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사고 현장 그 자신이 버스와 함께 굴렀으면서도 정신이 들자마자 환자들을 살피는데 헌신하는 김사부(한석규 분), 그의 앞에 만삭인 임산부가 아이를 살려달란 말을 채 마치지 못한 채 정신을 잃는다. 임산부를, 그리고 그녀가 부탁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심장 박동을 놓쳐서는 안될 일, 심폐 소생을 하려는데 팔이 말을 안듣는다. 쉴 틈없이 외상 환자가 쏟아지는 돌담 병원, 그리고 오래 전 오늘과 같은 버스 사고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다 다친 어깨, 그 휴유증과 오늘의 사고 때문이다. 하지만 임산부를 살려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김사부는 자신의 통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팔을 부숴서라도 고정이라도 시킬 듯이 자신을 다그쳐 심폐소생을 한다. 그리고 그런 김사부에, 아니 김사부가 그 버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민국 교수는 다시 한번 열패감에 빠진다.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 2ⓒ sbs
열패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때도 그랬다. 10년 전 버스 사고 현장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차창을 빠져나가려는 박민국 그와 달리, 김사부는 환자에 매달려 있었다. 당장 자신의 목숨이 사고 버스와 함께 경각에 달려있는데도 그는 '의사'의 본분을 다했던 것이다. 최고의 외과의, 의사로서의 자신감이 철철 넘치던 그는 바로 그날 그 버스에서 그걸 잃었다. 아니 김사부에게 빼았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뺏어간 그걸 되찾기 위해 그는 더 연구하고 노력했다. 김사부보다 더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거대 병원의 전 스텝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시연된 수술에서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그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게 된 게 '김사부가 보내준 쪽지'였다는 것을 알게된 박민국 교수는 다시 한번 좌절한다. 그리고 그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돌담 병원 원장 직을 수락한다. 김사부가 아니라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돌담 병원은 박민국이 보기에는 모순덩어리였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상 환자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김사부는 원칙도 없고, 시스템 따위는 엿바꿔먹은 채 오직 김사부에 의존한 주먹구구식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듯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라고 박민국은 생각했다. 거대 병원 최고의 외과의답게, 거대 병원의 시스템을 돌담 병원에 정착시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직원들의 월급을 대폭 인상하며 환심을 사고 병원장으로서의 권리와 권위를 한껏 이용하여 돌담 병원을 장악해 가면서 김사부를 기꺼이 짖밟아주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버스 사고 현장이다. 그날의 '트라우마'를 떠올린 박민국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발을 돌렸다. 하지만 서우진과 마주쳤다. 차은재도 잇달아 허겁지겁 현장을 뛰어든다. 병원장인 그가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결국 버스 안으로 들어간 박민국, 가슴에 우산이 꼿힌 환자와 버스에 다리를 짖눌린 환자를 두고 다시 한번 김사부와 의견이 갈린다. 이른바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합리적'인 관점에서 박민국은 더 살릴 가능성이 있는 환자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임에도, 10년전 그날처럼 김사부는 두 사람을 다 살리겠단다. 결국 박민국은 손을 놓고, 김사부가 매달려 두 사람을 다 살려내고야 만다. 그러곤 다시 한번 '버스의 늪'에 빠져버린 박민국에게 여유롭게 '웁스(oops)'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는 김사부.
기다렸다. 김사부가 살려낸 두 사람의 수술이 끝나기를. 자신도 모르게 혹시라도 두 사람을 다 살려내겠다는 김사부의 결정이 어긋나기를. 하지만 수술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김사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무시해왔던 10년 전 그 버스 현장에서 부터의 모든 일들을 낱낱이 그에게 따졌다. 왜 나를 무시하냐고. 왜 나한테 그러냐고.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 2ⓒ sbs
그만 그 버스에서 내려요 거대 병원 최고의 외과의 박민국, 그가 사사건건 김사부에 대해 예민하다 못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건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 하루 아침에 전원장 여운영을 몰아내고 돌담 병원을 장악하겠다고 들이닥친 인물이 말이다. 그런데 돌담 병원 원장으로 내려온 박민국이 움직이는 동인은 오로지 김사부이다. 그것도 김사부를 이기기 위해서, 김사부보다 나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10회 그가 김사부를 찾아간 장면에서 보여지듯이 김사부는 10년 전 그날 그 사고 버스 현장에 박민국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가장 어이없는 순간이다. 그토록 집요하게 김사부에게 매달려왔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니. 그리고 사사건건 박민국이 자신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김사부의 행동들은 그저 환자를 살리기 위한 김사부의 시급한 판단이었을 뿐이다. 결국 김사부 앞에서 박민국 교수는 참아왔던 분통을 터트리고야 만다. 그런 박민국에게 김사부는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한 마디 말을 건넨다. '그만 그 버스에서 내려요.'
김사부의 말처럼 10년 전 그 버스 사고 현장에서 박민국이 차창 밖으로 나간 것을 두고 뭐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 버스에 남아있던 김사부가 결국 사고를 당한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박민국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지난 시간 김사부보다 더 나은 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 어쩌면 그건 그날 그 버스에서 헌신했던 김사부처럼 살아오지 못했던 자신을 스스로 자책했던 시간이 아닐까. 그가 마음 속 깊이 생각하는 '의사'라는 본분과 다른 궤도를 살아왔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건 아닐까.
'열폭'이라는 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비롯한 가상과 현실의 공간에서 '열폭'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열폭'에는 언제나 '열폭'하게 만드는 대상이 있다. 하지만, <낭만 닥터 김사부 시즌2>는 바로 우리 사회 고질병처럼 된 '열폭'의 근원을 명쾌하게 짚는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자신이 마음 속에 그어놓은 어떤 선, 혹은 어떤 진실에 스스로 다가가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겠냐고.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문제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겠냐고.
최고의 스타 외과의조차 그 감정에 휘둘려 자신을 내모는 감정, 그래서 그 누군가에게 '탓'을 하고픈 감정, 하지만 그 감정의 근원을 드라마는 차분히 짚어왔다. 도대체 의사가 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건지, 의사가 본질이 다른 의사보다 더 나은 의사인 것이냐고. 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행보 한 걸음마다 누군가를 의식하며 누군가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메뉴얼'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드라마는 김사부와 박민국의 이야기를 통해 묻는다. 의사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하지만 이건 그저 '의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삶의 질문이다. 당신 삶의 본질이 그 누군가을 이겨서 얻어내는 그것이어야 하겠냐고.
2월 1일부터 방영된 ocn 드라마 <본대로 말하라>에는 장혁이 나온다. 그런데, 그 장혁이 '액션'을 하지 않는다. 일찌기 <추노>이래 그 스스로 절제된 생활을 절권도를 오래도록 연마해왔음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듯 몸을 써서 하는 연기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배우 장혁이다. 당연히 <본대로 말하라>에 장혁이 나온다면, 그가 출연했던 이제는 <본대로 말하라>의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김홍선 피디와 함께 한 전작 <보이스1>에서처럼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을 내세워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웬걸 1회 본방이 시작되고 한참 후에 등장한 장혁은 휠체어에 검은 안경을 쓰고 등장한다. 드라마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작이란 휠체어를 움직이고 하얀 실리콘 장갑을 낀 손으로 각종 기기를 조작하는 정도, 이전의 드라마에서 보았던 역동적인 장혁은 언감생심이다. 과연, 움직이지 않는 장혁이 재밌을까? 드라마는 바로 이 '반전'의 묘미를 한껏 살린다.
움직일 수 없는 장혁 <본대로 말하라>의 장혁이 분한 오현재는 사고 이전에 천재적 능력으로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했던 프로파일러였다. 그런 그가 '그놈'이라 칭해지던 연쇄살인범에게 승부를 걸고자 했던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그의 야심찬 시도는 5년전 사고와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경찰청의 공식적 발표로 오현재가 쫓던 '그놈'은 폭발 사고로 사망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오현재는 애인을 잃고, 그 자신 역시 앞도 보지 못한 채 휠체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2017년 방영되었던 <보이스1>에서 형사 무진혁으로 등장했던 장혁은 과거로 사고로 절대 청감 능력을 지닌 강권주의 수족이 되어 사건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제, <본대로 말하라>에서는 그 반대의 처지가 되었다. 앞도 보지 못한 채 휠체어에 의지하여 경찰청 연락망을 들으며 '그놈'에 대한 '와신상담'을 하고 있는 오현재에게는 <보이스1>의 그 자신처럼 수족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처지가 된 것이다.
오현재 대신, 아니 그 이상인 두 여자 차수영, 그리고 바로 그런 오현재 앞에 <보이스1>의 절대 청감을 지닌 강권주처럼 어머니의 사고로 인해 한번 본 것은 사진처럼 기억해 내는 '픽처링 능력'을 지닌 차수영(최수영 분)이 나타났다.
초등학교 시절 비오는 날 자신을 마중나온 농아 엄마가 싫었다. 그래서 외면했다. 하지만 그 외면은 엄마와의 영영 이별이 되었다. 차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수영에게 우산을 전해줘야겠다는 맘으로 도로를 건너던 엄마는 뺑소니 차량에 치어 세상을 떠났다. 수영은 그때 그 장면을 사진처럼 기억했다. 차량 번호도, 차에 탄 사람도, 그리고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우산을 쓰라던 엄마의 손짓도.
그러나 안일한 경찰은 수영의 기억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겼다. 결국 기억하고 있는 수영이 직접 나서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의욕만 앞서는 시골 순경이다. 어떻게든 광역 수사대에 가야 하는데..... 시말서 감인줄 알았던 토막 시신 사건은 그 사건을 본대로 기억해 내는 수영의 능력으로 인해 기회가 되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오현재, 그의 손발이 되어줄 차수영, 낯익은 구도다. 1997년 제프리 디바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던젤 워싱턴,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본 콜렉터>가 떠올려진다. 전신마비의 천재적 범죄학자 링컨과 의욕적인 형사 아멜리아 콤비가 손 하나만 남겨진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기시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움직이는 못하는 '두뇌'와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줄 의욕적인 '여형사'의 클라셰를 <본대로 말하라>는 오현재와 차수영의 캐릭터로 돌파하고자 한다. 사고로 인해서인지 원래도 인지 괴팍해진 프로파일러라는 점에선 오현재와 영화 속 링컨은 유사하지만 거기에 드라마는 간발의 차로 애인을 잃은 오현재만이 가지는 통한의 복수심을 얹는다. 그리고 그런 오현재처럼 역시나 오래전이지만 오늘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차수영의 해원을 결합한다.
그 결합은 처음엔 삐걱거린다. 오현재는 차수영의 기억이 본질을 놓친 주변부만 기억하는 쓸데없는 것이라 하며 내쳤고, 감정적이라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런 오현재가 막상 공장 안 그 누구도 모르는 장소에 갇혔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녀에게 자신의 두뇌를 빌어 사건 현장으로 인도하고, 처음 시체들을 보고 경악하는 그녀로 하여금 현장에서 예의 픽처링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파트너 쉽은 오현재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는 차수영의 '감정적 헌신'으로 인해 오현재의 마음을 울린다. '딱해서, 나도 딱하고 너도 딱해서'라며, 딱한 파트너쉽의 연대 기조가 마련된 것이다.
오현재와 차수영의 파트너쉽을 완성시킨 황하영 그런데 <본대로 말하라>에서 오현재와 차수영의 파트너쉽만을 말하면 아쉽다. 파트너쉽이라기 보다는 '어벤져스'라 하는 것이 정확할 황하영의 존재감이 놓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눈밝게 수영의 능력을 알아본 사람, 그런 그녀를 오현재에게 인도한 사람, 모두가 사라졌다한 오현재와 유일하게 소통하는 사람, 조직을 앞세운 상부의 지시 앞에서도, 어쩌면 물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게 먼저이고, 사건을 해결하는 게 우선인, 그래서 궁시렁거리다가도 그녀의 지시 한 마디면 기꺼이 팀원들이 그녀를 따르게 만드는 팀장 황하영, 어쩌면 <본대로 말하라>의 모든 것은 갚을 것이 있다는 그녀로 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드라마는 기존의 드라마에서 '소모'된 장혁이란 배우의 캐릭터를 역으로 활용한다. 움직이지 않는 장혁, 두뇌만 쓰는 캐릭터, 그런 반전적 재미를 완성하는 건, 이른바 '걸크러쉬'한 두 여성 황하영과 차수영이다. 걸크러쉬라 하지만 두 사람의 매력은 정반대다. 황하영이 그녀를 세상 앞에 알린 <독전>의 그 독한 캐릭터못지 않게 육두문자를 마다하지 않고 범인에 대척하며 조직 이기주의를 앞세운 상사 앞에 끔쩍도 하지 않는 걸크러쉬한 캐릭터라면, 차수영은 오현재의 분석처럼 아직은 자신감조차 없어 말끝조차 흐리는 풋내기이지만 엄마의 사건을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강단 만큼은 그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성장형 캐릭터이다.
위험한 공장에서 그 누군가 그곳을 들어가야 할 때 그걸 들어가겠다고 나선 수영에게 말없이 기회를 주는 황하영,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그놈'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이 두 여성 캐릭터, 그리고 그녀들의 뒤에서 '두뇌'를 빌어주는 오현재의 '딱한 어벤져스', 신선한 조합의 활약이 기대된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킹스맨>에서 이 말을 마친 해리는 음식점의 문을 잠근 후 자신들에게 무례했던 불량배들에게 혹독하게 다룬다. 물론 시작은 해리와 그 일행이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대들었던 불량배들이었지만, 그들의 도발에 비해 열 배 혹은 백 배의 대가를 치르는 결과를 낳았다. 딱 떨어지는 정장, 그 정장에 걸맞는 폼나는 무기들, 그리고 그와 어우러지는 '우아한' 말투와 에티튜드, 그러면서 화룡점정으로 등장하는 '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혹시나 그런 의문들 드는 관객들은 없었는지, 그 '매너'라는게 막상 실전에 들어서면 참 '매너스럽지' 않은 처참하고도 잔인한 폭력을 수반하게 된다고.
뭐 꼭 <킹스맨> 뿐인가. <007>의 여러 시리즈도 그렇고 주인공인 스파이는 멋들어진 옷 맵시에, 그 보다 더 매력적인 에티듀드를 자랑하며 등장하지만 막상 그가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다할 때는 '매너' 무소용에, '자비'없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기에, 당연히 그가 '처단'의 대상은 언제나 '복수'를 각오하고 다음 시리즈를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이 중단없는 폭력의 악순환은 시리즈를 거듭하며 더욱 폭력적인 악인의 등장으로 증폭되고 그에 대한 '정의'의 실현 역시 가차없어진다. 폭력과,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 이 '순환'을 우리는 스파이물로서 소비하지만 그 '근원'은 회의적이다. 그런데, 이 '회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스파이물'이 등장했다.
폭력적이지 않은 스파이물? 바로 1월 22일 개봉한 <스파이 지니어스> 이다. 윌 스미스와 톰 홀랜드와 목소리로 분한 이 스파이물은 두 사람의 출연으로, 그리고 윌 스미스가 연기한 스파이 랜스 스털링이 '새'가 되는 해프닝을 겪으며 천재 월터와 만나 악당에 대적하는 액션 어드벤쳐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소개가 틀린 건 아니지만, 정말 <스파이 지니어스>의 장점은 어쩌면 실사 스파이 영화로써는 시도해 볼 수 없는 '스파이' 업계의 관점의 전환을, 아니 더 나아가 세계 평화에 대한 야무진 담론을 구현해 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은 엄마와 세상에 둘도 없는 콤비를 자랑하던 한 소년 월터 베캣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나의 파트너라 다정하게 불러주던 엄마는 경찰로써 직분을 다하던 중 순직했다. 외톨이가 된 소년, 그러나 그 소년은 천재였다. 15살에 MIT를 졸업하고 스파이 에이전트 기술 연구소에 배치되지만 현실은 화장실 옆 한 귀퉁이에서 모두가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는 천덕꾸러기 과학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당대 최고의 스파이 랜스, 랜스는 다짜고짜 화를 낸다. 왜냐하면 불법 무기 거래 현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일본 야쿠자들을 상대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는데 그게 바로 월터가 만든 '고양이 홀로그램'이었던 것. 무지개 색 가루와 함께 등장한 고양이 홀로그램에 사람들이 넋을 놓은 사이 무사히 탈출을 했지만 언제나 '폭력'적인 방식을 써왔던 랜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전술'이었던 것. 결국 그 일로 월터는 해고당하게 된다.
그런데, 고향 집에 돌아와 연구를 계속하는 월터 앞에 랜스가 찾아온다. 그가, 아니 그의 얼굴을 한채 불법 무기를 나꿔챈 악당 킬리언 덕분에 랜스가 쫓기는 신세가 된 것. 랜스임을 숨기기 위해, 아니 숨기고 싶어하다 해프닝으로 월터가 만든 액체를 마신 랜스는 그만 비둘기가 되고. 이제 혼자서는 차 문 조차 열 수 없는 랜스는 본의 아니게 월터의 도움을 받게 된다.
스파이 에니전트 연구소에서 랜스를 쫓아 엘리베이터를 탄 월터는 자신의 발명품 '고무 인간'을 스스로 실현해 보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파이 전술'을 피력한다.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이길 수 있는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이며, 하지만 그런 월터의 생각에 랜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제 비둘기가 되어 킬리언을 쫓는 랜스는 본의 아니게 웥터가 발명한 고무인간처럼 만들어 버리는 멀티 펜에서 부터 허그 보호막, 고양이 홀로그램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아이들 장난같다고 웃어넘긴 그 월터의 발명품들이 적재적소에서 랜스와 월터를 구하는 묘수가 된 것이다. 다른 스파이 영화에서처럼 꼭 자신들을 쫓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게 해도 얼마든지 '스파이' 작전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월터의 생각이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월터의 도움을 받은 랜스가 고군분투해도 결국 킬리언은 전세계 스파이들의 신상 정보를 손에 넣었다. 그걸 되찾기 위해 북해의 연구소로 찾아간 랜스, 월터의 빠른 연구 덕에 비둘기에서 다시 원래 스파이의 모습을 되찾은 랜스, 그러나 이미 그의 도발을 예측한 킬리언에게 랜스는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랜스에게 킬리언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랜스가 킬리언이 보는 앞에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의 악순환, 그것이 '킬리언'이라는 악당을 '초래'했고, 이제 랜스 동료들의 목숨이 위험하게 된 것이다.
세계 평화의 방법론을 모색하다 <스파이 지이어스>는 세계 평화를 지킨다는 '스파이' 그 방법론의 문제,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선'과 '악'으로 나뉘어 서로를 규정한 채 되풀이 되는 '폭력'의 문제를 짚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수단'으로서의 '폭력' 조차, 그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는 '폭력'일 뿐, 그건 다시 중단없는 보복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명확한,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결코 실천하지 못했던 명제를 짚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한껏 살린 <스파이 지니어스>는 적에 대해 잔인하고도 가차없는 폭력 대신, '평화'를 사랑하는 천재 과학자 월터의 발명품을 빌어, 린치 대신 고무인간으로 만들어 자백하게 만들어 버리는 만능 펜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대신 허그해 버리는 보호막에, 공격 본능을 무력화시키는 고양이 홀로그램으로 그 대안을 모색한다.
그저 재밌는 애니메이션이라 치부하기에 월터와 랜스가 벌이는 설전의 세계는 깊다. 킬리언의 수족인 드론이 각자 스파이 에이전트 연구소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이미 우리가 이미 '드론'의 폭력성을 경험했기에 더욱 실감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잃고 싶어하지 않기는 랜스도, 월터도, 킬리언도 모두 같다는 지점도 시사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 다른 것도. 월터의 도움, 그리고 비둘기들의 도움으로 '개과천선'한 랜스는 그 이전과 다른 대사를 말한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다고, 그저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도시의 무법자처럼 피해다니던 비둘기가 가장 사랑스러운 별동대처럼 여겨지도록 만들듯, <스파이 지니어스>는 우리가 생각해 오던 '스파이' 영화의 고정 관념을 변화시킨다. 아니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과 함께. 그래서 월터와 랜스가 함께 세상을 구하는 방식이 더욱 의미가 깊다.
ebs는 지난 2010년 <학교란 무엇인가?> 시리즈를 통해 학교 교육의 방향을 모색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년, 2020년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는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7차 교육 과정, 시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행 평가가 대신하고 교사에 의한 하달식 교육 대신 활동 중심프로젝트가 대신한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은 바람직한 교육을 받고 있는가? 그 질문으로 부터 <다시 학교> 10부작을 마련하였다.
그 이전의 기능주의적 지식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그 자리를 대신한 새로운 교육 과정은 안타깝게도 '학력 저하', '학력 격차', '사교육비 사상 최대'의 결과를 낳았다. '지식보다는 역량이 중요하다', '학생 주도 수업'이 '강의식 수업'을 대신해야 한다는 최근의 학교 교육 담론, 그렇게 활동 중심의 프로젝트 수업 과정에서 교사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지며 스스로 '구태'라 여기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학원에 가서 하는 것이라 여기는 세태, 그래서 학교는 '잠자는 교실'이 되어버린 상황, 무엇이 문제일까?
다큐는 가르치지 않는 학교, 교사의 고백, 시험을 시험하다, 최고의 수업, 창의성의 발견, 학생다움을 묻는 어른에게, 수학이 불안한 아이들, 잠자는 교실, 학교는 동사다 등 총 10부의 다큐를 를 통해 현재의 학교 교육을 점검해 본다. 그 중에서도 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문해맹의 학교 세종 대왕이 창제하신 '쉬운 한글'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 중 한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전체 성인 인구의 7.2%인 311만 명 정도이다. (국가 평생 교육 진흥원, 성인 문해 교육 현황) 하지만 한글만 읽고 쓰면 다일까? 전체 성인 가운데 22%에 달하는 960만 명이 한글을 읽고 쓸 수는 있지만 복잡한 내용의 정보는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실질적 문맹이란 무엇일까? 가장 이해하기 쉽게는 의약품 복용량 설명서나, 각종 서비스 약관 등 공공, 경제 생활에 필요한 문서를 활용하는데 미흡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바로 등장하는게 '문해력'이다. 즉,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떨까? 교과서 내용 중 등장한 '머리에 서리가 내린다'에 여름인데 어떻게 서리가 내려요? 라거나, '얼굴이 피다'라는 문장을 설명하라니 피범벅된 얼굴을 그려 놓는다면? 과연 문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국어 수업만이 아니다.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유추하여 해석할 수 없는 학생들이 하물며 사회, 역사, 과학 교과서를 혼자 읽을 수 있을까?
청주에 있는 분평초등학교 2학년 지윤이에게 받아쓰기는 가장 두려운 시간이다. 책읽기는 로봇처럼 한 자 한 자 읽어서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한다. 글자를 제대로 못읽으니 당연히 수업은 못따라간다. 그러니 '공부가 재미없다'.
지윤이 만의 문제일까? 초등학교 학생의 11%가 이렇게 지윤이처럼 기초적인 문해력의 수준에 못미친다. 아이들의 문해력을 조사해 보면 개별적인 특성과 경험의 차이에 따라 3세에서 8세까지의 수준 차이가 난다. 당연히 3세 수준의 아이들은 심각한 읽기 부진을 보이고 이는 학습 부진으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만의 문제일까? 읽기 진단 검사를 마친 중학교 교실, 낱말 뜻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고지식'을 높은 지식이라 생각하고, '대관절'을 큰 절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단어 의미를 바탕으로 한 추론이 불가능하다.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고, 학습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중학교 2학년인 의담이는 학원 수업마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엄마랑 함께 공부를 한다. 하지만 문장 하나, 문제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 새벽 한 두시까지 공부해도 교과서 한 두 장정도를 소화할 수 있다. 이러니 다른 과목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는 현실이다. 활동 중심, 학습지 중심의 수업 형태에서 아이들은 얼마든지 글을 읽지 않아도 한 학년을 지나갈 수 있다. 글을 못읽으니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는 애초에 무리다.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이 방치되는 현실이다.
왜 아이들은 글에 집중하지 못할까? 글을 읽는 아이들의 시선을 조사해 보니 아이들의 시선은 글이 아닌 부수적 정보나 지문 외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는 훈련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더 재밌는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이 있으니 더더욱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게다가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의 읽는 메뉴얼은 책과 다른 방식이기에 아이들에게 책은 낯설다.
공교육이 해야 할 몫 -문해력 그렇다면 이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개별적인 차이이니까 각자 개인과 가정의 책임일까? 다큐는 바로 여기서 '공교육'의 위상을 불러온다. 말 그대로 공공의 교육을 책임지는 학교가 그 몫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국가의 책무라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트리모아나 초등학교 뉴질랜드 원주민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들이 모인 이 학교의 학생들이 언어 발달에 격차가 큰 건 당연한 결과다. 이에 뉴질랜드에서는 공교육의 책무로 국가가 나서서 '리딩 리커버리(reading recovery) 수업'을 진행한다.
국가가 지원하는 리링 리커버리 수업에서는 읽기가 부진한 학생들을 상대로 매일 30분씩 1년간 1;1로 전문적인 교육을 수행한다. 특히나 전문간들은 만6세 정도, 초등학교 2학년 이전의, 학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기 전의, '조기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청주의 분평 초등학교, 매일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방과 후에 지윤이와 함께 읽기 공부를 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지윤이는 이제 친구에게 자신만만하게 '받아쓰기 하나 틀렸어, 안타까워'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계절만의 변화이다.
얼굴이 피다를 얼굴에 피범벅을 해놓던 의담이를 비롯한 동산중학교 중학생들, 역시 문해력 캠프를 마쳤다. 왜 모르는 걸 질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질문도 아는게 있어야 하지 않냐던 포기를 먼저 말하던 아이들은 이제 친구들과 당당하게 답안지를 맞추는 수준에 이르렀다.
겨우 몇 달의 수업이 아이들의 문해력을 변화시켰다. 그저 문해력만이 아니다. '노력을 안해서 죄송해요'라며 한없이 수그러들던 아이가 웃음을 되찾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가 펴졌다. 학원이 아니다. 그저 학교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니 달라진 것이다. 다큐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공교육'의 자리가 아니겠냐고. 가장 기본을 책임지는 곳, 그곳이 바로 교육의 자리라고 '다시 학교'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성장'의 화두에 자신을 던진다. 어제보다 더 낫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어제보다 조금은 '발전'된 삶, 하지만 그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가 입장이 다르다. 조금 더 높은 지위, 조금 더 많은 돈, 혹은 더 조금 더 멋지거나 이쁜 모습 등등, 의사라면 어떨까? 조금 더 나은 의사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여기 그 딜레마에 빠진 두 명의 젊은 의사가 있다. 바로 <낭만 닥터 김사부2>의 서우진(안효섭 분)과 차은재(이성경 분)이다.
서우진 - 진짜 의사? 일찌기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아버지가 남긴 빚에 자신의 학자금 빚으로 인해 추심업체 조폭들에게 시달림을 받다 돌담 병원까지 밀려 들어온 서우진, 그는 자퇴서를 품에 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손기술을 가진 발군의 외과의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고생 덕분에 내 실속만 챙기면 된다는 그의 왜곡된 신념으로 택한 선배의 병원행이 뜻밖에도 그를 '내부 고발자'로 만들어 동료 의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그의 손기술은 겨우 '페이 닥터' 언저리를 맴돌다 그마저도 내쫓김을 당하게 되어 버렸다.
당장 빚쟁이들을 달래기 위해 단 돈 천 만원이면 기꺼이 자신을 팔겠다고 나섰지만 그런 그의 '호구지책'에 김사부는 냉랭하고, 겨우 말미로 얻어낸 1주일 동안 그가 잊고 살았던 '진짜' 사람, '진짜' 의사의 향기를 돌담 병원에서, 김사부에게서 느끼며 점차 돌담의 일원이 되어가는데, 뜻밖에도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는 그에게 들이닥친 '위기'는 바로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였다.
어린 자신과 함께 음독을 했던 부모님처럼 아이와 함께 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온 아버지, 그 아버지 환자를 서우진은 거부한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양 자기 아이마저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그 아버지를,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와 같아서 용서할 수 없다. 겨우 목숨을 건진 채 응급실에 누워있는 그에게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는 말을 한 고모의 기억을 잊지 못한, 아니 그 고모의 한탄이 그저 지나가는 말이 아닌 듯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이후 정말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게 아닌가 싶도록 힘들게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더더욱 자기 자식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 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의사'였다. 응급실에 환자가 들어온 순간, 수술실에 환자가 누운 순간, 그가 누구인가를 선택할 수 없는, 그저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이 의사의 '사명'이고 '숙명'인 그러나 서우진은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 '의사'임을 순간 벗어나고 만다. 그의 거부에 박은탁 선생(김민재 분)은 그 '원칙'을 환기시킨다. 당신은 '나쁜 의사'냐며. 그리고 김사부는 그를 당연한 책무인 양 그 아버지 환자의 수술실에 부른다.
주저하고 고뇌한 끝에 수술실에 들어선 서우진, '나쁜 의사'가 되지 않기 위해, 덤덤하게 김사부 옆에서 수술을 돕고 마무리하는 그 과정은 그가 지난 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민했던 '진짜'를 향한 첫 걸음이요, '왜 나에게'?라며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가족사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용기'있는 선택이다. 그리고 '마주하는 용기'만으로도 그 부모님 옆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였던 서우진은 훌쩍 자라 외과의 서우진으로 선다.
각자도생 이기적인 길 중 가장 유용한 길이라 생각해 선택한 '의사'라는 직업에서 그는 김사부를 보며 '진짜'가 아닐까 했다. 나만 잘 산면 돼 하던 그는 왜 '내부 고발자'가 되었을까. 그에게 다가온 물음표, '진짜', 어쩌면 홀로 살아남은 그가 가장 원했던 건, '더부살이'처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 '진짜'의 답을 서우진은 찾아가는 중이다.
차은재 - 의사의 재능? 차은재에게는 가난은 없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의사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따라서 의사인 언니의 집안에서 은재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의사가 되었다. 물론 다른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르치던 선생님이 재능이 없으니 취미로 하라는 말에 그만 두었다. 가업을 따라 의사가 되었지만, 첫 해부학 실습에서 그만 토하며 쓰러졌다. 역시 이번에도 재능은 없는 건가?
그렇게 자신의 재능을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다. 아니 내내 의심해 왔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자기 내부의 고민을 떠올렸다.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환자를 데리고 온 부모, 하지만 어린 환자의 아빠는 아이 걱정에 애닮은 엄마를 다그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려 했다. 참다못한 엄마는 아버지를 향해 커터칼을 들이밀었고, 그걸 차은재는 자신의 몸으로 막았다. 그런데 그런 차은재의 '선의'는 병원장 측에 의해 왜곡되고, 외려 '가해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차은재의 억울함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 아이의 엄마는 커터칼을 마저 휘둘렀고 그 아버지이자 남편은 살아남지 못했다.
나 하나 참으면 돼 하는 '타협', 혹은 김사부의 말대로 '편한 선택'이 가정폭력으로 인한 한 가정의 파멸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차은재는 자신의 재능을 떠올렸다. 해부학 실습실에서 쓰러지고, 흉부외과의임에도 제 아무리 청심환을 쏘아부어넣어도 수술실에서 견디지 못해도 악바리처럼 응급실에서라도 자신의 몫을 다하려하며 '할 수 있습니다'를 외치던 차은재였는데, 비로소 그날 해부학 실습실에서 쓰러졌던 자신을 복기한다. 바이올린처럼 이번에도 나는 재능이 없는 것일까 라고.
그러나 그런 그녀의 절망에 돌담 병원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다시 불려온 응급실, 이번에는 무기수 청년이다. 오랜 투석으로 인해 혈관이 다 망가지고 거기에 설상가상 본인이 살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환자, 그 환자를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쓰고 나서 허탈함에 나선 복도에서 서우진을 만난다.
'살려고도 하지 않는 무기수'에게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차은재에게 그녀가 자조적으로 쏟아부었던 '재능론'을 들었던 서우진은 그게 바로 '의사의 재능'이라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 말에 은재의 얼굴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김사부의 '니 탓이 아니라'는 덤덤한 위로가, 그리고 수쌤의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시하라는 충고가 자신의 재능을 탓하던 은재에게 비로소 자신으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인생은 묘하다. 자신에게 다가왔던 '트라우마'든 '과제'든 그걸 피해 제 아무리 도망쳐도 결국 다시 그 문제에 마주서게 한다. 그래서 일찌기 헤르만 헤세는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서우진과 차은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과거'의 알, 과거의 세계에서 한 걸음 나섰다.
물론 나섰다고 끝이 아니다. 서우진과 차은재는 뇌사자와 그 뇌사자의 장기 이식을 두고 예우와 기증의 적시를 두고 날카롭게 맞선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또 다른 '의사'의 길에 대한 질문과 과제를 떠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사람은 이제 그들을 오래도록 붙잡았던 과거에 머물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건, '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건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는 '데미안' 속 그 문장처럼 또 다른 나를 향한, 의사 서우진과, 의사 차은재의 길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친구인 맥스가 그토록 애타게 나인틴 헌드레드를 부르고 설득했음에도 그가 내린 최후의 결정이 충격적이라 좀처럼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니 그 충격적 결말조차도 그의 일관된 삶에 어울리는 마침표가 아닐까란 반문을 해보게 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건반에 여한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살고 있는걸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2020년을 살아가며 이 사람 나인틴 헌드레드를 삶의 지표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지니아 호의 나인틴 헌드레드 나인틴 헌드레드, 1900년,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가슴이 부풀어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어우러진 우아하고 멋들어진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건, 배 밑창에 겹치듯 다닥다닥 붙어 앉아 그 시간을 견뎌냈던 허름하고 추레한 그들이건 모두가 '아메리카'란 그 외침에 눈을 빛내며 달려가던 시절, 그들이 탔던 배 버지니아호에 아메리카로 함께 가지 못한 채 남겨진 바구니 속 아기가 있었다.
배의 제일 밑창에서 쉴틈없이 배가 어서 빨리 아메리카에 닿도록 쉼없이 석탄을 퍼부어 넣던 석탄부 대니에게 발견된 아이는 그가 발견된 박스와 연도의 이름을 따 대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가 되었다. 탄부들의 숙소에 매달린 바구니, 아버지가 된 대니의 옷으로 대신한 기저귀는 대니가 즐겨보는 경마 신문이 아이의 글읽기 교재가 되며 자라났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여전히 배가 항구에 정착해 모두가 배을 떠났을 때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배에 남겨져 있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잠든 모두를 뒤흔들어 깨운 꼬마의 피아노 연주, 그렇게 기적처럼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알린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날부터 버지니아호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런 '기적'은 버지니아호를 떠나지 않는 피아노 연주자의 전설이 되어 여전히 아메리카로 가는 분주한 사람들의 발길과 함께 회자되었고 종종 정해진 연주를 떠나 악단장을 당황케 하며 '신기'처럼 시작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즉석 피아노 연주는 버지니아 호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이벤트가 되었다.
나인틴 헌드레드적인 삶 원심력의 시대였다. 낡은 유럽을 떠나 새로운 대륙의 가능성을 찾아 자신을 던지는 시대였고, 새로운 대륙처럼 자신의 발전을 위해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게 어디 1900년대 뿐인가. 자본주의의 시대 이래로 늘 세상은 '확장적' 프레임 속에서 살아왔지 않은가. 우리 시대 역시 자아 계발과 발전은 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화두'였고 이고 일 듯하니.
그런 시대에 나인틴 헌드레드와 같은 삶이라니. 버지니아 호에만 있는 천재적 피아니스트라 처음엔 신기해 하지만, 그 신기함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배를 떠나지 않는 그를 '자폐'적 인간형이라며 자신들의 삶의 척도에서 예단하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를, 그의 음악적 재능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고자 했다. 당연히 그런 정도의 재능이라면 전 미국을 순회하며 그의 연주를 널리 알리는게 '인지상정'이었던 시대, 그에게는 앞다투어 연주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의 음악을 레코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당대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라 찬사받던 젤리 롤 모턴은 그런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배에 머무는 그의 정체를 '괴벽'이며 겁쟁이라 조롱하며 당당하게 배에 올라 배틀을 신청한 모턴, 그와의 세 번에 이르른 배틀 과정은 그저 연주 경합이 아니라 나인틴 헌드레드가 누구인가를 보여준 결정적 장면이 된다.
도전장을 내민 모턴의 연주에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 어떤 사심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감동하고 눈물마저 흘린다. 전장에 나간 듯한 그의 연주에 나인틴은 마치 아이처럼 가볍게 캐롤로 응수하며 반기며 그와 '배틀'의 의지가 없음을 음악으로 즐길 자세가 되어있음을 피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의지'를 당기는 모턴에, 이제 나인틴은 기꺼이 그의 연주와 같은 곡을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변주하며 호응한다. 이 두 번째 연주는 중요하다.
그들이 연주했던, '재즈',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했던 서양 음악에 흑인의 정서를 곁들인 이 음악의 본령은 바로 그 '변주'와 '즉흥성'에 있었던 것, 그 배틀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나인틴 헌드레드가 그저 모턴의 음악을 되풀이했다고 웅성거릴 때 나인틴 헌드레드는 가장 '재즈적'으로 모턴의 음악에 화답했던 것. 즉 '음악'을 음악의 동지로써 화답하며 함께 즐기자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가 음악을 음악으로 즐길 때 여전히 이겨야 한다는 의지에 사로잡힌 모턴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권유'에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극력한 즉흥 연주의 세번 째 연주로 배틀을 불을 당긴다. 즉 웃으며 즐기자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죽자고 덤빈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권유와 즐김이 의미가 없자 나인틴 헌드레드는 예의 모턴이 했던 방식으로,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장 극렬하고 치열한 연주의 한 장으로 모턴의 기를 눌러버린다. 애초에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지만 굳이 그대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기꺼이 응해주겠다는 태도로.
이 세 번의 과정을 통해 보여진 건 음악을 대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태도와, 세상 사람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과 다른 결을 살아가는 그의 삶의 맥락이다. 세상이 재즈'를 소비할 때 , 그는 본령으로서 '재즈'라는 음악하고 있었던 것. 과연 그런 그가 세상 사람들이 원하듯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행복할 수 있을까란 의문과 함께, 자신이 직접 연주하지 않는 음악을 거부하는 그의 음악적 고집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란 의문도 함께.
그렇게 굳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던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변화'의 시간이 다가왔다. 레코딩으로 그의 음악을 남기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의 눈에 띤 여인, '스토커'처럼 그녀를 찾아들던 그는 그녀가 배를 내리자, 오래도록 그에게 세상 밖으로 나가라 종용하던 맥스에게 버지니아 호를 내리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손 흔들어 그의 하선을 반기던 날, 그는 배를 내리다 문득 눈 앞에 펼쳐진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한없이 열려진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잠시 계단에서 그곳을 바라보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영화의 결말에서 본 그것과 같다.
88개, 피아노의 건반 개수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곳, 그곳이 나인틴 헌드레드에게는 버지니아 호였다. 그에게 세상은 그런 88개의 건반이 무수히 펼쳐진 곳이다. 그는 무수히 펼쳐진 88개의 건반 대신, 자신이 잘 칠 수 있는 단 한 대의 건반을 선택했다.
2020년의 벽두에 그렇게 세상에 펼쳐진 무수한 건반에서 뒤로 물러선 나인틴 헌드레드를 떠올리게 되는 건, 1998년에 개봉한 영화를 2020년 마스터피스로 다시 찾아보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지 않을까. 무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건 그 자체로 마스터 피스인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새로운 것, 더 넓은 세상을 갈구하며 뛰어가는 우리에게 단 한 척의 배, 그곳의 피아노를 자신의 삶으로 살았던 한 사람, 나인틴 헌드레드의 모습은 어쩌면 이해불가한 삶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늘 더 새로운 것, 더 많은 것을 갈구하며, 사실은 그 속에서 진정 내가 원하는 그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허덕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것을 기꺼이 감내한 나인틴 헌드레드의 삶은 기꺼이 그를 조롱해 보려 했지만 결국 그의 음악에 무릎끓은 채 연주회장을 떠났던 모턴과 같은 마음을 들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선택했던 88개의 건반조차 제대로 쳐내지 못한 채 또 다른 건반의 잿밥에만 홀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기꺼이 자신이 몸담았던 공간, 자신이 연주했던 피아노와 함께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 삶의 처연한 겸손과 최선이 그래서, 2020년 벽두에 떠오르게 되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올해는 각자 모두 진짜 자신의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최선을 다해 그 88개의 건반을 아름답게 연주해 내는 일에 몰두해 보면 어떨까 싶다.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면 그건 자신의 연주가 아니라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그 ' 외통수 고집'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들이 되돌이켜 보면 많지만, 그 중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계몽사 소년소녀 명작 동화집이었다. 서울 구석진 동네에 살던 아이는 이 50권 속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향한 눈을 틔웠다. 물론 그 세상에는 주로 라플란드의 요정과 첨탑 위에서 물레를 빚는 마녀 등등이 살았지만. 그 중에 <의사 둘리틀 선생>이 있었다.
퉁퉁한 덩치에 작고 동그란 안경을 걸친 사람좋게 생긴 의사 선생님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큰 정원이 딸린 그의 작은 집에는 언제나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의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물들로 붐볐다. 사람들 치료하지 않기에 빈털털이가 되어 구멍난 양말을 신어야 하는 형편이지만 지하실 작은 굴에도 생쥐 손님들로 가득찬 둘리틀 선생, 아프리카에 원숭이들이 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동물 친구들과 함께 먼 왕진 여행을 떠나는데...... 이렇게 시작되는 둘리틀 박사와 동물 친구들의 모험담이었다.
닥터 두리틀이 된 로다주 그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둘리틀 박사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하 로다주) 버전 두리틀 선생으로 돌아온다니 익히 아이언맨에서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로다주였기에 '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적역' 답게 엠마 톰슨, 라미 말렉 등 유수한 헐리웃 배우들이 목소리로 출연한 동물 출연진들을 상대로 역시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였다. 그런데, 쉬지 않고 쏟아놓는듯한 두리틀 선생으로 분한 로다주의 달변, 그리고 허허실실한 연기는 <아이언맨>의 로다주와 그리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아이언맨>의 로다주가 그리워지는걸까? 왜 연기는 로다주가 하는데 자꾸 죠니 뎁에 대한 기시감이 떠오르게 되는 건지? 작품 때문일까? 연기 때문일까?
<닥터 두리틀>은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의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도 원숭이가 열병에 걸렸다고 해서 아프리카 까지 왕진을 떠나는 원작의 둘리틀 선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고 해서 인간의 치료도, 동물의 치료도 거부한 채 두문불출 칩거하는 두리틀 선생으로 영화는 막을 연다.
그리고 언제나 헐리웃 가족 영화에서 그러했듯 두리틀 선생이 질색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 인간적으로 혹은 사업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두리틀 선생은 동물들과 대화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위기를 타개하고 목숨이 경각에 빠진 영국 여왕을 구해주기 위해 자신의 연인이 남긴 상상 속 장소라 여겨지는 미지의 세계 속 식물을 구하러 나선다.
동물들과 대화하는 의사 선생님인 만큼 <닥터 두리틀>의 동물 캐릭터들 역시 화려하다. 원작에서 등장한 183살인가 하는 앵무새 폴리네시아는 예의 그 집사와 같은 노련한 포스로, 거기에 원숭이 치치, 개 지프, 오리 댑댑 외에 추위를 타는 북극 곰과 겁이 많은 고릴라와 타조, 기린 등과 조수가 된 토미가 데려온 다람쥐가 있다. 마치 어벤져스 군단과도 같은 동물들은 영화에서 정말 어벤져스처럼 각자 자신의 몫을 다해낸다.
전형성을 넘어서지 못한 헐리웃 가족 영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방식이 역시나 매우 헐리웃 영화의 전형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둘리틀 박사에게 동물의 말을 가르쳐 준 앵무새, 살림꾼 오리, 회계를 책임지는 올빼미, 런던의 모든 일을 꿰뚫는 참새는 이제 두려움에 떨다 결정적 실수를 하고 자책하다 위기 상황에서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구하는 고릴라로, 서로 니가 잘하는 게 뭐냐며 아웅다웅거리던 추위 타는 북극곰과 타조는 위기를 겪으며 '브로'의 관계를 형성한다. 섬에 갇힌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위협하던 호랑이의 마더 컴플렉스 역시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여왕의 방에서 특파원 노릇을 톡톡히 한 문어라던가, 대벌레의 존재감은 색달랐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저 한 편의 평범한 디즈니표 동물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속 내용을 참조한 듯 고래까지 찬조 출연하여 박진감을 더했지만 모험은 그럴 듯하지만 난파선 잔해에서 유리병 조각으로 면도를 했다는 원작 둘리틀 선생의 넉넉함은 로다주 표 액션 어드벤처가 대신하고 자칭 로다주의 동창이라지만 그에게 '열폭'하는 왕실 주치의의 도발은 치졸한 수준일 뿐이었고 사랑하는 딸을 로다주에게 빼앗긴 아버지의 보복은 어설픈 감동 스토리로 마무리되며 갈등의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제 아무리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어설픈 봉합이다. 몇 십년을 흘러도 여전히 명절만 되면 <나홀로 집에> 시리즈가 되풀이 방영되고 있는가를 되새겨 보면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개'가 능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닥터 두리틀>의 전략은 안이하다.
그렇다 바로 문제는 로다주가 분한 두리틀 선생에서 부터 동물들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디즈니 표 동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기대되어진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하가 아닌 게 어디냐며는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아이언맨>을 졸업한 로다주가 선택한 첫 번 째 영화라면 제 아무리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기성품 이상의 감동을 기대하게 되지 않겠는가.
로다주는 <아이언맨>에서 보여준 때론 한없이 가볍다가도 어느 순간 훅 하고 감정을 울리며 들어오는 예의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연기의 폭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슷한 캐릭터인데 두리틀은 <아이언맨>의 기성품같다. 로다주는 지금까지 <아이언맨>을 제외한 <셜록 홈즈 > 시리즈 등에서는 늘 예의 <아이언맨>에 미치지 못하는 틀에 박힌 캐릭터를 답습해 왔고, 아쉽게도 <닥터 두리틀>의 두리틀 캐릭터 역시 그렇다. 더욱이 아쉬운 것은 그런 그의 로다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예측되는 연기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이래로 트레이드 마크를 넘어 박제가 되어가는 조니 뎁의 연기와 같은 잔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가서 두어 시간 재밌게 보내기에 나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로다주가 나와 기대를 품고 간 사람이라면 어쩐지 이보다는 영화를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인스턴트'의 향기를 느끼고 돌아설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인스턴트'적인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로다주와 동물들이 평범한 캐릭터를 변주하는 가운데 사냥꾼 집안에 태어나 동물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아이 토미 스터빈스(해리 콜렛 분)가 스스로 닥터 두리틀의 조수가 되어가는 성장 스토리는 배우의 진솔한 연기 때문이었을까 평범한 이야기 속에 울림을 가지고 전해진다.
얼마전 아는 분이 아들네가 둘째를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시작은 축하한다였지만 결국은 '어떻게 해요'라며 걱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출생율은 매년 최저를 갱신하고 있는 시절, 하나라도 더 낳으면 좋은 일 아닌가 싶지만, 현실은 혹독하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집안, 그나마 좋은 직장을 다녀서 어린이집의 혜택을 받는다지만, 일찍 끝나는 어린이집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할머니'의 몫이다.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가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또 다른 할머니가 그 '대타'를 하기 위해 서둘러 와야 하는 처지다. 할머니가 아프기라도 하면 완전 비상이다.
아이는 엄마가 낳지만 그 아이 하나를 기르기 위해 온 가족이 다 동원되어야 하는 현실, 그래도 그나마 봐줄 할머니가 있으니 낫다지만, 자식에 이어 손주까지 돌보는 할머니의 형편은 그리 녹록치 않다.
돌봄 공백을 몸으로 때우는 할머니 시작은 이제 60줄에 들어선 허정옥 씨네 집이다. 아침부터 일어나기 싫은 손주를 질질 끌다시피 이끌고 업고 하여 허정옥 씨가 출근한 곳은 같은 아파트 15층에 사는 큰 딸네 집이다. 두 명 중 한 명의 손주를 자신의 집에서 재운 정옥씨, 손주를 데려다 놓으면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그녀의 육아 전쟁이 시작된다.
두 손주와 실랑이를 벌이는 딸 대신 그 집 식구들 아침 챙기기부터 시작된 정옥 씨의 아침은 아이들을 겨우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어지러진 딸네 집안을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가 싶더니, 오후 4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와서 딸이 올 때가지 끝나지 않는 놀이 지옥 속에서 할머니의 혼을 쏙 빼놓는다. 직장에서 돌아온 딸은 힘들다고 꼼짝하지 않고 그 대신 엄마인 할머니가 동분서주 바쁘다.
2016년 큰 애를 낳으면서 시작된 황혼 육아, 딸은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린다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식 생각해서 해주는 일이지 돈 생각했으면 못할 일이라 고개를 내두른다. 이제는 제법 큰, 하지만 여전히 아기같은 손주들을 번쩍 번쩍 안고 업고 하다보니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약을 달고 산다. 병원에서는 오래도록 쓴 육체가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며 휴식을 요구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보육 실태 조사에 따르면 아이를 개인에게 맡기는 경우, 83.6%가 조부모라는 결과가 나왔다. 더구나 아이를 돌보는 조부모들 중 열 명 중 한 명은 일주일에 7일 동안 아이를 돌보고 있는 과도한 황혼 육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식이 힘들까 참여하기 시작한 황혼 육아에서 조부모들, 특히 할머니들은 손목터널 증후군, 관절염, 척추염 등 '손주병'을 얻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여전히 오랜 시간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자식 세대에게 맞벌이를 그만두거나 할머니에게 맡기거나 밖에 없는 현실, 믿을 곳이 되어주어야 하는 조부모들의 처지는 녹록치 않다.
이에 전문가는 설사 믿고 맡기는 내 부모라 하더라도 과연 어디까지 맡길 것인지, 즉 시간이나 조건에 있어서 명확하게 육아의 한계를 약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 이제 곧 둘째 출산을 앞둔 문미예 씨 집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온 가족이 육아에 참여한다. 아침 일찍 딸네 집으로 출근한 할아버지 문정기 씨가 오전 중에 손녀를 돌보면 오후에 할머니가 와서 돌봄을 이어가는 식이다. 가족마다 2~6시간 씩 시간을 나눠 한 사람에게 '독박 육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데 이런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가족들이 어디 쉽겠는가.
마음의 벽을 쌓는 황혼 육아 하지만 애본 공은 없다고, 할머니의 황혼 육아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대구에서 김포로 9살 손자를 돌보러 오는 73세의 곽정화 씨, 그런데 먼 길을 어렵게 온 할머니를 대하는 손주의 태도가 영 석연찮다. 하교 길에 반기는 할머니한테 대뜸 '왜 할머니야'라고 볼멘 소리를 내놓고 하더니 집에 와서도 할머니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지만 카메라에 비친 할머니도 만만치 않다. 꿀먹은 벙어리같은 손주에 대한 섭섭함을 피력하는 것도 잠깐 앉은 자세부터 연신 잔소리다. 며느리가 돌아오니 태세마저 전환하신다. 대놓고 첫 째 며느리를 본받으라 한다던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음식 만들기에 남자 아이들한테 웬 부엌 일이냐며 핀잔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참다못한 며느리는 방학을 핑계대며 할머니가 이제 먼 길을 고생하며 오시지 않아도 된다하고,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섭섭하다.
이렇게 막상 아쉬워서 부탁한 황혼 육아지만 집집마다 젊은 며느리 세대와 나이든 할머니 세대의 육아 방식의 갈등은 가족 내 위기를 조성한다.
69세 김복순 씨 역시 며느리의 부탁으로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 손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할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라면을 먹고 싶다는 손주에게 라면을 끓여준다. 마트에 가서 장난감을 사고 싶다면 말리는 엄마한테 그게 얼마나 된다며 하며 손주 역성을 드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눈치가 빠른 아이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그런 관계에서 소외된 엄마는 자신이 귀찮은 큰 누나가 된다며 상실감을 호소한다.
실제 2015 보육 실태에 따르면 황혼 육아를 하는 세대의 50%가 양육 방식의 차이로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할머니와 엄마의 권한 사이에서 정작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아이들, 곽정화 씨의 9살 손자가 마음을 닫은 건 잔소리 많은 할머니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 아무리 할머니 세대에게 육아를 맡겨도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건 부모 세대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 전문가의 고언대로 될 수 있을까. 다큐 속 할머니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이해를 더하며 한 발 물러서셨지만, 자기 자식들을 키우며 평생을 살아오며 '습'처럼 익혀진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조부모 세대의 사고 방식이 쉽게 변화되는 건 쉽지 않다.
보육 시스템의 부재, 그런 가운데 기댈 곳은 부모님 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정작 내 자식이 힘들까봐 시작한 황혼 육아에서 몸도, 마음도 다쳐가는 부모님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가족의 문제로 치환시킨 현상은 문제점은 명확하지만, 해결책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그 딜레마를 감수하고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란 최저 출산율의 딜레마로 귀결되는 것이다.
2016년 초겨울 지방의 초라한 돌담병원에서 의술과 인술의 기적을 일으키며 신드롬을 불러왔던 <낭만 닥터 김사부>, 그로부터 3년이 지나 2020년 시즌2로 돌아왔다. 예의 오래된 팝송이 담긴 카세트 테이트를 트는 '낭만'이 가득한 김사부의 방도, 그 방을 지키는 김사부도 여전하지만 그의 아이들이 달라졌다. 사고뭉치 아이들로 시작하여 어엿한 의사로 성장했던 서정쌤(서현진 분)과 동주쌤(유연석 분)이 각자의 일신사로 돌담 병원을 비우게 되고, 외과의가 필요했던 김사부가 본원 거대병원에서 '줏어온' 아이들 서우진(안효섭 분)과 차은재(이성경 분)이 새롭게 등장했다.
돌담 병원의 딜레마 아이들만 달라진 게 아니다. 시즌1 내내 지방의 작은 병원에서 '미션 임파서블'한 작전을 해내던 돌담병원, 하지만 돌담 병원의 발목을 잡는 건 그저 낡은 의료 기기와 적은 의료 인력이라는 객관적 조건만이 아니었다. 본원 거대 병원의 분원 돌담병원이라는 '구조적' 위치가, 거기에 자격지심으로 부터 비롯된 어긋난 묵은 해원으로 사사건건 김사부에게 태클을 거는 도윤환 원장과 그의 하수인들이 시즌 1 내내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었다. 그리고 시즌1의 마지막은 그가 그토록 진짜 실력이라 믿었던 권모술수로 인해 스스로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도윤환 원장이 원장 직을 내려놓는 '승리'의 팡파레를 울리며 화끈하게 마무리되었다.
3년만에 돌아온 돌담 병원, 낡은 의료 장비는 업그레이드 되었고, 최신 의료 기기가 구비된 수술실도 마련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돌담병원의 막강한 후원자였던 신회장(주현 분)이 더 이상 그곳에 없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바로 그 시즌1 내내 악의 치트키였던 도윤환이 거대재단 이사장이 되어 그 자신의 'I'll be back'을 실현해내고야 말았다.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벌인 일은 바로 김사부의 환자 나꿔채기이다. 지방 행사에 가던 중 교통 사고를 당한 국방부 장관, 응급 환자로 들이닥쳐 엄청난 피를 흘리며 심지어 아스피린을 복용하여 지혈도 제대로 되지 않은 환자를 김사부가 늑간 내 출혈까지 잡아내며 겨우 회생시켜 놓았더니, 거대 병원 간판 외과 의사 박민국 교수(김주헌 분)팀을 내려보내 가로챘다. 수간호사 오명심(진경 분) 선생의 말대로 김사부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놓고 생색은 거대 병원 측이 내려는 것.
이렇게 이제 거대 재단 이상장이 된 도윤환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김사부를 향해 그가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도윤환 원장이 먼저 던진 이 승부수에 대해 느긋하게, 하지만 그가 모르는 패를 쥔듯 '암중모색'하며 반격을 준비하는 김사부의 대결은 시즌2를 이끄는 가장 흥미진진한 관전 포인트이다.
여전히 세상은 돈과 명예와 권력, 그리고 그것을 향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의 것이라 자신하는 도윤환과, 그런 도윤환을 숨기지 않고 한껏 비웃어 주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응급 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던 '인간미' 넘치는 김사부의, '인간'이라는 화두를 둘러싼 대립은 대결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아이들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시즌 1의 윤서정과 강동주도 그랬다. 전문의의 자격증을 지녔지만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에 걸려 엎어진 채 누군가 일으켜 세워주길 바라는 아이와 같았다. 그런데 이제 시즌 2에 다시 돌담의 아이들로 등장한 서우진과 차은재 역시 시즌1의 그들과 비슷하다.
흙수저임에도 실력하나로 거대 병원의 에이스로 거듭났던 강동주, 그러나 그는 금수저들의 카르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다. 그렇게 찾아온 돌담 병원, 그리고 이제 3년 후 또 다른 상처만 가득한 흙수저 의사가 돌담에 등장한다. 어찌 보면 강동주보다도 더하다. 부모님이 음독을 한 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이, 그 아이는 따라가기도 힘든 의대 과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퇴서를 품고 견뎌냈다. 돈을 따라간 선배 병원, 하지만 의료법 위반에 걸려 폐업한 이유가 서우진이라는 소문은 그에게 이제 페이닥으로 일하는 거대 병원에서마저 그를 밀어낸다. 아버지의 빚에, 학자금 대출까지 그의 신장을 노리며 그를 린치하는 조폭들을 피해 그가 찾은 곳은 그에게 명함을 안겨 준 김사부가 있는 돌담 병원이다.
차은재라고 다를까. 서우진이 차은재를 남다르게 생각했던 그 지점, 누구보다 열심히고 누구한테라도 지지 않은 악바리인 아이가 사실은 '엄마가 슬퍼해서' 의대를 버티고 있었다는 그 딜레마는 흉부외과 전문의 차은재를 수술실에서 버텨내지 못하게 한다. 안정제를 복용해도, 청심환을 사탕처럼 씹어먹어도 넘을 수 없는 벽, 본원에서 수술실에서 잠든 차은재에게 선택지라고 던진 카드, 알고보니 김사부가 던진 구원의 카드였다.
서우진의 오래된 기사까지 스크랩해서 가지고 있고, 본원의 후배가 만류하는데도 기꺼이 차은재를 품은 김사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마냥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아량은 커녕,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온 서우진이 돈에 자신을 팔려하자 너같은 놈은 필요없다며 당장 내친다. 수술실에서 뛰쳐나온 차은재에게는 내 수술실에서 도망가는 너같은 의사는 필요없다며 다그친다.
요즘 아이들한테 그러면 '꼰대'라고 오영심 선생이 달래도 끄덕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시즌 1에서도 그랬다. 육체적 심리적 트라우마때문에 손을 쓰는게 여의치 않았던 윤서정에게 김사부는 얼마나 혹독했던가. 사사건건 중뿔나던 강동주와는 또 얼마나 싸웠던가.
마치 한껏 달궈진 쇠를 단단한 망치로 두드려 벼려 날선 칼을 만들어 내듯 김사부는 늘 자신의 상처에 갇힌 아이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은 차은재에게 수술실에 얼씬도 하지 말라하고, 자신을 팔겠다는 서우진에게 그런 의사는 필요없다며 1주일의 딜을 하게 만들며,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속에 믿음이 있다. 차은재든, 서우진이든 지금 이 자리까지 자신의 최선을 다해 온 이 '아이들'이 김사부가 달구어 두들겨 대는 그 망치질에서 그럼에도 지나온 순간의 그들처럼 다시 최선을 다해 가장 '정답'의 길을 찾아낼 것이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리고 바램이 있다. 뜨거운 그 불길과 같은 김사부의 가르침 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딛고 진짜 의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외과의, 수술실에도 갈 수 없는 흉부외과의, 그 최악의 상황을 이겨내려면 저 정도의 '제련'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과정인 듯싶다.
그 불가능한 미션이, 상처받은 아이들이 김사부의 단련 과정에서 몸부림치며 성장하는 과정이 시즌 1에서도 그랬듯 <낭만 닥터 김사부>의 진짜 이야기다.
지난 5일 다이어트 산업 배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음식 정치를 다루었던 <sbs스페셜- 끼니外란> 이 12일 그에 이어 영양제에 타깃을 맞추었다. 다이어트 산업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매우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영양제 시장, 그 필요성에 대한 평행선같은 주장과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막후 전쟁'을 다룬다.
평행선과 같은 영양제 진실 게임 대항해 시대 오랜 항해 동안 신선한 채소를 먹지 못해 선원들이 죽어가며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비타민 c의 중요성, 이처럼 비타민과 미네랄 등은 그 존재를 '결핍'을 통해 드러내는 우리 몸의 중요한 영양소이다. 발달한 약품 산업은 햇빛을 잔뜩 품은 양털을 용매제에 끓여 비타민 D를, 아스팔트 원료로 부터 비타민 C 등을 추출하여 대중적으로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 한해서만 한 해 53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산업이 되었다.
영양제 찬반 논란의 서막을 연건 영양제 전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여에스더 홍혜걸 의학 박사 부부이다. 방송 등으로 바쁜 두 사람 과도한 업무와 불규칙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갖가지 영양제로 극복하고 있단다. 모양만 영양제지 식품이나 마찬가지라며 아침 식사를 한 후 밥 한 공기 양에 버금가는 26알의 다양한 영양제를 이제는 한번에 먹을 수 있다는 내공을 펼쳐보이는 홍혜걸 박사. 30대 후반부터 젊음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양제를 섭취해 왔다는 홍 박사는 굉장히 저비용으로 과로로 인한 신체적 부담과 불규칙한 식사로 인한 영양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다며 영양제 적극 찬성 의견을 피력한다.
반면 <세계는 뚱뚱하다>라는 저서를 통해 비만의 사회학을 연구해온 베리 팝킨 교수의 입장은 다르다. 그때 그때 나는 지역 농산물에서 제철에 먹을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는 팝킨 교수는 영양제 무용론을 주장한다. 자연에서 충분한 영양을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더구나 기름진 음식이나 정크 푸드를 먹으면 아무리 좋은 영양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좀 다른 의견도 있다. 젊어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던 폴 자미넷 수칭 부부의 겨우, 식습관의 변화를 통해 만성 질환을 고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자신들의 전공을 떠난 암과 각종 질병 연구에 헌신하는 두 사람을 사골 국물로 무기질을 , 내장 중심의 고기 섭취를 통한 단백질을, 코코넛 오일로 지방을 섭취하는 식단으로 하루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그럼에도 이런 음식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비타민 D가 부족하고, 일주일에 12개의 굴로 아연 섭취를 충족시킬 수 있다지만 막상 12개의 굴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번씩 부족한 영양 성분을 각종 영양제를 통해 섭취할 것을 주장한다.
자연 식품을 통해 영양소 섭취를 주장하는 하버드 권장 식단 역시 종합 비타민과 비타민 D는 영양제를 통해 섭취해야 한다고 권장한다. 반면 가정의학과 명승권 교수는 '비타민부터 끊어라'라고 주장하는 비타민 무용론 전도사이다. 22편의 임상 실험을 통해 비타민 등 각종 영양제가 암 예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히나 방광암의 위험성은 52%나 증가한다는 것이다.
에린 미코스 존스 홉킨스대 교수 역시 비타민 섭취가 심혈관계 질환 예방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며 비타민 D와 칼슘을 함께 섭취했을 때 외려 뇌졸증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힜다.
특히 최근 노화를 막자우는 묘약으로 부각되고 있는 항산화제의 경우, 선충에게 이 항산화제를 과다 투여했을 때 도리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마이클 리스토 교수는 주장한다. 운동을 하며 항산화제를 복용하면 오히려 건강이 안좋아지는 반면, 차라리 항산화제 없이 운동을 했을 때 혈액 신진대사가 좋아지고 당뇨병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타민의 실제 효용은? 이렇게 맞물리는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제작진은 실험을 한다. 라면을 주식으로 삼다시피한 남요한 씨, 건강을 챙기기위해 마치 식사의 한 과정처럼 다양한 영양제를 복용하는 현지씨, 저탄수고지 다이어트를 했지만 지금은 요요에 시달리고 있는 이영훈 피디 등의 영양 상태를 조사한 것.
결과는 뜻밖이다. 세 사람 모두 비타민 B6가 과잉으로 나타났으며 우려와 달리 남요한 씨가 비타민이 좀 부족하고, 이영훈 비타민 A와 B12과잉인 것을 제외하고는 세 사람 모두 혈중 내 비타민 농도가 비슷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베리 팝킨 교수에 따르면 채소 속 항산화물질은 우리 몸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베타카로틴의 복용이 폐암을 증가시키듯 그것이 영양제의 형태로 변했을 때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활성부위에 얼마나 흡수되는지 시판되는 영양제의 효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양제 산업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맞춤 비타민이라며 한 병에 12만원짜리 비타민 B 주사처럼 직접 몸에 투입하는 주사요법까지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앞서 <끼니外란> 1편에서도 등장했던 산업과 하계의 유착 관계이다. 비타민 D를 많이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저명한 마이클 홀릭 교수가 업계로 돈을 받았던 스캔들에서 보여지듯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여러 주장들의 이면에 업계의 '로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큐는 지적한다.
앞서 영양제 전도사였던 홍혜걸 의학 전문기자 역시 특정 질병을 치료한다던가, 우리가 음식을 통해 먹지 않는 성분을 필요이상 섭취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선을 긋는다.
기준이 모호한 건강기능식품 이렇듯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건 비타민이나 미네랄 등의 영양제 만이 아니다. 방송 광고 등을 통해 등장하고 있는 키크는 약의 경우 1,2차에 걸친 비교 실험 결과 편차가 미미했고, 이런 식이면 1,2년이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전문가는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는 이른바 식약처의 건강 기능 식품 인정이다. 한 두 개의 논문만으로 인정되는 과정 자체가 허술하다는 것이다.
관절에 특효약이라는 글루코사민의 경우 비영리기관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결과가 나온 반면, 자금 지원을 받은 기관에서는 통증이 감소했다는 상반된 결과처럼 식약처 인증 기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특히 가르시니아 추출물처럼 급성 간염을 일으키거나 심장 질환 등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제품이 건강 기능 식품으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농림축산부는 일반 식품에도 기능성 표시 제도를 도입하려 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영양제 진실 게임의 결론은 모호하다. 이현령 비현령이듯이 양 측의 주장은 팽팽하고, 각 주장은 그 나름의 타당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결국 선택은 '소비자'의 판단이다. 하지만 각종 방송과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포되고 있는 여러 영양제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자극들은 건강 염려증에 휩싸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나 어쩌면 결론은 명확할 지도 모른다. 가장 기본은 신선한 식재료를 통한 규칙적이고도 건강한 식단이다. 앞서 비타민 무용론에 불을 지폈던 영국 BBC에서도 일조량이 적은 가을과 겨울철에 비타민 D 보충제 섭취를 권장한다던가, 음식으로 필요 영양량을 섭취할 수 없는 노약자 등에게 부족된 영양분의 영양제를 통한 보완을 제시하듯이, 오늘 우리가 먹는 각종 영양제들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먹는 식사의 '보조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게 아닐까. 굳이 과용하여, 영양제 천국인 미국인들의 오줌이 가장 비싼 오줌이라는 우스개꺼리의 당사자가 될 필요는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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