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공중파 수목 드라마들이 10%도 못되는 시청률로 고만고만하게 선두 다툼을 하고 있는 가운데, 비록 수치상으로는 이들 드라마보다 못하다지만 케이블이라는 한정된 플랫폼을 통해 6%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하고 있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기세는 놀랍다. (<이판사판> 8.2%, <흑기사> 9.3%, <로봇이 아니야> 3.1%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슬기로운 감빵 생활> 5.847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무엇보다 4%대로 시작한 시청률이 회마다 상승세에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이로써 '추억'을 팔아 가능했다는 <응답하라>의 신드롬을 그와 가장 반대의 상황, 감빵을 통해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다시 한번 '신원호'란 이름 석자의 가치를 증명하게 되었다. 또한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이우정'이라는 보증 수표 대신 신인 작가 정보훈과 함께였기에 그 가치는 더욱 증폭된다.



닫혀진 공감 감빵이 열린 서사의 공간으로

한 골목, 혹은 한 하숙집, 혹은 한 동네의 친구들이란 지역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시리즈는 물론 주인공이 설정되어 있지만, 그 '지리적 특성' 답게 주인공을 둘러싼 관계 전체가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어 각자의 삶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서사를 완성하여 갔다. 과연 그런 신원호의 특기가 감빵이라는 공간에서도 가능할 것인가? 어쩐지 어수선했던 첫 회,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닫혀진 공간이라는 감빵은 신원호를 통해 오히려 <응답하라>보다 훨씬 열려진 서사의 가능성으로 풀려나간다.


형을 확정받지 않은 김제혁(박해수 분)가 구치소에서 형을 확정 받아 교도소로 이감되는 과정 자체가, 그 공간의 이동과 함께, 등장인물의 변화로 연결되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낸다. 또한 교도소라는 공간이 한 동네처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면서도, 법률적 제재로 인해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기에 등장인물들의 변화를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만든다. 덕분에 이제 6회에 이른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는 구치소의 법자, 건달, 똘마니에서부터, 서부 교도소의 장발짱, 목공 반장 등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며 명멸해 갔다.


하지만, 이런 여러 인물들의 등장만으로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반전'들이 바로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매력이다. 구치소, 교도소라는 공간이 무엇인가. '나쁜 놈'이라는 말로 단정지어도 무리가 없는, '죄'를 지어, 그 죄의 대가로 공간적 제재를 당하는 곳이다. 바로 그런 사회적 단정이 이미 이루어진 곳에서, 드라마는 그 '단정'의 반전을 빚어내며 시청자들을 흡인한다.



반전의 인간 군상들

1,2회 구치소에서 가장 '반전'이었던 건, 바로 <응답하라> 시리즈의 산 증인과도 같은 딸들의 아버지 성동일의 반전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아버지'연하던 교도관 조주임(성동일 분)은 알고보니 죄수들에게 협박과 돈을 갈취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교도소로 와서 다수의 드라마에서 '악인'으로 등장했던 정웅인이 분한 팽부장은 그의 눈빛만으로 이미 나쁜 사람같았지만 알고보니 누구보다 재소자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음악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이런 식이다. 제 아무리 구치소고, 교도소고 인생의 막장인 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기에, 그곳에는 교도관과 재소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저마다의 '인간의 향기'를 한껏 뿜어내도록 드라마는 그려진다. 매 회 자신의 여동생을 성폭행하려던 범인을 트로피로 가격하여 교도소에 온 국민 투수 김제혁을 중심으로 그와 엇물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뜻밖의 이야기들이 '만인보'처럼 감빵 생활을 채워간다.


5회에서 중심에 선 인물은 장발장(강승윤 분)이었다. 평소 장기수(최무성 분)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갓 스물을 넘긴 청년, 하지만 그는 경상도 사투리의 서글서글한 태도와 달리, 외부 작업을 나간 곳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기사의 지갑을 슬쩍하는가 하면, 불시에 벌어진 방 점호 과정에서 들킨 개조한 시계를 아버지라 따르던 장기수의 것이라 밀어붙이며 무사히 만기 출소를 해 원성을 샀다. 겨우 스물 넘은 청년이 보인 철면피한 모습은 출소 임박의 절박감을 둘러대도 '인간적 회의'를 빚는다.


그런 인간적 회의 공간을 메꾸어 가는 건 김제혁이다. 구치소에서 부터 오랜 절친 준호(정경호 분)가 뜰어 말려도 늘 '인간적 호의'로 법자 등을 울려버리곤 하는 김제혁, 하지만 그런 영웅적 면모는 족구 시합에서 공을 손으로 잡는다던가, 미국의 수도를 뉴욕 양키스라고 답하는 어이없는 모습의 반전으로 인해, '인간적 훈기'로 내려앉는다. 김제혁만이 아니다. 사람을 죽인 죄로 무기 징역을 받은 장기수가 장발장에게 보인 선의 등 역시 사람사는 곳 교도소의 온기를 덥힌다.



그런가 하면 구치소에서 부터 줄곧 김제혁과 함께 하면서 '해롱'이란 별명을 얻었던 마약사범 한양의 반전은 이미 <비밀의 숲>에서 한 차례 반전을 선보인 그의 연기에 이어 또 한번 시청자들을 놀래키며 그의 이름 석자를 검색어에 올린다.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시청 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로 채널을 돌리지 않도록 만든 건, 선과 악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인간사의 군상들이지만, 그 진지한 틈을 채워가는 건 해롱이나, 문래동 카이스트의 맛깔스러운 해프닝들이다. 카이스트와 늘상 아웅다웅하며  극중 '웃음'을 담당했던 한 축이었던 '해롱'이 알고보니 '뽕'을 하면 멀쩡해진다는 내용은 극적이다.


하지만, 이런 재소자의 인간적인 면은 사회적으로 이미 고정된 교도소에 대한 인식과 상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알고보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장기수 등의 캐릭터에 비해, 보신과 안위에 눈을 밝히는 교도소장을 비롯한 일부 교도관의 캐릭터는 교도소 혹은 범죄자 '미화'의 우려를 낳는다. 하지만, 비록 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갔지만, 교도소 내에서는 권력의 향배가 달라지며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냉정한 잣대나, 때론 편협한 잣대는 '미화'라기보다는 '현실적'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현실적'인 관료로서의 교도관보다는, 6회에서 아쉬운 점은 김제혁의 재기 해프닝이다. 5회와 6회에 걸쳐 다루어 지고 있는 건 왼쪽 팔과 손에 마비가 온 김제혁의 에피소드이다. 팔에 무리가 온 김제혁, 이미 한 차례 왼쪽 어깨 수술을 받은 바 있어, 담당 의사조차도 회의적인 상황, 하지만 이미 한 차례 불굴의 의지로 왼쪽 어깨 부상을 극복한 바있는 김제혁이었기에 모두들 그를 응원한다. 하지만 이런 응원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 김제혁은 은퇴를 선언한다.



간과된 도덕적 딜레마

이젠 야구가 지겹다고 하는 그에게 그럴 수록 전국민적 서명 운동을 벌이고 서로 동참하며 그의 재기를 응원하고, 심지어 교도소장은 그의 전용 연습장까지 만들어 주는데, 그 전용 연습장 개장 날 그에게 자신이 트로피로 가격한 범인의 죽음이 전해진다. 그리고 김제혁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지지리도 없는 놈인가를 사람들 앞에서 한껏 토로하고, 다시는 야구를 안한다며 그 자리를 떠난다. 이후 6회는 야구를 그만둔 김제혁에게 담배를 드여오기 위해 문래동 카이스트가 이것 저것 다른 운동 등을 시키는 해프닝을 그려낸다. 도대체 야구 말고는 쓸데가 없어보이는 김제혁, 결국 수면제까지 먹이며 꿈을 빙자해 다시 야구를 할 것을 종용하고, 김제혁은 어리숙하게 그걸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프닝은 끝이나는데.


정작 '인간적'인 반전을 그려내기에 골몰한 드라마는 김제혁의 상황을 두고, 야구를 하느냐 마느냐에 더 집중한다. 동생을 범하려던 나쁜 놈이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야 만, 그 '도덕적 딜레마'는 가볍게 그의 재기 해프닝 속에 잠겨 버린다. 즉,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인간의 이면'을 다루고자 하지만, 그 '이면'의 지점이 '반전'과 '숨겨진 사연'을 넘어서지 못한다. 알고보니 좋은 놈은 있지만, 나쁜 놈이면 그냥 나쁜 놈이다. 묘하게 인간의 스펙트럼이 넓은 듯하면서도 상투적이며 이분법적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던 스포츠 선수가 사람을 '과실'로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어떻게 '언플'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슬기로운 감빵 생활>도 그와 같다. 김제혁이 겪어야 할 도덕적 딜레마 대신, 그의 재기 여부가 수면 위로 올라와 시청자들은 그에 골몰하며 짚어봐야 할 지점을 건너뛴다.


by meditator 2017. 12. 8. 14:32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세계적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 80여 편의 작품 중 자신이 뽑은 10개의 작품에 들어가는 수작이다. 장편으로는 14번 째, 프와로 탐정 시리즈로 8번 째인 이 작품은 1932년에 실제로 있었던 찰스 린드버그 아들의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으로, 크리스티 스스로 '새로운 플롯의 아이디어'를 선택의 이유로 삼았을 만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런 신선한 플롯 덕분에, 크리스티 자신은 물론 작품이 출간된 이후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왔고, 일찌기 1974년 시드니 루멧 감독이 영화화한 이래, 1989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한 영국 드라마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 시리즈 중 한 편으로 2010년 방영되었으며, 2015년 후지 tv  개국 기념으로 2부작 만들어진 바 있다. 안타깝게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작품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1978년 <나일 살인 사건> 등 5편의 장편 영화, 그리고 다수의 tv 시리즈에서 포와로로 활약하여 '포와로' 전문 배우로 기억되는 피터 유스티노프도 있다. 그리고 이제 2017년 케네스 브래너 감독, 주연의 신작이 찾아왔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201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소설을 읽은 독자를 비롯하여, 전작의 영화와 tv 시리즈를 본 사람, 그리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아니지만 포와로를 연기했던 배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보며 '비교' 대상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포와로
개인적으로  tv 시리즈를 통해 피터 유스티노프의 익살스런 포와로에 익숙해 있었기에, <덩케르크>에서 신념의 해군 제독으로 각인되어있던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하는 에르큘 포와로는 좀 낯설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스타일스 저택의 살인 사건>을 통해 처음 등장하는 포와로는 벨기에의 전직 경찰로 은퇴 뒤 영국으로 건너와 탐정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로 그를 본 사람들이 '프랑스인'인가 헷갈릴 때마다 벨기에 인이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노신사는, 그의 친구 헤이스팅스 대위에 따르면 5피트 4인치가 되지 않는 왜소한 체구에 콧수염을 뻣뻣하게 잘 관리하며 달걀 모양의 머리를 한 외양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영화마다 포와로 역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그 뻣뻣한 수염을 내세우며 등장하는데, 아마 풍성함과 예술성에 있어서는 2017년판 포와로가 압도적인 듯하다. (물론 풍성하고 예술적인 것이 가장 포와로답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포와로를 뻣뻣한 수염만으로 '특정'하는 건 일면적이다. 오히려 '약간의(?) 결벽증과 노골적인 자기애로 포장된 그의 예리한 '회색 뇌세포'야 말로 셜록 홈즈못지 않은 매니아 층을 형성한 매력의 정점이다. 2017년판 포와로 역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달걀을 등장하여 예의 포와로의 결벽증을 알렸고,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배경으로 통쾌한 사건 해결로 이 '회색 뇌세포'의 등장을 열었다. 

익살스러웠던 피터 유스티노프와, 날카로운 눈매의 예리하면서도 통찰력깊은 데이빗 서쳇에 비하면 케네스 브래너의 포와로는 영화 중 등장하는 '에르큘'과 '헤라클레스'의 언어적 착각처럼, 꽃중년의 풍모는 한결 우월했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스러운 '포와로'였는가에 대해서는 '넥타이'에 대한 집착 이상의 개성을 아쉽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어쩌면 포와로 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과연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아가사 크리스티다웠는가라는 그 기본으로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횡단하는 오리엔트 특급, 그 열차와 행로의 볼거리로 시선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끄는 건, 주인공 케네스 브래너를 비롯하여 조니 뎁, 주디 덴치, 페넬로페 크루즈, 윌렘 데포, 미셜 파이퍼 등 쟁쟁한 출연진이다. 이런 쟁쟁한 출연진은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비교된다.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역시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하여 숀 코너리, 바네사 레드그리에브 등 그 출연진의 면면만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포진시킨 영화는, 원작처럼 기차가 출발하자 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 주요 인물이라 여겨지던 한 배우, 아니 등장인물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눈사태로 인해 기차 역시 아슬아슬한 철교 위에 멈춰 서게 되고.

셜록 홈즈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추리물 매니아라고 하면 셜록 홈즈보다 더 한 수 위로 치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탐정과 함께 등장 인물의 대화나 행적 등을 살펴보며 '뇌세포'를 풀가동하여 '추리'를 해나가는 묘미에 있다. 대부분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유력한 용의자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러내 보이는 바, 그리고 드러내 보이는 면 이면의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비밀들이 하나씩 벗겨지며, 심리전의 양상을 띠며 '추리'의 과정은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전혀 뜻밖의 인물이 범인이듯,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면, 도덕에 대한 생각할 꺼리를 던지는 것이 아가사 크리티 작품의 매력이다.

그렇듯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에서도 포와로를 제외한 열차에 탑승한 11명의 승객이 용의자로 등장한다. 평범한 승객인 줄 알았지만, 모두들 한 겹을 벗겨내고 나면 수상한 면이 하나 둘씩 드러나는 상황, 거기에 피해자의 상흔 조차 의심스러운데. 특히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서로 다른 찔린 상처와 용의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막판 극적 반전을 통해, 그리고 결과에 따른 도덕적, 혹은 법적 판단의 잣대를 놓고 끝까지 독자, 혹은 관객들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작품이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자평하듯 이런 신선한 플롯의 전개에 대해, 데이빗 서쳇 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열차를 타기 전 포와로가 해결한 사건 과정에서, 사건은 해결하지만 그 사건의 범인이 자살을 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왜곡될 수 없다'는 포와로의 신념에 물음표를 던지고, 그 물음표를 12명의 배심원에 의한 직접 심판이라는 본 사건의 결론과 맞물려 수미상관으로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영드 특유의 깊이를 더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까지는 아니지만, 케네스 브래너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분명 조니뎁의 등장도 흥미 진진하고, 미셸 파이퍼의 카리스마는 여전했으며, 페넬로페 크루즈의 반전이나 월렘 데포의 건재는 반가웠지만, 11명의 승객과 1인의 승무원이 서로 엇물리며 벌이는 심리전의 긴장감이 반전 추리의 결말로 순조롭게 이어졌는가 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다. 하지만, 셜록 홈즈가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버전의 셜록 홈즈 시리즈 정도의 무리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컴버배치 베네딕프 버전만큼 신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아는 만큼 달라진다. 아마도,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신선한 결말 자체만으로도 쟁쟁한 배우진들,화려한 풍광과 함께 볼만한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혹은 원작과 함께 다른 배우가 연기한 포와로를 맛본 사람이라면, 그 맛본 정도에 따라 아쉬움의 농도는 짙어질 지도 모르는 것이,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층위가 다른 감상평이다. 하지만, 아쉬워도, 아마 나일 살인 사건이 또 다시 영화화된다면 보러 갈 것 같으니, 아쉽다 하면서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관객이 되듯, 아마도 이는 아가사 작품이 가진 근원적 매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by meditator 2017. 12. 6. 20:10

jtbc의 <전체관람가> 일곱 번째 감독인 창감독의 필모는 소재나 주제 면에서 다양하다. 2008년 <고사; 피의 중간고사>를 시작으로 <표적(2014)>, <계춘할망(2015)>까지. 하지만 정작 <전체관람가>를 통해 창 감독은 말한다. '불감청이었으나 고소원'(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바라던 바)이었던 장르로 '판타지'를 내세운다. 특히 설화나 상상 혹 이야기를 현실로 옮기는 것에 관심이 많다 밝혔다. 하지만 '판타지'만으로도 발붙이기 힘든데, 설화라니, 당연히 창 감독의 '소원'은 유보될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다. 타임 슬립을 기반으로 한 한 엄마의 자식 구하기인 중국 합작 영화 <역시 영구(2017)>를 통해 풀어내려 한 바 있지만, 본격적인 그의 '로망' 그 시작은 jtbc <전체 관람가>의 단편 영화를 통해서가 된다. 그렇게, <전체 관람가>의 창 감독 편은 '자본'과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되어지는 산업이 된 영화계에서 감독의 도전과 로망이라는 화두를 다시 한번 풀어낸다. 




창감독의 로망, 판타지 구미호, 그러나 쉽지 않은 화두 
판타지에 대한 자신의 로망을 풀어내기 위해 창 감독이 선택한 이야기는 '구미호'이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혼밥'이었는데, 그것을 창감독은 직설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평범할 수 없는 그러나 평범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로망'을 지닌 구미호 소년을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 

구미호만큼이나 우리 대중 문화에서 익숙하면서도 대접받기 힘든 존재도 드물다. 한때 우리 문화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중국의 '강시' 등과 같은 설화적 존재이면서도, 영미 문화권의 '좀비'가 샤머니즘적 성격을 승화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재해석되거나, 일본의 <나루토>처럼 트렌디한 소재가 되지 못한 채, 구미호는 늘 <전설의 고향> 납량 특집 편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했다. 

구미호를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94년 당시 조명받던 여배우 고소영을 청춘 스타 정우성과 함께 내세운 <구미호>가 등장했지만 역대 가장 '허접하다'는 평가를 받고 기억 속으로 사라져갔다. 2006년작 <구미호 가족>은 이제는 스타가 된 하정우까지 등장시키고, 당시로는 도전인 뮤지컬의 형태로 구미호를 재해석해냈지만, 감독의 차기작을 기약할 수 없는 불운한 실험작으로 남게 되었다. tv라고 다를까, 김태희가 광고의 여신으로 거듭나던 2004년 구미호를 판타지 멜로로 탄생시킨 <구미호 외전>은 김태희를 비롯한 한예슬 등의 당대 청춘 스타들을 포진시켰지만, 역시나 구미호하면 흰머리에 소복, 여우눈에 피칠갑이라는 공식을 벗어난 이 도전적 시도는 안타깝게도 역시 당대의 조롱을 받으며 쓸쓸하게 퇴장했다. 

트렌드가 된 좀비와 구미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어서였을까? 서인도 제도 부두교에서 등장한 특이한 설화적 소재였던 좀비는 현대 대중 문화에서 거대 자본 속에서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는' 파편화되고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자본주의 위기 속 개인들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수용하며 현대적 문화 코드로 재탄생되었다. 반면, 그간 우리나라에서 등장했던 대부분의 '구미호'들은 현대적 재해석을 내세웠지만, 아름다운 여배우를 내세운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의 해석을 뛰어넘지 못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입장에서도 전설의 고향같은 구미호를 연상하고 요구하고 그에 이질적이면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다. 



'혼밥'이 승화된 사회적 고독으로서의 구미호 
창 감독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앞서 구미호를 다룬 작품들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신이 자신이 선택한 주제 '혼밥'을 사회적 고립으로 확장하며, 거기에 평범한 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설정하며, 자신만의 판타지 월드를 구축해 낸다. 또한 구미호라면 당연히 여성이라는 고정 관념을 넘어서, 어머니 구미호를 등장시키지만, 거기서 탄생한 존재, 아니 어머니 구미호가 천년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탈취 변형한 자식 구미호로 송재림이란 남성 배우를 내세우면 전설을 뒤튼다. 

장황했던 메이킹에 비해, 정작 본편의 단편은 간결하다. 작품이 끝난 뒤, 대번에 2편이 궁금하다, 2편을 내놓으란 말이 나오듯, 창 감독의 <숲속의 아이>는 그 자신이 말하듯 자신이 구상한 장편의 프리퀼같은 모양새를 띤다.
곧 다가올 아이의 출생을 행복하게 기다리는 평범한 부부, 그러나 그 행복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산통으로 병원에 가던 중 실종된 아내, 아니 실종된 아내의 뱃속의 아이로 인해 비극이 된다. 그 충격적인 씬이후에 비로소 등장하는 제목 <숲 속의 아이>. 이어지는 다음 이 작품의 주제가 되는 '혼밥'을 하는 청년, 분식집에서 주변 사람들을 열심히 살피며 그들처럼 '간'을 집어먹지만, 익힌 간의 맛이 낯선지 곧 뱉어내고 만다. 그리고 들이닥친 경찰들, 청년을 밤거리에서 살인을 한 혐의로 체포하고, 그런 청년을 도와주려는 인권 변호사가 나타나지만, 그 '도움'은 그 인권 변호사는 물론, 경찰서의 피비린내 나는 살상으로 마무리된다. 

출생과 이어지는 청년의 난동이라는 이 불친절한 연결은, 하지만 다음 장면 엄마 구미호와 아들 구미호의 대화, 그리고 두 모자가 떠나는 도시, 새로이 자리잡은 숲속을 통해 모든 걸 설명한다. 나는 왜 이러냐며 평범하고 싶다는 아들, 평범한 게 무어냐고 반문하는 엄마,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다며, 살다보면 너도 평범해질 거라고 말하며 자신만큼 다 큰 아들을 보다듬는 엄마. 아름다운 여배우를 내세워 전설을 복기하지 않아도, 선우 선이라는 배우의 선굵은 분위기로 엄마 구미호와 배우의 재발견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아들 구미호를 열연한 송재림을 통해 고립된 존재 구미호를 설득해 낸다. 영화 관람 후 정윤철 감독이 빗댄 <렛미인>이나, 혹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 아이>처럼 이종의 존재를 통해 오히려 인간을 돌아보게 되는 쓸쓸하고도 짙은 고독의 여운을 남기는데 프리퀼 <숲속의 아이>는 충분하다. 
by meditator 2017. 12. 4. 16:52

홍콩 영화하면 느와르라는 말이 딱 떠오를 만큼 어둠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대세를 이룬다. 그 '대세'로 인해 이제는 노년줄에 들어가는 한때 청춘들에게 '로망'의 대상이었던 홍콩 영화는 뜨고, 져버렸다. 그리고, 최근 '범죄물' 중심의 우리 영화를 두고, 홍콩 영화를 빗대 우려를 표명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지난 주 <전체 관람가>를 통해 선보인 이명세 감독의 <그대없이는 못살아>를 보면 상업 영화, 그 중에서도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에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가가반증된다. 하지만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그 스스로 한번도 현역을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10년만에야 tv 예능 프로그램이 마련한 단편 영화를 통해 신작을 선보일 수 있듯이, 최근 박스 오피스에서도 보여지듯, 작품성있는 영화라 평해져도, 화끈한 오락적 요소를 가미한 범죄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용감하게 플레이어로 등장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기억의 밤>의 장항준 감독이다. 




이게 도대체 몇년 만인가? 감독 장항준!
이명세 감독이 10년만이라지만, 영화감독 장항준은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의 필모를 검색하면 2008년작 <전투의 매너>와 <음란한 사회>가 등장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감독 장항준은 2002년 <라이터를 켜라>와 2003년 <불어라 봄바람>의, 그리고 <북경반점(1999)>, <박봉곤 가출 사건(1996)>의 각본 그 기발한 상상력의장항준이다. 그 이후로 아내 김은희 작가와 2011년작 <싸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나, 불운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2012년작 <드라마의 제왕>으로 그의 작품을 tv에서도 보기 힘들어졌다. 예능 프로그램과 특별 출연은 빈번했지만, 감독으로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무한도전>을 통해서였다. 그런 그가 '정말' 오랜만에 작품을 들고 감독으로서 돌아왔다.

하지만 <기억의 밤>이 반가운 것은 장항준의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범죄 영화가 주류를 이룬, 혹은 역사물이라 하면 역사적 사실을 복기해내는 정도에 머무르는 제작 환경에서 모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창작물' 본연의 가치를 살린 작품의 등장이라는 의의가 <기억의 밤>을 돋보이게 만든다. 

영화는 흔히 우리 영화계에서 빈번하게 차용되는 원인과 결과가 '기승전결'의 형태로 연결된 서사의 방식을 뒤집는다. 서사의 시작은 21살의 삼수생 진석(강하늘 분)의 악몽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문의 장면으로 연상되는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진석, 그런 그를 맞이한 건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를 하려고 하는 그의 가족, 아버지(문성근 분)와, 어머니(나영희 분), 그리고 형 유석(김무열 분))이다. 

그런데 새로 이사온 집이 낯설지 않다. 더군다나 먼저 집주인이 짐을 남기고 간 방이 자꾸 진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느날 형이 납치되고, 19일 만에 돌아온 형은 어쩐지 진석이 알던 그 형이 아닌 거 같은데.
그의 전작을 통해, 그리고 외모의 분위기를 통해 선한 인상이 각인된 강하늘이라는 배우가 진석으로 등장하고, 그 주변의 인물과 상황이 '의심'을 더해가며 당연히 관객은 진석과 함께, 이 '호러'인지, '스릴러'인지 헷갈리는 영화 속으로 흡인되어진다. 






스릴러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설득하다
하지만, 이 영리하고 교묘한 전략은, 이 이후 진행되는 반전을 통해, 애초에 장항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1997년 imf가 한국 사회에 끼친 상흔을 설명하는 가장 절묘한 장치로 작동한다. 결국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뜻밖의 위기,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전혀 사회 안전망 없이 '가족'의 단위로 그 파고를 맞닦뜨리며 극단적으로 해체되어 가는 가족, 그 속에서 파멸을 맞게 되는 개인을 영화는 가슴아프게 설득해 낸다. 

초반부의 한 치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스릴러의 모양새가 후반부에 가서 장황한 부연설명으로 이 뒤엉킨 사태를 설명해 내는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에 이 영화의 방점이 그 시대의 아픔을 표현해 내고자 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 것이기에 불가피하지만 충분히 여운이 남는 사족으로 인정될만 하다. 

무엇보다 <기억의 밤>이 돋보이는 건, 마치 나비 한 마리의 몸짓이 불러오는 토네이도처럼, 한 국가, 한 사회의 위기가, '금모으기' 따위의 운동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미담'으로 치부될 수 없는, 그 사회 소속 개인들의 몇 십년이 지난 삶에까지 비극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묵시록적 주제 의식이다. 그러나 이 묵직한 주제 의식을 그간 한국 영화가 해오듯 직설적이고 선언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마치 이미 맞춰진 퍼즐의 판을 새로이 뒤집어 하나하나 맞추어 가듯, 장항준이라는 각인이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기발한 창의력'에 기반을 둔 트릭과 설정으로 풀어가려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렇게 선후가 바뀌어진 이야기에, 퍼즐 맞추기식 스릴러가 빠질 수 있는 삼천포를 한국 사회 자체의 질을 변화시킨 분명한 시대적 사건에 발을 딛은 굳건한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제대로 영화다운 영화 한 편을 봤다는 쾌감과 함께, 현대사에 대한 회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양 손에 쥐고 뿌듯하게 돌아오게 만든다. 역시 장항준이다. 
by meditator 2017. 12. 3. 02:54

100세 시대다. 예전의 오래 살았다고 했던 환갑 잔치가 이젠 무색해지는 시절이다. 그러나 오래삶이 꼭 영광만은 아닌 시절이 되었다. 철지난 시절을 '부흥'하려 했던 독재자의 딸과 그 세력들이 '적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듯, 우리 시대 나이듦은 '철 지난 유행가'처럼 현실과 조우하지 못한 채 '트렌드의 낙오자'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오래 살지만, 그래서 늙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세상이다. 한편에서 꼰대가 되어버린 노인에 대한 '혐오'와, 또 다른 편에선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not old'한 왕성한 활동력으로 존재감을 증명하는 '나오미족', '레옹족'의 대두라는 엇물린 이중주를 배태한다. 그런 이질적인 두 현상을 배경으로, 꼰대 노인들의 활약상을 그린 <반드시 잡는다>가 설 자리가 마련된다. 


인기 웹툰이었던 <아리동 라스트 카우보이>를 원작으로 한 <반드시 잡는다>는  tv 드라마 <시그널>, <터널>이나,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제는 범죄 수사물에서 익숙한 소재인 장기 미제 사건을 다룬다.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형사의 30년 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200 건이 넘는 현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시대의 한계 앞에 주저 앉은 형사 박두만의 회한, 그 시대적 한계와 '꼭 잡고 싶다'던 열망을 드라마 <시그널>과 <터널>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환타지 스릴러로 화답했다. 그 시절 열정적인 형사는 그대로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현재로 뛰어들거나, 혹은 현재의 동료와 소통하며 장기 미제 사건의 그 '포한'을 풀어낸다. 

그런데 <반드시 잡는다>의 시작은 보다 현실적이다. 30년 전 아리동 일대에서 연달아 벌어진 노인들의 죽음과 여성의 실종 사건, 당시 형사였던 박평달(성동일 분)과 최씨는 그 사건들이 연쇄 살인임을 자각했지만, 88올림픽 등의 국가적 행사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각자의 회한으로 남겨둔 채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월세방을 전전하며 세 독촉을 받거나, 병원 신세를 지는 처지의 노인네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제 30년이 흘러, 하지만 시간은 여전히 그들에게서 그 사건의 기억을 봉인해제 해주지 않는다. 월세방 처지에서도, 기억을 놓쳐가면서도 그 '과거'에 사로잡힌 과거 미제 사건의 형사는, 이제 '노인'이 되어 다시 과거의 그날에 마주한다. 



꼰대의 이면
이렇게 영화는 마치 후일담처럼 그 시절 장기 미제 사건의 주역들을 불러 온다. 하지만, 그저 그 주역들을 다시금 사건의 현장에 서게 만들지 않는다. 외려 그 시절 주역들을 둘러리로 만드는 대신,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꼰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이 이야기를 '꼰대 액션 스릴러'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변두리 동네 아리동, 그곳에 터줏대감인 심덕수씨(백윤식 분). 홀홀단신 월남하여 열쇠 수리공으로 아리동 근처에 집을 열 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는 이 노인네의 하루 일과는 열쇠 수리와 집세 독촉으로 채워진다. 이른바 '수전노'라 손가락질을 받던 노인, 근데 그 노인이 월세 독촉을 하고 간 다음 날, 그 '최씨'가 스스로 목을 맨 채 죽자, 동네 사람들은 심씨 노인이 죽였다며 원망을 한다. 

졸지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자가 된 노인은, 그 와중에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윗방 세입자 아가씨의 동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안위가 걱정되어 그 집을 찾아가다 만난 의문의 청년의 뒤를 쫓다 그를 도와준 최씨의 과거 동료 박평달씨를 만나게 되고, 최근 아리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30년전 미제 사건과 동일하다 주장하는 그와 함께 2017 아리동 연쇄 살인 사건 해결의 주역으로 거듭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노인네'라 하는 그 세대의 이면이다. 정신나간 노인네 박평달은 그 정신을 놓는 와중에서도 트라우마가 된 30년 전의 미제 사건에 대한 책임감을 놓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심덕수 씨 역시 돈만 아는 꼰대인 줄 알았더니, 알고보면 월세 독촉은 하지만 내쫓지는 않는 너그러운 집주인이라거나, 세입자의 처지를 '측은지심'으로 돌보는 훈훈한 이면을 가졌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 왜 그토록 자신의 행방을 애타게 찾았냐는 지은의 질문에 대한 심덕수 씨의 답은, 우리 시대의 기성 세대가 '후안무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영화는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책임감과 연민, 그리고 뜻밖의 이타심, 이제는 '꼰대'라 치부되며 온갖 시대착오적 결점으로 도배된 세대의 이면, 심지어 여전한 로맨틱함까지 설파하고자 하는 영화는, 그 반면에 그들이 합동작전으로 추격해 낸 30년묵은 연쇄 살임범의 끊이지 않는 욕망과, 그 계보에도 주목한다. 인간의 양면과도 같은 세대의 양면이다. 

노인 액션 스릴러답게 영화 속 추격전은 노인의 템포에 걸맞게 다리 다친 도망자를 배치한다. 한번은 애교지만, 두번에 이르면 실소가 나오지만, 사실 어쩌면 이게 현실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미 <끝까지 간다>에서도 그랬지만, 영화가 끝날 듯 하면서, 정말 끝을 보아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구성의 방식은, <반드시 잡는다>에서도 이어지지만, 안타깝게도 <끝까지 간다>의 조진웅과 같은 존재감의 부재가 영화의 호흡을 늘어지게 만든다. 또한 차라리 노인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음악도 좀 어울리게 '트롯'은 아니더라도 아리동과 그 세대에 걸맞는 분위기를 내세웠다면 어땠을까 싶게, 앞서나가는 장중한 배경 음악이 오히려 실버 액션 스릴러의 분위기를 흐트러 뜨린다. 대신 그 행간을 채우는 건 어색한 사투리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극을 끌고가는 심덕수 역의 백윤식과, 반전 매력 박평달의 성동일이다. 
by meditator 2017. 12. 1. 16:50
|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