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동화의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드라마 속 동화는 결코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동화 속 죽음의 신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는 아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아이가 간 곳을 알기 위해 엄마는 자신의 머리를 기꺼이 자르고, 가시 나무를 자신의 따스한 품으로 안아준다. 그래서 드디어 만나게 된 죽음의 신, 하지만 죽음의 신이 있는 곳은 강과 숲이 막고 있다. 죽음의 신은 엄마에게 말한다. 그 강을 건너고 싶으면 두 눈을 강에 던지라고. 엄마는 주저없이 자신의 두 눈을 강에 던진다. 아이를 위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모성의 댓가는 잔혹하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구했냐는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동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드라마가 비로소 시작된다. 

(사진; 헤럴드 경제)

드라마의 서두에 짤막하게 보여진 동화의 내용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서 엄마인 수현(이보영 분)이 자신의 아이 샛별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덕분에 1회 내내, 아직은 엄마와 함께 사는 샛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시청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샛별의 엄마 수현은 실시간으로 범인을 현상 수배하고, 범인을 찾아내는 시사 프로그램의 작가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자 샛별의 아버지인 한지훈(김태우 분)은 대통령 후보를 상대로 자신의 소신을 펼 정도로 정평이 난 인권 변호사이다. 수위 아저씨가 홀대하는 장애인에게 동정을 보이고, 잔혹하게 여자를 살해한 살인범에게 분노를 느끼며 저돌적으로 반응하는 수현도, 피해자 가족에게 오물 세례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기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양심적인 사람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회적 의식과 달리, 현실의 수현은 지극히 보통의 엄마일 뿐이다. 일하느라 돌보지 못하는 아이를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맡긴 채, 영어 학원이다, 수학 과외다 하며 뺑뺑이 돌리고, 그런 아이가 잠시 일탈을 위해 찾아간 장애인에게 당장 싸다귀를 날릴 만큼 속물적인 엄마일 뿐이요, 의식있는 변호사인 아빠는 그런 엄마를 방관하며 육아에는 오로지 엄마의 몫으로 돌리며 바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부모 아래에서 학습 부진을 겪으면서도 티없이 순수한 딸 샛별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착한 심성으로 자꾸만 엄마와 비끄러져 나가며, 다가올 비극의 징조를 보인다. 굳이 우연히 들른 까페 여인의 의미 심장한 예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동화의 학습 효과를 겪은 시청자들은 그 짧은 1회 동안, 엄마의 품에서 자꾸만 벗어나 튕겨나가는 샛별이의 행보에 번번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돌발적으로 사건을 만들던 샛별이 정작 사라지게 된 계기는, 마치 백화점에서 잠깐 아이의 손을 놓았던 그 찰라로 인해 아이를 잃게 되듯이, 10년 전 사랑하던 사람을 만나 잠깐 차를 마시는 그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우연히 벌어진다. 그것도 하필 수현이 내용까지 바꿔가며 수배를 하려던 했던 그 연쇄 살인범의 손아귀에 아이를 놓친다. 

뿐만 아니라, 번잡스럽게 벌려진 1회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등장하는 그 누구도 다 의심스러울 뿐이다. 뻔히 교도소에 갇혀진 사형수에서 부터, 그의 어머니가 불현듯 수현의 빌라 앞에 등장하는 것이며,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지적 장애아가 샛별이의 주변에 어른거리는 것까지. 뜬금없이 수현의 집으로 쳐들어 온 사형수의 동생 기동찬(조승우 분)까지 의심의 촉은 끝이 없이 번져간다. 도대체 10년 전 벌어졌던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기에 그 사건의 인물들이 촘촘히 수현과 수현의 딸 샛별의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걸까. 과거의 사건까지 시선이 간다. 친절하게 샛별이 친구의 강아지를 맡아준 문방구 주인에서, 수현과 부딪쳤던 택배 기사는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고,심지어 이유없이 등장하고 말기엔 비중있는 조연인 기동규 장애 학교 교사조차 의구심이 든다. 당연히 한기훈에게 피해자의 가족의 심정으로 악다구니를 하던 방청객 역시 피해갈 수 없으며, 하다하다 아빠가 친아빠일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아니 한기훈을 정적으로 여기는 대통령은 어떨까?


(사진; osen)

<신의 선물>은 이렇게 단 1회 만에 마치 추리 소설의 첫 장 인물 소개난처럼 이 드라마의 등장 인물과 함께, 그들의 혐의에 대한 의심을 풀어 놓는다. 덕분에 극은 마치 잔뜩 쌀겨를 쑤셔넣은 오즈의 마법사 속 허수아비처럼 삐죽거리고,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이 오즈의 브레인인 양 허세를 부리던 허수아비라도 되버린 듯,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사건의 실체를 그려내느라 골머리가 아프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신의 선물>이라는 드라마의 호불호가 갈릴 듯 하다. 번다한 전개를 실마리라 생각하고 도전 의식을 가진 그 누구라면, 2회를 이어 보며 모처럼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펼칠 장르물을 만났다 여길 것이요, 도무지 이리저리 복잡한 관계의 실타래가 그저 잔뜩 엉킨 것 이상으로 보여지지 않은 그 누군가는 두 손을 들고 채널을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마지막 복병이 있다. 생방송 순간에 들려오던 납치범의 다그치는 목소리 다음에 이어지던 딸 아이의 익숙한 흐느낌에 스튜디오로 달려가 전화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엄마 수현의 모습은, 장르극을 넘어, 처음 아이를 찾아 자신의 눈조차 서슴없이 던져주던 엄마의 처절한 모정을 다시 연상케 한다. 그래서, 장르를 넘어선 모성애의 서사라는, 보편적 공감대로서의 여지를 남기며 시청자들을 끌어 앉힌다. 

<신의 선물>이 그 부제처럼, 14일 이라는 기간을 빌미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아직 열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단 1회 만에도, 엄마인 수현도, 그리고 등장한 그 누구도,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인물들로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현의 주변에서 촘촘하게 배치된 기동찬의 식구들에게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이 드라마가 샛별의 납치 사건 이상의 그 무엇을, 그저 한 가족의 상실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지닐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전작이었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부부 사이의 불륜과 이혼 문제를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해냈듯이, <신의 선물> 역시 유괴 사건이라는 외피를 넘어 또 다른 문제 제기를 할 것처럼 보인다. 또한 <내딸 서영이>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통해, 그녀가 선택한 작품이라면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된 이보영이 선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된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이어 역시나 만만찮은, 하지만 기대해 봄직한 sbs의 월화 드라마 라인이다. 


by meditator 2014. 3. 4. 01:43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나눌 희망도, 서로/힘돋워 함께 할 삶도 없이/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혼자 밥먹는 세상
밥 맛 없다/ 참, 살 맛없다  -오인태<혼자 먹는 밥 > 중

먹방이 넘쳐나는 시대다. 
tv를 켜면 프로그램마다 먹방이 넘쳐난다. 끼니 때마다 정보 프로그램들은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하고, 그 맛집 속 먹음직스런 음식은 예외없이 그날의 검색어 순위에 올라 또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예능 프로그램도 다를 거 없다. 예능 프로그램 멤버 중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은 바로 먹방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일찌기 야수와 같은 식성을 보였던 강호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나 혼자 산다>와 <1박2일>을 오가며 진가를 발휘하는 데프콘의 존재 이유중 하나가 먹방이다. 심지어 어린 추사랑의 사랑스러움에서조차 먹방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사진; 뉴스 에듀)

아니 케이블로 가면 아예 맛집을 찾아다니며 하루에 몇 끼를 먹어대는 건 예사다. 인터넷 방송으로 가면 한 술 더 뜬다. 아예 먹방 전용 방송이 있고, 이 프로그램의 BJ(broadcasting jockey)들은 여자라 할 지라도 앉은 자리에서 킹 크랩에, 새조개에, 치킨까지 몇 끼는 거뜬히 먹어제끼고, 거리에 앉아 군복 차림으로 군대 시절을 추억하며 군사 식량을 시범보이고, 게스트의 요구에 따라 대화를 나누며 춤을 추다 음식을 먹는 생쇼(?)를 보이기도 한다. 

먹방계의 여신이라 칭해지는 BJ 더 디바의 방송은 하루 동안에만 조회수가 2만이 넘는다. BJ비룡의 경우, 그가 방송하는 거리까지 그의 고정 게스트들이 음식을 사들고 찾아와 함께 방송을 한다. 방송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BJ음마의 경우, 가족보다도 그의 게스트들이 그를 더 잘 안다고 자부한다. 홀로 먹는 밥상을 sns에 시와 함께 올려 화제가 된 오인태 시인의 저녁상은 홀로 먹는 것이되, 그의 sns를 넘쳐나는 댓글로 풍성해진다. 

그렇다면 이 넘쳐나는 먹방을 시청하는 게스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피씨방과, 개인 피씨, 그리고 모바일을 통해 먹방을 시청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홀로 사는, 혹은 홀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488만 1인 가구들이 그 주 시청층이다. 학업으로, 혹은 가족 사정으로, 그리고 직업 때문에 홀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먹방을 '탐닉'한다. 

그래서 먹방의 탐닉은 그저 먹방을 즐기고 빠져드는 문화 오락적 증상으로만 보여져서는 안돤다고 SBS스페셜은 진단한다. 우리 시대 먹방이란 이제는 해체되어 가는 가족 혹은 상실되어 가는 공동체를 향한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지향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제는 현실적으로 되어가는 싱글 라이프와, 여전히 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공동체적 의식, 그리고 무리 동물로써의 인간의 본성이 빚어낸 간극의 지엽적인 해소 방식이 먹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SBS스페셜의 카메라는 먹방의 진화를 시도한다. 그저 보고 즐기는 먹방이 아니라, 홀로 먹는 삶의 공허함을 메워줄 적극적 방식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그 첫 번째의 모색으로 등장하는 것이 '소셜 다이닝'(social dininig)이다. 
광고 디자이너 김건우씨의 경우처럼 일주일의 하루 모르는 사람들과 모여 직접 요리를 하고 함께 요리한 음식을 즐기는 것이다. 아현동 재개발 지구 피터 아저씨네 작은 집에 그저 하루 음식을 먹기 위해 들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피터 아저씨네를 찾아든 객식구의 솔직한 답변처럼 음식은 솔직히 그리 맛있지 않더라도, 홀로 세상을 떠돌다가 어느 하루 좁은 방에서 마치 가족처럼 무릎을 맞대고 음식과 함께 나누는 대화가 그리워 사람들은 잊지 않고 이 허름하고 조그만 집을 찾아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제 비로소 '소셜 다이닝'과 같은 형태로 싱글 라이프의 모색이 시작되었다면, 이웃 일본의 경우, 아예 밥을 함께 먹기 위해 모여 사는 '셰어 하우스'가 있다. 집값이 비싸 한 지붕아래 모여 사는 경제적 필요를 넘어서, 한 식구가 되어, 함께 음식을 하고 나누는 생활 형태가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아예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홀로 살아가는 노인, 혹은 노인 부부가 무료로 젊은 학생들을 데리고 살며 그들과 매일 저녁 식사를 나누는 '두 세대 함께 살기' 혹은 '꼴로까시옹'이 그것이다. 

'먹방'은 그저 트렌드나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모색' 해 보기 시작할 우리 사회 싱글 라이프의 일탈적 형태이다. 그리고 이제, 홀로 살지만, 외로이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해 구체적 모색이 필요한 시기라 sbs스페셜은 말하고 있다. 


by meditator 2014. 3. 3. 10:04

워낙 바빠서 tv 드라마 하나 챙겨 볼 여유가 없는 친구가 웬일로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했다. 

부부 사이의 문제를 모처럼 진지하게 바라보는 드라마라며, 그러면서 과연 재학(지진희 분)과 은진(한혜진 분)의 불륜으로 시작된 드라마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귀추가 주목된다고 덧붙였다. 중년의 그 친구가 살아온 나날에서 짚어왔을 때, 설사 불륜이라 하더라도, 실제 부부 사이의 이혼이란 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자기 나름의 결론과, 결혼에 대해 모처럼 진지하게 접근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부부의 외도와 갈등을 여타의 드라마처럼 무 자르듯 이혼이라는 결론으로 맺을 건지 기대 반 걱정 반이라고도 했다. 

(사진; tv 리포트)

그리고 드디어 종영을 맞이한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친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덕분에, 그 결론으로 인해 드라마적 완성도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왔다. 

아마도 그것은 재학의 불륜을 알고 용의주도하게 쿠킹 클래스까지 잠입하며 복수를 다짐했던 미경(김지수 분)의 깊은 분노, 그리고 그 깊은 분노만큼이나 집착적인 사랑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오랜 세월 재학에 대한 사랑 만으로 거의 학대에 가까운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을 견디며 살아온 미경에 대해 드라마를 봤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이 부부는 이혼을 하지 않을까 라고 쉽게 기대(?)를 했었기 때문이다. 
은진의 외도가 성수(이상우 분)의 외도로 인한 보복성 해프닝의 성격이 강하고, 두 사람이 막말을 하며 혹독하게 상대방을 몰아세워도 이른바 '미운 정'이 느껴지는 것과 달리, 재학-미경 부부에게서는 함께 한 세월의 온기가 그보다 덜 느껴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그 냉랭함을 대신할 '정'과 '관계'를 설득하기에 <따뜻한 말 한 마디>의 논리가 상투적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외도로 인한 상처가 치유받았다고 혹은 치유는 아니더라도 봉합되었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싶었으나, 시청자들은 그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적 근거의 부족과 함께,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우리 드라마에 숨겨진 '이혼'에 대한 환타지를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무시했다는 데서 오는 배신감도 있지 않을까.
일상의 삶을 견디며 사는 사람들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짧게는 하루, 아니 1박2일, 길게는 해외 여행을 꿈꾸는 핵심은 바로 '일탈'에 있다. 그처럼, 부부 간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자신이 불만을 가지고 사는 문제들이 드라마를 통해 속시원하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또한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전히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하고 있는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클라이막스와 엔딩은 마치 못된 놀부를 처단하듯,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응징하고 통쾌하게 이혼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미경이 재학을 버리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삶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환타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선택을 보여준다. 이혼은 그리 쉬운 게 아니라고, 어쩌면 상대방의 불륜 한번으로 손상된 자존심을 내세워 이혼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과, 가족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익숙하지 않은 해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세계 수위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세운 해법이 역설적으로 환타지적이거나, 진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이렇게 대중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달리, 애초에 제목에서부터 두 번의 이혼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당연한 수순이듯, 주인공 두 사람의  두번 째 이혼을 목전에 두고 있다. 

준구<하석진 분)와 재혼한 은수(이지아 분)는 마무리 되지 않는 준구의 불륜으로 이혼의 위기에 놓인다. 은수의 전남편인 태원(송창의 분) 역시 새엄만 채린(손여은 분)의 딸 슬기(김지영 분)에 대한 학대로 이혼을 선언한 상태이다. 마치 두 사람은 제목이 정해준 메뉴얼처럼, 재혼을 하고, 다시 이혼을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심지어, 이지아는 준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이다. 

3월 1일 은수가 준구를 만나 정리하듯, 애초에 은수와 준구의 결혼은 잘못된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설사 준구가 바람을 피지 않았더라도 자의식이 강한 은수는 준구의 집안에서 조금씩 말라가다, 언젠가는 또 다른 이유로 이혼을 선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그보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마치 탯줄을 자르지 않은 아이처럼, 비록 시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이혼까지 했지만 여전히 정신적 유대의 끈을 놓지 않은 은수와 태원의 두번 째 결혼이 순탄치 않는게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에서, 두번 째 결혼은 마치 두 사람이 지난 시간 내렸던 첫 번째 이혼이라는 결정이 경솔했음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처럼 씌여지고, 두 사람들의 두번 째 파트너는 무엇을 어떻게 해도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하는 도구적 인간들일 뿐이다. 드라마는 그들이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 문제적 인간이기 때문에, 두번 째 이혼에 봉착한 것처럼 그려내지만, 결국 두 사람의 근본적 문제는, 자존이라고 내세우면서, 첫 번 째 결혼의 탯줄을 끊어내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두 주인공의 두번 째 이혼을 들먹이며,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이르른 이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르고 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와 태원은 두번 째 결혼의 붕괴 지점에 이르러서야, 지난날 자신들의 결정이 경솔했음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른 분석도 가능하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세월의 더깨가 앉은 좀 살아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결혼과 이혼에 대한 현실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혼에 대한, 그리고 관계에 대한 따스한 가능성에 대한 천착이라면,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김수현이라는 노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냉소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랑을 담기에도, 가족이라는 그릇으로 포용하기에, 더더우기 개인의 자존감이 존중받기에는 더더욱 어색해져 버린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 거북살스런 제도를 야멸차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가정으로 다시 돌아간 미경도 어색하고, 태중에 아이를 넣고 이혼을 하겠다고 나서는 은수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애초에 결혼 자체가 미친 짓이기 때문일까. 설득력있는 이혼이라는 건 존재하는 것일까. 


by meditator 2014. 3. 2. 10:26

무라카미 하루키의 2013년 최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36살의 싱글남이다. 남들이 보기엔 도쿄의 내로라한 공대를 나와 도쿄 전철에 근무하며, 어린 시절 꿈꾸던 역을 짓는 일을 현실로 실현시킨 멋진 남자요, 이제는 결혼을 독촉하던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조차, 혼자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해져서 결혼하기가 힘들다고 말할 정도로 대학 시절부터 머물던 아파트에서 싱글 라이프를 꾸려나가는데 하등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금요일 밤 11시30분에 찾아오는 <나 혼자 산다>는 마치 위에서 서술한 다자키 쓰쿠르의 외면적 삶의 모습과도 같다. 혼자 살지만, 늘 주변에는 어우릴 누군가가 있고, 혼자 사는 삶은 먹방과 즐겨하는 취미로 넘쳐나고 감히 '외로움'을 들먹이기에 어색한 혼자로써 충만해 보이는 삶.

그런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 다자키는 그 누군가의 말처럼 스물 살 무렵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과도 같다. 아니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도, 저 책의 수식어처럼 개성이 강한 그들에 비해 '색채가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쭈뼛거리기 바빴던 한 켠으로 물러선 청춘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날 이후 그는 그저 이 이후의 삶을 연명해가며 서른 중반에 들어섰는데, 보는 사람들을 그를 그저 그럴 듯한 멋진 싱글남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전철 회사 멋진 싱글남  다자키 쓰쿠루의 속사정을, 아니 실은 경제 성장 시절의 무난하게 자랐지만 이제는 공허한 현실인이 되어버린 세대의 후일담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여다 보듯이, 2월 28일 <나 혼자 산다>는 그간 화려한 먹방과 취미 생활에 밀려났던 속사정이 슬며시 드러난다. 전셋집을 옮겨야 하는 처지에 놓인 김광규와 홀로 감기 몸살에 시달리는 파비앙의 혼자 사는 삶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김광규가 전셋집을 구하기위해 고군분투 했다./MBC 나 혼자 산다방송 캡처
(사진; 스포츠 서울)

마치 다자키 쓰쿠루가 색채가 없는 자기 자신에 대비를 하듯 그가 만나는 누군가가 어떤 색깔로 대변되었듯, <나 혼자 산다>의 각각의 멤버는 무지개 회원이라는 아롱이 다롱이의 색깔을 지닌 동호회적 성격의 구성원으로 재규정된다. 그 중에서 김광규 회원이 발하는 빛의 프리즘은 독특하다. 우리가 동네 마트에서 쉽게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한 색채를 띠면서도, 가장 그 평범함의 파장이 크다. 마흔 후반의 머리가 더 벗겨질까, 혹은 이제사 좀 머리가 나는가 노심초사하며, 건강에 좋은 것은 결코 놓치지 않는 보통 중년남의 면모를 결코 빼먹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무색하게 에어로빅에,  살사에, 그것을 넘어 음반 취입에, 홀로 외국 여행까지 보통사람이 꿈을 꾸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간다. 그래서 다른 무지개 회원들의 삶이 홀로 사는 연예인의 삶을 '관상'하는데 그치게 되는 반면, 유독 김광규 회원의 삶에는 보는 사람들의 '감정이입된 공감'이 실린다. 더구나, 요즘처럼 날마다 뉴스에서 전세 대란을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하고 있는 시점에 하필 보통 사람의 대변인 같은 김광규 회원조차  그 전세 시장에 휩쓸리게 된 지점은 참으로 절묘하기 까지 하다. 

죽은 자식 뭐 만지기라고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이 누렸던 것들을 쉽게 놓지 못한다. 그렇게 김광규 회원은 전셋집을 옮길 처지에 놓이자, 자신이 사기로 날렸던 돈을 다시 떠올리고, 심지어 그때 살았던 동네의 시세까지 착각하며 다시 가보는 해프닝을 벌인다. 또 언제나 그렇듯 이사는 해야 하고 집값은 올라가서 여의치 않으면 사람들이 생각하듯 진작 무리를 해서라도 이집을 사는 건데 하는 정석의 과정 역시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이들어 이제 좀 정들고 사는가 싶은 주거지를 옮겨야 하는데서 오는 '정주의 동물'로써의 불안함이다. 집값이 맞지 않음에도 다시 예전 동네를 가보는 그의 발걸음은 이제와 또 다시 어디선가 정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버거움의 표현이다. 

그런 김광규 회원의 모습은 물론 그 개인에게는 또 다시 평화로웠던 삶을 휘젓는 고통이겠지만, 나 혼자 사는 '저들의 이야기' 같은 <나혼자 산다>가 다시 한번 우리네 삶의 한 가운데로 던져지는 공감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사진; 엔터 미디어)

프랑스 청년 파비앙의 감기 몸살은 그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의욕적인 프랑스 청년 파비앙이 처음 동네 축구 동아리에 나가 하루 종일 종횡무진 열심히 뛰었지만,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은 혹독한 감기 몸살이다. 쌓아놓은 설거지, 두겹의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배즙을 덥혀 마시는 파비앙의 모습은 홀로 아픈 사람의 처량함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던 그가, 너무 아파 한의원을 찾고, 거기서 보험이 없어 거금을 내야 하는 장면에서부터는 우리 중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싶지만 우리가 받아들여 주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이 너무 여실히 드러나 가슴이 아파온다. 식당에 가서 감자탕을 즐겨 시키고, 공기밥을 흔들어 섞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지만, 결국 우리 안에 들어서지 못해 빠른 회복을 위해 고춧가루 탄 소주를 들이켜야 하는 그의 모습이 못내 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외국인 파비앙만이 아니라, 그처럼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서지 못하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들의 모습일 거 같다는 자각이 들기도 한다. 파비앙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에 가기 두렵다지만, 그와는 다른 우리와 같은 얼굴을 지닌 누군가는 또 다른 이유로 아픔을 물리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2월 28일의 <나 혼자 산다>는 모처럼 흥건한 먹방과 화려한 취미 생활을 뒤로 하고, 혼자 사는 삶의 속살을 내보였다. 그 속살에서 드러난 삶의 가장 기본인 사는 것, 그리고 질병에 대해 무방비한 싱글남의 모습은, 이 시대를 버텨가는 또 다른 우리들과 다르지 않기에 유독 짠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나 혼자 산다>는 삶의 희로애락을 채워간다. 


by meditator 2014. 3. 1. 10:17

얼마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관능의 법칙> 리뷰를 썼었다.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쓴 또 다른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었다. 이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관능의 세대를 훌쩍 넘긴 나이이고, 그 또 다른 분은 아직 그들의 세대가 되려면 한참 먼 나이였다.

그 분이 그랬다. 자신이 그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아, 저 세대가 되어도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고 자신만만할 수 있구나 란 것이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똑같은 이야기일 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세대와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게 오히려 <관능의 법칙>이 불온했던 이유는, 그런 관능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 외에는 해결책이 없는 안일한 낭만주의였기 때문이었는데, 누군가는, 그런 가능성이, 여전히 또 나이를 들어갈 희망으로 여겨지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의 차이는 2,30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가 필요해3>를 두고도 갈라진다. 그 세대를 훌쩍 넘어, 이제는 거의 자식뻘이 되어가는 세대의 이해를 위해 보는 나와, 그들과 동시대를 사는 그분의 입장이 역전되는 것이다. 나는 아, 요즘 젊은 세대는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라고 하며 보았다면, 오히려, 그분이 본 그 드라마는 현실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그저 환타지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다루는 세대가 자신의 세대와 비슷하면 비슷할 수록, 그 다루는 방식이 환타지스러운 것은, 동세대들은 그 현실과의 괴리감에 불편함을 느끼기 쉽고, 오히려 멀어지면 환타지로 받아들이는데 이물감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진리를 증명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사진; OSEN)

그렇다면 <드라마 스페셜- 들었다 놨다>가 그려낸 마흔 무렵의 사랑은 어땠을까?
대기업의 부장이지만, '내 인생엔 민폐란 없다'란 그의 좌우명의 현실태인 교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조만간 원주로 좌천될 남궁 상(김 C)과 같은 회사의, 하지만 남궁 상과 전혀 다르게 스카웃이 되어 이 회사로 올만큼 잘 나가고 있는 이은홍 부장(우희진), 이은홍 부장이 부하 직원을 달달 볶아 가며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동안, 종이에 그녀를 마녀라 그리며 속으로 궁시렁 대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두 사람의 관계의 시작은 같은 회사이지만, 서로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서로 다른 별의 사람들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런 이질적인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두 사람의 아파트와, 마흔의 나이에 여전히 싱글이라는 지점이다. 그리고 <들었다 놨다>에서 마흔 무렵의 사랑은 바로 이런 생활 속 교집합으로 부터 시작된다. 남궁상이 절대 그녀와 얽히지 말아야지 하면 할 수록, 이은홍의 사생활은 자꾸 남궁상의 레이더에 잡히고, 그런 그녀에게 무심하게 던지는 남궁상의 관심이 똑부러지는 듯하지만, 홀로 생활하는데 두려움을 가진 이은홍의 싱글 라이프에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관계의 진전이 '품앗이'라는 용어로 정의내려지고, 마지막 이은홍이 원주로 떠나는 남궁 상을 배웅하며, 아파서 병원에 실려간 환자 남궁 상의 보호자 란에 자신의 이름을 쓴 순간 가슴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듯, <들었다 놨다>가 전하고자 하는 마흔의 연애는 싱글의 삶을 채워주는 일상의 공유들이다. 

그리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품앗이 사랑을 하는 남궁 상과 이은홍의 사랑이, <관능의 법칙> 속 당당한 싱글로써 연하남의 사랑을 쟁취하는 정신혜(엄정화 분)의 사랑에 비해 훨씬 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을 드라마를 다 보고 한 독해의 의미이고, 실제 드라마는 그런 일상의 연애를 보다 스타일리쉬하게 낭만적으로 그려내고자 애쓴다. 민폐를 끼치지 싫어하며 홀로 사는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남궁상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이 울려퍼지고, 도서관같은 서가가 폼나게 진열된 전혀 궁상맞지 않은 집을 배경으로, 남궁 상과 이은홍의 해프닝을 로맨틱 코미디처럼 진행시켜간다. 마치, 한 영화를 보고 서로 다른 세대가 서로 다른 판단을 하듯이, 드라마의 극본은 일상의 삶 속에서 조금씩 의지해 가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중년의 사랑을 다루었다면, 연출은 그걸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게 붓질하겨 애쓰는데, <들었다 놨다>의 묘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덕분에, 남궁 상과 이은홍의 충돌은 부각되지만, 정작 그들이, 서로를 돌아보게 된 시점,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여지는 지점에 대한 설명은 불분명하다. 그저 언제나 로맨틱 코미디의 그것처럼, 김C라는 묘한 존재감에 의지한 남궁상과, 우희진이라는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게 아름다운 두 사람이 도드라져보이는, 사랑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연인들의 또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되돌아보면 현실적이었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들었다 놨다>가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매체 속 사랑은 늘 한결같이 낭만적이고, 로맨틱해져야 하는지, 작은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2. 24. 13:24

40%가 넘나드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어디까지 가려고 하나 하는 우려와 이웃집 싸움 구경 하는 심정으로 관심을 끌던 <왕가네 식구들>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 회까지 '어의상실'의 원칙을 견지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오로라 공주>나 <왕가네 식구들>과 같은 드라마의 후속작들은 일반 잘 나가던 드라마와 다른 부담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 워낙 '막장' 요소로 이름 높았던 전작의 조미료같던 진한 맛을 지양하며 새 드라마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적 관심을 끌던 전작만큼은 관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방영 2회만에 30%를 넘은 <참 좋은 시절>의 출발은 두번 째 관점에서 순조로운 듯하다. 또한, '왕가네 식구들이 기록을 봐야하는 스피드 스케이팅이었다면, <참 좋은 시절>은 제한된 시간 안에 소소한 몸짓으로 점수를 얻어내는 피겨 스케이팅 종목이라고 규정을 내렸던 김진원 연출의 정의처럼, 소소하고 따뜻한 행복을 그려내겠다는 <참 좋은 시절>의 색채 또한 <왕가네 식구들>과는 이미 2회만에 그 차별성을 분명하게 각인시켜나가고 있는 중이다. 


(사진; osen)


<참 좋은 시절>은 그간 주중 미니시리즈만 집필해오던 이경희 작가가 2000년도의 <꼭지>이후 모처럼 돌아온 주말극이다. 이미 <고맙습니다>를 통해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그려내어 전국민적 드라마를 탄생한 바 있는 이경희 작가에게, 주말 드라마는 어찌보면 생소하거나 도전해야 할 장르이기보다는 조금 더 풍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또 다른 장이라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늘 이경희 작가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가족으로 부터 시작된 해원의 희생자들이곤 했으니까. 아직도 사랑에 대한 드라마라면 한번쯤은 회자되곤 하는 <미안한다 사랑한다>에서 가장 기본적인 갈등의 시작은 엄마 오들희(이혜영 분)의 숨겨진 아들이었던 차무혁(소지섭 분)이란 존재였다. <크리스마스엔 눈이 올까요>도 다르지 않다. 차강진(고수 분)과 한지완(한예슬 분)의 슬픈 사랑의 시작은 그의 부모 차춘희(조민수 분)와 한준수(천호진 분)의 비극적 관계로 부터 잉태된다.
지양할 수 없는 관계 가족, 그 가족으로 부터 잉태된 비극, 그렇게 이경희 월드의 시작은 언제나 도망칠 수 없는 운명적 관계로 부터 시작되고, <참 좋은 시절> 역시 다르지 않다. 강동석(이서진 분)의 어머니 장소심(윤여정 분)이 차해원(김희선)의 집에서 가정부를 살게 되면서 갈등의 씨앗은 뿌려진다. 차해원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가족들이 차해원의 어머니에게서 받는 수모를 견뎌내기 힘든, 자존심강한 강동석은 이경희 월드에서 그리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 자신 한 사람으로는 너끈히 자존감을 내세울 수 있는 존재이지만,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들어서면 한없이 상처받고 그래서 발톱을 세우게 되는 가녀린 짐승같은 존재, 그것이 이경희 드라마의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렇게 끊어낼래야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 위에 주인공들을 상처입히는 또 하나의 관계가 있다. 그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고 없음이라는 양적 물증이 아니라, 이제는 그것이 사회적 신분 제도처럼 고착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규정하고, 평가 기준이 되는 '돈'에 의해 재편된 인간 관계가 그것이다. 촉망받던 의대생 강마루를 물질로 평가되는 세계 속에 자신을 던지는 욕망의 현신으로 변질시키는 건 결국 그의 불운한 가정 환경이다. 가진 것 없는 주인공이, 세상의 핍밥을 견디지 못하고, 자아를 외면한 채 자본주의적 자아로 재편하여 기계인간과도 같은 존재로 거듭나는 건, 이경희월드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차무원을 거듭 상처주는 건, 오들희의 숨겨진 자식이란 존재 외에, 부잣집 사모님인 그녀로부터 쏟아지는 모멸이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차강진도, <참 좋은 시절>의 강동석이 냉혹해 지는 지점은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결론이다. 

(사진; osen)

하지만 사회적으로 불균등한 부, 그리고 거기에 얹혀진 가족 관계로 부터 상처받고 발톱을 드러내는 주인공, 그것은 이경희 월드의 필요 조건에 불과하다. '피겨같다는' 연출의 말처럼, 진짜 이경희 월드를 규정짓는 본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 냄새 풍기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내걸었던 <고맙습니다>에서 세상에 상처받고, 아픈 딸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을 원망하기 보다, 그것을 품고 또 품으려 애썼던 이영신(공효진 분)으로 대표되는 캐릭터들이 그들이다. 단 2회지만, 10년 만에 돌아온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찬 동네 어귀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강동옥(김지호 분)으로 대변되는 바보같은 사랑이, 그리고 잘 나가는 검사 아들 대신 못나고 부족한 동옥과 심지어 자신의 친 아들이 아닌 동희(택연 분)를 부등켜 안고 사는 장소심 여사가 이경희 월드를 완성시키는 충분 조건이다. 그들 역시 상처받지만 그 상처를 들고 울부짖기 보다는, 그 대신 가진 것 없어도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주변의 관계까지도 온전하게 일으켜 세우는 강인한 자존감, 그것이 이경희 월드의 주제 의식이다. 그런 그들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하는 주인공들을 발톱을 세우지만, 결국은 발톱 대신 화해와 사랑으로 귀결되게 되는 것이다. 

단 2회에 불과하지만, <참 좋은 시절>은 이경희 월드의 색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경주라는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둥그런 고분을 배경으로 한 나지막한 도시의 라인처럼, 2014년을 이야기함에도 과거의 어느 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배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2014년을 사는 주인공들임에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얽혀들게 되는 강동석 검사의 가족들처럼, 얼기설기 사람 냄새 풍기며 우르르 다가오는 가족들에게서 <왕가네 식구들>의 현실적 아비규환 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치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가며 느끼게 되는, 분명 내가 지나가고 있는 곳임에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추억 속을 걷는 듯한 처연함을 <참 좋은 시절>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점점 찾아보기 힘든 사람다운 훈훈함이 <참 좋은 시절>의 기조이기 때문이리라. 


by meditator 2014. 2. 24. 09:57

조선 왕조의 건국을, 그 기틀을 구축한 삼봉 정도전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는 kbs1의 대하 드라마 <정도전>이 조선 건국의 인큐베이팅에 들어섰다.


귀양을 내려가 만나게 되었던 백성 아니 도자기를 빚어야 살아갈 수 있는 부곡민 천복과 양지를 만나 막연했던 정치적 풍운아에서 고려의 실상, 그리고 나라의 중심이 누구여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 정도전은, 이 두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더 이상 고려라는 나라로는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결론과 함께,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유랑 생활을 거듭하던 그의 방랑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드라마 <정도전>은 정도전과, 천민 양지, 천복의 만남과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정도전을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정치인 정도전의 목적이 일종의 '민본주의'임을 분명히 하고자 애쓴다. 중앙 정치가의 전횡으로 먹고 살기 힘든 그들의 생활, 외구의 침탈에도 보호막이 되어줄 수 없는 정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외구의 앞잡이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도, 결국은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힘없는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한 정부여야 한다는 신념을 드라마는 삼봉을 통해 피력하고 또 피력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백성 중심 사상은 당연히 그 누가 왕권을 잡던 상관없이 그들을 제대로 따뜻하게 보살피기만 하면 된다는 역성 혁명의 사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고려라는 왕조 국가를 거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낸 정도전의 진실된 면모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고려 말 사회적 갈등의 가장 큰 부분이자, 고려 왕권을 허약하게 만들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이 바로, 세금을 낼 백성들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일부 권문 세가의 농장과 사병이었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것을 지양한 새로운 체제라는 것이, 불가피하게 세금을 낼 수 있는 소농들이 중심이 된 이상적인 정도전이 구상한 토지 제도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 역시  조선 왕조 개국 후 불과 몇 명의 왕을 거치지도 못하고, 왕가와 또 다른 신흥 권문 세가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운명을 지닌 이상적(?)인 제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민본주의적 지향을 가졌음에도 정작 백성이 어쩔 수 없이 자기 삶의 기반을 잃거나 포기하고  권문 세가의 그늘이 된  '노비'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한계를 드러내며 시대적 한계를 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석의 여지와 상관없이 드라마 <정도전>의 지향은 분명하다. 한 나라의 존립 근거는 그 나라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드라마의 시각,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정도전의 시각에 따라, 드라마 속 인물들은 혁명과 개혁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 원대한 기획을 마친 정도전은 자신과 함께 할 인물로 고려를 넘어뜨릴 만한 무력을 가진 그 누군가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레이더망에 잡힌 인물이 바로 최영이다. 주변에서 만나는 백성들에게 번번히 물어볼 때마다 답으로 돌아온 최영을 만나 새로운 국가를 도모하고자 했던 정도전은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발길을 돌린다. 먹고 살기 위해 법을 어긴 백성에게 무리한 벌을 내리는 최영을 보고, 그가 백성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 뿌리에서부터 고려라는 왕조 국가의 사람이라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다음 발길이 향한 곳은 최영만큼 전국민적 인지도(?)에 있어서는 떨어지지만 그 못지 않은 잠재적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성계이다.


(사진; 미디어펜)

정도전이 선택한 이성계는 미묘한 경계인으로 그려진다. 조선이라는 500년의 완고한 유교적 왕조 국가를 이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국경이 분명하지 않은, 싸움 한번에 고려인이 되기도 혹은 오랑캐가 되기도 하는 경계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이 되려 애쓰지만, 그래서 고려 조정의 견제 대상이 되는 위태로운 운명의 인물로 그려낸다. 또한 고려를 뒤엎을 만한 무력을 가졌음에도, 고려를 뒤엎은 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능력이 없어 안타까운 무장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안타까움의 근간을 드라마는 전쟁터를 누비며 짐승처럼 살아온 그가 가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멈추고자 하는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만들고 싶은 덕장의 이미지로 설명해 낸다. 그렇게 하여, 백성을 생각하는 정도전과, 살생을 더 이상 피하고 싶은 이성계의 접점을 드라마는 그들이 만나기도 전에 이미 완성해 낸다. 

그리고 이제 드라마는 두 사람이 만나 혁명을 논하고, 그리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그런 과정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갈 것이다. 새로운 나라라는 불온한 담론 앞에서 인연도, 우정도, 보은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국 기로에 서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과거를 논하지만, 결국 그 생각의 끝이 닿는 곳은, 현재이다. 2014년의 국영방송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국가가 되지 않는다면 혁명조차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는 가장 불온한 서사이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2014년의 대한민국이 던진 질문이다.  


by meditator 2014. 2. 23. 10:14

2월 21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4부작 <미미>가 방영을 시작했다. '고스트 로맨스'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처럼, <미미>는 이제는 죽어 영혼이 되어 떠도는 미미와, 28살의 잘 나가는 웹툰 작가가 되었지만 불현듯 지난 기억을 잃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미미의 첫사랑 한민우의 뒤늦은 혹은 지나간 사랑이야기이다. 


드라마는 마치 청소년 관람가가 아니라, 청소년만 보라는 듯이 소녀들의 사춘기 시절 감성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그래서 조금이라도 철이 든 사람들이 오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쓰러질 듯한 순정만화식의 설정으로 도배된다. 

메모리

아파서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휴학을 밥먹듯이 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의 미용실에서 일을 도우며 학교가 그리울 때면 교복을 입고 학교에 숨어드는 비밀스런 소녀.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 홀로 남아 묘한 분위기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소년. 그런데 우연한 해프닝으로, 아니 이제는 솔직히 뻔해도 너무 뻔한 소녀의 실수로 인한 만남과, 자전거 타기 등의 도발 등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 호감을 만남으로 이어간 소년과, 소녀, 알고보니 이들에게는 서로가 공감할 만한 가족으로 인한 상처가 있었다! 소년의 상처를 위해, 소년에게는 소년을 구하다 죽어간 아버지가 등장하고, 소녀에게는 소녀에게 이름모를 병을 물려줄 병으로 고생하다 죽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따라간 아버지가 존재한다. 청춘의 고독을 씹기 위해서, 내가 어디서 데려온 자식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데려온 자식이 아닐까, 내가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부풀렸던 사춘기 시절의 그 상상력의 척도에 딱 들어맞는 설정이다. 그래서 그저 우연히 마주친 소년과 소녀는,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호감은, 그들 각자가 가진 비밀을 공유하는 만큼, 연민으로 사랑으로 발전하는데 하등의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1시간 여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위의 구구절절한(?) 설정 들을 드라마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3분 여의 짧은 뮤직 비디오에서 흔히 보았듯이, 드라마 속 그녀와 그는 그저 당연히 만나고 그리고 사랑하고, 이제 뜻하지 않게 이별까지 하며 또 다른 사연을 보탤 기세다. 그리고 설명을 하는 대신, 드라마는 그 행간을 장황한 음악으로 채워간다. 마치, the sm 발라드의 홍보용 뮤직 비디오라도 되는 것처럼, 드라마는 태연과, 종현 등의 목소리로 충만하다.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드라마의 목적이, 스토리인지, 아니면 상투적인 스토리를 뛰어넘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ost인지 질문할 수 밖에 만들도록.

뭐 비단 <미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응답하라 1997>이란 드라마를 통해 ost로 부각된 90년대 음악의 융성을 기점으로 케이블 방송 드라마들에 있어서 음악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닌 것이 되었다. 특히 m.net에서 앞서 방영되었던 <몬스타>의 경우는 드라마의 제재도 음악이었으며, 그 역시 드라마적 설정의 빈 공간을 음악으로 꽉 채웠다는 데서, <미미>와 다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아니 이제 애초에 본말이 전도된, 음악 드라마라는 형식이 m.net 드라마적 경향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음악이 그저 ost에 머물고 있다는 자조도, m.net 드라마의 경우가 되면, 그 경우가 역전이 되는 것이다. 

미라클

주인공의 대사보다도 많은 음악, 구체적이고 개연성있는 상황 설정보다도 아름다운 배경과 그럴듯한 분위기와 거기에 깔리는 드라마의 설정보다도 더 그럴 듯한 음악으로 대신되는 드라마의 내용을 이른바 '스타일리쉬한' 특징이란듯 내걸고 있다. 마치 중년 이후의 세대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들이, '막장'이란 요소를 세대적 흥행의 주된 코드로 장착하듯이, 청소년 세대, 그 중에서도 특히 여린 감성의 소녀 세대를 농단하기 위해서는, 분위기있는 그럴듯한 음악과 순정만화 스타일의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또 하나의 공식 같이 m.net 드라마의 특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결코 '막장'을 좋은 드라마라고 하지 않듯, 죽음을 농락하는 극단적 낭만주의에 호소하는 <미미>식의 설정이 결코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화뇌동하기 쉬운 여린 소녀 감성일 수록, 그 감성을 자극만 하지 않을 더 섬세한 개연성과 논리가 심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저 그들이 보면 설레일 모든 설정이 모아놓은 드라마는 지극히 청소년들을 구매 대상으로만 삼은 얕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심지어 19금에도 불구하고, 이젠 <마녀 사냥>을 현실적이라며 즐겨보는 청소년들이 과연 <미미>식의 감성에 호응을 할지조차 의문이다. 

<미미>는 두 주인공 최강 창민과 문가영이 각가 sm과 sm의 방계 회사 smc&c이며, 드라마에서 주구장창 흐르던 ost 역시 sm 소속 태연과 종현의 음악이듯이, made by sm의 드라마이다. yg의 아이돌 양성 과정을 <위너tv>란 프로그램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황에서 굳이 드라마가 made by sm을 걸고 넘어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주된 시청층인 채널이 거대 기획사들의 홍보의 장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이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케이블임에도 공중의 전파를 활용하는 매체로서의, 그리고 결국은 청소년 문화를 끌고가는  m.net의 책임감이란  문제를 한번쯤은 되짚어 볼 지점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2. 22. 10:41

독한 혀들의 전쟁 하이퀄리티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썰전>이 1주년을 맞이했다. 그에 따라 <썰전>은 프로그램의 특색을 살려 1주년을 기념하는 갖가지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앙케이트 조사로 돌아본 <썰전>
1부 <썰전>과, 2부 <예능 심판자> 모두 프로그램과 관련된 앙케이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1부 <썰전>에서는 <썰전>과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는 기자 들의 평가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간 1년 간의 활동을 통해 여, 야의 두 성향을 대표하는 이철희, 강용석 두 사람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개인적 구설수에 시달렸던 강용석의 경우, '이미지 세탁'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그간 그가 보여준 성실한 태도와 명확한 입장으로 인해 '또라이'는 아니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반면, 이철희 소장의 경우는 그 개인보다는, 그가 대변하는 입장을 통해, 그의 야성이 괴팍하거나 편협하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얻어냈다. 그저 패널 두 사람에 대한 평가이지만, 보수적 세력에 대한 인간적이라는 평가나, 야권 성향의 인물에게 알고보니 '객관적'이라는 평가는 묘하게도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알고보니 '인간적'이라는 보수와, 알고보니 '객관적'이라는 진보는 얼마나 서로 상대 진영에 대해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증명하는 언어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편견과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성공적인 이미지 세탁'이라는 효과를 얻은 인간적인 보수 강용석이지만, 그의 성실하고 순박한 인간성이 곧 그의 정치적 식견의 성실함(?) 혹은 정치적 야망으로의 성실함(?)으로 드러날 때의 위험성은 잔존한다. 그가 매회 준비한 엄청난 양의 자료에 의해 윤색되는 그의 논리는 또 다른 함정일 수 있다. 이철희 소장의 프로그램만 하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인 강용석의 발톱은 늘 실전을 위해 날세워져 있고 <썰전>은 그런 그를 위한 도구로 소용될 가능성 잔존한다. 
또한 '객관적'인 이철희 소장의 진보가 진보적 스펙트럼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불명확하다. 최근 안철수의 신당 움직임처럼, 이제 더 이상 아니 원래부터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진보 세력 내에서, '민주당'과 '안철수'에 대해 부정적인 이철희 소장이 포지션이 객관적인 것인지, 그저 이제는 현장에서 멀어진 노회한 평론가적인 것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애매모호하다. 

그러기에, 1년을 맞이한 <썰전>의 미묘한 무딤은, 점점 더 평론가적이 되어가는 이철희 소장과 현실에의 발톱을 숨기지 않지만 인간적인 강욕석의 조화에서 오는, 균형의 무너짐에 기인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링 안에서의 실전을 준비하는 여와, 링 밖에서 훈수를 둔 야의 대전은 가끔은 날이 곤두서지만, 어쩐지 한 김 빠져 보이는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jtbc뉴스9>이 가지는 현장성도, 이제는 그 래디컬함도 한 김 빠져버린 훈수두기에 
빠져가는 <썰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사진; osen)

패널을 평가하는 또 다른 패널
<예능 심판자>의 경우, 앙케이트 조사에 덧붙여, 동업자들인 비평지[ize]의 편집장 강용석, 전 [씨네21]기자 김도훈, 한겨레 tv의 이승한, 개그맨 조세호, 배우 여민정들을 패널들과 <예능 심판자>에 대한 평가를 덧붙였다.

예능이라는 특성을 잃지 않으려는 애교(?)로 보여지는 여민정과 조세호의 등장은 뜬금없었지만, 각계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온 <예능심판자>에 대한 평가는 이 프로그램이 처한 상황을 가감없이 드러내 주었다. 바쁜 스케줄에 밀려 더 이상 공부하지 않으면서 특색을 잃고 고루해지는 김구라와, 동료 연예인들의 뒷담화 외에는 아직 그 자리에 걸맞는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채 눈치보기에 급급한 김희철, 미디어 평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코미디를 하고 있는 이윤석 등에 대한 평가가 적나라하게 이어졌다. 

무엇보다 <예능 심판자>의 딜레마는 최고 시청률의 1분, 혹은 최저 시청률의 1분에서 보여진다. 배우들의 연예담과 부업 등에 쏠린 대중의 관심은, 대중들이 이 프로그램에 거는 기대가 아니라, 여전히 대중들이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져야 할 것이다. 즉,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계 각층의 입담가들에 의한 미디어 평론을 지향한다 하지만, 보는 시청자들은 그저 또 하나의, 혹은 좀 색다른  연예 정보 프로그램처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1부가 <썰전>이라는 색깔에 안착한 반면, 제목이 무색하게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예능 심판자>의 현실인 것이다. 더우기 패널들도 지적하듯, 김희철의 합류 이후, 눈에 띄게 방향을 잃고 정보에 대한 코멘트 정도에 그치거나, 노골적인 특정 소속사 사람들 띄우기나,  뒷담화에 귀기울이는 프로그램은 미디어 평론이란 미명이 무색해 질 정도이다. 그러기에, 최고의 1분 혹은 최저의 1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앞으로의 <예능 심판자>는 더더욱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패널 중 한 사람이 옹호한다. <썰전>의 무뎌짐은 무뎌짐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익숙함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런 평가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함을 핑계 대거나 익숙함의 피로를 논하기에 앞서, 익숙함의 성질이 미더움인가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찾아보게 되는 것은, 그 익숙함의 밑바탕에 미더움이라는 신뢰가 쌓여있기 때문이지만, 익숙함이 외면으로 바뀌어지고 있음은, 미더움을 쌓기도 전에, 나른해지고 있는 자신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돌잡이가 마이크를 굳이 잡지 않았더라도, 앙케이트 조사에서 시청자들이 <썰전>의 초심을 소원한 것처럼, 1주년에 초심을 기대하는 처지가 된 것에 <썰전>은 진지한 방점을 찍을 때라고 보여진다. 



by meditator 2014. 2. 21. 10:08

언제나 그렇듯 국가적 행사인 올림픽을 향해 각 방송사들이 전력질주한다. 심지어 이제는 중계조차 각 방송사 별 특색을 갖춰, 중계 방송 간의 경쟁 조차도 나날이 치열해 진다. mbc가 스타mc 김성주의 화려한 입담에 의존한다면, sbs는 신예 배성재 아나운서의 차분한 진행과, 거기에 덧붙인 전문가의 노련한 해석의 조화로 mbc의 중계와 쌍벽을 이루어 나가는 가운데, kbs는 강호동이라는 또 다른 스타의 해설 합류로 화제성을 이끌어오고자 했다. 이렇게 각 방송사 별로 중계를 둘러싼 경쟁이 예년과 다르게 좀 더 치열해 지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전통을 유지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경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돌아오면 떠오르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이경규가 간다>이다. 2002년 올림픽을 필두로 언제나 우리 나라의 국가적 운동 경기에는 그가 있었다. 이경규가 mbc에서 <일요일일요일 밤에>를 하건, kbs에서 <남자의 자격>을 하건, 심지어 sbs로 옮겨와 <힐링 캠프>를 해도, 언제나 <이경규가 간다>는 그 제목의 고유성을 살려내며 이경규를 따라 다녔다. 그리고 이제, 2014년의 소치 올림픽, <이경규가 간다>를 찾아볼 수는 없다. 대신, 올림픽 기간 동안 17일, 19일 양일 간에 걸쳐 <힐링 캠프> 소치 특집 편이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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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 다르게 <이경규가 간다> 대신에 <힐링 캠프> 소치 특집이 방영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지난 번 <힐링 캠프> 런던 올림픽 특집이었던 '런던 캠프' 특집에 대한 반성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맞아 <이경규가 간다>라는 전통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경규는 <힐링 캠프>라는 특성을 배제하고 런던 올림픽 특집 런던 캠프라는 특집의 미명 하에, 런던 판 <이경규가 간다>를 강행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경규, 한혜진, 김제동 세 사람의 응원 방식에 호불호가 갈렸으며, <힐링 캠프>란 프로그램의 성격 특성상, <이경규가 간다>라는 방식의 부조화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처음 <이경규가 간다>를 했을 때만 해도, 예능 프로그램이 국가적 체육 행사에 앞장서 응원을 한다는 방식이 신선한 포맷이었지만, 이제는 너도 나도 서로 못가서 난리인 상황에서 <이경규가 간다>라는 포맷이 전통성은 있을지언정, 차별성을 누리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딜레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던 <힐링 캠프> 런던 캠프는 결국 <이경규가 간다>의 한계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결과만을 낳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맞이해, 이경규와 <힐링 캠프>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방식을 포기하고 대신 <힐링 캠프>의 특성을 보다 고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소치 올림픽 판 <힐링 캠프>가 그 결과다. 이제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현지 응원 방식 대신에 발빠르게 금메달리스트 이상화와,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지만 6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운 이규혁 선수를 섭외한 <힐링 캠프> 소치 특집은 <힐링 캠프>다운, 그러면서도, 여전히 국가적 행사의 현장을 지키는 <이경규가 간다>의 전통을 지킨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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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발빠르게 섭외한 이상화 선수와 이규혁 선수와의 시간이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는가는 평가의 여지를 남긴다. 늘 그래왔듯 게스트의 역량에 따라 프로그램의 질이 리듬을 타는 <힐링 캠프>답게, 특히나 스포츠 스타들을 데리고는 상투성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전례처럼, 이상화 선수나, 이규혁 선수의 특집이 특별히 별다르지는 않았다. 그들의 고된 시간을 진솔하게 드러낸 시간은 좋았지만, 뻔해도 너무 뻔한 성유리를 제물로 삼은 러브 라인에 치중한 토크, 거기에 본인이 말해놓고도 무안할 지경의 이경규의 상투적 마무리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저 보도와 응원에 그쳤던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차분하게 올림픽의 상반된 캐릭터의 영웅을 발빠르게 이야기의 장으로 끌어온 것만으로도 <힐링 캠프> 소치 특집은 의미가 있다. 금메달리스트의 영광만큼, 6회를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메달인 이규혁 선수의 출연과 그의 소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 캠프>다운 특성을 십분 살려낸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경규의 소치 버전 <이경규가 간다>는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의 전통을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지난 해 sbs연예 대상에서 후배 들과 겨루어 상을 받는 현역으로 여전한 이경규의 저력이 보여지는 지점이다. 또한 이경규의 이런 면은, 또 한 사람, 그의 후배로 여겨지면서, 소치에서 해설자로서 모습을 보였던 강호동과 대비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 예체능>을 진행하는 강호동은 <우리 동네 예체능>의 프로그램적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프로그램 해설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거둔 일련의 성과과 상관없이 과연 이번 올림픽에서 그의 선택이 어울렸는가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가리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우리동네 예체능>이란 프로그램의 성격을 해설자 강호동이 제대로 살려냈는가에는 의문의 방점이 찍히는 상황이다. 자신이 이끄는 프로그램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그렇다고 이경규처럼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전통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해설자로서의 등장은 <달빛 프린스>의 강호동처럼, 나도 이런 걸 할 수 있다. 혹은 그저 올림픽이니 나도 한 자리 끼어보자 라는 강호동 자신의 욕심만이 앞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런던 올림픽의 단점을 극복한 이경규의 선택에 한 수 아래다. 50을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후배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는 이경규와, 짧은 자중과 숙고 뒤에 오래도록 자신의 페이스를 찾지 못하는 강호동의 차별 지점이기도 하다. 소치 올림픽의 이경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장을 지키던 자신의 전통을 지키면서, 자신이 하는 프로그램의 전통도 살린 현명한 버전업의 사례다. 


by meditator 2014. 2. 20. 0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