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의병의 이야기를 야심차게 다룬 <미스터 선샤인>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주인공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 및 주요 인물 구동매(유연석 분)을 '국외자'로 설정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아무리 어린 시절 조국의 은혜를 받지 못해 고국을 떠난 노비의 아들이나, 백정의 자식이라도 그들이 이제 '미국인'이 되어, 혹은 일본의 낭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설정은 제 아무리 그들의 극적인 '자각'을 예정한다 했어도, 그들의 역사적 존재로 인해 쉽사리 두 남자 주인공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바로 그 '국외자'였던, 그래서 늘 '경계'에 섰던, 아니 스스로 경계 밖의 존재라 자신을 규정했던 두 사람에게 스스로 경계를 넘어올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인 유진, 의병의 저격 대상이 되다. 

유진은 노비였다. 아비가 노비였고, 어미 또한 그러했다. 어미의 미색을 탐한 외부대신 이세훈과 그에게 잘 보이려던 희성의 조부가 억울한 누명을 씌워 유진이 보는 앞에서 아비를 멍석말이로 죽였다. 어미는 유진을 살리기 위해 희성의 어미를 겁박했고, 유진이 무사히 그 집에서 도망치는 걸 보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추노꾼을 피해 어미의 유언에 따라 유진은 조국에서 가장 먼곳 미국행을 택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조선의 어린 소년은 이방인의 놀림을 피하기 위해 총을 잡았고, 그 총이 그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총'의 덕택에 그는 조국에 미국의 장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연히 그에게 자신을 버린 조국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그를 조선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부른다. 경계에 선 유진, 하지만 그는 철썩같이 자신을 미국인이라 생각하려 한다. 


유진은 조선의 왕 앞에서도 미국인이었다. 유진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외부대신 이세훈을 조선의 정부와 '협력'하여 제거하자, 그에 호감을 가진 고종은 '한국인'인 그를 조선의 '군사' 고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오로지 이세훈을 역모죄로 몰기 위해 '의병'과 '정부'와 협력했던 그에게 고종의 청은 '논외'의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그는 '미국인'이었고, 미 영사관 주둔 장교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철옹성'에 돌을 던지기 시작한 건, '사랑'이었다. 남자의 양복을 입고, 총을 들고 담 위에서 만났던 고씨댁 영애 고애신(김태리 분)은 어느 틈에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신과 같이 총을 들었던 그녀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신분의 여성이었다는 그 다름이었을까, 대나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더 꼿꼿해지는 그녀의 품성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런 꼿꼿함 뒤에 숨겨진 자신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고독' 때문이었을까, 유진이 한글을 배워가고, 애신이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익혀가는 속도를 추월하여 두 사람의 마음은 깊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유진의 국적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외려 거리에서 총격을 벌이던 애신 대신 자신의 팔에 총상을 입어가면서 까지 대신 총을 들고 나서는 유진은 미국인 장교였기에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인'이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애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그러나, 도자기를 담은 나무 상자 안의 소년을 기꺼이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배 아래 칸에 숨겨 함께 미국으로 동행했던 선교사 요셉의 죽음은 '미국'이란 울타리 안에 있던 유진을 흔든다. 그저 아버지같은 선교사인줄 알았던 요셉, 하지만 그는 고종의 밀서를 품에 안고 이완익이 보낸 자의 저격으로 죽음에 이른다. 미국인이었지만 조선을 위해 일하다 죽은 '아버지'같은 요셉, 유진은 그런 그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선 정부 등의 처사에 반발한다. 그에게는 지금 요셉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선 정부나, 그의 죽음을 사주한 이완익이나 차별성이 없다. 

요셉의 죽음을 파헤쳐가던 유진, 그 과정에서 그가 알게된 사실은 정문 휘하 '의병단'에게는 위기였다. 그들에게 유진이 파헤쳐들어가는 건 그저 사건이 아니라, 의병의 전모였으니까. 그러기에 '미국인'인, '이방인'인 유진은 의병에게는 위험한 인물이었고, '제거' 대상이 되고 만다. 이는 역으로, 유진에게는 이제 '이방인'이 될 지, '의병'의 동지가 되어야 할 지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건 앞서 군사 고문관이 되어달라는 고종의 청탁과는 결을 달리한 선택이다. 애신 앞에서 노비의 신분이었던 자신의 '전존재'를 밝히던 그 순간과도 다른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인이었던 유진을 선택의 벼랑으로 몬다. 더구나 총을 들고 그를 저격하려 올 사람은 애신이다. 이제 더는 '미국인'이라는 존재가 그의 '안전 장치'가 될 수 없다. 




일본의 개, 구동매, 버림받다. 

조선에서 백정은 사람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조차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으며, 매질은 일상이었으며 백정의 여인인 게 들통나면 욕보이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을 존재, 그런 백정은 조선의 신민이 아니었다. 부모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며 죽어가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동매를 애신이 자신의 가마로 구해주었다. 겨우 목숨만 보전한 채 조국을 떠난 동매를 품어준 건 일본이었다. 조선에서 매질과 놀림의 대상이었던 그의 칼은 일본에서 그를 출세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기꺼이 일본인이 되었다. 기꺼이 그곳에서 짐승을 잡던 칼을 사람에게 겨누었고, 그게 동매를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행세'하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일본'을 등에 업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양반도 아니지만 그가 '행차'하면 사람들을 고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 친다. 그의 칼 앞에 일본인들조차 움찔한다. 그는 그렇게 '무신회' 한성지부장으로 호가호위했다. 

하지만 그의 위세는 '일본'이라는 그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서로 일본의 앞잡이이었지만, 그들의 뜻의 서로 달라진 순간, 같은 일본의 개였던 이완익과 동매는 '적'이 된다. 마치 사냥개가 사냥이 끝나자 '개고기'용으로 바뀌듯이, 덩치가 커져 손아귀가 잡히지 않은 낭인 동매는 이제 고애신의 조부 고사홍을 잡을 '개'일 뿐이었다. 살기 위해서 기꺼이 일본을 위해 칼을 잡은 동매, 이제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일본이 그를 버리자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마치 매타작을 당하다 도망치던 개가 주인이 부르자 쪼르르 달려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주인을 물 것인지, 거기엔 갖은 고문에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애신의 조부, 아니 죽어도 될 목숨을 귀하다 살려준 애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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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방인이던 유진과 동매는 경계인으로서 안온했던 존재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건, <미스터 선샤인>이 그리고자 하는 '의병 항쟁'의 큰 흐름과 맞물린다. 이방인이었던, 그리고 노비이자, 백정, 조선의 신민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그들마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드는 순간, '의병 항쟁'은 극적이 된다. 그러기 위해, 유진은 미국인임에도 조선을 위해 일하던 선교사 양아버지를 잃게 됐고,  동매는 그가 의탁하던 일본과 또 다른 일본의 앞잡이의 배신에 봉착하게 된다.  가장 그들이 믿던 것들을 잃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간 드라마에서 강력한 열강의 시민이었던 유진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연루 논란이 까지 일었던 일본의 낭인인 동매는 '역사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그들의 극적인 자각을 위한 장치였음에도, 사실 그들의 존재는 <베르샤이유 장미>의 오스칼이나, <성균관 스캔들>의 이선준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대 국가의 경기에서 한일전은 '필승'해야만 하는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듯, 역사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는 미국인과 일본인의 그늘에서 호가호위하는 주인공들의 존재를 편안하게 즐길 수 없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이제 GDP 1조 5608달러 그 전해보다 떨어졌다는데 그 전에 11위, 지난 해 12위의 국제적 위상의 국가에서 구한말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탈 속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그리고 그 무력했던 국가의 상황 속에서 일본의 앞잡이들이 판치는 상황을 지켜보는 건 편치 않은 것이다. '이완익'으로 대표되는 일본 앞잡이가 조선의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은 더더욱 불편하다. 하지만, 허구인 '이완익' 만큼이나, 사실 궁내부 대신 정문에서, 도공 황은산, 포수 장승구로 이어지는, 나아가 해외 지부까지 준비되는 의병의 상황 역시 '픽션'이다. 과연 구한말 우리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신분 제도를 넘나들며 양반과 천민이 손을 잡고집요하게 저들의 침탈에 대비했었을까? 픽션의 한계, 픽션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여유를 줄 수 있는가 그 문제이지만, 여전히 일본이라 하면 곤두세워지는 우리의 신경은 드라마를 편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서 영국 여왕을 괴물 외계인으로 표현한 설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구한말의 시대 상황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다. 국사 시험에서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이름에 모 배우의 이름을 쓸 정도는 아니라지만,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라고 여유롭게 시청할 만큼 우리의 역사적 지식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유롭지 않게 만들 정도로 현실의 국사 교육이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이 <미스터 선샤인>을 보고, 구한말 우리의 무기력함을 지배적으로 아이들이 인식할까 우려할 만큼, 아이들은 학교에서 겨우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달달 외는 식으로 우리 역사는 배우는,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은 우리의 '리얼'이 사실 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경계인에 서, 이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 주 이방인 주인공의 선택, 그 픽션의 울림이 커진다. 드라마를 통해 실감하는 역사이다. 


by meditator 2018. 8. 20. 16:05

신문에 실린 서평에서 '캄보디아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에겐 '못살고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로 기억되던 나라, 하지만 그 여행기 속 캄보디아는 그런 우리의 선입견이 무색하게,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도시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사라진 것들이 아직 남아있는 곳,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나누고, 그것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곳, 그 '캄보디아 여행기'의 지은이는 반문했다. 그래서 문명적으로 발전된 이곳에서 사는 우리는 정말 행복한 것이냐고. 

세계 여행기라 하면 한때는 우리보다 잘 사는 '문명국'의 유람이 당연한 것이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제법 잘 살아지면서(?), 그 '여행'과, 여행에 대한 기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가 '발전,' 과 '성장' 속에서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사람들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발견해 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저 영국 드라마 리메이크를 넘어서 한국판 <라이프 온 마스>가 우리에게 전해준 찡한 정서도 그것이 아닐까. 



화성보다 더한 88년 대한민국 
조폭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강력 3반을 향해 달려가다 정신을 차린 한태주(정경호 분)가 돌아온 곳은 2018년, 그를 혼란에 빠뜨렸던 과거의 늪으로 부터 건져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퇴원을 한 그가 걸음걸음하는 곳곳에서 왁자지껄한 강력 3반 동료들이 눈에 밟힌다. '현실'로 돌아왔는데 왜 그는 행복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답은 돌아온 그의 방에 있지 않을까? 퇴원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방은 1988년도로 잠시 회귀했던 그의 방과는 천양지차다. 그랬다. 화성처럼 낯선 88년도에 그가 머물던 방은 오래된 나무 프레임에, 유리문, 촌스러운 문양의 장판과 벽지, 가끔은 새어나오는 연탄 보일러, 그리고 로터리 다이얼이 툭 하고 빠지는 흑백 tv에 밍크 담요, 먼지가 켜켜이 눌어붙은 것처럼 오래 돼서 생경했던 곳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온 태주가 퇴원을 해서 돌아온 그의 집은 너무도 멀끔하다. 블랙 톤의 정갈한 인테리어, 그 안을 채운 금속 프레임의 기능적이며 트렌디한 의자며, 전등이며, 부엌 살림 역시 최첨단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곳에 들어선 태주가 낯설다. 마치 그가 88년에 처음 도착해서 낯설었던 것처럼. 

그랬다. 2018년의 태주는 마치 2018년의 그의 방처럼, 사람보다는 과학적 데이터와 증거를 믿었던 사람, 그래서 출세가 빨랐지만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약혼을 했던 연인과의 관계도 이어가지 못한 채 좌천되고, 이별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정서와 신념이 전혀 엊물리지 못하는 88년으로 나동그라졌었다. 




그가 떨어졌던 88년은 이미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제는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과학 수사'가 불가능했던 시절, 과학적 성취가 미비해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법이나 절차보다는 강동철 과장(박성웅 분)의 손아귀가 먼저이고 익숙했던 '인지 수사'와 '강압 수사'가 익숙했던 시절, 당연하게도 한태주는 반발한다. 하지만 그런 그를 88년에 붙잡아 세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람', 그 중에서도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한태주에게 '상실된 기억'이다. 돈을 벌러 사우디로 가서 돌아가신 분, 그래서 내내 고생하셨던 어머니와 그를 '홀로' 남겨둔 '그리운 기억'이다. 88년으로 돌아간 한태주는 그저 그리움으로 남았던  '아버지의 추억' 그 실체에 봉착한다. 

<라이프 온 마스>는 원작의 골격과 사건을 고스란히 쫓아가면서 그것을 88년의 공기와 사건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리고 거기에 한태주의 묻혀진 '트라우마', 아버지를 더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이제는 우리에게 '88년 올림픽이라는 영광'이라는 이름보다는 '야만과 폭압'으로 기억되는 80년대를 불러온다.

아버지의 시대, 그 시대와의 화해
88년으로 돌아온 한태주를 혼란에 빠뜨린 건 크게 두 가지이다. 2018년의 한태주의 능력이었던 '과학'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전근대적이며 야만적인' 강동철 계장으로 상징되는 88년식의 수사 방식과,  '아름답게만 추억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실체이다. 

과학적 데이터와 방식에 근거했던 한태주의 능력은 강력 3반의 일원으로 매사에 팀원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강동철 계장과 이용기 형사(오대환 분)의 주먹구구식, 심지어 증거 조작, 거기에 더한 '폭력적'인 수사 방식이 낳은 피의자의 죽음 등을 통해 극대화된다.  '야만적이며 폭력적이기만' 했던 88년도의 강력 3반, 하지만 본의 아니게 같은 팀이 되어 뛰어다니는 사이, 한태주는 어느덧 그들이 지닌 '인간의 결'에 '포섭'되어 가고, 그들의 '막무가내'식 수사에 한태주의 과학 수사가 '화룡점정'이 되어 절묘한 능력의 강력 3반으로 '버전 업'되어가는 식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 엇물리며 손발 맞추어 가던 88년도의 강력 3반과 2018년의 한태주 사이에서 튀어나온 '한태주 아버지' 한충호. 조폭들의 근거지를 털러 간 나이트 클럽 화장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태주의 기억 속 아버지와는 달랐다. 사우디에 돈을 벌러 간 적도 없으며,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는 듯 했지만 그의 사랑은 '허황됐다. 더구나 아버지는 88년도 인성시에 벌어진 연쇄 살인범의 혐의까지 받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그림자를 밟으며, 아버지의 실체를 하나하나 밝아가는 한태주, 그 끝에서 그가 마주한 건 그의 잃어버린 기억 속 아버지의 '비명횡사'이다. 아들을 사랑했지만 '부랑'했던 아버지, 결국 그는 한탕을 위해 도모하다 연쇄 살인범의 '증거 소멸'의 굴레에 걸려 '개죽음'을 당하고 만다. 한태주는 88년으로 돌아와 잊었던 기억의 한 장을 펼쳤지만 그곳에서 만난 건 '얼룩진 역사'.  태주의 아버지는 우리의 기억 속 80년대와 같다. 자식 세대에게 '올림픽'까지 치뤄내어 '발전'했다며 화려하게 팡파레를 울려댔지만, 기실은 양아치같고, 한탕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대. 성장과 번영의 80년대라는 캐치프레이드 속에 숨겨진 야만과 폭압의 역사.

하지만 드라마는 그 '비극의 폭로'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과오 앞에 망연자실한 한태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또 다른 아버지'이다. 육친의 아버지를 마주하기 위해 던져진 88년도에서 한태주를 맞이한 건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같은, 강동철 계장이다. 서울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한태주를 보란 듯이 '멕이던' 강동철 계장이지만, '츤데레'처럼 한태주를 챙긴다. 절대로 너가 걱정돼서 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전기구이 통닭에서, 김치국물, 장모님이 싸주신 갈비찜까지 알뜰하게 한태주를 챙긴다. 도망자로 쫓기는 순간에도 아들이 원하던 딱지를 사시 위해 애썼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88년에서 강력 3반과 함께 뛰어다니며 어느덧 풀어져가는 한태주의 모습은 결국 그가 2018년에 보여준 '과학'에의 신봉이 '인간에의 상실'이었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그 '인간에의 상실'에서 핵심은 '아버지의 상실'이었음을. 




드라마는 말한다. 그 시절 아버지는 '질곡'이다. 말이 앞섰으며, 자식을 기만하고 허황됐으며, '돈'을 쫓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자식을 아버지의 방식으로 사랑했었다고. 강동철 계장 역시 마찬가지다. 드라마의 후반부 강동철 계장의 선배 형사가 몰래 돈을 받은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되는 사건에서 수기로 적힌 통장에는 강동철 이름도 있었다. 선배 형사가 그랬듯, 아마도 강동철 계장 역시 그 관행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리라. 그가 증거를 조작해서 범인을 만들고, 법이나 절차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식으로 살아왔던 한 방식처럼. 

하지만 동네 양야치였던 아버지가 그럼에도 한태주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듯이, 강동철 계장이나. 이용기 형사 등 그들에게는 그 과실과 함께 한태주를 '회복' 시켜줄 '인간미'가 있었다. 초반 무조건 강동철 계장과 강력 3반에 반발하던 한태주가 그들과 자신의 과학 수사를 절묘하게 절충시켜 나가듯, <라이프 온 마스>는 그렇게 80년대와의 '화해'를 청한다. '아버지'의 시대와의 화해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번듯하게, 혹은 반듯하게 바로 세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시대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부도덕한 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듯 달려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토닥거림'이다. 

2018년 현실로 돌아온 한태주는 결국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 망상에 불과한 그 '증상'의 시대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이 '부정'의 몸짓, 그리고 그 '부정'의 몸짓이 향한 '부정한 시대', 드라마는 반문한다. 과연 완벽한 시대가 있겠냐고. 에어컨은 커녕, 그 찌든 여름에 차 유리창을 열어 자연의 바람으로 땀을 식혀야 하는 시대, 시체 검시를 보건소에서 하는 '과학'과는 담을 쌓았던 시대, 여전히 함께 일하는 동료 여순경을 '양'이라 부르며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시대, 촌스러운 패션과 후진 시스템의 시대, 한태주의 '퇴행' 혹은 '망상'은 그 '후짐'에의 복고이다.  하지만 그건 '퇴행'이라기 보다는, 달려가느라 놓친 '인간적 감수성'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기에 그 '복고'를 그저 망상이라 찍어 누르기엔 '행복'이 걸린다. 드라마는 내내 말한다. 그곳이 어디건, 당신이 웃고 행복하면 되지 않았냐고. 그리고 2018년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이 움직인다.  어쩌면 <라이프 온 마스>의 행복은, <응답하라 1988> 속 가족같던 이웃의 행복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이 막연한 우리에게 '화성'보다 가닿기 쉬운 '행복'이다. 더구나 그곳엔 여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와 가족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사족; 그럼에도 80년대는 행복했을까? 개인적으로 80년대 어느 날 강동철 계장 같은 아저씨한테 경찰서에서 다짜고짜 뺨을 한 대 맞았던 기억이 있다. 체감된 폭력과 그려진 폭력의 간극이리라. 마찬가지로, <라이프 온 마스>에서 그려진 추억의 80년대와 살아본 80년대의 간극처럼. 아마도 그 간극을 채우는 건, 드라마에서 처럼 '나에게 특별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 그곳이 사실 꼭 80년대일 필요는 없다.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정말 행복한 그곳이 당신이 머무를 곳이 아니냐고 드라마는 말한다. 설사 진짜 화성이라도 말이다.  명품 영드를 2018년의 우리를 위로하는 한드로 멋들어지게 만들어 낸 <라이프 온 마스> 제작진에 경의를 표한다. 


이순간을 영원히/아름다운 마음으로/미래를 만드는/우리들의 푸른꿈
어어어어어어/하고싶은 이야기/너와 내가 만들어요
우리는 모두다/사랑하는 친구들/어어어어어어/아아아 노래를/사랑의 노래를
미지의 세계를/찾아서 떠나요/사랑의 노래를/멈추지 말아요
언제나 끝이 없어라/알수 없는 질문과 대답/
저 넓은 하늘끝까지/우리들의 사랑을 노래해요
머물곳을 찾아서/낯선곳을 찾아가서
미래를 만드는/우리들의 푸른꿈
                                           -조용필, 미지의 세계 중 

by meditator 2018. 8. 6. 15:43

kbs2 주중 미니 시리즈는 고전 중이다. 월화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는 5~6% 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중 2,3위에서 오르내리고, 수목 드라마는 2%에서 4%대를 왔다갔다 하며 꼴찌를 맡아놓고 있다. 하지만, 이들 두 드라마를 '수치'상으로만 놓고 평가하는 건 아쉽다. 어쩌면 이들 드라마가 시도하고 있는 건, '수치'상으로 당연한 결과다. <너도 인간이니>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로서는 그간 생소했던 '로봇'이 주인공을 맡았으며, <당신의 하우스 헬퍼>는 잘 나가는 멋진 남자 주인공이라는 '환타지'적 요소를 배제한 '집안 일' 해주는 남자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간 '미니 시리즈'를 통해 시도하지 않았던 이들 드라마의 시도에 시청률이 당장 따라주지 않은 건 아쉽지만, 시청률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야말로 공영 방송으로서  '수신료'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한 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너도 인간이니?>의 획기적인 지점을 그저 '인간'이 아닌 '로봇'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에 국한해서는 아쉽다. <너도 인간이니?>가 진짜 신선한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로봇'을 통해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지금까지 드라마들과는 다른 서사의 전개를 통해 개연성 있게 설득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너도 인간이니?>는 시청률과 무관하게 혁신적인 드라마이다. 

애지중지했던 아들을 빼앗긴 로봇 공학자인 엄마 오로라(김성령 분)는 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똑같이 닮은 인공지능 로봇 '남신' Ⅱ, Ⅲ를 만들었다. 엄마를 찾아왔던 진짜 아들 남신(서강준 분)이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자, pk그룹의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의 위태로운 자리를 지키고자 엄마는 로봇을 아들 대신 고국으로 보내는데.

처음 남신 로봇이 진짜 남신을 대신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당연히 이 드라마의 '악역'은 당연히 남신의 사고를 사주했던 서종길 이사(유오성 분)라 생각했다. 물론 서종길 이사는 30회차에 이르는 동안 꾸준히 '악'역의 포지션을 가지고 활약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의 일관된 악행과는 달리, 매회 주요한 갈등 요소로 로봇 남신과 대립하는 '악역'의 롤을 변주시킨다. 

로봇 빼고 다 '악역'? 
처음 로봇 남신이 인간 남신을 대신했을 때 그를 위기에 빠뜨린 건 이제 그의 '연인'이 된 경호원 출신 강소봉(공승연 분)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고국을 떠난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공항에서 당시 경호원이었던 강소봉에게 '폭력'을 휘두렀던 인간 남신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던 강소봉은 인간 남신인 척 하는 로봇 남신을 찾아가고, 그런 강소봉을 자신의 정보원으로 두고자 하는 서종길 이사의 '획책'으로 다시 경호원으로 들어온 강소봉은 '로봇' 남신의 존재를 들통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기'의 발생자였다. 

재벌 3세의 '갑질'과 그에 저항하는 경호원의 갈등은 울면 안아주고, 위기시 인간 구호가 제 1원칙으로 내장되어 있는 로봇 남신의 활약으로 갑과 을의 갈등 대신, 이해와 우정, 나아가 '사랑'의 관계로 승화된다. 이렇게 극 초반 해프닝의 주인공이었떤 여주 캐릭터가 갈등을 넘어 화해와 사랑으로 극복되는 동안 뜻밖에도 로봇 남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건 '엄마'다. 

로봇 공학자 이전에 '엄마'였던 오로라는 아들 대신 pk그룹으로 보냈던 로봇 남신이 아들 이상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며 승승장구하자 아들의 자리에 대한 기우로 로봇 남신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로봇 남신의 역할을 아들 대신으로만 국한했던 엄마는 로봇 남신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자 '수동 모드'를 작동하고, 나아가 아들이 의식을 찾을 경우, '킬 스위치'로 로봇을 제거할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갑과 을'의 자리에서 갈등하던 강소봉이 '로봇'을 통해 감화되고, 심지어 로봇인 남신을 사랑하기에 이른 것처럼, '악역'이 되어 로봇 남신의 목줄을 쥐고 흔들려했던 엄마는 결국 '키운 정'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악역'의 끝판 왕으로 등극하지 못한다. 그렇게 엄마가  '연민'의 갈등에 빠지는 동안, 뜻밖에도 다크호스로 등장한 건 pk그룹 회장 남건호(박영규 분), 알고 봤더니 로봇 공학자인 엄마의 연구비를 댔던 그는 자식보다도, 손주보다도 pk 그룹을 더 우선하며 그를 위해서는 친손주 대신 로봇이라도 대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핏줄조차도 이용하는 '냉혈한'이었다. 

그런데 역시 회장님이 가장 나쁜 놈인가 했는데,  '냉혈한' 남회장을 능가한 악의 보스가 등장했으니 뜻밖에도 로봇 남신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인간 남신이다. 알고 봤더니 일찌감치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숨겼던 인간 남신은 자신의 역할을 무난하다 못해 자신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는 로봇 남신과, 그런 로봇 남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엄마, 지영훈(이준혁 분) 등으로 인해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30회차의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드라마 속 로봇이 일관된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인간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 그를 둘러싼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이해 관계로 로봇과 대립하고 갈등한다. 을이었던 강소봉이, 자신의 친아들에 대한 애착을 가진 엄마 오로라가, 자신의 혈육보다 그룹을 더 우선시한 남건호 회장이, 그리고 이제 로봇에게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사람들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인간 남신이 로봇의 맞은 편에 선다. 

하지만 이들이 '악역'이 되는 건 각자 '인간적'인 이유에서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내장되어 있는 메모리에 따른 원칙과 각종 취합한 정보에 근거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로봇 남신과 달리, 인간들은 각자의 위치,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합리' 따위는 말아먹고, 지극히 감정적이며,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인 판단과 행동을 불사하며 '선량한 로봇' 남신을 위기에 빠드린다. 심지어 단선적인 서종길 이사 조차도 인간 남신과 지영훈처럼, 그렇게 자신의 아들과 서종길을 경쟁시키며 조련하며 이용가치로만 이용했던 남회장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악역'롤에 개연성을 더한다. '로봇'이라 낯설고 생소했던 남신은 하지만 매회 각자 인간적인 이유로 그를 괴롭히는 인간들로 인해 어느덧 가장 불쌍한 '연민'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흔히 '인간적'이란 말을 좋은 개념으로 쓴다. 휴머니즘이란 말은 곧 '선(善)'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너도 인간이니?>는 오히려 우리가 인간적이라 생각하는 그 '개념'을 장착한 로봇을 등장시켜 '인간'에 대해 반문한다. 오히려 인간이란 인간적인 갈등을 하며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라고. <너도 인간이니?> 속 '악역'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들은 자신이 처한 '인간적' 상황으로 인해 문제를 발생시킨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피해를 자행한다. 하지만 강소봉이 그랬고, 오로라가 그렇듯 그들은 끝까지 '악역'이지 못한다. 자신의 딸 앞에서 약한 아버지의 눈물을 드러내고 마는 서종길마저. 폭주하고 있는 인간 남신조차 그의 한없은 이기적인 행태 안에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단역처럼 등장했던 인간 남신의 고모 남호연(김혜은 분), 오로라 박사의 조력자인 데이빗(최덕문 분)도 각자 자신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인간적 고뇌를 한다. 

<너도 인간이니?>는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로봇을 통해 '인간'의 모습에 대해 심층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 누구도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단선적인 캐릭터의 악역 대신 인간적인 갈등으로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을 통해 그리고 그런 인간들과 갈등하는 로봇 남신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드라마는 절묘한 인간 탐구론을 펼쳐낸다. 시청률의 수치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너도 인간이니?>의 가치이다. 

by meditator 2018. 8. 1. 16:03

1973년으로 간 형사의 이야기인 영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라이프 온 마스>는 중반부에 들어서며 '귤화위지(회남(淮南)의 귤을 회북(淮北)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의 우를 범하던 '리메이크'작의 우려를 씻고, 외려 '청출어람(청색은 남색으로부터 나오지만 남색보다 푸르다)'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지난 7회 원작에서 평범한 '인질범' 에피소드는 1988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으로 '타임슬립'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지강헌 인질극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시대의 공기를 소환했다. 수사극답게 그저 조용필과 박남정의 노래나, 선데이 서울 로 대변되던 '응답하라 1988'을 넘어  빈부 격차가 고착되던 1988년의 시대를 정확하게 포착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이어 우리에게 '형제 복지원' 으로 기억되는 또 하나의 '과거의 괴물'을 불러온다. 




괴물을 만든 시대, 1988년
2018년 연쇄 살인범을 쫓다 의문의 총격으로 사경을 헤매던 한태주(정경호 분), 그의 무의식 속에서 소환된 1988년에서도 그는 '현재의 연쇄 살인범'을 쫓는데 여념이 없었다. 현재의 연쇄 살인범 김민석의 과거 행적을 찾아 애초에 그의 살인을 봉쇄하려 했지만 찾을 길 없었던 그 존재는 뜻밖에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어린 태주의 곁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김민석을 조우하게 된 건 도봉리의 살인 사건, 죽은 지 오래된 김봉례네집에서 찾은 가족 사진, 그리고 그곳의 김민석, 민석의 행적을 찾아 김봉례의 남편을 찾아간 한태주는 민석이 두 사람의 친 자식이 아니라, 정부의 혜택을 받기 위해 가짜로 '입양'된 아이이며,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학대'당했던 피해자라는 사실에 맞닦뜨린다. 그리고 김봉례의 범행 수법이 그들이 쫓는 연쇄 살인범의 수법과 동일하다는 걸 알게 되고.  경찰서 내에서 죽은 마약 중독자의 죽음을 통해 범인이 그들 주변에 암약해 있음이 드러나며 김민석의 형 현석(곽정욱 분)이 드디어 전면에 등장한다. 

윤나영(고아성 분)을 납치하며 강력계에 역습을 가하던 현석은 하지만 기억 속 집을 찾아낸 태주로 인해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현석을 찾기 위해 그의 지난 과거 행적을 쫓던 태주와 강력계 형사들은 '범죄'를 만들어 낸 88년의 오욕된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월남에서 팔을 잃고 돌아와 술과 자식들 매질로 세월을 보내던 아버지, 그런 무능한 아버지 대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술집에 나갔지만 병을 얻었던 누나, 좋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의사'라도 될 놈이라던 현석은 '의사' 대신 연탄불로 위장하여 아버지를 죽였다. 벽에 즐비한 상장 대신 '범죄'를 손에 든 그의 변화에는 동생과 함께 외가를 찾아나섰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다짜고짜 그를 '납치'해간 인성시의 '환경 미화 작업'과, 그 배후의 '복지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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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사랑하던 소년, 사이코패스가 되다
현석의 과거 행적 중에 추적이 불가능했던 3년, 그 3년은 동생을 보살피려 했던 소년을 사이코패스로 돌변한 막무가내의 감금과 학대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 속에서 튀어나오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소환이다. 

1975년 내무부 훈령 410로, 정부는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인들을 영장없이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훈령은 70년대에는 유신 정권의, 그리고 80년대엔 독재 정권의 '유용한 수단'이 되어 '정화'라는 명목으로 죄없는 사람들에게 '영어'의 고통을 강요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형제 복지원에서의 인권 유린 사건. 특히 1988년 국가적 행사인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뤄내기 위해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는 이유로,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가출 청소년 같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사회 정화'의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잡아들였다. 

드라마는 이 '사회 정화' 작업을 상기시킨다. 현석은 그 '사회 정화'작업으로 표창장을 받은, 하지만 동생을 눈앞에 두고 자신을 무작정 잡아가 가둔 형사를,  복지원에서 자신에게 '변태적 행위'를 한 간호사를, 그리고 그 배후인 '복지원' 원장을, 동생을 학대한 김봉례씨처럼 '보복'하고자 했다.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수사물의 단골 주범인 '사이코패스'를 <라이프 온 마스>는 1988년이라는 시대의 인물로 재탄생시키며 다시 한번 '유전무죄 무전 유죄'의 시대를 복기한다.  1988년은 자랑스러운 88올림픽의 시대가 아니라, 유전무죄의 범죄들이 연달아 터지던 오욕의 역사였다. 

by meditator 2018. 7. 23. 14:18

시청률은 보잘 것 없었다.(1회 1.8%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하지만, 첫 회가 끝나고, '티라미수 케잌'하며 달콤하게 사랑 노래를 부르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법자'(김성철)이 화제가 되었다. 아마도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정민(김성철 분)과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권나라(정채연 분)의 풋풋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입혀진 음악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리라. 

대놓고 뮤직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에 '음악'을 입힌 시도는 kbs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사춘기 메들리(2013)>를 통해 시도된 바 있다. 제이 레빗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커피소년의 <아메리카노에게>, 불독 멘션의 <좋아요>가 한 폭의 수채화같은 고창의 여름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소년 정우(곽동연 분)와 소녀 아영(이세영 분)의 사랑을 타고 흘렀다. 허긴 <응답하라> 시리즈 역시 거기에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음악이 없었다면 '신드롬'이 되었겠는가. 그렇게 '청춘'은 언제나 '음악'을 타고 시청자의 감성을 흔들었다. 지난 7월 10일에 이어 17일 kbs2 밤 11시에 방영된 <투 제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선다. '뮤직 드라마'를 표방한 이 드라마는 기존의 작곡가의 곡이지만, 극중 '뮤지션'인 정민과 나라의 노래와 연주를 통해 '음악'을 고스란히 드라마에 입혀냈다. 




편의점 알바와 아이돌 연습생의 사운드 오브 뮤직
할 줄 아는 건 음악 밖에 없는 하지만 현실은 '편의점 알바'인 정민의 유일한 관객은 그의 열살 먹은 여동생이다. 그런 오빠를 한심하고 안타깝게 생각한 여동생은 오빠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sns'를 시작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방구석 '싱어송라이터'를 면치 못하는 정민 앞에 고등하교 시절 첫사랑인 나라가 나타난다. 

소리 없이 다가온/소문처럼 다가온 사람
별처럼 빛났던/너를 보게 됐고/Fall in Love
찬란했던 그 미소/두 눈에 가득했던 파도/난 너를 보면
Tiramisu Cake Tiramisu Cake/마치 넌 Tiramisu Cake  -<티라미수 케잌>


<투 제니>의 1부는  그렇게 '티라미수 케잌'처럼 달콤하게 다시 찾아온 첫사랑 나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돋보였던 나라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아이돌 연습생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나라의 '찬란했던 시절'은 그때가 끝이었다. 그녀가 '코코아'라는 그룹으로 데뷔를 했었다는 건 알지만, 이제 더는 그녀를 기억하는 동창들은 없다. 그녀의 첫 앨범을 사서 머리맡에 둔 정민 말고는. 그랬던 그녀가 어깨죽지가 꺽인 새와도 같은 모습으로 정민의 편의점을 찾고,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 아니 그녀의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부담감에 그만 '삑사리'를 내버렸던 학생으로 기억되는 정민은 오랜만에,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기억해 주는 동창으로, 그리고 재계약을 위해 소속사에 요구하는 '싱어송라이터'로의 변모를 위한 '기타 선생님'으로 나라의 곁에 자리하게 되고. 그런 정민의 도움으로 나라는 7년이라는 아이돌 연습생의 시절을 접고, 다시 한번 도전을 해보려 한다.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줄게
깜깜하면 등대가 되어줄게
And I know and I know and I know
너 슬픈 거 I know
무거운 짐 내가 들어줄게
하루하루 how do you feel today  -<your song>


1부에 이어진 2부는 정민의 이야기다. 그저 속절없이 시간을 타고 사는 편의점 알바인 줄 알았던 정민,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라, 아니 전교생 앞에서 '음이탈'을 한 트라우마가 정민이 꾸는 '뮤지션'의 꿈을 막는다. 여동생, 아니 단 한 명의 관객이 아니라면 노래를 할 수 없는 정민, 그렇게 오랜 '불치병' 을 겼는 정민은 하지만 기꺼이 자기 앞에 나타난 첫사랑을 위한 곡을 써서 '헌정'한다. 

정민이 만든 곡으로 싱글 앨범을 약속받은 나라, 그러나 정민의 곡은 나라가 아닌 다른 소속사가 미는 가수에게 돌아가고, 나라는 자신을, 정민을 '이용'하기만 하는 소속사와의 재계약을 접고, 정민과의 인연도 끊은 채 '칩거'한다. 

그래 이제 말해야 해/변하지 않아도 돼/그대로 있어도 돼
이제는 들려줄게/나의 마음을/이 자리에 서서/노래해줄게
너에게 말해야 해/그래 이제 말해야 해/너의 모든 게/지워지기 전에
이제는 들려줄게/나의 노래를/이 자리에 서서/노래해줄게  -<to. jenny>




청춘의 이야기에, 트렌디한 음악, 그리고 실험적인 형식 
2부작의 <투 제니>는 그렇게 '음악'에의 꿈을 꾸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그 '꿈'이 가로막힌 '청춘'의 이야기를 날줄로 삼고, 그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음악'을 씨줄로 삼아 엮어낸다. 또한 드라마는 기획사라는 기성 사회와 트라우마에 갇힌 청년들의 소통의 세상으로 'sns'를 등장시키며 청춘 담론의 새 가능성을 연다. 거기에 그 풋풋한 청춘의 이야기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실험적 방식을 통해 신선한 접근을 더한다. 

단 한 명이라도 관객이 늘면 노래를 못하고 도망치곤 했던 정민이 나라를 위해 관객들 앞에 서고, 나라를 찾아 피씨방의 사람들 앞에 서는, 그래서 자신도, 나라도 '구제'하는 이 '꿈'의 성장기는 편의점 알바 청년과 아이돌 연습생이 만난 그 순간 충분히 예견할 만한 결말이다. 하지만, 그 어디선가 본듯한 평범한 이야기에 '멜로망스', 최낙타, 샘김, 알고보니 혼수상태' 들의 음악이 더해지면서 그 청춘의 정서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드라마 스페셜은 아니었지만(예능국 제작), 여전히 녹슬지 않은 kbs 드라마다운 신선한 시도이다. 올드 미디어가 되어가는 tv의 바람직한 청춘들과의 '협연'이다.

by meditator 2018. 7. 18. 05:09

남자 주인공의 캐스팅, 그리고 이어진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고의 나이 차, 뜻밖의 연기 논란, 그리고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  등등 <미스터 선샤인>을 둘러싼 논란은 마치 '두더지 잡기'와 같다. 마치 망치로 두드려대는 타이밍을 놓쳤듯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런 '논란'이 무색하게 시청률은 상승세다. 김은숙, 이병헌 이라는 화제성을 엎고 8%를 거뜬히 넘기며 시작하더니, 3회차에 10%를 넘어섰다. (1회 8.852%, 3회 10.082%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조국으로 부터 버림받은 주인공들
<미스터 선샤인>의 시작은 비감했다. 강화도 김씨 가문에서 노비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하다 잡혔다. 아비는 멍석말이 매타작으로 목숨을 잃었고, 어미는 유진을 살리기 위해 양반네 며느리의 목에 비녀를 그었다. 그리고 어미의 목숨값으로 던져준 노리개를 들고 유진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어린 유진은 자신을 쫓는 추노꾼들을 따돌리며 밤을 낮삼아, 생감자를 씹으며 길을 이었다. 구사일생 도공의 집에서 만난 미국인을 따라 이 땅을 떠났다. 그것만이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지키는 길이라 어린 유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낯선 이방의 땅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총이 유진초이가 된 그(이병헌 분)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조국을 '오만원'에 팔겠다는 이완익(김의성 분)을 처단하기 위해 총을 든 의병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배신자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총을 들어 배신자를 저격하는 대신, 그 총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동지를 지키기 위해 홀로 남아 적들에게서 시간을 끌던 어미는 자신의 아이를 동지에게 전한다. 아비 역시 어미의 뒤를 이어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아이는 그렇게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어미, 아비 대신 완고한 학자인 할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 하지만 정숙한 여인으로 살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에 목숨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그녀고애신(김태리 분)을 할아버지는 의병의 아들이었으며, 그렇게 살지 않겠다더니 그 자신 역시 의병이 된 장승구(최무성 분)에게 보낸다. 

구동매라고 다를까. 그의 어미, 아비는 백정이었다. 칼을 들어 동물을 잡는 건 그들의 직업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일반 백성들조차 사람 대접하지 않는 모진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물을 잡던 칼 끝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위 세 사람 주인공들은 성별과 연령은 달라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라는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들은 '사람'으로 대접받은 적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원형이라지만, 거기서 주인이 되는 이들에 '노예'와 '여성'은 해당되지 않았다. 조선에 일본이 쳐들어 왔을 때그 일본군을 인도한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라고 하여, 과연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의 땅을, 땅에서 나는 소출을 빼앗가 가는 '양반'의 나라와, 자신들에게 쌀을 주는 왜군 사이에서 한 '백성'들의 선택을 어떤 기준의 잣대를 댈 수 있을까? 애초에 '양반'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노비'와, '백정'과,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바로 거기에서 <미스터 선샤인>의 질문은 시작된다. 지켜주지 않는 국가, 지킬 가치조차 없는 국가, 그 국가의 '구성원', 그들에게 '국가'는 어떤 것일까?



그 질문을 시작하기 위해 드라마는 가장 '낭만적'으로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조선은 비루했고 비겁했으며, 외세 앞에 무력했고 초라했다. 그에 비해 외세는 일본이든, 미국이든 영악했으며, 강력했고, 압도적이었다. 이완익을 저격했던 고애신의 어미와 아비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찾기가 희박하듯 드라마의 곳곳에서 '역사적 사실'의 불충실함과 빈약함, 심지어 왜곡을 만난다. 그 '부실'한 역사를 엮어 드라마가 도달하고자 한 것은 구한말의 역사 속에서 애초에 국가의 성원인 적 없는 세 주인공들의 가장 비극적이고도, 그래서 낭만적인' 캐릭터이다. 마치 배경에 '뽀샤시' 효과를 주어 '나'를 한껏 부풀려 드러낸 '셀카'와도 같다. 

그리고 이는 일찌기 고려의 무신이었으나 나라의 버림을 받아 칼이 꼿힌 채 천년의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도깨비'김신 과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 비극적 가족사를 감내해야 했던 지은탁의 서사와 잇닿는다. 허구의 역사를 길어 가장 비극적 낭만적으로 길어왔던 <도깨비>의 서사가 이제 가장 극적인 역사의 전환기였던 구한말로 시점을 옮겨 '사랑'과 함께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자각하는 근대적 개인, 그들의 선택 
개인에게 국가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은 '모던'하다. 근대 이전에 '개인'의 존재와 역할, 의식이란 건, '신분'이란 틀 속에서 규정받는 개인들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는 '신분' 속에서 살던 주인공들을 그 '신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를 도입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신분'을 부여한 부모님을 잃었다. 그저 잃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존재를 규정한 공동체가 그들을 버렸다. 거기서 그들의 첫 번째 자각이 싹튼다. 그저 노비로, 백정으로 순탄하게(?) 살아갔다면 몰랐을 '공동체'의 실체를 뼈저리게 깨달으며 자기 존재의 비감함을 통탄한다. 존재론적 깨달음음 가장 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온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이 몸담았던 공동체로 부터 '이반'하거나, 된다. 유진은 살아남기 위해 양반 사회인 조선을 떠나 '미국'이라는 신문명에 자신을 던진다. 구동매 역시 칼잡이였던 자신의 특기를 살려(?) 일본의 무사가 되었다. 고애신은 양반가의 여식이었지만, 어미, 아비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은 그녀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조신하게 한학이나 배우다 누군가의 '지어미'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거역한다. 아녀자가 무슨 '나라 걱정'이냐는 할아버지의 걱정이 무색하다. '애기씨'라는 존재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무색하게 그녀가 스승으로 받드는 건 '사냥꾼'의 아비를 둔 포수이고, 바느질 대신 총을 든다. 전근대와 근대의 격동기에 그들은 그렇게 '집단'에서 벗어난 '개인'으로 각자 자신의 운명 앞에 선다.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 '이탈'된 그들은 그래서 '근대적 개인'으로 자각하고 그로부터 '개인'과 '국가'에 대한 질문에의 토양에 던져지게 된다. 그저 양반님네에게 당해는 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라, 버림받음에 대한 '자각', 양반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조국에 대한 비감함이 그들을 '자각된 개인'으로 '국가' 앞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지킬 가치조차 없는 '국가'를 지켜야 하는가. 나를 지켜주지도 않는 '국가'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더 나아가 '국가'란 무엇인가? 이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김은숙 작가는 한껏 '드라마틱한' 인물들을 포진시켰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고애신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을 선뜻 든 것과 달리, 유진과 구동매는 '자기 코가 석 자'다. 그들의 총과 칼은 자신을 버티기 위한 방패이다. 

하지만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유진과 구동매는 원치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을 본다. 그리고 그 '자신'을 버렸던, 그래서 돌아올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던 '조국', 그럼에도 그 속에서 득세하는 '적'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총을 든 고애신과 만나며 새로운 질문에 봉착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고전적이지만, 당대적이다. 우리가 지난 정권에서 던졌던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4월의 바다에서 비롯된 질문들이 공동체의 존재와 의무에 대한 여러 드라마들을 탄생시켰듯이, <미스터 선샤인> 역시 그 계보에 서있는 '후일담'이다. 단지, 그 질문이 '공동체'의 당위에 대한 의문을 넘어, '나'로 바통이 넘겨졌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에 재주가 뛰어났던 김은숙 작가에게는 이 새로운 도전이 시련이 될 수도 있다. 작가가 그려내는 역사는 성기고, 뜻밖에도 호흡은 느리며, 연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과연 기 '시련'을 또 한번 '극복'해 낼 것인지, 역시나 김은숙이라는 '신화'는 이번에도 가능할 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8. 7. 16. 16:29
고교 동창생인 여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우리 드라마에서는 낯설지 않은 소재다. 예전 어머님들 세대에서 '여고 동창회'는 살림살이가 기반도 좀 잡고 '다이아 반지'도 끼고, '악어 핸드빽'도 들 수 있을 때쯤 나가는 곳이다. 그 곳에 나가 내가 이제는 이렇게 좀 살만하다며 살아온 역사에 대해 '자존감'을 보상받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나 교복이라는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공산품 찍어내는 듯한 획일적인 교육을 받던 그 시절 교실 안에서 동일한 존재로 취급받던 학우들의 후일담은 드라마틱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에서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의 '서사'는 잊을만 하면 다시 한번 등장하는 '익숙한 소재'이다. 



적인가!
얼마전 종영한 JTBC의 <미스티>는 여고 동창생의 애증을 적나라하게 다룬 드라마였다. 극중 주인공인 고혜란(서은주 분)의 삶에 불현듯 등장한 여고 동창생 서은주(전혜진 분)는 그때도 지금도 고혜란의 발목을 잡는다. 아니 그건 고혜란의 입장에서이다. 그때도 지금도 서은주에게 고혜란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낚아채가버리는 '연적'이었을 뿐이다. 드라마는 고등학교 시절 하명우(임태경 분)를 사이에 두고 갈등 관계였던 두 사람을 십 여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한 남자 이재영(고준 분)을 사이에 두고 조우시켜 드라마적 갈등을 극대화시킨다.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 동창생의 관계가 시간이 흘러 '연적'의 관계로 증폭시키는 경우는 빈번했다. 2007년 방영된 김수현 작가의 치명적인 멜로 <내 남자의 여자(2007)> 역시 고등학교 동창인 두 여성을 등장시킨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이화영(김희애 분)는 미국에서 이혼을 하고 피폐한 모습으로 고국에 돌아와 동창생인 김지수(배종옥 분)에게 의지하다 그녀의 남편을 유혹하게 된다는 서사야 말로 우리 사회에 고정 관념으로 자리 잡은  '여고 동창생'의 애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같은 해 방영된 <강남 엄마 따라잡기>는 교육열을 소재로 하여 아이의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한 여고 동창생 현민주(하희라 분), 윤수미(임성민 분), 이미경(정선경 분)이 아이들을 내세워 '대리전'을 치열하게 벌인다. 이렇게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의 갈등에서 '관건'이 되는 건 그때는 별볼일 없던, 혹은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아이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니 나보다 '잘나가고 있더라'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이다. 2012년 방영된 <청담동 앨리스>에서 고등학교 시절 얼굴은 이뻤지만 능력은 없던 서윤주(소이현 분)가 청담동 며느리가 되어 '갑질'을 하자 이에 당하던 한세경(문근영 분)이 자신도 청담동에 입성하기 위해 '시계 토끼'를 잡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이들 드라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만큼 우리 사회 속 '여여 갈등'의 전형으로 여고 동창생의 관계를 '전형화'시키면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지인가.
중년의 여성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여고 동창생의 관계가 '갈등'의 기폭제로 쓰이는 것과 달리, 그 이후 세대들이 주축이 되는 드라마에서 여고 동창생들은 '갈등'은 있되, 주로 세대의 전형으로 활용된다. 즉, 이는 이전의 드라마들이 여성들간의 관계를 '여여 갈등'의 관계로 풀어가는 반면, 이후의 세대에서 '여성의 적이 여성이 아니라 동지'라는 시각으로 '진화'되어왔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이들 드라마의 여고 동창생을 같은 시절을 공유한 같은 세대이다. 같은 시대의 음악과 놀이와 문화를 가진 세대 공감을 바탕으로, 이제 '연대'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함께 겪어가는 '동지'들이 되었다. 



2014년 JTBC를 통해 방영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39살이 된 여고 동창생 세 명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때는 꿈을 나누던 한반 친구였던 소녀들은 이제 이혼한 싱글맘(윤정완- 유진 분)에, 골드 미스의 대표가 되어버린 노처녀(김선미-김유미 분)에,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전업주부(권지현-최정윤 분)가 되어 동시대 30대의 '리얼 라이프'를 구현한다. 

시한부 드라마 작가 이소혜(김현주 분)와 톱스타 류해성(주상욱 분)의 달콤 애절한 연애담을 그린 JTBC 2016년작 <판타스틱> 역시 여주인공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다. 그 시절의 첫사랑과, 그 시절 그녀의 친구들이었던 여성들이 이제 서른 중반이 되어 다시 만나 그 시절의 사랑과 우정을 되살려 시한부로 인생의 종점에 이른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2017년 MBC를 통해 방영된 <이십세기 소년소녀> 역시 서른 중반이 된, 하지만 여전히 이십세기의 소녀와 같은 감성을 지닌 여고 동창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려낸다. 



웹툰 원작인 tvn의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화제성과 시청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며 순항하는 가운데, 같은 수목 드라마로 또 한편의 웹툰 원작 드라마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웹툰 플랫폼 KTOON에서 호평을 받으며 시즌 3까지 이어지고 있는 <당신의 하우스 헬퍼>가 동명의 드라마로 KBS2를 통해 방영을 시작한 것이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동명의 원작 속 인물들을 그대로 살려낸 것과 달리, 남자 하우스 헬퍼라는 원작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오되, 정리가 필요한 여성들의 에피소드에 집중했던 웹툰과 달리 미니 시리즈의 호흡을 살려내기 위해 극중 여성들을 '여고 동창생'의 관계로 묶어낸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판타스틱>, <이십세기 소년소녀>가 서른 중후반의 여성들을 전면에 세운 것과 달리, <당신의 하우스 헬퍼> 속 여고 동창생들은 이제 스물 중반, 바로 우리 사회 가장 살기 힘들다는 88만원 세대의 여성들이다. '온갖 잡다한 일을 시킬 때는 가장 필요한 사람 취급하고,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드라이조차 사치'인 '인턴' 임상아(보나 분)과 친구 약혼식에 반품을 가정하고 명품 옷을 입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현실은 목걸이에 비즈나 꿰며 연명하는 백수 윤상아(고원희 분), 명색이 네일샵 사장이지만 유지비에 알바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자영업자 한소미(서은아 분), 세 명이 주인공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 함께 살자고 약속하던 '몽돌 삼총사'였지만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상아의 오해로 세 사람은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십여년 아버지가 남긴 집을 인턴 형편으로 지키지 못해 세를 놓은 상아의 집에서 세 여고 동창생은 다시 조우하게 되면서 이 시대 이십대 후반 여성들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by meditator 2018. 7. 12. 20:46

월드컵을 맞이하여 '예언가'들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이전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문어, '파울'이 자연사한 이후, 연달아 4 경기의 승패를 맞춘 러시아 박물관에서 사는 청각 장애 고양이의 활약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 외에서도 중국의 길고양이, 일본의 문어 등 세계 각국에서 '점쟁이'로 활약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이들 '생물'에 도전장을 내민 '무생물'이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16강전이 진행되는 초반, 독일의 도르트 문트, 뮌헨 공대, 벨기에 겐트 대학 연구팀이 AI(인공 지능)을 활용해 10만번의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가 정확하게 일치하자 동물들을 앞지른 AI의 활약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예외적인 스포츠답게 AI조차 독일의 탈락과 우리의 우승을 예측해내지는 못했었다. 여전히 '고양이만도 못한 AI일까'


그러나 미래학자 레이커즈 와일은 'AI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이 도래할 것'이라 예측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은 대략 2045년 경으로 예측한다. 특이점이 오면 로봇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뛰어넘는다. 그러면 과거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듯이(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이 벌어질까? 생전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경고했다. '특이점이후 AI가 지구를 지배하려 할 것이므로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바로 이 '인공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ality), 인간이 AI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드라마'로 들어왔다. 지난 7월 9,10일에 걸쳐 방영된 <너도 인간이니?> 17회에서 20회차이다. 

특이점에 도달한 AI 남신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시아버지인 PK그룹 남건호(박영규 분)에게 빼앗긴 천재 과학자 오로라 박사는 아들의 모습을 꼭 닮은 AI 남신을 만들었다. 아들이 자라는 과정에 맞춰 업그레이드 된 남신, 드디어 성년이 된 아들의 모습을 닮은 아니 꼭 같은 남신Ⅲ를 완성했다. 그러던 중 엄마를 찾아 왔다 교통사고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 남신이 의식을 잃고, 엄마는 아들의 역할을 AI남신에게 맡긴다. 몇 번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엄마와 남신의 최측근이었던 지영훈(이준혁 분)의 지시를 따라 남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AI 남신, 하지만 그의 앞에 경호원 강소봉(공승연 분)이 등장하면서 AI남신은 자꾸만 '통제'를 벗어난다. 

통제를 벗어나는 남신을 다시 지시의 규율 안에 가두기 위해 엄마가 선택한 건 '수동 모드', 엄마를 사랑했던(?) AI 남신은 기꺼이 엄마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기꺼이 선택했던 수동모드는 결혼식 당일 납치당한 강소봉 앞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연구실에 있는 인공 지능 차를 원격 조정하는 건 물론, 결혼식장을 박차고 뛰어나가 강소봉을 구해내기 위해 괴력으로 납치 차량을 멈추는가 하면,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오토바이 질주를 마다하지 않은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오로라 박사에게 이젠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이 모든 일을 사주한 서종길(유오성 분) 이사를 만나 자신이 확보했을 증거를 빌미로 '협박'까지 한다. 

그저 집안의 전기 시스템이나 깔짝거리며 청소 로봇과 친구 삼고, 자신이 검색한 데이터에 기초로 곤란한 결혼 계약을 피하기 위해 강소봉에게 키쓰를 할 때만 해도 그저 좀 능력있는 AI인줄 알았던 그러나 여전히 엄마와 지영훈에게 순종적이던 AI 남신Ⅲ가 이제 그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특이점'의 지점에 이른 것이다. 



인간의 지배를 받던 AI가 그 '지배'의 시스템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심지어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지점을 벗어나는 이 상황은 물론 극 초반부터 예고된 바 있다. 화염에 휩싸인 클럽에서 자신의 정체가 들킬 상황을 넘어 사람들을 구한다던가, 자율 주행 자동차 시험 주행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차의 난동을 막아선다던가 등등, 하지만 이건 애초에 AI 남신에게 주입된 인명 구조의 원칙이라던가, 엄마의 위로를 위해 울면 안아준다던가 등등의 기본 시스템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엄마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아들 AI 남신인 강소봉을 만나며 마치 인간 남자가 여성을 만나며 변화하듯 감정이 없어 느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행동들을 하며, 이제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엄마마저 거스르며 독자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이 장면은 인류의 미래의 화두인 '로봇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특이점'의 '위기이다. 

그저 '로코'의 뻔한 캐릭터가 아닌 
하지만 <너도 인간이니?>는 이 인간의 위기를 '전형적인 로코'의 설정으로 넘긴다. 엄마는 '천재 과학자'라는 정체성이 무색하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AI 남신을 불편해 한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AI의 월권이 자기 아들의 자리를 위협할까 하는 '두려움'이다. 더구나 아들의 치료 조차 위기에 빠진 상황, 그런 엄마의 인간적인 우려로 인해 자신이 만들어 낸 AI의 '킬스위치'를 만지작거린다. 

즉, 과학적 담론과 위기에 대한 고민이어야 할 이 상황을 드라마는 전형적인 '로코'의 '관계적 위기'로 치환한다. 로봇이 인간을 뛰어넘는가라는 화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와, 그 AI를 사랑한 여주인공과 AI에게 친구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된 지영훈, 그 맞은 편에 질시하는 '인간 엄마'의 감정적 대응을 포진시키며 '관계'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차라리 과학자로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AI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면 어땠을까? 세상이 로봇의 진화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AI를 만들어 낸 당사자 엄마와 아빠라는 데이빗의 반응은 단순하다. 

<로봇이 아니야> , <너도 인간이니?> 등 '로봇'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드라마들이 트렌드에 맞춰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은 AI가 현실이 된 세태를 반영하여 드라마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활용'의 방식에 있어 지극히 '로코적 설정'의 수준에서 머무르며 '소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AI인 자신을 '활용'하는 대상을 넘어 '인정'해주는 강소봉에 대해 '시스템 에러'를 일으킨 AI 남신Ⅲ가 그 이후 보인 기능성 로봇의 경지를 넘어선 활약은 그저 '설레는 로코 남주'의 캐릭을 넘어서, 좀 더 진지하게 '고민'의 대상이 되어야 할 문제다. 



<너도 인간이니?>는 '도구적 존재'인 AI의 캐릭터를 극적으로 구현하며 AI를 극중 가장 감정이입되는 캐릭터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인간적 형체를 지닌 그를 모두 '이용'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로 자처했던 데이빗(최덕문 분)마저도 알고보니 남건호의 하수인이었듯이. 하지만, 최근 AI의 연구에서 가장 고민 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AI의 '도덕성' 문제이듯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에 이른 AI 남신은 그저 불쌍한 로봇을 넘어, 통제를 벗어난 그가 보이는 실천적 능력들이 '딜레마'의 대상인 것이다. 그저 '뻔한 로코의 공식에 따라'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미를 '뿜뿜'하는 캐릭터로의 단선적 전개는 외려 <너도 인간이니?>라는 드라마의 설정을 스스로 한정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부디 가장 '감성적인 AI' 남신이라는 캐릭터를 그저 착한 남자의 캐릭터로 소모하지 않고, AI가 가진 딜레마를 극적으로 잘 활용하여 시청률과 상관없이 AI란 소재가 잘 소화된 드라마로 남아주길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8. 7. 11. 15:56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대한민국은 2018년의 시점에서 보면 마치 '화성'처럼 낯설다. 우리가 살아낸 시절임에도 저랬나 싶게 낯설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늘 '현재 진행형'이라 여겨진 시간을 되돌아 보게 한다. 


지금은 어떻게 저렇게 입을 수가 있지 라고 여겨지는 아저씨들의 펑퍼짐한 패션, 나름 멋지다고 한 그 촌스럽기 그지 없는 뽀글머리 파마, 그리고 서슴없이 한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 여직원에게 '양'이라 부르며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성적 농담을 실실 웃으며 흘리는 '젠더적 무지', 그리고 '범죄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치면 다짜고짜 손부터 올라가는 '일상적이었던 폭력'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이었던 현상들이 그 시절에는 '일상'이며 '보편'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라이프 온 마스>는 2018년의 관점에서 보면 '화성'처럼 낯선 80년대의 공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7화는 그런 '화성같은 80년대'에서도 영화 <홀리데이> 등으로 재연되며 또렷하게 각인된 '지강헌 인질극'을 다시 한번 불러온다. 한 주택가에서 벌어진 탈주범들의 인질극, 그 과정에 강동철(ㅂㅏㄱ성웅 분) 계장 휘하 강력반 형사들이 '수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탈주 과정 중 다친 죄수의 치료를 위해 '의사'를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간호사'인 척 윤순경(고아성 분)이 그 집에 들어간데 이어, 공명심에 눈이 먼 김과장이 경찰 기동대와 함께 무분별한 진압 작전을 개시하자,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강동철과 한태주(정경호 분)가 잠입한다. 하지만 잠입이 무색하게 탈주범들의 인질이 되고, 이렇게 주인공들을 사건의 한 가운데 던져 넣음으로써 '지강헌 탈주극'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라면 한 박스를 훔쳤는데 감옥에서 10년?
당시 죄수가 호송 중에 탈주를 하여 주택가에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는 사실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사회적으로 '충격'이 컸다. 80년대 이후 무력에 의거하여 집권한 정권답게, 사회의 불안을 안정시키고, 시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지킨다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그런 가운데 '죄수'들의 '탈주'라는 건, 그리고 그들이 일반 시민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건, 그토록 전 정권이 내세웠던 '국민들의 안녕'에 이 정권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강헌이 연상되는 극중 이강헌(주석태 분) 등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저 라면 한 박스를, 돈 500만원을 훔쳤다는 이유로, 법으로 정한 형량 외에 '보호 감호소'에서 십 여년을 썩어야 하는데 반해, 70억이 넘는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대통령의 친동생이 풀려나는 상황에 대해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등장한 '보호 감호제', 이 제도야 말로 80년대 군사 정권이 저지른 야만적 폭력의 제도화를 상징하는 제도이다. 



1980년 제정된 사회 보호법, 이는 죄를 범한 자에 한하여 재범의 위험이 있고, 특수한 교육 개선 및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자에 대하여 보호 처분을 시행할 수 있다는 조치이다. 사회를 보호하고, 범죄자의 개선과 사회 복귀를 위한다는 이 제도는 1981년 삼청 교육대에서 순화 교육을 마친 2400여 명이 청송 교도소 등에 수용되며 현실화되었다. 이 초법적 범죄자 수용 조치는 이 후 세 차례의 헌재 등의 '합헌'결정이 이루어졌음에도 천주교 인권 위원회 등에서 '인권 침해'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이의가 제기되었고, 2003년에는 청송 보호 감호소 재소자 600여 명이 이와 관련하여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이 제도를 악용하여 영구적으로 사회에 격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악법'으로의 활용도가 높은 제도였다. 그리고 <라온마>의 지강헌은 자신들의 탈주 이유 중 하나를 이 '인권 침해'의 보호감호법을 들고 나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렇게 법이 있어도 초법적 조치에 의해 감옥에서 십 여년을 썪어야 하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맞은 편에, 드라마에서 등장한 '70억의 전경환'이 있다. 대통령의 동생으로 그 후광으로 새마을 본부 중앙본부장 자리에 올랐던 전경환은 1988년 공금 76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 시대 무려 대통령의 동생인데도 '구속'을 시켜야 했을 정도면 그가 저지른 '권력형 비리'가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 하지만 그는 다음 해 겨우 징역 7년에 벌금 22억원을 받았을 뿐이다. 라면 한 박스에 십 년, 돈 500에 15년에 비해, 76억원을 해먹으면 7년의 '유전무죄, 무전 유죄'



드라마 속에서 환기된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당시 사회를 뒤흔들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은 건, 바로 그 80년대가 2018년 이제는 '계급'으로 고착화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넘어설 수 없는 벽이 고착화되고 실감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시대라는 점이다. 강남의 고급진 아파트, 고액의 과외을 통한 고학력, 호화 자동차와 명품들, 그리고 '재벌'이라는 경제적 권력과 '권력형 비리'는 이전의 유신 권력과 다른 결을 가진, 자본주의화한 권력의 현실을 일반 시민들에게 절감케 해주는 시간들이었다. 화성과 같은 80년대의 공기를 소환한 <라온마>에서 터져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마치 2018년에 도도하게 흐르는 고도로 계급화된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을 열어준 물길의 '수원'과도 같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시간, 최근 거리의 패션가에서 그 시절 여성들이 입었던 알록달록한 무늬의 스커트가 등장했다. 화장도 다시 그 시절처럼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입술은 빨갛게 대비의 색감을 소환한다. 물론 패션의 소환과 다르게, 이제는 그 시절 윤순경을 대하는 '남성'들의 태도를 보고 입을 모아 '미투'라 할 정도로 '젠더적 감수성'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반면 그 시절 죽어가던 지강헌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회자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돈이 없어 포기하는게 익숙해진 시절, 지난 2014년 법무부는 2005년 결국 사라진 보호감호제의 변종인 보호수용제를 도입하고자 발표했다. 과연 '화성'처럼 낯선 80년대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by meditator 2018. 7. 1. 15:30

우리나라에서 전후 세대의 문학은 '아들들의 이야기'였다. 황순원, 이문열, 황석영 등 '백정'이었던 아버지, 혹은 '사상범'이었던 아버지, 혹은 부역자였던 아버지 등,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재했지만 부재해버린, 현실적인 도움보다는 부담이 되었던, 자신의 존재를 규정지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그 아버지의 시대를 발버둥치며 극복하려 노력했던 아들들의 지난한 서사의 기록물들이다. 아니 굳이 전후 세대의 문학만이 그러겠는가. 일찌기 '오이디푸스'가 그러했고, 더 거슬러 제우스로부터 모든 '영웅'들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나서야 그들의 존재를 온전히 증명해 낼 수 있었다. 오늘날은 어떨까? 그 시절 종잇장을 넘기며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에 몰두하던 사람들은 대신 tv리모컨을 쥔다. 그리고 tv 속 드라마들은 아침 드라마, 주말 드라마, 미니 시리즈를 막론하고 '세대간의 전쟁'을 진행 중이다. 그 시절 '문학'의 역할을 이제 tv 등의 대중 매체가 이어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총성이 울리는 곳은 '장르물', 지난 6월 9일 시작한 ocn의 <라이프 온 마스>도 예외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tv 속 인기 드라마의 메뉴였던 역사극들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여 '현대사'의 장르들이 등장하고 있다. kbs1의 아침 드라마의 단골 메뉴였던 6.25 동란 이후의 시대극은 이제 좀 더 현대로 그 영역을 확장하여, <응답하라> 시리즈를 필두로 또 하나의 역사극의 장르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 혹은 그와 유사한 현대사의 시점을 다룬 드라마들은 '사극'으로 정의내린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들의 기본적 존재 요건이 '고증'에 있다는 점이다. 일찌기 <응답하라> 시리즈를 필두로 이들 드라마들을 보며 시청자들의 흥미를 이끄는 가장 첫 번째 요소가 그 시대를 얼마나 그럴 듯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가 라는 점에서 이들 드라마들을 '사극'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무리가 없다 보는 것이다. 



화성처럼 낯선 쌍팔년도 
그렇게 <라이프 온 마스>도 1988년을 소환한다. 시즌 2까지 이어갔던 영국 드라마 원작에서 주인공이 1970년대로 갔듯이, 교통사고를 당한 한태주(정경호 분)는 30년을 거슬러 88올림픽이 개최됐던 그 해로 떨어진다. 일찌기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을 시작으로 최근 <응답하라 1988>, <시그널(2016)><터널(2017)>, 그리고 <란제리 소녀 시대(2017)> 등까지 매해 우리는 1980년대를 '드라마'로 소환해 왔으니 이젠 박남정, 소방차, 나미 등의 음악이 거리에 울려퍼지고, 펑퍼짐한 실루엣의 잠바와 통 넓은 바지를 입은 아저씨들, 그리고 원색의 의상을 입은 아가씨와, 뽀글뽀글 파마 머리의 아줌마들이, 그리고 그들이 깃들어 살던 2018년의 우리가 보기엔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도 아니었던 그 시대가 더는 낯설지 않다. 

<살인의 추억>, <터널>, <시그널>, 그리고 <라이프 온 마스>까지 모두가 80년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의 결은 다르다. 하지만, 심지어 장르물이 아니었던 <응답하라 1988>, 그리고 <란제리 소녀 시대>까지 이들 드라마들이 일관되게 '표현'해 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야만의 시대'라는 점이다. 1960년대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유신으로 이어지는 개발 독재가 79년 김재규의 총성으로 종식되고, 그 짧았던 '봄'은 곧 무참한 살육의 계절로 이어지고, 다시 '독재'의 시대가 연장되었던 시대, 경제적으로는 급격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축약해 냈지만, 사회적으로는 '전근대적 가부장적 구조가 길게 드리워져 있던 시대, 여전히 '남자'의 권력이 기세 등등했던 그 시대를 드라마들은 '야만'으로 정의내린다. 

그러기에 그 시절 여성들의 '자존'이 무시당하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범죄가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시킨' 성범죄라는 사실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그런 면에서 <라이프 온 마스(이하 라온마)> 역시 그러한 시대적 해석의 궤를 함께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더 진득하게 펼쳐간다. 

30년전 과거로 떨어진(?) 한태주, 졸지에 그는 서울서 부임한 인성시 서부 경찰서 반장이 된다. 2018년의 형사였던 그가 dna 검사가 뭔지도 모르는 인성시 경찰서에서 동료 형사들과 함께 '복고'적 방식으로 수사를 하며 벌이게 되는 해프닝이 극의 주요 흐름이다. 그런 가운데, 종종 그를 괴롭히는 '한태주씨 정신 차리세요'라는 병상의 목소리들, 그는 지금 자신이 몸담은 이 '과거'가 혹시 그의 뇌내 망상이 아닌지 혼란스러워 한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종종 그래서 정신까지 잃는 그의 앞에 등장한 그의 가족, 수사반장을 즐겨보며 형사가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그와 미용실을 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어머니, 그리고 사우디에 돈벌러 간 줄 알았지만 룸싸롱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룸펜 아버지가 다시 아니 그곳에 살고 있었다. 

6회 반환점을 향해가는 <라온마>는 그의 기억 속에 죽은 사람으로 기억되었던 아버지를 소환하며, 주인공 한태주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낸다. 인성시 골목에서 죽어간 무능력해서 가족과 이별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을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하는 소년의 사연을 통해, 드라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야기한다. 한태주의 기억 속에는 '영웅'으로 아로새겨져 있는 아버지, 하지만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인성시로 간 성인 태주가 만난 아버지는 그 어린 시절 기억의 영웅이 아니다. 



그 시절 아버지, 그 뒷모습
이 '아버지'에 대한 드라마의 정의는 의미 심장하다. 발전의 대한민국이 기억하는 80년대는 '찬란한 영광의 시대'이지만, 이제 역사의 돋보기로 들여다 본 그 시절은 드라마 속에서 처럼 수사라는 이름으로 다짜고짜 용의자를 때리고 부터 보는 '폭력'이 상습화된 시대였던 것이다. 마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알고보니 거짓말만 뻔드르르했던 백수였던 것처럼. 

하지만 <라온마>는 그저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2018년의 수사관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용의자를 폭력적으로 겁박하고, 심지어 범인으로 몰기 위해 증거 조작을 서슴치 않는 서부 경찰서 강력계 계장 강동철(박성웅 분)은 현대의 한태주와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무대뽀의 수사 방식은 시대적으로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라는 비극을 낳았지만, 일선의 경찰서에서는 그 수사 방식이 정반대로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대의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드라마는 보여준다. 가장 '야만적'이지만, 동시에 '전근대적인 인간미'라는 아이러니의 결을 드라마는 다루며, '아버지'의 시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드라마 속 아버지는 이제야 등장했지만, 사실 <라온마>에서 '아버지'의 세대를 상징하는 건  강동철이다. 온세상의 편법을 다 가져다 쓸 거 같은 꼼수에, 다짜고짜 손부터 올라가는 이 우격다짐의 형사 계장은, 그러나 한태주를 알뜰살뜰 챙겨주고, 이제 막 경찰로서 성장해 가는 윤나영(고아성 분)의 구겨졌던 존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준다. 집을 나가 변사체로 발견되어 슬퍼할 겨를도 없었지만, 떨어져 있는 아들을 위해 개막전 표를 준비했던 아버지, 그리고 룸싸롱 잔심부름꾼으로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주방을 털고 사탕을 주머니에 쑤셔넣던 아버지들, 그리고 강동철 계장처럼, 드라마는 선과 악 그 어느 한 경계로 나눌 수 없는 80년대를 살아냈던 생동감있는, 그래서 아이러니한 모순적 존재였던 그 시절 아버지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걸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가장의 뒷모습으로,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냈던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고자 애쓴다. 
by meditator 2018. 6. 25. 1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