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 골목의 뜻을 찾아보았다. 

골목; 큰 길에서 쑥 들어가 동네나 마을 사이로 이리저리 나있는 좁은 길
이 '골목'은 요즘 획일적으로 도시화된 도시 문화 속에서 고유의 색깔을 지닌 '골목 문화'로 각광받는다. 그래서 '무슨무슨 골목'하며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진 골목이 등장했고, 거기에 '골목길 상권이 나타났고, 결국엔 그 개성있는 이름으로 인해,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시대 '유적'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 시대에 출현하고, 사라져가는 골목은 드라마를 통해 또 다른 시대의 역사로 돌아온다. 바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과 <시그널>의 골목길이다. 

응팔과 시그널의 같고도 다른 골목길
<응팔>과 <시그널>에는 동일한 서울 변두리 지역의 골목길이 등장한다. <응팔>에 등장한 쌍문동이 아직도 유효한 서울 지역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따온 반면, 포탈 사이트에 그 지명을 검색하면 경상북도의 어느 곳이 뜨는 <시그널>의 홍원동은 1994년 서울 변두리 가상의 지역이다. <응팔>이 구체적 지명을 등장시킨데 비해, <시그널>이 가상의 지명을 쓴 것은 바로 드라마 속에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의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즉 드라마 속에서는 홍원동이라고 지칭되지만 그 사건에서 시청자들이 신정동 연쇄 살인 사건을 떠올리는 사건의 비극성이 그리고 드라마와 달리 여전히 미해결로 남은 사건의 결과가 <시그널> 속 지명을 가상화한다. 



두 드라마 속 골목은 각각 1988년과 1997년 거의 10년의 간극을 가진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를 통해 지켜보게 된 두 서울의 변두리 골목길이 주는 정서는 전혀 다르다. 쌍문동의 골목길이, 골목길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칭될 정도로 도시화된 서울에서 잔존한, 사람 냄새 그윽한 인간적 유대의 장소라면, <시그널>의 골목은 연쇄 살인을 무려 10년간 움켜쥔 불온한 공간이다. 1988년에는 공동체적 문화가 살아있던 골목길이 불과 10년이 흘러, 인간성 상실의 증거인 연쇄 살인을 품은 공간으로 전화된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골목길을 바라보는 두 드라마의 상이한 시각, 그리고 골목길을 배경으로 풀어진 서울이라는 도시의 극심한 빈부 격차의 역사가 이런 현격한 결과를 낳게된 것이라 보는 것이 적당하다. 

동일한 골목길을 배경으로 했지만 막상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골목길은 그 넓이에서 부터 다르다. <응팔>의 골목길이 심지어 자가용은 물론, 트럭 한 대가 들어서고도 공간이 한참 남는 널찍한 공간인 반면, <시그널> 속 사건이 벌어지는 골목은, 그 자체가 폐소 공포증을 느끼게 할 만큼 좁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로 막혀있다. 뿐만 아니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은, 그 어느 후미진 곳에서 '납치'가 벌어질만큼 외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다르다. <응팔>의 골목은 그 자체로 사람이다. 피 한 방울도 섞지 않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람들이 한 골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피붙이처럼 엉켜 살아간다.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대로, 어머니들은 어머니들대로 틈만나면 뭉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이들은 친구가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 아이를 같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고백'을 포기할 만큼 형제애를 나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뒷담화'대신 진심으로 이웃의 안녕을 걱정할 뿐만 아니라, 거리로 나앉게 된 선우네를 경제적으로 돕는 굵직한 부조에서부터, 용돈, 식사, 심지어 쓰러진 택이 아빠의 간호까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하기 힘든 일까지 너끈히 해내는 곳이다.

반면에 <시그널>에 등장한 골목은 같은 서울이되 서울이 아니다. 홍원동 골목길을 홀로 가던 여성들은 그곳에 움크리고 있던 연쇄 살인마에게 납치된다. 그저 다리 다친 불쌍한 강아지가 애닮아 발을 멈췄던 여성들은 연쇄 살인마(이상엽 분)의 어미가 강아지에게 했듯 검정 비닐 봉지가 머리에 씌워진 채 세상과 이별한다. 하지만 십 여년에 걸쳐 연쇄 살인이 벌어지는 동안, 역시나 사람들이 사는 그 골목엔 목격자가 없다. 어디 목격자만 없나? 그녀들의 실종조차도 백골 사체가 발견된 이후에야 드러날 만큼, '의문의 실종'이 가능한 곳이다. 심지어 '납치'되었던 점오 여경 차수현(김혜수 분)이 검정 비닐 봉지를 쓰고 거리로 나뒹굴고, 거기를 질주할 때, 그리고 연쇄 살인마가 다시 그녀의 목을 조를 때 골목의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건 그뿐이 아니다. 어미를 잃고 아비를 따라 쌍문동 골목길로 온 불쌍한 소년 택이는 비록 불면증 약을 한 움큼 씩 먹으며 성장했지만, 봉황당이라는 금은방을 하는 아비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어린 시절 부터 바둑이라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함께 자란 골목길 아이들 덕분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설움도 잊은 채 우정을 쌓았고, 심지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 아이와 결혼까지 한 성공의 삶을 산다.

하지만 <시그널> 속 골목길에서 자란 소년은 다르다. 엄마와 둘만 남겨진 소년, 하지만 봉황당을 하는 택이 아버지와 달리, 가난한 소년의 어미는 견디기 힘든 현실의 고통을 소년과의 동반 자살로, 그리고 소년에 대한 학대로 푼다. 바둑 기사로 어엿하게 자기 앞가림을 하는 택이를 아빠가 아프다고 여자 친구가 중국까지 따라가서 보호를 해주고, 그 여자 친구의 부모는 어린 딸을 남자 친구를 따라 중국까지 보내주는 결정조차 흔쾌히 하는 쌍문동 골목 공동체와 달리, 수시로 어미에게 목이 졸리고, 독을 탄 음식을 먹고 변기에 토해내야 하는 소년에게 손길을 내미는 이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소년이 데리고 온 강아지도차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약을 먹으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견녀내기 위해 여자들을 죽이며 살아간다. 



골목의 풍경은 다르지 않다. 쌍문동 골목길에도 야한 섹규얼리티를 강조한 영화의 포스터가 흩날리고, 홍원동 역시 삭막한 골목길에서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색채는 그 포스터의 짙은 색감이다. 그러나 똑같은 삭막한 콘크리트 담벼락과 거기에 붙은 조잡한 포스터이지만, 쌍문동의 그것들이 그저 시대를 나타내는 데코레이션에 불과한 반면, 홍원동의 그것은 여성을 상품화하고 도구화했던 20세기 정신 문화의 세계를 대변한다. 쌍문동의 소년들은 그저 의례로 소비했던 그것들이 홍원동 소년에게로 가면 트라우마의 실현으로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용이한 문화적 기반이 된다. 

골목, 경제적 빈부 격차가 낳은 다른 풍경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응답하라 1988>이 우스꽝스럽게 조명했던 야한 포스터가 나붙고 상영되던 그 시대는, 이른바 3s 문화 정책이 구체화되던 시대다. 군부가 민간 정부로 자기 변신에 성공하고, 경제적 호황이 그 성공을 뒷받침할 때, '독재'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가 내세운 것은 바로 sex, screen, sports의 3s이다. 

그에 따라 1982년 프로야구, 83년 프로 축구, 86년 아시안 게임, 그리고 88년 올림픽으로 sports 정책은 정점을 이루었다. 또한 82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거리는 불야성의 환락의 도시로 번쩍이기 시작한다. 또한 80년 컬러 tv가 보급되기 시작되었고, 영화는 그런 컬러 tv에 대응하는 자구책인 양 tv에서는 만날 수 없는 성인용 19금 영화들을 양산해 낸다. 그리고 그렇게 3s의 우민화(愚民化)정책이 벌어지는 동안, 사회적 비판 의식이 무뎌지는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삶에 매몰되고, 그 과정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일한 서울의 골목이지만, 그 골목길에서 배태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응팔>을 매개로 등장한 이야기는 철저한 서울 중산층의 자기 성장 스토리이다. 단칸방에서 끼니를 굶었던 정팔이네의 복권 당첨. 덕선이네 보증이라는 극적인 스토리까지 끼얹었지만, 결국은 전자대리점, 은행원, 금은방을 하는 당시 좀 살만했던 중산층의 약간은 굴곡있는 부의 에스컬레이션, 그리고 그런 안정된 기반 위에서 탄생한 아이들의 성공을 그려낸다. 골목길에서 위협이래봐야 바바리맨같은 위협적이지 않은 변태일 뿐이다. 심지어 그 마저도 미래의 남편감이 구해준다. 안온한 중산층다운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그런 중산층의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응팔>을 보며 향수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골목길의 그 누군가가 안정된 경제적 기반과 그에 따른 성공적인 자식 농사를 지었던 반면, <시그널>의 연쇄 살인마처럼 그런 경제적 기반을 누리지 못한 그 누군가에게 골목은, 상실과 범죄의 태반이 된다. 이미 사전에 제작된 <시그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지력이라도 가진 듯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된 아동 학대와 범죄를 다룬 데서 보여지듯, 2016년에 드러나고 만 아동 학대의 시초는 이미 저 1997년, 아니 <응팔>이 다루고 있지 않은 1980년대의 그 어느 골목길에서 비롯된다. 아니, 만약에 정환이네가 복권을 맞지 않아다면이라는 단 하나의 물음표만으로도 가능하다. 과연 그래도 여전히 쌍문동 골목길의 그들은 형님, 아우하면서 즐겁게 지냈을까? 거리로 나앉게 될 선우네를 택이 아빠가 돕지 않았다면 선우는 무사히 서울대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가족도 없이 홀로 공장을 다니다 수은 중독이 된 여공과 다른 삶을 살수 있었을까?

by meditator 2016. 2. 21.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