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씁쓸한 우스개가 있다. '앞으로 2주가 분수령'이라는 소리를 지난 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한 달 전에도 들었다는 것이다. 마스크 쓰고 조심하면 되겠지 했는데 '신천지'가 터지고, 이제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또 다른 '교회'에서 확진자가 대거 쏟아졌다. 이제 예배도 자제한다니 좀 줄어들려나 했는데 해외에서 확진자들이 속속 입국하고 있다.
'사회적 격리' 시책에 적극 협조했던 사람들은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실하게 해왔던 '격리'를 이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되면 '심장병', '치매', '우울증' 등의 발병이 늘어나는 등 개개인의 정신 및 신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의학적 보고마저 등장하고 있지만 '답'이 없다. 이럴 때일 수록 결국 챙길 건 '멘탈', 바로 그런 '멘탈'을 '건강'하게 지켜낼 수 있는데 '특효약'인 영화가 있다면? 바로 <모리의 정원>이다.
은둔?, 아니 정원이 너무 넓을 뿐 일본의 정원하면 곱게 다듬은 나무, 정갈한 바위, 수풀과 붉은 잉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는 연못을 떠올릴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하지만 알고보면 자연을 뺨칠 만큼 자연스럽게 만들기위해 인간의 지대한 노력이 경주된 곳. 그래서 곳곳의 정원들은 그 자체로 유명 관광 명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리의 정원>에 등장하는 정원은 그렇게 인간의 손길이 더해진 '풍광'좋은 정원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조감'으로 비춰지는 모리의 정원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 조금 넓은 수풀이 우거진 '마당'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싶은 그런 곳이다.
물론 모리의 정원에도 '연못'도 있다. 심지어 '모리'가 30년이나 가꾼, 하지만 그곳도 특별하게 다듬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94살이 되어버린 모리 옹이 홀로 구덩이를 파서 연못을 만드느라 오래 걸린 연못이다. 구덩이를 파서 빗물이 고여 저절로 연못이 된 곳, 그곳에 강가에서 옮겨온 송사리가 사는, 좋게 말해 연못이지, 물 구덩이에 가까운 그곳이 날마다 모리가 시간을 보내는 연못이다.
딱히 인간의 '인공적'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그 무성한 마당에 오늘도 94살 모리 옹은 '출근'을 하신다. 집 앞에서 빨래를 널던 아내는 머리 숙여 다녀오시라 한다. 옷을 여미고, 허리춤에 주머니를 찬 채 나막신을 신고 지팡이 두 개를 짚으며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호기롭게 길을 떠난 모리 옹, 그 기세에 길을 가던 도마뱀이 혼비백산 수풀로 몸을 피한다.
그런데 길을 따라 방향을 튼 모리 옹이 자신의 길을 막은 여리여리한 나뭇가지 하나에 그만 시선을 빼앗긴다. 눈이 휘둥그레해진 모리옹, '여태 자라고 있었는가?'라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겨우 나뭇가지와 헤어지니 이번에는 흰 고양이 한 마리, '이보게' 하고 인사를 청한다. 나풀나풀 나비에게 '어디에서 날아오셨나?'며 매료된다. 마치 나비에 시선을 빼앗겨 무릉도원으로 찾아간 옛날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이리저리 시선을 빼앗긴 모리 옹이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 아내가 배웅하던 그 집 앞이다. 여전히 빨래를 널고 있던 아내와 눈이 마주친 모리 옹은 한탄하듯 말한다. '연못이 멀구만'.
이런 식이니 연못까지 가는데 만도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겨우 연못에 도달하면 눈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송사리 몇 마리에 시선을 빼앗겨 한 나절이다. 그게 아니라면 개미는 어떨까? 바닥에 머리를 대고 개미를 바라보기만 하는 게 얼마 동안이었는지. 모리 옹을 기록으로 남기려 찾아온 포토그라퍼에게 모리 옹은 자신의 발견을 전한다. '요즘 알게 된건데 개미는 왼쪽 두번 째 다리부터 움직인다네', 그 모리 옹의 발견을 공감하기 위해 그날 하루 종일 개미와 눈높이를 맞추던 포토그라퍼와 그 제자, 하지만 결국 눈을 비비며 내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30년 세월이라지만, 그 30년의 세월 동안 헤매인 정원이 결코 '좁지 않다'. 그를 찾아온 '외계인'이 자신과 함께 우주로 가자 하지만(?) 당당하게 모리는 자신에게 우주보다는 정원이 넓다며 거절할 이유가 된다. 나무통, 휘어진 나무, 뒤집힌 화분, 그루터기 14군데 자신만의 쉼터를 전전하며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히 넓은 정원에서 매일 매일이 새로우니, 그런 자신을 두고 '신선'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평가를 모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내와 조카와 함께 한 밥상 머리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괴팍하게 펜치까지 동원해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뿌려대며 반찬들을 절단내는 괴팍한 노인네라 치면 하루 종일 개미를 보느라 바닥에 누워있는 모리 옹은 정말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 격리 시대라지만, 밖은 꽃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계절, 하루가 아니, 아침 저녁이 다르게 피어가는 꽃들, 그리고 우리 역시 해마다 피는 꽃이건만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에 대해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게 보면, 새로 뻗어난 가지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모리 옹과 우리가 무에 그리 다를까 싶다.
도대체 어느 만큼 '마이크로'한 시선을 견지하면 개미가 움직일 때 왼쪽 두 번째 다리부터 움직이는 걸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코로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몇 수 십번 마음 속에 새기는 참을 인자가 아니라, 좁은 마당도 우주보다 넓게 볼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바로 그런 모리 옹의 사고 방식이 아닐까. 30년 만에 개미의 왼쪽 두 번째 뒷다리의 움직임을 깨달은 모리 옹다운, 아이처럼 순수한 그의 그림이 영화 속 당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건, 우리 역시 마음 속에 그런 '모리 옹'과 같은 지향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메시지'일 것이다.
모리 옹의 정원은 그저 모리 옹의 '출근'처만이 아니다. 94세 당대 최고의 화가조차도 '학교'라 하며 가기 싫어하지만 매일 밤 '등교'해서 그린 그림의 대상일 뿐도 아니다. 주변에 아파트가 생겨 마당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생긴 상황, 찾아온 아파트 건축 업자에게 모리 옹의 아내는 말한다. 이곳은 남편의 전부이기도 하지만, 벌레와 나무와 고양이와 새가 함께 사는 공간이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그렇게 자연과 함께 하는 공간, 그리고 당대 최고 화가가 30년을 봐도봐도 지키지 않는 '정원'이 아파트로 인해 위기에 빠지자 젊은 예술가들은 모리 옹의 집 앞에 벽보를 붙이며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문패만 붙이면 못질을 제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도난을 당하고야 말 정도로 유명한 모리 옹의 글씨체, 그렇게 유명한 모리 옹이 쓴 글씨로 자신의 간판을 내세우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 찾아온 여관업자에게 모리 옹은 그가 원하던 여관 이름 대신,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문구를 써주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그렇게 남의 집 간판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린 모리 옹 답게, 지난 30년을 당신 손으로 흙을 퍼서 만든 연못을 다시 메꿔달라며 다른 사람도 아닌 아파트 인부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30년을 들여 만든 연못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도록 '선택'한 모리 옹 덕분에 정원에 사는 생물들은 다시 햇빛이 비치는 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버리는 것 같지만 모두가 같이 살아가는 길.
영화 속에서 모리 옹은 자신의 조용한 삶을 흐트러 뜨리는 사람들의 방문을 마땅찮아 한다. 하지만 웬걸, 모리 옹의 집에는 하루 종일 드나드는 사람들로 매양 분주하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볼일을 보겠다고 찾아온 인부에서 부터, 그의 그림을 얻겠다 찾아온 사람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를 사람들까지.
그의 집에 그림자를 드리울 아파트를 짖던 인부들은 반딧불이처럼 헬맷에 불을 밝히고 찾아와 하루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마시다 간다. 정원에 드리운 풀과 나무와 벌레처럼, 그렇게 사람들도 모리옹의 집에 머물다 간다. 우리 역시 '코로나 시대', '격리'의 공간에서, 본의 아니게 버려진 것들에 대해 아쉬워 하는 대신, 혹시나 그것들이 '모리 옹'처럼 이 '버려진 시간 속에서 새로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지.
<모리의 정원> 주인공인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는 실제로 1932년에 집을 지어 1977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으로 분한 야마자키 츠토무의 권유로 이 작품을 만들게 된 오키타 슈이치 감독은 소박하게 자연 속에서 살며 돌아가실 때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화가의 세계를 '자연을 향해 열린 세계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물질 문명'에 젖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
2018년 상하이, 밴쿠버, 샌디에이고 등 다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 후보로 지정되기도 한 <모리의 정원>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키키 키린의 유작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 그 어떤 작품보다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작품, 하지만 퐁당퐁당 좌석 배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격리'가 요구되는 시대, 극장에 가서 햇빛이 가득찬 푸르른 정원과 그곳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리 옹 부부를 꼭 보라 권유하기가 무색한 이 시간이 안타깝다.
사회적 격리의 시대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병리적 무기가 되어버린 시대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그 '인간'으로 인해, 그 인간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죽었다는 사실을 새삼, 재삼 확인하게 되는 시절이다. 그래서 국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고하고, 나아가 '처벌'의 대상으로까지 삼는다. 이 시대를 견뎌야 하는 짐은 '격리'된 개인에게 고스란히 얹혀진다.
바로 이 '격리'에 대해 충격적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올해 아카데미상 주요 후보에 올랐던 <두 교황>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2008년 만든 이 영화는 마치 2020년의 코로나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듯 하루 아침에 온 도시를 덮친 정체모를 백색 실명의 사태를 묵시록적으로 그려낸다.
격리, 아니 방치된 사람들 질병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어제와 다를 것없이 평범한 날 거리에서 운전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었다. 다른 맹인들과 달리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안과에서도 처음 보는 질병, 하지만 그 남자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그 남자의 차를 훔쳐간 도둑, 그 남자를 치료한 의사 이런 식으로 '백색 실명'은 퍼져 나갔다.
그리고 듣도보도 못한 질병에 대해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결정에 따라 격리될 장소로 떠나게 된 의사(마크 러팔로 분), 그 아내(줄이안 무어 분)는 이제 막 눈이 멀어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해내기 힘든 남편을 돕기 위해 스스로 눈이 멀었음을 자처하고 '격리'된다.
그러나 말이 격리지, 그건 백색 실명자들을 사회로 부터 '소거'한 것이었다. 덩그러니 허름한 건물, 군인들을 그들을 데리고 가 그곳에 '방치'했다. 깨끗한 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불결한 환경, 이제 갓 눈이 먼 사람들은 스스로 화장실조차 가기 힘들 정도로 제 한 몸을 돌보기 힘든 상태다. 결국 안그래도 더러운 환경이 복도 곳곳에 사람들이 만들어 낸 오염물 천지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그런 난제들 사이에서 '방치'된 실명자들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럴 수록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대사처럼 상황은 갈수록 극에 치닫는다.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원작의 한 문장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시각의 대한 의존도가 높다.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는 바로 그 인간이 가장 의존하는 시각을 상실케 함으로써, '인간'을 묻는다. 즉 가장 인간다운 시각을 상실케 하여,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묻는다.
인간다움에 대하여 '우리가 쌓은 담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일까'(원작에서), '집단 격리', 그 상황은 곧 무정부 상태의 아노미를 불러온다. 떼거리로 건물에 갇힌 사람들이 그나마 제한된 조건에서 질서있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합의된 룰과 원칙을 합의하고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먹는 것'의 평화마저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결국 그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부메랑이 되어 '격리'된 사람들의 목을 조른다.
상황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가는 건 격리된 그들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발포를 불사하며 '적대시'하는 군인들이다. 눈이 안보여 대열에서 빠져나온 사람, 썩어가는 발을 참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 모두 결국 총성의 희생자가 되었다. 어제는 국가의 '시민'이 하루 아침에 발포의 대상이 되는 공포스러운 '역전'은 그 누구라도 위협이 될 시에는 바로 '적'이 될 수 있는, 보호자를 자처해온 '권력'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민낯을 드러내 보인 건 국가라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 든지 공평하게 나눠가지려 애쓰던 사람들, 그런데 갑자기 3번 방에서 총을 든 한 사람이 그 총을 앞세워 식량을 독점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단지 총 한 자루라는 무력 앞에 무기력해진다. 순순히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거둬서 바치고, 그것이 떨어지자 '여자'를 '공급'하라는 주문에 자신들이 머무는 방의 여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보낸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격리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이 시력을 되찾을 때까지 그들을 몰아가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인간다움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다움'마저 잃은 듯 행동한다. 배고픔 앞에서, 겨우 한 자루의 권총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눈을 잃은 사람들 중에서 그간 눈이 안보여 왔던 '맹인'은 상대적 우위를 점한다. 영화 속 두 맹인이 등장한다. 그 중 한 명은 그의 보이지 않지만 보일 정도로 능숙해진 맹인의 생활을 총을 든 남자의 권력을 '보좌'하는데 이용한다. 그런 맹인에게 의사의 아내는 '인간'을 묻는다. '조금씩 양보하다보면 결국은 인간이기를 상실하게 되고 마는 존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안다.'(원작에서) 도대체 눈도 안보이고, 정부마저 버리다 시피하여 격리된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을 '인간의 존엄'을 운운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겠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참혹하게 그려낸다. 복도에 즐비한 배설물, 그걸 밟고 오가는 나신의 사람들, 그 한 구석에서 뒤엉킨 남녀, 그리고 배고픔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고 마는 남성들, 심지어 그 총 한 자루의 악이 제거된 상황에서 조차 사람들은 떨쳐 일어서기 보다 '협잡'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인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휴지 한 롤을 가지고 두 여성이 머리끄댕이를 잡고 혈투를 벌였다는 외신은 그 참혹함이 우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실감케 한다. 반면 비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환자들로 인해 전 사회가 '멘붕'에 빠졌지만, 마스크 한 장을 위해 몇 시간을 참으며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 부족한 병원 시스템에 자가격리를 하며 인내하는 대구 시민들, 희생과 봉사의 대명사가 된 의료진들, 그들을 보면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 인간 존엄의 경계는 건재하다는 '감사'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된다.
길고 지리한 사회적 격리에 지친 즈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경계가 풀려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게 만들어 준다. 드디어 모두가 시력을 되찾은 후, 그때서야 하늘을 바라본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는 자신에게 묻는다.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 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고 소설은 답한다. 코로나 시대를 견뎌가야 하는 우리 삶의 답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의 아내가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그럼에도 견뎌내며 자신과 남편, 그리고 주변의 삶을 인도했듯이, 눈밝은 그녀처럼 '존엄'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이 시대를 건널 밖에.
3월 22일 종영한 <본 대로 말하라>, 16회 4.388%(닐슨 코리아 케이블 기준)로 ocn 장르 드라마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일까, 16회 엔딩, 심정지로 죽을 뻔했던 황하영(진서연 분)도 다시 살아났다. 사라졌던 오현재(장혁 분)은 차수영 형사(최수영 분)의 책상에 두 사람이 공유하던 이어폰을 놔두면서 시즌 2를 암시하는 듯한 장면을 내보냈다. 시청률만으로만 보면 시즌 2도 기대해 볼만하지만 과연 그럴까? <본 대로 말하라>가 시즌 2를 하겠다면 스스로 재고해야만 할 과제들이 산적하다.
주도적이었던 두 여성 캐릭터의 붕괴 무엇보다 <본 대로 말하라>가 야심 차게 선보인 장르물로서의 설정은 바로 제목에서 보이듯이 '본 대로 말할 수 있는' 피처링 능력이 있는 차수영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청각장애인인 엄마가 자신의 눈앞에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뺑소니차에 죽어가는 장면을 고스란히 기억했던 어린 차수영, 거기서부터 <본 대로 말하라>는 비롯된다.
말 그대로 사진을 찍듯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을 그래도 기억해 내는 '능력'을 가진 차수영은 이 작품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김홍선 피디의 전작 <보이스>의 강권주 팀장처럼 '이상 신체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이다. <보이스>가 강권주 팀장이 남들이 듣지 못하는 사건 현장의 소리를 '캐치'해 내는 것을 실마리로 사건을 풀어나가듯이, <본 대로 말하라>는 자신의 동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현장을 본 대로 기억하는 바람에 광역 수사대의 일원이 된 차수영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펼쳐진다.
그리고 아직 풋내기 경찰, 그리고 신참 형사에 불과한 차수영을 '그놈'이란 칭해지는 '박하사탕 연쇄 살인마' 사건으로 이끌어 가는 건 '그놈' 때문에 휠체어 신세가 되어버린 그래서 차수영의 '본대로 말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프로파일러 오현재이다. <보이스 1>에서 듣는데 집중하는 강권주 팀장의 능력을 역시나 '그놈 '때문에 아내를 잃은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미친개처럼 돌진하는 역시나 장혁이 분했던 무진혁이 팀워크을 맞추듯 말이다.
하지만 종횡무진 날 것의 액션을 앞세웠던 장혁이 거친 눈빛 마저 검은 선그라스로 숨긴 채 휠체어에 앉아있자 좀처럼 드라마는 활기를 띠지 못한채 시청률마저 답보했다. '그래서였을까. 드라마는 '요건 몰랐지?'하는 반전의 설정으로 '장혁'을 휠체어에서 일으킨다. 그리고 종횡무진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일당백 '나쁜 놈들'을 상대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프로파일러'로서의 능력도 빼놓지 않는다.
이러고 보니 드라마가 중반에 이르러서부터 장혁의 <말하는 대로 봐라>가 되었다. 분명 애초에 드라마가 설정한 것은 '픽처링' 능력의 차수영과 장혁의 더블 플레이였을 터인데, 어느새 드라마에서는 장혁이 동분서주하며, 여주인공인 차수영은 마치 배부르게 먹고 난 후 나오는 '후식'처럼, 이 드라마가 이런 설정도 있었어라는 걸 확인시켜주듯 가물에 콩 나듯 그 능력을 선보인다. 그것도 대부분 장혁의 지시에 따라.
이렇게 사라져 버린 '여주인공의 존재감, 하지만 차수영만이 아니다. 그녀와 더불어 '걸크러쉬'한 존재로 등장부터 장혁만큼 분위기를 압도했던 황하영 팀장은 회를 거듭할 수록 애초의 존재감을 상실해 간다. 도대체 황하영인 선배인 양만수(류승수 분) 형사를 제치고 팀장이 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수사팀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이렇다하게 하는 것이 없다. 오죽하면 황하영 캐릭터를 떠올리면 기억나는 대사가 '오현재!'라는 외마디 외침 밖에 없을까.
심지어 후반부에 알고보니 그녀가 '납치 피해자'였다는 설정이 드러난 이후 그간 그녀가 경원시해온 비리 경찰과 손까지 잡는 황하영의 행동은 팀장으로서의 리더쉽은 물론, 그간 그녀가 보여온 강직한 경찰로서의 정체성마저 흔들며 캐릭터를 붕괴시키고 만다. 납치 피해자로서, 그리고 살고 싶었던 인간적인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던져 범인 검거에 앞장섰음에도 광수대 팀장으로서 캐릭을 설득시키는데 아쉬움을 남긴다.
최근 여성 캐릭터들을 내세운 드라마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본대로 말하라>의 차수영, 황하영의 경우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진행하면서 그 본래의 설정을 역동적으로 살려내지 못하면서 애초의 기대조차도 못미친 경우가 되었다.
그런데 <본대로 말하라>에서 아쉬운 건 두 여성 캐릭터만이 아니다. <보이스>가 비록 강권주의 이상 신체 능력에 기대었지만 기본적으로 112 신고 센터 골든 타임팀이라는 경찰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과 달리, 광수대라는 경찰 조직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조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복수를 향해 내달리는 오현재와 그에 협조하는 차수영이란 팀웍은 16회 내내 수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경찰을 자신의 비리가 드러날까 봐 사람까지 죽이려는 범죄 집단이거나, 범인에게 당하기만 하는 어리석은 조직으로 만들어 버린다.
잔혹한 범죄의 설정만으로는 이와 함께, <본대로 말하라>를 비롯한 최근 장르물에서 대두된 문제점은 허약한 스토리 라인을 자극적인 범죄로 무마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장르물의 시리즈들, 그런 가운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보다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스토리 대신, 그럴듯한 설정과 그 설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범인의 잔인무도한 범죄 현장이 드라마를 이끈다.
특히 오현재의 경쟁 프로파일러 나준석을 생방송 현장에서 목매달아 죽이는 장면의 경우, 그가 죽는 과정의 잔혹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지만, 그렇게 되도록 현장에 무수히 있던 형사들이 손을 놓고 있으면서 범죄를 쥐어짜내는 듯하여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또한 후반부에 이르러 비리의 축이었던 최형필(장현성 분)의 죽음이나, 양만수 형사의 죽음은 서사의 개연성과 상관없이 범인의 잔혹성을 위한 '희생적 장치'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반응이 뒤따른다. 덕분에 드라마는 매회 잔인하고 섬뜩한 범죄로 이어지지만 정작 16회를 완주하고 난 후 오는 여운이 얕다. 겨우 시즌 1에서 벌써 캐릭의 붕괴와 서사의 부실함을 드러낸 <본대로 말하라>, 다음 시즌을 <말하는 대로 봐라>로 하지 않으려면 보다 치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1화, 기존 병원 드라마의 전형적 서사 장치를 깨며 의학 드라마 이전 사람 사는 이야기를 표방하며 포문을 열었다. 또한 알고보니 키다리 아저씨였던 재벌가 막내 아들 소아 외과 안정원(유연석 분)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흉부 외과 김준환(정경호 분), 산부인과 양석형(김대명 분), 신경외과 채송화(전미도 분), 간담췌 외과 이익준(조정석 분)까지 20년지기 친구들의 캐릭터를 소개했다.
이어 2화의 바톤은 채송화가 이어받는다. 귀신이라 불리는 지각없이 출근하고 많은 수술을 소화하며 후배 전문의의 논문까지 챙기는,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소화해 내는 수퍼 우먼 채송화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거기에 더해 다섯 명 주인공들의 주변 전문의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이야기의 폭을 확장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방점을 찍는 건, 바로 '사람'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는 나태주의 시 <풀꽃>의 그 '너' 처럼 말이다.
자세히 보아야 안그래도 밤을 새워 해야만 하는 13시간 짜리 수술을 앞둔 채송화를 치프 레지던트 용석민이 조른다. 미디어와 '프렌들리'한 뇌센터장 민기준 교수는 지하철 영웅이 환자로 들어오자 공명심에 앞서 뇌를 여는 개복 수술을 하겠다고 했던 것. 병원장까지 나선 회의에서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은 덜하고, 정밀도가 높은 TSA수술로 변경했지만 문제는 민교수가 이 수술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다. 이에 치프 레지던트 용석민은 '환자가 죽는 걸 지켜보기겠냐'며 채송화를 닥달하는 한편, '잘 모르시면 제 말 대로 하시라' 며 환자에게 위협하다시피하며 수술을 변경하고자 애쓴다.
이 상황은 언뜻 보면 마치 치프 레지던트 용석민이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 나가서 보이는 돌발 행동처럼 보인다. 결과는 예상 외다. 물론 민기준 교수가 T경험이 일천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용석민이 자신의 논문 사례로 지하철 영웅을 이용하기 위해 상황을 밀어부친 것이었다. 용석민이 내세운 선의,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건 그의 욕망이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반 외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교수는 13명인데 그들을 어시스트할 레시던트가 장겨울 한 명인 상황, 그래서 외려 교수들이 레지던트의 안부를 묻는다. 심지어 이익준의 경우 자신의 수술에 어시스트를 부탁하기 위해 장겨울 앞에서 '픽미 픽미'하며 애교섞인 댄스를 보여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교수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장겨울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 오만해 보일 정도로.
응급실 콜을 받고 내려간 장겨울, 교통사고로 들어온 7세 남자 아이의 환후가 심상치 않다. 환자 보호자인 어머니를 만나 장겨울은 자신이 전달받은 결과를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달한다. 치명적이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시라. 심지어 어머니가 CPR을 하지 않아 더 위험에 빠졌다는 말까지 해버린다. 이 말을 지나가다 들은 안정원은 장겨울에 대해 의사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사람이란 선인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은 다시 응급실 콜을 받고 간 장겨울의 행동으로 인해 무색해 진다. 오랜 노숙 생활로 인해 동상에 걸리고 심지어 그곳에 구더기가 드글거리는 노숙자, 그가 뿜어내는 악취와 구더기로 인해 의료진 모두가 난감해 하며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장겨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구더기를 떼어내기 시작한다.
흔히 우리나라 속담엔 사람 겉만 봐서는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2화의 이야기는 바로 그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은 사람됨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쉽게 예단하고 선입견에 눈을 가리는 우리들의 '판단'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오래 보아야 채송화의 동급생이었던 여성이 환자로 들어온다. 일전에 유방암 수술을 했고, 다시 뇌에 암이 생겨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 남편은 해외에 일하러 가고, 홀로 투병을 해야 하는 여성은 잇다른 수술로 한껏 우울해져 있는 상황이다.
어르신들만 있는 병실에 배치된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그저 유방을 한쪽 절개한 이상한 사람에 대한 어긋난 호기심이라고만 여긴다. 그 역시 반전이다. 알고보니 한 병실의 어르신들이 그녀의 자격지심과 달리, 당신들에 비해 아직은 한참 젊은 그녀가 이뻤던 것이다.
유방도 한쪽 밖에 없고, 뇌수술까지 해야 해서 삶이 아득하기만 했던 그녀가 그래도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게는 한참으로 보였던 것이다. 여든 넘으신 엄마가 초로의 딸에게 너는 젊어서 좋겠다 하듯이. 그리고 그렇게 그녀를 곱게 쳐다보는 어르신들의 시선은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던 그녀를 구출한다. 어르신들에 대한 편견어린 커튼을 그녀가 열어젖히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삶의 구원이다.
그렇다면 2화의 이야기를 이끈 채송화는 어떨까? 그녀에게 '귀신'이란 별명을 붙인 건 용석민이다. 그녀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용석민에게 비춰진 그녀는 인간의 경지 그 이상으로 성실하고 일 열심히 하는 선배 의사란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2화에서 보여진 채송화는 그저 '워커 홀릭'이 아니다. 자신과 사귀던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진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없이 일상을 이어가는 '프로'이지만, 뻔히 제가 용석민이 자신의 욕심으로 채송화를 움직여 무리하게 수술을 강행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어시스트를 자처해서 뇌센터장 민기준 교수의 입장도 배려하고, 욕심인 줄 알면서도 후배 용석민의 요구를 품어주는 너끈한 포용력을 보인다.
하지만, 그저 포용력만이 아니다. 환자에게 무례했던 용석민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다시 한번 그런 일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따끔한 훈계 또한 잊지 않으면서 그저 수술 잘하고 일 잘하는 선배 의사 이상의 인간적 품격을 보여준다. 일 잘하는 것 이상의 '의사'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주목하는 '어른'들, '선배'들은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른의 품격', '나이듦의 품격'을 지닌다. 그저 오래 살고 프로페셔널하게 된 것이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여성 한 명에 남자 네 명의 우정이라는 묘한 구도로 앞으로 예의 신원호 피디의 작품처럼 남편 찾기로 회귀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에 2화에서 보여준 여주인공 채송화, 그리고 2화에서 등장한 장겨울 등 여성 캐릭터에 대한 접근은 그간 드라마들이 답보해온 '여성', '남성'의 이분법적인 구도와 선을 그은 듯한 차별성에 천착한 묘사가 아니라, 남성, 여성 이전의 사람,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서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신선했다.
특히 마지막 에필로그처럼 등장한 김준환과 채송화의 전 남친과의 대화, 연인 사이의 일에 과한 참견이 아니냐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전 남친에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없냐'라고 반문하는 김준환의 태도는, 그 '귀신'같은 삶에서도 '파스'같은 위로를 주는 친구들처럼 남녀 사이 그 이전의 '사람'이라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15년전 유통업을 하다 사업 실패로 많은 빚까지 졌던 진종현(성동일 분), 하지만 그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은 조만간 상장을 앞둔 IT 기업 포레스트의 회장이 되었다. 포레스트가 전국민적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저주의 숲 포레스트' 이란 SNS사이트가 큰 역할을 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어주는 사이트, 그 사이트는 '혐오'라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안고 성장세를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첨단의 IT기업을 일군 진종현 회장은 무속을 신봉하다 못해 광신하는 사람이다. 모기업 포레스트의 자회사인 진경은 아예 무당인 진경(조민수 분)가 이끌어 가고 진종현 회장은 포레스트의 상장보다 진경이 도모하는 거대한 음모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
OCN에서나 할 법한 장르물, 더구나 우리나라 장르물 중에서도 희귀한 장르인 오컬트물이 주중 TVN에서 가능할까라는 우려가 무색하게 1회 2.49%로 시작하여 12회 6.721%로 마무리된 <방법>은 최근 부진했던 TVN 주중 드라마 중 풍성한 성과를 거두며 종영했다.
특히 연상호 감독의 각본으로 주목받은 <방법>은 그간 오컬트 장르물에서 '조연'의 몫을 차지하던 '무속'을 전면에 내세웠다. 무속 신앙에 빠져든 사람들, 그리고 그 무속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서가 된 '혐오'가 어우러져 악의 세력으로 구축된다. 연상호 감독이 전작 <사이비>에서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이비'라는 현상으로 귀결되는가를 보여주었듯이, <방법> 역시 한 개인에게서 시작된 그릇된 광신이 어떻게 사회적 악으로 팽창하여 나가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임진희의 신념 드라마를 연 건 열혈 기자 임진희(엄지원 분)이다. 중진일보 탐사 보도 기자인 그녀는 포레스트에 대한 제보를 조사하던 중 제보자가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늘 기자답게 '팩트'를 중요시하게 여기던 임진희 하지만, 소진을 만나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는 다른 '무속'의 세계, '저주'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물건, 한자 이름을 알면 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는 소진의 당돌한 요구가 자신의 상사 김주환의 죽음으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임진희, 그녀는 이제 소진과 함께 그녀가 살아왔던 팩트의 세계를 건너 '무속'의 세계에 합류하여 진종현에게 씌여진 악귀가 열어가고자 하는 어둠의 시대를 막아서고자 한다.
어린 시절 왕따를 당했던 친구 소진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간직한 임진희, 그래서 자신에게 찾아온 또 다른 소진을 품는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방법'해 버리고 말겠다는 아직은 채 가치관이 무르익지 않은 소녀 소진을 다독인다. 그렇게 방법이라는 '저주'의 방식속에서도 '정의'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임진희의 신념을 <방법>은 동력으로 삼는다.
백소진의 방법 시작은 백소진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은 무당이었던 백소진 엄마의 그릇된 모성이었다. 잡신이 내려 신기가 약해 온갖 굿을 다해야만 겨우 풀칠이나 하고 살던 소진 모녀, 그런데 소진에게 이누가미가 들었다. 음식을 앞에 놓고 땅에 묻어 굶어 죽여 악에 치받힌 '견신' 이누가미, 그 악귀가 자신의 딸에게 들자 어미는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굿을 하러 온 진종현에게 그 악귀를 옮기려 했다. 그러나 굿을 지켜보지 말라는 어미의 당부를 어긴 딸때문에 진종현과 딸은 악귀를 나눠가지게 되었다.
결국 죄책감에 못이겨 진종현을 '방법'하려던 어미, 악귀를 나눠가진 딸이 나동그라져 괴로워하는 걸 어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어미는 진종현을 방법했다는 이유로 찾아온 진경 일당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진종현은 웃으며 그걸 지켜본다. 그리고 소진은 그 모든 걸 낱낱이 목격했다.
그 날 이후로 소진이 살아가는 목적은 진종현이다. 그를 방법하는 것, 그래서 진종현의 포레스트를 '폭로'하고자 하는 임진희를 찾아냈고, 그녀와 함께 포레스트를, 진종현을 '방법'하고자 했다.
'방법'을 증명해 보라는 임진희의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상사를 뒤틀어 죽여버리는 소진, 그런 소진은 어미를 죽인 진종현과 그 일당이 더 나쁜 놈들이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누군가를 죽이는데 있어 거침이 없기는 진종현과 다르지 않은 '저주' 악귀가 들린 또 한 사람일 뿐이다. 비록 악인이지만 죄없는 김필성이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자 '방법'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아직 미성년인 소진의 설정은 주목할 만 하다.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은 소진이 정의관이 투철한 임진희를 만나 '방법'의 방식과 목적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결국 임진희가 제시한 임진희를 '방법'하는 대신 자신의 몸에 '악귀'를 담는 '희생'으로 드라마를 마무리한 것은 '성장'과 '성숙'의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이것이 극 초반 딜레마가 될 수도 있는 '방법'에 대해 드라마가 답한 방식이다.
진경의 굿판 같은 악귀, 다른 선택, 바로 이게 소진과 진종현의 다른 길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소진이 임진희를 만나, '저주'의 악귀가 씌였음에도 결국 같은 '악귀' 진종현과 그의 어두운 음모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옆에 좋은 사람 '임진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종현이 만난 건 진경이었다.
종합병원 의사 부부의 굿이나 봐주며 돈을 벌어오던 진경은 우연히 그 병원에 '신이 들려' 입원 중인 진종현을 발견한다. 그가 소진 어미가 했던 '방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진경은 자신을 던져 굿을 하여 소진 어미가 했던 '저주'를 풀어낸다. 그리고 진종현에게 씌인 악귀를 자신이 모신다. 소진 어미를 찾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빨리 해치우라 했던 진경은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레스트의 모기업 '진경'의 수장이 되어 진종현의 포레스트의 온갖 궂은 일을 처리하겨 승승장구해왔다.
<방법>에서 최종 보스는 진종현이고, 진경은 7화에서 소진에 의해 '방법'당하며 퇴장하지만, 조민수의 신들린 연기에 힘입은 진경이 뿜어내는 어둠의 카리스마는 <방법>이라는 분위기 전체를 지배한다.
아니 진경만이 아니다. 드라마 첫 회 깊은 산골짜기 소진의 어미를 찾아온 두 여인은 바람핀 남편을 적당히 '방법'해 달라며 돈을 들이민다. 결국 이 장면이 보여주는 건 <방법>이 가진 문제 의식이다. 똑같은 악귀이지만, 진종현은 진경을 만나서,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조차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이환 상무(김민재 분)을 오른팔로, 그리고 그의 사이트에 '혐오'를 뿜어내는 사람들에 힘입어 최대 IT기업으로 승승장구한다.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SNS를 기반한 IT기업이 사회적 혐오와 악에 기반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법>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과연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우리네 무속 신앙의 장르화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한자 이름, 소지품만으로 단 몇 초 만에 온 몸이 뒤틀려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방법'의 신박함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진 일상의 '혐오'가 서사화된 그 드라마틱한 구성 때문이었을까? 연상호 감독은 <사이비>에 이어 또 한편의 종교적 문제작을 우리에게 과제로 남긴다.
2019년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공개되었던 <킹덤>이 3월 13일 시즌2로 돌아왔다. 유려하고 우아한 도포와 갓의 조선을 배경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환생이라도 되듯 좀비떼처럼 들이닥친 '역병' 환자들의 역습이라는 신선한 발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인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그만큼 시즌 2에 대한 기대는 높아졌었다.
<끝까지 간다> 김성훈 감독이 참여한 1회에 이어 <특별 시민> 박연제 감독이 바톤을 이어받은 시즌 2는 시즌1이 펼쳐놓았던 서사의 대장정을 이어받아 일단락짓는다. 그런데 시즌2를 보다보면 공교롭게도 자꾸 이즈음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코로나 19로 인한 혼란상이 자꾸 떠오른다.
역병, 그 정체가 밝혀지다 드디어 밝혀졌다. 인간을 좀비로 만들어 버리는 '역병'의 정체가. 매일 밤 한 사람씩 제물이 바쳐지는 어전, 그곳에서 좀비처럼 목숨을 잃고도 '왕'의 허명을 유지해가는 왕, 그렇게 시작되었던 시즌 1, 그 왕을 치료하던 어의의 제자가 희생되고, 그 제자와 함께 어의는 동래 지율헌으로 돌아왔다. 말이 백성들을 치료하는 곳이지 당장 끼니조차 없어 굶어죽게 생긴 백성들. 전쟁과 집권층의 가혹한 수탈 등으로 인해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인육탕'을 먹어서라도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이 좀비의 탄생, 그 배경이 된다.
호위호식하는 양반들, 굶주림에 시달려 '시체'라도 먹을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대조적으로 그려내며,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지배의 결과물인양 좀비가 되어버리는 역병은 동래를 시작으로 경상도 땅을 집어 삼켜버리고 만다.
역모의 혐의를 받고 쫓기던 세자 이창(주지훈 분)은 역병의 현실을 목격하고 위험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 자신의 옛 스승이자 전란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안현 대감(허준호 분)을 찾아나선다. 그런데 안현 대감은 마치 역병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역병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이 원산지인 생사초, 그 생사초로 죽은 사람을 살려낸 '기적'이자 '저주'의 시작은 알고보니 전란의 와중에 아군의 생사가 절멸에 다다르던 3년 전 안현 대감과 조학주(류성룡 분)가 함께 했던 전쟁터였다.
여기서 밀리면 곧 아군의 절멸, 그리고 나아가 조선의 패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벼랑 끝의 상황에서 조학주는 기꺼이 생사초를 이용하려 했고, 반대를 하던 안현 대감도 결국 끝내 막아서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전란은 평정되었고 조학주도, 안현 대감도 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된 것이다.
결국은 인재, 권력욕에서 비롯된 오만 하지만 전쟁으로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을 생사초는 이제 다시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가문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는 조학주의 권력욕으로 인해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왕 한 사람으로 끝날 줄 알았던 피를 부르는 영생은 결국 경상도 땅을 시작으로 조선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즉 우리 사회를 덮친 코로나 19가 그 시작은 중국이었으되, 결국은 우리 사회의 '인재'가 걷잡을 수 없는 확산을 만들어 냈듯이, 코로나 19에 대한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시절에 만들어진 <킹덤>은 중국으로 부터 유래한 생사초가 조선 땅에 들어와 인간들의 '욕망'의 도구로 씌여지며 좀비 역병을 불러오게 되었다는 점은 놀랍게도 시사적이다.
이렇게 시즌2는 시즌1에서 시작된 역병의 역습에 대한 그 시작과 창궐의 이유를 집권층의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부터 길어올린다. 영혼을 팔아 생명을 구해 그로 인한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서양 고전의 클리셰적 서사는 조학주라는 외척의 권력욕으로 부터 조선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정치 권력의 서사로 확장된다.
하지만 파멸은 예정되어 있었다. 세자 이창을 역모의 혐의로 몰아내고 죽은 임금을 살려내어 중전의 출산까지만 버티려했던 조학주의 권력욕은 애초에 중전의 가짜 회임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왕 한 사람만 역병에 걸리게 하려던 그의 야무진(?) 시도는 '이 한 마리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듯' 결국 조선 전체를 좀비의 세상을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역병의 창궐을 결과하게 한 것이다.
결국 두 번의 전란에서 조선이 살아남은 것이 무능한 집권층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어난 백성과 의식있는 양반층 사이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던 것처럼, 조선을 휩쓸어버릴 듯 불처럼 일어나는 역병에 전란에 나섰던 영신(김성규 분), 안현대감과 그 휘하들, 그리고 역신이 되어버린 세자 이창 등이 힘을 합한다. 이 또한 정부가 마스크 정책 마저도 좌충우돌하는 가운데에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사회적 격리와 마스크 쓰기 운동, 희생정신으로 현장으로 투신한 의료진의 헌신으로 조금씩 진정 국면에 다다른 우리 사회 코로나 19의 현황이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특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덮친 바이러스의 역습에 쩔쩔매고 있는 우리가 날이 풀리면 좀 나아질까 하며 학수고대 하듯, 처음엔 밤이 되면 역병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알고보니 그게 아니라 기온 차의 문제라 날이 풀려 더더욱 기승을 부리며 낮밤을 가리지 않고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는 역병 환자들의 모습은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적 팬더믹 상황으로 이어져 쉽게 상황을 낙관할 수 없게 만드는 현재 코로나 19의 실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 회차가 30분 여라 어느 틈에 시즌 전체를 다 보게 만들고야 마는 박진감 넘치는 전개, 그 전개의 속도는 시즌 1과 시즌2의 공통된 장점이다. 하지만 시즌 1이 조선이라는 그간 좀비 영화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과 거기에 물량 공세로 쏟아내는 역병 좀비의 역습은 신선하되, 6회차에 이르러서도 '역병 좀비'의 역습 그 이상의 내용성이 없었다는 아쉬움을 남겼었다.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 시즌2는 철저히 시즌 1이 풀어낸 역병의 서사를 완성하는데 치중한다. 역병의 유래, 그리고 왜 3년 만에 이 역병이 다시 창궐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긋난 권력은 어떻게 스스로 멸망의 길에 이르고야 마는가, 하지만 그 왜곡된 권력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애꿏은 목숨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라는 '정치적 서사'를 완성시키는데 진력한다.
덕분에 시즌1의 좀비로 압도하는 속도감과 스케일에 매혹되었던 시청자들이라면 시즌2의 보여준 서사가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영화 <창궐>을 연상케하는 5,6회의 궁궐에서 절체절명의 대치씬들은 충분히 스케일의 아쉬움을 보상할 만하다.
특히, 2회에서 3회에 이어진 여전히 생사초로 인한 역병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세력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권력욕에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조학주의 면전에서 다시 살아돌아와 조학주를 향해 돌진하는 '안현 대감'이 증명해낸 역병의 실체는 아마도 시즌2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요, 시즌1, 2를 통틀어 서사의 포인트가 될 듯하다.
가상의 임금과 세자를 상정했지만, 결국 조선 시대를 연상케하는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빗댄 시대적 배경에, 서양의 대표적 장르물의 대표작이 된 좀비물을 결합시킨 킹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이미 시즌 1에서 조선이라는 역사적 배경이어서 더욱 매력적인 좀비물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제 시즌 2는 그 매력의 개연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력을 다한다. 중국에서 온 약초에 얹힌 기생출의 알이, 누군가의 욕망으로 인해 왕, 그리고 조선의 한 지역, 그리고 수도 한양의 궁궐까지 집어삼켜버리는 서사는 충분히 오늘날 우리가 무방비하게 당하고 만 21세기의 바이러스 좀비의 역습을 연상시키고도 남는다.
시즌 2까지 이어진 <낭만 닥터>가 27%가 넘는 성과를 거두고 종영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아직 '의학 드라마'의 여운이 남아있는 상황, 여기 아직 시작하기도 전에 야심차게 시즌 2를 장담하며 서막을 열어젖힌 또 한 편의 의학 드라마가 있다. 지난 2017년 <슬기로운 감빵 생활>로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어 새로운 장르의 드라마를 선보인 신원호 사단이 출사표를 던진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다.
의학 드라마의 클리셰를 보기좋게 비껴가며 시작은 매우 '의학 드라마'답게 시작한다. 양석형(김재명 분)의 집을 찾은 채송화(전미도 분), 그런데 낡은 석형의 집에 전기가 나가고 이를 고치러 온 전기 수리 기사는 부주의하게 맨손으로 전기를 다루다 그만 감전을 당하고 만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채송화는 환자를 돌보고, 양석형은 동료 침착하게 119에 신고를 한다. 이어진 병원, 서로 친구인 듯한 신경외과 채송화와, 소아외과 안정원(유연석 분), 흉부외과 김준완(정경호 분)의 '의사 생활'이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의학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이어진다. 당연히 보는 시청자는 이 드라마가 '신원호'사단의 드라마인 것을 잠시 잊은 채 우리가 보아왔던 여느 의학 드라마와 비교하며 그 만듬새를 품평하게 된다.
그러던 중 등장한 이 병원 재단 이사장이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는 소식, 아니 그간 의학 드라마에서 그 '익숙하던' 재단을 둘러싼 클리셰가 여기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가 싶다. 이사장의 아내로서 등장한 김해숙 씨의 분위기와, 어쩐지 그와 엇물리는 모기업 전무로 나타난 김갑수 배우의 포스는 전형적인 재단을 둘러싼 이권 다툼의 냄새를 한껏 뿜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전형적인 병원과 그속에서 이전투구를 일삼는 재단의 권력 비리를 다룰 것같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여전히 신원호 표 드라마임을 밝히는 건 김해숙 씨의 자녀들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의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네 아들과 딸들, 그렇다면 그간 신원호 사단의 드라마답게 이제 율제 재단을 이어받을 막내 아들 찾기가 이어질라나 싶은데, 바로 소아외과 의사인 안정원이었음을 밝히며 싱겁게 아들 찾기는 막을 내린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그간 의학 드라마에 익숙했던 시청자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뒤엎으며 막내 아들인 안드레아가 제 발로 재단을 '악의 축'같은 전운(김갑수 분) 전무에게 넘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어머니(김해숙 분)의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던 것. 시청자들을 의심하도록 만든, '여기가 어디라고 와?'라는 대사는 아픈 아내가 있어 상가에 오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어길 정도로 착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뜻이었고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간 어머니의 눈에 띈 그는 아내의 병상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간 의학 드라마들이 보여준 클리셰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허를 찌른 것이다. 마치 이 드라마는 그간 여러분들이 보던 그런 '의학 드라마'가 아니예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결국은 선함이 슬기로운 것이다? 무시무시한 재단 이상장의 아내일 것같은 어머니도, 그런 어머니를 상대로 재단을 넘볼 것 같던 모 기업의 전무도 알고보니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눈 어릴 적 친구였던 것처럼, 그렇게 신원호 사단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 이어 다시 한번 무지막지하게 '선한 사람들의 월드'를 불러온다. 아마도 신원호 사단에게 이 세상을 사는 '슬기로운 방식'은 '성선설', '착하게 살자'인 듯 싶다. 감빵이라는 가장 열악한 인간의 현실 속에서도 '휴머니즘'을 길어내더니, 첫 회를 선보인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도 다르지 않다.
친구들에게 재벌가 막내 아들임을 숨겼다고 다그침을 당하던 안정원에게 중요한 건 '키다리 아저씨'로 하여금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게 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건 그가 형과 누나들에 이어 종교의 부름을 받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가 굳이 재단 이사장을 마다하면서도 vip 병실의 이권을 놓지 않은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그의 '선한 의도'와 같지 않다. 어린 환자는 그가 출퇴근을 마다하고 병상을 지켰지만 결국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는 끝까지 어린 딸의 손을 쉽게 놓지 못한다. 환자의 곁을 지키던 간호사와 의사들, 그들 모두의 책임을 안정원은 스스로 짊어지고자 한다. 하지만 그토록 의료진을 다그치던 어린 딸의 엄마는 이제 고개를 조아린다. 감사하다고. 고마웠다고. 이런 식의 '인간적인 반전'이 바로 신원호 사단이 말하는 바 '사람 사는 모습'이요, 슬기로운 삶인 듯 싶다.
이익준이 수술을 들어간 동안 당연한 듯 그의 아이를 채송화가 돌보고, 채송화가 일어서자 맞은 편에 앉았던 두 친구 준환과 석형이 자신의 웃도리를 벗는다. 그 양복 웃도리를 구겨지는 거 상관없이 둘둘 말아 채송화의 다리가 비껴선 아이의 머리에 베어주고 다른 한 명의 옷으로 덮어주는 장면, 이들의 사소하면서도 익숙한 우정의 장면은 20년지기 이들의 사람 냄새 나는 우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아들은 간이식을 받아야 하는 처지의 엄마는 세상에 나보다 더 재수가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 절규한다. 하지만, 채송화의 기지로 응급으로 이루어진 이익준(조정석 분)의 수술과 기대 이상으로 좋은 어머니의 결과는 단박에 한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 마치 상황이 때론 '인간을 시험에 들게 만들지만 결국 인간의 '슬기로움'은 그 상황을 이겨내고 본래의 '선함'으로 귀결될 것이다'라고 드라마는 첫 회부터 선언한다.
그리고 그걸 설득해 내기 위해 응답하라 99년의 그로부터 20년 후를 설정한다. 이제는 마흔 줄이 된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저마다 싱글인 그들은 예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다시 남편 찾기를 할 지도 모른다. 심지어 저마다 내로라하는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저 사람사는 이야기라고. 얽히고 설킬 다섯 의사들의 인연 그 서사를 넘어 '병원'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이 사는', 사람 냄새 풀풀나는 이야기라고. 2020년 유난히도 각박한 이 봄에 과연 이번에도 신원호 사단은 그들의 '슬기롭게' 라고 쓰고 '착하게'라고 읽혀지는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지 그 '성선설'의 마법을 기대해 본다.
100일의 휴식 끝에 <유키즈 온더 블록(이하 유키즈)>이 돌아왔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격의없이 사람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퀴즈도 풀던 프로그램, 그런데 다시 돌아온 <유키즈>의 두 사람 유재석가 조세호는 거리로 나서는 대신 마스크를 쓴 채 방송국으로 들어온다. '코로나 19' 때문이다.
유재석이 mc인 <놀면 뭐하니?>가 코로나 19라는 특별한 상황에 방구석 콘서트라는 응급의 처방으로 대응했듯이, 유재석을 앞세운 <유키즈> 역시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격리의 상황에 맞춰 좁은 공간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인다. 마음껏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 대신 제작진이 맞이하러 간 거리의 사람들, 과거의 출연자들, 그리고 대구에서 밤낮없이 봉사 활동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로 인해 사람들과의 소통이 더욱 빛난, 100일 만에 돌아온 <유키즈>의 진가가 외려 돋보였다.
텅 빈 거리, 그곳에 사람이 있다 지난 방송분을 보여주며 시작된 <유키즈>, 사람들로 가득찼던 거리, 그 시절이 무색하게 이제는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그저 대비되는 두 장면만으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만드는 상황,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사람들이 있다.
거리에서 만난 택시 운전을 하시는 분은 열심히 소독을 하지만 손님이 없다며 안타까워하신다. 오죽 벌이가 시원찮으면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의정부 집까지 일부러라도 가서 끼니를 때우고 올까. 백발이 성성한 버스 운전사는 당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마스크'를 열심히 쓴다며 안심을 시키셨다고 한다. 택시 운전을 하시는 분도, 버스를 운전하시는 분도, 모두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시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도 견뎠으니 지금도 다함께 이겨내자 하시며 사람들의 발이 되는 지금 이곳에서의 자신들의 일에 최선을 다하실 것을 다짐하신다.
백발이 성성한 그분들이 살아온 시절, 그 시절에 대해 그 이후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쉽게 잊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온 시절 대신 우리가 살던 강팍한 시대를 앞세웠다. 그런데 막상 시절이 '하수상'하고 보니, 더 어려운 시절이란 그 단어 한 마디가 위로의 지렛대가 된다. 여전히 백발이 성성한데도 사람들의 발이 되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어르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유키즈>가 보여준 위로는 바로 코로나 19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우리가 잃어가던 '사람사는 방식'에 대한 환기이다. 작년에 시끌벅적하게 함께 퀴즈를 맞추던 식당을 다시 찾아간 <유키즈>, 그곳에는 여전히 함께 퀴즈를 맞추던 주인들은 건재하지만, 그들이 맞이할 손님들이 없다. 손님이 없어도 행여나 올 손님들을 기다리며 소독약으로 닦고 또 닦고 있는 가게 주인들, 흥겨웠던 그 시절이 무색하게 매출이 급감한 시절에 그래도 그이들은 '낙담' 대신 함께 견뎌보자는 덕담을 놓치지 않는다.
사회적 격리가 가져온 가장 큰 심리적 공황은 바로 전염병과 나 자신의 대면이라는 공동체적, 사회적 방어막의 상실이다. 전염병에 걸린 가족의 임종이나 장례조차도 제대로 치룰 수 없는 상황, 우리네 최대의 경조사인 함께 어울려 보내는 장례식의 미덕조차도 결례가 되는 세상, 오죽하면 가장 안된 일이 이 시절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커플이라 할까. 축복도, 조의도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삼켜버리는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그저 거침없는 전염병 앞에 나약한 한 개인으로 무력하게 던져진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다.
공동체 정신의 부활 바로 그런 심리적 공황 상태에 대해 <유키즈>는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출연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매출이 떨어지는 것도, 손님이 없는 것도, 혹시나 전염병의 우려가 있는 것도 '나 하나'만 겪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건물주들은 집값을 내리는 '착한 일'을 하여 손님이 없어 지쳐가는 임차인들에게 힘을 보탠다. 베이커리를 하는 배용호 사장은 당장 자신의 매출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 베푸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코로나 앱을 만든 대학생은 보상이 아니라 어서 빨리 자신의 코로나 앱을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시절을 기원한다. 우리 모두가 함께 겪는 일,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함께 잘 견뎌내자는 그 말에 찍힌 방점은 마치 나 혼자 전염병에 맞서 싸우고 있는 느낌에 시달렸던 개인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 위로의 정점은 뜻밖에도 전염병이 가장 창궐했다는 대구로 부터 온다. 보훈 병원에서 일하던 정대례 간호사는 코로나 19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대구로 달려갔다고 한다. 이런 저런 질문에 그저 괜찮다고만 하여 그 괜찮다는 말의 행간에 담긴 의미에 유재석은 그만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마는데.
도시 봉쇄까지 언급되며 시절을 험악하게 만들었던 상황, 하지만 그곳에 한 사람이라도 손길을 더 보태려고 달려간 사람들이 있다. 앞서 보훈 병원의 정대례 간호사는 코로나 19가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장담을 하며 보는 이들을 위로한다. 이제 막 임관을 마친 아직도 앳된 학생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김슬기 소위를 비롯한 간호 장교들이라고 다를까. 이성구 대구 의사회의 호소문에 한 걸음에 대구로 내려간 서명옥 전 강남 보건 소장을 비롯한 다수의 자원봉사 의료진들 역시 여전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일원임을 뜨겁게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현장의 의료진이 전한 상황은 열악하다. 의료진이 사용하는 마스크, 의료용품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 거기에 인력까지 부족하여 숨막히는 방호복을 입고 열 몇 시간을 근무하는 열악한 조건, 그럼에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은 '괜찮다'였다. '저희가 잘 이겨내도록 하겠다.' '감사하다'였다.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전해진 평범한 감사의 언어는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다른 말 덧붙일 필요 없이 유재석이 흘린 눈물처럼.
이곳저곳 약국을 기웃거리다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겨우 마스크 두 장을 구하고 나서 찾아오는 허탈함에 어쩔 줄 몰라한 저녁, 오랜만에 찾아온 <유키즈>는 그래도 이 시절을 함께 견뎌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따스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아직 엄동설한이던 우리의 마음을 녹인다. 우리 모두 언젠가 빛좋은 공원에 둘러앉아 함께 커피라도 한 잔 나눌 수 있는 그 평범한 날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해준다.
'사회적 격리'가 권장되는 시대, 그래서 외려 답답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마스크를 끼고 '북한산'을 찾아 바람을 쐰다지만, '방콕'할 시간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물건이야 홈쇼핑으로 시킨다 하지만 남아도는 시간은 어쩔까, 그럴 때 가장 위안이 되는 건 올드 미디어니 뭐니 해도 'tv'다.
게다가 각 가정에 연결된 '스마트'한 기능을 가진 tv 덕분에 tv로도 다양한 컨텐츠를 즐길 수 있는 시대,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넷플릭스' 등을 tv로 즐긴다. '왓챠'나, '웨이브' 등이 고군분투하지만, 아직은 국내 드라마를 비롯 해외 드라마, 영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구비한 넷플릭스의 물량 공세를 넘보기는 힘든 상황이다.
일찌기 <프리즌 브레이크>를 시작으로 <블랙 미러>, <기묘한 이야기> <위쳐> 등 다양한 장르와 서사의 작품들이 넷플릭스 유저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꼭 입소문난 작품들만이 재미있을까? 알고보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들이 꽤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시즌2까지 이어진 <블레츨리 써클>이다.
1950년대에 여성들은 <블레츨리 써클>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당당하게 인정받은 '참정권'을 획득한 건 20세기 초의 일이다. 19세기부터 '한 표'를 통해 정치적 참여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성 참정권 운동은 활발했지만 그 실효를 거둔 건 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였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서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1952년에서야 국제 연합(UN) 총회는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조건으로 아무 차별없이 모든 선거에서 선거권을 갖는다'라고 의결했다.
'법'은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했지만, 정작 현실은 '법'을 쉬이 따라가지 못했다.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에서 누군가의 아내 정도의 역할로 규정되었으며, 사회적 진출에 있어서도 '비서'등 보조적 역할을 뛰어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바로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드'가 블레츨리 써클이다.
2015년작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해독기를 발명한 앨런 튜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블레츨리 써클>은 바로 이 앨런 튜링이 만든 암호 해독기로 '블레츨리 파크'에서 비밀리에 암호를 해독했던 비밀 조직에 속했던 여성 4명, 수잔(안나 맬스웰 마틴 분), 밀리(레이첼 스털링 분), 진(줄리 그레이엄 분), 루시(소피 런들 분)의 활동을 다룬다.
암호 해독 전문가 여성들 범죄를 해결하다 2차 대전 당시 암호 해독 비밀 조직에서 일했던 '엘리트' 여성들이었지만, 그 조직이 '비밀 조직'이었고, 더구나 '여성'들이었기에 종전 후 그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로 부터 10년 후, 두 아이의 아내가 된 수잔은 런던 지역에서 발생한 여성 강간 사건이 그냥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블레츨리 써클에서 일했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패턴'을 그리며 발생하는 연쇄 살인 사건임을 깨닫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다. 남편의 지인인 경찰청장을 만나는 등 애를 쓰지만 그녀를 누군가의 아내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적 시선의 한계는 그녀가 발견한 범인의 정보를 하찮게 무시해 버린다.
결국 수잔은 과거 자신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가장 가까웠던, 전쟁 후 홀로 외국 여행을 다닐 정도로 모험심과 독립심이 강했던 밀리, 블레츨리에서 일하던 여성들을 통솔했던 책임자였기에 두루 발이 넓은 진, 그리고 눈으로 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루시가 그들이다. 저마다의 뛰어난 능력으로 독일군 암호 해독에 있어 혁혁한 전과를 세우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가정주부, 비정규직 판매원, 도서관 사서에 매맞는 아내로 사는 처지가 된 그들은 수잔의 요청으로 밀리의 집과 진의 도서관을 아지트로 하여 수잔의 패턴 이론을 근거로 하여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이렇게 <블레츨리 써클>은 한때는 암호 해독이라는 군사 분야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했던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사회적 차별의 조건을 뚫고 범죄 수사를 해나가는 시리즈이다. 정부 모처에 일하는 '지인'들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구해다 주는 진, 그게 아니라면 첩보원을 불사할 모험에서 거침없는 밀리, 그렇게 구해진 정보를 통째로 암기해 전해주는 루시, 그리고 취합된 정보를 통해 범죄의 패턴을 읽어내는 수잔은 따로 또 같이 '원팀'으로 끈끈한 동지애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2012년에 방영된 시즌 1 3회, 2014년에 방영된 시즌 2 4회로 이루어진 <블레츨리 써클>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바로 이들 주인공 4명이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는 사건의 성격이다. 시즌 1에서 여성들을 유인하여 살해하는 연쇄 살인 사건, 그것을 추적해 들어가보니 거기엔 전쟁이 만들어 놓은 괴물이 있었다. 필요에 의해 전쟁 중에 상대방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인 선전전의 종사자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살인을 통해 해결하는 연쇄 살인마가 되어 버린다.
또한 시즌 2에서 살인의 누명을 쓰고 등장한 또 한 명의 블레츨리 써클의 동료 앨리스, 그녀를 살인죄로 몰아간 범죄 역시 결국은 '전쟁'이 싹틔운 인간을 대상으로 한 '화학전'의 잔재이다. 이들 범죄의 공통 요소는 '전쟁', 그리고 '전쟁' 중에 필요악으로 배태된 범죄, 그리고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거기에 집착하다 못해 범죄자가 되어버린 남자 범인이다. 하지만 이런 전쟁이 낳은 괴물에 대해 감히 고려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기존의 경찰 조직은 사건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한다. 그럴 때 과감하게 사건의 진실을 찾아 네 명의 여성이 뛰어든다. 희생자가 된 여성을 위해, 한때 동료였던 여성을 위해. 여성이란 '연대성'의 공감 위에 그녀들의 활동이 펼쳐진다.
하지만 전쟁 후 10년 다시 자신들의 전문적 영역을 되살려낸 그녀들의 활동은 당시 여성들의 위치만큼 어려움을 겪는다. 두 아이를 둔 가정 주부로 그녀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남편을 속이고 사건 수사를 하다, 자신의 가정을 위협받고, 스스로 목숨마저 위태로웠던 수잔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또한 릴리 역시 당차고 독립적인 의지와 달리 늘 직업적인 위기에 시달리고, 끝내 그로 인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루시는 가부장적인 남편의 가정 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고. 드라마는 당시 시대적인 배경으로 한 사건 수사와 함께, 1950년대를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의 어려움을 네 주인공의 처지로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들 네 명의 여성이 각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존적인 성장 드라마이자, 그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역량을 살려 범죄를 해결해 나가는 범죄 수사 드라마의 두 방향에서 감동과 성취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12.8 % 3월 8일 자 kbs2 <1박2일 시즌4(이하 1박2일)> 시청률이다. sbs <집사부일체>가 7.4%, mbc의 <복면가왕>이 9.4%로 동시간대 1위다. 심지어 지난 회차 13회 10.0%에 비하여 제법 올랐으니 이 정도면 상승세일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시즌4의 첫 회 15.4%가 최고 시청률이다. 첫 회 방송이 나가고 시즌4에 대해 '새 부대에 담긴 새 술'에 대한 희망에 찬 바램을 적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바램이 무색하게, 시즌4는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시즌4의 최고 시청률이 첫 방송이 될 거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리운다.
우리집엔 <1박2일> 애청자가 있다. 일요일 저녁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이라도 먹을라치면 마치 밥상에 빠지면 안되는 김치처럼, 리모컨을 찾는 그 누군가가 있다. 하지만 그 빠질 수 없는 일요일 저녁 밥상 메뉴였던 <1박2일>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그 시간대 주 시청자가 중장년층인데 도대체 지금의 <1박2일>에는 그들이 '정붙일 만한' 출연자가 없다는 것이다. 시즌 4가 시작한 지 어언 13회차, 계절이 바뀌어간다.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1박2일 시즌4> 첫 출연의 설레임을 안고 차가운 입김을 씩씩거리며 새벽 거리를 달려 kbs본관 앞에 달려왔던 출연자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원래 있었던 김종민, 이미 <맛있는 녀석들>을 통해 낯이 익은 문세윤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캐릭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나마 존재감 어필을 위해 떼를 쓰고 발버둥을 치는 딘딘 정도가 낫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돌 출신의 라비나, 래퍼 딘딘에 대해 <1박2일> 주시청자들이 정이 들만한 계기가 얼마나 있었을까? 연기자 출신의 김선우나 연정훈은?
그 실례는 3월 8일 방영된 한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방송은 <1박2일>의 트레이드 마크인 선상 조업을 위해 게임을 진행한다. 가장 첫 번째 스트레스 지수 측정과 이불 덮기 게임이 이어졌다. 지금 하는 시즌4보다 재방송으로 보는 시즌1이 훨씬 더 재밌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시즌1하고 시즌4의 내용이 달랐을까? 바다 조업은 차치하고, 그 전에 조업을 나가는 대상자를 뽑는 게임이라고 해야 그때나 이때나 별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별 거 아닌 걸 별걸로 만드는 게 바로 <1박2일>의 묘미였다.
그런데 스트레스 지수 측정 과정에서 딘딘 한 명 정도만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기 위해 '생쇼'를 벌였을 뿐, 다른 출연자들은 마치 '건강 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 같았다. 그건 이어진 이불 덮기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불을 높이 올려 잠자는 모습처럼 덮는 '슬랩 스틱'적 장치가 애초에 마련된 게임, 하지만 개별적으로 우스꽝스런 포즈를 제외하고 출연자들은 마치 말 잘듣는 아이들처럼 차례를 지켜 게임에 임한다.
예전의 김준호처럼 '잔꾀'를 부리는 사람도 없고, 강호동처럼 시끄럽게 분위기를 몰아가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서로 편을 갈라 이합집산하며 마치 생과 사의 혈투처럼 게임을 긴박하게 만들었던 긴장감은 더더욱 없다. 다른 출연자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마치 시청자처럼 얌전하게 앉아서 지켜본다. 이런 식이니,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웃음 요소를 만들어 보려는 '딘딘'의 행동은 그저 해프닝처럼 지나가 버린다. 오죽하면 보다 못한 문세윤이 라비한테 어떻게 말 한 마디 하지 않느냐고 할까.
<맛있는 녀서들>에서 펄떡이던 문세윤조차 시즌 초반에 어떻게든지 웃음을 자아내게 하려던 그 안간힘이 둔해졌다. 하다못해 동전 던지기 하나로도 시청자들이 웃다가 배가 아플 정도로 만들었던 <1박2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보는 것만으로도 맥이 빠져버리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예전의 이승기가 그 스스로 웃겨서 인기가 있었던가? 형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승기만큼 생생하게 리액션을 해주는 출연자가 있었던가를 웃기지도 않으면서 관람객 모드를 벗어나지 못하는 출연자들은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
국가대표 예능 <1박2일>의 이름값 하지만, 출연자들이 재미도 없고, 의욕도 떨어져가는 <1박2일>이 더욱 고민해야 봐야 할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시의성'이다. 아무리 시청률이 떨어진다 해도 <1박2일>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런 면에서 토요일 방영된 <놀면 뭐하니?>가 택한 발빠른 대처와 비교된다. 코로나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모든 공연들이 취소된 상황을 <놀면 뭐하니?>는 발빠르게 포착한다. 예정된 공연이 취소된 뮤지션들과 뮤지컬 배우들을 불러 모은다.
그들의 공연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국가적 비상 사태'로 인해 포기할 수 밖에 없어 안타까운 팬들을 위해, 그리고 날은 화창하지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는 시청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방구석'에서나마 조촐하게 '공연'을 기획한 것이다. 이게 바로 '비상 시국'에 대처하는 예능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1박2일>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복불복 선상 조업으로 상승한 시청률로 '자족'할 때가 아니다. 여전히 일요일 저녁이면 재미가 있건 없건 인내를 가지고 이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어려움을 짚어보려는 '공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지금 <1박2일>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건 코로나 시대에 대한 공감 만이 아니다. 자기들은 하던대로 하지만 보는 사람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그 '불감증'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과연 전국민 대표 예능이라는 <1박2일>이 어떤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다. 그렇지 않고서는 조만간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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