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 없는 피아노 지망생에서, 친구의 뒷바라지로 시작하여, 이제 서한 예술 재단의 기획실장에 오르기 까지 오혜원(김희애 분)이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친구 서영우(김혜은 분)에게 뺨을 맞는 건 예사요, 그녀와 사귀었던 남자 강준형(박혁권 분)을 자신의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일도 할 수 있었고, 회장님의 집에 마작 게임에 초대 받기까지 오혜원이 한 일은 그저 예술 재단의 눈에 보이는 그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닐터이다. 


그러던 그녀가 자신의 삶에 모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녀 얼굴의 상처를 보고서도 차를 가져다 달라는 냉정한 남편에게 가진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 속내를 언뜻 비춘다. 회장님의 여자 심부름으로 만난 국밥집 아주머니의 맥주 세례에 몸둘 바를 몰라한다. 예전의 그녀라면, 서영우에게 따귀를 맞은 그날처럼 한숨 한번 내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일상의 그녀로 돌아가련만 이제 오혜원은 그럴 수 없다. 자꾸만 자신이 초라해 진다. 그럴 듯해 보이던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 

물론 시시각각으로 오혜원의 주변이 그녀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 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예전의 그녀라면, 오히려 그것을 자신이 보다 더 유리해지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바로 선재(유아인 분)때문이다. 

<밀회>에서 오혜원의 자각은 선재와의 만남과 궤를 같이 한다. 선재와 교감하고, 그를 마음에 두기 시작하면서, 오혜원은 더 이상,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갈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무얼 의미할까? 
가장 원초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재생산하고픈 본능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런 재생산에 대한 욕구는, 결국, 삶의 에너지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더 확산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구,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이 된다. 영화<은교>에서 70대의 노작가는 은교를 사랑하게 되면서, 20대 못지 않은 젊음을 발산한다. 30대의 제자가 감히 내려가지 못하고 주저하던 벼랑을 눈 깜짝할 사이에 내려가, 은교를 발 동동거리게 하던 거울을 구한다. 70대의 노인도 펄펄 뛰게 만드는 사랑이건대, 하물며 마흔의 여자임예랴.

중년이란 나이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안정기에 들어선 나이이겠지만, 중년에 들어선 사람들이 그럼에도 상실감을 어쩔 수 없어 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들에게 젊은 시절과 같은 사랑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실감이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되어서도 젊고 팽팽한 그들에게, 사랑은 금단의 열매와도 같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 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쫓겨나듯, 오혜원은 거부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거부할 수 없는 선재를 마음에 두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에덴 동산이라 여겼던 서한 예술 재단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중년이라 가둬두었던 삶의 열정적 에너지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사랑은 그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눈뜨면서, 개울 물에 비춰진 자신을 바라보듯,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과연 자신이 그 사람을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 반문한다. 오혜원도 마찬가지다. 선재와의 모텔 행을 앞에 두고, 홀로 돌아와 목욕을 하며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눈물 짓던 그녀는 자신의 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직 순수한 청년 선재 앞에 내보이기에는 자신의 나이든 몸만큼이나 부끄러운 자신의 삶.

다시 영화<은교>에서, 노작가는 자신이 은교를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닫고 거울 앞에 서서 나신이 되어 자신의 몸을 샅샅이 바라본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지만, 그리고 육체적 능력으로는 모자랄 것 없지만, 그럼에도 늙어가는 육신에 괴로워한다. 마찬가지다. 오혜원도, 젊은 선재 앞에, 중년의 육신과, 어쩌면 그 보다도 더 노회한 자신의 삶에 딜레마를 느낄 것이다. 사회적 통념과, 윤리를 넘어선, 보다 본능적인 사랑하는 이로써의 부끄러움이다. 

오혜원을 연기하는 배우 김희애는 자신의 몸에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는 여전히 너무 아름다운 딜레마를 지니지만, 그녀만큼 우아하면서, 모멸감을 느끼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하는 배우도 드물다. 드라마 <장희빈>에서 어색했던 유아인은 모처럼 제 몸에 맡는 배역을 맡은 듯하다.  배우만이 아니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늘 두 주인공을 훔쳐보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는 장면은, 보는 이로하여금, 관음의 아찔한 감정을 오가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와의 사랑, 그와 함께 그녀를 위기로 몰아넣는 그녀 주변의 상황을 급박하게 이끌어내는 정성주 작가의 내공은 역시 대단하다. 영화 <색계>의 파멸을 항해가는 위험한 사랑에 매력을 느꼈듯, <밀회>에 빠져들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4. 4. 8. 02:49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란 학생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내는 확신'이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학생 토니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한다. 그것이 어느 것이 되든 결국 역사란 그것을 해석하는 후자들의 몫이라는 의미에서 두 정의는 공통점을 가진다.  


매주 토, 일요일 9시 40분에 방영되는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정도전이 그리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이상의 출발점을 부패한 고려 사회로 짚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 의지를 펴보지 못한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궤도를 틀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대업을 꿈꾸고, 그것을 함께 할 사람으로 이성계를 고른다. 하지만, 그런 정도전의 대업에의 권유에 대해 이성계는 냉정하다. 자신이 고려를 무너뜨릴만한 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은 욕심 이상의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은 당신에게 대업은 하늘이 내린 일이라고 강변하는 정도전과 그에 대해 부정하지만, 결국 회군을 하고, 최영을 제거하고, 왕을 패하며 고려의 멸망에 한 발 한 발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이성계의 고뇌를 담는다. 그의 고뇌가 깊을 수록, 그가 세우는 국가가, 그저 그 자신과 정도전 등 소수의 집단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드라마는 설득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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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성계가 어땠는지, 정도전이 어땠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조선을 건국한 승자들인 그들이 남긴 기록을 가지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부정확한 확신일 수도, 그들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하며 조선의 건국이란 사건이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즉, e.h.카가 말하듯, 역사는 과거와 그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의 대화라고 했을 때, 방점은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에게 찍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다시 해석되는 이성계의 촛점은 무엇일까?

배우 유동근씨가 이성계가 아닌, 그의 아들 이방원 역을 맡았던,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용의 눈물>의 경우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자의 난을 거쳐 가는 과정에서 보여진 '왕권 확립'의 과정을 다룬다. 즉 정통성도 있지만,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지도자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 촛점을 맞추었다. 왕자의 난을 거쳐 아버지를 배신하고 왕이 되는 이방원과, 그에 의해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양녕대군의 모습이 화제를 되었던 이 작품에서 지도자는 한 나라를 카리스마있게 이끌어 가는 강력한 리더쉽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어떤가? 그는 계속 고뇌한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말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닌가? 혹시 그저 자신의 욕심이 아닌가? 회군이 정말 고려를 위한 일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며 최영과 맞서는 과정이 정말 옳은 길인가? 정도전은 그에게 대업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이성계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할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협잡과 거짓을 밥먹듯이 했던 이인임과 권력의 자리에 앉자 강직했던 무장의 모습을 잃은 채 명예와 명분에 빠져버린 최영과 더욱 대비된다. 드라마 <정도전>은  무장이지만,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못지 않게 고민하는 인간형인 이성계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을 말한다. 

<정도전>의 이성계에 못지 않게 또 한 사람의 고뇌하는 대통령이 있다. 바로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이다. 그는 양진리 사건의 주동자로 특검에 기소되었지만, 사실 그는 양진리 사건이 그렇게 집단 학살극이 될 줄 몰랐던 재벌과 다국적 기업의 개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쉽게 내뱉듯이,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라고 발뺌하면 될 것을, 그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미 대통령인데도, 자신이 불가피하게 그 일원이 되었던 지난 역사적 과오를 밝히고자, 책임지고자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원칙을 지키고자 애쓴다.

이동휘가 그를 만류하는 비서실장에게 '그게 옳은 일이잖아요' 라고 반문하듯,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과, <정도전>의 이성계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권력의 유지가 아니라,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원칙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담백한 목표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담백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이동휘 대통령은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대통령 자신은 탄핵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성계는 피하고자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최영도, 그가 받들겠다고 했던 왕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원칙을 위해 이동휘는, 대통령으로서의 법과 수호를 지키는 대신에 다시 김도진과 팔콘의 개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되고, 이성계는 역모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정통 사극을 표방한 <정도전>은 당연히 고려말 조선 건국을 다룬 역사 정치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고, 이미 조선이라는 승리의 결과물이 분명한 사건이기에, 그 승자에 감정 이입하며 이성계의 원칙이 승리하는 과정을 흔쾌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불편해 한다. 정작 자신이 몸담고 사는 세상의 정치 이야기는 껄쩍지근하다고 한다. 자신이 백기들고 사는 현실을 소환해내는 드라마가 불편하다고 한다. 역사는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삶의 무게감으로 다가오니, 힘들다고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현실의 정치는 버겁다고 한다.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도, 그리고 불편한 현실이라도, <정도전>과 <쓰리데이즈>를 통해 그려지는 고뇌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 우리들이 가슴 속에 품고 그리워하는 그것들이다. 21세기 드라마의 햄릿형 지도자들은, 바로 자신의 권력 유지나, 이권이 아니라, 굼민을 위한 지도자가 가는 길을 고민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 속 소망이다. 결국 그것이 몇 백년전의 과거의 사건이듯, 혹은 현실이든, 결국 모든 역사적 결정의 끝에는 지도자의 선택이 있다. 양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뇌하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 수록, 드라마는 푸르게 빛난다. 
그래서, 그저 몇 프로의 시청률로 퉁칠 수 없다.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주고, 함께 그 고민을 나눠주길 바랄 뿐이다. 


by meditator 2014. 4. 7. 16:22

<sbs스페셜>은 3월 30일과 4월 6일 2주에 걸쳐 <숲으로 간 사람들>을 다루었다. 그 중 1부 '새 생명을 얻다'는 숲을 통해 암 등의 질병을 고친 사례를 들어 숲이 가진 자연 치유력을 증명한다. 그에 이은 2부 '새 인생을 얻다'는 아예 숲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례를 들어, 삶의 대안으로서의 숲을 제시하고 있다.



낮 시간의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것 중 하나는 보험 광고 방송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연예인들을 내세우며, 묻고 따지지도 않고 보험을 들어주겠다며, 이 보험을 들면 치료비 걱정은 없다고 꼬신다. 전 국민 의료 보험 시대라 하지만, 막상 암과 같은 질병이 생기면 넉넉한 집이 아니고서는 집안 거덜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는 것이 지금의 의료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앞날의 병원비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보험을 들어둔다. 하지만 보험을 들어둔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제 아무리 돈이 있다 한들, 현대 의학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렇게 현대 의학도 포기한 사람들을 숲이 품어 고쳐주었단다. 

혈액암 말기, 간암 2기, 위암 2기의 환자들이 숲을 걷는다. 물론 처음부터 이들이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숲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겠다고 들어선 숲에서, 신승훈씨는 뜻밖에도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6년 암과의 전쟁터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백완섭씨의 경우는 아예 작정을 하고 숲에 들어섰다. 위암 수술을 받은 그는 암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살았던 도시의 삶을 버린다. 전기,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숲 속에서 4년 째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실제 검사 결과 이들에게서 암세포는 사라졌고, 면역 상태는 거의 일반인 수준이었다. 그 수많은 장비와 명의가 있는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었던 질병이 그저 숲을 거니는 것으로, 숲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병을 안겨주었던 도시의 삶을 벗어난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살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일주일에 한 두번이라도, 아니 그게 안되면 한 달에 한번이라도 숲을 다녀오는 것으로 인간의 몸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치유력을 가진다. 말 그대로 생명력 넘치는 숲의 신비다. 

2부 '새 인생을 얻다'는 이렇게 생명력 있는 숲으로 삶의 공간을 옮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부에서도 보여지듯이, '암'등의 병을 가져온 것은 스트레스로 넘쳐나는 도시의 삶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뻔히 암유발적인 생활인 줄 알면서도 도시에서의 삶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전부인 줄 안다. 바로 그런 고정 관념을 벗어던진 이들을 2부, '새 인생을 얻다'는 다루고 있다. 

부부가 하루에 한 마디를 나누기도 힘든 도시의 삶을 살았던 이태인 씨 부부는 전기, 수도, 휴대폰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살면서 애인처럼 지낸다. 한때 잘 나가던 디자이너였던 이오갑씨는 이제 전국 백수협회 대표가 되어 산속에서 할 수 있는 100가지의 즐거움을 찾아 하루를 보낸다. 

이들이 포기한 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편리함과 넉넉함으로 유혹했던 문명의 속도, 경쟁 등이다. 숲으로 들어와 병도 치유하고 삶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게 되었던 1부의 환자들처럼, 숲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이들은, 조금 불편하지만,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행복을 얻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숲에 사는 부부는 매양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 혼자 외롭게 살건만 이오갑씨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근대 이후 등장한 세계관은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산업 혁명 등의 물질 문명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입장이었다. 즉, 물질 문명이 발전하듯이, 인류의 역사는 그 물질의 발달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이제 더 이상 인류의 진보만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으 입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석유라는 한정된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류 문명의 유한성을 들먹이는 사례가 석유 매장량이 적어지는 것에 반비례하여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지금껏 진보라고, 발전이라고 믿었던 인류의 문명이 가져온 것은 자원의 고갈과 병든 지구라는 반성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런 반성은 석유 문명 이후의 삶에 대한 대안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2부작에 걸친 <숲으로 간 사람들>은 바로 그런 문명론적 고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계가 등장한 것은 자연에 의존하던 삶을 사람들을 자본주의 제도하에 몰아넣기 시작한 그 즈음부터라고 한다. <모던 타임즈> 속 사람들은 거대한 시계에 짖눌려 신음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굳이 시계가 없어도, 우리 안에 내장된 속도감에 짖눌려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런 속도전에 길들여진 우리 삶의 대안으로, 석유 문명이 가져다 준 이기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대안으로 <sbs스페셜>은 숲을 제시한다. 

굳이 주렁주렁 보험을 들어도 고칠까 말까하는 병원이 아니라도, 매년 올라가는 집세에 시달리는 아파트가 아니라도, 남들보다 밀릴까 조마조마한 경쟁이 아니라도, 조금만 비우고 버리면 행복해 질 수 있는 대안으로 숲이다.  


by meditator 2014. 4. 7. 03:06

화제를 끌었던 <응답하라 1994>의 후속 드라마라는 부담을 안고 시작했던 <응급남녀>가

평균 시청륭 5%대로 선방하며 종영되었다. 


제목에서도 대번에 알 수 있듯이, <응급남녀>는 우리나라 의학 드라마의 전형대로, 응급실이라는 병원의 공간을 배경으로, 이혼을 했던 커플 오진희(송지효 분)와 오창민(최진혁 분)가 다시 조우하게 되어 벌이는 해프닝을 다룬다. 그리고 역시나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벗어나지 않고, <응급남녀>는 주인공 두 사람의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는 tvn 드라마에서 로맨틱 멜로 장르의 특징이라도 되어가는 것처럼, 결론이 뻔한 스토리를 오글거리는 상황의 미장센으로 메꾸어가는 방식에서 <응급 남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 만나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 대던 두 주인공은 어느새 다시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되어 낭만적인 장면을 마구 양산하며 행복한 결말에 이르른다.

이혼을 했던 이 두 사람이 결국 다시 이루어 지게 된 이유는 결국 '정'이다. 그들이 이전에 이혼을 했던 이유는 아직 미성숙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함께 하는 결혼을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에 벌였던 잘못된 판단이라는 전제 하에, 응급실 인턴으로 만난 두 사람은, 그 이전의 자신들의 상황을 복기하며, 여전히 서로에게 미련이 남아있음을 매 해프닝을 통해 확인한다.

이혼 부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응급 남녀>의 문제 의식은 신선하다. 하지만,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개연성을 차치하고, 자신과의 결혼이라는 세번 째 결혼으로 대미를 장식하며, 우리 사회 결혼의 문제를 차근차근 되짚어 보고자 했던 것과 달리,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 해피엔딩이라는 결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응급 남녀>는 오창석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함께 살았던 정에 의지하며 두 주인공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잡아죽일 듯이 굴었던 시어머니 역시 시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언제 그랬냐는 듯 며느리와의 앙금을 가라앉힌다. 그러고서는, 가장 쿨한 방식인 것처럼, 다시 결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식으로, 지금의 좋은 관계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마무리를 짓는다. 자신을 되돌아 보며 남발되던 나레이션은 행복의 감탄사형 종결 어미로 마무리된다.


’응급남녀’ 결혼, 이혼, 그리고 재회…사라져봐야 알수있는 것들
(사진; 뉴스24)

오히려 뻔한 두 주인공의 애정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응급남녀>를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사랑의 훼방꾼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멘토였던 국천수(이필모 분)였다. 

미성숙한 주인공이 여러 가지 의학적 사건들을 겪으며 제대로 된 의사가 되는 것은 의학 드라마의 전형적 클리셰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미성숙한 주인공에게 표본이 되는 멘토의 존재다. 그래서 <골든 타임>, <브레인> 등 인기를 끌었던 대부분의 의학 드라마에서 매력적인 멘토의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기업이 되어가는 병원이라는 조직에서 인간적 냄새를 풍기며 생명을 살리는 의학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존재로 등장한다.
 
<응급 남녀>의 국천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덥수룩한 머리, 깍지 않은 수염에, 구멍난 양말을 신고, 하지만, 생명이 오고가는 응급실에서 그 어떤 사소한 실수로 용납하지 않는 절대 능력치의 의사로 등장한다. 또한 그러면서, 생명에 경각에 달린, 하지만 보호자가 없어 수술을 할 수 없는 환자의 보호자 란에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써넣으라고 말하는 휴머니즘의 구현체이기도 하다. 그런 허술해 보이는 외모에 숨겨진 완벽한 매력은 당연히 여주인공은 물론, 시청자들조차 매료시킨다. 

캐릭터의 본원적 매력에 덧붙여 그것을 상승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이필모의 연기다.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은 최진혁도 로맨틱 물의 주인공으로서 나쁘지 않았고, 그간 드라마를 통해 주로 사극 연기에 치중했던 송지효는 자신의 몸에 맡는 옷을 입은 듯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수준의 두 주인공의 연기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마치 국천수 그 자체처럼 보였던 이필모의 연기이다. 멘토이면서, 동시에 오진희를 사랑하는 연기에서, 선생이면서, 동시에 사랑에 눈뜨는 연기를 과장하지 않고, 하지만 국천수의 눈빛만 봐도 그의 감정이 전달될 수 있도록 깊게 이필모는 연기를 해냈다. 그런 이필모의 내공이 뻔한 로맨틱물로써의 <응급 남녀>를 독특한 맛으로 빚어낸다. 

<그레이 아나토미> 등 외국의 의학 드라마들이 멘토와 애인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것과 달리, 여전히 우리나라의 의학 드라마에서 멘토들은, 마지막까지 점잖게 멘토로서의 자기 선을 지키며 한 명의 수컷이기보다는 멋진 선생으로 남겨진다. 드라마의 중반까지 가장 설레이며 오진희에게 다가갔던, 그래서 예정된 커플 오진희-오창석보다, 현실적으로는 오진희-국천수가 더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던 국천수는, 오진희-오창석의 관계를 알면서 주춤거리고 그들의 멘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이혼이 잘못은 아니라면서도, 이혼을 했음에도 그 둘을 묶었던 관계는, 또 다른 사람의 침입을 용인할 틈을 주지 않은 채, 아니 국천수가 끼어들까봐 서둘러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향해 치달린다. 마지막 회에 가서야, 사실은 너를 좋아했었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한번의 결혼이 가진 관계가 낙인처럼 잔존한다는 것을 드라마는 은연중에 말한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멘토가 아니라, 인간 이상의 멘토를 그려내며 인간에 대한 환타지를 키워간다. 응급실 취프로서의 국천수도, 오진희를 사랑한 국천수도, 그래서 현실에서는 더욱 존재할 수 없다. 

<응급 남녀>의 무난한 성공은, 주말 저녁 8시 4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대에 안착한 tvn주말 드라마의 안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어, 로맨틱 물 <응급 남녀>에 이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후일담을 다룬 장르물 <갑동이>까지, 주말이면 뻔한 가족드라마를 강요당하는데 지친드라마팬들에게는 주말의 선택이 풍성해졌다.


by meditator 2014. 4. 6. 12:35

4월 5일 가요프로 mbc <음악 중심>의 1위 후보 가수는 이선희, 임창정, 박효신이었다. 마치 눈을 씼고 이게 2014년이 맞는가 싶게 확인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한 시절 가요계의 레전드라 칭송받았던 이들이 2014년 4월 첫 째주 <음악 중심>에 다시 1위 후보곡을 가지고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이선희와 임창정은 같은 날 저녁 <불후의 명곡>을 통해 전설과, 전설을 노래하는 가수로 다시 조우하였다. 

최근 <무한도전>의 시청률이 예전 같지 못하자, 트렌디했던 이 프로그램의 인기가 이제 한 물 간 것이 아니냐는 조급한 진단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물론 오랜 세월 동일한 멤버로 지속되어온 <무한도전>의 피로도를 운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최근 이미자에 이어 이선희까지 이어진 <불후의 명곡> 특집이 너무 강력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사진; 서울신문)

이선희 편만을 예로 들어 보자. 박정현, 윤민수&신용재, 더 원, 울랄라 세션, 장미여관, 홍경민, 바다 등 그 각각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슈퍼스타k>, <나는 가수다> 등은 물론, <불후의 명곡>에서도 몇 승을 거뜬히 거머쥐며 그들 자신이 전설의 역사를 썼던 가수들이, 이선희 라는 전설을 기리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더구나 전설의 자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임창정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거기에 마치 그 예전 시절의 이선희를 복기하는 듯한 신인 가수 벤에, 그간 섹시 컨셉에 가려졌던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걸스데이도 결코 선배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이미자 편은 어땠을까? 역시나 그간 <불후의 명곡>을 통해 빛났던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총망라되었었다. 왁스, 소냐, 거미, 알리 등 당대의 디바들이 자신이 이미자 선배님을 기리는 그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노래를 불렀으며, 그들 못지않은 가창력의 정동하, 조장혁, 이세준이 자웅을 겨루었다. 울랄라 세션과, b1a4의 무대도 약방의 감초다. 

물론 늘 <불후의 명곡>을 보면 훌륭한 가수들에 의해 멋진 편곡으로 거듭난 아름다운 노래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그렇듯이, 제 아무리 향기로운 냄새로 무디어 지듯이, 늘 일정 수준 이상의 내용을 선보이고 있는 두 프로그램이지만, 거기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뻔하게 느껴지게 되는 한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두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시청자들을 상대하는 모든 프로그램들의 생로병사의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그 생로병사의 과정을 당기느냐, 늦추느냐는 그것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불후의 명곡>은 그간 아껴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그간 전설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이미자와, 이선희. 한국 가요사에 있어 굵은 고딕체로 그 이름을 남기고도 남을 두 사람의 전설 무대는 그 존재만으로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불후의 명곡>은 그저 전설을 모셨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전설의 이름값에 걸맞는 특집을 제대로 꾸려냈다. 

이미자와 이선희 편에 출연한 가수들의 면면을 보면, 가장 이선희스러운, 이미자스러운 노래를 잘 소화해 낼 것같은 가수들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리상자 대신 이세준의 가녀린 목소리를 살리 솔로 무대라던가, 이선희와 닮은 보이스를 가진 벤의 기용, 윤민수와 신용재의 콜라보레이션에, 그 등장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 박정현, 임창정처럼, 전설의 색깔에 맞춰, 가수들의 특징을 살려 절묘하게 재배치해낸 기획의 승리이기도 하다. 

윤민수·신용재·벤, ’불후의명곡’ 올킬 ’음원차트 싹쓸이’
(사진; 뉴스 24)

또한 이제는 모두를 들었다 놨다 하며 원숙미를 보이는 신동엽의 진행이라던가, 그에 못지않게 안정감있는 진행을 보이고 있는 대기실의 정재형, 문희준, 은지원의 조화도 <불후의 명곡>을 그저 음악을 듣는 프로그램 이상의 예능적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많은 관심을 끌며 시작되었던 <나는 가수다>는 가수간의 서바이벌이라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사되어 갔다. 반면 아이돌 가요 무대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전설에 대한 축제의 장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불후의 명곡>은 여전히 순항중이다. 이미자, 이선희 편처럼, 여전히 우리는 건재하다며 존재감을 뽐내며. 물론, 1985년부터 월요일 밤을 묵묵히 지켜온 <가요무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긴 하다. 그 시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대를 지키는 고정 시청자 층을 가진 <가요무대>처럼, <불후의 명곡>도 오래도록, 가수들에게 좋은 무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는 모처럼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오래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4. 6. 10:59

4월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능 전쟁의 첫 테이프를 4월 4일 밤 10시 <미스터 피터팬>이 끊었다. 

<미스터 피터팬>은 영원한 피터팬을 꿈꾸는 철부지 중년 스타들을 담은 신개념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내걸었다. 

영화 <후크>에서 네버랜드를 떠나 어른이 되어버린 피터 배닝은 피터팬이었던 시절의 자신을 잃고 세속의 어른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자신의 아이들이 후크 선장에게 납치된 걸 구하기 위해 네버랜드로 가면서, 그 시절의 피터팬으로서의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 간다.


그렇게 영화 <후크>처럼 <미스터 피터팬>은 신동엽, 윤종신, 한재석, 김경호, 정만식 등 중년의 남자 다섯 명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들은 연예인이라지만 대부분의 시간 일을 하고, 기껏 여가가 나면 친구들과 함께 술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을 잃어버린 또래 남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중년의 스타들은 서먹서먹했던 것도 잠시 함께 할 아지트를 꾸미며 그 시절 자신들이 즐기던 음악 등을 통해 공감대를 쌓아간다. 그리고, 영화에서 처럼 팅커벨 최희가 나타나, 어린 시절의 추억 상자를 열어 보이며 그들도 피터팬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상자 겉면의 고두심 등의 당대 스타들을 추억하면서 시작된 추억 여행은, 상자 속에서 등장한 딱지, 팽이 등을 돌려보며 절정에 이르른다. 팽이 줄 감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도 잠시 그 시절의 감각을 살려내며 중년의 남자들은 서로의 장기를 신기해 하며, 그것에 질세라 자신들도 해보며 피터팬이 되어간다. 

그렇게 피터팬이 된 중년의 스타들이 그들의 청춘을 되돌릴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풀잎 피리 불기, 싱프로나이즈드 스위밍, 철봉묘기, RC카 등의 동호회였다. 그리고 그것들 중 다섯 명의 중년들이 선택한 첫번 째 피터팬이 되는 길은 바로, RC카, 자신들이 몰았던 첫 차를 추억하며, 어린 아들과 함께 나눌 기억에 설레이며 다섯 남자들은 RC카를 몰기(?)위해 달려간다. 

<미스터 피터팬>의 면면은 신선하다. 
이미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신동엽이지만 늘 스튜디오에서만 진행만 하던 그에게 리얼 버라이어티란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당혹스러워 하고, 설치된 카메라와 대화를 시도할 정도로 낯선 장르이다. 그런 익숙하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 신동엽스러운 재치가 여전한 그의 모습은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토크쇼를 통해 걸쭉한 입담과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김경호나 정만식의 합류는 절묘하다. 지방색이 뚜렷한 사투리로 통하지만, 화장품 냉장고와 거기에 담긴 화장품, 화초를 가지고 나타난 김경호와, 연장같은 칼에, 양은 냄비를 들고 나타나, 김경호 등이 즐거워하는 음악에는 문외한이라 소외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정만식의 대비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볼거리가 되었다. 전혀 예능에 어울리지 않은 여전한 중년의 꽃미남 하지만, 팽이부터 시작해서 운전까지 그 무엇하나 거침없이 해내는 한재석의 반전 매력도 기대된다. 어디를 가도 윤종신인 윤종신의 캐릭터는 진부하지만, 자신을 내세우기 보다는 프로그램과 동료들에게 어울려 들어가는 윤종신 특유의 친화력, 그리고 그간 예능의 경험들이, <미스터 피터팬>에 해가 될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미스터 피터팬>이라는 새로운 작명을 들고 나타났지만, 중년 남자들의 리얼 버라이어티라,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렇다. <남자의 자격>이다. 평균 나이 40세를 넘긴, 역시나 중년의 남자들이 미처 다하지 못했던 101가지의 미션들 중 동호회의 성격을 띤 것들이 특화되어 <미스터 피터팬>으로 등장한다. 허긴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 중, 인간다운 삶을 위한 슬로우 라이프는 그간 <인간의 조건>을 통해 새롭게 우러내어 지기도 했었다. 또한 그렇게 따지자면, 언젠가, <미스터 피터팬>의 소재가 고갈될 그날, 그리고 멤버들의 리액션이 뻔해지는 그날 여성판 <미스, 미즈 피터팬 아니 웬디>가 등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KBS2 파일럿 '미스터 피터팬' 방송 화면 캡처
(사진; 텐아시아)

무엇보다 <미스터 피터팬>은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다양한 동호회의 활동등을 눈썰미 좋게 받아들여, 그것을 예능 프로그램화 살려냈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이미 첫 방송에서도 보여졌듯이 철봉이나 풀잎 피리처럼 기상천외한 동호회 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 이 프로그램의 소재는 무궁무진해 보인다. 

하지만, 초반에는 신선한 동호회들을 소개하는 화제성으로 갈 수 있겠지만, 결국 프로그램의 관건은 제작진의 만듬새이다. 첫 회, 어린 시절 사진을 배경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말해주는 멤버 각자의 소개에서 부터 시작하여, 먹방의 정만식, 예상 외의 능력자 한재석 처럼, 개별 캐릭터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것들을 맛깔나게 전달하는 모양새가 섬세하다. 그들과 어우러진 신동엽의 예의 19금 캐릭터나, 윤종신의 뻔한 설정도 진부해 지지 않았다. <미스터 피터팬>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4. 4. 5. 09:55

<쓰리 데이즈>는 암살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동휘 분)과 그를 지키는 경호관(한태경 분)의 이야기라고 서두를 떼었다. 지지율이 급감하다 못해 이제는 탄핵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라, 그의 정치적 포지셔닝은 분명 드라마적 요소가 극명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대통령이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청와대라는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이는 대통령이 박진감넘치는 스릴러의 주인공의 한 축으로는 너무 정적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고, 경호관인 한태경이 종횡무진 액션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것과 달리, 또 다른 축인 대통령은 역시나 운신의 폭이 적었다. 청수대로 여행을 가고, 특검을 만나러 간 잠행 길에 사고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통령의 특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대통령이 달라졌다. 자신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태경에게 더는 경호관이 아니라며 그를 제지하고 직접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그는 김도진을 찾아가 말한다. 다시 팔콘의 개가 되겠다고. 


액션 스릴러 등의 복합 장르물을 내걸고 있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심리이다. 때로는 설명적이다 싶게, 자신들이 어떤 행동에 이르게 된 입장을 드라마는 나열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드라마적 장치가 미흡해서가 아니다. 2014년의 <쓰리데이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 그래서 극명하게 대립되게 되는 그 서로가 서있는 자리의 차이, 또 그래서 서로가 함께 하게 되는 그 과정을 <쓰리데이즈>는 주목한다. 기꺼이 드라마가 늘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숨기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여느 장르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게 만드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의 한 특성이다. 

(사진; osen)

9회 말, 기밀 서류를 비밀리에 꺼내오기 위해 비밀리에 윤보원과 함께 재신 그룹에 잠입했던 한태경은 모니터를 보다 자신이 비밀리에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뛰쳐 나간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동료 이차영(소이현 분)이 재신 그룹 회장 김도진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실장의 암살 음모조차 단번에 간파해 낼 정도로 냉정한 이성을 가졌던 한태경이지만, 자신이 믿었던 동료 이차영의 배신(?)에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런 한태경을 보며 이차영은 고통스러운 눈물을 삼킨다. 

그리고 10회, <쓰리데이즈>는 장황하게 이차영의 배신을 끌고가지 않는다. 한태경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김도진 선언의 첫 번 째 예라도 되는 듯이, 대통령 기자 회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모험 끝에 어렵게 신규진 비서실장의 비밀 서류를 손에 넣은 이차영을 차로 밀어버린다. 사고롤 사경을 헤매는 이차영,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한태경을 배경으로 그간 이차영의 사연이 드러난다. 

법무팀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던 서류가 잘못되었음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이차영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 없는 대통령의 위치를 알게 된다. 자신이 제대로 직무를 수행했다면 대통령을 그렇게 고립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차영은 자신이 그 서류를 찾아오겠다고 각오를 밝힌다. 그리고 동료 한태경을 속이면서, 그리고 결국 이철규 소좌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무위로 만들면서까지 신규진의 개인 척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다. 

앞서 <쓰리데이즈>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심리라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직업적 사명감과 소명 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모든 어떤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회가 굴러나간다. 하지만, 과연 그 일을 하며 자기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대다수가 그 일의 목적이 '돈'이라고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십상이지 않을까. 

하지만, 김은희 작가는, 바로 그 '직업'과 '일'의 의미를 논한다. 당신이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는 그 '일'과 '직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이든, 일개 경호관이든! <쓰리데이즈>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 정치가 직업인 사람들의 일 이야기이다. 사람을 지키는 일이 직업인 경호관처럼. 그런데 그 직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정치가 달라지고, 나라가 뒤짚어 지는 것인 되는 것이다. 

<쓰리데이즈>가 방영되기 전까지 경호관이란 직업은 그저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항상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 그런데 이 드라마를 통해 보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직업적 소명 의식이란게 만만치 않다. 만류하는 대통령에게 이차영은 말한다. 자기도 경호관이라고. 하는 일이 법무팀장이란 영역일 뿐이지, 본질은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재신 그룹의, 신규진의 스파이가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그런 이차영의 선택은, 10회 마지막의 이동휘의 선택으로 치환된다. 
이차영의 선택은 그 수를 읽는 김도진에 의해 실패로 끝이 난다. 그런 이차영을 목격한 한태경은 신규진의 방을 엎으며 대통령에게 원망을 쏟아붓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냐고. 왜 일개 경호관에게 그 모든 짐을 지웠냐고. 하물며 한태경 자신이 도울 수 조차 없도록 만들고. 

그런 한태경에게 대통령 이동휘는 말한다. 자신은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대통령이라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대통령이기에, 그들과 똑같아 질 수 없다고! 까짓 대한민국에서 법과 질서가 얼마나 우스워질 수 있는 단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드라마 속 고지식한 대통령은 거기에 매달린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쥐고 놓지 않는다. 

그러던 대통령이 마지막 김도진을 찾아가 딜을 한다. 팔콘의 개가 되겠다고. 대신 탄핵을 면하게 해달라고. 

(사진; tv리포트)

대통령이 그런 과정에 이른 것을 설명하는 장면은, 드라마가 끝나고 덧붙여진 에필로그이다. 대통령 관저의 한 사무실을 가득 메운 채 열렬하게 정책에 대해 토론하던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 신규진, 그리고 다른 비서실장들, 그리고 그의 옆을 거닐며 그를 지키던 함봉수 비서실장과, 그의 부름에 아이처럼 달려오는 한태경. 그의 주변을 메웠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그들을,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동휘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힘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한태경이나, 이차영같은 젊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또한 김도진 일당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시도를 막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니까. 

10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어쩌면 이제 좀 뻔해져 보이기도 한다. 깜짝 쇼인 듯 하다가, 바로 다음 회가 되면, 사실은 이랬어 하는 것이, 결국은 장황한 설명조로 끝나는 드라마적 구조가 때론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행위 그 자체보다, 그것에 이르는 의도가 중요하다고 방점을 찍은 작가의 입장이니 그것도 처분에 맡깉 수 밖에.
겨우 윤보원과 한태경만 함께 했을 뿐, 10회에서 보여지듯이, 아직도 뜻을 같이 할만한 사람들은 저마다 속내가 복잡하다. 대통령에게 까지 악다구니를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인 한태경과 달리,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아들처럼 그를 바라보던, 그래서 그런 그의 희생을 막고싶은 이동휘의 속내는 더더욱 헤아릴 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기에, 그들의 그 소명이 함께 하는 물줄기는 합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각각의 물줄기가 거친 물살이 되어 비극을 막아내는 그 감동을 위해 조금 더 인내하는 수 밖에. 이것이 <쓰리데이즈> 의 개가 된 자의 숙명이다. 


by meditator 2014. 4. 4. 09:39

그저 드라마로서도 <쓰리데이즈>는 참 재미있다. 

북에서 내려온 리철규 소좌를 자신의 기자 회견장에 세우는 배수의 진을 친 대통령(손현주 분), 하지만, 그런 대통령의 시도는 오히려, 이제 그와, 그를 도운 경호관들조차 사기꾼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충수가 되어 옮아매어 진다. 더구나, 그 올가미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그 누구보다도 한태경(박유천 분)이 믿었던 한태경의 동료이자, 청와대 법무팀방인 이차영이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래서 매회 작가와 제작진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기꺼이 내 뒤통수가 멍이 들도록 거기에 머리를 들이밀게 만드는 재미를 <쓰리데이즈>는 선사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9회를 통해 대통령과 한태경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대사는, 드라마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한번쯤은 새겨들어야 할 명언들이다. 

‘쓰리데이즈’ 박유천, 장동직 무사히 빼돌리는데 ‘성공’

이동휘; 그래야 옳은 거잖아요.
이제 탄핵을 받으면 대통령 관저를 비우라는 통보를 하고 난 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온 정권인데 이렇게 만들 수가 있냐는 신규진 비서실장(윤제문 분)의 원망섞인 힐난에, 이동휘 대통령은 딱 한 마디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래야 옳은 거지 않냐고? 그런 이동휘의 답에 신규진 비서실장은 반문한다. 그런 사실이 우리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고? 경제가 좋아지냐고, 정치가 달라지냐고? 사람들은 그걸 몰라도 살아간다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살아가고 싶어한다. 골치 아프게 과거의 진실들을 알아서 자기 사는데 머리 아프기만 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이동휘 대통령의 사실이지 않냐는 묵직한 한 마디는 그래서 뭉클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들을 내보이는 것같아서. 

드라마 속 양진리 사건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그 결결이 잊고 살았던 진실들이 그 대사 한 마디에 울컥 솟아올라 가슴을 친다. 멀게는 '과거사 진실 위원회'가 밝혔냈던 친일파 인명 사전에 올랐던 사람들의 진실에서 부터, 뒤늦게서야 밝혀졌던 제주도 4.3 사건 등,그리고 가깝게는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있는 제주도에서부터, 쌍용자동차, 그리고 평택, 밀양 송전탑 현장에까지 우리가 잊고 사는 또 다른 양진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드라마 속 신규진 비서실장은 노골적으로 재신과 손을 잡고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앞장서는 협잡꾼이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은 또 한 사람의 신규진이 되어 누군가의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사는데 보탬이 되지 않으니깐. 

그래서 이동휘의 수식어가 붙지 않은 한 마디는, 그 한 마디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 <쓰리데이즈>가 좋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누구도 선뜻 하기 힘든 직언을 우리들에게 해주어서,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부끄러운 이 시간이, 마치 고해 성사를 대신 해주는 것처럼 시원하기도 하다. 

(사진; obs)

한태경; 저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의 행보는 쉽지 않다. 재신 김도진 회장(최원영 분)의 예언대로, 대통령은 그가 진실을 밝히려 하면 할 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사람이 죽어간다. 9회에서도 그를 돕고자 기자 회견장에 나선 리철규 소좌가 죽었다. 
그리고 힘들게 그를 기자회견장까지 데리고 온 한태경은 그의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 그런 한태경을 보고 대통령은 후회한다. 그의 아버지 한기준이 자신의 아들만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의지할 곳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제 겨우 3년차 된, 자신을 위해 죽기엔 너무 어린 경호관과 일을 도모하게 된 것이 무겁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에게 한태경은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그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직업에서 시작하여,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출발점이었고,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이 추진체였다면, 이제 9회에 들어, 한태경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선택으로 이 일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김도진이 한태경에게 한태경에게 이동휘에게와 마찬가지로 네가 무슨 일을 하려 하면 할 수록 네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갈 거라는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당신이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 세상이 알게 하겠다고 자신있게 대꾸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 세대가 저지른 과거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세대의 임무로 발현되는 과정, 그저 직업 정신이 투철한 한 청년이 자각된 역사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모습을 <쓰리데이즈>는 주인공 한태경을 통해 생생히 그려낸다. 그리고 김도진 일당의 2014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한태경 세대의 결심은 양진리를 되풀이 하지 않는, 즉 역사적 과오을 되풀이 하지 않는 진정한 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팍팍하다. 이동휘 대통령이 친 배수의 진은 오히려 그의 자작극으로 그를 옭아매고, 진실을 향해 뛰어든 한태경의 용기는, 자기 아버지의 죄를 덮으려고 살인조차 저지르는 파렴치범으로 매도된다. 
하지만 그래서, 더 <쓰리데이즈>를 응원하게 된다. 현실은, 한태경이 만난 검찰처럼, 그리고 그에게 뻔하게 각색된 스토리의 질문을 던지는 언론의 그것이지만, 우리가 만나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만큼은, 그런 바늘 구멍하나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뚫고 진실을 밝히려 하는 주인공들이 승리할 테니까. 그렇게 라도 우리도 왜곡된 현실의 숨통을 튈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조금은 덜 부끄럽게 사는 용기를 얻어 가질 테니까 말이다. 좋은 드라마다.  

그리고 이 좋은 드라마의 훌륭한 대사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이동휘 역의 손현주와, 한태경 역의 박유천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진정성어린 연기가, 대사를 그저 대사가 아닌, 진실이 되어 가슴에 와닿게 해준다. 두 사람이 인터뷰를 통해 밝혔던 진정성이란 각오가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음을 매회 두 사람의 연기를 통해 확인하고 감동받아 행복하다.


by meditator 2014. 4. 3. 01:51

sbs의 주중 미니 시리즈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동일한 스릴러 장르물이다. 

또한 두 드라마 똑같이 시작과 더불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쓰리데이즈>가 대통령의 저격 사건으로 서두를 열었다면, <신의 선물>은 김수현(이보영 분)의 딸 샛별(김유빈 분)이가 납치되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둘다 16부작 드라마로 중반을 넘긴 두 드라마의 진행 상황은 전혀 다르다. 

<쓰리데이즈>가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시작하여 과거 양진리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대통령과 한태경, 그리고 그들의 반대편에 김도진과, 국정원, 여당의 실세들의 명확한 전선이 형성되었다. 결전이 임박한 것이다. 
반면, 이제 10회를 마친 <신의 선물-14일>의 경우, 이제서야 샛별이의 사건이 과거 기동찬의 형 기동호가 저질렀다고 믿어졌던 기동찬이 사랑했던 여인 수정이의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사건이 밝혀진 것과 달리 오히려, 누가 샛별이의 범인일까는 더 오리무중이 되었다. 9회에서 10회 초반에 이르기까지 기동찬까지 수현이 의심할 정도로, 여전히, 아니 오히려 회를 거듭하면 할 수록,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럽다. 

장르물에서 모든 사람들이 범인의 혐의를 받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설정이다. 그만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장면 장면 그 누구도 범인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의 선물-14일>은 10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런 장르적 묘미에, 제작진이 너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가 들기 시작한다. 

사실 시청자들은 처음 기동찬이 수현과 함께 등장했을 때, 그리고 그가 수현과 함께 물에서 살아나와 2주 전의 과거로 돌아갔을 때 이미 그의 형의 범죄와 샛별이 납치 살해 사건 사이에 관계가 있을 거라는 예측을 가졌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니 당연히 그럴 밖에. 
그런데 드라마는, 그 당연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무려 10회라는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닌다. 처음 부녀자 연쇄 살인범 차봉섭(강성진 분)을 잡았고, 이어서 장문수(오태경 분)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을 잡으면 조금은 분명해 질 것 같은 사건의 윤곽은 마치 그저 양파 껍질만을 벗겨낸 듯 여전히 수많은 속살을 숨긴 채 시청자 앞에 던져진다. 샛별이의 엄마 수현이 내 딸은요? 하며 절규하듯, 시청자들도, 회를 거듭할 수록 도무지 윤곽조차 알 수 없는 범죄, 혹은 범인의 윤곽에 슬슬 지쳐 가기 시작한다. 마치 제작진들이 자기 들만 맛있는 걸 숨겨놓고 나눠주지 않는 것같이 약도 오르면서. 

(사진; osen)

오히려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 수록,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던 것이 수현의 주변으로 오면서 수현 주변의 인물들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수현의 남편(김태우 분), 그리고 그 남편과 내연의 관계에 있었던 수현의 후배 작가 주민아(김진희 분), 그리고 딸 샛별이가 좋아하는 가수 스네이크(노민우 분)에, 수현의 납치 현장에 찾아가 증거물을 숨긴 수현의 옛애인 현우진(정겨운 분), 기동찬의 집에 뜬금없이 나타난 노인(신구 분)까지 모든 사람들이 샛별이의 사건, 그리고 과거 수정이의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들 모두가 의심스러워진다. 
그런데,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도무지 그것이 수정이의, 그리고 샛별이의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그저 시청자들은 수현이 못지 않게 답답함이 증가된다. 이제 드라마가 2/3의 지점을 돌 즈음이 되었으면, 대강 윤곽이 드러날 만도 하련만 여전히 제작진은 시청자들에게, 매회 새로운 떡밥을 하나씩 던지면서 요건 몰랐지?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사건이 오리무중을 헤매게 되면서, 오히려 샛별이 모녀의 부산스러운 행보는 부각된다. 
딸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다는 엄마는 딸을 방치하는 것만 같고, 엄마를 똑닮은 딸은 갈 수 없는 나이임에도 스네이크의 콘서트장행을 감행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다. 딸을 방치하며 사건을 해결하러 다니는 엄마나, 그런 엄마의 손아귀를 벗어나 제 나이 또래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를 치는 딸내미나, 시청자들이 그들에게 연민이나, 공감을 하기 보다, 왜 저러지? 심지어 저럴 시간에 딸을 돌보지, 혹은 쟤가 더 문제야 라는 부정적 인식을 매회 쌓아가고 있을 뿐이다. 
제 아무리 그들의 보디가드 기동찬이 매씬마다 원맨쇼에 가까운 진기명기 연기력을 보이고, 그것도 모자란 듯 직접 기타를 치며 '마법의 성'을 불러도, 비호감으로 전락한 두 여주인공들에게서 떠나가려는 마음이 쉽게 돌아오질 않는다. 

<신의 선물-14>일이 던진 패는 만만치 않다. 대통령까지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사형제도라는 형행 제도의 문제점도 걸려있다. 신구가 분한 기동찬네 집에 등장한 노인이 사실은 대기업 회장이며, 그와 대통령은 한때 밀월 관계였으나 이제는 입장을 달리하는 사이라 하니 정재계의 커넥션 문제도 끼어 있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인권 변호사로 명망을 날리지만, 윤리적으로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역시나 문제가 있어보이는 한지훈(김태우 분)의 이중적 면모도 만만치 않다. 이들이 사건이 밝혀지면 마치 목걸이에 구슬이 꿰어지듯 한 줄에 쭈욱 얽힐 거 같긴 한데, 도무지 드라마는 그런 결론에 냄새만 피울 뿐 10부에 이르도록 무엇하나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없다. 마치 장기판에서 기동성 있는 차만 줄창 왔다 갔다 하고, 포 등 다른 무기들은 그저 한 발자국만 들락날락 하는 형국이다. 

가지고 있는 패를 숨기고, 위기를 조장하려다 보니, 능동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뛰어든 여주인공과 그 딸내미가 민폐가 되어버리고, 나쁜 놈인 것 같은 사람들은 어른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매회 끈질기게 따라오던 시청자들은 드디어, 10회에 이르러서야 겨우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밝혀질락말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전혀 감도 잡지 못하는 <신의 선물-14일>의 긴 호흡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어버렸다. 저렇게 벼르다 마지막에 제작진이 이 사람이 범인이야 이걸 몰랐지? 이런 사건이었어, 하면 오히려 보던 사람들이 이까짓걸 이제야 알려줘 하면서 분노하게 될 정도로. 수현과 기동찬은 몰라도, 적어도 시청자들은 대강 돌아가는 사건의 정체라도 눈치채도록 해야 장르 드라마의 재미를 놓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신의 선물-14일>은 너무 꼭꼭 숨어 술래가 찾다 해가 져서 집에 가버리게 만들듯, 숨겨진 패에 대한 애착이 크다. 숨바꼭질의 재미는 찾고, 찾아지는 과정의 쪼이는 맛이다. 

부디 남은 회차 동안이라도, 시청자들과의 숨바꼭질 대신, 시청자가 지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호흡으로 드라마를 끌어가 주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4. 2. 02:29

<밀회>에 빠져들고 계신가요? 이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떨리시나요? 혜원(김희애 분)과 선재(유아인 분)의 사랑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움켜 쥐고 계신가요?

그런데 혹시 얼마 전에 종영한 <따뜻한 말 한디>를 보셨나요? 아니 바로 지난 주에 종영한 <세 번 결혼한 여자>는요?

<밀회>는 40대 여인과 20대 남자의 사랑이야기입니다. 40대의 혜원은 서한 예술 재단 기획실장으로 권력을 쥔 쪽이죠. 선재는 공익 근무를 하며 킥배달을 하는 피아노 천재로 남편의 부탁을 받고 재능있는 피아노 지망생을 찾던 혜원의 눈에 띤 간택받는 입장인거죠. 선재를 만나 함께 연주를 하던 혜원은, 그리고 선재는 음악을 통한 교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을 통해 교감을 이루는 사랑이라니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제인 캠피온의 영화 <피아노>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지 않나요?

그런데 만약, 여기서 등장하는 혜원과 선재의 성이 반대라면요?
예술 재단의 기획실장이며 선재를 스카웃하려는 혜원이 40대의 미중년 남자였다면 어땠을까요? 그에게 선택을 당하는 피아노의 천재가 꽃다운 스무 살의 처자였다면요? 그들이 피아노를 통해 교감을 하고, 스무 살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기 보다 스물 살이 많은 남자 선생님에게 대뜸 사랑한다며 키스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런 설정이었다면, 제 아무리 개연성 있는 설정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그려낸 정성주 작가에, 영화 보다도 더 몽환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는 안판석 피디라도, '불륜'이라는 명제를 벗어나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왜 나이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가 만나면 불륜이 되고, 어린 남자와 나이 많은 여자가 만나면 사랑처럼 보이는 걸까요?

(사진; 스포츠 한국)

앞서 말했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보자구요. 
거기 주인공들 중 류재학(지진희 분)과 나은진(한혜진 분)도 사랑에 빠졌어요. 이 사람들 혜원과 선재가 나눈 피아노를 통한 교감이나, 키쓰는 커녕, 손이나 한번 제대로 잡아보았나요? 호텔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왔다지요.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드라마가 하는 20회 내내 불륜이란 분홍 글씨가 찍힌 채 혹독한 댓가를 치뤘습니다.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니, 잠자리를 하지 않아서, 진짜 사랑을 했다고, 류재학의 아내 송미경(김지수 분)은 더 분노했었지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수(이지아 분)와 결혼한 준구(하석진 분)는 결혼 전 만나던 다미(장혜진 분)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결국 그의 우유부단한 혹은 충동적인 행위들은 은수와의 결혼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지요. 

경우가 다르다구요?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나은진은 모르겠지만 류재학은 분명히 사랑에 빠졌었어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다미는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준구를 사랑하지요. 하지만 두 드라마는 두 커플의 사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은진과, 재학이 저지른 결과에만 몰두하며, 그들이 가져온 가정 파괴에 주목하지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준구나 다미는 거의 파렴치범 수준입니다. 

반면, <밀회>는 혜원과 선재의 사랑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그 사랑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드라마는 작동합니다. 예술 재단과 그것을 움직이는 가진 자들의 개처럼 살아가는 혜원, 그리고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현실이 그것을 받쳐주지 않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던 선재, 그들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라, 억압적 현실에 비춘 한 줄기 삶의 희망같은 것처럼 드라마는 묘사해냅니다. 선재는 혜원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스승은 혜원의 남편이지만, 선재는 아니라고 합니다. 진흙 속에서 뒹굴던 자신을 알아봐 준 당신이 자신의 진짜 스승이라고 합니다. 선재의 사랑은 흡사 아기 오리들이 처음 시각적으로 마주한 대상을 따라다니는 '각인'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자신의 꿈을 병으로 포기한 채 결혼조차도 정략적으로 선택하며 마름으로 살아가는 혜원에게 자신과 같은 병을 가진, 불우한 환경에서 고사되어 가는 선재는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짓눌려 가던 자아의 회복이요, 자기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사람들의 머리는 참 합리적(?)입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자신들이 보고싶은 것만 봅니다. 드라마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그려내기에 앞장섭니다. 여성들이 주시청층인 10시 대의 드라마들은 그래서 누군가의 남편들의 사랑은 불륜으로 정의내리고, 자신들과 같은 여성의 불륜은 사랑이라 이름붙입니다. 더구나 그 어린 남자애랑 사랑에 빠지는 혜원, 아니 김희애는 그 나이에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심지어, 예술 재단 이사장의 뒤를 봐주고, 회장님의 여자를 대줘도, 그녀는 여전히 우아함을 잃지 않습니다. 드라마는 보는 여성들의 꿈속의 자아이자 욕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재는 나이는 어리지만, 여성인 혜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태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 남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의 틀을 유지합니다. 사랑에 수동적인 여성과 그에 대해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남성, 대신 이전의 남성들이 그들의 날개를 경제적인 것으로 포장했다면, 선재는 대신 나이로 치장합니다. 속된 말로, 나이가 벼슬입니다. 나이어린 백마 탄 왕자가 조만간 늙을 일만 남은 여자 앞에 나타나 당신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그 하나는 '공평하게' 나의 사랑이 불륜만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길 원한다면, 남의 사랑도 그저 불륜으로 낙인 찍지 말고 사랑으로 다시 보아줘야 하는 마음의 자세겠지요. 어쨋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원의 사랑은 불륜입니다.  마흔 살 먹은 여자의 불륜도, 마흔 살 넘은 남자의 그것도 사랑일 수도 있는 거지요. 남자들이 하면 나쁜 짓이고, 우아한 여자가 하면 봐주는 건 너무 비겁한 태도입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마지막 회 준구와 다미를 맺어준 김수현 작가님의 깊은 속내가 그것이었을까요?

또 하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본질적으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점점 담아기 힘들어 지는 남자와 여자들의 욕망에 대한 태도입니다.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 속에 놓여진 사람들의 새로운 사랑은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아무리 철부지 같은 남편이라도 남편이 있는 혜원의 사랑은 불륜입니다. 류재학의 사랑이 불륜인 것처럼요. 하지만, 무수히 양산되는 드라마 속 불륜들처럼, 어쩌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담기엔 결혼이란 제도가 너무 경직되거나, 오래되어버린 문물제도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지점도 한번쯤은 짚어보자구요. 그러면 그 낡은 제도에 목매여 사는 사람들이 너무 초라해 지는 건 아니냐구요? 낡고 이제는 쓸모가 덜해도 여전히 누군가와 평생 믿음과 신뢰로 관계를 꾸려간다는 건 꼭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요. 그런 행복을 맛보지 못한 혜원의 사랑이기에, 더 안쓰러운 것도 있잖아요. 


by meditator 2014. 4. 1.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