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얼까'

8회가 끝나고, 이어진 9회 예고, 향기가 혼잣말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드라마 <여왕의 교실>도 초반 끓어오르던 마선생의 학생 인격 모독 논란을 거치며, 8회에 이르면서,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의 윤곽이 떠오른다. 과연, 교육이란 무엇일까? 21세기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20세기의 교실에서, 19세기의 선생님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

균형이 맞지 않은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문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20세기 교실이란?

흔히들 생각하듯이, 책상, 걸상, 교실 크기 등의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20세기 때의 문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파놉티콘'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는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으로, 건물 내부에 높이 솟은 중앙탑을 중심으로 죄수들의 독방이 빙 둘러 배치된 곳을 말한다. 이 감옥의 특징으로 말하자면, 중앙탑은 어둡고, 죄수들은 밝게 유지되어,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독방에 감금된 죄수들의 행동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고, 죄수들은 늘 감시 받고 있다는 압박감이 내재화되면서 일일이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규칙을 지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옥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해, 근대적 감시의 원형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즉, '시선의 비대칭성'은 피감시자와 감시자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을 낳고, 이런 원형이 학교, 병원, 공장 등 근대 사회의 곳곳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여왕의 교실의 강력한 메시지는 시작됐다!_3

 

그리고, <여왕의 교실> 속 마선생의 교실은, 바로 그 파놉티콘이라는 감방에서 유래한 근대적 교육의 극단적 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불편해 지는 것은, 마선생이 아이들을 전인격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데서 오는 반발감에 더불어,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교육의 본질을 포장되지 않은 뼈대 그 자체로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미셀 푸코는 모습을 알 수 없는 간수를 두려워하다, 나중에는 신성시 하게 되는 죄수들의 딜레마를 통해, 권력의 본질, 권력에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갈파한다. 그리고<여왕의 교실> 역시 마선생이 무리하면서도 혹독한 규율을 통해 반 아이들을 장악해 가려는 시도, 그리고 두려워하다, 거기에 굴복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역시나, 권력적 속성을 통해 아이들을 길들이는 것이 여전한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드라마답게 향기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런 마선생의 전형적인(?) 교육 방식을 일탈해 나간다. 하지만, 공부를 하기 싫어 모인 미술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른다거나, 이렇게 놀아도 될까 불안해 하거나, 막상 다같이 청소하자 했지만, 그 조차도 반 아이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해 불화를 겪는다거나 할 뿐이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규율과 벌칙으로 아이들을 혼돈에 빠뜨리고 언제 어디서나, 영화 <내니머피>의 유모처럼 아이들의 행로를 지켜보는 마선생의 모습을 보면, <여왕의 교실>이 지향하는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듯하다

19세기에도, 그리고 20세기에도 이 사회가 필요로 한 '역군'들의 생산 작업이 필수인 세상에서, 그들이 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거듭나기 위한 주입식 지식이 교육의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 21세기의 교실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학원'을 통해 사육당하는, 혹은 저마다의 개성이 각양각색인, 하지만, 한 자녀 혹은 기껏해야 두 자녀 가정이 주를 이루는, 그래서 그저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야생 동물같은, 하지만 상처가 많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_2

 

그리고 정말로,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며 아이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던 영화 <내니머피>의 유모처럼, 그 어떤 선생보다 아이들을 잘 아는 마선생은, 하나씩 하나씩 아이들이 닥친 문제를 터트리고 스스로 그걸 해결해 나가도록 역설적(?)으로 유도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얘들'이라는 무색의 단어 안에, 얼마나 수많은 고민과 고뇌들이 짖눌려 있는가를 <여왕의 교실>을 통해 깨닫게 되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질문이 남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무엇일까? 라는.

by meditator 2013. 7. 5. 10:15

미장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래 연극에서 시작된 용어로 소품, 의상, 분장, 조명 등의 요소를 연출자가 자신의 의도를 관객에게 제대로 잘 전달하기 위해 배치하는 것을 말하는데서 출발하여, 영화 속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서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된 용어입니다.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에 따르면 미장센이 뛰어나다는 것은, 영화 <시민 케인>처럼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조명, 각도, 앵글을 배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장센이란 용어가, 우리 영화로 돌아오면, 화면 상에서 감독이 자신의 주제를 보다 탐미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경향에 좀 더 힘이 들어간 듯합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홍련>이나,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와 같은 작품을 대표적으로 미장센이 뛰어난 영화가 일컫습니다.

 

(사진; 영화 <시민 케인> 중 한 장면)

 

그러던 '미장센'이란 단어가, 최근에 들어서는 드라마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텔레비젼 드라마를 즐기는 세대들이 보다 감각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 텔레비젼 드라마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이야기만이 아니라, 미장센을 통해 만드는 자의 입장을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주 시도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칼과 꽃>의 김용수 감독은 kbs드라마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통해 뛰어난 미장센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낸데 이어, <적도의 남자>에서도 그 특기를 잘 살려낸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시작한 <칼과 꽃>에서도 김용수 감독 특유의 '미장센'을 한껏 살려낸 화면은 영화 못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듯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런 선택은 어떨까요?'연출이 좋은 드라마와 작가가 좋은 드라마',

물론 애초에 이건 말이 안되죠. 드라마의 가장 기본 요소들인데, 그중 어느 것이 더 우위를 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드라마를 '작가 놀음'이라고 농담처럼 정의 내리듯이, 2시간 만에 승부를 내는 것이 아닌, 매주 2회씩 오랜 시간을 통해 끌어가야 하는 드라마에서, 이야기를 밀어가는 작가의 힘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조금만 시선을 끄는 그 무엇이 없으면 바로 리모컨으로 손이 가는 변덕스러운 상황에서, 잠깐만에라도 시선을 확 잡아끄는 연출의 능력 또한 무시못할 요소입니다.

하지만, <칼과 꽃>에 앞서 종영한<천명>에서처럼 제 아무리 연출이 미장센이 뛰어난 화면을 연출한다고 해도, 스토리가,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드라마는 공허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천명>에 뒤를 이은 <칼과 꽃>이 바로 그런 <천명>의 '도로'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겁니다.

 

(사진; 칼과 꽃, 티브엔)

 

 

 

 

물론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것은 <천명>에 비해, <칼과꽃>은 묵직한 두 중견 배우 김영철과 최민수가 영류와과 연개소문을 맡아 굳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대립되는 고구려의 두 세력의 팽팽한 기 싸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배우의 연기력이 그렇게 보여지게 한다는 것이지,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대립이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칼과 꽃>은 그 대립의 내용을 언제나 어느 사극에서나 그래왔던 왕의 세력과 신하들간의 역학 관계의 대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설정한 대신, 대립의 극한적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치중합니다. 극한의 클로즈 업을 통한 긴장감의 조성, 독대씬에서 보여진 탐미적인 분위기를 통해 대립을 설득해 내려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분위기 조차도, 보다 보면, 자꾸 어느 영화에서 봤지? 어떤 일본 드라마에서 본 거 같은데 하는 기시감을 불러 일으킬 뿐, 심각하기는 한데, 되돌아 보면 왜 심각하지란 반문을 하게 만드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도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대립 장면은 멋집니다. 하지만, 첫 회, 연충(엄태웅 분)과 공주(김옥빈 분)가 만나자 마자 첫 눈에 반한다는 설정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듭니다. 물론 엄태웅이 훌륭한 연기자인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만나자 마자 얼굴 근육을 풀리게 만들 정도의 대상이 되려면, 영화 <형사; duelist>의 무사(강동원 분) 정도는 되야, 시청자들이 공감을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만나자 마자 첫 눈에 반하더니, 질주하는 마차로 부터 공주를 구하기 위해 공주를 거꾸로 세우다 '눈이 맞는' 장면은, 암만해도 '미장센'의 부작용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연충은 그 방금 전에 자신을 쫓아오던 공주와 칼을 겨루기도 했었습니다. 제 아무리 공주가 이쁘다고 한들, 방금 전에 칼을 겨눈 그녀와 바로 사랑에 빠진다는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관련사진

(사진; 칼과 꽃의 한 장면, 한국일보)

 

 

첫 회의 <칼과 꽃>은 이야기를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대신, 몇 마디의 짧은 대사를 통한 선문답같은 메시지의 전달과 미장센이 뛰어나다 못해, 과잉이라고도 할 분위기를 통해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치장을 걷어내고 보면,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대립은 그 상황을 조선 시대에 가져다 놓아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것같은 고구려 특유의 역사성을 전달하지 못했고, 연충과 공주의 만남은 언제나 늘 그러하듯이 상투적이다 못해 그 뻔함이 낯부끄럽기 까지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장센이 뛰어나다고 했던 <장화홍련>과 <형사; duelist>는 그 평가의 반대편에 내용이 불충실하다는 지점도 있습니다. 앞선 작품에 비해 한결 더 미장센에 치중한 <칼과 꽃> 역시 부실한 대본을 가리려는 임기응변이 아닐까 해서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그런 얕은 수로는 시청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천명>이 보여주었는데, 또 다시 그 길을 <칼과 꽃>이 가려 하고 있다는 데서 안타까움은 배가됩니다.

by meditator 2013. 7. 4. 10:12

며칠 전 우리나라 부자들의 자수성가에 대한 기사가 났었다.

우리나라에 1조원이 넘는 재산을 가진 부자가 28명이 있는데, 그 중 자기 스스로 사업을 일으킨 사람은 단 6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타공인 우리 나라 최고의 재벌이라는 이건희 회장이나, 그의 뒤를 추격하는 정몽구 회장은 재벌 2세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뒤를 이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3,4등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들 자식 세대인 이재용, 정의선이다. 엎어치나, 메치나 이씨랑 정씨가(물론 그들끼리는 <황금의 제국>처럼 피터지게 쌈박질을 하는 사이라도) 재벌 순위를 채우고 있고, 심지어 이씨는 그 중 9명이나 된다. 그리고 이른바 자수성가라 할 사람은 겨우, 6명.

(이것이 왜 이상한 것인가는 미국의 재벌 분포도를 보면 된다. 그 잘 산다는 미국의 400대 재벌 중 70%에 다다른다고 한다.)

일본으로 부터 해방이 된지,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지 60여년이 조금 넘는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 다른 사람들은 겨우 집 한 칸 마련할 동안 부자들은 상상도 못할 부를 축적하며 대대대로 누리며 살아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kbs2의 월화 드라마<상어>는 그에 대한 해답 중 하나를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경쟁하기에는 버거워 보였던 <구가의서>의 종영을 기다리길도 한 것처럼, 천천히 템포를 늦추며 이야기를 전개시켰던 <상어>는 양 방송사의 상대작 <불의 여신 정이>와 <황금의 제국>의 시작에 발맞춰 이야기의 포문을 비로소 열어제낀 느낌이다.

하나씩 던져졌던 사건의 실마리가 꼼짝없이 조해우(손예진 분)의 아버지이자, 조상득(이정길 분)의 아들인 조의선( 김규철 분)의 지난 뺑소니 사건을 만천하에 폭로했고, 한이수이자, 김준(김남길 분)의 아버지 한영만(정의수 분)의 살인 사건에 혐의가 있는 것으로 몰고간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속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들의 실체도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그토록 조해우가 찾아 헤매는 한이수가 김준이란 사실을 아니, 추측을 조해우 만이 아니라, 조상국 회장까지 하게 되었고, 역으로 김준은 어수룩한 책방 주인이 바로 오형사의 살인범이자, 자기 아버지의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의 반, 타의 반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던 조해우는 이 모든 사건이 가리키고 있는 것, 이 모든 사건의 원죄가 바로 조상득 회장, 그의 선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역시나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조상득 회장은 책방 주인으로 짐작되는 사람과의 전화 통화에서 말한다.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조용히 살게 놔두지 않는다'고.

세상에 우국 충절의 독립 투사의 자손이라 칭송해 마지 않는 조상득 회장은, 그 누구라도 그의 선친과 관련된 사실을 들추는 사람은 가차없이 목숨을 뺏앗아야만 하는 '신분 세탁'을 거친 사람이다. 아마도, 그의 선친은, 그리고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라를 빼앗은 자들의 편에 들러붙어, 동포조차 팔아먹고 떡고물을 얻어, 그 것을 기반으로 오늘의 부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도 알려지다시피, 이렇게 해방 전에 '친일'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해방 후 '단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6.25를 거치며 미국과 손을 잡고 또 한번 재산을 뻥튀기하며 부의 성채를 구축해 간다.

뒤늦게 민족 문제 연구소의 '친일 인명 사전' 작업을 통해 밝혀졌듯이, 역대의 대통령으로 부터, 내로라하는 정, 재계, 문화계 인사들이 바로 실존의 조상득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드라마답게, 오늘날 현실의 재벌들이 2세, 3세 충실하게 그 부를 이어가고 있는 것과 달리, <상어>의 조상득 회장의 아들 조의선 사장은 안하무인 개망나니에, 손녀 조해우는 정의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범죄 증거를 검찰에 넘기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과연 <상어>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인을 저질러 가면서 자기 부친과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조상득 회장의 명예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해방 후에도, 그리고 4.19를 겪으면서도 늘 시도는 했었으되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주제가 '해묵지 않게' 신선하 주제 의식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점에서 의문이다. 역대의 대통령이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이었다는 사실 조차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조상득의 원죄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가 <상어>가 가진 딜레마가 될 수도 있겠다.

게다가, 드라마가 깔고 가는 묵직한 주제 의식과, 표면에 드러난 김준이 되어 나타난 한이수와 조해우의 사랑 이야기 사이의 균형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도 <상어>란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는가의 관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에 걸맞건 그렇지 않건, 드라마 <상어>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의미심장하다.

과거의 치욕을 덮고자 죄에 죄를 거듭하는 조상득 회장, 그의 도움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에게 협조하는 현직 검찰 총장 오현식, 그 커넥션은 오늘날 대한민국 부의 지형도를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준의 말처럼, 과거는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친일로 축적된 부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를 떠받들고, 이 시대의 특권층을 형성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떡고물로 인해 얽혀들어가 그의 마름이 된 수많은 하수인들이 여전히 진실을 왜곡시키고 부를 재생한하는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끝까지 <상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흔들림없이 잘 전달해 주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3. 7. 3. 10:16

강용석의 tv출연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그를 욕하던 사람들조차, 최근 종편과 케이블의 방송에 출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바꿔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심지어 호시탐탐 정치인으로써의 복귀를 노리는 그를 두고, 이러다 대통령 후보에 까지 나서는 거 아니냐는 우스개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무슨 대통령 후보! 라는 말에, 왜 안되냐고, 전 대통령이 <야망의 세월>과 <사랑과 야망>을 통해 대통령까지 됐는데, 강용석이라고 안될게 무어 있냐고 '이미지 세탁'의 성공적 사례까지 들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젼을 통해 등장한 인물들, 사건들의 이미지를 여과없이 받아들인다. <야망의 세월>이나, <사랑과 야망>의 남자 주인공은 그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모델이 된 누군가가, 정말 드라마 속 그 사람처럼, 의지의 입지전적 인물에, 정의롭고 양심적인 리더라 믿으며 한 표를 행사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 등장한 드라마 속 우리나라는 '수출 입국'에 '건설 입국'의 성장기의 화려한 조명만 반짝거렸었다. 한강을 따라 즐비한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신도시라는 신기루를 완성하기 위해 부서지고, 빼앗기고, 쫓겨난 삶의 흔적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을 딛고, 그 산동네를 탈피한 '개천에서 용난' 신화만이 부각되었었다.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각자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시킨 승리자가 되어야 했고, 그 성공 가도에서 일탈은 곧 그저 가난이 아니라, '패배자'라는 단호한 낙인까지 찍혀야 했다. 누구나 부지런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면 성공해서 번듯한 내 집 한 칸에서부터 대통령까지 될 수 있는 시대였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게으르고, 술독에 빠져있고 노름이나 하는 모자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사진; 스캔들의 한 장면, 뉴스엔)

 

하지만, 그 '성공시대' 대통령의 5년이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한때는 유행어였지만, 정작 히트작은 되지 못했던 어느 영화 주인공의 (사실은 실제 탈주범의)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현실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집을 가진 사람은 집을 가져서 '하우스 푸어'가 되고, 젊은이들은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88만원' 세대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성공'이란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빈익빈 부익부'의 처절한 리그만이 현실이 된 시대에, 이제 드라마는 한때 영광과 승리로만 윤색되던 시대를 솔직하게 복기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 성공 뒤에 스러진 삶들이 있다고.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과 1990년을 배경으로 한 <황금의 제국>은 공교롭게도 '건설 입국'의 뒤안길을 다룬다.

<스캔들>에서 등장한 건설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안전 기준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설계 도면을 고친다. 심지어,그로 인해 건물이 붕괴될 위기에도, 그리고 붕괴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죄과에 대한 반성이나,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우선되는 도덕적 불감증와 자본 이기주의의 끝장판을 보여준다.

<황금의 제국>에는 철거 대상인 건물과 거기에 남아 농성을 하는 사람들과, 철거 깡패들과, 그들을 부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또 다른 '건설 자본'이 등장한다.

<스캔들>에서 88년 올림픽은 범국가적 축제가 아니라,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시위도 할 수 없는 준계엄령이 상황이요, 그것을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아래 폭력적으로 밀어 붙일 수 있는, 그리고 건물 붕괴를 테러 위협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걸 보여준다.

 

(황금의 제국, 사진; 엑스포츠 뉴스)

 

<황금의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주의 아버지는 60평생 열심히 일해 가게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권리금까지 주었지만, 그 가게는 단 한 달만에 철거 대상이 되었고, 아버지에게 닥친 건, 철거 깡패의 무차별 폭력이요, 가게 주인이 응급실에서 생명의 경각에 놓인 태주의 아버지에게 돌려 준건 입에 발린 '기도'뿐이었다.

철거민들의 시위, 분신 자살, 철거 깡패,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건설 자본의 폭거, 이것이 이제와 무에 그리 새삼스러운 거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그 시절에는, 그저 대학생들의 유인물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진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혹은 신문 하단을 통해서만 단신으로만 전해지던, 절대로 방송을 통해서는 보여지지 않던, 역으로 성공의 팡파레만 울려퍼지던 그 시대의 사실들이, 이제야 버젓하게 그 시절 사실은 이랬다며 이야깃거리가 되어 나타난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용산을 비롯해서 많은 곳에서 철거 현장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다치고, 잡혀가고, 죽는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도 여러 첨탑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진행중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기의 이야기가 당장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 시절의 이야기들이 필요한 그 어느 때를, 이 시절의 이야기를 용감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그 어느 때를 또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대 '빈익빈 부익부'에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진실들은 묘한 위로가 된다. '성공'만이 삶의 바로미터가 아니라는 것을, '빈익빈'이 패배가 아니라, 제도적 부조리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통해 이 시절의 고단한 삶을 버틸 자존감을 심어준다.

by meditator 2013. 7. 2. 10:15

특수사건 전담반 텐(이하 텐)의 시즌2가 마무리되었다.

팀장 여지훈을 연쇄 살인범 F로 둔갑시켜버렸던 '언더스탠드'로 시작하여, 막내 팀원이었던 박민호(최우식 분)의 죽음(?)을 다룬 '박민호 납치 사건'으로 12부작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 여지훈(주상욱 분)은 이제 더는 당신들이 쓸모가 없다며 텐팀을 해체해 버린다.

하지만, 12 회의 마지막, 교도소의 문이 열리고, 아내를 죽였다는 모범수 한 사람이 출소한다. 8년이라, F의 마지막 연쇄 살인이 벌어진 지, 햇수로 8년이 흘렀다. 햇빛 속에 드러난 그의 실루엣을 잡은 카메라는 암시한다. 그가 바로, F라는 것을, 그리고 아마도 텐팀은 다시 모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투자만 된다면(?), 텐 시리즈는 계속 되리라는 것을.

 

텐 시즌 2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텐의 시즌 1,2회의 소제목, '언더스탠드'라 할 수 있겠다. 1,2회 수사에 참여하던 남애리는 F라 생각하며 쫓았던 사내의 아지트를 둘러보고 혼잣말을 한다. '언더스탠드,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말 그대로 이해를 한다는 것과, 세상에 드러난 사실 아래 숨겨진 진실이라는 것' 그리고 남애리의 이 정의 그대로 텐 시즌 2는 두 가지 언더스탠드를 향해 달려왔다. 왜?

 


텐 시즌 2는 스스로 F가 되어버린 여지훈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여지훈은 사라지고, 나머지 팀원들이 증거를 맞추어 보니, 모든 증거가 한 방향, 여지훈을 가리킨다. 특수 사건 전담반의 궁극적 목적과도 같은 것이 F의 체포였는데, 바로 그 F가 여지훈이었다니! 사실 여부는 둘째치고, 어느새 한 식구처럼 되어버린 팀원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팀장이 어쩌면 연쇄 살인마일 지로 모른다는 사실에 황망해져 버린다. 흔들림없는 좌표 자체가 사라진 느낌. 하지만, 역시나 특수사건 전담반답게 텐팀은 그런 '페이크' 조차도, 스스로 괴물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여지훈의 음모였음을 밝혀낸다.

그러나, F로 추정된 자와의 맞대결 과정에서 비닐에 싸여 숨이 막혀가는 남애리를 두고 범인을 쫓은 여지훈의 모습처럼, 범인을 쫓기 위해 자신을 믿고 따르던 팀원들까지 이용해 가며 F를 잡고자 괴물이 되어버린 여지훈의 모습은 팀원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를 의심했다는 사실도, 다시 그가 자신들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팀원 모두에겐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시즌2는 그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의 시간이자, 조금 더 서로를 알고, 믿어가는 시간이었다.

 

 

시즌1의 팀원들은 여지훈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처가 불쌍해서, 여지훈은 냉혈한 같지만 그와 함께 했던 것이라면, 시즌 2의 12회차를 겪으며, 남애리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박민호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맞부닥쳤을 때, 진심으로 여지훈을 이해할 거 같다는 그 말 처럼, 막연한 동정을 넘어, 괴물이 되어서라도 범인을 잡고 싶은, 여지훈의 심정을 공유해 간다.

이렇게 시작은 '짜~'하게 여지훈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사건으로 시작했지만, 텐2의 주된 내용은 서로를 이해해 가는 상징적 장치들로 가득하다. 즉, F와의 진검 승부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텐2가 텐 시리즈가 가져가야 할 치명적 플롯에 있어서는 마치 '스핀오프'처럼, 좀 맥이 빠지는 시리즈라 할 수도 있겠다. 더구나, 제작진들은 매 회 사건들을 통해, 선문답처럼, 텐 팀의 '언더스탠드'를 위한 화두를 던져댔지만, 과연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상징적 장치로 제대로 닿아갔는가라는 점에서도 의문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시리즈물에 있어서, 직선적인 사건의 전개가 아니라, 에돌아 가는 에피소드를 통해 등장인물 들의 관계를 점검해 보는 건 '미드'에서는 흔히 등장하는 방식이다. 마치 택시 운전사가 길을 모르는 손님을 태우고 삥 돌아 감으로써 택시비를 늘리듯이, 본 사건의 정공법을 잠시 접어두고, 에돌아 감으로써 시리즈의 수명을 늘리는 한편, 캐릭터를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수법이다. 어느 정도 시리즈 물의 지속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즉, 시즌 3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이렇게 여유롭게 시즌2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이 수법에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그 시리즈 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대를 에둘러 가는 만큼, 조금 더 본 사건이 진행되기를 기대하던 애청자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당연히 앞 시즌과의 비교에 있어서 비교 우위를 점하기 힘들기 때문에 늘 비교 절하의 대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텐>시즌2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시즌2의 초반에 여지훈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기에, 더더욱 기대감은 높아졌고, 그 이후의 스토리들이, 본 사건과 관련없는 에피소드들로, 심지어 그 에피소드물의 결론이 상투적으로 흘렀을 때, 더더욱 예전 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나올만 했다. 제작진은 선문답을 하려고 했는데, 시청자는 깨놓고 화끈하게 한 판 붙기을 원했달까? 그 덕분에, 아니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인지, <텐> 시즌2의 마지막 회는 그간 항상 위험의 안전 지대에 놓여서 애교와 코믹을 담당했던 박민호(최우식 분)를 위기에 빠뜨리는 극약 처방을 함으로써, 이것이 텐이라고 시즌 2의 마침표를 찍는다.

 

 

시즌1,2에 대한 비교나, 시즌 2의 내실성을 논하기에 앞서, 사실 그 어떤 공중파도 시간 내내 이만큼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보편적 '퀄리티'의 우수성은 짚고 넘어 가야 하겠다. 또한 영화에서나 볼 것같은 다양한 화면 구성 역시 스토리의 맛과 또 다르게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도 텐의 성과이다.

 

<신의 퀴즈>나 <뱀파이어 검사> 등이 시즌을 거듭하며 어설픈 사랑 이야기에 빠져 이야기의 본류를 잃거나, 급격하게 시리즈의 힘을 잃어갔던 것과 달리, 적어도 텐은 마지막 회 빗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서, 미소를 띠며 서로를 바라보는 거리감처럼, 팀원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제대로 견지해 냈다. 시즌1이 시리즈를 풀어가기 위해 선보였던 캐릭터들의 향연이, 시즌 2에 와서는 좀 무뎌진 듯 하지만, 남애리의 여지훈을 바라보는 미묘한 시점조차,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음으로써 시즌1의 애매모호함을 어떤 면에선 극복한 측면 조차 있다. 또한 언제 언디서나 확 눈이 뒤집힐 준비가 되어있는 백형사에, 폼잡는 여지훈의 잠언같은 한 마디로 마무리 되는 각 회차 등 캐릭터의 색깔을 놓치지 않고자 노력했다. 캐릭터의 성격은 놓치지 않고, 관계의 긴장감도 유지해 간것, 그것만으로도 텐2는 시리즈 물로써의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한 드라마 안에서도 등장인물이 널뛰기 하는 대한민국 드라마에서 이 정도면 시즌3 정도는 너끈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by meditator 2013. 7. 1. 10:13

sbs와 mbc의 10시 주말 드라마가 동시에 출격했다.

sbs는 이전 <출생의 비밀>이 한참 인기를 끌던 <백년의 유산>으로 반등의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 하기라도 한듯, <출생의 비밀>의 예정되어 있던 회차를 줄여가며, mbc<스캔들;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과 동시에 시작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리고 그 의욕을 뒷받침하듯, 남상미와 이상우의 적나라한 러브씬에 이은 베드씬에, 홍혜정(이태란 분), 송지선(조민수 분), 권은희(장영남 분)의 결혼 생활을 파노라마처럼 조망함으로써, '그 어떤 취향을 가진 고객도 다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 멘트와도 같은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늘 주말 시청률 1위 자리를 선점하던 kbs2의 8시 주말 드라마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던 <백년의 유산>의 후광을 업은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도 만만치 않다.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형사 하은중(갬재원 분)이 권총 사격 연습 중 오열하며 총기를 들고 폭주하며 도착한 곳은 바로 자신의 집이다. 거기서 그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 하명근(조재현 분)에게 총구를 겨눈다. 자신을 납치한 유괴범이라며. 그리고 드라마는 1988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태하 그룹 회장 장태하와 하명근의 악연이 시작된다.

 

(스캔들의 장태하 회장 역의 박상민- 사진; 마이데일리)

 

<스캔들>은 초반 몇 분을 제외하고는 198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결혼의 여신>은 2013년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에서 '트러블 메이커'는 재벌이다.

 

<스캔들>의 재벌 장태하는 88년 대한민국을 휩쓴 건설 강국의 주인공으로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설계 도면을 마구 뜯어 고치고, 그 결과 건물을 붕괴시키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88 올림픽이라는 것을 기회로 삼아 '테러'의 음모로 넘겨 버림으로써 자신의 죄과를 덮으려 하고, 아마도 거기에 하명근의 아들이 희생양이 될 것이다. 드라마는 하명근의 비극을 그려내기 이전에, 88올림픽을 앞두고 불도저를 들이밀고, 철거 깡패가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철거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태하 건설의 '원시적 축적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드라마 첫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외적으로 드러난 아동 납치범은 하명근이지만, 그 이면의 납치 사건을 조장한 본원적인 범죄자는 장태하라는 재벌이라는데 이 드라마의 촛점이 잡혀져있다.

 

<결혼의 여신>은 그저 서로 다른 네 명의 여인들의 결혼과 결혼을 앞둔 고민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중 두 명의 여인, 홍혜정과 송지혜(남상미 분)가 재벌집과 연관되어 있고, 나머지 여인들은 이 두 사람과 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다. 그리고 홍혜정과 송지혜의 삶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강태욱(김지훈 분)과 강태진(김정태 분)의 재벌가이다. 그리고 이 재벌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륜을 저지르는 강태진이나, 오히려 이혼을 한 며느리가 재벌가에 남아있는 홍혜정을 불쌍히 여기듯이, 안하무인에 이기적 전횡이 몸에 밴 집안이다.

 

(결혼의 여신 중 홍혜정- 사진; 마이 데일리)

 

<스캔들>이 재벌의 개인적 부도덕은 물론, 사회적 부도덕성에 집중하는 반면, <결혼의 여신>은 개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부도덕성은 물론, 뿌리깊은 '갑질'의 주범으로 재벌을 그려내고 있는 중이다.

우스개 소리로 대하민국 드라마에서 재벌이 나오지 않으면 드라마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새로 시작한 두 주말 드라마에서 재벌은 문제를 일으키고 확산 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거라고 시청률은 말해주고 있다. 지금 막 시작한 드라마 뿐이 아니다. <백년의 유산>도 그랬고, <출생의 비밀>도 그랬고, 스토리와 구성만 달라질 뿐, 언제나 문제의 시작은 그들이었다.

 

10시대 주말 드라마는 8시대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전연령층, 그 중에서도 중장년층이 타겟이다. 그런데 그들이 즐겨보는 드라마의 악의 축이 재벌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살면서 드라마속에서처럼 재벌과 엮이게 되는 일은 일생 가야 한번 있을까 말까 한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정반대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들과 엮이고, 그들로 인해 주인공들은 고통을 받는다.

예전 신데렐라 스토리가 한참일 때라면, 재벌과 엮인 그 이야기들이, 보통 사람들의 신분 상승의 환타지를 상징한다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 속 재벌들은 다르다. 그 누구보다도 부도덕하며, 온갖 사회적 비리의 주범이며, 극한의 찌질한 '갑질'을 일삼는다. 마치, 실생활에서 인간 관계로 엮이지 않아도, 우리 삶의 피폐함의 원인이 누구때문이라는 걸 '이심전심'으로 제작진과 시청자가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결국은 보통의 주인공이 승리를 얻는다. 하지만, 그 승리의 과정은 언제나 지고지난하다. 궁극의 승리를 위해서, 시청자들은 마지막회까지 되풀이되는 재벌가의 전횡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얻어질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승리를 드라마는 지루한 인내 끝에 선사한다. 덤으로, 인간답지 않은 재벌들을 마음껏 욕하며 얻는 카타르시스도

by meditator 2013. 6. 30. 09:54

구자철, 윤도현, 오현경

이 세 사람은 6월 28일 <땡큐>의 게스트들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당신 머리에 어떤 공통점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그렇기 보다는, 왜 저렇게 모아놨대? 라는 생뚱맞다는 반응이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그 반응처럼, 28일의 <땡큐>는 어색함으로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화면에 등장한 것은 오현경이었다.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란 그녀의 푸념도 무색하게 함께 할 차인표를 비롯한 세 남자들은 아직이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 나타난 윤도현은 오현경의 공치사도 무색하게, 이미 촬영 장비가 셋팅도 되기 전에 왔다고 선수를 친다. 하지만, 그런 오고가는 인사 치례 그뿐, 두 사람 사이엔 곧 머쓱한 정적이 흐른다. '개똥이' 시절 윤도현을 좋아했다는 오현경의 팬심이 그나마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함을 조금 풀어주었달까.

막내라고 가서 애교를 부려야지 다짐을 했던 구자철의 등장 이후에도 서먹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대한민국 누구나가 그렇듯이 민증까고 서열 정하기 부터 시작한다. 도대체 공감대를 찾을 수 없는 저 세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사진; tv 리포트)

 

그 의문은 차인표의 등장과 함께 자연스레 풀려 나갔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다니는 딸을 둔 두 아빠, 차인표와 윤도현의, 하지만 전혀 다른 교육 참여 방식으로 인해, 물꼬가 틔였다. 비록 싱글맘이지만 역시나 딸을 키우고 있는 오현경 역시 쉽게 이야기에 동화되어 갔다. 마치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 어디 나왔어?'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 가듯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또 누구나 아이 이야기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구자철 자신이 5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불평을 했듯이, 이제 막 결혼을 앞둔 구자철이 낄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틑 이야기는, 곧 결혼 생활 대처하는 차인표, 윤도현 두 사람의 자세, 즉, 20여년과 12년의 숙성된 경험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이제 결혼을 앞둔 구자철의 이야기로, 결혼에 대처하는 새 신랑의 자세와, 윤도현 결혼식에서의 박노해 신인 주례사까지, 선배들의 경험이 실린 멘토링으로 풀어져 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풀어져 나간,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오현경의 삶으로 까지 이어진다. 남들이 보기엔 번듯한 여배우인 오현경으로 하여금, 오래된 차 한 번 바꾸기나, 보험 하나 들기조차 버겁게 만드는 절박함의 속내조차 들여다 보도록 했다.

이렇게 결혼이란 제도의 서로 다른 지점을 살아가는 세 사람은 차인표란 매개체를 통해 결혼을 대처하는 세 가지 자세를 공유했다. 아마도 조만간 또 다른 결혼을 앞둔 '김조광수 커플'이 등장했다면, 더더욱 금상첨화이겠지만, 갓 결혼을 앞둔 구자철과, 싱글맘 오현경의 조합만으로도 구도는 신선해 보였다.

 

(사진; 노컷 뉴스)

 

물론, 28일 <땡큐>는 아슬아슬했다.

차인표와 윤도현이 같은 학부형으로 공감대를 나누고, 거기에 오현경이 동조하면, 구자철은 들어주어야 하고, 이제 막 결혼을 앞둔 구자철의 설레이는 사랑 이야기나, 오현경의 싱긍맘 생활 역시, 또 다른 사람들의 이해가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땡큐>는 그러저러한 서로 다른 결혼의 지점들을 '사연팔이'가 아니라, 게스트가 이야기 하면 무릎을 끓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차인표의 자세처럼, '진지한 공감'의 자세로 접근한다. 사실 그 어느 프로그램보다, 가장 <땡큐>가 잘 하는 것은, 이질적인 게스트의 조합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 해주게 되는 그 정감있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땡큐>란 프로그램에서 자주 마주치는 것은, 이야기 하는 누군가 만큼,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끄덕이며 들어주는 누군가이다.
그래서 처음엔 어거지같던 게스트의 조합들이, '자,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의 사연은 무엇입니까' 식의 토크쇼 방식이 아니라,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무언가를 먹어가며 자연스레 쌓이는 속정처럼 채워진다. 그래서, 마지막에 함께 갯벌에 나가 몸싸움을 하고, 하늘을 보고 갯벌에 드러눕고 , 노래를 하는 것이 하나도 어색해 지지 않을 만큼.

잘 들어주는 예능 <땡큐>를 보노라면,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고독한 이유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이 된다. 갓 결혼할 새 신랑이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든, 제 아무리 서로가 달라도, 귀를 여는 자세가 되어 있다면, 공감할 꺼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by meditator 2013. 6. 29. 09:50

드라마 <천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된 인종을 끝까지 향초를 이용해 독살하려던 대왕대비 문정왕후의 시도는 최원과 다인의 기지로 밝혀져, 결국 왕 앞에서 목숨을 구걸해야 했고, 자신의 아비가 최원을 죽였다 하여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곁을 떠나려 했던 다인은 최원과 결실을 맺고 최원과 함께 백성들의 병을 돌보며 행복하게 살았다. 어떤 한 점의 의혹도 없는 말끔한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명쾌한 엔딩을 보면 씁쓰레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에서는 문정왕후의 최후의 독살시도조차 막아내고 승리를 거둔 인종의 재위 기간이 단 8개월에 불과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사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 사건>을 비롯한 책에서는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로 결론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명>의 엔딩은 딜레마에 빠진다. 드라마 상에서는 문정왕후의 단말마같은 독살 시도를 막아낸 것으로 그려졌지만, 조선의 '서태후'라는 별명을 얻은 문정왕후가 과연 거기서 멈췄을까? 또 하나, 그런 문정왕후가 뻔히 궁궐에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위험 요소가 옆에 있는 걸 알면서도, 다인과 최원은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겠다고 궁궐 밖을 나오다니! 지금까지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던 두 사람의 행보치곤 너무 비논리적이지 않나? 결국 독살로 죽을 지도 모를 왕을 놔두다니, 이건 최원의 성격 상 '직무유기'라 느낄 거 같은데?

 

(사진; tv리포트)

 

언제나, 역사적 사실과 거기에 기초한 드라마에는 상상력과 허구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마치 역사가가 역사를 자신만의 잣대로 해석하듯,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또 한 사람의 역사가가 되어 역사를 해석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가능한 한 사실에 위배되지 않게 사실을 해석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번 주 종영한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가 끝난 후 주연 배우들은 인터뷰를 통해 악녀로 그려진 장희빈과 무기력하기만 한 숙종을 재해석했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의의를 설파했지만, 그 드라마가 장옥정과 숙종을 복원하기 위해, 또 다른 인물들을 왜곡하고 폄하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일본의 역사관이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핵심은 바로 그들 자신이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다는 피해자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핍박을 가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역사는 왜곡되고,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지속적을 상처입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천명>은 중종 연간 말기와 인종 연간 초기의 정치 세력의 격돌이라는 밑그림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의 독살 시도라는 야사의 주장, 그리고 거기에 왕을 지키려는 내의원 의원과 의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합집산이라는 상상력을 얹은 작품이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등을 보면, 드라마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세자를 죽이려던 문정왕후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게 그려져 있다. 자기 주변의 측근에만 의지하고, 자객을 부리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낮은 수준의 악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드라마 <천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자 죽음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문정왕후를 그려 내고 있다. 게다가 단순하게도 이 드라마를 끌고가는 역동적 동인이 오직 이거 하나다. 최원이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하면, 왕후가 또 하나의 시도를 하고, 그걸 해결하면, 또 사건을 벌이고. 그러다 보니, 20부작의 드라마가 단순해져 버렸다. 언제 어떤 회차를 봐도, 디테일은 달라도 흐름은 똑같다.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으로 비슷한 대사를 친다. 최원은 위기에 빠졌고, 다인은 그런 최원이 안타깝고 그런 식이다. 게다가 결국 드라마가 미션을 부여하는 문정왕후와 그것을 해결하는 최원 세력의 대결로 되다보니, 당연히 어떤 불운의 그림자도 없는 착한 편의 화려한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개월 후에 인종이 죽고, 그의 세력이 '을사사화'를 통해 모조리 제거가 되건 말건.

 

 

(사진; 헤럴드 경제)

 

과연 <천명>을 통해 제작진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회, 다인과 최원이 함께 복창을 하듯, 백성을 인술을 펼치는 휴머니스트 의원 최원의 이야기였을까? 그도 아니면 <추노>에 버금가는 도망자 버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딸을 위해서는 궁궐도, 도적들의 산채도, 감옥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을까? 하지만 이 궁금증은 마지막 회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비록 처음엔 거절했지만,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는 그토록 목숨을 걸고 왕을 구하려 하던 최원이 뜬금없이 백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논리도 이해가 되지 않고. 죽음에 이을 때까지 천하의 임꺽정에서 금부도사까지 무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화려한 무술 씬을 장황하게 선보이다 죽음에 이른 문정왕후 무사의 존재감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장옥정>으로 돌아가서, <장옥정> 제작진 측은 장희빈의 재해석이라고 주장했지만, 드라마를 통해서 보여진 것은 <해를 품은 달>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어설픈 시도였던 것처럼, <천명>에서 진하게 드리워진 , 조선판 도망자의 원래 버전 <추노>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무리수였다.

차라리, 도망자 버전 내의원이라는 어설픈 흉내를 내지 않고, 내의원이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버전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다면 어땠을까? 결국은 역사에서 패배자가 될 인종과 그의 세력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위해, 문정왕후와 인종의 대결을 사악한 마녀와 순한 피해자의 대결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운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시작할 때의 <천명>은 충분히 '봉황'을 그릴듯이 보였다. 하지만, 충분히 감동적이고 풍부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단순하게 마무리 해버린 <천명>이 그린 것은 '참새'인 듯 하여 아쉽다.

by meditator 2013. 6. 28. 09:54

이효리 vs. 김구라

<화신>은 마치 k1시합 홍보처럼 지난 주 내내 이효리와 김구라의 만남을 홍보했었다. 그리고 그 화제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다른 때와 다르게 방송 15분전부터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 하거나, 서먹서먹하거나, 정적이 흐르는 스튜디오를 보여줌으로써, 아직도 얼마나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껄끄러워하고 있는가를 가감없이 전달해 주려고 했다.

그리고 방송이 시작되자, 어쩔 수 없이 이효리와 김구라는 말을 섞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땀을 뻘뻘 흘리는 김구라의 사죄와 대인배 이효리라는 수식어로 이효리와 김구라의 악연은 훈훈하게 포장되었다.

<라디오 스타>에서 밝혔듯이 이효리는 예능을 순회 중이지만, 그녀와 껄끄러운 누군가가 출연하는 방송은 피하고 있다고 했다. <라디오 스타>에서 그녀가 말한 그 방송은, 한때 그녀와 연애를 했다고 풍문이 돌았던 누군가가 출연하고 있는 모 프로인 것처럼 몰아갔었다. 그런데 꼭 사적인 악연만이 아니었다. <화신>에서 밝혔듯이, 이효리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것도, 이어서 <화신>에 출연하고자 했던 것도 모두 김구라가 그곳에 없을 때였다고 한다. 다행히, <라디오 스타>에서의 조우는 피했지만, <화신>에서 결국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문희준이 김구라의 사과에 이어 형님으로 모시며 그와 방송을 함께 하게 되기까지의,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처럼, 이효리 역시 '홍보'라는 '밥벌이의 숙명'이 그녀로 하여금 방송을 통한 화해 모드를 강요하게 만들었다.

 

관련사진

(사진; 한국일보)

 

그런데, 굳이 방송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김구라와 함께 방송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어내면서 참여한 <화신>이 이효리가 원하던 바의 홍보 효과를 충분히 얻어냈을까?

언제나 그렇듯, '풍무으로 들었소?"라는 걸 통해 <화신>측은 이효리에게 이상순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이제 많은 프로그래을 통해 널리 알려진 두 사람의 관계 외에, 자칭 기자 모드라는 봉태규의 치밀한 조사를 통해, 이젠, 이상순의 실체, 이상순의 집안에 대한 뒷조사 까지 들어갔다.

이효리 자신도 방송을 통해 말한다. 자신이 예능에 출연하는 이유는 홍보를 위해서인데, 막상 방송에 나가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안물어보고 오로지 자신의 연애사에만 모두들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자기 역시 방송이니, 때로는 과장하는 것도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함께 보고 나면 이상순이 속상해할 때도 있다고. 그에 대해 mc 봉태규도 공감했다. 자신도 공개 연애를 해봐서 아는데,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알려져 있다보니, 상대방이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게 된다고. 정말 이효리가 나온 예능만 따라가다 보면, 인간 이효리보다, 인간 이상순에 대한 학습 효과가 커지니, 본인이 그걸 즐기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이효리와 사귄다는 이유만으로, 이상순은 그의 모든 걸 본의 아니게 대중들에게 쏟아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효리의 말에 대한 공감도 잠시, 다시 열심히 그가 찾아낸 풍문에 몰두하는 봉태규의 모습에서 이상순의 인신 보호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사진; 일간 스포츠)

 

그렇게 해서라도 출연한 방송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알릴 수 있다면 그나마 '홍보'라는 걸 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공교롭게도, 25일 <화신>의 출연자 중 세 사람, 이효리, 씨엘, 이준은 본인이나, 그가 소속한 팀이 새로운 신곡을 최근에 선보였었다. 하지만, 25일 방송 중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봐야, 이효리를 Bad girl에 비유한 정도에, 씨엘의 뮤직 비디오 의상이 여러 벌이었다는 정도? 그 대신 이른바 풍문을 들었다는 이효리의 연애 이야기, 이준과 현아의 열애설 몰아가기가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심지어 씨엘은 몇 마디 하지도 못한 채. 2회분에 걸쳐 방영되는 이 게스트들의 조합, 다음 주는 '홍보'를 기대해 봐도 될까? 하지만 지금까지의 <화신>의 성격 상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순위제로 바뀐 음악 프로에서, 후배들과 나란히 서서 저를 찍어주세요 하는데 무안하다는 이효리가 자신의 음악을 알릴 곳이 공중파에서는 거의 없다. 이효리 뿐만이 아니다. 소속사와 방송국의 불화로 sbs를 제외하고는 음악 프로에 출연하지 않는 씨엘도 마찬가지다. 순위제가 아닌 공중파 유일의 진짜 고품격 음악 방송 <유희열의 스케치 북>이 있다고? 금요일 밤 1시가 다 되어서야 방송을 하는 이 프로그램에 나가느니, 예능에 나와 신상털이라도 하는 게 그래도 더 홍보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이효리를 비롯한 가수들이 신곡이 나오면 예능 프로그램을 순회하는 것이다. <가요 무대>가 유구한 전통을 뽐내며 고정적 시청층을 확보해 가고 있는 것과 달리, 가수들은, 더구나 아이돌이 아니라면 제 아무리 좋은 곡을 가지고 나와도 자신의 음악을 알릴 기회가 없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용서하고, 그와 함께 웃으며 방송을 하고, 음악 얘기는 커녕, 자신의 연애 이야기만 속속들이 털어야 하는 '홍보'의 고달픔, 그래도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했으니, 어느 정도 성과는 얻은 건가?

by meditator 2013. 6. 26. 09:47

<힐링 캠프>가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2주년이라, 시청률에 목을 매단 채 명멸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방송 프로그램들 가운데서, 2년을 버텼다는 건, 분명 자축할 만한 일이다. 더우기,그저 연명의 의미가 아니라, 한때 제왕이었던 <무르팍 도사>를 제치고, 1인 게스트를 초대하는 토크쇼로서, 각 당의 대통령 후보를 비롯하여, 가장 화제성있는 인물들의 방문지로서, <힐링 캠프>의 가치가 빛나고 있는 이 시점, 2주년은 더더욱 자축할 만 하다.

 

그리고 그 2주년을 이르게 한데 공로에 있어 굳이 줄을 세우자면, 관록의 mc 이경규나 토크의 달인 김제동보다 한혜진을 앞 줄에 세우는데 한 표를 던질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을 지도 모른다.

<힐링 캠프>를 보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채널을 돌리다 한혜진이 나오면 몇 초라도 그녀를 보다가 다시 다른 채널로 돌린다는 말처럼 그녀는 대한민국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쁘다. 하지만 이쁜 것만이 아니다. 맑은 눈망울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리스너로서의 진정성은 출연자도 힐링을 하고,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도 힐링을 해야 하는<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의 성격을 살리는데 톡톡히 일조해 왔다. 어디 그뿐인가, 24일 방송에서 그녀 스스로 집안 내력이라고 밝히듯이, 이른바 이경규나 김제동도 선뜻 해내지 못하는 돌직구를 통해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는 그 부분을 긁어 주었고, 마음 속에 담아 두고 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대신 통쾌하게 던져 주었다. 대통령 후보들의 별명을 지을 간 큰 mc가 대한민국에서 그녀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렇게 <힐링 캠프>를 힐링 캠프답게 만들어 주던 한혜진이 결혼을 한다. <힐링 캠프>는 2주년 특집 방송의 첫 번 째 기획으로, 결혼을 앞둔 한혜진을 게스트의 자리로 끌어다 앉혔다.

다른 게스트 들이 했던 것처럼, 한없이 밝아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우울하고 힘들었던 학창 시절, 긴 무명 시절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고, 형부인 김강우의 말을 빌어, 한 집안을 이끌어 온 가장의 면모까지 밝혀 주었다.

그리고, 어렵게 이경규가 말을 꺼낸다. 공인이라 칭해지는 연예인은 그의 사생활과 대중들의 알 권리 사이에 상충되는 지점이 있다고, 옆에 있는 김제동도 거든다. 한혜진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서 질문이 던져진다. 이제 결혼을 앞둔 한혜진에게, 그녀의 과거의 연애사에 대한.

말이 토크쇼지, 청문회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 정확하게 헤어진 거냐? 아버지 장례식에 그 사람이 온 건 왜냐? 그때는 사귀지 않았을 때냐?

이어서 결혼할 기성용과의 연애사에서도, 시점이 중요했다. 언제 남자로 느껴졌냐?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냐?

한 식구였던 한혜진이 결혼을 한다는데, 더구나 결혼 날짜도 앞둔 한혜진에게, 지난 연애사의 역사적 사실까지 들추며 이리 가혹하게 청문회성 질문들이 던져져야 할까?

그것이 바로 한 식구였던 한혜진을 홀가분하게 보내기 위해 <힐링 캠프>가 마련한 배려였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남의 연애사일 뿐인데, 그 남의 일에, 침 튀기며 흥분하며, 감 놔라, 배 놔라, 훈수를 두는 혹자들을 위해, 한혜진의 먼지 한 점이라도 탈탈 털어 홀가분하게 결혼을 하게 해주려는 웃지못할 해프닝인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결혼할 사람 앞에서, 웃으면서 여유있는 척 해명해야 하는 게 공인이란 이름의 슬픈 숙명이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된다.

한혜진이 누구랑 언제 헤어졌는지, 누구와 언제 만났는지, 혹시나 양다리를 걸쳤는지가 왜 대중들의 알 권리여야 하는 건지, 그저 한 사람의 사생활일 뿐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 권리라 생각하고, 그걸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증권가의 찌라시를 회자시키고, 입에서 입으로 옮긴다.

이경규와 김제동이, 묵직하게 상충한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그건 개인의 사생활일 뿐이다. 그런데 그걸 '공인'이란 명목하에, 알 권리로 둔갑시킨 건, 엄밀하게 미디어의 힘을 빌린 또 다른 폭력이다.

by meditator 2013. 6. 25.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