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난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획기적인 영화 한 편을 들고 등장했다. 올해 8월 재개봉한 <인셉션>이다. 누군가의 꿈에 잠입하여 꿈꾸는 자의 무의식에 정보를 심고, 그를 통해 현실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가는 '팽이'로 상징되는 '토템'과, 꿈의 상황을 상징하는 엿가락처럼 휜 도시의 영상으로 기억된다. 프로이트를 통해 현실 세계에 문을 두드린 '무의식'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영화적 상상력의 신선한 영역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학적 성과'를 영화적 서사의 주요한 장치로 활용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셉션>에 이어 2014년 170분이라는 긴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우주 과학'의 붐을 일으킨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비행사 쿠퍼는 환경 오염으로 인해 멸망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하여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답을 구한다.
그리고 이제 2020년 과연 이번에는 어떤 '과학적 성취'를 들고 올 것인가 하는 기대에 걸맞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과연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하며 관객들을 '아노미' 상태로 빠뜨릴 정도로 '엔트로피'를 비롯하여, 평행 우주 등등 최신 과학 이론들이 진수성찬을 이룬다.
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과한 이론적 나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당부는 명쾌하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과연 무엇을 느끼라는 것일까? 여기서 뜬금없지만 오랫동안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 영국 SF시리즈 <닥터 후>가 떠오른다. 닥터 후는 이제는 사라진 미지의 별에서 온 외계인이다.
겉보기에 전화박스로 보이는 우주선을 타고 외계와 지구,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 드라마에서는 <테넷>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과학적 이론들이 등장한다. 평행 우주 정도는 당연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SF적 장치를 관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살던 외계의 멸망을 지켜본 닥터 후가 지구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에 개입하며 지구의 불행을 막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먼저다'
마찬가지로 <테넷> 역시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건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종횡무진 활약기다. 첫 장면 무려 4300 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했다는 엄청난 규모의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은 CIA 일원으로 잠입하여 암살당할 뻔한 요인을 구출하고, 214라고 칭해지는 '무기(?)'를 빼돌리는 작전에 투입된다.
오페라 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이 최면 가스에 모두가 잠이 든 상태에서 곳곳에 시한폭탄이 놓여진 상황, 이미 자신들의 임무가 완수되었기에 굳이 그 상황에 개입할 필요가 없음에도 주인공은 홀로 남아 사람들을 구하고자 분투한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 적에게 체포된 상황에서 동료들과 작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던가.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주인공은 '의문의 단체'에 구출되어 미래에서 온 미지의 적으로부터 3차 대전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이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이 <테넷>을 이끌어 가는 근간이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액션과 그보다 더 현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버전'의 장치들 사이를 오가며 작전을 수행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전'의 결정적 순간에 '사람'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오페라의 관객들이요, 아들을 지키려는 여주인공인가가 다를 뿐이다.
그렇게 '사람'을 중심에 둔 주인공의 활약, 거기에 또 하나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이다. 영화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되풀이 하여 말한다. 내가 상황을 주도하겠다고. 어쩌면 <테넷>에서 가장 결정적 '스포'가 될 대사는 '인버전'도 '엔트로피'도, '프리패스'도, '알고리즘'도 아니라, 바로 매번 주인공이 말한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말이다. 그의 '주도성'은 결과적으로 영화 <테넷>을 가능토록 만든 '동인'이다. 그 동인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지구를 멸망에 이른 '적'들에 대항하여 지구를 지켜낸다. 바로 이런 주인공의 사명감이야말로 '교리'라는 의미를 지닌 '테넷'으로 이어진다. 작전이 아니라 사명감, 모험이 아니라 인류애가 결국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느껴달라는 '요점'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적 주체성의 맞은 편에 지구 멸망의 키를 움켜 쥔 케네스 브래너가 분한 사토르가 있다. 사토르 마방진 첫 줄의 단어, 사토르는 러시아로부터 버려진 땅에서 플루토늄을 채취하며 살아남아 불법 무기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지만, 그런 자신의 부를 지구 멸망의 군불로 삼는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세상의 운명을 그 자신의 '맥박'에 맡긴다.
자신이 없어도 인류는 세상은 존재해야 한다는, 환경 오염 등 많은 오류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주인공과 내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는 사토르, 두 가치관은 사토르를 매개로 하여 지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미래의 적'이 한 도발을 통해 '현재'에서 충돌한다. 사토르 마방진의 대각선 글자인 '테넷(TENET)'은 글자에서 보여지듯 앞과 뒤가 같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매개로 마주한 과거와 현재이다.
'인버전'된 시간 속에서
그런데 여기서 조우하게 된 과거와 현재는 이전에 우리가 알던 시간 여행의 의미와 다르다. 시간 여행이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뛰어넘거나 역행하는 과정이라면, '인버전'이라는 장치를 통한 <테넷> 속 시간의 흐름은 거꾸로 주행하는 자동차, 쥐는 것이 아니라 놓아야 손으로 튀어 오는 총알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되 그것이 현재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통해 미래의 세력은 '현재'에 개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테넷> 속 지구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의 역설'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가서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할아버지의 손자는 미래에 '존재'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할아버지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손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테넷>은 거기에 평행 우주론을 등장시키며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그 '역설'에 변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변수'가 결국 오페라 극장 이후 오슬로, 에스토니아, 그리고 최후의 결전지가 되는 러시아 사토르의 폐허가 된 고향 마을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는 '인버전'된 인물과 현재 인물들의 교차된 행보을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3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원인과 결과, 하지만 영화는 <인셉션>처럼, 하지만 다른 '과학적' 성취에 기반하여 그런 '사고'의 패턴에 이의를 제기하며 미래와 현재를 연결한다. '일어날 일'의 시작은 현재일까? 미래일까? 뒤엉킨 '시간'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그럼에도 주도적으로 '삶의 선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런 '선의'의 끝에서 <테넷>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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