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조선 건국의 개략적 설명에 '사대주의'란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당시 줄긋기를 즐겨하시던 역사 선생님은 사대주의에 줄을 그으라 하시며, 그냥 사대주의가 아니라, 실리적 사대주의라 부연 설명을 덧붙이셨다. 하지만 역사 인식의 폭이 단순하던 그 시절, 사대주의면 사대주의지, 실리적 사대주의라는 단어가 가진 이율배반성에 대해 고등학생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몇 십년이 흘러, <정도전>은 그 시절에 밑줄 그어진 사대주의의 속내를 공들여 설명해준다.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의 과정을 그려내는 대하드라마 <정도전>은 이제 드디어 이성계의 회군이라는 사건에 이르렀다. 드라마는 '회군'이라는 군사적 사건을 그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한 야심의 일환이 아니라, 여말의 혼란기에 명분과 실리라는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세력간의 팽팽한 정치적 입장 차이로 설명해 내고자 한다. 

귀족 우두머리이자, 실질적인 고려의 실권자였던 이인임을 부정부패의 주구로 척결해낸 최영과 이성계의 연합 세력은 새로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명나라에 대한 입장으로 의견을 달리한다. 

(사진; tv리포트)

철령 이북의 고려 지역을 넘보는 명나라에 대해 최영은 명분을 우선시한다. 이제 막 입지를 확보해 가는 명나라를 얕잡아 본 최영은 무장답게, 고려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 지역 정벌을 주창하며, 고려를 황제국으로 격상시킬 것을 선포한다. 그런 그의 결정은, 모처럼 이인임 등의 세력을 척결하고 고려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만다. 노회한 무장의 마지막 욕심이 자신은 물론, 한 나라의 운명을 달리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이성계와 유림 세력은 입장을 달리한다. 이제 막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명나라와의 싸움은 국력이 고갈된 고려에 있어서 곧 그 나라의 운명을 종식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바라본 것이다. 최영의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군량미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요동 정벌은 무모한 시도라 본 것이다. 물론 명을 정신적 어버이로 가진 유림 세력의 한계를 짚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쇠잔해 가는 고려의 절박한 상황을 더 부각시키며, 그것을 고민하는 젊은 신진 사대부의 고뇌와, 백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이성계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최영과 이성계, 유림의 대립은, 언제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국가적 위기를 겪어 온 한반도의 역사에선 시사적이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배제한 채 명분에만 몰두하여 결국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조 시대의 무능한 외교 정책을 떠올려 보면, 시대를 달리하여 건국 시기의 조선과 그후 몇 백년이 흘러 오히려 여말 최영과도 같은 그 후손의 무모한 선택의 다른 길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된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명분은 그 저간의 사정이 배제된 그 문구로 보면 훌륭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인임 등의 핍박으로 왕실 곳간조차 채우기 힘들 정도가 된 고려 말의 그 명분은 허세에 불과하다. 그것은 21세기에도 강경 일변도의 외교 정책으로, 스스로 입지를 축소해 가는 현재의 정세를 비추어 보아도 교훈은 여전하다. 

드라마 속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역성 혁명은 그의 대의라 강권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인임이 끝내 그를 믿지 못했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하는 고려의 신하로 그려진다. 정도전에게 자신에게 욕망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며 토로했던 이성계에게 대의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단언했던 정도전의 정의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역사는 위화도로 간 이성계의 발목을 자연 재해와 역병으로 발목을 잡는 것처럼 그려낸다. 

역사를 온갖 우연적 요소의 집합체로 설명해 낸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처럼, 하늘이 뚫린 것처럼 쉬지 않고 내리는 비, 그로 인한 군졸들의 탈영과 역질, 그리고 군량미 부족은 이성계에게 천명을 설득한다. 그리하여,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그저 누군가의 욕망과 야심으로 인한 획책이 아니라, 불가피한 그 시대적 결론인 것으로써 그려내고자 드라마는 고심한다. 수많은 우연의 사건 들속에서 결국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야 마는  필연적인 역사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누군가의 야심이나 야망의 집합체가 아니라, 불가피한 역사적 결론이었음을 설명해 내기에 고심한다. 


by meditator 2014. 3. 31. 02:59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종영되었다.

애초에 제목을 세번 결혼하는 여자로 삼았던 만큼, 극중 주인공이었던 오은수(이지아 분)가 과연 세 번째 결혼을 누구와 할 것인가가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우선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을 했지만 헤어진 이후에도 애틋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전남편 정태원(송창의 분)과의 해후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였다. 하지만, 두번 째 결혼 대상이었던 김준구(하석진 분)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결국은 아이로 인해 준구와 다시 살지 않겠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통속적인 가능성을 차치하고, 여주인공 은수가 선택한 세 번 째 결혼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결혼이었다. 즉 자기 자신만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세번 결혼한 여자>를 문학 장르로 치자면,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과 이혼을 다룬 '순수 애정 소설'같지만, 오히려, 결론에 이르러 봤을 때, 작가 김수현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 문학'에 가까운 작품으로 보여진다. 

여주인공 오은수는 마치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여주인공 노라처럼, 자신을 속박하던 시집살이의 굴레로 부터,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부 관계로 부터 자유를 찾은 여성이다.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전남편 정태원의 입을 빌어, 그리고 준구 이모의 입을 빌어, 세상의 시각을 전한다. 자신을 포기하라고, 그러면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여주인공 은수는 그런 세간의 관습에 답한다. 이것이 나라고. 앞으로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아이를 위해 포기하느니, 차라리 후회를 택하겠다고, 뼈를 깍는 아픔을 겪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인생의 풍파를 겪은 나이의 노작가 답게, 물론 오은수의 선택을 마냥 해피엔딩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오은수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기 위해, 그녀가 낳은 두 번째 아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댓가를 치뤘다. 작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을 선택한 댓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오은수의 선택이 이 시대에 분명 의미있는 선택으로, 삶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지길 김수현 작가는 강하게 말하고 싶은 듯하다. 

오은수 만이 아니다. 그녀의 언니 오현수(엄지원 분)가 선택한 삶도 마찬가지다.  15년을 짝사랑 했던 사람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것이 당연히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삶도 또 다른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삶의 유형이다. 마지막 회, 은수는 말한다. 정작 언니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결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 동생의 정의에 대해 언니 현수는 말한다. 결혼을 한다면 안광모(조한선 분)의 어머니와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해서 피곤해서 싫다고. 이것을 통해 작가 김수현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은 결코 하나의 순차적 과정이 아닐 수도 있으면, 결혼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제도로, 이제는 이 사회 여성들의 삶에 질곡으로 자리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특히나 주말 온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보여준 작가의 시선은 파격적이다. 작가의 바로 전 작품,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현수 역을 맡았던 엄지원이 분했던 안소영 역을 통해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작품의 전체적 기조가 대가족 제도의 행복을 주제로 삼는 한에서 그 대안적 삶의 존재는 대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용해되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작가 김수현은 보다 적극적으로 삶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 '싱글'의 위치를 보다 부각시킨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싱글이지만 가족 속에 어우러져 그 싱글의 삶이 무디어 졌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 역시, 독립적 싱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계적 확대 가족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은수는 독립적이라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친정 부모와, 언니라는 모계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다. 언니인 현수와 광모의 삶도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현수 가족의 그림자는 짙다. 그런 한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대안으로 내세운 '싱글'은 제한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목적 의식을 내세운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자신의 주제를 완성하기 위해, 작품성의 매끄러움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 역시 오은수라는 똑부러지는 삶의 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캐릭터들을 훼손했다. 

이혼을 했음에도 한결같은 오은수 바라기였던 전남편 태원은 갑자기 새로 결혼한 채원(손여은 분)이 가정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자 태도를 돌변한다. 심지어, 은수를 찾아가 함께 하는 행복 운운하는 오지랖까지 펴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세번결혼하는여자’ 손여은, 송창의 아이 임신에 ‘행복한 입덧’

오은수를 제외한 또래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사이코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던 채원은 남편의 사랑을 찾자 공주가 되었고, 알콜 중독에 헤매던 다미 역시 준구의 사랑 속에 사랑스러운 천사가 되었다. 은수가 독립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동안, 그녀 주변의 여성들은 가장 의존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은, 여주인공의 선택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마치, 작가가 저런 의존적 인물은 저런데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여주인공 같은 사람은 아픔을 겪더라도 독립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묘한 '선민 사상'을 가진듯이 보여 드라마적 일관성을 놓친 듯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삶이 저렇게 아롱이 다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제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회, 행복을 찾은 채원과 다미의 캐릭터는, 그간 그들이 드라마 내내 보여주었던 돌출적 캐리터의 결론으로는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보다 아쉬운 것은, 여성 캐릭터가 독립적인데 반해, 드라마 내내 일관되게 한심해 보였던 남성 캐릭터들이다. 마치 작가가 '쯧쯧쯧' 하며 바라보듯이,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불쌍해 보일만큼, 수동적인 남성 캐릭터의 존재는, 비록 작가가 바라보는 이 시대의 대다수 남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영웅 드라마의 감정 과잉의 영웅만큼이나, 단편적인 캐릭터로 일관된다.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듯이 보였던 준구가 마지막 회 다미와 함께 행복해 하는 모습은 그가 그간 보였던 불성실을 사랑으로, 혹은 삶의 아이러니로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분명 김수현 작가가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결혼과 이혼만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은수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리를 서는 듯한 스토리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설득은 되지 않는 껄끄러운 선동문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4. 3. 31. 01:47

3월 29일 방영된 <인간의 조건>, 여섯 남자 멤버의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마지막 소회를 밝히는 자리에서 김준현은 말한다. 처음엔 미션이 주어지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당황했었는데, 어느 지점을 경과하면서, 어떤 미션이 주어지더라도, 오늘 하루 요렇게 요렇게 보내면 되겠다는 깜냥이 생겼었다고. 그런 김준현의 말에 정태호가 덧붙인다. 그래서 우리가 그만하게 되는거야! 라고. 

여섯 멤버들이 회고한 시간처럼 파일럿 방송으로 '핸드폰, 컴퓨터, 텔레비젼 없이 살기' 이래, 화제가 되었던 '원산지 음식만 먹고 살기', '쓰레기 없이 살기' 이래, 마지막 '최소한의 물건으로만 살기' 까지  인간의 조건, 문명 사회에서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지향하며 여섯 남자들이 한 집에 모여 살며 여러가지 미션을 수행하여 왔다. 

하지만, 깜짝 미션의 등장, 그 미션으로 인한 멤버들의 '멘붕', 그리고 혼돈 속에서 미션을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메뉴얼의 형식을 답습하다, 그것의 한계를 게스트로 넘어 보려고 했으나, 그 조차도 여의치 않자 결국 기존의 멤버를 1기로 치며, 멤버 교체의 단호한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언제인가 부터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그 어떤 미션을 해도, 함께 모여 밥먹고 놀다 잠들고, 뒹굴거리는 것이 화면을 채워가곤 했으니까.

멤버 본인들은 말하기 부끄러워 했지만, 작년 연말 시상식에서 '실험 정신상'을 받을 만큼 <인간의 조건>이라는 포맷이 가진 예능으로서의 건강성이나, 독창성은 독보적이다. 하지만 결국 멤버 교체라는 강수를 두게 될 만큼 프로그램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무엇때문일까?


무엇보다, 인간다운 미션이라는 범주의 한계가 있겠다. 핸드폰, 텔레비젼, 컴퓨터 없이 살기, 쓰레기 없이 살기라는 강수를 넘어설 화제를 불러 일으킬 미션이 더 이상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멤버들이 새로운 미션에 대비하여 스스로 추측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집없이 살기 등의 미션은 아직 해보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찾아보면 얼마든지 인간다운 삶을 고민해볼 미션의 여지는 남아있다라는 생각은 든다. 

물론 <인간의 조건>이 가지는 프로그램적 특성이 크기는 하지만, 매년 '무도 가요제'등을다른 버전으로 활용하는 <무한도전>이나, 똑같이 여행가고, 놀이하는 방송이지만, 몇년 째 계속되고 있는 <1박2일> 앞에서 미션의 한계를 운운하는 건, 어쩌면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젠 어떤 미션을 해도 새롭지 않는 그 진부해진 방송 내용의 한계가 아닐까.

그렇다면 앞서 지적했듯이, 이제는 어떤 미션을 들이대도 능수능란하게(?) 해치워버리게 된 멤버들의 문제일까? 아마도 제작진이 생각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여기에 방점이 찍히는 듯 하다. 

하지만 오히려 익숙해진 멤버들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제작진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 더구나, 같은 멤버 김준호가 <인간의 조건>에 비해, 새로 시작한 <1박2일>에서 훨씬 활약이 큰 것을 보면, 누가 하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누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케이블 방송 <삼촌 로망스>의 양상국도, <인간의 조건> 양상국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다. 박성호, 김준호, 김준현, 정태호, 양상국, 허경환까지, 각자 많은 가능성을 가진 우수한 멤버들을 데리고, 파일럿 방송을 했던 나영석 피디이상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지 못한 것이 오늘날 <인간의 조건> 멤버 교체의 가장 결정적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여성판 <인간의 조건>이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면서, 신선한 인물들의 공급으로 지금의 지지부진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겠다고 생각한 듯 한데, 그것은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크다. 단 2회만 한 여성 멤버들의 신선함이라는 것이, 그저 이벤트 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기존의 남자 멤버들이 존속하는 한에서, 가끔 먹는 특식으로서의 신선함이었다는 것이다. 남자 멤버들의 초반 화제성 지속 기간만큼 그들이 화제성을 유지해 줄지 벌써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구나 29일 방송에서 정태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조건>을 하면서 남은 것이 미션을 통한 인간다운 삶보다는 마치 친형제와도 같은 멤버 상호간의 관계라는 정의처럼, 그간 이들 멤버에 대한 정으로 본방 사수를 했던 <인간의 조건> 시청자층이 기존 멤버가 싹 물갈이 된 상태에서 기존 멤버가 하던 미션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은 새 멤버의 <인간의 조건>을 여전히 충성도 높게 보아줄 지도 미정이다. 

오히려 지금 <인간의 조건>에 진짜 필요한 것은 어떤 미션을 해도, 늘 똑같은 미션같아 보이는 제작 스타일의 문제가 아닐까, <1박2일> 시즌3의 서울 특집처럼, 그간 여러 번 갔던 서울이라도 전혀 다른 감상을 주었던 그런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누가 와도, 깜짝 쇼의 기간을 넘어서는 시청률의 충성도를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미션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과 연구에서 비롯된 변화만이 지금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넘어설 희망이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30. 12:16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는 많다. 

베르그송이 인간의 본질을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내린 데서 비롯된 '호모 파베르(Homo Faber)', 사유를 하는 인간이다 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그리고 인간의 본원적 특징을 '놀이'에 둔 요한 하위징하의 정의에 따른 '호모 루덴스(Homo Ludens)'까지, 그 특징에 따라 인간종은 새로운 이름을 명명 받았다. 이제, 거기에 하나의 명칭에 더 얹어진다. 바로 요리하는 인간, 바로 26일에서 28일에 걸쳐 kbs1을 통해 방영된 <요리인류>가 내린 인간의 정의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에 대해 말하기 전에 앞서, 이 프로그램을 만든 피디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봐야 겠다. 
이욱정 피디에 대해 이 글을 쓴 사람이 처음 접한 것은 <한겨레 신문>의 목요판 기사에서 였다. kbs피디였다가 잠시 휴직하고 세계적 요리 학교인 르 코르동블루를 다니며 고군분투하던 그의 이야기를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일찌기 <인사이트 아시아- 누들 로드>를 통해 다큐멘터리 부문 플리처 상급인 피버디 상을 받는 등 화제를 끌었던 그가, 직접 요리의 세계에 뛰어든 실시간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그런 그가 그 전투와도 같던 요리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돌아와 첫 작품을 만들었다니,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 것인가,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요리를 좋아하던 피디에서, 이젠 직접 요리를 할 줄 아는 피디가 만든 작품이라니. 

(사진; 해럴드 경제)

<요리 인류>는 말 그대로 요리를 통해 정의해 본 인류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사회사라고 사회의 각 분야라는 가지를 통해 역사 전체를 조감해 보는 분야가 있듯이, <요리 인류>는 요리라는 인간의 한 행위, 혹은 행태적 특징을 통해 인간다움의 본질을 짚어보고, 인류 역사를 조감해 보는 시간이었다. 

26일부터 시작된 <요리 인류>는 3부작으로 이루어 졌다. 
그 첫회는 <빵과 서커스>이다.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질문?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유목민들이 빵을 먹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동양에서도 익숙해진 식습관이 빵식이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건대, 왜 인류 중 누군가는 빵을 먹게 되고, 또 누군가는 밥을 먹게 되었을까? 그것에 대해 흔히 우리가 배웠던 지리 시간에는 그 지역에서 주로 나는 곡물로 그것을 정리했었다. 거기에 더해 <요리 인류>는 하나의 힌트를 더 덧붙인다. 바로 물! 사막 기후에서 장기간 돌아다니며 하며 살아가는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들은 밀죽에 비해 적은 물로, 짧은 시간에 조리할 수 있는 빵이 훨씬 더 유용한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리 인류>는 빵이라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먹거리를 통해, 인류 역사의 근원을 파악해 나간다. 
풍부한 곡물 생산을 바탕으로 빵을 주식으로 삼아 '빵 먹는 사람들'이라 불렸던 이집트 사람들이 처음 발효빵을 만들어 냄으로써 빵맛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찾아보는 등 빵 자체의 역사는 물론, 1부 제목에서 등장한 <빵과 서커스>의 유래, 로마에서 500여년간 지속되었던 검투사 시합의 절정에 이르른 순간, 경기를 보러 온 로마 시민들에게 빵을 던져 줌으로써 권력의 도구로 승화된 빵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빵의 역사를 섬세하게 더듬어 간다. 물론 프랑스의 크로와상에서 부터 중동 지방의 플랫 브래드까지 군침도는 빵의 종류들은 옵션이다. 
이 다큐의 마지막은 하루에 2억개의 빵을 만들며 화려한 빵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가 3000년 후 밀을 자족하지 못해 밀수입 가격 폭등으로 말미암마 정권의 운명이 뒤바뀌는 현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쯤이면 정말 빵으로 인한 인류의 흥망성쇠라 할 만하다. 

[리뷰] ’요리인류’, ’먹방’으로 인류학을 풍미하다
(사진; 뉴스 24)

2부는 <인간을 매혹시킨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 즉 향신료에 대한 이야기이다. 
눈과 코를 가린 사람들에게 양파즙을 먹여도 그것이 어떤 음식인지 전혀 알아맞추지 못한다.  그만큼 인류에게 음식의 맛에 냄새와 빛깔이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걸 증명함으로써, 역사의 순간순간들 그까짓 향신료 따위로 인해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의 전제를 깐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후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서구 열강의 인도로 가는 길에 대한 역사적 갈망을 추동했던 후추. 적은 양으로도 육류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잡는 건 물론, 그 맵고 알싸한 맛으로 인류의 음식 문화는 물론, 중세를 넘어 근대를 추동한 엔진에, 후추가 있다. 
후추만이 아니다. 아직도 뉴욕, 파리로 팔려나가 1kg에 1000만원을 호가하는 유세를 하는 샤프란도 만만치 않다. 그 샤프란 꽃의 꽃술로 만들어지는 이 향신료 1kg 을 만들기 위해 15만 송이의 꽃이 필요하단다. 달콤 매콤한 맛의 이 신비한 양념을 맛보기 위해 금보다 더 비싸다는 샤프란에 사람들은 지갑을 연다. 또한 조리를 한 후 노랗게 변하는 그 빛깔은 무슬림들에게 신성의 빛깔이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는 치유제이기도 하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하지만 그 비싸고, 귀하고, 맛있고, 심지어 약용 효과까지 있는 향신료가 그것을 생산하는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상흔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육두구를 생산해 냈던 섬은 육두구를 차지하려 했던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학살과 식민의 세월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기에, 덴마크의 레오나르도처럼, 누군가의 미각이 또 다른 누군가를 제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토종 향신료를 찾는 21세기판 요리 혁명을 준비하기도 한다. 


3부는 <생명의 선물 고기>이다. 
채식과 자연식이 트렌드가 되는 세상에 다큐는 오히려 동물식과 채식을 곁들여 몸의 건강을 되찾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인류에게 있어 육식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채식을 곁들인 육식은 즉 구석기 시대, 즉 현존하는 인류의 유전자 형태가 결정된 시대의 식습관을 되돌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육식은 곡물식을 굳이 하지 않아도 생존을 할 수 있을 만큼 필수 아미노산을 풍부하게 포함한 단백질의 보고이다. 인류가 서서 머리를 쓰고 생활할 수 있게 만든 가장 결정적 계기가 육식이라는 학문적 연구 결과로도 알 수 있듯이, 인류는 단백질을 섭취하면서,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한 지적, 육체적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요리 인류>는 그런 육식의 의미를 되돌아 보면서, 인류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고기를 어떻게 요리를 하며 소비해 왔는가의 향연을 보여준다. 
또한 고기를 소비했던 층과, 그리고 고기를 통한 분배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인류 역사의 계급성과 공동체 유지에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했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제 중세의 요리 과정,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소 도살 과정이 때로는 군침돌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사진; 영남일보)

요리를 해본 사람이 만든 작품답게, <요리 인류>를 보다보면 흥건하게 군침이 돌 정도로 요리의 과정이 맛깔나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물개가 사냥되어 고기가 되기 까지, 눈을 끔벅이던 소가, 갈기갈기 나눠져 제비뽑기의 대상이 되기 까지의 과정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요리의 과정도, 피범벅의 도살의 과정도, 결국 요리를 통해 본 인류의 일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채집한 혹은 사냥한 음식을 그냥 먹는 수준을 넘어,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에 도전한 인류를 통해, 창의적 인간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 맛있는 요리에의 욕망이 인류 역사에 끼친 상흔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요리를 통한 인류사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정성스러운 인류의 정의가, 수,목, 금, 가장 황금 시간대인 10시 타임에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이 주목을 받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부디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맛깔나는 눈요기와 지적 호사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선생님들이 선 시청하시고, 학생들에게 꼭 보여주시길. 역사라는게 이렇게 맛있게 버무려 질 수 있다는 것을!


by meditator 2014. 3. 29. 11:17

음어집을 외우지 못해 컨닝 페이퍼를 만들던 풋내기 경호관, 당선된 대통령이 나를 위해 죽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대통령이 제가 모실 첫 대통령이라며 주먹을 앙다짐하던 새내기 경호관 한태경(박유천 분), 이제 그는 대통령(이동휘 분)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대통령의 나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란 말을 실천하게 되었으며, 그를 우습게 보고 살려보내주었던 재신 그룹 회장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인물로 성장해 버렸다.


그렇게 성장해 가는, 아니 이미 부쩍 성장한 한태경이지만, 7회,8회를 거치며 그를 인도하는 건 이미 죽은 그의 아비들이다. 그의 아버지 한기준, 그리고 또 다른 아비 함봉수가 그에게 지시등이 되어 나타난다. 

(사진; 채널예스)

7회, 경호관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김도진이 있는 재신 호텔 스위트 룸까지 쳐들어 갔지만 눈앞에서 아버지의 기밀문서 98이 타버리는 것을 막지 못해 회한에 쌓여 소줏잔을 앞에 높고 앉아있는 한태경 앞에 경호실장 함봉수가 앉는다.
대통령을 암살하다 한태경의 손에 죽은 함봉수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 앉은 함봉수는 그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경호관이 된 이래 경호관으로서의 그의 등대가 되어주었던 함봉수이다. 그런 함봉수가 말한다.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쏘아 죽이던 그날처럼 다시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면 결코 망설이지 말라고 손을 내밀어 준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그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는 한태경은 그 어느때보다도 애절하게 자신이 죽인 함봉수 경호실장의 손을 잡는다. 

장례식장에서 장례도 치루지 못한 함봉수 실장의 처지가 거론되자 냉정한 동료들과 달리 한태경은 그건 단 한 번의 실수라고 눌러 못박는다. 비록 동료 경호관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한태경에게 함봉수 경호실장은, 그가 본능처럼 경호관으로서의 감을 되살려 낼 때마다, 그와 함께 등장해 그의 길을 밝혀준다. 비록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게 여전히 함봉수는 스승이다. 경호관으로서 그의 아비다. 그래서 그가 그 누구보다도 의지한 그의 아비가, 누군가에게 이용만 당하다 동료들에게조차 배려받지 못하는 개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한태경은 더 견딜 수 없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태경은 대통령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1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고 그때부터 줄곧 혼자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고군분투하셨다는 사실을 전해듣고도 혼돈스러워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비밀문서 98의 실체를 접하면서 아버지가 미처 밝히지 못한 채 죽은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행보에 유도등이 되는건, 그처럼 사건을 밝히고자 애썼던 아버지의 지난 모습이다. 

하지만 친아버지건, 정신적 아버지건, 그리고 상징적인 아버지 대통령까지, 그 아비들은 자신이 저지른 오류에 짓눌린 인생들이다. 98년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함봉수는 그리도 냉철하던 경호관으로서의 이성을 저버린 채 그 시절 상관이던 참모총장의 마수에 이용당해 버렸고, 아버지 한기준은 사건의 내막을 모른채 다수의 사람들이 죽어간 사건의 자금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팔콘의 개라 자처하며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동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젊은 경호관 한태경이 떨쳐 일어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역사적, 사회적 과오를 범한 아버지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를 반성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잘못된 방향이었지만 함봉수의 의도와, 아버지 한기준의 의도는 다르지 않다. 원치 않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한 것이다. 이동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태경은, 시인 서정주가 뒤늦게 그리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나의 아비는 노비였다 라며 자조하던 것과 달리, 아비들의 과거를 밟으며, 그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경호관의 경험을 상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함봉수, 그리고 이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고자 나선 한태경에 한 걸음 앞서 홀로 움직이던 한기준을 보여주는 <쓰리데이즈>는 상징적이다. 
단지 앞으로 살아갈 세대에 대한 독려가 아니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아비 세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아비로써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을 진중하게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하는 이동휘 대통령은 그래서 현실에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가는 바로 이 시대, 어른들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은 주저앉아서는 안되는 기성 세대와, 그런 어른들의 독려를 받은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야 겨우 또 역사의 한 고비를 넘을 수 있다는 게 <쓰리데이즈>가 힘겹게 내뱉고 있는 이야기다. 


by meditator 2014. 3. 28. 10:36

1회에서 5회를 거치며 상승세를 보이던 <쓰리데이즈>의 시청률이 7회 11.3%(닐슨)로 하향 곡선을 그었다. 전회 12.9%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던 거에 비해 1.7% 하락한 수치이다. 동시간대 경쟁작인 <감격시대>가 1위를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감격시대> 역시 전회 12.1%에 비해 0.6% 하락한 상태에서  <쓰리데이즈>가 보다 하락폭이 컸기때문에, <쓰리데이즈>의 시청자들이 다른 드라마로 채널을 돌렸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6회에서 7회에 걸쳐 전개된 내용에서 <쓰리데이즈>의 하향 요인을 찾는 것이 정확하리라 본다. 굳이 한 회의 방송분에 따른 시청률을 분석해 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쓰리데이즈>의 시청률 하락 현상이 마치 우리 사회 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이다. 


(사진; 메트로)



<쓰리데이즈>가  정치 드라마였어?
5회 중반에서 6회 중반에 걸쳐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의 축을 지나 본격적으로 98년 양진리 사건을 둘러싼 정치 세력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재신 그룹이라는 자본가가 정치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손을 잡은 여당 대표와 합참의장이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덮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을 압살하려는 음모를 장황하게 설명해 나간다. 6회 마지막 합참의장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7회, 드라마는 그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신규진 비서실장이 합참의장을 살해하는 사건에 집중하는 대신에, 그와 벌인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인 설전에 촛점을 맞춘다. 또한 그 이전에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과 동일시했던 대통령과의 입장 차이를 장황하게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애쓴다. 

그 장황했던 정치적 이견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결국 <쓰리데이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미스터리를 푸는 장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정치적 담론을 이 작품의 주제로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의 의도에 대해 여러가지 반응이 있지만, 가장 즉자적으로 나타난 반응 중 하나는 <쓰리데이즈>가 정치드라마였냐?는 반문이었다. 이 반문이 내포한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그저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을 찾는 재미로 드라마를 보아왔는데 골치아픈 이야기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저격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다보면 당연히 정치적 내용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을 텐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라마를 통해 설명이 되기 시작하니 뜨악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대해 피로감 혹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는 것도 고달프고, 매일 접하는 정치판도 시끄러운데, 굳이 드라마를 통해 그런 것을 또 복기해야 하냐는 볼멘 입장인 것이다. 

'나꼼수'를 통해 지난 총선 당시 정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김어준씨는 사람들에게 일갈한다. 당신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고민과 문제들이 결국은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신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된 존재로 규정되어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사는 것도 힘들고 고달픈데 그런 거창한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되느냐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래서, 신문도 끊고, 뉴스도 포털에 나온 단신만 거들떠 봐도 감지덕지한 상황에서, 뉴스도, 다큐도 아닌 드라마에서 정치 이야기를 정색하고 논하니, 채널부터 돌리고 보는 식이 되는 것이다. 

(사진; 메트로)


정치 이야기도 하기 나름?
<쓰리데이즈>가 6회에서 7회에 걸쳐 폭로하고자  했던 정치적 속살은 묘하게도 지금까지 몇번의 선거를 통해 반복되었던 야당의 정권 비판과도 닮은 면이 있다. 드라마는 친절하게 반복 설명하면서 이동휘 대통령과 그들이 98년 당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다시 그것을 밝히려는 이동휘 대통령을 주저앉히고자 하는 지를 덧붙인다. 하지만 굳이 반복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벌써 '아'하면, '어' 하고 안다. 벌써 그런 세월을 살아온 게 몇 년인데, 몰라서 이러고 있는게 아닌데, 드라마도, 야당도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가르치려 든다. 

<쓰리데이즈>는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바로 잡으려는 옮은 어른과,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넘으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이른바 '건전한' 역사적 시각을 다룬 드라마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는 드라마이다. 하지만, 좋은 주제와, 건강한 의식을 가진 드라마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학창 시절 그 좋았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이 지겨웠던 것처럼, 정치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사실은 이런 거야를 곧이 곧대로 가르치려 드는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하며 견딜 시청자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트렌디한 젊은이들에게, 자기 삶의 문제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장광설이라니!

그 좋은 주제 의식을 드라마적 재미로 살리기 위해 한태경이라는 경호관의 신분을 지닌, 하지만 과거사의 책임을 지닌 아버지를 가진 젊은이와, 진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을 극중 인물로 합류시켰지만, 그들이 드라마의 중심 스토리 밖에 빠져있고, 지금처럼 장황하게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주제에 접근하는 식이라면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김어준의 <나꼼수>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그때 당시 그렇게 원자화되고 개인주의화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치 팟캐스트 <나꼼수>가 인기를 끌었을까? 재미가 있어서다. 그리고 듣다보면 비록 방송이라도 명확하게 딱 꼬집어 주는 사안들이 속시원하고, 선동적인 걸 뻔히 알면서도 끌리게 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정치사에 있어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를 차치하고, 당시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붐을 이룬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멧 데이먼의 영화 '본시리즈'도 있다. 영화는 주구장창 싸움박질만 하는데도, 우리는 그 영화를 통해 미국이라는, 이 시대 절대 권력의 속살을 소름끼치게 절감할 수 있었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옳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쓰리데이즈>도, 현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설명하려 들지 말고, 드라마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보여주어야 한다. '쟤네들이 이렇게 나뻐', '쟤네들한테 이렇게 당했네' 만 중언부언하지 말고, 그렇게 나쁜 얘들한테 우리는 이렇게 맞서싸우고 있어,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있어 를 보여줘야 보는 사람들도 신이 나서 맞장구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7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중간중간의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덕을 더 많이 가진,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훌륭한 담론의 가능성을 지닌 드라마이다. <쓰리데이즈>가 성공적인 드라마로 남아 이런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장르물에도 불구하고, 기껏 어렵게 획득한 대중적 관심을, 주제에 대한 확신만으로,  안이한 전개 방식으로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몇 자 덧붙여 보게 된다. 


by meditator 2014. 3. 27. 15:09

3월 26일 kbs2 가 봄 개편을 맞이해 준비한 예능 중 첫 포문을 연 <밀리언셀러>가 시작되었다.


<밀리언셀러>의 구성은 신선했다.
26일 방영된 첫 회에는 오천만이 작사가에 도전케 한다는 그 야심찬 의도에 걸맞게 보내온 사연들이 방송의 중심이 되었다.
방송 중 정재영의 표현처럼 일반적으로 작사가가 가사를 보내면 그 중 맘에 드는 것을 작곡자가 고르는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나, 전국민을 작사가로 만들겠다는 취지에 맞게, 작곡가 진과 그들과 호흡을 맞춘 mc진이 직접 작사가들을 찾아나선다. 

이미 내정된 가수가 트로트 가수인 주현미임에도 포진된 작곡가 진도 다양하다. 돈스파이크, b1a4의 진영, 정재영, 장기하, 박명수 등, 트로트라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박명수가 작곡가로 등장한 것은 의아했지만, 이미 그 조차도 <무한도전>을 통해 전례가 있는 바, 예능의 차원에서 큰 무리라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런 작곡가 들과 함께 박수홍, 김준현, 은지원의 조합도, 각자의 면면은 익숙하지만, 그들이 함께 한 조합은 신선했다. 정재영과 장기하 팀의 경우, 두 사람 다 작곡이 가능한 인물들의 조합이라, 과연 앞으로 이 팀의 활용도가 어떻게 될 지 그것도 다음 회의 궁금증으로 남겨진다. 또한 과연 이 작곡가 진을 계속 활용할 지, 회마다 다른 작곡가 진들이 등장할 지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인다. 

KBS2 새 파일럿 프로그램 밀리언셀러가 일반인의 작곡 참여라는 새로운 형태로 눈길을 끌고 있다. / KBS 제공
(사진; 스포츠 서울)

mc와 작곡가들은 전국 방방 곡곡으로 흩어져 사연의 주인공을 찾는다. 사연도 다양하다. 평생을 술어 쩔어 자식들로 하여금 외면케 만들고 결국 화해치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는 사부곡,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아내에, 지체 장애 아들을 두고, 사업에 실패한 채 자살 시도의 위기 끝에 삶의 의욕을 불태우는 아버지의 감동 사연이 있는가 하면, <안녕하세요>에 나올 법한 가족보다 축구가 우선인 골칫거리 가장도 있었고, 드러머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9년차 연인이 애틋한 순애보까지 다양한 사연들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미 <아침 마당>의 장기 근속, 그리고 <안녕하세요>의 순항에서 보여지듯이, 작사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의 사연은 무궁무진하니, 소재의 고갈을 우려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두 팀의 작곡가를 놓고 사연의 주인공이 작곡가를 선택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물론 예능적 요소를 살리기 위해 혈압을 잰다든가, 승부차기를 한다든가 하는 방식이나, 작사를 하는 동안 작사의 주인공을 위해 밭에 돌을 고르라던가, 아이를 봐주는 내용은 때로는 싶었지만 그저 예능이다 싶게 넘어갈 수 있는 잔재미라 여겨진다. 오히려 아쉬운 점이라면 작사가 쉬운 과정이 아닌데, 그 부분을 좀 더 섬세하게 천착하여 그려내 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미 <안녕하세요>를 통해 검증된 전국민의 사연을 수렴하는 방식과, 거기에 덧붙여진 예능적 구성, 그리고 다음 시간에 있을 또한 이미 익히 <불후의 명곡>등을 통해 어느 정도 통하게 된 음악적 서바이벌의 조합은 익숙한 듯, 신선하게 <밀리언셀러>를 수요일 밤에 안착하게 만들 듯하다. <밀리언셀러>가 성공한다면, 베끼기나 약간 뒤틀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기존에 있는 예능의 장르를 콜라보레이션함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발전적 가능성의 여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mc와 작곡가들은 전국 방방 곡곡으로 흩어져 사연의 주인공을 찾는다. 사연도 다양하다. 평생을 술어 쩔어 자식들로 하여금 외면케 만들고 결국 화해치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는 사부곡,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아내에, 지체 장애 아들을 두고, 사업에 실패한 채 자살 시도의 위기 끝에 삶의 의욕을 불태우는 아버지의 감동 사연이 있는가 하면, <안녕하세요>에 나올 법한 가족보다 축구가 우선인 골칫거리 가장도 있었고, 드러머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9년차 연인이 애틋한 순애보까지 다양한 사연들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미 <아침 마당>의 장기 근속, 그리고 <안녕하세요>의 순항에서 보여지듯이, 작사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의 사연은 무궁무진하니, 소재의 고갈을 우려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두 팀의 작곡가를 놓고 사연의 주인공이 작곡가를 선택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물론 예능적 요소를 살리기 위해 혈압을 잰다든가, 승부차기를 한다든가 하는 방식이나, 작사를 하는 동안 작사의 주인공을 위해 밭에 돌을 고르라던가, 아이를 봐주는 내용은 때로는 싶었지만 그저 예능이다 싶게 넘어갈 수 있는 잔재미라 여겨진다. 오히려 아쉬운 점이라면 작사가 쉬운 과정이 아닌데, 그 부분을 좀 더 섬세하게 천착하여 그려내 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미 <안녕하세요>를 통해 검증된 전국민의 사연을 수렴하는 방식과, 거기에 덧붙여진 예능적 구성, 그리고 다음 시간에 있을 또한 이미 익히 <불후의 명곡>등을 통해 어느 정도 통하게 된 음악적 서바이벌의 조합은 익숙한 듯, 신선하게 <밀리언셀러>를 수요일 밤에 안착하게 만들 듯하다. <밀리언셀러>가 성공한다면, 베끼기나 약간 뒤틀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기존에 있는 예능의 장르를 콜라보레이션함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발전적 가능성의 여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7. 02:44

7회 마지막,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하지만 그 피를 보고도 자신은 멈출 수가 없다고 이동휘(손현주 분) 대통령은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한태경(박유천 분) 경호관 이런 나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라고. 대통령의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아래에 자막이 씌여진다. 사건 발생 72시간 경과. 한태경 경호관의 아버지가 죽고 대통령의 저격이 일어난 후로 3일, 이제 전쟁의 서막이 마무리되었다.


<쓰리데이즈>의 시작은 우연히 한태경 경호관에 의해 포착된 대통령 암살 음모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암살은 16년전 대통령이 팔콘의 컨썰턴트로 활동하던 시기에 가담한 양진리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 시절 양진리에서 살아남은 함봉수(장현성 분)는 경호실장이 되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한태경의 총에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커다란 사건의 시작이었다.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을 통해 98년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대통령 이동휘가 그날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고, 그날 이동휘와 함께 그 사건에 가담했던 재신 그룹, 여당 대표, 그리고 합참의장은 그 날의 진실을 덮어두기 위해 이동휘 대통령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쓰리데이즈>의 이야기는 회를 거듭해 가면서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듯 그 존재감을 부풀려 가고 있다. 매회 양진리 사건의 이야기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듯하지만, 회마다 그 이야기는 살을 붙여 가면서 덩치를 키운다. 7회에 이르러 비로소 대통령 이동휘가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을 만나기 전까진 사건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무지했었다는 것을 밝히고, 6회에서 김도진이 이동휘의 문책에 자신도 몰랐던 일이라며 발뺌했었던 일이 거짓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그러면서 왜 16년이 지나서야, 98년의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고, 대통령이 자신의 자리를 걸면서 그것을 이제야 밝히려 하는가도 명확해 졌다. 단순히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밝히는 스토리는 이제 한 나라의 운명을 건, 혹은 한 시대를 가름하는 입장 차에 따른 거대한 담론이 되어간다. 

또한 양진리 사건의 진실을 알게된 비서실장 신규진이 대통령을 설득하고, 참모총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정권과 동일시하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과, 대통령이 그를 자신이 없으면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것과 달리, 대통령을 걸고 딜을 할 야심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또 한 사람의 악인을 등장시킨다. 

그렇게 대통령의 최측근 신규진 비서실장마저 정권과 자신을 버리려는 대통령에 실망한 채 대통령 죽이기에 나서면서, 재신 그룹의 김도진의 '얼마나 힘이 센지' 보여주는 과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98년 문서가 재신 그룹 산하 재신일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그에 맞춰 발빠르게 여당 대표의 독려(?) 하에 대통령 탄핵 결의안이 가결된다. 함봉수 실장의 암살 시도에서 목숨을 구한 것도 잠시 이동휘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생명의 위기를 맞는다. 본격적인 대통령 죽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대통령과, 아들에게 유언 한 자락 남기지 않고 죽어가면서도 기밀 문서의 안위를 걱정했던 아버지가 하고자 했던 일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굳혀가는 한태경의 조우가 이루어진 시점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들이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에 맞선 이동휘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 하고, 그런 이동휘 대통령의 곁에서 한태경이 함께 할 여지가 생김으로써 또 하나의 전선이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대통령이라도 걸리적거린다면 없애버리려는, 그리고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경 유착된 '갑'의 세력과,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일 망정, 그것을 밝히고 사죄하겠다는 반성하는 기성 세대와 아버지의 오류에 치욕스러워 외면하고 주저앉기 보다는 그것을 지양하겠다고 나선 젊은 세대간의 역사적 전선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대통령은 물론 전혀 이동휘 같지 않다.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대뜸 대통령의 비리가 특검을 통해 폭로되고, 탄핵까지 이르는 과정은 너무도 우리에게 익숙하고 현실적이라 소름이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 속에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동휘의 등장은 어쩐히 드라마임에도 으쓱해진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비리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에도 주저앉지 않는 젊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달리는 청년 한태경의 어깨를 도닥여 주고 싶다. 현실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싸움을 시작한 이동휘와 한태경 두 사람의 싸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겼으면 하고 소망하는 건, 아직은 다 내리지 않은 우리 마음 속의 깃발 같은 거다. 


by meditator 2014. 3. 27. 01:56

이동휘를 비롯한 김도진 등이 만난 그 장소,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이 그려진 맞은 편에 또 한 편의 그림이 걸려있다. 바로 프란시스 고야의 <아들을 삼킨 사투르누스>가 그것이다. 


사투르누스

이 그림은 고야가 은둔했던 자신의 집(퀸타 델 소르도)의 벽에 그린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1층 식당 벽에 그려졌던 것이다. 

여기서 괴물처럼 묘사된 사투르누스는 로마의 농경신이지만, 로마 신화의 많은 신들이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차용해 와서 만들어진 것처럼, 실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된다. 사투르누스, 즉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그들을 먹어치운다. 테메테르, 포세이돈, 헤라 등이 사투르누스의 먹이가 되어버어 그의 뱃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고야는 이 그림을 통해 신화의 재현을 넘어 자신의 아들을 먹어버릴 정도로 타락한 기성세대의 폭력성을 그려내고자 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시민과 애꿏은 젊은 군인들을 희생시킨 다국적 기업 팔콘사와, 그와 작당한 재신그룹, 그리고 정부 각층의 인사들을 이 그림보다 더 적절하게 상징할 수 있을까.

그림은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로 끝나지만, 신화는 그 후일담을 전한다. 막내 아들로 태어난 제우스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힘을 키워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그의 뱃속에 들은 형제들까지 구한다. 과연 재신 그룹과 그 일당들의 시커먼 뱃속을 폭로하고, 그들에게 무고하게 희생된 죽음들을 되살려 낼 오늘의 제우스는 과연 누구일까. 그들 중 하나인, 마치 사투르누스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인 제우스처럼, 김도진에 의해 대통령이 된, 그들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난 이동휘일까, 좀 더 포괄적으로  기성 세대와 다른 순수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진 한태경일까. [아들을 잡아먹은 사투르누스]의 후일담은 드라마를 통해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6회까지 진행된 <쓰리데이즈>에서 악의 최종 보스로 등극한 사람은 재신 그룹의 김도진이다. 드라마에서 김도진과 이제 그의 반대편에 선 이동휘가 만나는 장소가 한 군데 더 등장한다. 바로 김도진의 집무실, 자신이 바랬던 바와 달리 양진리 학살 소식을 접한 이동휘는 김도진의 집무실을 찾아가 그의 멱살을 잡는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뒤에 배경으로 등장한 그림이 있다. 바로 리베랄레 데 베로나의 [디도의 자결]이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회화인 이 그림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아스] 4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트로이의 왕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아이네이아스는 점령된 트로이를 피해 배를 타고 도망치다 디도가 여왕으로 있는 카르타고에 도착하게 된다.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여왕 디도는 아이네이아스를 사랑하게 그가 카르타고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로마를 건국하라는 신탁을 받은 아이네이아스는 디도가 매달리는 걸  뿌리치고 카르타고를 떠나고, 그가 떠나던 날 디도는 자신을 버리고 간 디도를 원망하며 그가 준 선물 더미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서 칼로 자결하며 생을 마친다.

[디도의 자결]의 메시지는 배신 혹은 임무에 희생당한 사랑이다. 
즉 그 그림 앞에서 멱살을 잡이를 한 김도진과 이동휘, 98년 그들은 팔콘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양진리 사건의 이해 당사자로 밀월 관계를 유지하지만, 김도진이 그의 궁색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양진리 사람들과 군인들을 희생시킨 순간, 그 밀월 관계는 파국을 예고한다. 
자신이 대통령 이동휘를 만들었다고 믿는 김도진은 이동휘에게 말한다. '왜 그러셨어요? 그간 좋았잖아요,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지만 이동휘는 말한다. 먼저 배신을 한건 자신이 아니라고. 김도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반발하는 이동휘를 구슬르기 위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대통령 이동휘는, 김도진의 말처럼, 양진리와 같은 일을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 외국과 자본가들의 손에 농락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대통령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신을 했다고 말하는 김도진과 이동휘, 과연, 화염에 휩싸인 채 배신에 떨며 자결에 이르는 디도는 누구일까. 경호실장의 총에 희생될 뻔하던 이동휘는 스스로 그 화염을 뚫고 나온 디도와도 같다. 매회 밀고 밀리는 이동휘와 김도진의 일진일퇴 속에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4. 3. 25. 18:59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 있다. 

대사들
 이그림의 원제는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로, 그 중 댕트빌은 프랑스아 1세가 영국에 파견한 대사이고, 그 옆의 댕트빌의 친구 셀브는 역시 프랑스 대사로 베네치아에 파견된 성직자이기에, 제목이 [대사들]로 명명된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그림이 그려질 당시 약관 스물 아홉의 나이로, 그 나이에 대사로 임명될 정도라면 창창하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중앙에 비스듬히 그려진 물체가 있다. 바로 해골이다. 젊은이들의 그림에 해골이라니! 이 해골이 상징하는 것은 당연히 죽음, 그리고 그를 통해 되돌아 본  인생의 덧없음이다. 이렇게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 혹은 꼭  그 시기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명화라 칭송하는 많은 그림들에는 그려진 사물 이상의  철학적 혹은 종교적 상징을 띤, 퍼즐처럼 숨겨진 의미들이 꼭꼭 숨겨져 명화의 맛을 더해준다.

그런데, 매회 다음이 어떻게 이어질 지 전혀 가름할 수 없는 <쓰리데이즈>를 보노라면, 자꾸 그림들이 눈에 띤다. 게다가 그저 등장인물들의 배경을 장식하기 위해 쓰였다기엔 그 명화들이 숨겨놓은 의미가 심상치 않다. 이제 <쓰리데이즈>에 등장한 명화들을 통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재미를 찾아보자.

함봉수(장현성 분) 실장의 암살 시도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이동휘(손현주 분) 대통령은 비서실장이 청수대의 비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등 각종 기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즉각 소집한다. 

그리고 경호관과 비서실장을 대동하고 재신 호텔에 나타난 이동휘 대통령, 그가 걸어가는 복도의 끝에 니콜라스 랑크레의 [유년기(childhood)]가 걸려있다. 


니콜라스  랑크레의 이 그림은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 네 시기를 다룬 연작 [the four ages of man] 의 첫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그림은 유모가 뒤에 서서 갓난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앞에서 조금 큰 아이들이 유년기의 아이를 바퀴 달린 기구에 태운 채 끌어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이동휘 대통령은 그 그림을 멀리한 채 김도진 일행을 만나러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간다. 그런 그를 랑크레 그림의 아이로 치환시켜 보면 어떨까? 그간 김도진을 비롯한 여당, 군대, 국정원의 비호를 받으며 무리없이 대통령 직을 수행하던 이동휘가 그림 속에서 자기 보다 큰 언니, 오빠들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아이에 해당되었다면, 이제 그 그림이 걸린 복도에서 비장하게 걸어가는 이동휘 대통령, 98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이동휘 대통령은 그림 속과 같은 누군가 보호해 주는 시절과 이별이자,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는 홀로서기에 나선 대통령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 김도진 일행을 만나러 간 방안에는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이 붙여져 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민병대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와 그 대원들이 모금을 하여 의뢰한 그림으로 원제는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이지만 그 보다는 어두운 배경과 그 배경에 감싸인 듯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로 말미암아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그림이다. (하지만 실제 이 그림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낮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대장은 귀족, 그리고 부대원들은 부과금을 감당할 재력을 지닌 상인들로 구성된 부대로, 총을 지니고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자위권을 가진 부대였었다. 즉 17세기 당시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자본가 그룹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림 앞에 자리한 이동휘를 비롯한 네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98년 당시 국가 부도 위기에 줄어든 국방 예산을 빌미로 양진리 사태를 일으킨 주범들이다. 그들은 국가 부도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각자 다국적 기업인 팔콘의 이익을 위해, 혹은 그 자신이 주인인 재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삭감된 국방 예산을 되찾기 위해, 화해 국면으로 변화되는 정국의 경색을 위해 등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북한 강성 지도부를 접촉하여 양진리 사건을 도모한다. 팔콘의 개라고 지칭된 이동휘가 당당하게 그러면 당신들은 누구의 개냐고 되물었듯이, 그들은 대의적 명분으로 내걸은 것과 달리, 이동휘가 지적하듯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탐하기 위해 무고한 양진리의 사람들과 군인들을 희생시킨 사람들인 것이다.  

기세도 등등한 그림 속 자본가 그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총도 쏠 수 있는 자위권을 획득했다. 그들의 이해와, 그 그림 앞에 앉아 각자 자신의 주판알을 튕기는 네 사람은 다르지 않다. 더구나, 17세기의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의 다른 이름이 식민주의라는 것을 안다. 자신들의 무한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 신대륙을 강탈하고, 무고한 사람들은 죽인 무한 이기주의 자본가 그룹의 초상, 그것은 바로 [쓰리데이즈] 속 네 사람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김은희 작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서는,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스레 집단 초상으로 남겼던 17세기 부르조아지들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불사할 그룹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5.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