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은 국회의원 총선거였다. 결과는 압도적인 여당의 승리, 외신들과 언론들은 '코로나 19'에 시의적절하게 대처한 정부의 성과라 입을 모은다. 아직도 전세계적가 이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회적 격리를 해제할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위기의 파고에서 한 발 물러나있다. 여러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3차 대전에 맞먹는 위기 상황을 잘 대처해 낸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국가'의 존재를 실감시켜준 여당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4월 16일, mbc는 이승준 감독의 <부재의 기억>을 방영했다. 2020년 92회 아카데미상 수상식, <기생충>에 앞서 호명되었던 우리나라 작품이다. 29분의 영상,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작으로 선정된 <부재의 기억>,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후보작이 된 5작품 중 유일한 외국 작품이었다,

지난 2009년 <달팽이의 별>로 서울 국제 청소년 영화제 SIYFF 관객상, 2011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승준 감독, 감독이 미국의 한 다큐 플랫폼  회사로 부터 촛불 집회와 관련된 다큐를 제안받으며 <부재의 시간>은 시작된다. 이에 어떻게 세월호가 촛불 집회까지 이어지는가를 설명하고,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와 4.16 기록단과 함께 다큐를 제작한다. 

 

 

고통이 남아있는 한 고통은 계속 얘기되어야 한다
다큐의 시작, 아직 수학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레이던 그 상황이 남겨진 가족들의 상황극으로 재연된다. 그저 '수학 여행'을 다녀오는 것일 뿐, 그것이 꿈에서도 다시 만나기 힘든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몰랐던 아이들과 가족들은 여느 가족들처럼 그 시간을 맞이한다. 용돈이 주느냐 마느냐, 웬 용돈을 이렇게 많이 주느냐, 엄마보다 친구들이 그렇게 좋냐는 등 그 스스럼없는 대화들은 고스란히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멍에로 새겨진다. 아이들이 남긴 말을 읊던 가족들을 끝내 대사를 마치지 못한다. 

그렇게 잘 다녀오겠다며 웃으며 떠난 아이들은 4월 16일 당일 배가 좌초되고 있다는 신고가 되고 배가 기울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밝게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며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 이만큼 기울어 졌어요라며 아이들이 찍어 보인 세월호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 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방송은 침착하게 대기하라 하고 아이들은 저렇게 가만히 있으라 할 때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농담처럼 서로 주고 받는다. 

그렇게 배가 기우는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설마  해경이, 그리고 국가가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어른들이 자신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하면서도 지시에 따르던 아이들은 결국 해경과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배가 가라앉아 버리고 민간 잠수사들이 솔선수섬하여 아이들을 구하러 들어갔을 때 2인실에 7,8명이 모여, 작은 창에 머리를 끼워 넣으며 살려고 발버둥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다큐는 세월호가 좌초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된 그 순간부터의 당시 상황과 그 상황을 기억하는 부모, 생존자, 잠수부들의 증언을 오가며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전한다. 하지만 담담하게 보여준 그 시간 속에 '국가'는 없었다.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배가 좌초된다는 신고는 이미 접수받았다는 무책임한 응대로 이어졌고, 해경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제 때 상황실에 나타나고 제 때 해경이 현장에 출동하기만 했어도,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살렸으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 제대로 구할 수만 있었으면' 하고 아쉬운 맘을 접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관홍 잠수사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개 민간 잠수사조차 그 책임감과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 국가는, 책임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다큐는 묻는다. 

이에 해외 관객들도 일찌감치 공감, 2018년 뉴욕 다큐멘터리 영화제(DOC NYC)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아카데미 상의 후보로 예견되었다. 또한 미국 영화 협회 다큐멘터리상( AFIDocs) 단편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제 때 대처만 했다면 그 수많은 목숨들이 '바다'에 묻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다큐를 본 사람이라면 국적을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공감하고, 그래서 국가의 부재에 대해 분노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 시키고서도 대통령 앞에서 보여지는 '그림'에 연연하는 관계자들, 국회에서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사람들, 왜 사람들이 그 추운 겨울 거리로 나서 촛불을 들었는지 다큐를 보면 인과 관계가 명백하게 설득된다. 드디어 2016년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아이들이 사라진 그곳에 없었던 국가는 그렇게 '심판'되었다. 

 

 

그리고 2017년, 3년 만에 세월호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울부짖는 유가족들, 그곳에서 뒤늦게나마 배의 잔유물로 돌아온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그날의 진실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부재의 기억>이 아카데미 상에 노미네이트 된 사실에 대해 '단순한 영화 하나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게 아니라, 전 세계 영화 관객들이 세월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20분을 더해 감독판으로 방영하게 된 이승준 감독은 시간적 제약으로 인한 아쉬움을 달랬다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없었던 그 당시'를 통해 시민들이 보호받는 안전한 사회, 시민들을 보호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논의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감독의 말처럼, 이제 2020년에 본 <부재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건 이제는 부재한 사람들을 통해, '부재한 국가'에 대한 상흔이다. 그러기에 세월호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되새김해야 할 '과제'다. 

by meditator 2020. 4. 17. 15:20

코로나 19로 우리 영화의 신작 개봉이 주춤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만과 일본의 작은 영화들이 오래된 고전 영화들의 리메이크작들 가운데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거의 매주 새로운 신작으로 찾아오는 일본 영화들은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져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3월 개봉한 <모리의 정원>에 이어, 4월 9일 개봉한 <선생님과 길고양이>, 그리고 23일 개봉할 <고양이와 할아버지>는 모두 '노년의 삶'에 촛점을 맞춘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장르일 터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기엔 우리 역시 급격하게 고령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서 <선생님과 길고양이>는 과연 어떤 노년의 삶을 그려내고 있을까. 

 

 

독고다이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은 오늘도 바쁘시다. 소일 삼아 모여 게이트볼을 하는 동네 노인들이 함께 하자 불러도 교장 선생님은 바쁜 일이 있어서라며 가던 걸음을 서두른다. 사실 이젠 교장 선생님도 아니다. 정년 퇴직을 하셨다. 다니는 직장도 없는데 뭐 그리 바쁜 일이 있을까.

서둘러 교장 선생님이 들른 곳은 다름 아닌 동네 빵집이다. 어제 사간 빵맛이 예전과 다르다고 한 입 베어물은 빵을 들고 오셨다. 그 말을 들은 빵집 주인은 좌절한다. 빵이 잘 팔리지 않아 버터를 조금 더 싼 것으로 바꾸었는데 매일 빵을 사가는 단골이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결국 더는 빵집을 계속할 수 없겠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그런 빵집 주인의 '안타까운 상황'에도 교장 선생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런 식이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물론 같은 마을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교장 선생님은 '소통'하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와 교장 선생님이 찍은 '마을의 역사'가 될만한 사진을 정리하는 젊은이와의 대화에서도 교장 선생님은 동문서답, 젊은이 말처럼 '마이 페이스'일 뿐이다.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교장 선생님의 제자여서 반가이 인사를 하고, 교장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추억하고, 적어준 문구를 상기하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아니 '소통'이라는 걸 아는가 싶은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하다. 영화 후반 나오는  교장 선생님의 고백처럼 한때는 애도 많이 써봤지만 교장 선생님이 된 후 그 직책에 갇혀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았던 그 습성이 이제 그 누구와도 접점을 찾기 힘든 사람으로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만난 상당수의 어르신들의 또 다른 모습과도 같다.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 속에 갇힌 채 현실과 마주하지 않는 모습이 말이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의 일상은 무엇으로 바쁠까. 빵을 바꿔온 선생님은 아내의 영전에 빵을 놓는다. 그리고 빵 한 조각과 함께 한 식사 후 교장 선생님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다. 노년의 일상을 '헌신'한 러시아 작품의 번역, 그런데 알고보면 '꼭'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 무료할까봐 출판사에서 심심풀이삼아 해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위해 분주하게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하루를 보낸다. 

그런 교장 선생님의 정적을 깨뜨리는 방해꾼이 있다. 다름 아닌 고양이다. 그것도 길고양이.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내는 길고양이를 집고양이처럼 아꼈다. 그래서 늘 같은 시간이면 고양이는 찾아와 아내에게 밥을 얻어먹고 자기 집처럼 쉬다 갔다. 이제는 아내는 없지만 고양이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찾아온다. 고양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문을 통해 아내의 영전 앞에 앉아있는 길고양이. 

그런 고양이를 볼 때마다 교장 선생님은 자꾸만 아내와 함께 하던 시절이 떠올라 못견뎌 한다. 홀로 러시아 문학과 씨름하며 보내는 일상에서 길고양이는 유일한 방해꾼이자, 참견꾼이고, 그 마저도 교장 선생님은 거부한다. '추억'마저 고통이라 여기며. 몰두하지만 딱히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간, 스스로 고립된 시간은 교장 선생님으로 하여금 자꾸 '과거'에 매몰되도록 만든다. 결국 견디다 못한 교장 선생님은 그 추억을 유일하게 길어오는 고양이를 내쫓는다. 

솔라, 치히로 혹은 미의 실종 사건  
솔라, 치히로, 혹은 미, 이건 고양이의 이름이다. 길고양이로 이 집 저 집, 혹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붙여준 이름, 붙임성 좋은 고양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건 상관없이 반경 500미터의 자기 영역을 날마다 '순시'하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영역 동물'인 고양이를 그 한 영역에서 교장 선생님이 쫓아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댁에서 쫓겨난 고양이가 마을 전체에서 그만 사라졌다. 

안그래도 고양이를 수장시킨 사건에, 길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벽보까지 붙여서 걱정스러워 고양이 목에 방울 목걸이까지 달아주었는데 그 고양이가 사라졌으니 고양이 밥을 챙기던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걱정스러워하는 건 뜻밖에도 교장 선생님이다. 그저 자신은 아내가 떠올라 고양이를 내쫓았을 뿐인데 고양이가 사라지자 교장 선생님은 '야옹~'하며 고양이를 찾아 온동네를 헤맨다. 

고양이가 들어올 까봐 작은 문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바르고 부엌 문마저 막아놓았던 교장 선생님은 자신 때문에 고양이가 사라지자 그 '바쁘던 일상'을 놓고 고양이 찾기에 나선다. 심지어 애지중지하던 영전의 아내 사진마저 고양이를 찾기 위한 '미끼'가 된다. 죽은 아내와 번역, 그렇게 교장 선생님의 일상을 채웠던 중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고양이 앞에 하찮은 것이다. 영화는 반문한다. 나이듦의 시간을 채우는,  '집착해마지 않는 나의 것'들이 정말 그토록 애지중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냐고. 

교장 선생님만이 아니다. 작은 바닷가 어촌 마을, 저마다 고양이와 접점을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고양이가 실종되자, 그 접점을 상실하며 뜻밖에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학교를 중퇴하고 고양이 밥을 주던 세탁소 점원은 밥을 주던 그 시간이 쉴새없던 세탁소 일을 하던 자신에게 '휴식'과도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밤마다 벤치 아래 고양이를 반기던 소녀에게는 왕따로 괴로워 죽으려 하던 그 순간 자신의 발밑에서 울었던 고양이가 생명의 은인이다. 이렇게 그저 '길고양이'였지만, 그 '길고양이'는 저마다의 삶에 짖눌렸던 사람들에게 '쉼표'와도 같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고양이 부양 인구가 늘듯이, 그 작은 마을 사람들도 '사람' 대신 고양이에게 위로를 의탁하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고양이를 안고 부비며 유일하게 생기를 띠던 그 순간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고양이를 찾아나선다. 

 

 

그렇다면 고양이를 다시 찾았을까? <선생님과 길고양이>는 관객들마저 매료시킬 귀여운 고양이가 등장하지만 정작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고양이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고양이와의 접점을 사람과 사람의 접점으로 치환시킨다. 그 누구에게라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웠던 교장 선생님은 고양이를 잘 돌보지 않았다는 호통에 고개를 조아린다. 생전 드나들지도 않았던 미용실을 찾고 평소같으면 어울리지 않을 사람들과 고양이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밤거리를 헤매고 구르며 고양이를 찾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양이를 찾는 짧은 시간 동안 교장 선생님의 표정이 변한다. 와이셔츠는 흙투성이가 되고 다리는 절름거리지만 고루하기 짝이 없고 무표정이던 그 얼굴에 어쩐지 생기가 돈다. 

알고보면 'I can do it'을 사자성어처럼 졸업하는 제자에게 남길 정도로 위트가 넘치던 교장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일이 재미없었다지만 여전히 '선생님'으로서의 '촉'은 여전하신 분은, 고양이를 찾으며 그 문닫아 걸었던 자기 만의 공간에서 한 걸음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실종된 고양이를 매개로, 세탁소 점원과 미용실 주인 등 서로 다른 세대,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접점을 가지게 된다. 교장 선생님이 어렵기만 하던 젊은 세탁소 점원이 교장 선생님과 빵을 나눠먹는 일은 여사처럼 이루어 지고 세대간 높았던 권위의 벽을 알고보면 별 게 아니다. 젊은 남녀는 쑥쓰럽게 인사를 하고, 주먹밥을 나눠먹고 다시 내일 만날 것을 기약한다. 매일 학교를 땡땡이 치던 어린 소년이 교장 선생님의 손에 온기를 남긴다. 

나이듦의 시간은 숙제와도 같다. 그리고 그건 비단 나이듦을 짊어진 사람만의 숙제만은 아니다. 그 나이든 사람으로 채워진 사회, 그리고 그 나이든 사람을 부양해야 하는 젊은이들까지 불가피하게 모두의 숙제가 된다. <선생님과 길고양이>는 '해프닝'으로 부터 해법을 도모한다. 꼭 나이가 들어서만이 아니다. 서로가 자신의 고민 속에 빠져살며 저마다의 별에서 고뇌하던 '어린 왕자'와도 같던 사람들이 실종 사건을 계기로 서로 다른 별과 다리를 놓는다. 고양이가 귀여워 찾아들어 사람들의 관계와  나이듦의 과제를 새로이 받아들고 나오는 영화, <선생님과 길고양이>다. 

by meditator 2020. 4. 16. 15:23

정재승 교수가 프리젠터로 참여한 <ebs 다큐 프라임 - 뇌로 보는 인간>은 '돈'으로 부터 시작하여, 폭력, 예술, 섹스를 거쳐, 5부 종교에 이르렀다. 정재승 교수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5부 종교 편이 가장 논란이 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 이유는 바로 아직도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종교, 그리고 그 종교의 수장인 신에 대해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계적 인간이 만들어 낸 신 
그 시작은 인도 갠지스 강가이다. 하루 종일 시신이 불타오르는 이 곳, 사람들은 이곳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갠지스 강에 그 유골의 가루를 뿌리면 그의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껍데기를 버린 영혼이 다른 생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도인들의 생각은 육체는 헛되지만 존재는 영원하다는 힌두교로 부터 비롯된다. 종교를 가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또 다른 여행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죽음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으로 부터 '종교'는 시작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물론 죽은 뒤,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명료한 대답도 있었지만, 인터뷰에 응한 다수의 사람들이 죽은 뒤 천국, 극락세계, 환생 등으로 존재의 영생을 믿었다. 

초월적,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을까? 과학적으로 접근해 본다. 1987년 죽은 멜린다의 영혼이 남아있는 집으로 유명한 곳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전문가는 창밖에 어른거리는 멜린다의 환영이 사실은 방문객 자동차에 비친 손전등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그처럼, 초자연적인 많은 것들이 상상력이나 뇌가 작동한 결과물이라는 주장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걸까? 임사 체험을 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색과 빛이 화려하게 펼쳐진 천국을 봤다거나, 터널을 지나갔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는 인간의 뇌가 서로 비슷하게 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과학적 이유를 든다. 자연법칙에 따른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상대적으로 나약한 인간들은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불가지론'을 '초월적 존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 영역이 뇌에 '실재'할까? 이를 위해 마이클 퍼싱어 교수가 개발한 뇌의 측두엽을 자극하는 장치를 활용한다. 정재승 교수 본인을 비롯한 다수의 참가자들은 측두엽이 자극을 받자, 붕뜬 상태에서 옆에 누가 다가와 속삭이는 듯했다거나,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등 '접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에 따라 학자들은 신의 존재가 뇌가 자극을 받아 생기는 생리적 현상이라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신을 느끼는 부위 측두엽에 대한 이견도 있다. 펜실바니아 대학의 앤드류 뉴버그 교수는 다양한 종교 수행자 4~500백 명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측두엽 자체보다는 마치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할 때 뇌의 여러 부분이 연결되듯이 종교 역시 마찬가지라고 반론을 편다. 즉 특정 부분의 자극이 아니라 일상 생활과도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뇌의 총체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모습은? 
왜 종교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등장하게 되었을까? 정재승 교수는 생존 본능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예측한다. 수렵 채질 시절의 인간은 물가에 놓인 어린 아이와도 같은 신세였다. 그래서 인간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연한 작은 사건에서도 원인을 추측해 내는 독특한 능력을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바구니 앞에서 피리를 부는 노인을 본 소년이 바구니 속에 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도망을 치듯, 인간은 설사 그 판단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의 위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겁쟁이 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겁쟁이 뇌'는 자신들이 세상에 대해 가진 의문을 풀어줄 존재가 필요했고, 여기서 '신'을 창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양 과학지 <스켑틱>의 발행인 마이클 셔머는 여기에 인간의 패턴성을 더한다. 의미 없는 무늬에서 어떤 형상을 유추해 낼 수 있는 인간 뇌의 능력은 불규칙한 패턴을 가진 자연, 그 뒤에 의도를 가진 초자연적인 존재를 유추해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학적, 그리고 합리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 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전염병, 재난, 질병 등 인류에게 닥친 불가항력적인 제반의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행위자'로써 신을 창조했고,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로써 그것들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신은 어떤 모습일까? 인지 과학자 구형찬 교수와 종교학자 심형준 교수는 24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6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간이 어떻게 신을 기억하는가에 대해 실험한다. 

신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전지전능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조물주, 그러나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신은 뜻밖에도 이곳에도 저곳에도 임하시는 능력자라기 보다는 마치 사람처럼 일을 '순차적'으로 처리하시며, 때로는 화를 내시며,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감정적'인 존재다. 들려준 이야기 속의 공백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으로 채워넣는다. 즉, 사람들은 마치 사람처럼 '신'을 의인화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힌두교 칼리 여신의 팔이 여러 개인 게 하나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거라는 사람들의 자의적 해석처럼, 사람들은 신을 인간과 비슷하지만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냈다.

 

 

과학이 해주지 못하는 위로
그렇다면 만들어진 신은 인간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일까? 가장 극단적인 종교적인 의례, 신을 경배키 위해 온 몸에 바늘을 꼿는 모리셔스의 의식을 통해 알아본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니, 그 고통스러운 종교 의례 과정에 참가한 사람들은 심박수와 호흡이 동일하게 '고양'되었다. 또 다른 스페인의 종교 의례 700도가 넘는 나무 장작의 재 위를 다른 사람을 업고 뛰는 의식, 놀랍게도 이 의식에서 뛰는 사람이나, 업히는 사람이나, 심지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의 심박수가 같았다고 한다. 즉,  이러한 집단적 헌신을 통해 사람들은 동일한 심박수, 즉 일체감의 경험을 얻는다. 무려 2억명이 5ㅇ일에 걸쳐 알라하바드로 신을 찾아 떠나는 힌두교 축제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희열'도 다르지 않다. 

종교, 그리고 신은 위안과 소속감을 준다. 과학은 인간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신은, 종교는 인간을 하나로 단단히 묶는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말한다. 설사, 지금의 신이, 혹은 종교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또 다른 '믿음'의 대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오랫동안 배타적이고 고립된 유대인 공동체에서 자랐던 페사후 아이젠은 그 극단주의의 실체를 깨닫고 나서 그곳을 떠났다. 물론 그는 천 명의 가족이 있는 것같은 든든한 소속감을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덧붙인다, 그 소속감은 규율을 잘 따를 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예술과 문화 등 또 다른 공통 분모를 만들어 지는 현대 사회의 다른 공동체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논란은 끝나지 않는다. 종교는 삶의 지표이다. 아니다. 유용하지 않다. 믿음과 논거는 평행선을 이룬다. 인간이 신을 만든 과학적 논거가 진행되는 한편에서 '내림굿'을 받고 이제 막 새롭게 신을 받들게 된 애기 무당의 서사가 펼쳐진다. 몸도 너무 아프고,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던 그녀는 살고 싶어서 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부르며 통곡을 하고, 작두를 오르던 그녀는 내림굿이 끝난 후 활짝 웃는 얼굴로 이제야 속이 편해졌다며 선배 무당에게 기댄다. 

여전히 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한편에서는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안정을 주고,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의지가 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과학의 세계가 도래하고, 학자들은 자신만만하게 '종교'의 종말을 점쳤다. 하지만, 과학이 세상을 분석하면 분석할 수록 세상은 뜻밖에도 점점 더 알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과학이 발달할 수록 위태로워진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은 그 모든 불확실성을 잠재워 줄 절대자를 향한 갈망을 멈추지 않았다. 

다큐에서 보여준 '뇌의 현상'으로서, 진화의 결과물로서 '종교'는 명확했다. 하지만, 명확한들, 그 명확함이 우리에게 어떤 '앎'을 줄지언정, 어떤 '위로'를 줄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는 명확하다. 가슴 떨리는 일체감을 주지 못하는 차가운 과학은 결국 떨리는 가슴의 종교 앞에서 그저 한낱 명제에 불과하다. 과학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한계적 인간이 탄생시킨 진화의 결과물, 아마도 종교는 인간이 존재하는 이래, 내내 과학과 평행선을 유지하며 갈 것이다. 이성과 비이성의 불합리한 혼재,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by meditator 2020. 4. 8. 15:41

이제는 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신천지로 인한 대규모 감염은 전사회적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 많은 사람들이 1인 신격화의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어 법과 질서가 만들어 놓은 테두리를 넘어 '일탈적 행동' 집단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은 과연 21세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여전히 신천지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상은 기이하기 까지 했다. 

2020년 3월 1일 가평의 한 연수원 앞,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우리 아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문구로 온 몸을 도배한 어머니들이 절규하고 있다. 아이들은 '진짜 신앙'을 찾았다며 집을 나갔다.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아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강제로 '개종' 되어 끌려갔다며 아이들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아이들을 내놓으라 울부짖는다. 과연 무엇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가족과 생이별을 감수하면서 까지 종교에 헌신하도록 만든 것일까? 

사이비 종교를 연구해온 전문가는 이렇게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과정이 그루밍 성폭력의 6가지 과정과 유사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친절하고 상냥하게  접근한다
그 첫 번 째는 바로 대상의 선정이다. 한때 '신천지'의 일원이었던 남성이 자신의 경험을 보여준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발표를 하는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라며 상냥하게 접근한다. 결코 '종교'를 들먹이지 않는다. 인턴 기자인데 인터뷰 좀 해주시겠냐고 하고, 서울대 심리학교 대학원생인데 논문 쓰는 거 좀 도와주시겠냐고도 하고, ebs를 들먹이기도 한다. 절대 종교를 입에 담지 않고 친절하고 상냥한 이웃처럼 다가온다. 

시골에서 갓 도시로 올라온 젊은이는 서울에 올라오니 ebs 같은 데서 자신에게 인터뷰를 요청한다며 선뜻 응했던 게 신천지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고등학교 입시가 끝나고, 하지만 살아가야 할 방향이 아득한 젊은이들에게 '신천지'는 하느님이 다 정해주시니 힘든 거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며 유혹한다. 취업도 힘들고 앞날이 막막한데, 한 번에 그 모든 걸 정리해 주겠다니 로또 당첨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경쟁에 지친 세대에게 종교는 새로운 목적이자 대안인 듯 다가온다. 그리고 거기서 너는 이제 리셋되어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경쟁의 선두에 설 것이라 달콤하게 속삭인다. 14만 3천명의 지배 계급이 될 것이라는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에 익숙한 세대는 선뜻 발을 들여놓는다. 



신뢰를 얻다 
이제 전도사가 되어 이단에 빠진 사람들 상담에 힘쓰는 김충일 씨, 그는 지난 6년 동안 신천지에 인생을 바쳤었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집안, 그런데 그를 신천지로 이끈 건 그의 형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전도 1순위라는 포교 방식에 그가 넘어간 것이다.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종교적으로 고민이 많았던 청년 시절, 논리적으로 고민하던 것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더구나 수능을 망쳐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못해 좌절감에 시달리던 그에게 신천지 세상에서 더 많은 걸 누리게 해주겠다는 설득은 먹혔다.자라면서 엄한 아버지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충일씨, 누군가 나를 믿어줬다는 그 '신뢰'의 그물에서 빠져나오는 건 쉽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신뢰를 얻는다. 주부들에게 아이들을 봐주면서 재밌는 공부를 하자면서 접근한다. 천국의 , 삶의 방향을 열어준다며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도록 해준다. 재해 영상을 보여주며 종말에 대비하라며 준비물 리스트를 제시하고, 그 준비물을 마련하기 위해 주부들은 보험을 깼다. 지상의 시간이 얼마 안남았으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단다. 하지만, 2000년이 열리고, 그간 종교에서 말했던 것과 달리 너무도 평온한 세상, 사이비는 기도의 힘이라고 했지만, 배신감을 느끼게 되며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고립시키다
연우 씨의 딸은 5년전 집을 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다 칭찬했을 정도로 착했던 딸,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동생들도 돌보던 듬직한 맏딸은 일하던 곳에서 만난 28살 언니가 잘해준다고 하더니, 그 언니를 따라 집을 나갔다. 최미숙 씨의 딸은 7년 째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신천지 교회랑 주거 침입의 법적 공방까지 하며 전국 방방곡곡 1인 시위를 하며 딸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들. 그 어머니 앞에 나타난 딸은 예전의 그 딸이 아니었다. 가출이 아니라 신앙이라며 외려 어머니를 설득하는 딸. 그래도 안먹히자 자신의 신변보호를 신천지에 위임하고 만다. 이런 신변 보호 요청서는 조직적으로 행해진다. 조직적으로 가족 관계를 끊고 고립시켜 더욱 사이비의 상명 하복 관계에 빠져들도록 한다. 

이렇게 사이비는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고립 시킨다. 고립된 상태에서 집중적으로 세뇌를 시키는 성경 공부 모임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여, 고립을 강화한다. 

협박하고 통제한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신천지는 조직원을 확보하면 자신의 단계가 상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불법적 피라미드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수갑, 테이프 등으로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강제 개종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개종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한다. 

그런데 아무나 다 신천지가 될 수 있는 것 같지만, 마구잡이로 고르지 않는다. 엄격한 정식 입교 절차가 따른다. 신참자에 대한 신앙 관리 카드가 작성되는데, 거기엔 경제적 형편이 등급에 따라 나뉜다. 어느 이상 점수여야 입교할 수 있다. 대규모의 시험, 그 시험을 통해 신천지 정식 교인이 되면, 그 자체로 선택받은 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든다. 

고립된 생활, 반복된 학습을 통해 일상 생활보다 종교가 중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사이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과 경쟁을 시켜 통제한다. 교주가 등장하여 14만 4천 명을 들먹이며 경쟁을 유도한다. 그 보상을 독점하기 위해 달리도록 만든다. 교리에 세뇌되고 중독되는 과정의 연속, 결국 사이비는 진리가 믿지만, 종교가 만든 터널을 달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전문가는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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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선택을 부인하는 건 쉽지 않다
이렇게 고립되어 반복적으로 학습되어 세뇌되고 보니 당연히 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사이비 교주로 성스캔들을 일으켜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 정명석 교주, 그 종교에서 핵심 인물로 활약했던 김경천 씨는, 죽고 싶었다고 토로한다. 성격을 2000번 읽었다던 정명석, 그 사람이 자신에게 전해준 진실에 오랫동안 교주의 부도덕한 삶을 눈감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개종을 '호구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경천 씨,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부인하는 건 쉽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최고로 복받은 자에서 하루 아침에 바닥을 치는 선택, 그 30년의 허송세월을 스스로 부인하는 게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이비 교주를 쫓아 3억 가량의 재산을 처분하여 낙원 피지로 가족과 함께 떠났던 김영석 씨는 2년 만에 홀로 돌아와 고향에 머문다. 귀신을 쫓는다며 '타작 마당'을 벌여 신도를 폭행하던 교주는 특수 폭행, 감금죄로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아내와 아들은 그곳에 있다. 꿈속에서도 여전히 나타날 만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김영석 씨, 누가 극복할 수 있겠어요라고 탄식한다. 지워지지 않을 거라며 후회한다. 

주기적이다 싶을 만큼 구원이란 명목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 그럼에도 매번 젊은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 인생을 그곳에 건다. 세상이 불확실할 수록, 사람들은 어두운 밤의 등불처럼 종교를 쫓는다. 개별적인 신앙의 문제나, 교리의 문제, 혹은 실존의 문제라며 손가락질 하기 이전에 하나의 병리적 사회 현상으로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뒤늦었지만 종교에 빠져드는 과정을 보다 심도깊게 접근하고자 한 sbs스페셜의 시도는 철지난 얘기라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by meditator 2020. 4. 6. 14:17

늘 소원했던 가족들이 함께 있으면 좋을 줄 알았다. 아마도 이건 이상적인 로망이었나 보다. 봉쇄된 2달 동안 중국 후베이성에서 가정 폭력이 2배나 늘었다고 한다. 중국뿐인가, 프랑스, 영국, 북아일랜드 등 가정 폭력 신고 건수가 몇 십 프로씩 증가 중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신고 건수가 줄었다고 한다. 가정의 평화를 찾아서? 외려 전문가들은 '신고' 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하소연은 이어진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빠, 엄마들은 매끼 식사를 해결하느라 지쳐간다. 함께 있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더 힘들다. 가족때문에 지쳐갈 때 박카스같은 영화 한 편? 바로 <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이다. 

 

 

보드 게임 밖에 모르는 아버지
영화를 여는 사람은 바닷가를 서성이는 아버지 앨런이다. 이미 바닷가에 와서 서성이면서도 짐짓 아직 도착도 안한 듯 시치미를 떼보지만 갈매기 소리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나버리고 마는 속이 뻔히 보이는 늙수그레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배우 빌 나이가 연기한다. 

빌 나이하면 생소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바웃 타임>에서 이미 오래도록 옷장 속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왔다갔다 했다던 노회한 선배 타임 슬리퍼 아버지를 떠올리면 이미지가 딱 떠올려질 것이다. 거기에 <러브 액츄얼리>에서 한물 두물 아니 세물도 더 간, 대놓고 자기가 막 살았다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1등의 기적이 생기면 옷을 벗겠다던, 그래서 기타 하나로만 몸을 가린 채 1위 퍼포먼스을 한  락스피릿 충만한 노년의 락스타라면 어떨까?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그의 연기를 통해 감정이 흔들리게되는 빌 나이야 말로, 할 줄 아는 거라곤 보드 게임 밖에 없는 아버지 역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 보드 게임이 사단이었다. 피터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형과 피터는 보드 게임을 하다 형이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피터가 결혼을 하고 아들이 청소년이 된 이 즈음까지도 아버지는 실종된 형을 찾는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신원불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아버지와 피터는 이제 이 바닷가에서 만나 그 신원불명의 시체가 형인지 확인하러 갈 예정이다. 

뜬금없이 아이스크림 트럭에 다가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아들 피터의 그림 자랑을 하는 아버지, 당연히 돌아오는 건 아이스크림 트럭 주인의 냉랭한 응대다. 그렇듯 아버지는 어딘가 세상과 핀트가 좀 어긋나 보인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전히 열심히 형의 실종 전단지를 붙인다. 

 

 

그런데 아버지가 잘 하는 게 있다. 바로 보드 게임이다. 피터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 아버지와 피터, 그곳 호텔 1층 바에서 아버지는 자신들처럼 혹시나 신원불명의 시체가 자신들의 아들일까 하고 온 부부를 상대로 보드 게임을 한다. 

분노조절장애 아들
하지만 피터는 그런 아버지를 '극혐'한다. 심지어 아버지로 인해 돈을 잃은 부부에게 대신 돈을 갚아주려고 까지 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 밤길을 거닐 던 아버지가 다짜고짜 피터의 집을 찾은 후 들어 앉아 아내와 아들, 심지어 아들의 여자 친구와 조금씩 친밀해져 가지만 그런 상황의 매 순간마다 피터는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까 싶을 만큼 아버지에게 반응한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방법>은 '인간적'이다. 그리고 '가족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그 인간미라던가, 휴머니즘의 그 '인간적'이 아니다. 

가족들끼리 자주 부대끼니 부부 사이의 스킨쉽도 많아지겠다는 너스레에 상대방은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 아냐'라고 답한다. 그런 식이다. '가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단위이지만, 가족만큼 '데면데면'한 사이가 있을까. 바로 그 세상에 둘도 없이 '데면데면한 '사이인 그 가족의 '인간미', 그럼에도 '가족'이라서 서로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인 애증을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은 '은유법'처럼 풀어놓는다.

할 줄 아는 게 '보드 게임' 밖에 없는 아버지, 아들이 떠나간 그 날도 보드 게임을 했다. 여전히 그 시절 아들의 얼굴이 담긴 실종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지만, 막상 아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보드 게임'으로 상징되었지만, 많은 아빠들이 그러지 않을까? 뜬금없이 자식 자랑을 하고, 어릴 적 집 나간 아들을 놓지 못하지만, 막상 그 아들들에 대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여전히 눈치없는 소리만 하고. 자기 멋대로 이다. 

분노 조절 장애같은 아들은 다를까. 어릴 적 넉넉치 않은 형편으로 인해 늘 짝퉁만 사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켜켜이 쌓인 듯한 아들, 여전히 그럼에도 보드 게임만 하는 아버지를 참을 수 없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형의 실종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애증의 공동체.

 

 

행복의 단추는 어떻게? 
이 평행선같은 아버지와 아들은 어떻게 다시 행복의 단추를 채우게 되었을까? 결국 그 해법은 서로가 그어놓은 선에서 한 발자국씩 들어서는 것이다. 큰 아들만 찾으러 다니던 아버지, 그래서 그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매일 밤 밤거리를 헤매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오랜 배회 끝에 아들 집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뜻밖에 서먹서먹했던 아들 집 가정의 청신호로 작용한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온곳에 형의 전단지를 붙여놓은 채 칩거 한 아버지를 찾은 아들은 비로소 속내를 펼친다. 아버지도 안다. 그 불평불만만 늘어놓던 아들은 누구보다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제일 잘, 오래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들이 바라는 건 별 거 아니다. 형이 떠난 그 날부터 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그 옆에 있었던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라던 '가족'으로서의 소박한 소망뿐이다. 그 별거 아닌 소망을 솔직하게 터놓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은 가족이라 서로 기대하고 그래서 실망하고, 이 풀기 어려운 난제를 다가가는 구비구비 오솔길같은 영화다. 

다시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들먹일 수 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사연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오랫동안 양복점을 해왔던 할아버지는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손주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하며, 멋쟁이의 팁을 전수한다. 양복 단추를 전부 잠그지 않는 것.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 완벽한 방법은 행복의 단추 하나를 열어놓듯 서로에 대한 마음과 태도를 한 자락 열어놓는 것이다. 그래야 비슷하게나마 행복의 문이 열린다. 결국 단추를 채우는 게 아니라 열어놓는 것, 이게 영화가 제시한 해법이다. 

by meditator 2020. 4. 5. 14:47

중국으로 부터 시작하여 이제 전세계가 그 손아귀에 사로잡히고 만 코로나 팬데믹, 우리나라는 어언 2달째 그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말이 두 달이지 거의 2년이 된 것처럼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다른 차원에 빠져버린 듯한 상황, 과연 우리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저 의료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격리'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로 인하여 일상은 물론, 사회, 경제, 기술 전반에 급격한 변화의 파고를 몰고온 코로나 팬데믹. 과연 우리는 이런 '공황 상태'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현대 사회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하여 '관점의 전환'을 모색해온 <tvn shift>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코로나 팬데믹을 진단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일상의 변화 
우선 코로나 팬데믹 사회가 주는 시그널을 읽기 위해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씨가 나섰다.  지난 2달간 사람들이 한 검색어를 통해 우리 삶의 변화를 알아보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코로나로 인한 충격이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인 식욕마저 앞섰다는 것이다. 그간 검색어 순위에서 항상 제일 앞장섰던 건 '먹는 것'에 대한 검색이었다., 그런데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이를 앞질렀다. 사람들은 무서워한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수 없다'는 불가지론(agnosticism, 不可知論)으로 부터 비롯된 불안이다. 거기에 더해 치료약이 아직 없다는 불확실성이 사람들의 공포를 '에스컬레이션' 시킨다. 

흔히 사스나 신종 플루 등 앞선 바이러스 전염병과 비교가 되곤 하지만, 그 무서웠다던 메르스가 8주에서 10주 사이였던 것과 달리, 지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의 바이러스 전염병들에 압도적이다. 

송길영 씨는 확진자, 마스크, 혼초밥 등 사람들이 많이 검색한 50가지 단어를 통해 코로나 팬데믹 사회를 정의내린다. 그 첫 번 째는 '하루 종일', 아이들의 개학이 연기되어 '번아웃'에 빠진 엄마들, 60대 엄마, 아빠랑은 어떻게 놀아드려야 하냐는 질문을 올리는 자녀들처럼, '사회적 격리'로 인하여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가족들의 고민이 등장한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활동하는 공간이 축소되었다. 답답함을 넘어 심리적 불안을 느끼는 경우도 생겨났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친구'보다 '남편'이 중요한 관계의 대상이 되는 등 관계의 변화도 감지된다.  층간 소음 등의 갈등이 심해지는가 하면, 온라인 쇼핑몰 주문량 폭주와, 홈오피스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 등이 늘었다. 

손세정제, 마스크 등 이전과는 다른 물품들이 인기 품목이 되었고, 재택 근무가 권장되며 화상회의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산업', 일의 형태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코로나 이후,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는 새로운 산업 구조 혁명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빅데이터는 예측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렇다면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열고 있는 이 코로나 팬데믹은 과연 언제가지 갈 것인가? 이에 대해 감염 내과 최원석 교수가 전망을 펼친다. 

무엇보다 날씨가 풀리고 있는 즈음에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건 바이러스가 좀 수그러드는 것이다. 하지만, 평균 30도를 넘는 탄자니아에서 본격적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기온과 바이러스의 상관 관계를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이 최교수의 판단이다.

그리고 21세기 최초의 팬데믹이었던 신종 플루가 4월에 시작하여 8월에 기승을 부렸던 전례에 비추어 봤을 때 더더욱 섣부른 기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더욱이 북반구가 날이 풀리면서 좀 수그러든다해도 남반구가 겨울을 맞이하여 코로나가 지구의 남과 북을 순환하는 도돌이표 전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덧붙인다. 

마음의 경계를 푸는 순간 언제라도 다시 대유행할 수도 있는 코로나 팬데믹, 이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중 첫 번째는 영국이 시행하려 했고, '대유행 받아들이기'이다. 자연 상태에서 몇 명까지 감염될 수 있는가라는 기초 감염 재생산자 수에 따르면 코로나가 2명에서 5명 수준, 그에 따르면 65% 정도가 감염되면 집단 면역이 생길 것이라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집단 면역이 생기면 감염 자체가 저지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하지만 총리까지 감염되며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이 방식을 바꾸게 된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러시안 룰렛'과도 같은 집단 면역 방식은 의료체계와 국민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 

이에 반해, 최대한의 방역을 하며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전염되지 않도록 하는 방식, 여기서 문제는 바이러스는 그 성질상 완벽하게 차단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소한의 방역을 통한 집단 면역 방식의 경우 바이러스 종식 기간이 짧아지는 반면, 완벽하게 방역을 하려하면 할 수록 팬데믹은 점점 느리고 길게 오랫동안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대한의 방역을 통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하지만 종식은 쉬이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굶어 죽게 생겼다는 자영업자 대표 홍석천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결국 코로나와의 장기전을 대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위기는 곧 기술의 기회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기술이 인간을 앞지는 원년이라는 2020년, 그렇다면 기술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성균관대 기계공학과 최재붕 교수가 이에 답한다. 

비관론자들은 미, 중, 러 강대국들이 서로에게 코로나 팬데믹의 책임을 떠넘기는 음모론을 들이대는 가운데, 결국 인간이 만든 과학 기술의 무분멸한 자연 침식이 박쥐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이것이 코로나 팬데믹을 낳게 되었다며 기술 책임론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팬데믹 쇼크의 답은 기술에서 구해야 한다고 최교수는 말한다. 일찌기 캐나다의 인공 지능 스타트업은 이미 올초 빅데이터에 기반하여 팬데믹을 예고했었다고 한다. 알파고를 만들었던 딥마인드는 코로나 분석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결국 코로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술로 부터 비롯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시아 시장을 장악한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매월 5월 10일을 회사 최대 기념일로 삼고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연다. 그런데 이 날은 바로 알리바바 직원이 사스 판정을 받은 날이다. 사스로 직겨탄을 맞았던 알리바바, 하지만 거기서 새로운 사업을 착안한 마윈 회장은 사업의 구조를 변화시켜 온라인 시장에 전격 투자를 감행하여 아시아 1위의 그룹이 되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코로나 사태로 자영업, 재래 시장, 백화점 등 오프라인 산업이 직격탄을 맞은 것과 달리, 마스크 판매 등으로 시작하여 코로나 사태에 발빠르게 대처한 우리나라 쿠*이 그간의 적자를 일소하고 흑자로 전환한 케이스처럼, 사재기가 성행하는 유럽 등과 달리 '온라인 산업'이 이미 기반이 닦인 우리나라는 '코로나 사태'가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스마트폰을 든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포노사피엔스, 이들에게 포스트 코로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과학 기술은 단언한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방청객을 들일 수 없는 <tvn shift>방청객 대신 '사회적 격리' 중인 일반인들과 온라인 화상 공개 방송을 통해 화두를 공유한다. '랜선 파티' 등 이미 포노 사피엔스들에게는 익숙한 '온라인 문화'가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보편적 문명'의 방식으로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여 약관 39세에 장관이 된 대만의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은 마스크를 공급하기 위해 개발자 그룹에게 sns를 통해 문의한다. 그리고 단 며칠 만에 'e마스크 구매' 앱을 만들어 마스크 사태의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 나갔다. 이처럼, 4차 산업 혁명을 통해 이미 다가올 미래는 정해졌다는 것이다. 진화한 역사는 결코 거꾸로 돌아간 적이 없는 세상, 결국 그 세상의 흐름에 누가 먼저 다가가느냐가 코로나 사태, 그리고 그 이후의 세상을 끌려가지 않고 주도할 것이라고 '과학 기술'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15~20%나 늘어난 실업, 사회의 약한 고리가 되어버린 프리랜서들은 '무급'의 시절을 견뎌내고 있다. 남들이 밥벌이 걱정할 때 잘 나간다는 '택배' 기사는 쌀, 생수 등 늘어난 생필품의 무게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과학은 앞서 보라, 앞서 가라 강변하지만, 저마다 불안을 안고 버티고 있는 상황, 정작 가장 필요한 백신이나 치료제의 개발이 요원한 한에서 마스크로 가린 채 서로가 멀찍이 떨어져야 하는 일상은 호구지책의 늪에서 사람들을 구해낼 방도가 아득하다. 

알고는 있었지만, 빅데이터에서 부터 감염학, 과학 기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전문가들이 진단한 코로나 팬데믹은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고생하고 있는 일상을 공감케한다.  '음모론'으로 탁해졌던 눈을 밝게했으며,  당장의 어려움을 넘어 너른 시야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사자성어가 무색하게 당장의 이 고통을 끝낼 '묘수'는 보이지 않으니, 아예 문을 닫아야 겠다는 자영업자 홍석천의 답답한 하소연에 위로 말고는 해답은 없었다. 

by meditator 2020. 4. 4. 04:36

6%대(6.325% 닐슨 코리아 케이블 기준)로 시작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하 슬의)>이 3회, 8%를 넘기며 순항 중이다. 이른바 '워노 매직'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매주 1회, 한 시간 반 정도의 방영 시간, 우리나라 tv 드라마에서는 새로운 시도다. 밤샘 촬영 강행군에, 당일 찍어 당일 내보내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사전 제작에, 주 1회 방영의 시도는 순조로운 시청률로 보건대, 작품이 좋다면 시청자들은 언제나 기다려 줄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슬의의 신선한 시도와 구성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신선한 점은 그것만은 아니다. 3회, 오랜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이익준(조정석 분)의 아내는 반가워하는 남편이 무색하게 병원으로 찾아와 이혼을 종용한다. 여느 드라마라면 어떨까? 아마도 익준의 이혼이라는 소재만을 가지고 한 회차를 충분히 울궈먹을 것이다. 이혼의 위기, 심지어 외도의 소지가 있는 아내의 이혼 요구는 친구들에 둘러싸인 익준의 에피소드를 얼마든지 구구절절 애닮게 풀어낼 수 있다. 김희애 주연의 <부부의 세계>가 단 한 회만에 3%가 넘는 시청률 상승은 물론 세간의 화제가 되는 걸 보면, '이혼'을 둘러싼 갈등이 드라마에 있어 얼마나 '효자' 아이템인가는 새삼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웬걸, 4회, 계절이 바뀌고 어느새 익준은 서류상으로도 돌아온 싱글남이 되어 있었다. 가정에 대한 애정이 식은 아내를 아이의 알러지조차 챙기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풀어냈던 <슬의>는 4회, 엄마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는 익준 아들의 덧난 상처같은 한 마디로 '이혼'의 잔상을 담는다. 그렇게 '이혼'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걸 겪어내는 사람에 촛점을 맞추며 우리나라 드라마의 클리셰인 '이혼' 소재주의 를 넘어선다. 대신  <슬의>는 '사람', '인간미' 넘치는 그들의 사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제 4회차에 들어서며 그간 심할 정도로 마마보이의 모습을 보인 양석형(김대명 분)의 사연이 밝혀지며 주연 5명, 이익준, 양석형, 안정원(유연석 분), 김준환(정경호 분), 채송화(전미도 분)의 캐릭터 소개가 마무리되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거나한 신입생 환영회를 피해 창고 안에 숨어들었던 5명의 친구들, 그리고 이제 어느덧 노안이 오고, 입맛이 변하고, 꽃이 이뻐지는 마흔 줄이 될 때까지 그들이 여전히 '친구'인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에게도 오랜 몇 십년 지기 친구가 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늘 우리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 '비슷'함이 우리를 통하게 하고, 믿게 하고 그래서 오랜 세월을 '친구'라 여기게 된 듯하다. 아마도 '우정'이 다 그렇지 않을까. 

 

 

우정의 조건; 좋은 사람들 
그렇다면 <슬의> 주인공 5 명의 우정은 어떤 것으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같은 직업을 가져서? 함께 밴드를 해서? 대학 시절부터 이들을 보아왔기에 이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자처하는 응급실 봉선생은 이들의 공통점을 '없는 것'이라고 한다. 5무, 싸가지가 없고, 쉴 틈이 없고, 사회성이 없고 등등 저마다 하나씩 없는 것이 있어서, 그게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4회에 이르며 5명의 캐릭터를 소개했는데 과연 그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이들 다섯 명이 모두 과는 달라도, 그리고 드러난 면만 본다면 싸가지가 없고, 무뚝뚝하고, 일만 하게 생겼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클럽 죽돌이임에도 수석을 따놓은 당상이었다던 이익준이야 말할 것도 없다. 병실 침대를 고쳐주는 의사, 수간호사가 밥 못먹는 걸 배려하여 퇴근도 마다하고 자질구레한 병실 수발을 들어주겠다는 의사, 그게 이익준이다. 도시락을 준비한 인턴을 배려하여 선배 의사의 밥 투정을 입막음해버리고, 주변 사람들이 의심할 정도로 정겨울의 외사랑을 지원해주는, 잔정 많기로야 이익준을 따라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그의 이혼도 공부하러 간 아내 대신 아들을 키우며 이곳에 오래 도록 떨어져 있다 생긴 불상사다. 

그렇게 그 누구에게나 친절한 이익준의 맞은 편에 김준환이 있다. 모두가 다 아는 싸가지가 없는 의사, 그 싸가지 없음은 환자 보호자건, 인턴이건, 레지던트건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공평'하다. 하지만 그렇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김준환은 알고보면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결혼을 앞둔 딸을 둔 아빠가 수술을 할 처지에도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할 거냐며 냉정하게 잘라 말하던 김준환이 정작 아버지도 못간 딸의 결혼식에 제일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한다. 심장 수술을 앞둔 미숙아의 어린 부모에 대한 주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어린 엄마의 눈물을 품어준 것 역시 김준환이다. 채송화의 실연도, 양석형의 가정사도, 언제나 제일 먼저 마음 쓰는 사람도 역시 김준환이다. 

준환 못지 않게 사람들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석형이다. 친구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와도 함께 있으면 불안해 하는 사람, 도대체 저런 사람이 어떻게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가 됐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인데, 4회에서 무뇌아를 출산하는 엄마의 에피소드를 통해 뚱한 석형이 알고보면 얼마나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어렵사리 10달을 품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의 트라우마를 배려하여 음악을 틀고,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려는 의사, 그리고 출산 후 '미안하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하는 석형은 그 하나의 이야기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제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을 아버지의 외도, 여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병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무뚝뚝했던 과거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마마보이'가 되어버린 모습에서 더욱 석형이라는 사람의 '찐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안정원이야 말할 것도 없다. 장래 희망이 '신부'여서, 매해 신부가 되기 위해 '신청서'를 넣는 정원,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지 않았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헌신적이다.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당장 병원비가 없어 수술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그는 4회에서, 이제는 당장 월급까지 탈탈 털어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다. 돈뿐인가. 친구들이건, 함께 하는 전문의이건 그들이 먹는 칼국수건, 초코렛 간식이건 어느 틈에 그는 '남들'의 부족함을 챙긴다. 물론 편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은 못먹었다 '앙탈'을 부리지만 '배려'가 몸에 뱄다는 건 정원을 정의하는데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정원의 친구가 아니랄까봐, 채송화는 응급실에 들어온 외국인 환자가 당장 수술비가 없어 퇴원을 하겠다고 하자, 솔선수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키다리 할아버지'를 수소문한다. 

 

 

이런 식이다. 드러난 성격이야 까칠하기도 하고, 대인기피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좋은 사람들, 법없이도 살 사람들, 결국 '휴머니즘'의 '기본'을 갖춘 정서가 이들 다섯 명을 오래도록 '우정'이라는 울타리로 묶어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석형의 수술에 기꺼이 밥을 거르며 찾아와 '대기'를 타는 정원처럼. 그들은 늘 그렇게 선함의 연대로 따로 또 같이 '친구'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슬의>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결국 이렇게 좋은 다섯 명의 주인공들의 선함을 기반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살다보면 '생로병사', 이별도 겪고, 죽음도 겪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건 결국 '선한 의지', 그 선함을 가진 사람들의 기운이 아닐까 라고 <슬의>는 매회 강변한다. 

by meditator 2020. 4. 3. 03:35

ebs 다큐 프라임은 장장 2년에 걸쳐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와 함께 '뇌'를 통해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다큐를 마련했다. 돈, 폭력, 예술, 섹스, 종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뇌,  3월 30일, 그 첫 회를 연 건 바로 '돈'이다. 

다큐를 연 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 카네만 교수가 고안해낸 '머니 게임'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무작위로 뽑힌 두 사람들, 그들에게 정재승 교수는 10만원을 주고 게임을 제안한다. 

 

 

10만원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게임이다. 한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다른 사람과 어떤 비율로 나누게 하는 게임이다. 상대방이 거부를 할 경우 둘 다 10만원을 가질 수 없을 때 나누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5;5로 공평하게 나눈다. 하지만, 그 거부권이 없어졌을 때 나누는 사람의 태도는 돌변한다. 대부분 자신이 많은 비율을 가지겠다고 하고, 심지어 다 가지겠다고 까지 한다. 이른바 '독재자 게임'이라 칭해지는 이 게임에서 다니엘 키네만 교수의 표본 집단 역시 평균 72%를 자신의 몫으로 챙기는 등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에 서투른 인류 
자본주의 사회, 돈을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은 돈을 거저 얻을 수 있다면 남의 발바닥에 뽀뽀쯤이야, 심지어 똥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20만년의 인류 역사에서 돈이 만들어 진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인류는 20만년 전 수렵 채집 인류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문명의 산물인 '돈'을 마치 수렵 채집 인류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돈을 사냥감으로 여긴다. 수렵 채집 시절에는 '사냥감'을 저장할 수 없었기에 눈에 사냥감이 보일 때마다 사냥을 했었다. 돈은 저장할 수도 있고, 스스로 불어나지만, 여전히 인류는 사냥하던 그 시절의 '마인드'로 '만족'을 모른다. 그래서 브레이크없는 자동차처럼 계속 돈을 '사냥'하고자 한다. 

결국 인류를 돈을 만들어 냈지만, 돈을 사용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지 않아 끊임없이 부작용을 만든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가상 화폐 등 돈의 복잡성은 증가되는 추세인데, 인류는 그 '복잡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세일하는 기간이 되면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세일 전 가격에 비해 많은 할인을 했다는 이유로 구매를 하듯(앵커링 효과), 뇌에 닻을 내린 어떤 무의미한 요소에 낚여 돈을 향해 달린다. 

 

 

부자, 그것이 문제로소이다. 
문제는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돈을 향해 달려드는데, 모두가 돈을 잘 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돈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는 '아우토반' 경주에서 앞선 자들을 부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더욱 우세한 자들이 이른바 '슈퍼 리치(super rich)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슈퍼 리치일까. 지난 14년 동안 매주 2명씩 천 명 이상을 인터뷰해 온 매경의 박수근 기자에 따르면 현금성 자산 100억 이상, 당장 10억 정도는 유동 자금으로 가지고 있는 롤스로이스 정도의 차에, 한 달에 밥 값으로 1400만원 정도는 쓸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돈을 많이 가진 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문제가 된다고 박 기자는 말한다. 오랫동안 인터뷰를 통해 박기자가 절감한 건 대다수의 슈퍼 리치들이 공감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진 자이기에 그의 주변에는 '예스맨'들로 대부분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동등하게 만나기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방식이 체화되었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얘기만 듣다보니 공감 대신, 자기 합리화하는 확증 편향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이른바 우리 사회의 'ceo 갑질 사건'을 낳는 요인이 된다.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자 대커 컬트너는 이를 실험으로 증명했다. 사거리 정지 신호 시, 저가 차량 운전자의 100%가 멈춰 선 반면, 메르세데스 등 고급 차를 모는 운전자들의 45%가 그냥 지나쳐갔다는 것이다. 즉, 부자가 되면 될 수록 굳이 규범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서 '공감'을 담당하는 부분이 '미주 신경'인데 자기 기준, 자신을 만족시키는데 집중해온 부자들의 경우 타인에 대한 이해를 담당하는 '미주 신경'에 반응이 없거나 미약해 진다는 것이다.

부의 불평등, 뇌조차 변한다 
공감능력이 저하된 부자, 거기에 이기주의까지 겹치면 위험하다. 부자들이 더 위험한 이유는 세계적으로 부의 피라미드는 가파르게 더욱 불공평지고, 0.9%로 세계의 부 43%를 차지한 부자들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이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의 불평등은 이제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지구적 문제이다. 사람들이 노동을 해서 버는 '노동 소득'보다 빠르게 자본 소득과 배당 소득이 늘고 있다. 

OECD 기준 불평등 지수가 가장 높은 홍콩, 돈 있는 사람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이 도시, 상위 10%의 사람들이 빈곤 가정의 44배의 부를 지닌다. 50명의 부자가 정부보다 1.35배 재산이 많다. 그래서일까, 홍콩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체념한다. 운수가 안좋았다 말한다. 운이 나빠서 사는 게 지옥이라, 오래 살기보다 아프지 않고 이 삶을 견뎌내기를 바란다. 

돈에 시달리는 마음이 생쥐가 되어 정해진 시간 안에 치즈을 찾는 게임에 빠진 거 같다는 사람들 정말 그럴까? 한 해 농사를 끝내고 1년 정산을 하게 되는 농부들, 그런데 이 같은 사람인데도 추수 전과, 추수 후의 '뇌의 상태'가 다르다. 논리력, 인지 조절 테스트를 했는데, 아이큐가 무려 13점 정도나 차이가 났다. 이 정도면 알콜 중독자와 정상인의 차이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이에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돈을 식욕이나 성욕처럼 생존에 필요한 걸로 취급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만큼 사람들은 돈 앞에 절박하고, 돈을 향해 위험을 무릎쓰고 내달린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돈을 가지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은 세상을 잃은 듯 크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뇌에 영향이 아이들의 뇌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빈곤층 아이들을 연구한 찰스 넬슨, 그에 따르면 하루 벌이가 1~2달러에 불과한 빈곤층 아이들은 이미 3세 무렵에 또래 아이들 평균보다 아이큐가 낮아졌다고 한다. 평균을 100으로 치면 85의 수준이다. 아니 3세까지 갈 것도 없다 생후 2달 된 아기의 뇌내 회백질 양이 적었다는 것이다. 

오염된 환경, 부족한 영양, 그리고 스트레스가 아이들의 뇌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결국 이렇게 뇌마저 변했다는 것은 빈곤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이다. 뇌로 대물림되는 가난, 이건 그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뇌로 보는 인간 -1부 돈>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바로, '돈'으로 인해 뇌마저 변해가고 대물림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것이다. 그저 사회면 갑질 기사로 분노했던 사실의 이유를 밝히고,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상황의 근원을 밝힌다.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가 고착되다 못해 '뇌'까지 변화시키는 현실, 그걸 다큐는 고발한다. 

불평등을 혐오하는 인간, 
이러한 불평등한 상황이, 자본주의, 아니 인간 사회의 한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소득 하위 40%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체 부의 9% 정도는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은 0.3%에 불과하고, 그것마저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상위 20% 계층이 86%의 부를 누리고 있다. 결국 하위 계층은 아무 것도 안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런 상황을 감내할 수 있을까? 처음 시작했던 머니 게임의 참가자들, 그 중에서 앉은 자리에서 부당한 배당을 받게 된 사람들은 '꽤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인간만이 아니다. 같은 영장류인 원숭이의 경우도 옆 동료와 자신이 다른 대우를 받았을 때, 특히 자신이 부당하게 적은 보상을 받았을 때 분노하고 임무를 거부한다.

​​​​​​​영장류를 비롯한 인간은 공평함을 추구하는 오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인종과 종교, 그리고 사상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적당히 공평한 사회를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불공평해지고 있다. 과연, '돈'을 여전히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인류가 '지혜'를 가지고 불공평의 피라미드를 극복할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0. 4. 1. 16:03

<주디>를 보러 잠실에 위치한 영화관을 갔었다. 석촌 호수의 벚꽃들도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고, 제법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바로 석촌 호수의 통금령이 내렸다. 올해 만개한 벚꽃은 조용히 홀로 피다 질 터이다.

꽃이야 사람들이 보러 와주건 말건 상관없이 철이 되어 피고 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꽃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애써 만든 영화가 시절을 잘못 만나 영화관에서 홀로 고생한다. 좌석을 퐁당퐁당 배치를 했어도, 같은 줄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만치 비껴서 예매를 하고서도 마스크를 풀지 않은 채 관람해야하는 시절,  그 마저도 한 공간 안에 채 10 명이 안된다. 하지만, 그냥 10 명도 안되는 사람들만 보기에는 스타 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싶었던 주디 갈란드의 삶이 애닮다. 

 

 

인간이기 이전에 '스타'여야
2020년 아케데미 상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의 연기를 찬탄한다. 연기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작품의 호아킨 피닉스가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앙상하게 살을 뺀 그의 몸이 보여주는 '조커'의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오랜 약물 중독으로 인해 잠도, 먹는 것도 더는 그 무엇도 사람답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여배우, <조커> 속 호아킨 피닉스만큼 앙상하게 마른 몸, 도무지 몸에 에너지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듯 어깨는 푹 꺽이고, 두 팔은 흐느적흐느적, 바람이 불면 금새 날아가버릴 것같은 걸음걸이로 르네 젤 위거의 주디는 등장한다. 세팅된 머리, 긴 속눈썹의 짙은 마스카라로 도배된 얼굴은 안타깝게도 숨길 수 없는 나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전전하는 늙은 여배우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곳에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어리>의  그 여배우는 없다. 남우 주연상이 당연했듯,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의 몫이 당연해지는 순간이다. 

아이를 내 몸 밖에 있는 심장이라며 어떻게서든 내 아이들은 내가 키우고 싶다는 엄마, 하지만 당장 있던 호텔에서도 쫓겨나는 처지의 엄마는 결국 두 아이들을 전 남편에게 맡기고 그녀를 부르는 무대가 있는 영국으로 향한다. 

그녀가 원하는 건 평범한 삶이지만, 결국 그녀가 돌아갈 곳은 무대 밖에 없는 이 '씬'으로 영화는 주디 갈란드의 삶을 '정의'한다. 영화 <주디>는 죽기 6개월 전까지 섰던 마지막 영국에서의 무대 공연과, <오즈의 마법사>로 세상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던 그 시절의 주디를 교차하며 '엔터테이너'로서의 삶에 잠식당한 한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잠을 자고 싶어요', '햄버거 한 입만이라도 먹고 싶어요', '휴식 시간을 지켜주세요'라던  10대의 주디에게 제작사 대표는 '선택'을 강요한다. 말이 선택이지, 너가 아니라도 너를 대체할 너 또래 아이들은 많다는 대표의 말에, 당장 스케줄에 따르기 싫으면 이 문으로 나가라는 대표의 말에 누가 어렵사리 얻은 주인공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갈 수 있었을까. 

2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던 주디 갈란드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전횡에 가까운 양육을 통해 아역 배우,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 등을 통해 '아이돌'과 같은 청춘 스타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스타'의 대가는 가혹했다. 스크린에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제작사는 음식 대신, 잠 대신, 휴식 대신 약을 먹였다. 결국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게 될 정도로. 청소년 시절 성장에 필요한 음식물도, '멘탈'도 챙기지 못한 주디는 '스타'가 되었지만, 자살 시도와 약물 중독, 그리고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점점 입지가 좁아져 간다. 헐리우드 산업 시스템의 그늘은 온전히 주디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어갔지만, 그녀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녀 자신 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만 미국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그녀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가게 된 영국, 여전히 잠도 자지 못한 채 불안정한 몸짓으로 흐르적거리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살기 위해서 주디는 무대에 선다. '다음엔 잘 해 낼 수 있을까'라는 무대 공포증으로 첫 무대조차 설 수 없을 뻔한 해프닝을 만들지만, 떠밀리듯 나선 무대에서 여전히 '주디'는 '주디'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엔터테이너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성공적인 영국 데뷔 무대, 분장실에는 꽃다발이 넘치고, 기사는 호평 일색이지만, 정작 무대를 내려온 분장실의 주디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다. 그 무엇도 그녀를 위로해 줄것이 없는 것같은. 

멋진 노래 뒤에 우뢰와 같이 쏟아지는 관객석의 박수와 찬사, 하지만 그런 인사를 받고 주디는 말한다. 저는 무대에서만 주디 갈란드라고.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그늘로서 처연하게 스러져 간 '스타'의 삶 
하지만, 세상은 주디를 '인간' 이기 이전에 '스타'로 소비한다. 부모도, 제작사도, 그리고 네 번의 결혼으로 만난 '남자'들 조차도.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의 길이 눈 앞에 당장이라도 보이는 듯',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며 '결혼'하자는 주디, 늘 내편인 되는 누군가를 갈구하지만  결국 그녀는 늘 '혼자' 남는다. 다시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약과 술에 의지하는 악순환, 그런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는 삶의 무게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회마저 앗아간다.  비록 '무대'를, 그 무대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여전히 좋아했지만, 그녀의 자존감 낮은 '멘탈'과 술과 약물에 지친 육체는 더 이상 무대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우리 시대의 '청춘 스타'였던 아이돌들의 추레한 내리막길을 '기사'로 접하게 된다. 영화 속 주디나, 우리 시대의 그 '사건 사고' 속 아이돌 들이나, 미처 자신들의 '인격'과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전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스타'로서 '소비'되어 마모되고 만 존대들이다. 늘 자신을 빼앗기며 살아왔던 그들은 '모든 걱정이 레몬 사탕처럼 녹아버리'는 달콤한 그 무엇을 꿈꾸지만, 영화 속 주디의 말처럼, 저 산 머너에 있는 무지개를 쫓아 걸어가는 게 전부인 것이 어쩌면 인생인 것처럼, 제 아무리 그들의 삶이 '희생'의 결과물이었을지라도, 결국 삶의 무게는 온전히 그 '스타' 당사자에게 짊어지워진다. 

영화 <주디>는 어린 시절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희생자가 된 주디, 그 가혹한 대가를 전 생애에 걸쳐 짊어진 주디 갈란드의 모습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대 위의 스타가 아니라, 인간으로  행복하고 싶지만 행복을 얻는 법을 배우지 못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사랑받고 싶었지만 끝내 내 편을 얻기 어려웠던 한 여성의 모습이 만인의 스타였던 무대 위의 주디와 대비되며 펼쳐진다. 




by meditator 2020. 4. 1. 01:47

은둔형 외톨이, 그건 바다 건너 일본의 사회적 현상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접촉이 어려워서 그렇지 학교를 가지 않고, 구직조차 하지 않은 채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15세에서 29세 사이의 청년 인구가 19% 정도에 달할 것이라 전문가들을 추정한다. oecd 평균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다. 

일명 은둔형 외톨이라 칭해지는 사회적 고립 청년, 3개월 이상 집안에 머물며 가족 등과의 인간 관계가 없는 상태로 있는 청년들을 뜻하는 단어다. 3월 29일 <sbs스페셜>은 이 청년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린다.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 개인적인 일탈로 여겨지고 있는 이들 청년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사회적 고립 청년'들이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자랑하는 '밀레니엄 세대'가 낳은 그늘이며, 사회적 현상으로 적극 대처해 나가야 한다 주장한다. 

 

 


스스로 택한 '고립'
18살 상민이, 아빠의 생신 날, 온가족이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데도 상민이는 방문을 닫고 만다. 가족과 얼굴이 마주한 게 언제인지도 모른다. 중2 때부터 학교 가기를 싫어하더니 고등학교 입학 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아예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2개월 째, 방안에만 머무르고 있다. 

방에서 상민이는 무얼 할까?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들여다 본다. 부모의 바램은 온가족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이지만, 차라리 안 먹을 지언정 식탁에 나서지 않는다. 결국 엄마가 상민이 먹을 밥을 들고 방으로 가져다 준다. 

23살 민준씨도 마찬가지다. 1년 넘게 방에서 산다. 학교 다닐 때는 지각, 결석도 하지 않은 모범생이었다. 군대도 다녀왔고, 제대 후 친구들도 만나러 나가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 그는 '칩거'한다. 

하소연도 해보고, 다그치기도 해봤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민준씨의 답은 냉정하다. '바라지마, 도와주지마, 내 스스로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굶어 죽었구나 해',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포기한 아들이 나가서 어떻게 될 까봐, 차라리 답답한 게 낫다며 눈물을 흘린다. 

도대체 이들 사회적 고립 청년들이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내린다. 그런데 사회적 고립 청년들은 그 '정의'를 배반한다. 전문가들은 하지만 그럼에도 그 '정의'로 부터 '고립'이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전문가가 찾은 상민이, 어렵사리 말문을 튼 상민이는 힘들어서 그랬단다. 학교가 여러가지로 힘들어서, 그러면서 이게 편하니, 그냥 이렇게 살겠단다. 정말 편할까?

26살의 민성씨는 반복적인 고립 생활을 한 지가 벌써 4년 째다. sns를 통해서 보면 친구들은 잘 살고 있는데 자신만 뒤처지는 거 같은 '패배감'이 자꾸 그를 방안으로 밀어넣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자신에 대해 가족조차 불편하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그를 더 세상 밖으로 나갈 자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방안에서 편했을까? 천국과 지옥을 반복했다고 한다. 5년 동안 고립 생활을 했던 28살 유승규 씨 역시 마찬가지다. 엉망진창이었던 시간, 순간순간 제 정신이 될 때 그런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단다. 자신이 싫었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단다.

 

 

밀레니엄 세대의 그늘
흔히 90년대 생, 밀레니엄 세대를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가진 세대라고 한다. 거기에 자기 주장이 강하고 똑부러진 세대, 평균적인 모습으로 비춰진 이 세대의 모습은 그 세대를 사는 동세대의 청년들에게는 '1등만 기억하는', 과잉 스펙과 외향적인 태도가 강요되는 시대로 짐지워진다. 캐치프레이즈처럼 강요된 시대 정신에 '쟤네들처럼 살아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청년들은 스스로 늦었다, 실패자다라며 스스로 낙인찍게 되고, 그중 더 예민한 친구들은 숨어 들어가 '고립'을 강제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육'과 '경쟁'에서 최고의 성취가 약화되지 않는 한 사회적으로 '고립'을 선택한 청년들의 대열은 줄어들 수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 실례를 민성 씨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한 '가정 폭력'을 잊을 수 없다고 하는 민성 씨, 그런 너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라며 변명하는 부모님, 하지만 그런 '가정 폭력'을 둘러싼 민성 씨네 가족 불화의 근원을 찾아들어가니 그곳에 민성 씨의 자퇴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자퇴를 하게 된 민성 씨, 하지만 부모님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아들이 자퇴를 결심했는지를 살펴보기에 앞서, 자퇴만은 막아야 한다며 동분서주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했던 어머니, 그런 아들을 용납할 수 없어 손찌검을 한 아버지. 그 시절의 앙금은 고스란히 민성씨에게 남아 '고립'의 계기로 작용했다. 

물론 처음부터 '고립'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두 발로 세상을 딛을 자신이 없어, 조금만 쉬겠다고 생각했던 생활이, 게임을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2,3년이 훌쩍 지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정말 세상 밖에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리며 '고립'이 강제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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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그래서 전문가들은 사회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초기에 '사회'와 주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대응하여 사회적 고립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스스로 '고립'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기에 '가족'을 비롯한 외부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고립 청년이 어느덧 고립 장년이 되어버리는 30년이 넘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1970년대에 시작된 고립 청년 100만의 사회적 현상은 이제 80대의 부모가 50대의 자녀를 돌보는 돌보는 부모의 노화로 비롯된 또 다른 양상의 사회적 문제를 낳고 있다. 

이에 일본 히키코모리 문제의 권위자, 사이토 타마키 교수는 고립 기간이 짧은 사람일 수록 생활 패턴을 바꾸기 쉽고 사람을 다시 사귀기가 쉽다며 빠른 대처를 요구한다. 

이런 전문가의 권유에 따라 고보리 모토무 대표는 k 고립 청년들을 위한 공동체를 마련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집을 떠난 민성씨가 찾아간 곳도 이곳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 외에 특별한 요구 조건이 없는 이곳의 모토는 단순하다. 느려도 괜찮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자. 서로 도와주자. 사회로 나가고 싶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선 청년들에게 공동체는 편견없이 바라봐주며 세상을 향한 문을 열어준다. 

이렇게 살겠다고 놔두라던 상민이 역시 가족,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관심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한 저녁 밥상에 앉았고, 아버지와 산책도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 까지 아버지가 날마다 '사랑하는 상민아'라며 편지를 썼다. 

최근 코로나 감염 사례에서 등장한 대구 모처를 비롯한 여러 곳의 청년들 집단 거주처, 사회는 그저 '사이비'에 '감염'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창창한 나이'의 청년들이 가족들과도 인연을 끊은 채 '종교'를 택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 역시 '종교'로의 고립을 택한 또 다른 사회적 고립 청년 집단일 수도 있으니까. 사회적 성취, 특히 최고의 성취가 청년들의 목표로 일괄적으로 강요되는 세상에서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는 청년들은 저마다의 방으로 숨어들어갈 수 밖에 없다. 어느새 oecd 기준의 몇 배를 넘었다는 사회적 고립 청년들, 그건 우리 사회 성취 지상주의가 낳은 '상흔'이다. 그리고 그 상흔에 대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사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다큐는 전한다. 



by meditator 2020. 3. 30.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