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는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왕이다. 마치 우리가 세종대왕이나 정조 대왕을 현명한 왕의 대명사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전우다. 나와 함께 피흘리는 자는 나의 형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5세
국왕이 솔선수범 전장에 나서 함께 피흘리며 뛰면서 우리는 전우고, 형제라는데 이보다 더한 '독려'가 있을까. 물론 그 '독려'는 무수한 국민들의 피와 땀의 헌신을 요구하지만, 어쨌든 비겁하지 않은 이 왕의 행보는 그래서 윌림엄 셰익스피어 이래, 로렌스 올리비에, 케네스 브래너 등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국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헨리 5세'를 그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일찌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가족 사이에 던져진 소년의 이야기 <동물의 왕국>을 통해 2010 선댄스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바 있는 데이비드 미쇼 감독이 역시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신하들 사이에 던져진 역대 가장 '젊은' 헨리 5세를 들고 출정했다.
영화 <더 킹; 헨리 5세>는 아직 왕이 되기 이전 헨리 4세 치하에서 어떻게든 왕자의 자리를 벗어나 기사 존 폴스타프를 벗삼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왕자 할(티모시 샬라메 분)로부터 시작된다. 그 자신이 랭카스터 공작의 아들로 귀족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 '헨리 3세'의 후손인 점에 내세워 '왕좌'를 차지했던 아버지 헨리 4세, 덕분에 그는 재위 기간 내내 귀족들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헨리 4세의 위기를 끊임없이 '내우외환'을 불러일으키는 '전쟁광'과도 같은 권력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 할은 반기를 든채 할은 저잣거리에 침잠한다.
하지만 첫 번 째 왕자인 그를 '권력'은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공연하게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거라 공언하지만, 그를 대신해 핫스퍼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간 동생은 그가 나서서 아버지의 부질없는 '정쟁'에 제물이 되지 말라며 핫스퍼를 제거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거듭하다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를 찾아온 대법관 윌리엄이 아버지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며 간곡하지만, 젊은 청년의 영웅심과 의협심, 그리고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설득을 하자 왕궁을 찾는다.
그리고 왕이 된 청년, 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치적 사안에 보다 신중하려 하지만 아직 어린 왕을 둘러싼 정국은 그로 하여금 애초에 아버지와 다른 왕이 되고자 했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을 다시 전쟁터로 내몰지 않고자 했던 그의 신념을 자꾸만 시험에 들게 한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래서 그가 죽였던 핫스퍼가 반란을 일으켰던 원인이 된 그의 사촌이 풀려날 수 있도록 지불도 하는 등 가급적 국민적 부담을 덜려하지만 정작 복병은 오랫동안 '해원'의 관계였던 프랑스로부터 시작된다. 왕의 즉위식에서 부터 그에 대한 조롱을 일삼던 프랑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암살'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그의 존재를 위협한다. 아니 시작은 프랑스지만 왕자 시절 방탕하다 하여 귀족들에게 일찌감치 눈 밖에 나버렸던 그의 행보, 즉 신하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지 못한 그의 불안한 '존재론적 정당성'이 그로 하여금 믿을 수 없는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른다.
권력은 죽음을 먹고 자란다 전쟁에 나서기 전 그는 두 가지 일을 한다. 굳이 멀리 덴마크로 시집을 간 동생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주변에, 그가 왕자 시절 그의 토한 오물까지 거둬준 오랜 벗 존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즉위식에서 어린 시절부터 친하다며 자신에게 온 선물까지 나눠줬던,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울 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사촌 등을 '암살' 사건을 빌미로 처형한다. 측근과 숙청, 그렇게 젊은 왕은 조금씩 권력을 다져나간다.
프랑스와의 전장에서도 시험을 계속된다. 전쟁이라는 공간에서 군사들이, 그리고 전쟁 비용을 낸 성직자와 귀족들이 바라는 전쟁, 그리고 항복은 커녕 나타나 조롱을 일삼는 적국의 왕자, 그런 유혹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군사적 피해를 줄이려 헨리 5세는 고뇌한다.
비록 큰 싸움없이 첫 번째 격전지가 될 곳의 성문을 열었지만 그 이후의 원정은 길고 지리했으며 이렇다할 싸움 한번 없이 계속된 행군은 영국군을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친 프랑스군, 긴 원정 끝에 수가 줄어든 영국군은 상대로 되지 않을 만큼 장비를 갖춘 대군이다. 당연히 장군들은 '항복'을 권하고, 하지만 여기서 항복은 그저 한번의 싸움을 지는 것이 아니라 헨리 5세라는 젊은 왕의 존재 자체를 흔들 위기다.
결국 그 유명한 영국군을 승리로 이끈 '아쟁쿠르' 전투는 영화 속에서 할이던 시절의, 그리고 왕이 된 지금도 그의 유일한 벗 존의 기지로 진흙밭같은 전장에서 갑옷을 벗어던진 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을 탄 프랑스 병사를 상대로 백병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한다.
너희 한 명, 한 명이 잉글랜드고, 이 곳이 잉글랜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잉글랜드를 위해서 싸워라. 너희의 것으로 만들어라. 잉글랜드로 만들어라.
우리는 모두 전우다, 형제다 라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는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는 거짓일 지도 모를 '독려사'로 영국군 앞에서 포효한다. 그리고 그 왕의 말이 끝나자 군인들은 전장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승리를 얻는다. 왕의 벗 존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의 희생을 안고.
자신의 왕좌를 위협할 지도 모를 사촌 등을 죽이고 길을 떠난 왕은 이제 자신들의 군대보다도 훨씬 더 많은 프랑스군 포로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고 죽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죽은 자들의 무기를 들고 언제든 다시 영국군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란 명목으로. 그리고 그렇게 가장 아끼던 벗마저 잃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왕은 이제야 비로소 신료들을 비롯한 국민적 환호성을 받는다. 하지만 뒤늦게서야 안다. 그가 벌였던 저 환호성을 얻고자 벌인 전쟁이, 수많은 희생이, 애초에 '조작된 위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젊은 왕 헨리 5세의 고뇌 영화 <더 킹; 헨리 5세> 속 왕이 된 소년은 흡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며 고뇌하던 청년 <햄릿>과도 같다. 자신의 아비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했을 지도 모를 부정한 권력 숙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자신의 영혼에 고뇌했던 청년은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왕궁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을 관철시키려, 그리고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고뇌한다.
하지만 햄릿이 자신을 던져 '복수'와 '부정한 권력'을 징벌하려 했듯이, 헨리 5세의 왕좌는 '피'를 통해 권위를 얻는다. 영화 속에서는 아쟁쿠르 전투의 엄청난 프랑스인 포로를 다 죽인 걸로 나오지만,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시 가는 곳곳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그곳 사람들을 '학살'한 무자비한 왕이었다. 그리고 백년전쟁의 서막이었던 아쟁쿠르의 영광은 그런 헨리 5세의 잔혹한 정벌은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영국에 대한 복수심을 불러일으켜 이후 '잔댜르크'의 등장을 낳는다.
영화에서 헨리 5세는 가장 친한 벗 존을 프랑스 원정을 통해 잃는다. 이 '존'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헨리 5세>에서는 피스톨이란 사내로 그려진다. 왕과 함께 방탕한 시절을 보내던 피스톨은 결혼한 아내를 두고 왕의 전장에 나선다. 전쟁은 승리를 얻었지만 남편이 전쟁에 나간 동안 그만 아내는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승리한 전쟁, 그러나 정작 그 전쟁에 참여한 병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라고 피스톨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묻는 듯하다.
<더 킹; 헨리 5세>를 통해 미소년 젊은 왕을 통해 '권력'의 쟁취가 의미하는가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상을 가졌지만 그의 이상은 권력의 놀음 앞에 순진했고, 그가 원하지 않았던 백성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서야 신하와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권력' 말이다. 그렇게 소년은 아버지같은 벗을 잃고, 그리고 아버지같은 후견인이던 윌리엄을 그 스스로 죽이고,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고서야 왕으로의 인정을 얻는다.
남자와 여자, 그 '커플'의 이야기가 드라마 스페셜에서 빠질 수 없다. 올해도 변함없다. 하지만, 저마다의 삶을 짖누르는 무게가 가일층 극심해진 시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젠더의 관계보다, 세상에 맞서는 '동지'로 손을 맞잡는다. 바로 <사교-땐스의 이해>와 <때빼고 광내고>이다.
<사교- 땐스의 이해> - 꼭 남자만 여자를 들어올리란 법이 어디 있어! 언젠가부터 대학 생활은 두 단어로 정의되어 버렸다. '인싸'와 '아싸',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거나, 그게 아니면 올곧이 '개인'으로 그 어떤 곳에도 '소속'됨이 없이 학교 생활을 스스로 감내한다. 바로 이 극와 극의 성향을 가진 '인싸'와 '아싸'가 본의 아니게(?) 만났다.
병현(안승균 분)이는 자타공인 인싸다. 늘 만나는 사람마다 밝은 얼굴로 안부를 묻고 과의 일정을 홍보하는 인싸 중에서도 이른바 핵인싸. 이미 경영대 학생 대표를 맡고 있는 그이지만 그 어떤 수업 시간이라도 학생을 대표할 그 누군가를 뽑는 자리에서 선뜻 손을 든다.
반면, 수지(신도현 분)는 오늘도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저어'하면 하루 일과를 보낸다. 자신의 이름이 혹시나 불러질까 두려워하고, 점심 시간 도시락도 혼자 화장실 한 칸에서 꾸역꾸역 해결해야 하는 '아싸' 라기에도 과하다 싶을 만큼 '대인 기피'의 수준이다.
이렇게 핵인싸와 대인기피 아싸 병현과 수지가 각자의 사정으로 '사교-땐스의 이해'라는 과목에서 만났다. 심지어 시험 대신 함께 춤을 추어야 하는 커플 추첨에서 두 사람은 커플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두 사람의 신장이다.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수지는 보통의 여성들보다 훤칠하고, 병현이는 경영대 GD라는 별명처럼 깔창을 몇 개나 깔아 자존심을 챙기는 처지다. 신체적 컴플렉스, 하지만 그 '외양'은 그저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두 사람의 '존재'를 규정한다.
남들보다 작은 키로 인해 고등학교 시절 위축됐었던 병현이는 지금도 우유는 먹지 않을 정도로 키가 작다 억지로 우유를 쏟아붓는 등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었다. 수지 역시 남들보다 훤칠한 키로 인해 모처럼 잘 차려입고 나간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병현이와 얽힌 악연으로 인해 대학 내내 그림자 같은 '아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두 사람을 얽어매는 각자의 컴플렉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규정'되어 있는 사교 댄스는 키가 작은 병현이와 키가 큰 수지가 함께 하기에는 '난감'하다.
드라마는 키가 너무 커서 아싸가 된 여자와 키가 너무 작아 그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인싸가 된 남자를 커플로 조우하게 한다. 그리고 그걸 통해 우리 사회 젊은이들을 얽어매는 세상사의 '기준'들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당연히 인싸라 밝고 자신감이 넘칠 것같았던 병현이, 아싸라 그저 도망가기만 할거 같은 수지, 하지만 인싸니 아싸니를 넘어,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넘어 두 사람은 키가 크고 작음을 떠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으로 인해 고통받는 상대방을 공감하며 위로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때 함께 서로의 손을 잡는다. 이 절묘한 조우, 이제 그들이 추는 춤은 지금까지 '사교 댄스'라는 이름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었던 그 춤과는 격이 다른 춤이다.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을 넘어선 서로 위로간 된 커플의 한 판 땐스, 주제와 형식의 기가 막힌 조합이다.
<때빼고 광내고> - 내가 원했던 꿈은 아니지만 돈도 벌고 사건도 해결하고 여기 또 다른 커플이 있다. 그들 역시 사교 땐스 수업에서 만난 병현이와 수지처럼 첫 만남은 악연이다. 시작은 태랑(박은석 분)이다. 만년 취준생, 오늘도 어김없이 또 떨어졌다. 질문을 잠시 놓친 자신에게 무례한 말을 퍼붓는 면접관에게 예의 결벽증으로 당신도 깔끔하지는 못하다고 대거리를 하고 나왔으나 마음이 편할 리가. 바로 그 때 어릴 적 동네 옆집 형 영배(임지규 분)에게서 연락이 온다.
형을 따라 나선 접대 자리에서 만난 대기업 임원은 태랑이 죽은 자기 아들과 닮았다며 관심을 보이고 그 관심은 영배 형을 통한 취업 알선, 아니 취업 사기로 이어진다. 휴일도 없이 미용사로 일하며 번 돈을 기꺼이 아들의 취업을 위해 내준 어머니의 금쪽같은 돈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당연히 그 대기업 임원이 꼿아주었다는 자리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믿던 형도 잃고, 직장도 잃고, 돈도 잃은 태랑은 며칠전 다짜고짜 그를 찾아와 자신과 함께 일해 보자던 안나(나혜미 분)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그가 직장에 다니는 줄 아는 어머님을 위해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태랑이 정리 결벽증이 맘에 든다며 '스카웃'한 안나의 범죄현장 청소 업체에 함께 울며 겨자먹기로 함께 하기로 한다.
경찰고시만 붙었다면 지금쯤은 범죄 현장을 누빌 것이라며 범죄 현장에 흥건한 피 쯤이야 암껏도 아닌 안나와 그녀가 다짜고짜 집으로 쳐들어와 본 면접에서 합격점을 받은 취업사기당한 깔끔 청년 태랑은 이름조차도 생소한 범죄 현장 청소 업체의 사장과 직원으로 호흡을 맞춘다.
한때는 취준생이던 두 사람이 본의 아니게 하게 된 범죄 현장 청소 과정에서 발견한 돈 봉투, 그 돈봉투를 통해 태랑은 자신처럼 마지막 동앗줄이라 잡은 게 그만 취업 사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지후(병현 분)를 만나고, 안나와 함께 지후를 죽음으로 몰아간 취업 사기 사건에 뛰어든다.
만년 취준생이라는 답답한 현실을 범죄 현장 청소라는 기발한 직업을 통해 풀어간 이야기, 출판사 편집주가 범죄 현장을 닦는 청소로 변했지만 그 달라진 꿈만큼 이시대 젊은이들을 억누른 현실에 대한 진폭의 궤도를 달리한다. 현실에서 길어올린 기발한 소재, 하지만 그저 가볍지만은 상상력의 조합은 궤도 위에서 막연한 젊음을 역설적으로 위로한다.
장장 5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한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6부작이 만들어진 시간이다. 1,2부 진화 심리학적으로 '증오'의 기원을 추적했던 다큐는 '증오'가 진화의 결과로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정서적 기제'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그 '내재되어 있는' 증오의 문을 열어제치는 건 무엇일까? <3부,증오를 부추기는 기술>은 바로 그 '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열려진 문'은 봇물처럼 증오를 키워 '극단주의'까지 흘러넘친다. 바로 <4부, 증오의 극단주의>이다.
3부. 증오를 부추기는 기술 - 누가 증오를 부추기는가? 에돌아 갈 것도 없다.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젤라니 콥은 오늘날 사람들을 부추겨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주범으로 '카리스마적인 리더와 언론'을 손꼽는다. 특히 중립적 사실 보도를 사명으로 했던 '언론'은 이제 그 어떤 단체보다도 당파적이며 편향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극단적인 대립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리더와 언론의 선전, 선동은 사람들에게 편향적 시각을 갖게하는 걸 넘어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우려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94년 무려 백만 명이 살해당한 르완다 학살이다. 벨기에는 르완다를 식민 지배하며 소 10마리 소유를 기준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을 나눴다. 15%의 소수 투치족이 85%의 다수 후투족을 지배하며 반목을 거듭, 시간이 흐르며 이들은 서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후투족 언론, 그 중에서도 친정부적 어용 언론이었던 '캉구라'는 투치족을 마치 '바이러스'처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반투치 선전'에 열을 올렸다. 문맹자가 많았던 르완다에서 영향력이 컸던 라디오 방송국은 더했다. 투치족을 인간이 아니니 죽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며 '바퀴벌레 소탕작전'이라 부추겼다. 더구나, 지주 계급이었던 투치족을 죽이면 그들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그러니 더 많이 죽여 더 많은 땅을 가지라 선동했다.
이렇게 언론과 방송을 통한 지속적인 선동, 거기에 투치족은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아이들과 노예들을 죽였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후투족 사람들은 투치족을 상대로 싸우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자신들이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거라는 '공포'를 내재화 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선전의 '핵심'은 '비인간화'이다. 유대인들에 대해 지하에 들끓는 쥐떼와 같다고 했던 나치처럼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며 박멸해야 할 존재로 치부했다. 공격해서 죽이는 게 당연한 것이라며 대량 학살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은 선전과 선동은 사회적 인지 능력인 공감 기능을 관장하는 내측 전전두엽 피질의 활동을 떨어뜨린다.
인간의 진화 과정을 도표로 만들어 놓고 미국에서 342명에게 조사를 했다. 질문에 답한 미국인들 거의 대부분이 자신이 진화의 최종 단계인 100%라 답했다. 반면 이민자인 멕시칸들은 75% 정도 밖에 진화되지 못한 존재라 여겼다. 유럽인도 마찬가지다. 무슬림에 대해 60%라, 즉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가 간주했다.
문제는 이러한 비상식적인 편견이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찰스턴 감리교회에 들어가 성경 공부 모임을 하던 흑인들을 총기로 난사한 빌런 도프. 그는 흑인들이 매일 백인을 죽이고 백인 여자를 성폭행하고 있다는 가짜 뉴스를 인터넷을 통해 '습득'했다.
백인에 대한 흑인들 범죄를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빌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사이트는 '보수 시민 위원회'라는 백인 우월주의 선전 사이트였다. 문제는 이 사이트가 '사실'에 근거한 검색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을 더 내면 상위에 링크시켜주는 구글의 상업적 알고리즘의 결과였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하여 취득하는 '사실'처럼, 이들 사이트에 대한 '사실적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구글'등의 검색 사이트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증오'를 퍼뜨린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며 사람들은 예외적인 일탈로 여기지만 다큐는 바로 그런 인간의 '증오'에 기반한 대량 학살에 이르는 행동은 인간 역사가 가진 오랜 전통의 산물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은 인간이 가진 이 전통이 산물을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기꺼이 이용한다는 것도.
지난 2018년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재선 가도에서 떨어지는 지지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반난민 정책'을 자신의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외국인 침략자가 몰려오고 있다'며 유세 내내 공포를 부추겼고, 바로 자신이 맞서 싸울 적임자라, 헝가리를 지킬 수 있다며 '증오'를 불지르며 '대중 영합적 민족주의 운동'을 조장했던 빅토르는 결국 재선에 성공했고, '반난민, 반EU' 정책을 앞세워 4선까지 기세를 몰아붙였다.
4부. 증오의 극단주의 - 결국 리더의 조종이다 바로 이러한 '증오'의 분위기 속에 '극단주의', 그리고 급진화된 개인이 탄생한다. 필라델피아 빈민가 출신의 청년 프랭크는 1971년 '백인 우월주의 스킨헤드'가 되었다. 다. 나치 깃발을들고 자신들이 유대인의 희생양이라 여기던 집단에서 가족과도 같은 소속감을 느꼈다. 미국이 유대인에 의해 소돔과도 같이 타락했다며 행동에 나선 그는 총기 판매, 조직원 납치 감금을 일삼다 17살에 구속되어 3년 형을 살게 되었다.
학대받던 가정에서 16살에 도망쳐 나온 제시 모틀은 말콤 X의 자서전을 읽고 이스람교로 개종했다. 유누스 압둘라 무함마드로 개명한 그는 살라피 자하디즘에 헌신, 오사마 빈라덴을 지지하며 알카에다 조직원을 모집하여 보냈다.
극단주의 전문가인 샤샤 하블리첵은 백인 우월주의건, 극단주의 이슬람이건 다 똑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세계적에서 조직적으로 부상되고 있는 극단주의 단체 이들의 1차적 목표는 편가르기이다.
1971년 필립 짐바르도 교수에 의한 유명한 지하 감독 실험이 있다.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니 편과 내 편을 나누고 이들을 죄수와 간수로 분하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간수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잔인해졌다. 쇠사슬로 죄수를 묶는가 하면, 변기 청소를 시키고 기합을 하는 등 가혹 행위까지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은 자연스럽게 맡겨진 역할에,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게 되는 것일까는 의문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비밀'이 있었다. 2001년 BBC에서 일반 대중 15명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한 것이다. 간수로 뽑힌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감옥을 운영하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1971년과 달리 간수들은 가혹 행위는 커녕 자신이 간수가 되어 죄수를 통제하는 상황을 싫어했다.
그리고 1971년 실험에는 실험의 배후 짐바르도 교수가 간수들의 가혹 행위를 '조장'했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들이 간수건, 죄수건 주어진 역할에 무조건 충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극단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가는데에는 '리더의 지시'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이 '리더의 지시'를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이라크 전 당시 잔혹 행위가 발생했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사례이다.
2008년 오바마가 당선된 이후 증가한 백인 우월주의, 이에 트럼프는 '나는 당신들과 같다'며 이를 부추겼다. 위험을 필요이상으로 부풀리고 행위에 대한 칭찬과 보상을 약속하며 거기에 그럴싸한 대의명분까지 더해지면, 상황에 던져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같이 되면서 극단주의적 행동을 서슴치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포 정치를 이용한 정치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엄격한 법'일까? 이에 대해 한때 스킨 헤드족이었던 프랭크는 회의적이다. 그를 구속했던 법도, 그가 거리에 나설 때마다 그에게 퍼부어지던 욕도 그를 바꾸진 못했다. 외려 그를 바꾼 건 나치 문신과 스킨 헤드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었으며 그의 일탈을 견뎌준 유대인 상점 주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제시를 변화시킨 건, 그가 조직원들을 알카에다로 보냈던 모로코에서였다. 그가 미국에서 당연히 누리던 것들, 언론의 자유라던가 하는 것을 위해 모로코 사람들이 목숨까지 걸며 싸우는 것을 본 제시는 지금까지 그가 투쟁했던 '극단주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모든 프랭크에게, 제시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 바로 우리 인간 사회의 비극, 그 악순환을 낳는다.
시각장애인 이동우, 절단 장애인 신명진, 뇌병변 편마비 김종민, 청각 장애 김예진, 시각 장애 김민우, 이들이 한 스튜디오에 모였다. 이 스튜디오에서 그들을 부르는 명칭은 '별일없이 사는 이웃', 별 일없이 산다는 이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토크쇼가 있다. 매주 월요일 밤 11시 35분 찾아오는 ebs1의 <별일없이 산다> 이다.
mc 조우종과 함께 장애우, 비장애우가 '이웃'이란 호칭으로 모여 지난 9월부터 11월 11일까지 8회차에 걸쳐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들리지 않는 이를 위해서는 '수화' 통역사의 도움이 더해지고, 보이지 않는 이를 위해서는 옆 이웃의 친절한 해설이 곁들인다. 어색할 거 같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장애'의 벽이란 것이 막상 함께 하면 조금 에돌아 갈 뿐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시간 바로 <별일 없이 산다>이다.
빅 데이터에서 '부질없다, 감동하다. 정확하다. 사랑, 설레다, 고맙다.' 등의 단어로 등장한 11월 11일 8회차의 주제는 바로 '결혼'이다. 장애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도 결혼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하는 시대. 취업도 하기 힘들고 취업을 해도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들다고 하는 시대에 젊은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과정의 버거움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스튜디오에 모인 '별일 없이 사는 이웃'들은 어땠을까?
결혼은 미친 짓이다? 뇌병변 편마비 김종민 감독은 결혼은 미쳐야 하는 것같다고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그런 이 시대 상식적인 단정에 8백만을 꿈꾸지만 현실은 8백명 구독자를 가진 유투브 크리에이터 시각 장애인 김민우 씨는 미쳐서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물들어 가다보니 결혼을 꿈꾸게 되는 것이라 '낭만적'인 반기를 든다.
스다르가르트 병이라는 희귀 유전병 때문에 암점이 점점 커져 시력을 잃게 된 김민우 씨는 컴퓨터 화면의 글씨를 최대로 확대해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이 남아있다. 안마사를 했었고 지금은 시각 장애인 골볼 선수인 그는 그의 전담 카메라맨이자 그가 하는 골볼 심판이 되어 그를 전담 마크하는 아내 한지혜 씨와 8개월 째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다.
정상인인 이상미 씨도 막상 하려보니 희말라야 등반을 하는 마음이라는 하소연을 하는 극한 미션 결혼, 하지만 한지혜 씨는 김민우 씨와의 신혼 생활에 대해 정상인들이 10 할 수 있는 걸 4나 5해줘서 서로 갈증하게 되는 결혼 생활에 대해 정상인에 비해 겨우 6가지 밖에 해줄 수 없지만 그 6가지에 최선을 다하는 김민우 씨와의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첫 눈에 반했지만 쉽지 않았단다. 시각 장애인, 더구나 유전병이었기에 친구, 가족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 중증 절단 장애인인 신명진 씨 역시 자신과 같은 동료 사서였던 8년 연하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까지는 달콤했지만 막상 상견레 자리에 가니 아내 부모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는 경험담을 나눈다. 같은 청각 장애인이라지만 나라마다 수어가 달라 국제 수어로 사랑을 나누어 모로코인 칼리드와 결혼에 이르렀다는 김예진 씨는 이제 두 살배기 아들의 재롱에 한참 빠져있다고 고백한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 순간, 결혼은 필수가 된다는 이웃들, 가족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선택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가족이 바로 배우자라고 말하는 그들의 결혼은 마흔 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하다 결혼 이후 '사랑의 인사', '위풍당당 행진곡' 등 수려한 명곡을 탄생시킨 작곡가 엘가의 사례와도 같다.
결혼에 대한 비관주의가 지배한 세상에서 <별일 없이 산다> 속 결혼 이야기는 마치 편견이 가득찬 세상에서 '낙관주의'가 가득한 별일 없는 이웃들을 지향하는 <별일 없이 산다>의 정서를 이어간다. 마치 장기하가 부른 동명의 노래 제목처럼 말이다.
물론 그들은 웃으며 말하지만 유전병을 이기고 결혼에 이른 김민우 씨 부부와, 장모님 앞에서 자신의 장애로 인해 한없이 부끄러웠던 위기를 극복한 신명진 씨의 웃음은 마치 가을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난 가을꽃처럼 강인한 사랑의 의지가 읽힌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친구의 생생한 고민을 취재하는 코너에서 뇌병변 편마비 감독 김종민의 결혼하고 싶은 고민을 다루었지만 어쩐지 그 고민의 결이 다가오지 못한다. 조금 더 현실로 한 발 들어가 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이 시대 청춘들이 결혼에 대해 가장 큰 짐으로 여기는 건 바로 경제적인 문제이다. 그런 현실적인 고민들을 담아내 보면 어땠을까? 보고 있으면 궁금해 지는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김예진 씨 부부는, 번듯한 아파트에 사는 김민우 씨 부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지, 막상 사랑으로 결혼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이다. 이미 성공적으로 사랑의 성취를 이룬 부부들이 나와 아침 방송 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니 결혼에 성공했어가 아니라, 장애만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이렇게 극복했어라든가, 아니면 결혼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쳐 있는 싱글 이웃이라든가,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다른 입장의 이웃들의 의견도 같이 함께 하는 자리였으면 별일 없이 사는 이야기의 내용이 좀 더 풍성해 졌을 것같다. 그저 낭만적인 결혼 성공의 후일담 식으로 전개된 <별일 없이 산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장애우 결혼 캠페인 프로그램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장기하가 그의 노래에세 별일 없이 산다고 하는 건, 정말 별일이 없어서가 아니지 않았을까? 별일이 만연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하루하루 즐겁고 재밌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발 뻗고 잘 수 있다는 것이었을진대, 그런 진짜 별일 없이 살 수 있는 '현실적 공감'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조선 건국,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 그리고 광해군, 인조 반정 등은 이미 사극으로 숱하게 만들어진 역사적 소재들이다.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가의 말처럼, 사극은 오늘에 발을 붙이고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 새롭게 '각색'한다. 바로 '조선 건국'과, '광해군' 시절의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다. 누가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역사 속 인물들은 때로는 영웅이 되고, 때로는 악의 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2019년 가을에 찾아온 이 '역사'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씌여진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름을 가진 역사 속에서 상상력의 힘으로 탄생한 아들들은 '아비'의 나라라는 숙명에 맞서 싸운다.
아버지와 아들, 그 애증의 관계 <나의 나라>는 고려 말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성계 부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극중 이성계로 분한 김영철과 그의 다섯 번째 아들인 장혁이 분한 이방원은 그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사극과 달리 주인공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 개국과 그 이후 다시 벌어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는 바로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의 '부자의 애증' 관계가 놓여있다.
'애썼다', 그 한 마디면 됐을 거라는 이방원, 하지만 아비인 이성계는 자신과 함께 조선을 건국한 동지이자, 아들 중 가장 특출났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을 끊임없이 견제했을 뿐이다. 심지어 이제 왕좌를 이어받기에 차고도 넘치는 아들들을 두고 후처로 맞이한 선덕왕후 강씨에게서 난 어린 왕자 방석을 후계자로 삼았다. 결국 이런 이성계의 결정은 아버지의 신임을 얻지 못한 방원이 스스로 왕좌를 찬탈해 가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초래하고야 만다.
이렇게 이성계와 이방원의 엇갈리는 부자의 애증 관계가 드라마의 씨실이 된다면, 그 씨실의 결을 채워가는 건 또 다른 부자의 애증관계이다. 바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앞장선 남전, 안내상이 분한 남전은 정도전과 남온을 합친 듯한 가상의 인물이다. 일찌기 고려의 실력자였고, 이제 조선의 건국에 앞장선 개국 공신, 그런 그의 위세 앞에 그림자 속에 숨어든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들 남선호(우도환 분)이다. 하지만 그는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없는 노비의 아들인 '서얼'이다. 적자인 형이 물에 빠져죽자 니가 죽었어야 했다는 모진 말을 들으며 자란 남선호는 세상에 보란듯이 '입신양명'하여 아버지 남전 앞에 당당하고 떳떳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과 시험에서도, 요동 정벌에서도 늘 운명의 고비에서 '인정'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그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아비의 주군인 이성계에게 중용이 되었지만, 남선호는 결국 깨닫고 만다. 아비인 남전에게 자신은 그저 '권력'을 위한 수단이었음을,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주었던 연이의 죽음 앞에 선호는 이제 더는 아비의 '개'가 되지 않겠다 결심한다. 아비의 추악한 뒷모습을 남김없이 확인하고나서야 비로소 아비에게서 자유로워지려한 아들, 하지만, 그 결심은 이미 늦었다. 그가 어찌해보기도 전에, 자식보다 '권력'을 탐한 아비는 가 그 '권력'의 칼날 앞에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인 서휘(양세종 분)는 아버지가 없다. 이성계의 오른 팔이었던 서휘의 아버지 서검은 우연히 알게된 비밀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아내기 위해 사선을 넘나드는 서휘, 동생을 살리기 위해 남전의 첩자가 되었고, 이방원의 칼날 앞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시련 속에서 다듬어진 서휘의 기지는 이방원의 눈에 들었고, 서검의 아들은 그를 죽음의 끝에서 건져낸다. 아비가 없었지만 적과 내 편을 알 수 없는 정쟁 속에서 어느덧 '부자'와 같은 돈독한 믿음을 가지게 된 이방원과 서휘, 불신의 부자 관계들 속에서 외려 이 '의사 부자' 관계의 믿음이 결국 역사적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서 <나의 나라>를 주목할 관전 포인트이다.
아들을 죽여야 사는 아비 광해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소생을 얻지 못한 채 공빈 김씨 등에게서 임해군, 광해군 등 13명의 아들과 10명의 딸 본 선조, 그 자신이 후사 없이 죽은 명종의 대를 이었던 조선 최초 방계 혈통의 왕이었던 만큼 정실에 의한 왕가의 계승을 중요시여겼다. 그래서 그의 나이 51세, 선조 자신이 19살인 인목왕후를 정비로 들였다.
하지만 이미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버리고 '파천'을 벌이는 등 권위가 떨어진 선조와 달리, 문제가 많았던 임해군 대신 세자가 된 광해군이 신하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kbs2의 <녹두전>은 바로 이런 선조와 광해군이 가진 부자의 갈등 관계를 불러온다. 임진왜란이라는 위급한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선조는, 그 광해군 대신 광해군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책봉하겠다고 했다는 역사적 상상력을 덧댄 것이다.
이미 세자로서 전장을 누비며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왕이 될 날만을 고대하던 광해군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였고, 결국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차마 갓난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 왕의 벗이자 충직한 신하였던 정윤저(이승준 분)는 허윤의 묵인 아래 외딴 섬으로 가 왕의 아들인 녹두를 자신의 아들인 양 키운다.
그러나 좁혀져 오는 왕의 의심을 피해 녹두를 없애려는 허윤의 피습은 외려 녹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찾아 한양을 찾는 계기가 된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이 과부촌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과부가 되는 여장을 해서라도 존재의 진실에 다가가려 한 녹두는 결국 자신이 왕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조금 더 왕의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 무과에 응시하고 녹두가 자신의 아들인 줄 모르고 광해군을 그를 급제를 시켜 자신의 곁에 둔다.
한편 일찌기 아버지로 부터 시작하여 늘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 없었던 광해는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고, 아버지가 후사로 삼으려 했던 영창조차 궁에서 쫓아낸다. 그런데 이제 죽였던 아들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벗인 허윤조차 한 칼에 베어버리는 폭주를 하는 광해, 그런가 하면 정작 가장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훝날 인조 반정의 주인 율무, 그리고 광해군의 곁에서 그가 가장 믿을 만한 무관이 되어 아비의 폭거를 지켜보게 되는 녹두, 광해군의 운명이야 이미 역사적으로 판명난 것이지만 역사적 상상력으로 덧댄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 광해의 아들은, 죽여야 했던 자신의 아들을 알게된 광해는 과연 어떤 운명을 선택할 것인가. 이 부자 관계의 행보가 궁금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광장이 뜨거웠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으로 대립한 사람들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 만족치 않고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그저 의견이 다르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극명하게 서로에 대해 '증오'에 가득한 말 폭탄을 쏟아놓는 시절, 과연 이런 '대결'의 현실이 '봉합'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당사자들은 '봉합'이 아니라 자신들의 '옳은' 의견을 '정리'되어야 한다고 '단언'할 것인다. 문제는 그 '대결'의 양자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대립, 궁하면 돌아가라는 '선인'들의 지혜를 빌려봐야 하나. kbs1이 그 지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한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시리즈이다. 11월 5일과 6일에 걸쳐 방영된 1,2부는 '증오', 그 기원의 진화론적, 사회사적 의미를 파헤쳐본다.
증오의 기원 진화심리학자 브라이언 헤어와 함께 탐구한 1부 증오의 기원, 다큐는 '증오'는 인간의 본성인가?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과 유전자가 99% 일치한다는 보노보와 침팬지, 하지만 이 두 종은 친화적인 암컷 지배와 공격적인 수컷 지배로 전혀 다른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다큐는 지리적 원인에서 찾아본다. 기원전 6백만년 전에 콩고강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두 동물군, 먹이 걱정이 없는 보노보가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공동체를 꾸린 반면, 한정된 먹이를 두고 경쟁을 해야 했던 침팬지는 다른 무리에 적대적인, 심지어 자식들이 많다고 여겨지면 어린 침팬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공격적 성향이 높은 무리가 되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먹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자연적 환경에서 동물들의 '증오'가 싹텄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친화적이며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 보여주는 적대적인 모습은 인간이야말로 가장 증오가 가득한 생명체임을 유감없이 증명해 낸다. 특히 인간이 '증오'를 표명하는 방식 가운데 '집단 따돌림'은 빈번하게 보여진다.
10대의 왕따 현상을 살펴보면 따돌리는 아이들이 비주류라는 기존의 선입견과 달리 가해자들은 비주류도 아니고 따돌림은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외려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인기있는 부류들이 하는 보편적인 행태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에게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공평함'이다. 불공평한 상황에 대해 인간은 그걸 학대나 위협이라 여기며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서 벌어지는 학교 등 집단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복수인 총격 사건, 성장하는 과정에서자신이 세상에 기대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기억이 분노를 키우고, 이런 분노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 응원을 받으며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는 등 용의주도한 준비 끝에 '폭발'한다. 또한 특정하고 제한적인 세계관의 경험이 증오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동성애 반대 시위로 유명한 미국의 원리주의 침례교 단체에서 보여지듯 스스로 내몬 '수난'으로 인해 신념은 강화된다.친족 관계로 얽혀진 이 단체에서의 탈퇴는 마치 팔다리가 잘린 채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에 던져지는 공포감을 느끼기에 쉽사리 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증오는 유전적인 소인을 가지고 사회적 배제를 통해 증폭되며, 자신이 소속된 집단적 정서로 인해 '폭력'의 정서를 수용하게 만든다.
편가르기의 기원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집단을 미워할까? 인간은 편가리기를 좋아한다. 종교, 인종, 정치 성향을 근거로 사람을 분류하고 나랑 다르구나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편을 '극단적'으로 응원한다.
이 원인을 인지 과학자 로리 산토스는 '부족주의(tribalism- 부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힘을 과시하는 현상)에서 찾는다. 1950년대 사회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오클라호마에서 15살 소년들을 모아놓고 가짜 야영 캠프 실험을 했다. 가상의 시합을 한다고 편을 가르게 된 소년들은 급기야 기를 불태우고 야영지를 습격하는 등 상대집단을 괴롭히는 등 경쟁이 과열되는 행동의 변화를 보였다.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그의 성격이 아니라 직장, 가정, 지역 사회 등 이른바 그가 속한 '부족'에게서 영향을 받게됨이 증명된다. 더구나 경쟁을 벌어야 하는 상황은 집단간의 증오심을 발동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바로 특정 지역을 연고로 한 스포츠 팬들의 강한 충성심이다. 진화한 형태의 전쟁이라 정의내려진 스포츠는 승리, 전리품인 트로피 등의 전쟁의 상징적 요소들을 가지고 특별한 유대감으로 결속하게 된다. 그냥 밉다는 상대 편, 이렇게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 정체성에 완전히 녹아드는 극단적 유대 관계가 바로 정체성 융합'이다.
옆의 팬이 공격당하면 마치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느끼고, 축구가 아니라 동료 팬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폭력'적이 되는 상황, 개인들은 적극적으로 집단을 보호하고 방어하며 마치 각자가 최전방에서 싸우는 전우처럼 서로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 된다. 이런 폭력적 편가르기는 과거 부족사회에서 구성원들의 단결이 곧 생존을 보장했던,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심리 기제에서 비롯된다.
이런 정체성 융합에 기반한 '부족주의'가 스포츠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에서도 극단적으로 존재 양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진보적 민주당원과 보수적 공화당원은 서로 자기 쪽만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 진영을 '악'이라 규정하며 증오한다. 심리적 매커니즘은 스포츠 부족주의와 동일하지만 그 신념과 윤리적 강도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훨씬 더 심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 관계망을 파괴하고 있는 것, 성향이 다르면 가족이라도 함께하지 않으며, 타인종보다도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과 사귀는 걸 꺼려할 정도로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을까? 앞서 종교적 극단주의 단체가 친족에 기반하듯, 미국내 보수와 진보적 입장은 대다수 부모와 지역으로 부터 비롯된 환경적, 문화적 요인이 결정적이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유전적 요소는 강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마치 우리의 지역 감정처럼.
집단만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객관적 사실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 취임식에 모인 군중이 오바마에 비해 적었음에도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은 편견으로 이를 왜곡하여 '가짜 뉴스'를 만드는 지경에 이른다.
증오의 도구가 된 기술의 발달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인터넷, 블로그 등의 기술의 변화는 이런 양극화 심화를 완화시키기는 커녕 외려 조장하고 있다. 부족주의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언론 매체는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좀 더 자극적이고 신랄하게 전달하여 수익을 올린다.
페북 등 사용자가 집단 안에서 위안과 안전함을 느끼도록 패러다임이 짜여진 각종 소셜 미디어는 생각이 다른 팔로어를 '위협'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교류를 배제하고 내집단 구성원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밀폐된 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거기에 사용자의 관심을 오래 끌 수 있는 콘텐츠를 전달하도록 만든 알고리즘은 분노, 공포같은 부정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콘텐츠를 통해 부족주의를 자극하며 사고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지난 2016년 '모든 무슬림은 극단주의자'라는 생각을 가진 극우 불교 승려 위라투는 무슬림 남성이 불교도 여성을 성폭행하는 '가짜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다. 무슬림이 다수 불교도를 위협한다고 선동하는 이 영상으로 인해 불교도의 폭동이 유발되었고, 2017년 미얀마 서부 무슬림 소수 민족 로힝야족 학살이 초래되었다.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할 페북이 추악한 인간 본성을 품어낸 결과였다.
외부인에 대한 공포와 분보를 선동하는 것만큼 집단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건 없다. 이에 감정 이입을 한 인간들은 같은 종인 다른 인간에게 서슴없이 잔혹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이미 힘의 균형점을 잃은 지 오래지만, 상대가 당한 부당함은 보지 않은 채 각자 자신들이 가진 상흔의 역사에 기반하여 자신들을 '희생자'라 여긴다.
이러한 경쟁적 피해의식은 궁극에 가서 상대편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게 된다.
실제와는 다른 심리적인 상태에 따른 인식은 확증 편향(자신의 신념, 가치관, 판단 따위에만 주목하고 그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지며 정치인들은 이를 부추긴다.
인지 심리학과 진화 심리학에 근거하여 추론해 본 '증오 사회'의 기원, 인간이 아닌 동물 실험과 우리나라가 아닌 타국의 사례들이 등장했지만, 그 '기원'에서 비롯된 '증오'가 만연한 사회는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는 '증오'로 분열되고 폭력적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까? 그 암담한 현상에 대한 희망을 앞서 셰리프의 실험이 전한다. 편을 갈라 싸우던 소년들, 하지만 급수하던 탱크에 돌을 넣어 당장 마실 물이 급해지자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물 구하기' 합동 작전을 벌인다. 이렇듯 보다 긴급한 상위의 목표는 집단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 한때 적이 보다 더 큰 적 앞에서 손을 잡았던 세계 대전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간 집단간의 증오는 얼마든지 바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성냥갑', '닭장', 흔히들 아파트를 낮잡아 부르는 통칭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홍익대 유현준 교수에 따르면 1년 365일 아파트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한 눈에 다 보이는 공간 이러한 공간은 아이들의 뇌세포를 자극할 꺼리가 없다. 그래서 정작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선택한 아파트에서 부모들은 주말이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위해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아파트에 18세 이하 미성년자 가구 중 71.6%가 산다. 마당과 마을과 골목을 잃어버린 아이들, '하우스 딜레마'다.
<sbs스페셜>은 2달에 걸쳐 유현준 교수와 함께 '공간 여행'을 떠난다. 과연 어떤 공간에서 내 아이를 키워야 할까 하는 고민이 그 출발점이다. 성장하는 동안 1층 단독 주택에서 2층 양옥, 그리고 아파트에서 살아봤다는 유현준 교수, 그가 설계를 할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주택이었단다. 그래서 그는 골목이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는 주택가에 대한 예찬론을 펼친다. 불과 500m 이동할 때도 선택 가능한 길이 수십 가지에 이르는 골목은 아이의 기억을 풍성하게 만들고, 이는 곧 아이가 가진 삶의 배터리를 풍성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주택? 도시? 자연? 아이를 위해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서울 주택가에서 수도권의 좀 더 큰 아파트로 큰 맘 먹고 이사한 예서네 집, 하지만 정작 그 집이 짐이 되는 현실에 봉착했다. 무리를 해서 이사한 덕에 엄마는 학습지 선생님을 하게 되었고 퇴근을 해서도 남은 업무 때문에 예서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그래도 엄마는 늦게라도 예서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출퇴근 거리가 멀어진 아빠는 예서를 만날 시간조차 없다. 좋은 아파트라지만 이사를 와서 한결 외로워진 예서, 좁고 복닦거려도 친구들이 있던 다세대 주택가를 그리워한다.
어린 나이에 동화작가로 등단을 한 이수네, 엄마는 이수의 감성을 좀 더 키워주기 위해 인천의 아파트에서 제주로의 이사를 감행했다. 비오는 날 마당에서 하는 물놀이, 아파트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이수의 감성은 폭발했다. 때로는 놀이동산, 공방, 까페로 변신하는 이수에게 우리집은 '변신'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하지만 늘 선택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것만은 아니다.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남해로 이사한 윤슬이네는 딜레마에 빠졌다. 시골이 재미없다는 아이, 벌레가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싶단다. 여유롭고 한적한 것도 잠시 심심해하는 아이를 보며 부모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셋째 임신 사실을 알고 오은주 씨는 장성에 집을 지었다. 가운데 마당이 있는 집, 굳이 주변 이웃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언제든 나와서 편히 쉴 수 있는 마당에 아이들은 층간 소음을 걱정하지 않고 뛰어논다.
목동에 사는 엄마들은 쉽사리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수도권에 자가로 아파트가 있지만 전세로 그 보다 좁은 목동에 살면서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 학군과 교육 여건이 좋은 이곳에서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 있게 된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한다.
이처럼 아파트, 주택, 도시, 자연 등 맹모삼천지교처럼 아이들을 위해 부모들은 최선의 '공간'을 찾아 헤매지만 정답은 없다. 유현준 교수 역시 주택이 답이다가 아니라 직업을 탐방하듯 공간 역시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한다. 같은 공간도 창문 밖에 커튼을 달아 공간을 확장하고, 화분을 놓아 마당처럼 꾸며도 좋다. 아파트라도 자주자주 인테리어를 바꿔 변화를 꾀하며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는 등 얼마든지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실에서 공부를 이런 고민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을 다큐는 제시하고자 한다. 아이들 공부를 위해 집을 놔두고 좋은 학군에서 전세를 사는 우리나라 학부모들, 결국 '교육'이라는 화두로 집결되는 고민을 위해 '거실 학습'이라는 공간 활용 학습법을 제시한다. 물론 기승전 '공부'로 이어지는 해법은 아쉽다. 하지만, 우리 아이의 교육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제는 해외에서 살기까지 감행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거실 공부법'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네 아이를 모두 일본의 명문대인 도쿄대에 보내서 '사토 마마'라 불리우는 사토 료코씨 그런데 그녀의 비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다름아닌 거실 공부법. 아이들을 공부시킬라 하면 우선 방을 주고, 요즘은 방도 부족해서 방 안을 다시 독서실처럼 꾸며주는 우리와는 달리, 그녀는 '공부하는 아이들이 외로우면 안된다'는 소신을 펼친다. 공부는 힘든 것이기에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녀, 자, 이제부터 공부하자가 아니라, 어느 틈에 손에 연필을 들고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는 분위기를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도쿄대생들의 74%가 초등학교 때까지 거실에서 공부를 했고,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거실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는 통계, 일본 명문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한 중학생 리나의 집, 리나가 거실 식탁에서 공부를 하는 한편에서 엄마는 부엌 일을 한다. 그러다 리나가 부탁을 하면 함께 앉아 문제도 내주는 환경, 바로 이렇게 가족과 소통하며 언제든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실에서의 공부가 일본에서 좋은 학습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학습 방식에 대해 전문가는 굳이 조용한 도서관을 놔두고 까페를 찾아가는 요즘 청년들의 학습 방법과 유사함을 지적한다.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 그 환경은 오히려 외떨어진 좋은 방이 아니어도, 학습적 분위기만 갖춘 가족적인 거실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똑같은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다른 시도도 있다. 마을의 정서를 가진 아파트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들이 의기투합했다. 무려 80개가 넘는 출입구를 가진 테라스를 가진 저층, 앞마당을 가진 중간층, 그리고 다락방을 가진 복층 형태의 고층 아파트가 함께 단지를 이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업비 때문에 이런 '이상적인 시도'는 선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으로 시도한 것이 바로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어느 아파트에나 있는 놀이터를 아이들이 스스로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굳이 놀이터뿐이랴, 주변 동네를 주도적으로 자신의 공간으로 탐험해 가는 방식도 있다. 소유하지 않더라도 '도시의 보물 찾기'를 통해 공간은 확장할 수 있다. 단지 아이들에게 그럴 시간만 준다면.
'성실히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경쟁을 하더라도 반칙은 처벌을 받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노력하면 결과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저의 결과도 공정할 줄 알았습니다. 기회의 공정성을 믿었던 제가 한심합니다' 서울대 집회에 나선 한 학생의 발언이다.
이른바 '조국 사태', 청년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쉽사리 모이기 쉽지 않은 대학가 단 2명이 준비를 했는데 500 여 명의 학생이 몰렸다. 조국 전 민정 수석이 법무부 장관이 된 이틀만의 일이다. 8월 23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대를 비롯 연세대, 고려대, 부산대 등에서 13차례 집회가 열렸다. 96건의 발언, <시사 기획 창>은 이 발언을 데이터 분석 기법을 통해 살펴봤다. 단어, 빈도, 연결 중심성을 통해 심층 의미를 분석했다.
학생들의 발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당연히 조국, 그리고 '정의'이다. 그리고 의미망의 중심에는 '공정'이 있다. 학생들은 공정에 대한 위반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는 정의에 위배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공정'이란 무엇일까? 바로 기회의 평등이다. 교육을 통해 자신들이 한 노력이 보상받고 인정받는 세상, 그를 통해 앞으로의 삶이 보장받는 세상이다. 조국 사태로 인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에서 '과정으로서의 공정성' 훼손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들의 생각은 '후안무치'란 단어로 연결된다.
'부모 잘 만난 고등학생이 연구에만 매진한 어떤 사람의 논문 1저자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 논문을 도둑질한 세태가 너무나 부끄럽다.' -연대 대학원생
'한번 두번 받아볼까 말까한 장학금을 가정 형편이 더 어렵거나 성적이 더 좋은 학생이 아니라 유급을 두 번이나 당한 최하위권 학생이 여섯 학기 내내 받았다는 사실, 이러고도 기회가 평등하다 할 수 있나?' - 고대 학생
대학생들 '정의'와 '공정'에 문제 제기를 하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선 '상식에 대한 질문', '공정'에 대한 의문, 그 기저에는 바로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서려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그 상처를 보듬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이 정부를 뽑았는데, '기회의 평등함, 과정의 공정함, 결과의 정의로움'을 내세운 정부가 국민의 상처를 다시 후벼팠다고 느끼는 것이다. 바로 '촛불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함께 광장에 서서 나누었던 공유된 기억은 곧 새 정부가 이루어줄 도덕적 사회에 대한 기대로 승화되었기에 '도덕적 결함'에 분노했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것이다. 그 기저에는 자신들의 기대를 모아 정권을 '맡겼는데', 어쩌면 이 정부도 애초에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고, 관심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는 '소외감'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학생들은 이런 '사태'를 그런 '불공정'한 일이 별 거 아니라고 하는 기성 세대가 보내는 사회적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런 ' 기성세대의 상식'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물론 그런 학생들이 들고 일어선 것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있었다. 이미 기득권인 서울대 학생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자한당의 손길이 어른거린다 등등.
하지만 학생들은 반박한다. 자신들은 박근혜 탄핵 세대라고. 그때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었다고. 자신들이 나선건 어떤 정치적 사상이 따른 것이 아니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목소리를 내는데 또 지금 자신들의 목소리가 특정한 진영의 목소리로 치부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진보 세력이나 보수 세력 모두 정치적으로 반응했다. 교육의 불평등이라는 제도의 문제로 받았다. 정부는 대입 제도 개선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입시 제도가 이상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단점'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자신들이 한 고생,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원하는 것, 하지만 그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일상에서 느낀 불공정에 대한 상처와 원망이 '조국 사태'를 빌미로 터진 것이라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학생들은 강변한다. 민주, 반민주의 구도가 아니라고, 거시적인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가 아니라고. 자신들이 마주한 공정과 불공정의 문제라고.
고용없는 저성장 시대를 맞닦뜨린 세대 1960년대생 대졸자는 100%는 물론 고졸자 35%까지 취업되었다. 이들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을 차지했다. 하지만 1990년대 대학을 나온 이들은 53.4%만이 취업을 했다.
취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청년 1000명에게 청년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미국, 중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재능과 노력을 우선 순위에 놓은 반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부모의 재력을 첫 번째 조건으로 답했다. 두번 째 조건도 인맥이었다. 세번 째에 가서야 재능이라 답했다.
심지어 '인맥'의 정의도 다르다. 홍콩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사회 관계망을 '인맥'이라 여기는 반면. 우리 사회에서 인맥이라 함은 당연히 부모의 인맥이다. 결국 우리 사회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를 '부모'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능력과 인맥이 자신들의 능력보다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여기니 '조국 사태'에 '분노'가 폭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생각은 바로 우리 사회 이동성의 정체와 하락을 반증한다. 정체된 사회, 숙명론과 패배론이 팽배한 사회, 당연히 행복지수가 떨어진다. 그리하여 희망도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사회, 출발선이 같지 않은 것 같다는 박탈감, 바뀔 수 없다는 좌절감이 만연한 사회, 촛불 이후에도 청년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촛불을 든 청년들은 바로 그런 사회, 그런 미래에 반대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0~30대 직원이 2004년 60%였던 것이 2015년 45%, 외려 14%가 감소했다. 20~29년차 직장인의 연봉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가 초봉에 비해 4배나 늘어난 반면, 유럽은 겨우 1.5배, 하는 일이 아니라 근속 연수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 연공급제, 대기업 중심의 노조, 우리 사회 노동 구조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청년를 통해 집약적으로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청년 노조 유니온은 '사다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다리 없이도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에 대해 '논의'가 되어야 할 시기라 주장한다.
사회 진입만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청년 정책은 일부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문제에만 집중되어 왔던 점도 재고되어야 한다. 청년층 전반에 걸친 일상의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다고 체감되는 상황에서 사회 구조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게 청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국회나, 정당의 관심은 '실업'에만 주목한다. 정작 왜 실업에 놓이는가라는 포괄적인 문제는 주목하지 못한 채, 그러다 보니 고용 정책 외에 청년들에게 별도 지원 정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누가 청년을 대변하는가 서복경 서강대 청년정책 센터장은 약간의 정보, 혹은 약간의 인센티브로 자동적으로 산업 구조에 편입될 것이라는 인식이나 방식은 전세계적으로 청년층이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서 낡은 방식이라 일침을 가한다. 보다 구조적이고 글로벌한 이 문제에 대해 거시경제적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렵사리 이런 청년들의 고민에 대해 '청년 기본 법안'이란 결과가 도출되었다. 2017년 청년 미래 특별 위원회에서 발의한 청년 기본 법안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 보장을 내세우며 이를 국가와 지자체의 의무 조항으로 넣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기본 법안'조차 1257일 째 상정조차 되고 있지 않다.
말로는 청년 정책이 중요하다지만 언제나 중요하다는 정치적 사안에 밀려 뒷전이 되어버린 '청년 법안', 결국 당사자인 청년들이 '정치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의 한계가 지적된다.
87년 민주화 세대는 2004년 총선을 통해 이인영, 오세훈, 원희룡 등이 30대의 나이에 국회에 진출했다. 40대 미만의 국회의원이 16대에는 5.7%, 17대에는 7.7%, 18대에는 2.3%, 19대에는 3%, 20대에는 1%로 외려 거꾸로 줄어들고 있다. 세계 평균 15.5%에는 한참 못미치는 전세계에서 끝에서 두 번째의 수치이다.
19대 청년 비례 대표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하나 씨는 오늘날 청년 문제는 청년이면서 동시에 가난하기에 생존을 위한 문제가 많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평균 수십 억의 재산가인 국회의원이 그런 국회의원의 자녀들이 이런 절박한 청년들의 문제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청년없는 국회에서 청년을 위한 정치는 상정조차 되지 못하는 청년 기본 법안으로 상징된다. 이에 전문가는 말한다. 기성 정치인 본인이 무얼 하겠다 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 새로운 사람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 청년을 위하는 것이라고.
이에 가장 바람직한 사례가 등장했다.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도시 부산, 20.8% 전국에서 가장 낮은 청년층, 하지만 그 두 배에 달하는 청년들이 이 늙은 도시를 빠져나간다. 이런 현실에 부산시와 부산 지하철 노조는 이 시대에 귀감이 될 만한 결정을 내렸다. 부산 최대의 공기업 부산 지하철, 통상 임금 소송에서 승소하여 얻은 돈을 신규 채용을 위한 비용으로 기꺼이 양보했다. 기존 직원들의 더 높은 임금대신, 노조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여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적정 인력 확보라는 결정을 내린 노조, 덕분에 사상 최대 670 명의 신규 채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음 세대 고용 확보를 위해 직원 1인당으로 치면 1000만원을 양보하여 세대간 연대 임금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조국 사태 어언 두 달 여, 광장에서도 소외된 청년, 그 불공정에 대한 문제 제기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이다.
매년 찾아오는 단막극 시리즈 <드라마 스페셜>의 장점 중 하나라면 동시대 청년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구현해내고자 애쓴다는 점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드라마 스페셜>의 <렉카>, < 스카우팅 리포트>, <굿바이 비원>은 그런 동시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런데 유독 청년들의 아우성이 사회 이곳저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시대여서 일까. 드라마들은 그저 삶의 수레바퀴에서 신음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넘어 그 시련을 꿋꿋하게 넘어서는 '용기'와 '의지'에 집중한다. 아파서 청춘이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아가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다.
<렉카> - 실직 청년의 무모한 레이싱 태구(이태선 분)는 렉카를 몬다. 아니 이제 몰았다가 될 지도 모른다.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사건은 뻔한 형편, 렉카 운전사들은 그 뻔한 사고 현장을 향해 필사의 레이스를 벌인다. 하지만 어릴 적 사고로 다리를 절 뿐만 아니라 천성이 모질지 못한 태구는 늘 그 막무가내 레이스에서 밀린다. 결국 사장은 사고를 내서라도 실적을 올리지 않으면 태구를 자르겠다며 최후 통첩을 한다.
결국 본의 아니게 도로에 엔진 오일을 뿌리고 사고를 기다리는 태구, 그의 앞에서 검은 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져 가로등을 박는다. 사고를 보고 달려온 척 렉카를 몰고간 태구, 그런데 사고 운전수를 견인을 극구 거부하며 태구에게 막말을 하며 사고 현장을 빠져나가려 한다. 그때 태구의 눈에 띈 열린 차 트렁크 속 여성으로 의심되는 무엇.
<렉카>는 실직 위기에 몰린 렉카 운전사 태구가 마주친 트렁크에 사람을 실은 수상한 차량과의 질주하는 '레이싱 액션'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이다. '단막극'이라는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규모의 카레이싱 장면 속에서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탄 차량 사고로 눈 앞에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어야만 했던 청년 태구의 트라우마가 엇물린다.
뻔히 태구가 사고를 낸 줄 알았다며 거침없이 막말을 하며 태구를 모욕하는 운전사와 자신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고 심지어 그 사고로 인해 결국 렉카 일마저 빼앗긴 상황에서 주저앉는 대신 과거 사고 속 구해내지 못한 여동생 대신 트렁크 속 여성을 구해내기 위해 무모한 레이싱에 돌진한다. 실직의 위기, 모멸감을 넘어서 린치와 협박을 가하는 검은 자동차의 운전자와 그 조력자들, 하지만 세상에 그 누구 한 사람 자신의 편이 아닐 꺼 같던 위기의 태구가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늘 그에게 잔소리를 해대던 동료도, 렉카 사장도, 그리고 그를 외면했던 경찰도 그의 지원군이 된다. 결국 태구는 재벌 3세에 의해 죽을 운명에 빠진 한 여성은 물론, 하마터면 범죄자가 될 뻔한 그 자신의 위기를 스스로 돌파해 낸다.
<스카우팅 리포트> - 2019년판 아버지와 아들 우연히 만난 녀석,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쓰이는데, 알고 보니 내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는 일찌기 고전 <오이디푸스>에서 부터 시작해서 <메밀꽃 필 무렵>까지 서사의 익숙한 소재이다. 그 익숙한 소재의 이야기를 2019년 버전으로 변주한 이주영 작가의 <스카우팅 리포트>는 2018 단막극 공모전 수상작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뒷돈이나 받다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야구 선수 출신의 스카우터 윤경우(최원영 분)이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동앗줄처럼 내려온 기회 고교 유망주 곽재원을 구단으로 스카우트해 오는 것이다.
재원을 찾아가 내려간 지방 고교, 감독의 총애를 받고 메이저 리그 진출의 꿈을 꾸는 유망주라지만 그 역시 고교시절 유망주였지만 부상으로 한순간에 꿈을 접었던 트라우마를 가진 윤경우의 눈에는 어깨 통증을 참고 무리한 투구를 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스카우터를 넘어 동변상련의 측은한 마음에 조금 더 수월하게 투구를 할 수 있도록 재원에게 조언을 하고 고기도 사먹이며 은근히 자신의 구단으로 그를 끌어오려 애쓰는 와중에 홀어머니가 횟집을 한다는 재원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경우는 생각지도 못한 '운명적 관계'를 맞닦뜨린다.
탕아로 돌아온 아버지, 그 아버지와 같은 위기를 겪게 된 아들, 이런 전통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적인 딜레마에서 많은 이야기들은 자신의 시대적 풍경을 배경으로 풀어내 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였고, 늙어 발을 헛디딘 <메밀 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인 동이에게 도움을 받는다. 그렇다면 2019년의 아버지와 아들은 어떨까?
경우가 조언하려 했던 재원의 통증은 알고보니 경우의 아들이기에 운명적으로 봉착하게 된 기형적 신체 구조로 인한 것. 경우 역시 그로 인한 통증을 참고 던지다 무리가 왔고, 그런 경우에게 아버지는 설득한답시고 모진 언사로 인해 부자의 관계는 지금도 서먹서먹하게 된 것, 그리고 바로 그 날 그런 상황으로 인해 재원의 모친과도 이별을 초래하게 된 엎친데 덮친 운명의 순간에 이제 다시 재원이 서게 된다.
재원은 경우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리그는 커녕 당장 이 경기를 완투하면 선수 생명 자체가 위험한 상황에도 팀의 에이스로 경기를 책임지려 한다. 갖은 방법으로 설득하던 아버지 경우, 과거 경우의 아버지처럼 모진 말로 부자의 관계를 끊는 대신, 아들의 무모한 도전에 어깨를 두드려 준다. 때로는 그럴 때가 있는 것이라며, 과거 자신이 그랬듯이, 어쩌면 이게 마지막 일 수도 있는 '영광'의 시간을 아들이 기꺼이 감수할 있도록, 그래서 같은 실패라도 다른 도전의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하느냐에 함께 '배팅'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2019년 드라마 스페셜의 선택이다.
<굿바이 비원> - 과거와 이별하는 방식에 대하여 공시생의 이야기는 그간 드라마 스페셜이 즐겨 다뤄왔던 소재이다. 2019년 드라마 스페셜로 찾아온 <굿바이 비원>은 그런 공시생의 이야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서본다.
드디어 붙었다. 스물 세살에서 부터 서른 한 살까지 무려 8년이란 시간을 반 지하 방에 살며 버텨냈던 공시생 생활이 7급 공무원 합격이란 팡파레를 울리며 막을 내렸다. 출근해야 할 곳은 지금 사는 곳에서 무려 두 시간이나 떨어진 경기도의 한 시청, 기념삼아 온 근무지에서 친구의 부추김으로 그만 새 오피스텔을 계약해 버렸다.
하지만 막상 공시생의 생활을 함께 한 비원, B1 지하방을 떠나려니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헤어졌다지만 소개팅을 했다는 소식만으로 가슴이 철렁내려앉는 남자 친구와 함께 했던 기억이 이곳저곳을 채운 공간, 그래서 옷장 위에서 발견된 돈이 당연히 남자 친구의 것이라 생각한 것처럼 어쩐지 이곳을 떠나면 진짜 그와는 영영 이별이라는 생각에 다은(김가은 분)의 마음은 무겁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새로 들어갈 오피스텔에 필요한 전세 자금 대출도 원하는 금액을 맞추기 어렵고 취객의 뇨상 방뇨가 지긋지긋했던 이곳이었는데 마치 '비원'이 아직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 미적거리며 '과거'를 놓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벌어진 집을 보러왔다는 핑계로 들이닥친 치한, 비오는 날 자신의 집 앞에서 얼쩡거려 치한이라 오해해서 잡고 보니 자주 들르던 편의점 직원, 심지어 그 직원은 다은이 살던 집에 먼저 살던 사람이었으며 다은을 주변에서 챙겨왔었다는데, 반면 남겨진 물건을 핑계로 만난 남친은 자신이 다니는 보험 회사 상품을 권유하며 미련을 덜어버리니. 이렇게 얼키고 설킨 관계들 속에서 다은은 비로소 자신의 방에 돈을 두고간 '임자'를 찾아낸다.
오랜 암투병으로 인해 가끔은 정신이 흐려지시던 엄마, 그 엄마는 자신의 미덥지 못한 기억 때문에 기억해야 할 물건들을 무조건 높은 곳에 두는 버릇이 생기셨단다. 그 엄마가 당시 공시생이었던 다은이 취업을 하면 사신으라고 마련해 두셨다던 신발 값, 바로 그 돈은 이제 '과거'와의 이별에 주저하던 다은의 등을 기꺼이 떠민다.
병으로 인해 맛을 못느끼던 엄마가 만들어 차마 먹을 수 없었던 엄마의 김치, 그 김치를 먹고 배탈이 나듯, 8년간의 젊음을 함께 했던 취준 생활을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보낸다.
취업 준비생 70만 시대다. 그중 31%가 공채를 준비하는 '공시생'이다. 그런데 웬걸 정작 그들이 두드리는 문이 사라져간다. 전체적으로 하반기 정기 공채가 11.2%나 줄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기업 공채가 폐지되거나 축소되고 있는 중이다. 2019년 하반기 신입 공채 중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5.6%, 하지만 20%는 미정이거나, 34%는 아예 신입사원 모집이 없다고 한다.
공채 폐지를 선언한 현대 자동차, 최신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을 신속하게 확보하여 적재적소에 배치, 시장 변화에 빨리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더는 공채로 뽑은 인력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 자동차의 결정에 '반대'를 표명한 사람들이 50%나 된다. 무엇보다 그간 공시를 꾸준하게 준비해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정이다. 정해지지 않은 기준으로 신입 사원을 뽑는 '수시 채용' 자체가 불분명하며 시험의 안정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가장 컸다. 각자가 가진 문화 자본에 의해 차별받을 수 있다는 우려, 무엇보다 기업이 요구하는 트렌드에 맞는 경력은 또 어디서 어떻게 쌓아야 하느냐는 하소연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공채에 취준생들은 더욱 공채에 몰릴 수 밖에 없다. 지난 9월 실시된 EBS공채 시험, PD 2명, 방송 기술직 2명, 기자 6명, 경력직 6명을 뽑는 시험에 2000명이 몰렸다. 평균 150대 1, 하지만 들여다 보면 신입직은 더 높고, 그중에서도 PD 부문은 무려 1000 명이 몰려 500대1이 되었다.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나와 같은 꿈을 가진 또래 500명을 제쳐야 하는 현실, 2019년 상반기 구직자 1인당 평균 입사 지원 횟수 13회, 서류 합격 그 중 2회, 최종까지는 합격률 26%, '공채가 복권 당첨보다 어렵다'는 우스개 소리가 등장한다.
공채가 뭐길래 <당선, 합격, 계급>의 장강명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문학 공모전이 한국 사회 채용 제도의 또 다른 버전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동일한 시험을 통해 적합한 사람을 뽑을 수 있다는 전제로 한 한국 사회 특유의 제도인 '공채'는 실제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신입 사원 채용 과정이다.
1957년 삼성 물산에서 시작된 공채, 당시 27명 모집에 1200명이 지원 공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50년대 이후 빠른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 기업 환경에서 많은 사원이 필요했고 공채는 제 2의 수능, 취업 과거제로 우리 사회의 '계급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장강명 작가는 이런 공채를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벌판에 있는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이라는 몇 채의 성으로 비유한다. 그나마 그 성에 들어가야 좀 살기가 났기에 1년에 한번 성문을 열 때 너도 나도 그 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겠다고 아우성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기에 구직자 입장에서 '공채의 종말'은 '사다리 걷어차기'라 여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공채의 종말, 그 시작은 IMF이다. IMF이후 노사정 3자가 구제 금융 한파와 급박한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고용 조정(정리 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의 법제화를 합의함으로써,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소수의 좋은 일자리와 다수의 질이 좋지 않은 비정규직 중심의 일자리라는 '이중 구조'가 구조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보장된 일자리를 향해 매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제 2년차에 들어선 이인선 씨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른바 노량지 공시생인 그녀는 아침 6시에 눈을 떠서 밤 12시까지 공부, 공부, 또 공부로 이어진 일상, 끝이 없다는 절망감, 상실감에 헤매지만, 그 길의 끝에서 청춘을 다바친 보상이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 또한 놓지 않고 공채 성공의 그날을 기대해 본다.
지방이라고 다를까,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취준을 하고 이쓴 세연 씨는 매일 자소서와 이력서를 넣으며 보낸다. 1년 6개월 지금까지 넣은 이력서만 100개가 넘는다. 면접도 15번이나 봤다. 그런데도 이제 그녀는 혹시나 도움이 될까 다시 기사 자격증 시험을 본다. 공채에 합격하기 위해 또 다른 시험을 봐야 하는 현실.
인선 씨나 세연 씨에게 공채의 문이 좁아지는 현실은 쉽게 받아들여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직무 전문성'을 키워야 하는 건지, 좁지만 그래도 공정하고 가능한 통로가 생각되는 공채, 하지만 그 조차도 이젠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적절한 인재를 얻는 방법이 아니라고 '수시 채용'을 도모하는 기업, 안정적 구직과 변화하는 트렌드의 딜레마가 바로 2019년 청년들이 맞이하는 현실이다.
변화하는 세상 청년 1144명에게 수시 채용에 대해 물었다. 찬성 측 36%는 일정에 구애받지 않는 걸 28%는 연중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17%는 채용 전형이 짧아 빠르게 취업할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꼽았다. 반면, 41%의 반대 의견은 무엇보다 수시 채용이 되면서 채용 규모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29%는 일정 파악과 대비의 어려움을 들었다. 22%는 수시 채용이 된다면 수요가 있는 직무만 뽑히게 될 것이라 했다.
이시한 교수는 일찌기 이런 상황을 예측, 공채가 아니더라도 취업의 문을 여는 열쇠에 대해 강의를 해왔다. 이 교수는 말한다. 대다수의 취준생들이 대기업에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가 명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중소 기업의 경우에는 어떤 기업인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
결국 수시 채용으로 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더 높은 차원의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발빠르게 기업 정보와 구직자 정보를 공유하는 비지니스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있다. 10년 뒤에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자신이 하던 업무가 없어질 수도 있는 변화의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 자신의 회사를 넘어 '인맥'의 네트워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취업에도 등장한 '수시'는 흡사,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타다'와 기존 택시 업계의 갈등과도 같다. 4차 산업 혁명과 함께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인력 조달'에 변화를 꾀하려는 산업, 그럼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전통적인 '시험'을 통해 정규직의 좁은 문을 향해 몰려드는 취준생들, '업무 능력 중심'의 사회로 변화해 가는 길목에서 '공시'는 점점 문이 좁아지고, 그 좁은 문을 향해 여전히 달려가는 취준생들의 뜀박질은 버겁다.
업무 능력 중심의 사회로의 변화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이제는 가격 비교 플랫폼 커뮤니티 대리가 된 8년차 직장인 송기훈 씨의 방식은 어떨까? 그도 한때는 남들 다하는 언론사 공채를 준비했었다. 서류 전형조차도 쉽지 않자 스스로 현장을 찾아다니며 찍은 보도 사진 포트폴리오로 길을 뚫었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매번 좌절, 사진 기자인데도 일반 신문 기자와 똑같은 방식을 통해 뽑는 언론 고시에 반발도 생겼다.
그래서 한 회사의 사보를 시작으로 이직에 이직을 거듭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콘텐츠 회사를 거쳐 지금 회사에서 이제 대리까지 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취준생들과 나눈다. 그가 정의한 '공채'는 제일 먼저 눈에 띈 통로이다. 하지만 그저 먼저 눈에 띄었을 뿐 가까이 가보니 들어가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신 옆에 있는 작은 통로를 통해 앞으로 전진하는 중이다. 그는 충고한다. '공채'를 준비한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 말고 진정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을까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하라고.
아예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은 이혜인 씨도 있다.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팀장, 하지만 겨우 입사 4개월차이다. 하지만 '직무 능력'에 맞춰 이곳에 들어온 그녀이기에 업무 순환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와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하다보니 콘텐츠 기획 마케팅의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혜인 씨에게 공채는 다른 세상이야기이다. 그녀 역시 회사보다 '직무'가 먼저다.
다큐는 여전히 고단한 '공채'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수시 채용을 모색하는 변화하는 산업 환경을 짚는다. 그렇게 이미 와있는 새로운 세상에서 '공채'에 발이 묶이는 대신 다른 길의 모색을 고려해 보려 조심스레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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