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명의 게스트들과 20회의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

<땡큐> 마지막 회, 갑작스럽게 폐지 통보를 받은 것인지, 그간 <땡큐>를 이끌어오던 mc 차인표의 마지막 인사 한 마디를 육성으로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제작진은 처음 <땡큐>를 시작하던날, 첫 게스트 박찬호를 만나기 위해 바삐 걸어오던 그의 모습과  <땡큐>의 정체성을 묻는 박찬호의 질문에,  그 자신도 다큐인지, 예능인지 헷갈려 하는 초짜 mc 차인표의 진지한 어눌함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 이르러서까지, 피디 자신도 어쩌면 여전히 다큐와 예능의 경계선에 서있음을 고백한 마지막까지 어정쩡했던 <땡큐>가 사라졌다. 

8년을 한결같이 달려온 <놀러와>가 자막 하나로 사라진 이래, 더 이상 어떤 프로그램의 생존 여부나, 아름다운 마무리 따위가 회자되지 않는다.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을 우리 아이들의 아침 시간을 달래주던 <뽀뽀뽀>가 사라져도. 이제는 모든 것이 그저, 그러려니, '효용' 가치가 사라지면 무참히 버려지려니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6% 의 시청률을 턱걸이하는 <땡큐>의 존속을 바라는 건 언감생심일 수도 있겠다. 

2013년 3월에 시작해서 이제 8월, 반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20회의 여행을 다니며, 99명의 게스트를 모신 <땡큐>는 어쩌면 애초에 힐링을 주는 게스트의 섭외가 그렇게 지속적으로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에 비하면 오래한 것일 지도 모른다. 


첫 출연자가 당대 최고의 힐링 멘토 혜민 스님과 이제 막 은퇴한 야구선수 박찬호 였던 것에 비해 마지막회의 출연자가 영화 <숨바꼭질>을 홍보하기 위해 나온 손현주, 문정희에 연기자로서의 새 출발을 알리러 나온 보아인 것을 보면, 힐링 다큐에 방점을 찍다가, 결국은 집단 예능 토크쇼가 되어간 <땡큐>의 한계가 그대로 보여진 것일 수도 있다. 

첫 회 <땡큐>는 스님에게조차 첫사랑의 아픔을 물어볼 정도로, 그 사람의 직위나 존재에 압도당하지 않은 채 조심스레 사람과 사람으로 인연을 만들어 가던,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는, 출연자들이 함께 한강 다리에, 혹시나 좌절하여 그곳을 찾을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담은 글귀를 남기었던 실천적 멘토링을 했었다.  
이제 마지막 회에 이르러서는 딱 보기에도 손현주를 비롯한 그 자리에 모인 유해진, 무술 감독 박정률, 야구 해설가 이병훈 등에 비해 삶의 연륜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분명한 오죽하면 보아 자신이 민망했던 듯 엔딩에서 많이 배우고 간다라는 감상을 말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아시아의 별'로 치켜세우며 너도 나도 보아라면 무조건 좋다라는 식의 오글거릴 정도의 예능 특유의 호들갑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행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해피 투게더>랑 무에 그리 다를 게 있을까 싶게. 
물론 짧은 시간에 그렇게 변해 온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다큐인지, 예능인지 모를 정체성조차 불분명한 <땡큐>가 '힐링'이 대세인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좋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자는 소박한 취지는, 상대 방송국 프로그램의 상대적으로 높은 시청률로 인해, 2회에 걸쳐 느그하게 누렸던 여행의 호흡을 바트게 1회 안에 꾸려 넣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이고, 생각 외로 존경받을 만한 사회적 멘토들이 많지 않은, 그리고 그들의 tv출연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대부분 출연자들이 '홍보'를 목적으로 한 연예인들 위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주 특별했던 <땡큐>는 어느 틈에, 그저 그런 연예인들의 또 다른 집단 토크쇼가 되어버려가는 게 불가피하다, 이정도면 많이 버텼다 자평했을 수도 있겠다.

(사진; tv리포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땡큐>의 종영은 아쉽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밤을 새며 자신의 경계를 풀고 나누던 이야기의 추억은, 본래의 색깔이 바래졌어도 그 미덕은 여전히 유효하다. 제 아무리, 출연자 누군가를 오글거릴 정도로 치켜세워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행간에서 찾아지는 진심 또한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유해진과 류승룡이 한 달간 비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시간을 즐겼던 거지 라고 말할 수 있는 손현주의 느긋한 품성을 <땡큐>가 아니라면 찾아내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많이 평범해 졌지만, 여전히 '힐링'의 여지가 있는 프로그램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 꿰어차는 것이 실험용 파일럿 프로그램들인 한에서, 그것도 타 방송의 아류 프로그램들인 한에서, 그냥, <땡큐>나 보게 놔둬요~!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공공 부문과 사적 기업의 차이는 흔히, 가치와 효용의 차이로 나뉘어진다. 공공 부문은 효율적으로 일을 해야 하지만, 결코 공공성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사적 기업은 보다 이익을 중심으로 효율성을 우위에 놓고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은 '효율'과 '생존'이라는 명목 하에, 효용 가치가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방송은, 이 둘 중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공중파는 말 그대로 공중의 기기이면서도, 그 활용 논리는 지극히 사적이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전가보도처럼 씌여진다. 금요일 밤의 늦은 시간일랑, 쫌 놔두면 안될까. 그 시간까지, 굳이, 케이블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따라잡을  또 다른 서바이벌에 시청자들을 몰아세우는게 공중파의 바른 자세일까? 공중파는 꼭 흥행 위주의 케이블보다 높은 시청률을 유지해야 할까? 

물론 그저 그런 연예인 토크쇼로 전락해 버린 <땡큐>의 책임도 크다. 지리산 산골만 뒤져도 이원규에, 박남준에, 정말 세속에 찌든 사람들을 '힐링' 시켜줄 무소요의 삶을 실천하는 '멘토'들이 널렸다. 그런 분들을 모신 진짜 힐링 <땡큐>의 존속을 기대하는 건, 시청률 경쟁만이 난무하는 공중파에선 이젠 무리일까. 시청률 상관없이, 그저 이런 프로 하나쯤은 좀 놔두면 안될까. 시효가 지난 맥빠진 질문만 던져본다. 


by meditator 2013. 8. 10. 10:27
홍미란, 홍정은 자매(이하 홍자매) 작가의 작품에는 이른바 창의적인 측면에서 늘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자매의 작품은 노골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유행했던 미국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온다던거가,(<빅>, <환상의 커플> 등),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나 만화 등의 포맷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경우가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미남이시네요> 등)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근한 서사의 되풀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홍자매의 작품이 방영되면, 일단 보게 되는 '믿고 보는' 드라마가 된 데에는, '창의성'을 뛰어넘는, 홍자매만의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맛깔나는 뒤틀기가 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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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이 귀신을 보는 설정은 이미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이다. 가깝게는 2011년 개봉한 손예진 주연의 <오싹한 연애>가 있고, 조금 더 시야를 넓히면, 시즌을 거듭하고 있는 미국드라마 <고스트 위스퍼러>, <고스트 앤 크라임>, <슈퍼 내츄럴> 등이 있다. 

제목이 노골적으로 <주군의 태양>이듯이, 남자 주인공 주중원과 여자 주인공 태공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주군의 태양>은 굵직한 스토리로 보면, <오싹한 연애>의 귀신을 보는 여자와 사랑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여주인공이 귀신과의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귀신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채 이승의 곤란함을 겪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가 하면, 귀신을 보기 때문에 밤에는 잠도 못자는 여주인공에게 어드벤티지를 주는 것은 그의 옷깃이라도 잡으면 귀신이 싹 사라지는 남자주인공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영매가 된 여주인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형식을 띤다면, 드라마는 언제나 홍자매의 드라마가 그래왔듯이, 남,여 주인공은 어떤 이해 관계를 매개로 얽히게 되고, 얽히다 보니 서로의 진심, 특히나 보기엔 별 볼일 없지만, 알고보니 괜찮은 여자라는 여주인공의 실체라던가, 보기엔 멋져보였는데 알고보니 불쌍한 남자였다는 반전의 매력을 선사한다. 
즉 홍자매의 인간형들은 언제나 등장할 때는 지극히 타산적이거나, 혹은 타산적이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여, 혹은 남주인공으로 인해 '진정한 인간'으로 교화되는 '승화'의 드라마저 감동을 그려낸다. <주군의 태양>은 이미 제목에서 그 특징을 드러낸다. 쇼핑몰의 사장 주중원은 마치 왕조시대의 '주군'처럼 쇼핑몰의 대표로서 전폭적인 권능을 행사한다면, 백수의 수준에서 겨우 벗어나 쇼핑몰의 아르바이트 청소직으로 취직한 태공실은 겨우 '태양'으로 불린다. 하지만, 여느 홍자매의 드라마처럼, 귀신을 보는 또 다른 권능을 지닌 태양은 결국 주군의 묵은 해원을 풀어줄, 그리고 얼어붙은 주군의 심장을 녹여줄 구세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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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매회 펼쳐지는 주된 에피소드는 오히려 미드 <고스트 위스퍼러>난 <고스트 앤 크라임>처럼 여주인공이 영매가 되어 억울한 사연으로 인하여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는 성격이 부각된다. 물론 이것은 좀 더 시야를 확장하면, 여름이면 찾아왔던 <전설의 고향>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등장할 때는 무시무시한 귀신이었는데, 알고보니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거나 하는 식이다. 
더구나 <주군의 태양>에 지금까지 2회에 걸쳐 등장한 귀신들은 이른바 도시괴담류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에피소드들이다. 죽은 친구를 불러내는 여고생들의 '분신사바' 해프닝이나, 결혼할 여인이 바라보는 거울을 통해 지켜보는 또 다른 신부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익숙한 설정들이다. 
하지만 여름이면 공포 영화가 빠짐없이 개봉하듯, <전설의 고향> 쯤은 또 한번 봐줘야 할 것 같듯이, 사람들은 익숙한 공포의 소재에 거부감없이 빠져든다. 더구나, 알고보니 그 귀신이 사람을 해꼬지 하려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혹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등장한 것이라는 결론은 뻔하다 하면서도 <전설의 고향>을 보고 눈물 콧뭇을 찍어냈듯이, 여전히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마치 주중원과 태공실의 사랑을 인큐베이팅하듯, 귀신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완성을 지향한다. 등장할 때는 섬칫한 모습이지만, 알고보니 커피 한 잔을 갈구하거나, 제사상을 원했던 귀신처럼 인간사와, 구천의 경계가 희미하고, 그 사이에는 다하지 못한 인간의 사연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연을 풀어내면서, 주군과 태양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삶의 딜레마를 넘어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그런데 항상 매력적인 홍자매의 드라마에 발목을 잡는 것은 완성도였다. 기존의 이야기를 뒤틀든 어떻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놉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나가는 세부적인 스토리들의 개연성이 부족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평가였다.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자매의 작품이 흥행작이 되었던 이유는, 부실한 스토리를 메꾸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향연이었다. 단 1회만에 냄새나는 머리, 확연한 다크서클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태공실처럼.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만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을 홍자매는 이미 <빅>을 통해 충분히 학습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2회를 메꾸어 낸 익숙한 도시 괴담류의 스토리들이 지금은 친근하고 약간은 감동적일지 몰라도, 이것이 되풀이 되다보면 진부해질 수도 있는 위험성 역시 <주군의 태양>은 내포하고 있다.
부디 이번엔 용두사미가 되지 않기를~


by meditator 2013. 8. 9. 09:57

'아니 어떻게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해요?'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집에 찾아와 기물 파손을 해놓고서는, <라디오 스타>에서 정반대로 이야기를 했더 신정환, 고영욱의 도발을 해명하다, 듀스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고 하자, 이현도가 뻘쭘해 한다. 그러자, 윤종신이 말한다. 이게 라스의 방식이라고. 
<라디오 스타>의 제작진이 바뀐 이래 몇 회 동안, 이게 라디오 스타인가? 세바퀴인가?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 세례를 받았던 <라디오 스타>가 듀스 20주년 특집을 맞이하여, 웃음으로 버무려지면서도, 그 행간에서 진지함을 놓치지 않은 <라디오 스타>만의 본령으로 돌아왔다.

 
(사진; osen)

'절뚝거리며 살아왔어요'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는 이현도의 이 한 마디보다 더 듀스의 20주년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비록 이현도 자신이 늘 2등만 했다고 아쉽게 말했지만, 그 자리에 동석한 '버벌진트', '뮤지', '스컬'이 자신들의 학창 시절을, 그리고 그 시절의 혼돈스런 열병을 듀스를 통해 설명해 내듯 듀스는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90년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그의 20주년 헌정 앨범에, '용감한 형제', '신사동 호랭이', '라이머', '이단 옆차기' 등 이 시대의 내로라 하는 작곡가들이 기꺼이 참여하듯, 듀스는 우리나라 힙합 1세대의 대표 주자인 것이다.
하지만, 2년 여의 짧은 활동 기간, 이어서 멤버 김성재의 죽음 등으로 이현도는 그 이후의 세월을 그림자처럼 살아올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했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고, 듀스를 만든지 20년이 지난 이즈음에야, 케이블 방송의 힙합 오디션 프로에서 '힙합 크루'의 수장 격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년 만에 공중파에 처음으로, 듀스 20주년 헌정 방송 특집으로 <라디오 스타>를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라디오 스타>는 라디오 스타만의 방식으로 한 시대의 영웅을 소화한다. 그를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폄하하지 않고. 
늘 그의 그룹에게 2등만을 안겨주던 서태지와 말을 섞지도 않았던 자신이 하는 음악에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존심을 지닌 이현도지만, 손가락을 세워 서태지가 최고라고 말할 만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은 세월의 여유를 보인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후배들과의 게임 한 판에서도 지는 걸 참지 못하는 자존심 센 남자의 냄새를 풍기다가, 후배들이 망친 세간 살이 하나하나를 꼰지르는 째째한 인간미까지 보이기 까지 한다. 이른바 <라디오 스타>식의 인간미다. 
그렇다고 그런 그가 낮잡아 지지는 않는다. 세월이 흘러 '힙합 1세대'의 전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대중들이 잊지 않고 찾아주는 <여름 안에서>를 꼽을 만큼 느긋해 졌지만, 그가 프로그램 내내 벗지 않은 검은 선글라스처럼, 여전히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가 도달했던 성취는 그와 함께 출연한 출연자들의 언급을 통해, 그들이 고른 그의 음악을 통해  자연스레 빛이 나도록 한다. 
그 방식은, 자신은 정형돈이나, 유세윤과는 다르게 '본투비(born to be)' 가수임을 주장하는 하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듀스도 모른다고 내리 조롱을 당하다가도, 스컬 팬의 한 마디에 정말로 불뚝이면서도, 예능과 음악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투박하게 정의내리는 뮤지션 하하를 제대로 조명해 내는 것 역시 <라디오 스타>인 것이다. 



하지만 20주년 헌정 특집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방송분 9.1%(닐슨)에 비해  낮아진 7.5%(닐슨) 시청률처럼,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듀스이지만, 이제는 시청자들에게는 그의 존재가, 듀스의 20주년의 의미가 생소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런 세월의 갭을 어거지로 미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라디오 스타>는 그를 잘 모르는 하하를 통해 메꾸어 나간다. 그의 노래 하나 아는게 없어 스컬이 노래를 부를 때 후렴구나, 감탄구나 따라부르는 하하이지만, 학창 시절 더블 데크 카세트를 통해 편집해서 그의 노래를 장기 자랑에 가지고 나갔던 추억을 지녔던 것처럼, 한때 대세였던 듀스를 추억해 내는 방식이다. 
헌정 특집에 걸맞게 듀스의 노래들을 출연자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한 곡, 한 곡 불러보는 방식으로, 이제는 누군가에는 그리움이 될, 혹은 누군가에게는 아, 저런 노래를 불러서 '듀스'라고 하는구나 라는 식으로, 추억하거나, 의미 부여를 해낸다. 그렇게 절뚝이며 20여년의 세월을 견뎌왔던 전설의 '듀스'를 복기한다. 웃고 떠들다, 문득문득 던지는 진지한 한 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라스식의 헌정 방송이다. 


by meditator 2013. 8. 8. 10:14


정상 이하의 지능을 가졌거나 감정 폭이 극히 제한적인 사람이 특정 분야에서 경이적인 지적 재능을 보이는 희귀한 증상

 kbs2의 월화 드라마 <굿닥터>의 남자 주인공, 성원 대학 병원의 레지던트로 1년간 임시 고용된 박시온(주원 분)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임상 병동 순시 과정에서 김도한 교수의 지시 사항을 고스란히 머리에 입력할 정도로 복사기와 같은 기억력을 가진 천재이지만,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하는 사회성 발달에 있어 자폐적 장애를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환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드라마 <굿닥터>는 그런 비정상적인 주인공 박시온을 내세워, '좋은 의사'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KBS월화드라마 굿닥터 -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노력과 사랑. 다시 시작되는 KBS 휴먼 메디컬 드라마!


역설적이다. 

그의 임용 자체가, 그가 역에서 응급 상황 하에서 아이를 살린 해프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듯이, 환자와의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의사라는 직업에, 그것이 불가능한 서번트 증후군 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자체가 도발적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미 2회 만에, 죽은 형과 토끼가 어른이 되게 해주고 싶었다는 레지던트라는 전문 직업임에도 여전히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박시온을 통해 과연 의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최고의 능력을 자랑하는 김도한(주상욱 분) 교수이지만, 그보다 직급이 높은 과장 고충만(조희봉 분)의 환자가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병원의 시스템, 집도의의 말 한 마디에 수술실 밖으로 내팽개쳐지거나, 말 한 마디 못하고 주먹을 맞아야 하는 상명하복의 군대식 서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김도한에게 맞은 박시온을 토닥이며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너의 행동이 어쩌면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고 달래주는 차윤서(문채원 분)의 영혼없는 설득(드라마 속 윤서는 또 하나의 박시온처럼 행동한다)처럼, 이른바 보다 편의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시스템이, 그 운용 여부에 따라 굳어져 버린 관료 체계화 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분명, 위태로운  환자의 상태 하나만을 보고, 담당의나, 수술방 예약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다짜고짜 환자를 밀고 들어가는 행위는 혀를 차게 만들 정도로 대책이 없다. 하지만 그의 극단적인 행동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일말의 공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한 두달은 여사로 기다리게 만드는 현재의 대학 병원의 대기 순번 체제에, 겨우 기다리다 의사라고 만나면, 환자와 눈을 마주치기는 커녕, 앞에 있는 차트나 모니터만 들여다 보다, 또 몇 가지의 검사나 하라고 하는 비인격적인 처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료 체계가 가지는 비인간적인 합리성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들이, 말도 안되는 서번트 증후군의 의사의 돌발적인 행위에 공감하게 만드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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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학 드라마에서 병원내의 비인간적인 관료적 의료 체계는 이미 '클리셰((문학·예술 평범한 수법)'처럼 등장하고 있다. 2012년의 화제작이었던 <골든 타임>에서 헌신적인 의사 최인혁을 가로막은 것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병원의 냉혹한 시스템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브레인>의  의사 이강훈은 그 자신이 그 체계의 수호자에서 희생자로, 그리고 다시 저항자로 거듭나는 히어로로 그려졌었다. 이제, <굿닥터>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어쩌면 김도한 교수의 정의가 가장 냉철하게 정확한, 오로지 인간을 살리겠다는 순수 의지만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박시온을 통해, 지금의 의료 체계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문제 제기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격적 요법을 통한 문제제기 방식은, 2013년에 들어서 화제작으로 관심을 끈 작품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직장 내 갑을 관계를 사회적 문제로 까지 환기시킨 <직장의 신>의 주인공 미스 김은 그 어떤 정규직도 넘보기 힘든 많은 자격증과 자격증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3개월 임시직을 고수한다. 그럼으로써, 이 사회에 뿌리박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갑을 관계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최근 종영한 <여왕의 교실>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선생님이, 가장 포악한 독재자가 되어 아이들을 조련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똘똘 뭉쳐 선생님에게 대적하는 힘을 가지려고 하는 자생력을 키우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을 밟고 혹은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이기적인 인간형을 양산하는 경쟁 제일 주의의 신자유주의 교육 체계를 비판하기 위해, 가장 선생님답지 않은 선생님을 등장시킨 것이다. 

직장, 학교에 이어, 이번엔 병원이다. 

당신을 담당하는 의사가 서번트 증후군이라면 어떨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면 아마도 백이면 백 다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누구나 의사로서는 무리라고 생각하는 환자를 내세워 의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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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학교, 병원,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그리고 이젠 가장 시스템화되어 기계처럼 잘 돌아가고 있는 제도들이다. 하지만 가장 원활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합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체계 속에서 '사람'의 존재가 무시되어져 가는 제도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지금의 우리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존재들이며, 가까이하기엔 너무 거대한 존재들이다.

거기에 드라마들이 질문을 던진다. 마치 골리앗에게 자그마한 바윗돌을 던지며 덤비는 다윗처럼, 

거인을 만나러 가는 다윗을 보고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변할 수 없다고, 한 개인이 어찌 해보기엔 무력하다고 느끼는 존재들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선, <여왕의 교실>의 마여진 선생이나, <직장의 신>의 미스김, 그리고 <굿닥터>의 박시온처럼 역설적 인간형이 필요한 것이다.

by meditator 2013. 8. 7. 10:00

이런 게 방송이 되겠어?'

이 대사는 첫 방송을 앞둔 <이적쇼>를 두고 이적이 <방송의 적> 도중에 한 말이다.  주변의 친구들이 너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 단독으로 토크쇼를 하면 누가 보겠냐는 조언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에 앞서 가장 먼저 회의을 표명한 사람은 이적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비슷한 대사를 이적은 <힐링 캠프>에서 또 읊조린다. 왜 힐링 캠프가 자신에게 출연 요청을 했을까? 혹시 누가 펑크를 냈나? 과연 이게 방송이 될까? 이제 곧 한혜진이 영국으로 가는데 지금 방송이 안되면 자신의 방송분은 영원히 묻히는데? 
하지만 이게 방송이 되냐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세상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방송의 적>과 그 안의 코너 <이적쇼>는 순항중이고(물론 때로는 존박쇼가 되기도 하지만), 시청률이 낮건 어떻건 힐링 캠프 이적 출연분은 방영이 되었다. 

(사진; 스포츠 월드)


<힐링 캠프>의 도입부 게스트 소개에서, mc들은 이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국민 가수'라는 호칭을 들먹인다. 하지만 '국민가수'에 걸맞는 사람으로 mc 자신들도 '조용필'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냐며 자평을 한다. 이승철은 끼워넣어 주고, 부활은 이경규가 친분으로 어거지로 갖다 붙이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이적 소개로 넘어간다. 나오는 이적 자신도, 자신 정도의 게스트로 방송이 될까를 걱정하며 소심하게 처신을 하고. 
<sbs 스페셜-대한민국 가수, 조용필> 편을 보면, 국민 가수란, 그저 팬이 많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필과 동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기쁠 때, 외로울 때, 그리고 사랑을 할 때 조용필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왔던 것처럼,  그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했던 노래를 불렀던 가수를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거위의 꿈'을 비롯해, '달팽이', '왼손잡이', '하늘을 달리다', '다행이다'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낸 이적이야 말로, 차세대 국민 가수감이라 해도 크게 무리가 없지 않을까.

그런데, 조용필이나, 이승철과 달리, 이적에게 '국민 가수'라는 타이틀은 어쩐지 버거워 보인다. 그가 그렇게 수많은 노래들을 통해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도 어쩐지 그는 그의 세대인 유희열이나, 김동률, 심지어 윤종신보다도 이른바 포스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걸고 하는 <방송의 적>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포스는 커녕, 한참 아래 후배 존박과 존재감을 놓고 아등바등거리는 그가 만만해 보이기 까지 한다. 
그건 <힐링 캠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그만한 '엄친아'가 어디 있겠는가. 형제들과 함께 서울대를 나오고, 어머님은 1세대 여성학자에, 때로는 안쓰는 근육을 쓰는 느낌으로 원서를 읽으며, 13만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다. 
그런데, 서울대를 나온 수재는 학창시절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 작곡을 한 소년의 이미지에, 학자인 어머님의 존재는, 이분들이 나를 지켜주지 않겠구나란  세속적 깨달음으로, 책을 많이 읽는 지식인은 음담패설을 즐기며, '낯선 여자'를 좋아하는 속물의 풍모에 밀려버린다. 심지어, <나는 가수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은 노래가 불려진 아티스트가, 방송 분량을 걱정하며, <다행이다>를 이경구의 심장 수술 버전으로 바로 바꾸어 불러주고, 낯선 여자를 주제로 한 즉흥곡을 만드는데 거침이 없다. 
김동률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거위의 꿈' 가사를 단숨에 써버렸다는 걸 보면, 말만 하면 말하는대로 툭툭 만들어 내는 걸 보면, 천재는 천재인 거 같은데, 그 예전 살리에르가 보고 분노했던 천박한 천재 모짜르트를 보는 것처럼, 어쩐지 천재로 인정하기엔 너무 범상하다. '아우라' 따위는 개나 줘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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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이 가수의 본업에 충실하라 조언을 할 정도로 개가수가 되어가는 이적의 장점은 아마도 그 평범함이 빗어내는 친근감일 것이다. 
<방송의 적>에서 이적은 늘 자신을 한껏 드러내고, 부풀려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언제나 신인 가수 존박에게조차 밀릴 정도로 보잘 것 없다. 한껏 허세를 부려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보잘 것없고, 하지만 이적은 그 보잘 것 없는 것조차도 결코 마다치 않는다. <힐링 캠프>에서 방송이 될까를 걱정하는 이적의 캐릭터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이경규가 늘 누군가에게 묻혀간다는 지적에, 그렇게라도 살아남는게 어디냐는 담백한 토로가 어울리는 지점이기도 하고. 

그런데 리얼리티 쇼에서의 어설픈 허세어린 모습이, 그리고 토크쇼에서의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모습이, 그의 동년배들, 그리고 이제 서른 중반을 넘긴 그보다 어린 세대들에게는 공감대를 자아낸다. 
그 세대가 그렇다. 자식 하나나 둘 낳는 시절에, 누구나 다 나름 '엄친아'였고, 한 가닥씩 하면 사회에서 자리잡아 가려고 하는데, 영 포스가 안 나는 세대인 것이다. 그 앞전의 세대는 민주화다 뭐다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경제 발전기의 떡고물로 그런대로 잘 먹고, 잘 나갔는데, 이제 이적으로 대변되는 세대는, 나름 배울만큼 배우고, 이룰만큼 이루었는데, 영 때깔이 안나는 것이다. 경제는 불황이라 하니 내일을 알 수 없고, 자신이 이룬 것들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것이다. 반면, 별로 내세울 게 없으니 어깨에 힘 좀 넣으려 해도 넣어지지 않는, 그래서 눈 앞의 조그만 행복, 조그만 욕망에 솔직한 그 세대의 전형적 캐릭터로써의 이적을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캐릭터가 발견되기 시작한 곳은 일찌기 캐릭터 발견의 귀재였던 <라디오 스타>였다. 그것을 증폭시킨 것은 <무한도전>이었고, 이제 그는  <방송의 적>을 통해 게스트가 아닌 호스트가 되어, 이적이란  세속적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소비시키는 중이다. 이 황당무개하고 어의없는 리얼리티 쇼에서, 얍삽하려 노력하지만 늘 별로 건지는 것 없는 '이적'을 연기하는 이적이 그럴 듯해 보이는 건, 방송의 적 이적과 실제의 이적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소탈하고 소박한 유형의 '이적'을 동시대의 표상으로 예능은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하고 있다. 
아마도 이담에, 이적이 '국민 가수'가 된다면, 그때의 국민 가수는 조용필이나, 이승철의 아우라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국민 가수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3. 8. 6. 10:08

일반적인 중년 남성들이 텔레비젼을 보는 특징 중 하나는 어떤 프로그램도 집중해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번 마누라의 리모컨을 강탈하여 모 프로그램을 보는가 싶으면, 어느새 리모컨 사냥에 나선다. 공중파에서 종편을 거쳐, 뉴스전문 채널에서, 여행, 낚시 채널까지를 종횡무진 한 채널에 정착하기 힘들어 한다. 마누라와 아들이 깔깔깔 거리며 보고 있는 프로그램을 지그시 바라보는가 싶으면 어느새 쓴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십상이다.  우리집만 그런가 싶어서 하소연을 하니, 다른 아줌마들도 공감 백배인 걸 보면 일반적이란 전제를 달아도 그리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런 남편이 드라마를 다 보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는 마누라의 리모컨을 고정시킨다. 조용필이 나온다! 그리고 한 시간여, 추억을 공유한 사람만이 가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sbs스페셜- 대한민국 가수, 조용필>을 지켜본다. 

(사진; sbs)

프로그램 중간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조용필은 야광봉을 흔들며 그를 '오빠'라 연호하는 팬들에게 엎드려 손을 뻗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터뷰, 조용필은 말한다.
"오빠는, 조용필의 다른 이름과도 같다"고.
그렇다, 그의 노래, <비련>의 첫 마디 가사, '기도하는~'의 다음 가사는 '꺄악!'인 것처럼, 조용필은 '오빠부대'라는 말을 처음 말들어낸 가수이다. 그의 19집 <hello>가 발매되었을 때 수그리고 있던 그의 오빠 부대들은 다시 떨치고 일어나, 조용필의 사진을 들고 앨범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그의 말대로, 한번 오빠는 영원한 오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조용필이라는 것을 프로그램은 여러 가수들과 평론가의 입을 빌려 증언한다. 

63세의 조용필이 무려 19집 <hello>를 들고 나왔을 때, 입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행보에 대해 한 마디씩을 거들었다. 외국 작곡가의 곡을 받은 '바운스'나 '헬로'를 듣고, 조용필답다라던가, 젊은 세대조차 매료시킨 능력이라던가, 혹은 조용필이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하지만 굳이 '가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떼어놓고 보면, 그리고 나이를 또한 지워버리고 보면, 한 사람의 가수가 기존의 자신의 색깔과는 다른 새로운 앨벌을 들고 나와, 세간의 이슈가 된 것만으로도 어쩌면 일정 정도의 성공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크레용 팝이라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 처음에 "빠빠빠'라는 곡을 들고 나왔을 때 그 낮은 지명도로 인해 음악 방송 무대에 조차 서기 힘들다가, 호불호가 갈리든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니 방송 출연의 기회가 보다 많이 주어지는 것처럼. 조용필의 19집 앨범이 조용필다웠던 그렇지 않던 젊은 세대조차 그의 노래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화제가 되다보니 sbs스페셜>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사진; tv 리포트)

하지만 <sbs스페셜>은 2013년의 조용필에 대한 논란이 1회성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통해 이른바  '뽕짝', 트로트 장르에서 확고한 인기를 얻었던 조용필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자 드럼을 활용한 '단발머리'라는 곡을 들고 나왔던 것처럼, 이미 그는 국악, 재즈 등 특정 장
르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는 실험을 계속 해왔다는 것을 후배들과 평론가의 입을 빌어 확인해 준다. 

장르만이 아니다. 그 예전에 젊은 사람들이라면,'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화려한 거리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에 공감을 얻고,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에 젊음의 다하지 못한 열정을 담아냈었다. 심지어, 시위를 하다 잡혀간 친구를 생각하며 운동가요가 아닌  '친구여~ 모습은 어디갔나~ 그리운 친구여~'를 부르기도 했었다. 머리가 희끗해진 남편이 계면쩍은 미소를 띠며 <sbs스페셜>을 지켜보는 이유 역시 그의 노래를 즐겨 불렀던 지난 날이 떠올라서 였을 것이다. 
조용필 자신이 불순한 젊은이들이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하여 수사기관에 끌려 갔었다고 증언하듯, 아니 그 증언의 협소한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젊은이들이라면 사상과 노선을 가리지 않고, 조용필의 노래에 심취했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같이한 노래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  조용필은 세간에 회자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노래와 함께 호흡해준 사람들의 삶에 천착한 노래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도 프로그램은 짚고 넘어간다. 광주 항쟁을 배경으로 한 '생명'이나, 6월 민주 항쟁을 직접적으로 그린 '서울 1987'같은 곡들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그램은 조용필의 전국 순회 마지막 공연에서 '설렘'을 부르는 조용필의 모습을 노래의 자막과 함께 담는 것으로 끝난다.
'너에게 간다. 설레임 그대로야'라고.
<sbs스페셜>은, '가왕' 조용필의 전설을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는, 19집이 생뚱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전한 현재 진행형의 실험맨 조용필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 아직도 노래방에 가서도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노래를 시켜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는, 노래하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조용필의 매력을 다시 확인 시킨다. 여전히 '오빠'인 그를 통해,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본질적 의미의 '청춘'을 환기시킨다. 보는 늙수그레한 시청자들조차 지레 눌려버린 나이가 무색해질 만큼.


by meditator 2013. 8. 5. 10:11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몬스타> 마지막 회, '니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들려달라던 나나(다희 분)에게 선우(강하늘 분)가 들려준 노래이다. 세이를 아직 정리하지 못하는 선우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자, 선우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나나에 대한 선우의 마음을 담은 노래로, 그냥 그 노래를 선우가 부른 순간, 나나가 울음을 터트리며 가버렸듯 모든 것을 노래 가사로 다 설명해 줄 수 있는 노래였다. 


그런데 노래가 나오는 동시에 함께 자연스레 함께 읊조리는 엄마와 달리, 현직 고등학생인 아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저 노래가 뭐지? 하면서.
그도 그럴 것이, 이영훈 작사, 작곡, 이문세 노래의 <사랑이 지나가면>이 첫 발매된 것이 1987년이다. 무려 26년 전 노래를 2013년의 고등학생이 사랑의 슬픔을 대변하는 곡으로 부르고 있다. 엄밀하게 이건 넌센스다. 하지만, <몬스타>를 시청했던 그 누구도 그 장면에서 선우가 부른 그 노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비단 <몬스타>에 그치지 않는다. 굳이 시작을 따지자면 영화 <건축학 개론>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본격적인 계기라면 <응답하라 1997>을 들어야 하나, 하지만, <건축학 개론>이나, <응답하라 1997>의 OST들은 90년대라는 특정 시점을 상징적으로 담보해 내기 위한 의도적인 도구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청춘 드라마의 OST 들은 굳이 특정한 시대적 배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혹은 20세기적인 곡들인 경우가 많다. 

'처음엔 미처 몰랐어. 눈부신 사랑에 빠질 줄은
멀리서 전학온 이상한 아이가 너란걸 누군가 얘기했을 뿐
그러던 어느날인가 조금씩 내눈에 띠더라구'
이것은 2013년에 발매된 불독 맨션의 스타걸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2013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불독 맨션이 처음 활동하던 당시에 발표했던 노래다. 드라마 스페셜 <사춘기 메들리>에 등장한 이 노래는, <사춘기 메들리>의 내용을 그대로 축약해 놓은 듯해 화제가 되었다. 또 제이레빗의 목소리에 실린 또 다른 OST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고 김광석이 1996년에 발표한 곡이었고, 극중 고등학생인 정우(곽정연 분)이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 부른 곡은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였다. 그뿐이 아니다. 제목은 <사춘기 메들리>였지만, 드라마는 <20세기 메들리>인 것처럼, 불독 맨션을 비롯해, 젝스키스까지, 그리고 커피소년처럼, 20세기의 정서와, 그들이 정서의 계보를 잇는 아티스트들의 노래로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 내었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빈 풍경이 불어온다
.......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몬스타>란 드라마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1회 '라디오'란 별명으로 왕따를 당하는 박규동(강의식 분)이 눈물젖은 목소리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아니었을까? 이 노래 역시 1990년 이소라의 6집 <눈썹달>에 실린 곡이다. 뿐만이 아니다. <몬스타>는 유재하의 <지난 날>로 시작하여, 신승훈의 <날 울리지마>,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루시드 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이승철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그리고 들국화의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까지, 20세기 뮤지션의 향연이었다. 물론 그들만은 아니다. 커피 소년, 제이레빗,  M.O.T 등 역시나 20세기적 정서를 유지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이 풍성하게 담겼고, 이런 음악들은, 스토리만큼이나 극으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음악이 ost화 되어 가고 있다는 자탄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핸드폰의 벨소리로 음악을 소비하기 시작했고, 드라마의 ost가 되어야 귀를 기울여 듣고 찾아듣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ost 공해라고 할 만큼 드라마에서 음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중이고 깔리는 곡의 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응답하라 1997>을 기점으로, 이제 음악은 드라마의 배경을 장식하는 수준을 벗어나, 당당하게 극의 주인공으로 한 자리를 꿰어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특히나 최근 제작된 <몬스타>나, <사춘기 메들리>의 경우는 음악이 없이는 드라마 자체가 완성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거기에 사용된 음악들이, 2013년의 청춘들이 즐겨듣는 곡들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곡들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편의적으로는, 그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청춘을 상징하던 시점이 바로 그 20세기 였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거기다 <응답하라 1997>의 성공 사례처럼, 2013년의 청춘도 잡고, 20세기의 어른의 관심도 끌어보자는 양수겹장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껏 위축되었던 80년대를 지나, 이른바 x세대로 상징되는 자유로운 청춘의 문화가 만개된 90년대야 말로 평론가들이 르네상스라 지칭하듯, 다양한 장르의 풍성한 음악들이 창조되었고, 지금 우리가 드라마에서 조우하듯 예전 노래라는 시대적 한계에 가둬두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명곡들이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름이 뭐예요? 전화 번호 뭐예요?'
'다같이 원/ 빠빠빠빠빠빠'
위의 두곡은 2013년 8월까지 가장 이슈가 된 포미닛의 <이름이 뭐예요>와 크레용 팝의 <빠빠빠>의 가사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후크송'이라며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단순한 가사의 곡들이 화제가 되더니, 올해 들어서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사랄 것도 없는 단순한 어구들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유행 중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이런 노래가 화제가 되기로 서니, 설레이는 첫사랑의 섬세한 감정에 '이름이 뭐예요?'라고 어겨다 붙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쩌면 최근 청춘 드라마의 노래들이 그 예전 노래를 자꾸 가져다 쓰는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요즘 노래 중에 풋풋한 청춘의 정서를 대변할 노래가 없어서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당연히 기승전결의 개연성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을 시적으로 맛깔나게 풀어준 노래들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거슬러 올라가 20세기까지 에돌아 가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8. 4. 10:36

화면 위쪽에 <최종회>라는 자막이 선명하게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타>12회를 보는 내내 과연 이 드라마가 마지막 회 맞어? 라는 의문을 숨길 수 없었다. 심지어, 11시가 넘어가면서 부터는 내가 제작진도 아닌데 초조해지기 까지 한다. 도대체 남은 시간은 20분도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지? 

결국 마지막회 <몬스타>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어 11시 반을 넘어 엔딩 크레딧을 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은, 호, 혹시, <몬스타 시즌2>를 만들려고 하나? 라는 의구심까지 든다. 뭔가 12회에 마무리를 짓기 위해, 허겁지겁 꾸겨넣은 느낌이 너무 강해서이다. 

물론 마무리는 지어졌다. 하지만 찬찬히 되돌아 보면, 이걸 마무리라고 해야 하나? 그저 '봉합'이라고 해야 하나?  휴지없이 화장실 다녀온 듯 어딘가 찝찝하다. 


음악 드라마니, 성장 스토리니 해도, 결국 <몬스타>를 이끌어 갔던 기본 줄기는 설찬(용준형 분)과 세이(하연수 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이다.  거기에 얹힌 그들의 가족사까지.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일찌기 키스까지 해버렸다. 마지막 회, 몰래 한지웅(안내상 분)에게 기타를 배운 설찬이 세이에게 노래를 들려 주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성숙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설찬과 세이의 관계는, 사귀기 전에는 자신의 맘을 몰라서, 사귀고 난 다음에는 혹시나 세이가 자신보다 선우와 더 가깝게 지낼까 찌질하게 앙탈을 부리는 설찬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찬은 가끔 멋있다.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돌답게 음악을 창작하는 능력이 뛰어나, 칼라바의 음악을 프로듀싱하거나, 키스씬처럼 임팩트있게 여주인공에게 들이댈 때는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런 설찬의 모습은 아주 가끔 등장할 뿐이고, 늘 주인공 설찬은 마치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칭칭거리는 아이처럼, 보챈다. 그런 모습을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는 남자 아이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극을 이끌어 가는 매력은 반감된다. 12회가 마무리 되어도 설찬은 여전히 처음의 설찬 그대로인 느낌이다. 자신의 그룹 일을 포기하면서 칼라바의 일원으로 무대에 서도. 그의 선택이 그리 빛나지 않아보인다. 



그러기에, <몬스타>는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이미 11회 세이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  확연해진 삼각 관계임에도,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어색한 명목 하에, 서브남인 선우의 캐릭터 비중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늘 설찬이라는 캐릭터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태클에 대해 도발하는 캐릭터이기에, 그를 도발시켜 주는 누군가가 끝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 <몬스타>의 캐릭터 설정을 보았을 때, 소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우상처럼 좋아하는 아이돌 설찬이 학교로 돌아와, 학교 안의 평범한 소녀를 사랑한다는 스토리는, 설찬의 아이돌이란 존재와의 충돌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12회에 이르러, 가장 본질적인 그 갈등은, 소녀 떼들 사이에서 세이의 손을 잡으려는 설찬의 노력 정도로, 그리고  그 마저도 해프닝으로 만든 채 어물어물 넘어가 버린다. 아이돌의 사랑 만들기가 아니라, 아이돌이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극복하는 설찬의 성장통은 설찬의 찌질한 캐릭터에 빛을 잃었다. 


뿐만 아니다. 이 드라마의 대표적인 두 남자 캐릭터 설찬과 선우는 어린 시절 한 때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며, 어린 시절의 오해로 인해, 이제는 철천지 원수처럼 으르렁대는(물론 그 마저도 설찬의 일방적인 감정인 경우가 많지만) 사이이다. 아마도 <몬스타>가 풀어내야 할 과제 중 순번을 매긴다면 결코 다섯 손가락의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을 갈등이었다. 그런데 12회로 마무리된 <몬스타>에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의 오해로 미워하는 사이였지만, 칼라바로 뭉쳐서 음악을 할 정도인 사이? 여전히 세이를 사이에 두고 견원지간 같은 사이?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남자 캐릭터 사이의 관계가 어물어물 넘어가 버렸다. 늘 너는 하지 말아야 될 오지랖을 부린다며 막말을 하던 설찬과 그런 설찬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선우의 관계는, 설찬이 선우가 좋아하는 세이를 좋아하는 걸로 퉁친 게 되는 건가? 

차도남과 박규동의 오랜 해원을 멋들어 지게 풀어낸 것에 비해, 정작 두 주인공의 오해와 갈등은 해결이 되었다는 건지, 그저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는 식인건지, 12회가 끝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발목을 잡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세이가 쥐방구리 드나들듯 하던 집의 주인 한지웅이 사실은 부모님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엄마를 첫사랑으로 못잊어 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몬스타>의 12회를 끌고오던 주요 갈등 요인 중 하나였다. 거기에 보태 세이는 엄마가 아빠가 아닌 사람을 좋아해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오해를 하는 것이고. 

설찬의 경우는,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면서 엄마를 늘 어머니라 깍득하게 부르고, 폐를 끼지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처지이다. 

즉 두 사람 모두, 어른들의 일,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처에 대한 해결을 <몬스타>는 어떻게 풀어내었을까?

가장 조마조마하게 시청자들을 만들던 엄마와 한지웅이 잘 알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엄마가 그 모든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으로 넘어가 버린다. 시청자들은 저게 터지면 어떻게 될까 이러고 있는데, 됐어, 세이는 더 이상 상처받으면 안돼 라며 꿀떡 삼켜버린다. 12회 설찬의 방송 출연이 어려워지자, 칼라바의 사연 팔이를 통해 이슈를 만들려던 피디가 올포원의 리더 말 한 마디에 아이템을 꿀꺽 삼켜버린 것보다 더 우스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아빠의 죽음은 알고 봤더니, 어린 세이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서라는 예상 밖의 스포를 12회 마지막이 되어서야 터트려 버린다. 이런 것도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시청자들은 극의 흐름을 이쪽에서 예상하고 지켜보며, 과연 저걸 어떻게 주인공들이 지헤롭게 극복해 내어 성장을 하게 될까 이러고 있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책임을 지우며, 그리고 그 조차도 극복을 한 것인지, 그냥 울고 만 것인지도 분명치 않게 마무리지어 버렸다. 엄마 때문에 아빠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엄마를 보지 않겠다고, 호주에서 혼자 한국으로 날아온 세이가, 정작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이 과연 울면서 노래 한 번 부른다고 해결 될 수 있을까? <몬스타>를 지켜본 시청자라면 그런 의구심은 당연히 드는 것이다. 

설찬과 엄마의 관계도 그렇다. 설찬이 그렇게 엄마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이유가, 엄마의 파양 때문이었다는 걸, 마지막 회에 가서야 밝히고 그저 엄마의 사과 한 마디로 넘어가 버린 이 모자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러니, 혹시 시즌2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몬스나>는 정작 가장 명확하게 해결하고, 혹은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갈등들은 두루뭉수리하게 혹은 마지막 회에 가서야 어거지로 마무리를 지은 반면에 차도남과 박규동, 심은하, 김나나 등 조연들의 이야기는 현실감과 개연성, 그 어느 것에서도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잘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것이 12회라는 회차의 한계라기엔 그간 2회를 끌고오면서 그저 별 극적인 사건 없이 주인공들을 투닥거리다 끝낸 회차가 꽤 됐었다. 12회가 부족하다기 보다는, 12회라는 회차의 분량 조절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할 듯하다. 또한 청소년의 성장통에 대한 고민이 주인공 커플과 선우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성장이란 그저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고 넘어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왕의 교실> 아이들이 선생님과의 전쟁과도 같은 성장통을 겪으며 선생님과의 이별 조차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 지듯이, 속되지만,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몬스타>의 성장통은 무엇이었나 12회가 끝난 지금도 묘연하다. 



by meditator 2013. 8. 3. 10:16

"찌질대지마! 언제까지 어리광만 피울거야!"

마여진 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역시나 마여진 선생님다웠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그렇게 닦아세우는 선생님에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여기는 너희 교실이 아니라며 냉정하게 돌아서서 가서 선생님에게 '스승의 은혜'를 눈물을 흘리며 불러준다. 

언제나 그렇듯, <여왕의 교실>의 마지막은 감동적이다. 성큼 커버린 아이들이, 이제는 응석받이가 아닌 아이들이, 냉혹한 선생님의 속내조차 읽어낼 줄 아는 한 마디, 한 마디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뭉클하게 눈물이 흐른다. 아마도 그 눈물의 의미는, 진실과 진실이 맞닿아 빚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발산되는 화학작용일 것이다. 


물론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여왕의 교실>의 엔딩이 그리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마여진 선생님의 교실에서 아이들의 변화는 이해가 가지만,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마여진 선생님 대신 들어온 교감 선생님 앞에서 단체로 일어서서 한 명, 한 명이 잘못했습니다를 복창하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는 방식처럼, 일사분란하게 무리의 아이들이, 혹은 25명의 아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의 교훈적 결말을 향한 '집단주의' 클리셰를 보는 듯해서 불편했다. 

또한 마여진 선생의 역설적 교육 방식에 의한 아이들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려고 했던 의도는 알겠지만, 하루 아침에 아이들이 선생님이 그리워요, 선생님이랑 함께 하고 싶어요 라는 식의 변화는 작위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위원의 소신어린 결정처럼, 제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교육의 현장에서, 마여진 선생과 같은 역설적 교육 방법이 지닌 수단의 비윤리성 역시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넘어갈 수 없는 지점 역시 여전히 남는 것이다. 


<여왕의 교실> 고현정, 드디어 웃었다 이미지-1

(사진; mbc)


하지만 그러기에 <여왕의 교실>은 많은 질문을 남긴다. 

우선은 마여진 선생님처럼 해야 겨우 자생적 능력을 가지고 독립적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이다. 간에 무리가 갈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며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했던 마여진 선생님이라면 왜 아니 정상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들, 호시탐탐 친구들을 왕따나 만들려는 아이들,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로봇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강력한 충격 요법만이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여왕의 교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모들에게 묻는다. 과연 여러분들은 당신의 자녀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를 원하느냐고?

마여진 선생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부모들이나, 교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어리다'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어른들 말을 들어라. 어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마여진 선생님의 교육에 의해 달라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꿈을 찾아나선 아이들은 어른들이 너희를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마스터 플랜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글로벌 리더가 되라던 고나리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위한 모금에 앞장서는 전혀 다른 방향의 글로벌 리더가 되었고, 가업을 이어 받아 의사가 되라던 아이는 기자가 되겠다고 한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겠다고 하지만, 이제 아이들을 하려고 하는 공부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막연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한 공부가 아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마여진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플랜카드를 들고 교육청을 방문하려고 까지 한다. 


<여왕의 교실>은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아이,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으려고 하는 아이, 과연 그런 아이를 당신은 진짜 원하시냐고? 혹시 그간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이들을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길들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냐고? 어른들이 만든 세계관을 세뇌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냐고? 그리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그래서 말로는 니가 언제 혼자 헤쳐나갈 수 있니?라면서도, 끝까지 어른들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사는 아이를 원한 것은 아니었냐고? 묻는다. 


이제 교육을 통해 독립적 인간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키우던 장수 풍뎅이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주듯,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도 선생님과 이별을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로 자라났다. 과연 내 아이가 그렇게 담담하게 내 품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향해 떠나보낼 수 있는 부모가 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아이들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믿는 독립적 인간이 되어도 되는지, 남겨진 질문이 묵직하다. 







by meditator 2013. 8. 2. 01:59

이수(김남길 분)가 죽었다. 김준으로 돌아왔던 이수가 죽었다. 

한 조각의 생존에 대한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총알은 목을 관통했다. <상어>란 드라마를 따라왔던 사람이라면, 이승의 세계에 이수를 위한 자리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만에 만난 해우(한예진 분)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여전히 지키고자 하는 준영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수는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생에게는 '간'이 필요하다. (물론 꼭 간은 죽어서 주는 건 아니다) 동생과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수의 삶을 견인해온 복수도, 사랑도 이젠 이수의 몫은 끝났다. 그저 담담하게 죽을 사람이 죽었으니 하며 드라마를 바라보다, 이제야 이수가 친구라는 걸 안 오랜 친구 동수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이수의 손을 잡고, 이수를 목놓아 부르는데 울컥한다. 해우가 '이수야, 사랑해'라던 순간에도 올라오지 않던 감정이 솟아오른다. 비로소, 헤짚어 보게 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복수를 위해 살아갔던 한 남자의 삶을. 드라마 내내 김준이 되어, 온갖 감정을 드러내 보였던 이수였지만, 정작 드라마를 통해, 그의 삶이 안쓰러워진 건 동수의 통해 이수의 이름이 불리워졌을 때다. 


해우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회 해우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자신의 가계, 할아버지가 저지른 엄청난 죄과를 대신 사죄하기 위해, 호텔과 자신의 직업이 날라갈 지도 모를 할아버지의 과거를 세상에 알린다.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진 할아버지가 공식적 채널을 덮자,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알리고, 증거가 부족하다 하자, 할머니의 유품 속 사진마저 세상에 던진다. 주저함도, 거칠 것도 없이, 자신의 가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진; tv리포트)



1회의 1떡밥이라는 그간의 대전제를 무시하고, <상어> 20회는, 죽은 줄 알았던 이수의 생존(사실 죽였다라기엔 김준과 수현의 연기가 너무 어설프긴 했다)과 할머니의 비녀 속 사진, 암살자 부인 목의 열쇠에, 마지막 박여사가 빼놓은 총알까지, 많은 사건과 그 사건의 해결들이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1회부터 진짜 그림자처럼 암약하던 요시무라 회장의 존재감도 이수의 명쾌한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린다.  덕분에, 이수는 죽음의 순간을 숨가쁘게 맞이했고, 결국 위너는 새로운 암살자가 된 형사가 되었으며, 해우는 기계처럼 자신의 가계 청산 작업을 하느라, 고뇌에 빠질 틈 조차 없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죽어가는 순간에도, 죽은 이후에도, 복수를 위해 10여년을 헌신한 이수의 삶에 대한 여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수를 사랑해, 그로 인해 자신의 가계를 무너뜨릴 용기를 가지게 된 해우의 결단도 드라마 내에선 그리 큰 자리를 얻지 못한 채 담백한 그녀의 소회로 넘어간다. 


<상어>가 20회를 통해 결국은 성취하고자 했던, 해우가 자신의 집안을 무너뜨리면서까지도 속죄해야만 했던 의미는 묵직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라는 어둠 속에 묻혀진, '역사'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잡혀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한 할아버지의 외침처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의 더 나은 삶이란 미명 하에 포장된,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틈만 나면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감정적 분통을 터뜨리는 건 자연스럽지만, 숨겨진 '학살'과 약탈의 기록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없이 스러져 가는 것에는 무감한 현재의 우리에게, 잘 살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의 '사실'인 과거 조차 눈감고 외면하려고 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뒤틀린 역사의 왜곡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조명국'이란 상징적 근대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끝내 이수조차도 죽여버리고 미소를 짓는 그를 통해, 과거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의 악이 되어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마지막 회를 통해 완결된 <상어>의 주제 의식은 이해는 되지만, 감동이 부족하다는 데 이 드라마의 딜레마가 있다. 이수와 해우의 사랑이 그렇듯 하지만, 그 치명적인 운명에 공감하기 힘들 듯, 드라마 속 인물들은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명적 스토리에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가슴을 떨리게 하는데는 어딘가 1% 부족한 듯한 느낌인 것이다. 


천영보는 조상국이 되어가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이제와 이수의 아버지나, 이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쯤은 눈도 끔적할 정도가 아닌 만큼, 하지만, 그걸 천영보를 연구한 학자가 말하듯,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저지르는 위인이라던가, 조국을 위해서나, 너희를 위해서였다는 잡혀가면서 조차 뻔뻔한 조상국 회장의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고문 기술자였던 이수의 아버지 한영만과 암살자가 조상국과 함께 한, 과거의 학살자가 현재의 압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뚜렷한 역사에 대한 전제는 분명했지만, 그것을 살아있는 인물로 풀어내는데 구체성을 더하지 못한 것이, 전형적 인물의 딱딱함으로 남은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이수와 해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복마전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손녀가 그가 없애고자 하는 인물과 사랑을 하게 되는 설정이 가장 극적이긴 하지만, 과연 두 사람이 살아있는 캐릭터로 펄떡거렸는지, 혹시나 가장 극의 중심에서 운명을 고뇌하며 고난에 빠져들었던 주인공들 조차, 그저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 수단으로만 이용된 건 아닌지, 이수의 죽음을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이 지점에서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7. 31.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