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보면 1998년 <정사>로 떠들썩하니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이래, 이재용 감독만큼 그의 작품 세계가 '파란만장'한 감독이 있을까? 세상은 최근 1000만이란 숫자로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름이 낯설지 몰라도, 그의 이름을 따라 작품을 쫓아온 관객이라면 최근 그의 인터뷰 제목처럼, 그의 다음 작품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궁금함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삶과 고뇌의 이력으로 그의 다음 여정에 대한 궁금증이다. 마치 투명한 유리창처럼 그의 생각이 온전히 작품으로 드러나는 감독, 그래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삶을 나눌 수 있는 감독, 이재용 감독이 2016년 들고 온 작품은 <죽여주는 여자>이다. 


이재용과 그의 그녀들
이재용 감독 영화에서 '여성'은 대부분 영화의 중심에 놓여있곤 한다. 98년 <정사>는 2016년에도 '불륜'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에서 일찌기 '바람난 유부녀 서현(이미숙 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 적나라함은 2003년 <조선 남녀 상열지사>에서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숙부인(전도연 분)에 이르르면 극에 달한다. 세련된 미장센으로 가두어지지 않는 여성의 욕망을 통해, 닫힌 사회에 대한 냉소를 퍼부었던 이재용 감독, 하지만 그의 다음 행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도발'과 '파격'이란 수식어가 달리는 <다세포 소녀>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그가 관심을 보인 대상은 여성, 단지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던 '부인'에서, 상식 밖의 10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세포 소녀>는 대세 감독이었던 이재용을 아웃사이더로 만들었고, 이후 그의 행보는 <다세포 소녀>의 서사 못지 않게 파격적으로 이어진다. 



2009년 <여배우들>은 말이 고현정, 김민희, 최지우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이름을 올렸을 뿐이지, 막상 그녀들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은 다큐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영화를 통해 이재용에 대한 혼돈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그 혼돈을 통해 그 어떤 스타 다큐보다도 진솔하게 인간으로서 여배우들의 삶을 통찰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이재용 감독은 <감독이 미쳤어요>란 파격적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를 넘나든다. 과연 이 감독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시점, 뜻밖에도 2015년 그가 들고 온 작품은 가장 평범한 극영화 <두근두근 내인생>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의 여성에 대한 천착은 멈추질 않았으니, 부인과 10대 소녀, 여배우를 경유한 그가 관심을 준 것은 자기보다 늙어가는 자식을 둔 엄마였다. 그렇게 '죽음'과 '엄마',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던 그가, 2016년 그 '고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껴안은 것은 '죽음 앞에 선 여성'이다. 

그렇게 <죽여주는 여자>는 삼팔 따라지로 의지가지없이 남한으로 흘러들어 공장 직공 등 안해본 일 없이 하다가, 돈이 된다 하여 '양공주'를 하다 이젠 나이들어 먹고 살기 위해 '박카스 아줌마'가 된 소영(윤여정 분)의 이야기이다. 즉 이재용의 여성에 대한 서사가 이어진 것은 여성성에의 천착이라기 보다는, 조선이래 이 한국 사회에서 제도화된 도덕이 가장 강고하게 요구되는 대상이자, 그러기에 가장 직접적인 희생자였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절녀, '가족'이 최우선이 된 산업사회, 그리고 고도의 산업 사회에서 그 꽃이 된 여배우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고비에서 만나게 된 '박카스 아줌마'는 우리 현대사가 토해놓은 가장 적나라한 결과물이다. 

현대사의 마돈나, 소영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먹고사는 것'이 보상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온 소영,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모성의 상실과 여전히 자신의 몸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막다른 삶이다. 



영화는 소영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그 이전 영화에서 이재용이 실험했던 바 '다큐'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가 깃들어 사는 도시를 지그시 바라본다. 영화의 시선은 천천히 여전히 여성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녀가 신은 높은 굽의 신발로 걷는 느릿한 걸음을 따라 도시를 경유한다. 그녀의 일터인 탑골 공원 등과 그녀의 주거지인 이태원 등, 불야성을 이룬 메가 폴리스 서울이 숨긴, 그림자 서울의 모습을. 영화 속 서울은 즐비한 도심의 빌딩 대신, 노인네들이 하릴없이 죽치고 있는 공원과 스산한 등산로, 이방인이 낯설지 않은 거리와 속살같은 골목을 비춘다. 그리고 도시는 재개발을 거쳐 번쩍번쩍 현대화되지만,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스러져간 구도심처럼 변화되는 세상에서 재개발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먹고 살기 위해 흑인 병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도 안된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보낸 소영, 하지만 사회가 거세한 그녀의 모성은 쉬이 잠재워지지 않는다. 나이든 몸을 돌보기 위해 호구지책으로 '박카스'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그녀이지만, 병원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코피노 민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의사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가 내뱉은 소년에게서 자신이 젊은 시절 보살피지 못한 채 입양시켜버린 아들을 떠올리며 부등켜안은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만큼이나 도시에 깃들어 살지만 도시가 돌보지 않은 노년의 인생을 구제(?)한다. 이방의 어린 소년과 죽음을 앞둔 보살펴줄 이 없는 노년들, 현대화된 도시가 품지 않고 뱉어버린 '생'을 모성을 잃고도 모성을 놓치지 않은 소영을 통해 보살핀다. 그녀는 '죽여주는 박카스 아줌마'에서 도시가 쓰레기치우듯 내뱉어버릴 노년의 삶을 '구원해 주는' 마지막 보호자가 된다. 도시의 마돈나처럼. 



하지만 '성모'가 된 마돈나와 달리, 도시의 마돈나의 삶은 가차없다. 늙은 그녀에게 사회가 베풀어 준 '양로원'은 차가운 감옥, 그리고 찾아가는 이 없는 무연고의 죽음이다. 그녀가 잡혀갈 때 '언니'라며 울부짖던 동거인들의 슬픔이 무색하게, 영화는 그 흔한 '신파'의 미련마저 떨친 채 끝까지 냉철함을 잊지 않고, 박카스 아줌마로써 소영의 삶을 직시하며 여운을 짙게 남긴다. 

by meditator 2016. 10. 14. 20:05

2015년 30만 2천 8백쌍의 부부가 결혼을 했다. 하지만 10만 9천 2백쌍이 이혼을 했다. 대략 1/3이 이혼을 한 셈이다. 그 중 40대 이상의 이혼이 40%를 넘는다. 즉 '부부'라는 형식의 제도가 '유지'되는 것이 여의치 않은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혼율만이 문제가 아니다. 결혼생활 만족도 조사에서 30대 부부들이 60.7%의 만족도를 보인 반면, 중년을 넘어서면서 그 만족도는 급격하게 떨어지며 40대 52.2%, 50대 43.7%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살기는 살아도 그저 마지못해 살고 있는 부부가 과반수를 넘는다. 더 심각한 것은 '성'을 매개로 하여 형성된 '부부'라는 제도이자 관계인데, 섹스리스 부부가 조사에 응한 수치에 한해서 35.1%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을 '부부'라는 제도의 붕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런 대한민국 부부의 현실이 바로 10월 10일에서 13일까지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출발점이다. 한 마디로 어찌어찌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같은 대한민국의 부부, 그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점을 모색해 보겠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 달라지는 부부
그 진단의 출발점이 되는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부부의 탄생>이다. 인도와 미국, 그리고 한국의 부부가 형성되는 과정을 들여다 보며 우리나라 부부의 '요건'을 파악해 보겠다는 것이다. 인도 샴페이 마을 거기서 한 쌍의 부부가 탄생된다. 22살의 라키와 25살의 수지드는 결혼식 당일날까지 서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식장에 들어선다. 서로 집안의 아버지가 의견을 맞추어 마련된 결혼식, 집안 간의 행사이자, 마을의 축제다. 아내될 리키는 평생 남편 집에서 먹고산다는 이유로 지참금을 마련하여 가고, 결혼 후에도 남편이 직장으로 떠난 시가에서 시집 식구들과 살아간다. 6개월만의 친정 나들이도 예외적일 정도로. 

그에 반해 미국의 케이스(31)와 베니스(28)부부는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전적으로 개인과 개인의 결합으로 결혼을 맞는다. 심지어 결혼식도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그들이 출근하던 맨해튼 페리와 지하철을 배경으로 '깜짝 쇼'처럼 벌인다. '가족'이 중심이 되는 인도와 '개인'의 책임이 되는 미국의 결혼, 그 중간 쯤에 우리의 결혼이 있다. 성당수련회에서 만나 오랜 기간 연애를 했던 부부, 하지만 결혼 과정에서 그들은 '집' 구하는 것 등  양가 부모님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가족'과 '개인',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더 낳다 말할 수 없다. '가족'이 전제가 되는 결혼은 '위기'의 관리 능력이 우수하다. 인도에선 이혼이 제기되면 6개월간의 가족 숙려 기간이 주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대부분 '가족'들의 설득으로 이혼까지 이르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인도의 '가족 중심주의'조차도 변화하는 시대에 무기력하다. 그렇다고 미국은 나을까? 자유의지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미국, 당연히 결혼 지속 기간이 떨어진다. 결혼하고 20여년이 지난면 결혼한 부부의 반 정도가 남남이 된다. 결국 변화하는 세상은 묻는다. 과연 '부부'가 이상적인 제도냐고.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래도 '부부'라는 제도를 유지하고 산다면, 그 '부부'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2부 <같이 사는 이유>를 통해 다양한 연령대의 부부들을 살펴본다. 
물론 당연하게도 연애 시절, 그리고 갓 결혼한 신혼 부부의 일상은 서로의 존재와 사랑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남녀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런 사랑과 믿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장담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결혼의 내용성을 변화시킨다. 
 
'개인'의 사랑을 전제로 했던 우리의 결혼, 그 양상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건 '아이'의 출생부터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이'가 중심이 되는 부부의 생활, 이때부터 결혼 만족도는 떨어지기 시작한다. 즉 '아이'의 출생과 함께 우리의 부부는 자녀 교육을 위한 경제 단위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남편은 돈이나 벌어다 주며, 심지어 아이의 교육을 위해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는 처지가 된다. 떨어지던 부부간의 만족도는 아이들의 다 성장을 하고 품을 떠나면 그때서야 회복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40%를 웃도는 만족도가 나아지는 건 아니다. 

결혼, 그리고 부부, 그 위기의 해법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부부 사이가 존중과 사랑으로 만개한 37년차의 김준서 김민자씨 부부, 대가족의 장남과 맏며느리 살아온 세월, 뒤늦게 남편은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고 아내와 함께 하는 삶에 충실하고자 한다. 20여년의 세월에 걸쳐 사랑에 빠진 커플 3000쌍을 살펴본 가트만 박사에 따르면 '비난, 방어, 경멸, 담쌓기'로 관계를 메꿔간 부부의 94%가 이혼에 이르렀으며 결국 '대화 방식'이 문제가 된다 결론을 내린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중년 이혼에서 이혼 신청을 요구하는 아내들은 대부분 그 이유를 오랜 세월 쌓인 성격 차이를 들고 있는 반면, 남편들은 이혼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이혼을 당하는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은 현실은 바로 우리 사회 남녀간의 간극을 보여준다. 

위의 아내 김민자씨는 이제라도 자신을 돌아봐주는남편이 용서가 된다고 한다. 다큐는 오랜 시간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부부의 사례를 통해 노력하고 배려하는 것만이 '부부가 살 길이라 보여주고자 한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면 복측피개영역에서 도파민이 발생한다고 한다. 최근 연구 결과는 21년이 넘게 이 물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즉 오래도록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되물은 질문, 김민자씨는 답한다. 다시 태어나면 이 사람과 결혼하지는 않겠다고. 



그렇다면 좀 더 레디컬한 해법은 어떨까?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 50여개국 38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폴리아모리 (polyamory), 즉 다자간 연애는 어떨까? 이 그룹의 모임, 1;1이 아닌 파트너들이 서로에게 꺼리낌없이 스킨쉽을 한다. 우리 정서로 보자면 '괴랄하기' 그지없는 이 모습, 하지만 이 그룹이 주장하는 것은, '금기'를 깬 솔직함이다. 부부라는 관계를 깨지 않고, 서로의 다른 마음을 솔직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런 다자간 연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연인에 대한 질투보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쁨이 더 지배적이라며 일부일처의 비정상적 금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리학자 재닛 로퍼스는 living apart together을 주장한다. 즉 서로 다른 삶의 스타일을 사는 사람들끼리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고,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5년전 재혼을 한 재닛은 그의 남편과 일주일에 금토일 3일만 부부로 한 공간 안에서 지낸다. 

다큐는 위기의 부부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부부의 맨 얼굴은 상처투성이다. 과연 결혼이 유효한 제도인가라는 물음조차 던져질 정도로.  그럼에도  부부란 것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제도인 한에서 그 유지를 위해서는 '노력'과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그 '노력'의 방식은 다양하다. 남편의 개과천선이든, 다자간 연애이든, 혹은 따로 또 같이이든. 
by meditator 2016. 10. 13. 17:20

양심과 소신 대신 이익을 쫓는 전문가는 

   연쇄살인범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악한 존재, 가장 나쁜 사회 악입니다.
                                                             -표창원

10월 11일 방영된 <캐리어를 끄는 여자>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이 법정에 올랐다. 극중 야구선수 강현호가 수술 부작용으로 사망에 이르자 그의 아내는 남편의 사인을 '의료 사고'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의료 과실이라는 아내의 주장을 '묵살'하기 위해 과실의 주체가 되는 의사 및 그의 재판을 맡은 오성 측이 남편 강현호가 1차 수술 뒤 무리하게 음주를 했다는 주장을 하여 강현호 선수의 죽음이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된다. 뜻밖의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신해철씨의 죽음이 떠올려지는 사건이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에서는 신해철 씨의 사건 외에도 최근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무고'범죄와 관련된 사건을 k-fact의 대표 함복거가 억울하게 연루된 범죄로 고스란히 재연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그 피해자인 연예인들만이 그 이름이 까발려지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사건, 그리고 그에 이어 신해철 씨의 억울한 죽음과 같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극중 주인공들이 맡은 사건의 내용으로 등장하며 시선을 끈다.



이런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시의적'이어서 접근성이 좋지만, 동시에 '소재주의'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최근 이슈가 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만으로 '화제성'에 기대어 가고자 하는 안이한 의도말이다. 더욱이 아직도 신해철 씨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아픔으로 남겨진 상황에서 더더욱 조심스러운 사안이다. 이런 '소재주의'의 함정을 넘어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주제 의식을 북돋우는 소재로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의료 사고의 화제성을 넘어 '쯩'의 존재론을 묻다
즉 사건 그 자체로써의 화제성을 넘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전문가와 비전문가,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구축된 기득권층의 비리'와 '존재론'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10월 11일자 경향 신문의 김민아 논설 위원 칼럼에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법학자 손기병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 양극화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실력주의, 업적주의로 번역되는 메리토크라시는 능력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체제로, 지능 지수와 노력에 의해 수월성(merit)을 획득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그 메리트를 오직 시험에 의해서만 증명할 수 있기에 전형적인 메리토크라시 사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5,6회에 걸쳐 벌어진 사건 강현호 선수의 죽음과 관련된 의료 과실 사건은 위의 '메리토크라시'의 부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술 시 과오로 인해 강현호 선수의 몸에 ;천공(perforation 장기의 일부에 어떤 병적변화가 일어나거나, 또는 외상에 의하여 구멍을 만들어, 장기외의 부분과 통하는 것) 을 만든 심원장(김원해 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병원 내 권력을 이용하여 조수였던 강선생을 비롯한 수술방의 스태프들에게 함구를 요구한다. 이런 심원장의 파렴치한 부인과 왜곡은 최근 백남기씨 부검 논란과 관련하여 더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와 오성의 사건 연습을 거듭한 작전 앞에 골든트리의 반격은 쉽지 않다. 심원장과의 의료 분쟁에서 진 피해자들을 방청성에 앉히고 거듭 심원장에게 천공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지만 결정적 증거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한 줄기 희망이었던 강선생이 심원장의 결백에 동의하고 법정을 빠져나가자, 방청석에 앉아있는 간호사가 증인을 자처하며 재판은 판도가 달라진다. 심원장의 잘못된 시술로 인해 생긴 천공으로 잘려지게 된 소장을 스스로 폐기했다고 증언하는 간호사, 하지만 앞서 강선생의 증언을 들먹이며 오성은 '간호사'와 '의사',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격을 들먹이며 반발한다. 

물론 드라마는 차금주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온 강선생으로 인해 골든 트리의 승소, 강현호 선수의 명예 회복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결정적 순간, 똑같이 수술방 스태플로 참여했음에도 '간호사 주제'라며 제쳐지는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메리토크라시'에 의한 계급 폐해를 고발한다. 그리고 이는 주인공 차금주의 문제로 회귀된다. 

차금주를 통해 '쯩'을 반문하다. 
도망치다시피하는 강선생을 맨발로 쫓아간 차금주, 그녀는 자신을 사시만 5번 떨어져 '면허'의 중요성을 모를 수도 있다며 말문을 연다. 그에 앞서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의 집에 찾아갔다가 배가 부른 남편의 동거녀를 마주하게 된 차금주, 그 이혼의 울분을 남편의 차에 마구 퍼부은 바람에 경찰서 신세가 된다. 그런 그녀에게 경찰은 자신의 신분을 보증할 그 무언가를 묻고, 그런 경찰에게 차금주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꼭 무엇이어야 하는 사람이냐고 반문한다. 무엇이어야 하는 사람,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여주인공 차금주는 사시는 비록 5번이나 떨어졌지만, 가장 유능한 변호사 사무장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변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늘 그녀는 밀려나고 무시당한다. 그런 그녀의 울분이 응축되어 그녀의 신분을 묻는 경찰에게 '아무것도 아니면 어떠냐고' 반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차금주의 설움은 바로 다음 장면 디스패치가 연상되는 가쉽지 함복거가 등장하자, k-fact가 안기부 소속이 아니냐고 굽실거리며, 마치 그녀가 정부 요원일 지도 모른다며 운을 띠우는 함복거의 한 마디에 허리가 꺽어지는 경찰. '면허'쯩과, 그 면허 쯩을 가진 전문가에 약한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한 발 더 나아가 그간 암약하며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해결사의 뒷배가 어쩌면 오성의 이동수(장현성 분)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며, <캐리어를 끄는 여자> 속에서 벌어지는 부도덕한 범죄의 최종 보스가 결국 로펌, '법조계의 신성 가족'임을 드라마는 암시한다. 

결국 심원장도, 그리고 이제 그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는 이동수도, 의사 면허를 따고, 변호사 쯩이 있는 메리토크라시의 핵심인 그들이야말로 '민나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 놈みんな泥棒です) 이며 연쇄살인범 저리가라할 파렴치범이자, 진짜 사회악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추악한 관료를 빗댄 저 단어가, 1982년 드라마 <거부실록>을 통해 당시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빗댄 단어로 회자되었고, 이제 2016년 한국 사회을 좀먹는 연쇄살인범보다 더 악독한 기득권층이 되어 고발당한다. 결국 그간 법조계를 다룬 다른 드라마들처럼 결국 기승전 최종 보스로서의 로펌을 등장시킨 <캐리어를 끄는 여자>, 하지만 그저 사회악의 고발과 폭로만이 아니라, 쯩이 없는 여주인공을 통해 '면허'의 존재를 묻는다. '쯩'에 약하지만, '쯩'이 '의무'보다는 '권리'로 쓰이는, 어쩌면 그저 종잇장에 불과한 허상은 아니냐고 묻는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니어서 설움을 받은 차금주에게 함복거는 '억울하니 출세하라'고 권유한다. 즉 다시 변호사 시험을 보라는 것이다. 실력에 없어서가 아니라,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변호사 시험을 포기했던 차금주, 그 쯩이 없어 설움을 당하던 차금주, 도망치던 강선생을 붙잡고 면호는 '권리'이자, '의무'라며 의사로서 진실을 밝혀줄 것을 호소하던 차금주는 과연 변호사가 될까? 


by meditator 2016. 10. 12. 06:23

2015년 간통법이 폐지되었다. 그 이전 간통법이 폐지되기 전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갖는 것을 피해 배우자가 신고하면 징역 2년의 처벌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 간통법은 '개인'의 결혼에 대해 '국가'가 법적으로 개입하는 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법'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불륜'은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대표적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불륜'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의 속내는 무엇일까? 거기엔 최근 성과 관련된 보고서(2016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50대 남성의 53.7%, 여성의 9.6%가 외도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런 확률은 연령대 별로 4%씩 증가하며 40대에서는 6%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보고서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여성들이 '결혼'이란 제도에 성실한 반면, 남성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고, 결국 그로 인해 여성들이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불륜'에 대한 노골적 불편함은 이런 여전한 결혼제도를 둘러싼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의 반증이다. 그러기에 여성들이 주된 시청층인 tv에서 불륜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진짜 사랑이 뒤늦게 찾아온다면?
이런 조심스러운 '불륜'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 <공항 가는 길>이 취한 해법은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뒤늦게서야 찾아온 진정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핵심은 '소울 메이트'이다. 말 그대로 당신 영혼의 짝이 뒤늦게서야 나타난다면? 이다. 효은 엄마, 애니 아빠로 애니의 죽음을 매개로 얽히게 된 두 사람, 최수아(김하늘 분), 서도우(이상윤 분)은 각자 아이들로 인해 겪게되는 가정의 위기 속에서 정작 각자의 남편, 아내 대신 서로에게서 '위로'를 받고, 서로에게 공감한다. 
서도우는 딸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딸을 지워버리려는 아내와 달리, 빗속에서 잠시 차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을 대신하여 '애니'의 유골이 든 가방을 꼭 끌어안고 기다려주는 최수아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런가 하면 마음 둘 곳 없는 시어머니의 집에서 뛰쳐나온 수아의 다친 마음을 쉬게 해주는 건 서도우이다. 

하지만 그 정도론 이들의 '사랑'을 진척시키기엔 아직 시기상조라고 느꼈을까? 아니, 그 보다는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대한 '유부남', '유부녀'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경계'를 그리기 위해, 드라마는 한번 더 에돌아 간다. 서로를 찾아 헤매면서도 굳이 만지지도 말고, 애써 만나려 하지도 말고 운운하는 3무의 관계를 설정한다. 서로의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만나면 죄책감이 느껴지는 관계에 대한 일말의 책임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 3무란 경계선은 흐르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을 조장하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다. 드라마는 애니의 죽음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가정이란 경계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서도우 어머니의 죽음이란 '극단적 상황'을 통해 감정의 봇물을 터트린다.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의 죽음이란 극약 처방을 통해서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심리적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한 것이다. 

애니의 죽음 앞에서 냉정한 아내 때문에 홀로 딸의 죽음을 가슴에 접어두어야 했던 서도우, 그런 그가 달려오는 수아의 품에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다. 애니의 죽음에서부터 참고 참았던 모든 설움을 한껏 토해낸다. 서도우의 불행을 두고 물불 안가리고 달려온 수아와, 그런 그녀 품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서도우, 이 절정의 공감과 위로가, 이들이 '서로의 영혼'을 공유하는 진짜 '사랑'임을 드라마는 역설한다. '불륜'이라는 도덕적 잣대가 아닌 불가항력의 인간적 감정임을 설득하고자 한다. 

사랑, 그리고 결혼 
거기에 이런 이들의 '금기'에의 도발에 대한 '알리바이'를 위해, 두 남녀의 파트너에 대한 '신뢰'에 먼저 금이 가게 만든다. 서도우는 애니의 죽음 앞에 동요하기는 커녕 애니의 기억조차 없애버리려 애쓰는 아내를 보며, 그리고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온 애니에 대한 기억의 조작을 보며, 이제 아내에 대한 의심으로 한 발 나아간다. 그런가 하면 '자네'라며 아내에게 문자로 지시하는 '시드니의 신사' 최수아의 남편, 그가 가진 이중성이 자꾸 삐져나온다. 그렇게 드라마는 두 사람의 순애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미 그 이전에 '신뢰'가 무너진 결혼을 그려간다. 즉 사랑에 빠진, 그리고 이제 '불륜'으로 들어설 두 남녀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애써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현실에서 불공정한 '불륜'대신에 가장 아름다운 환타지로서의 '사랑'을 통해 결혼에 찾아든 변수를 질문한다. 



불성실한 배우자, 심지어 애초에 '신뢰'할 수 없었던 결혼, 그리고 이제 서로의 세계관조차 엇물리는 배우자, 그리고 그런 배우자와 달리, 눈빛 하나로도 서로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소울메이트의 출현, 드라마는 뒤늦게 찾아온 '진짜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소통'을 얻는 관계를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던져지는 반문은 '결혼'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최수아와 서도우의 사랑이 아름답고 공감되면서도, 쉽게 그들의 손을 들 수 없는 건 여전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제도 때문일 것이다. 과연 현재 우리 사회의 결혼은 무엇일까? 여전히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관계일까? 공정한 불륜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불성실한 상대방을 어디까지 참아내며 지속시켜야 하는 제도일까?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파트너와의 결혼 생활은 불가능한 것인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은 파기되어야 하는 것인가? 사랑이 곡진할 수록, 이 반문도 깊어진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소울 메이트와의 사랑에 빠져든 두 사람이 봉착할 문제도 결국 '제도'로서 그들이 얽어매어진 결혼이다. 
by meditator 2016. 10. 7. 05:26

모든 일본 영화가 그렇다고 '보편적'으로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고레에다 다카에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라던가,  다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이 가지는 공통적 화두는 '변화하는 세상'의 '자존'이다. 이제 색다른 '멜로'의 장르로 찾아온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도 그 일련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 어떤 일본의 감독보다 압도적이다. 그 이유는 첫사랑을 겪은 성인이라면 한번쯤은 보거나 들어봤을 '오겡끼데스까?'라는 그 한 마디로 설명되는 <러브레터>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련한 첫사랑의 전설로 회자되는 <러브레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사실 그리 아름답기만한 내용은 아니다. 애인이 죽은 지 2년이 다 되도록 그를 잊지못한 히로코, 그 여자가 애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후지이 이츠키를 만나며 순애보였던 사랑의 뒷면을 알게되고 비로소 사랑을 마무리지는 '이별사'이자, 담담한 인생의 서사이다. 그런 어찌보면 쓸쓸한 삶의 서사가 아련하고 애틋한 이와이 슌지의 정서와 만나며 잊지못할 첫사랑의 명작이 된 것이다.

그렇듯 <립반윙클>의 신부도 한 여성의 수난사, 그리고 혹은 사랑이란 서사가 역시나 이와이 슌지의 정서를 통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어디에?
첫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편지'라는 고전적 매개체를 등장시켰던 <러브레터>처럼 <립반윙클의 신부>의 매개체가 된 것은 'sns' 플래닛이다. 
임시교사로 재직중인 미나가와 나나미 (구로키 하루}가 의지하는 것은 그녀의 플래닛과 플래닛의 이웃들이다. 남편을 맞선사이트에서 고르고 그와 거리에서 만나 서로의 조건에 맞추어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가는 과정, 그 과정 속의 혼란과 의아심을 남편대신 플래닛의 이웃과 소통한다. 심지어 그런 그녀를 의심하는 남편에 플래닛을 없애는 대신 새 계정을 만들며 .

하지만 그럴듯한 직업도 여의치않듯이, 그럴듯한 결혼 생활도 그녀에겐 역시나 여의치않다. 플래닛 친구를 빙자한 마스유키(아야노 고)의 사업적 이용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거짓'으로 채워진 그녀와 남편의 결혼 때문이었는지, 결국 그녀는 한밤중에 낯모를 거리를 헤매는 처지에 이른다. 영화는 결국 거리에 내던져진 나나미의 처지를 통해 '가족'과 '결혼'이라는 구 제도, 그리고 '플래닛'이라는 새로운 문물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쉬이 확립할 수 없는 오늘날의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면 아마도 <립반윙클의 신부>는 그저 현대 사회의 적나라한 비판서로 마무리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임에랴.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
그렇게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관객이 보기엔 가장 믿지못할 인물인 마스유키에게 전화를 하는 어리석은 행보를 걷는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아르바이트 소개, 자신의 결혼을 파멸로 빠뜨렸던 그 결혼식장 알바 자리에 앉아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녀에게 찾아온 거액의 아르바이트,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만난 사로나카 마시로(코코 분).

첫 번 째 결혼이 파탄나는 과정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여주인공 나나미의 비주도성이다. 결혼을 하는 과정도, 그것이 파탄나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끌려다닌다. 심지어 홀로 나와 사는 삶에서 조차도 그리 주체적이지 않아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영화 속에서 했던 유일한 주체적 언어는 '같이 죽겠어요'다. 그녀가 행복한 웃음을 띤 결혼식은 마시로와 함께 한 장난같은 결혼 코스프레이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한 한 마디의 언어가. 천진난만하게 행복해하던 결혼식이 그녀를 살린다.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죽으려던 마시로도, 늘 그녀를 이용해 먹기만 하던 마스유키도 그녀의 천진한 교감 앞에 손을 든다. 사랑이든, 연민이든. 



그녀를 이용하려했던 사람들, 그녀 앞에서 끝까지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삶을 움켜쥔 그녀에게 그건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 나나미를 만났던 마츠유키는 초콜릿을 건네주며 당신의 마음이 문제라고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sns 시대이건 구시대의 유물같은 결혼이건. 동성애의 결혼이건, 그게 문제가 아닐지도. 연인의 숨은 첫사랑을 찾아내며 비로소 자신의 연애사를 직시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러브레터>의 히로코처럼, 나나미도 연인의 죽음을 겪고 담담하게 자신을 마주본다. 동화같은 레스토랑에서 살아남은 건 립반윙클 대신 그의 아내 나나미다. 

나가지마 미호가 있었기에 <러브레터>의 감성이 가능했듯, <립반윙클의 신부>는 때로는 답답하고, 하지만 그 천치같은 순수함으로 결국 자신을 살린 구로키 하루란 배우의 존재감에 의지한다. 거기에 때로는 sns 시대의 삶을 감각적으로, 혹은 몽환적으로 그려낸 이와이 슌지 감독의 감성이 더해져 신선한 멜로 한 편이 탄생되었다. 멜로라기엔 어패가 있어보이는, 하지만 본의 아니게 멜로가 되어버린 나나미의 순애보를 통해 시대와 사회라는 조건 속에서 사람과 사랑의 문제를 짚어보게된다.
by meditator 2016. 10. 6. 20:27

얼마전 인터뷰에서 배우 윤여정은 자신이 tvn의 열혈 시청자라며 그 이유를 새로운 것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비단 윤여정씨만이 아니다. 주변에서는 아예 tvn에 채널을 고정해 놓는 사람들도 있다. <시그널>이 tvn에서 방영했으니 망정이지, 공중파에서 했다면 아마도 '러브 라인'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우스개처럼 공중파 드라마하면, '사랑 이야기'라는 공식이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전 조기 종영한 <뷰티플 마인드>의 경우 애청자들은 차라리 ocn이나 tvn으로 갔다면 드라마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 안타까워 했으니. '신선한 시도'로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tvn 을 비롯한 케이블 드라마의 성공은 곧 공중파의 위기가 되었다. 주중 미니 시리즈가 20%를 넘기는 경우가 가물에 콩나듯 쉽지 않은 상황, 안되면 심지어 케이블보다 낮은 3%의 수모를 겪는 상황에서, 그 위기를 타파하고자 공중파가 꺼내든 칼은 바로, 케이블의 인기 작가들의 공중파 유입이다. 




<W>의 송재정 작가 
그 대표적 작가가 바로 얼마전 종영한 <W>의 송재정 작가다. 송재정 작가는 1998년 <순풍산부인과>를 시작으로 <똑바로 살아라(2002)>, <거침없이 하이킥(2007)>, <크크섬의 비밀(2008)> 등 공중파에서 시트콤을 주로 집필해왔다. 그러던 중 2012년 <인현왕후의 남자>를 시작으로 TVN으로 자리를 옮겨 미니 시리즈를 전환을 한다. <인현왕후의 남자>,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의 인연이 현대에 다시 만나 이어지는 '운명적 사랑'을 통해 방영 당시는 물론, 종영이 된 현재까지도 대표적인 TVN의 작품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늘의 송재정을 있게 한 것은 표절 시비에도 불구하고 2013년 방영된 <나인;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이다. 향 9개로 20년전 과거로 돌아가 미스터리한 인연의 끈을 풀어가는 이 드라마는 '시간'을 매개로 삼는다는 점에선 <인현왕후의 남자>의 바통을 이어받지만, 흔한 역사적 시간과 현재의 타임워프물 대신, 주인공의 주변 인물과 얽힌 20년이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얽히고 설킨 '인연'과 '운명'이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이후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왕세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활약을 다룬 <삼총사>의 부진을 딛고, 송재정 작가는 2016년 MBC로 자리를 옮겨 <W>를 인기몰이를 한다. 

<인현왕후의 남자>에서 '역사적 인물의 타임 워프를  다뤘던 송재정 작가는 <나인>을 통해 주인공 가정사의 비밀이 벌어진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다. 그렇게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송재정 작가가 <W>에선 시간 대신, 현실과 웹툰이라는 '공간'적 상황을 등장시켜 다시 한번 젊은 시청자들을 열광케 한다. 2016년 서울이라는 공간은 같지만 만화 속 등장인물인 강철(이종석 분)과, 그의 열혈 독자 오연주(한효주 분)가 가상과 현실을 오가며 사랑과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이렇듯 송재정 작가의 작품에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미스터리와 운명적 사랑이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나인>에서 미스터리한 운명을 풀기 위해 진력했던 주인공은 이제 공중파로 오면, '사랑'에 좀 더 방점을 두고 웹툰과 현실 세계를 오간다. 덕분에 <나인>의 치밀한 전개를 기대했던 전작의 시청자들은 <W>의 전개가 어설프다는 평가를 내리는 반면, 다양한 연령대를 흡인할 수 있는 복잡하지 않은 전개와 스타 배우들의 러브 스토리가 <나인>과 다른 <W>의 장점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간 공중파에서 접할 수 없었던 이야기라는 점에서 송재정 작가의 공중파 재입성은 의미있다. 엉성하던 혹은 단순하든 <W>는 일부 매니아 층을 거느렸던 <나인>과 달리, 최고 시청률 13.8(7회 닐슨 코리아 기준)를 찍으며 동시간대 1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 가서 9.3%(16회)까지 하락한 시청률은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이는 송재정 작가의 차기작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권음미 작가
송재정 작가의 바통을 이어받은 건 역시나 MBC 월화 드라마로 돌아온 권음미 작가이다. 권음미 작가는 화성 연쇄살인을 <시그널>에 앞서 다루어 화제를 일으켰던 <갑동이>의 작가이다. <살인의 추억>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갑동이, 그 진범과 카피캣의 물고 물리는 흥미진진한 스릴러는 TVN 장르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 하지만 권음미 작가 역시 송재정 작가처럼 공중파 출신이다. 2008년 <종합병원>으로 첫 발을 내딛은 권작가는 이후 이제는 범사가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재벌가의 이면을 파헤친 <로열 패밀리(2011)>를 집필했다. <로열 패밀리>에서 크리에이터로서 박상연, 김영현 작가의 도움을 받았던 권작가는 이후 TVN으로 이적하여 드디어 자신의 색채가 듬뿍 담긴 <갑동이>를 통해 권음미라는 작가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이렇게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연 권음미 작가는 역시나 공중파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9월 26일부터 <캐리어를 끄는 여자>를 시작했다. 



독특하게도 사법 시험에 매번 미끄러져 사무장이 된 여자 차금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권작가는 앞서 <갑동이>처럼 잡히지 않는 연쇄 살인마를 최종 보스로 선정한다. 경찰의 손아귀를 비웃듯 그 뒤편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주인공을 지켜보며 그의 목을 죄어오는 설정은 <갑동이>에서 <캐리어를 끄는 여자>로 이어진다. 하지만 좀 더 장르물의 색채가 강했던 <갑동이>와 달리, 역시나 공중파라는 다중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캐리어을 끄는 여자>는 그보다는 말랑말랑하게 로맨틱 코미디와 법정 드라마, 그리고 스릴러의 절묘한 배합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이혼녀가 된 차금주(최지우 분)와 그를 스카웃하여 함께 미지의 범죄를 해결하고자 하는 파파라치 언론 대표 함복거(주진모 분), 그리고 풋내기 변호사 마석우(이준 분)의 삼각 관계와 협업이 이 드라마의 묘미이다. <원티드> 등의 스릴러 드라마들이 고전했던 것과 달리,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그런 미스터리물의 단점을 로코라는 당의정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고, 이제 3회에 불과하지만 압도적 <구르미 그린 달빛>을 제치지는 못하지만 동시간대 2위까지 치고 오르는 성과를 보건대 어느 정도 그 전략이 성공하고 있는 듯보인다. 


이에 앞서 TVN에서 <로맨스가 필요해>시즌을 썼던 정현정 작가가 이미 KBS2로 넘어와 <연애의 발견>에 이어 주말극 <아이가 다섯(2016)>을 선보이는가 하면, 일찌기 JTBC를 통해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를 통해 호평을 받았던 하명희 작가는 그 이후 <따뜻한 말 한 마디>, <상류 사회>, <닥터스>까지 공중파의 인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정현정 작가나 하명희 작가가 특유의 '사랑 이야기'로 케이블에서 공중파로 재진입에 성공했다면, 위의 송재정 작가나, 권음미 작가의 경우는 그간 공중파가 시도하지 않았던 신선한 이야기를 통해 공중파 드라마의 경직된 영역을 뚫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이들 작가들이 애초에 그 시작이 대부분 공중파였고, 자신만의 특별한 서사를 케이블을 통해 드러냈듯이, 그 반대의 경우로 그간 공중파에서 작업을 하다, 편성이 여의치 않자 케이블로 가서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다. <청춘시대>의 박연선 작가가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할 수 있다. 

by meditator 2016. 10. 4. 06:22

10월 2일에서 3일 연휴의 마지막 날을 넘어가는 밤 11시 40분, kbs 드라마 스페셜  2016 두 번 째 작품이 찾아왔다. 지난 주 80년대의 학교로 갔던 단막극은 이번 주 또 다른 시대, 현재의 학교로 시선을 옮긴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말도 안되는 학칙으로 학생들을 얽어맸던 학교는 이제, 그 보이는 규칙 대신, 이른바 '짱'이라는 학교 폭력의 또 다른 권위 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다.


클리세가 된 유구한 학교 폭력 
<빨간 선생님>이 그 배경을 여자 고등학교로 삼아서 그랬을 뿐이지, 이제는 전설이 된 영화<말죽거리 잔혹사>의 그 '잔혹'한 배경이 바로 개발 열풍이 한참 불어제치던 80년대의 말죽거리, 오늘의 양재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고 보면, 정권보다 그 생명력이 유구한 게 '학교 폭력'인 셈이다. 그리고 <학교> 시리즈를 비롯하여 주로 남자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치고 '학교 폭력'에 대해 다루지 않은 드라마가 거의 없으니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학교 폭력은 이제 거의 '클리셰'에 가깝다. 이 '뻔한 소재'에 대한 고민을 <전설의 셔틀>은 '희극(comedy)'이라는 장르를 통해 접근하고자 한다. 



소개에 따르면 '명실상부, 자타공인' 명성 고등학교의 짱 조태웅(서지웅 분), 그의 천하독존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드라마는 빵 셔틀을 위해 달리는 학생들의 급박한 모습으로 시작한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빵을 토스하며 조태웅 앞에 빵과 딸기 우유를 대령하는 학생들, 하지만 조태웅은 그런 학생들의 단말마적 경주에 대해 시간을 재며, 다음에는 좀 더 분발하라 으름짱을 놓는다. 그렇게 '권위'의 조태웅이 선생님 앞에서도 여유롭게 빵을 베어무는 그 반에, 이미 소문으로 17대 1로 학생들을 때려눕혔다 하는 서울의 강찬(이지훈 분)이 전학을 온다. 대뜸 새롭게 등장한 '전설의 주먹'을 눈빛으로 선제 공격하고 나선 조태웅과 달리, 피씨방에서부터 조태웅과 실랑이를 벌이던 조폭인 듯한 다짜고짜 끌고나가 때려눕히는 것에서부터 강찬은 태웅의 세계에 친밀하게 스며들어 온다. 하지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기 힘든 법, 찬의 관용적인 태도는 태웅의 강팍한 태도와 대비되며 태웅 일인독재 하에 신음하던 학교 아이들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데.....

'희극'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면 함께 등장하는 단어가, '풍자'와 '해학'이다. 나아가 '페이소스'도 좋은 희극의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런 그저 웃기는 것을 넘어 진짜 희극의 맛을 위해 <전설의 셔틀>이 등장시킨 캐릭터는 바로 한때 빵 셔틀로 자살까지 생각했었으마 전학이라는 인생 역전의 계기를 통해 다시는 셔틀을 하지 않기 위해, 17대1의 일진으로 자신을 조작한 전학생 강찬의 웃지못할 해프닝이다. 태웅과 아이들 앞에서는 강한 눈빛을 부라리며 전설의 짱인 척 하다가 뒤돌아 서며 그 상황을 모면했다, 혹은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안도, 혹은 기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찌질한 한때 빵셔틀이었던 이면을 보여주는 강찬의 이중적 캐릭터가 이 학교 폭력을 희화화한 <전설의 셔틀>의 묘미이다. 

하지만 그저 잘 속아넘겼던 안도의 묘미는 기존의 태웅과 달리,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 어쩔 수 없이 태웅에게 당하는 아이들을 위기에서 번번히 구출해 주는 상황을 만들어 가는 강찬에 대한 아이들의 호의, 그리고 뜻하지 않게 조우하게 된 찬이로 인해 빵 셔틀이 되었던 서재우(김진우 분)의 등장으로 인해 그저 순탄하게 학교 생활을 하기 위해 일진 흉내를 냈던 강찬이 결국 조태웅과 맞장을 떠야하는 상황으로 몰려가며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캐릭터는 흥미롭고, 이야기가 재밌긴한데 
전학을 간 학교에서 다시 빵셔틀을 하지 않기 위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조작하고 소문을 퍼뜨려 17대1의 전설적 영웅이 되어 나타난 강찬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하지만 극 초반 그런 강찬의 캐릭터와 그가 조태웅 그룹의 일원으로써 겪는 해프닝으로 끌고가는 전개는 어쩐지 좀 버거워 보인다. 그의 지난 빵 셔틀로서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이제 일진으로서 난처한 상황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와 거기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하거나, 다른 학생들의 피해를 줄여보려는 강찬의 고군분투는 분명 신선하지만, 그런 서사의 반복 혹은 점층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끌고가기엔 좀 버거워보였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대사를 선생님의 대사로 되풀이하여 상황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유오성으로부터 신입생 유준상 등의 카메로 군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것이 애초의 서사의 단조로움인지, 연출의 단순함인지, 아니면 연기의 단면성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남는다. 



외려 조태웅과 일전이 끝난 후 그때야 비로소 서재우와 둘이 앉아 마음을 터놓고 하는 이야기들, 공부만 하던 엄친아였던 서재우가 먼저 학교에서 늘 얻어터지던 강찬에 대한 폭력을 외면해서 미안했다던 속내와 그런 서재우에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빵 셔틀의 자리를 넘길 수 밖에 없었던 강찬의 피치못했던 상황에 대한 사과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 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서재우 역시 강찬이 떠넘긴 빵 셔틀, 즉 학교 폭력의 희생자로 전학을 택한 듯한데, 그 사연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강찬의 보조적 캐릭터로만 소모된 점이 극을 단조롭게 만든데 일조한 듯 보인다. 

<전설이 셔틀>이 학교 폭력을 그려내는 방식은 <목포는 항구다> 등의 조폭 코미디와 같은 방식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주인공이 다른 집단에 들어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그로 인해 해프닝을 버이게 되는, 즉 극 속의 폭력은 심각하지만, 몇 번의 해프닝을 통해 희화화되고, 쉽게 마음을 나누고 해소되는 갈등들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전설의 주먹으로 속여낸 강찬은 조태웅과 맞짱을 뜨게 되는 위기에서 뜻하지 않은 서재우를 비롯한 학생들의 도움과 역시나 우연히 내지른 발차기로 조태웅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런 강찬과의 일전에서 패자가 된 조태웅은 '보복' 대신 곱게 강찬의 친구로 거듭나고, 학교는 평화를 되찾았다는 '동화'같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런데 한때 옥상에 올라가 자살마저 생각했던 강찬의 인생역전을 '가볍게' 그려내는 방식이 그 상황을 그저 타자로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재밌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그 당자사에겐, 그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소모하는 방식이 아닌가란 우려를 덧붙이고 싶다. 특히나 현재 사회문제로서 '폴리스'가 학교 안에 상주해도 쉬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 대해, '소재적'으로 접근한 방식이 아닌가에 대한 노파심이다. 

by meditator 2016. 10. 3. 15:32

9월 29일 개봉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 이 영화의 원제는 해석한 그대로 Things to come, 그리고  L'avenir이다. 이 중 avenir 은 영어로 future 즉 미래이다. 이 희망 가득할 것같은 단어로 이름표를 붙인 영화, 하지만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맞이할 미래는 그녀를 원치않는 일상의 파괴로 밀어넣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건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의 장황한 철학적 담론이다. 68세대로 한때는 소련까지 가면서 급진적 흐름에 몸을 맡겼던 나탈리는 이제 파리의 한 고등학교의 철학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전히 '급진적'인 내용의 책을 읽으며 출근하는 그녀를 막아서는 건 경찰이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의 권리를 내세우며 교문을 봉쇄한 '급진적 주장'을 하는 학생들이다. 나탈리는 그 학생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대신 선생님으로 수업권을 주장하며 막아선 학생들을 제치고, 심지어 본의아니게 시위대에 발이 묶인 학생들을 설전을 하며 시위대로부터 '구출'해오기까지 한다. 그런가하면 급진적인 제자를 아들의 자조적인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여전히 철학 교사, 혹은 저자로서, 그리고 남편과의 대화 속 그녀는 '레디칼radical'한 진보적 지식인이다. 이런 자신의 삶을 '원칙'과 '행동'이 일치한 일관된 삶이라 자부하며.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 순 없었어? 
이제는 그녀가 쓴 교재의 재출간조차 여의치않은 한 물간 철학 교사,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사상이 정도를 걷고 있다 자부심을 느끼는 그녀에게 삶은 '자존'을 허락치 않는다. 25년을 서로의 사상을 배척하면서도 '부부'로서의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생각했던 남편은 그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 그 여자와 살겠다 선언한다. 한밤중에도 전화를 걸며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며 그녀에게 의지했던 홀어머니는 억지로 요양원에 모시자 그 삶의 일탈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곁을 떠난다. 표지를 바꾸는 것에도 허락할까말까 했었던 그녀의 철학 교재는 상업적 승산이 없어 재간 계획 자체가 무산된다. 늘 그녀를 종종걸음치게 만들었던 그녀의 삶이 이제 그녀의 곁을 떠나며 그녀를 공포스런 '미래'로 밀어넣는다. 



남편의 외도 고백에 대한 나탈리의 반응은 '왜 그걸 말해?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 순없었어?'이다. 이 말의 뉘앙스로 보건대, 아마도 아내 나탈리는 굳이 남편이 '고백'이 아니라도 그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녀들 앞에서 이들 부부의 대화는 신랄한 사상 투쟁 같아 보이지만, 그 '말'의 형식을 벗겨놓고 보면, '권태기'조차 지나버려 '애'보다는 '증'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한 부부란 이름의 '남의 편'들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편의 외도 고백에 그녀는 25년을 이리 살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줄 알았다며 배신감을 피력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아쉬워하는 건, 남편과의 별거로 인해 그가 가져가 버린 자신의 손때묻은 책과, 역시나 그녀의 손길이 닿은 여름 휴가지의 별장이다. 즉 '양심적 지식인'이라 자부했던 그녀의 일상들은 한꺼풀 벗겨놓고 보니 누군가의 아내, 자녀 그리고 풍족한 중산층의 안온한 삶이었을 뿐이다. 

젊은이에게 '미래'는 '꿈'과 함께 찾아오는 '희망'이지만, 굳어져가는 일상에 자족하며 사는 나이듦의 '미래'는 악몽과도 같다. 그녀는 이제 꿈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고, 욕망의 환타지라 정의 내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외도를 고백하는 남편에게 왜 나를 배신했냐 대신, 왜 그런 말을 하냐 반문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같던 결혼 생활은 사랑하는 남편에 의해, 올곧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사상적 삶은 애틋하게 여겼던 남제자에 의해 산산조각난다. 

버리면 채워지는 삶 
영화 속 나탈리는 어머니로 인한 울음 외에 두 번을 운다. 남편과의 이별? 혹은 자신의 손때묻은 별장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밤, 홀로 운다. 그리고 남편의 차를 타고 가는 나탈리의 눈빛은 그녀에게 닥친, '미래'란 이름의 상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실천적 삶이었다는 자신에 대해, 서명 따위나 하는게 무슨 실천이냐는 제자의 냉혹한 평가가 내려진 그 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그 제자와 애인의 흥건한 물놀이를 목격한 그 밤 그녀는 서럽게 오열한다. 그 서럽게 오열하는 그녀의 품에는 알레르기때문에 맡기 싫다는 어머니의 고양이 한 마리뿐이다. 마흔 넘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며 스스로 말했던 그녀가 화려한 원색의 드레스로, 나이든 몸을 한껏 드러내었던 그 곳에서, 어쩌면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잃은 양 서럽게 운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리고 놓치고 버려지며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아니 삶도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남편의 별장에서 몰래 울고, 다시 남제자의 시골 집에서 다시 한번 서럽게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었던, 하지만 의연했던 그녀는 버릴 것은 버리고, 그 버린 자리 시간을 방패삼아 미래를 메꿔간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그 서럽게 오열하며 이별했던 그 제자의 시골집에 다시 방문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어머니의 부재 이후 어디를 가든 낑낑거리며 끌고 다녔던 검은 고양이를 방면하기 위해. 그리고 관객에게 물음표 혹은 느낌표를 선사하는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역시나 가차없이 '방면'한다. 잠시 후에 찾아올 손주와 자녀들의 식사 준비를 서두르며. 

아마도 나탈리 또래의 우리네 어머니를 그린 영화라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남긴 고양이를 애지중기 키우며, 은근슬쩍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선물을 들고 찾아든 남편에게 궁시렁거리며 모처럼 온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가족애'와 '모성애'로 마무리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탈리는 늘 어머니의 집에서 움직이지 않아 들기조차 버거웠던, 하지만 시골집에 가자 그 하룻밤에 야생의 본능이 살아난 고양이를 자유로울 수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준다. 그리고 그 본능이 살아난 고양이처럼 하룻밤을 보낸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돌아온 집에서, 은근슬쩍 끼어든 남편을 거침없이 돌려보낸다. 대신 자녀들과 식사를 하며, 새로 생긴 손주를 달랜다. 그녀에게 닥쳤던 '미래'란 이름의 원치않는 자유는 이제 그녀의 다른 '현재'가 되어 그녀에게 새롭게 안착한다. 그것이 이자벨 위페르의 생생한 연기로 구현된 삶의 연속성이다.  

영화는 지난 2005년 출간된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의 여성편같다. 68세대로 진보적인 세대를 자부했던 남자가 세상이란 물결에 휩쓸려가던 이야기가, 이제 2016년 나이듦에 떠밀려 버린 68세대 여성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굳이 프랑스나, 68세대라는 수식어를 떼고 보면, 한때 '개혁'의 흐름에 앞장섰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나이들고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이른바 386으로 상징되었던 이들의 자화상을 대신 그려주는 듯하다. 아니 뭐 굳이 한때 진보란 수식어를 떼어놓고, 그저 나이듦이란 주제만 놓고 봐도 감상 요건은 충분하다. 아쉽다면 현재의 우리가 반추할 이런 내용들이 외국 영화를 통해, 그것도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것뿐. 
by meditator 2016. 10. 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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