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니?"

<출생의 비밀>의 주제를 단 한 마디로 농축해야 한다면, 아마도 이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여러분, 밥은 먹고 다니십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래? 밥 안 먹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출생의 비밀>의 여주인공, 정이현(성유리 분)도 그랬다. 당장 회사가 뒤집혀 난리를 치고 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홍경두(유준상 분)가 이 말을 했을 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마도 속으론 육두문자를 날리지 않았을까?

 

21일밤 <나 혼자 산다>에는 함께 워크샵을 떠난 무지개 회원 들 앞에 2교시 선생님으로 철학자 강신주씨가 등장해, 밥의 철학을 논했다. 강신주 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날 그날 하루를 때우기 위해 먹고 사는데, 이건 밥이 아니다, 사료다 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사료가 밥이 되기 위해서는, 밥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여유와,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기쁨이 따라야 한다고 부연 설명을 붙인다.

이런 강신주 철학자의 설명에 의거해, 사료를 흡입하고 사는 대부분의 요즘 사람들이라면, <출생의 비밀>의 "밥은 먹고 다니니?"를 이해할 리 만무하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바쁜 우리에게 '사료'가 아닌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울림이 허왕하듯이, 함께 나누는 '밥'의 의미를 반추하고자 의도했던, '밥' 이상의 욕망의 무가치함을 논하려 했던 <출생의 비밀>은 '사료'의 물결에밀려 허겁지겁 18부작으로 종영하는 성급한 마무리로 종결되었다.

 

(사진; 노컷뉴스)

 

18회, 아마도 이 마지막 회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은 홍경두와 정이현의 화해의 입맞춤이 아니라, 파킨슨씨 병에 걸려 어린 시절로 돌아간 최석(이효정 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최국(김갑수 분)의 모습일 것이다.

한때 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형을 죽이려 했던 동생, 그리고 그 동생에 의해 반신불수에 어리버리해져 버린 형과, 모든 것을 차지하려 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육신조차도 돌보지 못할 처지가 되어버린 동생이 함께 동화책을 읽고, 로봇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그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도, 더 선명하게 욕망의 무기력한 끝을 정의내리고 있다.

 

'백년의 유산에는 유산이 없고, 출생의 비밀에는 비밀이 없다'는

세간의 우스개처럼, <출생의 비밀>에는 그 어떤 막장의 요소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떻게 야수같은 홍경두와 천사같은 정이현 사이에서 이쁜 해듬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출생의 비밀이겠지만, 그 드라마 제목에 낚여서 들여다 볼 시청자들이 흡족할 만한 롤러코스터의 극적 흥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차근차근 잃어버린 정이현의 기억을 따라가며, 정이현의 주변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반추해 봐야 하는, 마치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와도 같은, '속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김규완 작가의 작품에는 언제나 선명한 '욕망'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욕망을 둘러싼 사람들의 다양한 접근을 가지고, 종교적이리만큼 집요하게,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늘 김규완 작가가 하고자 했던 바였다.

<신데렐라 언니>는 그 주제를 초반에 분명한 방점으로 찍었다, 대성도가와 사랑을 둘러싼, 은조 모와 은조, 효선, 그리고 기훈의 욕망의 파노라마를 적나라하게 제시함으로써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어모았다.

반면, 똑같이 인간의 거침없는 욕망에 대해 논하면서도, <출생의 비밀>은 뜻을 알 수 없는 제목처럼,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바를, 홍경두의 기행에, 정이현에 기억 상실 뒤에 숨겨 놓음으로써 이 드라마의 정체를 오리무중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추리적 요소를 가미하여 알고보니 천사같은 정이현이 바로 그 욕망의 도가니에 스스로를 재물로 던져넣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드라마의 재미를 살리고자 했겠지만, 극의 구조만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결국은 제 풀에 되돌아 오는 기억이라는 어설픈 설정으로 재미도, 추리의 묘미도 살려내지 못했다. 아마도 굳이 시청률의 패인을 따지자며, 그것이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극의 중반에 이르도록, 이현의 기억 상실의 비밀을 아껴둔 채,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헷갈리게 만든 난해함이 극의 발목을 잡았다.

 

(사진; 리뷰스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언니>가 초반에 짜하게 욕망의 잔치상을 벌려놓고, 후반에 수습을 제대로 못해, 초반 시놉만 그럴 듯한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출생의 비밀>은 오히려, 마지막 회의 70여분이 아쉬울 정도로, 줄여버린 2회 분량이 섭섭할 정도로, 끝으로 갈 수록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던 드라마이다. 용두사미였던 전작의 아쉬움을 극복하고, 끝까지 해야 할 말을 비축한 주제 의식이 살아있는 드라마였다는 점에서 작가의 성취를 인정해 줘야 할 드라마인 것이다. 적어도 시청률이라 편한 잣대만으로 폄하될 드라마는 아니다.

 

홍경두의 캐릭터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당연히 시청률을 깍아먹는 불손한 캐릭터이다.

돈도 없죠, 무식하죠, 다짜고짜 행동부터 하고 보는, 하지만, 마지막 회, 박본부장이, 홍경두의 여름에는 수박, 겨울에는 고구마라는, 뜬금없는 '밥' 타령에 자살을 거둬들였듯이, 김규완 작가는, 욕망을 향한 계산만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처방은, 홍경두와 같은 단순무식한 바보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통해 국민 남편이 되었던 유준상이 탐낼만한 치유의 캐릭터다. 하지만 역설적이고, 난해하다.

줄어버린 2회 때문일까, 홍경두의 바보같은 사랑은 이해가 되지만, 경두와 이현의 다시 되찾은 사랑이 100%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상당히 작위적이다. 하지만, 최석이 구축하려고 했던 욕망의 성채에 아버지 보차 외면한 채 자신을 던지려고 했던 이현의 치료제로 조건없는 사랑을 주는 홍경두가 있는 그림이 그리 싫지는 않다. 그래도 머리 속에 팽팽 계산기가 돌아가는 이 세속적인 세상에, 저 구도가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건 미지수다.

by meditator 2013. 6. 24.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