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한 영화가 있다. 지난 2014년 <레드 바이올린>의 프랑수와 지라르 감독이 더스틴 호프만, , 케시 베이츠, 데브라 윙거 등과 함께 만든 <보이 콰이어>가 뒤늦게 지난 5월 14일 개봉했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알콜 중독인 엄마와 살아가는 소년 스텟(개럿 웨어링 분), 그는 음악 시간에 뒷자리에서 엎드려 있다 자신을 지적하는 선생님에게 수업은 따분하며 선생님은 아이들을 때린다는 식으로 노래를 바꿔 부르며 반항을 하는 소년이다. 자신의 엄마에 대해 험담을 하는 친구에게 쓰레기를 뒤집어 씌우는 건 여사이다. 얼굴은 늘 우울한 불만투성이, 그의 발에 걸리는 돌은 걷어차여 저만치 날아간다. 

반항아 스텟, 보이콰이어의 문을 두드리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스텟은 술에 쩔어 정신을 못차리는 엄마를 돌본다. 목욕물을 받아주고 스프를 끓이고 먹던 술을 버린다. 그러나 그런 스텟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양육비를 부담하던 아버지는 혼외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육 시설로 스텟을 보낼 것을 청한다.

부모가 없이 홀로 남겨진 스텟의 처지는 흡사 넷플릭스 <인간 수업> 속 오지수의 조건과 같다. 하지만 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오지수와 달리, 스텟에게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아침에 보육원 행이 될 뻔한 스텟에게 스텟이 다니던 학교 교장 선생님인 미스 스틸(데보라 윙거 분)은 '편애'라는 힐난을 무릎쓰고 스텟을 감싼다.

스텟이 천부적인 목소리를 타고 났다며 학교에 국립 소년 합창단 보이 콰이어를 초빙하여 스텟에게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던 미스 스틸,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스텟에게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보이콰이어  소속 단원들이 다니는 사립 학교에 보낼 기회를 열어준다.

 

 

하지만 입학 오디션에서 단장인 카르벨레 선생(더스틴 호프먼 분)은 스텟의 목소리에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감동하지만 그의 불손한 태도를 들어 입학을 반대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은 했지만 이미 나이도 많고, 악보조차 볼 줄 모르며, 거기에 자신을 배척하는 학교 분위기에 이전 학교에서 하듯 불손한 태도로 일관하는 스텟은 학교 생활에 어우러져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스텟은 점차 보이콰이어 단원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도 그 일원이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율리 선생은 기회를 주지만 목소리 말고는 음악적 기초가 없는 스텟은 늘 '맨 땅에 헤딩'하는 처지이다. 

카르벨레 선생님 스텟에게 손을 내미다
입학 때부터 스텟을 눈엣 가시처럼 여겼지만 일찌기 스텟의 재능을 알아본 카르벨레 선생님은 흡사 <위플래쉬>의 플랫쳐 선생처럼 스텟을 몰아부친다. 플랫쳐 선생처럼 위악적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 음악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카르벨레 선생님은 스텟이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일깨워내고 단련해 나갈 것을 엄중하게 요구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스텟이 살아왔던 '독불장군'식의 일탈적 태도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무대에서 온전히 조명을 받으며 일사불란한 보이 콰이어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스텟은 합창단의 솔로를 맡을 정도로 성장하지만 그런 만큼 동료 단원들의 시기도 더해진다. 솔로 무대에서 악보가 사라지고, 또 다시 이미 세상에 없는 엄마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 역시 스텟처럼 자신의 불뚝거리는 성정을 이기지 못해 기회를 잃었던 쓰라린 기억을 가진 카르벨레 선생님은 일탈적 행동을 한 스텟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며 기회와 책임의 의미를 일깨운다. 그런가 하면 그의 뒤에서는 기지를 발휘하여 학교를 쫓겨날 처지에 놓인 스텟의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또한 스텟으로 인해 자신의 가정 생활이 파괴될까 두려워 찾아온 아버지를 돌려세운다. 

 

 

카르벨레 선생님의 엄격하지만 따스한 지도로 스텟은 비로소 그간 자신을 얽어맸던 상실감을 떨치고 눈물어린 진심으로 학교에 남을 것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보이 소프라노로서 최고의 난이도이자, 최고의 영예가 되는 3옥타브 '레'의 경지를 펼쳐보일 '메시아'의 독주 파트 기회가 찾아온다. 국립 소년 합창단에게, 그리고 보이 소프라노로서 스텟에게 찾아온 다시 없을 기회, 스텟은 다른 합창단원들과 함께, 그리고 홀로 그곳에 모인 관중들의 감동어린 열렬한 박수 세례를 이끌어 낸다. 

<보이 콰이어>는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스텟이 미스 스틸, 카르벨레 선생님 등 그에게 따스한 손기를 내민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보이 콰이어의 아름다운 보이 소프라노로 빛을 발하는 '음악적 성취'만으로도 이미 음악적이면서도 교육적인 성과를 거둔다. 교실 책상 위에 올라가 발을 구르며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던 소년이 다수의 관중 앞에서 헨델의 메시아 최고 난이도 3 옥타브 레를 넘나들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뿜어내는 장면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다. 

하지만 <보이 콰이어>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렇게 최고의 공연을 마친 스텟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스텟, 변성기가 온 것이다. 보이 소프라노로서의 생명이 끝난 스텟, 하지만 선생님들의 든든한 지원과 사랑으로 자신이 원하던 바를 성취한 스텟은 이제 더는 '일탈'하거나 주저 앉지 않는다. 소프라노 파트 대신 알토 파트가 되어 학교에 남을 수도 있지만, 스텟은 대신 자신에게 열린 '기회'를 선택한다. 그의 편이 되어주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스승들의 가르침 덕분에 스텟은 기꺼이 또 다른 인생의 길에 설 준비가 된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길을 열어 준 이야기, 그것이 음악 영화 그 이상 <보이 콰이어>의 가르침이다. 

by meditator 2020. 5. 21. 02:49

어느덧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년을 맞이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시간, 금남로를 물들였던 광주 시민들의 고귀한 피는 역사 속에 그 이름값을 제대로 얻고 있을까? mbc는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이하여 젊은 감독 강상우가 추적한 '김군'이라는 시민군의 행방을 다룬 다큐 <김군>을 방영했다. 

2019년 만들어 진 <김군>은 그 해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상 신인 감독상을 비롯, 2020년 들꽃 영화제 다큐 부문 감독상을 수상하고 파리 한국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바 있는 작품이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김군>, 왜 평단은 시민군 김군의 행방에 촛점을 맞춘 젊은 감독의 영화에 박수를 보냈을까? 그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 우리 역사의 자리 매김 때문이다. 

 

 

김군이 '광수'라고?
김군이 광수라니? 얼굴이 전면에 드러난 몇 안되는 시민군의 사진 가운데 김군이라고 쓴 띠를 두른 한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이 광수란 말인가? 아니다. 여기서 '광수'는 광주에 온 북한 사람을 가르키는 통칭이다. 광주에 북한 사람이라니?

전 육군대령 출신의 극우 인사 지만원 씨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일군의 노령층 지지자들 앞에서 광주에 시민군은 없었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에서 내려온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북한군의 폭동에 광주 시민들이 부역을 했다는 것이다. 

지만원 씨는 이른바 범죄 증명 과정에서 지문 분석 등에 쓰는 기하학적 분석 방법에 따라 5.18 광주 시민들 가운데서 이른바 '광수' 561명을 찾아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복면을 주로 사용했으며, 특히 2010년 북한 노동자 회관에서 벌어진 기념식 앞줄에 앉은 세 사람 중 한 사람, 김창식이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김군이라는 것이다.

 

 

진짜 김군을 찾아서 
2014년 지씨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이런 주장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드러냈다. 이에 5.18유족 모임은 지씨를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지씨가 '광수'의 대표적 근거로 내세운 김군이라는 실제 인물을 찾기에 나섰다. 

25차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에 출석한 김영택 씨는 20여사단 등이 광주를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대규모의 부대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라며 반문한다. 

여전히 광주 트라우마 센터에서 아픈 상처를 치료받는 양동남 씨, 당시 19살이었떤 양동남씨는 지만원씨에 의해 36 광주라 명명된 장본인이다. 양동남 씨는 북한군이 600 명 씩이나 광주에 왔다면 그건 그 사람들이 올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국방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겨우 19살이었던 시절, 어떤 민주화 의식이 아니라 사진 속에 보여진 리어카에 실린 2구의 시신, 그렇게 일반 시민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라 밝힌다. 

 

 

5월 15일 신군부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 계엄이 펼쳐진 상황에서 5.18일 광주 금남로에 시민들이 모였다. 그리고 피로 물들여진 금남로, 그 현장으로 보고서 광주 시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M16'으로 시민을 쏘는데 돌팔매질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시민들, 그 중에서도 군대를 다녀와 총기를 다룰 줄 알았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화순, 나주, 함평을 돌며 칼빈, M1 소총을 털어와 무기를 들었다. 총기까지 든 상황 얼굴이 알려지면 훗날 처벌이 두려워 복면과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고 당시 19살이던 32 광수 정희문씨는 당시를 떠올린다. 그런데 북한군 특수군이라니 !

그렇다면 그렇게 스스로 복면과 마스크를 쓴 시민군들 사이에서 얼굴이 드러난 김군 사진들은 어떻게 찍혔을까? 그 사진을 찍은 당사자는 당시 중앙일보 사진 기자였떤 이창성 씨다. 계엄군과 시민군이 맞닦뜨리는 상황을 담을 수 없었던 이 기자는 외곽에 나가 시민군에게 사정을 해서 얼굴이 드러난 사진을 몇 장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전면에 얼굴이 드러난 김군은 누구일까? 당시 만삭으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했던 주옥 씨는 김군이 자신의 아버지가 하던 막걸리 왕대포 시음장에 자주 들르던 사람인 듯 하다고 증언한다. 

당시 원지교 다리 밑에 모여 살던 7, 8명의 젊은이 무리 중 하나, 그들은 고아들로 천막을 치고 살며 넝마를 주어 팔며 살아가고 있었다. 안그래도 이렇게 넝마주의를 하던 젊은이들이 시민군에 적극 활동했지만, 넝마를 주워 산다는 '직업' 자체가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아 신분이 드러내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기에그들에 대한 '포상'조차도 쉽지 않아 배제되거나 소외되기가 십상이라 김군에 대한 추적은 더욱 쉽지 않다. 

당시 23살이었던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당시의 청년은 울분과 열정의 마음에서 떨쳐있어나 총을 든 상황에서 한가롭게 '어디 살아요?'를 물을 수 있었겠냐고, '이름이 뭐예요?'라고 할 수 있었겠냐고 씁쓸하게 말한다. 나가면 시체로 돌아오는 상황, 사람죽는 시체 냄새가 진동해서 밥조차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매일 매일을 보냈던 그 시절의 동지였지만 그들은 서로 누군지 모른다. 

 

 

김군이 탑승했던 트럭은 도청에 무기를 반납하러 가는 상황이었다. 김군이 반납한 걸로 추정된 캐러번 50, 총기를 반납한 5월 23일 이후 김군은 더 이상 당시의 사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에 나와 증언을 한 최진수 씨는 자신이 연행되었던 장소에서 김군이 사실되었다고 증언한다. 5월 24일 계엄군간 오인 사격으로 군인이 사망하자 그 보복으로 무차별 총살이 벌어졌다. 최진수 씨는 김군이 그 희생자라 밝힌다. 툇마루에서 자신에 앞서 발을 먼저 내딛었다는 이유만으로 관자놀이에 총을 쏜 군인들, '그 눈을 봤습니다'라고 최진수 씨는 38년 동안 묻혀진 한을 비로소 꺼내 놓는다. 

끝나지 않는 상흔
40년은 매우 긴 시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억대의 벌금과 실형을 살고 나온 지만원 씨는 2020년에도 여전히 광주는 폭동이라 주장 중이다. 

강상우 감독이 만난 그 시절의 시민군들, 이제 와 사진 속 사람을 찾는 거, 그래서 김군이 진짜 김군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거 이거야 말로 역사에 대한 '역행' 아니냐고 묻는다. 이제는 그 시체 썩던 냄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다시 그 기억을 소환하면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하는 역사의 주역은 가슴이 아프다. 안받아들여도 좋으니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조적으로 덧붙인다.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어렵게 살다 힘들게 내린 결단이었다고 말하는 이장갑 씨, 하지만 훗날 체포되어 김일성이 무슨 지령을 내렸냐, 김대중에게 얼마를 받았냐며 고문당했던 기억만 선명하고, 나머지는 이제 기억조차도 흐릿하다고 안타깝게 말한다. 

 

 

당시 20살이었던 최영철 씨는 이제 택시 운전을 한다. 다른 곳은 다 괜찮지만 체포된 곳을 지날 때면 여전히 새삼스럽고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걸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2년 선고를 받은 김용균 씨는 당시 도청에 들어간 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모두 못하게 되니 그 이후의 삶이 후회로 남는다고 고개를 떨군다. 당시 21살인던 박인수 씨는 여전히 다 빼내지 못한 총알을 원래 아픈가 보다 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오월 얘기는 그만하자는 시민군들, 인생을 송두리채 바친 사람들은 여전히 약을 안먹으면 잠을 잘 수 없다. 이발소에서 이발사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길 수 없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혼자 살아남아서 미안하고 죄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군이라니, 이 얼토당토 않은 주장으로 다시 한번 그들을, 그들이 살아남아서 미안하다고 삼키는 죽은 동료들을 여전히 오늘의 일부 인사와 세력들이 음해하고 있다. 그건 '보수'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모욕이다. 떨쳐일어난 그들에 대해 존중과 존경은 못할 망정, 존재한 역사를 거스르려는 그 '망언'과 '망발'은 이미 저만치 굴러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향한 돌팔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돌팔매에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상처를 입는다. 부디 역사에 용기를 낸 사람들에 대한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시대가, 세대가 될 수 있기를. 오죽 답답했으면 젊은 감독이 김군 찾기에 나섰을까. 여전히 두 손으로 하늘 가리는 이 '노망'든 세대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오월이다. 

by meditator 2020. 5. 19. 15:07

<인간 수업>은 진한새 작가의 극본으로 김진민 피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만든 10부작 드라마이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지만 그 주인공이 성매매 중개업을 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10부작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회차 동안 '성'과 '폭력' 이라는 청소년 드라마에서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플롯과 파격적인 전개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품행이 단정하며 학업 성취의 동기가 남다른 계양 고등학교의 모범생 오지수(김동희 분), 하지만 보여지는 순하고 성실한 외양과 달리 그는 성매매 중개업자이다. 도박꾼 아버지, 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어머니, 그를 돌보아주는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도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을 가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지수는 그저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그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포주'가 되었다. 

가진 돈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던 그를 구해준 인연으로 인해 이왕철(최민수 분)의 도움을 받아 '조건 만남'을 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잡음도 순조롭게 해결하며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던 사업은 그의 정체를 알게된 배규리(박주현 분)와 얽히며 1년 반 동안 모은 돈을 날리며 무위로 돌아간다.  거기에 뜻하지 않게 얽혀든 변태성욕자 무리, 조폭, 그리고 자기 애인인 서민희(정다빈 분)의 뒤를 봐주는 인물을 집요하게 캐내려 하는 일진 곽기태(남윤수 분)의 개입으로 접입가경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미성숙한 아이들의 인간 배우기 
그런데 이 자극적인 설정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수업'이다. 드라마에는 오지수를 비롯한 3 명의 고등학생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른들 뺨치게 야무지다 못해 도발적인 청소년들이다. 두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최첨단 앱을 이용하여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변조해 신분을 숨기며 포주업을 하는 오지수는 자신이 하는 일이 그저 '거간꾼' 정도라고 생각한다. 수요와 공급을 중간에서 맞추어 주는 일이라는 식으로 치부한다. 자신과 같은 학생인 서민희가 조건 만남에 나서지만 그런 일이 그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적 경계를 넘어선다. 

아니 극 후반에 들어서 종종 등장하는 지수의 무의식을 반영한 '꿈'씬에서 그의 모든 판단은 '1등급'이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돈을 다 잃고도 학교에 가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서도 학교 책상에 엎드리고야 마는 그에게 학교에서 살아남기가 그가 벌인 모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다.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탈도덕'적인 상태다. 

그런 지수보다 한 수 위의 존재가 나타난다. 공부는 잘하지만 도통 학교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는 지수와 달리, 남학생들과 어울려 운동을 하고, 각종 학교 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배규리가 그 주인공이다. 오지수와 배규리에 대해 '안으로만 삭히는 고구마 같은 녀석들'이라는 담임의 촌철살인처럼, 사업을 하느라 배규리를 돌봐주지는 않지만 자신들과 같은 레벨의 인간이 되도록 끊임없이 조율하고 강제하는 상류층 부모를 둔 배규리에게 사회는 규리의 부모들이 규리에게 하듯 조정하고 조련하여 요리해 가는 대상일 뿐이다. 

오지수를 알게 된 배규리는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에 응하는 듯하면서도 그를 포주라 욕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벌어들인 돈을 보고 그 돈이라면 자신을 그럴 듯한 가정의 부속품처럼 다루는 부모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그의 사업에 가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배규리의 '욕망'이 적극적이면 적극적일 수록 오지수의 사업은 점점 꼬여만 간다. 아버지가 지수의 돈을 가지고 달아나고, 조폭이 얽히고, 그걸 해결다고 하자 납치와 협박이 난무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수는 물론 배규리의 목숨조차 위태롭게 된다. 그럼에도 규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수가 좌절하고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규리는 사업을 놓지 않으려 한다.

탈도덕적 의식을 점수로 매기면 지수보다 한 수 위이다. 지수가 살아남기 위해 생존템으로서 도덕적 일탈을 선택한다면, 어릴 적부터 부속품처럼 조련당하고 번듯한 아이가 되기 위해 부모의 욕구를 피가 나도록 참아내던 규리는 인간다움이란 정의 자체가 다르다. 도덕이란 경계 자체를 비웃는 규리의 탈도덕적 레벨은 어쩌면 지수보다 한 수 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규리 역시 정신적 학대와도 같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의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지수와 같다. 

그리고 오지수의 '공급원'이 된 학우, 서민희가 있다. 부모가 없이 고모네 집에 얹혀서 살아가는 민희는 사랑하는 기태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기 위해 조건 만남에 나서는 아이다. 뻔히 기태가 자신을 돈때문에 옆에 두는 줄 알면서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민희, 그런 민희가 조건 만남의 폭력적인 상황에 맞닦뜨리면서 공포가 폭발하고 만다. 

오지수, 배규리, 서민희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원인을 가지고 '탈도덕적 경계'에 선 위기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를 가졌지만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낸 문제의 희생양들이다. 방기된 가정, 혹은 과잉 기대로 조련되는 가정, 그게 아니면 상실된 가정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떤 게 '인간'의 모습인지 배울 기회를 잃거나, 아니면 반발심을 가지며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신체는 어른처럼 성숙했고, 어떤 면에서 두뇌는 어른보다 더 빨리 움직이지만, 정작 그 '하드 웨어'가 되는 인간됨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동물들처럼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게 저마다의 방향으로 분출된 이들의 행동은 뜻하지 않게 사건 사고를 발생하며 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 

 

 

묘한 어른으로 인해 촉발된 '인간다움'
여기서 묘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왕철, 오지수와 함께 '실장님'으로 조건 만남의 '보디 가드' 역할을 하던 이 인물은 돈을 받고 움직이는 포주의 행동 대장이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서민희를 들여다 보고, 오지수가 빠진 위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들여다 봄으로 인해 서민희는 처음으로 그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왕철로 인해 서민희가 변해간다. 

그런 서민희의 변화는 실타래처럼 얽혀만 가던 오지수가 벌인 포주업이 달려가는 지옥의 레이스를 멈출 수 있는 치트키를 경찰 이해경(김여진 분)에게 쥐어준다. 하지만 치트키는 미약하고 때론 늦는다. 오지수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내민 손은 수업 시작 종에 묻힌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벌인 '비인간적'인 사건은 '너무도 인간적인 참혹하게 인간적인 결과물'을 낳는다. 결국 사건은 최악으로 치달아 노래방을 '만인 대 만인'이 몸과 몸으로 부딪치고야 마는  전장으로 만들고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일단락된다. 

행동대장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왕철의 '어른스러운 헌신'으로 마무리된 사건, 결국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벌인 일들이 그나마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야 말았다는 결과에 이르러서야 오지수는 깨닫는다.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맹목적인 욕망의 결과물인가를. 누군간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처절하게 배우게 되는 역설적 인간다움. 그것이 숨가쁘게 달려간 10부작 <인간 수업>이 도달한 결론이다. 

하지만 배움은 처절하지만 그 배움의 실천에 나설 용기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껍질 게처럼 자기 보호와 연민에 빠진 오지수는 서민희를 희생시키고 결국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업'에 이르러서야 '수업 종료 종을 울릴 수 있었다.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같은 여지를 둔 결말은 이 수업의 종료를 다음 시즌에 대한 여지로 남긴다. 결국 자기 목숨마저 수업료로 저당잡혀야 하는 인간 수업, 그들은 채 자라지 않았지만 그들이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숙제는 과중하다. 

by meditator 2020. 5. 15. 16:40

kbs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모색하는 '특별 기획'으로 <대한민국 길을 묻다> 4부작을 마련하였다. 11일 방영된 첫 시간 연세대 경제학과 성태윤 교수의 <실업 팬데믹>을 방영하였고, 다음날에는 김연희 BCG 아시아태평양 유통부문 대표가 코로나 19로 변화된 소비 심리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진단했다. 이어 13일에는 기모란 국립 암센터 예방 의학과 교수가 코로나 19와 지금까지 바이러스와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 지, 2차 유행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 지 살펴볼 예정이다. 끝으로 14일에는 이화여대 에코 과학부 최재천 석좌 교수가 바이러스 시대를 맞이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을 통해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 

 

 

경제 위기 코로나로 증폭되다 
그 중 첫 시간을 연 성태윤 교수는 이미 우리나라가 코로나 이전부터 경제적으로 상황이 심각했다고 진단한다. 그 예로 지난 2년간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 총생산)와 GNI(Gross National Income 국민총소득)가 연속적으로 감소해왔다는 증거를 든다. 이처럼 2년에 걸쳐 감소한 경우는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 밖에 없었기에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왜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 경제는 위기 상황이었을까? 그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 52시간 제도 이다. 미국의 경우 주 40시간 이상을 근무할 경우 임금을 1.5배를 늘인다던가, 의사 등 특수 직종은 그런 초과 수당에서도 제외시키는 등 탄력성과 유연성을 가지고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유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일 맥주 회사는 근로 시간 계좌 제도를 운영하여 수요가 많은 여름에 초과 근무를 하여 근로 시간을 저축하여 놓고, 일감이 없는 겨울에는 줄이는 등 역시나 탄력적 운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주 52시간을 일괄적으로 법적으로 강제하다 보니 정작 노동자들이 수당 등으로 보전했던 임금이 감소하며 주 52시간만을 근무해도 충분한 월급을 받는 괜찮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근로자도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무엇보다 기업이 심각하다. 적은 노동 시간으로도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산업 시스템으로 재배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 52시간 제도를 맞이하다 보니 노동 비용은 증가하고 생산성 증가는 이루지 못하는 등 경제 적응력 자체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경제 지수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외부 요인이 겹체 '존망지추(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시기란 뜻으로, 나라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중대한 때를 일컫는 말)'의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성교수는 안타까워한다. 

특히 그 직격탄은 청년 계층에게 떨어졌다. 기업들의 3/4이 예정된 채용 계획을 미루거나 취소하다 보니 취업을 준비해왔던 청년들은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취업 만이 아니다. 자영업이 어려워지다 보니 알바 자리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청년층만의 경우라 할 수도 없다. 그 이전 연도에 비해 19만 5천 명이 감소한 취업자 수는 60대를 제외하고 전 연령대에서 감소했고 이는 2009년 금융 위기 이후 최대치이다. 

지금까지 15만6천명이 실업 급여를 신청한 상황, 호텔, 항공, 대기업 등 직종과 나이에 상관없이 실업의 위기를 겪고 있다. 실제 무급 휴직 등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직장인들이 160만 7천 여명으로 작년 대비 4배나 증가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규모 일자기 위기는 코로나 19가 사라지면 덜해질까? 성태윤 교수는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길고 험란한 과정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과 독일의 서로 다른 해법 
그렇다면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킬 방법이 있을까? 이에 성교수는 임금을 유지하며 일자리를 지키는 건 지니의 요술 램프가 없는 한 불가능하다며 결국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제시한 두 가지 사례, 

그 중 첫 번째는 미국 GM의 사례다. 미국은 기업이 어려울 대 즉시 해고할 수 있는 '외적 조정' 제도를 택하고 있다. 한때 미국 최고의 노동자 보유 기업으로 미국 산업을 선도하던 GM은 2009년 파산을 신청했다. 생산 공장을 폐쇄하고 강도높은 구조 조정을 진행하는 한편 노동자의 고임금을 해결하기 위해 다수의 노동자를 해고하였다. 그 결과 GM은 39일 만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GM이 한 대규모 해고의 사회적 여파는 컸다. 개별 기업으로서는 파산을 벗어나는 즉각적이고 실효성 높은 해결책이지만, 기업에서 놓여난 노동자들로 인해 전사회적 경기 불황의 여파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즉 기업은 회생했지만 기업에서 해고되어 구매력을 상실한 노동자로 인해 사회적 부담은 외려 커진 것이다. 

그와 반대의 사례다 독일 폭스바겐이다.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은 통일 휴유증 등으로 이익률이 급감하자 노조의 합의 하에 임금을 삭각한 생산 라인 '아우토 5000'을 새로 만든다. 여기서 만든 차는 가격과 품질에서 호평을 받으며 2005년 이래 가장 많이 팔린 차가 되었고, 이런 생산 공정 변화의 수익을 통해 폭스바겐은 위기를 극복했다. 

폭스바겐의 사례는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키며 위기를 극복한 사례다. 사람을 조정하는 대신 임금을 낮춰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내적 조정'의 방식으로 우리나라는 이런 폭스바겐의 사례를 '광주형 일자리'의 형태로 도입하여 최근 노동 비용 증가와 수출 감소의 난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미국과 달리 '내적 조정'의 사례는 2008년 금융 위기에 독일이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았듯이 사회적 여파를 줄인다. 성태윤 교수는 이런 '내적 조정'의 사례가 기업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사회의 부담을 줄이는 '조정' 사례라고 적극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광주형 일자리가 취지와 달리 사회적 성과에 있어 여러 난제를 겪고 있듯이 경제적 이해 관계를 고려하여 설계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개별 기업이 경기 변화에 따라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의 '조정' 방식도 중요하지만 코로나 19 이후 달라질 기업 환경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성교수는 주장한다. 일시적 부진을 겪는 항공이나 교통 부문은 정상화될 것이지만 19세기 기계로 대체된 수공업으로 인해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자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 역사적 넌센스로 기록되듯 이미 '언택트 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산업 부문 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기업이나 중소 상공인들이 코로나 19로 위협을 받고 있는 한편에서 화상 회의 서비스 기업. 새벽 배송, 코로나 진단 키트  등이 사상 초유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일자리가 등장하고 있는 점에 집중해야 새로운 일자를 보다 많이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기업들의 등장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20세기 미국이 우편 독점권을 해제하며 다양한 우편 배송 업체가 등장할 수 있었듯이 경제 시스템 활성화를 위한 규제 환경의 조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결국 코로나 19는 4차 산업 혁명이라고 화두를 봉착했던 우리 산업의 생태계를 더욱 급격하게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던진다. 산업 혁명이 기계 산업의 발전이라는 겉모습 이면에 자유 경쟁이라는 시장 경제 논리의 사회적 확산이라는 시대적 담론과 함께 하듯이 결국 지금 우리는 정체된 산업 경제 시대, 그 이후의 시대를 급격하게 맞이하고 있다.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성태윤 교수는 선택지는 열려있지만 그 선택에 따라 사회와 기업이 맞이할 미래는 달라질 것이라 예언한다. 

by meditator 2020. 5. 13. 17:03

양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 오랫동안 미루어 지다 5월 6일 개봉했다. 최근 이렇다할 개봉작이 없어서일까. 박스 오피스 1위를 선점하고 있다. 역시 우디 앨런일까? 아니 그런 찬사보다는 과연 우디 앨런 감독에게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을까란 우려가 앞선다. 성추문도 성추문이지만 이제 2020년, 우디 앨런이 감독이 하는 이야기가 '그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는 지점에서이다. 

 

 

최근 우디 앨런 감독이 영화를 여는 방식처럼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역시 그의 다른 영화처럼 다큐식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뉴욕을 떠나 지방의 작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개츠비(티모시 살라메 분), 하지만 그는 쫓겨났다고 전해지는 이전의 대학처럼 이 대학에 영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를 든다면 애리조나 유지의 딸인 여자 친구 애슐리(엘르 패닝 분)때문이다. 주말 유명 감독인 롤란 폴란드 감독(리브 슈나이더 분)과의 인터뷰가 잡힌 애슐리와 함께 모처럼 뉴욕으로 돌아가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기고자 하는 개츠비, 하지만 그들의 야무진 데이트 계획은 인터뷰를 하러 간 애슐리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방황하는 개츠비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두 이야기의 갈래로 진행된다. 그 중 하나는 남자 친구인 개츠비의 고생담이다. 여자 친구와 함께 뉴욕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뉴요커인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통털어 가장 로맨틱한 일정을 짜놨지만 비가 오기 시작한 날씨와 함께 여자 친구와의 일정은 자꾸만 어긋난다. 

하지만 그런 어긋날 연예 행보에 좌절하는 그의 절망 사이사이로 차츰 드러나는 건 뉴욕 상류층의 자제이지만 형이나 친구들이 부모님이 원하는 삶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과 달리 스스로 삶의 여정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갬블러로서 타고난 거 아니냐며 포커판에서 딴 돈으로 고급 호텔을 호기롭게 예약하는 개츠비, 여전히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공부하고 부모님의 제공하는 각종 문화적 향유를 통해 지적인 여유를 누리지만 그날 밤으로 예정된 어머니의 파티에 어떻게든 참석하지 않으려 하듯 그에게 부모님과 그 주변 사람들은 그저 '지적 허영'에 들뜬 졸부들일 뿐이다. 책을 읽고 전시회를 보고 피아노를 치고 그렇게 그가 누린 모든 것들을 그저 어머니가 시켜서 어쩔 수 없어서 했던 것들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여자친구의 동생인 챈(셀레나 고메즈 분)의 지적처럼 그런 '부'의 울타리를 차고 나갈 용기도 없다.

누린 것과 지향하는 것 사이의 '혼돈', 그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청년이 개츠비다. 그는 <위대한 개츠비> 속 그 개츠비처럼 방황하는 청춘임에는 동일하지만, 스스로의 삶에 도박을 거는 대신 어머니의 돈을 종자돈 삼아 재미로 도박판을 다니는 청년에 불과하다. 사랑에 올인하고 싶지만 여자 친구는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뜻하게 않게 만난게 된 챈을 통해 부모님의 부는 누리고 싶지만 아직 그 무엇도 열정적으로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찌질한 자신을 시인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언가를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에 있어서 우디 앨런 감독은 예의 장기를 발휘한다. 거기에 도시적 감성이 더해지며 영화는 청춘 영화 이상의 문화적 감성을 즐길 거리로 제공한다. 거대 도시 뉴욕이 아니라 지적 문화적 공간으로서 그곳에서 나고 자란 개츠비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비오는 뉴욕 명소를 통해 감각있게 드러난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그런 정체성의 방황 끝에 만나게 된 '어머니의 진실'을 통해 감각적인 문화 도시 뉴욕이 가진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역사'에 대한 우디 앨런 식의 풍자 역시 놓치지 않으며 예의 풍자적 기지 역시 놓치지 않는다. 

 

 

애슐리의 엇나가버린 도전 
남성인 개츠비의 서사가 우디 앨런 감독의 장기를 살린 영역이었다면, 또 다른 측면 여성인 애슐리의 서사는 역시나 우디 앨런 식의 '조크'이지만, 그것이 바로 더 이상 우디 앨런을 이 시대의 대표적 감독이라 부를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 된다.

개츠비를 연신 본의 아니게 바람 맞히고 있는 애슐리((엘르 패닝 분)는 학교 신문의 기자로 유명 감독 로만 폴라드 감독을 만난다는 기쁨에 설레이는 여학생이다. 애리조나 출신 은행업계 거물인 아버지, 미인대회 출신의 이력, 살면서 뉴욕은 어릴 적 겨우 두 번을 와봤던 이 지방 출신의 여학생은 학보사 기자로 뉴욕에, 거기에 유명 감독을 만난다는 행운으로 인해 한껏 들뜬다. 출발할 당시부터 개츠비는 뉴요커로서 애슐리에게 로맨틱한 데이트 행보를 제시하지만 이미 인터뷰란 기회에 들뜬 애슐리에게 그런 개츠비의 '선물'은 자꾸 한 귀로 흘러 나간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작품 완성도에 대한 로만 폴라드 감독의 돌출 행동으로 인해 애슐리가 애인에게 돌아갈 시간은 늦춰진다. 하지만, 이건 애슐리의 생각이다. 천재 감독의 우울증, 그리고 이어진 그의 각본가의 뜻하지 않은 가정사, 그리고 뜻밖에 조우한 당대 스타와의 인터뷰는, 애슐리가 만난 행운이지만, 그 반대로 그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앳되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만남일 뿐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여자만 보면 그 상대방이 누구건 상관없이 '작업 정신'을 발휘하게 되는 이 남성들의 조합은 역시나 우디 앨런 영화의 '전통'이다. 그런데, 그런 '전통'과 맞물리는 애슐리가 제 아무리 애리조나 출신에 뉴욕에 몇 번 와보지도 못한, 심지어 로만 폴라드 감독을 알게 된 계기조차 개츠비를 통해서일 만큼 문화적 성숙에 있어 미숙하다 해도, 애슐리를  대상화시키는 지점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당당한 여성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영화적 장치로서 썩소를 자아내게 한다.

제 아무리 지방의 작은 대학이라 하더라도 학보사 기자를 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진 여성이 뉴욕의 대감독이란 이유만으로, 혹은 당대의 스타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쉽게 그들의 '언어적 유혹'의 정체를 모른 채 쉽게 무장해제 되어 버리는 장면은 '백치미'를 넘어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 만큼 전 세대의 관습적 장치이다. 그녀가 매번 꺼내드는 취재 수첩이 무색하게 만들 만큼.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런 애슐리와 대비되는 지점에 개츠비를 '자각'시키는 어머니와 챈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직의 상처를 딛고 '사랑'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모은 돈을 통해 뉴욕의 상류층으로 자리매김한 자수성가의 상징도, 그리고 개츠비에게 자신의 현실을 자각케 만드는 뉴요커 챈의 존재도 영화 속에서는 개츠비의 '자각'을 위한 '장치'로 씌여졌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마돈나 아니면 마리아, 남성의 시각에서 자신을 구제할 두 여성성의 협소한 한계 속에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는 머무르고 만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이번 세기 이전에는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조크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세기의 시대에는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의 관점에 대해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성찰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던 이야기를 여전히 능숙하게 변주하고 있는 우디 앨런 감독은 이제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진짜 안타까운 것은 그의 지나간 이력보다 그가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호흡할 수 없는 옛날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지점이다. 

by meditator 2020. 5. 10. 21:45

또 한 편의 의학 드라마가 찾아왔다. 매주 수, 목 밤 10시, kbs2를 통해 방영되는 <영혼 수선공>이다. 안타깝게도 목요일 밤 화제작인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시간대가 겹치는 바람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신하균이 정신과 의사 이시준으로 분하여 '정신과' 분야를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는 또 다른 지점에서 의학적 힐링을 지향한다. 

 

 

마음이 아픈 시대 
아마도 그 '힐링'의 출발점은 친구와 함께 바닷가를 찾은 정소민이 분한 여주인공 한우주가 옷을 입은 채로 바다에 뛰어들어 있는 힘껏 오열하고 절규하는 그 장면이 아니었을까? 또한 자신과 더블 캐스팅된 아이돌 팬들이 자신의 공연 차례에 상복을 입고 나타나 팔짱을 끼고 앞좌석을 차지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들이 보낸 화환을 발로 차는 장면은 어떨까? 그리고 애인이라 해서 도움을 청했는데 변심한 애인은 단독 보도의 욕심에 나눈 대화를 단편적으로 편집하여 10년 고생해서 탄 신인상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자 야구 방망이로 그의 차를 짖이겨 버리는 장면은 어떤가? 

묘하게도 이 한우주가 정신줄을 놓는 이 장면들이 '공감'을 자아낸다. 우리들은 살아가며 저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한우주 대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속으로 화를 꾹꾹 눌러 참아가며 살아가고 있기에 그녀의 일탈과 분노 장애에서 공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흔히 정신줄을 놓는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실낫같은 경계를 두고 두고 정상과 비정상이 되어 버리고 마는 '정신줄을 놓게 만드는 상황'을 무수히 겪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신과 의사 이시준은 '미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겁니다'라는 진단을 내린다.

'아픈거다'라고.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고통 속에서 결국 정신을 놓고 자신의 가슴에 빨간 약을 바르던 엄마를 괜찮다며 딸이 안아주던 장면과,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현병에 걸린 장재열을 품어주던 지해수의 사랑이 떠올려지는 '처방'이다. 이렇게 <영혼 수선공>은 앞서 노희경 작가가 다뤘던 '정신'의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정신과 병원을 전면에 내세우며 다루고자 한다. 

극중 한우주는 안그래도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10년 만에 각고의 노력 끝에 신인상을 타게 되던 날 상을 받기 위해 나선 무대에서 그만 음주 측정 거부로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이 '체포'가 사실은 해프닝이었다. 이시준이 애써 지켜주고 싶었던 망상증 환자 동일이 자신이 경찰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을 탈주하여 벌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명으로  한우주는 모든 것을 잃는다. 언론은 지난 밤 마신 술로 그녀를 음주 운전자를 만들어 버린다. 제작사 대표는 하루 아침에 그녀의 배역을 없애 버린다. 오디션에서 나서보지만 번번히 고배를 마신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자신에게 닥쳐온 불리한 결과들, 하지만 한우주가 맞닦뜨린 사건은 억울하지만 그 '억울'함의 보편성이 <영혼 수선공>이 말하는 '아픔'의 근원이다. 한우주처럼, 혹은 한우주처럼은 아니지만 세상에 억울한 일 한번 안당해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녀를 억울하게 만든 동일은 어떨까. 시상식장에서 한우주를 체포하는 무리수를 뒀지만 매일 순찰을 돌며 취객을 선도하는 등 거리 정비에 솔선수섬하고 날치기범을 향해 몸을 던지는 동일은 그의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상실'의 마음이 가져온 망상증에서 헤매이고 있다. 경찰이 아니지만 경찰이고픈 자신의 '지향'이 그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잃어버리고 가질 수 없음, 이것이야 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매번 곱씹으며 삼켜야 하는 대부분 고통의 근원들 아닐까. 사람을, 부를, 일을, 관계를. 살아가면서 성취하는 순간보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그리고 그럼에도 가질 수 없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 되돌아야 하는 시간들이. 그래서 사람들은 가슴 속에 저마다 스스로 빨간 약을 바르고 있고, 그것마저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극중 한우주처럼 폭발하건, 동일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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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준이 건네는 위로와 치유 
그리고 이시준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 그네> 속 의사 이라부처럼 정신과적 조치 이상의 '치료'를 통해 치유에 다가간다. 망상 장애는 대뇌 변연기의 도파민 과다를 먹물들 주장으로 제껴버린 이시준은 가장 큰 원인을 고장난 마음에서 찾는다. 다른 사람의 잣대에 나를 가두지 말라, 칭찬도 비난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  다 찰라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순찰을 하고싶은 동일과 함께 거리를 헤매듯 직적 환자의 아픔에 뛰어든다. 어떻게든 환자와의 유대를 가지고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인정하고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도와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공중 그네> 속 의사 아라부가 때로는 환자보다 더 정신이 나간게 아닌가 싶듯이 이시준 역시 매일 밤 잠못들고 '살자'를 외치며 뛰는 그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아픔을 치유하는 사람과 아픈 사람의 간극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드라마 <영혼 수선공>은 우리 시대 마음의 아픔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최고의 화제작은 될 수 없을 지 몰라도 그 제작 의도에 맞게 좋은 '힐링'의 기억을 가진 드라마로 남을 있도록 '완주'하기를 바래본다. 

by meditator 2020. 5. 8. 19:02

지난 4월 2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인간 수업>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진한새 작가가 고등학생이 주범이었던 범죄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저작한 이 작품은 <무법 변호사>, <개와 늑대의 시간>, <결혼 계약> 등 인기작을 만든 김진민 피디가 연출을 맡아 작품의 기대치를 높였다.

거기에 얼마전 종영한 <이태원 클라쓰>에서 장근수 역으로 출연했던 김동희가 분한 오지수가 사건을 이끈다. 1등급 성적표에 부모님 사인을 위조하는 고등학생 오지수, 그는 자의적 '아싸'이다. 그에게 삶의 목표는 '남들처럼' 사는 것이다. 남들처럼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남들처럼 대학도 가고, 남들처럼 직장도 다니는 것. 그것이 그의 삶의 소망이다. 

 

 


소년 지수의 평범한 소망 
이 평범한 소망, 하지만 그 평범함이 지수에게는 가장 힘들다. 도박 중독인 아버지, 어머니는 결국 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버렸다. 그의 집을 찾은 배규리((박주현 분) 말대로 쓰레기장같은 집에 소라게를 벗삼아 산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데 아직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지수가 어떻게 학원까지 다니며 1등급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그가 돈을 벌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돈, 9000만원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자칭 '중개업'에 '보호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선택한 '알바'에 대해 배규리는 '쓰레기 포주업자'라고 한다. 음성 변조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오지수는 성매매를 알선한다. 그리고 운전을 해주는 왕철(최민수 분)과 동업으로 혹시나 성매매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상사에 대해 '보호'를 해주는 '불법적 사업'을 한다. 

그에게 '포주'라고 일갈하는 규리에게 자신은 '알선'과 '보호'를 해주는 사업을 한다고 무표정하게 반문하는 오지수의 모습은 바로 <인간 수업>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사회문제 연구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배규리와 오지수를 어떻게든 품어주려고 하는 담임 선생님  진우, 하지만 그런 진우도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이라는 걸 시인한다. 즉, 공부 말고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곳. 

하지만 우리 나라 청소년 들 중 공부을 하며 순탄하게 대학이라는 관문을 성실하게 넘어서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드라마 속에서 보여지는 반의 풍경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학교는 오로지 '공부'만으로 아이들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그 평가에서 1등급으로 선망을 받는 지수이지만, 정작 그의 실상은 '방치된 미성년'이다. 

하지만 이 '방치된 미성년'은 어떻게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도덕적 일탈'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줄 엄마도, 아빠도 없기에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법'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제작진을 이렇게 보호받지 못한 청소년이 선택한 역설적 경계의 이탈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청소년의 문제를 폭로한다. 

 

 
보호받지 못한 미성년의 극단적 선택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에 등장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특수한 암에 걸려 죽어가는 부인, 그런데 같은 마을에 약사가 개발한 약이 이 암에 특효가 있다. 병든 아내를 둔 남편 하인즈는 약사를 찾아가 약을 구하려 하지만 약값이 워낙도 비싼데, 약사는 이 부부의 사정을 알고 10배나 더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 결국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인즈는 약을 훔치고 만다. 

이 사례에 대한 판단에서 12세~ 17세 청소년들은 아무리 아내를 구하려 했어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즉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습적 판단'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나아가 18세에서 25세에 이른 청년들은 나아가 '법과 질서'를 준수하며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의무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인간 수업>의 오지수는 위의 도덕적 발달에서 '하인즈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한 그에게 누군가의 성, 특히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미성년자가 성매매를 하는 미성년 보호의 의미는 '인지'되지 않는다. 더구나 '법과 질서' 따위. 

주목해야 할 것은 오지수에게 그런 '도덕'의 판단과 자각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지수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 모두 각자의 조건에서 도덕적 결핍을 가지고 있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 학교는 아이들을 '길러'낸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이 이 사회의 성원으로 옰곳이 설 수 있는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는 '수업'은 커녕 '조건'조차도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어떻게 지수가 그런 '인간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는 오지수가 그런 일을 해서 벌은 6000만원을 보자 대뜸 들고 날라버리는 인간인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싫다고 지수만 홀로 두고 집을 나가버리고, 학교는 그저 1등급인 지수만을 '측정'하는데, 도대체 '보호받아야 하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외려 상처만을 입은 아이가 '소라게'처럼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드라마 속 지수는 목소리까지 변조하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노련한 사업가이고, 동업자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자 경찰을 불러 위기를 모면하는 기지를 발휘하는 영민함을 보이지만, 선망하던 규리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저 첫사랑에 빠져버리는 순진한  10대의 모습을 영락없이 드러내고 만다. 이 소년의 이중성이야말로 아직 채 미성숙한 10대의 불안정성을 고스란히 보이며 이 소년의 현실을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보호받지 못한 소라게같은 선택의 대가는 가혹하다. 6000 만원까지 부를 축적시켜 조만간 그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겠다 생각하던 9000 만원을 목전에 둔 사업은 배규리의 등장으로 아버지 한탕의 희생물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눈 앞에서 칼이 번득이지만 결국 가족이라 뒤돌아서고마는 지수, 그 '파산'의 와중에도 꼬박꼬박 학교는 나가는 지수의 모습은 그가 잡고 있는 지푸라기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낸다.

배규리의 동업 제안을 어떻게서라도 피해보려 이리저리 알바를 뛰어보지만 공부와 병행이 불가능하다. 결국 중간고사를 망치고야 마는 지수는 폭발한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규리와 손을 잡겠다고 한다. 다시 한번 또 세상에 자신을 '버린' 소년 지수, 참혹하고 혹독한 '인간 수업'이 기다리고 있다. 

10대 청소년물임에도 높은 폭력성과 선정서의 등급으로 시작된 <인간 수업>은 그간 공중파 등의 드라마가 감히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풀어내며 다시 한번 넷플릭스 콘텐츠에 대한 화제성을 이어가며 그 영향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by meditator 2020. 5. 7. 15:06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ebs 다큐 프라임은 아시아의 가족들에 주목한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 어느덧 딸들을 결혼시킬 즈음에 이르른 아버지들, 서로 다른 역사적 사회적 환경 속에 살아온 이 아버지들의 현재를 통해 우리 시대 '아버지'를 그려내고자 한다. 

 

 

아버지들에게 딸들을 결혼시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함께 결혼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식장을 들어서서 사위가 될 사람에게 까지 함께 발 맞추어 걷는 전례도 사라져간다. 딸들은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가 아니라, 동등한 동반자로서 남편과 함께 식장을 들어선다. 다큐는 전통적 의미의 결혼에서 딸의 손을 잡고 식장을 들어선 아버지의 심정에 주목한다. 관습성을 넘어, 딸을 손을 잡고 걷는 그 시간이 마치 자신이 지나온 시간 위를 걷는 듯한 그 '아버지'의 소회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베트남- 캄보디아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들
베트남의 아버지 반뚜안 씨, 한 골목에서 30년을 살아온 그에게 딸은 어떤 의미일까? 매일 학교에 딸을 데려다 주던 아버지, 어느 비오는 날 오토바이가 그만 빗물에 미끄러져 웅덩이에 빠졌을 때 혹시나 딸이 다쳤을까 안아올렸던 그 기억이 여전하듯, 딸은 그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버지도 한때는 청춘이었다. 그러나 이제 결혼을 앞두고 설레이며 빛나는 딸들처럼 청춘이 모두 아름답게 빛나는 건 안니다. 아버지 반뚜안 씨에게 청춘을 상징하는 옷은 군복이다. 캄보디아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1977년 벌어진 전쟁의 기억은 참혹하다. 특히 1976에 입대했던 동기들은, 아직 군대에 적응하기도 전에 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목숨을 많이 잃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돌아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낳은 딸, 그래서 더 애틋했다. 그런 딸을 그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때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혼자 방에 들어와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고 아버지는 이제야 말한다. 화가 나도 적을 다루듯이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전쟁의 기억은 오래도록 아버지의 상흔이 되었다. 

그렇다면 캄보디아의 아버지는 어떨까? 캄보디아는 11월이 결혼 시즌의 시작이다. 하지만 크레브 씨의 막내 딸 니타는 돈을 더 모아 식을 올리겠다며 조상들의 영전에 인사만 드리고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며 살아왔다는 아버지 크레브 씨, 하지만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 왔음에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농담 한번, 장난 한번을 치지 못한다.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역시 아버지가 경험했던 참혹한 기억에서 부터 비롯된다. 

아버지는 살아남았지만 아직도 꿈을 꾸면 끔찍했던 기억 속으로 소환되곤 하신다. 1975년 크메르 루주에 소년병으로 징집되었던 아버지는 3년 넘게 군대에게 보냈다. 베트남과의 전쟁 기간, 전쟁의 공포와 함께 먹을 것이 없는 '기아'의 고통이 소년 크레브를 괴롭혔다. 농민 유토피아를 이루겠다며 17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크메르 루즈는 배고프다고 해도 혹은 요구되는 대답이 아닌 다른 대답을 해도 투옥을 당했고, 배고픔을 못이겨 혹 먹을 것이라도 훔치거나 하면 죽임을 당할 정도로 혹독한 군 기강을 유지했다. 그 죽음과 공포의 시간 속에서 아버지는 오로지 살아남는 법만을 배웠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참혹한 기억을 자식들은 모르길 바랬다.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말을 아낀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자식을 위해 달려온 성공 인생 
한국의 김호영 씨는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2시에 끝나고 집에 돌아와 5시에 출근을 하기도 하고, 건설 현장을 따라 지방을 떠돌며 한 달에 한번 집에 들리며 30여년을 타지를 떠돌았다. 그렇게 돈을 버느라 아빠 노릇도 못하는 사이 딸 소연이는 훌쩍 자라 어느 덧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쇼호스트를 준비하며 결혼을 앞둔 딸 소연씨, 결혼은 소연씨가 하는데 이제 노후의 부모님이 더 설레여하신다. 소연 씨가 결혼할 집인데 가구 배치를 놓고 부모님이 설왕설래하시는 상황, 한국적 결혼의 전형적인 상황이다. 내 결혼이니 내가 알아서 한다 하니 섭섭해하신다. 농담 반, 진담 반, 엄마 아빠 집 같다는 딸, 그래도 행복해 보이시니 참는다는 요즘 결혼의 풍속도다. 

인도는 풍속은 우리보다 한 술 더 든다. 연애 결혼을 바라는 젊은이들도 있지만, 이제 결혼을 앞둔 카비타는 자신을 위해 아버지가 최선을 선택을 해주시리라 믿으며 중매 결혼을 선택했다. 아버지 라메시는 교육, 직업, 집안을 따져 알맞은 남자를 골랐다. 

그렇게 딸에게 맞는 조건의 남자를 골라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결국 아버지의 경제력이다. 일자리가 없었던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수도 파이프 사업으로 자수성하가한 아버지 라메시. 그는 자신의 여력이 되는 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주기 위해 애쓴다. 그게 그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자리이다. 25년전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왔을 때 태어난 딸, 자식이야말로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이다. 

 

 

몽골의 바토그토는 대가족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이어받아 일가를 이루었다. 사회주의 체제 시절 몽골은 집단 목축을 하여 개인 소유의 가축이 없었지만, 1992년 민주주의 이후 자기 소유의 가축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열심히 일했던 바토그토네 집안은 이제 300 마리의 양떼를 지니게 되었다. 

그 열심히 일한 노력의 결과로 네 딸을 모두 도시의 대학을 보냈다. 유목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았지만 자식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둘째 딸이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서도 이웃 유목민 아들과 손주를 낳아 돌아오니 기쁘다. 하늘이 자신에게 준 선물과도 같다. 오죽하면 딸은 이웃집안으로 시집을 가도 손주는 자신이 키우고 싶다고 할까.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몽골, 그리고 한국, 서로 다른 아시아의 아버지들이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진 자리 궂은 자리 마다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이 살아왔던 원천은 나라는 달랐지만 결국 가정이었다. 

by meditator 2020. 5. 5. 22:37

영화의 후반, 생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연 줄리언 무어가 분한 테레사 영은 남편에게 묻는다. 삶이 우리를 지나쳐 가는 것일까? 우리가 삶을 지나가는 것일까? 라고. 이 '우문' 은 결국 '주체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삶이, 어떤 순간 나 자신을 떠도는 방랑자처럼 '객체'화 시켜버릴 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그건 죽음일 수도,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게 된 상황일 수도 있다. 그 누구라도 살면서 종종 자신을 휩쓸어 버리는 삶의 국면에 마주하게 된다. 여기 그렇게 자신이 의도치 않는 삶의 기로에 놓인 두 여성이 있다. 바로 줄리언 무어가 분한 테레사 영과, 미셸 윌리암스가 분한 이자벨 앤더슨 이다. 

 

 

당신이 잊고 있던 과거가 다시 찾아 온다면?
영화를 여는 건 인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자벨 앤더슨이다. 아이들과 여유로운 야외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자벨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조차 사기 어려울 정도로 자금 부족의 위기 상황을 맞이한다. 그런데 도착한 기쁜 소식과 그렇지 않은 소식, 한 가지는 뉴욕의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을 운영하는 테레사가 거액을 후원하기로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담뿍 정이, 그 중에서도 자꾸만 그녀의 모성 본능을 일깨우는 한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녀가 직접 뉴욕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지원을 받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마침내 테레사를 만난 이자벨, 그런데 어쩐지 자신이 거액을 공여하기로 했음에도 고아원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테레사는 생뚱맞게도 이자벨을 자기 딸의 결혼식에 초대한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결혼식에서 이자벨은 18살 시절 낳아 입양을 하기로 결정했던 딸과 그 딸의 아빠인 오스카(빌리 크루덥 분)를 만난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딸과, 지우고 싶은 그녀의 과거가 그녀를 찾아왔다. 

2006년 매즈 미켈슨 주연으로 수잔 비에르 감독이 만든 <애프터 웨딩>처럼, <애프터 웨딩 인 뉴욕> 역시 인도에서 복지 사업에 헌신하는 이자벨이 뜻밖에 만나 자신의 과거로 영화를 연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18살 시절, 이자벨은 아이를 낳는 것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미성숙한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부당하고 생각한 그녀는 당시 남친이었던 오스카와 입양을 결정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난 후 아이를 만나러 간 오스카는 그런 두 사람의 결정을 번복했다. 그리고 아이를 홀로 키우며 테레사를 만나 다복한 가정을 꾸려왔다. 딸인 그레이스는 엄마가 죽은 줄 알고 오늘에 이르렀다. 

영화는 이제는 복지 사업가가 되었지만, 한때는 자식을 버린 이자벨이 뜻밖에 조우하게된 '과거'의 인연,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엄마의 '실존'을 뒤늦게 알아버린 딸 그레이스의 혼란으로 이끌어 간다. 

 

 

'과거'를 불러온 테레사
눈 앞에서 자꾸만 인도의 소년이 어른거리던 이자벨은 자꾸만 인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테레사는 지원하겠다는 금액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리면서 그녀를 만류한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키워왔던 미디어 그룹의 매각과 정리를 한다. 왜?

<애프터 웨딩 인 뉴욕>, 그 혼돈의 시작은 테레사가 남몰래 삼키는 알약으로 부터 비롯된다. 야심찬, 그리고 진보적인 사업가로 찬사를 받으며 미디어 그룹을 키워왔던, 그리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부녀와 가정을 꾸려 이제 8살난 쌍둥이 아들까지 둔 남부러울 것 없는 테레사에게 지나가야 할 삶의 '마지막 문'이 도래한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끌어들인 테레사를 찾아온 이자벨에게 테레사는 자신에게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직 두 쌍둥이 아들이 어리다는 것을. 뒤늦었지만 그녀에게 딸을 돌려주듯이. 테레사는 자신의 아들들을, 그녀가 부재한 가정을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잔 비에르 감독의 <애프터 웨딩>이 덴마크의 송강호라 칭해지던 걸출한 매즈 미켈슨의 연기력에 기대어 뒤늦게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한 남자의 회한에 방점을 찍었다면, 그에 반해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어쩐지 그 방점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여겨진다. 분명 이야기는 뒤늦게 과거를 마주한 이자벨의 혼란과 갈등이지만, 어쩐지 자꾸 시선이 줄리언 무어가 분한 테레사에게 향한다. 

둘 다 명불허전의 배우이지만, 그럼에도 줄리언 무어와 미셸 윌리암스가 가진 배우로서의 내공의 차이때문일까, 그것도 그렇지만, 과거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영화가 지난 시절의 회한에 솔직했던 반면, 진취적인 두 여성을 앞세운 영화는 '여성'으로서의 그들의 ' 멋져야 하는 존재감'에 짖눌렸달까.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한과 후회, 그리고 때로는 이기적이거나 감정적인 지점에들에 대해 그 '바닥'에 다다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건은 절절하고 두 배우의 연기는 훌륭한데 감정의 울림이 깊지 않다. 

 

 

죽음을 마주하게 된 여성 사업가, 아직 어린 두 아들, 그녀가 과거 남편이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 자신이 키우고 있는 큰 딸의 생모를 불러들이기까지의 '고뇌'가 관객은 자꾸만 짚어지는데 영화는 어쩐지 그걸 평면적으로 스쳐간다. 죽고 싶지 않다는 테레사의 절규만으로는 그녀가 홀로 약을 삼켜가며 남편의 과거 여자이자 딸의 생모를 불러오기까지의 복잡한 심사가 다 설명되지 않아 안타깝다.

이자벨은 어떨까? 18살에 포기한 모성, 그리고 이제 고아원의 한 아이에게 유독 모성적 연민을 놓지 못하는 상황, 거기에 뒤늦게 나타난 딸에 대한 애매한 모성의 복잡한 갈래가 차별성을 가지고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에 18살에 딸을 포기했던 여성이 이제 인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복지 사업가에 이르기까지의 회한어린 여정의 깊이 역시 미흡하다. 요가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복지 사업가라는 여성과 미디어 그룹의 대표인 여성의 미담을 넘어 그들이 드러내는 감정적 여운이 짧다. 멋진 여성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삶의 여정에 대한 좀 더 진솔한 천착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by meditator 2020. 4. 27. 23:31

<이어즈 & 이어즈(이하 이어즈)>는 BBC와 HBO가 공동으로 제작한 영국 드라마이다. 2019년에 6부작으로 방여된 이 드라마는 같은 해 가디언지가 선정한 영국 드라마 중 4위에 오르는 화제작이 되었다. 최근 왓챠 플레이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2019년에서 부터 2034년까지 '미래'의 영국을 다룬다.

그런데 이 '미래'의 이야기가 주목받고 있는 건 바로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전세계가 위기를 맞이하며 혼돈에 빠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미래를 향해 나갈 것인가라는 불안함의 '가정'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어즈>는 영국의 대표적인 미니 시리즈 <닥터 후>의 러셀 T 데이비스가 각본을 맡았다. <닥터 후>는 미래에서 온 외계인 닥터 후를 주인공으로 영국의 역사와 정치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드라마로 이런 서사의 장점이 <이어즈>를 통해 영국이 맞닦뜨린 현실과 미래에 대한 담론으로 제대로 풀어내어 졌다. 

 

 

평범했던 가족에게 들이닥친 격동의 세계 
이야기의 시작은 2019년이다. 브렉시트 후의 영국, 그곳에 한 가족이 있다. 금융 설계사로 살아가는 맏형 스티브(로리 키니어 분)는 회계사인 아내 셀레스트(트니아 밀러 분)와 두 딸과 함께 천정부지로 집값이 치솟는 런던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에 반해 큰 딸인 이디스(제시카 하인스 분)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세계를 돌아다니며 소수자의 인권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중이다.

둘째 대니얼(러셀 토비 분)은 주 정부의 공무원으로 난민들을 담당하는 주택 관리원으로 결혼까지 한 '게이'였고, 다리를 쓰지 못하는 막내 로지(루스 메이들레이 분)는 아빠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며 학교 식당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로지가 태어날 당시 바람이 나 집을 나간 아버지,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라이언스 가족의 '어른'은 오래된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증조 할머니 뮤리얼이다. 

나름 특별하고 평범했던 라이언스 가족은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지만, 격동의 세기에 들어선 영국은 이들이 누리고 있는 '보통'의 삶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격동'의 한 가운데 정치인 비비언 룩(엠마 톰슨 분)이 등장한다. 

 

 

심야 토크쇼에 등장한 비비언 룩, 약칭 비브 룩은 당시 국제적인 분쟁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해 욕설을 섞어가며 관심도 없다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브렉시트 후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오로지 영국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비브 룩의 '극우적' 정치적 입장은 2025년 드론으로 목숨을 잃은 지방 의회 의원의 보궐 선거에서 아이들의 전자기기 제한을 내세우며 압도적인 관심을 끌고, 2026년 아이큐 70이상인 사람만 투표를 하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총선까지 승리의 기세를 몰아간다. 

하지만 오로지 영국에만 집중하겠다는 극우적 입장이 판치는 것과 달리, 세계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중국이 만든 인공섬 흥사다오를 둘러싼 국제적 분쟁에서 결국 미국은 핵미사일을 쏜다. 극우 정권이 들어선 우크라이나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처단하고, 결국 이런 세계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런던의 유력 은행들이 파산한다.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가족 
그 과정에서 집을 판 돈을 은행에 맡겨두었던 스티브네 일가는 금융전문가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100만 파운드 이상의 돈을 하루 아침에 잃고 할머니네 집에 얹혀 택배 배달을 하는 신세가 된다. 아내 역시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 지능의 세상에서 더 이상 회계사라는 직업이 존재 이유를 잃고 실직하게 된다. 비브 룩이 오로지 영국의 이해를 내세우며 승승장구하여 총리에 이르지만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 진다. 사람들은 출근하게 해달라며 '출근하기' 운동을 펼치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안정적인 직업은 없다. 

미국이 흥사다오에 핵미사일을 쐈을 때 그곳에서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던 이디스는 그로 인해 피폭'을 당하고 자신의 생을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런 이디스에게 자신이 사랑하게 된 우크라이나 난민 빅토르의 송환을 위해 애쓰던 대니얼은 도움을 청하고, 이디스의 도움을 받아 빅토르를 안전하게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극좌정권이 장악한 스페인으로 떠난 대니얼은 위험을 무릎쓰고 난민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그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1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스티브는 약물 실험 대상이 되는 바람에 고개가 제 멋대로 돌아가고, 막내 딸 로지는 직업을 잃고 대신 하던 푸드 트럭마저 여의치 않게 된다. 살던 지역은 위험 지역으로 철조망이 쳐지고 왕래조차 쉽게 할 수 없게 되고,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실종되기 시작한다. 

극좌와 극우가 판치는 세계, 스티브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80년대에 태어나 살아온 자신들의 지난 시대는 잠깐 괜찮았던 세계적 위기의 휴식기였을 지도 모른다고. 결국 그들이 당연하다 믿으며 살아왔던 '민주주의는 잠깐의 이상'이었냐고. 

세상이 점점 뜨거워지고, 기후 변화는 극심해져 80일, 90일의 홍수가 일상이 되고, 나비가 멸종된 세상, 사람들의 삶이 갈수록 척박해지는 것과 달리 인공 지능의 세상은 나날이 발전한다. 어릴 적 부터 온갖 IT 문명에 접속했던 스티브 가족의 큰 딸 베서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지털' 세계에서 찾고 트랜스 휴먼을 지향하며 손에 핸드폰을 이식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자신의 정신을 디지털로 업로드하고자 하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정부의 권한에 자신을 맡기는 조건으로 디지털 휴먼으로 거듭난다. 머릿 속에 '인터넷 세상'을 동기화환 베서니는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본다. 황반 변성을 앓아 시력을 잃을 위기의 증조 할머니는 줄기세포 수술로 다시 시력을 되찾는가 하면,  택배 배달을 하던 자전거에 치어 목숨을 잃은 라이언스 가족의 아버지는 물문자로 거듭나는 '수장'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런 문명의 편리함이 사람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작 사람들을 가스비와 전기세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사이버 공격이란 명목으로 정전이 일상이 된 세상을 살아간다. 실종자 캠프는 고도화된 전파 방해로 핸드폰 수신마저 불가능하게 '격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전으로 손실되는 정보를 대신하기 위해 다시 종이 인쇄물이 등장한다. 

결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던 BBC가 2029년을 끝으로 방송을 끝낸 날, 창궐하는 전염병 환자들을 난민 캠프로 보내 정부는 '자연스런 난민'들의 정리를 도모하는 '파쇼적' 결정을 내린다. 

결국은 세상은 '우리가 할 탓'이다 
그렇게 2029년을 보내던 날, 함께 모여 이제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암울함을 나누던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남탓', '세상 탓'을 하지만 결국 '너희들 탓'이라고 통렬하게 쏟아붓는다. 

어쩔 수 없는 작고 무기력한 존재라고 주저 앉아 있지만, 사실은 바로 그 작고 무기력한 너희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목화를 생산한 농부들에게 0.01달러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는 싼 티셔츠를 보고 거저네 하며 샀던 그 선택, 슈퍼에서 일하던 여성 대신 자동 계산대에 들어섰을 때 그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 선택, 심지어 편하게 생각했던 그 '편의주의', 비브 룩을 웃고 조롱했지만, 그녀에게 선뜻 손을 들어주고 열광했던 그 '선택'이 바로 오늘의 너희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세상에서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한 것이라고. 

 

 

피폭으로 인해 생의 마지막 길에 들어선 이디스,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빅토르를 구하러 한다. 아니 빅토르만이 아니라, 난민 캠프에 전파 방해를 하던 송신탑을 파괴하고 그 실상을 전세계에 전한다.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마지막 선택이다. 자신의 아이가 철조망에 가로막혀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가족의 '호구지책'이 될 수 없는 푸드 트럭을 몰고 철조망을 향해 로지가 달린다. 빅토르가 자신의 동생 대니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여 빅토르를 실종자 캠프로 보냈던 스티브는 죽음 대신, 자신이 알고있는 비브 룩의 비리 정보를 경찰에 보낸다. 

결국 2030년 비브 룩은 현직 총리 최초로 구속되고, BBC는 다시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9년으로 부터 2030년까지 장장 20여년에 걸쳐 영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위기, 그 위기 속에서 속절없이 희생자가 되던 가족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 그 '위기'로 부터 영국의 민주주의를 지킨다. 

6부작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리즈 안에 숨막히게 지나가는 몇 십년의 세월을 몰아넣은 <이어즈>는 결국 그것을 통해 오늘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능태'의 현실로 그려낸다. 마치 잠수함의 토끼처럼 나비가, 바나나가  멸종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각자도생의 삶에 빠져살던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방기한 결과물은 그 어떤 '스릴러'와 '공포물'보다도 무시무시하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할 것같은 미래의 모습이기에 더욱. 

물론 그렇게 공포스런 미래를 향해 질주하던 드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들의 손을 들어준다. 작고 무기력하고 자신들의 삶에 묻혀 살던 그 평범했던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결단과 모험에 자신을 던지고 그것이 결국 민주주의를 잠깐의 이상이 아닐 수 있도록 만드는 지 드라마는 '극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었지만, 괴물이 가고 또 하나의 괴물이 깨어났다는 에필로그의 대사처럼 언제나 '위기'는 또 다시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잠언처럼 남긴다. 드라마로 넘기기엔 엄숙했던 미래의 묵시록이다. 





by meditator 2020. 4. 21.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