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이동휘 역을 맡은 손현주 씨가 인터뷰에서 당부했었다. 4회까지 봐달라고. 

손현주라는 배우가 결코 식언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드라마 <쓰리데이즈>는 4회에 이르러 증명한다. 4회에 이르러 이 드라마는 그간 3회 까지 진행되어진 이야기들이, 그저 본 게임에 앞선 에필로그였음을, 진짜 이야기는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장엄한 팡파레가 울려퍼지듯이 웅장하게 펼쳐보인다. 

그렇다고  <쓰리데이즈>가 3회까지 펼쳐놓은 이야기들이 결코 소박하지는 않았다. 1회 서민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시장으로 나섰던 대통령이 다짜고짜 밀가루 세례를 맞는가 싶더니,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대통령이 사라졌다. 대통령 암살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긴가 싶더니, 불현듯 암살범이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시 다른 각도로 펼쳐진다. 암살 위험을 피해 도망간 것으로 여겨졌던 대통령은 음어의 비밀과 함께 피치못할 이유로 단 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청주역에서 특별 검사를 만나려 했단다. 

그리고 드디어 4회, 3회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장황하게, 때로는 번잡스럽게 진행되었던 이야기들은 응집력을 가지고 한 곳으로 모아진다. emp탄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고를 만난 대통령은 의도하던 만남을 이루지 못했고, 특별 검사는 주식 조작 과정에 개입한 대통령의 비리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발견한 탄핵감의 과오를 만천하에 밝힌다. 3회까지 몰두했던 대통령의 암살은 또 다른 거대한 음모 혹은 사건의 발화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3회 까지의 과정에서 절대악은 경호실장이었다. 사실을 밝힌 한태경에게 대뜸 총구를 들이밀은, 당당하게 자신의 거쳐였던 경호관저 2층에서 대통령을 겨누었던 그의 존재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4회에 들어, 그가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98년의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한태경의 아버지를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에게 진실을 가릴까 두렵다는 토로를 했던, 정신이 혼돈한 과정에서도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되뇌이는 대통령의 말에서, 우리가 그간 알아왔던 드라마적 진실이 시험대에 오른다. 

대통령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밝히고자 하는 사실이 진짜 진실이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폭로에 앞장선 특검의 진실은 무엇이며,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며 암살에 앞장선 경호실장의 진실은 또 어떤 것인가 의문을 남긴다. 만약 순조롭게 암살이 진행되어다면, 특검의 발표대로 모든 혐의를 뒤집어 쓴 당사자가 되어버린 대통령을 만드는 거대한 세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한 개인의 사명감에서 시작된 암살 시도가 대통령조차도 필요에 따라 제거해 버리려 하는 거대한 국가 전복 음모로 변모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국가적 음모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기에 드라마 <쓰리데이즈>가 그저 여느 블록버스터 급 장르물과 다르게 전율을 느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스포츠 한국)

하지만 <쓰리데이즈>의 매력은 단지 회를 거듭하며 스케일을 키워가는 블록버스터급 이야기의 스케일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서 놓치지 않는 고뇌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있다. 3회의 단 한 장면 등장했던 대통령이 기차 안에서 신참 경호원 한태경과 만들어 내는 훈훈한 장면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듯이, 거창한 이데올로기와, 막연한 불의가 아닌, 진실을 향해 순수하게 나아가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인간미가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힘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심어준다. 결코 자기 자신 대신 누군가를 총알받이로 만들 대통령이 아니란 비서실장의 단언처럼, 긴박했던 사건들 속에서, 오래 뇌리에 남는 것은, 유언처럼 되새기게 되는 대통령의 나직한 하지만 단호한 진실을 밝히겠다는 선언이다. <싸인>, <유령>을 이어, <쓰리데이즈>까지 이어지는 이제는 '갓은희'라 칭송받는 작가 김은희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쓰리데이즈>는 또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아버지 세대의 과오로 인해 펼쳐진 사태에 휘말려 들어간 우직한 경호관 한태경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고군분투기다.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알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누군가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사이에 던져진 아들 세대의 고뇌와 결정은, 곧,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실천적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재미는 있지만, 결국 보고 나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괴로운 드라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 4회 만에 기꺼이 <쓰리데이즈>가 요구하는 고행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드는 드라마, 그것이 이제 비로소 시작된 <쓰리데이즈>의 힘이다. 


by meditator 2014. 3. 14. 02:07

<제왕의 딸, 수백향>이 애초에 기획했던 120부에서 줄어든 108부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드라마 시작 전에 논란이 되었듯이 백제 무령왕의 공주로 추측되는 인물 수백향을 역사 속에서 건져 올려 드라마화시켰던 <제왕의 딸, 수백향>은 역사 속에 그려진 일본으로 간 공주 수백향이 아니라, 픽션으로서의 출생의 비밀을 가진 수백향의 이야기를 그려내었다. 
굳이 역사적 사실을 뒤틀어 가면서까지 왕자에 이어, 공주에 이르는 이중의 출생의 비밀을 꼬아 놓은 드라마를 만들 이유가,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 층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제왕의 딸, 수백향>은 대단원의 막을 내릴 즈음에야 그 답을 던진다. 

자신의 진짜 친딸 수백향이 설난(서현진 분)임를 알게 된 무령대왕(이재룡 분)은 하지만,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것도 잠시 병으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이른다.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자신에게 왕좌를 내주어야 했던 동성왕의 영전 앞에 이르른 무령왕은 백제를 평화롭고 풍성하게 만든 자신의 치세를 칭송하는 신하 내숙(정성모 분)에게 되묻는다. 진짜 자신이 백제의 주인이 맞냐고? 
그러면서 오히려 무령대왕은 진짜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내숙 당신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자신을 앞에 내세우고, 그 뒤에서 온갖 협잡을 마다하지 않으며 백제를 흔들리지 않도록 애쓴 당신이야말로 진짜 백제의 주인이 아니겠냐고. 내숙 당신은 아마도 필요했다면 나 조차도 충분히 이용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사진; tv리포트)

무령 대왕의 그 말은 내숙이 진짜 주인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포기한 채 백제의 군주로 살아야 했던 그의 회한을 내비친 말이다.  무령 대왕은 덧붙인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다음 생에 군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리고 군주의 길을 잘 해내면, 다음 생엔 그 복으로 필부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절대 권력 군주를 <제왕의 딸, 수백향>은 대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불쌍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공주가 되려던 설희의 음모와, 그런 설희의 음모에 맞서서 자신의 길을 지키려 했던 굳굳한 소녀 설난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이 드라마의 처음과 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대왕의 역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왕좌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자신과 정적이 되고 만 집안의 딸인 채화(명세빈 분)를 잃어야만 했던 남자, 백제 왕족 사이의 정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아버지, 왕가의 혈통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동성대왕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며 그를 왕재로 길러내기 위해 애썼던 군주, 그런 무령 대왕을 그리기 위해 <제왕의 딸, 수백향>은 역사 속 수백향을 윤색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원수라 칭해지는, 사랑했던 딸을 겨우 만났지만 그 아이를 다시 떠나보내야만 하는, 원수의 자식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무령 대왕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 회한이 깊어보인다. 

그의 의붓 아들 명농의 길도 다르지 않다. 설난은 그가 무령 대왕의 친 아들이 아니라 더 이상 태자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무령 대왕에 의해, 철저하게 왕재로 길러진, 그래서 한시도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의 마음가짐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를 지레 포기하고 만다. 무령 대왕이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마음으로부터 존경해왔던 무령대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태자로 키워진 명농의 길 역시 무령대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설난을 마음에서 지우지 않지만 왕좌의 주인인 그는 백제가 우선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대한 반문이다. 권력과 권위의 향배는 늘 개인이나, 그가 선호하는 집단의 이해 관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제왕이 딸, 수백향>은 자신을 포기하고 고행의 길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진짜 군주, 지도자의 길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일 드라마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지난하게 출생의 비밀을 둘러싼 이합 집산으로 세월을 보냈던 <제왕의 딸, 수백향>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3. 14. 00:57

장르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처럼 행복한 시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르극이라고 한다면 미드(미국 드라마)나 일드(일본 드라마)를 다운받아보거나, 그게 아니라면 케이블을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일 터인데, 요즘은 당당하게 월화수목 장르극을 공중파에서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3월 들어 새로이 시작한 sbs의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보통 한 방송사에서, 그것도 월화 수목 드라마를 연달아 장르물을 편성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감하게 sbs는 <신의 선물>에 이어, <쓰리데이즈>를 편성했다. 두 드라마는 비록 아직 시청률 면에서는 발군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지만, 젊은 시청자 층을 중심으로 웰메이드라는 이른 평가를 받으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선전 중이다. 


하지만 같은 장르물이라고 해도 두 드라마의 궤적은 다르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 두 드라마의 장르물로서 따로 또 같은 묘미를 찾아보자.



1. 사건의 단초- 내 피붙이의 죽음을 파헤치는 주인공들
<신의 선물>에서 수현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샛별이가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쓰리데이즈>의 경호관 한태경의 아버지는 정체을 알 수 없는 트럭에 쫓기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두 주인공들은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들로, 자신들의 피붙이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두 드라마의 방식은 다르다.

<신의 선물>의 엄마 수현은 자신이 세심하게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딸이 죽은 강가에 몸을 던지지만, 그건 엄마에게 딸이 죽음에 이르른 2주 전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 슬립'의 계기가 된다. 엄마 수현은 딸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딸이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 <쓰리데이즈>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이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3일 간의 사건을 그려낸다.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 사건이 일어나고 3일, 그리고 그 후의 3일 까지의 3일 단위의 날짜들이 전쟁의 서막, 결전, 심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긴박하게 전개된다. 

딸을 잃을 지도 모를 엄마의 절박함, 순식간에 아버지를 잃은 경호관의 슬픔이, 장르극이라는 특정 분야를 넘어, 보편적 감성으로서의 공감을 호소하며 시청자들을 유인한다. 

2. 사건의 확산- 피붙이의 죽음을 넘어선 미궁 속으로 
하지만 내 혈육의 죽음을 파헤치고자 시작한 두 주인공들의 행보는 개인적 해원을 넘어 더 큰 범죄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로 돌아 온 수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일어날 일을 이야기해 보지만 마이동풍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엄마 수현이 선택한 방법은 샛별이을 데리고 도망치는 일이다. 하지만, 샛별이와의 도망도, 엄마가 버린 아이의 물건이 돌아오듯 결국 다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결국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범인이 샛별이를 제물로 삼기 전에 앞장서 연쇄 살인범을 잡는 것이다. 

<쓰리데이즈>의 한태경은 아버지의 죽음이 경찰의 조사대로 그저 졸음 운전에 의한 우연한 교통 사고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발견한 흐트러진 집, 방금 누군가 빼내 간 듯한 기밀 문서, 그리고 자신의 집을 다녀간 대령의 죽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대령이 바로 시장에서 대통령에게 밀가루를 던지라 지시했던 인물로 밝혀지며,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하게 되고, 죽어가던 대령이 암시한 대통령의 암살 음모에 끼어들게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암살 음모를 밝히려 뛰어든 태경은 암살자의 신분을 알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암살 음모의 조력자로 쫒기는 처지에 까지 놓이게 된다. 

딸이 죽기 까지 2주라는 시간에 쫓기는 엄마,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쫓기는 경호관, 두 주인공들이 시간과, 사람 들에 쫓기면 쫓길 수록 장르극으로서의 두 드라마의 재미는 배가된다. 


3. 장르극의 묘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가는 사건들
두 시간 짜리 영화라면 몰라도 16부작 정도의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장르극으로 끌고 간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그래서 케이블 등에서 방영되는 장르극 들은 대부분 전체적인 긴 호흡의 중심이 되는 줄거리에, 각 회차 별 해결이 되는 짤막한 사건들을 얹어서 감으로써, 그 문제점을 해결한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그런 장르극의 호흡에서 오는 문제점을 각각 자신만의 드라마적 묘미를 통해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신의 선물>에서 엄마 수현은 적극적으로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에 개입한 결과 범인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추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범인의 손을 맞잡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4회 마지막 엄마 수현은 그가 죽어야 자신의 딸이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의 손을 놓는다. 그렇다면, 이미 4회를 통해 엄마가 그토록 애닳아 하던 사건이 해결되는 것일까? 하지만 4회에 이르러 오히려 드라마는 복잡해 진다. 엄마 수현이 개입한 사건들에게 제 아무리 엄마가 애를 써도 결국 피해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결국 어쩌면 샛별이의 죽음도 막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불길한 복선이 드리우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임 슬립 하기 전 굴뚝같이 믿었던 범인이 사실은 범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오히려 엄마 수현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샛별이의 납치 사건은 그 이전에 알려진 사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전혀 다른 얼굴이 비춰지기 시작하며 드라마는 다른 궤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쓰리데이즈>는 전체적으로 한태경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통령의 암살 음모라는 두개의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2회 만에, 대통령의 암살범을 밝히는 배짱을 보인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꼬이고 돌아서 범인을 밝히는 것과 달리, 범인이 누군지를 밝히고, 오히려 주인공이 암살범의 조력자로 몰리며 쫓고 쫒기는 역할의 방향이 역전된다. 뿐만 아니라, 단 2회에 불과했는데도, 2회 동안 시청자들이 보았던 것을 의심하고 다시 돌이켜 복습하게 만드는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2회에서 시장통 밀가루 해프닝의 목적이었던 대령의 음어 쪽지 전달이, 사실은 다른 메시지였다는 것을 3회에 드러냄으로써 드라마는 또 다른 행선지를 밝힌다. 대통령은 사라지고 없는데, 대통령이 나타날 지도 모를 청주역에 암살범과, 경호관들과, 그리고 한태경이 모이는 기막힌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춰진다. 하지만, 겨우 몇 회지만 시청자들은 안다. 이것이 또 다른 퍼즐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렇게 한 회, 한 회 친절하게도 공개되는 퍼즐들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쓰리데이즈>의 충실한 '닥본' 시청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4. 장르극의 재미 그 이상의 주제 의식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가 대단한 것은 우리나라 공중파 드라마에서 보기 드물게 장르극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것만이 아니다. 

1회에서 양심적 변호사로 나오는 아버지와 그 못지 않게 의협심이 강한 어머니로 등장한 주인공 부부의 이율배잔적인 삶의 행태와, 대통령의 사형제도를 내세운 강성 정치적 공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드라마가 그저 엄마가 살해된 딸의 죽음을 막는 단순한 사건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 엘리트 지식인이자, 중산층인 엄마가, 딸의 사건을 파헤지면서 조우하게 된 진실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신의 선물>의 잠재력이다. 

<쓰리데이즈>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경호실장은 그것을 밝힌 경호관에게 선언한다. 대통령은 지켜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나라의 수반의 존재를 부정하고 들어가는, 그렇게 부정을 당하는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 몰래 자신의 임기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하려던 일은 또 무엇이었는지,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이 어디인지 그것 역시 백척간두의 그것 마냥 아득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복선은 3회 대통령 이동휘가 집어든 책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공지영의 책이 대신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킬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의 삶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는 책의 소개문이 어쩌면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는 드라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근자에 우리 나라 드라마가 해왔던 시도를 한 발 더 뛰어넘은 용기를 낸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제 의식에 있어서도 공중파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묵직한 정치 사회적, 심지어는 철학적 수준의 질문들을 던지는 좋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분명 이 드라마를 편성하는 측에서도, 이 드라마들이 그간 sbs를 끌어왔던 트렌디한 드라마들에 시청률로 버금가리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이 두 드라마는 여느 통속적 드라마들이 받는 시청률 운운의 평가만으로는 아쉽다.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면 감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게 미흡하더라도, 2014년 대한민국 드라마 사의 한 획을 그을 소중한 드라마들임에는 분명할 것이라 지레 설레발을 떨어본다. 




by meditator 2014. 3. 13. 02:12

다시 공자님의 말씀에서 시작해야겠다. 공자님은 말씀하셨다. 마흔은 불혹(不惑)이라고, 공자님이 말씀하신 불혹의 마흔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는 나이이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아 세상 일에 이치를 터득한 나이, 그래서 더 이상 흔들릴 필요가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중년들 사이에 우스개 소리로 요즘의 나이는 예전 세대의 나이에서 한 십 여년은 빼야 현실감이 있다는 말처럼, 이제 우리 시대의 마흔은 더 이상 세상 이치에 흔들리지 않는 중후한 나이가 아니다. 그리고 드라마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는 바로 그런 전혀 중후하지 않은, 그래서 하염없이 세상에 흔들리고 그래서 더 살아볼만한 마흔먹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11일 종영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여주인공들은 마흔 무렵의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답게 저마다의 행복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혼 후 생활고와 작가를 향한 꿈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정완(유진 분)은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드라마 작가의 꿈을 이루게 되었고, 기꺼이 그녀를 위해 결혼도 미루며 외조를 해주는 든든한 애인도 얻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가부장적인 남편 그늘에서 숨막혀 하던 지현(최정윤 분)은 잠시 첫사랑에게서 혼란을 느꼈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정을 되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셋 중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루었지만 친구 정완이 사랑하는 사람을 낚아채려 할 만큼 결혼에 맹목적이었던 선미(김유미 분)도 결혼할 사람을 찾게 되었다. 대부분 환타지로 마무리되는 우리나라 드라마답게 세 주인공은 한껏 행복에 겨워 드라마를 마무리한다. 굳이 그녀들의 환타지적 행복에 발을 걸기에는 그간 마흔에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가 너무도 분명했었다. 

(사진; 서울 경제)

결국은 어쩔 수 없는 환타지적 결말보다는, 그간 이 드라마가 과정 중에서 보여주고 노력했던 마흔 무렵의 삶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이혼도 불사했지만 아직은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작가 지망생에, 현실은 마트 아르바이트 사원인 정완, 친구들이 보기에는 부잣집에 시집 가서 치맛바람 날리며 자식들 공부 시키느라 여념이 없는 이른바 '강남 엄마'지만, 그 그늘에선 학대에 가까운 시집 살이에,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조차 숨기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했던 과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지현, 그리고 세 사람 중 가장 사회적으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자기 중심적인 스타일로 인해, 사업적으로도, 우정면에서도, 연애면에서도 자기 사람을 얻지 못한 채 나이들어 가는 선미의 삶이 그것이다. 

결혼을 해도, 혹은 이혼을 해도, 홀로 살아도, 드라마가 그려낸 마흔 무렵의 삶은 '불혹'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정'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에, 그녀들의 삶은 불완전했고, 그 불완전함을 수긍하기엔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그녀들은 젊었다. 이제는 그만하면 살만큼 살았다며 세상에서 물러나기엔 그녀들의 꿈은 여전히 팔팔하고, 사랑은 나비처럼 주변에서 팔랑거리며 그녀들을 유혹한다. 뿐만 아니라, 안정된 삶을 살기에 그녀들이 처한 조건은 너무도 불안정적이다. 사업적으로 성공한 듯 보이던 선미의 인테이러 사무실도, 안정적으로 보이던 지현의 결혼도 그 어느 것도 그들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몸소 보여준다. 

그래서 그 불안정한 흐름에 휘말린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새로이 선택하고 도전할 수 밖에 없다. 작가라는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를 결혼에 도전하고, 가혹한 시어머니와 근엄한 남편이 만든 세계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 도전이 스무 살의 도전과는 같지 않다. 이제 막 드라마 작가의 꿈이 도래해도, 첫사랑이 눈 앞에 나타나 유혹해도 그녀들을 흔들지 않는 또 다른 좌표가 있다. 결국 지현을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것, 정완이 흔들리면서도 그 중심을 잡게 만드는 그것, 그리고 결국 선미의 외로움을 보상해 주는, 그녀들의 피붙이이다. 

마흔 무렵의 그녀들은 이혼한 싱글맘으로써 딸린 혹같은 아이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젊은 날 자신처럼 원치않는 임신을 하게 된 사춘기 딸 때문에 좌절하고, 예상치도 못하게 들어선 아이때문에 혼돈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딸린 혹들을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더 아름답고 풍성한 마흔을 가꿀 수 있게 된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것이 스무살, 서른 살 무렵의 풋내기 여성들과는 다른, 마흔 무렵의 여성들이 사는 또 다른 맛이라고. 

덕분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정완은 아들과 함께,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지현은 자신이 속해야 하는 곳이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선미는 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연하남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불안정하고 혼돈스러웠던 그들은 성숙한 엄마로써 행복을 쟁취한다. 그리고 이제 진짜 불혹(不惑)의 삶을 즐기게 된다. 

이런 <우리가 사랑할 수 있으까>의 세계관은 jtbc라는 종편 방송국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 중산층의 고뇌와 로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흔들리고 헤매여도 결국은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환타지, 그것의 충실한 실현이다. 


by meditator 2014. 3. 12. 01:43

한참 인기를 끌었던 <수상한 그녀>는 칠순의 말순 할매(나문희 분)가 우연히 청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단지 영정 사진을 찍고 나왔을 뿐인데, 말순 할매는 행색은 그대로이지만 얼굴과 몸이 꽃다운 젊은 처자(심은경 분)가 되어버렸다. 할매인줄 알았떤 자신이 젊은이가 된 사실을 우연히 마주친 앞 사람의 선글라스와 차창에 비친 모습으로 알게 된 할매는 기절초풍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할매의 혼란을 그리 길게 끌지 않는다. 할매는 곧 자신의 '회춘'이 평생을 아들 하나 바라고 살았던 자신의 일편단심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 여기고 젊음을 즐길 시동을 건다. 덕분에 영화는, 혼돈도 잠시 유쾌하게 할매의 젊음 탐방기로 접어들게 된다. 


타임 슬립물에서 빠질 수 없는 클리셰라 한다면 바로 이 부분, 타임슬립을 한 주인공, 과거 자신이 살았던 시점과, 현재의 시간을 거스른 시점 사이의 혼돈을 느끼는 상황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보는 사람들 역시 주인공의 혼란과 혼돈을 공유하고,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계륵이기도 하다. 분명 꼭 짚고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긴 하지만, 그 설명이 작품의 만드는 사람들의 호들갑과 보는 사람들의 경악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 2회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샛별이가 죽은 장소로 가 자살을 시도했던 엄마 수현(이보영 분)은 아이가 죽기 2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물 속에서 빠져나온 수현은 아이가 갇혔던 장소에 아이의 흔적이 없는 것과 전화를 통해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깜짝 파티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 해 주는 가족들을 통해 자신이 사건이 나기 전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샛별이가 죽고, 자신이 죽으려 했던 사실을 악몽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수현은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타임슬립했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미래에 있을 샛별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진; tv리포트)

주변 사람들에게 2주 후에 샛별이가 납치 당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리려 하고, 그게 안되니 샛별이를 데리고 도망가려 하고, 함께 죽을 뻔했던 기동찬(조승우 분)을 만나게 되고, 그와 아웅다웅하며 결국은 과거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하는 과정은 분명 <신의 선물>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젠 어느 덧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400년을 살았다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청자들에게 구구저절 장황하게 타임슬립의 파생적 문제점을 설명하는 과정은 가급적이면 짧으면 짧을 수록 좋았다. <신의 선물>을 보는 시청자들은 엉마인 수현만큼이나 과연 누가 샛별이를 죽였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물에서 살아나왔을때, 창고에 샛별이의 흔적이 없었을 때,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흘러나왔을 때 이미 엄마 수현에게 시간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빨리 범인을 찾기 위한 기회로 돌아가길 바라는데, 드라마는 여전히 타임슬립의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답답해 진다. 

장르물의 관건은 속도이다. 여기서 속도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빠르게 진행시키는 의미에서의 속도만이 아니다. 긴박감을 줄 때는 주되, 시청자들의 사건 이해를 위해서는 풀어주는 강약 조절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선물> 3회는 필요한 건 알지만 초반의 타임 슬립의 혼돈에서 수현이 스스로 범인을 찾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시간까지의 나열식의 장황함이 마음 급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딴 짓을 하게 만든다. 

물론 3회의 <신의 선물>이 장황함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결국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엄마 수현은, 결국 자신과 같은 처지의 기동찬과 함께 범인을 찾으려 한다. 잠시 재벌의 엄청난 재산에 현혹되었던 기동찬도 자신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형의 사형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고, 그리고 잠시잠깐이었지만 샛별과의 조우를 떠올리며 수현의 수사에 합류한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다시 장르극의 긴박감이 살아나고, 해골 무늬 티셔츠를 입은 두번 째 피해자를 찾기 위한 혼돈스런 숨바꼭질을 시청자의 느슨해진 관심을 조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 빗속에서 피해자를 찾기 위해 나선 수현의 목을 범인인 듯한 사람이 조여올 때 장르극으로서의 <신의 선물>의 묘미는 극대화된다. 

장르극의 딜레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장르극에 있어, 방영 시간 내내 범인을 쫓을 수도 없고, 설명과 혼돈의 시간이 필요한데, 과연 그 배분과 깊이를 어떻게 해야 범인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운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신의 선물>은 충직하게,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 과정을 세세하게 짚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엄마 수현이 과거에서 돌아와 남편 한지훈(김태우 분)이나 첫사랑 현우진(정겨운 분)들에게 미래의 사건을 토로할 때, 그저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의 격차만이 아니라, 아내를 믿을 수 없는 남편, 그녀를 믿어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첫사랑,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하게 빚어지는 감정적 괴리감에 주목했다면 어땠을까. 사건의 용의자로써 남편, 혹은 첫사랑과의 감정적 이반이었다면, 수현이 벌인 혼돈의 시간이 타임 슬립물의 통과 의례가 아니라, 또 다른 실마리로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동찬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을 거슬러 헤매는 기동찬 대신에, 형의 사형과 재벌 회장의 돈 사이에서 고뇌하는 기동찬에 촛점을 맞추면 어땟을까. 잃어버린 아이를 향해 질주하는 엄마, 거의 모노드라마처럼 연기의 묘미를 선보이며 독주를 하는 기동찬, 그들의 폭주 사이에 쉼표가 어디가 될 것인가에 따라 드라마의 묘미는 달라질 듯하다. 

하지만 이런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물>은 유괴되어 살해된 아이를 찾는 엄마의 타임슬립물이라는 장르적 선택에서 이미 비교 우위의 드라마이다. 치정과 막장, 로맨스가 아니고서는 드라마를 논하기 힘든 우리 드라마 시장에서, 보기 드문 반가운 시도이기도 하다. 어쩌면 굳이 장황한 3회의 리뷰 조차도, <신의 선물>에 보다 많은 관심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노심초사가 빚어낸 과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크다. <신의 선물>이 마지막까지 웰메이드 드라마로 남아, 장르극의 안착에 기여하길 바라는 맘이다. 


by meditator 2014. 3. 11. 08:49

2013년 10월 <마귀-파발을 달리다>를 통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소식을 전하던 파발꾼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길어올린 바 있던 드라마 스페셜이 이번에는, 죽은 자를 위해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양반을 대신해 울어주던 노비 곡비(哭婢)를 내세운다. 


곡비 단금(황미선 분)의 딸 연심(김유정 분)은 남을 위해 평생 울며 살아야 하는 그래서 정작 자신의 피붙이가 죽었을 때는, 진짜 울어야 할 때는 눈물이 말라 붙어 나오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곡비의 삶을 거부한다. 하지만 어미 단금은 그나마 그거라도 하면 연심이 평생 밥을 굶지는 않겠다는 신념 하나로 연심에게 곡비를 강요한다. 딸린 자식 때문에 곡비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미가 싫은 연심은 울음을 파느니, 차라리 웃음을 파는 기생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비의 신분인 곡비는 기생에게조차 내처지는 미천한 신분일 뿐이다. 


하지만 거짓 울음을 울며 살고 싶지 않다는 연심의 결심은 몇 날 며칠을 기생집 청루각 앞에서 버티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행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청루각 수기생 도화(임지은 분)의 아들인 양반 서출 윤수(서준영 분)와 조우하게 된다. 

<드라마 스페셜-곡비>의 얼개는 명징하다. 조선 시대 양반 중심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뜻이나 의지는 상관없이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가 규정하는 존재로만 살아야 하는, 그래서 그런 존재로 인해 슬픔이 배태된 존재들을 조우시킨다. 울고 싶지 않지만 울어야 사는 곡비, 웃고 싶지 않지만 웃어야 사는 기생, 그리고 양반이라지만 어미를 기생으로 두는 바람에 그 누구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 서출들이 <곡비> 를 통해 얽혀들게 된다. 

차라리 웃음을 팔겠다는 연심은 수기생 도화와 윤수의 악연을 알게 되며 웃음을 팔고 살아야 하는 기생의 고달픈 삶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았던 그녀는 아파서 곡비를 할 수 없는 어미 때문에 윤수의 집으로 끌려와 곡비를 강요당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죽은 형 대신에 이제는 상주로 나설 수 있는 윤수와 마주치게 되고.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게 되었다며 곡비를 부탁하는 윤수에게 연심은 당신이 바라던 것이 겨우 양반이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결국 연심은 윤수 형의 영전 앞에서 울음을 토한다. 자신처럼 곡비가 되고 싶었다던 하지만 뱃속의 자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곡비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던 어미의 사연을 듣고,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울음을 토한다.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 양반들 대신에 울음을 울어주야 하는 노비 곡비의 삶을 거부하는 연심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의 족쇄가 강요되는 조선 사회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자아를 내세운 근대적 인간상이다. 더구나, 서출인 윤수에게 당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이냐라며 다그치고, 울음을 강요하는 문중의 양반들을 호통치며 자기 직업의 진정한 면모를 강조하며 토해내는 연심의 울음은 더더구나 '모던(modern)하다. 과연 역사적 현실로써 그 시대에 노비가 자신의 주어진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 '도망'이나, '죽음'이 아니고서는 가능한가를 질문해야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양반들 앞에서 죽은 자식을 위해 진정한 울음조차 내지 못하는 위선을 호통치는 연심의 장면은 상상력을 넘어선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에 되살려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신분적 억압에 자신을 다해 저항하는 연심의 그 모습은 감동이 된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노비의 모습은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찾아헤매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자기 계발서와도 같다. 그런 모던한 의식의 연장 선상에서 <곡비>의 감동은 전해져 온다.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위태로운 경계에 선 사극 <곡비>를 살려낸 것은 후반부에 들어선 배우들의 연기이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랴~' 라며 난봉가를 그 어떤 노래보다 구슬프게 불러대는 아직 소녀같은 하지만 그래서 그 누구보다 처연해 보이는 김유정의 연기는 울기 싫어 차라리 웃음을 팔겠다는 연심이 그 자체였다. 언제나 사극에서 그 발군의 매력이 돋보이는 서준영의 서출 연기도 안정적이었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기생 어미 임지은의 연기는 몇 장면에 지나지 않았어도 존재감이 두드러졌고, 곡비 어미 황미선의 연기는 처연했다. 

하지만 2014년에 들어서 새롭게 선보이는 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시리즈는 어딘가 어설프다. <곡비>의 초반 연심이 된 김유정은 극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사극에서 안정적이던 서준영의 감정은 어색했다. 중반 이후 그들의 연기가 같은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불협화음들은 비단 <곡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토리가 상투적이거나, 맺음새가 어색하거나, 어딘가 한 가지 이상의 단점들을 몇 회 동안의 드라마 스페셜이 노정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것이 배태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제 몇 년 동안 반복된 드라마 스페셜의 인력과 소재의 고갈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7000 여 만원 정도에 불과한 제작비 때문인지, 만족도가 크지 않다. 물론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드라마 스페셜이 습작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요일 밤과 월요일의 경계에 선 시간까지 드라마 스페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습작을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애써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만 더 신선하고, 완결성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3. 10. 08:47

다시 한번 특집으로 꾸려졌던 여성 멤버 들의 화학제품 없이 일주일 살기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단 두 번의 특집 방송으로 여성 멤버들은 당당하게 <인간의 조건> 정식 멤버로 입성하게 되었다. 주어진 일주일이란 시간을 버티던 그녀들의 고군분투, 그리고 4주차에 걸친 방송을 통해 김숙, 김신영, 김지민, 박은영, 박지선, 박소영 여섯 여성 멤버들은 열성적으로 자신들이 <인간의 조건>을 이끌어 갈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보였다.


'화학 제품 없이 살기'란 미션을 받아든 멤버들이 보인 과정은 마치 암선고를 받은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기 까지의 과정과도 같았다. 화학 제품이라는 미션을 막연하게 받아들였다가, 그게 알고보니, 여성이며, 연예인인 자신들에게 있어, 그간 해오던 모든 겉치례를 벗어던져야 하는 혁명적인 미션이라는 것을 알고 이른바 '집단 멘붕'에 빠지고, 자학과 자기 부정을 거쳐 미션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기 까지의 과정은, 연예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 사회에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 '허울'을 필요로 하는 과정인가, 그래서 여성으로서 그 미션이 얼마나 버거운 과정인가를 여섯의 여성 멤버들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름다움에 앞서 여성 방송인으로서 시청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김지민의 모습은 우리 사회 여성의 딜레마를 가감없이 드러낸 모습이었다. 당장 3월 8일에 이어진 남성 멤버들의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아가기' 미션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에서 샴푸나, 수분 크림등이 날아가고, 최소한의 로션 만이 살아남고, 오히려 안경이나 담배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과정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살아가는 틀의 차이가 고스란히 보여지는 것이다. 


우먼 특집 인간의 조건 - 화학제품 없이 살기

하지만 미션을 수긍한 여섯 멤버들은 언제 '멘붕'이 왔냐는 듯이 적극적으로 화학제품 없는 삶에 도전한다. 집에서 가져 온 천연 비누가 있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화학 제품 없이 사는 삶에 도전한다. 심지어 생방송을 진행해야 하는 아나운서 박은영이 사상 최초로 멤버들이 급조한 숯으로 그린 눈썹과, 꽃물로 들인 입술 등으로 면피한 채 민낯에 가까운 모습으로 거침없이 내보이기도 한다. 
무공해, 천연 제품의 사용이 사회 일각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만큼 찾아보면 '한살림', '생협' 그게 아니라도 그걸 주대상으로 하는 업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섯 여성 멤버들은 그런 완제품을 찾아 쓰는 대신, 마치 만능 칼 하나로 모든 것을 만들어 쓰던 '맥가이버'처럼 그 자신들이 직접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주방 세제에서 부터, 샴푸,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만들어 쓰는데 앞장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여성 멤버들을 정규 편성으로 밀어준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간 남성 멤버들만의 방송이 지속될 때 <인간의 조건>의 시청률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을 고심하기도 하고, 안타까워도 했지만 그것이 어떤 지점에서 문제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언제나 미션이 주어지면 남성 멤버들도 열심히 그 미션을 수행해 냈었으니까. 하지만, 여성 멤버들의 일주일이 진행되면서, 그 차이점이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남성 멤버들은 미션이 주어지면, 어느새 자신을 엄습해 오는 그 미션의 불편함을 방어하는 수준에서의 미션을 수행하는 수동적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내 온도를 몇 도에 맞추면, 거기에 맞추어서 견디고, 버티는 그 정도랄까. 대신 그런 버티는 과정에서의 한데 어울려 사는 남자들의 공동체적 삶이 방송의 주된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다 보니, 그런 사람냄새나는 삶의 모습도 익숙하다 못해 지루해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짬만 나면 거실 소파에서 자는 김준현이 푸근했고, 밥을 하는 정태호가 친숙했고, 아웅다웅거리는 김준호와 박성호가 흐뭇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저 늘 그런 모습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뻔함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성 멤버들에겐 그 자신의 동력 외에 외부 게스트가 에너지로 충원되어야 하는 상황까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새로운 조합을 맞춘 여성 멤버들은 그 조합의 신선함만큼, 미션에 대해 도전하는 의욕이 남다르다. 여성들로써는 버거운 미션에 당혹스러워도 하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남성 멤버들의 그것과 비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늘 화장을 해야 하는 그녀들이 소금을 이를 닦고 민낯을 드러내야 하는 그 자체도 볼 거리가 되었지만, 그 볼거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칫솔에서 부터, 샴푸, 비누 등 기초적인 세정 용품에서 부터, 립그로스, 천연 분을 넘어, 향초 등 생활 용품에 이르기 까지의 시도가 볼만했다. 

(사진; tv리포트)

뿐만 아니라, 방송의 꽃인 아나운서가 목욕 가운을 입는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낸 시도에서 부터, 천연 제품을 고수하기 위해 방송 내내 자신이 데뷔 때  했던 개그 꼭지의 한복 의상이나, 짚 머리띠에서 버선에 짚신 까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한복을 고수했던 박은영, 김신영, 박지선의 철저함은 그녀들의 실천에 신뢰를 보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회, 수가 놓인 아얌에, 가죽 당의를 신고, 천연 염색으로 고운 빛을 낸한복을 입고 완벽하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천연 제품을 실천한 김숙은 그저 과제의 실천 그 이상의 성과를 보여준다. 그저 이 정도면 화학 제품 없이 살기가 되겠지가 아니라, 매회, 매 순간 그저 화학 제품 없이 살기가 아니라, 그것의 대안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만한 그 무엇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물론 남성 멤버들의 수동적 태도와, 그에 반해 적극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단지 타성에 젖은 것과 새로운 멤버들의 적극성으로만 구분할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적당히 '갑'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남성적 삶과, 사회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유리 지붕을 뚫고 살아가는데 익숙한 '을'의 여성들의 습성이 자연스레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이든, 이제 정규 편성된 여성 멤버들의 <인간의 조건>은 정체된 프로그램에 활력을 줄 것이며, 시청자들에게 또 다른 생각할 꺼리와 볼 거리를 줄 것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의 바람이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9. 11:32

봄을 앞두고 각 방송사 별로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의 개편 소식이 들린다. 

유재석, 강호동 등 이른바 예능의 전성기를 이르던 두 예능 거두의 새로운 프로그램 발진이 시도되는가 하면, 이제는 그들 못지 않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신동엽과 김구라의 새 프로그램도 준비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봄 개편 예능의 대체적인 추세는 그간 인기를 끌던 리얼 버라이어티 대신 스튜디오 토크쇼라는 점이다. 물론 신동엽이 윤종신과 함께 하는 새 파일럿 예능 <미스터 피터팬>의 경우는 야외 버라이어티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 작품을 제외하고, 강호동의 <별바라기>, 유재석의 <나는 남자다>, 그리고 김구라의 <진격의 역지사지- 대변인들> 모두 스튜디오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토크쇼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리얼 버라이어티의 한 장을 과감하게 닫고 스튜디오 토크쇼가 대두하게 된 배경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장기간 독주와 범람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야외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해외로, 정글로, 시골로, 심지어는 군대로까지 그 공간적 범위를 확대하고, 연령별로는 청년을 넘어 할배, 할미에서, 어린이, 이제는 아기까지 가리지 않고 예능의 대상이 된 상황이 포화점을 지나지고 있다는 지적은 굳이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제 아무리 포화 상태라 하더라도 검증되지 않은 것을 하느니 보다, 낯뜨겁더라도 기존의 있는 것들을 조금씩 바꿔서 연명하는 것을 선택하던 예능 트렌드가 결정적으로 변화되는 변곡점은 무엇이었을까?

가수 김그림이 JTBC 마녀사냥에 깜짝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 JTBC 방송 화면 캡처
(사진; 스포츠 서울)

그것은 외람되게도 공중파가 아닌 종편 jtbc의 예능 <마녀 사냥>의 성공이 아닐까 싶다. 
평균 시청률 2.627% 를 가지고 이 프로그램의 성공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 맞다. 하지만, 그 저렴한 시청률로는 설명하지 못할 이 시대의 트렌드로써 <마녀 사냥>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견을 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평균 시청률 2.627 %가 의미하는 바는 역설적이기도 하다. 광범위한 연령 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시청률 표에서는 결코 집계 할 수 없는, 시청률 집계표가 놓여있는 텔레비젼이 놓인 거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마녀 사냥>의 초록색 기운을 공중파의 개그 프로에서 차용해 써도 이물감이 없어지는 tv 시청 양식의 변화를 <마녀 사냥>은 스스로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녀 사냥>은 마치 '금성에서 온 남자, 화성에서 온 여자'의 텔레비젼 판이라도 되는 양, 연애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프로그램의 소재로 한다. 당당하게 19금을 내건 이 프로그램은 그간 공중파의 토크쇼에서는 결코 다루지 않았던 성에 대한 담론은 스스럼없이 내세우면서, 현실적인 젊은이들의 성과 사랑을 토크쇼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결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음성적으로나마 엿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공론화 되면서, 그 또래의 젊은이들의 연애 코치로 당당하게 등극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그 시간에 그 자리를 지켜서 봐야할 의미을 잃어가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이 간절히 원하는 동시대 젊은 층의 지지를 획득한 <마녀 사냥>의 성취를 당연히 새롭게 개편을 하는 프로그램들이 놓칠 리가 없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4월 9일 부터 선보일 유재석의 <나는 남자다>는 철저히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표방한다. 공중파임에도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네세우는 방식에서 부터 케이블의 방식, 혹은 <마녀 사냥>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남자'를 내세우는 방식은 결국 그 이면에 그들의 이야기 대상이 대부분 여자가 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감으로써 결국 여자를 마녀로 규정하고 시작했던 <마녀 사냥>과 다르지 않은 출발점을 가진다. 물론 유재석의 이 프로그램을 오로지 <마녀 사냥>의 답습으로 보기는 힘들다. 8년 여 만에 폐지되었던 <놀러와>의 마지막 시도 중 하나가, 유재석과 남자 패널들이 여성 게스트를 불러다 놓고, 연애에 있어 남성적 시각과 여성적 시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조율했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시도는 <놀러와>의 호흡기를 뗀 결정적 시도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묻혔던 아이템을 용감하게 다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데는 그런 그들만의 이야기가 손질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마녀 사냥>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남자들만의 이야기를 내세운 것은 유재석만이 아니다. 신동엽이 kbs2에서 선보일 파일럿 예능 <미스터 피터팬>역시 남자들만의 예능을 표방한다. 물론 이 작품은 야외 리얼 버라이어티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3월 7일 <마녀 사냥> 예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도 야외 녹화만으로도 힘들다고 하는 신동엽이 하는, 야외 리얼 버라이어티는, 그것도 남자들의 이야기를 내세운 프로그램은, <마녀 사냥>의 mc 신동엽의 색채가 짙게 음영처럼 드리워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마녀 사냥>의 성공을 단지 19금이라던가, 음지에 묻어 두었던 사랑을 양지로 꺼내든 성적 담론에 국한시키면 아쉽다. 19금이라던가, 성에 관해서는 <마녀 사냥>못지 않은, 혹은 그보다는 더한 케이블의 여러 프로그램들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소재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마녀 사냥>이 군계 일학으로 젊은 층의 호응을 얻었던 것은, 신동엽, 성시경, 허지웅 등의 mc진과 곽정은, 한혜진, 홍석천등의 패널 등이 이루어진 솔직하고 설득력 있는 조화에서 비롯된다. 때로는 자막으로 순화시켜야 하거나, 묵음 처리를 해야 할 만큼 솔직한 입장의 토로와, 그에 못지 않은 패널 별 입장에서의 현실적이고도 설득력있는 조언들이 이 프로그램을 '소통'에 성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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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머니투데이)

그에 따라, 봄 개편을 맞이한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스튜디오 토크쇼라 하더라도 더 이상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관객, 혹은 관객 이상의 시청자층과의 소통을 내건다. <마녀 사냥>의 성공을 뒤업고 성시경이 mc 중 하나로 등극한 kbs의 토크쇼 <진격의 역지사지-대변인들>이 그것이다. '당신의 입이 되어 드립니다'라는 컨셉은 <마녀 사냥>의, 그리고 kbs2의 <안녕하세요>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단지 성과 사랑이라는 소재를 넘어서, 개인의 신변 잡기를 넘어서, 갑을 관계 등 사회적 불통을 그 대상을 확산 시킨다는 점에서 발전적 모방의 사례가 된다. 이미 <라디오스타>나, <마녀 사냥>을 통해 검증된 김구라와, 성시경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감으로써, 새로운 영역의 위험 요소를 줄이고자 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홀씨처럼 날아가, 새로운 포자들을 번식시키고 있는 <마녀 사냥>이 처음이라고 말하기는 또 어폐가 있다. 그에 앞서, 게스트들을 불러놓고, 19금은 아니지만, b급 정서의 솔직한 토크로 한때 화제가 되었던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든 <라디오 스타>가 존재하며, 보다 근원적으로는, 여전히 우리의 생활 곁에서 우리의 귀가 되어주고 있는 다양한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이다. 결국은 라디오 프로그램식의 시청자가 사연을 보내주고, 그것을 mc가 소개하고, 게스트와 함께 난장토론을 벌이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방식들이 홀씨의 근원이다. 결국 범람하다 못해 고사되어 갈 조짐을 보이는 공중파 예능의 젖줄은 방송의 원류 라디오가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8. 11:48

과연 동일한 드라마가 맞을까 싶게 2회를 연 <쓰리데이즈>는 그 내용만큼이나 진행에 있어서도 반전이었다. 

마치 프롤로그라도 되는 양 세 번의 총성이 울리기 까지 등장인물들의 처한 상황을 느슨하게 1회가 보여준 것과 달리(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인물이 살해되며 사건의 복선이 깔리지만), 2회는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대통령의 실종에서 암살을 시도한 인물까지 밝혀내며 한 코스를 단숨에 달려 버린다. 16부라는 드라마 동안, 대통령의 암살 시도가 굵직한 미스터리로 갈 거라는 시청자의 안이한 기대를 단숨에 짓밟아 버리며. 

(사진; 스타 투데이)

제작 발표회에서 함봉수 실장 역을 맡은 장현성은 우스개 소리로 친구인 하지만 늘 드라마에서 몸을 쓰는 역에 익숙한 비서실장 역의 윤제문을 두고, 헷갈리지 말라고 자신이 경호실장임을 밝혔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을 통해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 경호실장 역의 장현성이 가장 먼저 실체를 밝히는 악역이 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1회에서도 경호실을 찾아와 위협적으로 책임을 묻는 윤제문이나, 심지어 2회에서 경호실장 옆에서 연신 눈을 돌리며 의심가는 표정을 짓는 경호 본부장 역의 안길강을 의심할 지언정, 1회부터 충실히 대통령의 경호에 여념이 없는 경호실장 함봉수를 의심할 순 없었다. 심지어 드라마 공홈의 인물 관계도에서 조력자로 표시되는 함봉수가 단 2회만에 대통령 암살범으로 등극(?)함으로써 이제 <쓰리데이즈>에서는 주인공 한태경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믿을 사람이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이 함봉수 임이 밝혀진 순간, 한태경에게 총을 겨누며 함봉수는 말한다. 대통령은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사실 2회의 드러난 반전이 대통령을 지키는 핵심인 경호실장이 암살범이었다는 사실이라면, 내적 반전은, 한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이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함봉수의 선언이다. 그의 단언으로 드라마는 대통령의 암살을 밝히는 단순 미스터리에서 한 발 더 깊게 들어간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에서부터 작가는 정의로워야 하지만 정의로울 수 없는 사회적 존재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싸인>에서는 법의학이라는 수단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이명한(전광렬 분)과 법의학을 수호하는 윤지훈(박신양 분)의 대립을 내세웠다. <유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적 영역이 되어야 할 정보를 사적 이익을 위해 휘두르는 조현민(엄기준 분)과 그에 대항하는 사이버 수사대의 김우현(소지섭)이 등장한다. 

<쓰리데이즈>는 보다 더 직설적이다. 단 2회 만에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것을 목숨과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저격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를 그저 나쁜 놈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의 말인즉슨, 대통령이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놈이란다. 그 순간, 그의 방식은 부적절했지만, 그의 선택은 또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문제가 된 '기밀 문서 98'의 내용이건, 혹은 함봉수가 피력한 바의 논리이건, 대통령이 정말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면 모든 비극의 시작은 표피적인 암살 사건이 아니라, 대통령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쓰리데이즈>란 드라마는 보여지는 암살 사건을 넘어 또 다른 궤도를 가진 드라마로 재시동을 걸게 된다. 

김은희 작가가 느끼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어떤 직위, 그 중에서도 특히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직업적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채 그것을 사적 이해로 농단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이 법의학을 농락하는 그 누구든, 정보를 전횡하는 그 누구든, 심지어 국가를 농단하는 그 누구든, 결국 본질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직위와 역량을 들고 타인을 농락하려 드른 사람들은 우리 사회 처음부터 아래까지 너무도 익숙한 현상이다. 그런 그들에 맞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며  자신이 맡은 바 직업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싸인>에서 윤지훈의 죽음이 놀랍고 감동스러웠던 것은 법의학적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조차 불사했다는 그 지점이다. 개인적 원한이나, 집단적 복수가 아니라, 순수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그 직업적 헌신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이 죽음을 걸고서야 가까스로 얻어지는 어려운 난제라는 자각때문일 것이다. 

(사진; 해럴드 경제)

그런 윤지훈에 못지 않게  '애국가만 들어도' 눈물이 차오르는 순혈의 정의남 한태경은 이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의 딜레마는 김은희 작가 작품의 전작들 주인공들 보다 더 어렵다. 그의 직업인 경호관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어떤 사람 혹은 세력, 그리고 앞으로 밝혀지게 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대통령 사이에서 직업적 윤리와, 사적 원한, 그리고 그를 앞서는 역사적, 혹은 그 이상의 도덕적 윤리 앞에서 고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켜야 할 사람이 지킬 가치가 없다면, 그를 지켜야 하는 한태경의 선택은? 함봉수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가? 아버지의 임종을 앞에 두고서도, 그리고 장례식을 미뤄두고라도,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한태경에게 던져진 선택은 곧 이 드라마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다. 시청자들은 고뇌하는 한태경과 함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의 소용돌이에 함께 휘말리게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7. 01:49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가 종영되었다.

다른 시즌에서도 그래왔듯 그녀 신주연(김소연 분)의 집을 찾아든 주완(성준 분)과의 사랑을 이룬다. 무려 여섯 살 연하의 잘 나가는 뮤지션 남친이다. 주인공 신주연만이 아니다. 그녀와 같은 직장을 다니는 이민정(박효주 분)도, 정희재(윤승아 분)도 다 사랑을 쟁취했다. 다만, 신주연과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던 강태윤(남궁 민 분)과 오세령(왕지원 분)만이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마침표를 찍지 못했을 뿐, 말 줄임표가 비극으로 끝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랑만이 아니다. 신주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앙숙이었던 오세령과의 우정을 회복했으며, 그 우정과 함께 사업에서의 윈윈을 얻게 되었다. 이민정은 당당하게 미혼모임을 밝히고서도 팀장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정희재는 1년을 기다려주겠다는 착한 남친을 두고 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저 해피엔딩에 이르는 사랑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 고구마였던 주완을 보살펴 주던 신주연에게 어른 남자가 되어 나타난 주완은 이제는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는 주연을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주연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성장 스토리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그와의 커플링을 목욕탕 선반 유리잔에 던져 넣는 것으로 시크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주연의 냉랭했던 마음은, 동료의 걱정을 직장이라는 틀 속에 넣어 각자의 문제라 외면하려 했던 주연의 이기적인 태도는 진정한 사랑을 감별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 직장 동료를 넘어 우정이라는 관계에 도달하는 '성숙함'에 도달하게 되었다. 

20,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장르를 '칙릿(chick lit)'이라고 한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는 그렇게 칙릿의 장르적 특성에 충실한 듯 보인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의 일종인 칙릿을 굳이 로맨스 소설이라 하지 않고, 새로운 용어 '칙릿'이라는 단어를 차용한데는 장르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도화된 산업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그 여성들의 사회적 존재가 두드러지면서, 그들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장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칙릿을 굳이 로맨스 소설과 구분하는 장르적 이유를 들자면,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삶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반영한다는 데 있다. 굳이 방점을 찍자면, 로맨스 보다는 '직업 의식'이나 라이프 스타일 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해놓고 보면, 과연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는 두 장르 중 어느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 리뷰 스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홈쇼핑 회사의 MD인 주연, 금요일 밤이면 원나이트 하는 남성을 만나 바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성적 용구를 만족하는게 충실한 민정, 그리고 고시를 준비하는 가난한 애인을 둔 희재는 드라마의 시작 초반만 해도, 우리 시대의 젊은 여성의 리얼리티를 충실히 살려낸 듯 보였다. 그리고 매회, 마치 여성판 <마녀 사냥>이라도 되는 듯, 키스에서 부터 시작하여, 스킨 쉽,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적나라한 수다는, 그 예전 <SEX&CITY>의 그녀들의 수다 만큼이나 적나라했다. 어디 그뿐인가, 공중파 드라마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리타분한 부모님 세대의 간섭 따위는 없다. 오로지 사랑도, 삶도 나의 선택인 듯 보인다. 쿨한 젊은 세대의 표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똑부러지게 당당한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의 대변자같은 그녀들이 사랑하는 남자들은 그녀들이 어릴 적 보던 만화 <캔디>의 안소니나 테리우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고구마였던 주완을 보모처럼 주연이 보살펴 주듯이, 불현듯 멋진 남자가 되어 나타난 주완은 주연을 그 어린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는 양 보살펴 준다. 피곤하고 상처 받아 돌아온 집에 음식을 해놓고 기다리는 우렁 각시같은 주완이 있다면, 직장에는 또 다른 키다리 아저씨 태윤이 팀장으로 음으로 양으로 주연을 보살핀다. 어디 그뿐인가. 원나이트의 상대자로 피지 못할 임신의 상대방은 알고보니, 애아빠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성실남이다. 고생고생해서 뒷바라지 하자마자 고시에 성공한 애인이 헤어지자 하여 상처를 받을라치면 자기 마음을 자기보다도 더 잘 아는 자상한 동료 남친이 등장한다. 만나자마자 하는 키쓰에서 시작하여, 그것도 부족하면 상상으로까지 매회 충만했던 스킨 쉽의 실체는, 사실 여전히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백마 탄 왕자'들이다. 단지 그들이 탄 백마가 시대에 맞게 진솔한 위로와, 직장에서의 배려, 삶의 진정한 동반자로 변색되었을 뿐이다. 아니, 이것도 그들의 옵션에 불과하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속 그 어떤 남자도, 등장한 여주인공들만큼이나,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가장 구체적 딜레마인 경제력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은 어릴 적 그녀들이 읽던 동화나 만화 속 왕자님에 버금가는 능력자들이다. 여전히 드라마 속 그녀들은 어떤 의미에선가 신데렐라들인 것이다. 

드라마는 적나라하게 우리 시대 젊은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 하는 듯 하지만, 드라마 속 그녀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사랑도, 일도 승승장구요, 미혼의 임신도 거뜬하며, 직장 1년 차에 속 시원하게 때려치고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그들의 사랑 놀음에. 주연의 독백에 홀려 저건 내 이야기다 싶어 빠졌다 돌아온 현실은 그래서 더 초라하다. 제 아무리 <마녀 사냥>을 열 시청해도 막상 내 연애는 책으로 배운 것과 다를 바 없는 식이다. 내 앞의 남자는 절대 백마 따위는 커녕, 집값이 두려워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할 찌질남일 뿐이다. 
<로맨스가 필요해>가 시즌을 거듭할 수록, 드라마 속 환타지는 강화되는 경향을 띤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신데렐라 이야기에 골몰한다. 현실이 압박을 더할 수록, 드라마는 황홀하다. 그래서 더 공허하다. 이제는 젊은 세대 사랑 문법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로맨스가 필요해>가 그래서 더 아쉽다. 


by meditator 2014. 3. 5.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