현재의 형사와 과거의 형사가 만나 수사도 했었다. 현재의 형사가 내 머릿속의 과거로 돌아가 수사도 했었다. 젊은 형사가 자기 아버지의 동료인지 적일지 모른 형사들과 함께 수사도 했었다. 남이 안보이는 소리가 들리고, 사진기처럼 현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형사도 등장했다. 한 술 더 떠서 팔, 다리, 눈 등등 사지 육신이 사이보그인 병기들도 등장했다. 또 새로운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러자 이제 수사 현상의 번외인 '아마츄어'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아마츄어'들의 면면이 심상찮다. 국내 최고 탐사프로그램 피디가 되는 게 소원이었지만 현실은 각종 고소, 고발에 시청률까지 바닥, 프로그램 폐지 위기에 몰린 열혈 피디 강무영(이선빈 분)가 그 첫 번 째 인물이다. 결국 없어질 프로그램을 놓고 팀장과 시청률 4.5%를 딜하여 직접 범인을 잡고자 나선다. 강피디가 주목한 사건은 바로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벌어진 살해 사건, 거리를 가던 남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흉기를 현장에 둔 채 범인이 사라진'구촌 대학생 살해 사건'을 추적한다. 

탐사보도 피디와 손을 잡은 전직 검안의와 프로파일러
강무영 피디가 도움을 청한 건 다단계 판매 사무실 물품 창고 한 쪽을 빌려 탐정 사무소로 쓰고 있는 '탁원(지승현 분)'이다. 한때는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 자신의 실력이라면 떼돈을 벌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월세 낼 돈조차 마땅치 않은 처지다. 그래서 귀찮지만 늘 방송 출연을 핑계로 자문을 구하러 오는 강무영을 마다할 수 없다. 강무영이 제공한 자료를 통해 범인이 절단한 채 놔둔 '피해자의 두 손'을 통해 범인과 피해자가 '손'을 통해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추정하는 탁원의 프로파일링은 여전하다. 

 

 

탁원의 도움을 받은 강무영이 13년 전 사건이 최근 거리에서 입이 찢겨진 채 역시나 무차별 난자당해 죽은 한 학교 선생님의 살해 사건을 주목한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조사하기 위해 두 사람이 찾아간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예를 갖추며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참 하는 중인 이른바 '황천길 프로 배웅러 장례 지도사' 이반석이다. 

지금은 장례 지도사이지만 한때는 하루에 수십구 씩 시체를 검안하던 국과수 수석 부검의였었다. 탁원과 강무영의 부탁을 받은 이반석은 동료에게 도움을 핑계로 시체 보관소를 찾아 최근 벌어진 윤리 선생 살인 사건이 죽기 전에 조커처럼 찢긴 입, 거기에 같은 왼손으로 잔인하게 가해진 상흔 등을 미루어 동일범의 소행일 수 있다는 것을 추정해 낸다. 

그런데, 바로 이 국과수에 출동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여성 실종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직접 피해자인 척 잠입 취재했던 강무영 피디의 취재를 앞서 브리핑을 하여 무위로 만들어 버린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사 강호(차태현 분)가 그 주인공이다. 사사건건 강무영과 부딪히는 강호는 사건 현장으로 뛰어든 강무영과 함께 불법 성형 시술 현장에서 부딪치더니 이제 다시 13년전 사건과 최근 벌어진 교사 구형진 살해 사건을 두고 다시 맞물리는 처지에 놓인다. 

익숙하지만 진부하기도 한 차태현의 수사극 
형사라지만 자신이 잡고자 하는 범인이 있으면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검거를 해야만 하는 강호, 더구나 김광규가 특별출연한 조폭들의 현장에 홀홀단신 등장한 강호를 돕는 건 한때 전설의 조폭이었으나 이제는 종종 천식 호흡기를 꺼내드는 테디 정(윤경호 분)와 그의 바텐더들인 '맨손(박태산 분)'과 '연장(장진희 분)'이다. 

형사이면서도 검거를 위해서는 불법적 수단과 도움을 마다하지 않는 강호와 그의 조력자 전설의 조폭팀, 그리고 시청률은 물론, 탐사 보도에 대한 사명감까지 구비한 강무영 피디와 그의 조력자 전직 프로파일러에, 전직 국과수 검안의, 이들의 조합은 그 자체만으로도 오합지졸 범죄자들을 모아놓았으나 뜻밖의 우주 수호자가 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면모가 보인다. 

아직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진강호와 강무영, 하지만 범죄 수사에 있어서만은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이들이 13년전 사건과 구형진 살해 사건의 범인을 향해 함께 뛰어든다면 그 어떤 '강력 수사팀' 저리 가라할 황금의 조합이 펼쳐질 듯하다. 

 

 

과거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이 만나 연쇄 살인범의 정체가 드러나는 사건 자체는 새롭지 않았지만, 강무영 피디가 추적하는 과거 사건이, 진강호가 추적하는 오늘의 사건과 병렬적으로 진행되며 시청자로 하여금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전개 방식은 새로웠다. 허허실실 코믹한 전개였지만, 사건 진행의 내실은 착실하게 수사극으로서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으며 새로운 장르로서의 기대를 품게 한다. 

차태현은 무려 2015년 <엽기적인 그녀> 이래로 전혀 새롭지 않지만, 여전한 그의 친숙함을 무기로 새롭게 조합된 씬스틸러 팀과의 콜라보는 익숙한 듯 신선한 기대를 가지게 한다. 차태현의 진부함을 새로운 옷을 입은 프로파일러로 등장한 지승현, 전설의 조폭 윤경호, 전직 검안의 정상훈 등 걸출한 조연진이 충분히 보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부디 이 익숙한 듯 새로운 조합의 수사팀이 좋은 성과를 거두어 차태현의 바람처럼 시즌제의 드라마로 안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20. 5. 24. 17:26

일주일에 한 회씩 도대체 끝이 있을까 싶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단 한 회만을 남기고 있다. 일찌기 제작진이 시즌제를 예약했기에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제 2020년과 함께 했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매듭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그렇게 한번의 마침표를 위해 이어가는 이야기 중 그래도 가장 관심을 끌게 되는 건 '사랑'이다. 대학교 때부터 마흔 즈음에 이르도론 '우정'을 이어 온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래서 이전  신원호 - 이우정 콤비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남편 찾기'에 골몰할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더 성숙해진 주인공들은 그 나이만큼 '어른스러운' 사랑의 이야기를 변주해낸다. 

 

 

준완이 건네지 못한 반지 
아마도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가장 '융성한' 연애를 한 건 준완(정경호 분) 커플이었을 것이다. 늘 애인이 있지만 원칙적이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그 누구도 오래 만나지 못하던 준완, 다쳐서 자신의 병원에 입워한 익준의 동생, 익순(곽선영 분)의 활기찬 모습에 반한다. 

불짬뽕을 핑계로 그녀의 부대 앞을 찾아간 준완은 저돌적으로 익순에게 연애를 할 것을 청했고, 일주일을 기다려 익순의 '오늘부터 1일'이라는 문자를 받고 아이처럼 팔짝거리던 준완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렇게 준완의 집과 부대 근처에 있는 익순의 집을 오가며 연애를 하던 두 사람, 하지만 12부작이라는 시리즈가 짧은 만큼 이제 오랜 이별을 맞이할 두 사람의 연애도 그 뜨거웠던 시간 만큼 안타깝기만 하다. 

이전에 했던 연애에서 상처를 깊게 입은 익순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마흔 줄의 준완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었지만 기꺼이 그런 익순의 결심을 존중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만 이 커플을 흔든건 아니다. 좀 더 나은 자기 계발을 위해 유학을 신청한 익순, 그리고 신청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익순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장장 3년, 외국 유학을 가게된 익순에게 준완은 웃으며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것을 말한다. 

물론 준완은 익순을 만나 웃었지만 그의 속마음마저 웃는 건 아니다. 유학이 결정되었지만 차마 준완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준완의 표정은 어두워 진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익순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미안해서 오빠한테 못알렸구나 하면서. 또한 떠남이 곧 이별이라고 생각하는 익순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너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라며 장거리 연애를 감수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부담스러워 그 무엇도 받지 않겠다는 익순에게 커플링으로 산 반지를 자신의 주머니 깊숙이 묻는다. 익준이 목놓아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부르던 노래방 그 뒷자리에서 줌아웃된 채 상념에 젖은 준완의 모습은 실연한 그 누구보다도 처연하다. 

 

 

익준이 전하지 못한 반지 
익준9조정석 분)이 전하는 못한 반지의 사연은 더 길다. 대학을 들어가던 그 시절, 나란히 앉아 면접을 준비하던 익준과 송화(전미도 분), 단정함을 중요시한다는 말에 당황하던 송화에게 익준이 건넨 머리띠는 두 사람의 오랜 '호의'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호의는 익준에게 '첫사랑'이란 감정으로 변해한다. 

송화에게 고백을 하려고 금은방에 들러 반지를 산 날, 하필이면 그날 석형 역시 송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술을 마시는 석형을 보며 익준은 자신이 준비했던 반지를 버렸다. 그리고 오랜 우정을 이어 온 두 사람,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익준은 조금씩 송화에게 자신의 묵은 마음을 열어 보인다. 아이를 키우랴 병원의 오만 가지 일에 신경을 쓰는 익준에게 송화는 너를 위한 시간이 있냐고 묻고, 익준은 너와 함께 밥 먹는 이 시간이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송화는 그런 익준의 마음에 당황한 듯 자리를 피한다. 11회 송화네 신경외과 회식까지 참석한 익준은 술게임에서 송화를 여자로 본 적이 있느냐는 집요한 질문에 얼버무리며 '당연하지'라고 넘어갔지만 노래방으로 와서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부르며 자신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다. 

왜 익준은 노래만 부르고 말았을까? 거기엔 송화가 있다. 송화는 익준이 슬며시 드러낸 마음에 자리를 피했다. 술게임에서 드러난 익준의 마음에도 그저 복잡한 표정일 뿐이다. 그 누군가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 익준은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노래 한 자락에 자신의 마음을 덜어낸다. 

그건 송화를 사이에 두고 익준과 신경전을 벌이는 안치홍(김준환 분) 역시 마찬가지다. 출근 첫 날부터 그 누구에게라도 친절하던 교수님에게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준 치홍은 첫 수술에서 실수를 한 자신을 감싸는 송화에게 슬며시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였지만 선을 긋는 송화의 태도에 한 발 물러선다. 늘 송화를 챙기며 그녀를 지켜보고 그 누구보다 송화와 가까운 익준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지지만 치홍이 낸 용기는 생일 날 '다정한 반말' 두 마디일 뿐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다른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익준화 치홍은 송화를 사이에 두고 아마 꽤나 유치찬란한 삼각 애정 쟁탈전을 벌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익준도, 치홍도 자신의 감정을 안으로 삭인다. 그건 그 상대방인 '송화'에 대한 존중이다. 아직 '사랑'할 여지를 내보이지 않는 송화이기에 거기에 섣부르게 자신의 감정들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꺼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는 준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기다려주고 사랑스레 바라보아 줌, 이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가지고 소유하고 '내 것'의 의미였기에.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마흔 줄에 접어든 '어른'들의 사랑 방식을 좀 더 성숙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들은 여전히 밴드를 좋아하고 함께 어울려 먹거나 놀 때는 여전히 아이들처럼 천친난만하고 심지어 '유치 뽕짝'이지만, 그들이 일을 하는 자리에서나, 상대방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는 '어른스럽다'. 

그런 면에서 이제 곧 병원을 떠나 신부가 되려고 하는 정원(유연석 분) 바래기인 겨울의 선택이 궁금하다. 정원을 사랑으로 붙잡아 달라는 정원 어머니의 부탁에 겨울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무뚝뚝한 외양과 달리 배려심이 넘치는 석형(김대명)이 받아든 추민하(안은진 분)의 고백에 어떻게 대응을 할까. 과연 이들은 또 어떤 '어른'들의 모습을 보일까?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려 애쓴다. '나'가 우선이어야 살아남는다고 하는 세상에서 '너'나, '우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런 정서는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재미를 떠나 이전 작품보다 무르익은 작품의 세계를 느끼도록 한다. 드라마는 늘 '희로애락'의 파노라마를 펼치지만 보고 나서 남겨지는 건 묵직한 격려이다. 조금 버겁고 힘들더라도 우리 조금 더 어른스럽게 살아보도록 노력해 보자라는. 

by meditator 2020. 5. 22. 16:25

<인간 수업>은 진한새 작가의 극본으로 김진민 피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만든 10부작 드라마이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지만 그 주인공이 성매매 중개업을 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10부작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회차 동안 '성'과 '폭력' 이라는 청소년 드라마에서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플롯과 파격적인 전개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품행이 단정하며 학업 성취의 동기가 남다른 계양 고등학교의 모범생 오지수(김동희 분), 하지만 보여지는 순하고 성실한 외양과 달리 그는 성매매 중개업자이다. 도박꾼 아버지, 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어머니, 그를 돌보아주는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도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을 가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지수는 그저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그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포주'가 되었다. 

가진 돈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던 그를 구해준 인연으로 인해 이왕철(최민수 분)의 도움을 받아 '조건 만남'을 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잡음도 순조롭게 해결하며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던 사업은 그의 정체를 알게된 배규리(박주현 분)와 얽히며 1년 반 동안 모은 돈을 날리며 무위로 돌아간다.  거기에 뜻하지 않게 얽혀든 변태성욕자 무리, 조폭, 그리고 자기 애인인 서민희(정다빈 분)의 뒤를 봐주는 인물을 집요하게 캐내려 하는 일진 곽기태(남윤수 분)의 개입으로 접입가경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미성숙한 아이들의 인간 배우기 
그런데 이 자극적인 설정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수업'이다. 드라마에는 오지수를 비롯한 3 명의 고등학생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른들 뺨치게 야무지다 못해 도발적인 청소년들이다. 두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최첨단 앱을 이용하여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변조해 신분을 숨기며 포주업을 하는 오지수는 자신이 하는 일이 그저 '거간꾼' 정도라고 생각한다. 수요와 공급을 중간에서 맞추어 주는 일이라는 식으로 치부한다. 자신과 같은 학생인 서민희가 조건 만남에 나서지만 그런 일이 그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적 경계를 넘어선다. 

아니 극 후반에 들어서 종종 등장하는 지수의 무의식을 반영한 '꿈'씬에서 그의 모든 판단은 '1등급'이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돈을 다 잃고도 학교에 가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서도 학교 책상에 엎드리고야 마는 그에게 학교에서 살아남기가 그가 벌인 모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다.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탈도덕'적인 상태다. 

그런 지수보다 한 수 위의 존재가 나타난다. 공부는 잘하지만 도통 학교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는 지수와 달리, 남학생들과 어울려 운동을 하고, 각종 학교 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배규리가 그 주인공이다. 오지수와 배규리에 대해 '안으로만 삭히는 고구마 같은 녀석들'이라는 담임의 촌철살인처럼, 사업을 하느라 배규리를 돌봐주지는 않지만 자신들과 같은 레벨의 인간이 되도록 끊임없이 조율하고 강제하는 상류층 부모를 둔 배규리에게 사회는 규리의 부모들이 규리에게 하듯 조정하고 조련하여 요리해 가는 대상일 뿐이다. 

오지수를 알게 된 배규리는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에 응하는 듯하면서도 그를 포주라 욕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벌어들인 돈을 보고 그 돈이라면 자신을 그럴 듯한 가정의 부속품처럼 다루는 부모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그의 사업에 가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배규리의 '욕망'이 적극적이면 적극적일 수록 오지수의 사업은 점점 꼬여만 간다. 아버지가 지수의 돈을 가지고 달아나고, 조폭이 얽히고, 그걸 해결다고 하자 납치와 협박이 난무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수는 물론 배규리의 목숨조차 위태롭게 된다. 그럼에도 규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수가 좌절하고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규리는 사업을 놓지 않으려 한다.

탈도덕적 의식을 점수로 매기면 지수보다 한 수 위이다. 지수가 살아남기 위해 생존템으로서 도덕적 일탈을 선택한다면, 어릴 적부터 부속품처럼 조련당하고 번듯한 아이가 되기 위해 부모의 욕구를 피가 나도록 참아내던 규리는 인간다움이란 정의 자체가 다르다. 도덕이란 경계 자체를 비웃는 규리의 탈도덕적 레벨은 어쩌면 지수보다 한 수 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규리 역시 정신적 학대와도 같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의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지수와 같다. 

그리고 오지수의 '공급원'이 된 학우, 서민희가 있다. 부모가 없이 고모네 집에 얹혀서 살아가는 민희는 사랑하는 기태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기 위해 조건 만남에 나서는 아이다. 뻔히 기태가 자신을 돈때문에 옆에 두는 줄 알면서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민희, 그런 민희가 조건 만남의 폭력적인 상황에 맞닦뜨리면서 공포가 폭발하고 만다. 

오지수, 배규리, 서민희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원인을 가지고 '탈도덕적 경계'에 선 위기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를 가졌지만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낸 문제의 희생양들이다. 방기된 가정, 혹은 과잉 기대로 조련되는 가정, 그게 아니면 상실된 가정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떤 게 '인간'의 모습인지 배울 기회를 잃거나, 아니면 반발심을 가지며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신체는 어른처럼 성숙했고, 어떤 면에서 두뇌는 어른보다 더 빨리 움직이지만, 정작 그 '하드 웨어'가 되는 인간됨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동물들처럼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게 저마다의 방향으로 분출된 이들의 행동은 뜻하지 않게 사건 사고를 발생하며 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 

 

 

묘한 어른으로 인해 촉발된 '인간다움'
여기서 묘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왕철, 오지수와 함께 '실장님'으로 조건 만남의 '보디 가드' 역할을 하던 이 인물은 돈을 받고 움직이는 포주의 행동 대장이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서민희를 들여다 보고, 오지수가 빠진 위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들여다 봄으로 인해 서민희는 처음으로 그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왕철로 인해 서민희가 변해간다. 

그런 서민희의 변화는 실타래처럼 얽혀만 가던 오지수가 벌인 포주업이 달려가는 지옥의 레이스를 멈출 수 있는 치트키를 경찰 이해경(김여진 분)에게 쥐어준다. 하지만 치트키는 미약하고 때론 늦는다. 오지수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내민 손은 수업 시작 종에 묻힌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벌인 '비인간적'인 사건은 '너무도 인간적인 참혹하게 인간적인 결과물'을 낳는다. 결국 사건은 최악으로 치달아 노래방을 '만인 대 만인'이 몸과 몸으로 부딪치고야 마는  전장으로 만들고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일단락된다. 

행동대장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왕철의 '어른스러운 헌신'으로 마무리된 사건, 결국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벌인 일들이 그나마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야 말았다는 결과에 이르러서야 오지수는 깨닫는다.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맹목적인 욕망의 결과물인가를. 누군간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처절하게 배우게 되는 역설적 인간다움. 그것이 숨가쁘게 달려간 10부작 <인간 수업>이 도달한 결론이다. 

하지만 배움은 처절하지만 그 배움의 실천에 나설 용기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껍질 게처럼 자기 보호와 연민에 빠진 오지수는 서민희를 희생시키고 결국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업'에 이르러서야 '수업 종료 종을 울릴 수 있었다.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같은 여지를 둔 결말은 이 수업의 종료를 다음 시즌에 대한 여지로 남긴다. 결국 자기 목숨마저 수업료로 저당잡혀야 하는 인간 수업, 그들은 채 자라지 않았지만 그들이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숙제는 과중하다. 

by meditator 2020. 5. 15. 16:40

또 한 편의 의학 드라마가 찾아왔다. 매주 수, 목 밤 10시, kbs2를 통해 방영되는 <영혼 수선공>이다. 안타깝게도 목요일 밤 화제작인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시간대가 겹치는 바람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신하균이 정신과 의사 이시준으로 분하여 '정신과' 분야를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는 또 다른 지점에서 의학적 힐링을 지향한다. 

 

 

마음이 아픈 시대 
아마도 그 '힐링'의 출발점은 친구와 함께 바닷가를 찾은 정소민이 분한 여주인공 한우주가 옷을 입은 채로 바다에 뛰어들어 있는 힘껏 오열하고 절규하는 그 장면이 아니었을까? 또한 자신과 더블 캐스팅된 아이돌 팬들이 자신의 공연 차례에 상복을 입고 나타나 팔짱을 끼고 앞좌석을 차지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들이 보낸 화환을 발로 차는 장면은 어떨까? 그리고 애인이라 해서 도움을 청했는데 변심한 애인은 단독 보도의 욕심에 나눈 대화를 단편적으로 편집하여 10년 고생해서 탄 신인상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자 야구 방망이로 그의 차를 짖이겨 버리는 장면은 어떤가? 

묘하게도 이 한우주가 정신줄을 놓는 이 장면들이 '공감'을 자아낸다. 우리들은 살아가며 저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한우주 대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속으로 화를 꾹꾹 눌러 참아가며 살아가고 있기에 그녀의 일탈과 분노 장애에서 공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흔히 정신줄을 놓는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실낫같은 경계를 두고 두고 정상과 비정상이 되어 버리고 마는 '정신줄을 놓게 만드는 상황'을 무수히 겪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신과 의사 이시준은 '미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겁니다'라는 진단을 내린다.

'아픈거다'라고.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고통 속에서 결국 정신을 놓고 자신의 가슴에 빨간 약을 바르던 엄마를 괜찮다며 딸이 안아주던 장면과,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현병에 걸린 장재열을 품어주던 지해수의 사랑이 떠올려지는 '처방'이다. 이렇게 <영혼 수선공>은 앞서 노희경 작가가 다뤘던 '정신'의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정신과 병원을 전면에 내세우며 다루고자 한다. 

극중 한우주는 안그래도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10년 만에 각고의 노력 끝에 신인상을 타게 되던 날 상을 받기 위해 나선 무대에서 그만 음주 측정 거부로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이 '체포'가 사실은 해프닝이었다. 이시준이 애써 지켜주고 싶었던 망상증 환자 동일이 자신이 경찰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을 탈주하여 벌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명으로  한우주는 모든 것을 잃는다. 언론은 지난 밤 마신 술로 그녀를 음주 운전자를 만들어 버린다. 제작사 대표는 하루 아침에 그녀의 배역을 없애 버린다. 오디션에서 나서보지만 번번히 고배를 마신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자신에게 닥쳐온 불리한 결과들, 하지만 한우주가 맞닦뜨린 사건은 억울하지만 그 '억울'함의 보편성이 <영혼 수선공>이 말하는 '아픔'의 근원이다. 한우주처럼, 혹은 한우주처럼은 아니지만 세상에 억울한 일 한번 안당해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녀를 억울하게 만든 동일은 어떨까. 시상식장에서 한우주를 체포하는 무리수를 뒀지만 매일 순찰을 돌며 취객을 선도하는 등 거리 정비에 솔선수섬하고 날치기범을 향해 몸을 던지는 동일은 그의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상실'의 마음이 가져온 망상증에서 헤매이고 있다. 경찰이 아니지만 경찰이고픈 자신의 '지향'이 그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잃어버리고 가질 수 없음, 이것이야 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매번 곱씹으며 삼켜야 하는 대부분 고통의 근원들 아닐까. 사람을, 부를, 일을, 관계를. 살아가면서 성취하는 순간보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그리고 그럼에도 가질 수 없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 되돌아야 하는 시간들이. 그래서 사람들은 가슴 속에 저마다 스스로 빨간 약을 바르고 있고, 그것마저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극중 한우주처럼 폭발하건, 동일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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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준이 건네는 위로와 치유 
그리고 이시준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 그네> 속 의사 이라부처럼 정신과적 조치 이상의 '치료'를 통해 치유에 다가간다. 망상 장애는 대뇌 변연기의 도파민 과다를 먹물들 주장으로 제껴버린 이시준은 가장 큰 원인을 고장난 마음에서 찾는다. 다른 사람의 잣대에 나를 가두지 말라, 칭찬도 비난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  다 찰라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순찰을 하고싶은 동일과 함께 거리를 헤매듯 직적 환자의 아픔에 뛰어든다. 어떻게든 환자와의 유대를 가지고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인정하고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도와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공중 그네> 속 의사 아라부가 때로는 환자보다 더 정신이 나간게 아닌가 싶듯이 이시준 역시 매일 밤 잠못들고 '살자'를 외치며 뛰는 그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아픔을 치유하는 사람과 아픈 사람의 간극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드라마 <영혼 수선공>은 우리 시대 마음의 아픔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최고의 화제작은 될 수 없을 지 몰라도 그 제작 의도에 맞게 좋은 '힐링'의 기억을 가진 드라마로 남을 있도록 '완주'하기를 바래본다. 

by meditator 2020. 5. 8. 19:02

지난 4월 2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인간 수업>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진한새 작가가 고등학생이 주범이었던 범죄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저작한 이 작품은 <무법 변호사>, <개와 늑대의 시간>, <결혼 계약> 등 인기작을 만든 김진민 피디가 연출을 맡아 작품의 기대치를 높였다.

거기에 얼마전 종영한 <이태원 클라쓰>에서 장근수 역으로 출연했던 김동희가 분한 오지수가 사건을 이끈다. 1등급 성적표에 부모님 사인을 위조하는 고등학생 오지수, 그는 자의적 '아싸'이다. 그에게 삶의 목표는 '남들처럼' 사는 것이다. 남들처럼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남들처럼 대학도 가고, 남들처럼 직장도 다니는 것. 그것이 그의 삶의 소망이다. 

 

 


소년 지수의 평범한 소망 
이 평범한 소망, 하지만 그 평범함이 지수에게는 가장 힘들다. 도박 중독인 아버지, 어머니는 결국 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버렸다. 그의 집을 찾은 배규리((박주현 분) 말대로 쓰레기장같은 집에 소라게를 벗삼아 산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데 아직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지수가 어떻게 학원까지 다니며 1등급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그가 돈을 벌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돈, 9000만원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자칭 '중개업'에 '보호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선택한 '알바'에 대해 배규리는 '쓰레기 포주업자'라고 한다. 음성 변조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오지수는 성매매를 알선한다. 그리고 운전을 해주는 왕철(최민수 분)과 동업으로 혹시나 성매매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상사에 대해 '보호'를 해주는 '불법적 사업'을 한다. 

그에게 '포주'라고 일갈하는 규리에게 자신은 '알선'과 '보호'를 해주는 사업을 한다고 무표정하게 반문하는 오지수의 모습은 바로 <인간 수업>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사회문제 연구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배규리와 오지수를 어떻게든 품어주려고 하는 담임 선생님  진우, 하지만 그런 진우도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이라는 걸 시인한다. 즉, 공부 말고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곳. 

하지만 우리 나라 청소년 들 중 공부을 하며 순탄하게 대학이라는 관문을 성실하게 넘어서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드라마 속에서 보여지는 반의 풍경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학교는 오로지 '공부'만으로 아이들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그 평가에서 1등급으로 선망을 받는 지수이지만, 정작 그의 실상은 '방치된 미성년'이다. 

하지만 이 '방치된 미성년'은 어떻게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도덕적 일탈'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줄 엄마도, 아빠도 없기에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법'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제작진을 이렇게 보호받지 못한 청소년이 선택한 역설적 경계의 이탈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청소년의 문제를 폭로한다. 

 

 
보호받지 못한 미성년의 극단적 선택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에 등장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특수한 암에 걸려 죽어가는 부인, 그런데 같은 마을에 약사가 개발한 약이 이 암에 특효가 있다. 병든 아내를 둔 남편 하인즈는 약사를 찾아가 약을 구하려 하지만 약값이 워낙도 비싼데, 약사는 이 부부의 사정을 알고 10배나 더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 결국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인즈는 약을 훔치고 만다. 

이 사례에 대한 판단에서 12세~ 17세 청소년들은 아무리 아내를 구하려 했어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즉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습적 판단'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나아가 18세에서 25세에 이른 청년들은 나아가 '법과 질서'를 준수하며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의무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인간 수업>의 오지수는 위의 도덕적 발달에서 '하인즈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한 그에게 누군가의 성, 특히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미성년자가 성매매를 하는 미성년 보호의 의미는 '인지'되지 않는다. 더구나 '법과 질서' 따위. 

주목해야 할 것은 오지수에게 그런 '도덕'의 판단과 자각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지수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 모두 각자의 조건에서 도덕적 결핍을 가지고 있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 학교는 아이들을 '길러'낸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이 이 사회의 성원으로 옰곳이 설 수 있는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는 '수업'은 커녕 '조건'조차도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어떻게 지수가 그런 '인간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는 오지수가 그런 일을 해서 벌은 6000만원을 보자 대뜸 들고 날라버리는 인간인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싫다고 지수만 홀로 두고 집을 나가버리고, 학교는 그저 1등급인 지수만을 '측정'하는데, 도대체 '보호받아야 하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외려 상처만을 입은 아이가 '소라게'처럼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드라마 속 지수는 목소리까지 변조하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노련한 사업가이고, 동업자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자 경찰을 불러 위기를 모면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영민함을 보이지만, 선망하던 규리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저 첫사랑에 빠져버리는 순진한  10대의 모습을 영락없이 드러내고 만다. 이 소년의 이중성이야말로 아직 채 미성숙한 10대의 불안정성을 고스란히 보이며 이 소년의 현실을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보호받지 못한 소라게같은 선택의 대가는 가혹하다. 6000 만원까지 부를 축적시켜 조만간 그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겠다 생각하던 9000 만원을 목전에 둔 사업은 배규리의 등장으로 아버지 한탕의 희생물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눈 앞에서 칼이 번득이지만 결국 가족이라 뒤돌아서고마는 지수, 그 '파산'의 와중에도 꼬박꼬박 학교는 나가는 지수의 모습은 그가 잡고 있는 지푸라기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낸다.

배규리의 동업 제안을 어떻게서라도 피해보려 이리저리 알바를 뛰어보지만 공부와 병행이 불가능하다. 결국 중간고사를 망치고야 마는 지수는 폭발한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규리와 손을 잡겠다고 한다. 다시 한번 또 세상에 자신을 '버린' 소년 지수, 참혹하고 혹독한 '인간 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10대 청소년물임에도 높은 폭력성과 선정서의 등급으로 시작된 <인간 수업>은 그간 공중파 등의 드라마가 감히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풀어내며 다시 한번 넷플릭스 콘텐츠에 대한 화제성을 이어가며 그 영향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by meditator 2020. 5. 7. 15:06

<이어즈 & 이어즈(이하 이어즈)>는 BBC와 HBO가 공동으로 제작한 영국 드라마이다. 2019년에 6부작으로 방여된 이 드라마는 같은 해 가디언지가 선정한 영국 드라마 중 4위에 오르는 화제작이 되었다. 최근 왓챠 플레이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2019년에서 부터 2034년까지 '미래'의 영국을 다룬다.

그런데 이 '미래'의 이야기가 주목받고 있는 건 바로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전세계가 위기를 맞이하며 혼돈에 빠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미래를 향해 나갈 것인가라는 불안함의 '가정'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어즈>는 영국의 대표적인 미니 시리즈 <닥터 후>의 러셀 T 데이비스가 각본을 맡았다. <닥터 후>는 미래에서 온 외계인 닥터 후를 주인공으로 영국의 역사와 정치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드라마로 이런 서사의 장점이 <이어즈>를 통해 영국이 맞닦뜨린 현실과 미래에 대한 담론으로 제대로 풀어내어 졌다. 

 

 

평범했던 가족에게 들이닥친 격동의 세계 
이야기의 시작은 2019년이다. 브렉시트 후의 영국, 그곳에 한 가족이 있다. 금융 설계사로 살아가는 맏형 스티브(로리 키니어 분)는 회계사인 아내 셀레스트(트니아 밀러 분)와 두 딸과 함께 천정부지로 집값이 치솟는 런던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에 반해 큰 딸인 이디스(제시카 하인스 분)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세계를 돌아다니며 소수자의 인권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중이다.

둘째 대니얼(러셀 토비 분)은 주 정부의 공무원으로 난민들을 담당하는 주택 관리원으로 결혼까지 한 '게이'였고, 다리를 쓰지 못하는 막내 로지(루스 메이들레이 분)는 아빠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며 학교 식당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로지가 태어날 당시 바람이 나 집을 나간 아버지,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라이언스 가족의 '어른'은 오래된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증조 할머니 뮤리얼이다. 

나름 특별하고 평범했던 라이언스 가족은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지만, 격동의 세기에 들어선 영국은 이들이 누리고 있는 '보통'의 삶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격동'의 한 가운데 정치인 비비언 룩(엠마 톰슨 분)이 등장한다. 

 

 

심야 토크쇼에 등장한 비비언 룩, 약칭 비브 룩은 당시 국제적인 분쟁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해 욕설을 섞어가며 관심도 없다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브렉시트 후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오로지 영국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비브 룩의 '극우적' 정치적 입장은 2025년 드론으로 목숨을 잃은 지방 의회 의원의 보궐 선거에서 아이들의 전자기기 제한을 내세우며 압도적인 관심을 끌고, 2026년 아이큐 70이상인 사람만 투표를 하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총선까지 승리의 기세를 몰아간다. 

하지만 오로지 영국에만 집중하겠다는 극우적 입장이 판치는 것과 달리, 세계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중국이 만든 인공섬 흥사다오를 둘러싼 국제적 분쟁에서 결국 미국은 핵미사일을 쏜다. 극우 정권이 들어선 우크라이나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처단하고, 결국 이런 세계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런던의 유력 은행들이 파산한다.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가족 
그 과정에서 집을 판 돈을 은행에 맡겨두었던 스티브네 일가는 금융전문가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100만 파운드 이상의 돈을 하루 아침에 잃고 할머니네 집에 얹혀 택배 배달을 하는 신세가 된다. 아내 역시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 지능의 세상에서 더 이상 회계사라는 직업이 존재 이유를 잃고 실직하게 된다. 비브 룩이 오로지 영국의 이해를 내세우며 승승장구하여 총리에 이르지만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 진다. 사람들은 출근하게 해달라며 '출근하기' 운동을 펼치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안정적인 직업은 없다. 

미국이 흥사다오에 핵미사일을 쐈을 때 그곳에서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던 이디스는 그로 인해 피폭'을 당하고 자신의 생을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런 이디스에게 자신이 사랑하게 된 우크라이나 난민 빅토르의 송환을 위해 애쓰던 대니얼은 도움을 청하고, 이디스의 도움을 받아 빅토르를 안전하게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극좌정권이 장악한 스페인으로 떠난 대니얼은 위험을 무릎쓰고 난민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그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1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스티브는 약물 실험 대상이 되는 바람에 고개가 제 멋대로 돌아가고, 막내 딸 로지는 직업을 잃고 대신 하던 푸드 트럭마저 여의치 않게 된다. 살던 지역은 위험 지역으로 철조망이 쳐지고 왕래조차 쉽게 할 수 없게 되고,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실종되기 시작한다. 

극좌와 극우가 판치는 세계, 스티브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80년대에 태어나 살아온 자신들의 지난 시대는 잠깐 괜찮았던 세계적 위기의 휴식기였을 지도 모른다고. 결국 그들이 당연하다 믿으며 살아왔던 '민주주의는 잠깐의 이상'이었냐고. 

세상이 점점 뜨거워지고, 기후 변화는 극심해져 80일, 90일의 홍수가 일상이 되고, 나비가 멸종된 세상, 사람들의 삶이 갈수록 척박해지는 것과 달리 인공 지능의 세상은 나날이 발전한다. 어릴 적 부터 온갖 IT 문명에 접속했던 스티브 가족의 큰 딸 베서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지털' 세계에서 찾고 트랜스 휴먼을 지향하며 손에 핸드폰을 이식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자신의 정신을 디지털로 업로드하고자 하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정부의 권한에 자신을 맡기는 조건으로 디지털 휴먼으로 거듭난다. 머릿 속에 '인터넷 세상'을 동기화환 베서니는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본다. 황반 변성을 앓아 시력을 잃을 위기의 증조 할머니는 줄기세포 수술로 다시 시력을 되찾는가 하면,  택배 배달을 하던 자전거에 치어 목숨을 잃은 라이언스 가족의 아버지는 물문자로 거듭나는 '수장'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런 문명의 편리함이 사람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작 사람들을 가스비와 전기세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사이버 공격이란 명목으로 정전이 일상이 된 세상을 살아간다. 실종자 캠프는 고도화된 전파 방해로 핸드폰 수신마저 불가능하게 '격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전으로 손실되는 정보를 대신하기 위해 다시 종이 인쇄물이 등장한다. 

결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던 BBC가 2029년을 끝으로 방송을 끝낸 날, 창궐하는 전염병 환자들을 난민 캠프로 보내 정부는 '자연스런 난민'들의 정리를 도모하는 '파쇼적' 결정을 내린다. 

결국은 세상은 '우리가 할 탓'이다 
그렇게 2029년을 보내던 날, 함께 모여 이제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암울함을 나누던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남탓', '세상 탓'을 하지만 결국 '너희들 탓'이라고 통렬하게 쏟아붓는다. 

어쩔 수 없는 작고 무기력한 존재라고 주저 앉아 있지만, 사실은 바로 그 작고 무기력한 너희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목화를 생산한 농부들에게 0.01달러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는 싼 티셔츠를 보고 거저네 하며 샀던 그 선택, 슈퍼에서 일하던 여성 대신 자동 계산대에 들어섰을 때 그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 선택, 심지어 편하게 생각했던 그 '편의주의', 비브 룩을 웃고 조롱했지만, 그녀에게 선뜻 손을 들어주고 열광했던 그 '선택'이 바로 오늘의 너희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한 것이라고. 

 

 

피폭으로 인해 생의 마지막 길에 들어선 이디스,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빅토르를 구하러 한다. 아니 빅토르만이 아니라, 난민 캠프에 전파 방해를 하던 송신탑을 파괴하고 그 실상을 전세계에 전한다.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마지막 선택이다. 자신의 아이가 철조망에 가로막혀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가족의 '호구지책'이 될 수 없는 푸드 트럭을 몰고 철조망을 향해 로지가 달린다. 빅토르가 자신의 동생 대니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여 빅토르를 실종자 캠프로 보냈던 스티브는 죽음 대신, 자신이 알고있는 비브 룩의 비리 정보를 경찰에 보낸다. 

결국 2030년 비브 룩은 현직 총리 최초로 구속되고, BBC는 다시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9년으로 부터 2030년까지 장장 20여년에 걸쳐 영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위기, 그 위기 속에서 속절없이 희생자가 되던 가족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 그 '위기'로 부터 영국의 민주주의를 지킨다. 

6부작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리즈 안에 숨막히게 지나가는 몇 십년의 세월을 몰아넣은 <이어즈>는 결국 그것을 통해 오늘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능태'의 현실로 그려낸다. 마치 잠수함의 토끼처럼 나비가, 바나나가  멸종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각자도생의 삶에 빠져살던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방기한 결과물은 그 어떤 '스릴러'와 '공포물'보다도 무시무시하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할 것같은 미래의 모습이기에 더욱. 

물론 그렇게 공포스런 미래를 향해 질주하던 드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들의 손을 들어준다. 작고 무기력하고 자신들의 삶에 묻혀 살던 그 평범했던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결단과 모험에 자신을 던지고 그것이 결국 민주주의를 잠깐의 이상이 아닐 수 있도록 만드는 지 드라마는 '극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었지만, 괴물이 가고 또 하나의 괴물이 깨어났다는 에필로그의 대사처럼 언제나 '위기'는 또 다시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잠언처럼 남긴다. 드라마로 넘기기엔 엄숙했던 미래의 묵시록이다. 





by meditator 2020. 4. 21. 16:03

6%대(6.325% 닐슨 코리아 케이블 기준)로 시작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하 슬의)>이 3회, 8%를 넘기며 순항 중이다. 이른바 '워노 매직'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매주 1회, 한 시간 반 정도의 방영 시간, 우리나라 tv 드라마에서는 새로운 시도다. 밤샘 촬영 강행군에, 당일 찍어 당일 내보내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사전 제작에, 주 1회 방영의 시도는 순조로운 시청률로 보건대, 작품이 좋다면 시청자들은 언제나 기다려 줄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슬의의 신선한 시도와 구성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신선한 점은 그것만은 아니다. 3회, 오랜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이익준(조정석 분)의 아내는 반가워하는 남편이 무색하게 병원으로 찾아와 이혼을 종용한다. 여느 드라마라면 어떨까? 아마도 익준의 이혼이라는 소재만을 가지고 한 회차를 충분히 울궈먹을 것이다. 이혼의 위기, 심지어 외도의 소지가 있는 아내의 이혼 요구는 친구들에 둘러싸인 익준의 에피소드를 얼마든지 구구절절 애닮게 풀어낼 수 있다. 김희애 주연의 <부부의 세계>가 단 한 회만에 3%가 넘는 시청률 상승은 물론 세간의 화제가 되는 걸 보면, '이혼'을 둘러싼 갈등이 드라마에 있어 얼마나 '효자' 아이템인가는 새삼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웬걸, 4회, 계절이 바뀌고 어느새 익준은 서류상으로도 돌아온 싱글남이 되어 있었다. 가정에 대한 애정이 식은 아내를 아이의 알러지조차 챙기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풀어냈던 <슬의>는 4회, 엄마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는 익준 아들의 덧난 상처같은 한 마디로 '이혼'의 잔상을 담는다. 그렇게 '이혼'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걸 겪어내는 사람에 촛점을 맞추며 우리나라 드라마의 클리셰인 '이혼' 소재주의 를 넘어선다. 대신  <슬의>는 '사람', '인간미' 넘치는 그들의 사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제 4회차에 들어서며 그간 심할 정도로 마마보이의 모습을 보인 양석형(김대명 분)의 사연이 밝혀지며 주연 5명, 이익준, 양석형, 안정원(유연석 분), 김준환(정경호 분), 채송화(전미도 분)의 캐릭터 소개가 마무리되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거나한 신입생 환영회를 피해 창고 안에 숨어들었던 5명의 친구들, 그리고 이제 어느덧 노안이 오고, 입맛이 변하고, 꽃이 이뻐지는 마흔 줄이 될 때까지 그들이 여전히 '친구'인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에게도 오랜 몇 십년 지기 친구가 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늘 우리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 '비슷'함이 우리를 통하게 하고, 믿게 하고 그래서 오랜 세월을 '친구'라 여기게 된 듯하다. 아마도 '우정'이 다 그렇지 않을까. 

 

 

우정의 조건; 좋은 사람들 
그렇다면 <슬의> 주인공 5 명의 우정은 어떤 것으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같은 직업을 가져서? 함께 밴드를 해서? 대학 시절부터 이들을 보아왔기에 이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자처하는 응급실 봉선생은 이들의 공통점을 '없는 것'이라고 한다. 5무, 싸가지가 없고, 쉴 틈이 없고, 사회성이 없고 등등 저마다 하나씩 없는 것이 있어서, 그게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4회에 이르며 5명의 캐릭터를 소개했는데 과연 그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이들 다섯 명이 모두 과는 달라도, 그리고 드러난 면만 본다면 싸가지가 없고, 무뚝뚝하고, 일만 하게 생겼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클럽 죽돌이임에도 수석을 따놓은 당상이었다던 이익준이야 말할 것도 없다. 병실 침대를 고쳐주는 의사, 수간호사가 밥 못먹는 걸 배려하여 퇴근도 마다하고 자질구레한 병실 수발을 들어주겠다는 의사, 그게 이익준이다. 도시락을 준비한 인턴을 배려하여 선배 의사의 밥 투정을 입막음해버리고, 주변 사람들이 의심할 정도로 정겨울의 외사랑을 지원해주는, 잔정 많기로야 이익준을 따라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그의 이혼도 공부하러 간 아내 대신 아들을 키우며 이곳에 오래 도록 떨어져 있다 생긴 불상사다. 

그렇게 그 누구에게나 친절한 이익준의 맞은 편에 김준환이 있다. 모두가 다 아는 싸가지가 없는 의사, 그 싸가지 없음은 환자 보호자건, 인턴이건, 레지던트건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공평'하다. 하지만 그렇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김준환은 알고보면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결혼을 앞둔 딸을 둔 아빠가 수술을 할 처지에도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할 거냐며 냉정하게 잘라 말하던 김준환이 정작 아버지도 못간 딸의 결혼식에 제일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한다. 심장 수술을 앞둔 미숙아의 어린 부모에 대한 주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어린 엄마의 눈물을 품어준 것 역시 김준환이다. 채송화의 실연도, 양석형의 가정사도, 언제나 제일 먼저 마음 쓰는 사람도 역시 김준환이다. 

준환 못지 않게 사람들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석형이다. 친구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와도 함께 있으면 불안해 하는 사람, 도대체 저런 사람이 어떻게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가 됐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인데, 4회에서 무뇌아를 출산하는 엄마의 에피소드를 통해 뚱한 석형이 알고보면 얼마나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어렵사리 10달을 품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의 트라우마를 배려하여 음악을 틀고,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려는 의사, 그리고 출산 후 '미안하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하는 석형은 그 하나의 이야기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제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을 아버지의 외도, 여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병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무뚝뚝했던 과거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마마보이'가 되어버린 모습에서 더욱 석형이라는 사람의 '찐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안정원이야 말할 것도 없다. 장래 희망이 '신부'여서, 매해 신부가 되기 위해 '신청서'를 넣는 정원,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지 않았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헌신적이다.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당장 병원비가 없어 수술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그는 4회에서, 이제는 당장 월급까지 탈탈 털어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다. 돈뿐인가. 친구들이건, 함께 하는 전문의이건 그들이 먹는 칼국수건, 초코렛 간식이건 어느 틈에 그는 '남들'의 부족함을 챙긴다. 물론 편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은 못먹었다 '앙탈'을 부리지만 '배려'가 몸에 뱄다는 건 정원을 정의하는데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정원의 친구가 아니랄까봐, 채송화는 응급실에 들어온 외국인 환자가 당장 수술비가 없어 퇴원을 하겠다고 하자, 솔선수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키다리 할아버지'를 수소문한다. 

 

 

이런 식이다. 드러난 성격이야 까칠하기도 하고, 대인기피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좋은 사람들, 법없이도 살 사람들, 결국 '휴머니즘'의 '기본'을 갖춘 정서가 이들 다섯 명을 오래도록 '우정'이라는 울타리로 묶어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석형의 수술에 기꺼이 밥을 거르며 찾아와 '대기'를 타는 정원처럼. 그들은 늘 그렇게 선함의 연대로 따로 또 같이 '친구'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슬의>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결국 이렇게 좋은 다섯 명의 주인공들의 선함을 기반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살다보면 '생로병사', 이별도 겪고, 죽음도 겪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건 결국 '선한 의지', 그 선함을 가진 사람들의 기운이 아닐까 라고 <슬의>는 매회 강변한다. 

by meditator 2020. 4. 3. 03:35

3월 22일 종영한 <본 대로 말하라>, 16회 4.388%(닐슨 코리아 케이블 기준)로 ocn 장르 드라마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일까, 16회 엔딩, 심정지로 죽을 뻔했던 황하영(진서연 분)도 다시 살아났다. 사라졌던 오현재(장혁 분)은 차수영 형사(최수영 분)의 책상에 두 사람이 공유하던 이어폰을 놔두면서 시즌 2를 암시하는 듯한 장면을 내보냈다. 시청률만으로만 보면 시즌 2도 기대해 볼만하지만 과연 그럴까? <본 대로 말하라>가 시즌 2를 하겠다면 스스로 재고해야만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주도적이었던 두 여성 캐릭터의 붕괴 
무엇보다 <본 대로 말하라>가 야심 차게 선보인 장르물로서의 설정은 바로 제목에서 보이듯이 '본 대로 말할 수 있는' 피처링 능력이 있는 차수영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청각장애인인 엄마가 자신의 눈앞에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뺑소니차에 죽어가는 장면을 고스란히 기억했던 어린 차수영, 거기서부터 <본 대로 말하라>는 비롯된다.

말 그대로 사진을 찍듯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을 그래도 기억해 내는 '능력'을 가진 차수영은 이 작품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김홍선 피디의 전작 <보이스>의 강권주 팀장처럼 '이상 신체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이다. <보이스>가 강권주 팀장이 남들이 듣지 못하는 사건 현장의 소리를 '캐치'해 내는 것을 실마리로 사건을 풀어나가듯이, <본 대로 말하라>는 자신의 동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현장을 본 대로 기억하는 바람에 광역 수사대의 일원이 된 차수영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펼쳐진다.

그리고 아직 풋내기 경찰, 그리고 신참 형사에 불과한 차수영을 '그놈'이란 칭해지는 '박하사탕 연쇄 살인마' 사건으로 이끌어 가는 건 '그놈' 때문에 휠체어 신세가 되어버린 그래서 차수영의 '본대로 말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프로파일러 오현재이다. <보이스 1>에서 듣는데 집중하는 강권주 팀장의 능력을 역시나 '그놈 '때문에 아내를 잃은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미친개처럼 돌진하는 역시나 장혁이 분했던 무진혁이 팀워크을 맞추듯 말이다. 

하지만 종횡무진 날 것의 액션을 앞세웠던 장혁이 거친 눈빛 마저 검은 선그라스로 숨긴 채 휠체어에 앉아있자 좀처럼 드라마는 활기를 띠지 못한채 시청률마저 답보했다. '그래서였을까. 드라마는 '요건 몰랐지?'하는 반전의 설정으로 '장혁'을 휠체어에서 일으킨다. 그리고 종횡무진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일당백 '나쁜 놈들'을 상대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프로파일러'로서의 능력도 빼놓지 않는다. 

이러고 보니 드라마가 중반에 이르러서부터 장혁의 <말하는 대로 봐라>가 되었다. 분명 애초에 드라마가 설정한 것은 '픽처링' 능력의 차수영과 장혁의 더블 플레이였을 터인데, 어느새 드라마에서는 장혁이 동분서주하며, 여주인공인 차수영은 마치 배부르게 먹고 난 후 나오는 '후식'처럼, 이 드라마가 이런 설정도 있었어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가물에 콩 나듯 그 능력을 선보인다. 그것도 대부분 장혁의 지시에 따라. 

 

 

 

 

이렇게 사라져 버린 '여주인공의 존재감, 하지만 차수영만이 아니다. 그녀와 더불어 '걸크러쉬'한 존재로 등장부터 장혁만큼 분위기를 압도했던 황하영 팀장은 회를 거듭할 수록 애초의 존재감을 상실해 간다. 도대체 황하영인 선배인 양만수(류승수 분) 형사를 제치고 팀장이 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수사팀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이렇다하게 하는 것이 없다. 오죽하면 황하영 캐릭터를 떠올리면 기억나는 대사가 '오현재!'라는 외마디 외침 밖에 없을까.

심지어 후반부에 알고보니 그녀가 '납치 피해자'였다는 설정이 드러난 이후 그간 그녀가 경원시해온 비리 경찰과 손까지 잡는 황하영의 행동은 팀장으로서의 리더쉽은 물론, 그간 그녀가 보여온 강직한 경찰로서의 정체성마저 흔들며 캐릭터를 붕괴시키고 만다. 납치 피해자로서, 그리고 살고 싶었던 인간적인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던져 범인 검거에 앞장섰음에도 광수대 팀장으로서 캐릭을 설득시키는데 아쉬움을 남긴다. 

 

최근 여성 캐릭터들을 내세운 드라마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본대로 말하라>의 차수영, 황하영의 경우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진행하면서 그 본래의 설정을 역동적으로 살려내지 못하면서 애초의 기대조차도 못미친 경우가 되었다. 

그런데 <본대로 말하라>에서 아쉬운 건 두 여성 캐릭터만이 아니다. <보이스>가 비록 강권주의 이상 신체 능력에 기대었지만 기본적으로 112 신고 센터 골든 타임팀이라는 경찰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과 달리, 광수대라는 경찰 조직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조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복수를 향해 내달리는 오현재와 그에 협조하는 차수영이란 팀웍은 16회 내내 수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경찰을 자신의 비리가 드러날까 봐 사람까지 죽이려는 범죄 집단이거나, 범인에게 당하기만 하는 어리석은 조직으로 만들어 버린다. 

 

 

 

 

잔혹한 범죄의 설정만으로는 
이와 함께, <본대로 말하라>를 비롯한 최근 장르물에서 대두된 문제점은 허약한 스토리 라인을 자극적인 범죄로 무마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장르물의 시리즈들, 그런 가운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보다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스토리 대신, 그럴듯한 설정과 그 설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범인의 잔인무도한 범죄 현장이 드라마를 이끈다. 

특히 오현재의 경쟁 프로파일러 나준석을 생방송 현장에서 목매달아 죽이는 장면의 경우, 그가 죽는 과정의 잔혹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지만, 그렇게 되도록 현장에 무수히 있던 형사들이 손을 놓고 있으면서 범죄를 쥐어짜내는 듯하여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또한 후반부에 이르러 비리의 축이었던 최형필(장현성 분)의 죽음이나, 양만수 형사의 죽음은 서사의 개연성과 상관없이 범인의 잔혹성을 위한 '희생적 장치'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반응이 뒤따른다. 덕분에 드라마는 매회 잔인하고 섬뜩한 범죄로 이어지지만 정작 16회를 완주하고 난 후 오는 여운이 얕다. 겨우 시즌 1에서 벌써 캐릭의 붕괴와 서사의 부실함을 드러낸 <본대로 말하라>, 다음 시즌을 <말하는 대로 봐라>로 하지 않으려면 보다 치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스타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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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20. 3. 23. 14:31

<슬기로운 의사 생활> 1화, 기존 병원 드라마의 전형적 서사 장치를 깨며 의학 드라마 이전 사람 사는 이야기를 표방하며 포문을 열었다. 또한 알고보니 키다리 아저씨였던 재벌가 막내 아들 소아 외과 안정원(유연석 분)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흉부 외과 김준환(정경호 분), 산부인과 양석형(김대명 분), 신경외과 채송화(전미도 분), 간담췌 외과 이익준(조정석 분)까지 20년지기 친구들의 캐릭터를 소개했다. 

이어 2화의 바톤은 채송화가 이어받는다. 귀신이라 불리는 지각없이 출근하고 많은 수술을 소화하며 후배 전문의의 논문까지 챙기는,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소화해 내는 수퍼 우먼 채송화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거기에 더해 다섯 명 주인공들의 주변 전문의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이야기의 폭을 확장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방점을 찍는 건, 바로 '사람'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는 나태주의 시 <풀꽃>의 그 '너' 처럼 말이다. 

 

 

자세히 보아야 
안그래도 밤을 새워 해야만 하는 13시간 짜리 수술을 앞둔 채송화를 치프 레지던트 용석민이 조른다. 미디어와 '프렌들리'한 뇌센터장 민기준 교수는 지하철 영웅이 환자로 들어오자 공명심에 앞서 뇌를 여는 개복 수술을 하겠다고 했던 것. 병원장까지 나선 회의에서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은 덜하고, 정밀도가 높은 TSA수술로 변경했지만 문제는 민교수가 이 수술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다. 이에 치프 레지던트 용석민은 '환자가 죽는 걸 지켜보기겠냐'며 채송화를 닥달하는 한편, '잘 모르시면 제 말 대로 하시라' 며 환자에게 위협하다시피하며 수술을 변경하고자 애쓴다. 

이 상황은 언뜻 보면 마치 치프 레지던트 용석민이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 나가서 보이는 돌발 행동처럼 보인다. 결과는 예상 외다. 물론 민기준 교수가 T경험이 일천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용석민이 자신의 논문 사례로 지하철 영웅을 이용하기 위해 상황을 밀어부친 것이었다. 용석민이 내세운 선의,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건 그의 욕망이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반 외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교수는 13명인데 그들을 어시스트할 레시던트가 장겨울 한 명인 상황, 그래서 외려 교수들이 레지던트의 안부를 묻는다. 심지어 이익준의 경우 자신의 수술에 어시스트를 부탁하기 위해 장겨울 앞에서 '픽미 픽미'하며 애교섞인 댄스를 보여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교수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장겨울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 오만해 보일 정도로. 

응급실 콜을 받고 내려간 장겨울, 교통사고로 들어온 7세 남자 아이의 환후가 심상치 않다. 환자 보호자인 어머니를 만나 장겨울은 자신이 전달받은 결과를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달한다. 치명적이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시라. 심지어 어머니가 CPR을 하지 않아 더 위험에 빠졌다는 말까지 해버린다. 이 말을 지나가다 들은 안정원은 장겨울에 대해 의사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사람이란 선인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은 다시 응급실 콜을 받고 간 장겨울의 행동으로 인해 무색해 진다. 오랜 노숙 생활로 인해 동상에 걸리고 심지어 그곳에 구더기가 드글거리는 노숙자, 그가 뿜어내는 악취와 구더기로 인해 의료진 모두가 난감해 하며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장겨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구더기를 떼어내기 시작한다. 

흔히 우리나라 속담엔 사람 겉만 봐서는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2화의 이야기는 바로 그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은 사람됨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쉽게 예단하고 선입견에 눈을 가리는 우리들의 '판단'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오래 보아야 
채송화의 동급생이었던 여성이 환자로 들어온다. 일전에 유방암 수술을 했고, 다시 뇌에 암이 생겨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 남편은 해외에 일하러 가고, 홀로 투병을 해야 하는 여성은 잇다른 수술로 한껏 우울해져 있는 상황이다. 

어르신들만 있는 병실에 배치된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그저 유방을 한쪽 절개한 이상한 사람에 대한 어긋난 호기심이라고만 여긴다.  그 역시 반전이다. 알고보니 한 병실의 어르신들이 그녀의 자격지심과 달리, 당신들에 비해 아직은 한참 젊은 그녀가 이뻤던 것이다.

유방도 한쪽 밖에 없고, 뇌수술까지 해야 해서 삶이 아득하기만 했던 그녀가 그래도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게는 한참으로 보였던 것이다. 여든 넘으신 엄마가 초로의 딸에게 너는 젊어서 좋겠다 하듯이. 그리고 그렇게 그녀를 곱게 쳐다보는 어르신들의 시선은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던 그녀를 구출한다. 어르신들에 대한 편견어린 커튼을 그녀가 열어젖히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삶의 구원이다. 

그렇다면 2화의 이야기를 이끈 채송화는 어떨까? 그녀에게 '귀신'이란 별명을 붙인 건 용석민이다. 그녀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용석민에게 비춰진 그녀는 인간의 경지 그 이상으로 성실하고 일 열심히 하는 선배 의사란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2화에서 보여진 채송화는 그저 '워커 홀릭'이 아니다. 자신과 사귀던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진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없이 일상을 이어가는 '프로'이지만, 뻔히 제가 용석민이 자신의 욕심으로 채송화를 움직여 무리하게 수술을 강행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어시스트를 자처해서 뇌센터장 민기준 교수의 입장도 배려하고, 욕심인 줄 알면서도 후배 용석민의 요구를 품어주는 너끈한 포용력을 보인다.

하지만, 그저 포용력만이 아니다. 환자에게 무례했던 용석민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다시 한번 그런 일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따끔한 훈계 또한 잊지 않으면서 그저 수술 잘하고 일 잘하는 선배 의사 이상의 인간적 품격을 보여준다. 일 잘하는 것 이상의 '의사'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주목하는 '어른'들, '선배'들은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른의 품격', '나이듦의 품격'을 지닌다. 그저 오래 살고 프로페셔널하게 된 것이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여성 한 명에 남자 네 명의 우정이라는 묘한 구도로 앞으로 예의 신원호 피디의 작품처럼 남편 찾기로 회귀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에 2화에서 보여준 여주인공 채송화, 그리고 2화에서 등장한 장겨울 등 여성 캐릭터에 대한 접근은 그간 드라마들이 답보해온 '여성', '남성'의 이분법적인 구도와 선을 그은 듯한 차별성에 천착한 묘사가 아니라, 남성, 여성 이전의 사람,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서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신선했다. 

특히 마지막 에필로그처럼 등장한 김준환과 채송화의 전 남친과의 대화, 연인 사이의 일에 과한 참견이 아니냐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전 남친에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없냐'라고 반문하는 김준환의 태도는, 그 '귀신'같은 삶에서도 '파스'같은 위로를 주는 친구들처럼 남녀 사이 그 이전의 '사람'이라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by meditator 2020. 3. 20. 13:42

15년전 유통업을 하다 사업 실패로 많은 빚까지 졌던 진종현(성동일 분), 하지만 그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은 조만간 상장을 앞둔 IT 기업 포레스트의 회장이 되었다. 포레스트가 전국민적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저주의 숲 포레스트' 이란 SNS사이트가 큰 역할을 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주는 사이트, 그 사이트는 '혐오'라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안고 성장세를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첨단의 IT기업을 일군 진종현 회장은 무속을 신봉하다 못해 광신하는 사람이다. 모기업 포레스트의 자회사인 진경은 아예 무당인 진경(조민수 분)가 이끌어 가고 진종현 회장은 포레스트의 상장보다 진경이 도모하는 거대한 음모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

 

 

OCN에서나 할 법한 장르물, 더구나 우리나라 장르물 중에서도 희귀한 장르인 오컬트물이 주중 TVN에서 가능할까라는 우려가 무색하게 1회 2.49%로 시작하여  12회 6.721%로 마무리된 <방법>은 최근 부진했던 TVN 주중 드라마 중 풍성한 성과를 거두며 종영했다. 

특히 연상호 감독의 각본으로 주목받은 <방법>은 그간 오컬트 장르물에서 '조연'의 몫을 차지하던 '무속'을 전면에 내세웠다. 무속 신앙에 빠져든 사람들, 그리고 그 무속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서가 된 '혐오'가 어우러져 악의 세력으로 구축된다. 연상호 감독이 전작 <사이비>에서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이비'라는 현상으로 귀결되는가를 보여주었듯이, <방법> 역시 한 개인에게서 시작된 그릇된 광신이 어떻게 사회적 악으로 팽창하여 나가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임진희의 신념 
드라마를 연 건 열혈 기자 임진희(엄지원 분)이다. 중진일보 탐사 보도 기자인 그녀는 포레스트에 대한 제보를 조사하던 중 제보자가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늘 기자답게 '팩트'를 중요시하게 여기던 임진희 하지만, 소진을 만나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는 다른 '무속'의 세계, '저주'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물건, 한자 이름을 알면 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는 소진의 당돌한 요구가  자신의 상사 김주환의 죽음으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임진희, 그녀는 이제 소진과 함께 그녀가 살아왔던 팩트의 세계를 건너 '무속'의 세계에 합류하여 진종현에게 씌여진 악귀가 열어가고자 하는 어둠의 시대를 막아서고자 한다.

어린 시절 왕따를 당했던 친구 소진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간직한 임진희, 그래서 자신에게 찾아온 또 다른 소진을 품는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방법'해 버리고 말겠다는 아직은 채 가치관이 무르익지 않은 소녀 소진을 다독인다. 그렇게 방법이라는 '저주'의 방식속에서도 '정의'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임진희의 신념을 <방법>은 동력으로 삼는다. 

 

 

백소진의 방법
시작은 백소진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무당이었던 백소진 엄마의 그릇된 모성이었다. 잡신이 내려 신기가 약해 온갖 굿을 다해야만 겨우 풀칠이나 하고 살던 소진 모녀, 그런데 소진에게 이누가미가 들었다. 음식을 앞에 놓고 땅에 묻어 굶어 죽여  악에 치받힌 '견신' 이누가미, 그 악귀가 자신의 딸에게 들자 어미는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굿을 하러 온 진종현에게 그 악귀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굿을 지켜보지 말라는 어미의 당부를 어긴 딸때문에 진종현과 딸은 악귀를 나눠가지게 되었다. 


결국 죄책감에 못이겨 진종현을 '방법'하려던 어미, 악귀를 나눠가진 딸이 나동그라져 괴로워하는 걸 어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어미는 진종현을 방법했다는 이유로 찾아온 진경 일당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진종현은 웃으며 그걸 지켜본다. 그리고 소진은 그 모든 걸 낱낱이 목격했다.  

그 날 이후로 소진이 살아가는 목적은 진종현이다. 그를 방법하는 것, 그래서 진종현의 포레스트를 '폭로'하고자 하는 임진희를 찾아냈고, 그녀와 함께 포레스트를, 진종현을 '방법'하고자 했다. 

'방법'을 증명해 보라는 임진희의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상사를 뒤틀어 죽여버리는 소진, 그런 소진은 어미를 죽인 진종현과 그 일당이 더 나쁜 놈들이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누군가를 죽이는데 있어 거침이 없기는 진종현과 다르지 않은 '저주' 악귀가 들린 또 한 사람일  뿐이다. 비록 악인이지만 죄없는 김필성이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자 '방법'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아직 미성년인 소진의 설정은 주목할 만 하다.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은 소진이 정의관이 투철한 임진희를 만나 '방법'의 방식과 목적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결국 임진희가 제시한 임진희를 '방법'하는 대신 자신의 몸에 '악귀'를 담는 '희생'으로 드라마를 마무리한 것은 '성장'과 '성숙'의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것이 극 초반 딜레마가 될 수도 있는 '방법'에 대해 드라마가 답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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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의 굿판 
같은 악귀, 다른 선택, 바로 이게 소진과 진종현의 다른 길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소진이 임진희를 만나, '저주'의 악귀가 씌였음에도 결국 같은 '악귀' 진종현과 그의 어두운 음모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옆에 좋은 사람 '임진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종현이 만난 건 진경이었다. 

종합병원 의사 부부의 굿이나 봐주며 돈을 벌어오던 진경은 우연히 그 병원에 '신이 들려' 입원 중인 진종현을 발견한다. 그가 소진 어미가 했던 '방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진경은 자신을 던져 굿을 하여 소진 어미가 했던 '저주'를 풀어낸다. 그리고 진종현에게 씌인 악귀를 자신이 모신다. 소진 어미를 찾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빨리 해치우라 했던 진경은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레스트의 모기업 '진경'의 수장이 되어 진종현의 포레스트의 온갖 궂은 일을 처리하겨 승승장구해왔다. 

<방법>에서 최종 보스는 진종현이고, 진경은 7화에서 소진에 의해 '방법'당하며 퇴장하지만,  조민수의 신들린 연기에 힘입은 진경이 뿜어내는 어둠의 카리스마는 <방법>이라는 분위기 전체를 지배한다. 

아니 진경만이 아니다. 드라마 첫 회 깊은 산골짜기 소진의 어미를 찾아온 두 여인은 바람핀 남편을 적당히 '방법'해 달라며 돈을 들이민다. 결국 이 장면이 보여주는 건 <방법>이 가진 문제 의식이다. 똑같은 악귀이지만, 진종현은 진경을 만나서,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조차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이환 상무(김민재 분)을 오른팔로, 그리고 그의 사이트에 '혐오'를 뿜어내는 사람들에 힘입어 최대 IT기업으로 승승장구한다.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SNS를 기반한 IT기업이 사회적 혐오와 악에 기반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법>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과연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우리네 무속 신앙의 장르화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한자 이름, 소지품만으로 단 몇 초 만에 온 몸이 뒤틀려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방법'의 신박함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진 일상의 '혐오'가 서사화된 그 드라마틱한 구성 때문이었을까? 연상호 감독은 <사이비>에 이어 또 한편의 종교적 문제작을 우리에게 과제로 남긴다. 

by meditator 2020. 3. 18. 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