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들어서면서 <쓰리데이즈>, <신의 선물>을 시작으로, <골든 크로스>, <개과천선>, <빅맨> 그리고 케이블의 <갑동이>, <신의 퀴즈 4>까지 다양한 장르물의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장르물이라는 특성상 시청률면에는 대중성을 타 장르 드라마만큼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뉴스에서도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사회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젊은 층에게는 수치로만 설명할 수 없는 화제성을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위의 드라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장르물 드라마들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남자들이다. 그것도, <빅맨>의 김지혁을 예외로 하고, 대부분, 청와대 경호관, 전직 형사나 형사 혹은 검시관, 검사시보, 변호사 등의 전문직 남성들이다. 이들은 자기 가족, 혹은 자신이 하고 일의 과정에서 조우한 사회의 부도덕한 면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는 의지의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 드라마에는 모두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경찰관으로 쫓기는 경호관을 돕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피해자의 엄마가 되어 직접 유괴범을 쫓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여성 캐릭터들이, 올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장르물 드라마의 남성 캐릭터들처럼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라고 하면, 드라마마다 형편의 차이가 느껴진다. 때로는 신선한 독립적인 여성상을 구가하는가 하면, 여전히 수동적이며 보조적이며, 때로는 민폐에 가까운 '여성'으로서만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진; osen)

6월 13일 방영된 <갑동이> 17회는,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도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오마리아(김민정 분)와,마지울(김지원 분)이 그들 앞의 사이코패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갑동이가 바로 수사반장 차도혁(정인기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마리아, 하지만 공소 시효 만료로 인해 더 이상 그를 벌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의붓 아버지 한상훈(강남길 분)이 희생을 하여 가까스로 갑동이 사건을 검찰 수사선상에 올려놓게 되는 과정에 무기력감을 느낀다. 더구나 48시간을 구금하고 심문을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갑동이라는 알게 된 상황에서도 너무나 태연자약한 차도혁에게 좌절감까지 절망감까지 느끼던 오마리아는 그런 자기 자신의 무기력감의 돌파구를 차도혁의 다중인격에서 찾으려 한다. 즉, 다중인격이라 갑동이가 아닌 차도혁은 죄책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정신적 분석으로, 그가 자신에게 여전히 뻔뻔하게 대하는 그 상황을 설명하고, 피해자인 자신의 고통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울은 한 술 더 뜬다. 무려 여덟 명의 여성을 즐기듯 죽인 사이코패스 류태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명목하에, 류태오를 찾아든 마지울은 그가 가진 분노를 일깨우며, 그 속에 숨겨진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쓴다. 

물론, 피해자로써 자신의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싶어하는 오마리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와 벌]의 쏘냐처럼, 범죄자의 구제에 연연해 하는 마지울이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게, 그가 아니라, 그녀여야 하는가?

마지울은 그저 우연히 들른 커피숍에서 눈에 띤 류태오를 자신의 만화 속 범인 캐릭터로 그리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와 면식을 튼 사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7회를 오는 동안, 과연 마지울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감수하며, 류태오와 빈번하게 접촉하는 상황에 개연성이 충분한가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류태오가 마지울을 자신을 구원해줄 여인으로 삼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에 낚여, 죄책감을 느끼고, 이제 그의 인간성 회복에 앞장서는 마지울은 단면적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무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대뜸 연쇄 살인범 류태오를 따라 나서던 자기 중심적인 맹랑한 여고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류태오가 살해했던 여덟 명의 여자들은 마지울의 염두에 없다.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는 류태오와, 그에게 대단한 존재인 것 같은 자신만이 있다. 거기에, 모성성의 발로라 여겨지는 무한한 측은지심이라니!

오마리아는 한 술 더 뜬다. 갑동이를 잡기 위해 치료 감호소의 정신감정의가 되고, 류태오를 갑동이를 잡기 위한 제물로 쓰기 조차 마다치 않던 그녀가, 정작 갑동이 앞에서, 정신과 의사인 그녀의 직분을 망각한 채 흔들린다. 아니, 정신과 의사라는 그녀의 지식이, 그녀의 감정에 노예가 되어, 그녀의 눈을 막게 된다. 

17회에 이른 <갑동이>의 여성 캐릭터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눈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해, 이성보다는 '감성', 냉정한 판단, 보다는 충동적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르물에서 이렇게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캐릭터의 몫은 대개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개과천선>에서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이지윤(박민영 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의협심이 강한 법학 전문 대학원 출신의 로펌 인턴 사원이 된 이지윤은 늘 그녀의 정의감이 그녀를 앞선다. 대형 로펌의 인턴 사원이지만, 사사건건 대응은 감정적이기 일쑤고, 늘 사건을 앞에두고 그녀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건, 그녀의 감성이다. 결국, 청소년 범죄자를 두고 연민에 사로잡힌 그녀는 사건의 진실에  눈 감은 채, 그를 변호하다, 뒤늦게 진실을 알고 자책한다. 물론 이런 사건은 변호사로서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장르 드라마에서 유독 여성 캐릭터에게는 이렇게 감정으로 인해 사건을 망가뜨리는 상황이 주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화제를 안고 시작했던 <신의 선물>에서 납치된 딸 샛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엄마 김수현(이보영 분)은 번번히 민폐적 상황을 만든다. 딸을 찾기 위한 맹목적인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앞뒤 안 가리고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고, 정작 그 상황을 해결해 주는 건, 남자 주인공이나, 주변 남자들의 몫이라, 욕을 먹게 되었다. 심지어, 그토록 사랑하는 딸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납치범을 찾겠다고, 정작 딸을 방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골든 크로스>에서도 다르지 않다. 정의감이 투철한 검사 서이레(이시영 분)와 아버지 기업을 망가뜨린 골든 크로스 멤버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골든 크로스 대표가 된 홍사라(한은정 분)이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녀들이 주로 하는 일은 사랑에 눈물 흘리고, 가슴아파하는 역할이다. 그녀들이 하는 일은 복수이거나, 정의 실현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사랑'이다. 

즉, 2014년의 장르물은, 시스템을 갖춰 진 미드를 뺨칠 정도는 아니지만, 2014년의 한국 사회를 냉정하게 재단하는 사회 비평의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중이지만, 정작 그 드라마 속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수동적이고, 정적이며, 전근대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꼭 여성을 섹스어필한 존재로만 쓰는 것이 소모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오로지 감성이나, 모성, 혹은 연민이라는 특정한 감정적 기제로서만 여성을 소비하는 것 역시, 편견에 사로잡힌 방식에 다름아니다. 

(사진; 뉴스엔)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웃음기 하나 없니, 사랑 타령도 없이, 건조하게 묵묵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론을 다룬 <쓰리데이즈>는, 여성 캐릭터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쓰리데이즈> 속 여성들은 감정적이지도 충동적이지도, 사랑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경찰이면, 경찰, 청와대 경호관이면 경호관으로서의 사회적 삶에 충실하다.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위기에 빠져도 거의 누가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빠져나온다. 온 몸이 묶인 채 갇힌 이차영(소이현 분)은 스스로 악을 쓰며 묶인 것을 풀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공중회전을 하며 차에 치일 뻔하고서도, 동료 경호관 한태경(박유천 분)에게 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 뿐이며, 내가 나의 일을 하듯,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또 다른 여성 캐릭터 윤보원 순경(박하선 분)은 한 술 더 뜬다. emp 탄을 맞고,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끄덕없고, 남자 세 명 정도는 거뜬히 쓰러뜨린다.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인 조력자로,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다. <쓰리데이즈>의 여성 캐릭터들을 보면, 얼마든지, 작가의 의지만 있다면 여성 캐릭터들도, 보다 진일보한 이성적인 인물로써 드라마 내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까지 2014년의 대부분의 장르물은, 여성을 '여성'으로 소비하고, 소모하는데 진력하는 편이다. 덕분에, 늘 여성들은 문제를 만들고, 헤매고, 흔들리며, 그녀를 그렇게 만든 남성들의 잿밥이 되거나, 그녀들을 잡아주고, 이끌어 주는 멋진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데 봉사한다.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사회적 시선의 성취만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취가 아쉽다. 여성을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로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객관적으로 조명해 주는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 


by meditator 2014. 6. 14. 18:29

우선 이 글을 쓰기 전에 누군가의 엄마인 내가 가진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싶다. 

누군가의 엄마인 나는 <신의 선물>을 보면, 묘한 이중적인 감상에 휩싸인다. 
딸을 살리고자 시간을 거슬러 온 엄마 수현(이보영 분)에게 그다지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기에 그럴 수록,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범인은 찾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엄마 수현의 맹목성이 그 누구보다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에서는 또 엄마인 수현이 와닿지 않는다. 

시간을 거슬러 온 수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딸이 여전히 과거의 시간 속에 생존해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최선을 다해 딸과 함께 도망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제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마치 운명처럼, 수현과 수현의 딸은 사건을 향해 멈출 수 없는 행보를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수현은 딸과 함께 도망치는 대신 스스로 범인을 찾는데 나선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24일 방영분에서도 보여지듯이 수현이 범인을 잡는 과정은, 그녀 스스로가 짚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듯한 위기의 순간들 뿐이다. 앞서 범인으로 추측되었던 신봉섭(강성진 분)을 잡기 위해 변장에 육박전까지 불사했다. 하지만 그런 수현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신봉섭이 예상치 못한 오토바이를 탄  남자에 의해 살해 당하자, 그 오토바이 탄 남자로 추측되는 장문수(오태경 분)의 집을 탐색하기 위해 들어갔던 수현은 예상치 못하게 장문수에게 사로 잡혀 입막음에 포박을 당하는가 하면, 결국 또 염산 병이 난무하는 육박전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살벌한 범인 색출 작전인데, 제 아무리 아이를 사랑한다 한들 아이와 함께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온 수현은, 샛별이가 죽기 전보다도 더 딸인 샛별과 함께 하는 시간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길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비상이 걸려 뛰쳐나가는 형사들처럼, 수현은 어디선가 범인과 관련된 정보를 들으면, 그 누구라도 좋으니, 아이를 맡기고 뛰쳐나간다. 그것이 남편(김태우 분)인 것은 당연지사요, 때로는 동찬의 사무실의 여직원 제니(한선화 분)이기도 하고, 후배 작가인 주민아(김진희 분)요, 옆집에서 일 돌봐주는 할머니(정혜선 분)이기도 하다. 

(사진; 리뷰스타)

그리고 6회와 7회를 거쳐 새롭게 등장 인물들의 사연이 밝혀지면서 연쇄 살인범이나, 아동 강간 살해범이 아니라, 오히려 수현이 무방비하게 아이를 맡기는 인물들에게서 수상한 점들이 발견되어 가고 있다. 알고 봤더니 샛별이의 아버지는 과거 동찬의 형 사건의 담당 검사였으며, 믿음직스런 후배는 남편의 내연의 애인이었다. 하지만, 집 바깥으로 돌며 사건을 해결하려 고군분투 중인 수현을 그 사실을 모른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식이다. 아이를 구한다며, 아이를 방치하는 수현의 모성이 영 불편하다. 

더구나 수현의 아이 샛별이는 남편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말던 자신이 궁금하다고 대뜸 남편의 멱살부터 잡아채는 수현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덥석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에서 똑같다. 그래서 쉽게 사라지고, 쉽게 누군가를 쫓아가 엄마인 수현은 물론 보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과연 이런 수현의 딜레마, 범인을 쫓기 위해 아이를 방치해야 하는 모성의 편향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이를 유괴한 범인을 쫓는 엄마라는 캐릭터로 인해 불가피하게 아이를 방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신의 선물>이 가진 구조적인 패착이 되겠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또 하나의 복선이라면?

되돌아 보건대, 과거에도, 수현은 첫사랑과 잠시 만나기 위해 샛별이를 누군가에게 맡겼었다. 그런 수현의 사소한, 하지만 결국은 결정적인 무신경이 딸 샛별이의 유괴로 이어졌었다. 그런데, 자살 시도 끝에 시간을 거슬러 온 수현은 다시 범인을 찾겠다며 자신의 딸을 누군가에게 덥석덥석 맡긴다. 더구나, 그때 그 사건이 났을 당시 맡겼던 후배 작가에게, 전혀 의심도 없이, 샛별이이 손을 넘겨준다. 정작, 사건을 쫓느라,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오류를 되짚어보는 반성이 없는 것이다. 

7회 기동찬은 함께 일하는 병태(연제욱 분)에게 눈으로 보여지는 사건의 이면에 대한 경구를 듣는다. 동찬을 그 후배의 말을 통해, 형의 사건을 의심해 본다. 하지만, 오히려 후배의 말은 수현에게 더 어울린다. 가장 그녀가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제 7회에 본격적으로 의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샛별이의 사건이 남편이 검사였던 시절에 있었을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정작 사건의 발단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느라 주변에 무신경했던, 그리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믿었거니 했던, 그녀의 무신경, 막연한 신뢰에서 비롯되고 있다. 수현은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만, 7회 엔딩에서 후배에게 손을 잡혀 가다 자동차와 부딪치게 되는 샛별이처럼, 어떤 면에서 수현은 사건이 일어나도록 조장하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신의 선물>의 모정은 불편하다. 열렬히 응원하고 박수를 보내기엔 어쩐지 껄쩍지근하다. 심지어 수현의 열성적인, 하지만 맹목적인 모정의 여정이 가혹한 댓가를 치를 것 같아 불안하기 까지 하다. 시간을 거슬러서도 여전한 수현의 맹목성, 그리고 역시나 시간을 거슬러서도 자신이 본 것만을 믿겠다는 기동찬의 또 다른 맹목성이 부서져 나가는 시간, 그래서 진실 앞에 오열하게 되는 비극의 시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우리 삶의 위선과 마주서는 시간, 그것이 <신의 선물>이 남긴 이야기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25. 02:03
자, 다음 두 드라마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쓰리데이즈> 1회,  시장 순시를 나간 대통령(손현주 분)은 한 시민으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곧 그 밀가루 세례는 대통령을 음해하려하던 시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측근 양대호 대령이 그 소란스런 과정을 통해 비밀리에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과정이었음이 밝혀진다. 단 한 회만에 사건과 사건의 결과가 드러난다. 1회만이 아니다. 1회 말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음모는, 곧 경호관 한태경에 의해 범인이 경호실장 함봉수였음이 밝혀진다. 어디 그뿐인가. 3회,4회에 걸쳐서 98년 양진리에서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음이 알려지게 되고, 그 배후로 특검은 대통령을 지목한다. 하지만, 4회 말, 병실에서 혼수상태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 시작한 대통령의 입에선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말이 힘들게 흘러나온다. 


<신의 선물> 1회 말미, 부녀자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당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샛별을 따라 자살을 시도했던 혜원은 딸이 죽기 2주 전으로 돌아와, 딸을 살리기 위해 부녀자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기에 몰두하고, 곧 범인이 밝혀진다. 바로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받고자신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그 아이들의 엄마를 찾아다니며 죽인 차봉섭(강성진 분)이었다. 혜원의 남편이 증거 불충분으로 차봉섭을 풀어주었음에도 집요한 혜원과 기동찬의 합동 작전으로 연쇄 살인범 차봉섭은 검거되기에 이르지만, 범행 현장을 보고 오는 도중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차봉섭이 죽었음에도 사진 속의 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수상하게 여긴 혜원과 기동찬은 다시 혹시나 있을 지 모를 공범을 찾는데 주력하고, 10년 전 검사였던 혜원의 남편에 의해 사형을 당했던 사형수의 아들 장문수(오태경 분)를 쫓는다. 드디어 그의 방 안에서 샛별의 사진과, 즐비한 납치에 사용되었던 물품을 발견한 혜원, 이렇게 6회는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신의 선물> 6회에서 등장한 장문수는 샛별을 죽인 범인일까? 물론 다음 주를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건대, 이렇게 일찌기 범인의 면모를 드러낸 장문수는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신의 선물>도, <쓰리데이즈>도 드라마의 초반부터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의 범인들이 밝혀지지만, 정작 그 등장한 범인들은 진짜 범인들이 아니다. 

<신의 선물>의 경우, 결정적 사건은 하나다. 주인공 혜원의 딸인 샛별이 납치당해 죽은 사건이 그것이다. 하지만, 샛별의 엄마 혜원이 샛별의 사건을 해결하여 가면 갈수록, 혜원은 정작 엉뚱한 사건의 범인을 진짜 범인이라 착각한 것이 되고, 샛별이 납치 사건은 전혀 다른 파장으로 번져나간다. 
<쓰리데이즈>의 경우는 결정적 사건인가 했는데, 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이 계속 등장하는 반전에, 반전의 연속이다. 대통령이 밀가루 세례도 센세이널한 이슈인데, 한 술 더 떠 암살에, 이제 탄핵감인 양진리 사건 은폐까지 등장한다. 게다가 대통령은 죽어갈 측근들에게 말한다. 한 나라의 수장인 자기 자신보다더 더 거대한 암흑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비록 사건의 양상은 달라도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사건들이 진행되는 방식은 보다 본질적이고, 본원적인 문제 제기를 향해 나아간다. 그저 한 어린 소녀의 납치 사건인 줄 알았던 사건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이코패스의 범죄 행각을 거쳐, 이제 툭 튀어난 범행 공모자를 통해 10년 전 누군가의 원죄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현듯 등장한 대통령과 측근들의 대사들로, 이것이 혜원 가족의 문제 그 이상임을 암시한다. 
<쓰리데이즈>도 마찬가지다. 젊은 경호관 아버지의 죽음에서 촉발되어, 경호실장의 해원에서 시작된 암살 시도는 16년 전 동안 묵혀왔던 대통령의 치부를 꺼내들었고, 그건 다시 대통령조차 없애 버릴 수 있는 거대한 어둠의 존재를 드러낸다. 

벌써 범인이 밝혀지면 어쩌냐는 우려의 목소리에 그건 빙상의 일각이라는 제작진의 큰소리처럼, 시청자들의 추리를 뛰어넘는 반전의 연속은, 결국 이 두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18일 중간 제작보고회에서, <쓰리데이즈> 출연진들이 5회에서 부터 '이제 시작'이라며, '맛없는 밥상은 권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마치 얕은 수를 가진 노름판의 초짜처럼 자신이 알아낸 패에 희희낙락하다, 다음 주 제작진이 던진 또 다른 떡밥에 농락당하기를 반복한다. 분명, 케이블의 수사 드라마들처럼 에피소드식이 아님에도,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긴 호흡의 스토리에 지치지 않도록, 매회 이 드라마에 빠진 시청자들과 즐거운 힘겨루기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 힘겨루기는, 회를 거듭하면서 이 두 드라마에 감탄하는 시청자층의 증가로 보건대 제작진의 승리고 판가름나고 있다. 하지만, 분명 겨우 저 멀리 가물가물한 불빛 하나에 의지하고 가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시청자들은, 그 가물가물한 불빛만으로도, 환호작약하고, 다가가 그것이 원래 자신이 찾던 곳이 아니었음을 알고도  기꺼이 농락을 당해준다

그간 시청자들은 뻔히 아는데도, 주인공만 모른채, 마치 환한 방안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스토리에 지친 시청자들은 자신들을 매회 기만하며, 또 매회 새로운 떡밥을 던지며 유혹하는 이 두 드라마에 그간 참았던 갈증들을 마음껏 해갈하고 있는 중이다. 비단 그것은 우리나라 시청자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실시간으로 방영된 드라마의 댓글 중한국 드라마가 뻔한 로코나, 막장이 아닌 이런 드라마도 있었냐는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드라마는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한국 드라마의 새 장을 열고 있는 중인 것이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시청률 따위'라며 이른바 '부심'를 내세우며 드라마를 옹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3. 19. 01:41

드라마의 재방송이란 어떤 의미일까?

주말 혹은 일요일 한 나절 무료하게 거실을 뒹굴다 손에 잡힌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돌리다 어쩌다 눈을 맞추게 되는 그래서 시간 때우기 식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아니 그 조차도 이젠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젊은 층들에게는 별 의미가 닿지 않는 시간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주말과 일요일, 약속을 차치하고라도 자리를 지키며 텔레비젼 앞을 사수해야 할 이유가 생길 지도 모른다. 본방 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재방송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로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재방송이 그것이다. 

<쓰리데이즈>는 5,6일 본방에 이어 9일 1시 5분부터 시작된 재방송을 회 별로 종결 없이, 광고도 없이, 1,2회를 연달아 방송하는 연방을 했다. 본방 방영 당시, 1회가 드라마의 도입부라 친절한 설명을 위해 극의 흐름이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2회는 그에 비해 장르극으로서의 박진감이 살아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쓰리데이즈>는 일반적으로 드라마들이 재방 시간을 위해 편의적으로 그래서 때로는 흐름이 끊길 정도로 장면을 들어내는 성의없는 편집을 하는 것과 달리, 연방을 위한 1,2회의 톤을 맞춘 편집을 해냄으로써, 재방 그 자체로 마치 한 편의 완결된 스토리를 가진 영화와도 같았다는 호의적 평가를 얻었다.

(사진; 쓰리데이즈의 한태경; 스포츠 월드)

그런 성의를 다한 재방송 덕분인지 그 다음 주 상승세를 이어간 쓰리데이즈는 결국 13일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쾌거를 달성했다. 그런 <쓰리데이즈>를 벤치마킹이라도 하듯이 같은 장르물임에도 불구하고, <쓰리데이즈>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10%에 못미치는 시청률에 고전하고 있던 <신의 선물>도 15일 3,4회를 연방으로 방송하기에 이른다.

물론 연방이 모든 드라마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중간에 광고도 없이 한 호흡으로 드라마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드라마가 별 내용이 없거나, 지루해질 경우 오히려 이어진 다음 회까지 시청자들을 끌고가기는 커녕, 중간에 이탈하는 숫자를 배가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기도 한다. 즉,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의 '연방'이란 일정 정도 제작진의 입장에서 드라마의 내용 자체로 시청자들을 설득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경우, 장르물을 좋아하거나, 드라마를 즐기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방영이 되기도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기대작들이었으며, 매회, 드라마의 수준과 퍼즐같은 내용을 두고 수많은 리뷰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던, 단지 그에 비해 대중적 관심만이 부족한 그런 드라마들이었기에 연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장르물의 경우, 추리에 추리를 거듭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중간 유입이 어려운 난점을 가지고 있는데, <쓰리데이즈>의 경우, 재방송 연방을 통해 극을 사건 중심으로 보다 명확하게 편집해 냄으로써, 중간 유입층의 증대를 가져왔다. 또한 지금까지 지난 회의 설명이나, 앞으로의 사건 전개를 위한 포석으로 상대적으로 늘어진 홀수 차와, 그에 반해,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상대적으로 스릴 넘치는 짝수 회차를 함께 이어붙여,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짐으로써, 본방을 본 사람들 조차 재방이 본 것을 또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맛을 가진 작품으로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여, 보고 또 봐도 재미있는 드라마란 입소문을 만드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 신의 선물; 한겨레 신문)

또한, <쓰리데이즈>나, <신의 선물>의 경우, 장르물의 특성상 남여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급박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와중에, 섣부른 감정 양산을 오히려 드라마의 독이 되는 상황에서 본방에서 어설프게 끼어든 남녀 주인공 사이의 발라드 ost가 재방에서는 가차없이 삭제된 처럼, 이미 본방을 통해 방영되었지만, 다양한 사이트를 통해 올라왔던 시청자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 노력하는 제작진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그저 보는 시청자층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시청자층으로 시청자들을 적극적으로 견인해 내는 자세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본방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들이 해결되어짐을 보임으로써 드라마적 완성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줘 시청자들의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렇게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재편집된 연방으로써의 재방은, 방송 트렌드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시도이다. 그저 시간 때우기 용 재방이 아니라, 재방이 그 자체로 새로운 재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등장한 것은, 방송가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본방 시간조차 맞추기 빠듯한 제작 환경에서, 그리고 안이하게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트렌디한 작품들이 반복 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용기있게 장르극을 편성하고, 또 그 장르극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본방에 이은, 재편집된 연방이라는 시도는 장르극의 발전을 위해 노력의 일환으로 고맙기 까지 하다. 부디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좋은 성과를 거둬서, 그에 뒤이은 야심찬 시도를 하는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되기 바란다. 


by meditator 2014. 3. 16. 16:25

장르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처럼 행복한 시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르극이라고 한다면 미드(미국 드라마)나 일드(일본 드라마)를 다운받아보거나, 그게 아니라면 케이블을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일 터인데, 요즘은 당당하게 월화수목 장르극을 공중파에서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3월 들어 새로이 시작한 sbs의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보통 한 방송사에서, 그것도 월화 수목 드라마를 연달아 장르물을 편성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감하게 sbs는 <신의 선물>에 이어, <쓰리데이즈>를 편성했다. 두 드라마는 비록 아직 시청률 면에서는 발군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지만, 젊은 시청자 층을 중심으로 웰메이드라는 이른 평가를 받으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선전 중이다. 


하지만 같은 장르물이라고 해도 두 드라마의 궤적은 다르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 두 드라마의 장르물로서 따로 또 같은 묘미를 찾아보자.



1. 사건의 단초- 내 피붙이의 죽음을 파헤치는 주인공들
<신의 선물>에서 수현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샛별이가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쓰리데이즈>의 경호관 한태경의 아버지는 정체을 알 수 없는 트럭에 쫓기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두 주인공들은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들로, 자신들의 피붙이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두 드라마의 방식은 다르다.

<신의 선물>의 엄마 수현은 자신이 세심하게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딸이 죽은 강가에 몸을 던지지만, 그건 엄마에게 딸이 죽음에 이르른 2주 전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 슬립'의 계기가 된다. 엄마 수현은 딸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딸이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 <쓰리데이즈>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이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3일 간의 사건을 그려낸다.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 사건이 일어나고 3일, 그리고 그 후의 3일 까지의 3일 단위의 날짜들이 전쟁의 서막, 결전, 심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긴박하게 전개된다. 

딸을 잃을 지도 모를 엄마의 절박함, 순식간에 아버지를 잃은 경호관의 슬픔이, 장르극이라는 특정 분야를 넘어, 보편적 감성으로서의 공감을 호소하며 시청자들을 유인한다. 

2. 사건의 확산- 피붙이의 죽음을 넘어선 미궁 속으로 
하지만 내 혈육의 죽음을 파헤치고자 시작한 두 주인공들의 행보는 개인적 해원을 넘어 더 큰 범죄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로 돌아 온 수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일어날 일을 이야기해 보지만 마이동풍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엄마 수현이 선택한 방법은 샛별이을 데리고 도망치는 일이다. 하지만, 샛별이와의 도망도, 엄마가 버린 아이의 물건이 돌아오듯 결국 다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결국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범인이 샛별이를 제물로 삼기 전에 앞장서 연쇄 살인범을 잡는 것이다. 

<쓰리데이즈>의 한태경은 아버지의 죽음이 경찰의 조사대로 그저 졸음 운전에 의한 우연한 교통 사고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발견한 흐트러진 집, 방금 누군가 빼내 간 듯한 기밀 문서, 그리고 자신의 집을 다녀간 대령의 죽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대령이 바로 시장에서 대통령에게 밀가루를 던지라 지시했던 인물로 밝혀지며,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하게 되고, 죽어가던 대령이 암시한 대통령의 암살 음모에 끼어들게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암살 음모를 밝히려 뛰어든 태경은 암살자의 신분을 알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암살 음모의 조력자로 쫒기는 처지에 까지 놓이게 된다. 

딸이 죽기 까지 2주라는 시간에 쫓기는 엄마,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쫓기는 경호관, 두 주인공들이 시간과, 사람 들에 쫓기면 쫓길 수록 장르극으로서의 두 드라마의 재미는 배가된다. 


3. 장르극의 묘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가는 사건들
두 시간 짜리 영화라면 몰라도 16부작 정도의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장르극으로 끌고 간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그래서 케이블 등에서 방영되는 장르극 들은 대부분 전체적인 긴 호흡의 중심이 되는 줄거리에, 각 회차 별 해결이 되는 짤막한 사건들을 얹어서 감으로써, 그 문제점을 해결한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그런 장르극의 호흡에서 오는 문제점을 각각 자신만의 드라마적 묘미를 통해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신의 선물>에서 엄마 수현은 적극적으로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에 개입한 결과 범인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추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범인의 손을 맞잡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4회 마지막 엄마 수현은 그가 죽어야 자신의 딸이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의 손을 놓는다. 그렇다면, 이미 4회를 통해 엄마가 그토록 애닳아 하던 사건이 해결되는 것일까? 하지만 4회에 이르러 오히려 드라마는 복잡해 진다. 엄마 수현이 개입한 사건들에게 제 아무리 엄마가 애를 써도 결국 피해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결국 어쩌면 샛별이의 죽음도 막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불길한 복선이 드리우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임 슬립 하기 전 굴뚝같이 믿었던 범인이 사실은 범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오히려 엄마 수현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샛별이의 납치 사건은 그 이전에 알려진 사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전혀 다른 얼굴이 비춰지기 시작하며 드라마는 다른 궤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쓰리데이즈>는 전체적으로 한태경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통령의 암살 음모라는 두개의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2회 만에, 대통령의 암살범을 밝히는 배짱을 보인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꼬이고 돌아서 범인을 밝히는 것과 달리, 범인이 누군지를 밝히고, 오히려 주인공이 암살범의 조력자로 몰리며 쫓고 쫒기는 역할의 방향이 역전된다. 뿐만 아니라, 단 2회에 불과했는데도, 2회 동안 시청자들이 보았던 것을 의심하고 다시 돌이켜 복습하게 만드는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2회에서 시장통 밀가루 해프닝의 목적이었던 대령의 음어 쪽지 전달이, 사실은 다른 메시지였다는 것을 3회에 드러냄으로써 드라마는 또 다른 행선지를 밝힌다. 대통령은 사라지고 없는데, 대통령이 나타날 지도 모를 청주역에 암살범과, 경호관들과, 그리고 한태경이 모이는 기막힌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춰진다. 하지만, 겨우 몇 회지만 시청자들은 안다. 이것이 또 다른 퍼즐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렇게 한 회, 한 회 친절하게도 공개되는 퍼즐들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쓰리데이즈>의 충실한 '닥본' 시청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4. 장르극의 재미 그 이상의 주제 의식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가 대단한 것은 우리나라 공중파 드라마에서 보기 드물게 장르극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것만이 아니다. 

1회에서 양심적 변호사로 나오는 아버지와 그 못지 않게 의협심이 강한 어머니로 등장한 주인공 부부의 이율배잔적인 삶의 행태와, 대통령의 사형제도를 내세운 강성 정치적 공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드라마가 그저 엄마가 살해된 딸의 죽음을 막는 단순한 사건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 엘리트 지식인이자, 중산층인 엄마가, 딸의 사건을 파헤지면서 조우하게 된 진실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신의 선물>의 잠재력이다. 

<쓰리데이즈>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경호실장은 그것을 밝힌 경호관에게 선언한다. 대통령은 지켜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나라의 수반의 존재를 부정하고 들어가는, 그렇게 부정을 당하는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 몰래 자신의 임기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하려던 일은 또 무엇이었는지,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이 어디인지 그것 역시 백척간두의 그것 마냥 아득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복선은 3회 대통령 이동휘가 집어든 책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공지영의 책이 대신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킬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의 삶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는 책의 소개문이 어쩌면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는 드라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근자에 우리 나라 드라마가 해왔던 시도를 한 발 더 뛰어넘은 용기를 낸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제 의식에 있어서도 공중파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묵직한 정치 사회적, 심지어는 철학적 수준의 질문들을 던지는 좋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분명 이 드라마를 편성하는 측에서도, 이 드라마들이 그간 sbs를 끌어왔던 트렌디한 드라마들에 시청률로 버금가리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이 두 드라마는 여느 통속적 드라마들이 받는 시청률 운운의 평가만으로는 아쉽다.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면 감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게 미흡하더라도, 2014년 대한민국 드라마 사의 한 획을 그을 소중한 드라마들임에는 분명할 것이라 지레 설레발을 떨어본다. 




by meditator 2014. 3. 13. 02:12

한참 인기를 끌었던 <수상한 그녀>는 칠순의 말순 할매(나문희 분)가 우연히 청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단지 영정 사진을 찍고 나왔을 뿐인데, 말순 할매는 행색은 그대로이지만 얼굴과 몸이 꽃다운 젊은 처자(심은경 분)가 되어버렸다. 할매인줄 알았떤 자신이 젊은이가 된 사실을 우연히 마주친 앞 사람의 선글라스와 차창에 비친 모습으로 알게 된 할매는 기절초풍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할매의 혼란을 그리 길게 끌지 않는다. 할매는 곧 자신의 '회춘'이 평생을 아들 하나 바라고 살았던 자신의 일편단심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 여기고 젊음을 즐길 시동을 건다. 덕분에 영화는, 혼돈도 잠시 유쾌하게 할매의 젊음 탐방기로 접어들게 된다. 


타임 슬립물에서 빠질 수 없는 클리셰라 한다면 바로 이 부분, 타임슬립을 한 주인공, 과거 자신이 살았던 시점과, 현재의 시간을 거스른 시점 사이의 혼돈을 느끼는 상황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보는 사람들 역시 주인공의 혼란과 혼돈을 공유하고,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계륵이기도 하다. 분명 꼭 짚고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긴 하지만, 그 설명이 작품의 만드는 사람들의 호들갑과 보는 사람들의 경악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 2회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샛별이가 죽은 장소로 가 자살을 시도했던 엄마 수현(이보영 분)은 아이가 죽기 2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물 속에서 빠져나온 수현은 아이가 갇혔던 장소에 아이의 흔적이 없는 것과 전화를 통해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깜짝 파티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 해 주는 가족들을 통해 자신이 사건이 나기 전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샛별이가 죽고, 자신이 죽으려 했던 사실을 악몽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수현은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타임슬립했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미래에 있을 샛별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진; tv리포트)

주변 사람들에게 2주 후에 샛별이가 납치 당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리려 하고, 그게 안되니 샛별이를 데리고 도망가려 하고, 함께 죽을 뻔했던 기동찬(조승우 분)을 만나게 되고, 그와 아웅다웅하며 결국은 과거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하는 과정은 분명 <신의 선물>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젠 어느 덧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400년을 살았다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청자들에게 구구저절 장황하게 타임슬립의 파생적 문제점을 설명하는 과정은 가급적이면 짧으면 짧을 수록 좋았다. <신의 선물>을 보는 시청자들은 엉마인 수현만큼이나 과연 누가 샛별이를 죽였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물에서 살아나왔을때, 창고에 샛별이의 흔적이 없었을 때,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흘러나왔을 때 이미 엄마 수현에게 시간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빨리 범인을 찾기 위한 기회로 돌아가길 바라는데, 드라마는 여전히 타임슬립의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답답해 진다. 

장르물의 관건은 속도이다. 여기서 속도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빠르게 진행시키는 의미에서의 속도만이 아니다. 긴박감을 줄 때는 주되, 시청자들의 사건 이해를 위해서는 풀어주는 강약 조절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선물> 3회는 필요한 건 알지만 초반의 타임 슬립의 혼돈에서 수현이 스스로 범인을 찾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시간까지의 나열식의 장황함이 마음 급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딴 짓을 하게 만든다. 

물론 3회의 <신의 선물>이 장황함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결국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엄마 수현은, 결국 자신과 같은 처지의 기동찬과 함께 범인을 찾으려 한다. 잠시 재벌의 엄청난 재산에 현혹되었던 기동찬도 자신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형의 사형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고, 그리고 잠시잠깐이었지만 샛별과의 조우를 떠올리며 수현의 수사에 합류한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다시 장르극의 긴박감이 살아나고, 해골 무늬 티셔츠를 입은 두번 째 피해자를 찾기 위한 혼돈스런 숨바꼭질을 시청자의 느슨해진 관심을 조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 빗속에서 피해자를 찾기 위해 나선 수현의 목을 범인인 듯한 사람이 조여올 때 장르극으로서의 <신의 선물>의 묘미는 극대화된다. 

장르극의 딜레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장르극에 있어, 방영 시간 내내 범인을 쫓을 수도 없고, 설명과 혼돈의 시간이 필요한데, 과연 그 배분과 깊이를 어떻게 해야 범인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운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신의 선물>은 충직하게,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 과정을 세세하게 짚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엄마 수현이 과거에서 돌아와 남편 한지훈(김태우 분)이나 첫사랑 현우진(정겨운 분)들에게 미래의 사건을 토로할 때, 그저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의 격차만이 아니라, 아내를 믿을 수 없는 남편, 그녀를 믿어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첫사랑,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하게 빚어지는 감정적 괴리감에 주목했다면 어땠을까. 사건의 용의자로써 남편, 혹은 첫사랑과의 감정적 이반이었다면, 수현이 벌인 혼돈의 시간이 타임 슬립물의 통과 의례가 아니라, 또 다른 실마리로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동찬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을 거슬러 헤매는 기동찬 대신에, 형의 사형과 재벌 회장의 돈 사이에서 고뇌하는 기동찬에 촛점을 맞추면 어땟을까. 잃어버린 아이를 향해 질주하는 엄마, 거의 모노드라마처럼 연기의 묘미를 선보이며 독주를 하는 기동찬, 그들의 폭주 사이에 쉼표가 어디가 될 것인가에 따라 드라마의 묘미는 달라질 듯하다. 

하지만 이런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물>은 유괴되어 살해된 아이를 찾는 엄마의 타임슬립물이라는 장르적 선택에서 이미 비교 우위의 드라마이다. 치정과 막장, 로맨스가 아니고서는 드라마를 논하기 힘든 우리 드라마 시장에서, 보기 드문 반가운 시도이기도 하다. 어쩌면 굳이 장황한 3회의 리뷰 조차도, <신의 선물>에 보다 많은 관심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노심초사가 빚어낸 과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크다. <신의 선물>이 마지막까지 웰메이드 드라마로 남아, 장르극의 안착에 기여하길 바라는 맘이다. 


by meditator 2014. 3. 11. 08:49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동화의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드라마 속 동화는 결코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동화 속 죽음의 신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는 아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아이가 간 곳을 알기 위해 엄마는 자신의 머리를 기꺼이 자르고, 가시 나무를 자신의 따스한 품으로 안아준다. 그래서 드디어 만나게 된 죽음의 신, 하지만 죽음의 신이 있는 곳은 강과 숲이 막고 있다. 죽음의 신은 엄마에게 말한다. 그 강을 건너고 싶으면 두 눈을 강에 던지라고. 엄마는 주저없이 자신의 두 눈을 강에 던진다. 아이를 위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모성의 댓가는 잔혹하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구했냐는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동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드라마가 비로소 시작된다. 

(사진; 헤럴드 경제)

드라마의 서두에 짤막하게 보여진 동화의 내용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서 엄마인 수현(이보영 분)이 자신의 아이 샛별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덕분에 1회 내내, 아직은 엄마와 함께 사는 샛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시청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샛별의 엄마 수현은 실시간으로 범인을 현상 수배하고, 범인을 찾아내는 시사 프로그램의 작가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자 샛별의 아버지인 한지훈(김태우 분)은 대통령 후보를 상대로 자신의 소신을 펼 정도로 정평이 난 인권 변호사이다. 수위 아저씨가 홀대하는 장애인에게 동정을 보이고, 잔혹하게 여자를 살해한 살인범에게 분노를 느끼며 저돌적으로 반응하는 수현도, 피해자 가족에게 오물 세례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기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양심적인 사람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회적 의식과 달리, 현실의 수현은 지극히 보통의 엄마일 뿐이다. 일하느라 돌보지 못하는 아이를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맡긴 채, 영어 학원이다, 수학 과외다 하며 뺑뺑이 돌리고, 그런 아이가 잠시 일탈을 위해 찾아간 장애인에게 당장 싸다귀를 날릴 만큼 속물적인 엄마일 뿐이요, 의식있는 변호사인 아빠는 그런 엄마를 방관하며 육아에는 오로지 엄마의 몫으로 돌리며 바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부모 아래에서 학습 부진을 겪으면서도 티없이 순수한 딸 샛별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착한 심성으로 자꾸만 엄마와 비끄러져 나가며, 다가올 비극의 징조를 보인다. 굳이 우연히 들른 까페 여인의 의미 심장한 예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동화의 학습 효과를 겪은 시청자들은 그 짧은 1회 동안, 엄마의 품에서 자꾸만 벗어나 튕겨나가는 샛별이의 행보에 번번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돌발적으로 사건을 만들던 샛별이 정작 사라지게 된 계기는, 마치 백화점에서 잠깐 아이의 손을 놓았던 그 찰라로 인해 아이를 잃게 되듯이, 10년 전 사랑하던 사람을 만나 잠깐 차를 마시는 그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우연히 벌어진다. 그것도 하필 수현이 내용까지 바꿔가며 수배를 하려던 했던 그 연쇄 살인범의 손아귀에 아이를 놓친다. 

뿐만 아니라, 번잡스럽게 벌려진 1회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등장하는 그 누구도 다 의심스러울 뿐이다. 뻔히 교도소에 갇혀진 사형수에서 부터, 그의 어머니가 불현듯 수현의 빌라 앞에 등장하는 것이며,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지적 장애아가 샛별이의 주변에 어른거리는 것까지. 뜬금없이 수현의 집으로 쳐들어 온 사형수의 동생 기동찬(조승우 분)까지 의심의 촉은 끝이 없이 번져간다. 도대체 10년 전 벌어졌던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기에 그 사건의 인물들이 촘촘히 수현과 수현의 딸 샛별의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걸까. 과거의 사건까지 시선이 간다. 친절하게 샛별이 친구의 강아지를 맡아준 문방구 주인에서, 수현과 부딪쳤던 택배 기사는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고,심지어 이유없이 등장하고 말기엔 비중있는 조연인 기동규 장애 학교 교사조차 의구심이 든다. 당연히 한기훈에게 피해자의 가족의 심정으로 악다구니를 하던 방청객 역시 피해갈 수 없으며, 하다하다 아빠가 친아빠일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아니 한기훈을 정적으로 여기는 대통령은 어떨까?


(사진; osen)

<신의 선물>은 이렇게 단 1회 만에 마치 추리 소설의 첫 장 인물 소개난처럼 이 드라마의 등장 인물과 함께, 그들의 혐의에 대한 의심을 풀어 놓는다. 덕분에 극은 마치 잔뜩 쌀겨를 쑤셔넣은 오즈의 마법사 속 허수아비처럼 삐죽거리고,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이 오즈의 브레인인 양 허세를 부리던 허수아비라도 되버린 듯,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사건의 실체를 그려내느라 골머리가 아프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신의 선물>이라는 드라마의 호불호가 갈릴 듯 하다. 번다한 전개를 실마리라 생각하고 도전 의식을 가진 그 누구라면, 2회를 이어 보며 모처럼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펼칠 장르물을 만났다 여길 것이요, 도무지 이리저리 복잡한 관계의 실타래가 그저 잔뜩 엉킨 것 이상으로 보여지지 않은 그 누군가는 두 손을 들고 채널을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마지막 복병이 있다. 생방송 순간에 들려오던 납치범의 다그치는 목소리 다음에 이어지던 딸 아이의 익숙한 흐느낌에 스튜디오로 달려가 전화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엄마 수현의 모습은, 장르극을 넘어, 처음 아이를 찾아 자신의 눈조차 서슴없이 던져주던 엄마의 처절한 모정을 다시 연상케 한다. 그래서, 장르를 넘어선 모성애의 서사라는, 보편적 공감대로서의 여지를 남기며 시청자들을 끌어 앉힌다. 

<신의 선물>이 그 부제처럼, 14일 이라는 기간을 빌미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아직 열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단 1회 만에도, 엄마인 수현도, 그리고 등장한 그 누구도,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인물들로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현의 주변에서 촘촘하게 배치된 기동찬의 식구들에게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이 드라마가 샛별의 납치 사건 이상의 그 무엇을, 그저 한 가족의 상실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지닐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전작이었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부부 사이의 불륜과 이혼 문제를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해냈듯이, <신의 선물> 역시 유괴 사건이라는 외피를 넘어 또 다른 문제 제기를 할 것처럼 보인다. 또한 <내딸 서영이>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통해, 그녀가 선택한 작품이라면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된 이보영이 선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된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이어 역시나 만만찮은, 하지만 기대해 봄직한 sbs의 월화 드라마 라인이다. 


by meditator 2014. 3. 4. 01:43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