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길거리'를 검색하면 어떤 것들이 뜰까? 영어(street)나 일어(‘通り)로 검색하면 일반적인 길거리 사진들이 뜬다. 하지만 한국어로 '길거리'를 검색하면, '맙소사!', 거리의 풍경 대신 짧은 치마나 반바지, 스키니를 입은 여성들의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촬영한 '몰카'사진들이 대거 뜬다( 10, 16일 여성신문 보도)


이는 대한민국이 몰카의 왕국임을 증명한다고 '여성신문'은 결론내린다. 이에 덧붙여, 더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관음적 행위'의 결과물인 '몰카'에 대해 대다수의 남성들이 범죄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우스개처럼 혹은 마치 훈장인 양 여성을 훔쳐보는 것을 관행화시킨다. 그래서 수영 선수로 부터 의대생, 의사, 경찰 등 평범한 사람들이 몰카를 찍은 혐의로 법적인 수사 대상이 된다. 



관음이 일상화된 대한민국 
이러한 우리 사회의 '관행적'인 관음적 범죄를 통해 드러난 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공간 '길거리'가 사실은 여성들에게는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요, 심지어 그녀들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범법 장소'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0월 30일 방영된 <sbs스페셜-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는 바로 여성들이 안심할 수 없는 '일상의 공간'에 시선을 돌린다. 

여성 중 70%가 넘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잠재적으로 범죄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왜? 남성과는 다른 생물학적 조건 때문에? 혹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받은 교육때문에. 하지만 다큐는 바로 그 여성들의 공포의 근원은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공간의 공포로 부터 비롯된 바 크다고 주장한다.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치안의 질서가 안정되어 있다는 대한민국, 그러나 그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실존은 드러난 치안율의 수치와 다르다. 실제 강력 범죄 희생자 중 84%가 여성,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살해되는 몇몇 나라에 속하는 대한민국,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안심하고 '거리'를 나다닐 수 없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공포가 된 일상적 공간 
이런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다큐는 실제 사례로 접근한다. 바쁜 일과에 틈을 내어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 여성, 그러나 그 여성의 속내는 복잡하다.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잠시 찾아간 화장실, 거기서 만난 취객은 다짜고짜 그녀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동료들의 제지로 더 이상 폭력은 없었다지만, 그녀에게 그 남성의 억센 손길과, 폭력적인 태도와 눈빛은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다. 가장 대중적인 장소인 화장실, 하지만 여성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곳은 여기 뿐만이 아니다. 

이 글의 처음에서 등장한 길거리는 '몰카'를 넘어 여성들에게는 언제라도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다. 해가 진 거리에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으슥한 골목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같은 장소를 향해 가는 오빠와 누이 동생, 하지만 그들의 행보는 다르다. 지름길이라는 이유로 일직선상의 어두운 골목을 덤덤하게 향하는 오빠와 달리, 여동생은 큰 길을 에돌라 약속 장소로 온다. 외향적인 성격임에도 늦은 밤 귀가가 두려워 일찍일찍 집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여동생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거리에 식구들의 마중을 받는다. 

거리만이 아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동수단이 된 지하철, 그리고 건물 내의 이동수단이 엘리베이터에서도 늘 여성은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홀로 탄 엘리베이터, 그리고 사람으로 붐비는 지하철에서 늘 여성은 긴장하고 두려움에 떤다. 

그렇다고 집이라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홑가구가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 홀로 사는 여성들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너무나도 많다. 집앞에 몰래 달아놓은 몰카를 통해 비밀 번호를 알아내, 늦은 밤 도어락을 여는 검은 손, 그리고 혹시나 거리에서 부터 쫓아온 괴한이 혹시라도 집까지 쫓아올까 집에 들어서도 한 동안 불을 켜지 못하는 안슬픈 상황이 우리 여성들의 현실이다. 



이렇게 일상의 공포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공포심은 실제 공포 영화를 볼 때보다도 더 극심했다. 더욱이 언젠가 단 한번이라도 겪은데서 잠재되어 있는 트라우마는 언제나 비슷한 상황이면 공포를 되살려 낸다. 

여성학자들은 인류 역사의 지난 2000여년간을 남성 지배의 역사라 규정한다.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에서 약자로서, 을로써 언제나 그 존재를 보장받기 힘들었던, 그래서 자존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 그나마 당당해졌던 여성. 거기에 한국 사회가 가진 전근대성은 그런 남성 중심 사회의 퇴행적 모습을 강화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관행화되었던 '성적인 관례'들이 앞다투어 고발되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들은 여전히 육체적 약자로서, 그런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 분노를 투영하거나,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키는 남성들에 의해 여전히 삶의 공간 곳곳에서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을 다큐는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여성들의 존재론적 공포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 
by meditator 2016. 10. 31. 05:48

누군가는 그럴 지도 모른다. 아직도 해? 라고. 2009년에 시작해 벌써 햇수로 8년 째,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금요일 밤, 아니 금요일이라고도 말하기 민망한 밤 12시하고도 한참 넘은 30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 유스케는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켜왔다. 마치 그 예전에는 <수요 예술 무대>를 비롯하여 '음악'이 목적이었던 무대들이 늦은 밤이라도 꾸준히 자리를 지켜왔었다. 


하지만 마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홍대 앞 인디 뮤지션들의 무대가 사라지듯, '시청률'이라는 방송의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은 '음악'만이 목적이었던 프로그램들을 하나 둘씩 잠식하고 이젠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물론 '음악' 프로그램들이 없는 건 아니다. <뮤직 뱅크> 등도 건재하고, <복면 가왕>처럼 새롭게 인기를 끈느 프로그램들도 눈에 띤다. 하지만 아이돌도, 아이돌이 아닌 가수들이 온전히 자신의 노래만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프로그램은 이제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이 생존해 있다. 이제 '노래'도 예능이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마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상승한 임대로에도 불구하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홍대 앞 공연장과도 같다. 



10년 생존을 위한 야심찬 포석 
애국가 시청률보다도 낮은 1,2%의 시청률로 안간힘을 쓰던 <유희열의 스케치북>, 처음엔 프로그램의 '품격'을 위해 버티던 '아이돌' 등에게 무대를 공개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건 프로그램의 성격을 하향평준화시키며, '유스케'만의 고집에 애착을 가지던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아이돌 위주의 프로그램인 <뮤직 뱅크>등이 낮은 시청률을 고집하듯, 생각 외로 그들의 합류가 <유희열의 스케치북> 시청률엔 도움이 안됐다. 이제 노래도 '복면'을 쓰거나, 남의 노래를 새롭게 편곡하거나 해야 볼거리가 되는 세상에, 일찌기 그런 시도를 앞서서 했던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늦은 밤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위기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이제 10주년이라는 원대한 꿈을 향한 새로운 포석을 둔다. 그 방식은 '음악'이 예능이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원론적'인 방식의 접근이다. 바로 '월간 유스케'의 형식을 띤 한 가수의 온전한 콘서트로 꾸며진 한 시간이다. 



월간 유스케, 익숙한 용어의 조합이다. 그렇다. 일찌기 월간 윤종신이 있었다. 2010년 4월부터 시작하여 2016년 10월 50호가 된 윤종신의 디지털 싱글 앨범이다. 이는 기존의 앨범 단위로 신곡을 발표하는 것이 뉴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그 의미가 퇴화해 가자,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와 소통하고자 아티스트 윤종신이 마련한 플랫폼이다. 과연 예능인으로서 분주한 윤종신이 가능할까?라는 우려를 불식하고 이제 햇수로 6년째, 50에 이르렀다. 

이렇듯 월간 윤종신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대한 유연한 적응이듯이, 10월 29일 첫 선을 보인 <월간 유스케> 역시 변화하는 방송 환경에서의 새로운 모색이다. 우선 그간 애매했던 불금의 밤 대신, 조금 더 여유로운 토요일 밤으로 시간대를 옮겼다. 그리고 매달 한번씩 한 아티스트가 온전히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특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물론 그간에도 신곡을 낸 뮤지션이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음악을 서너곡씩 불러주는 코너가 있었다. <월간 유스케>는 그런 코너의 확장판이다. 최근 내노라하는 가창력있는 가수들이 설 무대라는게 듀엣으로 부르거나, 타인의 곡을 재해석해서 부르거나, 일반인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상황에서, 월간 유스케는 오히려 그런 흐름에 역행하는 가장 본원적인 음악 프로그램으로서의 선택을 한다. 



창간호, 그 이름값에 걸맞았던 박효신 
그리고 그 첫 무대는, 야심찬 포석답게 최근 7집 앨범 <I am a dreamer>로 앨범 차트를 석권한 박효신이다. 무엇보다 박효신의 무대는 방송 출연이 흔하지 않은 그의 7년만의 방송 출연이라는 점, 거기에 199년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통해 방송을 데뷔했던 그의 기념비적인 복귀라는 점에서 '월간 유스케"의 창간호에 걸맞는 무대가 되었다.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밤을 뜨겁게 달군 그의 콘서트는 지난 야생화 앨범에 이어 다시 그와 작업을 한 정재일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그의 새 앨범의 '꿈',  '홈(home)' 등의 신곡과 이전 앨범의 야생화 그리고 군대 가기전 앨범의 히트곡들이 메들리로 불리워졌다. 이날 박효신의 방송은 이미 그의 콘서트가 거의 10분만에 매진되듯, 5만 여명의 신청자로 화제가 되었고, 바뀐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연만으로 이름이 검색어에 오르는 등 그간 아쉬웠던 유스케의 화제성을 단번에 회복시켰다. 음원이 아니고서는 그의 음악을 듣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그의 달라진 음색에 갑론을박하며 그의 복귀를 반겼고, 덕분에 창간호, 거기에 월간 유스케라는 야심찬 포석이 헛된 시도가 아니었음을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증명했다. 그저 숙제는 이런 박효신의 화제성을 이을 다음 호, 그리고 특집이 아닌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의 입지를 예능으로서의 음악이 융성한 시대에 마련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0. 30. 03:36

<썰전>에서 전화로 인터뷰한 이재명 시장의 말처럼 전국민이 수치심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시간까지는 참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무능과 부패의 주체가 국민들이 권력을 이양한 대통령이 아니라, 그 배후의 듯도보도 못한 정체불명의 한 개인과 어처구니없는 개인적 친분의 측근들이라니, 연일 그들의 정체와 그 정체를 둘러싼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연의 실마리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보도를 접한 시청자들은 '어이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나비 효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의 근원은 깊다. 범서방파가 구속이 되고 그 수사 과정에서 정운호 '네이처 리퍼블릭' 정운호 대표의 100억대 도박 사건이 터졌다. 한 개인의 도박 사건은 다시 그의 롯데 면세점 선정 로비 의혹을 통해 롯데 그룹으로 확대되고, 롯데 비자금 수사의 불을 당긴다. 또한 동업자 김모씨의 폭로로 홍만표 변호사가 전관 예우로 막대한 이익을 취득한 것이 드러나고 거기서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의 연결 고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조선일보는 넥슨의 뇌물을 받은 진경준 게이트에 더해 우병우 부동산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우병우 게이트는 윤곽이 커져간다. 우병우가 문제의 중심이었던 사건, 하지만 우병우를 비호하기 위해 청와대가 이의 문제 제기를 한 조선일보를 '부패 기득권 세력'으로 비난하고, 이에 조선일보는 k스포츠와 미르 재단에 청와대가 압력을 넣어 기업들로부터 상납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다시 대우조선 해양 접대로 송희영 주필이 사퇴하는 등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겨레가 조선일보가 제기한 k스포츠와 미르 재단의 중심에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며 드디어 최순실이 사건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와 맞물려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이대 부정 입학 및 학사 처리 과정에서의 부당한 대우 등을 기사화시키고 이에 이대 학생 및 교수들의 반발로 이어지며 이른바 이 정권의 실세 최순실이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치 나비의 날개짓이 토네이도를 일으키듯 한 기업인의 도박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국정을 농단한 배후 인물의 실체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검찰의 수사와 그에 맞물리는 언론의 보도 사이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사건과 사실, 그리고 가쉽이 뒤엉킨 형태를 지닌다. '도박'이라는 파렴치한 사건은 집권 세력의 도덕적 불감증내지는 부도덕으로 이어졌고, 한 여학생의 부정 입학과 더 부정한 학사 행위라는 개인적 파행은 결국 k스포츠와 미르 재단이라는 국정 농단의 사태와 동전의 앞뒤면처럼 밀착된다. 사람들은 가쉽처럼 사건을 들여다 보다, 결국 정권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고, 언론의 가쉽성 폭로 기사는 결국 정권의 목줄을 죄는 단죄성 결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 손석희라는 인물을 전국민적 영웅이라 해도 반발심이 들지 않게끔 지난 월요일 이후 <jtbc 뉴스룸>을 통해 그간 구름잡듯이 그려져 왔던 최순실이란 인물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 지고 있다. 이에 그간 눈감고 귀막으며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던 방송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앞다투어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사안들을 너도 나도 폭로하기에 나선다. 



폭로와 가쉽의 프레임 속에서 
그도 그럴 것이 최순실의 가장 최측근이라 하여 각종 실권을 행사했던 고영태의 전직은 의심스러우며, 그와 최순실, 그리고 '황태자'라는 전근대적 별칭으로 불리는 차순택이라는 인물이 만나게 된 과정은 너무도 '사적'이니 화수분처럼 파도파도 폭로할 꺼리가 넘치니 말이다. 독일로 달려가 최순실의 행적을 쫓는 jtbc의 특종을 뒤따라가는 종편 등의 보도 프로그램은 그런 빼앗긴 특종 대신 가장 손쉬운 '신상 털기'식의 가쉽성 보도로 앞다투어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래서 이제 그간 입을 꾹 다물었던 kbs가 정유라와 관련된 사안들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종편들은 고영태와 관련된 과거 사실과 그에 관련된 연예인들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사람들은 고영태의 과거 사진 속 연예인의 실명을 들먹이고, 고영태가 관여한 연예인 야구단에 함께한 연예인들을 손가락질 한다. 또한 또 다른 실세로 등장하는 최순실 언니의 딸 장시호(장유진)이 과거 친분이 있다는 연예인들의 이니셜로 퍼즐 게임을 하도록 유도한다. 

대통령의 뒤에서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을 비롯한 그 측근들에 대한 이렇게 흘러넘치는 가쉽성 기사는 국민들을 '수치'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쉽게 그들을 '조롱'하게 된다. '무당'이나, '호빠'라는 단어로 폄하하며 비웃는 것으로 '분노'의 온도를 낮추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다 보니, 김주하 앵커처럼 그런 사람들에게 당한 대통령이 불쌍하다는 식의 동정론으로 유도되기도 한다. '미친 년'에게 당한 '정신 나간 사람' 수준으로 사건의 프레임이 변화된다. '조롱'은 쉽지만, '분노'에는 '실천'이 따른다. 그들을 비웃고 조롱하며 또 다른 가쉽이 없나 찾아 헤매는 사이 분노의 열기는 어느새 연예인 가쉽 뒤지던 그 습관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난 여름 우병우 사건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사건이 무엇이었나를 최신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들보다 미디어 영향력이 컸던 연예인은 술집 여성의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한 남성 연예인이었다. 검찰 수사도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연예인과 달리, 검찰 조사에는 응하지 않으면서 여러 언론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던 성폭행 당사자라는 여성과 그의 친척이라던 사실상 조폭 집단의 확인 되지 않은 사실을 쏟아부었던 것이 바로 지금 최순실과 그 측근들의 가쉽을 '정의로운' 양 쏟아내고 있는 언론들이라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앞서 기억해야 사실도 있다.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대통령의 7시간을 비롯하여, 해경의 수상한 행동, 그리고 사건을 덮고 무마하려는 시도 대신, 엉뚱하게도 유병언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의 이상한 종교와 행태, 그리고 그의 추적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도 바로 지금의 최순실과 그 측근들의 '사실'들을 쏟아부었던 언론이라는 것이다. 



지난 여름과 2014년 세월호 사건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그 하나는 사건을 가쉽화하고, 그것을 대중들이 가장 만만한 먹잇감으로 여기는 연예인으로 귀결시킨다는 것이다. 최순실이라는 실체가 드러나기 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얼마나 '고소'를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 연예인들이 대중들의 도덕 재판에 끌려나왔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손쉽게 호기심에 그걸 클릭하고 욕을 하는 동안 얼마나 중요한 사건들이 묻혀졌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중 기혼의 한 연예인은 실제 가정사의 아픔까지 겪게 되었는데, 과연 그게 그 개인의 부도덕한 행위 책임만일까? 그저 한 개인의 사적 문제, 혹은 최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유명인의 억울한 무고 사건, 그게 아니라도 검찰 재판 결과까지 기다려도 될 사건을 앞서가며 여론 재판으로 끌어들이며 신물이 나오도록 씹도록 만들었듯, 이제 또 다시 최순실과 관련되어 연예인 이름이 오르내리는 프레임의 변화를 그래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유병언 사건과 최순실 사건의 공통점은 똑같이 대중들이 이질적으로 여기는 '종교'를 들먹이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등을 믿는 국민이 다수인 현실에서 '사이비'라는 말은 곧 '적대감'을 자연스레 발산시키고, 동시에 우리 밖의 적이라는 감정을 부추긴다. 또한 이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저 미워하고 밀어내야 할 대상으로 상대방을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사이비 교주, 혹은 무당이란 프레임은 사실 그가 진짜 해치워 버린 정권 차원의 비리를 뒤덮어 버리고, 그저 '나쁜 사람'이란 대상으로 단순화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좀 더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대신, 돌 몇 개 던지는 것으로 침 뱉어 버리는 것으로 분노를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몇 달동안 질리고 질리게 유병언을 떠들던 그 시절의 종편은 실컷 떠들고 나더니, '지겹다'라는 프레임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기에 가쉽에 혹해 쉬이 지겨워 지지 말고 사건의 본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형광등이 백개 켠 아우라'라며 떠들었던 조선일보가 이제 가장 우국의 선봉대가 되어있는 상황, 엊그제만 해도 용비어천가 부르짖던 여타 종편과 공중파가 앞다투어 '사건'을 '가쉽성'으로 끌고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여당이 한 통속이듯, 그들도 한 통속이었다는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또 다시 그들이 제시하는 프레임에 시선을 빼앗긴 채 이 정국의 주도권을 넘겨, 그들이 원하는 다음에 끌려들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0. 28. 18:08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별 일이 아닐 수 없덨다던 최수아(김하늘 분)는 자신의 일상을 흐트러트린 서도우(이상윤 분)와 이별을 한다.  3무 사이라, 그리고 2무 사이라 애써 자신들을 변명하며 서로를 놓지 않으려던 했던 두 사람이지만, 자신에게 몰려온 개인사들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를 핑계대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불륜'을 핑계대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 11회 제주의 공항에서 결국 다시 조우하고 만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드라마는 '불륜'을 정당화하기 위해 '운명'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의 운명적 재회를 통해 <공항 가는 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처럼 보이는 '재회'의 필연이 아닐까?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지난 10월 10일에서 13일까지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3부작은 대한민국 부부의 현실을 들여다 보고자 했다. 전통과 개인의 중간 지점에 놓인 한국의 결혼, 그래도 현재 한국의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한 남녀의 결합이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로서 결혼은 아이의 출산과 함께 그 '사랑'의 양상이 급격하게 변화해 간다. 즉 대한민국 부부는 사랑하는 개인의 결합을 넘어 남편은 돈을 벌어다주고, 아내는 아이를 키우는 자녀 양육의 경제적 단위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된 부부의 성격은 아이가 다 성장해서 부모의 품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대한민국에서 부부로서 살아가는 만족도는 현격하게 떨어진다. 

드라마는 바로 그 지점, 자녀 양육의 경제적 단위로서 부부의 현실에서 시작된다. 서도우-김혜원 부부, 두 사람은 비록 서도우의 친자는 아니지만 '애니'라는 아이를 매개로 시작된 부부이자, 애니를 아껴주는 할머니, 형과 같은 민석(손종학 분)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이룬다. 민석이 친형은 아니지만, 도우가 돌아가신 어머니만큼 믿는 형이듯이, 애니가 친자는 아니지만 도우도, 애니도 가장 애틋한 부녀지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짜못지 않던 유사 가족은 친모 혜원의 도발로 인한 애니의 죽음으로 파괴되어간다. 애니가 죽고, 애니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다 자신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결국 애니에 대한 아내의 배신을 알고 분노하며, 결별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수아네 역시 마찬가지다. 애니와 룸메이트였던 수아의 딸 효은(김환희 분)은 애니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받고, 그런 딸의 고통을 공감한 수아는 무작정 말레이시아에서 딸을 데리고 귀국한다. 하지만 그런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박진석(신성록 분). 국제화 시대의 경쟁력을 내세우던 현실주의자인 그는 아내의 무모한 결정에 분노하고 아내의 직업으로 인한 육아의 공백을 아내와 딸을 시어머니 집으로 강제 입주시키는 것으로 분풀이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 홀로 남겨지는 딸을 견디지 못한 수아는 결국 사표를 쓰고,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국제학교' 행이라 거짓말을 하고 딸과 함께 제주도로 향한다. 

양육의 경제적 단위로서의 부부, 그 이면엔?
이렇게 드라마는 '자녀 양육 단위'로서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부부로서의 그 기반을 파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가 연결 고리가 되지 않을 때 두 부부를 들여다 본다. 

애니의 죽음이후 급격하게 파괴되어져가는 서도우 부부, 하지만 그건 '애니'라는 의붓딸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딸 애니를 미혼모로 자신이 어렵게 키워왔던 딸이라 속인 혜원은 딸을 이용하여 서도우와 결혼해야 할 만큼, 서도우, 그리고 재벌가와 막역한 인간문화재 그의 어머니 고은희 여사(예수정 분)의 그늘이 필요했다. 결국 애니와 고은희 여사의 죽음 이후 벌어진 사이는 이 부부를 부부로 포장해 왔던 포장지가 사라진 부부로서의 민낯을 드러낸다. 

수아와 진석의 부부도 다르지 않다. 딸 효은의 육아로 인해 번번이 충돌하는 부부, 아내를 자네라 부르며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남편 진석은 아내의 의사는 커녕, 아내의 진심어린 말 한 마디조차 짜증내 한다. 아내와 딸이 없는 집에서 홀로 자유로워하는 남편, 그리고 오래전 연인이었던 아내의 친구 송미진(최여진 분)에게 거침없이 도발하는 남편, 무엇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양육과 아이의 생각을 먼저인 양육 태도를 상징으로 대립되는 두 사람의 가치관은 자녀 양육의 단위로서 부부의 삶조차 충실해 질 수 없게 된다. 

결국 드라마는 '자녀'라는 대한민국 부부의 허울을 벗겨버리고 난 자리에 이질적인 두 사람으로 남겨진 두 부부의 민낯을 펼쳐보인다. 불륜이 문제가 되었을 때, 과감히 둘의 관계에 공백을 제시할 만큼, 최수아나 서도우에게 있어, 불륜이 가정 파괴의 주범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파괴된 부부'가 있었음을 드라마는 설득하고자 한다. 



그에 반해 아내가 외면한 애니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수아에게 마음이 열렸던 도우,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장 외롭고 힘들었을 때 수아를 품어주었던 도우처럼 서로의 '정서'만으로 무작정 서로에게 끌렸던 두 사람이 이제 제주에서 다시 조우하게 함으로써, <공항 가는 길>은 그저 불륜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한 교감으로서 불륜을 생각하고자 한다. 

물론, 아직도 박진석의 아내이고, 김혜원의 남편인 두 사람은 여전히 결혼이란 제도 속에서 놓여있다. 그러기에 그래도 불륜은 불륜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저 막연한 끌림으로 혼돈에 빠졌던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삶을 '느리게', '새롭게' 시작하는 제주에서의 만남은 삶의 방향을 정한 이후의 또 다른 각도의 불륜을 전개하게 한다. 과연 삶의 태도에서조차 결단을 내린 두 사람은 이제 다시 운명적으로 찾아온 이 필연의 만남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지. 이런 수아와 도우의 이후의 행보를 통해, 드라마는 '자녀'라는 허울에 씌여 사는 부부들을 거울 앞으로 내몬다. 

by meditator 2016. 10. 27. 18:41

10월 23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평양까지 이만원>은 어쩐지 반갑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산다는 정체불명의 청년, 그 청년의 숨겨진 사연을 풀어가는 단막극은 일찌기 <베스트 셀러 극장> 혹은 <tv문학관>을 통해 소개되었던 익숙한 플롯의 작품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래전의 단편 소설을 읽은 듯 '고전적인 소재와 주제 의식'을 깔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시대와 엇물리지 않은 구름잡는 이야기같을 수도 있겠지만, 출생의 비밀과 그로 인한 청춘의 고뇌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음을 고통받게 하는 가장 '본원적'인 주제 중 하나이니, <평양까지 이만원>은 서가에서 고전을 꺼내 통독하는 느낌으로 오래된 듯하지만, 그래서 신선한 감상으로 다가온다. 



구부러진 못, 영정 
대리 운전을 하는 한 청년이 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규칙을 위반한 다른 대리운전 기사에게는 씨알도 안먹히게 단호하던 그가, 사장조차도 의심스럽다는 서울 한복판의 산동네 길에서 만난 아줌마가 꽃을 한 송이도 못팔았다고 하자 선뜻 지갑을 연다. 화장실은 수리중이고, 방안 전등은 댕강 끊어졌는데 기꺼이 그 불편함을 감수한다. 도대체 왜?

그의 모호한 정체가 풀려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그를 찾아온 신부님으로부터이다. 그를 동생처럼 여기는 차준영 신부(김영재 분), 그와 함께 술을 먹으며 사제를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간 그가 그렇다고 세속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며 놀린다. 하지만 그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한 듯 연신 걸려온 전화에 당황한 듯 자리를 뜬 신부의 뒤로 나타난 소원(미람 분)과 뜻하지 않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부제직까지 수여받은 후 뛰쳐나온 박영정(한주완 분), 그리고 그의 주변에 느닷없이 등장한 여성 소원과, 그녀로 인해 가장 그와 막역하던 관계에서 불편한 긴장이 팽배한 관계로 변한 차신부의 현실적 갈등은 이후 드러날 박영정의 환속의 사연과 맞물린다. 그가 본의 아니게 얽혀든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사랑의 굴레는 그로 하여금 환속을 풀어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 계기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구부러진 못'이다. 박혀있다 뽑혀나온 못, 그 형상은 흡사 사제의 길을 가다 이제 하루하루 대리운전을 하며 살아가는 영정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그렇게 속에 머무르지만 정처없는 영정처럼 구부러져 쓸모가 없어진 못을 그가 만난 소원은 기꺼이 거둔다. 그것이 악마를 쫓아주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부적이라며. 

하지만 소원이 말한 그 구부러진 못의 부적의 주문은 이후 차신부의 입을 통해 재연되고, 술자리에서 그의 토로에 따르면 그건 그가 외면했던 어머니의 미신이었던 것으로 인연의 끈을 풀어간다. 그는 외면하지만 소원과 차준영을 통해 그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 보게 되는데, 거기엔 지금 그가 얽힌 관계처럼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과거의 악연이 있다. 그리고 그 '악연'은 그로 하여금 사제직을 떨치고,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이라 외면하는 현실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리고 용서 
가장 간절한 순간 다시 성당으로 돌아가 기도를 하게 되는 영정, 그로 인해 그는 비로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도망치려 한 그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어깃장을 놓으려 했지만 차신부와 소원의 진심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영정, 그들을 통해 그는 비로소 '사랑'을 용서하게 된다. 차신부와 소원의, 그리고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하지만 아버지였기에 자신을 신부직에서 토해놓았던 또 한 분의 신부님과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고 뒤늦게 펼쳐본 아버지로써의 사랑을.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다. 구부러진 못 그 전설의 시작을. 마치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사랑했다는 아버지의 고백처럼, 그 사랑은 '구부러진 못'을 행복의 메신저로 변화시켜, 자신을 구부러진 못으로 내던져버린 영정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 미신과도 같았던 전설은 그가 차신부와 소원, 두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으로,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한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그가 그럴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겨진 편지에 구부러진 못을 그려놓았었다. 결국 우리에게 '용서'라는 힘을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평양까지 이만원이란 제목답게 드라마의 마지막은 처음과는 다른 밝은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은 영정의 모습을 마무리된다. <평양에서 이만원>은 그 흔한 '사랑'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장 고전적인 주제이지만, 2016년에는 가장 생경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 생경하고도 고전적인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 현실에 살지만 현실에서 벗어나있는 '신부'라는 소명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드라마는 종교직으로서의 신부 이전에 '인간'의 사랑을 논한다. 그리고 로만 칼라를 벗어버린 차신부와, 영정을 잉태하였음에도 신부로서의 소명을 성실히 수행한 존경받은 신부로 남은 그의 아버지를 통해, 용서와 사랑의 한계를 묻는다. 그리고 출생으로 인해 소명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 영정의 방황은 성과 속의 포용을 반문한다.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에 생뚱맞은 하지만 언제나 영원불멸한 진리인 '사랑'과 '용서'를 설득한다. 


by meditator 2016. 10. 24. 05:55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란 속담이 있다. 

일찌기 유교 문화권이었던 우리 나라에서는 죽은 조상은 확실히 모셨지만,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한 존중이라기 보다는, 그 '죽은 조상의 음덕'으로 현실 세계를 잘 살게 해달라는 현세주의적 욕망이 앞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속담은 바로 그런 우리 문화의 현실적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주고 있다. 

첫 회 다짜고짜 여주인공에게 '암선고'를 내렸던 <판타스틱> 16부의 대장정을 마치며, 그래도 여전히 여주인공을 살려놓는다. 개똥밭은 커녕, 사랑도, 일도, 삶도 '행복'에 겨워. 하지만 그저 '살려놓았다'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라고 한다면 <판타스틱>이란 드라마에 대한 '오독'이 될 것이다. 남녀 주인공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때론 그가 진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었던 홍준기(김태훈 분)을 통해 인생의 끝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죽음, 즉 웰다잉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남긴다. 



암선고를 받으며 시작된 '시한부 로코'
잘 나가는 방송 작가 이소혜(김현준 분), 하지만 방송 작가로서 성공적인 외양과 달리 그의 삶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작가라지만 막상 새로 들어가는 작품에는 '발연기'의 대가라는 한류 스타 류해성(주상욱 분)이 주인공을 맡아서 대본 리딩에서부터 실소가 터지게 만드는가 하면, 개인사에 있어서도 유일한 혈육인 오빠와 언니는 늘 그녀에게 손을 벌리는 처지다. 바쁜 삶, 기댈 곳 없는 인간 관계, 그런 그녀에게 느닷없이 '암'이라는 재앙이 찾아왔다. 

그렇게 드라마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여주인공에게 '암'이라는 데미지까지 주며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뜻밖에도 인생의 암담한 종착역이라 생각되었던 '암'선고 이후 그녀의 삶은 오히려 '역전'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이 드라마 <판타스틱> 16부의 여정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삶을 달리 만든 건 바로 그녀의 주치의 홍준기다. 드라마를 쓰기 위해 도움을 받으러 찾아간 그, 그의 권유로 생각지도 않았던 건강 검진을 하게 되고 '암'선고를 받아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에게 홍준기는 전무후무한 서브남으로 찾아온다. 그녀의 주치의지만, 그 역시 암 투병 환자임을 밝힌 홍준기는 '암'으로, 그리고 그 보다 더 막막한 삶으로 주저앉아버린 그녀에게 '암' 선고가 인생의 끝이 아님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때론 그녀 앞에 발연기 남주로 등장하여 첫사랑의 사연을 지닌 지고지순한 해성과의 연적으로 아웅다웅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암환자 그녀에겐 때론 환우로, 때론 주치의로, 그리고 결국은 '죽음'의 멘토로 16부의 여정을 함께 했던 홍준기를 통해 이소혜는 변화한다. 

이소혜보다 앞서 암을 선고 받았기에 결국 이소혜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한 그, 하지만 '죽음에의 여정조차, '소풍'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홍준기는 '웰다잉'의 표본을 보여주며 앞서간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소혜에게 선물한 앨범을 통해 드라마 초반 우울한 가정사에 쉴새없이 사건 사고가 터지는 일 속에서 삶의 활기라고는 없던 그녀가 오히려 암 이후 얼마나 밝아지고 활기차 졌는가를 보여주며 결국 삶은 '어떤 병이나 사건'이란 외인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죽은 이후 조차도 이소혜의 '섬망'으로 등장하여, 삶에의 의지를 북돋는다. 그리고 그런 홍준기를 통해 시청자들조차 그를 멘토로 삼아, 삶과 죽음을 반추해보도록 드라마는 유도한다.

죽음의 멘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삶의 멘토가 된 홍준기를 통해, 삶의 절망에 빠져있던 이소혜와, 소혜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던 해성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로코'의 형식으로 그려낸다. 드라마는 '암'과 '죽음'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울하거나 칙칙하지 않고 그 어떤 로코보다 역동적인 사랑과 삶의 과정을 다룬다. 결국 홍준기는 멘토와 서브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한 후 그의 보람된 인생을 천상병 시인처럼 '소풍'으로 설명하며 생을 마감한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웰다잉, 그리고 소풍같은 삶 
홍준기를 웰다잉으로 이별한 대신, 드라마는 '로코'의 본분을 살려, 여주인공 이소혜를 사랑의 힘으로 살려낸다. 홍준기는 소풍을 마치고, 이소혜의 소풍은 끝나지 않았지만, 끝나고 끝나지 않고 여부를 떠나 암과 죽음을 화두로 삼았던 드라마는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 의지를 개진한다. 그저 자신에게 몰아닥친 삶에 휘말려 한 세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소풍'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즐기고 보람을 찾을 것을 주장한다. 그런 잘 죽기 위한 건강한 여정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인해, 암과 죽음을 담은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삶에 대한 생생한 의지로 가득찼다. 

그 덕분에 일 중독이었던 이소혜는 홍준기, 류해성의 사랑을 통해, 일도, 사랑도, 관계에서도 진정한 행복을 되찾았고, 철부지같았던 한류 스타 류해성은 연기 변신은 물론, 최진숙의 손아귀를 벗어나 스스로 책임지는 사랑의 주체로 거듭났다. '로코'답게 사랑하고 성공했지만, 암' 투병을 넘어설 만큼 건강했다. 그것이 가능케 한 것은 이제는 그 어떤 역할에서도 안정적인 캐릭터를 선보이는 김현주의 연기와, '발연기 한류 스타'라는 배우로서는 난감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며 연기 지평을 넓힌 주상욱,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연적이자, 멘토로 판타스틱이란 드라마의 주제를 넉넉하게 이끌어낸 김태훈의 변신에 힘입은 바 크다. 

앞서 <청춘 시대>를 통해 2016년 현실에 걸맞는 청춘에 대한 신선한 해석으로 화제가 되었던 jtbc 금토 드라마는 그 뒤를 이어 또 한번 '죽음'이란 화두를 '로코'로 변주해 내며, 치열한 주말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다. 특히나 <추적자>, <황금의 제국>의 조남국 피디가 jtbc로 이전하며 <라스트>에 이어 새로운 장르로 선보인 <판타스틱>은 여전히 최진태(김영민 분) 일가를 둘러싼 비리를 그려내는데 있어서는 그의 날선 감각이 변함없음을 아낌없이 보여주는가 하면, 발연기 남주에, 시한부에 작가인 여주인공, 거기에 멘토이자 서브남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버무린 신선한 '로코'로 조남국 월드의 가능성을 확장해 보였다. 


by meditator 2016. 10. 23. 11:57

만약 저녁 무렵 당신의 집에 낯 모르는 그 누군가가 찾아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해달라고 한다면?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누군가가 당대 최고의 개그맨이라면? 그에 대한 반가움은 있겠지만, 그래도 준비되지 않는 우리집 저녁 밥상을 '개그맨'을 빙자한 방송에 공개한다는 건 어쩐지 무리수다. 차라리 아쉽고 말지. 10월 19일 첫 선을 보인 <한끼 줍쇼>의 1회을 요약한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결국 큰 소리를 치며 숟가락 하나만을 달랑 들고 야심만만하게 떠난 강호동과 이경규의 여정은 7시간의 행보 끝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궁여지책 편의점에서 식사하는 여고생들 틈에 껴서 컵라면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다음 회를 기약하며, 그런데 다음 회엔 가능할까?




이경규, 강호동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저녁을 잃어버린 삶
지금도 재래 시장에 가면 간혹가다 만나기도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에 경문을 외며 집집마다 '보시(施)'를 받으러 다니는 탁발승이 있었다. 스님은 음식을 얻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그를 통해 자신의 업을 덜 수 있다하여 '구원'해주는 길이라 당당했다. 이렇게 '보시'가 가능했던 것은 담이 낮았던, 그리고 담만큼이나 인심이 넉넉했던 우리 집과 외부가 열린 '마을 공동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에 오늘날이라면 아파트라면 경비실을 넘지 못할 것이요, 혹시라도 넘는다 하더라도 당장 업무가 불성실하다 경비 아저씨가 경고를 먹을 일이 될 것이다. 단독 주택이나 빌라라면 문이 열리기는 커녕, 인터폰으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시골이라면 다를까?

그래서일까? 도시의 이경규와 시골의 이경규는 달랐다. 지난 6월 22일 종영한 <예림이네 만물 트럭>을 몰고 오지를 돌던 이경규는 그의 딸 예림이와 유재환과 함께 시골 마을을 누볐다. 어르신들이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드리는 목적에서 였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홀로 계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집에서 이경규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마을 노인정에서도 무사통과였다. 하지만 그렇게 어르신들에게 프리패스였던 이경규가 '도시'로 오니, 그의 '자신만만'이 무색하게 옹색해 진다. 당장 거리로 나서니, 그의 수제자이자, 파트너라는 강호동의 너스레는 백발백중인 반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싶게 인지도부터 떨어진다. 

하지만 강호동의 너스레라고 다 통하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천하장사'를 내세워도 닫힌 문은 요지부동이다. 예능 대부 이경규라는 이름표도, 철 지난 강호동의 '천하장사'란 타이틀도 무색해지게 결국에 쫄쫄 굶고 만 <한끼 줍쇼>, 첫 회니 '규동'이라 이름붙인 '망원동 브라더스'의 어정쩡한 조합을 각인시키기 위해, 거기에 오히려 굶어서 '한 끼'가 부각될 프로그램의 캐릭터를 위해 굶을 만도 하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어쩌면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때늦어 버린 건 아닌가라는 노파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예능은 아닐까?
프로그램 말미 강호동은 실패했다 하지 말고 성공하지 못했다로 하자며 자위한다. 그리고 비록 밥은 얻어 먹지 못했지만, '망원동'이라는 동네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맨땅에 헤딩이란 수식어답게 몇 십년만에 처음 지하철을 타고 망원동에 내려 해가 저물도록 다리 품을 팔았지만, 애써 강호동이 '문학적'이란 수식어를 내세우며 강조한 것도 무색하게, '망원동'이란 동네가 그리 정겹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어디를 가나, 인기척 대신 꽏 닫힌 문들로 점첩된 도시의 동네를 마주하게 될 뿐이다. 심지어 해가 지니 으슥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매번 거절 당하기도 하였지만, 과연 저 집들 중 얼마나 되는 집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까 하는 회의가 먼저 든다. 



'저녁이 있는 삶', 모 정치인의 슬로건으로 시작된 이 단어, 하지만 도시민의 '저녁'은 그리 녹녹치 않다. 이제는 '가족'을 이루어 사는 집보다 홀로 사는 이의 가구가 더 많아져 버린 나라에서 아이들이 뛰놀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음식 냄새 풍기는 집을 향해 각자가 달려가 퇴근하신 아버지와 함께 밥상머리에 빙 둘러 앉아 한 끼를 나누던 그 저녁은 이제 '추억'의 한 장일 뿐이다. <응답하라>라는 드라마가 그토록 '붐'을 이루는 것은 이제는 잃어버린 도시 공동체를 기억 속에서 '소환'했기 때문이었으니. 6시부터 8시까지라고 저녁 시간으로 정해놓고 망원동을 두 mc가 헤매는 시간, 그들이 헤맨 골목에는 불이 켜진 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우 불 밝혀진 집으로 찾아가면 거절 당하기 일쑤니. 지하철에서 만난 신혼의 아내 고백처럼 하루에 한끼도 밥을 나누지 못하는 부부들이 사는 세상에서, 애초에 밥 숟가락 하나 얹을 저녁상을 받을 집이 '희박'한 것이다. 

취지는 좋다. 도시의 저녁을 함께 나누며 잃어버린 도시의 온기를 느껴보는 것만큼 낭만적인 것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 밥 한 끼의 낭만은 어쩌면 이제 시대 착오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한끼 줍쇼>가 고민해야 할 것은 25년만에 처음으로 만나 어색한 '규동' 커플의 어울리지 않음이 아니라, '저녁'을 잃어버린 '도시'가 아닐지. 그건 그 옛날 '양심 냉장고'같은 캠페인으로 해결될 길 없는 시대의 삭막함이다. 


by meditator 2016. 10. 20. 05:52

물빛이란 고운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을의 유래는 슬프다. 장마가 지면 하수 처리 시설이 잘 안된 저지대 이곳까지 한강 물이 들어와 '수색(水色)'이 되었단다. 그 고운 이름이건, 그 이름에 담겨진 슬픈 지리사이건, 이제 이 동네는 '역사'의 한 장을 넘기고 있는 중이다. 2005년 뉴타운 개발에 합류했지만 지지부진했던 수색, 최근 들어 재개발이 활기를 띠며 이주가 개시되고, 철거가 진행중이다. 이제 그 사라질 과거, 수색을 사라져버린 여인 예리와 그녀의 주변을 떠도는 세 명의 남자들을 통해 장율 감독이 기억한다. 




우리와 이방인을 가르는 것이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겠느마는, 아이러니하게도 '개발'과 '경제'라는 이름표만 달면 간이라도 담싹 들어내어 줄 거 같은, 그리고 그런 토착민과 달리, 경계인인 장율 감독은 그의 작품을 통해 꾸준히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곳'을 영화로 살려내고 기억한다. 일찌기 2008년 <이리>이래, 다큐였던 <풍경(2013)>, <이방인들;디지털 삼인삼색(2013)>, <경주(2014)>에 이르기까지. 이리와 경주란 지명이 곧 영화 제목이었듯, 영화 속 '그곳'은 그곳에 터를 잡아 살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한 편의 작품을 이룬다. 아마도 토착민인 우리가 미처 잡아내지 못한, '곳'에 대한 예민한 정서가 경계인 장율의 섬세한 시각 속에 뒤늦은 깨닮음으로 다가온다. 이제 봄날의 꿈처럼 찾아왔다 사라질 <춘몽>도 마찬가지다. 

경계인 장율이 살려낸 물빛 마을 
재개발이 진행될 수색의 한 골목, 거기에 드리워사는 사람들이 있다. 재개발 예정이기에 천정이 무너져도 집주인이 책임지지 않는, 하지만 7,80년대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모던한 양옥집 앞엔 비닐 포장이 생뚱맞게도 '고향 주막'이 덜컥 들어앉아 있다. 그 '주막'의 주모는 중국에 와서 잠시 바람을 핀 결과물로 자신을 낳고 한국으로 도망치듯 들어온,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부양하는 젊은 예리(한예리 분)다. 북간도 등 종종 책을 뒤적이고, 영상자료원에 가서 무료 영화를 보며, 몸에 흘러 넘치는 리듬을 타는 예리, 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운명을 역학자에게 기대어야 하는 '포장마차'와 '아버지'에 의해 묶여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그런 예리 주변을 맴도는 세 사람, 그녀가 들어사는 집주인 아들이라는 어리버리한 간질 환자인 종빈(윤종빈 분),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탈북자 정법(박정범 분), 한물 간 건달 익준(양익준 분)이 그들이다. 아, 그리고 또 한 명이 있다. 수색 산길을 오프로드식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축구공을 자신의 몸처럼 부리는 소년(이주영 분)까지. 그들은 예리와, 예리의 주막을 빛을 찾아드는 나방처럼 드나든다. 

사라질 수색과 사람들을 향한 헌사이자, 추도사 
흑백의 영화처럼, 그 안에 웅크린 변전소처럼 좀처럼 삶의 환희를 찾을 길 없는 수색의 삶, 그리고 탈북자와, 건달과 찌질한 백수 청년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은 때로는 연적으로, 때로는 동지애를 발휘하며, 아버지에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예리와 함께 그들은 잠시 봄날 꿈같은 시절을 맞본다. 물론 그 봄날의 꿈은, 이제는 봄이란 단어가 무색해진 세월처럼 그랬던 적이 있었는가 싶게 스쳐간다. 마치 이제 사라져 우리의 기억 속에 '수색'이란 단어만이 문명화된 도시 저변에 아르라이 남겨질 기억처럼. 



영화 속 예리가 영화 종반부 주막을 찾아온 '몸도 마음도 건강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나풀거릴 때, 모처럼 입은 그녀의 하얀 치마와 함께, 그녀의 한 마리 나비와 같다. 그리고 곧 그것은 '호접몽'을 떠올린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꿈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노닐었는데, 꿈을 깨고 보니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던, 그 나비의 꿈. 영화는 내내 예리의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막판 한 장의 영정 사진으로 남긴 그녀를 보니, 그녀가 잠시 이 세상에 왔다 머물러 간 건지, 수색에 버림받은 이 시대의 세 '아웃사이더'가 잠시 예리라는 '꿈'을 꾼 건지 모호하다. 

꿈은 쓸쓸했지만 따스했고, 이제 꿈에서 깨서 돌아와 색을 찾은 수색에 남겨진 그들의 삶은 비루하다. 하지만 잠시 꿈을 꾼 동안구구절절 그들의 삶을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충분히 인간적이며, 심지어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수색에 살았을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금수저라는 집주인 아들도, 밀린 월급은 받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또 북에 남겨진 사랑하는 가족을 짊어진 탈북자의 삶도, 그리고 위태로운 건달의 삶도. 예리와 함께한 시절은 그저 꿈으로 흘러가고, 수색보다 '상암 디지털 미디어 시티'라는 지명으로 기억되는 도시의 '고향'은 재개발 속에 '수몰'될 예정이다. 잃어버릴 고향에 대한 마지막 헌사이자, 갈 곳없는 아웃사이더를 향한 추모사이다. 
by meditator 2016. 10. 19. 17:23

사이보그(cyborg), 이 단어는 사이버네틱스(cynetics 인공 두뇌학)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여러 영화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이들은 진화하는 기계인 '로봇'과 달리, 인간이 '기계'와 일체화되어 진화를 이룩한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사이보그'의 문학적 경계가 형성된다. '인간'이지만, '인간'과 '로봇'의 경계에 선 존재. 과학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거듭 놀라운 성과로 '로봇'을 만들어 내지만, 늘 그 '기계적 존재'는 '인간'의 영역에는 함량 미달인 결과로 나온다. 물론 '알파고'처럼 이제는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이 전존재인 인간에 아직은 미흡하다는 것에 대해 '인간은 자부심을 느낀다. 즉 인간과 닮았지만 아직은 인간에 한참 못미치는 존재, 하지만 '인간을 닮거나, 넘어설까 위협을 주는 존재, 이 아이러니한 이중성이 우리가 '기계 인간'에 대해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실체가 아닐까?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에서 시간에 맞춰 등장한 사이보그 남편에 대한 감정도 바로 이런 미묘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날마다 8시 29분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와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남편, 천재 과학자인 아내가 맞춘 메뉴얼에 따라, 아내를 사랑해 주는 남편, 하지만 첫 장면부터 아내 세정(손여은 분)은 그 다정한 남편이 건네는 하얀 국화를 뿌리친다. 메뉴얼에 맞추어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남편, 하지만 그 메뉴얼의 빈틈을 발견한 세정은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아니다. 그녀의 불안함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싹이 트기 시작했다. 

미스 프랑켄슈타인, 세정, 그리고 그녀의 사이보그 남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이름이 있다. 1818년 메리 셸리가 썼던 <프랑켄슈타인>, <즐거운 나의 집> 속 세정의 대학 시절 별명은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죽어가는 강아지를 살리려 했지만 그것이 오해가 되어 자신의 실험을 위해 강아지를 죽였다고 오해를 받은 그녀에게 '프랑켄슈타인'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대학 시절의 아픈 기억으로 스치듯 지나간 이 별명, 하지만 <즐거운 나의 집> 속 세정과 그녀의 사이보그 남편 성민(이상엽 분)의 관계는 이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또 다른 버전과도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괴물'을 일컬어 쉬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 원작 속 '괴물'은 피조물(the creature)라고 불려졌다. 그게 아니면 괴물이나, 악마로, 정작 그 '괴물같은 피조물을 만든 사람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불려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오히려 이 어긋난 명명은 이 소설의 진실을 말한다. 시체를 조각조각 이어붙여 생명으로 탄생된 피조물, 그는 그 흉칙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그저 '생명'이었다. 하지만 그 흉한 몰골에 자신을 탄생시킨 프랑켄슈타인은 물론 사람들은 그를 '괴물'로 치부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그의 소원마저 묵살당했다. 즉 세상은 그저 '생명'인 존재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자신이 저질러 놓은 '생명'의 과업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방기한 프랑켄슈타인, 어쩌면 그가 진짜 괴물이라는 것을 '오명'은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즐거운 나의 집>은 그 원작의 슬픈 사연과 오명의 역사를 사이보그 남편과 인간 아내의 이야기로 옮겨온다. 학우들에게 외면받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성민, 그런 성민에게 세정은 이미 그 이전부터 마음이 가있었다. 거기서 부터 시작된 그와 그녀의 인연, 그 결과물은 지금 여기서 사이보그가 된 남편 성민과 그런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세정의 불안한 관계이다. 

드라마는 '미스터리'하게, 그리고 '호러틱'하게 성민과 세정의 불안한 관계를 그려낸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성민과, 그것을 안간힘을 써서 막으려 그를 조정하는 세정의 초조함, 그들의 어긋난 기억 속에 삽입되는 등장하는 과거의 진실 들이 드라마의 분위기를 한껏 북돋은다. 서로의 다른 기억과 진실들이 배우들의 혼란스런 표정과 겹쳐지며, 즐거우려 했지만 결국 즐겁지 않은 결혼의 이면을 들춘다. 사이보그 남편에 대해 부정적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에게 그럼 아버지는 인간인 어머니에게 왜 그랬냐고 반문하는 세정처럼, '인간'으로서의 결혼에 대해 물음표를 남긴다. 



처음엔 남편을 불신했지만, 결국 자신이 꿈꾸던 '즐거운 나의 집' 속에서 자신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세정은 극단의 결정을 내린다. 세정을 배신하고 또 배신했던 성민, 그런 성민을 갖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난도질한 세정, 드라마는 '사이보그 남편'이란 불안한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로 마무리 된다. '사이보그'가 되어서야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불안한 존재 인간을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바탕으로 한 사이보그 남편과 인간 아내의 슬픈 사랑 이야기, 그 원작에 걸맞게 한껏 커튼이 드리워진 아파트, 밀실과도 같은 방, 그 속에서 벌어지는 스토커와 같은 '통제'시스템, 그리고 정작 그런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해 약으로 버티는 세정의 모습과 불안함은 이 즐겁지 않은 결혼 생활을 충분히 증명한다. 그리고 이런 '결혼'과 '사랑'에 대한 '사이보그'라는 신선한 소재를 도입한 '미스터리 호러' 장르는 드라마 스페셜이기에 가능한 도전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김지현 피디가 작가도 겸업한 mbc의 <퐁당퐁당 러브>처럼, <어셈블리>의 연출 최윤석 피디의 작가 겸업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한 신선한 시도이기도 하다. 덕분에 <어셈블리>에서 열연을 펼쳤던 송윤아, 옥택연, 정희태의 까메오 출연을 반갑게 만든. 
by meditator 2016. 10. 17. 12:12

'국수'에 이어 '빵'이더니, 이번엔 양복이다! 

바로 <월계수 양복점>의 작가 구현숙이 그려내고 있는 소재들의 이야기이다. 2013년 mbc 주말 드라마였던 <백년의 유산>은 삼대에 걸쳐 운영되는 국수집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 이듬해 역시나 mbc 주말 드라마였던 <전설의 마녀>에서는 부모와 자식대가 '빵'을 매개로 어울려 졌다. 그리고 이제 자리를 바꿔, kbs2 주말 드라마로 찾아온 <월계수 양복점>에서는 '비스포크', 즉 맞춤 양복을 통해 화해하고 모색하는 부자의 삶을 그린다. 

구현숙 작가가 그려내는 전통 
구현숙 작가의 드라마에는 늘 '장인'과 '전통'이 그 중심에 있다. 산업화가 극대화된 세상에서, 그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게 자신의 '기술'을 밑천으로 우직하게 '전통'을 꾸려낸 명장들이 등장한다. '국수', '빵', '양복'이라는 소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소재들은 바로 근대 문명이 우리 땅에 들어오며 받아들인 문물들이다. 즉 근대사의 증거물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산업화'라는 새로운 조류 앞에서 기계화되고, 공장 제품화 되면서, '장인'을 밀쳐버린 제품들이기도 하다. 구현숙 작가는 바로 그런 명장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놓쳐버린 지난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열심히 살아온 '부모' 세대의 사연과, 그 사연의 결과물로 등장한 자식 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주말 드라마의 가족사의 영역를 구축해 왔다. 



<월계수 양복점>은 그렇게 구현숙 작가가 기존에 그려왔던 근대적 전통으로서의 소재라는 지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되, 기존 mbc주말 드라마로써의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가졌던 <백년의 유산>과 <전설의 마녀>와는 좀 다른 궤도를 보인다. 즉 전통의 유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악연'과 복수극이라는 구조를 가졌던 전작들과 달리, 최근 등장하고 있는 '슬로우 라이프'라는 새로운 조류의 삶의 방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이는 작품의 소재로 등장하는 비스포크, 즉 맞춤 양복과 절묘하게 조응한다. 

선친에 이어 월계수 양복점을 운영하는 이만술씨(신구 분)는 공장제 기성복이 대세를 이루는 세상에서 여전히 맞춤 양복을 고집한다. 당연히 그의 양복점은 운영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양복점을 운영했던 그지만, 패션 회사 부사장이 된 아들은 가업에 뜻이 없다. 

비스포크와 대를 이은 양복점 
여기서 이만술씨가 고집하는 맞춤 양복을 뜻하는 말이 비스포크(bespke)이다. 비스포크는 been spoken for의 줄임말로, 이른바 '말하는 대로'라는 뜻이다. 고객의 취향에 맞춘 '나만의 양복'을 뜻하는 말로, 고객의 취향에 따른 원단과 디자인을 상담 결정하고, 신체 사이즈를 재서 가봉(몸에 맞는 지 보기 위하여 듬성듬성 대강 꿰매어 맞춘 상태)을 하여 고객의 몸에 맞는 지 확인 한 후 완성품을 만드는 과정 전체를 뜻한다. 공장제 양복, 기성복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양복은 당연히 양복점에 가서 맞추는 것이었지만, 기성복이 야곰야곰 맞춤 양복 시장을 잠식하며, 어느 덧 거리마다 한 두곳씩은 있던 양복점은 이제 구시대의 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고 더불여 '소비'적 부분에서 '명품', '한정판' 등 '하이엔드'한 물건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양복을 비롯한 '비스포크'한 물건들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월계수 양복점>은 바로 양복의 변천사를 드라마적 배경으로 담는다. 

그런 변화하는 시대, 그리고 거기에 따라 맞춤 양복의 수요가 달라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면서, 거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담는다. 패션 회사 사위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이만술 씨의 아들 이동진(이동건 분)은 아버지의 초라한 양복점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와 배다른 형제와 그 어머니의 음모로 졸지에 밀려나고 급기야 사표를 쓰고 이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성공'을 화두로 '사랑'도 없는 결혼을 꾸려가던 그가 자신의 삶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비로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그의 아버지가 하던 양복점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아버지는 이유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수석 제자였던 배삼도(차인표 분)가 다시 돌아와 아버지 대신 양복점을 사수하려고 하는 중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스러져 가는 전통을 고집하는 아버지와, 이제 그 아버지의 전통을 잇기 위해 돌아온 두 명의 남자들을 등장시킨다.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지만 밀려나는 맞춤 양복 시장 때문에 실패하고 아내의 닭집이나 도왔던 배삼도와, 역시나 성공이라는 담론으로 자신을 밀어부쳤던 이동진, 두 사람 그들은 이만술의 가출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꿈과,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매개로 양복점을 삼는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듯 돈을 벌고, 성공을 따르던 두 남자가 삶의 속도에서 튕겨져 나와 돌아온 곳, 그 본의든, 본의 아니든 선택한 '다른 속도의 삶에는 '느리게 만들어지는 양복' 비스포크가 있다. 

15회, 아버지와 똑같은 양복을 부탁했던 청년은 배삼도만 만든 가봉한 양복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다. 아버지의 단벌 양복, 자신의 퇴학을 막기 위해 선생님 앞에서 무릎 끓고 벌을 섰던 그 양복, 그래서 아들을 개과천선 시켰던 그 양복을 이제 아들은 첫 출근의 양복으로 삼고자 한다. 그런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동진은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살피고, 그와 똑같은 원단을 구하기 위해 원단 시장을 헤매고, 그러고도 배삼도는 여전히 스승님의 양복을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한숨을 쉰다. 원단을 찾고, 치수에 맞춰 가봉을 하고 완성품까지 대략 두 달여가 걸린다는 과정, 기능올림픽 금메달 리스트가 아직도 멀었다는 완성품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가 써놓은 메모의 뜻을 헤아리는 아들의 모습은 흡사 '수련'의 과정과도 같다. 

이렇게 드라마는 '속도전'의 시대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고집스레 전통을 고수하던 아버지, 뒤늦게 나마 그 아버지대의 전통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의 뒤를 따르려는 제자와 아들, 그 철 지난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최근의 비스포크 붐에 편승하여 드라마의 힘을 준다. 그리고 더불어 그 철 지난 이야기에 가능성을 연다. 전통이라지만, 새로운 전통이다. 독짓던 늙은이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자신을 불에 놓았고, 방망이를 깍던 노인은 뒤늦은 사과를 받을 사이도 없이 자리를 떴다. 그렇게 오래전 전통이 사라진 사이, 서구의 문물이 우리 땅에 와서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마저도 밀려났던 근대적 전통이 새로운 삶의 스타일에 힘을 얻어 돌아온다. 

 



by meditator 2016. 10. 16.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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