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계시는 아는 분네 집안이 졸혼을 했다. 집이 팔렸고 아버지와 엄마가 각각 자신의 집을 얻었다고 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어머니가 오래 힘들었고, 갱년기가 찾아온 엄마는 지나온 시절의 힘듬을 토해내셨을 때 이번에는 아버지가 맞춰주시는가 싶었는데, 결국 부부는 각자의 각 길을 떠났단다.
저 얘기를 듣고 우선 들었던 생각이 그러면 아이들이 고향에 돌아오면 어디로 가지? 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아이들은 그게 뭔 문제냐는 반응이지만 그래도 거기에 생각이 먼저 멈춘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에서 김상식 씨(정재영 분)와 이진숙 씨(원미경 분)도 그랬다.
말썽꾸러기가 되고싶지 않은 부부 진숙 씨와 함께 음악회를 보러가기로 한 날, 상식 씨는 꽃을 좋아하는 진숙 씨를 위해 해바라기 한 송이를 들고 길을 건너다 그만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곳은 병원, 그곳에 누워, 그리고 그런 상식 씨 옆에서 두 사람은 저 앞에서 부모 걱정하는 다른 자식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오고, 그런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하는 어머니에 대해 다 큰 자녀들은 늙은 부모들을 '말썽꾸러기'가 되었다며 짜증스럽게 말을 나눈다.
말썽꾸러기였던 자식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씻겨주고 잔소리도 해가며 키웠던 '기둥'같았던 부모들, 하지만 어느 틈에 그 말썽꾸러기였던 자식들은 버젓한 성인이 되고, 이제 아이들을 키우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말썽꾸러기'가 되어간다. 몸이 늙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몸뿐인가 마음들도 제 멋대로다. 어느 틈에 자식들은 부모들을 골칫덩어리 자식마냥 취급한다.
졸혼을 선언한 진숙 씨, 반응은 제 각각이었어도 자식들 마음 속에 '우리 엄마 왜 그런대?'라는 맘이 왜 없었겠는가. 어느덧 각자 삶의 문제도 버거워질 나이의 자식들은 이제 와 '부모가 말썽을 부리는 게' 번거롭고 때로는 신경을 끄고 싶기도 한다. 이제 다시 아버지와 엄마가 만나 데이트를 하신다는 막내의 톡에 핸드폰을 뒤집어 놓는 은주(추자현 분), 은희(한예리 분)의 심정이 그것이리라.
부모는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뉘어 키우려 했지만 다 자란 자식에게 부모는 어느 새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부모와 자식의 자리가 그래서 다른 것이다. 제 아무리 내 속을 알아주는 자식이라 터놓는다 해도, 자신의 삶이 있는 자식에게 부모의 속 마음은 짐스러운 시절이 되었다.
그래서 '말썽꾸러기'라는 말을 들은 상식 씨와 진숙 씨의 마음이 철렁했다. 상식 씨는 자신이 아픈 걸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했다. 아이들이 자랄 때 바깥으로만 돌고, 집에 오면 화만 내던 아버지였는데 이제 와서 아프다는게 면목이 없다. 상식 씨는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싶다며 수술을 뒤로 미루고 싶어했지만, 아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면 빨리 수술받는게 낫다며 진숙 씨가 상식 씨를 잡는다.
수술을 받게 된 상식 씨의 곁을 지키는 진숙 씨, 몇 번의 데이트, 그 때마다 전해준 꽃이 진숙 씨의 마음을 다 풀어내서일까. 진숙 씨는 말한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세트' 메뉴라고. 졸혼을 선언하고 그런 진숙 씨의 졸혼 선언에 응답하여 상식 씨가 집을 나갔어도, 자식들에게 부모는 함께 살던, 따로 살던 부모라는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했건, 미워했건, 때로는 증오했건 그들이 함께 해왔던 시절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진숙 씨는 기꺼이 아이들에게 말썽꾸러기가 되고 싶지 않은 상식 씨의 마음에 동조한다. 그런 진숙 씨의 마음은 이혼을 알린 은주에게 네 이혼에 엄마의 졸혼이 영향을 끼쳤으면 어쩌나 하며 미안해 하는 마음과 같은 갈래이기도 하다.
아는 건 없어도 가족이다. 결국 부부는 상식 씨의 수술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는 공모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는 것 없는'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이 가족은 가족이 아니어야 할까. 아니 되려, 상식 씨와 진숙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부같고, 그런 엄마 아버지의 공모를 알고 뒤늦게 달려온 은주와 은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족같다. 흔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해결책'이 되곤 하는 '병'이라는 설정 때문이었을까. 결국은 '아프다'는 것만큼 '만병통치약'이 없기 때문인 것인가.
그런 면이 없지도 않다. 졸혼으로 갈라선 부부와 아이들을 이어주는 접착제에 '병'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은주와 태형(김태훈 분)은 결국 이혼을 합의한다.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부부됨의 기본 요건이어야 할 태형의 정체성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제 두 사람의 공동체를 묶어줄 그 최소한의 '연민'조차도 놓여나게 만든다. 심하게 말하면 '사기'라고 할 수 있는 태형의 거짓말, 그리고 은주가 원했던 가정에 대해 오해했던 태형의 독선, 이런 서로가 몰랐던 서로의 '진심'들, 그 진심들을 품어줄 '여지없음'이 더는 두 사람을 '연민'으로 묶어낼 힘조차 잃은 것이다.
반면, 상식과 진숙 씨는 이제 오랫동안 서로에 대해 팔짱을 끼고 외면했던 서로에 대한 '연민'을 풀어낸다. 그 시작은 상식 씨다. 오랜 결혼 생활 동안, 결국 가장 미웠던 사람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였던 상식 씨. 결국 상식 씨가 싸웠던 것은 자신에게 과분한 상대라 생각한 진숙 씨에 대해 한없이 옹졸하기만 했던 상식 씨 자신이다.
그 옹졸함을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표출했던 상식 씨가 22살로 돌아갔던 뇌의 이상 증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한다. 그리고 그 반성을 진숙 씨에게 드러내고, 진숙 씨 역시 닫았던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한평생 가장이었으면서도 홀로 외로웠을 사람, 그 사람을 바라봐주는 마음, 그건 '감정'과 별개로 함께 삶을 일구며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왔던 '공동체'의 주체로서 서로에 대해 가지는 연민이다. 진숙 씨는 말한다. 상식 씨가 아버지로 열심히 살아왔던 것, 그거 하나만 잘했다고. 자신에게 모질었던 상식 씨 대신 아버지로 늙어버린 상식 씨를 진숙 씨가 품는다. 찬혁의 가정사를 알게 된 은희가 찬혁을 안아주며 마음을 더 깊숙이 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상식 씨와 진숙 씨는 말썽꾸러기가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대했든 두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함께 하든 따로이든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그런 아이들이 덜 커도, 다 커도 마찬가지인 부모의 자리이다. 아이들에게 상식 씨의 수술을 숨기는 마음은 여전히 아버지이고, 어머니인 진숙 씨의 사랑의 방식이다. 그래서 '아는 건 없어도', 부모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두 사람의 진심 때문에 여전히 이 가족은 '가족'이다.
수목 드라마들이 고전 중이다. 제목이 무색하게 kbs2의 <출사표>는 3.3%, jtbc의 <우리, 사랑했을까>는 2.02%의 저조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공중파와 종편이라는 집계 방식의 차이를 든다 하더라도 도토리 키재기인 처지이다. (닐슨 코리아 기준) 그런 가운데 mbc의 <미쓰 리는 알고있다> 역시 3.2%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드라마와 달리 4부작이라는 점에서, <미쓰 리는 알고있다>는 선방이라고 볼 수 있다.
<미쓰 리는 알고있다>는 mbc 드라마 극본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은 서영희 씨의 작품으로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다. 드라마는 '달의 이면'을 말하고자 한다.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 주기가 같아 40억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달의 뒷면이 인간 문명의 결과물인 아폴로의 달 탐사로 드러났다. 그렇듯 강남 노른자 재건축 아파트에서 발생한 양수진의 죽음은 거기에 얽힌 사람들의 숨겨온 욕망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궁 아파트, 하지만 말이 강남이지 노후될대로 된 이 아파트는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정전에, 바퀴들을 득시글거리고, 엘리베이터는 빈번하게 멈춘다. 재개발이 시급한 상황, 하지만 어쩐지 재개발 승인이 쉬이 나지 않는다. 당연히 아파트 주민들은 재개발과 관련된 사안에 촉각이 곤두서있고, 그 중심에 궁아파트 9동 1004호 살면서 부동산 중개인을 하는 이궁복(강성연 분)이 있다. 아파트 값의 오르락 내리락 조차 쥐락펴락 하는 능력자, 아파트에 온 택배까지 맡아주며 온 동네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해결사,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아파트 조합장이며, 부녀회장도 들썩인다.
그렇게 모든 주민이 재개발과 관련하여 예민해 있던 즈음 아파트 주민이던 양수진(박신아 분)이 아파트 화단에 몸을 던졌다. 기간제 교사였지만, 몇 년전 사고로 움직일 수 없는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피팅 모델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살던 수진이었기에 처지를 비관한 자살로 여겨졌다.
모두가 수상하다 하지만 수진 어머니의 뺑소니범 사건과 관련하여 수진을 알게 된 인호철(조한선 분)이 자살로 종결되는 것을 석연치 않게 여긴다. 그로써는 자신이 해결해 주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건으로 인해 삶을 망가뜨린 것같은 수진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수진이 자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호철의 무모한 검시 시도, 뜻밖에도 수진은 목이 졸린 채 죽임을 당한 후 아파트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더구나 임신을 한 상황에서.
살해 사건이 된 수진의 죽음으로 호철은 보다 적극적으로 사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당연히 그 과정에서 아파트 재개발에 혈안이 되어있는 주민들, 특히 부동산 중개인 이궁복과 갈등을 빚는다.
이궁복과 인호철의 접점은 비단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아파트 재개발을 수호하고자 하는 부동산 중개인의 갈등만이 아니다. 궁부동산의 실질적 주인인 사장의 아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궁복이 사장의 후처라 그러고 그래서 사장이 중국에 가있는 동안 그 아들을 15년 동안 거뒀다는 서태화가 사건의 중심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양수진과 서태화,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이웃 사촌이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가 형님, 동생 하는 처지였고, 양수진과 서태화 역시 누나, 동생하며 자라왔다. 그러던 중 서태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양수진의 어머니와 양수진이 서태화를 가족처럼 대해줬고, 이제 양수진의 어머니가 다치신 후, 양수진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서태화는 양수진에게 동네 누나 이상의 감정을 느끼며 보호자를 자처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이며 질풍노도의 시기인 서태화의 일방적인 감정은 그에게 '접근 금지 명령'의 결과를 낳았고, 사건 당일에도 양수진을 폭력적으로 겁박했으며 양수진에서 나가는 증거 영상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당연히 인호철은 서태화를 잡으려고 하고, 이궁복은 자동차 사고를 내는 무리수를 감행하면서까지 서태화를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사건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대뜸 조합장 직함을 내려놓겠다는 104호의 봉만래(문창길 분) 노인, 그와 그의 아내 남기순(박혜진 분)의 태도가 심상치않다. 봉만래 노인에게 '알고있다'고 언질을 주는 그의 아내, 그와 그의 아내가 들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런가 하면, 조합장이 물러나자 가장 분주해진 부녀회장(전수경 분)과 그의 남편 관리소장(우지원 분), 그리고 총무(김예원 분)의 관계도 수상쩍다. 양수진이 죽던 날 아파트 cctv를 조사하려 하니 그 누군가가 삭제한 상황, 알고보니 삭제를 한 건 관리소장이었고, 삭제를 사주한 건 총무였다. 제 3자인 이들이 양수진 사건에 엮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
하지만 드러난 서태화를 제외하고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양수진의 집 바로 윗층, 704호 입주민이자, 궁 아파트 재개발을 노리는 병운 건설 사위인 이명원(이기혁 분)이다. 주변 탐문 조사를 하러 찾아간 날 명원은 얼굴에 멍이 든채, 손에는 반창고를 붙인 채 당황한 모습으로 호철을 맞이했다. 호철이 부탁한 수진의 손톱 밑에서 발견된 상피 세포는 명원의 상처와 일치할까?
회사에서 기세등등한 모습과 달리, 수진과 관련된 일련의 상황에서 늘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명원, 수진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안 태화는 명원을 향해 폭주하고, 두 사람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만다. 그런데 늘 서태화에게 필요 이상으로 강압적인 호철이 늘 명원에게는 한 수를 접는 모양새다. 4회 마지막 늦은 밤 수진 집에서 발견한 인기척에 들어간 호철에게 발견된 명원, 호철은 명원에게 '니가 왜 여깄어'라고 하고, 그런 호철에게 명원은 '형'이라 부르며 당황한다.
한 여성의 죽음, 그 죽음에는 억울하게 뺑소니 사건을 당한 어머니를 봉양하려다 피폐해진 한 여성의 사연이 있다. 하지만, 여성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얽힌 두 남자가 등장하며 사건은 애증으로 인한 치사 사건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두 남자와 얽힌 이궁복과 인호철, 그리고 명원의 아내까지 등장하면 사건의 각도는 또 달라진다. 어디 그뿐인가, 조합장 부부는 무엇을 숨기고, 관리소장과 총무는 왜 cctv를 삭제했을까? 무엇보다 지금은 궁 아파트를 들썩이는 실세가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 까지 지난 15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오른 이궁복이 안수진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그 속사정은 또 무엇일지.
<미쓰 리는 알고있다>는 4부작이지만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장르의 묘미를 회차마다 한껏 살려내고 있는 중이다. 한 불쌍한 여성의 살인 사건은 매회 사건의 각을 펼쳐가며 이제 수사를 하는 형사 인호철과 이명원의 숨겨진 관계까지 암시하며 사건의 판도에 또 다른 변주를 가하며 재미를 더하고 있다. 등장 인물 모두가 수상해진 사황, 4부작이기에 한껏 장르물로서의 박진감을 한껏 살려내는 중이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알처럼 스르르르 빠져나갔다. 언제 우리가 가족이었나 싶게 모두가 흩어져갔다. '가족'이었지만 서로가 이제 더는 '가족'이기를 주저하자 원심력은 빠르게 가족을 흔들어 놓았다. 이제 중반을 넘어선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의 처지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민낯을 확인하고 뿔뿔이 돌아서려는 순간 무언가가 서로를 끌어 당긴다. 서로가 확인한 민낯이, 서로가 던졌던 속에 담아두었던 한 마디가, 상처였다고, 고통이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이제 다른 의미로 서로를 붙잡는다.
일방적이었던 가부장적 사랑, 그 족쇄를 풀다 김상식(정진영 분) 씨와 이진숙(원미경 분) 씨의 결혼은 한평생 기울어진 시소와 같았다. 그런데 그 기울어짐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다. 김상식 씨는 가진 거라고는 방 한 칸인 배운 것 없는 자신을 선택해 준 대학생이었던, 더구나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진숙 씨에 대한 열등감에 평생 시달렸다. 자기보다 많이 배운, 그리고 비록 자신의 아내이지만 여전히 은주의 아빠를 잊지 못했을 지도 모를 아내에 대한 김상식 씨의 마음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결혼식장에 온 은주 아버지 또래의 남자를 은주 아버지라 오해하고, 아내가 줄쳐놓은 소설 책 속 한 문장이 아내의 잊지못하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난폭해 졌다. 그는 아내에게 묻지 않은 채 스스로 쳐놓은 오해의 덫에 갇혀 아내를 밀어냈다. 22살도 잠시 돌아간 청년 김상식 씨가 그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가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은 냉정한 은주의 지적처럼 어설픈 '책임감' 뿐이었다.
아내를 부양했지만, 자신에게 버거운 그녀를 늘 오해하고 의심하며 한 평생을 보냈다. 상처입은 새와 같던 그녀를 품었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품기에 그가 가진 마음의 그릇은 그의 생각만큼 넓지 않았다.
아내가 낳은, 하지만 자신의 자식이 아닌 은주를 사랑하는 방식도 결국 마찬가지다. 그는 은주를 식구들이 편애라고 할 만큼 예뻐했지만, 결국 은주에게 내민 통장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하며 내민 통장에 은주는 은희라도 그랬겠냐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가 은주를 사랑하는 방식이라며 돈을 모으는 대신, 그 돈을 당시 아내에게 주었다면 아내는, 그리고 가족들은 조금 더 편안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김상식 씨는 가족을 소외시키는 대신 자신의 책임만에 집착한 것이다.
그의 그런 일방적인 방식은 스스로가 저지른 교통 사고 처리 방법에서도 드러났다. 자신이 저지른 당시만 해도 그 보상금과 법적 처벌을 감수를 피하고 싶었던 김상식 씨는 식구들 몰래 피해자 소년의 가족을 책임졌다. 그리고 그 책임의 시간 동안 가족들을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고, 아버지의 부재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 가부장으로서 홀로 '책임'졌다고 하지만, 그 책임의 그림자는 온전히 가족이 감당했다.
그런데 이제 사고로 머리를 다쳐 잠시 22살로 돌아간 김상식 씨로 인해 김상식 씨를 눌러왔던 과거의 족쇄가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다. 은주 출생의 비밀이 온 가족에게 알려지고, 아내의 졸혼 선언으로 과거를 돌아온 김상식 씨가 자신이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내고, 아내와의 오래도록 쌓인 오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결자해지, 의도야 어떻든 가족 내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던 가장 김상식 씨는 이제 자신을 똘똘 감쌌던 성벽과도 같은 것들을 하나 둘 씩 풀어내기 시작한다. 드라마라서 16작에 완결되야 하는 서사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굳이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김상식 씨 또래 많은 가장들이 김상식 씨와 같은 사연은 아닐지라도 가장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홀로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외롭게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터무니없는 오해로, 때로는 어쩌지 못하는 책임감으로 , 혹은 때로는 치기어리기조차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드라마는 말한다. 그 알고보면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그 홀로 짊어진 마음을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고 당부한다. 졸혼까지 선언했음에도 김상식 씨가 하나 둘씩 자신을 둘러싼 갑옷과도 같은 오해와 고집을 털어내자 아내 진숙 씨가 그런 상식 씨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가 건네는 한 송이 꽃에, 한 잔의 커피에 진숙 씨의 미소가 돌아온다. 사랑이 별 건가, 가족이 별 건가, 그 사소한 마음들이 모여, 사랑이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다. 대학 교정에서 울던 진숙 씨를 차에 태웠던 상식 씨의 그 배려심처럼 말이다.
민낯이 되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다 자신은 그러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는 은주에게 따숩게 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가격의 집에 살지만 은주네 부부에게 온기는 없었다. 이제 은주를 다시 만난 막내 지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은주네 부부가 편안해 보인다고 한다.
서로 떨어진 방, 그 방의 거리 만큼이나 멀고 서먹서먹하던 두 사람이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남편 태형(김태훈 분)의 커밍 아웃으로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결국 이혼을 하자고 하는 은주, 그런데 그렇게 이혼으로 가려는 와중에 은주 출생에 대한 뜻밖의 진실이 드러났다. 휘청거리는 은주, 늘 거리감을 가지고 대했던 남편 태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으로 은주를 걱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몇 십년 동안 친아버지와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는데, 이제 와 생물학적 아버지가 무슨 의미가 있냐며 되려 위로를 한다.
그런가 하면, 태형이 사랑했던 함께 떠나고 싶었던 사람에게, 다른 사랑하는 이가 그가 있는 뉴질랜드로 가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한 건 바로 아내 은주였다. 아내 은주가 있는 곁에서 태형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술이 취했다. 그렇게 돌아온 날 여전히 아들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는 태형의 방 앞에서 닥달을 하고, 그런 시어머니에게 은주는 차분하게 말한다. 나도 그 사람이 받아들여지니 이해가 되는데 어머니는 왜 그게 안되냐고.
공식적인 '부부'의 정의에 따르자면 앞으로 이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지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방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태형, 그 방문 앞을 지켜주는 은주, 그 어느 때보다도 두 사람은 '한가족'같다.
애인에게 성폭행을 당해 괴로워하는 서영은 그런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하는, 파렴치한 애인의 어머니를 달래는 듯한 자신의 어머니가 더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서영에게 찬혁(김지석 분)은 때론 가족이 '비겁한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가족이니까, 들쑤셔 더 아플까봐 그러는 거라고.
사실 정답은 없다. 가족이 가족됨에, 저 마다 사람이 다르듯이 어떻게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건, 마음이 아닐까. 마음만 있다면, 서로가 가족이기를 바라는 마음만 있다면, 비겁하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상식 씨의 더 늦지 않은 고백이. 태형과 은주의 민낯이 서로를 그래서 아직은 가족이란 구심력으로 서로를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삭막한 도시가 연상되는 회색빛 담벼락 앞에, 혹은 스산한 해변가에 한 소녀가 서있다. 온 세상을 담을 듯 커다란 눈망울, 그림을 보는 순간 배경도, 소녀의 옷도, 머리도 사라지고 그 눈망울에 담긴 애잔한 감성에 압도된다. 이 그림을 보고, 이 소녀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까?
'저는 이 그림에 전쟁이 끝난 후 부모를 잃고 남겨진 전쟁 고아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공감하시는가? 이 그럴 듯한 한 마디에 2차 대전 후 미국 사람들은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었다. 1950~60년대 마크 로스코나 잭슨 플록과 같은 추상 미술이 주류였던 미 미술계에서 인형처럼 큰 눈을 그린 저 그림들을 전시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겨우 자리를 잡은 것이 술집 벽 한 켠, 하지만 우연히 신문에 실린 사진과 그 사진에 얹혀진 이 그림의 작가라는 월터 킨의 그럴 듯한 해석은 '키치'라는 평론가들의 폄하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과 그 작가를 대중적 인기의 물결에 얹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 2014년 팀 버튼에 의해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빅 아이즈>의 이야기처럼, 이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녀들의 그림을 그린 진짜 주인공은 이 그림을 팔아 한 몫을 크게 챙긴 월터 킨이 아니라 그의 아내였던 마가렛 킨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평생을 정진해온 화가 마가렛 킨의 전시회가 지난 5월에서부터 9월까지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개최되고 있다. 특히 정우철 씨 등의 도슨트를 통하면 마가렛 킨의 생애에 대한 보다 친절한 설명에 다가설 수 있다.
전쟁 고아의 슬픔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그림의 진짜 작가 마가렛 킨은 무엇을 그리고자 했을까? 바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작가의 슬픈 마음을 그대로 그림에 드러낸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그리는 눈은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 마가렛 킨
이름을 찾기 위한 지난한 싸움 첫 번째 결혼으로 딸을 얻었지만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도시로 나온 마가렛은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처지였다. 1950년대 미국은 아직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던 시대, 함께 그림를 그리던 월터가 다가오자 마가렛은 홀로 딸을 키워야 하는 불안정한 처지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결혼은 그녀의 '무덤'이 되었다. 남편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여류 화가의 존재가 인정받기 힘들다는 핑계를 들어 그녀의 이름에 남편의 성인 '킨'을 서명하게 유도하였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고, 사업 수완이 좋은 월터가 이른바 '굿즈'와 같은 형태로 그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업화하며 떼돈을 버는 동안, 그녀는 딸조차 모르는 숨겨진 방에서 강아지들을 벗삼아 하루 18시간씩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이 많이 팔리면 팔릴 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녀의 고통은 더욱 극심해졌다.
그래서 그녀가 모색한 돌파구가 바로 그녀가 좋아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이전에 그렸던 그림과 다른 그림을 그리고자 한 것이었다. 킨이라는 결혼 후 생긴 성 대신 전시는 마가렛의 전 생애 기간 동안 그림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시해 놓았다. '킨'이라는 서명으로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혼란을 느꼈던 시절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세계적으로 그녀를 유명작가로 만들어 준 '빅 아이즈'를 시작으로, 월터 킨의 아내로 남편처럼 그림을 그리는, 그래서 부부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시기의 '모딜리아니 풍'의 그림이 잇달아 걸려있다.
하지만, 변화시킨 화풍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상쇄할 수 없었다. 더구나 딸을 위해 선택했던 결혼이었지만 딸 앞에서조차 빅 아이즈의 주인 행세를 하는 남편을 견딜 수 없었던 마가렛은 모든 재산을 놔둔 채 딸과 함께 월터를 떠난다. 그리고 미국 사회 내 성장하는 여성의 인권 운동에 발맞춰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돌입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었다. 무려 12년, 1986년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아내의 그림과 그 그림으로 만든 굿즈를 팔아 일군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여 변호사조차 내세울 수 없었던 월터를 상대로, 법정에서 53분 만에 스스로 자신이 마가렛임을 증명하는 그림, '증거 번호 227'을 그려서야 자기 그림들의 이름을 되찾았다. 더구나 늘 울타기 바깥에서, 혹은 갇혀서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아직은 슬픈 눈빛이지만 울타리 밖으로 나온 '세심한' 포인트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12년 동안 거짓말을 했고, 이는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결정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는 진실이 가지는 가치를 배웠고, 명성, 사랑, 돈, 그 무엇도 양심을 버릴 만한 가치는 없다고 배웠다', -마가렛 킨
도슨트의 말처럼 때로는 일본 서스펜스 영화 속 아이 귀신과도 같은 커다란 눈에 대한 호불호는 차치하고, 키치 풍의 팝 아트가 익숙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마가렛 킨의 '빅 아이즈'는 친숙한 '화풍'이다. 그러나 그 친숙한 화풍에 담긴 한 여성 화가가 벌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지난한 싸움이야마로 전시회를 통해 얻은 진짜 수확이다. 그저 애잔했던 눈망울이 자신을 잃은 여성이 그림을 통해서 밖에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이라 여겨지니 그 눈망울들이 한결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슬픈 눈망울은 자신의 이름을 찾는 여정에 나선 이후 변화한다. 하와이에서의 자유로운 삶, 종교, 그리고 사랑은 눈망울을 한결 더 커졌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다.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자신이 그린 그림 속 인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일관된 작품 세계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더구나 아직도 생존해 있는 작가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결과물을 전시회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최근 재개된 툴루스 로트렛 전의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40대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00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려냈던 툴루스 로트렉이 보였던 삶에 대한 '성실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어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거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팀 버튼 감독의 그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캐릭터들이 다름 아닌 마가렛 킨의 영향력이었다는 사실은 '옵션'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마가렛 킨의 생애를 스크린에 옮긴 이가 팀 버튼감독이 되는 것이다. 팀 버튼의 <빅 아이즈>는 바로 그런 두 사람의 '인연'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아마도 전시회를 보고 팀 버튼의 <빅 아이즈>를 본다면 색다른 감흥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이들어 가며 제일 두려운 것이 무얼까? 지난 2018년 89세의 일기로 작고한 시인 도널드 홀의 마지막 저작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이다. 100세를 사는 것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닌 것이 되어가는 세상에서는 죽는 것보다 늙어가는 과정이 화두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멀쩡하게 정신줄을 놓지 않고 늙어가는 것이.
실제 중장년층이 암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치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치매 환자는 약 75만 명으로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 누군가의 현실이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 치매, 그와의 '현명한 동행'을 모색하기 위해 ebs 다큐 프라임이 치매 합창단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지난 2011년 뉴욕 대학 랭곤 정신병원 신경 정신과 메리 리틀먼은 치매를 앓고 있는 뉴욕 시민을 위한 합창단 <언포게터블스>를 창단했다. 정상적으로 말을 하기 힘든 환자들도 자신들이 익숙하게 불렀던 노래는 따라 부르는 모습에서 착안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9월 20일 치매 극복의 날을 기념하여 보건복지부와 중앙 치매 센터 주최로 '치매 극복 실버 합창대회'가 열리고 있다.
예전에 불렀던 동요나 대중가요 등 추억 속의 노래는 기억 속에 묻혀져 있던 추억을 생생하게 소환해 낸다. 실제 2~30대 때 즐겨부르던 노래를 부르게 했을 때 기억력과 인지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뿐만 아니라 치매 환자가 아니더라도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환기되듯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환자의 우울감과 불안감을 줄여준다고 한다. 이렇듯 음악 요법은 치매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모리즈 합창단, 그 무모한 도전 서울, 부산, 경기, 강원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오디션 지원자 중 뽑힌 38명은 모두 치매이거나 치매 전 단계인 경도 인지 장애를 앓고 있다. 3개월을 기한으로 이 메모리즈 합창단의 목표는 2020년 2월 제주에서 개최되는 '제주 국제 합창제' 오프닝 무대에 서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씩 모여, 독창곡 <과수원길>과 합창곡 <사랑해>와 <닐리리 맘보>을 연습한다. 이한철 씨의 지휘에 맞춰 노래를 박자와 음정에 맞춰 부르고, 외워야 함은 물론 노래에 맞춰 율동까지 해야하는 험란한 과정, 과연 38명의 합창단원들은 이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쉽지 않았다. 예전에 불렀던 노래였지만 기억을 잃은 합창단원들에게 노래는 따라부르기 조차 생소한 곡처럼 들렸다. 겨우 노래를 익혀도 그 다음에 가사를 외우는 것이 '난공불락'이었다.
하지만 '노래'는 기적을 낳았다. 폭압적인 남편과 살며 웃음을 잃었고, 남편이 죽은 후 우울증과 치매를 앓게 된 합창단원은 노래를 부르며 잃었던 웃음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 합창단원이 되었을 때 굳어 있기만 했던 얼굴이 이젠 미소로 가득찼다. 음악에 맞춰 저절로 어깨도 으쓱으쓱, 그저 노래가 아니라 잃었버린 삶의 재미를 찾는 과정이었다.
잃어버린 걸 찾은 분은 또 있다. 젊어 기타 연주자로 활동했었지만 30대 때 사고로 앓게 된 뇌병변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며 살았었는지조차 망각하고 살아왔던 합창단원은 합창 연습을 하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찾았다. 아내와 함께 악기점에 들러 기타를 연주해본 단원에게 합창단의 시간은 잃었던 자신을 찾는 시간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50대의 나이에 치매를 앓게된 합창단원은 <사랑해>라는 음악의 기적이었을까.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부엌에 들어선다. 자신을 간병하느라 고생하는 남편의 생일을 맞아 미역국을 끓이기로 한 것. 미역과 고기를 넣어 볶은, 국물이 없는 미역국을 마련하여 남편 앞에 마련한 생일상, 남편은 그 상만 봐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비록 국물이 없어도 맛은 예전이 아내가 끓여주었던 맛이라는 남편, <사랑해>가 가져다 준 선물이다.
물론 음악을 통해 웃음을 찾고, 젊은 날의 기억을 소환했지만 그 시간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었다. 노래를 익히고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찰 수 있는 시간, 거기에 율동까지 더해지니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안무 지도하는 선생님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할 수 밖에 없는 도무지 오른 손, 왼손의 순서와 박자를 맞추는 것이 합창단에게는 불가능한 도전같아 보이는 상황이다. 거기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 합창단에서 리더쉽을 발휘하던 반장님이 그만 쓰러지시며 합창단의 여정을 중도에서 하차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전세계를 급습한 코로나 팬데믹이다. 3개월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합창제의 오프닝 무대에 서기 위해 강행군을 했던 메모리즈 합창단이었지만 대부분의 노인인 구성원들에게 코로나 팬데믹은 속수무책이다. 결국 대회 참가를 포기하게 된 상황, 이제는 엇박자라도 율동까지 익힌 합창단원들의 시간이 아까운 제작진은 한 명 한 명 합창단원들을 모셔 촬영을 하고 이들을 한 영상으로 재편집하여 메모리즈 합창단 공연을 완성했다.
그새 기억이 흐려져 영상으로 찾아온 공연 속 자신을 헷갈려 하기도 하고, 조만간 그 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추억이지만 함께 했던 그 시간은 합창단원 자신과 가족들에게 다시 없을 아름다운 도전이었다. 노랫말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던 처음, 과연 저분들이 무사히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비록 영상 속에서지만 처음 입어보는 교복을 입고 율동에 열심히 노래를 맞추어 부르는 메모리즈 합창단의 기록은 '치매'라는 한계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실제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지난 2018년 ebs다큐 프라임 <알츠하이머 보고서>를 통해 보여지듯이 치매는 영양과 환경, 스트레스, 운동 등의 관리를 통해 예방과 진행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메모리즈 합창단>의 시도 역시 개인과 가족이 짊어지는 '고통'스런 환경에 대한 '제고'를 하고자 한다. 합창단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집에 있다가 이렇게 나와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좋다고. 치매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메모리즈 합창단>과 같은 시도가 좀 더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욕창은 스스로 운신이 쉽지 않은 환자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고정된 상태에 있을 때 살이 무르기 시작하여 급기야 썩어들어가게 되는 질병이다. 7월 2일 개봉하는 영화 <욕창>은 70대 퇴직 공무원 강창식(김종구 분)의 아내 나길순(전국향 분)이 뇌출혈로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해 욕창이 생기며 벌어지는 난감한 상황을 다룬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고자 하는 건 그저 '보이는 상처'만이 아니다.
외려 영화 속 '욕창'은 상징적이다. 영화 속에서 '오래도록 고정된 상태'에 놓인 건 그저 나길순의 움직일 수 없는 몸만이 아니다. 70 평생을 '가부장'으로 군림해 온 아버지, 여전히 지금도 아버지의 200만원이 넘는 연금과 그의 집이라는 경제적 영향력 아래 놓인 가족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어머니 나길순의 욕창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욕창으로 드러난 가족 낡았지만 오래된 성곽과 같은 김종구 씨의 집, 그곳에 김종구 씨와 뇌출혈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내 나길순 씨가 산다. 아니, 그들 부부와 함께 나길순 씨를 '전담 간병'하는 재중동포 유수옥(강애심 분)씨가 산다.
간병인이라지만 이젠 집안 살림까지 책임지는 강애심 씨, 그녀가 마련한 밥상에 세 사람의 식사할 저녁이 준비되면 김종구 씨는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든다. 일반적으로 가족이 함께 하는 밥상의 모습은 어떨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식구를 기다리고 모든 식구가 앉으면 그때 비로소 함께 수저를 들지 않을까? 하지만 김종구 씨는 강애심 씨가 뒤늦게 아내를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단편적인 식사의 한 장면이야말로 이 집안에서 김종구 씨가 누리는 권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내인 나길순 씨의 식사와 집안 일 모두를 책임지는 강애심 씨, 그녀의 바지런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투병을 해온 나길순 씨의 몸에 '욕창'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강애심 씨가 환자의 위치를 자주 바꿔도 보고 약도 발라보지만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그러자 김종구 씨는 딸인 지수(김도영 분)에게 연락을 한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딸에게 연락을 한다.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아 매사에 반목하는 큰 아들, 멀리 떨어져 립서비스만 능한 둘째 아들과 달리, 딸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집으로 달려가 '해결사'가 되곤 한다.
점점 심해져 가는 어머니의 욕창, 방문 간호사가 오고 강애심의 노력으로 잣아드는가 싶은 욕창에 변주를 일으키는 건 간병인 강애심이다. 어느덧 '안주인'의 자리가 익숙해져가는 강애심의 '위치', 어머니를 위해 사온 과일도, 어머니의 옷장 속 머플러도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레 강애심의 것들이 되어가는 상황이지만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나길순 씨도,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딸인 지수도 전담 간병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렇다할 토를 달기 어렵다.
강애심이 미묘하게 경계를 오가는 상황에서 기름을 불어넣은 건 하지만 결국 강창식의 욕망이다. 어느덧 누워있는 아내를 제쳐두고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강창식은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의 불안정성으로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그녀에 대해 '무리한 결정'을 도모한다. 하지만 이는 숨겨져 있던 가족의 깊은 갈등을 건드리며 파국의 끈을 당긴다.
피해자 여성들 영화의 시작은 어머니 나길순의 오랜 투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어머니로 인해 재중동포 전담 간병인이 함께 살고, 그런 상황을 딸인 지수가 뒷치닥거리를 하는 상황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창이 깊어지고, 거기에 아버지의 욕망이 드러나며 보여지는 이 모순적인 관계는 그 정점에 아픈 어머니가 아니라 가부장으로서의 자신의 불편이나 불리함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거기에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마저 편승하고자 하는 집요하고도 파렴치한 가부장의 권세가 있다.
그리고 결국 그런 '구조'에서 여성들은 피해자가 되고 만다. 욕창으로 점점 더 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어머니는 좀 더 나은 '케어'를 받을 수 있는 '조건' 대신 아버지의 편의를 위해 집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딸인 지수는 언제나 1분 대기조처럼 달려오곤 한다. 그녀 자신이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없는 가정에서 말조차 못하는 어머니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 그리고 그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손으로 어머니가 잡아주는 장면은 모녀의 '난감한' 처지를 비감하게 드러내 보인다. 반면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핑계로 이 '책임'에서 자신들을 방기한다.
강애심이라고 다를까. 아픈 남편, 무능한 아들을 대신하여 손주를 키우기 위해 이곳까지 온 그녀는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헐거워보이는 '사기'의 그물에 취약하고, 강창식 씨의 욕망 앞에 역부족이다. 딸기 한 알의 시큼한 맛이, 나길순 씨 옷장의 오래된 머플러 한 자락으로 달래지기엔 기구한 운명이다.
부모님 세대가 노인이 되어가면서 불가피하게 맞이하게 되는 <욕창>의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의 전개는 각 가정이 저마다 '역사'로서 지녀왔던 모순적 가족 관계를 답습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픈 환자의 문제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 곪아들어가고 있는 건 해묵은 가족의 지체된 역사다.
가족 해체의 시대이다. 월간 8천에서 1만 부부가 이혼을 한다고 한다. 연간으로 보면 11만 쌍의 부부가 헤어진다. 꼭 이혼만이 아니다. '조혼'처럼 법적 장치를 거치지 않고 부부가 자유로워지는 새로운 '관행'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보다 더 '해체'의 조짐으로 드러나는 건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젊은이들이 '결혼'을 더 이상 인생에 꼭 필요한 통과 의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또한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고자 하는 등 '가족'의 형태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렇게 '가족'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어가고 있는 즈음, <(아는 건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이제 절반을 넘어서 '절정'에 이른 드라마는 가족 저마다에게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며 '가족'의 한계, '가족의 끝을 묻는다.
비밀은 없다 머리를 다쳐 22살로 돌아간 아버지 김상식(정진영 분)씨가 어머니 이진숙(원미경 분)씨에게 제일 먼저 확인한 건 바로 그리도 애지중지 키웠던 큰 딸 은주((추자현 분)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조차 모르는 22살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확인차 물어봤던 이 질문, 그 질문을 그만 막내 지우(신재하 분)가 듣고 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자신이 들었던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막내는 그 사실을 가족같은 형 찬혁(김지석 분)에게 털어놓는다. 그 때만 해도 그저 막내만의 가슴터질 것같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 비밀은 22살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추억 순례 여행에 동참한 둘째 은희(한예리 분)에게 강한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거실에 자리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의 그날, 어머니 손을 처음 잡아봤다던 아버지, 그런데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는 이미 큰 딸 은주가 있었던 것이다.
은희의 기습적 질문에 수습은 커녕 망연자실하고마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진실에 한 발 다가서게 된 은희는 당사자인 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을 종용하고, 어머니는 결국 은주에게 고백하고 만다. 아이를 가진 21살의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을.
은주가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가족의 판도를 바꾼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이며 어머니에게 횡포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 아버지로 인해 늘 어머니의 편이었던 은희는 어쩐지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반면, 자신을 편애하다시피 아꼈던 아버지의 자부심넘치는 큰 딸이었던 은주는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보인 아버지의 태도가 자신을 볼모로 삼은 정신적 폭력이라 느끼며 아버지에 대해 분노한다.
여전히 우리는 가족이며 형제라 하지만 어머니와 은주에게 어쩐지 거리감을 느끼는 은희와 지우, 그런 은희에게 은주는 이제 더는 자신이 이 집의 가족일 수 없음을 선언하는 은주. 어머니의 졸혼 선언에 이어 가족은 다시 한번 '가족의 경계선'으로 밀려난다.
가족의 한계는 어디일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족들을 불러모은 아버지는 오래전 자신이 저질렀던 교통 사고를 고백한다. 당시 보험을 들지 않아 엄청난 보상금은 물론, 구속이 될뻔한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교통사고로 다쳤던 아이를 이제 커서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까지도 '자식'처럼 돌보아 왔던 무거운 짐을 토로한다.
하지만 홀가분하게 집을 나서겠다는 아버지의 의도는 식구들에게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자식'처럼 돌보아왔던 그 '피해자'가 아버지를 애틋하게 여기는 것과 달리, 하지만 정작 아들인 지우는 바깥으로 도는 아버지의 정을 느끼지조차 못한 채 자랐던 설움이 폭발한다.
어머니는 더하다. 그토록 자신과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해 주던 남편이 어느 날인가 부터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던 그 시절 이래, 어머니 진숙 씨는 남편을 견디며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았다. 어머니가 본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 밖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들어 놓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제 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과일 가게 사장님의 부인을 간병한 걸 그 남편과 바람이 난 거라고 아버지가 오해한 것처럼. 그러나 어머니는 용납할 수 없다. 당시에 아버지가 어머니와 단 한번도 상의하지 않은 채 홀로 그 일을 짊어져왔다는 사실이.
은주는 왜 함부로 사람을 책임지려 했냐고 냉정하게 반문한다. 그 질문에는 아버지가 홀로 짊어지며 가족을 소외해 왔던 시간이, 그리고 그 교통사고만이 아니라, 자신을 가진 어머니를 책임지려 하며 아버지가 느꼈던 '소외의 시간'에 대한 힐난이 담겨져 있다.
은주는 결국 '커밍아웃'을 한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말한다. 인기를 끌었던 <부부의 세계>처럼 지금까지 대부분의 가족 드라마들은 불륜이나 외도 등을 가족 해체의 주요인이라 말해왔다. 그런데 <가족입니다>는 그런 '사건'을 넘어 가족의 본질을 묻는다.
가족이라는 삶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저마다 홀로 짊어졌던 책임의 무게를 드러내며 과연 그렇다면 가족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아버지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교통사고를 오랜 시간 책임져왔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를 아내와 가족에게 쏟아부었다. 성정체성이 다른 남편은 아내에게 오랜 시간 위선의 부부 행세를 했다. 거기에 더해 피를 온전히 나누지 않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 그에 반해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가족처럼 지내온 사이, 그리고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친구 등을 통해 그렇다면 가족은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리고 과연 그럼에도 가족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한다. 그래도 아는 건 없어도 가족일까?
티비 조선의 사극 <바람과 구름과 비>가 6월 27일 12회 방영분이 6.327%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다. 이제 중반을 넘어선 12회, 이야기의 진행 과정으로 봤을 때 제작진이 희망했던 10%의 고지도 예상해 볼만한 기세다.
<바람과 구름과 비>가 토, 일 밤 11시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공중파 드라마도 4%만 넘어도 중박이라고 하는 열악한 시청 환경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간 제작비 등으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정통 사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갈증이 해소됐기 때문일까? 매회 그리고 한 씬, 한 씬 허투루 넘어가는 장면이 없는 제작진의 정성, 거기에 더한 배우들의 열연은 그간 '사극'에 목말랐던 시청자들의 마음을 흡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역사가 '스포'가 돼듯 세도 정치와 무능한 권력으로 인해 사그라들어가는 조선 말의 역사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소재이다. 그런 익숙한 소재를 '점바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주 명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통해 재해석하고 있는 <바람과 구름과 비>는 정통 사극의 새로운 변주로 역사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며 호평을 얻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변주'의 성격에 있어서 드라마는 '옛 것을 통해 오늘을 살펴보고자 하는' '온고지신'의 배움이 가득하다. 특히 12회에 등장한 조선을 뒤덮은 역병은 아직까지 '코로나 팬데믹'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거울이다.
왕재를 둘러싼 파워게임 후사가 없던 철종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이하전(이루 분)은 부당하게 재산을 축적했다는 이유로 장동 김문의 김병운(김승수 분)을 공격했지만 외려 그의 농간에 결국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고 만다.
그를 앞세워 자신은 물론, 자기 가문의 앞날을 보전하려 했던 신정왕후 조씨(김보연 분)은 그만 자리를 보전하고 눕고 마는데, 그런 대비 앞에 송전이라는 점바치가 철종 이복 형님 아들이라는 영운군을 데리고 등장한다. 자신이 애정했던 이하전과 똑같은 사주에다, 그와 비슷한 흉터까지 영운군, 그에게 마음을 빼아겨 버린 대비는 철종에게 어서 빨리 후사를 정하라 재촉한다.
거기에는 앞서 최천중(박시후 분)이 왕재라 천명한 이재황(박상훈 분)의 아버지 이하응에 대한 견제 심리와, 보다 만만한 영운군을 앞세워 대비의 가문인 조씨 가문의 득세를 기도하고자 하는 '권력욕'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등장한 영운군 뒤에는 정작 실세 장동 김문이 있었으니, 후사를 둘러싼 파워 게임의 향배는 점입가경이다.
이에 철종은 이재황을 왕재라 천명한 바 있던 최천중을 부른다. 과연 누가 진짜 왕재인가를 둘러싼 두 점바치 최천중과 송전의 갑론을박, 이에 두 사람이 나라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놓고 그들이 선택한 왕재의 진실성을 결정하기로 한다.
송전이 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라의 앞날이 태평성대가 될 것이며 세손까지 올해 안에 볼 것이라 장담을 한 반면, 최천중은 최근 한 달간 천기를 살펴본 결과 나라에 역병이 돌 것이라 예언한다. 발칵 뒤집힌 조정, 이미 철종 3년에 역병으로 한바탕 나라의 위기를 겪은 조정은 최천중의 예언을 놓고 그의 목숨을 겁박한다.
최천중은 왜 불길한 예언을 했을까? 그런데 왜 최천중은 철종의 앞에서 가장 불길한 운세를 예언했을까? 거기에는 이미 빈촌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 역병이 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 하지만 이를 담당해야 할 혜민서와 한성부의 관리들은 팔짱을 낀 채 강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그 사실을 알아야 하는 철종이지만 실세인 장동 김문의 방해로 '보고'의 계통조차 막혀 있는 상황, 이에 천중은 차기 왕재를 가리는 자리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왕에게 역병에 대한 대비를 '충언'한 것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또한 역병을 둘러싼 권력의 민낯을 까발린다. 역병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고 이 치료에 필요한 예산이 필요한데, 그 긴급성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장동 김문은 빈촌은 습해서 역병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며 콧방귀를 끼며 일축한다. 한 술 더 떠 나랏돈을 쓸데없이 백성들에게 쓰지 말란다. 그들에게 나랏돈은 자신들의 뒷배이지 백성들에게 쓸 돈이 아니다.
이렇게 권력의 실세와 그 밑의 관리들이 빈촌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역병에 대해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상황은 김씨 세도의 조선이 왜 '침몰하는 배'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
그렇게 '권력'의 중심이 백성의 일에 팔짱을 끼고 있는 상황에서 역병의 중심지로 달려간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의 캐릭터로 보자면 고개를 꺄우뚱하게 되지만 가난한 아이들을 보살펴 온 민자영이, 그리고 그의 청을 받아 봉련이 빈촌으로 달려간다.
봉련이 던진 왜 너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민자영은 장동 김문에 의해 부숴지는 유접소를 구하기 위해 나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던 천중의 말을 대신한다. 그리고 그렇게 민자영을 감화했듯이 천중은 그 자신의 돈으로 전국 방방 곡곡에서 구한 역병 치료약을 구해 등장한다.
앞서 강가에서 천문을 보고 역병을 예감한 천중은 자신의 오른팔인 용팔용에게 미래를 묻는다. 침몰하는 배, 그곳에서 탈출할 것인가, 그 침몰하는 배에 탄 사람들을 구하려 애쓸 것인가. 멸문지화를 입고 홀로 살아남아 사주 명리학을 익히며 이미 조선의 운명을 예감한 천중, 그가 말하는 침몰하는 배는 바로 권문세족의 횡포로 침몰하는 조선이었다.
침몰하는 조선에서 탈출하는 대신, 그곳의 사람들을 구하기로 결심한 천중은 그의 혜안으로 역병 치료약을 구하는 등 역병에 대비한다. 하지만 그런 천중의 '선한 의도'에 대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장동 김문 등의 조정은 외려 천중이 역병을 퍼뜨렸다는 '마타도어'로 대응한다. 역병 치료에 앞장섰지만 외려 잡혀가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누가 왕재인가? 12회, 과연 누가 왕재인가로 시작된 <바람과 구름과 비>, 역병이 돌자 이하응은 지금 왕재를 논할 때가 아니라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역병의 역습은 과연 누가 진짜 '왕재'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만든다.
기생의 치맛자락 밑을 기며 온갖 수모를 참아내며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왔던 이하응, 예산 편성을 해주지 않는 김문에게 분노하고, 복지부동하는 관리들에게 빈촌의 진흙 세례을 퍼붓는 이하응이라면 충분히 여러 패착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다시 재건하고자 했던 대원군의 기세를 읽을만 하다.
그에 반해 그저 철종 이복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등장하여 대비를 등에 업은 영운군이야 말로 또 한 사람의 철종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바람과 구름과 비>는 그렇게 조정의 왕재 싸움 중에서도 역병에 대비하기 위해 왕에게 간언을 서슴치 않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역병 치료약을 사들인 천중의 행보를 대비시킨다.
봉련의 어머니는 천중에게 슬피우는 용이라 했다. 용이야말로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 아닐까. 혈통으로 '인증'받는 왕재의 나라에서, 그의 언행에 탄복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이 아래로부터의 움직임, 침몰하는 배에서 사람들을 구하고자 애쓰는 천중이야말로 그 시대에 진정 필요한 '왕재', 즉 리더가 아닐까. 알량한 혈통에 연연하며 왕재에 매달리는 조정은 침몰하는 배의 또 다른 반증이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보여지는 권력의 민낯은 그저 왕조 시대의 잔해라고 보아 넘기기에는 씁슬함을 남긴다. 그 반면 침몰하는 조선을 예감했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천중의 모습, 중반을 넘어선 <바람과 구름과 비>는 왕재를 둘러싼 파워 게임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조건을 묻는다.
ebs 다큐 프라임은 지난 6월 8일에서 부터 10일까지 3부작으로 <혼돈 시대의 중앙 은행>을 다뤘다. 왜 중앙은행이었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삼만리 여행을 떠났던 곳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고대 경제학과 김진일 교수와, 명지대 특임교수 박정호 교수가 찾았다.
이탈리아에 살던 마르코의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갔던 아르헨티나, 넓은 국토, 풍부한 자연 자원,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아르헨티나는 뉴욕만큼 꿈의 땅이었다. 그러던 아르헨티나가 한 해 54%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 상승을 기록하며 국가 부도 선언만 8차례나 하고 있는 위기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정부로 부터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통화량 조절에 실패한 중앙 은행이 있다.
중앙 은행이 뭐길래? 중앙 은행이 왜 중요한 것일까? 그건 바로 물가, 그리고 그 물가를 조절할 수 있는 돈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기 때문이다. 미 연방 준비 위원회가 만든 '금리 게임', 금리를 소수점 아래로 약간의 변화를 주기만 해도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이 요동친다. 즉, 중앙 은행이 어떤 금리 정책을 취하는가에 따라 한 나라의 경제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중앙 은행'의 역할이 다시금 '주목'되는 건 바로 글로벌 경제 위기 때보다 심각하다는 코로나 19로 인한 세계 경제의 위기 때문이다.
평소 수 천명의 사람들로 북적이던 뉴욕 타임스퀘어가 유령 도시처럼 조용하다. 당연히 경기는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실업률이 대공황 수준보다 심각하다. 미국만이 아니다. 강력한 도시 봉쇄 정책을 펼친 중국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하루 3,4천 위안을 팔던 가게가 하루 몇 백 위안의 장사를 하기도 쉽지 않다. 심리적 공포로 소비가 위축되고, 8천만 개에 달하던 법인 회사 중 10%에 달하는 8백만 개가 치명적인 위기에 빠졌다. 하나의 법인에 3만 여 명의 사람들이 고용되었다 했을 때 1600~ 2000 만 명의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올 판이다.
일본의 경우 47개 현이 비상 사태를 선언했다. 장기간 경기 침체로 인한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진 일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성장률이 마이너스 6%에 달했다. 가계 부채 비율이 높은 우리 나라, 코로나 팬데믹은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임시직들에게 더욱 심각한 고용 충격을 안기며 불안한 가계를 흔든다. 학습지 교사와 같은 특수 고용직 노동자의 경우 가계 지출이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끊는 현실에, 수수료를 내는 고용의 특수한 형태로 인해 경제 위기를 고스란히 교사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경제에 대한 위기감은 imf 이후로 가장 높아졌고 이런 불안감은 0.1%라는 역대 최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초래했고,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0.2%를 기록했다.ㅣ 저성장, 저물가의 길고 긴 터널이 예견되는 상황, 이에 한국 은행은 앞서 기준 금리를 0.75%로, 다시 0.5%로 인하, 이렇게 기준 금리가 낮아진 상황에서 더 이상 금리 인하를 통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자 국고채 매입 등 다양한 자산을 사들여 시중에 통화를 늘리는 '양적 완화' 카드도 고민하고 있다.
'양적 완화'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대응하여 주요 각국의 주된 경제적 정책이다. 역대 최저 이자율을 기록하고 있는 미국은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2조2천억을 쏟아부으며 경기 부양의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총량만 정해놓고 높은 금리를 받았던 환매조건부 채권(RP) 매입에 12조 이상을 쏟아부으며 경기 회생을 노리고 있다. 일본의 경우 국채, 은행채, 주식까지 중앙 은행이 나서서 매입하며 양적 완화에 앞서고 있다.
무엇보다 그간 미국은 경우 기축 통화인 달러를 찍어내며 공격적으로 자국의 경기 침체에 대응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달러 정책은 달러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그 대표적인 국가가 앞서 살인적인 인플레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이다.
'빵 좀 사줄 수 있나요?' 이제 거지들이 돈 대신 빵을 사달라고 한다는, 한때 복지 국가 반열에 올랐던 아르헨티나, 원자재 붐으로 국가 재정이 넉넉해졌지만 인프라를 늘리는 대신, 공무원을 늘리고, 에너지, 가스 등에 보조금을 늘리는 선심성 정책으로 재정 적자가 늘어났다. 그를 상쇄하기 위해 들여온 외채는 결국 페소 가치의 하락을 결과했고 높은 인플레로 국민 3명 중 1명 꼴인 340만이 빈곤층이 되어버린 국가 부도의 현실을 맞이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김포에서 수출입 장난감 업체를 하는 지훈 씨, 한대는 자체 생산 공장을 가졌지만 이젠 가격 경쟁력 때문에 중국 현지에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지훈 씨는 달러로 거래를 하기에 환율의 폭격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1200원에서 1290원으로만 올라도 90원의 손실분을 떠안아야 하는 수출입 업체의 현실, 그럼에도 가격 경쟁력 때문에 함부로 가격을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 바로 기축 통화 달러의 글로벌 시대의 현장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시대 중앙은행들은 '양적 완화' 외에 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중국의 중앙 은행은 금 매입에 나서고 있다. 달러를 대신할 대표적 안정적 자산으로 여겨지는 금, 그래서 경기가 침체되면 사람들을 금 매입에 나선다. 중국만이 아니다. 전세계 중앙 은행들이 금 매입양을 늘리고 있는 중이다.
위기가 곧 기회 또 다른 방식으로 중국은 위안화와 1;1 호환되는 디지털 위안화를 추진 중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중앙 집중식 금융 시스템에 반발하여 등장한 분산 원장(블록 체인) 기술인 비트 코인, 하지만 1분만에도 가격이 등락하는 엄청난 변동성으로 인해 '신뢰'성 있는 대안 화폐가 되고 있지 못하다. 이런 비트 코인의 불안정성을 보완하여, 현재 유통되는 화폐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디지털 화폐의 발행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정책은 다양한 포석을 지니고 있다. DCEP, 즉 디지털 전자 화폐 결제 시스템은 국가가 돈의 흐름을 들여다 볼 수 있어 금융 시장의 중앙 통제가 용이한 방식이다. 거기에 위안화를 디지털 기축 통화의 선두 주자로 하여 글로벌 기축 통화인 달러에 대응하고자 하는 야심 또한 내포되어 있다.
중국과는 또 다른 이유에서 디지털 화폐를 시도하고 있는 국가가 있다. 석유가 폭락으로 인한 물가 상승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가 그 주인공이다. 화폐 가치 몰락으로 학교에 선생님이 떠나가는 상황, 그래서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미 신뢰성을 잃어버린 현실 화폐 대신 공무원이나, 은퇴 공무원들에게 연금대신 '페트로'라는 디지털 화폐를 나눠주어 새로운 DCEP 시스템을 시험해 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위기, 이에 중앙 은행은 '양적 완화' 카드까지 내밀며 침체에 빠진 경제를 구해내는 정책을 쓰는 한편, 또 다른 한편에서 그 위기의 상황을 미래에 대한 포석으로 삼기 위해 디지털 전자 화폐 시스템 도입등의 신기술을 시험해 보고 있다.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미국의 대공황과 일본의 장기 불황의 뒤에는 중앙 은행의 '실수'가 있다고 단언한다. 미 연방 준비위원회는 금리를 내려도 불확실한 판에 금리를 인상하는 등 긴축 정책을 펼치는 한편, 은행들의 파산을 방치하며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산 시장 버블이 붕괴되던 90년대 초반 일본 중앙 은행이 금리를 즉각 인하했다면 일본 경제가 그토록 긴 불황의 늪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통화 정책의 키를 쥐고 있는 중앙 은행의 정책이 한 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위기일수록 그 '키맨'의 역할은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아르헨티나의 사태에서도, 베네수엘라의 위기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중앙 은행의 '독립성'이다. 2009년 정부의 화폐 발행에 반대하던 중앙 은행장을 해고해버린 아르헨티나는 결국 국가 부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종종 미국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미 연방 준비위원회 의장의 '권위'가 바로 중앙 은행의 독립성을 대변한다.
'지 밖에 몰라', 아마도 이 말에 '가정'을 꾸리고 살아온 많은 아내들이 감정을 이입하지 않을까. 그건 살면서 몇 번은 속으로, 혹은 혼잣말로 되뇌였던 '남편'을 향한 '대사'였으니. 분명 남편과 아내가 하나의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것임에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저런 감정이 느껴지게 된다.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어떻게든 잘 꾸려나가기 위해 아내가 자신의 시간, 노력 등등 자신의 어느 부분을 던져가는 반면, 어느 지점에서 그 '가장'의 위세로 자신을 고집하는 지점에 맞닦뜨릴 때 그 막막한 벽 앞에서 느껴지는 좌절감의 표현일 것이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 세대에서 이런 일이란 '일상'의 풍경이었다. 이제와 '졸혼'이 등장했지만, 그 '졸혼'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들이 지 밖에 모르는 남편을 '내 편'이 아닌 '남의 편'이라 '자조적'으로 퉁치며 견뎌왔다. 젊은 세대에 와서 많이 달라져 육아의 부담을 나누고, 공동체적 합의에 충실하려 하지만 그 비율이 만족스러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노력이 필요한 상황일 것이다. 세대를 달리하지만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남성, 이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는 아버지 김상식 씨와 사위 윤태형을 통해 세대 별 남성상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뒤늦은 오열 6회, 돌아온 남편 김상식(정진영 분) 씨는 이제 기억이 돌아왔다며 아내 이진숙(원미경 분) 씨에게 '졸혼'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내 이진숙 씨는 그런 남편 김상식 씨가 수상하다. 아니 수상할 뿐만 아니라 이제서야 홀가분하게 자신이 짊어져왔던 가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나 싶은데 22살이 되었던 김상식씨로 인해 자꾸만 옛 생각이 떠오르며 싱숭생숭해진다.
하지만 사실 김상식 씨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아내에게 졸혼을 하자고 했을까? 전부는 아니지만 단편적으로 그를 스쳐가는 자신의 지나온 나날들, 그는 첫 딸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하던 날 먼저 상에 앉아 음식에 손을 대는 그를 말리는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집을 나서던 지 멋대로인 남편이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아내에게 동료 말에 따르면 그 돈으로 어떻게 형수님이 아이들을 키웠는지 놀랍다고 할 만큼의 생활비를 주던 인색한 남편이었다. 그렇게 생활비에 쪼달리는 아내가 사들고 온 과일에 분노하며 유리창을 깨버리는 안하무인의 남편이었다.
남의 아이를 가진 진숙 씨에게 무릎 끓고 청혼을 했던 상식 씨가 변해 버린 그 어느 날 부터 상식 씨는 가정의 폭군이 되어 살아왔다.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만으로 군림했다. 아내보다 못배우고, 점점 자라는 아이들에게 부족한 듯한 자신의 모습을 이른바 '열폭'으로 표출했다. 말은 칼보다 날이 섰으며, 눈길만으로도 아내를 자지러지게 했고, 분노한 그의 손에 남아나는 게 없었다.
이제 다시 22살이 되어버린 상식 씨는 그렇게 지 멋대로, 안하무인으로 그토록 사랑했던 진숙 씨를 괴롭히며 살아온 자신의 지난 날을 견딜 수가 없다. 오열했다.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진숙씨를 그렇게 괴롭힐 수가 있나 하며.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진숙 씨가 원하는 대로 '졸혼'을 하기로.
잘못꿰어진 결혼, 뒤늦은 결심 여기 또 한 사람 '졸혼'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상식 씨의 첫 째 사위 윤태형(김태훈 분)이다. 뉴질랜드로 세미나를 가겠다던 그는 아내 은주(추자현 분)가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노트북을 놔두었다. 그 노트북에는 아내에게 '커밍 아웃'을 하는 채팅창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갔다는 그는 어릴 적부터 도망치곤 하던 소록도로 갔다.
왜 아내 은주와 결혼을 했느냐는 처제의 질문에 아내 은주도, 자신도 집으로 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의사가 되었던 태형은 남들이 보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다. 한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 없는 것같은. 그래서 자신을 얽어매는 집으로 부터 도망치듯 아내를 방패삼아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은 그에게 또 다른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아내를 아이를 가지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그런 아내를 지켜보는 한편, 자신의 정체성을 '가정'으로 회피하는 자신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는 분노한다. 자신을 방패막이로 삼았음을, 그리고 그 비겁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채팅창으로 알렸음을.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그 시간을 방조했던 그 치사함을. 늘 도망치고 회피하고 살아왔던 삶에 대해 질타하는 아내에게 분노했지만 떠난 아내의 뒷모습에 처참하다. 편의적으로 회피하여 온 삶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아내, 잘못꿰어진 결혼이 남긴 상흔이 깊다.
김상식 씨도, 경우는 다르지만 사위 태형도 결혼이라는 함께 꾸려가야 할 삶을 자신의 멋대로 재단해버린 결과에 봉착했다. 22살의 여린 청년이 되어버린 김상식씨에게는 괴물처럼 느껴지는 자신이 살아왔던 날들, 뒤늦게라도 되돌리려하지만 너무 큰 상처를 받은 아내, 과연 그들이 이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삶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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