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 피디가 돌아왔다. 10월 12일 첫 선을 보인 <모두의 거짓말>에 대한 지금으로써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이게 아닐까. 일찌기 풋풋한 젊음의 시대을 가장 열정적으로 그려낸 <태릉 선수촌>,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청춘 로코물의 대명사가 되었던 이윤정 피디, <골든 타임>을 끝으로 mbc 시대를 종료한 후 tvn으로 이적, <치즈 인더 트랩>으로 다시 한번 이윤정 청춘 월드의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2017년 이윤정 피디가 들고 온 작품은 뜻밖에도 진실을 향한 탐사 보도 고난기를 담은 <아르곤>, 이를 통해 이윤정 월드는 질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어 이제 2019년 ocn을 통해 다시 한번 장르물 <모두의 거짓말>로 돌아왔다.
가려진 진실, 떠오르는 음모 대기업 족벌 경영 체제 철폐를 주장하던 청렴한 국회의원 김승철(김종수 분)을 아버지로 둔 김서희(이유영 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아버지가 그토록 주장하던 재벌가 JQ의 외아들 정상훈(이준혁 분)이었다.
1회 오프닝과 함께 한 여성이 건물 옥상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자 자신의 방에서 자해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던 상훈은 김승철을 찾아가 다그친다. 그녀의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냐고. 도대체 그녀를 희생해서라도 얻고자 하는게 무엇이냐고. '진실'을 밝히라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나서서 이 모든 것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그리고 뛰쳐나온 상훈, 방문 앞에서 그 모든 것을 듣고 있던 김서희와 마주친다. 김서희는 아버지가 던진 책에 맞아 피흘리는 상훈을 걱정하지만 상훈은 아내를 외면한 채 떠나버린다.
이 장면에서 떠오른 건 '위선'이다. 청렴한 정치인으로 존경받던 김승철이 한 여성을 희생시켜가면서도 지키려 했던 '진실'을 무엇일까에 대해 시청자들은 의문을 가지며 드라마를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의문도 잠시, 외딴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김승철 의원은 유명을 달리하고, 김승철 의원과 싸우고 나선 정상훈은 소식이 끊긴다.
그런데 김승철 의원이 죽자마자 소속당에서는 김승철 의원 지역구에 딸인 김서희를 내세우려 한다. 그곳에 세워질 JQ의 신재생 에너지 사업 관련 죽은 김승철 의원의 딸이자 JQ의 며느리인 김서희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사업과 무관하게 독일에서 살던 남편을 따라 살다 이제 까페나 운영하는 김서희에게 '정치 입문'이란 날벼락같은 일,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죽은 아버지를 물어뜯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며 김서희의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려 한다. 그럼에도 선뜻 결정하지 못한 김서희 앞에 남편의 잘린 손에 이어, 그 손을 자르는 영상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를 협박하는 영상이 도착한다.
어떻게든 남편을 찾으려는 김서희, 그런 서희의 사력을 다한 고군분투에 힘을 더하는 건, 아픈 어머니를 위해 서울 생활을 접으려하는 광수대 경위 조태식(이민기 분)과 그의 팀원들이다. 우발적 사고사로 접으려 했던 김승철 의원의 교통 사고, 하지만 쉽게 덮으려 했던 사건이 자꾸 꼬리를 드러내며 귀촌하려는 조태식의 등덜미를 나꿔챈다. 사고 차량은 하루 만에 폐차 처분되고, 차 안에 있었다던 블랙 박스는 사라졌다. 현장에서는 그 누군가의 스키드 마크가 의도적으로 제거되었다. 사고인줄 알았던 사건이 자꾸 의도된 살인 사건으로 몸집을 드러낸다. 거기에 당일날 죽은 김의원과 말다툼을 벌였다던 정상훈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잘린 손이 김의원의 추모식 당일 날 광장에 놓여진다. 조태식이 발을 빼려하면 할수록 사건이 그를 잡아끈다.
<아르곤>과 <모두의 거짓말>은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르곤>은 HBC에 남은 유일한 탐사 보도 프로그램, 자극적인 낚시성 기사와 가짜 뉴스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실이 산화되는 것'을 막는 마지막 보호막이 되고자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반면, <모두의 거짓말>은 제목에서부터 보여지듯이 김승철 의원의 죽음과 정상훈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그 속에 담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광수대 조태식 경위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국회의원이 되어야 할 김서희의 이야기이다.
<아르곤>, 그리고 <모두의 거짓말> 두 작품 모두 '가짜'의 범람이다. 각자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개인적 이해 관계를 위해 편의적으로 조작되거나 사라지는 뉴스라는 가짜와 싸우는 이야기가 <아르곤>이라면,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청렴한 국회의원, 그런 그가 자신의 지역구에 유치한 JQ의 신재생 에너지 사업의 커넥션이라는 정경 유착의 토대 위에 얽혀진 이해 관계가 만들어낸 '가짜'를 향해 연대한 김서희와 조태식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곳엔 '우직'한 한 사람이 있다. 이제는 그의 이름 앞에 '고'라는 안타까운 수식어를 붙여야 하는 김주혁이 분했던, '사실'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실을 향해 갈 수 없다는 기자 겸 앵커, 아르곤의 팀장 김백진이 있다. 아내가 죽은 순간에도 '생방송'을 떠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을 던져 '아르곤'을, '진실을 향한 탐사 보도'를 살려내기 위해 8부작의 시간동안 '참언론'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모두의 거짓말>에는 조태식이 있다. 물론 싸이코라 불릴 정도로 완벽주의인 김백진과는 결을 달리한다. 한때는 똑똑하고 촉도 좋고 몸도 잘 쓰던 조태식은 이제 시골 파출소가 유일한 꿈이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한때 똑똑하고 촉도 좋은 조태식을 소환한다. '진실'이 가려지는 장막 속에서 여전한 촉을 빛내며 그곳을 더듬어 어느덧 사건의 중심에 선다.
그런 우직한 진실주의자와 함께 뛰는 '성장'하는 여성들이 있다. 지방 시사 주간지에서 전전하다 해고된 기자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특채된 '용병', 당연히 기존의 아르곤 팀 동료들에게 '굴러온 돌'인 이연화(천우희 분), 스물 아홉 해 별볼일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온몸으로 굴러 살아온 그녀의 '호기심'어린 열정이 아르곤의 굴러온 돌에서 어엿한 기자 이연화로 그녀를 성장시킨다.
그런가 하면 그녀가 잘 한 것이라고는 JQ의 며느리가 된 것 밖에는 없다는 아버지의 이름값에는 한없이 부족했던 김서희, 하지만 그런 그녀를 그 누구보다 아껴주었던 아버지, 비록 함께 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 앞에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김서희가 남편을 찾기 위해 국회의원이란 이름값을 기꺼이 받아든다. 그리고 남편을 찾아, 아버지의 죽음 그 진실을 향해 뛰어든다.
그리고, 조태식의 명실상부 오른 팔 열혈 형사 강진경(김시은 분)도 빼놓을 순 없다. 육상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으로 머리로 하는 건 좀 부족해도 몸으로 하는 건 자신있다는 강형사는 첫 발령을 받았던 대구서 서장의 조카를 뺑소니범으로 잡은 이래 예의 '단무지'적인 마인드로 달려드는 모습에서 <아르곤>의 이연화가 오버랩된다.
일찌기 청춘 로코의 명장답게 이윤정 피디는 장르물이지만 특유의 정서적인 색감으로 각 씬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낸다. 거기에 각 인물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연출 방식으로 단 2회만에 주인공들의 매력을 드러내 보인다. 한없이 무력하고 연약한 듯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것같은 김서희, 나른한 퇴직 형사의 분위기를 보이지만 순간순간 변하는 눈빛에서 여전한 촉을 드러내보이는 조태식, 그리고 단 한 씬으로도 캐릭터가 보여지는 등장인물 군상들이 과연 앞으로 어떤 갈등과 조합을 이뤄나갈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비록 시청률은 부진했지만 <아르곤>은 8부의 시간동안 그 어떤 작품보다 '언론'이 가야 할 '진실'에 대해 혜안을 보여주었다. <타인은 지옥이다>의 바톤을 이어받은 <모두의 거짓말> 역시 첫 술에 배부르진 않았다. 그래도 첫 회 1.375%에 이어 2회 2.163%로 두 배에 가까운 상승으로 '위선'을 뚫고 진실을 향해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광장이 홍해 바다처럼 갈라졌다. 뜨겁던 촛불의 열기로 타오르던 광장이 불과 몇 년 만에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뉜다. 입장의 차이라고 한다. 진보와 수구의 문제라고도 한다. 혹은 시대적 과제와 집권층의 부도덕의 문제라고도 한다. 그리고 세대와 세대의 갈증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도무지 틀리지 않은 주장들이 서로 '합의'에 이를 길은 요원해 보인다.
이렇게 갈라진 세상에 1000회를 맞이한 <다큐 프라임>은 무려 6부작의 대장정을 통해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누가 더 '진정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진정성'의 시대가 변한 게 아니냐고.
정의의 시대, 1980년대 6부 <진정성이란 무엇인가>의 시작은 이제는 대통령상까지 받은 소목장이 된 586세대 양석주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석주씨, 1980년 휴교령이 떨어지자 6.25를 겪은 아버지는 아들을 산속 텐트로 보내고 한 발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휴교령이 풀리고 돌아간 학교,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을 기다리며 그의 마음 속 죄책감은 커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1983년 대학에 입학한 그를 자연스레 시위로 이끌었다.
그렇게 586들이 자신을 내던졌던 1980년으로 부터 물꼬를 튼다. '학우여'의 '학'자만 외쳐도 교내 곳곳에 포진되어 있던 사복 경찰이 와서 잡아가던 시대,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을 도서관 난간에 매달았다. 그 난간에서 '황정하' 열사가 세상을 떠났다. '산자여 따르라'며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자신이 몸에 불을 붙였고 이한열, 박종철 등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그런 동료 학생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박혜정 열사는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부끄럽게 죽을 것'이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의 목숨을 거두었다.
80년대를 살았던 학생들은 눈 앞에서 목도한 사회적 폭력 앞에 자신을 내던졌다. 폭력적 공권력은 저항의 극한적 수단으로 내가 어떻게 죽어서 살겠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저항과 죽음으로 쌓아올린 정의의 시대였다. 1987년 거리로 나온 넥타이 부대는 이들 '선봉'에 섰던 청년 학우들의 외쳤던 주장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결과물을 얻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90년대 '후일담' 문학 등을 통해 '정의'에의 헌신은 그 시대의 '진정성'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달라진 시대, 삶의 가치가 변하다 그러나, 시대는 멈추지 않았다. 1997년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불러왔다. 불황, 대규모 구조 조정, 실업을 겪으며 80년대의 사회적 정의는 물질 체제에 기반을 둔 생존주의에 압도당한다. '서바이벌 생존 체제'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사람들은 20세기를 살아왔던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가야만 했다.
총학생회장이나 각종 단체의 대표적 위치에 있던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정치에 입문하며 우리 사회 정치의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매김되는 동안, 현장을 지키며 486, 586이 되어가던 사람들은 실존적 고민을 겪어 내야만 했다. 운동권 특채로 대기업에 들어갔던 양석중 씨 역시 이때 퇴직을 했다. 생계를 위해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나무',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비로소 자신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 보게 되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며 사는 삶, 뒤늦었다 싶었지만 비로소 자신의 방향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모두가 방향을 찾은 건 아니었다. 4부 <나는 잘 살아왔는가>의 윤남진 씨, 학생운동을 하고 이후 20여년간 시민 단체에서 일을 해왔다. 하나 뿐인 딸 윤서는 기특하게 사회 운동으로 바쁜 아빠가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대안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술에 취해 감옥 갔던 얘기며 지금까지의 상처를 부여안고 힘들어 하는 아빠를 보다 못한 윤서는 아빠가 가고 싶어하던 티벳 불교의 성지를 향한 길에 함께 오른다.
몇 년 전 위 절제 수술을 받고 낙향한 윤남진 씨, 가정에 소홀했던 아빠는 막상 해발 6000 가 넘는 고갯길을 넘으면서도 딸과의 서먹함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아빠는 뭐라고 말을 붙여 보려하지만 정작 딸은 그런 아빠를 더 어색해 한다. 딸뿐만이 아니다. 이곳 티벳에서는 길잡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지만 그는 정작 고국에서 길을 잃었다.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정의'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시민 단체 일, 이루고자 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하고, 벗은 갈라지고 흩어졌다.
오롯이 자신의 내면을 비춘다는 가파른 티벳의 고갯마루를 넘으며 겨우 23살, 30년전 영문도 모르게 학생운동의 총책으로 잡혀가 혹독한 취조를 받으며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은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제는 가끔 되묻곤 하는 그 시간을 다시 꺼내본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의 삶이 순탄했을까. 참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 것도 이룬게 없다는 남진 씨,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혼자라는 윤서의 아빠, 마음이 단단해지려면 겪어내야 한다는 고통의 산마루를 넘어서 남진씨를 안아준 건 유일한 혈육 윤서다.
과정 중심의 진정성 우리 사회에서 진정성이 언급되기 시작한 건 뜻밖에도 예능에서 부터 이다. '리얼'과 '날 것'의 탐하며 '진성성'을 추구하던 문화로 부터 '목표'만큼 '수단'과 '과정'이 중요하다는 방점이 찍혀진다. 제 아무리 미션을 먼저 달성했어도 '꼼수'를 쓴 출연자는 탈락되는 예능의 룰이 어느덧 사회로 확산되어갔고, 개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도 점점 더 엄격해져만 갔다.
미시간대 교수 로널드 잉글하트는 그의 책 <조용한 혁명>에서 이러한 변화를 '가치관의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정의내린다. 탈권위주의적이고, 문화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게 되는 오늘날 환경 보호, 평등, 관용, 공존, 성적 소수주의 등 다양한 가치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두고 수도권 남녀 700명의 사회 인식을 조사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사회 공헌 기업의 제품을 구입하려 하는가 , 대의를 위한 일에 동찬하는가 등의 사회 인식 조사를 통해 드러난 최상위 4.3%와 최하위 3.017%의 차이는 현격했다. 하지만 상위 22%, 중위권 35%의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과 이타주의, 공존 의식, 생태주의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 공유하고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목표중심적인 정치 지향의 진정성도, 먹고사니즘도 극복해낸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도개하고 있음을 이 조사는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생태적인 삶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 3부 <가고 또 가다보면>은 21세기의 라이프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 전직 회계사 김정연 씨의 사례를 다룬다. 31살의 정연씨는 지난 해 전남 영광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씨가 운영하는 <바우 다른 세상 연구소.에 들어갔다. 인생의 한 시기 불행하지 않고 재밌게 살아내기 위해 '생태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택했다.
콩 3알을 넣고 100번을 돌려야 하는 맷돌처럼 느리게 가는 삶, 햇살보다 밝은 웃음으로 정연씨의 대안적 삶의 공동체의 장점을 소리높여 전한다. 그리고 도심 속 네트워크가 공허했던 강동하가 '해야'가 돼서, 상자에서 상자로 옮겨지는 도시의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김도희가 '자야'가 되어 공동체의 동료가 되었다. 척박한 산속 만 오천 그루의 가시오가피 나무로 보살피고, 직접 만든 캠핑카로 도시의 전통 시장에 커리를 팔러 나가던 그녀, 하지만 일년이 지난 후 정연 씨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정연씨 만이 아니다.
그저 꾸준히 하고자 했지만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갈등을 쌓이게 만들어 결국 공동체를 허물었다. 처음이 아니다. 2013년 대안적 삶을 위해 황대권씨가 만들었던 이전의 공동체도 인건비도 안되는 수입을 가지고서는 살아낼 수 없어 사라져갔다. 생태주의적 삶의 현실은 그때도 지금도 가혹하다.
의식은 변화하고 있지만 그 의식을 담보해낸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대혼란은 또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거대한 용트림일지도. 수척해진 얼굴로 하지만 정연 씨는 다시 길을 떠난다. 남진 씨도 티벳의 설산을 고통스럽게 완주하며 살아낼 용기를 얻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넓은 원을 그리며, 라이나 마리아 릴케
'작년에 왔던~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무안하지만 2019년에 다시 찾아온 kbs2 드라마 스페셜에 걸맞는 주제곡은 이게 아닐까 싶다. 올해도, 다행히도 드라마 스페셜은 다시 찾아왔다. 금요일 밤 11시, 새롭게 '드라마 대전'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자리 끼어들어 10편의 단막극이 돌아왔다.
9월 27일부터 <집우집주>, <웬 아이가 보았네> 두 편의 단막극이 방영되었다. 문보현 드라마 센터장의 각오처럼 '경제 논리로는 매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공영 방송으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단막극의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올해도 찾아온 드라마 스페셜, 그 서막을 연 2편은 2019년의 현실을 담아내려 애쓴다.
2019년의 현실 드라마 스페셜의 오프닝을 연 <집우 집주>는 2019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집'의 문제를 다룬다. 중소 건축 사무소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수아(이주영 분)의 일은 '집을 꾸며주는 것'이다. 다 만들어진 집을 돋보이게 해줄 소품 선택에 있어 남다른 감각을 자랑하는 그녀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빈티지한 턴테이블을 들여놓고 싶은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그녀만의 감각으로 구차하지 않게 지냈던 공간마저 인상된 전세금으로 인해 비워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드라마는 엄연한 직장인임에도 자신이 꿈꾸는 집을 마련하기는 커녕 가지고 있는 돈으로 마땅한 전셋집조차 마련하기 힘든 청춘에 주목한다. 더더욱 그녀를 초라하게 만드는 건 엘리베이터도 없이 서민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사는 부모들이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겨우 마련한 집에 아버지는 지금도 남들이 버린 가구를 주워와 고쳐 쓰고 어머니는 빠듯한 생활비에 보태느라 남의 집 파출부 일을 나가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두번 째 작품인 <웬 아이가 보았네>는 시골 마을에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름은 오동자(김수인 분), 하지만 친구들은 동자를 똥간이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동자가 할아버지와 사는 집은 허구헌 날 술에 절어 사는 할아버지로 인해 술병이 나뒹구는 쓰레기장과도 같다. 그래도 동자는 술에 취해 쓰러지다시피 잠들어 버린 할아버지가 혹시나 숨이 끊어지는 건 아닐까 얼굴을 대본다. 냉장고 속에 굴러다니는 한 초코파이 한 입으로 끼니를 때운 채 학교로 향하는 동자, 국가에서 나눠주는 쌀을 굳이 돈으로 받겠다고 고집한 동자가 꼬깃꼬깃한 돈으로 하고 싶은 건, 최근 소식이 끊어진 엄마를 찾아가려 한 것이다.
그런 동자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동자만의 아지트가 있다. 산 속 외딴 빈 집, 그곳에서 동자는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을 느끼게 해주는 라디오를 듣는다. 바로 그 동자의 아지트에 들이닥친 불청객, 아니 그 집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주인 아저씨'가 좀 이상하다. 분명 시커먼 옷에 커다란 덩치의 아저씨인데 집을 꾸민 '갬성'이 어쩐지 '여성스럽다', 심지어 동자을 보고 보이는 반응조차도. 이렇게 2화 <웬 아이가 보았네>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산속으로 숨어든 양순호(태항호 분)와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 오동자를 만나게 한다. 동화 <거인의 집>을 모티브로 했다는 드라마는 '거인'이 2019년의 트렌스젠더가 되고픈 남자가 되며, 그의 '모성성'을 불러 일으키며 '의사 가족'을 잠시나마 꾸려낸다.
'동화'로 받은 현실 다시 집을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 수아,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남자 친구는 이 기회에 아예 '살림을 합칠 것', 즉 청혼을 한다. 하지만 오갈 곳조차 없어뵈던 남자 친구 유찬((김진엽 분)이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게 상견레 자리에서 드러나고 초라한 자신의 집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수아는 자신의 집을 소개하는 대신 자신에게 인테리어를 부탁했던 친구의 멋진 아파트를 자신의 집이라 속이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아의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아버지, 그런 수아를 이해하지 못한 남자 친구 덕분에 역설적으로 수아는 자신이 가졌던 '집'에 대한 컴플렉스를 되돌아 보게 된다. 가정과 연인 관계조차 해체될 위기, 뜻밖에도 수아를 구제한 건 그녀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신혼집을 꾸미려 했던 친구, 경찰을 불러도 할 말이 없었던 친구 집을 빌려서 벌였던 남자 친구와의 상견례 자리, 하지만 친구는 수아에 대한 봉변 대신, 마치 <안나 까레리나>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그 문구처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던 자신의 헛된 욕망, 그 실체를 고백한다. 그리고 으리으리한 집으로 그녀를 위축시켰던 남자 친구도 알고보니 그 '으리으리한 부'의 허울을 벗어던졌던 것.
그렇게 <집우 집주>는 1019년에 '집'으로 인해 고통받는 젊은 세대의 현실을 차이나는 '집'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강단있는 젊음의 순박한 '동화' 버전 '로코'로 마무리짓는다.
<웬 아이가 보았네>는 조금 더 '환타지'적이다. 수술을 통해 순호에서 순이가 될 날 만을 학수고대하던 남자로 잘못태어난 여자 순호 씨, 그는 자신의 집에 쳐들어와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볼모로 삼고 엄마를 찾아달라는 동자와 잠시나마 '모녀'의 정을 나눈다. 엄마처럼 만두를 빚고, 동자에게 생선을 발라먹이고, 생리를 시작한 동자에게 파티를 열어주고 걸맞는 속옷을 준비해 주고자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속사정이야 영락없는 엄마와 딸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영락없는 아동 성추행, 결국 순호의 집에 들이닥친 이장과 동네 사람들 앞에서 순호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비극적 상황을 '환타지적 동화'로 응답한다. 순호와 함께 엄마를 찾아갔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던 동자의 엄마, 그 엄마를 동자를 떠난 순호가 찾아간다. 그리고 여자가 될 날 만을 기다리며 모았던 돈으로 엄마의 빛을 갚아주고 순호는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추억을 기억하며 떠난다. 그리고 순호의 빈 자리에 순호가 갚아준 빛으로 자유로워진 엄마가 순호가 마련해준 하얀 원피를 입고 동자를 찾아온다.
가택 침입인 줄 알았더니 자신과 다르지 않게 신분 상승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스로 내려온 친구, 계층 차이때문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결혼인가 싶었더니 스스로 뛰쳐나온 남자 친구, 엘리베이터도 없이 온수도 제대로 안나오는 아파트인가 싶었는데 그래도 화목한 가정, 그렇게 <집우 집주>는 예의 드라마적인 환타지로 2019년에 집없어 서러운 젊음에 화답한다. 수아는 드라마의 처음과 형편은 달라진 것 없지만 대신 '마음만은 부자'가 되었다.
결손 조손 가정의 학대받는 아이 동자는 '엄마' 같은 아저씨를 만나 '성추행' 대신 처음으로 따스한 가정과 모성의 세례를 받는다. 심지어 그 아저씨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해서 동자에게 엄마도 찾아준다.
<집우 집주>나, <웬 아이가 보았네>는 2019년의 현실에 감히 칼을 대지 않는다. 대신 그 현실을 살아가며 벼렸던 칼날을 칼집에 꼿아주고, 풍선을 들려준다. 그리고 잠시나마 풍선을 들고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함께 산책을 하자며 현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다. 드라마다운 상투적인 해법, 하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kbs2 드라마 스페셜이 가장 능숙하게 해왔던 방식이다.
조커는 언제나 강렬했다. 광대의 입 그대로 찢어진 입, 하얗게 분장된 얼굴, 그리고 그의 악행이 극에 달할수록 미친듯이 웃어제치는 광기어린 웃음, 1940년 배트맨의 첫 호가 발간된 이래, 악당 조커는 언제나 배트맨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악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기에 빠진 고담시'의 평화와 안정을 찾기 위해 나선 배트맨, 하지만 조커는 바로 그 배트맨이 목적으로 하는 '평화와 안정'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장 잔혹하게 가리지 않는 범죄자였다. 마치 '배트맨'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는 나를 완성시켜(you complete me)' <다크 나이트> 속 대사처럼, 정의의 사도 배트맨이 존재하기 위해 그와 반대인 속성을 가진 조커가 끊임없이 '도발'되었다. 1989년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도, 때로는 주인공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2008년작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는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듯 불쑥 등장하여 배트맨이란 존재를 '히어로'로 완성시켜 주었다.
하지만 토드 필립스 감독은 바로 이 '광기와 악행'의 범죄자 조커에게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 처음 조커란 캐릭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무성 영화 <웃는 남자>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혁명과 전쟁, 폭동, 왕정복고 등 19세기 격변의 프랑스 역사를 살아냈던 <레미제라블>의 저자인 빅토르 위고는 <웃는 남자>를 통해 귀족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납치되어 기형적인 얼굴이 되어 정체성을 상실한 '웃는 남자'를 통해 도덕적인 '결핍'에 시달리는 귀족 사회와 경제적 신체적 '결핍'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대비시킨다. 그렇게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자신의 찢어진 얼굴을 통해 고스란히 담아냈던 '웃는 남자'는 이제 현대 미국의 뉴욕이 모티브가 된 '고담'시의 '아서 플랙'을 통해 오늘에 되살아난다.
아서 플랙, 끓어오르다 지금까지 <배트맨> 시리즈 속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요란했다.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보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이 기괴한 어릿광대는 기발한 각종 장치와 트릭을 통해 '고담시'를 뒤집고 배트맨의 허를 찌르곤 했다.
그러나 아직 조커가 되지 못한 <조커> 속 아서 플랙의 등장은 처연한다. 일용직 품팔이와도 같은 어릿광대 아서 플랙, 정신병원에서 나온 그가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일이지만 그 마저도 동네 아이들의 조롱거리로, 동료의 협잡으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우울증 환자로 지금 먹고 있는 7가지 약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그의 마음과 아랑곳없이 그가 '모셔야 할' 어머니는 그를 '해피'라 부른다. 어머니의 곁에서 모자가 함께 '머레이쇼'를 보며 자신의 꿈인 '코미디언'이 되는 순간을 상상할 때가 유일한 낙인 아서, 하지만 순간순간 튀어나오곤 하는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웃음은 그의 꿈조차 세간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비루한 삶, 그러나 책임져야 할 부양 가족, 그리고 오로지 '망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같은 꿈, 폭발을 향해 나아가는 초침처럼 그의 삶은 차곡차곡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른다. 그리고 그 '폭발'의 계기는 우연히 동료에 의해 쥐어진 총,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멈출 수 없는 웃음에 대한 폭력적 조롱이 빚어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참을 수 없어 총을 사용한 '범법자'였다.
하지만, 그 '범죄'는 뜻밖에도 그의 툭 튀어나온 뼈 일그러진 몸 속에 숨겨두었던 '욕망'을 꺼내든다. 불안을 달래려는 듯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 참으려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다그치는 웃음, 그리고 순간순간 그를 몽롱하게 찾아드는 '망상', 그럼에도 그는 '멀쩡한' 척하며 살아가려 했다. 비극적인 순간순간이 이어져 그를 잠식해 갔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가려 했던 그 내부에 있던 범죄적 욕망의 뇌관을 건드린 건 뜻밖에도 '어머니'이다.
고담시 최고의 부호 토머스 웨인에게 끊임없이 보내지던 어머니의 편지는 그가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붙잡으려 했던 가정, 그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는 계기가 된다. 어머니 말씀처럼 '해피'가 되려했던 아들 아서가 짊어지려 했던 그 비극적 운명은 그의 말처럼 '코미디'같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마는 가난한 집안의 입양아가 겪어낸 폭력의 결과물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사실'이 그가 버텨왔던 '정상적인 척 살아내려 했던 '삶'의 뇌관을 폭파해버린다. 그와 함께 두 발의 총성과 함께 날아간 그의 꿈도. 대신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견뎌왔던 그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조커'로 거듭난다.
고담시, 아서, 그리고 조커 <조커>는 '아서'라는 고담시의 가장 밑바닥 삶을 버텨가던 신체적 정신적 문제아가 고담시의 '사회적 문제'와 맞물리며 '안티 히어로'로서 거듭나게 되는 지점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아서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착각했던, 그래서 잠시 꿈에 부풀었던 토머스 웨인은 아서는 물론, 고담시 최고의 부호로써 고담시의 경제적 상황에 못견디며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그가 가진 '부'만큼의 자신감으로 멸시한다. 토머스를 아버지라 부른 아서의 해프닝은 그의 어머니의 '망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서 개인의 비참한 도발은 뜻밖에도 고담시 사회적 봉기의 도화선이 된다.
그토록 꿈이었던 머레이 쇼에 출연한 날, 정성스레 광대 분장을 하고 그 자리에 나간 아서는 때로는 아버지라 '망상'했던 자신의 정신적 대부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그 시간 아서로부터 촉발된 거리의 광대들 중 한 명이 고담시의 '대부' 토머스를 '삭제'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에 의해 벌어진 참사로 조커가 된 아서와 토머스의 아들 브루스는 맺어진다. 바로 '너는 나늘 완성시켜'라는 조커의 대사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개인의 원한, 개인의 질곡이 궁극에서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갈등과 순치되는 순간, 바로 그 절정에서 아서는 두 팔 벌려 자신의 '조커'됨을 받아들이고, 이미 미치광이 아서에 몰두했던 관객들은 그 수많은 조커들 사이에서 '조커'로서 스스로 세례를 내리는 아서에게 묘한 '공감'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고담시가 가진 부조리와 갈등이 자아내는 '비극적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사회적 정체성'에 자신을 어떻게든 꿰어맞추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개인'들만이 가진 '고뇌'의 비등점을 조커가 된 아서가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지점, 그렇게 아서와 고담시의 '기층 민중'들은 '아버지'를 밟고 자신의 세상을 연다. 그저 디씨 코믹스의 광기어린 조력자였던 조커가 사회부조리극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집안의 가장이 자신의 부인 외에 또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일이 있었다. 바람직한 건 아니었지만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묵인된 '관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9년에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렇게 한 시대에 별로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이 다음 시대로 오면 매우 지탄받을 만한 대상이 되곤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몸살'처럼 겪고 있는 문제도 어떻게 보면 바로 이 '변화된 시대'의 담론으로 부터 시작된 것일 지도 모른다. 바로 이 '변화된 시대의 담론'과 관련하여 ebs 다큐 프라임은 <진정성 시대> 6부작을 마련했다. 9월 23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일까지 무려 6부작에 걸친 대장정이다.
'진정성', 그 시작은 진심어린 사과로부터 진정성의 시작을 연 건 뜻밖에도 '사과'이다. 왜 '사과'일까? 지난 2003년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뉴욕 타임즈는 자신의 신문에 실린 조작 기사에 대한 사과문을 실었다. '잘못이 일어났을 때 바로 잡아라'라는 모토에 따라 독자에게 사과를 한 뉴욕 타임즈는 덕분에 '정론지'로서의 명성과 전통이라는 '진정성'을 더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단 한 건의 왜곡된 기사 하나만으로도 뉴욕 타임즈의 전통은 무너질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진정성'으로 통하는 '사과'의 중요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왜 지금 '사과'일까?
텍사스대에서 'The science of saying sorry'를 연구하는 티머시 쿰스는 1994년에서 부터 2018년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한 결과 꾸준히 사회적으로 '사과'의 중요성이 증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증가와 함께 대중들 사이에서 각종 사안에 대한 의견들이 빠르게 전파되고 개진되며, 그런 대중들이 제시하는 요구와 요청에 대해 리더들이 대답을 해야 했고, 이는 곧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일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성 있는 사과란 어떤 것일까? 각 나라마다 '사과'를 말하는 언어가 있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영어를 예를 들자면, 'I am sorry'와 'Apologize', 가 주는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흔히 친근한 사이에서 쓰는 말로 알려진 'I am sorry', 그 의미에는 일어난 일을 안타깝게는 여기지는 거기엔 '책임 의식'이 없다. 반면 'apologize'는 더 잘할 수 있었고 더 잘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성'은 바로 이 '책임'에서 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성있는 사과를 잘 하지 못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오해하게 했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외려 반발을 샀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역시 '사과' 대신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쫓겨났다.
왜 이들은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지나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내가 더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헛된 자존심이 왜 사과를 해야하냐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자기애의 부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과'를 끝까지 피하려 만들기도 한다.
'사과'는 인간만이 가진 갈등 조정의 수단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을 넘어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해결 방식이 되기도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희생자 박물관을 만들고 과거사를 가르치는 등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에 더해 당시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끓고 진정한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범 국가'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졌다. 반면 그 반대의 지점에 일본이 있다.
일본은 여전히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정치인들이 참배하는가 하면, '통석의 념' 등 애매한 외교적 수사로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려 애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건, 바로 '피해자'이다. 피해자가 메시지의 중심에 놓여있는 진정성있는 행동을 하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여전히 '일본'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들끓게 되는 건 바로 그 '피해자'인 우리에게 '일본의 사과'가 '진정성있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과가 진정성있기 위해서는 사과의 수사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말에 덧붙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재발 방지의 구체적인 대안과 자신이 피해를 입은 상대방에 대해 책임을 지는 '보상'의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 말뿐인 사과, 후회는 사과를 받는 상대방의 '냉소'와 반발을 부른다.
진정성을 파는 사회 이렇게 소셜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진정성'이 더욱 중요시되는 것과 달리 ,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일이 점점 더 드물어 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신뢰'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어만 간다. 그러기에 물건을 파는 기업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는 '진정성'을 마케팅의 '포인트'로 삼는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파자노, 그곳에 오래된 푸줏간 식당이 있다. 외진 곳에 있는 식당이라 얕보면 안된다. 전세계에서 이곳 식당의 고기를 맛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든다. 8대째 250년, 이제 64세가 된 다리우 체케니 씨가 운영한 지만 44년된 이 식당의 메뉴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저 소금을 뿌려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고기가 다다. 그런데 그 고기가 피레네 산맥에서 방목한 소들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찌기 '희생된 동물에게 감사하라'는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동물이 행복한 삶을 살았느냐 화두 아래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진 '진정성 있는 음식'이 바로 50유로나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이 식당의 유일한 메뉴다.
이렇게 21세기는 환경 오염이 심해질 수록, 음식을 먹는 자와 만드는 자의 거리가 멀어질 수록, '자연', '천연, 등의 '진정성'을 화두로 내세운 '마케팅'이 범람한다. <진정성의 힘>을 쓴 조셉 파인 교수는 바로 이런 '인공'에 대비되는 '자연스러운 진정성'이 바로 이 시대 진정성의 첫 번째 근원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진정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발품을 판다. 경기도 여주의 한 목장, 지난 2006년 소비자와 밀착되는 체험 공간으로 목장을 연 조옥향 씨의 목장에 주말마다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대리 만족'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다.
거기에 가격까지 착하면 금상첨화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DIY가구의 대명사가 된 스웨덴의 가구 회사는 '합리적 가격'을 마케팅의 포인트로 하여 소비자가 직접 만드는 '플랙팩 시스템'으로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 스스로 부엌용 식탁을 영업용 책상으로 알뜰하게 살아왔던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의 '가격은 진정하다'는 모토를 위해 오늘도 이 회사는 '합리적'인 소비를 위한 연구를 거듭한다.
또한 '진정성'은 '시간'의 마력에 기댄다. 아직도 전통 방식이 오크통을 고집하고 처음 사용했던 샘물로 '단일적 영감'을 광고하는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 위스키라던가, 나폴레옹이 다녀가고, 헤밍웨이가 찾던 그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가장 오래된 까페의 '보수성'은 '진정성'의 또 다른 원천이 된다. 아니 라스베이거스에 재연된 베니스처럼 '오리지널리티'를 흉내라도 내야 한다.
이렇게 '인스턴트'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진정성'을 갈구한다. '진정성'이 있는 물건을 소비하고, 자신들의 요구와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리더를 원한다.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추지 못했을 때 진솔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멸종한 '진정성'에 대한 '노스텔지어'처럼
시대를 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최근 '다큐'들의 화법이 달라졌다. 이전 정부에서 집중했던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비판적' 다큐들이 한결 줄어든 대신에,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세대 갈등'의 요인 중 하나인 젊은 세대의 고민과 고충에 대한 '해법'과 '대안'에 대한 꾸준한 모색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mbc스페셜의 '요즘 것들' 시리즈, 그리고 sbs스페셜의 <체인져스-나도 돈벌고 싶다>, <297대1의 꿈, 그후 10년>, <간헐적 가족> 등이 그런 일련의 흐름 속에 있는 다큐이다. 그리고 9월 29일 방영된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들 하비 프러너> 역시 동시대 젊은 층의 새로운 직업적 모색을 다룬다.
진지한 여가 한강 시민공원에서 열린 아마츄어 서핑대회, 이곳에 백예림씨도 참가했다. 하지만 이미 서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춤을 추며 웨이크 서핑을 하는 영상을 통해 예림씨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요즘 빠져있는 건 '서핑복'이다.
셰프, 승무원, 공무원....지금까지 그녀가 도전했던 직업들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사로잡은 건 서핑, 그런데 서핑을 하다보니 갈아입기조차 불편한 서핑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걸 좀 편하게 만들 수 없을까? 기왕이면 멋지고 이쁘게,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서핑복 쇼핑몰의 사장님이 되었다. 직접 맘에 드는 서핑복을 만들고, 스스로 모델이 되어 홍보하고, 판매까지 하는 예림씨,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의 자금 마련을 위해 그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슬금슬금 중고 사이트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비록 집은 점점 비어가지만 서핑복을 향한 그녀의 열정은 그와 반비례하여 불붙고 있는 중이다.
이제 이십대 초반인 김슬기씨는 자신의 공방에서 독특하고도 이쁜 케익의 마무리가 한참이다. 마무리된 케잌은 주인을 찾아 배달이 되는데, 오늘 김슬기 씨가 만든 케잌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개'님이시다.
바로 개들을 위한 독특하고도 예쁜 디저트를 만드는 일이 김슬기씨의 사업이다. 아버지와 둘이 사는 슬기씨, 그 허전한 가족의 공간을 위해 슬곰, 달곰 두 마리의 강아지들이 채웠다. 그러다 자신이 즐겨먹는 간식들을 애완 동물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 사람들이 먹는 초콜릿을 못먹는 강아지들을 위해 케롭 파우더를 사용하는 등 동물들만을 위한 마카롱, 초코파이, 초코 송이, 케잌이 탄생했다.
나날이 번창하는 그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이삿짐 나르던 일을 하던 아버지가 배달에 나섰다. 이제는 자신의 애완 동물을 위해 간식을 만들고픈 사람들을 위한 수업도 하게 되었고, 제자들도 생겼다. 언젠가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로 강단에 서는 야무진 꿈을 키워가는 슬기씨, 그녀의 꿈을 이룰 날이 멀지 않을 듯하다.
현재 캘거리 대학의 석좌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로버트 스테빈슨 교수는 '진지한 여가' 이론을 주장한다. '특수한 기술, 지식, 경험 등을 획득하고 표출하는 충분히 본질적이고 재미있고, 참여자가 경력을 쌓아가는 성취감있는 아마츄어, 취미 활동가, 자원봉사자의 체계적인 핵심활동'이라고 자신의 책 <진지한 여가>를 통해 정의한 이론이다. 크로스 컨트리, 산악 트레킹, 재즈 연주를 즐기는 스테빈슨 교수는 바나나 칵테일의 주재료는 '바나나'이지만, 거기에 '버터, 계피. 아이스크림' 등의 다양한 부재료가 들어감으로써 '풍미'를 더하듯, 진지한 여가 활동은 삶의 질을 더욱 고양시킬 것이라 주장한다.
다큐는 이 '진지한 여가' 이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여가는 tv시청이나 낮잠 등과 같은 일상적 여가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으로서의 '여가'인 것이다.
하비 프러너, 아직은 도전 중 2009년 한 방송을 통해 '화장품 좋아하는 남자'로 소개되었던 김한균씨는 이제 어엿한 화장품 제조업체 사장님이 되었다. 비비 크림 등 당시만 해도 남자들에게는 낯설었던 화장품에 매료되었던 한균씨, 자신이 좋아하는 화장품을 사업으로 '런칭'했던 그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남성 화장품 사업에서 고배를 마셨다.
남자라면 다 비비 크림을 좋아할 줄 알았던 그 초기의 사업 아이템은 아이를 낳고 아토피에 시달리는 아이를 위한 보습 화장품으로 아이템을 변화시키며 중국 시장에서 잘 나가는 '왕홍'이 되었다. 여기서 왕홍은 현재 중국 경제를 달구는 '현실이나 인터넷 생활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네티즌의 관심을 끌어 인기를 얻은 사람들'을 뜻하는 최신 경제 크리에이터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잘 하는 일이 된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비행기 승무원이던 주이형씨는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다 허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다친 허리를 치료하기 위해 시작한 피트니스, 이제 그녀는 동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2015년 머슬마니아 유니버스 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프로카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좋아하는 일이 돈버는 수단이 되니 그만큼의 압박감이 커져가고, 그 돌파구를 그녀는 다시 머슬 마니아를 접목시킨 디제잉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운동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두려움을 '음악'을 통해 해소했던 경험을 새로운 일의 영역으로 개척해 운동 디제잉의 새로운 도전을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안정은 씨 역시 마찬가지다. 취업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던 달리기가 이제 그녀를 달리기 전도사로 만들었다. 몽골 고비 사막 등 달리기를 하며 딴 80~90개의 메달은 달렸던 장소, 함께 뛴 사람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일기장과 같은 기록이 되었고, <나는 오늘 모르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라는 책의 결과물을 낳았다. 서울에서 달리기 좋은 코스 100개를 만드는 등 저자, 기획가, 강연자 등 이제 정은씨는 '직업 부자'가 되었다.
이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잘 하게 되었고, 그게 그들의 직업이 된 사람들을 '하비 프러너'라 칭한다. 하비 프러너의 등장에는 무엇보다 더 이상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게 된 '산업 구조'의 변화가 기반이 된다. '인간 노동의 고용'을 넘어 '기계', '인공 지능' 등이 그 영역을 대변하게 되며 '노동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든 사회, 거기에 우리 사회에서도 보여지듯이 수명의 증가로 인해 노후의 삶이 '노동'에 종사하는 만큼 늘어난 사회는 '여가'의 의미가 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거기에 산업 고용 형태의 변화가 수반된다. 김한균씨가 중국의 왕홍이 되었듯이, 인터넷 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직업군이 등장하는 산업의 새로운 조류 역시 '하비 프러너'의 등장을 촉진한다. 거기에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듯이 젊은 층의 '취업 불황' 역시 새로운 직업군의 모색을 재촉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오프로드 달리기 기획자로 일하고 있느 이윤주 씨의 하소연처럼, 취미가 일이 되는 하비 프러너가 원하는 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느냐라는 딜레마가 있다. 좋아서 시작한 서핑복 사업이지만 집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아야만 그 일을 계속 지속시킬 수 있는 예림씨처럼, 아직 우리 사회에서 '취미'가 곧 돈 벌이가 되며 수입도 보장할 수 있는 영역은 '실험' 단계에 있다. 더구나 최근 우리 사회를 덮치고 있는 '장기적 불황'의 기운은 '취미'를 직업에 도전할 수 있는 삶의 여유마저 잠식시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이번에도 '역시'다. 김용수 감독의 <달리는 조사관>은 회를 거듭할 수록 이야기의 밀도는 진해지고, 미장션은 더욱 예술적이어지지만, 역설적으로 시청률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작과 달리, 동시간대 종편의 <우아한 가>가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치고나가며 시청자청의 이반이 심해지고, 거기에 감각적이면서도 '이성적'인 김용수 감독의 연출 방식이 여전히 이 시대엔 낯선듯하다. 그럼에도 3,4회 <달리는 조사관>이 보여준 이야기는 이 시대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인권'의 실마리를 풀어준다.
인권, 그 당연하고도 위협적인 화두의 딜레마 인권,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 '사전'은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장애인이건 아니건, 여자건 남자건, 외국인이건 아니건 사람은 누구나 누려야 할 '인간적'인 권리가 있다.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인간적 권리이다. 하지만 '인권'이 이 인간적 권리가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점은 늘 어느 사회에서나 각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러 '편견'으로 인해 인간적 권리들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조사관>의 배경이 되는 국가 인권 증진위원회는 바로 이런 '위협받고 있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일을 하는 곳이다.
2019년 소오소관 주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주인이 칼에 찔려 사망한 것. 이를 조사한 경찰은 이 주점에서 일하던 지순구(장정연 분)가 외국인 노동자 나뎃 쿠미(스잘 분)과 함께 밀린 임금 50만원 받으러 갔다가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수감중이던 나뎃은 자신의 옷에 '나는 사장을 죽이지 않았다'라 쓰고 스스로 목을 매 죽음으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리고 나뎃의 형 사와디 쿠미야가 인권 증진 위원회(이하 인권위)를 찾아와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 호소한다. 그리고 지순구의 변호사인 대형 로펌 '썬앤문'의 오태문((심지호 분)가 등장해 경찰이 외국인 노동자 나뎃, 그리고 경계성 지능장애인 지순구를 '임의 동행'해 장시간 심문하여 경찰의 시나리오에 맞춰 '자백'을 받아냈다며 무죄를 주장한다.
하지만 인권위는 의견이 갈린다. 인권위가 할 수 있는 거, 해야 하는 거는 '조사'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상 경찰의 무리한 강압적 수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애초의 소오소관 주점 살인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재조사'해야 하지만 그건 결국 인권위의 영역을 넘어선 '수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성격에 맞게 '조사'만 해야 한다는 한윤서(이요원 분)와 예의 열혈 검사 출신답게 '수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배홍태(최귀화 분)는 서로 다른 의견으로 티격캐격하지만 결국 '사건'의 진실을 향해 한 발 한 발 들어서고 만다.
편견의 공동 정범들 여기서 <달리는 조사관>이 주목하고자 하는 건 바로, 편견이다. 경찰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경계성 지능 장애인이 범죄 피의자가 되어 왔을 때 보여준 편견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관습적 편견'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인권위에 '조사'를 받으러 온 경찰은 외려 반박한다. 과연 경찰이 그렇게 '편견'만으로 수사했겠냐고. 조사 과정에서 지순구는 경찰이 간과했던 '소화기'를 언급하며 범인만이 아는 현장의 상황을 '자백'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편견'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범인만이 아는 현장의 상황이란 '자백'에 대한 편견이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관들은 현장과 조사한 내용을 보며 이 '자백'한 내용의 헛점을 찾아들어간다. 그리고 결국 동네 주민의 증언을 통해 사건 당일 나뎃은 지순구와 함께 술집에 간 것이 아니라 집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렇지만 현장에 있었던 족적은 2명의 것. 결국 지순구와 함께 술집을 찾은 건 지순구 고시원에 지내던 고시생 형이었다.
그러나, 고시 1차 합격을 했다는 형은 '고시'라는 사회적 관문을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피의자의 그물에서 벗어났다. 더구나 지순구의 변호사는 나뎃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대신, 나뎃을 재물삼아 지순구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의 사건 수임 성과만을 노린다. 결국 조사관들은 그 '고시 1차 합격'이라는 허울의 실체를 밝혀낸다. 사실은 백수였지만 남들한테 그럴 듯해 보이기 위해 '고시생'이라는 겉치레로 자신을 치장했던 것. 그리고 그 '고시생'보다는 당연히 '외국인 노동자'가 더 범죄 피의자로 그럴 듯해 보였기에 수사는 '진실' 보다는 그럴 듯한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경계성 지능 장애라는 장애 역시 변호사의 편의적인 사건 포장의 함정이 된다.
'조사관'이라는 신분적 딜레마를 넘어 한윤서는 지순구에게 충고한다. 나뎃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사의 그럴듯한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가 '무죄'라는 얄팍한 법의 그물을 피하는 비겁함에 대해. 그리고 수사를 할수 없는 한계를 넘어, 그럼에도 '나뎃'에게 행해졌던 부당한 겁박 수사에 대한 인권위의 입장을 밝히고. 비록 고시원 형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공동정범이지만 지순구에게 어떤 살인적 의도가 없었음에 대한 의견도 빼놓지 않는다.
언뜻 평범한 살인 사건, 그러나 그 '평범한 사건' 속에 숨겨진 건 우리 사회를 잠식한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고, 또 역설적으로 '학벌'과 이제는 고착화 되어가는 '고시 합격자'라는 신분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는 '인간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늘 선언적으로 다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에 대한 다종다양한 수식어의 함정에 빠져 있는지 드라마는 차근차근 폭로한다. 그러면서 한윤서의 입을 통해 묻는다. 우리 역시 '편견의 공동 정범'이 아니냐고.
<달리는 조사관>를 채우는 건 '감각적'인 영상과 구도이다. 하지만 그 구도를 통해서 제작진이 진득하게 설득하는 건 우리의 굳어져 가는 사고의 양식이다. 이는 이미 김용수 감독의 전작 <아이언맨>에서 보여졌던 방식이다. 드라마를 채운 건 유려하고 감각적이고 심지어 서정적인 영상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드라마는 예리하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이제 <달리는 조사관> 역시 마찬가지다. 불편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고 방식'에 대해 '질문'하는 '공간'을 연다. 그래서 그건 낯설고 어색하다. 바로 그 낯설고 어색함이 <달리는 조사관>의 딜레마이자, 매력이다.
보트 피틀', 이 말은 원래 살 곳을 찾아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난민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이 '보트 피플'이 영국에 등장했다. 바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영국의 청년들이 템즈강 일대에서 '보트'로 집을 삼아 살기 시작하며 영국형 보트 피플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트 피플'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니게 되었다. 서울의 평균 집값이 7억에 달한다. 물론 이건 평균이다. 강남으로 가면 날마다 치솟아 몇 십억을 호가한다. 7억이라 해도 2백만원씩 30년을 모아야 하는 한 달에 2백만원을 벌지 못하는 청년층이 70%를 상회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 집을 마련한다는 건 이제 '언감생심'인 세상이 되었다. 과연 청년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신혼 여행만 4년째 2016년 12월에 결혼을 했다. 대학도 채 졸업하지 않은 채 결혼에 돌입한 전재민- 김송희 부부, 신혼집을 얻는 대신, 그 돈으로 항공권을 사서 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어언 4년 여, 이들은 어느새 '프로 여행 영상 제작자'가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신혼여행(?)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행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게 적게는 백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까지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부부는 이제 천만 원 정도의 10kg이 넘는 방송장비를 짊어지고 경관이 좋은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는 프로 여행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여행의 경험은 두 사람을 어느새 독자 초청 강연회의 저자로 만들어 주었다.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오늘은 행복하니까>의 저자 쨈쏭 부부가 바로 전재민-김송희 부부 자신이다. 강연회에서 두 사람은 에베레스트 트레키의 경험을 나눈다.
새벽 누구보다 먼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기 위해 나섰던 두 사람, 하지만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겨우 주변의 도움으로 정상을 정복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은 천천히 가더라도 방향만 맞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나만의, 우리만의 방향'에 집중하고 싶다는 두 사람, 이제 수익은 생겼지만 '평생 살아갈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집'을 마련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여행지에서 잠시 머무는 그곳이 '순간'이지만 어느덧 두 사람의 집이 된 지금, 인생이 곧 여행이 아니겠나며, 결국 인생이란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라며, 평생 머무를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삶을 얻었다고 말한다.
고시원 대신 캠핑카 김동해씨는 자신에게 온 택배를 받으러 차를 타고 가야한다. 왜냐하면 그의 집은 택배 아저씨가 찾아갈 수 없는 '캠핑카'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구리시 왕숙천 천변 무료 주차장에 지금은 머무르고 있는 동해씨,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의 집은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어릴 적 꿈은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올라온 서울, 현실은 월세를 내기도 빠듯한 삶이었다. 반지하, 고시원, 지금까지 동해씨가 살아온 공간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고시원 살이가 지겨웠던 그는 보증금 4천만 원으로 중고 캠핑카를 마련했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대리 운전' 일을 위해 보다 더 기동성이 있는 '전동휠'를 마련했다.
물론 자유로운 '집'을 마련했지만 캠핑카에서의 생활도 녹록치는 않다. 35도를 넘나드는 한여름, 밖의 실온보다 5~6도가 높은 캠핑카에서 여름을 나는 건 고역이었다. 기능이 떨어지는 냉장고 덕에 식재료가 잘 상해서 애를 먹는 것도, 물탱크는 있지만 샤워 등을 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도 나름 고충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더위, 추위 등 자연적 환경을 피하는 곳이라는 집의 사전적 의미를 놓고 보면 엄연히 캠핑카는 덜 스위트해도 그의 '홈'이다.
햇빛이 들지 않은 고시원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는 동해씨, 어제처럼 살면 어제처럼 밖에 살 수 없다고 써놓은 캠핑카 속 그의 좌우명처럼 그는 이 캠핑카를 '고치'로 삼아 탈피할 미래를 꿈꾼다.
서울에서 한 달 살이 70만원이면 수영장 딸린 집이 웹디자이너인 조희정 씨는 사전적 정의 그대로 '디지털 노마드'족이다. 디지털 시스템 아래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일한다는 디지털 노마드족에 걸맞게 조지아에서 서울에 있는 동료와 화상 회의를 통해 일을 진행한다.
조지아에서 생활한 지 어언 28일 째, 세계의 여러 곳을 떠돌며 한 달 살기를 실행하고 있다. 이곳 조지아는 유럽과 같은 환경이지만 서울에서 장 한번 보면 8~10만원이나 들 비용이 이곳에서는 한껏 장을 봐도 2만2천원 정도, 한 달 40만원이면 충분해 한 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한 때는 워커홀릭이었다. 그러나 경쟁적인 일 관계 속에서 자신이 소모되는 게 싫어 독립을 했다. 그리고 이제 모바일 웹 서비스를 개발하며 세계를 떠돌고 있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직업이 그녀의 방랑을 가능케 한다. 한 달이 끝난 그녀가 다음에 선택한 곳은 '독일', 그곳에서는 또 다른 한 달짜리 ' 새집'이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는 홀가분한게 가방 한 개를 들고 또 다른 '노마드'로서의 삶을 떠난다.
쫓겨나는 대신 이동식 집을 농사를 짓고 싶던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땅'이 없던 그에게 '농사'란 꿈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임대했던 땅에서 쫓겨난 청년, 홧김에 세계로 떠났다. 유지황 씨를 비롯한 청년 3인방의 2년 여에 걸친 무일푼 세계 농업 체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파밍 보이즈>라는 다큐 영화로 제작까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지황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를 찾아나선 제작진이 그를 만난 곳은 6평짜리 이동식 주택에서이다. 농사를 짓는 청년을 위한 이동식 주택, 입구에 일을 하고 온 작업복을 벗어 세탁할 세탁기에서부터 샤워실까지 이어지는 비록 작지만 한 사람이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간을 단 돈 천만원으로 지황 씨는 지었다.
왜 집을 지었을까? 세계를 떠돌면서 텐트에서 지내다 보니 아늑한 집이 가지고 싶었다고 한다. 처음엔 농촌에 많은 빈집을 이용해 보고자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말이 빈집이지 외지에 사는 자녀가 주인인 집을 임대하기도 쉽지 않았고, 막상 살만하게 고치려면 2~3000 정도 비용이 드니 그것도 만만치 않았단다. 무엇보다 농촌에 정착하는 것도 잠시 쫓겨나는 경험을 했던 그는 집이라도 가지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청년들을 위한 이동식 주거 공간을 마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자신의 손으로 지은 자신의 집, 일년에 전기세 등으로 20~30만원 정도, 거기에 겨울에 난로를 떼는 비용으로 5~6만원, 더 이상 '월세'에 시달릴 염려가 없는 집, 그런 ''타이니 하우스'들이, 그런 집을 짓고 살고픈 청년들이 남해군 두모마을에 모였다. 지자체와 이장님의 적극 지원 아래 폐교를 빌려 6개월 정도 기한을 정해 뜻을 맞는 사람들과 벌써 6채 째 집을 짓고 있는 중이다. 첫 농사를 짓고 쫓겨난 지 어언 7년 청년 지황씨의 꿈은 이제 ' 청년 공동체'로 부풀어간다.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시대>에 따르면 이른바 '386'이라 통칭되는 세대는 어느덧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벌어서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청년 세대'들이 있다. 다큐는 말이 좋아 집을 버리고 세상을 찾았다고 하지만, 스스로 집을 얻을 수 없는 세대의 궁여지책, 저마다의 각자도생을 보여준다. 서울에서는 더 이상 한 달 생활하기가 버거워 세계를 떠도는 사람들, 집을 얻을 수 없어 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그리고 쫓겨날 수 없어 달팽이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집을 짓는 청년들, 과연 이게 요즘 것들이 자신의 '세상'을 찾는 보편적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땅에 정착하고 싶은 청년들을 '하우스 노마드'로 모는 세상, 이 땅에서, 세계에서 떠도는 청년 노마드들을 그저 세상에의 도전이라 퉁칠 수 있을까.
sbs는 1991년부터 2009년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공채 탈렌트를 선발했다. 공채 탈렌트, kbs나 mbc 등이 드라마를 자체 제작하던 시절 '공채 탈렌트'는 마치 지금의 '공사 취업' 그 이상, 배우로서의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규모와 환경이 변화하며 '공채'가 아닌 '연예기획사' 등 다른 방식으로 데뷔한 스타들이 주연을 꿰어차면서 공채 탈렌트의 면모는 퇴색했다. 그럼에도 1990년 개국한 sbs는 새로 만들어질 자사 드라마의 자원을 위해 '공채' 탈렌트를 모집했고,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성동일, 김지수, 김남주, 김명민 등이 바로 이 sbs 공채라는 관문을 통해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sbs에서 공채 1기인 성동일이 1996년 방영된 <은실이> 속 단역에 가까운 역할인 '빨간 양말'을 통해 세상에 그 이름을 알렸듯 sbs 공채의 길은 험란했다. 결국 2003년 10기를 끝으로 더 이상 공채라는 이름의 탈렌트 공모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 일부 스타급 연기자들의 고액 출연료 등으로 인한 제작비 증가가 문제가 되고, 연예 기획사를 통한 배우 수급이 방송국과 마찰을 빚게 되자 kbs에 이어 sbs도 다시 자사 방송국에 1,2년 동안 전속되어 활동하는 공채 탈렌트를 모집하게 된다.
이미 '연예 기획사'의 몸집이 거대해져가는 드라마 시장, 하지만 그만큼 드라마를 통한 스타의 탄생 역시 주목받고 각광받던 시절, 2009년 이루어진 sbs공채 탈렌트 모집에는 무려 4157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남자 397대1, 여자 222대1, 평균 29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4명이 영광스런 sbs공채 11기 탈렌트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김성오, 허준석, 김가은 등 그 14명 중 그래도 지금도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그 엄청난 경쟁을 뚫고 공채 탈렌트가 된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sbs스페셜>이 그들을 찾아나선다.
297대1, 그리고 10년 처음 만난 건 김호창씨,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이름을 치면 4~50개의 작품이 나열될만큼 여러 작품 속 감초같은 조연으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얼굴이다. 바로 그가 10년 전 297대1의 경쟁을 뚫고 sbs공채 탈렌트가 된 주인공 중 한 명이다.
드라마를 보느라 직장 나갈 시간인 것도 잊어버리신 어머니를 보면 젊은 김호창은 그게 바로 자신의 길이라 생각했다. 저 드라마에 나오면 더 이상 어머니가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최종합격, sbs공채 탈렌트라는 명찰을 걸고 방송국에 들어설 때면 성공은 눈 앞에 있는 거 같았고, 곧 유명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렵게 공채가 된 동기들은 청소 아줌마보다 더 일찌 나와 탈렌트 실을 지켰다. 지나가는 행인 등 작은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그는 다작 배우가 되었고, 스스로 처절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아직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래도 여전히 연극과 영화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김호장 씨의 'dreams come true'는 여전히 ing중이다.
당시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주목받았던 이수진 씨, 당시를 그녀는 눈 앞에 계단이 보여 걸어가기만 하면 될 것같았던 시기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오디션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그녀를 찾는 미팅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그녀 앞에 올라가기만 하면 될 것 같던 계단은 점점 투명해져 갔다. 이제 10년이 지난 이수진은 이제 이가현이 되어 다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있다. 생계를 위해 친구 까페 일을 돕고 있다. 물론 그만 둘까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또 돌아오고야 말았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땐 무엇이 되고 싶었지만, 이젠 그저 이 일을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당대 이미 스타였던 김태희와 동명이인으로 주목받았던 김태희씨는 이제 중국으로 향한다. 유명 백화점 모델로 발탁되어 중국에서 연예 활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 자신을 알리는 것이 쉽지 않아 언어의 장벽을 감수하고서라도 선택한 길이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10년전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린 태희씨는 주마등같이 눈 앞에 스치는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참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고 한다. 열심히 했지만 항상 외줄타기와도 같은 배우의 삶, 떨어질 듯하다가도 다시 붙잡고 가는 그런 삶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목표에 골인할 수 있을 것이란 신념으로 그녀는 중국에서의 도전을 시작한다.
그리고 동기들 중 가장 미모가 뛰어나서 주목받았던 김효주씨는 활동 도중 사라져 동기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사람이다.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택할 용기가 없었다던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어 조용히 그 길에서 물러섰다고 한다. 그리고 미술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제서야 비로소 마음이 유연해져 자신의 길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10년전 자신의 모습이 마치 전생같다던 효주씨는 이제 다시 용기를 내서 오디션을 보고, 드라마와 영화, 연극으로 인생 2막을 준비 중이다.
김호창 씨, 이수진씨, 김태희씨, 김효주 씨, 비록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여전히 10년전 공채 탈렌트가 되어 선택한 길 위에 있다. 비록 아직 그들의 꿈은 진행 중이지만, 대번에 날아오를 것같던 10년전 그때와 달리, 이제 그들은 '날아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연기'하는 자신의 삶이 좋아 이 길 위에 있다.
반면, 당시 21살 최연소로 발탁된 석진이 씨 당시만 해도 연기에 더더욱 미치고 싶다며 포부를 당차게 밝혔던 석진이씨는 이제 그 길 위에 있지 않다. 처음에는 하루하루 꿈꾸는 것 같았고 즐거웠지만 계속계속 살아남아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의 생리가 그녀의 성향과 맞지 않았던 것. 복학을 하고 취업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며 불투명한 미래에 저당잡힌 자신을 견딜 수 없었던 석진이 씨는 몇 달 동안 한 두시간씩 잠을 자며 공부해서 승무원이 되었다. 비록 일은 힘들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배우와 다른 안정적인 생활이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고 웃는다.
29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날개를 달았던 14명의 10년 전 공채 탈렌트들, 다큐는 그렇게 10년 전 꿈을 꾸었던 젊은이들을 통해 다시 꿈을 묻는다. 십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혹은 왜 여전히 이곳에 있는지, 혹은 다른 길을 선택했는지를 짚어본다. 그것을 통해, 그저 배우가 되려고 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여전히 갈림길에 선 동시대인들의 공감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10년 전을 회고한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그들은 공채라는 자부심을 채 느끼기도 전에 그 날개는 초라해 졌다. 당시 몇몇 드라마에 출연 기회는 얻었지만, 이미 대세가 되었던 외주 제작과 연예 기획사의 융성기에 방송국은 자사가 뽑아놓은 젊은 유망주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었을까? 그랬다면 그들이 기억하는 10년 전이 그토록 애잔하지는 않았을 것같다. 물론 각자의 재능과 스타성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도 있겠지만, 시스템 속에 그들을 묶어놓고 흘러보낸 시간, 10년 전과 지금의 꿈을 논하기 전에, 그 꿈을 저당잡았던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꿈은 그저 막연한 개인의 의지만이 아니다. 시대와 사회가 움틔워주어야 할 새싹이다.
1993년에서 2012년까지 무려 10여년 방영된 kbs2의 <체험 삶의 현장>은 연예인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다양한 노동의 현장에서 땀을 흘려 벌어돈 돈으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노동'을 고전적으로 다룬다. '노동'을 경험해보지 않았던 이들이 그 '현장'에서 서툴러 당황해하고 고생하는 '체험담', 그 자체가 볼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애쓴' 댓가로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미담'을 더해 <체험 삶의 현장>은 오래도록 '휴머니티'한 예능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노동의 '현장'은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되었고 대안을 찾아내는 노력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불상사' 들로 인해 결국 프로그램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노동'이 예능으로 돌아왔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tvn에서 새로 시작한 예능 <일로 만난 사이>와 유투브에서 조회수 신기록 행진을 벌이고 있는 전직 아나운서 장성규의 일일 체험 현장을 다룬 <워크맨>이다.
두 프로그램의 형식은 사실 단순하다. 단 하루 동안 <일로 만난 사이>가 유재석과 초대된 게스트, 혹은 게스트들이, 그리고 <워크맨>에서는 장성규가 '노동의 현장'에 투입되어 일을 하는 것이다.
시대 공감; <워크맨> 그냥 하루종일 일만 할 뿐인데 왜 새로운 예능의 화두와 대세가 되었을까? <아는 형님>과 <방구석 1열>을 통해 차근차근 예능감을 키우며 순발력있는 입담을 선보이던 장성규 아나운서는 프리 선언 후 유투브로 향했다. 10여분 짧은 시간에 그가 투입된 각종 '노동'의 현장에서의 예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갈고 닦은, 그리고 거기에 더해 보다 날것의 생생한 반응을 보여주며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전의 <체험 삶의 현장>이 다룬 '고전적'인 현장과는 다른 요즘 젊은 것들이 땀 흘리며 살아가는 그럼에도 꼴랑 법적인 '시급'이라는 테두리에 갇힌 채 보상받지 못한 노동의 현장을 장성규가 대변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탄으로 방영된 에버랜드 알바에서, 장성규는 에버랜드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의 현장을 섭렵한다. 그의 말대로 매일 웃고만 있어서 편하게 일하는구나 했던 그곳에서 관객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춤추고 노래하고, 아이들의 물세례를 맞으며, 심지어 고난이도의 놀이기구를 타야 하는 과정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자체로 웬만한 서바이벌 예능 저리가라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웃으며 그걸 해낸다. 어디 에버랜드 뿐일까. 미용실, 편의점, 피자집 등등 이 시대 '알바'의 행렬은 무궁무진하고 장성규는 그걸 온몸으로 체험해 내며 ''페이소스' 넘치는 웃음을 자아낸다.
바로 그 지점, 오늘날 '알바'라는 통칭으로, 그리고 '시급'이라는 대가로 퉁친 현장의 고생담을 장성규는 '리얼'하게 전해주며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마지막, 그가 받은 '시급'을 정산하며 그날의 흘린 땀과 '비례'하지 않는 혹은 때로는 '게임 회사' 등 직장의 레벨에 따라 '후하게 '치뤄진 대가에 대한 역시나 '날것의' 반응을 보며 동시대인들은 '동시대의 애환'을 나눈다. 젊은 세대가 여유를 낼 수 있는 시간, 10여분 그 시간 동안 장성규가 울고 웃으며 때로는 삭제되지만 충분히 알 수 있는 질펀한 '욕'들을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은 그렇게 서로가 버텨가는 삶을 나누는 것이다.
유재석 버전 체험 삶의 현장 반면에 유재석을 앞세워 런칭한 <일로 만난 사이>는 보다 고전적인 <체험 삶의 현장> 버전에 가깝다. 단지 예전< 체험 삶의 현장>이 양지운이라는 걸출한 성우의 구성진 입담을 배경으로 아나운서들과 다른 삶의 현장을 다녀온 출연자들의 '훈수'를 더해 맛갈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일로 만난 사이>는 mc 유재석이 현장에 투입되어 함께 '노동'을 하며 그 의미를 '에스컬레이션'시킨다.
이효리, 이상순과 함께 한 첫 회, 그리고 차승원과 함께 한 2회를 통해, <일로 만난 사이>는 그간 타 프로그램의 낮은 시청률과 함께 위축되어 있는 mc 유재석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한다. 여전히 우리 나라 대표적 mc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느덧 마흔 줄, 자신을 동력으로 밀어붙이기 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나이가 된 그가 녹차밭과 고구마 밭에서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실전 '노동'의 현장에서 한껏 작아지는 모습이다. 리얼리티 예능에서 질주했던 경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이지만, 도시에서만 나고 자랐던 그가 마주한 '농촌'의 현장에서는 그저 '일머리'없는 일꾼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3회에 이르러 그렇게 '일머리' 없는 유재석조차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 '대책없는' '하찮은 형들'의 등장으로 국면은 전환된다. 뮤지션으로는 일가를 이루었지만 화문석을 만드는 현장에서는 그저 오십 줄에 엄살 심한 형들이기만 했던 유희열, 정재형은 함께 나이들어 가는 이들이 땀 흘리며 나누는 삶의 고갯마루를 보여준다.
그렇게 농촌으로 전전하던 <일로 만난 사이>는 4회에 이르러 힙벤져스 그레이, 쌈디, 코드 쿤스트 와 함께 ktx 기지로 향한다. 휴식 시간 유재석의 말처럼 '힙합' 하면 '자유분방'한 영혼들이라는 등식으로 연상되는 인물들, 그들의 갖가지 휘황찬란한 머리 색처럼 자유롭게 편하게 생활할 것이라는 '선인관'을 가지게 되는 당대의 '힙한 전사'들과 함께 한 현장.
청소용구를 실은 자전거를 타고 달려 열차가 도착하고 다시 떠나는 짧게는 10분에서 15분, 30분 사이에 이뤄지는 '신속 정확'한 열차 내 청소팀에 합류한 유재석과 '힙벤져스' 들, 하지만 분방할 것이라는 유재석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여사님'들의 칭찬을 들으며 꼼꼼하고 착실하게 일에 매달리며 '힙합'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깬다.
그들이 만든 곡이 발표될 때마다 음원 순위이 수위에 오르며 '화제'의 중심이 되는 그레이, 쌈디, 코드 쿤스트. 그들이 유재석조차 그 템포를 따르기가 힘들어 헉헉거리는 ktx현장에서 보여준 건, '자유분방'한 영혼이라기 보다는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성실한 노력가들이었다.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집중력을 보이고 깔끔하기 까지 했던 그가 유재석과 함께 나눈 이야기 보여 허심탄회하게 토로해준 '번아웃'의 시간들은 최고의 뮤지션이 되기 위해 그들이 감수해왔던 '물밑 숨가쁜 자맥질'과 같은 숨겨진 노력의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여느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들이 자신들이 성실하며,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예술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번아웃'을 경험했다면, 이만큼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한번의 허튼 몸짓을 보이지 않고 묵묵하게 노동의 템포를 따르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진솔한 모습이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이렇게 2019년 유재석 버전의 <체험 삶의 현장>은 여전히 2019년에도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서 쉼없이 땀으로 범벅된 '노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중계한다. 그리고 그 '노동'을 통해 게스트의 인간적인 모습, 그들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전하는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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