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다. 그 기대에 걸맞게 ebs 다큐 프라임은 새 시대에 시급하게 해야 할 교육적 과제로 '대학 입시'를 들고 나선다. 바로 지난 5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6부작에 걸쳐 방영되었던 <대학 입시의 진실>이 그것이다. 


왜 대학 입시였을까? 
<1부; 학생부의 두께>, <2부; 복잡성의 함정>, <3부; 엄마들의 대리 전쟁>, <4부; 진짜 인재, 가짜 인재>, <5부; 교육 불평등 연대기>, <6부; 불편한 진실을 넘어서>를 통해 <ebs 다큐 프라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대학 입시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아니라, 이미 고착화된 대한민국의 계층 고착화와 그나마 있는 기회조차 날려버리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희망없는 닫힌 통과 의례라는 것이다. 즉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격차 세습'을 통해 '꿈'과 '희망'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기에 새 정부가 가장 앞서서 이 문제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큐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몇 가지 사례,
그 첫 번 째, 장관 후보자들 몇몇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위장 전입',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바는 무엇일까? 자식 교육을 위한 '생계형' 위장 전입이었다는데, 도대체 왜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위장 전입'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두 번 째, 글을 쓰는 기자의 자녀들은 경기도 한 도시의 일반고 출신들이다. 그 도시의 대표적 명문고라 자부하던 고등학교, 하지만 학교의 위상은 해를 거듭할 수록 초라해져만 간다. 한때는 가난한 도시에서 '개천에서 용'을 만들어 내던 전설은 이제는 아이들이 벌써 중학교만 들어가도 신도시로 '전입'하고, 그나마도 고등학교에 입학할 시기 좀 공부 좀 한다하는 아이들은 '과학고, 외고, 자사고'로 이동하고, 남은(?) 아이들이 진학하다 보니, 제 아무리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부'에 힘을 실어주어도 이른바 '명문'대학 진학률은 해마다 떨어지고 학생들의 수업 분위기 역시 갈수록 저하되는 중이고 선생님들의 의욕 역시 마찬가지라 전해진다. 



교육 불평등의 현실
이런 극과 극의 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 서울대 입학생에 대한 통계 조사를 통해 다큐는 그 진실에 접근해 들어간다.(5부; 교육 불평등 연대기)
서울대 입학생 중 자사고, 특목고는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비율로만 보면, 일반고와 자사고, 특목고는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통계의 장난이 있다. 위의 표에서 보여지듯이 전국 수능 응시생 비율 중 자사고, 특목고의 비율은 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즉 90 대 10의 싸움에서 결과가 반반으로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부 잘 하는 자사고, 특목고 학생들이 서울대 가는 걸 가지고 무슨 이의를 제기하냐고? 그렇다면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자사고와 특목고에는 어떤 학생들이 갈까? 학생들 부모님의 직업의 차이를 살펴보면 그 '이의'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감지된다. 



아래 표에서 보여지듯이 상위층 비율이 외고와 일반고의 경우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자사고, 특목고의 편중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과 지방의 대비에서 서울, 경기, 그 중에서도 강남 8학군을 중심으로 한 교육 특구의 학생 층에 '편중'된 결과를 보인다. 지방의 경우 설사 특목고라 하더라도 주소지는 그 지방이 아닌 학생들인 경우가 빈번하다. 이 결과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건, 서울대를 대표적 사례로 했을 때, 서울에 사는 돈 많은 부모들의 자녀들이 주로 서울대에 진학한다. 전국민의 20%에 해당하는 소득 1,2분위의 학생들 중 이른바 상위권이라 할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10%' 남짓하다. 더 이상 '대학'은 꿈의 사다리가 아니다. 

꿈의 사다리를 걷어찬 대학 입시 
왜 대학은 꿈의 사다리가 될 수 없을까? 공부만 열심히 해서 시험을 잘 보면 되지 않나? 라고 반문한다면 당신은 '뭘 잘 모르는 사람'이다. 

2019년 대학 입시 요강, 수시 모집을 통해 정원의 76%를 선발, 정시 모집 인원이 그만큼 줄었다. 수시 모집 중 학생주 전형 비중이 늘었다. 전체적으로 학생부 교과 비중이 늘었지만, 학생부 종합 전형도 전체 모집 인원의 24.3%로 늘었다. 논술 고사 대학별 모집 인원은 전체적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서울 소재 주요 대학에서 논술은 주요 전형이다. 

자, 만약 당신에게 자녀가 있다면 저 전형 중 당신의 자녀에게 맞는 전형을 고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몇 줄의 글로 현재의 대학 입시를 설명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저 단어의 행간, 행간에 숨어있는 수많은 전형, 현재 대학을 가는 전형 방법은 실제 7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2부; 복잡성의 함정, 1부; 학생부의 두께)



그래서 실제 설문을 해보면 대다수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대학 입시에서 느끼는 가장 큰 불만이 바로 '다양성'을 핑계로 세분화된 대입 전형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 복잡성의 미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이 최근 늘어나고 있는 이른바 학생부 전형이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학적부, 생활 기록부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31번의 변화를 거쳐온 학생부. 2017년 현재 진로 탐색 과정을 담은 학생부는 총 24장이 기록 가능한 방대한 '자료'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기록'이 문제다. 학생부를 보여주자, 선배들은 '그 엄청난 양에 놀라는 반면, 너무 주관적'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외국의 교육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고, 모호하며, 학생에 대해 결정적으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 보여주기 식'이라 평가한다. 외국의 '수치화'한 학생부와 너무 큰 차이다. 


하지만 이 학생부로 인해 학생들의 희미가 엇갈린다. 실제 지방의 한 학교에서는 학생부 조작으로 물의를 빚었다. 등급에 따라 페이지 수가 달라지는 학생부, 등급이 낮은 학생들에게는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각종 '몰아주기 혜택'. 하지만, 오히려 조작의 당사자인 선생님은 반발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방 일반고 학생들은 그나마 '대학' 갈 기회조차 없다고. 

안타깝게도 선생님의 반문은 사실이다. 학교를 신뢰하지 않는 '재력있는 학부모'들은 학생부 관리를 위해 각종 컨설팅 업체로 달려간다. 아니, 이미 '정보전'이 된 대학 입시 강남 초등학교 학생들은 이미 6학년 무렵이면 고등학교 과정을 완료한다는 상황에서 정보와 재력을 가진 부모들의 아이들이 일찌기 교육의 기회를 선점하고 길러져 자사고, 특목고 등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관리된' 아이들과 고등학교 자녀들의 전형 방법조차 먹고 사느라 제대로 알 수 없는 부모, 기백만원의 학비는 물론 학생부를 채울 각종 스펙을 채울 재력이 든든한 부모와 학비도 빠듯한 학부모의 경쟁은 이미 달리기도 전에 결과가 나온 게임이다. (3부; 엄마들의 대리 전쟁)



강남에서 떠도는 웃픈 교육의 지표, 이른바 텐텐 학습법(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학습 방식), 아이가 잠시 힘들어도 '하이웨이'에서 내려서서는 안된다는 강박적 '모정', 아이대신 학생부 봉사 활동을 채워주는 열혈 모정은 우리 사회 '관리 가족'의 그늘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정말 '인재'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카이스트의 이 그래프는 왜곡된 교육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반고 출신 학생들은 선행 학습이 부족한 2학년까지는 고전하지만 그 이후에는 숨겨져 있는 잠재력이 발휘된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관리'되어진 우리의 학생들에게선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의 기쁨이란 어불성설이다. '목표 주사'를 맞고 버텨온 학생들은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 되어있다. 

걷어차진 사다리를 돌려주어야 나라가 살고, 아이들이 산다
예일대 윌리엄 데러저위츠 교수는 이런 학생들의 미래를 그의 저서 <똑똑한 양떼들>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부모들의 정보와 돈으로 명문대에 들어간 엘리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고민이 없는 것은 물론, 부모들이 제시한 방향으로만 자신의 미래를 반응하고, 창의적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그들은 이후 우리 사회의 엘리트로서 '늘 안전한' 선택만을 하는 '안이하고 무능력한 지배 그룹'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안이하고 무능한 지배 그룹'이 미래를 책임 질 수 있을까? 미래 학자 토마스 프레이가가 주장하는 바 20년대 대학의 상당수가 문을 닫을 '탄력적이며 유연하며 투지가 넘치는' 미래 인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의 '디자인 베이비'들은 미래를 책임질 인재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사다리'에서 걷어차여진 대다수의 학생들이다. 일본의 교육 학자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진 일본 사회'를 이미 그의 책 '격차 세습'을 통해 경고한 바 있다. '하류의 자녀는 하류'가 되는 사회, 1억 명이 빈곤 계층인 사회, 이른바 버는 돈 없이 빠찡꼬 게임으로 딴 돈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즐기는 것으로 연명하는 식의 '현재를 즐겁게 지내자는 '니트족'들은 계층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서 젊은이들의 자구책으로 드러나는 한 예이다. 특히 '개천에서 난 용'들의 '인적 자본'에 의해 급격한 성장 주도의 경제를 근간으로 해온 대한민국에서 '격차 세습'으로 인한 계층 고착화는 '대한민국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심각한 문제이다. 

EBS의 <대학 입시의 진실>은 최근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학생부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부터 시작하여, 대학 입시 그 자체를 낱낱이 해부하여 들어간다. 그리고 통계의 장난 속에 숨겨져 있는 결국 가진 자, 아는 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현행 '계층 세습'의 도구가 되는 대학 입시의 민낯을 세세하게 밝힌다. 



문제 제기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대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방향도 제시한다. 단순한다. 학생도, 학부모도, 선생님들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그 '복잡'한 대학 입시 정책을 '단순'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돈과 정보에 의해 '선점'하는 그 방식을 뜯어 고쳐서, '열심히 공부하면' 갈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면 된다. 

6부작에 걸쳐 방영된 <다큐 프라임- 대학 입시의 진실>은 현행 대학 입시 제도의 모순과 그 원인을 심층깊게 진단했다. 그리고 그 대안까지 제시했다, 새 정부를 맞이한 '교육 방송'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 교육 정책처럼, 꼭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변화되는 교육 정책 속에서도 여전히 상위를 독점하고 있는 강남 8학군처럼 상위 계층의 카멜레온보다 더 빠른 적응력을 따라잡을 지도 문제다. 무엇보다 부모들의 마음을 다스려 주지 않으면 교육 정책은 실패한다는 학자의 말처럼 '내 아이는'하면 사회 지도층이라도 위장 전입을 마다하지 않는 '이기적' 자녀애의 욕망을 과연 어떻게 순치시켜 나갈지도 미지수다. 그러기에 총체적인 진단이었던 <대학 입시의 진실>이 더 의미가 있다. 공은 던져졌다. 과연 이 '로드맵'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 지는 전적으로 새 정부의 몫이다. 그리고 그건 일자수 몇 개 이상의 진정한 '꿈의 사다리'를 마련해 주는 해결책이다. 

by meditator 2017. 6. 1. 16:30

1977년 출간된 고 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수필집 중 한 꼭지에 해당하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마라톤 대회로 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손을 모아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선두 그룹이 지나고, 마라톤 대회를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관심이 흩어질 무렵 여전한 교통 통제에 짜증이 나던 참에 푸른 색 옷의 마라토너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이 좀 우습고 불쌍하다고 느꼈던 작가, 하지만 정작 그의 얼굴에서 '정직한 고통'을 본 순간,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차도로 뛰어들어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그런 작가의 독려에 힘입어 거리의 시민들도. 


지금이라면 다를까? 처음 이 책을 접했던 70년대 후반, 이 글은 충격적이었다. 꼴찌는 말 그대로 꼴찌였던 세상 속에서 '낙오하지 않는 이'를 향한 격려의 박수라니! 그건 그저 한 편의 수필이 아니라, 성장 지상주의 대한민국을 울리는 경종이었다. 그리고 이제 5월 28일 sbs스페셜은 어쩌면 그 시절 박완서 작가처럼 이번 대선에서 꼴찌를 한 심상정을 복기한다. 



찌 심상정, 하지만 여전한 심블리
'어대문'의 선거판이었다. '촛불'의 후원을 얻은 '어대문'에 도전한 후보들은 이제 '정계 은퇴'가 운운될만큼 역부족의 선거판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선거 중반 토론 과정에서 그래도 우리 편 '어대문'에 흠집을 내는데 동조했다는 이유로 당원들을 잃는 해프닝을 겪으면서도 완주를 했다. 아쉽게도 원하던 10%를 넘기는 커녕 6.2%라는 여전히 넘기 힘든 진보 세력의 현실을 경험했다. 그런데 왜 다큐는 심상정을 주목할까?

시작은 이제는 돌아와 주방 앞에 선 서툰 주부 심상정으로 시작한다. 가사 일을 14년 째 남편에게 맡기고 바깥 사람이 된 심상정, 모처럼 돌아와 아들이 원하는 '닭볶음탕'을 하려하는데, 도무지 부엌이 낯설다. 장보러 간 마트에서는 여전히 '정치인'이다. 그런데 이 사람 낙선한 대통령 후보 맞는지? 인기가 좋다. 어른들만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돌 스타급이다. 거리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6.2%의 득표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놈의 인기'말이다. 

바로 그 점이다.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선거 과정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두 사람있었다. 바로 왜 유승민 후보가 바른 정당인 것과, 또 한 사람 심상정 후보가 정의당이라는 것이다. 선거 과정 후보자들의 토론을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여, 야의 편견없이 보자면 두 사람이 제일 잘 했다. 말이 앞뒤가 맞았고, 자신의 논리가 있었고, 객관적인 설득력을 가졌었다. 사전 선거 지지율에서 심상정 후보는 11.4%의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 선거도 '토론'과 '결과'는 별 개의 것이었다. 물론 '토론'을 못해서 망한 후보도 있다. 하지만 '토론'을 잘 해서 잘 된 후보도 없다. 

하지만 또 그게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정의당이 바른 정당에도 못미친 6.2%의 득표를 얻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진보 세력 후보 중 가장 다수의 득표를 했다. 14대 대선 당시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은 0.9%를,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를 득표했다. 그에 비하면 심상정 후보의 득표수는 무려 두 배나 는 것이다. 

득표수만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3억의 빛이 무색하게 선거가 끝나고 정의당에는 성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못미 심상정' 등 비록 선거에서 심상정을 지지하지는 못했지만 심상정의 완주를 지지하는 성금들이었다. 2억 8천만원이 모였다. 선거에 지면 '정계 은퇴'하라는 정치판에서 낙선 후보에게 성금이라니!



심상정에 대해 지지의 의미
그렇게 선거에서 지고도 여전한 인기를 누리는 심상정 후보에게는 별명도 많다. 심블리에서부터 2초 김고은, 심크러쉬까지. 그 별명의 면면에서도 느껴지듯이 '트렌디함'이 심상정과 함께 한다. 이런 '트렌디한 별명'에 대해 정치학자는 물론 별명의 시작은 정의당 홍보팀이었을지 모르나, 그 별명이 '대중'적이 되는 과정에는 '대중의 적극적인 호응'이 뒤따랐을 것이라 분석한다. 일찌기 국회에서부터 '적폐'의 수구 세력에게는 '걸크러쉬'하기를 마다하지 않지만, 홍보 영상을 비롯한 평소의 그 모습에서는 2초 김고은을 수긍하게 할 만큼 '심블리'한 심상정. 아마도 본인이 우기지 않아도 2초 김고은이란 별명이 '욕'이나 '어불성설'이 아닌 웃고 넘어갈 수 있게 만든 건, 심상정이 선거 기간 보인 '노력'의 결과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똑같이 대선 토론 과정에서 혁혁한 성과를 보인 두 사람이지만, 유승민과 심상정이 보인 토론의 결은 달랐다. 일찌기 유시민 작가와 100분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경제학자이자 관료 출신의 유승민 후보가 논리적인 토론가였다면, 심상정 후보는 정의당 후보로서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살아온 삶이 일치된 실천가로서의 그 모습에 더 힘이 실린다. 선거 과정 여성과 관련한 실언을 한 홍준표 후보에게 따끔하게 짚고 넘어가는 모습이나, 굳이 나설 필요없는 민주당 후보의 대북 송금 문제를 나서서 언젯적 대북 송금이냐며 그 자리에 있는 모두 후보들을 뜨끔하게 하는 장면은 홍준표 후보와는 또 다른 의미로 토론을 보는 이들을 속시원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거기에 우리 사회의 약자로서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에 대한 그녀의 일관된 입장은 그저 군소 정당으로서의 '선거 결과'를 의식하지 않는 '프로파간다'를 넘어 이번 선거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속시원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으로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한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경기 고양 갑의 심상정 후보와 경남 창원 성산 노회찬 후보를 제외하고는 한 자리 수의 지지율을 넘지 못했다. 심상정이라는 개인이 보인 성과가 정의당, 혹은 진보 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하지만 명망성의 한계를 넘어, 그 지지 속에 숨겨진 의미를 짚고자 한다. 심상정의 입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살아온 삶을 통해 그녀가 주장하고자 하는 '노동'이 제 목소리를 내고, 제대로 대접을 받는 사회에 대한 여전한 열망이 6.2%의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심상정 개인에 대한 열렬한, 그리고 여젼한 인기의 요인이라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상회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50%를 넘는 지금, 그럼에도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심상정의 지지율에 담겨있는 간절한 우리 사회 약자들의 제 목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sbs스페셜>이 짚는다. 





by meditator 2017. 5. 29. 14:41

마지막회를 시청한 호청자들은 허무했을 지도 모른다. 첫 회부터 내내 집요하게 추격하던 하완승의 첫 사랑 현수 살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가 싶더니 결국 밝혀진 살인범과 사주범 뒤에, 거대한 또 다른 사건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100미터로 질주를 해왔는데 도착하고 보니, 겨우 한 정류장에 도달했다는 '사인'을 받고 망연자실했을 지도 모른다.


모호한 엔딩? 아니 시즌 2를 향한 원대한 떡밥

하지만 '미드(미국 드라마)'나 '영드(영국 드라마)'을 다수 시청했던 시청자라면 이런 '엔딩'의 방식에 익숙할 듯하다. 극 초반 시작되었던 사건, 하지만 정작 눈 앞의 사건을 해결하고 보니, 그 사건은 진짜 거대한 음모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뭐 이런 식 말이다. <셜록> 등의 시리즈에서 낯 익게 등장했던 이 서사'의 구조는 나선형으로 시리즈를 거듭하며 진범을 향해 달려가는 방식이다. <멘탈리스트>와 같은 드라마는 '레드 존'이라는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무려 시즌6을 달려가는 식이다. 결국 <추리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단 한 차례 16부작 드라마라면 이런 식의 엔딩이 '허무'하다못해, 호청자에게 모욕을 준 셈이지만, 그게 아니라 시즌제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면 '큰 그림'을 향한 영리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에 선글라스까지 장착한 현수와 '그림자'의 조우라니! 이보다 더한 시즌 2의 떡밥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추리의 여왕>이 던진 모호한 엔딩, 그리고 다음 시즌을 향한 여운만으로 이 드라마의 시즌제를 기대하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추리의 여왕>이 지난 16부작 동안 보여준 연출, 연기, 그를 통해 구현된 캐릭터들과 서사들이 16부작 한 회차로 마무리 짓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2009년 종영된 <몽크> 시리즈가 있다. 자동차 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후유증으로 강박증을 겪는 탐정 몽크(토니 샬호브 분)와 그의 전직 동료 형사들, 그리고 몽크의 비서로 채용되지만 거의 동반자적 역할을 하는 나탈리(트레일러 하워드 분) 등에 의해 '해프닝'으로 시작하여, 강력 사건 해결로 마무리되는 <몽크>는 탐정물이지만 한편의 소동극처럼 진행이 된다.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캐릭터들, 그리고 그 분위기

그리고 <추리의 여왕>을 보면 그 시절 <몽크>가 떠오른다. 요리에는 젬병이지만, 사건만 일어나면 궁금증을 참지 못해 프라이팬이 타는 줄도 모르고 뛰쳐가는 아줌마 탐정 유설옥(최강희 분)과 그녀를 아줌마라 무시하는 듯하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공간에 오면 촉이 좋아진다며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그녀를 믿어주고, 그녀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달려가는 하완승(권상우 분)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화음은 유쾌하고 따스한 콤비 플레이어다. 돌땡이라 부르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그를 의지하고, 아줌마라 부르지만 그 누구보다 그녀의 의견을 따라주는 이 언밸런스한 조합은 강박증 탐정과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살피는 비서 겸 '왓슨 뺨치는' 조력자 나탈리 못지 않은 명조합인 것이다. 아줌마와 형사, '사랑'이 개입되기 힘든 이 조합은 16부 동안 그 어떤 사랑의 주인공들보다 설레이며 시청자들을 이끌었다.


특히나 그간 우리의 드라마들에서 '복수'의 역동성을 끌고가는 캐릭터나, 성공담의 주인공으로서의 여성 캐릭터의 존재 외에 남성에의해 그 존재감이 증명되지 않는 '캐릭터'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아쉬웠던 상황에서 아줌마 탐정 유설옥의 존재는 그저 16부로 퉁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캐릭터다.


 

 


그렇게 캐릭터 자체로도 시즌제를 바라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기대가 되는 건 모처럼 자신들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최강희와 권상우이다. 어느덧 중견 연기자가 된 두 사람, 하지만 그간 성실하게 활동해 온 것과 달리, 한때 스타였던 두 사람의 존재감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오래 되었다. 전작 <화려한 유혹(2015)>의 신은수 역은 연기 변신이었지만 끝까지 몸에 맞지 않은 옷이었고, <메디컬 탑팀(2013)>의 권상우는 그의 단점을 더 부각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던 두 사람에게 찾아온 유설옥과 하완승, 그 두 캐릭터는 모두 그간 최강희가 해오던 그 통통튀는 귀여움과 권상우의 허허실실한 자연스러움을 연장시킨 캐릭터다. 그런데 그 잘 하는 캐릭터를 다시 하는 두 사람에게는 이전에 보지 못한 '안정감'과 배가된 자연스러움이 보강된다. 그간 아마도 각자가 아니라, 권상우와 최강희가 '합체'된 시너지 효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건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빈번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늘 아쉬웠던 이원근의 매력이 모처럼 빛을 발한 것도 '홍소장'의 캐릭터였고, 신현빈 역시 같은 케이스다. 하완승 + 우경감의 조합의 활약이 아쉬울 정도로 박병은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특히 배방서에서 밀려난 완승 등이 배방 2동의 마트와 도시락 가게를 거점으로 수사를 펼쳐나가며 동네 주민들과 '협업'하여 범인을 잡는 수사 방식은 발군이었다. 그렇듯 파출소 직원 한명, 동네 주민 한 명, 한 명 등장했던 인물군 모두가 '기억되는 캐릭터'로 남긴 <추리의 여왕>은 그래서 마지막회 배방 2동을 부감하는 장면에서 오랫동안 정든 곳을 떠나는 아쉬움이 느껴지듯 그런 '인간미'를 살려낸다. 그저 주인공만이 독주하고, 그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작동하던 미니 시리즈와 달리, 마치 주말 가족드라마처럼 등장한 그 누구라도 '존재감'을 드러냈던 배방 2동 '어벤져스' 수사 팀의 활약이 계속 보고 싶은 것이다.


 

 


캐릭터만이 아니다, <추리의 여왕>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때론 이게 드라마야 영화야 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인상깊었던 연출들이다. 한참 꽃이 피는 배방 2동을 배경으로 그 꽃 속에서 설왕설래하는 두 주인공을 비롯하여, 그들은 물론 주변 인물들이 출몰하는 곳은 그곳이 갯펄이든, 시체가 던져진 개울이든 그 어느 곳이든 '예술'적 성취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사건을 수사하고 추리를 하는 '어두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배방 2동과 도시락집, 설옥이네 집 등의 '동네의 아기자기함과 따스한 정서'가 조합되어, <추리의 여왕>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셜록> 등의 명드를 떠올리면 주인공 못지 않게 그 드라마의 그 분위기가 기억되듯, <추리의 여왕>에는 바로 그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라 할 만한 정서가 정립되었다.


물론 많은 장점만이 있는 건 아니다. 요즘처럼 빠른 사건 전개가 아니면 채널이 바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캐릭터, 배경과 분위기까지 챙겨가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추리의 여왕>의 가장 큰 단점은 수사물이라기에 늘어지는 진행 속도였다. 물론 호청자들은 그 조차도 <추리의 여왕>만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그 '느린' 속도는 8% 내외의 시청률이라는 결과로 시즌제의 발목을 잡고 만다. 물론 <추리의 여왕>의 낮은 시청률을 꼭 전개 방식의 문제라 볼 수는 없다. '연애' 이야기 아닌 아줌마 탐정이라는 생소한 캐릭터의 활약상은 중장년층이 채널 주도층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약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웰메이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추리의 여왕>, 시청률은 비록 낮았지만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새 시대의 공영 방송 덕택에 다음 시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by meditator 2017. 5. 26. 16:40

<까칠 남녀>는 지난 15일 '여자도 군대 가라'에 이어, 23일 '군인도 사랑받고 싶다'를 통해 '군대'를 '까칠한 젠더 토크쇼'의 전면에 내세웠다. 최근 일부 사이트를 중심으로 '성평등'이 아니라, 패미니즘적 편견을 양산한다며 <까칠 남녀>'폐지' 서명 운동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2회에 걸쳐 진행된  우리 사회 남녀 사이에 가장 민감하게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군대'에 대한 토론은 <까칠 남녀>의 존재론적 의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이었을 듯하다.


 

 


평등을 논하려면 여자도 군대가라?

군대 장비가 즐비하게 늘어놓아져 있는 x의 방에 들어선 남자들, 그들은 자연스레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고, 장비를 갖추며 '군인'이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남자라면 이 '과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제 아무리 특권층이라도 '군대'와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면 대통령 후보조차 '낙마'를 하는 사회, 질병을 사유로 석연치 않게 매번 군입대가 연기되는 연예인의 군대 가는 문제가 가장 예민한 사안이 된 사회, 그리고 한 연예인의 흡연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당한 군입대 등급의 문제가 조만간 그의 군복무가 끝날 상황인데도 여전히 '왈가왈부'의 대상이 되는 사회, 그렇게 제반 사안에서 '군대'는 우리 사회에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그래서 역설적으로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는 문제라는 걸 매번 증명해 내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성'과 관련하여 '평등'의 담론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게 되면서 가장 큰 딜레마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남자들만의 군입대'이다. 방송 중 방송인 서유리가 평등해지면 군대 갈 수 있다는 말이 화제가 되었고, 결국 2부작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을 우스개식으로 시작한 토크쇼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군대'에 대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민감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성들도 가야하는 군대, 과연 현실은 어떨까? 송영선 의원이 '국방 전문가'임에도 군복무를 안해봐서 라는 이유만으로 발언 자체가 무시되는 현실, 그리고 막상 여성들이 그래, 여성들도 군대갈 수 있다고 하지만, 거리에 나가 입장을 물어보면 과반수의 여성, 심지어 남성들은 그 보다 작은 비율이 여성의 군입대를 찬성하는 남성들만의 '의무'이자, '특권, '전유물', 그리고 명예이자 상흔으로 자리잡은 군대, 과연 정말 여성들도 군대를 가는 현실이 가능할까?


방송 중 사례로 등장한 여성들이 군대를 가는 외국의 사례는 놀랍다. 노르웨이의 마리 에릭센 쇠레이어 국방 장관은 여성이다. 심지어 그녀는 여성들의 군입대를 의무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녀만이 아니다. 그녀에 앞선 노르웨이의 역대 국방장관들은 상당수가 여자다. 우리로는 격세지감이다. 노르웨이만인가. 네덜란드도 군인들을 사열하는 여성 장관의 모습이 등장한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외국의 사례.


 

 


이런 장면에 대해 부러움을 나타내는 여성 패널과 달리, 정영진 등의 패널은 남북한의 대치로 '전쟁'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우리와 상황이 다르다며 고개를 젓는다. 이렇듯 '군대'와 관련한 사안은 매 사안마다, 입장을 위해 등장하는 젊은이들부터, 패널들까지 끝날 줄 모르는 선로처럼 입장이 갈린다.


그나마 서민 교수가 다를까? 하지만 여성 신문에 칼럼을 기재하는 서민 교수, 자신의 칼럼을 예로 들어 남자들은 군대 한번 다녀온 걸 평생 울궈먹는다며 비판하자, 이에 이날의 게스트 방송인 최욱은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애 낳은 걸 평생 울궈먹는다며 바로 대응하듯, 그리고 그가 남성들이 방산 비리에 취약해서 여성들이 국방 장관 등 중책을 맡아야 한다는 발언에 역차별이라는 반발이 일듯, 그의 입장은 객관적 평등의 시각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편향의 흔적을 감추지 못한다.


여자를 보내기엔 너무 험란한 군 생활?

'평등하다면 군대에 갈 수 있다', 라거나, 남자들이 군대를 간다면 여자들은 '임신'을 하지 않나라는 여성들의 입장에 남성들은 답답해 한다. 그의 두드러진 남성적 입장으로 발언마다 '악플 주의보'를 받는 정영진은 '남성들에게 군대는 끝나지 않는 상흔'이라며 여성들이 군대를 너무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다. 요즘 군대가 좋아져서 공부도 할 수 있지 않은가란 여성 패널의 입장에 단호하게 '군대는 아카데미가 아니다'란 반론이 따른다.


군대 사이트에 등장한 여성 걸그룹의 사진 등에 여성 패널들이 성차별을 들며 반발하자, 과연 성적 에너지가 가장 왕성한 20대 초반의 남성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한 '군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맞선다. 그런 당당한 성적 이해에 대한 요구에 여성 패널은 꼭 그 왕성한 에너지를 '성적'으로만 집중하는 군사 문화 역시 문제가 아니냐며 반문한다.


도저히 만날 길 없는 담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 일반,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들을 비롯한 상당수가 '군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군대가 좋아져도, 물론 여전히 군 내부 폭력 사태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그 닫혀진 공간 속에서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상황이 비일비재 하는 현실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군대란 그어떤 보상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훈련에 시달린 그들에게 일과 후의 공부는 어불성설이고, 예능에서 극한이라 내보이는 훈련 정도는 거뜬히 참아넘길 수 있는 내무반의 관계와 군기가 도망갈 길 없는 미로이다. 더구나 그런 고통을 드러내는 것조차 '군인 정신'에 위배된다며 '색출 대상자'가 되는 곳에서 2년을 마친 젊은이들에게 사회는 '군바리'란 우스운 별칭 외에 인심쓰듯 공무원 가산점제 따위로 보상을 낚는다.


 

 


그렇게 2회의 토크 쇼를 통해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가 군대에 대해 여전히 아직도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시간'을 볼모로 삼으며, 그 '볼모'의 시간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에 있어 역시나 박하다 못해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는 사실이다. 공무원 가산점이라는 알고보면 소수를 위한 낚시밥조차 갸륵할 만큼, 그래서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잘 대해주기라도 하라는 자조적 첨언이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군대와 군인의 정확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다시 여성들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문제로 돌아와, 그렇다면 여성들은 성평등을 위해 군대에 가야할까? 하지만 여성들의 군 입대 문제를 들고 나서기 전에 남성들도 평등한 대우를 받는 군대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2회의 토크쇼는 드러낸다. 군대 2년만 있다 나오면 남성주의적 문화가 내재화될 수 밖에 없는 강제적 문화, 하지만 그 조차도 이젠 조롱거리가 되는 현실, 섹시한 여성 걸그룹만이 위로가 되는 폐쇄적 공간, 군대 내 여성은 물론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비일비재한 실정, 이런 여전히 '인간적이지 않은' 군대 내의 문화와 습속에 대한 제고와 개선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 <까칠 남녀> 2회의 가장 큰 성과이다.


남성과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가장 당돌한 질문으로 시작된 <까칠 남녀> 군대 문제, 하지만 그 날선 질문 혹은 요구의 여정에서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 젊은이들이 한참 젊음의 꿈을 펼쳐야 할 그 시기에 군대로 인해 얼마나 큰 상실을 겪게 되는가를 반증한 시간이었다. 군대라는 남성주의적 특권을 나누기 싫어서라는 이의 제기보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여성들에게는 겪고 싶지 않게 하기 위해 여성이 군대 가는 걸 반대한다는 '토로'가 실감났던 시간, '선택'과 때로는 영원한 짐이지만 그래도 행복일 수 있는 임신과는 비교조차 되기 힘든 그 죄없는 '영어( 囹圄 )의 시간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갖고 개선해 나가야 하는 것이 질문의 전제라는 것을 <까칠남녀>는 밝힌다.


여성과 남성의 성평등에 대한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하여, '남성 인권', 그리고 보편적 인간 인권의 문제로 귀결된 군문제, 그건 군 가산점으로 퉁칠 수 없는 '시간의 굴레'라는 걸 <까칠 남녀>는 증명했다. 그리고 이는 그저 이 프로그램이 평등이란 주제를 내걸고, 페미니즘적 담론을 유포하는 불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전문적인 입장을 가지고 공격하는 여성 패널들과 달리, 노골적으로 여성편이라며 또 다른 편견을 드러내는 남성 패널과, 경험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는 또 다른 남성 패널의 한계는 여전히 노정 중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 이토록 진솔하게 '군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최소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노력하고자 하는 그 시선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에게도 열려있다는 것을 <까칠 남녀> 군대 편이 증명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의 지속 이유는 충분하다.

by meditator 2017. 5. 23. 13:37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대한민국, 당연히 우리의 문맹률이 0%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OECD 가입국 문서 해독 능력 비교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전 국민의 75% 이상이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일상 문서 해독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014, 3, 7 국민 일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글을 읽을 수는 있을 정도인데, 65세 이상 노인 연령 층으로 가면 상태는 더 심각해 진다. 65세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문맹률은 절반에 가깝고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이 30%에나 달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 어르신들의 '봉건적 사고'의 잔재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기회조차 놓친 '어르신들 문맹'의 소산일 지도 모를 일이다. 




시집 세 편의 어엿한 시인, 칠곡군 할머니들
그래서 다수의 지방 자치 단체는 고령화 시대 이런 심각한 어르신들의 문맹률로 인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노인 복지 회관, 마을 회관, 경로당을 중심으로 한글 인문학 수업을 늘려가고 있다. 그런 인문학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글'을 배우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작품'으로 빛을 발한 기적의 사례가 있다. 바로 경북 칠곡군 할머니들이다. 

대구와 구미 사이의, 유명 농산물도, 유명 관광지도 없는 이곳, 주변 사람들이 아니면 그 지명조차 낯선 이곳 22개 마을의 할머니들은 2013년부터 '문해 교육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를 통해 할머니들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볼 수 있게 되었고, 꾸깃꾸깃한 그 옛날 자신에게 보내온 연애 편지에서부터, 자식들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할머니들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한글'이 어렵다는 할머니들, 그러나 할머니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을 넘어 '작품'을 창작해 냈다. 사투리로, 맞춤법이 틀린 한글, 하지만 그 속에 인생이 담긴 '詩'가 바로 그것이다. 

시가 뭐고?      소화자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 시간이라 일도 놓고 헛둥지둥 나왔는데 시를 쓰라하네/ 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2015년 그런 할머니들의 작품이 <시가 뭐고?>로 출간되었다. 출판 기념회도 했고, 북콘서트도 했다. 그 여세를 몰아 1년 뒤 119명 할머니들의 <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81명 할머니들의 87편의 시가 <작대기가 꼬꼬장 꼬꼬장해>가 지난 3월 23일 세 번 째로 출간되었다. 바로 이런 이제는 어엿한 세번 째 시집을 가진 시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SBS스페셜이 다룬다. 

다큐의 시작은 '詩에 대한 질문이다. 광화문 거리에 만들어진 간이 천막, 들른 사람들은 자기 앞에 펼쳐진 백지에 시를 쓰라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시, 그건 너무 어렵단다. 화면이 바뀌고, 한낮의 볕이 바른 양지, 칠곡군 할머니들이 앉아계시고, 시를 묻자, 할머니들 입에서 흥타령처럼 시가 흘러나온다. 쉽게 쓰여진, 아니 불려진 시?



여전히 한글 맞춤법이 너무 어렵다시는 할머니들, 그런데 시는 참 술술 잘도 나온다. 타고난 시인이셨나? 하지만 할머니들이 쓴 시를 보면 느껴진다. 그들의 지난 80년 삶이 그대로 시가 되어 흘러나왔음을. 자신을 표현할 길 없던 그 몇 십년의 세월이 뒤늦게 한글을 배워 물꼬가 터지고, 그 인생인 '시'라는 매개를 얻어 응축되어 표현된다. 

영감 / 칠곡시인 조덕자 할머니
젊은 때는 집에 있는 것보다 주막에 있는 시간이 드 만낫다
호호백발 할배 대니 갈 곳이 없어 집박계 모르네 이재사 할마이가 제일 좋다 하네


철이 들기도 전에 결혼을 하고 어려운 살림살이 허리 한번 못 펴보고 산 세월, 이제 남편이 있어도 바람처럼 돌아다닐 여력도 없이 병든 동반자, 자식들 다 여의고 이제사 여유가 생긴 할머니들은 '신이 나서', 늦게 분 '시'바람에 밥수저만 놓으면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신다


인생, 시가 되다,
할머니들이 쓰는 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詩>이다. 경기도 인근의 작은 도시에 사는 미자 할머니, 그 나이에도 여전히 중학생인 손자를 부양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못할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지만, 화사한 색감의 옷과 머리의 꽃장식처럼 소녀 감성을 잃지 않았다. 그런 미자 할머니가 '시' 강좌를 듣고,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 보게 되며, 영화는 미자 할머니가 만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목도한 아름답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를 담는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의 시이야기란 이창동 감독의 술회처럼, 영화 속 미자 할머니는 결국 자신의 몸으로 시대를 울리는 시가 되는 슬픈 마무리를 한다. 

작약꽃 / 칠곡시인 이쇠건 할머니
자야자야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올해도 여전히 연분홍 작약이 아름답게 피였네
나는 나는 시집온 지 육십 오년 되었구나 
그래서 내 나이는 팔십육세란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옃다네

하지만 그렇게 시대를, 자신이 결국 눈감아버릴 수 없는 삶을 '시'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했던 영화와 달리, 할매 詩트콤 속 할머니들의 삶은 마치 온갖 세월의 풍파를 겪고 의연해진 거목과도 같다. 잦은 바람 따윈 거뜬히 품어 버리는. 젊어 주막을 들락거리는 남편도, 농삿일보다 바깥일에 더 정신 팔렸던 남정네도,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식도, 삶은 고난했지만, 그 고난한 삶을 결코 한 시도 허투루 살지 않은, 온 몸으로 생을 짊어온 낙천성과 여유로움, 그리고 인생에 대해 그 어떤 철학자도 따라갈 수 없는 해탈이 이 칠곡 할머니들의 시엔 담겨있다. 그런 할머니들의 시처럼, 다큐 역시 詩트콤이라며 그런 늙었지만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밝게 그려내려 애쓴다. 

동네 청년이랑 몰래 동구밖 나무 아래서 연애를 하던 갈래머리 소녀는 이제 자식들 거둬먹이려 농삿일을 하며 한 평생을 보내느라 나무 막대기처럼 굵직해진 손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놓치지 않은 사랑을 노래한다. 먼저 보낸 자식의 무덤 앞에서 허물어지는 엄마는 하지만 여전히 건사해야 할 식구들은 물론 외지인에게 조차 밥 한끼를 걱정하며 미소를 보낸다. 어쩌면 할머니들이 이룬 기적은 '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되돌아 보면 한 줄의 시로 마치기엔 '고생'보따리였던 인생, 하지만 여전히 할머니들은 그 '신산스러운' 삶의 무게 대신, 또박또박 시랑 씨름하는 열정으로 오늘을 채워간다. 할머니들의 삶은 과거형이 아니라, 네 번 째 시집을 기대하기에 충분할 현재, 혹은 미래형이다. 
by meditator 2017. 5. 22. 16:10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그려 어쩔 수 없이 <시그널>과 시작도 전부터 비교를 당했던 <터널>, 이제 16부작이 마무리 된 후 그 누구도 <터널>을 두고 <시그널>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이 과연 입봉 작가와 입봉 피디의 작품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안정적'인 정서와 구도로 단 한 회도 허투루 보낸 회가 없을 정도로 한 회, 한 회 완성도높은 이야기로 16부작을 완주한 <터널>, 박광호가 터널로 떠날 때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것은 남겨진 강력 1팀과 딸 신재이(이유영 분)만이 아니었다. 




<시그널>과 비슷했다고, 아니 오히려 비슷한 건 <수사반장>
비슷한 소재, 거기에 유사한 설정을 들고 그럼에도 <시그널>을 전혀 떠올리지 않도록 만든 <터널>은 그 자체로 스릴러물의 새로운 구획 확장이다. <시그널>은 비슷한 시기 방영된 <응답하라 88>의 수사 버전처럼 그 당시의 시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80년대에서 2017년이 되어도 전혀 '발전'하지 않은 '적폐' 사회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변화되지 않은, 심지어 고착화되어 기득권으로 공고해진 '적폐'는 '김은희 작가'의 전매 특허이자, 박근혜 정권 아래서 그것을 실감했던 사람들의 '이성'을 깨우고 분노케 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과거의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와 현재의 그의 집요함을 계승한 현재의 박해영(이재훈 분)과 차수현(김혜수 분)의 동지애로 그가 못다한 사건의 완결로 마무리된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쫓던 연쇄 살인범을 쫓아 터널을 통해 이제 '교신' 대신 직접 2017년으로 넘어온 박광호. 여전히 그가 살던 80년대는 '연쇄 살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주먹구구식' 수사 방식을 고집했던 '전근대적' 사회였지만, 살인범을 쫓는 그의 집념을 '시간'을 초월할 만큼 열정적이다. <시그널>이 이재한이란 캐릭터를 통해 연쇄 살인과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시대에 주목했다면, <터널>은 똑같이 집요한 형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를 통해 80년대의 <수사반장>을 불러들인다. 





1989년 무려 880부작으로 종영했던 <수사반장>의 상징적 인물은 콜롬보 반장처럼 낡은 바바리 코트를 걸쳐입은 박반장의 최불암이었다. 우리가 배우 최불암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그 이미지 그대로 우리의 아버지처럼 그는 '사건'의 아버지 역할을 기꺼이 자임한다. 법을 어기며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때론 호통치지만, 죄를 미워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란 그 뻔한 경구처럼 가난 등의 이유로 범죄의 길에 빠진 범죄자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씁쓰레하게 사건을 마무리하고 등돌리는 박반장의 모습에서는 오늘날 스릴러의 냉혹한 수사의 흔적을 쉬이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 아버지같은 박반장의 그늘 아래 수사원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남형사(남성훈 분)가 그나마 샤프했을까 한 덩치하지만 노총각의 순정을 숨기지 못하는 조형사(조경환 분)도 홀아비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김형사(김상순 분)도 '인간미'하며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건을 추적하는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며 서러운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기억되는 지점은 그 결국 숨길 수 없는 '휴머니즘'이었다.

그리고 이제 <터널>은 시간을 거슬러 자신보다도 나이 많은 딸과 해후한 아재 형사 박광호를 현대로 불러들이며 그 시절 <수사반장>의 향수를 고스란히 불러낸다. 연쇄 살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 당연히 사건이 나면 주변의 수상한 범죄자들을 불러 '족치는' 것이 유일한 수사 방식이던 시절, 연달아 죽어가는 부녀자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선재 아버지'와 같은 남겨진 사람들을 보며 자책하던 광호는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 온다. 핸드폰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 '과거'의 인물은 달라진 시대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가 자신이 살던 시절에 했던 그 열렬한 수사에의 열정으로 어느 덧 강력 1팀의 막내이자, 에이스 형사로 떠억하니 자리잡는다. 

강력 1팀의 막내가 된 80년대의 아재 형사 
바로 그가 '막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그 시절 막내였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늙어버린 강력 1팀장을 비롯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김선재(윤현민 분)와 곽수사관(김병철 분), 송수사관(강기영 분)을 자신만의 열정으로 감복시킨다. 그의 열정이란 바로 '형사란~'이란 서두로 시작하여, 끝까지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포기하지 말라는 '열정'이 담뿍 담긴 '직업 의식'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그를 시간을 거슬러 그가 잡지 못한 사건의 희생자 아들이자, 이제는 스스로 어머니의 살인범을 잡겠다고 나선 김선재와 해후하게 만든다. 어머니를 잃은 줄도 모르던 겨우 걸음마를 떼던 아이는 그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범죄 수사' 밖에는 안중에 없는 '인간미' 제로의 수사관이 되었고, 그런 그의 파트너로 박광호가 등장하며, '피해자'와 '수사관'의 사연넘치는 관계가 성립된다. 



그렇게 <터널>은 자신이 미처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시절에 어머니를 잃은 선재와 범인을 쫓아 시간을 거스른 박광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범죄의 상흔과 그 '치유'를 주제로 삼는다. 거기에 시간을 거스른 광호로 인해 삶이 왜곡된 딸 신재이까지 엮이며 광호의 극한 수사는 좀 더 기구해진다. 자신이 알지도 못했던 딸과 자신이 잡지 못한 피해자의 아들과 함께 수사를 진행하는 박광호, 하지만 그는 '2017'년이란 시간적 딜레마를 한번 잡고자 하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피해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아재 형사의 열정으로 극복한다. 

물론 <터널>은 요즘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느 스릴러물처럼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들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정호영(허성태 분)도, 목진우(김민상 분), 두 사이코패스들의 시대를 넘나드는 범행이 16부작의 줄기이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연쇄 살인마의 만행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스릴러의 특성 상 그들의 범죄 방식에 천착하다, 때로는 그들에게 매달리고 마는 '스릴러'의 패착을 <터널>은 넘어선다. 그들이 사이코패스든, 소시오패스든, 그리고 어머니 때문이건, 타고났건, 혹은 자신의 범죄를 '신'의 용서로 거창하게 포장하건 결국 그들은 '살인범죄자'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들의 죄로 드라마를 치장하는 대신,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고 상처받는 '피해자'자들과 열정의 수사관을 전면에 내세우며 최근의 스릴러와 차별성을 가진다. 

마지막 회 목진우를 잡아넣고 나서 그 연쇄 살인범의 후일담 대신 드라마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찾아 소식을 전하고, 좀 더 빨리 범인을 잡지 못했음을 사죄한다. 그 옛날 <수사반장>처럼 '인간미' 넘치는 마무리로 끝을 맺는 방식은 어쩌면 2017년에 가장 '진부한' 휴머니즘이지만, 그래서 새롭다. 물론, 왜 박광호가 시간을 거슬르게 되었는가에서 부터 따지고 들자면 군데군데 빈구멍들은 있다. 하지만 마지막 회 모든 사건을 해결한 박광호가 터널에 간절하게 귀로의 소망을 전하고 그에 터널이 반응하듯,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그의 범인을 향한 열렬한 수사 의지 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드문드문 보이는 구멍조차도 메우고도 남을 만큼,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준 설득력과 그 설득력을 더 설득시키는 전개와 연출이 <터널>을 오래도록 따스하게 기억에 남도록 할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하는 85년 조용필의 <킬리만자로 표범>아련한 노랫 가락과 함께. 
by meditator 2017. 5. 22. 05:00

mbc 스페셜은 해마다 5월이면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휴먼 다큐 사랑>이라는 특집 시리즈를 방영해 왔다. 2006년 시한부 삶을 사는 영란씨와 그녀의 1분 대기조였던 남편 창원씨의 순애보로 시작된 시리즈, 2007년 <엄지 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 2009년 <풀빵 엄마>, 2011년 <진실이 엄마> 등을 통해 2016년까지 45편의 다큐가 '가족'의 의미를 되새겼다. 


2006년에서 이제 2016년, 그리고 올해 2017년 해마다 같은 이름으로 돌아온 <휴먼 다큐 사랑>이지만 해를 거듭하며 이 다큐를 통해 조명하고자 하는 '가족'의 의미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며 다른 감동과, 다른 질문을 던진다. 두 편에 걸쳐 방영되었던 <진실이 엄마>를 통해 고 최진실 씨의 환희와 준희는 아이에서 사춘기 청소년으로 자라났고, <너는 내 운명>의 1분 대기조였던 창원씨는 이제 홀로 아내를 그리며 살아간다. 2009년에는 로봇 다리 세진이를 통해 '장애우'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2014년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삼혜원에서 생활하는 듬직이를 통해 '사랑'과 '가족'의 또 다른 의미를 짚었다. 2015년에는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신해철씨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2015년의 사랑의 의미를 묻고, 역시나 같은 해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의 일상을 통해 더 큰 가족으로서의 국가의 의미에 대해 물음표를 남긴다. 2016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우리 사회 가족의 그늘을 <러브 미 텐더>를 통해, 탈북자의 문제를 <내딸 미향이> 등으로 '가족'에 대한 질문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간다. 그 해의 <휴먼 다큐 사랑>을 보면 그 시대 우리 사회 '가족'의 정의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되듯, 지난 10여년간 <휴먼 다큐 사랑>은 우리 사회 가족의 바로 미터로 자리 매김해 왔다.



고아 수출국의 민낯, 신성혁이 된 아담 크랩서 
그렇다면 이제 2017년에 찾아온 <휴먼 다큐 사랑>에서 보여진 이 시대의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나의 이름은 신성혁>이다. 5월 8일, 15일 2부에 걸쳐 방영된 이 다큐는 '고아 수출국' 대한민국의 민낯을 밝힌다. 

고아 수출국, 몇 십년전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단어, 하지만 우리나라는 1956년부터 무려 1998년까지 38년간 해외 입양 1위의 국가였다. 심지어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고아 수출국'이었다. 그 중에서도 주로 '미국'으로의 고아 수출이 대부분이었다. 80년에서부터 98년까지의 미국 이민 자료를 보면 미국의 전체 고아 입양 대상자 중 한국은 36.8%, 즉 미국 고아 입양자 세 명 중 한 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간 아이들은 다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 되었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가족의 달 첫 번째 휴먼 다큐 사랑이 밝힌다. 

그의 이름은 신성혁,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국말로 하는 것이 어눌하다. 오히려 40년동안 써온 아담 크랩서란 이름이 입에 익다. 당연히 그의 첫 번째 언어는 영어다. 그러나 1부에서 만난 그는 이민국의 재판 과정에 있다. 심지어 결국 그 재판에서 져서 수용소에서 건강을 잃어가며 하루 하루 한국으로의 송환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십년 전 그의 어머니는 침을 잘못맞아 못쓰는 다리를 끌고 집을 나간 남편 대신 두 아이를 먹여 살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기만 하면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는 꿈의 나라 미국으로 두 아이를 생이별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아이들의 미국 생활은 지하실에서 숟가락이나 벨트로 맞는 학대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그 학대조차도 파양으로 인해, 정부 보조금을 받고 아이들을 못박는 기계로 쏘며 13명의 아이들을 더 심하게 학대한 새 부모로의 이전이었다.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그 집을 찾아올 때까지.

하지만 학대의 끝은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모라고 호의적으로 증언을 했던 그를 양부모는 거리로 내쫓았다. 16살 어린 나이에 쓰레기통에서 남이 버린 버거를 줏어 먹으며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입양 당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책등을 가지러 몰래 양부모의 집에 들어갔다 신고되는 바람에 25개월의 교도소 생활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 '범죄'는 그를 '추방'할 유효한 조건이 되었다. 

왜 미국에서 십여년을 넘게 살았는데 그는 미국인이 될 수 없었을까? 그건 바로 '고아 수출'에만 연연한 채, 그들의 권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우리 정부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는 '고아'만 수출했지, 그들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권한에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미국으로 온 한국의 고아들은 18살이전에 양부모가 시민권을 취득시켜 줘야만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처럼 18살이 되기 전에 쫓겨난 아이들, 혹은 설사 18살이 되더라도 양부모가 동의하지 않는 아이들, 심지어 교도소라도 다녀오기라도 했다면 영원히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 



아들의 귀향, 뒤늦은 어머니의 모성 
냉정한 재판, 그리고 한국으로의 송환을 인정하기 전에는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수용소 생활, 결국 아담은 신성혁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조차 어려운 미국인, 당연히 한국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는 그는 졸지에 한국인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에겐 다리가 불편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2부는 그 어머니와 이젠 신성혁이 된 아담의 40년만의 모자 상봉을 그려낸다. 40년만에 돌아올 아들을 위해 며칠 동안 음식 준비를 하던 어머니는 그만 아들을 보자 눈물을 터트리다 못해 정신줄을 놓아 버린다. 아들이 왔다는 것 외엔 잠시 기억을 잃을 정도로. 대화는 안통하지만 지난 40년간 늘 학대를 당하던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만으로 오랜 외로움이 풀려간다. 그러나 다리를 못쓰는 어머니, 마찬가지로 몸이 성치 않은 새 아버지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는 없는 아들은 서울로 올라와 귀환 입양아들을 위한 시설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역시 그에게는 좀처럼 쉽게 '정착'을 허용치 않는다. 주민등록증은 주어졌지만 오물이 나오는 지하 방과 쉽게 늘지 않는 한국어, 그리고 그 보다 더 어려운 밥벌이가 그를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긴 그를 한없이 외롭게만 했던 미국이 아니다. 이제 그의 생일날 바리바리 음식을 싸들고 그를 찾아오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휴먼 다큐 사랑>은 고아 수출국의 오명을 자신의 40년 생애에 고스란히 새긴 신성혁 씨와 그 어머니의 뒤늦은 모성을 2017년의 가족, 그 자화상으로 그려낸다. 
by meditator 2017. 5. 16. 02:44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 원시 인류 사피엔스는 무리의 가운데에서 살며 평생 '고독'과 싸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무리와 함께 이루어지며, 개인의 삶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하지만 인류는 그런 '환상적'인 공동체를 시절을 두고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비대해진 사회 속 원자화된 개인으로 홀로 '고독'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처지에 이르렀다.바로 그 '원자화된 개인'이 처한 '관계'의 문제를 kbs2의 2부작 드라마 <개인주의자 지영씨>가 전면에 내세운다. 




고독에 대처하는 두 가지 자세
드라마는 대비되는 두 남녀의 캐릭터를 시끌벅적하게 내세우며 시작한다. 한 오피스텔에 잇닿아 있는 704호와 705호 그곳엔 번호만 다를 뿐 똑같은 구조의 집과 달리,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산다. 간호사로 일하는 나지영(민효린 분), 그녀는 극단적 개인주의자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주의를 넘어 '인간, 관계 혐오주의자'같다. 심지어 살아있는 모든 것과 혹시라도 연이 닿을ㄲ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녀가 매달리는 건 정신과 의사, 매번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잠을 들 수가 없다며 좀 더 강한 수면제를 요구한다. 

그런 그녀의 옆집에는 그녀와 정반대로 찰거머리처럼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박벽수(공명 분)가 있다.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가 싶더니 그의 여친은 그가 자신을 외로움을 피하는 도구로 여긴다며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서를 갈 정도로 그에게 진절머리를 치며 떠난다. 그가 친절하게 대하는 회사 동료들, 친구들은 하지만 그런 그를 웃긴 진상 취급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 먹는 대상으로 취급해 버린다. 

잠시 사귄 애인들과의 격한 이별 의식으로 경찰서에서 조우한 두 사람, 이후 그들은 각자의 성격답게 치근덕거릴 정도로 관심을 가진 벽수씨와 그런 벽수씨를 치한보듯 멀리하는 옆집 여자로 자꾸 부딪친다. 그리고 그 부딪침은 일련의 연애 드라마 방식의 싸우다 정들고 연애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드라마는 '혼밥족'이 대세가 된 젊은이들의 연애 생태계를 그린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그 '혼밥족'이 된 젊은이들이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극단적으로 캐릭터화 했지만 '관계'로 부터 받을 상처가 두려워 '관계'를 거부하는 지영과 그 '관계'로 부터의 단절이 두려워 '좋아요'를 구걸하며 기꺼이 '봉'이 되는 벽수의 모습 중간 그 어디쯤에 이 시대 청춘들의 고민이 들어서 있을 듯하다. 



고독 증후군, 그 발원지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관계'로 고민하는 청춘들의 '발원점'이다. 이들의 양상을 달리하지만 결국은 '관계 공포증', 혹은 '고독 증후군'을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떠받들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이다. 

지영은 8살 무렵 아버지와 싸우는 엄마의 입을 통해 자신을 가지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녀가 8살 이래 집을 떠나올 때까지 매번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그 말을 되풀이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부부'로 살았지만, '가족'이란 이름 아래 그녀를 방기했고,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그녀가 스스로 집을 나올 때까지. 벽수라고 다를까. 입양아인 그는 한번의 파양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새로 입양된 집안에서 자신에게 가하는 노골적인 차별을 감내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에서 도망친 지영과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탱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은 벽수. 그런 두 사람이 '가족'이란 제도 속에서 받은 상처는 고스란히 이제 '혼밥족'이 된 그들의 삶을 규정한다.

드라마는 말한다. 이 시대의 고독한 청춘들, 그러나 그 '고독'의 발원지는 해체되어 가고 있는 가족이라고. 청춘은 그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지만, 거기서 받은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트라우마'로 인해 현존재의 삶조차 규정받고 있다 말한다. 우리 시대가 여전히 신봉하고 있는 가족주의가 가진 발톱을 드라마는 유리처럼 여린 청춘들의 자기 방어적 기제를 통해 드러낸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사회에서 가족은 우리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전면적인 '보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보여지듯이, 그 '보호자'인 가족은 동시에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을만큼 자의적인 구조이다. 개개인의 불투명한 가족애와 의지에 맡겨진 가족이 그 속에 힘없는 존재에게 얼마나 가학적일 수 있는가를 드라마는 증언한다. 젊은이들치고 '가족'에 대한 고민 한 자락없지 않은 이 시대의 풍경의 상징적 묘사다. 

물론 드라마는 그런 두 사람의 상처를 '로맨틱하게. 사랑과 이해의 '관계'를 통해 치유해간다. 그 흔한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사랑으로.라는 상투적 슬로건처럼. 애초에 704, 705호의 옆집에 가장 양 극단의 캐릭터를 가진, 그러나 동일한 가족으로 부터 받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살게된다는 상투적 설정은 그렇게 당연히 로맨스 드라마의 정석에 맞추어 결론이 난다. 

그러나, 그런데도 어쩐지 너무도 현실적이었던 벽수와 지영의 캐릭터 덕분일까. 그들이 때론 막무가내로, 때론 조심스레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로맨스 드라마의 훈훈함 이상 마음을 덥힌다. 마치 빗속에 거리의 고양이들이 서로 몸을 마주대고 그 온기로 내리는 비를 견디듯. 그들이 어린 시절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그 유리처럼 깨뜨려버리는 대신, 로맨틱한 사랑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어쩐지 안도하게 된다. 아마도 그건, 사랑만큼 그 치유에 마음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부디 '가족'으로 부터 상처받은 청춘들이 서로를 보다듬으며 치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미니 시리즈와 미니 시리즈 사이 땜방처럼 들어간 2부작 드라마, 극단적이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관계'의 이야기를 '사랑'으로 풀어낸 이야기는 때론 달달하게 때론 뭉클하게 이 시대의 청춘 서사를 짧지만 공감가게 완성해 보인다. 

by meditator 2017. 5. 10. 14:23

일상 속에 숨어있는 불평등과 편견을 허물기 위해 나선 프로 불편러들의 이야기 <까칠남녀>, 1회부터 늘 그 '불평등과 편견'을 둘러싸고 여성과 남성의 입장은 대립에 대립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제 7회, 모처럼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적 구별 없이 '프로 불편러'들의 입장이 일치했다. 바로 '자위'라는 주제로. 1회 여성의 털로 시작하여, 피임, 졸혼, 피임, 데이트 비용, 맘충 등 우리 사회 '성'과 관련된 예민한 주제를 다뤘던 <까칠 남녀>, 하지만 7회 '자위'에 대한 토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그나마 남자들의 영역에서는 하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불가피하게 수용되고 있지만,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영역, 그 영역을 용감하게 <까칠 남녀>가 들고 나섰다. 그리고 모처럼 남녀 이구동성으로 '내 몸의 자유'를 주장한다. 




엄연한 존재로서의 '자위'
오나니, 수음, 마스터베이션 등 자위와 관련된 용어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거기엔 자위(自慰)의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함이라는 뜻에서 부터, 라틴어 어원 마스터 베어의 손으로 오염시키다의 마스터베이션까지 다양한 의미의 역사를 내포한다. 그렇듯 '위로'와 '오염'의 극과 극의 존재론을 가진 '자위'는 그 자체로 '성'에 있어 비장할 수 밖에 없는 주제다. 

그런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까칠 남녀>는 대부분의 인간이 하며, 실제 남성의 92%, 여성의 62%가 하고 있다는 실제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초대된 게스트 비뇨기과 의사이자, 성교육 전문가인 황진철 박사는 건강한 성생활인 '자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집착, 혹은 각자의 처한 상황이 빚어내는 강박적 자위로 인한 조루나 지루가 문제라고 '문제'의 영역을 구획한다. 

그렇다면 교육 방송 성교육 토크쇼 <까칠 남녀>가 이 문제를 공공연하게 내세운 의도는? 교육부가 제정한 성교육 표준안에서 교육에 임한 교사는 먼저 '야동'이나 '자위'라는 단어를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보여지듯 우리의 성교육은 엄연한 인간의 성행위의 일종인 자위를 터부시 함으로써 대다수 이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청소년 등이 잘못된 정보를 접하지 못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그 현실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는 '음란 동영상'이 성교육 교과서를 대신하고, 그로 인해 각종 커뮤니티에는 이와 관련된 황당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전구, 오이, 참외, 컵라면 등 기상천외한 각종 도구들로 인해 응급실 등을 찾는 '위험한 해프닝'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거기에 이런 성과 관련된 무지로 인해 부모 자식간의 갈등이 빚어지고, 어쩌면 아이들은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자위에 대해 가르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른 5살부터 자위에 대해 알려라는 커녕 제대로된 성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막상 패널들조차 아들의 자위에 맞닦뜨리는 상황에 대해 당황하듯, 여전히 우리 사회 '성'을 둘러싼 세대간 인식의 간극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갈 길이 먼 여성의 성
처음 여성 해방에 관련된 서적에 접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해방을 논하기에 앞서 '여성이란 존재'를 인식하고 수용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전제였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서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보고 만져보고,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여성학의 입장이 벌써 몇 십년전. 하지만 2017년의 중년 여성들은 '마스터베이션'과 관련된 도구에 질색을 하며, '자위'에 대해서는 '뭘 그렇게 까지'라며 손사래를 친다. 

물론 그런 중년의 세대와 젊은 세대는 다르다. 당당하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미처 그것을 몰랐던 것에 안타까워하는 등 자신의 욕구에 한층 솔직해졌다. 그러나 그런 젊은이들조차 말한다. 2017년에도 여성들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정숙하고 조신하기를 요구받는다고. 



여전히 '수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의 성, 그러기에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자위'는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실제 아이를 낳고 나서도 자신의 성기를 만져보거나, 들여다 본 적이 없고, 자위에 대해 모르는 여성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내 몸을 모르고, '자위'를 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냐고. 그건 바로 내 몸을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까칠 남녀>는 입을 모은다. 그 누군가의 성욕을 수용하는 대상, 혹은 아이를 낳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아껴야 할 나 자신의 일부이자, 방식으로서 '자위'는 규정된다. 즉, 성관계와는 별도로 나의 몸을 탐구하는 기초로서의 '자위'는 그 존재론을 드러낸다.

이런 여성의 자기 인식, 자기애, 자기 욕구에 대한 인정으로서의 과정은, 나아가 부부간의 성 문제로 구체화된다. 실제 기혼 남녀의 72%, 67%가 결혼 과정에서의 '자위 경험'이 있는 현실, 하지만 남성의 8%, 반면 여성의 92%가 상대방의 '자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이 위태위태한 성적 불균형의 현실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자위에 대해 혹시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가 라는 자책은 바로 '자위'에 대한 무지로 인해 빚어지는 대표적 사례다. 

물론 방송은 조심스럽게 '자위'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 못박는다. 개인차는 물론, 세대와 성별에 따라 차이의 간극이 큰 문제라는 것도 공감한다. 하지만,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단언처럼, 그것이 곧 '죄책감'으로 덮어 씌워진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방송을 젖혀 버리고자 애쓴다. '자유', 해방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위'를 복권하고자 애쓴다. 

그 언급만으로도 여전히 얼굴이 벌게지는 단어, 그것이 토크쇼의 주제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느 사실만으로도 <까칠 남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터부'를 '자유'로, '해방'을 '자기애'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한 표현으로 저 뒷골목에 숨었던 '자위'를 끌어오고자 애쓴다. 이런 '노력'의 목적은 무엇보다 현실이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언급만으로도 부끄럽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않게 되는 이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궤도 수정하고자 한 노력이다. 그러기에 <까칠 남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ebs답게 교육 방송으로서의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다. 
by meditator 2017. 5. 9. 04:20

이제는 과거의 인물이 된 오바마 대통령,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오바마 케어'라고 칭해지는 미국 의료 보험 체제를 개편으로 부터 상징되는 '진보적'인 업적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결국 '오바마 때문이다'라는 평가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트럼프'를 선택하도록 만든 경제적 불안감에 대해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평가도 등장한다. 임기 중 전용기를 타고 열심히 놀러다니고 농구 경기를 보러 다녔다는 '한 일이 없는 이미지'만의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 어디든지 달려갔던 기동력 뛰어난 현장가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할 당시에 이르기까지 무려 55%의 높은 지지도를 유지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의 대통령들이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던 것과 달리, 퇴임식을 맞이하기도 전에 탄핵을 받아 감옥에 가있거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고개를 수그리고 청와대를 나서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아니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따지더라도 놀라운 지지율이다. 과연 그의 공과를 차치하고 퇴임에 이르러서까지도 여전히 높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오바마, 그 이유가 뭘까를 <sbs스페셜>이 찾아본다. 




남의 나라 대통령 인기 높은 이유를 찾아보는 심리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같은 대통령 제를 운영하는 우리 나라의 새 대통령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무사히 퇴임하는 건 물론, 퇴임에 이르러서까지 환호를 받는 대통령, 어쩌면 우리가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가장 소박한 희망은 그것이 아닐까? 박수받으면 떠날 수 있는 대통령, 그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해낸 오바마의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2920일 동안 오바마를 지켜 본 오마바 전속 비디오 작가의 지난 5년간의 기록을 들춰본다. 

오바마를 통해 새 대통령에 바란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즐기는 대통령이었다. 그에겐 2009년 취임에서 부터 퇴임까지의 시간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공식 미디어 작가 차운드 하리를 비롯한 미디어 참모들이 있었다. 현대의 정치가 마치 '아이돌 탄생기'처럼 '이미지네이션'이 중요해지고, 언론에 의해 취합된 정보에 따라 대통령의 선택 여부가 판가름나는 시절에, 가장 발빠르게 그런 '트렌드'에 앞서 간 대통령으로 오바마는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공식 작가 차운드 하리는 그런 '미디어 프렌들리'라는 지점만으로 오바마를 기억하는 것에 고개를 젓는다.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 오바마는 카메라의 온 오프의 경계가 없었던 인물이라 강조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카메라에 많이 노출되었지만, 그 노출된 그의 모습은 '가공된 이미지'가 아니라, 카메라가 꺼진 순간에도 이어진 오바마 그 자신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렇게 진솔한 오바마란 인물은 미국 시민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오바마는 다인종 국가 미국의 전형처럼 복잡한 가계를 가진 인물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인물로써 입지전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오바마는 그런 자신을 규정지었던 그 모든 것을 넘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통합'시켜 나가는데 그 누구보다 솔선수범한 인물로 비디오는 기록한다. 

경선 과정에서 자신의 상대방이었던 힐러리를 국무 장관으로 임명했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국방 전문가 조셉 바이든을 런닝 메이트로 임기 내내 함께 했다. 무엇보다 그가 걸출했던 것은 미국이 위기를 맞이한 그 순간 순간이라 비디오는 기록한다. 우리에게도 기억으로 남는 백인의 흑인 교회 난입사건, 그 추도식에 선 오바마는 자신의 피부색 또한 흑인 임을 드러내지 않고, 'amazing grace'를 부르며 온 국가를 열광적인 통합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이 선거 기간은 물론, 취임 과정에서 위기에 몰릴 때 아와 타를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편을 결집시키는 것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위기를 돌파했던 것과 달리, 미국 내 인종 갈등을 정점으로 이끌었던 그 사건의 현장에서 노예선 선장으로 자신이 과거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며 만들었던 그 노래를 부르며, 흑백 인종 갈등을 봉합하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연설회장에서 자신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반대론자의 목소리에 그는 무시하는 대신, 준비해온 자신의 연설을 접고, 비록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전향적 자세를 보인다. 

현대 정치학이 결국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건 '통합'이다. 다양한 인종, 층위가 나는 계층, 그리고 그들 각각의 요구라는 복잡하게 서로의 이해 관계가 얽힌 사회에서, 그들을 하나의 정치 체제로서 '통합'하는 것이 오늘날 정치 체제와 리더의 가장 큰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다큐가 주목한 성공적인 지도자로서 오바마는 바로 그것을 퇴임의 그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오바마가 통합을 이루어 간 포인트는 바로 '아버지'이다.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바로 그 '아버지'로서의 자세로 국가의 모든 일에 접근해 들어간다. '각하'로서의 대통령이 아니다. 자신도 남들처럼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로써 국민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현장으로 달려가 함께 슬퍼하고, 기쁜 일은 함께 나눈다. 그의 초대로 백악관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마치 우리 친근한 이웃의 초대처럼 반가운 일인 듯. 

또한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허물어 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드러낸다. 딸이 평가한 웃긴 것과 창피한 것의 중간에 있다는 '코믹'한 모습을 정치적 긴장의 요소로 적절하게 활용하며,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실수에 관대하다. 그런 소박하지만 거리낌없는 그의 모습들이 그의 퇴임 과정에서 지난 시간의 동반자의 눈물과 수많은 이들의 굿바이 영상으로 마무리된다. 

업적보다 중요한 건? 
그런 오바마를 두고 미국의 대통령 연구자는 슬픔의 사령관(commander of grief)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전시 최고 사령관(commander in chief),  하지만 오바마는 '공감'을 통해 '국민'을 통합해 나가며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새로운 지도자상을 이루어 냈다. 이는 지난 대통령 시절, '불통'으로 인해 내내 고통받았던 우리에게는 몹시 부러운 덕목이기도 하다. 



오바마 비디오는 오바마가 퇴임 한 후 5년이 지난 2021년에 공개될 예정이다. 작가의 허락을 받아 취합한 한 시간 여의 영상에는 카메라가 켜지던 꺼지던 진지하게, 혹은 때론 가볍게 자신을 내보이기에 서슴없었던 한 대통령의 모습이 담겨있다. 물론 '미디어 프렌들리'한 그의 입장처럼, 그런 비디오 속 모습은 오바마라는 정체 세력이 지향했던 바 '이미지네이션'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네이션'을 넘어, 지금 새 대통령을 맞이하는 우리가 '고소원'인 것은 바로 '이미지'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세대, 그보다 더 극과 극의 입장으로 치달아 가는 이 대선 정국 속의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기꺼이 솔선수범하는, 그래서 박수 받으며 청와대를 떠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대통령이다. 다큐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업무 실적으로 보면 오바마는 잘 한 것만큼, 잘하지 못한 것도 많은 대통령이다. 그 누군가의 평가처럼 그로 인해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통령이었던 한에서 많은 국민들이 그를 통해 위로받고, 그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일원으로 자신을 정의내릴 수 있도록 만든 그 '리더쉽'이라고 다큐는 말하고 있다. 부디 새 대통령도 그 누구들의 대통령이 아닌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 되길~
by meditator 2017. 5. 8. 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