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작년 합계 출산율은 0.92명으로 2011년(1.24명)보다 0.32명 감소하여 역대 최저를 기록하였다. 세계 203개 국 중 꼴찌이다. 이 기록이 암담한 것은 저출산과 관련하여 2011년 이후 10년간 평균 21.1%씩 증가시킨 총 209조 5000억원을 정부가 쏟아부은 결과라는 점이다. (한국 경제 연구원) 

도대체 저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왜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늘지 않고 있을까? 역설적으로 그 이유를 8월 16일 방영한 <sbs스페셜 - 아빠를 고발합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14세 소년이 어른들과 함께 플랜카드를 들고 나섰다. 거기에 써있는 건 바로 '아빠를 고발합니다'라는 문구.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를 아동 학대로 고발했다. 우리나라 아동 복지법에 따르면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의 성장에 맞춰 건강하게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엄마와 이혼한 지 5년이 된 아빠는 단 한 번도 소년의 양육비를 챙겨주지 않았다. 심지어 새로 가정을 꾸려 아이까지 낳아서 키우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단다. 소년은 '유기, 방임'도 신체적 정신적 학대에 해당한다며 아빠를 고발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행위는 저희를 유기, 방임하는 행위이고, 왜 어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저와 같은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지, 왜 그 사람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친부를 아동학대로 고발한 김유성(가명)군의 기자회견 발언


우리나라에서 이혼 후 양육비를 받지 못한 비율이 78.8%에 이른다. 그 중 단 한 차례도 받지 못한 경우도 73.1%에 달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16년간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이다도시 씨 
외국인으로 우리나라 방송에 출연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다도시 씨, 그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살던 이다도시 씨는 지난 2010년 이혼했다. 당시 12살, 5살이던 두 아이들을 책임진 이다도시 씨, 당시 법원은 매월 120만원의 양육비를 판결했다. 그로부터 무려 1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다도시 씨는 아이들의 아빠로 부터 단 한푼의 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들과 연락조차 끊었다. 

두 아이들을 먹히고 입히며 홀로 고전하며 살아왔던 나날들, 더구나 늘 행복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방송에 보이던 그녀에게 이혼은 '생업'이었던 방송 출연에 장애가 되었다. 다행히도 숙명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두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 시간은 이다도시 씨에게는 '시련'이었고, 아이들은 '자기 인생에서 아빠를 지웠다'며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되었다. 

양육비를 받지 못한 채 5년이 지났을 무렵 '양육비 이행 관리원'이 출범했다.(2015) 드디어 양육비를 받을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당연히 접수를 했다. 법원은 의무를 이행하라 명령을 했다. 하지만 민사적 제재에 불과한 명령은 '해외'에 있는 아이들 아빠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감치 명령 역시 닿을 수 없었다. 채무 불이행 명부에 등재시켰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역시나 피해갔다. 그의 sns에는 골프장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지만 매달 30만원을 받는다는 그의 핑계에 더 이상 강력한 법적 조처는 없었다. 

이다도시 씨는 울분을 터트린다. 자신이 터널 통행료 2천원을 내지 않아도 당장 그날 독촉 전화가 걸려오는 대한민국, 이 나라는 얘들 생명보다 터널 지나는 비용이 더 중요한 나라냐고. 결국 이다도시 씨는 양육비를 받지 못한 지 16년 만에 지난 2018년 양육비를 부모들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NGO인 '베드 파더스'에 남편의 신상을 공개했다. 

공개되기 전 남편에게 원만하게 해결하라며 사전 통보하였지만 남편 측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외려 개인간 문제에 무슨 권리로 나서느냐며 반발했다. '베드 파더스'에 신상이 공개된 90%는 이다도시 씨의 남편과 같은 '아버지'들이다. 우리의 이혼 관례상 대부분 이혼 후 양육권이 엄마에게 주어지고 있는 법적인 맹점이 현실로 드러난 사례이다. 

 

 

앞서 아빠를 고발한 유성군의 경우, 5년 만에 집으로 양육비를 독촉하기 위해 찾아가자 외려 '주거 침입죄'로 경찰을 불렀다. 외제차를 몰면서도 돈을 못번다고 하는 아버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 유성군의 동생은 학교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로 재능이 많지만 엄마의 외벌이로는 그 재능을 키워주는 게 언감생심이다. 

김유성 군은 왜 '고발'까지 했을까? 엄마는 그게 지난 5년간 연락조차 하지 않은 아버지와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 측은 괘씸해 할 뿐이다. 4살 때 떨어진 아버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동생 유나, 막상 아버지와 카톡이 되자, 아버지라 해야하나, 아저씨라 해야 하나 혼란스러워 한다. 미술 치료 과정에서 유성군의 그림에는 스트레스를 의미하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유나가 그린 그림에 '집'은 가장 희미하다. 엄마는 돈도 돈이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끊긴 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이 안타깝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양육비 소송 판결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핑계를 댄다. 그러나 1994년 개정된 법제로 인해 양육비는 친자 관계 본질에서 발생하는 의무이기에 재판 결과의 인지 없이 지불하는 되는 것이다. 

양육비 개인의 채무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 되어야 
심지어 양육비를 주기 싫어서 몸으로 때우는 경우도 있다. 오늘도 잠복 중인 선희씨, 그녀 역시 지난 6년간 양육비를 받지 못했다. 21개월에 50일된 신생아를 데리고 이혼을 했던 그녀, 남편은 그녀와 아이들을 생애 최대 오점이라 하며 외면했다. 

법원에 소송을 제출할 때마다 판사는 임의대로 양육비를 깍는다. 하지만 그 깍은 양육비조차 남편은 거부했다. 법원이 미지급으로 감치 명령을 내리고, 일손이 부족한 경찰 대신 양육 부모들이 선희 씨처럼 잠복을 해서 경찰을 불러야 겨우 잡아간다. 하지만 잡혀간 남편은 양육비를 주는 대신 '몸'으로 15일을 때웠다. 자신의 재산은 현재 재혼한 아내 명의라며. 

아이들의 양육을 떠맡은 엄마들은 아이들을 키우랴, 양육비를 받아내랴, 거기에 이제 이런 명목 상의 강제만 있는 불합리한 제도를 바꾸는데 나서랴 그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양육비를 내지 못하면 2년 금고에 1500 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문다. 선제적 강제 징수도 한다. 강력한 조처만 있는 게 아니다. 실제 양육비를 주지 못할 수 도 있는 상황, '양육비 대지급제'라는 제도을 통해 국가가 양육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제도가 있다. 이런 제도가 추구하는 건 결국 자라나는 아이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이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양육비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부모로써 아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고. 하지만, 그 책임을 개인적 채권 구도로만, '민사적 해결'에 떠맡기는 건 양육의 책임을 오로지 한 가정에 떠맡기는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제 저 심각한 양육비 분쟁에 국가가, 사회가 나서야 할  때라는데 이견이 없다. 아이들을 낳도록 돈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온 아이들을 사회가, 국가가 어떻게 책임지고 제대로 키워낼 때, 믿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출산율'도 늘게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20. 8. 18. 01:14

지난 2017년 6월 10일 tvn을 통해 첫 선을 보인 드라마 <비밀의 숲>은 방영과 동시에 화제가 되었다.  6월이었지만 이미 한 여름과도 같았던 시절, 그런 더위를 잊게 해줄만큼 한 겨울을 배경으로, 그 배경만큼이나 서늘하게 막을 열었던 <비밀의 숲>은 검사 황시목이 방문한 집에서 목격한 살인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흐른 2020년 8월 50여 일에 걸쳐 비가 내리는 이 시절에 통영 지청에서 원주 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처지인 황시목 검사는 안개가 자욱한 통영 바닷가를 지나다 다시 한번 '두 청년'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사건' 현장'을 통한 황시목과 한여진의 재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간', 사람들은 황시목(조승우 분)을 시쳇말로 그렇게 표현했다. 어릴 적 받은 뇌수술로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황시목에게 '법'이라는 이성적 장치는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명문화된 법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면 되는 '서부지검' 내부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 동료들이 그와 밥을 먹는 것조차 불편해 했지만, 황시목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2017년 <비밀의 숲> 1회에서 사건을 목격한 검사 황시목은 현장에 있었던 그 자신이 한여진(배두나 분) 경위에게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것 따위 무색하게 그가 목격한 현장에서 발견한 '사실'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이제 2020년 원주 지청으로 발령받은 황시목은 통영지청장님이 직접 환송을 해주겠다는 '자리'를 '쌩까고' 이번에도 사건 현장인 통영 바닷가로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현장에서 발생한 두 청년의 죽음에 '사고' 이상의 의문을 느끼던 순간, 자신의 집에서 핸드폰으로 '안스타' 순례를 하던 한여진 경감 역시 한 남자의 통영 사진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며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황시목과 한여진은 2017년 <비밀의 숲>에 이어 다시 돌아온 시즌2 <비밀의 숲>에서 한 사건을 통해 '재회'하게 된다. 

황시목이 발견했던 박무성의 죽음, 그 죽음은 그저 한 개인의 죽음, 혹은 검찰 스폰서의 죽음이 아니라, 결국  검찰 내부에 얽히고 얽힌 커넥션을 밝히기 위해 훗날 검사장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될 이창준(유재명 분)이 기획하고 검찰 수사과 과장 윤세원(이규형 분)이 실행한 '설계된 죽음'이었으며, 검찰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비리의 음모를 벗겨줄 첫 번 째 '실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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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사건의 의미는? 
그렇다면 이제 통영에서 벌어진 두 청년의 뜻하지 않은 죽음도 시즌 2를 관통할 사건의 시작일까? 

우선 통영 사건을 통해 시청자들은 다시 한번 황시목과 한여진이 누구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주인공인 '환송회' 자리 대신 두 청년의 죽은 현장으로 간 황시목, 그는 그저 술을 먹고 파도가 거센 바다에 뛰어들어 우발적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모두가 '퉁'쳐버리는 사건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 안주하는 대신 그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사실'에 집중한 황시목에게 통영 바닷가의 사건은 그저 우발적인 사고라기엔 의문점이 남았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 분명 접근 금지 푯말이 있었어야 할 이곳에 제 아무리 술이 취했기로서니 청년들은 그리 무모하게 뛰어들었을까란 의문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같은 시간 이제는 경찰청 수사구조혁신단 주임 경감이 된 한여진 역시 의아함을 느낀다. 통영 바닷가에서 접근 금지 푯말을 배경으로 커플 사진을 찍어 올렸던 사람이 황급히 사진을 삭제한 상황에 한때 동료였던 장건(최재웅 분)에게 협조 요청을 하고 두 사람은 '안스타'의 사진을 토대로 '가해자'로 추정된 사람을 찾기에 이른다. 
그리고 황시목에게 전화를 걸어 2017년 <비밀의 숲> 1회에서 용의자와 형사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제 '과거'의 공조 팀 동료로 다시 한번 '통영' 사건의 '공조 수사'를 벌인다. 

황시목이 그렇듯이, 한여진 역시 시즌 1에 이어 다시 한번 '정의감'이 투철한 형사로 돌아왔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법적인 사실에만 충실한 황시목과, 반면에 너무도 '인간적인' 한여진은 극과 극의 인간형이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주변 상황과 관계를 제치고 '사건'의 본질, 그리고 그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에만 충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역설적으로 '공통 분모'를 가진다. 통영 사건은 <비밀의 숲>을 지난 시간 그리워했던 애청자들에게 통영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절묘하게 두 사람의 캐릭터를 환기시키며  <비밀의 숲> 시즌 2 또한 이러한 두 사람의 전혀 다른, 하지만 공통의 '지향'이 시즌을 관통할 것임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두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중대 사안'을 통해 '적'으로 부딪치게 될 것이다.  검찰과 경찰, 서로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 가지고 싶은 '권한', '권력'을 향해 치열하게 수싸움과 기세 싸움을 벌일 판의 '말'로 던져질 예정인 것이다. 

하지만 경찰청 수사구조 혁신단 단장을 맡은 최빛이 시즌 1의 이창준의 죽음과 거기에 연루된 황시목을 검찰 관련 자기 식구 감싸기 사안으로 몰고가려 하지만 그 수하가 된 한여진이 자기 역시 '관계자'였음을 환기하며 그 사건은 그리 간단하게 검찰의 자기 편 감싸기와 관련된 사안이 아니라고 제지하듯이, 한여진은 쉽사리 '말'로 '헌신'만 하지는 않을 조짐이 보인다.

박무성의 죽음을 시작으로 결국 자신을 발탁한 이창준에 이르렀던 '설계'를 한 눈 팔지 않고 끝내 밝혀냈던 황시목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종료된 통영 지청 업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간 두 청년의 죽음에 의아심을 가지게 된 황시목과, 수사구조 혁신단으로 옮겨 가서 굳이 나서도 되지 않지만 '불의'는 넘길 수 없어 직접 탐문 수사에 나선 한여진의 기세로 보건대, 이들이 검찰과 경찰의 치열한 권력 투쟁 사이에서도 '사고'가 될 뻔한 두 청년의 죽음을 '사건'으로 길어내듯, 적어도 이들이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과정에서 뜻밖의 '진실'을 향해 다시 한번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비밀의 숲> 시즌2 1회는 보여주고 있다. 

by meditator 2020. 8. 16. 03:14

십시일반(十匙一飯),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보태면 한 사람이 먹을 밥 한 공기가 만들어 진다는, 즉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속담이다. 그런데, mbc 수목 드라마의 제목 <십시일반>에서 그 뜻은 속담을 '역설적'으로 활용된다.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을 살리고 돕는게 아니라,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오리엔탈 특급 살인>만큼이나 신선한 '설정'으로 시작된 <십시일반>, 8부작의 반전 넘치는 전개가 도달한 결론은 뜻밖의 '진실'이다. 

 

 

모두가 의심스럽다 
예고편에서 마치 삼복 더위를 날려줄 '납량 특집극'처럼 분위기를 잡는다. 아니나 다를까, 1회가 끝나기도 전에 등장인물 중 가장 돈이 많은, 유인호 화백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유인호 화백이 죽은 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었다. 

당대 최고의 화백이라 칭송받는 유인호(남문철 분) 화백, 그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그림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는 상태, 당연히 그의 재산은 수백 억이다. 그런 그의 생일날 사람들이 모여든다. 현재 그와  살고 있는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려인이라는 연극 연출가 설영(김정영 분), 그러나 그녀는 법적으로는 그의 아내가 아니다. 한때 잘 나갔던 모델 김지혜(오나라 분)와 바람을 펴 아내와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인호는 다시 전처 설영을 찾았고 그녀는 그의 수족이 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유인호를 돌보고 있다. 

그러나 유인호와 설영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자식은 김지혜와 사이에서 낳은 유빛나(김혜준 분)가 유일하다. 유인호는 김지혜를 버렸지만 지혜 모녀에게 양육비를 대주었고, 파산을 한 김지혜는 어떻게든 유인호에게 잘 보여 유산 상속을 받을까 해서 생일날 일찌감치 찾아들어 유인호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중이다. 김지혜 모녀만이 아니다. 사기 전과 4범인 유인호의 이부 동생 독고 철(한수연 분)과 그의 딸  독고 선(김시은 분) 역시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유인호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죽은 유인호의 동생 유해준(최규진 분) 역시 유인호가 거두어 주는 처지이니 당연히 그 자리에 참석한다. 거기에 유화백의 친구이자 매니저 역할을 하는 문정욱(이윤희 분)과 가사 도우미 박여사(남미정 분) 역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모두가 모인 자리 유인호 화백은 지난 1년간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며 비아냥거리며 내일 유언장을 공개할 것이라 선포한다. 자신의 것을 자기 맘대로 줄 것이니 '토' 달지 말라며. 하지만 그 유언장이 공개 되기 전에 유인호 화백의 죽음이 앞섰다. 그리고 수면제 알레르기가 있는 그가 수면제 과용으로 죽었음이 밝혀지며 뜻밖에도 그가 먹은 다섯 알의 수면제를 먹인 인물이 그의 유일한 딸을 낳은 김지혜와, 도우미 박여사, 친구 문정욱, 이부 동생 독고 철, 그리고 조카 유해준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화가를 죽인 다섯 알을 나누어 먹인 이들이 '범인'일까? 하지만 사건은 간단치 않다. 이들이 수면제를 탄 이유에는 그들로 하여금 유언장의 내용에 접근하도록 유인한 '익명'의 누군가가 발송한 '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익명'이 의도한 것은 화가의 죽음이었을까?

등장 인물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추궁하고 서로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으르렁 거리며 싸우게 되는 과정, 당연히 시청자들은 누가 죽였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탐정' 게임에 골몰하게 된다. 드라마는 이런 '추리'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갑자기 등장 인물을 '인터뷰' 한다거나, 등장인물들이 'sns'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추리해 가는 신선한 기법을 활용하여 긴장감을 높여간다. 

 

 

하지만, 누가 범인일까?을 둘러싸고 진행되던 드라마는 중반주에 들어서면서 각도를 튼다. 등장인물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유산에 혈안이 된 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게 된 유산의 주인공, 유인호의 실체가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빛나와 함께 유력한 유산 상속자로 부각되었던 유해준, 하지만 빛나보다도 더 큰 아버지의 자식같다며 빛나를 몰아세웠던 그의 '태도'가 수상하다. 그는 정말 순종적인 조카였을까? 그가 큰아버지가 먹는 초콜릿에 수면제를 타가면서까지 노렸던 것은 뜻밖에도 '진실'이었다. 어린 시절 그와 함께 큰아버지의 집을 방문해서 아들 해준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큰 아버지 집에 들어간 해준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의 '실종',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해준은 '복수'의 칼을 갈았고, 그 해준이 준비한 '복수'의 실체가 드러나며, 또 하나의 '진실'이 드러난다. 

진짜 나쁜 놈은 누구일까? 
15년 전 해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충직한 비서이자 친구인 줄만 알았던 문정욱이 '노예처럼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스스로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항변하는 15년의 시간 뒤에는 당대 최고의 화백이라고 칭송받지만, 그 자신말고는 아내건, 친구건 가릴 것도 없이  그 누구에게도 비열하리만큼 냉혹했던, 심지어 자신의 죽은 뒤에 명성조차도 '디자인' 하기에 여념없었던 유인호라는 '거악'이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시작은 평범한 탐욕이다. 유산을 둘러싼 한 푼이라도 더 자기 몫을 노리기 위해 달려든 '하이에나'와 같은 가족들의 이전투구, 그리고 그런 탐욕의 피해자인 듯한 유인호의 죽음, 하지만 그 드러난 탐욕의 커튼을 젖히고 보면, 거기에는 그들의 탐욕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명성과 부를 위해서 동생의 죽음을 감추고, 친구를 노예처럼 부렸으며, 사랑했던 이에 대해 파렴치했던 '이기주의자' 유인호의 '인과응보'인 죽음이 드러난다. 회를 거듭해가며 '탐욕'은 에스컬레이션되고 그 정점에 '유인호'가 있다. 

과연 누가 유인호를 죽였을까? 라는 의문 부호의 스릴러로 시작된 <십시일반>은 등장인물들이 '십시일반' 유인호 죽음의 주력, 혹은 조력자인가 싶더니, 마지막 회 '속담'의 본류로 돌아와 힘을 합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원했던 죽은 뒤에도 그 '명성'만으로 그림값이 치솟는 '명성'으로 남은 유인호의 '실체'를 맟천하에 드러내는 '십시일반' 어벤져스로 활약하며 유쾌한 한 판 블랙 코미디로 막을 내린다, 비록 8부작이지만, 아니 8부작이라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신선한 장르적 시도'는 비록 시청률로 보상받지 못했지만 지지부진한 공중파 드라마는 물론, 볼 거 없다며 하소연하는 시청자들의 기호에 색다른 활력을 불어넣었다. 

by meditator 2020. 8. 14. 02:21

눈에 멍이 들고 온몸이 퉁퉁 부은 여자 아이가 편의점에 나타났다. 지난 5월에 발생했던 창녕 여아 탈출 사건이다. 머리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감금과 고문에 가까운 가혹 행위를 했던 이 사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아동 학대 사건, 2019년에만 43명의 아이들이 '가정 학대'로 인해 숨졌다. 2013년  6,796건, 2015년 11,715건,  2018년 24,604건으로 해마다 아동 학대는 늘고 있다. 

지난 1998년 부모가 남매를 학대, 결국 죽은 딸은 마당에 암매장하고 발견된 동생 영훈이는 다리미와 쇠젓가락으로 인한 상처가 있었던 '영훈이 남매 사건,', 그리고 이어진 1999년 소아암에 걸린 신애를 방치한 사건은 전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고 가정 문제에 사회가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던 '관습'을 뚫고 20년만에 아동 복지법이 개정되었다. 유기와 방입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고 , 아동학대 신고 1391이 개통되며 국가가 적극적으로 '아동 학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국가적 조처는 아직 역부족 
그렇게 첫 발을 내딛은 국가적 조처는 2013년 칠곡 아동 학대 사건에서 방치한 친부에게 최초로 처벌을 했고, 2013년 갈비뼈가 16대 부러지도록 학대 당한 이서현 사건을 계기로 2014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아동 학대에 대한 특례법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2015년 친 딸을 굶기고 때렸던 인천 여야 학대 탈출 사건을 계기로 장기 결석 아동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안이 발의되고 특례법이 만들어 졌지만 아동 학대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에 정부는 전수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일선의 전문가들은 그에 따른 예산 부족과 인력 부족 등을 들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도 과중한 업무로 인해 이직율이 30%에 달하는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호 기관도 부족하다. 동네 노래방 숫자보다도 적은 보호시설,  현재만 해도 8천 건 정도가 '보호' 절차를 밟고 있지만 정작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갈 '시설'은 태부족인 것이다. 결국 '구조'된 아이들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분리된 아이들 중 겨우 13%만이 ' 시설 보호'를 받고 있다. 재학대 발생율을 증가할 수 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예산 중 0.03%의 저열한 수준, 전문가들은 이는 '국가적 방치'라 안타까워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대 발견 사례가 외국에 비해 1/3에 불과하다.  실제 학대 사례가 적은 게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가려진 '암수 범죄'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쉼터에 있는 20살 현석(가명)이는 4살 때부터 10여 년이 넘게 학대당했다. 삽으로, 소주병으로 맞았고, 변기에 머리가 쑤셔박혔다. '아빠를 죽여주세요'라며 기도했으나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집이 지옥인 아이들, 내 새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학대', 아이들은 가출을 하거나, 성인이 되어서야 지옥같은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회는 시선이 주목될 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언론도 이슈가 되는 사건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정작 그 '학대'당한 아이들을 누가 기르고 돌볼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아가, 왜 '학대'가 줄어들지 않는가, 어떤 상황에서 때리는가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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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이 훈육? 
학대의 시작은 어디일까? 학대 사건이 벌어지면 계부, 계모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작 대부분 학대를 하는 주체는 친부모일 경우가 78.5%이다. 가해 부모들은 놀라울 정도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고, 단 한 명도 내 아이가 미워서라고 안한다. 심지어 사랑해서 였다고 말한다. 

과도한 훈육이었다고 말하는 '학대', 말을 듣지 않아서, 거짓말을 해서, '학대'할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부모들의 '사고'에 자리잡은 생각은 아이의 몸은 아이의 것이 아니며, 언제든 부모가 손을 댈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다큐가 만난 평범한 부모들은 고백한다. 위험하게 놀때, 혹은 독박 육아 과정에서 아이들이 컨트롤이 안될 때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게 된다고, 분노 조절이 안될 때가 있다고. 

체벌은 우리 사회 부모가 배운 유일하다시피한 훈육 방법이다. 하지만 막상 훈육보다는 감정이 올라와 스스로 감정이 조절이 안돼서 손이 올라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훈육은 즉각적 명령 준수 효과가 있다. 그러기에 부모들은 나의 훈육 방법이 옳았구나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다시 상황은 반복되게 된다. 결국 체벌 효과는 없다. 그러나 '체벌'만이 유일한 훈육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부모는 더 강한 체벌로 아이의 잘못을 다스리려 한다. 

과연 체벌이 훈육일까? 전문가들은 되묻는다. 이제는 동물도, 범죄자도 안맞는 세상에 왜 아이들이 맞아야 하냐고? 때리는 것만이 아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너때문에 못살겠다' 등등 부모들은 차마 타인에게는 입 밖에 내놓지 못할 말을 내 아이에게 한다. 상처주는 말 역시 정신적 학대다. 

스웨덴 역시 한때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1971년 3살 여아가 학대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부모 및 그 누구라도 아이에 대한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했다.(1979)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은 대로 가르친다는 취지였다.  유엔아동 협약 보다도 10년 빨랐다. 

일찌기 방정환 선생은 아이들을 어른보다 귀하게 보고 높게 대접하라 하셨다.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라 하셨고, 당연히 때리지 마라하셨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현재 여전히 우리 사회는 '훈육'이란 이름에 '체벌'이 아이들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건 특별한 범죄가 아니다. 결국 '내' 아이를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구시대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정부는 지난 6월 민법 915조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고자 나섰다. '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 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그간 법적으로 가정 내 체벌을 허용하는 근거가 되어 온 조항이다. 훈육으로의 체벌 금지, '가정'이 세상 전부인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법'만이 아니라 부모들의 '인식적 변화'가 확산되어야 할 시점이다. 



by meditator 2020. 8. 11. 15:38

공감 능력과 죄책감 결여, 낮은 행동 통제력,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에 기만, 이런 성향을 높게 나타내는 사람을 반사회성 인격 장애, 사이코패스라고 정의한다. <악의 꽃> 도현수의 어릴 적 친구라는 김무진 기자(서현우 분)는 도현수를  '사이코패스'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면 다 '살인범'이 되는 것일까? '사이코패스'면 무조건 다 나쁜 놈일까? <공항가는 길>, <마더> 등을 통해 관습적이고 통념적인 관계에 역설적인 질문을 던져왔던 김철규 피디가 이번에도 그 단어만으로도 '범죄'가 연상되는 '사이코패스'라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을 묻는다. 


사이코패스의 과거 
자타공인 '사이코패스' 도현수(이준기 분), 어릴 적부터 남들과 다른 행동 양상을 보였던 그는 이제 병원장인 백만우(손종학 분)와 약사인 공미자(남기애 분)의 아들 백희성으로, 그리고 차지원 형사(문채원 분)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금속 공예가로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아가던 백희성의 일상은 '도현수'를 알고 있던 김무진 기자의 등장 그리고 한때 도현수와 동거동락했다던 남순길의 죽음으로 인해 과거로부터 '도현수'가 소환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도현수, 그의 과거가 무엇이었길래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왔던 것일까? 2002년 연주시에서 발생한 6명의 살해 및 암매장 사건의 범인 도민석, 그는 도현수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상한 태도를 보이던 도현수를 아버지가 벌인 살인 사건의 공범이라고 의심한다.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도현수가 사라지던 당시 벌어졌던 이장 살해 사건의 범인을 도현수라 추정한다. 그로부터 18년 , 도현수는 여전히 이장 살해범으로 용의자 신분인 상태다. 

김무진을 만나 본의 아니게 회고하게 된 '과거', 그곳에서 되새겨진 김무진과 도현수의 우정'은 우정이 아니라, 김무진에 의한 일방적인 '이지매' 현장이었다.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돌팔매를 맞아야 했던 도현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순길의 죽음에서 다짜고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연주시 연쇄 살인, 그리고 다시 한번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버린 도현수가 김무진의 부추김에 의해 자신에게 씌워진 살인 용의를 스스로 벗겨내기 위해 어릴 적 살았던 가경리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의 기억에 떠올려진 것은 아비처럼 귀신 씌워진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을 굿판에 던져져 '집단 린치'를 당했던 '트라우마'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데 서투르다, 혹은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진 '인간형'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그리고 아버지가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마을과 주변 사람들에게 '범죄자'로 낙인찍인 채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한 인물을 그려낸다. 거기서 그 인물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범죄적 행동은 드러나지 않은 채 '타자'의 시선, '타자'의 통념만으로 규정된 채 무리 밖으로 내쳐져버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누가 더 사이코패스일까? 
도현수의 수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향에서 도망나와 일하게 된 중국집, 그곳에서 그는 남순길을 만난다. 3년 여를 같은 방을 쓰며 지내던 남순길, 하지만 그는 도현수가 모아놓은 천 만 원에 눈독을 들이고 그를 죽이려 한다. 오로지 자신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도현수를 죽이려는 남순길, 그의 공격을 피하려던 도현수는 그가 찌르던 칼로 남순길을 도리어 공격하려 하지만 결국 그 자신만이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도망치고 만다. 

그러나 도망치던 도현수는 그만 빗속에서 백만우의 차에 치고만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백만우의 아들 백희성이 되고만다. 아직도 자신의 집 은밀한 곳에서 진짜 아들 백희성을 간병하고 있는 백만우 부부, 그런데 진짜 아들을 대신하여 백희성 노릇을 하는 도현수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않다. 모처럼 며느리 차지원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백만우 부부의 태도는 사이코패스라는 도현수보다 더 사이코패스 스럽다. 남순길 사건이 벌어지고 찾아간 어머니의 약국에서 어머니는 다짜고짜 백희성이 된 도현수의 따귀부터 올려친다. 아무리 편의에 의해 길렀다지만 길러진 정의 흔적보다는 오로지 도현수로 인해 자신들의 안위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길까 불쾌해 하기부터 하는 백만우 부부이다. 

형사인 며느리로 인해 불편하다 못해 불안해 하는 어머니에게 도현수는 말한다. 차지원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남순길을 제압하고 칼을 들었을 때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악령'과도 같은 아버지의 모습, 그 아버지의 손에는 굵직한 개 줄이 쥐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현수가 쥔 그 칼로 어서 찌르라는 듯 그게 니 본성이라며 '종용'하는 듯한 미소를 띤다. 그렇게 늘 수시로 도현수의 눈 앞에서 도현수의 '본능'을 부추기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집요한 등장'을 차지원만이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줄을 쥐고 악령같은 기억으로 등장하는 친아버지, 새로운 신분을 제공했다지만 얼음장처럼 차갑다 못해 사사건건 자신들이 쌓아올린 사회적 명망에 오점이 될까 다그치는 의붓 부모, 돈 천 만원에 칼을 들이대는 동료, 도현수가 살아온 시간 속에 만난 인물들은 본투비 도현수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는 거침없이 도현수를 겁박하고 위협한다. 당연히 가장 의심스러운 도현수를 지켜보다 보니 도현수보다 더한 '위악적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는 <악의 꽃>이다. 

도현수가 선택한 삶, 그는 차지원을 선택하여 자신의 '사이코패스'적인 범죄 욕망을 잠재우려 했다지만, 그는 그저 평범한 삶을 누리고자 한다. 아내와 딸과 함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영상을 보며 평범한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하고 그 누구보다 자상하고 헌신적인 일상을 꾸려가던 도현수, 하지만 그의 '소박한(?) 소망은 대번에 그가 도현수라는 걸 알아본 김무진의 등장으로 틈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은 그가 애써 꾸려온 가정, 무엇보다 그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 믿던 아내 차지원 형사와의 사랑에 '시련'으로 다가올 것이다. 

by meditator 2020. 8. 7. 14:45

지난 8월 1일 방영된 <코로나 200일의 기록 바이러스와 국가> 1부 병든 신세계를 통해 kbs1의 취재팀은 uhd카메라를 앞세워 세계 미국, 중국, 일본, 이탈리아, 브라질 등 7개국의 코로나 19 현장을 담아냈다. 

코로나 19에 무방비하게 당하는 여러 국가에서는 입을 모아 대한민국의 사례가 등장했다. 발빠른 국가의 대처, 헌신적인 국민들의 참여로 그 어느 국가보다 신속하게 코로나 19를 '제압'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나라, 국민들 앞에서 여전히 '진실'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그 피해를 전가하는 많은 나라에 비하면 정말 우리나라는 자부심을 가질만 했다. 

하지만  그 '자부심'만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다큐는 덧붙인다. 1부에 이어 8월 2일 방영된 <바이러스가 묻다>에서는 지난 200일 동안의 주요 사건과 핵심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혁혁한 성과' 이면에 우리가 자족해서는 안될 '교훈'을 남기고자 한다. 

 

 

산술적 심각성보다 더한 심리적 불안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사상 유례없는 감염병의 등장, 정부는 우한 교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산 인근에 교민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일부 국민들과 아산 주민들은 반발했다. 민간 시설과 떨어져 물리적 위험성이 없는 상황, 하지만 산술적 심각성보다 백신조차 없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속 공포는 훨씬 더 컸다. 이는 바이러스의 공습은 객과적 데이터를 넘어서 우리 사회를 '정신적 아노미의 상황'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부의 발빠른 대처와 국민들의 협조로 코로나 19는 더 이상 확산을 멈춘 채 주춤했다. 28번 확진자 이후 더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자 정부는 위축된 경체 살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도 잠시 대구에서 확진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신천지'라는 종교적 맹목성이 더해져 8126명까지 코로나 19의 대유행이 다시 한번 우리 사회를 덮쳤다. 자택 대기 중 사망 환자가 등장하며 보건 의료 시스템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 다시 한번 정부와 국민들은 지혜를 모았다. 부족한 보건 의료 시스템의 문제는 대구 지역 환자 절반이 다른 지역에서 치료를 받게하는 한편, 중앙 연수원이 생활 치료 센터로 활용되며 보건 의료 시스템의 위기를 돌파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간 병원이었던 대구 동산 병원이 '이익' 대신 지역 코로나 '노아의 방주' 역할을 자처하며 이타적 결정으로 위기에 빠진 대구 보건 의료 시스템에 물꼬를 텄다. 

의병만으론 안된다. 코로나 팬데믹의 그림자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에 앞장섰던 전문가들, 자원 의료진들은 입을 모아 그런 일련의 대처 과정이 '운이 좋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참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한 달이 넘게 대구 현장에 있었던 의료진, 매일 환자를 보러 갈 때마다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나섰던 사람들,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가 또 다시 이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지난 200일의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이들에게 내려진 지침은 '무조건 희생하라'였기 때문이다. 

즉,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던 이유는 '헌신적인 의병'과도 같은 의료진들과 지역 의료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구'였기에 가능한 '운좋은 상황'도 놓쳐서는 안된다. 의대만 4곳, 다른 지자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상 자원이 많았던 대구, 그럼에도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을 맞이했었다. 그 위기를 메꾼 건, '공식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자원 봉사'라는 비공식적 관계, 미약한 시스템을 '의병'들이 몸을 던져 막은 것이다. 그러기에 '시스템'의 구축되지 않는 한 다시 또 이런 운좋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르다고, 또 다시 있을 지도 모를 이런 상황에 '정규군'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자원했던 의료진들은 입을 모은다. 

또한 그렇게 의병과도 같은 헌신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우리 보건 시스템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청도 정신병원에서 대거 발병한 코로나 19, 대남 병원으로 부터 시작된 코로나 19에 대해 국민들은 그 병원을, 그곳에 입원한 사람들을 우리 사회에 대한 '악마화된 가해자'처럼 여겼다. 당장에 위협적인 코로나 19 감염 사태에 대해 정신 질환 환자에 대한 '수용소'와도 같은 장기 입원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 볼 '여지'는 없었다.

'수용소'와도 같이 환자들을 한 방에 다수 기거하게 하는 등 정신 질환 환자들에 대한 장기 입원 문제는 그간 우리 의료계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수십년된 문제였지만 사회적 관심은 이번에도 없었다. 심지어 이들에 대해 소독업체도, 도시락 업체도 거절을 하는 등 '터부'만이 강하게 작동하며 '코로나 19'에 얹혀 정신병원에 대한 편견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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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지 않았던 감염
정신 병원에서의 집단 발병에서 숨겨져 있는 편견이 드러나는가 하면, 구로 콜센터와 물류 센터 집단 발병은 코로나 19가 우리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시작은 한 사람의 거짓말이었다. 확진자가 줄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느슨해 질 시점 이태원 클럽에 다녀간 사람들로 부터 150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감염병 관리 지원단은 접촉자를 파악하고 방역을 통해 더 이상의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학원 강사로 일했던 경력을 숨긴 확진자의 거짓말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한 학원 강사의 거짓말로 부터 시작된 집단 감염은 올해 수능을 앞둔 수험생에서 부터 대형 물류 센터 직원들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스크도 잘 쓰고, 장갑도 잘 끼고 공공시설 이용도 안했는데 억울하다'는 물류 센터 확진자, 결국 그녀의 감염은 아이와 남편까지 이어졌고 결국 남편은 생명의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152명의 대규모 감염, 하지만 이 결과에 대해 이 대형 물류 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을 보인다. 코로나 19로 인해 확산된 '언택트'한 생활, 물류 센터의 배송 물량은 180만 건에서 300만 건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결국 시간에 맞춰 배송을 하기 위해 빨리 빨리 실적 위주의 배송 과정이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역에 이익은 국민 모두가 누린다고 정부는 장담했지만 '호구지책'이 우선하는 저소득층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구로 콜센터 감염도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탄 화물 엘리베이터로 부터 시작된 대규모 감염,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콜센터 업무는 '사회적 격리'와 '언택트'를 표명한 코로나 19 방역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전문가들은 지난 200일 우리가 '성공'이라 자찬한 코로나 19에 대한 성공적인 방역 에는 보건 의료적인 측면과 사회 경제적인 측면의 두 얼굴이 있다고 지적한다. 청도와 대남 정신 병원의 대규모 감염 사례를 통해 보건 의료 방역 시스템의, 그리고 쿠팡 물류 센터와 구로 콜센터의 집단 감염에서는 사회 경제적인 시스템의 그림자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피해는 언제나 그랬듯 취약 계층에 집중되었다. 시스템의 틈, 그 틈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서는 언제 어디서든 또 다시 대규모, 집단 이란 황망한 결과를 받아들 수 밖에 없다고 다큐는 결론 내린다. 





by meditator 2020. 8. 5. 16:25

2019년 12월 30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 시에서 원인모를 질병이 발명했다. 해가 바뀌어 1월 9일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코로나 19 발생 200일, 지금까지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은 1610만 명, 아직도 하루에 20만 명의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 19, 21세기의 판도를 바꾼 감염병, 그 '팬데믹' 현장의 기록을 kbs가 전한다. 

국가는 어디에 있나? 
'기껏해야 감기 정도'라고 장담했던 자이르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에 바이러스는 존재치 않는다'는 정부는 마스크를 쓰기를 권고하거나 외출을 자제하도록 권유하지 않았다. 심지어 3월 15일에는 그런 정부 입장을 지지하는 관제 시위까지 등장했다. 5월 11일에는 창궐하는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보건부와 협의도 하지 않은 채 가게들의 영업 재개를 허용했다. 

그런 안이한, 거기에 한 술 더 떠 대기업을 위한 경제 살리기에만 정부의 대처는 결국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누적 확진자 270만 명, 전체 도시 중 98%가 코로나 19에 노출되는 통제 불능 상황을 맞이했다. 특히 그 피해는 빈민촌에 집중됐다. 빈민촌의 사망자는 방치되었다가 27시간이 지나서야 수습되는가 하면, 걷잡을 수 없이 느는 사망자로 인해 숲을 밀고 집단 매장지를 긴급하게 마련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자신이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더 이상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정부를 견딜 수 없는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이탈리아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지난 2월 이탈리아 북부에서 원인을 알수 없는 환자들이 급증한 이래 보건당국은 상황을 낙관하며 봉쇄나 출입국 제한 등 대처에 늑장을 부렸다. 치료 장비 부족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거나, 노인 환자들의 호흡을 돕기 위한 헬멧을 벗겨 다른 환자에게 씌워주는 의료 시스템의 붕괴 상황에 봉착했다.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은 성당에 누워있고, '죽어도 괜찮은 나이는 몇 살인가'라며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정부에 항의했다. 

세계 제 1의 국가면 뭐하나 
브라질과 이탈리아 상황이 보여준 것은 결국 전염병이라는 비상 상황에 있어 국가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역할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 것은 바로 세계 제 1의 국가라 큰 소리치던 '미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혀 문제 없어요'라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 3월 22일 뉴욕시가 봉쇄되었다. 의료 시스템은 속수무책이었다. 장비도, 병상도, 관리할 사람도 없었다. 시신을 우선 보관할 냉동 트럭까지 등장했다. 가족이 없는 시신들은 뉴욕 인근 작은 섬에 매장당했다. 

이게 세계 제 1의 국가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벌어진 일이다. 여행 유투버인 발레리는 안전하니 밖에 나가도 된다는 대통령의 감언이설에 맘 놓고 해외 여행을 하다 코로나 19에 걸렸다. 책임감없는 리더쉽은 그 피해가 바로 국민 개개인에게 전가된다. 급증하는 환자, 대처 능력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성급하게 하이드락시 클로로퀸의 치료제로서의 효과를 장담했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은 약품이었다. 반면 발 빠른 대처의 기본이 되어야 할 진단 키트의 승인이 늦어져 기하급수적 감염을 조장했다. 데이터와 과학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정부, 결국 15만 명의 사망자, 전세계 코로나 19 환자  5명 중 1명이 미국인이라는 최대 감염국의 오명을 받아들었다. 

반면 중국의 경우 '공산당의 권위주의적 정책'이 중국민의 피해를 막지 못했다. 12월 30일 우한 건강위에 원인모를 질병 발생이 보고된 이래, 1월에 첫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춘절과 겹쳐 대처가 늦었다. 1월 23일 봉쇄된 공항, 하루 아침에 1108만 명이 도시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코로나 19 확산 과정에서 사망자는 속출했지만 전염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던 의사는 외려 거짓 유포 혐의로 곤혹스런 처지에 바졌다. 확진자 발표 21일 후에야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정부, 이에 대해 정부는 지방 정부에서 중앙 정부로 이어지는 보고 체계의 권위주의적 관료 시스템이 발빠른 대처를 막았다며 뒤늦은 변명을 한다. 거기에 검열과 투명성 부재의 공산당의 의사 결정 과정이 피해를 가중시켰다. 전문가들은 안타까워한다. 시진핑은 3월 10일 우한을 방문하여 승리를 선언했지만 3주만 중국 정부가 일찍 행동했어도 확진자의 95%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무엇이 중요한가? 
'생명을 지켜줘', 일본 국회 앞 시위 대열에 참석한 일본 시민들이 든 피켓의 문구이다. 기업 캠페인에 돈을 몰아주고, 올림픽 유치에 목을 거는 정부로 인해 국민의 생명과 삶이 위협받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늑장 대처와 소극적 검사. 이것이 일본 정부가 코로나 19에 대한 대처이다. 3월 6일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 승무원 20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18일간 700여 명이 될 때까지 방치했다. 이 사태를 보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어떻게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저런 일이! 

일본에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으려 하지 않으면 코로나 19 감염 확진을 받기 어렵다. 37.5도 이상 발열 나흘 이상이거나 폐렴 증상, 동맥혈 산소 포화도 93% 이하 등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는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현저하게 낮은 검사 건수, 당연히 확진자 수가 낮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진자 수를 의도적으로 낮추려는 일본 정부의 얕은 수에도 불구하고 7월말 도쿄 일일 확진자 수가 1000 명을 넘어섰다. 시민들은 정부가 재해마저 돈으로 사려 한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게임의 카드처럼 불성실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스웨덴의 경우는 정부가 코로나 19에 대해 다른 국가들과 다른 실험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스웨덴 정부, 봉쇄나 영업 금지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당연히 마스크나 손소독제를 구하기 조차 어렵다. 스웨덴에서는 외려 마스크를 쓴 사람을 무서워할 지경이다. 자국의 의료 역량을 고려하여 선제적 방역 대신 선별적 방역을 실시하고, 의료계가 감당할 수준에서 노인과 위험 집단을 보호해 왔던 스웨덴 정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 19의 환자가 줄어가고 있는 즈음에도 10만 명당 확진자가 100 명을 넘어 독보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5월에만도 70%의 신뢰를 얻었던 공공 보건 정책은 이제 그 신뢰도가 57%로 떨어진 상황, 조금 더 일찍 검사를 실시하고, 조금 더 일찍 마스크를 섰더라면 조금 더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지 않았을까라는 국민들의 실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초기에 감염자 수 등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알릴 시 당연히 시민들의 불안감은 고조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정부 정책의 투명성과 신뢰를 담보하여 이후 감염병 정책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행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가 입을 모아 부러워하는 우리나라이다. UHD 카메라로 생생하게 전한 팬데믹의 현장, 결국 그곳에서 만난 건, '국가'이다. 전세계의 역사를 바꾼 코로나 19 팬데믹, 그 과정에서 국가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국가의 늑장 대처, 혹은 책임의 회피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감염병이라는 공통의 적, 하지만 국가의 선택이 국민들의 운명을 갈랐다. 

by meditator 2020. 8. 3. 01:49

지난 5월 17일 첫 방송을 연 <바람과 구름과 비>가 21부작으로 7월 26일 막을 내렸다. 평균 5%를 넘는 시청률로 수려한 연출, 그리고 모처럼 만나본 일관성있는 작품의 전개는 그동안 작품성있는 사극에 목마른 시청자들의 갈증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이병주 원작의 소설을 21부의 드라마로 각색한 <바람과 구름과 비>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왕좌의 꿈을 꾸었던 점바치 최천중의 야심으로 시작된 원작 소설을 강직한 강화군수인 아버지를 둔 양반가 자제였지만 권문 세가의 야욕에 희생되어 멸문지화의 위기에 몰린 최천중(박시후 분)이란 인물로 새로이 각색해내며 시작되었다.

과거에 급제했던 총명한 선비였으나 요절할 운명이라는 산수도인의 예언으로 인해 관직에 나가는 대신 강화 군수인 아버지를 돕는다. 그러나 장동 김문의 모략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 자신도 생명이 위태롭게 된 최천중은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사주 명리학'을 무기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한양에 나타난 최천중은 그의 세 치 혀로 권문세가 김문은 물론, 대왕대비 조씨, 그리고 상갓집의 개처럼 지내던 야인 대원군(전광렬 분)을 사로잡는다. 

자신을 멸문지화로 삼은 장동 김문에 대해 복수를 하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제대로 된 권력을 세우겠다던 포부를 가지게 된 최천중은 진정 백성을 위하는 왕을 옹립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의 눈에 띈 왕재는 바로 대원군, 그리고 그의 아들 고종이었다. 마치 '도원결의'를 하듯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대원군과 손을 맞잡은 최천중은 그 누구보다 앞장서 고종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권문 세가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런 그의 꿈은 그가 도운 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내세우며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해가며 갈등을 빚는다. 또한 왕권에, 아니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을 집중하고자 하는 대원군의 눈에 가난한 백성들을 도우려 동분서주하는 최천중은 동지처럼 여겨졌지만, 최천중이 만든  '삼전도장'에 갈곳없는 백성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최천중을 '왕'처럼 의지하자 '권력'의 위험 요소로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대원군이 탄압하는 천주교인에 외국인까지 최천중의 그늘로 숨어들자 대원군의 의심은 극에 달한다. 최천중의 '애민심'이 대원군의 눈에는 또 다른 권력 의지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옹립한 대원군 암살에 나선 최천중 
결국 대원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 최천중은 그를 피해 외유 생활 3년을 거친 후 돌아와 자신이 옹립한 권력 대원군을 '척결'하고자 한다. 그를 위해 '명성황후'가 되는 민자영을 돕는 한편, 중신들과 대비와 도모 대원군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가 최후에 선택한 방법은 비록 명리학에 밝은 그가 보기에 대원군의 세상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의 치하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더는 놔둘 수 없어 그 스스로  대원군을 제거하는 것이다. 

21회, 영길리에서 배운 기술을 통해 대원군의 잔칫상에 놓인 거문고에 화약을 숨기고, 거기에 술을 흘려 폭발을 시도한 최천중, 하지만 '대의'를 앞둔 그의 눈 앞에서 어린 소녀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 다시 뛰어들어가 거문고를 멀리 던져 버린다. 화약은 폭발했지만 최천중이 던져버린 덕분에 대원군은 목숨을 구하게 되고 최천중은 팔과 다리가 잘린 채 효수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자신이 벌인 '암살 시도'를 스스로 무위로 돌려버린 최천중, 이 어이없는 상황은 주인공 캐릭터의 '자멸'이었을까? 아니 외려, <바람과 구름과 비>는 사실인 '역사' 속에서 가상의 영웅 최천중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 

앞서 20회, 궁정에서 대원군을 축출하려던 최천중은 그의 의도를 누설한 김병학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그런 최천중에게 자신과 다시 한번 함께 할 것을 권유하는 대원군, 그런 대원군의 명에 따라 최천중은 병인양요가 일어난 강화로 향한다. 대원군의 청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전쟁터로 가겠다는 최천중은, 처형장에서 죽을 위기에 놓인 오랜 그의 연적 채인규(성혁 분)를 동행한다. 그리고 그의 도주를 눈감아 준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그 누구라도 더는 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최천중의 생각은 오랫동안 그를 죽이려고 했던 옛 벗 채인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최천중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오른팔과 다름없는 용팔용(조복래 분)을 잡아간 대원군의 앞에 최천중은 그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무릎을 끓는다. 그런 최천중이었기에 대원군의 목숨이라는 대의 대신, 기꺼이 희생양이 될 뻔한 두 소녀의 목숨을 앞세운 것이다. 지금까지 '대의명분'을 앞세웠던 '역사적 인물', '영웅'이라고 한 사람들의 행보와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대원군을 암살하러 갈 때에도 그 스스로 앞장섰던 최천중은 자신이 실패할 때를 대비하여 그와 함께 했던, 그를 따랐던 사람들을 도피시킬 장소를 마련해 놓는다. 그런 그들이 힘을 합쳐 최천중을 구했지만 그들을 마련한 연해주로 보내고 홀로 대원군을 찾아가 마지막 총구를 겨눈다. 

 

 

실패한 영웅, 최천중의 길 
그 마지막 대결에서 최천중은 한때는 뜻을 함께 했지만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길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대원군이 '왕권' 중심의 '왕권 강화'를 일관되게 고집하고, 그를 위해 다시 한번 자신과 손을 맞잡을 수 없겠냐며 애증의 권유를 최천중에게 했지만, 최천중은 말한다. 이제야 자신은 진정한 '왕재'를 보았다고. 늘 최천중이 다른 권력에 대한 야욕이 있을까 두려워했던 대원군은 그 말에 눈이 번쩍하지만, 최천중이 말한 '왕재'는 다름 아닌, '민중', '백성'이었다. 

명리학을 통해 권문 세가를 징벌하고 백성들을 위한 왕으로 고종과 그의 아비 대원군을 도왔던 최천중, 강화의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애썼던 강직했던 아버지를 도왔던 이래, 최천중의 화두는 늘 '백성'이었고, 그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숱한 시행착오 끝에 그가 도달한 곳은 더는 일개인의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는 '백성'들이 주체가 되는 '나라'였다. 왕조국가의 '지양', '민주주의'에 대한 '자생적'인 깨달음이자 '지향'을 '선포'한 것이다. 

끊임없이 백성들을 위한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대원군도, 명성황후도 도왔지만, 그들이 결국 도달한 곳은 '백성'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며 <바람과 구름과 비>는 최천중이라는 이상적인 개혁가를 통해 '민주주의의 탄생'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저 '예언'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살리려 하는 한 사람, 비록 그가 자신의 적이었던, 지나가다 본 가엾은 가족이었든, 혹은 적을 죽이러 들어간 암살의 현장에 등장한 소녀였든 그 한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경애에 대한 '실천'을 일관되게 실천하며, 민주주의 주체가 진짜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역사적 사실을 빗겨갈 수 없듯이 가상 인물인 최천중에 의한 대원군 암살은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실패였을까?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거둔 최천중은 그가 일찌기 마련해 놓은 연길리의 조선인 마을로 돌아간다. 이미 그곳에는 그를  따르던 삼전도장 사람들이 '마을'을 일구고 그가 미리 써놓은 '지침'에 따라 이제 '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 결국 '조선'이라는 난파선에서 최천중이라는 부표를 따라 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으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그들만이 아니다. 강화도에서 그가 살려준 소녀의 이름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여사였다. 그렇게 '최천중'은 이제 망해갈 조선을 구하기에 앞장 설 독립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고 드라마는 덧붙인다. 이렇게 <바람과 구름과 비>는 그간 역사물이 말해왔던 '영웅'과는 다른 영웅담을 논한다.

최천중은 실패했다. 그는 백성을 위한 권력을 옹립하지도 못했다. 그가 도운 대원군도, 명성황후도 결국 자신들의 권력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야욕에 눈이 멀어갈 때도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최천중은 최후의 수단으로 대원군을 '암살'하려 했지만 그 마저도 실패했다. 정말 그가 실패한 것일까? '거사'는 실패했지만, 최천중은 망해갈 조선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했다. 그런 최천중의 실패한 성공을 통해 <바람과 구름과 비>는 권력의 쟁취가 목적이 아닌 진짜  영웅에 대해 묻는다. 소의를 위해 대의를 희생하는 영웅, 대원군 시대라는 역사를 통해 길어낸 '우리 시대'의 영웅, <바람과 구름과 비>였다. 

by meditator 2020. 7. 27. 02:30

우리나라 가족 드라마에는 일종의 '전형'이 있다. 가족에게 닥친 어려움, 경제적이거나,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거나 하는 '위기' 상황에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은 '위기'를 기회로 다시 뭉친다. 얼굴 붉히며 싸웠더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을 모아 가족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그 함께 위기를 돌파하는 것으로 '가족'의 갈등은 어느 틈에 얼음이 녹듯 풀어지고 가족들은 함께 웃으며 그래도 '가족'이 최고여~ 하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만으로 그간 가족 간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 역시 가족이 행복하게 함께 웃으며 16회의 막을 내렸다. 그런 면에서는 여느 가족 드라마의 엔딩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함께 웃음에 이르는 그 과정의 해법은 그간 우리나라 드라마가 추구했던 방식과 다르다. 모두 함께였던 그간 가족 드라마와 달리, <가족입니다>는 단호하게 말한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제대로 서야, 개개인이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먼저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에 방점이 찍힌다. 

엄마가 떠났다
15회 마지막 장면, 엄마 진숙씨(원미경 분)는 가족들을 불러모은다. 저녁 시간, 예전 같으면 '엄마표 음식'으로 그간 엄마의 음식에 적조했던 가족들을 불러모아 한 끼를 챙겨먹이느라 애썼을 엄마가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고 오라 말한다. 한 명씩 찾아오는 은주(추자현 분), 은희(한예리 분), 지우(신재하 분), 세 명의 자식들을 앉혀놓고 엄마는 그간의 쌓인 감정을 폭발한다. 

은희가 헤어진 애인때문에 언니를 찾아갔을 때 언니가 날린 '팩폭' 때문에 무려 5년 동안이나 언니와 '의절' 아닌 의절을 했을 때도, 은주가 이혼을 했을 때도, 그리고 이제 막내 지우가 일언반구 말도 없이 집을 나갔을 때도, 그곳에 엄마, 아빠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마다 엄마의 가슴은 미어졌지만, 그렇게 무너져내리는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식들은 엄마에게, 아빠에게 의논 한 자락없이 늘 일방적으로 자신의 일을 결정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엄마는 '너희에게 가족은 뭐니?'라고.

엄마가 이렇게 그간의 설움을 폭발하면 나머지 가족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막내는 대번에 무릎을 끓었다. 그런 막내에게 아버지는 당장 집을 나가라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 은주도, 은희도 자신들에게 서운함이 켜켜이 쌓인 엄마의 마음을 풀고자 애쓴다. 

이 '일반적인 가족들의 노력'이라는 해법으로 여느 가족 드라마가 가는 '해피엔딩'의 길을 걸어가는가 싶었는데, <가족입니다>는 다른 선택을 한다. 엄마가 떠난 것이다. '졸혼'에서 한 발 더 성큼, 엄마가 가방을 싸들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1년 여, 엄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버텨내기 위해 자신을 버렸던 시간을 스스로 치유한다. 엄마의 버킷 리스트, 정처없이 떠나고 싶던 그 마음을 실천한 것이다. 

모두가 집을 떠났었다. 결혼을 하고, 혹은 독립을 하거나, 이제 막내는 '가족'이라는 부담스러움을 피해, 그리고 아버지 상식 씨는 '졸혼'을 하겠다는 엄마의 의견을 존중해 집을 나섰었다. 모두가 떠났을 때도 엄마는 집을, '가족'을 지켰다. 그런 엄마가 이제 떠났다. 

은주를 가지고, 은주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상식 씨와의 결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변해버린 상식 씨을 견디며 아이들을 품으며 가족을 버텨냈던 엄마, 그 시간은 결국 엄마에게 '졸혼'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결정하도록 했다. <가족입니다>는 '졸혼'에 이르기까지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친 엄마에게 스스로 '치유'의 시간을 준다. 가족으로 부터 받은 상처를 가족들로부터의 '위로' 대신 이제 엄마 스스로 한 사람으로 온전히 서는 것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가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웠던 엄마가 스스로의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시간이다.  그리고 엄마가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친 자신을 발길 닫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동안, 남은 가족들은 '집'을 지킨다. 

엄마만이 아니다. 사라져 버리려던 막내는 그 이유를 큰 누나처럼, 혹은 작은 누나처럼, 누나들에 휩쓸려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자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같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누군가 스스로 물음을 던졌던 막내 지우는 비록 '사기'에 휘말렸지만 '가족'을 떠나 온전히 '자신'만으로 서보려고 했다. 
 

   

 

따로  또 같이 
지나왔던 시간 동안 '자신의 비겁했던 열등감으로 인해 가족과, 아내와의 관계에서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태도고 일관했던 아버지가 '회개'하며 찾아온 엄마와 아빠의 '해빙 모드',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섣부르게 '졸혼'을 뒤엎지 않는다. 서로가 '졸혼을 해도 아이들의 부모라는 점에서는 '세트'라는 사실에 공감했지만, 아버지가 다시 지게차 운전 자격증을 따고, 엄마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며 서로가 당당한 사람으로 서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남이가?"가 아니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원심력으로부터 가족이라는 구심력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우리 사회는 늘 공동체라는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용해시키는 것을 우선하는 시절을 지내왔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세대에서 이제 더는 공동체가 개인의 행복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없는 시절이 되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삶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없는 시대, 이제 가족도 변해야 한다고 <가족입니다>는 말한다. 

아버지는 그간 엄마에 대한 오해를 풀었지만 '졸혼'을 선택한 엄마를 존중한다. 평생 부부로 살면서 하지 않았던 '존중', 그로 인해 나무 등걸처럼 딱딱해진 부부 관계의 굳은 살이 조금씩 풀어진다. 시작은 연민이었다. 어느 틈에 늙고 병들어 버린 배우자에 대한 연민, 하지만 여느 드라마들이 '연민'으로 퉁쳐버린 노년의 삶을 <가족입니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연민을 바탕으로 한 '존중'으로 끌어 올린다. 1년 여를 집을 떠나 떠도는 아내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아버지의 기다림에 엄마는 가족 여행을 가자는 아버지의 소원에 응답한다. 나이든 부부가 서로가 불쌍해서 함께 산다는 흔한 '화해'를 넘어 나이가 들어도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드라마는 결론을 내린다. 

 

 

서로 배다른 형제였다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을 알게되고 서먹해졌던 3남매의 관계는 끈끈한 핏줄 대신 의절을 할 만큼 이해할 수 없었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연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은주와 은희 자매는 은주가 홀로 감당하기 힘든 '이혼'의 과정에서 은희의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경계를 풀기 시작한다. 거기에  본인은 비난이 아니라 정당한 지적이라고 하지만 늘 동생들에게는 가차없이만 느껴졌던 은주의 '거리감'은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이질감의 벽을 허물자 그 속에 담긴 '진심'의 무게로 전해진다. 

하지만 제 아무리 어려운 시간을 곁에 있어줄 수 있지만 각자 삶의 과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세 남매 각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가족입니다>는 양보하지 않는다. 은주의 이혼, 은희의 복잡했던 연애사와 일, 그리고 지우의 도발적인 가출, 모두에 세 남매는 때론 힘이 되어주고, 달려가 줄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 일 뿐이다. 

그렇다면 각자도생해야 하는게 가족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각자도생'의 과제가 '가족'의 해체는 아니라고 드라마는 힘을 주어 말한다. 가슴 속에 앙금이 남은 채 '졸혼'을 한 어머니는 행복했을까? 남편 태형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리감으로 시달리던 은주가 외려 이혼을 한 후 전남편 태형과 편하게 대화를 하고 웃을 수 있듯이, 서로가 온전히 스스로 지켜낸 자존에서 부터 관계는 시작되어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어머니를 활짝 웃으며 반길 수 있는 각자의 건강함이 모여 아는 건 별로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by meditator 2020. 7. 22. 03:13

tv조선의 토,일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는 유일한 사극으로 5%대의 안정적 시청률을 확보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7월 19일 5.1% 닐슨 코리아 ) 이병주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10 권 분량의 방대한 내용을 21부작 드라마로 압축하여 전개, 매 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7월 18일 토요일 마지막 장면, 대원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고종이 최천중과 그의 아버지를 사면복권하며 최천중을 잡으려 군사를 풀었던 대원군의 허를 찌르는 '엔tv조선의 토,일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는 유일한 사극으로 5%대의 안정적 시청률을 확보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7월 19일 5.1% 닐슨 코리아 ) 이병주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10 권 분량의 방대한 내용을 21부작 드라마로 압축하여 전개, 매 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7월 18일 토요일 마지막 장면, 대원군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고종이 최천중과 그의 아버지를 사면복권하며 최천중을 잡으려 군사를 풀었던 대원군의 허를 찌르는 반격을 개시했다. 3년 전 대원군에 의하여 쫓기다 결국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이역만리까지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동안 사랑하는 여인 봉련은 대원군의 볼모가 되어 대원군이 원하는 미래를 점쳐주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돌아온 최천중은 자신의 적인 건 물론, 이제 경복궁 중건 등으로 백성들에게 장동 김문 못지 않게 원성을 사고 있는 대원군 이하응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우선 자신과 인연을 맺은 규수 민자영을 고종의 왕비로 간택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한편, 고종을 사이에 두고 대원군과 힘겨루기에서 밀리고 있는 대왕대비 조씨에게 접근하여 대원군 이하응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에게 전권을 위임해 줄 것을 요구한다. 섭정이란 미명아래 전권을 휘두르는 대원군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최천중의 복권은 그저 한 사람 최천중의 재등장 이상, 효(孝)를 내세워 허수아비 신세로 만들어 버린 고종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건이요, 정적인 대왕대비와의 힘겨루기에서 허를 찔린 형국이 되었다. 거기에 최천중의 후원을 받은 왕비는 호시탐탐 고종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최천중은 고종을 설득하고 대왕대비, 중신들과 모의하여 당상관 회의에서 대원군의 실각, 일종의 '명예 혁명'을 시도하는데, 7월19일 일요일 밤 방영된 19회에서는 야심차게 시도한 최천중에 의한 대원군의 퇴진은 바로 전날 발생한 경복궁에서의 화재 과정에서 당황한 고종에 의해 대원군이 먼저 선수를 치며 물거품이 되고 만다. 

대원군의 실각을 도모한 최천중 
똑같이 고종의 앞에서 마주한 최천중과 대원군 이하응, 하지만 바로 하루 차이에 방영분 속 상황은 하늘과 땅만큼 달라졌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고종, 그리고 그의 섭정자 대원군을, 이제 다시 자신의 손으로 물리고자 했던 최천중의 시도는 19회에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최천중은 일찌기 그의 오른팔과 같은 용팔용에서 '조선의 난파선론'을 피력한 바 있다. 난파선과 같은 조선,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망할 운명이니 일찌감치 스스로의 몸을 뺄 것인가, 아니면 난파선이라도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배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인가. 거기서 최천중은 후자의 운명을 선택했다. 멸문지화를 당하고 점바치가 된 신세에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재산마저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최천중.

그런 그가 자신의 '점바치' 능력을 활용하여 조선을 쥐고 흔드는 부패한 권력을 갈아엎고자 하는 바는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그는 대원군과 손을 잡고 장동 김문을 축출하는데 앞장섰고 성공했다. 그 뒤를 이어 그가 일찌기 왕재라 예언했던 고종이철종의 뒤를 잇고, 그의 아비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어 '섭정', 하지만 말이 '섭정'이지 실질적인 '국정'의 주인이 되었다. 

 

 

허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대원군 이하응과 백성들을 위한 권력을 세우겠다는 '개혁' 의지에서 의기가 투합했던 최천중,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후대의 왕이라 치켜세우는 최천중을 노여워하는 대원군은 이미 백성들을 위한 권력보다 자신의 권력이 우선이었다. 당연히 최천중과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다.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최천중은 그 '순진무구'한 개혁에의 의지로 호랑이한테 나라를 맡긴 셈이 되었다. 그의 사주 명리학적 능력을 활용하여 부패한 장동 김문을 밀어냈지만, 결국 그가 손잡은 건 또 다른 '권력'일 뿐인 셈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 손을 내민 건 훗날 대원군의 가장 큰 정적이 되는 명성황후 민자영이었다. 그의 의도야 어떻든 결국 최천중은 19회까지만 보면 그의 알량한 개혁에의 열망으로 조선을 구렁텅이로 빠뜨려가는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이른바 주인공의 캐릭터 붕괴일까? 그것보다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난파선에 기꺼이 남고자 하는 '영웅적 캐릭터'가 '성장'해 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부패한 권문 세가, 그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꺼이 기며 저잣거리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던 대원군 이하응이 보인 모습은, '왕조 시대'에 '개혁'을 꿈꾸던 최천중에게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왕권'은 권력의 맛을 본 순간, 이미 더 이상 '백성'이 없다. 어떻게해서든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욕망'의 정치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대원군을 '결자해지'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유부단하기 그지 없는 고종, 그리고 거기에 조력자일 줄 알았지만 또 다른 복병이 될 명성황후의 야망은 '위로부터'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꿈꾸던 저잣거리의 영웅 최천중에게 결국은 '명예롭지 않은' 선택의 길에 대한 고민을 안길 것이다. 

왕조 시대의 시대적 한계 안에서 백성들의 '안온한 삶'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대원군도, 민자영도 결국은 백성들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면, 그 어떤 왕도, 왕의 측근도 백성들의 평안을 도모해 줄 수 없다면, 결국 최천중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인가? 그것이 <바람과 구름과 비>가 마지막에 보여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by meditator 2020. 7. 21.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