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멍이 들고 온몸이 퉁퉁 부은 여자 아이가 편의점에 나타났다. 지난 5월에 발생했던 창녕 여아 탈출 사건이다. 머리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감금과 고문에 가까운 가혹 행위를 했던 이 사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아동 학대 사건, 2019년에만 43명의 아이들이 '가정 학대'로 인해 숨졌다. 2013년 6,796건, 2015년 11,715건, 2018년 24,604건으로 해마다 아동 학대는 늘고 있다.
지난 1998년 부모가 남매를 학대, 결국 죽은 딸은 마당에 암매장하고 발견된 동생 영훈이는 다리미와 쇠젓가락으로 인한 상처가 있었던 '영훈이 남매 사건,', 그리고 이어진 1999년 소아암에 걸린 신애를 방치한 사건은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고 가정 문제에 사회가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던 '관습'을 뚫고 20년만에 아동 복지법이 개정되었다. 유기와 방입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 아동학대 신고 1391이 개통되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아동 학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국가적 조처는 아직 역부족 그렇게 첫 발을 내딛은 국가적 조처는 2013년 칠곡 아동 학대 사건에서 방치한 친부에게 최초로 처벌을 했고, 2013년 갈비뼈가 16대 부러지도록 학대 당한 이서현 사건을 계기로 2014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아동 학대에 대한 특례법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2015년 친 딸을 굶기고 때렸던 인천 여야 학대 탈출 사건을 계기로 장기 결석 아동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안이 발의되고 특례법이 만들어 졌지만 아동 학대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에 정부는 전수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일선의 전문가들은 그에 따른 예산 부족과 인력 부족 등을 들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도 과중한 업무로 인해 이직율이 30%에 달하는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호 기관도 부족하다. 동네 노래방 숫자보다도 적은 보호시설, 현재만 해도 8천 건 정도가 '보호' 절차를 밟고 있지만 정작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갈 '시설'은 태부족인 것이다. 결국 '구조'된 아이들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분리된 아이들 중 겨우 13%만이 ' 시설 보호'를 받고 있다. 재학대 발생율을 증가할 수 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예산 중 0.03%의 저열한 수준, 전문가들은 이는 '국가적 방치'라 안타까워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대 발견 사례가 외국에 비해 1/3에 불과하다. 실제 학대 사례가 적은 게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가려진 '암수 범죄'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쉼터에 있는 20살 현석(가명)이는 4살 때부터 10여 년이 넘게 학대당했다. 삽으로, 소주병으로 맞았고, 변기에 머리가 쑤셔박혔다. '아빠를 죽여주세요'라며 기도했으나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집이 지옥인 아이들, 내 새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학대', 아이들은 가출을 하거나, 성인이 되어서야 지옥같은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회는 시선이 주목될 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언론도 이슈가 되는 사건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정작 그 '학대'당한 아이들을 누가 기르고 돌볼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아가, 왜 '학대'가 줄어들지 않는가, 어떤 상황에서 때리는가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체벌이 훈육? 학대의 시작은 어디일까? 학대 사건이 벌어지면 계부, 계모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작 대부분 학대를 하는 주체는 친부모일 경우가 78.5%이다. 가해 부모들은 놀라울 정도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고, 단 한 명도 내 아이가 미워서라고 안한다. 심지어 사랑해서 였다고 말한다.
과도한 훈육이었다고 말하는 '학대', 말을 듣지 않아서, 거짓말을 해서, '학대'할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부모들의 '사고'에 자리잡은 생각은 아이의 몸은 아이의 것이 아니며, 언제든 부모가 손을 댈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다큐가 만난 평범한 부모들은 고백한다. 위험하게 놀때, 혹은 독박 육아 과정에서 아이들이 컨트롤이 안될 때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게 된다고, 분노 조절이 안될 때가 있다고.
체벌은 우리 사회 부모가 배운 유일하다시피한 훈육 방법이다. 하지만 막상 훈육보다는 감정이 올라와 스스로 감정이 조절이 안돼서 손이 올라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훈육은 즉각적 명령 준수 효과가 있다. 그러기에 부모들은 나의 훈육 방법이 옳았구나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다시 상황은 반복되게 된다. 결국 체벌 효과는 없다. 그러나 '체벌'만이 유일한 훈육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부모는 더 강한 체벌로 아이의 잘못을 다스리려 한다.
과연 체벌이 훈육일까? 전문가들은 되묻는다. 이제는 동물도, 범죄자도 안맞는 세상에 왜 아이들이 맞아야 하냐고? 때리는 것만이 아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너때문에 못살겠다' 등등 부모들은 차마 타인에게는 입 밖에 내놓지 못할 말을 내 아이에게 한다. 상처주는 말 역시 정신적 학대다.
스웨덴 역시 한때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1971년 3살 여아가 학대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부모 및 그 누구라도 아이에 대한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했다.(1979)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은 대로 가르친다는 취지였다. 유엔아동 협약 보다도 10년 빨랐다.
일찌기 방정환 선생은 아이들을 어른보다 귀하게 보고 높게 대접하라 하셨다.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라 하셨고, 당연히 때리지 마라하셨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현재 여전히 우리 사회는 '훈육'이란 이름에 '체벌'이 아이들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건 특별한 범죄가 아니다. 결국 '내' 아이를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구시대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정부는 지난 6월 민법 915조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고자 나섰다. '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 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그간 법적으로 가정 내 체벌을 허용하는 근거가 되어 온 조항이다. 훈육으로의 체벌 금지, '가정'이 세상 전부인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만이 아니라 부모들의 '인식적 변화'가 확산되어야 할 시점이다.
공감 능력과 죄책감 결여, 낮은 행동 통제력,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에 기만, 이런 성향을 높게 나타내는 사람을 반사회성 인격 장애, 사이코패스라고 정의한다. <악의 꽃> 도현수의 어릴 적 친구라는 김무진 기자(서현우 분)는 도현수를 '사이코패스'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면 다 '살인범'이 되는 것일까? '사이코패스'면 무조건 다 나쁜 놈일까? <공항가는 길>, <마더> 등을 통해 관습적이고 통념적인 관계에 역설적인 질문을 던져왔던 김철규 피디가 이번에도 그 단어만으로도 '범죄'가 연상되는 '사이코패스'라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을 묻는다.
사이코패스의 과거 자타공인 '사이코패스' 도현수(이준기 분), 어릴 적부터 남들과 다른 행동 양상을 보였던 그는 이제 병원장인 백만우(손종학 분)와 약사인 공미자(남기애 분)의 아들 백희성으로, 그리고 차지원 형사(문채원 분)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금속 공예가로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아가던 백희성의 일상은 '도현수'를 알고 있던 김무진 기자의 등장 그리고 한때 도현수와 동거동락했다던 남순길의 죽음으로 인해 과거로부터 '도현수'가 소환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도현수, 그의 과거가 무엇이었길래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왔던 것일까? 2002년 연주시에서 발생한 6명의 살해 및 암매장 사건의 범인 도민석, 그는 도현수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상한 태도를 보이던 도현수를 아버지가 벌인 살인 사건의 공범이라고 의심한다.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도현수가 사라지던 당시 벌어졌던 이장 살해 사건의 범인을 도현수라 추정한다. 그로부터 18년 , 도현수는 여전히 이장 살해범으로 용의자 신분인 상태다.
김무진을 만나 본의 아니게 회고하게 된 '과거', 그곳에서 되새겨진 김무진과 도현수의 우정'은 우정이 아니라, 김무진에 의한 일방적인 '이지매' 현장이었다.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돌팔매를 맞아야 했던 도현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순길의 죽음에서 다짜고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연주시 연쇄 살인, 그리고 다시 한번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버린 도현수가 김무진의 부추김에 의해 자신에게 씌워진 살인 용의를 스스로 벗겨내기 위해 어릴 적 살았던 가경리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의 기억에 떠올려진 것은 아비처럼 귀신 씌워진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을 굿판에 던져져 '집단 린치'를 당했던 '트라우마'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데 서투르다, 혹은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진 '인간형'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그리고 아버지가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마을과 주변 사람들에게 '범죄자'로 낙인찍인 채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한 인물을 그려낸다. 거기서 그 인물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범죄적 행동은 드러나지 않은 채 '타자'의 시선, '타자'의 통념만으로 규정된 채 무리 밖으로 내쳐져버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누가 더 사이코패스일까? 도현수의 수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향에서 도망나와 일하게 된 중국집, 그곳에서 그는 남순길을 만난다. 3년 여를 같은 방을 쓰며 지내던 남순길, 하지만 그는 도현수가 모아놓은 천 만 원에 눈독을 들이고 그를 죽이려 한다. 오로지 자신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도현수를 죽이려는 남순길, 그의 공격을 피하려던 도현수는 그가 찌르던 칼로 남순길을 도리어 공격하려 하지만 결국 그 자신만이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도망치고 만다.
그러나 도망치던 도현수는 그만 빗속에서 백만우의 차에 치고만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백만우의 아들 백희성이 되고만다. 아직도 자신의 집 은밀한 곳에서 진짜 아들 백희성을 간병하고 있는 백만우 부부, 그런데 진짜 아들을 대신하여 백희성 노릇을 하는 도현수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않다. 모처럼 며느리 차지원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백만우 부부의 태도는 사이코패스라는 도현수보다 더 사이코패스 스럽다. 남순길 사건이 벌어지고 찾아간 어머니의 약국에서 어머니는 다짜고짜 백희성이 된 도현수의 따귀부터 올려친다. 아무리 편의에 의해 길렀다지만 길러진 정의 흔적보다는 오로지 도현수로 인해 자신들의 안위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길까 불쾌해 하기부터 하는 백만우 부부이다.
형사인 며느리로 인해 불편하다 못해 불안해 하는 어머니에게 도현수는 말한다. 차지원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남순길을 제압하고 칼을 들었을 때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악령'과도 같은 아버지의 모습, 그 아버지의 손에는 굵직한 개 줄이 쥐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현수가 쥔 그 칼로 어서 찌르라는 듯 그게 니 본성이라며 '종용'하는 듯한 미소를 띤다. 그렇게 늘 수시로 도현수의 눈 앞에서 도현수의 '본능'을 부추기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집요한 등장'을 차지원만이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줄을 쥐고 악령같은 기억으로 등장하는 친아버지, 새로운 신분을 제공했다지만 얼음장처럼 차갑다 못해 사사건건 자신들이 쌓아올린 사회적 명망에 오점이 될까 다그치는 의붓 부모, 돈 천 만원에 칼을 들이대는 동료, 도현수가 살아온 시간 속에 만난 인물들은 본투비 도현수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는 거침없이 도현수를 겁박하고 위협한다. 당연히 가장 의심스러운 도현수를 지켜보다 보니 도현수보다 더한 '위악적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는 <악의 꽃>이다.
도현수가 선택한 삶, 그는 차지원을 선택하여 자신의 '사이코패스'적인 범죄 욕망을 잠재우려 했다지만, 그는 그저 평범한 삶을 누리고자 한다. 아내와 딸과 함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영상을 보며 평범한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하고 그 누구보다 자상하고 헌신적인 일상을 꾸려가던 도현수, 하지만 그의 '소박한(?) 소망은 대번에 그가 도현수라는 걸 알아본 김무진의 등장으로 틈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은 그가 애써 꾸려온 가정, 무엇보다 그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 믿던 아내 차지원 형사와의 사랑에 '시련'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난 8월 1일 방영된 <코로나 200일의 기록 바이러스와 국가> 1부 병든 신세계를 통해 kbs1의 취재팀은 uhd카메라를 앞세워 세계 미국, 중국, 일본, 이탈리아, 브라질 등 7개국의 코로나 19 현장을 담아냈다.
코로나 19에 무방비하게 당하는 여러 국가에서는 입을 모아 대한민국의 사례가 등장했다. 발빠른 국가의 대처, 헌신적인 국민들의 참여로 그 어느 국가보다 신속하게 코로나 19를 '제압'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나라, 국민들 앞에서 여전히 '진실'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그 피해를 전가하는 많은 나라에 비하면 정말 우리나라는 자부심을 가질만 했다.
하지만 그 '자부심'만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다큐는 덧붙인다. 1부에 이어 8월 2일 방영된 <바이러스가 묻다>에서는 지난 200일 동안의 주요 사건과 핵심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혁혁한 성과' 이면에 우리가 자족해서는 안될 '교훈'을 남기고자 한다.
산술적 심각성보다 더한 심리적 불안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사상 유례없는 감염병의 등장, 정부는 우한 교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산 인근에 교민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일부 국민들과 아산 주민들은 반발했다. 민간 시설과 떨어져 물리적 위험성이 없는 상황, 하지만 산술적 심각성보다 백신조차 없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속 공포는 훨씬 더 컸다. 이는 바이러스의 공습은 객과적 데이터를 넘어서 우리 사회를 '정신적 아노미의 상황'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부의 발빠른 대처와 국민들의 협조로 코로나 19는 더 이상 확산을 멈춘 채 주춤했다. 28번 확진자 이후 더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자 정부는 위축된 경체 살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도 잠시 대구에서 확진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신천지'라는 종교적 맹목성이 더해져 8126명까지 코로나 19의 대유행이 다시 한번 우리 사회를 덮쳤다. 자택 대기 중 사망 환자가 등장하며 보건 의료 시스템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 다시 한번 정부와 국민들은 지혜를 모았다. 부족한 보건 의료 시스템의 문제는 대구 지역 환자 절반이 다른 지역에서 치료를 받게하는 한편, 중앙 연수원이 생활 치료 센터로 활용되며 보건 의료 시스템의 위기를 돌파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간 병원이었던 대구 동산 병원이 '이익' 대신 지역 코로나 '노아의 방주' 역할을 자처하며 이타적 결정으로 위기에 빠진 대구 보건 의료 시스템에 물꼬를 텄다.
의병만으론 안된다. 코로나 팬데믹의 그림자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에 앞장섰던 전문가들, 자원 의료진들은 입을 모아 그런 일련의 대처 과정이 '운이 좋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참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한 달이 넘게 대구 현장에 있었던 의료진, 매일 환자를 보러 갈 때마다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나섰던 사람들,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가 또 다시 이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지난 200일의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이들에게 내려진 지침은 '무조건 희생하라'였기 때문이다.
즉,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던 이유는 '헌신적인 의병'과도 같은 의료진들과 지역 의료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구'였기에 가능한 '운좋은 상황'도 놓쳐서는 안된다. 의대만 4곳, 다른 지자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상 자원이 많았던 대구, 그럼에도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을 맞이했었다. 그 위기를 메꾼 건, '공식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자원 봉사'라는 비공식적 관계, 미약한 시스템을 '의병'들이 몸을 던져 막은 것이다. 그러기에 '시스템'의 구축되지 않는 한 다시 또 이런 운좋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르다고, 또 다시 있을 지도 모를 이런 상황에 '정규군'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자원했던 의료진들은 입을 모은다.
또한 그렇게 의병과도 같은 헌신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우리 보건 시스템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청도 정신병원에서 대거 발병한 코로나 19, 대남 병원으로 부터 시작된 코로나 19에 대해 국민들은 그 병원을, 그곳에 입원한 사람들을 우리 사회에 대한 '악마화된 가해자'처럼 여겼다. 당장에 위협적인 코로나 19 감염 사태에 대해 정신 질환 환자에 대한 '수용소'와도 같은 장기 입원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 볼 '여지'는 없었다.
'수용소'와도 같이 환자들을 한 방에 다수 기거하게 하는 등 정신 질환 환자들에 대한 장기 입원 문제는 그간 우리 의료계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수십년된 문제였지만 사회적 관심은 이번에도 없었다. 심지어 이들에 대해 소독업체도, 도시락 업체도 거절을 하는 등 '터부'만이 강하게 작동하며 '코로나 19'에 얹혀 정신병원에 대한 편견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공평하지 않았던 감염 정신 병원에서의 집단 발병에서 숨겨져 있는 편견이 드러나는가 하면, 구로 콜센터와 물류 센터 집단 발병은 코로나 19가 우리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시작은 한 사람의 거짓말이었다. 확진자가 줄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느슨해 질 시점 이태원 클럽에 다녀간 사람들로 부터 150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감염병 관리 지원단은 접촉자를 파악하고 방역을 통해 더 이상의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학원 강사로 일했던 경력을 숨긴 확진자의 거짓말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한 학원 강사의 거짓말로 부터 시작된 집단 감염은 올해 수능을 앞둔 수험생에서 부터 대형 물류 센터 직원들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스크도 잘 쓰고, 장갑도 잘 끼고 공공시설 이용도 안했는데 억울하다'는 물류 센터 확진자, 결국 그녀의 감염은 아이와 남편까지 이어졌고 결국 남편은 생명의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152명의 대규모 감염, 하지만 이 결과에 대해 이 대형 물류 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을 보인다. 코로나 19로 인해 확산된 '언택트'한 생활, 물류 센터의 배송 물량은 180만 건에서 300만 건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결국 시간에 맞춰 배송을 하기 위해 빨리 빨리 실적 위주의 배송 과정이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역에 이익은 국민 모두가 누린다고 정부는 장담했지만 '호구지책'이 우선하는 저소득층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구로 콜센터 감염도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탄 화물 엘리베이터로 부터 시작된 대규모 감염,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콜센터 업무는 '사회적 격리'와 '언택트'를 표명한 코로나 19 방역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전문가들은 지난 200일 우리가 '성공'이라 자찬한 코로나 19에 대한 성공적인 방역 에는 보건 의료적인 측면과 사회 경제적인 측면의 두 얼굴이 있다고 지적한다. 청도와 대남 정신 병원의 대규모 감염 사례를 통해 보건 의료 방역 시스템의, 그리고 쿠팡 물류 센터와 구로 콜센터의 집단 감염에서는 사회 경제적인 시스템의 그림자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피해는 언제나 그랬듯 취약 계층에 집중되었다. 시스템의 틈, 그 틈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서는 언제 어디서든 또 다시 대규모, 집단 이란 황망한 결과를 받아들 수 밖에 없다고 다큐는 결론 내린다.
엄마에게 '아이'는 또 다른 '나'이다.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의 엄마 재키는 아들 안젤로에게 자신의 '질'을 통과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굳이 그 과정이 아니더라도 '아이'라는 한 생명이 탄생되기까지 '정자'의 역할을 제외한, 피와 살과 뼈가 이루어지는 과정 전체는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그러기에, 엄마는 아이를 세상 밖에 내놓아도 언제나 또 다른 나를 대하듯, 나의 일부로서, 그리고 나를 통해 등장한 새 생명에 대한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동일시'와는 다르게 엄마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한 생명으로 서고 자라난 '아이'는 어느덧 독립적 인격체로서 무럭무럭 성장해 가고 독자적인 삶을 향한 지향과 열망을 가지게 된다. 밤새 잠안자고 보채던 시절, 엄마의 사생활 따위 아랑곳없이 보살핌이 필요한 시절 '나의 시간'을 갈구했지만, 그런 갈증이 무색하게 어느덧 자란 아이는 '엄마'라는 둥지를 떠난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가고자 한다.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 티캐스트
둥지에서 떠난 아이, 하지만 여전히 아이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엄마는 '빈둥지'를 감싸안고 허탈한 공황에 빠지고 만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바로 그렇게 '빈둥지 증후군'에 빠진 엄마에게 이 여름, 배우이자 감독인 헬렌 헌트가 새로운 둥지를 권한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한 둥지를. 꼭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만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갈 길을 잃은 그 누군가라도 이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엄마라는 둥지에서 날아가 버린 아들 재키(헬렌 헌트 분)는 엄마이다. 그런데 이 엄마 이상하다. 아들 앤젤로의 방문 앞 그곳이 재키의 잠자리다. 아직 앤젤로가 어린 시절 엄마 앤젤로는 아들의 방문 앞에서 책을 읽다 잠을 청한다. 아직 어리면 어려서 그렇다 치지만 그런 재키의 잠 버릇?은 앤젤로(브렌튼 스웨이츠 분)가 이제 대학을 가게 된 스물 살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심지어, 집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대학으로 들어가 기숙사로 옮기게 된 상황에 '멘붕'에 빠진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그렇게 불면 날아갈세랴, 꺼질세랴 불철주야 지키던 아들이 사라졌다. 이혼한 전 남편이 사는 LA로 입학 전에 잠시 휴가를 떠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 떠난 것이다. 당연히 재키에겐 청천벽력이다. 엄마 재키는 아들을 찾아 LA로 떠난다.
LA로 떠나는 재키, 그런데 이 재키의 여행은 그녀에게는 보통 도전이 아니다. 뉴요커로 오랫동안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그녀는 '워커홀릭'이었다. 남들이 다 가는 휴가 한 번 안가고 헬스장에서도 원고 교정을 보던 그녀에게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살던 곳을 떠난 아들 찾아 가는 여정 자체가 버거운 도전이다.
아들을 찾아 도착한 LA, 미행을 하듯 따라다니다 결국 마주치고 만 아들은 외려 엄마에게 큰 소리다. 자신은 작가가 되려고 하고, 작가는 꼭 대학을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여유로운 LA 바닷가에서 '알바'나 하면서 글을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 아들에게 '대학'에 가지 않고 작가가 되었지만 말년이 불행했던 작가들의 목록을 줄줄 외어보지만 아들은 요지부동이다. 심지어 뉴요커에 워커 홀릭인 엄마를 비웃는다. 서핑 한번 해보지 않은, 아니 수영을 해도 물에 머리 넣는 것조차 하지 않는 엄마가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엄마의 불철주야 그 지독한 모성애가 숨막히단다.
엄마라는 둥지에서 당당하게 떠나버린 아들, 심지어 그동안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던 둥지가 자신을 겁박했다고 고백하는 아들, 그 상황에 대해 엄마 재키는 뜻밖에도 서핑을 배우기 시작한다. 편집자로서 작가 지망생인 아들의 글에 시시콜콜 간섭을 하던 재키에게 아들이 그토록 좋다던 서핑에 대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이, 그걸 빌미로 자신을 무시하는 아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아들 앞에 서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으로 서핑을 시작하는 재키.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 티캐스트
하지만 물 위에 서프보드를 띄우고 서면 될 것같은 그 만만해 보이던 서핑, 하지만 서프 보드에 올라타는 것조차 '난관'이다. 그래서 바닷가에서 만난 이언(루크 윌슨 분)에게 서핑을 배우며 아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날을 기대하는데 녹록하지 않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락이 두절됐다는 이유로 그토록 오랫동안 휴가조차 가지 않은 채 일해왔던 직장에서 '해직' 통보조차 받게 되고 만다.
결국 아들이 머물고 있는 남편의 집을 찾아가 폭발하고 마는 재키, 그 과정에서 재키의 '편집증적'인 모성애가 드러난다. 사실 앤젤로가 재키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었던 것. 앤젤로의 위에 형이 있었고. 그 큰 아들은 앤젤로가 어린 시절,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에 대해 재키 부부는 서로에게 '원망'을 했고, 재키는 남은 아들 앤젤로에게 '집착'에 가까운 모성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큰 아들이 죽고 남편과 이혼을 한 후 오로지 남은 아들을 지키고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 조차 없이 일만 하던 재키, 아들을 찾아 LA로 온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 왔던 '삶의 루틴'에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바다로 간 엄마 재키는 파편만 남은 빈 둥지에서 망연자실하는 대신, 바다로 향한다. 아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려고 시작했던 서핑이었지만 이제 직장도 잃고, 아들도 잃고 그녀에게 어느 덧 '위로'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서핑을 가르쳐 주던 '이언'도 함께.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재키는 벽장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LA의 바다로 온다. 서프 보드를 타고 바다로 나간 재키, 상자 속에 들었던 오래 전 죽은 큰 아들의 흔적을 바다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찾아와 뉴욕으로 돌아가겠다는 앤젤로에게 엄마는 이곳 LA의 바다에 남을 것을 전한다. 이제 더 이상 아들을 지키려고 안달하던 엄마는 없다.
아들 앤젤로와의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어쩌면 재키는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큰 아들의 빈둥지로 인한 상실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편집증적으로 고군분투해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 밤 아들의 방문 앞에서 책을 보다 지쳐 잠이 들며 지나왔던 시절은 앤젤로를 무사히 키워냈지만, 이제 성인이 된 앤젤로에게는 더 이상 방문 앞을 지켜주던 엄마 재키는 필요치 않았다.
꼭 재키가 아니더라도, 엄마들의 숙명, 다행히도 재키에겐 아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어느덧 그녀를 매료시켜버린 바다가 다행히도 있었다. 수영장에서도 머리가 헝클어질까봐 물 속에 머리를 담그지 않던 재키는 이언에게 서른 일곱이라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머릿빨'없는 나이든 모습을 바닷물 속에 여실히 드러내고 만다. 하지만 바닷물에 머리가 다 들러붙건, 파도에 얼굴이 한껏 우겨지건 말건, 이제 재키에겐 그게 중요치 않다. 파도에 휩쓸려 나동그라져도, 그 파도 속에서 한껏 느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인, 존재에 대한 확신, 그것만으로도 재키는 충분히 족해보인다. 거기에 자신을 지지해 주는 남자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 티캐스트
빈둥지 증후군,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왔던 엄마들에게는 불가피한 통과 의례다. 늘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왔던 삶,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시간, 자신에게도 돌아가야 할 시간, 그곳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엄마들, 사람들에게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이 주는 '힐링'은 담백하고 명쾌하다.
이제 한껏 파도를 타는 재키, 그 자체만으로 가슴이 확 뚫린다. 문득 나도 올 여름 나이가 무색하게 서핑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솟는다. 하지만 꼭 서핑이 아니더라도 어떠랴. 내 곁에도 서핑처럼 이미 내가 열중하고 있는 무엇이 있을지. 한동일 씨의 <라틴어 수업>에 '삶의 여집합'이란 말이 나온다. 나를 상실감에 빠뜨린 삶의 그 무엇, 하지만, 돌아보면 나를 슬프게 하는 그 무엇을 제외한 삶의 여집합이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삶의 나머지, 여집합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 그게 삶에 대해 오만하지 않은 태도라고 작가는 말한다. 아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이제 자신의 것이 된 서핑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있는 표정으로 타는 재키, 그녀처럼 우리도 자신의 '서핑 보드'를 챙겨 볼 일이다.
2019년 12월 30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 시에서 원인모를 질병이 발명했다. 해가 바뀌어 1월 9일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코로나 19 발생 200일, 지금까지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은 1610만 명, 아직도 하루에 20만 명의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 19, 21세기의 판도를 바꾼 감염병, 그 '팬데믹' 현장의 기록을 kbs가 전한다.
국가는 어디에 있나? '기껏해야 감기 정도'라고 장담했던 자이르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에 바이러스는 존재치 않는다'는 정부는 마스크를 쓰기를 권고하거나 외출을 자제하도록 권유하지 않았다. 심지어 3월 15일에는 그런 정부 입장을 지지하는 관제 시위까지 등장했다. 5월 11일에는 창궐하는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보건부와 협의도 하지 않은 채 가게들의 영업 재개를 허용했다.
그런 안이한, 거기에 한 술 더 떠 대기업을 위한 경제 살리기에만 정부의 대처는 결국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누적 확진자 270만 명, 전체 도시 중 98%가 코로나 19에 노출되는 통제 불능 상황을 맞이했다. 특히 그 피해는 빈민촌에 집중됐다. 빈민촌의 사망자는 방치되었다가 27시간이 지나서야 수습되는가 하면, 걷잡을 수 없이 느는 사망자로 인해 숲을 밀고 집단 매장지를 긴급하게 마련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자신이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더 이상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정부를 견딜 수 없는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이탈리아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지난 2월 이탈리아 북부에서 원인을 알수 없는 환자들이 급증한 이래 보건당국은 상황을 낙관하며 봉쇄나 출입국 제한 등 대처에 늑장을 부렸다. 치료 장비 부족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거나, 노인 환자들의 호흡을 돕기 위한 헬멧을 벗겨 다른 환자에게 씌워주는 의료 시스템의 붕괴 상황에 봉착했다.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은 성당에 누워있고, '죽어도 괜찮은 나이는 몇 살인가'라며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정부에 항의했다.
세계 제 1의 국가면 뭐하나 브라질과 이탈리아 상황이 보여준 것은 결국 전염병이라는 비상 상황에 있어 국가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역할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 것은 바로 세계 제 1의 국가라 큰 소리치던 '미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혀 문제 없어요'라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 3월 22일 뉴욕시가 봉쇄되었다. 의료 시스템은 속수무책이었다. 장비도, 병상도, 관리할 사람도 없었다. 시신을 우선 보관할 냉동 트럭까지 등장했다. 가족이 없는 시신들은 뉴욕 인근 작은 섬에 매장당했다.
이게 세계 제 1의 국가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벌어진 일이다. 여행 유투버인 발레리는 안전하니 밖에 나가도 된다는 대통령의 감언이설에 맘 놓고 해외 여행을 하다 코로나 19에 걸렸다. 책임감없는 리더쉽은 그 피해가 바로 국민 개개인에게 전가된다. 급증하는 환자, 대처 능력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성급하게 하이드락시 클로로퀸의 치료제로서의 효과를 장담했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은 약품이었다. 반면 발 빠른 대처의 기본이 되어야 할 진단 키트의 승인이 늦어져 기하급수적 감염을 조장했다. 데이터와 과학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정부, 결국 15만 명의 사망자, 전세계 코로나 19 환자 5명 중 1명이 미국인이라는 최대 감염국의 오명을 받아들었다.
반면 중국의 경우 '공산당의 권위주의적 정책'이 중국민의 피해를 막지 못했다. 12월 30일 우한 건강위에 원인모를 질병 발생이 보고된 이래, 1월에 첫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춘절과 겹쳐 대처가 늦었다. 1월 23일 봉쇄된 공항, 하루 아침에 1108만 명이 도시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코로나 19 확산 과정에서 사망자는 속출했지만 전염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던 의사는 외려 거짓 유포 혐의로 곤혹스런 처지에 바졌다. 확진자 발표 21일 후에야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정부, 이에 대해 정부는 지방 정부에서 중앙 정부로 이어지는 보고 체계의 권위주의적 관료 시스템이 발빠른 대처를 막았다며 뒤늦은 변명을 한다. 거기에 검열과 투명성 부재의 공산당의 의사 결정 과정이 피해를 가중시켰다. 전문가들은 안타까워한다. 시진핑은 3월 10일 우한을 방문하여 승리를 선언했지만 3주만 중국 정부가 일찍 행동했어도 확진자의 95%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무엇이 중요한가? '생명을 지켜줘', 일본 국회 앞 시위 대열에 참석한 일본 시민들이 든 피켓의 문구이다. 기업 캠페인에 돈을 몰아주고, 올림픽 유치에 목을 거는 정부로 인해 국민의 생명과 삶이 위협받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늑장 대처와 소극적 검사. 이것이 일본 정부가 코로나 19에 대한 대처이다. 3월 6일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 승무원 20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18일간 700여 명이 될 때까지 방치했다. 이 사태를 보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어떻게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저런 일이!
일본에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으려 하지 않으면 코로나 19 감염 확진을 받기 어렵다. 37.5도 이상 발열 나흘 이상이거나 폐렴 증상, 동맥혈 산소 포화도 93% 이하 등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는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현저하게 낮은 검사 건수, 당연히 확진자 수가 낮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진자 수를 의도적으로 낮추려는 일본 정부의 얕은 수에도 불구하고 7월말 도쿄 일일 확진자 수가 1000 명을 넘어섰다. 시민들은 정부가 재해마저 돈으로 사려 한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게임의 카드처럼 불성실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스웨덴의 경우는 정부가 코로나 19에 대해 다른 국가들과 다른 실험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스웨덴 정부, 봉쇄나 영업 금지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당연히 마스크나 손소독제를 구하기 조차 어렵다. 스웨덴에서는 외려 마스크를 쓴 사람을 무서워할 지경이다. 자국의 의료 역량을 고려하여 선제적 방역 대신 선별적 방역을 실시하고, 의료계가 감당할 수준에서 노인과 위험 집단을 보호해 왔던 스웨덴 정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 19의 환자가 줄어가고 있는 즈음에도 10만 명당 확진자가 100 명을 넘어 독보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5월에만도 70%의 신뢰를 얻었던 공공 보건 정책은 이제 그 신뢰도가 57%로 떨어진 상황, 조금 더 일찍 검사를 실시하고, 조금 더 일찍 마스크를 섰더라면 조금 더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지 않았을까라는 국민들의 실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초기에 감염자 수 등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알릴 시 당연히 시민들의 불안감은 고조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정부 정책의 투명성과 신뢰를 담보하여 이후 감염병 정책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행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가 입을 모아 부러워하는 우리나라이다. UHD 카메라로 생생하게 전한 팬데믹의 현장, 결국 그곳에서 만난 건, '국가'이다. 전세계의 역사를 바꾼 코로나 19 팬데믹, 그 과정에서 국가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국가의 늑장 대처, 혹은 책임의 회피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감염병이라는 공통의 적, 하지만 국가의 선택이 국민들의 운명을 갈랐다.
지난 5월 17일 첫 방송을 연 <바람과 구름과 비>가 21부작으로 7월 26일 막을 내렸다. 평균 5%를 넘는 시청률로 수려한 연출, 그리고 모처럼 만나본 일관성있는 작품의 전개는 그동안 작품성있는 사극에 목마른 시청자들의 갈증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이병주 원작의 소설을 21부의 드라마로 각색한 <바람과 구름과 비>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왕좌의 꿈을 꾸었던 점바치 최천중의 야심으로 시작된 원작 소설을 강직한 강화군수인 아버지를 둔 양반가 자제였지만 권문 세가의 야욕에 희생되어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린 최천중(박시후 분)이란 인물로 새로이 각색해내며 시작되었다.
과거에 급제했던 총명한 선비였으나 요절할 운명이라는 산수도인의 예언으로 인해 관직에 나가는 대신 강화 군수인 아버지를 돕는다. 그러나 장동 김문의 모략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자신도 생명이 위태롭게 된 최천중은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사주 명리학'을 무기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한양에 나타난 최천중은 그의 세 치 혀로 권문세가 김문은 물론, 대왕대비 조씨, 그리고 상갓집의 개처럼 지내던 야인 대원군(전광렬 분)을 사로잡는다.
자신을 멸문지화로 삼은 장동 김문에 대해 복수를 하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제대로 된 권력을 세우겠다던 포부를 가지게 된 최천중은 진정 백성을 위하는 왕을 옹립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의 눈에 띈 왕재는 바로 대원군, 그리고 그의 아들 고종이었다. 마치 '도원결의'를 하듯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대원군과 손을 맞잡은 최천중은 그 누구보다 앞장서 고종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권문 세가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런 그의 꿈은 그가 도운 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내세우며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해가며 갈등을 빚는다. 또한 왕권에, 아니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을 집중하고자 하는 대원군의 눈에 가난한 백성들을 도우려 동분서주하는 최천중은 동지처럼 여겨졌지만, 최천중이 만든 '삼전도장'에 갈곳없는 백성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최천중을 '왕'처럼 의지하자 '권력'의 위험 요소로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대원군이 탄압하는 천주교인에 외국인까지 최천중의 그늘로 숨어들자 대원군의 의심은 극에 달한다. 최천중의 '애민심'이 대원군의 눈에는 또 다른 권력 의지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옹립한 대원군 암살에 나선 최천중 결국 대원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 최천중은 그를 피해 외유 생활 3년을 거친 후 돌아와 자신이 옹립한 권력 대원군을 '척결'하고자 한다. 그를 위해 '명성황후'가 되는 민자영을 돕는 한편, 중신들과 대비와 도모 대원군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가 최후에 선택한 방법은 비록 명리학에 밝은 그가 보기에 대원군의 세상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의 치하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더는 놔둘 수 없어 그 스스로 대원군을 제거하는 것이다.
21회, 영길리에서 배운 기술을 통해 대원군의 잔칫상에 놓인 거문고에 화약을 숨기고, 거기에 술을 흘려 폭발을 시도한 최천중, 하지만 '대의'를 앞둔 그의 눈 앞에서 어린 소녀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 다시 뛰어들어가 거문고를 멀리 던져 버린다. 화약은 폭발했지만 최천중이 던져버린 덕분에 대원군은 목숨을 구하게 되고 최천중은 팔과 다리가 잘린 채 효수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자신이 벌인 '암살 시도'를 스스로 무위로 돌려버린 최천중, 이 어이없는 상황은 주인공 캐릭터의 '자멸'이었을까? 아니 외려, <바람과 구름과 비>는 사실인 '역사' 속에서 가상의 영웅 최천중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
앞서 20회, 궁정에서 대원군을 축출하려던 최천중은 그의 의도를 누설한 김병학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그런 최천중에게 자신과 다시 한번 함께 할 것을 권유하는 대원군, 그런 대원군의 명에 따라 최천중은 병인양요가 일어난 강화로 향한다. 대원군의 청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전쟁터로 가겠다는 최천중은, 처형장에서 죽을 위기에 놓인 오랜 그의 연적 채인규(성혁 분)를 동행한다. 그리고 그의 도주를 눈감아 준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그 누구라도 더는 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최천중의 생각은 오랫동안 그를 죽이려고 했던 옛 벗 채인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최천중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오른팔과 다름없는 용팔용(조복래 분)을 잡아간 대원군의 앞에 최천중은 그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무릎을 끓는다. 그런 최천중이었기에 대원군의 목숨이라는 대의 대신, 기꺼이 희생양이 될 뻔한 두 소녀의 목숨을 앞세운 것이다. 지금까지 '대의명분'을 앞세웠던 '역사적 인물', '영웅'이라고 한 사람들의 행보와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대원군을 암살하러 갈 때에도 그 스스로 앞장섰던 최천중은 자신이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그와 함께 했던, 그를 따랐던 사람들을 도피시킬 장소를 마련해 놓는다. 그런 그들이 힘을 합쳐 최천중을 구했지만 그들을 마련한 연해주로 보내고 홀로 대원군을 찾아가 마지막 총구를 겨눈다.
실패한 영웅, 최천중의 길 그 마지막 대결에서 최천중은 한때는 뜻을 함께 했지만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길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대원군이 '왕권' 중심의 '왕권 강화'를 일관되게 고집하고, 그를 위해 다시 한번 자신과 손을 맞잡을 수 없겠냐며 애증의 권유를 최천중에게 했지만, 최천중은 말한다. 이제야 자신은 진정한 '왕재'를 보았다고. 늘 최천중이 다른 권력에 대한 야욕이 있을까 두려워했던 대원군은 그 말에 눈이 번쩍하지만, 최천중이 말한 '왕재'는 다름 아닌, '민중', '백성'이었다.
명리학을 통해 권문 세가를 징벌하고 백성들을 위한 왕으로 고종과 그의 아비 대원군을 도왔던 최천중, 강화의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애썼던 강직했던 아버지를 도왔던 이래, 최천중의 화두는 늘 '백성'이었고, 그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숱한 시행착오 끝에 그가 도달한 곳은 더는 일개인의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는 '백성'들이 주체가 되는 '나라'였다. 왕조국가의 '지양', '민주주의'에 대한 '자생적'인 깨달음이자 '지향'을 '선포'한 것이다.
끊임없이 백성들을 위한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대원군도, 명성황후도 도왔지만, 그들이 결국 도달한 곳은 '백성'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며 <바람과 구름과 비>는 최천중이라는 이상적인 개혁가를 통해 '민주주의의 탄생'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저 '예언'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살리려 하는 한 사람, 비록 그가 자신의 적이었던, 지나가다 본 가엾은 가족이었든, 혹은 적을 죽이러 들어간 암살의 현장에 등장한 소녀였든 그 한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경애에 대한 '실천'을 일관되게 실천하며, 민주주의 주체가 진짜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역사적 사실을 빗겨갈 수 없듯이 가상 인물인 최천중에 의한 대원군 암살은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실패였을까?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거둔 최천중은 그가 일찌기 마련해 놓은 연길리의 조선인 마을로 돌아간다. 이미 그곳에는 그를 따르던 삼전도장 사람들이 '마을'을 일구고 그가 미리 써놓은 '지침'에 따라 이제 '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 결국 '조선'이라는 난파선에서 최천중이라는 부표를 따라 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으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그들만이 아니다. 강화도에서 그가 살려준 소녀의 이름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여사였다. 그렇게 '최천중'은 이제 망해갈 조선을 구하기에 앞장 설 독립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고 드라마는 덧붙인다. 이렇게 <바람과 구름과 비>는 그간 역사물이 말해왔던 '영웅'과는 다른 영웅담을 논한다.
최천중은 실패했다. 그는 백성을 위한 권력을 옹립하지도 못했다. 그가 도운 대원군도, 명성황후도 결국 자신들의 권력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야욕에 눈이 멀어갈 때도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최천중은 최후의 수단으로 대원군을 '암살'하려 했지만 그 마저도 실패했다. 정말 그가 실패한 것일까? '거사'는 실패했지만, 최천중은 망해갈 조선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했다. 그런 최천중의 실패한 성공을 통해 <바람과 구름과 비>는 권력의 쟁취가 목적이 아닌 진짜 영웅에 대해 묻는다. 소의를 위해 대의를 희생하는 영웅, 대원군 시대라는 역사를 통해 길어낸 '우리 시대'의 영웅, <바람과 구름과 비>였다.
우리나라 가족 드라마에는 일종의 '전형'이 있다. 가족에게 닥친 어려움, 경제적이거나,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거나 하는 '위기' 상황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은 '위기'를 기회로 다시 뭉친다. 얼굴 붉히며 싸웠더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을 모아 가족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그 함께 위기를 돌파하는 것으로 '가족'의 갈등은 어느 틈에 얼음이 녹듯 풀어지고 가족들은 함께 웃으며 그래도 '가족'이 최고여~ 하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만으로 그간 가족 간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 역시 가족이 행복하게 함께 웃으며 16회의 막을 내렸다. 그런 면에서는 여느 가족 드라마의 엔딩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함께 웃음에 이르는 그 과정의 해법은 그간 우리나라 드라마가 추구했던 방식과 다르다. 모두 함께였던 그간 가족 드라마와 달리, <가족입니다>는 단호하게 말한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제대로 서야, 개개인이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먼저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에 방점이 찍힌다.
엄마가 떠났다 15회 마지막 장면, 엄마 진숙씨(원미경 분)는 가족들을 불러모은다. 저녁 시간, 예전 같으면 '엄마표 음식'으로 그간 엄마의 음식에 적조했던 가족들을 불러모아 한 끼를 챙겨먹이느라 애썼을 엄마가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고 오라 말한다. 한 명씩 찾아오는 은주(추자현 분), 은희(한예리 분), 지우(신재하 분), 세 명의 자식들을 앉혀놓고 엄마는 그간의 쌓인 감정을 폭발한다.
은희가 헤어진 애인때문에 언니를 찾아갔을 때 언니가 날린 '팩폭' 때문에 무려 5년 동안이나 언니와 '의절' 아닌 의절을 했을 때도, 은주가 이혼을 했을 때도, 그리고 이제 막내 지우가 일언반구 말도 없이 집을 나갔을 때도, 그곳에 엄마, 아빠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마다 엄마의 가슴은 미어졌지만, 그렇게 무너져내리는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식들은 엄마에게, 아빠에게 의논 한 자락없이 늘 일방적으로 자신의 일을 결정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엄마는 '너희에게 가족은 뭐니?'라고.
엄마가 이렇게 그간의 설움을 폭발하면 나머지 가족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막내는 대번에 무릎을 끓었다. 그런 막내에게 아버지는 당장 집을 나가라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 은주도, 은희도 자신들에게 서운함이 켜켜이 쌓인 엄마의 마음을 풀고자 애쓴다.
이 '일반적인 가족들의 노력'이라는 해법으로 여느 가족 드라마가 가는 '해피엔딩'의 길을 걸어가는가 싶었는데, <가족입니다>는 다른 선택을 한다. 엄마가 떠난 것이다. '졸혼'에서 한 발 더 성큼, 엄마가 가방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1년 여, 엄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버텨내기 위해 자신을 버렸던 시간을 스스로 치유한다. 엄마의 버킷 리스트, 정처없이 떠나고 싶던 그 마음을 실천한 것이다.
모두가 집을 떠났었다. 결혼을 하고, 혹은 독립을 하거나, 이제 막내는 '가족'이라는 부담스러움을 피해, 그리고 아버지 상식 씨는 '졸혼'을 하겠다는 엄마의 의견을 존중해 집을 나섰었다. 모두가 떠났을 때도 엄마는 집을, '가족'을 지켰다. 그런 엄마가 이제 떠났다.
은주를 가지고, 은주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상식 씨와의 결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변해버린 상식 씨을 견디며 아이들을 품으며 가족을 버텨냈던 엄마, 그 시간은 결국 엄마에게 '졸혼'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결정하도록 했다. <가족입니다>는 '졸혼'에 이르기까지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친 엄마에게 스스로 '치유'의 시간을 준다. 가족으로 부터 받은 상처를 가족들로부터의 '위로' 대신 이제 엄마 스스로 한 사람으로 온전히 서는 것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가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웠던 엄마가 스스로의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시간이다. 그리고 엄마가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친 자신을 발길 닫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동안, 남은 가족들은 '집'을 지킨다.
엄마만이 아니다. 사라져 버리려던 막내는 그 이유를 큰 누나처럼, 혹은 작은 누나처럼, 누나들에 휩쓸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자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같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누군가 스스로 물음을 던졌던 막내 지우는 비록 '사기'에 휘말렸지만 '가족'을 떠나 온전히 '자신'만으로 서보려고 했다.
따로 또 같이 지나왔던 시간 동안 '자신의 비겁했던 열등감으로 인해 가족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태도고 일관했던 아버지가 '회개'하며 찾아온 엄마와 아빠의 '해빙 모드',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섣부르게 '졸혼'을 뒤엎지 않는다. 서로가 '졸혼을 해도 아이들의 부모라는 점에서는 '세트'라는 사실에 공감했지만, 아버지가 다시 지게차 운전 자격증을 따고, 엄마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며 서로가 당당한 사람으로 서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남이가?"가 아니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원심력으로부터 가족이라는 구심력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우리 사회는 늘 공동체라는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용해시키는 것을 우선하는 시절을 지내왔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세대에서 이제 더는 공동체가 개인의 행복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없는 시절이 되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삶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없는 시대, 이제 가족도 변해야 한다고 <가족입니다>는 말한다.
아버지는 그간 엄마에 대한 오해를 풀었지만 '졸혼'을 선택한 엄마를 존중한다. 평생 부부로 살면서 하지 않았던 '존중', 그로 인해 나무 등걸처럼 딱딱해진 부부 관계의 굳은 살이 조금씩 풀어진다. 시작은 연민이었다. 어느 틈에 늙고 병들어 버린 배우자에 대한 연민, 하지만 여느 드라마들이 '연민'으로 퉁쳐버린 노년의 삶을 <가족입니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연민을 바탕으로 한 '존중'으로 끌어 올린다. 1년 여를 집을 떠나 떠도는 아내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아버지의 기다림에 엄마는 가족 여행을 가자는 아버지의 소원에 응답한다. 나이든 부부가 서로가 불쌍해서 함께 산다는 흔한 '화해'를 넘어 나이가 들어도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드라마는 결론을 내린다.
서로 배다른 형제였다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을 알게되고 서먹해졌던 3남매의 관계는 끈끈한 핏줄 대신 의절을 할 만큼 이해할 수 없었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연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은주와 은희 자매는 은주가 홀로 감당하기 힘든 '이혼'의 과정에서 은희의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경계를 풀기 시작한다. 거기에 본인은 비난이 아니라 정당한 지적이라고 하지만 늘 동생들에게는 가차없이만 느껴졌던 은주의 '거리감'은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이질감의 벽을 허물자 그 속에 담긴 '진심'의 무게로 전해진다.
하지만 제 아무리 어려운 시간을 곁에 있어줄 수 있지만 각자 삶의 과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세 남매 각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가족입니다>는 양보하지 않는다. 은주의 이혼, 은희의 복잡했던 연애사와 일, 그리고 지우의 도발적인 가출, 모두에 세 남매는 때론 힘이 되어주고, 달려가 줄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 일 뿐이다.
그렇다면 각자도생해야 하는게 가족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각자도생'의 과제가 '가족'의 해체는 아니라고 드라마는 힘을 주어 말한다. 가슴 속에 앙금이 남은 채 '졸혼'을 한 어머니는 행복했을까? 남편 태형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리감으로 시달리던 은주가 외려 이혼을 한 후 전남편 태형과 편하게 대화를 하고 웃을 수 있듯이, 서로가 온전히 스스로 지켜낸 자존에서 부터 관계는 시작되어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어머니를 활짝 웃으며 반길 수 있는 각자의 건강함이 모여 아는 건 별로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tv조선의 토,일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는 유일한 사극으로 5%대의 안정적 시청률을 확보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7월 19일 5.1% 닐슨 코리아 ) 이병주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10 권 분량의 방대한 내용을 21부작 드라마로 압축하여 전개, 매 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7월 18일 토요일 마지막 장면, 대원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고종이 최천중과 그의 아버지를 사면복권하며 최천중을 잡으려 군사를 풀었던 대원군의 허를 찌르는 '엔tv조선의 토,일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는 유일한 사극으로 5%대의 안정적 시청률을 확보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7월 19일 5.1% 닐슨 코리아 ) 이병주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10 권 분량의 방대한 내용을 21부작 드라마로 압축하여 전개, 매 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7월 18일 토요일 마지막 장면, 대원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고종이 최천중과 그의 아버지를 사면복권하며 최천중을 잡으려 군사를 풀었던 대원군의 허를 찌르는 반격을 개시했다. 3년 전 대원군에 의하여 쫓기다 결국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이역만리까지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동안 사랑하는 여인 봉련은 대원군의 볼모가 되어 대원군이 원하는 미래를 점쳐주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돌아온 최천중은 자신의 적인 건 물론, 이제 경복궁 중건 등으로 백성들에게 장동 김문 못지 않게 원성을 사고 있는 대원군 이하응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우선 자신과 인연을 맺은 규수 민자영을 고종의 왕비로 간택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한편, 고종을 사이에 두고 대원군과 힘겨루기에서 밀리고 있는 대왕대비 조씨에게 접근하여 대원군 이하응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에게 전권을 위임해 줄 것을 요구한다. 섭정이란 미명아래 전권을 휘두르는 대원군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최천중의 복권은 그저 한 사람 최천중의 재등장 이상, 효(孝)를 내세워 허수아비 신세로 만들어 버린 고종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건이요, 정적인 대왕대비와의 힘겨루기에서 허를 찔린 형국이 되었다. 거기에 최천중의 후원을 받은 왕비는 호시탐탐 고종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최천중은 고종을 설득하고 대왕대비, 중신들과 모의하여 당상관 회의에서 대원군의 실각, 일종의 '명예 혁명'을 시도하는데, 7월19일 일요일 밤 방영된 19회에서는 야심차게 시도한 최천중에 의한 대원군의 퇴진은 바로 전날 발생한 경복궁에서의 화재 과정에서 당황한 고종에 의해 대원군이 먼저 선수를 치며 물거품이 되고 만다.
대원군의 실각을 도모한 최천중 똑같이 고종의 앞에서 마주한 최천중과 대원군 이하응, 하지만 바로 하루 차이에 방영분 속 상황은 하늘과 땅만큼 달라졌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고종, 그리고 그의 섭정자 대원군을, 이제 다시 자신의 손으로 물리고자 했던 최천중의 시도는 19회에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최천중은 일찌기 그의 오른팔과 같은 용팔용에서 '조선의 난파선론'을 피력한 바 있다. 난파선과 같은 조선,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망할 운명이니 일찌감치 스스로의 몸을 뺄 것인가, 아니면 난파선이라도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배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인가. 거기서 최천중은 후자의 운명을 선택했다. 멸문지화를 당하고 점바치가 된 신세에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재산마저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최천중.
그런 그가 자신의 '점바치' 능력을 활용하여 조선을 쥐고 흔드는 부패한 권력을 갈아엎고자 하는 바는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그는 대원군과 손을 잡고 장동 김문을 축출하는데 앞장섰고 성공했다. 그 뒤를 이어 그가 일찌기 왕재라 예언했던 고종이철종의 뒤를 잇고, 그의 아비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어 '섭정', 하지만 말이 '섭정'이지 실질적인 '국정'의 주인이 되었다.
허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대원군 이하응과 백성들을 위한 권력을 세우겠다는 '개혁' 의지에서 의기가 투합했던 최천중,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후대의 왕이라 치켜세우는 최천중을 노여워하는 대원군은 이미 백성들을 위한 권력보다 자신의 권력이 우선이었다. 당연히 최천중과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다.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최천중은 그 '순진무구'한 개혁에의 의지로 호랑이한테 나라를 맡긴 셈이 되었다. 그의 사주 명리학적 능력을 활용하여 부패한 장동 김문을 밀어냈지만, 결국 그가 손잡은 건 또 다른 '권력'일 뿐인 셈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 손을 내민 건 훗날 대원군의 가장 큰 정적이 되는 명성황후 민자영이었다. 그의 의도야 어떻든 결국 최천중은 19회까지만 보면 그의 알량한 개혁에의 열망으로 조선을 구렁텅이로 빠뜨려가는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이른바 주인공의 캐릭터 붕괴일까? 그것보다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난파선에 기꺼이 남고자 하는 '영웅적 캐릭터'가 '성장'해 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부패한 권문 세가, 그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꺼이 기며 저잣거리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던 대원군 이하응이 보인 모습은, '왕조 시대'에 '개혁'을 꿈꾸던 최천중에게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왕권'은 권력의 맛을 본 순간, 이미 더 이상 '백성'이 없다. 어떻게해서든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욕망'의 정치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대원군을 '결자해지'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유부단하기 그지 없는 고종, 그리고 거기에 조력자일 줄 알았지만 또 다른 복병이 될 명성황후의 야망은 '위로부터'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꿈꾸던 저잣거리의 영웅 최천중에게 결국은 '명예롭지 않은' 선택의 길에 대한 고민을 안길 것이다.
왕조 시대의 시대적 한계 안에서 백성들의 '안온한 삶'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대원군도, 민자영도 결국은 백성들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면, 그 어떤 왕도, 왕의 측근도 백성들의 평안을 도모해 줄 수 없다면, 결국 최천중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인가? 그것이 <바람과 구름과 비>가 마지막에 보여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200회, 300회, 그리고 400회를 함께 했다. 그리고 7월 17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500회를 맞이했다. 당연히 500회도 이 프로그램과 함께 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 공개 방송이었던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함께 울고 웃던 관객들과 더 이상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간 100회 세션맨 특집을 비롯하여 늘 신선한 아이디어로 자축연을 벌였던 특집들은 그 자리를 빛낸 주인공들에게 한없는 박수 세례를 쳐주었던 관객들의 열기로 그 자리가 더욱 빛났지만 2020년 500 회 특집에 박수를 쳐줄 관객들의 자리는 비었다. 하지만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관객들의 자리에 '추억'을 앉혔다. 바로 그저 <유희열의 스케치북> 500회가 아니라, KBS2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뮤지션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진행했던 '고품격' 프로그램의 역사, 그 뒤안길을 '추억'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바로 <유희열의 스케치북 500회 특집 - THE MC>이다.
1992년 시작된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가 그 시작이다. 그 뒤를 1995년부터 <이문세쇼>가, 1996년에 <이소라의 프로포즈>, 2002년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바통을 이어받고, 2009년부터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시작되어 2020년 500회에 이르렀다. 햇수로만 28년이다.
이문세, 이소라, 윤도현과 함께 한 시간 여행 그 시간을 함께 추억하기 위해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앞선 프로그램들에서 MC를 맡았던 이문세, 이소라, 윤도현을 초청했다. 이문세, 이소라, 윤도현이 프로그램의 첫 MC를 맡았던 그 날을 추억하며 시작된 '시간 여행'은 시작된다.
그 시절을 보니, 그 자리에 앉은 이문세, 이소라, 윤도현이 이제는 제법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윤도현, 유희열은 <이문세쇼>가 첫 데뷔 무대였고, 이소라 역시 세션으로 활동하던 시절을 지나 신인으로 <이문세쇼>에서 솔로 가수로서 첫 선을 보였다.
정말 정글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기세로 '타잔~'을 우렁차게 불러대던 그 시절 기세등등하던 신인 윤도현과, 그 때나 이 때나 썰렁한 농담 한 자락을 얹어 분위기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윤도현의 말대로 살아있는게 기적인 듯한 신인 유희열의 모습은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정말 헤어진 연인 생각에 흐르는 눈물로 '제발'을 부르다 뛰쳐나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여전히 눈물이 글썽하지만 담담하게 그 시절을 회고한 이소라는 <이소라의 프로포즈> 때보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 세월만큼 편안해 보인다.
MC들 뿐인가. 다른 MC들만큼이나 달랐던 프로그램의 성격, 공개방송으로 진행되어 사전에 분명 노래를 안부르기로 했지만 흘러나오는 반주 때문에 얼떨결에 노래를 부르고 마는 안성기, 강수연의 모습은 <이문세쇼>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이소라의 감성넘치는 연애 편지는 다시 들어도 '귀가 녹고', 가슴이 울린다. 절대 움직이지 않기로 유명한 이소라가 장국영의 리드에 따라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한 무대는, 고 장국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먹먹해지는 추억이다. 이제는 명 MC가 된 김제동과 신이 목소리에 모든 것을 주었다는 김범수의 데뷔 무대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였다.
28년, 발라드의 황금기였던 시대를 풍미했던 <이문세쇼>와 <이소라의 프로포즈>, 힙합과 인디 밴드의 전성기를 누볐던 <윤도현의 러브레터>, 그리고 K-POP에 부응하여 뮤지션 유희열이 댄스를 마다하지 않았던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그 자체로 한국 음악사의 산 증인이 된다.
아이들을 재우고 늦은 밤 하루 종일 육아로 지친 심신을 달래주던 시간은 어느덧 다 큰 아이들과 함께 음악으로 교감하는 '공감'의 시간이 되었고, 다 자란 아이들은 집을 떠나고 이제 다시 28년을 추억하는 시간에 홀로 앉았다.
잊지못할 실수로 등장한 <이문세쇼>의 깜짝 전화 방문에서 벌어진 해프닝도, 얼굴없는 가수 조성모의 등장도, 고 장국영의 센스 넘치는 무대도, 김제동의 촌철살인도, 그리고 세션으로 무대 뒤에서 주인공이 되어 무대 앞으로 나오기까지 음악 인생 전체가 걸렸다던 아코디언 연주자 심상락 옹의 뭉클했던 명언의 순간도 다 함께 했다. <이문세쇼>에서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그리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그 28년의 세월 동안 삶의 굽이굽이마다 위로와 안식과 즐거움을 주었다. 감사하다.
단막극의 장벽은 높았다? 4부작 <미쓰 리는 알고 있다>가 첫 회 야심차게 4.2%로 출발했지만 2,3%대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2회 3.2%, 3회 2.4%) 하지만, 단막극의 장벽이라기엔 kbs2 <출사표>가 2.7%, jtbc의 <우리, 사랑했을까>가 2.084%(닐슨 코리아 7.15 기준)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볼 때 수목극 전체의 문제가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유투브나 넷플릭스 등 시청자 주도형의 콘텐츠가 융성하면서 불가피하게 받아들 수 밖에 없는 결과물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 리는 알고 있다>는 mbc 극본 공모 당선작답게 신선한 플롯의 전개를 3,4부에 걸쳐 선사했다. 지난 1,2회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한 양수진(박신아 분)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혐의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양수진,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의 사망 원인은 목이 졸려 죽은 질식사였다. 5년전 뺑소니 사고로 어머니가 전신마비가 된 후 필리핀으로 도망가 버린 아버지 대신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한편 피팅 모델까지 해가며 병수발을 들어온 양수진은 집요하게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했었다.
그녀가 죽은 건 5년 전 뺑소니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피팅 모델로 일하며 살아왔던 그녀의 이력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누나라 부르며 접근 금지 명령을 받을 정도로 추근댄 서태화(김도완 분)? 그가 죽이려고 덤벼드는 양수진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병운 건설의 사위 이명원(이기혁 분)일까?
사건 전후로 cctv는 의도적으로 삭제되었고, 양수진이 사는 아파트는 오랫동안 재개발 문제로 시끄러운 상태였다. 재개발을 좌지우지하는 미쓰 리는 양수진네와는 언니 동생하며 친했지만 서태화를 자식처럼 보살피며 서태화의 일이라면 두 팔 걷어부치고 나서는 '보호자'이다. 양수진이 떨어져 죽은 동의 104호에 사는 재개발 조합장 부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하고, 관리소장(우지원 분)은 총무(김예원 분)의 부탁으로 cctv를 지웠다. 이렇게 양수진의 이웃에 사는 모두가 범인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1,2회가 진행되었다.
형과 동생, 엄마와 아들? 뜻밖의 관계들 하지만, 2회의 마지막 서태화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그 집을 수색하기 위해 아파트로 온 인호철 형사(조한선 분)는 양수진의 집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조용히 그 집으로 들어선다. 그 때 인호철의 눈에 띤 건 정신없이 양수진의 집을 뒤지고 있던 이명원, 그런데 이명원이 자신을 발견한 인호철에게 형이라 부른다!
바로 이렇게 양수진의 주변 인물 모두에게 혐의를 두고 진행되면 사건은 2회 엔딩에서 이명원이 인호철에게 형이라 부르며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된다. 양수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밝히려고 했던 어머니 뺑소니 범은 알고보니 이명원이었고, 이명원의 범죄 사실을 당시 사건 수사관이었던 인호철이 무마해 준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어린 동생이던 이명원, 그 뒷바라지에 모든 것을 희생했던 인호철은 검사로 임용되어 성공 가도를 달릴 동생의 앞길을 차마 막을 수 없었던 것.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동생 이명원 대신 양수진을 친누나처럼 따르다 사랑해 버린 서태화를 범인으로 몰고가려한다. 하지만 서태화에게는 자신의 차로 인호철의 차를 밀어서라도 서태화를 보호하려 하는 미쓰 리, 이궁복(강성연 분)이 있었다. 대놓고 미쓰리하며 무시를 하는데도 보모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서태화를 위해 애쓰는 미쓰 리, 인호철을 그런 미쓰리가 서태화를 낳은 미혼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과 동생, 엄마와 아들, 스릴러였던 드라마는 이제 숨겨진 가족 관계들이 드러나며 새로운 전개가 펼쳐진다. 뿐만 아니다. 의뭉스럽게 무언가를 숨기던 봉만래 조합장의 사연은 치매 걸린 아내가 양수진을 죽였다는 오해로 부터 시작되어, 사업을 하느라 가산을 탕진한 아들에, 원치 않는 결혼으로 생활비를 대줘야 하는 딸까지 등장하며 비장한 노부부의 자살 시도로 이어진다.
숨겨진 사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은 드러나고만 양수진의 사망 사건, 거기엔 복수를 다짐하며 접근했다 그만 그 사람을 사랑해버리고 말아버린 양수진의 비극적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자살에 가까운 도발은 결국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양수진을 이명원이 10층에서 추락시키게 만드는 '비극'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하지만, <미쓰 리는 알고 있다>가 '요건 몰랐지'하고 최종적으로 내민 카드는 인호철도, 이명원도, 그리고 양수진도 모두가 병운 건설이라는 '자본'이 벌인 장기판의 '말'이었다는 진짜 비극이었다.
자신의 동생이 저지른 사건인 줄 알고 무마해 버린 그 5년 전 교통 사고의 실제 범인은 이명원이 아니라, 이명원과 결혼한 병운 건설의 딸 한유라(김규선 분)였던 것이다. 병운 건설은 현장의 증거를 말소하고, 술에 취한 채 기억을 못하는 이명원에게 사건의 기억을 뒤집어 씌우고 인호철마저 이용한 것이다.
비록 '거악'은 모두를 '장기판의 말'처럼 가지고 논 '자본'이었지만,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형사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인호철이 벌인 한번의 눈감음이 결국 토네이도를 발생시킨 나비의 날개짓처럼 양수진을 처절한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인간 군상들의 그림자'라는 지점에 방점을 찍으며 인호철과 그의 동생이 벌인 '탈도덕적 행위'를 자신의 이해 관계와 핏줄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궁복과 다르지 않게 군상들의 스케치처럼 그려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제법 괜찮은 형사가 그 직위를 해제당한 것만으로 충분히 '처벌'받았다는 것일까? 이명원 역시 마찬가지다. 양수진을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 못했지만 10층 추락사에 책임이 있는 그가 병운 건설의 비리를 고발하고 검사실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 잔으로 어쩐지 '면죄부'를 받는 듯 보여지는 상황은 마찬가지로 씁쓸하다. 마치 병운 건설의 사위 자리를 잃은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단죄'를 받은 것처럼 보여진다.
스릴러로 시작했던 드라마가 3,4부에 이르러 드라마의 톤이 바뀌어 '휴먼 드라마'의 톤이 되며 '스릴러'가 가져야 할 '냉정한 시선'은 방향을 잃고 '사람 사는 이야기'의 '페이소스' 가 곁들여 지며 캐릭터들은 급 '휴머니스트'들이 되어간다. 인호철은 '회개'하며 사건을 잘 마무리하고 멋지게 퇴장한다. 재개발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이궁복은 양수진의 죽음에 대해 급 반성하며 '재개발' 따위 그래봐야 돌과 콘크리트 덩어리라며 가진 재물 모두에서 손을 뗀다. 재개발의 부질없음을 논하고 싶었던 것일까. 부동산 신화의 물거품같음을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었던 것일까.
한 여성의 죽음 이면에 얽히고 설킨 인간 군상들의 혈연과 이해 관계를 그려내고 싶었던 의도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들이 '스릴러'의 미덕이랄 수 있는 '인간미'의 경계에서 누그러뜨려지지 않는 제대로 된 해결을 기대하며 짧은 4부작이나마 정주행해온 스릴러의 시청자들에게는 양수진의 안타까운 죽음만큼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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