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삼일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그리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된 해이다. 이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각 방송사는 저마다 '특집'이란 이름으로 다양하게 이를 기념하고자 한다. 지나간 역사의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기에 대부분 그 시절의 사건들을 '다큐'의 형식으로 소환한다. 그런 가운데 mbc는 독특한 시도를 한다. 바로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방식이다. 김수로, 박찬호, 강한나, 김동완, 공찬 등 연예인들과 함께 '예능'의 형식으로 임시정부의 시간을 떠올린다. 즉, 이들이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 충칭 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선열들이 살았던 방식을 재현해 내는 식이다. 1월 7일 그 첫 번째 시간은 상해 임시 정부를 방문하여 어려운 형편에서 임시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그 시절 선열들의 행보를 따라본다. 

 

 

박찬호 등이 도착한 상해, 이들을 맞이한 건 단대 사학과 양지선 교수이다.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 그것이 바로 상해 임시 정부라며 임시 정부의 의의를 정의내려준 교수는 그와 함께 임정의 역사, 임정의 수난사를 알려준다. 

임정의 수난사, 그를 함께 한 2019년의 사람들 
전남 함평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김철, 그는 1917년 가산을 정리해 상해로 왔다. 그렇게 그가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하비로에 1919년 첫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지였던 이곳의 하비로 청사는 결국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프랑스의 폐쇄 명령으로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옮기게 된 보경리 청사, 거기엔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보내준 미국과 멕시코 동포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임시 정부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내세우며 첫 근대적 정부를 구성했지만 현실에서의 행보는 팍팍했다. 하비로 청사 이래 임정 첫 7년간 무려 12번이나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1920년대에는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였고, 불과 30원이 집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려웠던 시간은 천황이 눈 앞에 지나가는데 폭탄이 있었다면 던졌을 텐데 하며, 돈이 생기면 먹을 걸 사들고 왔던 철공소 직원 이봉창의 소회가 거사로 움트던 독립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렇게 고난의 장정, 그 장정에 2019년에서 온 출연자들이 참여한다. 함께 여성 독립운동가로 임정의 안 살림을 책임졌던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 그리고 김구 선생의 어머니이신 곽낙원 여사의 회고에 등장했던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먹었다던 쫑즈(찹살떡), 두부탕, 짠지 등을 맛본다. 지금이야 부드러운 쌀떡이지만 당시 추위 속에 얼음덩어리같았을 떡,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주로 사먹었다던 중국 국수 찌꺼기, 시장에서 팔고 남은 배추 시레기 등만으로도 출연자들은 당시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출연자들은 저마다 맡겨진 미션에 따라 임정 시절 독립 운동가들의 삶 체험에 나서는데, 김수로와 강한나에게 맡겨진 건 상해의 거리에서 '수로 상회'와 '한나 상회'를 열어 물건을 파는 것. 

이들인 연 '상회'의 모티브가 된건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 상회'이다. 임정 당시 독립 자금의 60%를 책임지셨다는 안희제 선생은, 경남 의령 분으로 영남 지역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힘을 모아 '백산 상회'를 열어 그 운영 자금을 모아 중경 임시 정부로 보내셨다고 한다. 그 시절 그의 집안과 집안 끼리 가까운 사이였던 경남 진주 출신 lg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도 구인회 상점을 해서 번 돈 만 원을 안희제 선생 편에 임정으로 보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1927년 결국 백산 상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럼에도 안희제 선생은 1942년 광복군에 거액의 자금을 대는 밀명을 수행하는 등 독립 운동의 안살림에 혁혁한 공험을 하셨다. 

윤봉길 의사가 일한 세탁소로 간 박찬호 
박찬호가 불려간 곳은 세탁소, 힘 쓰는 일이라면 자신있다던 박찬호, 하지만 그를 맞이한 2019년의 세탁소는 버튼 하나로 작동되는 기계식, 하지만 박찬호의 호언장담을 기계가 듣기라도 한 양 고장이 나고, 박찬호는 일일이 손으로 세탁을 하는 처지에 놓인다. 힘이라면 자신있다던 박찬호지만 이불을 하나 빨고는 두 손을 들고 싶은,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이불이었다. 

왜 세탁소였을까? 세탁소에서 일했던 독립운동가는 다름아닌 윤봉길 의사였다.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임정으로 가고자 했던 청년, 하지만 청년은 그곳까지 갈 여비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청도의 세탁소에서 일을 해 그 돈으로 임정을 갔고 기꺼이 의거의 주인공이 되셨다. 

 

   

 

2019년의 김염이 된 김동완 
이른 새벽 제일 먼저 길을 떠난 김동완을 맞이한 곳은 영화 촬영장, 단역이려니 했는데 그가 해야 할 역할은 서거 30주년을 맞이한 레이먼드 킴, 김염을 기리는 영화의 김염 역할이었다. 

<야초한화>로 1930년대 중국의 청춘 스타로 떠올랐던 김염, 하지만 1934년 가장 잘 생긴 남자 배우, 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 1위였던 김염, 하지만 그는 일본이 자신들을 선전하기 위한 영화에 출연을 거부하고 위대한 항일 영화로 선정된 <대로> 이후 40여 편 항일 영화를 찍으며 중국의 영화 황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선택에는 그의 집안 배경이 큰 몫을 한다.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탄탄대로의 성공을 뒤로 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진료소를 열고 동포를 진료하며 독립자금을 대던 중 밀정에 의해 독살당하신 아버지 김필순, 이후 그를 맡아 키운 고모부 김규식과 김순애 역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우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셨다. 7명의 형제들 중 4명이 독립 운동에 참여한 집안, 김염의 선택은 항일이었고, 그 선택에 중국인들은 2019년에도 그의 죽음을 기린다. 

세탁소에서 허리가 아프도록 빨래를 한 박찬호는 이어서 공찬과 함께 인성학교를 방문한다. 1917년 여운형에 의해 상해에 세워진 초등학교, 이역만리 중국에서도 한국어와 한국혼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학교는 초등학교였지만 당시로서는 내로라하던 김태연, 이광복, 현정건, 선우혁, 여운홍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선생님으로 독립정신을 고취, 이 학교 출신 학생들 상당수가 이후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 소년 척후대의 주요 인원으로 성장했다. 이런 인성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1999년 상해 한국인 학교가 만들어졌고, 공찬은 이곳의 1일 교사로, 박찬호는 이곳 학생들을 상대로 자신이 이룬 꿈에 대해 설파한다. 

 

 

<독립 원정대의 하루 살이>는 두 가지 플랫폼의 형식을 띤다. 1월 7일 tv를 통해 방영된 프로그램에서는 상하이로 간 연예인들의 1일 독립운동가의 삶 체험을 중심으로 한 '예능적 형식'에 방점을 찍은 반면,  웹 사이트에 올려진 웹 다큐는 <그 남자의 집 대한민국>, <백산 안희제와 독립 자금의 비밀> 등,  tv 판에서 부족했던 역사적 사실을 다큐 형식으로 구성,  tv를 통해 독립 운동가들의 삶에 대해 궁금증을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다. 그러기에 예능적 접근이 아쉬웠던 사람들이라면 <독립 원정대의 하루살이> 사이트를 방문하면 김수로, 강한나, 박찬호, 김동완이 했던 체험의 본연을 만날 수 있다. 

by meditator 2019. 1. 8. 17:12

1월 6일, sbs는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특집하는 취지에서 <신년 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 전쟁>을 방영했다. 이 다큐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바로 그 주인공이 의렬단이기 때문이다. 이하 다큐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제 시대 가장 비타협적이고 강고하게 일제에 저항했던 단체, 하지만 우리는 이 단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단체와 그 단장인 김원봉이 우리 독립 운동사의 접혀진 부분인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택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에게 김원봉은 '나 밀양 사람이오'하던 대사와 함께 등장한 <암살>의 조승우가 분한 역할로,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분한 정채산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다가왔다. 그 영화 속 신출귀몰 바람같던 독립운동의 전설 김원봉, 그리고 그가 단장으로 있던 의렬단을 sbs가 복원한다. 

다큐를 연 건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오지 태항산맥 그곳 운두저촌에 남겨진 한글 문구이다. 

왜놈의 상관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조선 말을 운두저촌 주민들은 칠을 더하며 지켜왔다. 왜 이곳 주민들은 조선의용군의 저 문구를 지켜주려 했을까? 심지어 나이든 주민들 중에는 조선 의용군의 우리말 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있다. 도대체 이역만리 이 외진 곳에서 조선 청년들은 무엇을 했던가? 그 의문으로 부터 다큐는 시작된다.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그리고 다큐는 1923년 경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졌다. 일제, 그 중에서도 그 폭압적 권력의 핵심부인 종로 경찰서를 공격하다니.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미와 경부는 사건의 용의자로 김상옥을 추정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왜 김상옥이었을까? 그는 철물점을 하는 상인이었지만, 사실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거기에 명사수에 비호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1920년 미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고 사이토 총독이 이들을 영접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상옥은 이곳에 폭탄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만 하루 전 예비 검속에 폭탄 등의 다수를 가진 채 걸려 버린다. 비호 장군답게 검거를 피해 잠적했던 김상옥,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연히 종로 경찰서 사건의 주범으로 추정된 것이다. 

그리고 1월 22일 그가 효자동 민가에 숨어있다는 소식을 접한 일경은 무려 김상옥 한 사람을 잡기 위해 1000 여 명을 동원하여 집중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겨우 총 두 자루, 하지만 명사수였던 그는 무려 3시간 동안 일경과 대치했고 총알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이는 김장옥이란 이름으로 일경과 대치하다 죽음을 맞이한 김장옥의 영화 <밀정> 속 첫 씬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김상옥의 죽음 이후 무려 2달 동안이나 보도 통제를 하며 수사를 하던 일경은 이 사건에서 '김원봉'이란 인물을 찾아낸다. 바로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던 의렬단의 의거였던 것이다. 

 

 

김원봉과 의렬단 
1919년 11월 상해, 조선의 청년들은 비폭력 투쟁이었던 3.1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광복을 이루기 위해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고자 무력을 수단으로 암살을 정의로 삼아 5개의 적 기관(조선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등) 파괴와 7악(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부,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의 제거를 목표로 하여 결성되었다.

그에 따라 앞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을 비롯하여,
1920년 부산 경찰서장 폭사 사건,
같은 해 밀양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1921년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내 폭탄 폭파 사건,
1922년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의 일본 육군 대장 암살 시도, 
1924년 김지섭 일본 천황궁 앞 폭탄 투척 시도
1924년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의 친일파 정갑주 일가족 사살, 밀정 배정자 암살 시도, 일진회 이용구 회장 부상,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 습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제 시대 국내 혹은 국외 무장 투쟁들을 벌여왔다. 

혁혁한 활동을 벌였지만 동시에 김상옥, 나석주의  자결, 김병현의 순국, 김광추, 박희광, 김지섭 등의 체포 등을 겪으며 개인적 테러활동에 한계에 도달하고 독립 운동 내에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 물결과 함께 의열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종적을 감춘 김원봉,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6년 중국 남경의 천녕사에서 였다. 

 

 

조선 의용대와 의용군 
개인적인 투쟁을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승화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2년 조선 혁명 정치 간부학교가 개교되었다. 또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위해 김원봉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중국 혁명 엘리트의 산실인 황포 군관 학교에 입교하였다.

1938년 중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조선 의용대가 창설, 이들은 조선 민족 해방과 국제적 동맹으로서 중국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2가지 임무를 내걸고 중일 전쟁에서 선전전, 심리전 등을 비롯한 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거기에 좀 더 동포들이 많은 지역으로의 투쟁 거점을 옮기고자 하는 열망에 조선 의용대 상당수가 화북으로 옮겨 1042년 조선의용군으로 호가장 전투 등에서 앞서 운두저촌의 중국인들이 기릴 정도로 혁혁한 활약을 보였고 이들의 활약 덕분에 팽덕회, 주석, 등소평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한편 남경에 남아있던 김원봉 등은 1942년 중국 임시 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 1지대가 되어 조선 진격의 준비를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한다. 

의의와 한계 
다큐는 1919년에  결성한 의렬단의 궤적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다룬다. 무엇보다 우리 독립 운동사의 존재하지만 말할 수 없었던 영역을 봉인 해제하고자 했던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굳이 조승우나 이병헌이 아니었더라도 영화 <암살>이나 <밀정>에서 등장한 김원봉, 혹은 김원봉으로 추정된 인물의 존재감은 컸다. 하지만, 그 큰 존재감을 가진 인물을 우리는 드러내어 말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여전히 아쉽다. 다큐는 의렬단의 존재적 계승을 1935년 해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에 촛점을 맞추어 조선 의용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 서술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전히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딜레마가 되고 있는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다큐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함구하고 있다. 

과연 의렬단과 아나키즘, 그리고 조선 의용대, 조선 의용군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노선을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다큐는 스스로 자충수를 두고 만다. 다큐에서는 마치 김원봉이 그의 친구 윤세주에게 부탁하여 조선 의용대의 일보를 화북으로 옮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엄밀하게 조선 의용군 내 분파적 결정이었다. 즉 국민당 정부와의 협조적 관계를 선택했던 김원봉과, 물론 우리 주민이 많은 만주로의 이주도 있지만 중국 공산당 내 팔로군으로 귀속한 조선 의용군의 행보는 엄연히 다른 길인 것이다. 이들은 김원봉과 이른바 '연안파'로 나뉘어 졌으며  광복군과 북한의 조선 의용군의 모태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들은 모두 이후 자진 월북이후 숙청이라는 사건을 겪기도 하였다. 과연 역사를 어디까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역사적 행보에 대한 과욕이 겉훑기식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이러한 객관적 사상적 궤적에 대한 사실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면 차라리, 1920년대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폭력 투쟁의 의렬단만을 충실히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실하게 했다면 다큐의 한 시간을 채우고도 넘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렬단의 독립 투쟁>은 의의와 한계를 가진, 어쩌면 일제하 독립 운동사에 대한 방송의 과제를 남긴 시간이 되었다. 


by meditator 2019. 1. 7. 16:44

<다큐 시선>은 삼일운동 100주년, 임시 정부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곁의 친일 잔재 3부작을 마련했다. 1월 3일 방영된 첫 번 째 친일 잔재는  '교육'이다. 

지난 2014년 2월 미쓰비시 근로 정신대 피해자 네 분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재판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에 동참한 반인도적 행위까지 일일이 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포함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 계속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재판의 결과 이행을 지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12월 5일 대법원 앞에는  근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 모임 사람들과 함께, 91살의 김정주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 더 늦기 전에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중학교에 보내준다 하고 일본의 공장으로 보낸 선생님들 
김정주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무렵 중학교를 보내준다는 담임과 교장의 꼬임에 넘어가 일본으로 갔다. 놀라운 건 이제 81살 된 여동생 김성주 할머니 마저 언니처럼 동생을 꼬드겨 근로 정신대로 보냈다. 후지코시에 강제 징용된 동생 김정주 할머니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장과 기숙사 생활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배가 너무 고파 기숙사의 이름모를 푸른 풀들을 뜯어 먹어야 했던 시간, 지진으로 다리를 다치고 기계에 손가락을 잃은 채 돌아온 고국, 하지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은 파탄났다. 

이 두 어린 여학생에게 상급 학교를 미끼로 일본 행을 권했던 건 75년전 순천 남초등학교의 오오가끼 선생님, 근대화된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이제 곧 만주, 중국 등을 손아귀에 넣어 대동아 공영권의 주인이 될 일본 밑에서 식민지인 게 , 2등 국민이라도 하는게 행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벌이는 성전과도 같은 전쟁에 기여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교장은 학생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논리를 설파했을 것이다.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선 민족 교육의 선각자들 
그런데 당시 일본인 선생님만이 그랬던 게 아니다. 1938년 3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일본은 우리 말과 글을 못쓰게 하고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황국 신민 서사를 강요 하는 등 새로운 식민지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는 전쟁으로 가는 일본의 체제에 식민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정책의 변화였다. 이어 1943년 교련 등 군사 교육 분야를 도입하는 등 지원병과 학도병에 맞는 교육을 변질시켜 나갔고, '일한 병합'의 취지로 한국, 한국인, 한국 역사, 한국의 문화 모든 것을 '폐멸'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교육, 식민지 정책에 우리의 교육인들이 동조를 넘어 앞장섰다. 

의친왕에게서 하사 받은 땅에 추계 학원을 만든 황신덕은 1937년 중일 전쟁 직후 김활란 등 대표적인 사학 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전쟁 지원 단체에 가입하여 근로 정신대를 독려하는 선동을 하고 글을 썼다. 

더 충격적인 건 민족 사학의 거두로 알려진 인촌 김성수의 다른 선택이다. '조선의 징병령 쾌보는 실로 반도 2천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등등 1942년 이후 총독부 기관지를 비롯 여러 신문에 학도병 독려의 글을 쓰는 등 친일에 앞장 선 것이다. 

이화 여전을 세운 김활란, 지금의 서울 음대 전신인 경성 음악 전문 학교를 세운 현제명 등 민족 교육의 대표자들은 일제 말기 얼굴을 바꾸고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 섰다. 

 

 

물론 이들의 변절에 대한 변명도 있다. 황신덕의 경우 1927년까지 근우회를 조직하고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 섰고, 인촌 김성수의 경우 변절을 한 1930년대 말까지 25,6년간 민족 교육의 거두로 헌신해왔었다는 점이다. 학교와 신문사, 경성 방직을 지키고자 하는 시대적 고육책이었음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변절보다 그 변절을 덮고자 했던 이후의 행동들이다. 친일에 대한 반성과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동포에 대한 사죄는 커녕 해방 후 반공주의 정권의 기득권으로  자기 보전에 연연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고대 앞의 거리는 인촌로이고, 대법원 판결로 서훈이 박탈된 현재에도 고려대학교 인촌 기념관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추계 학원에도, 고려대학교에도 여전히 황신덕과 김성수의 동상은 세워져 있다. 

이런 민족 사학의 결과물로 인한 소송과 분쟁도 이어진다. 최근 연극계의 화두는 남산 드라마 센터가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다. 학도병 지원은 물론, 만주 한인 이민 등을 적극 권장했던 대표적 친일파 동랑 유치진, 그 역시 해방후 반공주의 정권과 결탁하여 미군정 귀속 재산을 불하받아 그 자리에 남산 드라마 센터를 지었다. 귀속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어야 한다는 법에 의거 더 이상 유치진 일가의 남산 드라마 센터, 서울 예대 소유는 불가하다는 반발이 일고 있다. 역시나 대표적 친일파 민영휘가 만든 휘문고는 상속되며 족벌 사학이 되었고 최근 사학재단 임대 보증금 횡령 사건 등에 휘말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제 하 민족 사학들 중 상당수가  일제 말 자신의 재산과 직위를 보전하기 위해 '친일파'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명목이야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교육을 보전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를 위해 그들은 비행기를 헌납했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심지어 내선일체의 선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그런 과오에 대한 반성과 속죄의 시간은 없었다. 대신 해방 이후 미군과 정권에 유착하여 다시 한번 기득권이 되어 이제 ''족벌 사학'이 되었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가는 이 '단죄되지 않고 속죄하지 않은 시간'이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이 되었다. 

일제 시대 교과서 속 식민지 교육 
이렇게 교육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결국은 '변절'로 그들의 선각자적 활동을 얼룩져버리는 동안, 교육이라고 달랐을까. 전남대 일문과 김순전 교수는 식민지 시절 교과서를 번역하여 식민지사의 내막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저 두 친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두 친구가 일본인이고 한국인인 한 달라진다. 수례를 끄는 일본인과 미는 조선인이라는 식이다. 이처럼 주도적인 일본인과 수동적인 한국인 상이 은연 중에 교과서 곳곳에 심어져 있는 것이다. 

역사 교육은 보다 고등적 암시가 담겨있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설명하되 갈등 구조를 더해 한계를 드러내는 식이라거나, 박혁거세, 석탈해가 일본에서 왔다는 식으로 하여 일본과 한국이 원래 하나 였으며 나뉘어 졌던 것이 합쳐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내선 일체론', '동화론'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식민 사학 논쟁 
1925년 자국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조선사 편수회를 만든 일제, 37년 조선사 편수회가 만든 조선사가 편찬된다. 식민지적 관리 방식으로서의 조선 역사이자, 역사적 자료의 독점, 관리 체계 정립을 이룬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일본의 지방사로,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지배 논리가 관철된 역사로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에 의한 역사, 그 그림자는 생각 외로 길다. 지명으로 압록강은 두 군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랴호허 강의 지류인 압록강(鴨淥江)이 그 둘이다. 고려 역사 속 강동 6주가 있는 곳을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으로 역사 책은 기술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는 이의를 제기한다. 외려 중국의 역사서 등을 조사해 보면 후자의 압록강이 더 맞고, 그에 따르면 고려가 세운 천리장성의 위치도 한참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윤관의 9성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위치가 아닌 '두만강 너머 700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연구소 측은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인하대 연구소 등이 주장하고 있는 건 지금의 역사서들이 일본의 실증사학자 쓰다소키치의 제자인 이병도가 만든 진단학회에 의한 교과서가 가진 식민지 사관의 흔적들을 지우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이병도의 제자들, 그 학파에 의한 한국사관의 점령, 이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학계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 만큼이나 어려운 숙제라 입을 모은다. 
 

 
카톨릭 대 기경량 교수는 일제 시대 펴낸 조선사는 하나의 사료집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식민주의적 흔적은 극복해야 하지만 그 사료집에 불과한 조선사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는 건 또 하나의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이라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김세연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 역시 주류는 잘못됐고 비주류는 옳다는 흑백 논리를 경계한다.  과학의 발달에 근거하여 탄소 동위원소 등 고증학적 관점에서 학문적 공론의 장이 펼쳐져야 하며 정치적 목적의 왜곡을 우려한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는 일본이 만든,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만든 역사의 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혹은 각각의 사관에 따라 역사학계는 나뉘어지고 학문적 공론의 장을 통한 진솔한 토론과 합의는 쉬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교과서 개정 때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by meditator 2019. 1. 5. 04:50

2018년 가계 부채 1500조가 되었다. 한 가구당 7,022만원인 셈이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울리는 대출을 해주겠다는 각종 정보성 알림들, 우리는 어쩌면 24시간 빚의 유혹 속에 놓여있다. 대학에 들어가서 학자금 대출, 결혼을 하며 집 장만을 위한 융자,  그리고 나이가 들어 사업을 하기 위한 대출 등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빚은 우리 삶의 '레버리지(지렛대)'가 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정의하자면 빚은 소득, 수입이 발생하는 시점과 돈이 필요한 시점 간의 갭을 미래 소득이나 수입을 담보로 미리 당겨서 쓰는 유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긍정'적 수단의 증가폭이 심상찮다. ebs다큐 프라임은 지난 12월 3일 부터 <부채 사회>, <빚의 역습>, <미래의 빚> 3부작으로 <경제 대기획 빚>에 대해 다루며 급증하는 우리 사회 빚의 현실과 대안에 대해 고민한다. 
 


부채사회
한 가구당 7000만원이 넘는 가계 부채라지만 빚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태도는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만화 작가인 허안나씨는 대학 1학년 2학기부터 받았던 학자금 대출을 졸업과 동시에 갚지 않으면 월급에서 원천징수하겠다는 문자를 받고서야 비로소 그 무게를 실감했다. 그리고 '만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갚기 위해 직장을 10여년간 다녀야 했다. 

최춘근-박금순씨 부부는 빚 권하는 사회의 천연기념물 같은 부부이다. '저축 장려 시대'를 살아온 부부는 융자 없이 당시로는 1억 2천만원 짜리 집을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런데 이제 빚없이 살아온 삶에 대해 부부와 자녀의 생각은 '다시 태어나도 빚을 지지 않겠다'부터, '그 돈이었으면 사업적으로 투자를 해서 더 큰 이익을 보았을 텐데', 그리고 '내 돈 대신 할부로 차를 사는게 편하다'까지, '동상이몽'이다.   

그런가 하면 택시 운전 25년차의 김강수 씨에게 '빚'이란 어쩌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그의 재산 목록 1호 택시와 집을 가지게 해준 고마운 수단이다. 2700만원을 대출 받아 개인 택시를 사고, 그 빚을 3년만에 갚았고, 15년거치 주택 대출은 아직도 한 달에 70만원씩 갚고 있지만, 그 빚이 없었다면 택시를 사고, 집을 가지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한 술 더 뜨는 경우도 있다. 부동산업자 박정수 씨는 빚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케이스다. 수원에만 150채, 전국적으로는 300여 채, 거기에 아내 소유의 300채를 더하면 600여 채의 아파트를 소유한 그는 자기 돈 18억에 1300억의 빚을 사업의 동력으로 활용한 케이스다. 이렇게 박정수 씨처럼 '사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집을 가지기 위해 월세을 적극활용하는 케이스도 있고, 편의점을 하는 이우성 씨처럼 이율을 활용하기 위해 부채 상환을 미뤄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깨를 짖누르는 무거운 짐,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 혹은 삶을 업그레이드 시킬 지렛대, 심지어 사업 수완이 되는 빚, 저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빚을 지는 것이 이상해 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빚의 역습
그런데 빚은 참 묘하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는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경매에 돈을거는데 묘하게도 현금과 카드의 금액이 차이가 5~10% 정도 차이가 났다. 3개월 할부를 염두에 두었다고도 하지만, 사람들은 '외상'일 경우 더 쉽게 돈을 쓰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현금으론 까다롭던 사람들이 분명 자신의 돈이 지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카드 등 빚의 경우 한결 조건에 있어 너그러워진다. 그리고 물건을 파는 회사들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요즘 트렌드가 되는 정말 무이자가 아니라, 할부를 할 것을 감안하여 이미 애초의 가격이 높게 책정된다는 '무이자 할부', 하지만 사람들은 그 문구에 쉽게 지갑을 연다. 

이렇게 빚에 너그러운 사람들, 심지어 사람들의 경우 빚을 지고도 무감각하다. 지금 당신의 빚이 얼마입니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사거나 사업을 하기 위해 은행권 등에서 빌린 돈의 금액을 댄다. 하지만 할부로 산 핸드폰, 집안을 온통 채운 가전제품, 마이너스 통장, 심지어 아직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은 이번 달 카드 요금에는 무감하다. 자동차는 어떻고. 이렇게 사람들은 빚을 지고서도 빚에 무감해져 간다. 

 

 

그럼에도 무던해 질 수 없는 것이 그 중에서도 주택 대출 등이다. 무리해서라도 빚을 내서 집을 사놓아야 한다는 의식은 1936년 이래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부동산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1969 강남 개발 시작, 1977년 반포 2단지, 압구정 현대 아파트로 부터, 여의도 목화 아파트 분양은 45;1의 경쟁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첨만 되면 웃돈이 얹어지고 순식간에 3배로 뛰는, 심지어 한 해 40%가 오르기도 했다는  '신기루'같은 시절에 그 누가 그 한 '몫'에 뛰어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IMF때 까지였다.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동산 신기루에 뛰어든 가족의 허망한 역사를 마민지 감독은  <버블 패밀리>를 통해 실감나게 설명한다.  50%의 융자를 받아 집 장사를 했던 마감독의 어머니, 아버지는 IMF 후 금리 인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땅을 사서 집을 지어 건물세를 받자는 부모님, 여전히 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신다. 

IMF를 지나 2008년 부동산 불패 신화는 다시 한번 이자 폭탄을 맞고 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하우스 푸어', 일산에서 6천만원으로 분양을 받아 그걸 다시 1억 4천에 팔고 하는 식으로 집으로 돈을 좀 만졌던 이동훈 씨, 2008년 당시 10억을 빌려 13억 짜리 집을 샀다. 하지만 부동산 시세가 폭락하여 10억에 그 집을 팔아야만 했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부동산 버블'이 낳은 결과다. 

이런 '부동산 버블'이 가져온 파산은 우리나라만의 사례가 아니다. KDI 박정호 교수에 따르면 도쿄에는 한때 평당 100억 짜리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을 넘어 하와이와 미국으로 까지 번져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며 그럴 듯한 녹지를 사들이는 식의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하지만 91년에서 2005년까지 무려 15년간의 경기 하락 과정에서 오피스는 40%, 주택은 반토막이 되었고, 일본인들이 많이 사들였다는 미시시피 주 경우 카타리나가 강타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역사에서 부동산 버블과 관련하여 전세계적으로 충격적 교훈의 사례가 된 건 뭐니뭐니 해도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이다. 집값의 1%만 내도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구조, 2000년대 초저금리 상황에서 넘치는 유동 자산이 신용도가 취약한 서브 프라임 계층에게 까지 대출이 됐다.  이 대출을 받아 대규모로 집에 투자를 하며 생겨난 부동산 버블, 결국 2004년 이자율이 오르자 결국 원금과 이자 등 집값을 갚지 못해 파산에 이르른다. 그 '파산의 도미노'는 158년 전통의 리먼 브라더스를 비롯한 금융권으로 이어지고, 미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까지 흔들었다. 

고스란히 채무자에게 짊어지는 부담, 하지만 문제는 채무자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채무 불이행은  그 지역의 소비 생활을 위축시키고, 이는 주변 산업 도시의 불황으로 이어지면 부메랑처럼 나라전체에 번져나간다. 즉 부채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로 10여 년 캘리포니아 스톡튼 거리에는 여전히 방치된 집들이 남아있고, 상권은 회복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사태를 겪은 미국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미국 전체의 경기는 좋아졌을 지 몰라도 개인의 고통은 진행중이라고. 

 

 

미래의 빚
그렇다면 빚으로 인한 개인의 고통, 그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지난 10월 27일 서울 청계천에서는 쥬빌리 은행의 10년 이상된 연체 채권 소각 행사가 이루어 졌다. 3개월이 지난 부실 채권은 그 원금의 10%가 안되는 가격으로 추심업체로 넘어가고 그때부터 빚을 갚지 못하는 개인의 지옥같은 고통은 시작된다. 바로 이런 채권, 그 중에서도 10년 이상된 죽은 빚을 탕감해주는 행사. 하지만 빚의 탕감에는 도덕적 논의가 따른다. 

유엔에서는 개도국 등에서 빚을 갚지 못해 노예와 같은 삶을 누리는 일회용 사람들이 있다고 선포했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파산'이다. 1962년 법적으로 파산이 명문화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첫 번째 파산자가 등장한 건 IMF 때인 1997년에 이르러서 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파산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법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도덕적 해이, 하지만 빚을 졌어도 아이를 교육시키고 멀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자는 것이 '파산'의 취지이다.

빚을 진 상태와 빚으로 부터 자유로운 심리 상태 사이에 인지적 능력조차 차이가 나는 부담, 다큐는 여기서 역설적으로 빚은 그렇다면 채무자만의 책임인가를 반문한다. 즉, 현재의 신용 평가 제도는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3년전 처음 하는 사업이라 은행권 대출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사업을 시작한 사장님, 다행히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카드 연체가 없는데도 2년 8개월동안 겨우 신용 등급이 한 등급만이 올랐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기존의 신용 평가 방식, 지금까지 잘 갚았으니 다음에도 잘 갚을 것이라는 전통적 방식은 주부나 사회 초년생, 신생업체 등 정작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각 지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손길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미국에서 13년전 은퇴한 간판 디자이너 채스 페리씨, 아들과 함께 다시 한번 사업에 도전하고자 했지만 그 역시 신생업체라는 조건이 은행 대출의 발목을 잡았다. 채스 페리 씨에게 희망을 제시한 건 대안 금융이었다. 기존의 은행권이 카드 사용 빈도 수 등 구식 알고리즘에 근거하여 신용 평가를 한 것과 달리, SNS를 통한 홍보 등 사업 활동 내용을 '핀테크(금융과 IT의 융합을 통한 금융서비스 및 산업의 변화)'에 근건하여 새롭게 평가받아 사업 자금을 대출 받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어떨까? 미국의 클라크슨 대학교에는 리사 프로그램이 있다. 졸업 후 직장을 찾는 시간으로 6개월 동안 학자금 상환을 유예한 후 취업 후 세금 신고서를 제출하면 그때부터 10년간 갚는 방식이다. 그런데 취업한 학생들은 모두 소득의 6.2%를 갚는다. 즉, 많이 버는 학생은 많이, 적게 버는 학생은 적게, 학자금 상환이지만 그 자체가 졸업생 기부 활동이 되며, 빚에서 새로운 소득이 창출되어, 장학금이 만들어 지는 제도이다. 

이런 방식을 우리의 채무 관계에 적응해 보면 어떨까? 금리나 높건 낮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지금의 방식에 채권자가 그 부담을 나누어 져 금리에 따라 채무 비율이 달라진다면? 모두가 100%는 아니지만 조금 더 만족할 수 있는 방법에 다가가는 건 아닐까? 가계 부채의 부담이 사회적, 국가적 부담이 되고 있는 시대, 과연 그 부담은 온전한 것인가? 신용의 사각 지대에 놓은 사람들을  2금융, 사금융으로 내몰고 있는 제도로 부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신용 평가 제도는 무엇일까? 다큐는 모두가 만족하는 빚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9. 1. 4. 05:36
|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