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의 계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 엔딩'이 '벚꽃 깡패'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 화사한 봄 벚꽃을 맞이하러 여행을 떠난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봄꽃을 맞이하러 찾아가는 대표적 명소, 남산. 남산을 찾은 연인이라면 빠짐없이 들르는 곳이 바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과 김선아가 사랑의 실랑이를 벌였던 이제는 이름조차 '삼순이 계단'이 된 곳이다. 그런데 그 영어 번역조차 어설픈 이 삼순이 계단이 사실은 우리 민족에게는 '치욕'의 장소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국사 교과서가 논란이 되는 국사 시간에 삼순이 계단에 숨겨진 역사까지 가르쳐 줄리가 만무하다.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는 공간, 그 속에 숨겨진 역사적 사연, 하지만 교육에서 다루어 지지 않는 그 숨겨진 역사를 '방송'이 대신 나섰다. 바로 지난 11월 부터 매주 화요일 7시 40분 찾아오는 <동네의 사생활>과 지난 12월 종영한 <역사 저널 그날>에 뒤를 이어 찾아온 <최태성, 이윤석의 역사 기행 그곳>이다. 




골목과 거리에서 만난 역사 인문학, <동네의 사생활>
우리 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을 모토로 내세운 <동네의 사생활>은 해방촌, 제주, 원효로, 대학로 등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토크쇼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걸어가니던 골목, 이제는 폐업을 한 구멍 가게 들이 '역사'를 만나, '현장'으로 탈바꿈한다. 배우 정진영의 사회로, 김풍, 주호민, 다니엘, 딘딘 등에 역사가 서경덕이 합류하여, '인문학'으로 우리 동네의 품격을 달리 한다. 

4월 5일 방영된 17회, 이제 막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한 남산을 찾았다. 관광객과 상춘의 연인들이 즐겨찾는 남산. 연인들이 사랑의 실랑이를 벌이는 삼순이 계단은 조선의 국신당을 허물고 일본이 13만평의 조선 신궁으로 올라가기 위해 성역화한 참배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어설프게 삼순이 계단이라 표시된 이 계단 주변 어느 곳에서 일본이 조선에 '영역 표시'를 하기 위해 만들었던 신당의 입구였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의 치욕스런 신당보다 더 아픈 남산의 역사가 있다. 바로 이제는 서울 유스호스텔로 변신한 1994년부터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었던 중앙 정보부 남산 본관이 그곳이다. 유신 시절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고문을 받다 숨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조를 당했던 곳. 본관을 비롯하여 지하 벙커라 불리던 지하 고문실 등 40여개의 건물이 오롯이 남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프로그램은 밝힌다. 

프로그램의 행보는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에서 끝나지 않는다. 끝을 알 수 없는 나선형 계단을 지나, 취조를 받던 사람이 서로를 볼 수 없게 지그재그로 흡음판이 달린 방을 만들고, 심지어 자살을 할 수 없게 창문조차 작게 만들었던, 그래서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 이어 군부 독재를 지켜내기 위해 숱한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박종철 열사의 목숨을 거두었던 남영동 대공 분실이 이날 여행의 종착지다. 



이렇게 프로그램은 국정이 아닌 검인정 교과서에서도 얇게 다루고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숨죽인 역사 현장을 '동네 답사'의 이름을 빌어 재현한다. 덕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 선언을 한 33인의 사실적 모습과, 그와 대비되는 이회영 일가의 헌신적인 생애가 드러난다. 아름다운 벚꽃에 숨겨진 군산의 모습과 이제는 역사가 된 학림 다방의 추억도 되살려 본다. 때로는 기억해야 할 역사, 때로는 잊지말아야 할 진실이 동네의 골목과 거리를 통해 살아온다. 

휘황한 중국 문명의 불빛 속에서 사라져 가는 임시 정부을 찾아서, <역사 기행 그곳>
지난 해 신돈 편을 예고까지 한 후 출연자의 신상 문제와 관련하여 본의 아니게 휴업을 하게 된 <역사 저널 그날>을 대신하여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찾았던 최태성, 이윤석의 <역사 기행 그곳>, 이 프로그램이 <역사 저널 그날>의 시즌2 대신 정규 편성되어 3월 25일부터 매주 토요일 8시 10분에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정규 편성 첫 번째 기획은 '고난의 길 임시 정부 루트', 임시정부의 여정을 따라간 기행이다. 이 기행의 의의는 3회차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마지막 편 최태성 강사와 이윤석씨가 오마주한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김구와 김원봉, 해방을 맞이하여 죽은 동지들을 기리며 술 잔을 나눈다. 영화 속 김원봉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중근, 윤봉길 등의 알려진 열사와 의사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서 그친다. 하지만 <역사 저널 그곳>에서 김원봉으로 분한 이윤석은 거기에 더한다. 충칭의 임시 정부를 홀로 지키셨던, 그리고 그곳에서 고향에 함께 돌아가지 못한 채 별표로 남으신, 그리고 다시 무연고 무덤으로 이젠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의 여정을 함께 하셨던 분들, 그 분들을 기린다. 

그리고 바로 첫 번째 <역사 기행 그곳>은 우리 역사 교과서가 미처 담지 못한 임시 정부의 여정을 때론 사(私)사로운 여행처럼, 하지만 사(史)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은 채 홍커우 공원이 있는 상해를 시작으로 임시정부 고난의 시기였던 항저우, 치장을 경유하여 해방을 맞이한 충징까지를 함께 한다. 



두 사람의 여정은 곧 백범 김구 선생의 여정이 되고, 그 여정 속에서 백범 김구 선생처럼 김원봉을 만나고, 윤봉길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역사 책은 기록하지 않은 임시 정부 서기이자 흥사단 단원이셨던 김복형 선생님과 같은 독립 운동가를 알게 되는 시간이 되고, 어쩌면 이 방송 프로그램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충칭 임시 정부와 같은 사라질, 그리고 사라진 독립 운동사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화려한 중국의 발전 속에서 근근히 버텨가는, 혹은 무연고 처리가 되는 독립 운동의 흔적들이, 곧 우리가 '임시정부'를 '역사' 속에서 취급하고 있는 역증처럼 여운이 남는 시간이 된다. 

'답사'는 동호회가 만들어지는 등, 세간의 취미 생활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미 '여행'은 tv 프로그램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답사'와 '여행'이 만난다면? 이 두 주제를 가장 시의적절하게 엮은 프로그램들이 바로 <동네의 사생활>과 <최태성, 이윤석의 역사 기행 그곳>이다. 4지 선다와 암기 과목이라는 역사 교육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미와 교훈의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애썼고, 학교에서 이미 역사를 배웠던 사람에게도 새로운 깨달음과 반성의 시간이 된다. 덕분에 흩날리는 벚꽃 속에, 혹은 화려한 중국 문명의 불빛 속에 숨겨진 우리 역사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by meditator 2017. 4. 9. 15:32

<김과장>이란 절대 아성이 사라지자, 수목 드라마의 접전이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과장>의 후속 작품으로 전작의 아우라에 힘입은 <추리의 여왕>은 첫 회 11.2%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코믹 스릴러'라는 이질적인 장르의 문제였을까, 2회만에 9.5%로 1위의 자리를 <사임당, 빛의 일기(이하 사임당)>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영애와 송승헌의 결합이라는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내리 <김과장>에게 고전했던 <사임당>은 야심차게 1위로 뛰어올랐다(닐슨 전국 기준 9.6%). 하지만 1위라지만 2위인 <추리의 여왕>과는 0.1% 차이, 더구나 수도권에서는 여전히 <추리의 여왕>이 우세한 편이다. (<추리의 여왕>  10.0%. <사임당> 9.3%, 닐슨 코리아 수도권 기준) 아직은 그 누구의 손이 올라갈만한 형편이 아닌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의 여왕>과 <사임당>의 혼전이 반가운 이유는 권상우, 송승헌이라는 두 배우가 모처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으며 건재를 과시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대표적 스타 송승헌&권상우 
송승헌은 1997년 <그대 그리고 나>를 통해 잘 생긴 신인으로 얼굴을 알린 후 1999년 <해피 투게더>에 이어 2000년 <가을 동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대표적 청춘 스타가 된 배우다. 이후 <여름 향기(2003)>, <에덴의 동쪽(2008)>, <마이 프린세스(2011)> 등을 통해 무난하게 그의 유명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닥터 진(2012)>, <남자가 사랑할 때(2013)>에 이르러서 그의 스타성은 정체, 혹은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권상우 역시 2001년 <맛있는 청혼>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며 <천국의 계단(2003)>, <슬픈 연가(2005)>로 역시나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영화에서 부진했던 송승헌과 달리, 권상우는 2003년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시작으로, <신부수업(2004)>, <말죽거리 잔혹사(2004)>, <청춘 만화(2006)>을 통해 영화계를 이끄는 대표적인 청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송승헌과 함께 했던 영화<숙명(2008)>, 드라마 <못된 사랑(2007)>을 경과하며 권상우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해왔다. 

2000년대 최고의 '잘 생김'을 연기했던 두 배우 권상우, 송승헌. 두 배우는 당대 '청춘'의 대명사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청춘'의 싱그러움을 넘어선 '연기'로 자신을 증명해 내는데 실패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2003년 대종상 영화제 남자 신인상, 이어 <말죽거리 잔혹사>로 2004년 대종상 영화제로 남자 인기상을 수상했지만 권상우는 그의 대사가 오랫동안 개그의 소재로 회자될 만큼 출연하는 작품마다 대사 처리의 어색함과 미숙함이란 논란을 넘어서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짙은 눈썹, 우수어린 연기의 송승헌 역시, 그런 트레이드 마크가 된 '분위기'만을 되풀이하는 하는 그의 경직된 연기로 인해 점점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랬던 그들이 모처럼 다시 돌아왔다. 물론 아직 최종 결과물이 나온 것도, 비록 확고한 시청률로 보상받고 있지도 않지만, 오랜만에 TV 드라마로 돌아온 권상우와 송승헌의 복귀에 대해 반응은 호의적이다. 물론 여전히 권상우의 발음은 귀에 걸리고, 송승헌은 예의 잘생김만을 연기하지만, 그럼에도 '구관이 명관'까지는 아니지만, '구관 나름의 긍정적 효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돌아온 익숙한 오빠들
<대장금>의 신화, 그 주인공이었던 이영애의 13년만의 복귀로 화제가 되었던 <사임당>,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드라마는 배우 이영애의 미모 이상을 설득하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는 집중력을 분산시켰고, 무엇보다 여전히 현모양처라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선입관이 강한 사임당에 대한 '역사'를 넘어서다 못해, 역사를 방기한 듯한 이야기는 공감을 떨어뜨렸다. 그런 와중에 송승헌의 존재감이 한 줄기 빛 처럼 드라마를 구해가기 시작했다. 조선판 개츠비라는 제작진의 설명처럼, 이미 결혼하여 아이들까지 둔 첫 사랑 사임당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왕족이라는 '낭만적 설정'은 모처럼 돌아온 이 잘생긴 분위기의 배우를 한껏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송승헌이 등장하지 않은 현대가 차라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나오고, 말도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헌신적인 이겸은 볼만하다는 것이 최근 <사임당>에 대한 평가들이다. 

그렇게 송승헌이 오랫동안 칩거 후에 예의 그가 가장 자신있는 '헌신적인 순정남'의 모습으로 호평을 받듯이, 송승헌과는 다르지만 권상우 역시 검사나 의사 등 어려운 대사 처리가 필요없는 그가 가장 잘 하는 '소탈한 형사'로 돌아와 좋은 반응을 이끌고 있다. 서동서 폭력 2팀 형사, 직감과 본응으로 수사하는 일명 마약 탐지견, 즉 '개같은' 형사다. 폭력 시비로 관할 파출소로 좌천될 만큼 수사 과정에서 물불을 안가리는 하완승 캐릭터는 모처럼 권상우가 '스타'로 각광받던 시절 잘 하던, 예의 힘을 뺀 연기이다. 물론 과거의 사연을 떠올리며 그의 눈에 맺힌 눈물 역시 감성 배우 권상우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다. 

이렇듯 모처럼 돌아온 송승헌과 권상우는 가장 그들이 잘 할 수 있는 캐릭터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게 모처럼 보니 신선하다. 잘 생긴 송승헌과 털털한 권상우의 매력이 제대로 살아나는 모습이 반갑기 까지 하다. 물론 그들이 전보다 더 연기를 잘 해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들이 어울리는 작품에서 그들이 잘 하는 걸 가끔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검증되지 않은 신인, 작가와 감독의 포장으로 연기를 운운할 게재가 되지 않는 종합 선물셋트같은 드라마들도 있는 마당에 그래도 한때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스타였던 그들이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 지나간 폐가전제품으로 밀쳐지는 것보다는 가끔 여전히 '우리의 오빠'로 그 존재감을 증명해 주는 것. 그것 또한 나쁘지 않지 않을까.
by meditator 2017. 4. 7. 16:34

2017년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지에서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 자국의 자본과 자국의 노동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국가 이익 우선주의'라는 외피를 두르고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국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현상이다. 그 선봉에 선 것은 대선 과정에서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국 우선주의'를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자국의 보호무역주의와 반 이민주의 정책을 위해 '펜스'도 마다하지 않고, '동맹'도 깰 수 있다며 세계를 위협한다. 하지만 미국이 두드러질 뿐 세계 어느 나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이야, '아베' = 일본 국가 주의로 상징되듯 헌법 개정을 전제로 강력한 일본을 구축하여, 다시 한번 '팍스니포니카(PAX-NIPPONICA)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정책은 일반으로 들어오면 '반한 시위' 등의 민족주의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세계적인 민족주의의 경향이 도대체 영화 <분노>와 무슨 상관이 있단 것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 전체의 구조화된 질서, 의식, 행동 체계는 개인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이를 아비투스(habitus)로 정의내리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아비투스가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고 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분노>는 바로 그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을 드러낸다.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트럼트처럼 일본의 거리에서는 종종 '한군인은 물러가라'는 반한 시위가 등장한다. 여기서 일본은 '우리'요, 한국인은 '타자'이며, '외부인'이다. 자신들이 아닌, 우리가 아닌 타자가 바로 현재 일본의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며, 자신의 '위기'의 핑계를 '타인'에게 대고 있다. 정말 그럴까?

영화 <분노>의 시작은 무더운 여름 도쿄의 주택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부부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피로 흥건한 현장에서 발견된 '憤怒(분노)'라는 단어만이 유일한 단서. 살해범은 잡히지 않고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영화는 그 살해범을 잡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용의자의 몽타쥬가 방영되는 시점의 세 이야기를 옵니버스 식으로 엮어간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던 딸 아이코(마야자키 아오이 분)를 데리고 돌아온 요헤이(와타나베 켄 분),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딸을 그의 임시직원 타시로(미츠야마 켄이치 분)가 호의를 가지고 대하지만 그런 타시로를 요헤이는 영 미덥지가 않다.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날마다 클럽 파티와 게이바를 전전하며 보내던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게이바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 분)과 '동거'를 하지만 역시나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접지는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키나와로 엄마를 따라 이사온 스즈미(히로세 스즈 분)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 분)를 따라 섬에 갔다가 만난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분)에게 거부감없는 호의를 전한다. 



이렇게 세 편의 이야기,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부부 살해범의 몽타즈, 별 개로 진행되는 이야기와 상관없이 세 곳에 등장한 세 사람의 '외부인'의 모습은 이미 '관객'의 의심을 산다. 그리고 관객처럼 역시도 자신들 앞에 등장한 외부인에게 같은 외부인인 스즈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이야기의 '내부인'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부부 살해범의 진범이 누구냐는 '추리'와 함께, 세 '곳'의 사람들의 관계가 엇물려가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는 누군가의 '의심' 혹은 순진한 믿음을 통해 뜻밖의 파국으로 전개된다. 

어렵사리 마음을 연 '정체모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믿음 끝에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경계와 의심, 심지어 '신고'다.  요헤이가,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자부하던 아이코가, 그리고 유마가 결국 그 '의심의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외면한 이후에 드러난 것은 아이너니하게도 '초라한 자신들'이다. 몸을 팔던 딸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딸에 대한 불신, 그리고 클럽을 전전하는 게이인 자신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불신이 결국은 '사랑하는 이'를 신고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었어야 했던 것일까? 그 믿음도 의심스럽다. 타나카를 따라갔던 스즈미에게 벌어진 생각지도 못한 '사고', 하지만 그 사고에 스즈미는 자신을 지키기에 연연했고, 타나카는 비겁했다. 그리고 그 '비겁'의 우정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우정은 결국 또 다른 믿음의 파국을 초래하고야 만다. 

보편적 발화로서의 분노 
<분노> 속 이야기는 몸을 더럽힌 딸을 용서할 수 없는 전통적인 아버지, 번듯한 외양의 직장인이지만 성 정체성에 있어 떳떳하지 않은 남성, 그리고 미군에 의해 강간당한 소녀 처럼, 파격적인 사례가 나열된다. 즉, 일본이라는 세계에 호시탐탐 자신을 강대국으로 드려내고 싶어하는 국가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을 '성'이라는 원초적 매개를 통해 질문한다. 조상신에게 명절마다 감사하다며 정치인들이 순례를 다니는 이 국가의 민낯이 어떤가 묻는다.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 끝내 외면하는 나라, 그 나라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아니 꿀꺽 삼켜지고 있는 '강간'의 현실을 묻는다. 또한 '분노'를 새기며 한낮의 거리에서 미쳐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묻는다. 

영화는 인간과 인간,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의 경계와 관계에 대한 질문 같지만, 결국 그 질문 너머에 있는 것은 번드르르한 경제 대국이라는 거죽을 벗겨내고 난 '초라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 초라한 일본의 자화상에 '느네들이 그렇지'하면 미소지을 일만은 아니다. 그 세 편의 이야기로 드러난 가족과 인간, 그리고 관계 속에 축적된 '타자에 대한 선긋기'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라고 그리 자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분노>는 보편적으로 고민하고 '분노'해야 할 발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발화점은 마치 희말라야 정상에 던져지듯 우리 사회에 던져져 불꽃도 내지 못한 채 몇몇의 조기 상영과 심야 상영으로 꺼져가고 있다. 



by meditator 2017. 4. 6. 19:55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은 많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남과 여'의 프로그램들은 '사랑'을 다룬다. 연예인들의 가상 결혼 이야기를 다룬 <우리 결혼했어요>나, <님과 함께>처럼, 2015년 종영한 <마녀 사냥>의 경우도 남녀간의 솔직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했지만, 그 솔직한 담론의 대부분은 만남과 교제를 전제로 깐다. 진짜 '민낯'의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는 없을까? 그 시도를 3월 27일 새로이 시작한 ebs의 <까칠 남녀>가 시작했다.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불편한 이야기. 그 속에 숨은 불평등과 편견에 화난 프로불편러들의 까칠한 토크. 이것이 새로 시작한 <까칠 남녀>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화나게 한 일상의 불평등과 편견은 어떤 것일까? 

<까칠 남녀>는 3월 27일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공주도 털이 있다'에 이어, 4월 3일 금기어가 된 '피임'을 전면적으로 다룬 '오빠 한번 믿어봐, 피임 전쟁'을 다루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편견과 불평등의 담론, 그 시작은?
남녀 차별에 대한 솔직한 고백 혹은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는 했지만, '가부장주의에 입각한 남성 중심 사회'인 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문제 제기의 중심은 우리 사회가 짊어지우고 있는 여성성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첫 회, '공주도 털이 있다'는 과연 남성성이란? 여성성이란? 하고 말문을 열지만, 곧 여성이 털을 기르는 구체적인 사안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하고 있는 '여성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겨드랑이 털, 겨털이란 칭해지는 이 단어에 대해 '빅 데이터'의 상당 부분이 '웃기다'로 규정내려지는 대한민국,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제모 안한 여자와 사귀느니, 뱃살 나온 여자랑 사귀겠다란 대답은 젊은 남성 56%가 답했다는 현실의 데이터에서 보여지듯이, 그 '웃긴' 겨털이 여성의 문제가 되면, 혐오와 공격의 대명사로 치환되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첫 번 째 회차의 주제다. 

가슴 털을 보이는 남자 배우는 '섹시'하다고 칭송받지만, 시상식 장에 제모를 안하고 등장한 미 여배우 롤라커크의 모습이 화두가 되고, 내 몸을 사랑하자는 취지에서 털을 기른 여성이 혐오스런 대상으로 공격을 받는 현실, 그것을 통해 '법'은 어기더라도, 사회문화적으로 길들여진 '아름다움'에 대한 '내면화'로써의 '미감(美感)을 짚어보며 그 이미 내면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진다. 

프로그램은 미지의 x의 방을 등장시키고, 그 방 주인을 '추리'하며 그 날의 주제를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시작된다. 이미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던 박미선이, 이번에는 그 '관습화된' 남자와 여자 이야기가 아닌, '민낯'의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런 박미선과 함께 에로 영화 감독으로 성에 대해 솔직함의 대명사인 봉만대 감독과 당당한 여성의 대명사로 인정받는 서유리, 빅데이터 전문가 서영진, 기생충 학자 서민, 성 칼럼니스트 은하선이 때론 솔직하게, 때론 까칠하게 그 날의 주제를 풀어나간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의 문제를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한 <까칠 남녀>는 2회 보다 더 솔직한 주제인 '피임' <오빠한번 믿어와, 피임 전쟁>을 가지고 찾아온다. oecd 낙태율 1위, 콘돔을 안쓰는 문화인 대한민국의 심각한 현실이 주제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나누는 '성', 하지만 현실은 '임신'에 대한 공포는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혼 여성에게만? 아니 미혼 여성 낙태율 17%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기혼 여성의 낙태율 33.3%에서 보여지듯이, 기혼, 미혼의 문제가 아닌 남녀 일반의 문제다. 

하지만 그 남녀 일반의 문제는 패널로 등장한 중년의 봉만대 감독이 적절한 피임 방법이 아니라고 확정된 체외 사정을 자랑스레 말하는 해프닝에서 보여지듯이,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피임'법에 무지하거나,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하거나, '기분, 감정' 등의 문제로 치부하는 안이한 현실에 대해 프로그램은 패널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짚어간다. 

결국 이야기의 방향은 리처드 기어의 '노 콘돔, 노 섹스'의 슬로건을 앞세워 '가장 유효하고 경제적이며 합리적 피임 방법'인 콘돔에 의한 피임으로 귀결된다. 즉 여성만의 임심 공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성, 그런 선택 과정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서 '남성 피임 방식인 콘돔'으로의 유도다. 

사회적 의식을 내면화한 편견에 대한 문제 제기 
무엇보다, 첫 회 여성의 겨털에 이어, 피임를 다룬 <까칠 남녀>는 그린 라이트 식의 '솔직'함과는 궤를 달리한 편견과 오해를 걷어내고자 하는 솔직함이다. 우리의 편견이 남자가, 혹은 여자가가 아닌, 피임에 대한 사회적 강제가 임신과 출산에 대한 국가 경제적 접근에서 시작되었듯이, 1915년 질레트 면도기의 광고와 함께 시작된 여성의 제모 관습에서 보여지듯이, 우리가 무심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대다수의 의식들이 '사회'적으로 훈련되고 교육받은 '생각'이라는 것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임신 공포가 여성의 책임이 된 세상의 이면에는, 정관 수술로 강제로 수술대로 끌려 들어갔던 남성의 피해가 존재하듯, 여성과 남성 이분법 그 이상의 '사회적 의식'에 대한 '제고'를 요청한다. 단지, 그 사회적 의식이 만든 세상이 남성이 지배적인, 그래서 여성이 사회적 을인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 경직된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가 결국 보다 많은 부담을 안고 있는 여성의 문제 제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남는다. 피임에 대한 회차는 가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서의 '콘돔'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인식 제고에 많은 시간을 제공했지만, 여성이 개발 도상국이냐란 발끈한 반발을 불러왔던 정영진의 '미군이 있다고 자주 국방을 안할쏘냐'라는 문제 제기도 그냥 허투루 넘어설 부분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즉 남성의 콘돔 사용율도 심각하게 저조하지만, 콘돔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남성에게 '철 좀 들어라' 식의 유도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감정적 성적 대립을 조장하는 자세이다. 또한 네덜란드 등의 30%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구 피임약 사용율 5%에서 보여지듯이, 성적 자기 결정권의 방식으로서 여성의 피임 방식에 대해서도 보다 긍정적인 입장이 아쉬웠다. 

즉 방송 초반 보여지듯이 우리 나라 청소년의 대다수가 '성'에 대해 조숙한 반면, '피임' 등의 방법에서 무지한 현실, 아니면 청년들의 경우, 친구나 인터넷을 통한 '외전'으로서의 성 지식의 습득이 현실인 상황에서, <까칠 남녀>가 '편견'과 불평등'이란 담론에 입각하여, 남성 중심의 피임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적절했지만, 어쩌면 콘돔 대신 랩을 쓰는 지금의 열악한 현실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피임', 그리고 '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계몽'이 절실한 상황이 아닐지라는 우려도 드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7. 4. 5. 15:35

지난 3월 13일부터 21일까지 <EBS다큐 프라임>에서는 4차 산업 혁명을 앞둔 미, 중 등의 발빠른 움직임을 <글로벌 인재 전쟁>을 통해 다루었다. 무엇보다 이 다큐가 놀라웠던 것은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이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춰, 아니, 그것을 선도하기 위해 자국의 교육 시스템과 환경을 거의 '혁명적'으로 변화시켜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글을 비롯한 아이티 산업을 이끄는 실리콘 밸리의 대부분 기업들이 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 그가 내세운 정책들에 강하게 반발했는가를 이 다큐는 보여준다. 기존의 대기업 중심의 산업 체계로는 더 이상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수용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한 아이티 산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산업들은 이 '변화'를 '블랙홀'처럼 해외의 인재 빨아들이며, 그 인재들이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창조적' 교육 환경 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업 환경을 조성해 간다. 

이렇게 해외 인재들이 마음껏 자신의 아이디어를 펼치고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며 4차 혁명을 주도해 가는 미국에 중국 역시 중궈멍(중국몽)을 외치며 하루에 1만개의 새로운 기업이 만들어 지는 창업의 열기 속에 '텐센트'와 같은 세계 4위의 기업이 만들어 지고 있는 중이다. 



스타트 업은 커녕, 대2병에 시달리는 한국 대학생들
이렇게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춰 미, 중이 자국의 교육과 산업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4월 2일 방영된 <대2병, 학교를 묻다>를 통해 본 우리의 교육 현실은 비관적이다 못해, 암담하다. 4차 교육 혁명을 주도하기는 커녕, 따라잡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낡은 제도와 그 아래에서 신음하며 '미래'를 저당잡히고 있는 청춘에게 새로운 세상의 '주도'란 언감생심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줄기차게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열렬히 외우고, 풀며 공부해 왔던 청춘들, 그런데 그들이 막상 대학에 들어가 2학년이 되면, '심각한 자기 정체'장애의 제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2병'이다. 

1학년 때는 대학에 입학했다는 흥분과 기쁨으로 한 시절을 보낼 수 있다. 공부도 대부분 교양 위주이기 때문에 전공에 자신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도 잠시 제쳐둘 수 있다. 그러던 학생들이 2학년에 올라가며 전공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잠이 안오고, 살이 빠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수업을 전폐하고 휴학을 하고, 자신을 대학에 보낸 부모님은 물론, 이런 교육 제도를 만든 세상을 원망하기에 이르는 것이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2병의 제 증상이다. 

도대체 왜 이런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그건 대한민국에서 수능이란 제도를 통과해본 학생과 부모님, 관계자라면 그 누구라도 알듯이, 지난 시간 학생들이 '오로지' 대학만을 가기 위해 불철주야 달려왔기 때문이다. 장래에 대한 고민도, 꿈에 대한 고민도, 그 모든 것을 선생님과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에선 '대학'만 가면, 그것도 좋은 대학만 가면 다 해결해 줄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것만 같던 대학, 하지만 막상 대학은 여전히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을 되풀이 하고 있고, 그들이 유보해왔던 꿈과 장래, 적성에 대한 빌미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적성 따윈 무시하고 취직이 잘 된다는 과에 밀려 들어온 학생, 자신이 무엇을 잘 하는지 조차 미처 알 시간조차 없었던 학생, 꿈조차 불투명했던 학생들은 그래서 대학 2학년 즈음에 큰 '혼란'을 느낀다. 



뭔가의 '메이커'가 되거나, '스타트업'할 준비는 커녕,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 무엇을 해야할 지 조차 모르는 학생들, 그 원망의 근원을 찾아 수능을 만들었다는 박도순 교수를 찾아가 그 원망을 풀어놓았지만, 뜻밖에도 박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수능 반대'. 애초에 쉬운 자격 시험으로 만들었던 수능이 그 이전의 입시 제도와 마찬가지로 대학생들의 줄세우기로 변질된 대한민국에서 잘못된 입시 제도의 책임을 질 사람은 없다. 여전히 부모 세대는 자신이 죽도록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금의환양'이 되는 세상, 대학 강의실에서 토론이나 질문은 커녕 일방적 강의만이 낭랑한 세상에서 대학생들은 고시나, 취직 외의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꿀 수 없다. 

개혁의 시작은 비판적 교육으로부터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다큐는 덴마크를 찾는다. 인생을 즐기자는 모토 '휘게'가 국민 정서인 나라 덴마크, 이 나라의 학생들은 그래서 정규 교육 과정 중간에 자리잡은 쉼표와 같은 '인생 학교' 애프터스콜레, 폴케호이스콜레 등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마치 정규 교육 과정의 '안식년'과도 같은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고,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나간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쉬는 것을 통해 찾아내는 꿈, 굳이 인생 학교가 아니더라도 짧은 수업 시간 외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보내는 학생들은 하루 12시간 공부하며 입시를 위해 달려가는 한국의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건 대학의 선택을 자신이 아닌 세상과 부모 등의 그 누군가가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학대하다시피 공부하며, 정작 자신의 미래에 대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현재의 교육, 과연 이 교육의 문제를 풀기위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 희소성의 해법을 학생들이 문제 풀이를 스스로 하며 수업을 주도해 나가는 '거꾸로 교실'과 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기존의 학제를 무너뜨린 '자유학기제' '오디세이 학교'에서 그 '희망'의 단초를 찾아내고자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자는 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스스로 모멸감에 견디지 못해 교사직을 그만둘까 고민했던 수학 시간, 그 주도권을 아이들에게 넘기자 놀랍게도 아이들은 스스로 그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가며 활기를 되찾아 간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의 개혁이 왜 중요한 것일까? 그저 대2병을 해결하기 위해, 4차 산업 혁명을 다른 나라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기 '생각하는 백성이 없이 위대한 나라는 없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하신 그 평범하고도 진솔한 진리때문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들의 교육은 어떻게 그리 다를 수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원하는 교육 정책을 취한 정당에 투표했기 때문이라는 우문 현답을 낸다. 바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이즈음에 학교를 묻는 이유다. 

'모든 사회 문제 한 가운데에는 사실상 교육이 있고, 그래서 해결책도 교육에서 찾아야 하는데 개혁의 방향 자체가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교육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미래가 없어요'   -이혜정 (교육과 혁신 연구소)

by meditator 2017. 4. 3. 15:54

촛불에 의해 '탄핵'을 당한 전직 대통령의 구속 여부가 화제가 되는 시절이다. 청와대가 비워지자, 정국은 급속도로 다음 청와대 주인공이 될 사람을 향해 몰려간다. 그런데 과연 새로운 대통령을 잘 뽑으면 다 되는 것일까? 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그저 새로운 대통령이 아니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체제, 새로운 사회'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의 시작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 '시작'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런 고민의 시점에 박경수 작가가 <귓속말>을 들고 찾아왔다. 


<추적자 the chaser(2012)>, <황금의 제국(2013)>, <펀치(2014)>라는 그의 전작들만으로 더 이상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작가다. 일찌기 아내와 딸을 형사 백홍석(손현주 분)을 통한 권력에 대한 복수를 시작으로, 그의 '부도덕한 권력'을 향한 '복수극'은 시작되었고, 매년 그 복수는 정치와 경제, 법의 '카르텔'을 저격해 왔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사법' 카르텔에 의해 아버지를 '영어의 몸'이 되게 만든 전직 형사 신영주(이보영 분)를 내세워 또 한 편의 '복수'의 시동을 건다. 



하지만 1,2회 아버지에게 '자유'를 안기기 위해 자신이 몸담았던 경찰직은 물론,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헌신하는 신영주보다 더 시선이 가는 건 뜻밖에도 요지부동의 늪에 빠진 판사 이동준(이동준 분)이다. 

위기에 빠진 '정의남' 이동준
서울 지방법원의 촉망받는 판시 이동준은 아버지의 청탁조차 외면한 채 대법원장의 사위를 구속시킬 만큼 법 앞의 정의를 실천하는데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바로 그 '정의로운 판결'로 인해 스스로 '재임용'의 늪에 빠지게 된다.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대법원장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동준의 판결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동료 법관들과 함께 이동준을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고자 한 것.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동준은 예의 '정의로움'으로 돌파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어려움에 빠진 어머님을 돕기 위해 방문했던 건강보험 평가원행이 뜻밖에 '불법'의 이름으로 그를 옭죄어 오자 고민에 빠진다. 정의로웠던 판사가 하루 아침에 '피의자'의 신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그가 '법비(法匪)'라 경멸해 마지 않았던 거대 로펌 태백의 최일환(김갑수 분)가 손을 내밀었던 것. 그의 요구 조건은 이동준의 마지막 재판이 될 신영주의 아버지 신창호(강신일 분) 재판에서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마지막 동앗줄이라며 그를 찾아온 신영주에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을 했던 이동준, 하지만 그 약속은 '구속'의 위기에 몰린 이동준에 의해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만다. 그리고 그 헌신짝처럼 버려진 약속으로 인해 이제 또 신영주라는 또 하나의 늪이 그의 발목을 잡아끈다. 

'정의'의 시대, 박경수 작가가 주목한 것은 뜻밖에도 '정의'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이다. 지식인이란 어쩌면 이 시대에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이 단어의 주인공을 일찌기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샤르트르는 자신의 출신 계급과 무관하게 자신이 배움을 통해 선택한 사상에 따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비판하면서 소외 계층에 봉사하는 존재라 정의 내렸다. 하지만, 샤르트르의 이 말을 뒤집으면, 노엄 촘스키가 지적한 바, 부와 권력으로 장악된 이 사회에서 그의 하수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짜 지식인'의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것을 기반으로 자신이 살아갈 '존재'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 

일찌기 6.25전쟁 이후, 논과 땅과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교육시켜 '입신양명'을 이루고자 했던 한국의 열렬한 자식 사랑은 이 사회를 '학력 사회'로 만들었다. 학교의 교육을 통해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이들은 뷰로크라트(관료)와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았고. '탄핵'이 된 시점에서도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없는 검찰 등의 권력의 '내부자들'로 권력 카르텔의 성실한 수행인이 되었다. 



<귓속말> 속 아버지 세대들은 태백의 대표 최일환, 이동준의 아버지 이호범(김창완 분)처럼 지배 계급의 성공한 '지식인'들과 그런 그들에 대항해 싸웠지만 자신의 직위(기자)와 경제적 능력조차 잃고, 이제 영어의 몸이 된 신창호를 통해 우리 현대사 속 지식인의 서로 다른 길을 이분법적으로 제시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할 수 있었던 지식인의 명확하게 다른 모습이다. 

젊은 지식인의 선택
그리고 이동준이 빠진 '자중지난'을 통해 이제 그 자식 세대가 봉착한 '딜레마'를 드라마의 주제로 내세운다. 정의로웠던 판사 이동준은 불명예에는 맞서 싸워보려 하지만, 스스로 '법'의 심판을 받을 지도 모를 함정에는 무기력했다. 그래서 신영주의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자신은 태백의 사위가 되는 선택을 했다. 

남들은 그가 국내 최고 로펌 태백의 사위가 됐음을 축하하지만 이동준의 미간은 풀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청탁마저 거절하며 그가 살고자 하지 않았던 길에 원치 않게 들었다고 생각한다. 신영주에게는 어떻게든 자신이 그녀를 돕기 위해 애를 써보겠다며 말한다. 

그런 그에게 두 사람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버지는 '태백 최일환 대표'를 묻는 동준에게 되묻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최일환의 정체가 아니라, 바로 니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한다. 위기에 빠졌을 때 너는 거침없이 태백의 손을 잡았다고. 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또 한 사람, 신영주는 신영주의 아버지를 나중에라도 꼭 구해주겠다고 말하는 이동준에게 '세월호'가 연상되는 답으로 돌려준다. '기다려라'라는 그 말이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는 일이 될 수도 있다며. 또한 시험의 계절, 단 한번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교수가 결국 총장 취임을 앞두고 불법 비리 혐의로 구속된 사례를 들며, 시험의 계절은 매년 돌아온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이동준의 선택을 비웃는다. 

최순실 사건이 터지고, 그의 충실한 조력자이자 어쩌면 동반자인 우병우와 김기춘 등의 실체에 대해 샅샅이 밝혀졌다.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소년은 그가 선택한 '권력'의 충실한 하수인이자, 스스로 권력의 내부자로 이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학력 사회'를 통해 합법적 권위와 권력이 된 다수의 '지식인'들의 카르텔이 진짜 문제라는 걸. 



그리고 바로 그 진짜 문제에 대해 <귓속말>은 한때는 정의로웠으나 어느덧 그 '카르텔'의 일원으로 허용된 이동준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드라마 속 이동준은 태백의 사위이자, 거대 로펌 태백의 촉망받는 변호사가 되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린다. 여전히 그의 정체성은 '정의로운 판사'지만, 이미 그의 선택은 '부도덕'의 루비콘 강을 건넜다. 과연, 그 '저승'의 강에서 이동준이 어떤 선택을 할지. 또한 신영주를 비롯한 태백의 딸 최수연(박세영 분), 보국산업의 아들 강정일(권율 분) 들 또 다른 '지식인'들의 행보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선택을 묻고자 한다. 

덕분에 혼돈스러운 이동준을 그려내기 위해서였을까? 1,2회의 <귓속말>은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을 떠나, 꽤나 모호하고 혼돈스럽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듯한 대사들은 떠오르지만, 그 모든 것들이 궁지에 몰린 이동준마냥 뒤엉켜버린다. '선'가 '악'의 경계가 벌써 주인공 자신에게서 결정되지 않았다. 그 '경계'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시청자들도 불편한 선택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불편함은 정의로운 주인공에게 닥친 시련과는 다른 거북스러움이다. 과연 이 거북스러운 질문에 시청자들의 인내심이 견뎌낼 지 그 쉽지않은 길의 여정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7. 3. 29. 16:08

왜 또 화성일까? 3월 25일 시작한 OCN의 범죄 수사 드라마 <터널>을 보면 이 질문은 당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일찌기 연극 <날 보러와요>의 영화 버전 <살인의 추억> 이래, tvN의 <갑동이> <시그널>까지 '도돌이표'처럼 반복된 소재이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엔 <시그널>에서 조진웅이 연기한 이재한 형사의 잔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또 한 명의 형사라니! 

결국 <터널>의 첫 번째 과제는 과연 이 드라마가 같은 소재를 다루되, 어떻게 다른 지점을 보고 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 회, <터널>은 분명 같은 '화성 연쇄 살인'이지만, 조금은 다른 '포커스'의 이야기임을 '차별적'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터널

터널ⓒ OCN


<터널>의 첫 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뜬금없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영국 드라마(영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1960년대 영국과 1980년대 한국

영국 itv가 방영한 <endeaver(인데버)>. 2013년에 시작된 이 드라마는 <셜록>처럼 4회차의 미니 시리즈이다. 첫 회 방영 이후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이제 시즌 4를 무사히 방영하고, 시즌 5를 준비 중이다. 이 드라마는 1965년 옥스포드를 배경으로 옥스포드를 중퇴한 형사 모스가 주인공으로 끌어가는 수사 드라마이다.

왜 1965년이었을까? 드라마 속 경찰서는 <터널> 속 1980년대의 경찰서와 판박이다. 사건이 나면 동네 양아치들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라는 명목으로 잡아다 다짜고짜 네가 범인이지? 그날 밤 뭐 했어? 라는 식의, 이미 영화<살인의 추억>에서 부터 클리셰가 되었던 그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수사를 한다. 

그러던 그 옥스포드에 <터널>처럼 10대 소녀를 비롯한 여성들의 살해가 연거푸 등장하기 시작한다. 같은 수법, 같은 방식. 경찰은 예의 방식으로 수사를 반복하지만, 도대체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다. <터널>의 형사들이 눈을 씻고 봐도 사건의 단서하나 잡을 수 없었던 것처럼. 1960년대의 영국과 1980년대의 한국은 아직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이라는 '신종 범죄'가 등장하지 않은, 그래서 그런 범죄자에 대한 미개척지이자 그런 수사를 할 준비도 조건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인데버

인데버ⓒ itv


바로 그때 <인데버>에서는 아직 정식 경장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한 젊은 모스가 툭 튀어나온다. 한때 옥스포드를 다녔던, 늘 오페라 음악을 듣고, 취미가 신문의 십자말 풀이인 이 형사는 우락부락한 덩치로 곤봉이나 총을 내세워 범죄자를 제압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당시의 그들과 다르게 '머리'를 써서, '추리'를 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범죄의 도래를 예측한다.

그렇게 영드 <인데버>는 산업의 발전,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이 등장하는 지능 범죄, 성범죄,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 살인 등 신종 범죄를 그 소재로 하여, 새로운 수사의 지평을 연다.

3월 25일 첫 선을 보인 <터널> 역시 지금까지 화성 연쇄 살인을 다루었던 드라마들과 같은 소재를 다루었지만, <인데버>처럼 그 전과는 달랐던 새로운 범죄 양상에 속수무책인 당시의 경찰의 혼돈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이 드라마의 영역을 드러낸다.

형사 박광호의 30년 타임 슬립

강력반 10년 고참의 형사 박광호(최진혁 분)는 '누군가 봤고, 누군가 들었고, 누군가 알고있다'는 그의 지론에 따라 사건이 나면 '저인망' 식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어 결국은 용의자를 찾아내는 베테랑으로 인정받는 경찰이다. 그런데 그의 관내에서 되풀이 되는 여성들의 살인 사건에는 베테랑인 그는 물론 동료 형사들 모두 속수무책이다.

그도, 그의 동료들도 늘 그래왔듯이 피해자 주변 그 누군가일 것이라고 탐문에 탐문을 거듭하지만, 도무지 실오라기 하나 건져지는 것이 없다. 그리고 또 다시 반복되는 사건. 2017년을 사는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연쇄살인이지만, <터널> 속 1986년을 사는 형사들은 그것을 알리가 없다. 

 터널

터널ⓒ OCN


그 시절 범죄는 피해자와의 어떤 원한이나 피해에 의해서만 일어나던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함께 고도화되어 가는 사회는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죽이는 살인마를 잉태하고 탄생시켰다. 바로 이 지점을 첫 회 <터널>은 충실히 보여준다. 부당한 권력이, 부도덕한 사회가 배태한 연쇄살인이라는 <시그널>과, 잡히지 않는 연쇄 살인마와 경찰의 대결이라는 <갑동이>와는 같은 듯 다르게 <터널>이 터트린 프롤로그다.

그리고 그 프롤로그는 역시나 역부족인 형사 박광호가 범인을 따라 훌쩍 30년의 시간을 건너뛰며, 이제는 연쇄 살인이 관례화되고, 그와 함께 그에 대한 범죄 수사 방식도 일취월장한 2017년의 시대와 호흡할 '여지'를 만든다. 그렇게 <터널>은 첫 회를 통해, 박광호 형사의 시간을 건너뛴 수사의 개연성을 닦으며, 1980년대 형사의 21세기적 활약을 기대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7. 3. 28. 21:18

거개의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일본 영화는 굵직굵직한 현재사의 궤적을 다루거나,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우리 나라 영화에 비하면 '미시적'이다. 대부분 단막극 정도의 소재로 한 개인사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간다. 그래서 '심심하다(?)'. 그런데 그 '심심한 영화 속에 빠져들다 보면 묘하게도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진다. 두 시간 여의 상영 시간이 종료되고 나면, 괜시리 '사는 게 뭘까?'란 자문을 하게 된다. 


아쿠타가와 상에 5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던 소설가 사토 야스시는 전업작가로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인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새로운 모색을 하기 위해 직업 훈련 학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전직은 실패했다. 그가 새 직업을 구하는 대신, 당시의 경험을 소설 <황금의 옷>으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토 야스시는 <카이탄 시의 풍경>, <그곳에만 빛난다>에 이어 <황금의 옷>으로 하코다테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전작들이 영화화된 것처럼 <황금의 옷>도 영화화되었다. 현재 개봉중인 <오버 더 펜스>가 그것이다. 

이 3부작은 그저 하코다테가 배경이라는 이유만이라면 아쉽다. 카이탄 조선소가 축소되면서 일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 사람들을 그린 <카이탄 시의 풍경>, 자신에게 닥친 뜻하지 않은 뜻하지 않은 운명으로 헤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곳에서만 빛난다>처럼, 모두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놓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상실'과 '치유'의 3부작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정의다 싶다. 

무심한 남자와 이상한 여자의 만남
그렇듯 <오버 더 펜스>도 가족과도 인연을 끊은 채 도시에서 돌아와 직업 훈련 학교를 다니는 한 남자 시라이와(오다기리 죠 분)로 시작된다. 직업 훈련 학교에 다니지만 그가 딱히 정말 직업 훈련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렇다고 딱히 대놓고 훈련 과정을 방기하지도 않는다. 마치 공기처럼 학교를 흘러다니다, 학교가 마치고 동료들의 한 잔도 마다하고 도시락과 맥주를 사서, 느릿하게 자전거로 짐도 풀지 않은 그의 집에 돌아와 검은 바다를 보며 밤을 보낸다. 

그렇게 그 어느 것에도 무심하던 그가 웃었다. 도시락을 사들고 나오다 마주친 남녀, 여자는 남자에게 '애정'을 운운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타조의 모습을 흉내낸다. 대로에서 마치 전위 예술같은 동작으로 실감나는 새의 소리까지 구현하며. 동행한 남자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질겁하지만, 시라이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그의 미소를 그녀가 보았다. 

무심한 남자 시라이와와 이상한 여자 사토시(아오이 유우 분)의 인연은 뜻밖의 곳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뜻밖의 인연은 더 뜻밖의 하룻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관심과 끌림으로 시작된 하룻밤은 뜻밖의 봉변과 당혹스러움으로 마무리된다. 세상에 가장 무심한 남자 시라이와가 만난 여자는 남들이 쉬운 여자란 평판과 달리 여리디 여린 유리같은 여자였던 것이다. 

'다중'이 아니라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독이 오늘날의 생산 양식을 특징짓는다. (중략) 신자유주의 성과 사회에서는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의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풀꽃같은 사람들
시라이와는 돜쿄에서 대기업까지 다니던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도 있었다. 단지 그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시간'뿐. 일에 너무 바빴던 그는 미처 가정을 돌볼 새가 없었다. 그 부족한 '시간'이 그와 그의 가족에게 뜻밖의 '사건'을 안겼고, 그 '사건'은 그로 하여금 도시에서 일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치 세상과 창을 하나 사이에 둔 것처럼 그렇게 직업 훈련 학교를 핑계로 '시간'을 흘러 떠다니고 있었다. 

차마 가족조차도 조심스러워 하는 그에게 다짜고짜 욕을 하며 니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한 술 더 뜬다. 그가 잘못했는데 자기가 더 펄펄 날뛰질 않나, 달려간 그의 앞에서 동물원을 한바탕 뒤집으며 소란을 피우질않나. 가장 정신없이, 가장 자신을 놓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녀는 '삶의 과민증' 환자였다. 마치 햇빛만 비춰도 벌개지는 햇빛 알레르기처럼 그녀는 삶의 사소한 자극조차도 버거워하며 자신을 '가학'한다. 영화는 시라이와와 달리 사토시가 남자 이름을 가지고 낮에는 유원지 알바에 밤엔 술집 여종원업원으로 일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자신을 못견뎌하는 그녀의 행동만으로도 지나온 그녀의 삶이 순탄치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에 벽을 친 남자와 세상을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여자가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되며,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을 두르고 있던 '펜스'를 넘을 용기를 얻고 결국 자신을 두른 그것을 넘는다. 남자는 상처받았다며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되고, 여자는 그런 남자로부터 '최악이 아니라'는 위로를 얻는다. '사랑'이다. 

<오버 더 펜스>에는 시라이와만이 아니라, 그가 거리를 두었던 직업 훈련 학교 동료들의 삶도 등장한다. 그저 교관의 잔소리 대상이었던 그들, 하지만 시라이와와 사토시의 사랑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가듯, 그저 멀뚱멀뚱 서로를 '관전'하던 이들이 '소프트볼' 시합 준비를 하며 '돈독'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를 형성해 가며, 아니 그 관계에서 튕겨져나간 인물마저, 무채색의 배경이었던 그들 역시 '시라이와'와 '사토시'처럼 저마다의 '색채'가 있는 '존중받아야 할'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영화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떠올리게 한다. 시라이와도 사토시도,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핑계로 직업 훈련 학교에 모인 모두는 어쩌면 '성공'과 '경쟁'이 된 사회에서는 밀려났다 치부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이들을 결국 사랑스런 풀꽃으로 그려내며, 존재와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마치 나태주 시인의 또 다른 <풀꽃>처럼. 

풀꽃 2
이름을 알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by meditator 2017. 3. 26. 00:12

격세지감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51.6%로 대통령이 된 순간이래, 장미 대선이라는 조기 대선이 이루어지는 날이 돌아오기 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사람들은 절망했고, 그 절망에 찬물이라도 끼얹는듯 정권은 사람들을 목조르고 세상은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져만 갔다. '희망'이란 말이 무색하던 시절, 하지만 그 완고하던 권력이 '최순실'이라는 비선 실세를 통해 누수가 되며, 광장의 촛불이 켜졌다. 모두들 숨죽이고 포기하고 살았던 것만 같던 시절, 그 촛불의 저력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되돌아보니, 사람들은 일찌기 '불가능'의 시대에 그 불가능을 돌파할 '희망'을 꿈꾸었던듯 하다. 2016년 <시그널>에서 <태양의 후예>, 다시 2017년으로 이어진 <낭만 닥터>, <피고인>, <김과장>까지 높은 시청률과 함께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 중 다수가 그 불가능를 피어올린 주인공들이었다. 이들 드라마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며 시청률과 화제성이란 쌍글이에 성공했던 것이다. 




시작은 <시그널>이었다. 
그 이전 영화 <살인의 추억>, 그리고 드라마 <갑동이>와 동일하게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시그널>, 하지만 드라마가 촛점을 맞춘 것은 바로 그 불가능했던 과거의 사건을 풀어내고자 하는 '과거'와 '현재'의 인간들이었다. 1989년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형사 이재한(조진웅 분)과 그 시절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던 소년에서 이제 경찰대 출신의 프로파일러가 된 박해영(이제훈 분),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을 집요한 사건 추적이라는 목적의식으로 승화시킨 형사 차수현(김혜수 분)이 그 주인공들이다. 

결국 이재한의 '실종'으로 마무리되어버린 1989년과 달라지지 않은, 아니 그 시절 사건의 결탁자들이 그것을 빌미로 권력을 공고화시킨 현재는 우리 현대사의 '권력'의 태생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폭로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여전히 전근대적인 시대를 상징한 채 씁쓸한 패배로 남았던 화성 연쇄 살인을 과거와 현재 인물들의 '의지'를 통해 '환타지'적으로 해결해 낸다. 그리고 그 사건의 해결은 몇 십년을 통해 공고해진 현대사의 적폐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이었다. 



그 '의지'를 이어받은 건 <태양의 후예>다. 
<태양의 후예>는 20일 방통위 방송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한국 피디대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2016년의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로맨스 드라마의 대가인 김은숙 작가와 김원석 작가가 함께 한 이 드라마는 '군인'이 나오는 드라마는 인기가 없다는 전례를 불식시키며 38.8%의 압도적 시청률로 작품성과 인기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전대통령조차 애청자였다는 아이러니한 인기를 구가했던 <태양의 후예>가 인기를 끈 가장 큰 요인은 흔히 '정권'의 수호자였던 '군인'이 '여자와 어린이'라는 대사로 상징되듯, '국민 일반'을 위한 보편적 정의의 수호자로 거듭났다는 점에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공간을 탈피하여 이국의 전장터를 배경으로 삼은 '환타지적' 배경과, 총을 맞고도 다음 장면에서 바로 '불사'의 존재로 적과 대치하는 주인공의 '슈퍼맨'을 능가하는 능력치는 '로맨틱 드라마'의 가장 유효한 장치로 작동했지만, 그런 '로맨스'의 줄기를 타고 곳곳에서 두 주인공을 통해 드러나는 정의와 휴머니즘을 고뇌하는 청춘의 모습은 정의로운 시대를 갈구하는 대중들의 염원을 드러내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전장의 정의는 이어서 <낭만 닥터> 속 의료 현실의 정의로 새롭게 구현된다. 
도라지 위스키가 나오는 옛날 다방에나 어울릴법한 한물 간 '낭만'이라는 단어가 경쟁과 성공시대에  '인간다움'이란 의미로 재해석되며 27.6%의 화려한 성적으로 2017년을 열었다. 

한때 거대 병원에서 가장 잘 나가던 의사, 외과계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신의 손 부용주(한석규 분),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빌어 대리수술을 자행했던, 하지만 그 피해를 고스란히 그에에 덮어씌운 병원 측의 모함을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런 그가 나타난 곳은 강원도 인근의 돌담 병원. 카지노로 주변의 교차하는 고속도로로 응급 환자가 범람하는 곳, 하지만 '영리'라는 조건에서 보면 한없이 방치된 이곳에, 그는 '김사부'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답게 저 마다의 상처를 지닌 젊은 의사들과 함께 '인간적인 의술'을 구현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환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필요한 의술 대신, 돈이 되는 기계와 그럴 듯한 외관으로 환자를 유혹하는 시대, 낭만적인(?) 낡은 병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곳에서 김사부와 때론 그를 의심하면서도, 그럼에도 그가 보이는 기적같은 의술을 따라 어느 틈에 자신도 '낭만적'이 되어가는 젊은 의사들은 의술이 곧 돈이고 사업인 시대에 '인간적인 의술', 그를 위한 돌담 프로젝트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오로지 그들의 '선의'로. 



다음엔 법이다. <피고인> 
3월 21일 역시나 28.3%로 박수를 받으며 떠난 <피고인>의 시작은 뜻밖에도 기억조차 잃은 채 살인범이 되어 감옥에 갇힌 검사 박정우(지성 분)였다. 재벌 앞에 당당했던 검사, 재벌가의 아들 차민호(엄기준 분)이 저지른 패륜적 범죄를 눈감아주지 않은 채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던 박정우에게 돌아온 것은 아내와 딸의 살인범이라는 무자비한 함정, 심지어 그는 그 충격으로 기억까지 잃었다. 

하지만 감옥도 박정우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국판 <프리즌 브레이크>라 빗대어진 드라마는 이제 종영과 함께 미드를 지우며, 박정우를 기억에 남긴다. 검사로서의 출중했던 그의 능력은 기억을 잃은 그 상황 속에서도 차민호가 끊임없이 그를 향해 펼쳐대는 암울한 상황을 뚫고 재심 포기와 사형수라는 족쇄를 뚫고 탈옥과 검사로의 복귀라는 희대의 역전극을 펼친다. 드라마는 늘 박정우라는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고, 그를 '고난'에 빠뜨렸지만, 그는 그 어떤 순간에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의지로 그 모든 미션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며 결국 재벌가의 망나니 연쇄 살인범 차민호를 법정에 세운다. <피고인>의 미덕은 재벌과 손잡은 검찰, 그리고 그 하수인이 된 교도 행정의 부도덕한 권력의 고리 아래에서,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결국 '법'의 심판이란 기본적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원칙'의 문제를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권의 심판 과정과 맞물리며 의의가 배가된다. 



<김과장>의 사이다도 빠질 수 없다. 
아직 2회가 남은 <김과장>은 앞선 드라마들에 비하면 18회 17.0%로 상대적으로 아쉬운 성취이다. 하지만 매회 김과장을 통해 시청자들의 마음에 부어준 속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차자면 그 어떤 인기 드라마 못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착해서 당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삥땅'이 능력이 된 김성룡(남궁민 분), 그런 그가 우연히 빙판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자꾸만 '착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전임자 부인을 도와주고, 더러워서 나가려다 택배 회사 정상화에 앞장서고, 구조 조정에 앞서며, '비리'의 귀재, 그가 '정의로운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그만이 아니다. 그가 몸담게 된 경리부 늘 회사의 궃은 일을 처리하면서도 사무실에서 음식 냄새 피운다고 구박덩이였던 바람부는대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편한 삶의 방식이라 여겼던 '복지부동'이 삶의 모토였던 사람들이 김과장과 함께 '복마전' 재벌 TQ의 대항마가 되어간다. 우리 사회에서 이미 가진 자,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와 질서 아래에서 나 하나 어찌 목숨을 보전하고, 내 가족을 먹여살리면 된다 생각했던 '보통 사람들'이 각자의 '도생'을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하니, 불가능하리라 보였던 '불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드라마 <김과장>은 가장 통쾌하게 그려낸다. 마치 하나 둘씩 피워내기 시작한 촛불이 광장을 덮고, 절대 권력을 이제 법 앞에 세우기에 이르른 것처럼. 

이렇게 <시그널>에서부터, <태양의 후예>, <낭만 닥터>, <피고인>, <김과장>까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시청자들이 열렬히 환호했던 드라마들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시청자라 이름지워진 이 시대의 대중들이 갈구했던 것, 기원했던 것들이 드라마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들이 형사이건, 군인이건, 의사이건, 검사이건, 일개 회사원이건, 시청자들은 그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불의에 '복지부동'하는 대신, 싸워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영원할 것같은 재벌과 정치 권력과, 검찰 등 이 시대의 권력들의 '적폐'를 무너뜨려주기를 원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화려한 시청률은 이 시대의 '건강한 시민의식'의 또 다른 발현이요, 갈구였던 것이다. 

by meditator 2017. 3. 24. 17:44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작 영화 <토니 에드만>을 보고 난 후 문득 장 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이 떠올려졌다. 소설 속 챕터를 드골에서부터 시라크까지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의 대통령 이름으로 대신했던 책, 그래서 주인공 폴 빌릭은 드골 시대로부터 시라크 시대까지 나고 자라고 가족을 이루며 나이들어 갔지만, 그의 삶이 그 대통령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야기. 

마치 영화 속 토니 에드만은 독일 버전의 나이든 폴 빌릭 같았다. 오랫동안 외도를 했던 아내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고 그의 딸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런 상황에 대해 '속수무책'인 아버지 폴 빌릭, 물론 <토니 에드만> 속 딸은 자폐증도, 정신병원도 아니지만, 아버지인 토니 에드만이 보기엔 그에 버금가게 심각해 보이고, 그런 딸의 모습에 폴 빌릭만큼 '망연자실'해 한다. 하지만 그런 무능력해져 버린 노쇄한 가장의 모습을 넘어 <프랑스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는 건 바로 영화 속 아버지와 딸이라는 부녀의 갈등이 결국 아버지의 세대와 딸의 세대라는 시대적 충돌을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 개인의 삶이라는 것조차도 결국은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만 그 형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묵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동적으로 규정되어진다면 '인간'이겠는가? <토니 에드만>의 미덕은 그런 '피동성'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어설픈 토니 에드만의 부정(父情)에서 비롯된, '그럼에도'에 있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폴 블릭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는 대책없이 적극적으로 딸의 인생에 뛰어들고, 그것이 '페이소스'가 담뿍 담긴 이 시대의 불랙코미디가 되었다. 그리고 토니 에드만의  '그럼에도'는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 함몰되어가는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이기도 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 놓고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보다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살짝 이상한 아버지 토니와, 너무나도 멀쩡해서 문제인 딸 이네스 
영화가 시작되고 아버지 빈프리드 의 집에 찾아온 택배 기사, 하지만 그 택배 기사를 맞은 아버지의 행동은 어딘가 영 '정상적'이지 않다. 다짜고짜 틀니를 끼고 가발에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척하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퇴임하는 교장 선생님을 위한 아버지의 지도 아래 마련된 학생들의 공연을 보면 그런 의심은 한결 짙어진다. 

굳이 이상한 가발이나 틀니를 끼지 않아도 종종 가슴에 찬 심장 박동기가 울리는 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추레한 외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유용함'이 사라진 듯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가 이혼한 아내의 집에서 오랜만에 딸과 조우한다. 

그런데 아프신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조차 없다는 딸은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눈도 마주칠 시간이 없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그런 딸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버지,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아버지가 그 '지그시'의 선을 넘어 서면서 부터이다. 

딸은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조차 시간이 없다며 비서를 대신해 응대할 정도로 사무적이다. 그러던 딸이 아버지가 보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는 반응을 한다. 마치 사람이 죽어나가도 무심히 거리를 지나는 현대인들이 몸개그에 관심을 보이듯. 더구나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이제 막 체결을 앞두고 거기에 온 신경을 쏟는 딸의 빈틈없는 일상을 자꾸 헤집고 들어오며 불편하게 한다. 심지어 한바탕 퍼부은 딸과 헤어진 그가 예의 틀니와 가발을 뒤집어 쓰고 토니 에드만이라며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영화 처음부터 보여준 아버지의 '코미디'는 사실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 있노라면 그의 코믹한 설정은 어쩐지 불편하다. 심지어 그가 줏어섬기는 거짓말들은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그 기묘한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틈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딸과도, 딸이 계약하고자 했던 대표와도, 딸의 주변 사람들과도. 영화 속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이젠 뒤켠으로 밀쳐진 세대이고, 그 중에서도 외양으로 보면 가장 뒤쳐져있어 보이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를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꼰대'스러움 대신에, 마치 파티에 온 피에로처럼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세상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일부 어르신들이 보이는 '어처구니'없음과 다르게 또 다른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아버지가 애써 거짓말까지 해대며 만들어 내는 '실소의 공간'을 빽빽히 채워가는 건 오늘날 현대인의 전형이라고도 할 딸의 삶이다. 현대적 거간꾼이라고도 하는 루마니아와 독일 기업간의 체결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인 이네스는 계약의 성공을 위해서 루마니아 기업의 집단 해고 정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과 계약하면 자신들이 나서서 '해고'를 해주니 좋다는 식이다. 가족간의 관계도,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의 문제도,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루마니아 라는 나라의 처지도 그 모든 것은 그녀의 '계약 성공'이라는 블랙홀 안에 무기력하게 빨려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헤집어 놓은 틈은 이런 '성공'만을 향해 다친 발톱을 치료하는 대신 기꺼이 그 고통조차 이겨내며 하이힐을 신는 딸의 삶이다. 아버지의 해프닝은 영화 중반까지는 내내 불편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철갑을 두른 듯한 딸의 일상에 조금씩 틈을 만들어 간다. 아버지를 보낸 딸은 그녀에게도 '눈물'이 아직 존재함을 스스로 시인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간 낯선 루마니아 가정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The greatest of all'을 열창하고 만다. 이제는 잊혀진 어린 시절 그 언젠가 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불렀던 그때처럼. 그리고, 자신을 옭죄였던 그 꽉조인 옷과 신발을 훌훌 벗어던진 채 동료들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모두 영웅을 찾고 있죠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 필요한거예요
전 저를 채워줄 사람을 찾지 못했죠
세상이란 외로운 곳이에요
그래서 전 저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맹세했죠
누군가의 그림자 속을 걷진 않겠다고
(중략)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예요

성공적인 삶, 그리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질문
이네스가 절규하듯 부른 ''The greatest of all'은 이네스 세대의 절규다. 아버지 세대가 일구어 놓았다는 세상이 그녀들에게 물려준 건, '성공,과 경쟁, 자신들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북받침을 참지 못했듯이,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던 난, 과연 내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퇴물같은 아버지가 던진 질문도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딸에게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오랫동안 키워오던 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늙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든 개, 그 개를 보고 어머니는 이제 그만 안락사를 시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어머니도 개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처치 곤란 아버지와 함께 한 딸과의 여정에서 비로소 그 진의가 드러난다. 정리 해고를 위해 방문한 루마니아의 공장, '경영 합리화'를 고민하기 위해 방문한 그곳에서 아버지는 살아숨쉬는 인간으로서의 루마니아 노동자와 그들의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하듯, 아버지는 딸에게서도 그런 걸 되찾아주고자 역부족인 노력을 시도한 것이다. 



토니 에드만이 된 아버지는 마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정의를 되묻는 듯하다. 일찌기 요한 하위징하는 '시계'의 발명과 함께 중세의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놀이하던 인간은 '인간적 삶'을 빼앗기고 '시간'이 지배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가속도'가 붙어, 인간에게 그나마 남겨져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미덕' 조차도 '합리'와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빼앗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영화는 질문한다. 털북숭이 루마니아 괴물이 된 아버지와 딸의 포옹이 뭉클했다면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얻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문득 저런 아버지를 가진다는 것이 부러웠다. 이제는 세상이 퇴물이라 불러도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 가치관에 대한 믿음이 당당한, 아,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당당한 어르신들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문하게 된다. 그 분들은 진정 당당해서 저러는 것일까? 오히려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 아닐까?라고. 자신의 세대를 허투로 살아오지 않은 아버지 세대의 당당함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토니 에드만을 볼 일이다. 




by meditator 2017. 3. 21.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