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회씩 도대체 끝이 있을까 싶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단 한 회만을 남기고 있다. 일찌기 제작진이 시즌제를 예약했기에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제 2020년과 함께 했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매듭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그렇게 한번의 마침표를 위해 이어가는 이야기 중 그래도 가장 관심을 끌게 되는 건 '사랑'이다. 대학교 때부터 마흔 즈음에 이르도론 '우정'을 이어 온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래서 이전  신원호 - 이우정 콤비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남편 찾기'에 골몰할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더 성숙해진 주인공들은 그 나이만큼 '어른스러운' 사랑의 이야기를 변주해낸다. 

 

 

준완이 건네지 못한 반지 
아마도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가장 '융성한' 연애를 한 건 준완(정경호 분) 커플이었을 것이다. 늘 애인이 있지만 원칙적이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그 누구도 오래 만나지 못하던 준완, 다쳐서 자신의 병원에 입워한 익준의 동생, 익순(곽선영 분)의 활기찬 모습에 반한다. 

불짬뽕을 핑계로 그녀의 부대 앞을 찾아간 준완은 저돌적으로 익순에게 연애를 할 것을 청했고, 일주일을 기다려 익순의 '오늘부터 1일'이라는 문자를 받고 아이처럼 팔짝거리던 준완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렇게 준완의 집과 부대 근처에 있는 익순의 집을 오가며 연애를 하던 두 사람, 하지만 12부작이라는 시리즈가 짧은 만큼 이제 오랜 이별을 맞이할 두 사람의 연애도 그 뜨거웠던 시간 만큼 안타깝기만 하다. 

이전에 했던 연애에서 상처를 깊게 입은 익순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마흔 줄의 준완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었지만 기꺼이 그런 익순의 결심을 존중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만 이 커플을 흔든건 아니다. 좀 더 나은 자기 계발을 위해 유학을 신청한 익순, 그리고 신청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익순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장장 3년, 외국 유학을 가게된 익순에게 준완은 웃으며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것을 말한다. 

물론 준완은 익순을 만나 웃었지만 그의 속마음마저 웃는 건 아니다. 유학이 결정되었지만 차마 준완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준완의 표정은 어두워 진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익순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미안해서 오빠한테 못알렸구나 하면서. 또한 떠남이 곧 이별이라고 생각하는 익순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너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라며 장거리 연애를 감수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부담스러워 그 무엇도 받지 않겠다는 익순에게 커플링으로 산 반지를 자신의 주머니 깊숙이 묻는다. 익준이 목놓아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부르던 노래방 그 뒷자리에서 줌아웃된 채 상념에 젖은 준완의 모습은 실연한 그 누구보다도 처연하다. 

 

 

익준이 전하지 못한 반지 
익준9조정석 분)이 전하는 못한 반지의 사연은 더 길다. 대학을 들어가던 그 시절, 나란히 앉아 면접을 준비하던 익준과 송화(전미도 분), 단정함을 중요시한다는 말에 당황하던 송화에게 익준이 건넨 머리띠는 두 사람의 오랜 '호의'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호의는 익준에게 '첫사랑'이란 감정으로 변해한다. 

송화에게 고백을 하려고 금은방에 들러 반지를 산 날, 하필이면 그날 석형 역시 송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술을 마시는 석형을 보며 익준은 자신이 준비했던 반지를 버렸다. 그리고 오랜 우정을 이어 온 두 사람,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익준은 조금씩 송화에게 자신의 묵은 마음을 열어 보인다. 아이를 키우랴 병원의 오만 가지 일에 신경을 쓰는 익준에게 송화는 너를 위한 시간이 있냐고 묻고, 익준은 너와 함께 밥 먹는 이 시간이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송화는 그런 익준의 마음에 당황한 듯 자리를 피한다. 11회 송화네 신경외과 회식까지 참석한 익준은 술게임에서 송화를 여자로 본 적이 있느냐는 집요한 질문에 얼버무리며 '당연하지'라고 넘어갔지만 노래방으로 와서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부르며 자신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다. 

왜 익준은 노래만 부르고 말았을까? 거기엔 송화가 있다. 송화는 익준이 슬며시 드러낸 마음에 자리를 피했다. 술게임에서 드러난 익준의 마음에도 그저 복잡한 표정일 뿐이다. 그 누군가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 익준은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노래 한 자락에 자신의 마음을 덜어낸다. 

그건 송화를 사이에 두고 익준과 신경전을 벌이는 안치홍(김준환 분) 역시 마찬가지다. 출근 첫 날부터 그 누구에게라도 친절하던 교수님에게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준 치홍은 첫 수술에서 실수를 한 자신을 감싸는 송화에게 슬며시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였지만 선을 긋는 송화의 태도에 한 발 물러선다. 늘 송화를 챙기며 그녀를 지켜보고 그 누구보다 송화와 가까운 익준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지지만 치홍이 낸 용기는 생일 날 '다정한 반말' 두 마디일 뿐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다른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익준화 치홍은 송화를 사이에 두고 아마 꽤나 유치찬란한 삼각 애정 쟁탈전을 벌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익준도, 치홍도 자신의 감정을 안으로 삭인다. 그건 그 상대방인 '송화'에 대한 존중이다. 아직 '사랑'할 여지를 내보이지 않는 송화이기에 거기에 섣부르게 자신의 감정들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꺼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는 준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기다려주고 사랑스레 바라보아 줌, 이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가지고 소유하고 '내 것'의 의미였기에.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마흔 줄에 접어든 '어른'들의 사랑 방식을 좀 더 성숙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들은 여전히 밴드를 좋아하고 함께 어울려 먹거나 놀 때는 여전히 아이들처럼 천친난만하고 심지어 '유치 뽕짝'이지만, 그들이 일을 하는 자리에서나, 상대방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는 '어른스럽다'. 

그런 면에서 이제 곧 병원을 떠나 신부가 되려고 하는 정원(유연석 분) 바래기인 겨울의 선택이 궁금하다. 정원을 사랑으로 붙잡아 달라는 정원 어머니의 부탁에 겨울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무뚝뚝한 외양과 달리 배려심이 넘치는 석형(김대명)이 받아든 추민하(안은진 분)의 고백에 어떻게 대응을 할까. 과연 이들은 또 어떤 '어른'들의 모습을 보일까?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려 애쓴다. '나'가 우선이어야 살아남는다고 하는 세상에서 '너'나, '우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런 정서는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재미를 떠나 이전 작품보다 무르익은 작품의 세계를 느끼도록 한다. 드라마는 늘 '희로애락'의 파노라마를 펼치지만 보고 나서 남겨지는 건 묵직한 격려이다. 조금 버겁고 힘들더라도 우리 조금 더 어른스럽게 살아보도록 노력해 보자라는. 

by meditator 2020. 5. 22.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