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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삼일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그리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된 해이다. 이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각 방송사는 저마다 '특집'이란 이름으로 다양하게 이를 기념하고자 한다. 지나간 역사의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기에 대부분 그 시절의 사건들을 '다큐'의 형식으로 소환한다. 그런 가운데 mbc는 독특한 시도를 한다. 바로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방식이다. 김수로, 박찬호, 강한나, 김동완, 공찬 등 연예인들과 함께 '예능'의 형식으로 임시정부의 시간을 떠올린다. 즉, 이들이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 충칭 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선열들이 살았던 방식을 재현해 내는 식이다. 1월 7일 그 첫 번째 시간은 상해 임시 정부를 방문하여 어려운 형편에서 임시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그 시절 선열들의 행보를 따라본다.
박찬호 등이 도착한 상해, 이들을 맞이한 건 단대 사학과 양지선 교수이다.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 그것이 바로 상해 임시 정부라며 임시 정부의 의의를 정의내려준 교수는 그와 함께 임정의 역사, 임정의 수난사를 알려준다.
임정의 수난사, 그를 함께 한 2019년의 사람들
전남 함평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김철, 그는 1917년 가산을 정리해 상해로 왔다. 그렇게 그가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하비로에 1919년 첫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지였던 이곳의 하비로 청사는 결국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프랑스의 폐쇄 명령으로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옮기게 된 보경리 청사, 거기엔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보내준 미국과 멕시코 동포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임시 정부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내세우며 첫 근대적 정부를 구성했지만 현실에서의 행보는 팍팍했다. 하비로 청사 이래 임정 첫 7년간 무려 12번이나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1920년대에는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였고, 불과 30원이 집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려웠던 시간은 천황이 눈 앞에 지나가는데 폭탄이 있었다면 던졌을 텐데 하며, 돈이 생기면 먹을 걸 사들고 왔던 철공소 직원 이봉창의 소회가 거사로 움트던 독립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렇게 고난의 장정, 그 장정에 2019년에서 온 출연자들이 참여한다. 함께 여성 독립운동가로 임정의 안 살림을 책임졌던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 그리고 김구 선생의 어머니이신 곽낙원 여사의 회고에 등장했던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먹었다던 쫑즈(찹살떡), 두부탕, 짠지 등을 맛본다. 지금이야 부드러운 쌀떡이지만 당시 추위 속에 얼음덩어리같았을 떡,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주로 사먹었다던 중국 국수 찌꺼기, 시장에서 팔고 남은 배추 시레기 등만으로도 출연자들은 당시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출연자들은 저마다 맡겨진 미션에 따라 임정 시절 독립 운동가들의 삶 체험에 나서는데, 김수로와 강한나에게 맡겨진 건 상해의 거리에서 '수로 상회'와 '한나 상회'를 열어 물건을 파는 것.
이들인 연 '상회'의 모티브가 된건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 상회'이다. 임정 당시 독립 자금의 60%를 책임지셨다는 안희제 선생은, 경남 의령 분으로 영남 지역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힘을 모아 '백산 상회'를 열어 그 운영 자금을 모아 중경 임시 정부로 보내셨다고 한다. 그 시절 그의 집안과 집안 끼리 가까운 사이였던 경남 진주 출신 lg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도 구인회 상점을 해서 번 돈 만 원을 안희제 선생 편에 임정으로 보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1927년 결국 백산 상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럼에도 안희제 선생은 1942년 광복군에 거액의 자금을 대는 밀명을 수행하는 등 독립 운동의 안살림에 혁혁한 공험을 하셨다.
윤봉길 의사가 일한 세탁소로 간 박찬호
박찬호가 불려간 곳은 세탁소, 힘 쓰는 일이라면 자신있다던 박찬호, 하지만 그를 맞이한 2019년의 세탁소는 버튼 하나로 작동되는 기계식, 하지만 박찬호의 호언장담을 기계가 듣기라도 한 양 고장이 나고, 박찬호는 일일이 손으로 세탁을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이라면 자신있다던 박찬호지만 이불을 하나 빨고는 두 손을 들고 싶은,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이불이었다.
왜 세탁소였을까? 세탁소에서 일했던 독립운동가는 다름아닌 윤봉길 의사였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임정으로 가고자 했던 청년, 하지만 청년은 그곳까지 갈 여비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청도의 세탁소에서 일을 해 그 돈으로 임정을 갔고 기꺼이 의거의 주인공이 되셨다.
2019년의 김염이 된 김동완
이른 새벽 제일 먼저 길을 떠난 김동완을 맞이한 곳은 영화 촬영장, 단역이려니 했는데 그가 해야 할 역할은 서거 30주년을 맞이한 레이먼드 킴, 김염을 기리는 영화의 김염 역할이었다.
<야초한화>로 1930년대 중국의 청춘 스타로 떠올랐던 김염, 하지만 1934년 가장 잘 생긴 남자 배우, 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 1위였던 김염, 하지만 그는 일본이 자신들을 선전하기 위한 영화에 출연을 거부하고 위대한 항일 영화로 선정된 <대로> 이후 40여 편 항일 영화를 찍으며 중국의 영화 황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선택에는 그의 집안 배경이 큰 몫을 한다.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탄탄대로의 성공을 뒤로 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진료소를 열고 동포를 진료하며 독립자금을 대던 중 밀정에 의해 독살당하신 아버지 김필순, 이후 그를 맡아 키운 고모부 김규식과 김순애 역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우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셨다. 7명의 형제들 중 4명이 독립 운동에 참여한 집안, 김염의 선택은 항일이었고, 그 선택에 중국인들은 2019년에도 그의 죽음을 기린다.
세탁소에서 허리가 아프도록 빨래를 한 박찬호는 이어서 공찬과 함께 인성학교를 방문한다. 1917년 여운형에 의해 상해에 세워진 초등학교, 이역만리 중국에서도 한국어와 한국혼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학교는 초등학교였지만 당시로서는 내로라하던 김태연, 이광복, 현정건, 선우혁, 여운홍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선생님으로 독립정신을 고취, 이 학교 출신 학생들 상당수가 이후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 소년 척후대의 주요 인원으로 성장했다. 이런 인성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1999년 상해 한국인 학교가 만들어졌고, 공찬은 이곳의 1일 교사로, 박찬호는 이곳 학생들을 상대로 자신이 이룬 꿈에 대해 설파한다.
<독립 원정대의 하루 살이>는 두 가지 플랫폼의 형식을 띤다. 1월 7일 tv를 통해 방영된 프로그램에서는 상하이로 간 연예인들의 1일 독립운동가의 삶 체험을 중심으로 한 '예능적 형식'에 방점을 찍은 반면, 웹 사이트에 올려진 웹 다큐는 <그 남자의 집 대한민국>, <백산 안희제와 독립 자금의 비밀> 등, tv 판에서 부족했던 역사적 사실을 다큐 형식으로 구성, tv를 통해 독립 운동가들의 삶에 대해 궁금증을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다. 그러기에 예능적 접근이 아쉬웠던 사람들이라면 <독립 원정대의 하루살이> 사이트를 방문하면 김수로, 강한나, 박찬호, 김동완이 했던 체험의 본연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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