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 동기, 선배들이 어느덧 은퇴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맨날 운동화에 파카나 걸치던 선배들이 번듯한 새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 빛나던 신입 사원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반백이 된 그들이 '사회'로 방출되었다. 하지만 말이 '퇴직자'지, '놀기'엔 너무 멀쩡하게 젊다. 그리고 이른바 100세를 사는 게 점점 가능해 지는 시대에 그들이 '놀고 먹어야'할 시간이 그들이 직장 생활을 해왔던 시간보다도 길다. 과연, 이 '아득하게 창창한' 은퇴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최근 코로나 사태로 2월 27일 <다큐 시선>은 지난 2017년 7월 5일 방영된 <서러워말아요, 젊은 그대>를 재방영하며 어언 3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리 사회 '늙수그레한 젊은이'들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젊은이들과 '알바'를 경합하는 노익장 
동네 슈퍼가 편했던 61세의 임종석 씨는 오늘로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10일 째이다. 식품 회사 부장 출신, 퇴직을 하고나서 택시 운전을 하던 그는 불규칙한 생활로 건강에 무리가 오자, 편의점에서 '알바' 인생을 시작했다.

임종석 씨가 일하는 편의점 체인에는 현재 임종석 씨와 같은 시니어 교육생이 현재 650명 연수 중이다. 점주는 임종석 씨보다 10년쯤 어린 50대, 그가 젊은이들 대신 시니어 세대를 '알바'로 고용한 건 연락두절될 일 없이 꾸준히 오래 근무를 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하여 그 세대 특유의 '근면 성실'함을 높이 사서이다. 

하루 10시간 신용카드 계산은 척척이지만 각종 할인 카드를 내밀면 멘붕이 오는 '초보'지만 한 달 꼬박 일하면 230만원 황혼의 아버지로써 면이 선다. 이렇게 임종석 씨처럼 은퇴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니어'들이 지난 5년 새 7배나 늘었다. 이들이 선호하는 업종 1위는 바로 임종석 씨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이다. 어느새 진짜 젊은이들과 편의점 알바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여기 젊은이들과 '경쟁'을 넘어 어느덧 '선점'하게 된 또 하나의 알바가 있다. 바로 '전단지 알바'이다. 되돌아 보면 예전에는 거리에서 학생들이 '전단지'를 나눠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전단지'를 나눠주는 분들이 대부분 '시니어'로 바뀌었다. 10대들의 손쉬운 '알바'가 노년의 길거리 부업으로 전환된 것이다. 아마도 그건 꼬박 2시간을 서서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장당 50원꼴 500~700장의 전단지를 나눠주고 2만 5천원을 받는 '헐한 알바비'때문이 아닐까. 

뜨거운 여름 햇빛이 내리쬐는 신촌의 오후 2시, 땡볕 아래에서 중무장을 한 채 쉴 새없이 미장원 할인권을 나눠주는 유영자씨가 있다. 싸늘한 시선, 익숙한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기꺼이 맡겨진 전단지를 소화해 낸다. 

20년전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 가장이 된 유영자씨는 전단지 아르바이크로 번 100여 만 원의 최저 생계비 수준의 돈으로 생활해 왔다. 어르신이라 더 받아주기도 하니 미안하면서도 그렇게 했어도 거절이 익숙해지지 않아 서운한 아르바이트, 신촌에서 '한 탕'을 뛰고 다시 신림동으로 자리를 옮겨 꼬박 전단지를 나눠준 유영자씨의 일과는 해질녁 6시 반이 넘어서야 마무리된다. 그까짓 몇 장 쯤 남기면 어때서 싶지만 마지막 한 장까지 성실하게 나눠주고 나서야 홀가분하게 돈 받은 만큼의 보람을 느끼며 평범한 할머니의 자리로 돌아간다. 

젊은이들이 보수가 적어 떠난 자리에 대신 '알바'를 뛰는 시니어 세대,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버는 세대가 되었다. 2017년 기준 일하는 노인 421만명, OECD 평균 2배가 넘는다. 그렇게 많은 노인들이 열악한 조건에도 말년까지 일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계 노인 빈곤율 1위로 부터 비롯된다. 저임금 일자리나 자영업을 전전할 수 밖에 없는 노인 세대, 당연히 소득이 낮을 수 밖에 없어 상대적 빈곤율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려운 건 일할 곳이 없는 삶
하지만 꼭 생계때문만은 아닌 경우도 있다. 73세의 양주익 씨는 오늘도 지역 신문을 뒤적이며 일자리를 찾는다. 공무원 퇴직 후 미화원 등 임시직을 전전하다 보니 어느덧 70줄, 노인을 위한 일자리라도 70이 넘는 양주익 씨가 할 만한 곳이 드물다. 

30년을 넘게 일했건만, 그래도 또 일하고 싶다는 양주익 씨, 꼭 생계 때문이 아니라, 나갈 곳이 있는 삶, 나도 일할 곳이 있는 사람이라는 '활기찬 삶'에 대한 지향이 오늘도 양주익 씨를 조바심내게 만든다. 연금으로 받는 150만 원, 그 정도면 생활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1년에 아내와 제주도 여행이라도 한번 가는 여유있는 삶을 살려면 한 달에 250만원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경비 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심지어 '경비 지도사'란 경비 자격증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양주익 씨는 우선 그거부터라도 따고자 한다. 

이제 은퇴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은 63세의 정효선씨는 벌써 4번 째 일자리를 위한 면접 준비를 한다. 대기업 부장 출신, 직장에 다닐 때만 해도 매일 매는 넥타이가 지겨워 푸는 게 소원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젠 다시 넥타이를 맬 일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은퇴 후의 삶을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은퇴는 일렀고 자녀들의 갈 길은 머니, 은퇴 후의 생활은 예상과 달랐다. 

1년 계약직으로 사회적 기업에서 일을 했던 정효선 씨가 이제 면접을 보는 건 '일용직'. 경복궁 야간 경비이다. 겨우 2주 동안 하는 이 '경비' 일자리에 36명 뽑는데57명이 모였으니 정효선 씨도 긴장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대기업 부장 출신이라는 그의 전직이 '경비'와 같은 일용직에는 외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다행히 뽑혀 매일 밤 관람객들의 '검표원'으로 활기차게 일하는 정효선 씨, 겨우 50만원이 좀 안되는 급여지만 보람을 느낀다. 그의 소박한 소망이라면 매일 하는 일이 있었으면 하는 것, 그것 뿐이다. 

양주익 씨의 경우처럼 노인 세대에게 은퇴 후의 삶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증가하는 노인 세대를 대비하려면 국가, 사회가 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마련해 가야 할 문제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 비해 활동력이 떨어지는 노인 세대에게 맞춤인 사회 서비스 일자리는 공공이 만들어야 하는 '과제'이다. 이를 위한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한 지자체가 있다. 성동구에서는 서울숲 컨테이너 거리에 <엄마손 만두>를 비롯하여 까페 등 고령자 친화 기업을 만들었다. <엄마손 만두>의 경우 61살이 최연소인 시니어들이 만들어 가는 '노인을 위한 신의 직장'이다.  매니저를 제외하고는 노인들이 4시간 격일제로 일하는 이곳, 매니저로 일하는 64세의 엄기범 씨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웃음이 늘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112명, '노인들을 위한 신의 직장'이 좀 더 많이, 여러 곳에서 만들어져야 하겠다. 


by meditator 2020. 2. 29.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