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에서 토, 일 밤 10시 50분에 방영 중인 <바람과 구름과 비>는 1977년 2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10권 분량의 대하 장편 소설이다. 5백년을 이어왔지만 김씨 세도가에 휘둘리는 무능한 임금 철종, 훗날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이 될 이하응은 자신의 야심을 숨기고 투전판의 개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렇게 중병을 앓고 있는 조선의 끝자락에서 소설가 이병주는 회한의 역사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펼쳐보이고자 하였다.
그런 이병주 원작의 소설이 <야경꾼 일지(2014)>의 방지영 작가의 손을 빌어 20부작의 드라마로 새롭게 태어났다. 자신의 아들을 왕재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던 야심가 최천중은 장동 김문의 모략으로 강직한 관리였던 아버지를 잃은 청년 최천중으로 거듭났다.
최천중의 아버지 최경은 강화현감이었지만 백성들이 그의 행차에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생업에 종사하게 할 만큼 '백성의 삶'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권문세가이던 장동 김문에게는 거추장스러웠던 인물, 나라에 바칠 세금을 빼돌리려던 김문은 그것을 실은 조운선을 불태우고, 그 죄를 최경에게 묻는다. 도망칠 수 있었지만 아들을 역적의 아들로 만들고 싶지 않아 거부한 최경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겨우 살아난 최천중은 '요절'할 운명인 그를 예언한 '산수도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끊어진 길을 다시 잇고자 '사주 명리학'의 통달한다.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줄 뿐이다. 거처로 정한 배오개의 주막에서 공부했던 '사주 명리학'으로 '도사'로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역적의 아들이라는 '오명'으로 인해 결국 장동 김문에 잡혀 이하응과 이하전의 역모를 내통한 '죄인'의 처지가 된 최천중(박시후 분)은 그를 사랑하는 옹주 봉련(고성희 분)의 도움으로 피신하지만 조선 팔도 장동 김문의 세도 세상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최천중은 도망자가 되는 대신, 장동 김문의 잔치에 '점바치 최천중'이 되어 등장한다. 무능했던, 거기에 이제 병까지 얻은 철종의 후사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시점, 앞날을 살펴볼 줄 아는 사주 명리학을 무기로 그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왕재임을 '선언'한다. 죽을 자리에서 삶을 구걸하는 대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의 덜미를 잡는 방식으로, 그 스스로 선언한 삶의 길을 만든 것이다.
그의 이런 '선언'은 동상이몽으로 서로 다른 왕재를 밀고 꿈꾸던 이들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최천중의 존재감을 드러내 스스로 목숨을 구명할 기회를 얻게 된다. 무능한 철종에게 불려가 왕의 권위는 후세를 원하는 사람으로 잘 이어가는 것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며 평생 김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던 철종을 솔깃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장동 김문의 손아귀에서 왕실의 권위를 복권시키고 싶은 신정왕후에게 후사의 힌트를 쥐어준 것처럼, 다시 한번 자신들의 손으로 꼭두각시 왕을 만들고자 했던 장동 김문 역시 최천중의 '예지력'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든 것이다. 즉,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그 누군가를 왕재로 삼고 싶지만, 자신들의 내세울 카드에 대해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최천중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읽어줄 수 있다는 '능력'을 내보이며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넘어, 그 '세력의 중심'에서 '키'을 쥔 인물로 스스로를 부상시켜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 존재의 부상 능력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려줄 뿐이라고 정의내리는 최천중, 그의 예지력은 그가 공부한 '사주 명리학'을 넘어 권력의 판세와 그들의 욕망을 읽어낸 '혜안'의 산물이다.
물론 그런 그의 '도발적 점괴'가 그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차기 왕좌의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던 이하전에게 '단명'할 것이라 예언하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와지기도 하지만, 외려 그런 이하전에게 훗날 고종이 되는 이재황을 방패막이로 삼으라 하며 회유하며 그가 자신을 책사로 여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보이며 선언한 '왕재' 이재황의 아버지 이하응은 그런 최천중을 개처럼 바닥을 기며 보존해온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 총을 겨누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하응의 위협 역시 왕의 앞에서 그에 대한 오해를 풀어 그가 자신을 적으로 삼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최천중, 화려한 언사로 권문세족의 홀려 재산을 털어내고 천하를 도모하고자 했던 원작의 야심가는 멸문지화의 운명에서 겨우 살아나 '명리학'을 무기로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의 그 '욕망'을 읽어내 한낫 점바치라는 비천한 존재에서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선 신선한 캐릭터로 거듭난다.
스스로 길을 만드는 영웅 하지만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최천중이란 인물이 매력적인 건 그저 그저 '권력'을 자신의 세 치 혀로 좌지우지하는 그 '매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직한 강화 군수였던 아버지 아래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 애를 썼던 청년은 그 스스로는 세상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하응의 말처런 그의 운명은 그를 세상의 뒷전에 놔두지 않는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다시 맞아 죽을 뻔하던 적도사을 거침없는 일갈로 구해내던 천중의 기개는 갈곳없는 아이들을 보살펴주던 유접소가 장동 김문의 온실로 인해 내쫓기는 처지에 이르자 홀로 나서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칼을 맞기까지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몇 수 십장의 탄원서를 마다하지 않겠다던 그의 정성이 이하응을 움직이고 다시 이하전을 움직여 유접소를 구해내지만 장동 김문의 권세를 그것을 무기력하게 한다. 결국 그 스스로 아이들을 그가 머무는 주막에 거두는 최천중, 그런 그의 명성은 저잣거리에 머물고, 전주에서 관리의 횡포에 억울한 백성들은 관이 아닌 그를 찾아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하전을 찾는다.
이하전이 그렇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온 백성들을 장동 김문을 위한 공격의 빌미로 삼고자 할 때, 그렇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는 왕재가 장동 김문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분노를 폭발하는 최천중, 거기에 <바람과 구름과 비>가 그려내고자 하는 영웅의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작에서 천하를 도모하고자 삼전도장을 만드는 최천중, 드라마는 그 천하에 대한 야심을 청년 최천중의 강직함과 올곧음으로 인한 '영웅 서사'로 변화시킨다. 곪을대로 곪은 나라, 그 속에서 자기 가문과, 자기 자신의 끊어진 길을 '명리학'이라는 역설적 무기로 만들어가는 최천중은 그 스스로 권력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권력에 욕망을 애초에 지니지 않음으로 인해, 그리고 '백성의 삶'에 중심을 놓치지 않음으로 인해 조금씩 저잣거리의 영웅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의적이었던 홍길동이 율도국을 만들 듯, 한때 양반이었으나 비천한 점바치가 권력을 주무르는 최천중이 품을 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드라마는 10권의 소설을 21부작이라는 짧은 서사 속에 풀어내기 위해 매회 군더거기 없는 박진감넘치는 전개로 관심을 끌고 있다. tv조선이라는 방송국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아쉬운 지점이다.
올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이 <괴물>에 이어 그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작품이 바로 2013년작 <설국열차>이다. 기상이변으로 꽁꽁 얼어붙은 지구, 그로부터 17년 동안 지구 궤도를 순환하던 설국열차. 하지만 17년이란 시간 동안 빙하기 속에서 생존이 무색하게 열차 속 인간 세상의 계급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노정하고 있었다. 바로 그 '설국 열차'가 드라마로 돌아왔다.
영화 <설국열차> 이후 7년, 미국 <TNT> 10부작 드라마로써 <설국 열차>를 발표했다. 총괄 프로듀서로서 봉준호 감독이 참여한 이 시리즈는 영화 <큐브(1997)>를 쓰고 SF시리즈 <오펀 블랙>의 프로듀서인 그램 맨슨이 총괄 책임을 맡았다. 넷플릭스를 통해 시리즈의 첫 회 미국 내에서는 330만 명이라는 폭발적인 조회수를 보이며 넷플릭스 인기작으로 순항 중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소 설국열차 포스크 아포칼립소(인류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세계) 드라마를 표방한 <설국열차>는 빙하기를 맞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윌포드가 부자들의 돈을 모아 '설국 열차'를 만드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열차가 떠나는 순간, 하지만 예정과 다르게 빙하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차에 '무임승차'한 일군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무력으로 그들을 '제거'하려 하지만 '생존'에의 갈망은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열차에 오르도록 만들고, 열차의 꼬리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로 부터 7년, 열차는 여전히 지구 궤도를 순항 중이다. 하지만 꼬리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열차 꼬리칸에 올라 탔지만 아내가 살기 위해 그를 놔둔 채 앞 칸으로 가버린 레이턴(다비드 디그스 분)는 꼬리칸의 동지들과 '혁명'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의 말대로 전 열차의 승객 3000 명중 70%를 차지하는 삼등칸과 꼬리칸 사람들, 하지만 대부분의 특혜는 열차를 만드는데 돈을 댄 1등칸 승객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드라마로 온 <설국열차>는 영화 <설국 열차>의 주제가 된 꼬리칸의 '혁명'을 그대로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영화 초반에 그랬듯이, 그리고 드라마에서 언급되었던 3년 전 혁명처럼 막상 '봉기'를 일으킨 꼬리칸 사람들은 단 한 칸을 나아가지 조차 못한 채 무참히 진압 될 상황이다.
그때 그 상황을 무마하고자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꼬리칸 혁명 동지였지만 앞서 제동수(드라마 속 일종의 경찰 역할)들에 의해 '차출'되었던 레이턴이다. 열차에 오르기 전 강력반 형사였던 레이턴, 그를 차출한 이유는 바로 열차 내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3000 명의 열차 탑승 인원 중 유일하게 '형사'인 그였기에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호출'된다.
드라마로 온 <설국 열차>는 꼬리칸의 '혁명'이라는 기본적 주제를 '살인 사건'이라는 에피소드를 통해 '변주'하며 묵시론적 주제에 '수사물'의 장르적 재미를 더한다.
성기와 신체 일부를 절단 당한 채 삼등칸 아래 쪽에 숨겨져 있던 남성 시체, 하지만 그저 '살인 사건'처럼 보였던 사건은 알고보니 그 남자가 레이턴을 버리고 간 아내와 함께 아이를 만들려던 사람이었던 걸로 밝혀지며 떠나간 아내와 레이컨을 엮이게 만드는가 하면,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삼등칸에 있던 스파이였음이 드러나며 일반적인 살인 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만든다.
또한 이와 같이 신체 일부를 훼손했던 사건이 3년 전에 있었고 그 사건의 진범으로 추정되었던 여자가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며 3년 전 사건의 처리 문제도 따르게 된다. 거기에 사건을 조사하며 드러나는 1등칸에서부터 꼬리칸에 이르기까지 커넥션으로 이어진 '마약 사건'은 열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멜라니(제니퍼 코넬리 분)의 통제에 이상 신호를 드러내게 된다.
방주인가 계급의 요새인가 살인 사건으로 만나게 된 설국 열차의 총 매니저 멜라니와 꼬리칸의 레이턴, 멜라니는 호의적 조건으로 레이턴을 회유하려 하지만 꼬리칸의 '혁명적 사명'에 투철한 레이턴은 사건의 실마리를 빌미로 '혁명'의 기회로 삼고자 하며 부딪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갈등은 '설국열차' 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데서 비롯된다. 열차에 위기가 생길 때마다 꼬리칸에 정전이 오고, 배식을 줄어드는 등 핍박에 시달려오던 레이턴에게 열차는 계급 체계의 견고한 요새와도 같다. 그래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열차의 다수를 점하는 꼬리칸이 엔진을 장악하고 열차를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극 초반 그 정체가 밝혀지듯이 열차를 책임지는 멜라니에게 열차는 3000 명의 생명을 담보하는 빙하기의 방주이다. 그녀는 때론 모순되고 부조리하더라도 돈을 낸 1등칸의 이해와 안녕을 충실히 보장해 주고, 나머지 칸의 생존도 지켜낼 수 있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라 여겨진다.
드라마는 이런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이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가운데, 살인 사건을 계기로 드러나는 마약 거래처럼 열차의 또 다른 '그림자'가 곁들여지며 2시간 짜리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복잡다단한 사회적 체계를 가진 세상으로서의 설국 열차를 보여준다. 슬럼가와 같은 3등칸, 환락의 중심 나이트 칸, 그리고 거기에서 실세가 된 '청소부' 그룹 등 통제될 수 없는 열차 속 세상이 열린다.
거기에 정상 궤도를 달리고자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지 7년이 된 기차는 매번 동력에 위기를 겪게 되고, 열차에 들이닥친 눈사태로 주된 단백질원이었던 소가 '몰살'당하며 소고기 없는, 그리고 소의 메탄 가스가 없는 농작물의 생장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당장의 위기는 나이트 칸에서 벌어진 시끌벅적한 격투기 쇼 눈요기로 시선을 돌렸지만 떨어진 동력은 꼬리칸의 존재 자체 위기로 이어질 상황, 안팍의 위기 속에서 혁명과 생존, 그리고 순조로운 열차 운행이라는 저 마다의 미션이 매주 한 회차씩 공개될 <설국 열차>의 주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처음 '여보'라는 말을 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다. 저기요, 있잖아요. 결혼을 하고도 한참을 그렇게 불렀었다. 그러던 것이 '여보, 당신'이 오래된 냉장고처럼 익숙하다 못해 권태로운 일상이 된 시절이 되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졸혼'이라는 단어가 주변에서 들린다. 아이들도 있고 그러니, 그리고 이제 와 '이혼'이라 하기도 그러니, 결혼을 졸업하겠다는 것이다. 그 졸혼을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의 어머니 진숙(원미경 분)이 말을 꺼내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살면서 이혼은 커녕, 졸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도 진숙이 목이 메어 졸혼을 하자는데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무게가 온전히 다가왔다.
진숙 씨하고 부르던 남편 상식(정진영 분)이 어느덧 어이, 저기하다, 은주야, 은희야, 지우야 하며 아이들 이름으로 아내를 부른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을 보고 말하는 게 싫어 아이들 방을 열고 아빠 식사하시라고 시킨다. 아내를 보며 설레던 남편이었는데, 이제는 아내가 말만 시키면 '가자미 눈'을 뜨고 바라본다.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내팽개치기 십상이다. 시간의 힘이다.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온 시절이 무릎을 끓고 반지를 전해주던 그 설레이던 커플을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내 진숙은 '졸혼'을 요구했다.
졸혼을 선언한 아내 아내의 졸혼 요구에 남편을 뜨던 부황을 집어 던졌다. 집을 팔아 나누자는 말에 화를 버럭 낸다. 그리곤 맘대로 하라더니 늘 가던 산으로 휭하니 떠나버렸다. 아이들은 제 각각이다. 똑 부러지는 맏딸은 평생 집안 살림만 하는 엄마가 어떻게 혼자 살려고 하냐며 현실적인 질문으로 진숙의 의지를 꺽으려 한다. 뭐든 엄마 맘대로 하라는 작은 딸이지만 그 말이 진숙의 복잡한 속내를 덜어주지는 않는다.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한 막내 아들은 자신을 독립할 수 없다며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진숙은 '독립'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산행을 갔던 남편이 행방불명되더니, 머리를 다친 채 돌아왔다. 지나온 세월을 다 잊은 채 22살 그녀만 보면 설레던 젊은 상식이 되어.
그렇게 <가족입니다>의 1,2회는 기억 상실이 된 아버지에게 발목이 잡혀버린 엄마의 졸혼 전선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평범한 가족', 이 말이 맞을 것이다. 22살의 숙이씨만 불러도 설레이던 그 젊은 상식은 온데간데 없고 가부장적인 고집불통이 되어버린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랴, 아이들을 키우랴, 자신을 내세워 본 적도 없이 늙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형제라지만 늘 만나면 아웅다웅 제 각각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 때문에 엇나기기가 십상인, 그래서 가족이라지만, 말이 가족이지 서로의 속사정은 뒤춤에 찔러둔 채 살아가는, 그래서 때로는 남들보다도 서로를 더 이해하기가 힘든, 아니 이해하기가 싫은 관계들 말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22살이 된 아버지 <접속>을 비롯하여 <텔미 썸씽>, <후아유>,<황진이> 등의 각본을 써왔던 김은정 작가가 <우리집에 사는 남자(2016)> 이후 오랜만에 돌아왔다. 전작과는 다르게 우리네 사람 사는 모습을 물씬 느끼는 '가족' 이야기로 돌아온 김은정 작가는 졸혼의 위기를 맞이한 이제 막 노년 초입의 부부에 촛점을 맞춘다. 거기에 자존심이 세지만 오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채 각방을 쓰며 살아가는 첫 딸 부부와, 오래 사귀던 연인의 바람으로 지난 5년간 연애 한번 하지 않고 지내왔던 둘째 딸의 이제 새롭게 시작된 사랑 이야기가 엇물리며 엮인다. 자신들의 삶도 충만할 정도로 버거운데 거기에 빨간 불을 키며 가족의 이름으로 소환되는 일들에 아들과 딸들은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가족'이라 달려간다.
정진영, 원미경, 추자현, 한애리 등 그 누구 하나 빠지는 이 없이 어루러지는 호연과 함께 모처럼 진지하게 몰입할 수 있는 가족 드라마의 등장이다. 막장이 아니면 '가족'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 거 같은 시절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가족 이야기들을 통해 모처럼 가족에 대한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게 만든다.
젊은 상식이 아내에게 숙이씨 할 때마다 흠칫하는 늙은 숙이 씨의 표정은 그 나이쯤 되는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아내가 무색하게 말끝마다 그 시절의 상식이가 된 남편 덕분에 그 젊은 상식처럼 설레이며 가정을 잘 꾸려가려 애쓰던 시절을 복기하게 된다. 참 오래된 시간이다. 과연 그 오래된 시간의 결이, 그 역사의 무게가 아내 숙이씨의 졸혼 선언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 그저 졸혼의 무력화가 아니라 이 모래알 같은 가족을 다시 '재건'시킬 수 있을까?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HBR)는 1922년부터 하버드 대학이 출간한 대표적인 경영학 잡지이다. 최근에는 ted처럼 동영상으로 서비스되는 HBR은 전세계적으로 비지니스적 도전에 지적 영감을 주는 대표적인 사이트로 자리매김하였다. EBS는 이런 HBR의 콘텐츠에서 착안하여 매주 월요일에서부터 목요일까지 15분간 저명한 스토리텔러들을 초빙하여 국내외 기업들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 비지니스의 담론을 마련하고자 한다.
특히 지난 5월 25일 부터 방영된 EBS 비지니스 리뷰(이하 EBR)에서는 2019년 지난 10년간의 급격한 시장 변화를 핸드폰을 손에 든 인류, 즉 포노 사이엔스라는 신인류의 등장으로 해석한 <포노사피엔스>의 저자 성균관대 기계 공학과 교수 최재붕 교수를 초빙하여 팬데믹 시대를 분석한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바라보라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분야는 바로 '택배 문화', 언텍트 소비 시스템이다. 그 시작은 미국이다. 1994년 아마존이 시작했던 온라인 배송 사업은 1995년 이베이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1996년 인터파크가 발빠르게 그 대열에 참여했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전자 상거래 대표 기업을 든다면 전 세계 온라인 상거래의 69%를 점유하고 656조의 이익을 남기고 있는 마윈의 알리바바이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진단하는데 있어서 마윈의 이야기는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최재봉 교수는 2003년 사스의 위기를 기회로 삼은 마윈의 성공 사례에 대해 조금 더 면밀히 접근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는 것은 이미 하고 있는 것이라며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지니스적 명언을 남긴 마윈, 그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곳에 바로 '기회'가 있음을 역설한다.
그래서 2003년 사스 동안 어떻게 재택 근무를 했는가 그 경험치를 분석하는 한편, 400 여명이 동시에 재택하며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할 수 있었던 그 방식을 사스로 인한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전의 기회로 삼는다.
이제는 대표적인 전자 상거래 기업의 대표였던 마윈은 당시 돈이 없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던 그는 그 이전의 사업이라 하면 '자본'을 앞세웠던 방식을 탈피하여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는 디지털 플램폼 시대에 착안했다. 그리고 이런 마윈의 선택은 이어령 선생의 '자본 권력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명지명에 통한다.
또한 마윈은 흔히 이런 사업을 이끄는 사업가들과 달리 공대 출신도 아니고, 인터넷에 능하지도 않았다. 알리바바에는 '마위 테스트'가 있듯이, 마윈처럼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쓸 수 있을 시스템에 착안했다. 즉,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도 결국은 기술보다 '인간,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먼저였던 것이다.
거기에, 마윈은 계획 자체를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문명 교체기, 판이 바뀌고 일자리가 바뀌는 상황에서 장기 계획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데이터에 기반하여 고객의 요구에 기반한 '에자일 경영(작업 계획을 짧은 단위로 만들고, 시제품을 만들어 나가는 사이클을 반복함으로써 고객의 요구 변화에 유연하고도 신속하게 대응하는 개발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경국 소비자의 마음을 사고, 소비자의 움직임에 따라 사업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명의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 그렇다면 그 마음을 사야하는 이 시대의 소비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여기서 코로나 시대에 유명해진 또 한 사라마 오드리 탕이 등장한다. 마스크 앱을 개발하여 발빠르게 코로나 사태에 대처한 대만의 디지털 총무장관, 그는 시빅 해커(시민 계발자 ) 출신의 젊은 관료이다.
코로나가 터지고 마스크가 전국민적으로 필요하게 되자 이건 반드리 앱이나 웹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오드리 장관은 이를 자신이 속해있던 대만 개발자 그룹 '기브 제로'에 의논한다.
정부가 하는 일을 0부터 다시 생각해 본다는 이 젊은 그룹, 바로 여기서 최재붕 교수는 포노 사피엔스가 만드는 표준의 차이를 주목한다. 즉, 기존의 사회가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오늘날 포노 사피엔스는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 맵을 만든 이동훈군이나 중3 학생이 만든 '코로나 나우' 역시 같은 사례다. 개발자들이 자신이 개발한 소스 코드를 공유하고, 그걸 '오픈 소스'에서 공유해서 배운 사람들이 현실에 필요한 각종 앱 등을 만들어 내는 이런 상황은 이전의 폐쇄적인 관계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초등학생도 마음만 먹으면 커뮤니티 등에서 자신이 필요한 지식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는 상황, 포노사피엔스에 기반한 시대는 지식의 표준이 변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의 백과사전을 만든다? 이 불가능할 것같던 일이 누구나 편집을 하고 지식을 올리고, 이에 대한 리뷰를 통해 지식의 정제되는 '집단 지성'의 과정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혈연, 지연, 학연이 아닌 '네트워크연'의 현실태이다.
표준의 변화가 새로운 시대를 일지기 1903년 헨리 포드는 그 이전에 숙련된 장인에 의해 만들어 지던 자동차를 도축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여 대량 생산 체제로 생산해 냈다. 그 덕분에 2000 달러이던 자동차는 800 달러가 되었고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바로 이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는 2차 산업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 컨베이어 벨트가 오늘날 다른 '표준'을 만들어 내고 있다. 피자 배달 사업, 더 새로울 것이 없을 것같은 이 사업에 컨베이어 벨트가 등장했다. 고객이 주문을 하면 로봇이 만들고 사람이 토핑을 한 피자는 다시 로봇이 오븐에 넣고 배달 트럭에 실린다. 그리고 고객에게 도착하는 동안 구워진 피자는 고객에게 가장 맛있는 따뜻한 상태에 전달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로봇'이 아니다. 바로 '고객이 가장 맛있는 상태에서 받는 피자'를 주목해야 한다고 최재봉 교수는 강조한다. 소비자가 주문하여 3D 프린터를 활용하여 로봇이 조립했던 신발 공장이 기술을 최첨단이었지만 결국 소비자의 요구에 호응하지 못하여 망했던 것처럼 기술보다 중요한 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소비자의 요구에 호응하여 각광받고 있는 대표적 제품으로 '드론'의 예를 든다. 드론의 등장과 함께 '드론 택시'까지 섣부르게 예측되던 2000 년대, 하지만 드론은 배터리가 오랜 시간과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는, 즉 30분 이상 날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 대해 프랭크 왕은 사진과 영상을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 스마트폰처럼 드론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의 영상을 찍어 공유함으로써 그 한계를 돌파한다.
물리적 한계의 기술적 극복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드론으로 대신한다는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제 드론은 사진 촬영은 물론, 대규모 방역이나, 건설 현장 사이의 보조적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결국은 이 시대의 소비자, 포노사피엔스의 마음을 사로 잡아야 드론이 날고, 로봇이 피자를 굽는 시대에도 결국 기술보다 중요한 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포인트이자, 표준이라고 최재붕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소비자는 더 이상 예전에 TV를 통해 수동적으로 광고를 흡수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다. 저녁 7시 이후 가장 많이 보는 미디어 매체가 유투브인 세상, 2,30대 젊은이들이 물건을 사기 전 가장 많이 참조하는 상대가 '유투버'인 세상에서 소비자들은 이제 모든 걸 내 의지대로 선택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펭수와 BTS라고 최재붕 교수는 예를 든다. 그저 캐릭터를 넘어서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는 펭수 캐릭터, 이에 소비자들은 스스로 자발적 팬덤을 만들어 높은 조회수로 자신들의 호의를 증명한다.
소비자가 선택하면 높은 광고비가 없어도 거대한 성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가 BTS이다. 2013년 데뷔한 BTS, 여느 신인 아이돌 그룹처럼 방송 기회가 적었던 BTS는 방송 대신 자신의 일상을 유투브를 통해 생중계하기 시작한다. 잦은 소통으로 팬덤을 만들어 가던 BTS, 이에 미국에서 폭발적인 팬덤이 발생하고, 2019년 AMA에서 수상을 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렇게 전 세계 문명이 포노 사피엔스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 팬덤 방식으로 재편되는 세상, 기술의 발달은 달라진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 인간의 마음'이 놓여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때 새로운 비지니스 성공의 기회가 열린다고 최재봉 교수는 결론 내린다.
4회에 이른 최재붕 교수의 리뷰는 마윈, 오드리 탕 등 새롭지 않은 사례에 대해,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 이 시대의 신인류 포노사피엔스, 그들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표준, 그럼에도 그 중심에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함에 대한 강조는 코로나 시대 이후 본질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제시한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시즌 1이 마무리되었다. 쌀쌀하던 봄, 날씨보다도 더 스산하게 우리를 찾아왔던 코로나 19로 한껏 위축되던 시절 우리를 찾아와 장미가 만개하는 5월 말에 이르기까지 오랜 벗처럼 시청자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산부인과 의사 석형(김대명 분), 밴드를 하자며 오랜 친구들을 불러 모으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사고로 죽고, 아버지의 외도와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어머니를 쓰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가정사의 와중에 아내가 떠났다. 그래서 석형은 아픈 어머니와 함께 오롯이 '혼자'의 삶을 감수하고자 한다.
1999년 함께 의대에 입학했던 친구들은 어느덧 마흔 줄이 되어 율제 병원을 이끄는 중요 교수진이 되어 있었다. 간담췌외과 이익준(조정석 분), 소아외과 안정원(유연석 분), 흉부외과 김준완(정경호 분), 신경외과 채송화(전미도 분), 그 친구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를 하기 위해 이용했다는 석형의 자조적인 고백에 친구들은 어림없는 소리말라며 콧방귀를 끼고 먹던 자장면에 집중한다. 이렇게 '츤데레'스럽게 다정한 '벗'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1년이 12부작이라는 짧고도 긴 서사 속에 담아졌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12회, 도대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은데 하는 시청자들의 조바심이 무색하게 율제 병원은 바삐 돌아간다. 자신이 하던 '키다리 아저씨'의 자선 사업을 친구 송화에게 넘긴 채 신부가 되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려 했던 안정원 교수는 씽씽카를 타다 다쳐 간을 절제할 지경에 이른 어린 환자를 살리기 위해 며칠째 병원을 떠나지 못한 채 노심초사한다. 친구들이 소아 중환자실이 정원이의 방이라고 농담삼아 하듯 자신의 어린 환자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오갈 때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정원, 그런 정원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시킨지 오래된 리조또를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건 그 환자의 예후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수술로도 지혈을 할 수 없었던 환자의 부모님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더는 해드릴 것이 없다는 고백을 준완은 할 수 밖에 없다. 대기가 길어 환자들의 짜증이 폭발할 지경에 들어온 만삭의 산모에게 석형은 안타까운 결과를 알려야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채송화 선생은 환자의 코마를 선언한다.
그렇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지난 12부 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이 '현장'이 바로 삶과 죽음이 오가는 병원이었음을 다시 한번 환기 시킨다. 뱃속에 아이를 잃은 산모의 통곡이 길게 이어진 후, 마치 판도라의 상자 구석에 숨겨져 있던 희망이 뒤늦게 나타나듯, 12부 내내 석형을 안타깝게 했던 조산의 위험이 있던 산모에게 그 위험의 고비가 넘겨졌음이 알려지는 '희망을 남기며 삶과 죽음을 오가던 병원 이야기는 한 시즌을 마무리한다. 남편에게 간 이식을 해주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에도 자신은 이식을 할 수 없다며 울면서 말하던 아내의 인간적인 고뇌가 풀리며 이곳이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임을 확인한다.
삶의 영역에 헌신하는 이들 그리고 그곳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삶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12부 내내 신부가 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던 정원, 소아외과 의사가 필요하다던 병원장의 부탁도, 단 하나 남은 막내 아들만은 엄마를 외롭지 않게 해야 한다던 엄마의 간절함도 정원의 결심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만 보면 저절로 얼굴에 함박 웃음이 지어지고 죽음의 길에 나설지도 모를 아이를 놓칠 수 없어 며칠 밤을 세워 조바심을 내던 그 시간이 저절로 정원의 마음을 돌려세운다. 조금 더 많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정원은 그렇게 송화의 '찬성'을 얻으며 다시 병원에 남는다.
석형은 어떨까? 그토록 석형과 어머니를 힘들게 하던 아버지가 떠나면서 뜻밖에도 사업을 남겼다. 유언으로 석형에게 아버지 대신 회사를 이끌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뜻밖의 '횡재'와도 같은 유언에 '시간이 아깝다'고 딱 잘라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 그 중심에 환자들이 줄지어 기다리는데도 자상하게 산모들을 보살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한 아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혹은 아이를 잃은 산모의 마음을 자상하게 헤아리는 산부인과 의사 석형이 있다.
준완이라고 다를까.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던 익순이 유학가던 날, 준완은 포기할 뻔했던 환자를 살리기 위해 긴 수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와 익준이와 컵라면 한 그릇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그제야 자신이 익순의 출발조차 챙기지 못했음을 깨닫고야 만다.
기꺼이 신의 소명을 거둘 수 있는 곳,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조차 잠시 접어둘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슬기로운 의사'들이 살아왔던 지난 1년의 율제 병원이다.
물론 막상 병원에 가면 환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모니터만 들여다 보고 5분은 커녕 6달을 기다려 1분만에 진료를 마치는 현실에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 의 사람 냄새는 어쩌면 '환타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코로나 사태에 있어 세계 그 어느나라 보다 발빠르게 대처하여 안정적 시국을 맞이한 데는 '헌신적이고 책임감있는 의료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듯이, <슬기로운 의사 생활> 속 때론 어른이 같지만, 자신이 맡은 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책임감있는 어른'이었던 주인공과 그 주변 의료진들의 모습이야말로 코로나에 지친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세상엔 믿을만한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우정어린 힐링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보고 나면 어쩐지 나도 좋은 어른으로 살고 싶어지게 하는, 그래서 더욱 그 좋은 친구들과의 잠시 이별이 아쉽다.
'운명같은 사람이어라. 보고 또 싶은 가인이어라.' 이건 tv tv 조선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 트롯>의 우승자 송가인의 2019년 정규 앨범에 실린 곡이다. 송가인의 이름을 절묘하게 살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담은 이 곡은 또한 이제 송가인이 태어난 진도 고향집을 찾아갈 정도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송가인바라기'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트롯'이 대세다. 2019년 <미스 트롯>에 이어, 2020년 <미스터 트롯>까지 tv조선의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은 18.114%에서 35.711%까지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런 종편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은 역으로 지상파 프로그램들이 앞다투어 출연했던 가수들을 초빙하고, 당대 최고의 개그맨 유재석이 <놀면 뭐하니?>를 통해 트롯 가수 유산슬로 데뷔하는가 하면, <뽕숭아 학당>, <나는 트롯 가수다>, <트롯신이 떴다> 등 트롯 가수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프로그램을 편성하며 트롯 붐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시작이자 중심에 <미스 트롯> 우승자인 송가인이 있다. sbs스페셜은 송가인을 중심으로 2020을 달구고 있는 트롯 열풍에 대해 알아본다.
송가인과 함께 불붙은 트롯 열풍 네이버에서 코로나 사태의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비대면 라이브 콘서트에 송가인이 출연하자, 전국이 들썩인다. 서울, 부산, 광주, 경북 전국에서 송가인의 팬들이 송가인팬클럽을 상징하는 핑크빛 옷과 모자를 쓰고 모여 축구장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형 현수막을 들고 응원을 한다.
어린 아이들도 송가인이 불렀던 '용두산아~'를 자연스럽게 읊조리는 현상, 트롯 관련 검색량이 이전 연도에 비해 10배나 늘었다.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과 스타 탄생 송가인이 대중들의 관심을 폭발시킨 것이다. 나이든 세대만 즐기던 '흘러간 옛노래'라는 인식이 변했다. 소비 세대가 달라졌다.
송가인, 유산슬 등의 곡에 참여한 김지환 등 트롯 작곡가들도 더불어 바빠졌다. 트롯에 대한 관심과 함께 다른 장르 뮤지션들이 트롯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2019년 신곡 중 50% 이상이 트롯 관련 곡이다. 음원 소비량은 송가인의 등장과 함께 108%까지 늘어났다. 관객수도 송가인의 등장 이전보다 3배나 증가했다.
지역 축제나 전전하던 트롯이 이제는 방송가를 점령했다. 송가인이 라디오에 출연하던 날 중년의 팬들은 송가인 얼굴을 한번 보기 위해 몇 시간 째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보는 수동적인 팬질에서 머무르지 않느다. 팬클럽들이 모여 아이돌 팬클럽처럼 스트리밍 활용법을 배우고 연습을 한다. 핸드폰을 서너 개씩 돌리며 송가인 노래 음원 순위 상승에 적극 참여한다. '찍덕'도 등장한다. 70대 찍덕인 윤정현씨, 최고령 찍덕이지만 그의 사진 구독자수만 3만 7천이다. 찍덕뿐이랴. 아이돌 팬덤의 최고 난이도라 할 수 있는 팬픽도 등장한다. 한동진 씨가 그 주인공이다. '생선 장수 이야기'를 비롯하여 수 십편의 에피가 그의 손끝에서 나온다. 송가인 자신이 무서울 정도라고 하는 팬까페 회원 수가 만 단위로 증가, 6만에 달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무명이었던 송가인은 지방의 작은 무대를 전전했다. 한 곡에 3만원을 받고 녹음을 하는 처지였다. 판소리를 하다 트롯으로 전향했던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닌가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냐 앞으로 더 힘든 일이 있을 거야 라며 자신을 추스렸던 송가인은 여전히 스타가 어색하다. 하지만 그녀의 고향 진도에는 여기저기 그녀의 얼굴을 담은 현수막과 전신 입간판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차들로 마을 어귀는 주차장이 되어있고 부모님들은 몰려드는 팬들에게 음료수라도 전하랴 바쁜 하루 일과를 보내는 중이다.
왜 지금 다시 '트롯'일까? 송가인이라서? 임영웅이라서? 1935년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래 트롯은 가요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서울대 최우정 교수는 최근 다시 붐을 이루고 있는 트롯에 대해 이 시대가 트롯을 불러냈다고 진단한다.
트롯을 이루는 대표적 음계 5개, 그건 판소리 등에서 유래한 한국인의 정서에 가장 익숙한 음계이다. 하지만 최근의 트롯은 이런 전통저인 정서에 경쾌한 리듬을 실어그 차이와 모순에서 빚어내는 새로운 정서의 음악으로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트롯이 새로운 정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늘 트롯은 고생이 심했던 시대 세대 불문하고 공감하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으로 우리와 함께 해왔다. 1950년대 전쟁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1960~70년대 고향을 떠나온 노동자들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고도 성장 시대 속 애환을 함게 했듯이 이제 2020년 어려운 경제 환경에 놓인 한국인의 마음을 다시 한번 트롯이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것이다.
트롯, 치유하다 정말 트롯은 치유일까? 광주에 사는 송가인 팬클럽 회원인 박형미씨는 하루가 행복하다. 고생고생하며 아이들을 키웠지만 그 아이들이 다 자라 외지로 떠나자 맘이 텅 비어 버렸다. 그 허전한 마음에 송가인이 들어왔다. 인생의 2막을 열어 준 선물같다고 박씨는 말한다.
송가인 콘서트에 앞서 군중을 독려하는 핑크 가인 댄스팀, 그 중심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고애경 씨는 경북 포항에서 우체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송가인을 알기 전에는 일 밖에 모르던 분이라고 직원들이 전하는 애경 씨, 치열하고도 전쟁같은 삶을 살아냈지만, 그만큼 우울감이 심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송가인의 노래를 듣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인생이 바뀌었다. 매일 송가인이 선전하는 물건을 하나씩 사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애경씨, 송가인의 노래를 들으며 그 기운을 받고 시작하는 하루가 이제는 행복하다.
나이를 불문하고 송가인에게 빠진 팬들은 입을 모아 그녀가 인생의 활력이라고 말한다. 마치 소화제를 먹고 막힌 속이 확 뚫리듯 송가인의 노래가 답답했던 자신의 삶을 확 트여주었다고 말한다. 최우정 교수는 바로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정서를 공감할 수 있는 것이 트롯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집단적 치유의 힘이라고.
sbs스페셜은 우리 시대 신데렐라로 등극한 송가인을 통해 시대의 치유가 된 트롯을 분석한다. 덕질, 팬질하면 10대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가 조금 지나자, 2030 그리고 40까지 보다 경제력을 소유한 '어른'들의 새로운 '놀이 문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 2019년 <미스 트롯>에 이어 2020년 <미스터 트롯>까지 새로이 등장한 트롯 열풍은 중장년을 문화의 최전선으로 이끌어 낸다. 삶의 등반을 마친 이들이 '트롯'과 함께 문화의 주역으로 한 목소리를 낸다. 더 이상 흘러간 옛노래가 아닌 트롯은 당대 최고의 트렌드가 되었다. 가사는 애절하지만 더 이상 그 애절함에 목을 놓아 우는 대신 함께 들썩이며 흔든다. 시대는 고달프지만 그 고달픔에 지지않겠다는 의지의 움직임이다.
현재의 형사와 과거의 형사가 만나 수사도 했었다. 현재의 형사가 내 머릿속의 과거로 돌아가 수사도 했었다. 젊은 형사가 자기 아버지의 동료인지 적일지 모른 형사들과 함께 수사도 했었다. 남이 안보이는 소리가 들리고, 사진기처럼 현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형사도 등장했다. 한 술 더 떠서 팔, 다리, 눈 등등 사지 육신이 사이보그인 병기들도 등장했다. 또 새로운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러자 이제 수사 현상의 번외인 '아마츄어'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아마츄어'들의 면면이 심상찮다. 국내 최고 탐사프로그램 피디가 되는 게 소원이었지만 현실은 각종 고소, 고발에 시청률까지 바닥, 프로그램 폐지 위기에 몰린 열혈 피디 강무영(이선빈 분)가 그 첫 번 째 인물이다. 결국 없어질 프로그램을 놓고 팀장과 시청률 4.5%를 딜하여 직접 범인을 잡고자 나선다. 강피디가 주목한 사건은 바로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벌어진 살해 사건, 거리를 가던 남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흉기를 현장에 둔 채 범인이 사라진'구촌 대학생 살해 사건'을 추적한다.
탐사보도 피디와 손을 잡은 전직 검안의와 프로파일러 강무영 피디가 도움을 청한 건 다단계 판매 사무실 물품 창고 한 쪽을 빌려 탐정 사무소로 쓰고 있는 '탁원(지승현 분)'이다. 한때는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 자신의 실력이라면 떼돈을 벌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월세 낼 돈조차 마땅치 않은 처지다. 그래서 귀찮지만 늘 방송 출연을 핑계로 자문을 구하러 오는 강무영을 마다할 수 없다. 강무영이 제공한 자료를 통해 범인이 절단한 채 놔둔 '피해자의 두 손'을 통해 범인과 피해자가 '손'을 통해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추정하는 탁원의 프로파일링은 여전하다.
탁원의 도움을 받은 강무영이 13년 전 사건이 최근 거리에서 입이 찢겨진 채 역시나 무차별 난자당해 죽은 한 학교 선생님의 살해 사건을 주목한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조사하기 위해 두 사람이 찾아간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예를 갖추며 죽은 사람의 메이크업을 한참 하는 중인 이른바 '황천길 프로 배웅러 장례 지도사' 이반석이다.
지금은 장례 지도사이지만 한때는 하루에 수십구 씩 시체를 검안하던 국과수 수석 부검의였었다. 탁원과 강무영의 부탁을 받은 이반석은 동료에게 도움을 핑계로 시체 보관소를 찾아 최근 벌어진 윤리 선생 살인 사건이 죽기 전에 조커처럼 찢긴 입, 거기에 같은 왼손으로 잔인하게 가해진 상흔 등을 미루어 동일범의 소행일 수 있다는 것을 추정해 낸다.
그런데, 바로 이 국과수에 출동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여성 실종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직접 피해자인 척 잠입 취재했던 강무영 피디의 취재를 앞서 브리핑을 하여 무위로 만들어 버린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사 강호(차태현 분)가 그 주인공이다. 사사건건 강무영과 부딪히는 강호는 사건 현장으로 뛰어든 강무영과 함께 불법 성형 시술 현장에서 부딪치더니 이제 다시 13년전 사건과 최근 벌어진 교사 구형진 살해 사건을 두고 다시 맞물리는 처지에 놓인다.
익숙하지만 진부하기도 한 차태현의 수사극 형사라지만 자신이 잡고자 하는 범인이 있으면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검거를 해야만 하는 강호, 더구나 김광규가 특별출연한 조폭들의 현장에 홀홀단신 등장한 강호를 돕는 건 한때 전설의 조폭이었으나 이제는 종종 천식 호흡기를 꺼내드는 테디 정(윤경호 분)와 그의 바텐더들인 '맨손(박태산 분)'과 '연장(장진희 분)'이다.
형사이면서도 검거를 위해서는 불법적 수단과 도움을 마다하지 않는 강호와 그의 조력자 전설의 조폭팀, 그리고 시청률은 물론, 탐사 보도에 대한 사명감까지 구비한 강무영 피디와 그의 조력자 전직 프로파일러에, 전직 국과수 검안의, 이들의 조합은 그 자체만으로도 오합지졸 범죄자들을 모아놓았으나 뜻밖의 우주 수호자가 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면모가 보인다.
아직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진강호와 강무영, 하지만 범죄 수사에 있어서만은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이들이 13년전 사건과 구형진 살해 사건의 범인을 향해 함께 뛰어든다면 그 어떤 '강력 수사팀' 저리 가라할 황금의 조합이 펼쳐질 듯하다.
과거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이 만나 연쇄 살인범의 정체가 드러나는 사건 자체는 새롭지 않았지만, 강무영 피디가 추적하는 과거 사건이, 진강호가 추적하는 오늘의 사건과 병렬적으로 진행되며 시청자로 하여금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전개 방식은 새로웠다. 허허실실 코믹한 전개였지만, 사건 진행의 내실은 착실하게 수사극으로서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으며 새로운 장르로서의 기대를 품게 한다.
차태현은 무려 2015년 <엽기적인 그녀> 이래로 전혀 새롭지 않지만, 여전한 그의 친숙함을 무기로 새롭게 조합된 씬스틸러 팀과의 콜라보는 익숙한 듯 신선한 기대를 가지게 한다. 차태현의 진부함을 새로운 옷을 입은 프로파일러로 등장한 지승현, 전설의 조폭 윤경호, 전직 검안의 정상훈 등 걸출한 조연진이 충분히 보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부디 이 익숙한 듯 새로운 조합의 수사팀이 좋은 성과를 거두어 차태현의 바람처럼 시즌제의 드라마로 안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일주일에 한 회씩 도대체 끝이 있을까 싶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단 한 회만을 남기고 있다. 일찌기 제작진이 시즌제를 예약했기에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제 2020년과 함께 했던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매듭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그렇게 한번의 마침표를 위해 이어가는 이야기 중 그래도 가장 관심을 끌게 되는 건 '사랑'이다. 대학교 때부터 마흔 즈음에 이르도론 '우정'을 이어 온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래서 이전 신원호 - 이우정 콤비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남편 찾기'에 골몰할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더 성숙해진 주인공들은 그 나이만큼 '어른스러운' 사랑의 이야기를 변주해낸다.
준완이 건네지 못한 반지 아마도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가장 '융성한' 연애를 한 건 준완(정경호 분) 커플이었을 것이다. 늘 애인이 있지만 원칙적이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그 누구도 오래 만나지 못하던 준완, 다쳐서 자신의 병원에 입워한 익준의 동생, 익순(곽선영 분)의 활기찬 모습에 반한다.
불짬뽕을 핑계로 그녀의 부대 앞을 찾아간 준완은 저돌적으로 익순에게 연애를 할 것을 청했고, 일주일을 기다려 익순의 '오늘부터 1일'이라는 문자를 받고 아이처럼 팔짝거리던 준완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렇게 준완의 집과 부대 근처에 있는 익순의 집을 오가며 연애를 하던 두 사람, 하지만 12부작이라는 시리즈가 짧은 만큼 이제 오랜 이별을 맞이할 두 사람의 연애도 그 뜨거웠던 시간 만큼 안타깝기만 하다.
이전에 했던 연애에서 상처를 깊게 입은 익순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마흔 줄의 준완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었지만 기꺼이 그런 익순의 결심을 존중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만 이 커플을 흔든건 아니다. 좀 더 나은 자기 계발을 위해 유학을 신청한 익순, 그리고 신청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익순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장장 3년, 외국 유학을 가게된 익순에게 준완은 웃으며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것을 말한다.
물론 준완은 익순을 만나 웃었지만 그의 속마음마저 웃는 건 아니다. 유학이 결정되었지만 차마 준완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준완의 표정은 어두워 진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익순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미안해서 오빠한테 못알렸구나 하면서. 또한 떠남이 곧 이별이라고 생각하는 익순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너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라며 장거리 연애를 감수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부담스러워 그 무엇도 받지 않겠다는 익순에게 커플링으로 산 반지를 자신의 주머니 깊숙이 묻는다. 익준이 목놓아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부르던 노래방 그 뒷자리에서 줌아웃된 채 상념에 젖은 준완의 모습은 실연한 그 누구보다도 처연하다.
익준이 전하지 못한 반지 익준9조정석 분)이 전하는 못한 반지의 사연은 더 길다. 대학을 들어가던 그 시절, 나란히 앉아 면접을 준비하던 익준과 송화(전미도 분), 단정함을 중요시한다는 말에 당황하던 송화에게 익준이 건넨 머리띠는 두 사람의 오랜 '호의'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호의는 익준에게 '첫사랑'이란 감정으로 변해한다.
송화에게 고백을 하려고 금은방에 들러 반지를 산 날, 하필이면 그날 석형 역시 송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고 술을 마시는 석형을 보며 익준은 자신이 준비했던 반지를 버렸다. 그리고 오랜 우정을 이어 온 두 사람,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익준은 조금씩 송화에게 자신의 묵은 마음을 열어 보인다. 아이를 키우랴 병원의 오만 가지 일에 신경을 쓰는 익준에게 송화는 너를 위한 시간이 있냐고 묻고, 익준은 너와 함께 밥 먹는 이 시간이라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송화는 그런 익준의 마음에 당황한 듯 자리를 피한다. 11회 송화네 신경외과 회식까지 참석한 익준은 술게임에서 송화를 여자로 본 적이 있느냐는 집요한 질문에 얼버무리며 '당연하지'라고 넘어갔지만 노래방으로 와서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를 부르며 자신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다.
왜 익준은 노래만 부르고 말았을까? 거기엔 송화가 있다. 송화는 익준이 슬며시 드러낸 마음에 자리를 피했다. 술게임에서 드러난 익준의 마음에도 그저 복잡한 표정일 뿐이다. 그 누군가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 익준은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노래 한 자락에 자신의 마음을 덜어낸다.
그건 송화를 사이에 두고 익준과 신경전을 벌이는 안치홍(김준환 분) 역시 마찬가지다. 출근 첫 날부터 그 누구에게라도 친절하던 교수님에게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준 치홍은 첫 수술에서 실수를 한 자신을 감싸는 송화에게 슬며시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였지만 선을 긋는 송화의 태도에 한 발 물러선다. 늘 송화를 챙기며 그녀를 지켜보고 그 누구보다 송화와 가까운 익준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지지만 치홍이 낸 용기는 생일 날 '다정한 반말' 두 마디일 뿐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다른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익준화 치홍은 송화를 사이에 두고 아마 꽤나 유치찬란한 삼각 애정 쟁탈전을 벌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익준도, 치홍도 자신의 감정을 안으로 삭인다. 그건 그 상대방인 '송화'에 대한 존중이다. 아직 '사랑'할 여지를 내보이지 않는 송화이기에 거기에 섣부르게 자신의 감정들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꺼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는 준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기다려주고 사랑스레 바라보아 줌, 이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가지고 소유하고 '내 것'의 의미였기에.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마흔 줄에 접어든 '어른'들의 사랑 방식을 좀 더 성숙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들은 여전히 밴드를 좋아하고 함께 어울려 먹거나 놀 때는 여전히 아이들처럼 천친난만하고 심지어 '유치 뽕짝'이지만, 그들이 일을 하는 자리에서나, 상대방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는 '어른스럽다'.
그런 면에서 이제 곧 병원을 떠나 신부가 되려고 하는 정원(유연석 분) 바래기인 겨울의 선택이 궁금하다. 정원을 사랑으로 붙잡아 달라는 정원 어머니의 부탁에 겨울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무뚝뚝한 외양과 달리 배려심이 넘치는 석형(김대명)이 받아든 추민하(안은진 분)의 고백에 어떻게 대응을 할까. 과연 이들은 또 어떤 '어른'들의 모습을 보일까?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려 애쓴다. '나'가 우선이어야 살아남는다고 하는 세상에서 '너'나, '우리'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런 정서는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재미를 떠나 이전 작품보다 무르익은 작품의 세계를 느끼도록 한다. 드라마는 늘 '희로애락'의 파노라마를 펼치지만 보고 나서 남겨지는 건 묵직한 격려이다. 조금 버겁고 힘들더라도 우리 조금 더 어른스럽게 살아보도록 노력해 보자라는.
어느덧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년을 맞이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시간, 금남로를 물들였던 광주 시민들의 고귀한 피는 역사 속에 그 이름값을 제대로 얻고 있을까? mbc는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이하여 젊은 감독 강상우가 추적한 '김군'이라는 시민군의 행방을 다룬 다큐 <김군>을 방영했다.
2019년 만들어 진 <김군>은 그 해 부산 영화 평론가 협회상 신인 감독상을 비롯, 2020년 들꽃 영화제 다큐 부문 감독상을 수상하고 파리 한국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바 있는 작품이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김군>, 왜 평단은 시민군 김군의 행방에 촛점을 맞춘 젊은 감독의 영화에 박수를 보냈을까? 그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 우리 역사의 자리 매김 때문이다.
김군이 '광수'라고? 김군이 광수라니? 얼굴이 전면에 드러난 몇 안되는 시민군의 사진 가운데 김군이라고 쓴 띠를 두른 한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이 광수란 말인가? 아니다. 여기서 '광수'는 광주에 온 북한 사람을 가르키는 통칭이다. 광주에 북한 사람이라니?
전 육군대령 출신의 극우 인사 지만원 씨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일군의 노령층 지지자들 앞에서 광주에 시민군은 없었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에서 내려온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북한군의 폭동에 광주 시민들이 부역을 했다는 것이다.
지만원 씨는 이른바 범죄 증명 과정에서 지문 분석 등에 쓰는 기하학적 분석 방법에 따라 5.18 광주 시민들 가운데서 이른바 '광수' 561명을 찾아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복면을 주로 사용했으며, 특히 2010년 북한 노동자 회관에서 벌어진 기념식 앞줄에 앉은 세 사람 중 한 사람, 김창식이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김군이라는 것이다.
진짜 김군을 찾아서 2014년 지씨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이런 주장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드러냈다. 이에 5.18유족 모임은 지씨를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지씨가 '광수'의 대표적 근거로 내세운 김군이라는 실제 인물을 찾기에 나섰다.
25차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에 출석한 김영택 씨는 20여사단 등이 광주를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대규모의 부대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라며 반문한다.
여전히 광주 트라우마 센터에서 아픈 상처를 치료받는 양동남 씨, 당시 19살이었떤 양동남씨는 지만원씨에 의해 36 광주라 명명된 장본인이다. 양동남 씨는 북한군이 600 명 씩이나 광주에 왔다면 그건 그 사람들이 올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국방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겨우 19살이었던 시절, 어떤 민주화 의식이 아니라 사진 속에 보여진 리어카에 실린 2구의 시신, 그렇게 일반 시민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민주화 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라 밝힌다.
5월 15일 신군부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 계엄이 펼쳐진 상황에서 5.18일 광주 금남로에 시민들이 모였다. 그리고 피로 물들여진 금남로, 그 현장으로 보고서 광주 시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M16'으로 시민을 쏘는데 돌팔매질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시민들, 그 중에서도 군대를 다녀와 총기를 다룰 줄 알았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화순, 나주, 함평을 돌며 칼빈, M1 소총을 털어와 무기를 들었다. 총기까지 든 상황 얼굴이 알려지면 훗날 처벌이 두려워 복면과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고 당시 19살이던 32 광수 정희문씨는 당시를 떠올린다. 그런데 북한군 특수군이라니 !
그렇다면 그렇게 스스로 복면과 마스크를 쓴 시민군들 사이에서 얼굴이 드러난 김군 사진들은 어떻게 찍혔을까? 그 사진을 찍은 당사자는 당시 중앙일보 사진 기자였떤 이창성 씨다. 계엄군과 시민군이 맞닦뜨리는 상황을 담을 수 없었던 이 기자는 외곽에 나가 시민군에게 사정을 해서 얼굴이 드러난 사진을 몇 장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전면에 얼굴이 드러난 김군은 누구일까? 당시 만삭으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했던 주옥 씨는 김군이 자신의 아버지가 하던 막걸리 왕대포 시음장에 자주 들르던 사람인 듯 하다고 증언한다.
당시 원지교 다리 밑에 모여 살던 7, 8명의 젊은이 무리 중 하나, 그들은 고아들로 천막을 치고 살며 넝마를 주어 팔며 살아가고 있었다. 안그래도 이렇게 넝마주의를 하던 젊은이들이 시민군에 적극 활동했지만, 넝마를 주워 산다는 '직업' 자체가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아 신분이 드러내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기에그들에 대한 '포상'조차도 쉽지 않아 배제되거나 소외되기가 십상이라 김군에 대한 추적은 더욱 쉽지 않다.
당시 23살이었던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당시의 청년은 울분과 열정의 마음에서 떨쳐있어나 총을 든 상황에서 한가롭게 '어디 살아요?'를 물을 수 있었겠냐고, '이름이 뭐예요?'라고 할 수 있었겠냐고 씁쓸하게 말한다. 나가면 시체로 돌아오는 상황, 사람죽는 시체 냄새가 진동해서 밥조차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매일 매일을 보냈던 그 시절의 동지였지만 그들은 서로 누군지 모른다.
김군이 탑승했던 트럭은 도청에 무기를 반납하러 가는 상황이었다. 김군이 반납한 걸로 추정된 캐러번 50, 총기를 반납한 5월 23일 이후 김군은 더 이상 당시의 사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에 나와 증언을 한 최진수 씨는 자신이 연행되었던 장소에서 김군이 사실되었다고 증언한다. 5월 24일 계엄군간 오인 사격으로 군인이 사망하자 그 보복으로 무차별 총살이 벌어졌다. 최진수 씨는 김군이 그 희생자라 밝힌다. 툇마루에서 자신에 앞서 발을 먼저 내딛었다는 이유만으로 관자놀이에 총을 쏜 군인들, '그 눈을 봤습니다'라고 최진수 씨는 38년 동안 묻혀진 한을 비로소 꺼내 놓는다.
끝나지 않는 상흔 40년은 매우 긴 시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억대의 벌금과 실형을 살고 나온 지만원 씨는 2020년에도 여전히 광주는 폭동이라 주장 중이다.
강상우 감독이 만난 그 시절의 시민군들, 이제 와 사진 속 사람을 찾는 거, 그래서 김군이 진짜 김군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거 이거야 말로 역사에 대한 '역행' 아니냐고 묻는다. 이제는 그 시체 썩던 냄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다시 그 기억을 소환하면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하는 역사의 주역은 가슴이 아프다. 안받아들여도 좋으니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조적으로 덧붙인다.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어렵게 살다 힘들게 내린 결단이었다고 말하는 이장갑 씨, 하지만 훗날 체포되어 김일성이 무슨 지령을 내렸냐, 김대중에게 얼마를 받았냐며 고문당했던 기억만 선명하고, 나머지는 이제 기억조차도 흐릿하다고 안타깝게 말한다.
당시 20살이었던 최영철 씨는 이제 택시 운전을 한다. 다른 곳은 다 괜찮지만 체포된 곳을 지날 때면 여전히 새삼스럽고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걸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2년 선고를 받은 김용균 씨는 당시 도청에 들어간 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모두 못하게 되니 그 이후의 삶이 후회로 남는다고 고개를 떨군다. 당시 21살인던 박인수 씨는 여전히 다 빼내지 못한 총알을 원래 아픈가 보다 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오월 얘기는 그만하자는 시민군들, 인생을 송두리채 바친 사람들은 여전히 약을 안먹으면 잠을 잘 수 없다. 이발소에서 이발사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길 수 없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혼자 살아남아서 미안하고 죄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군이라니, 이 얼토당토 않은 주장으로 다시 한번 그들을, 그들이 살아남아서 미안하다고 삼키는 죽은 동료들을 여전히 오늘의 일부 인사와 세력들이 음해하고 있다. 그건 '보수'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모욕이다. 떨쳐일어난 그들에 대해 존중과 존경은 못할 망정, 존재한 역사를 거스르려는 그 '망언'과 '망발'은 이미 저만치 굴러간 역사의 수레바퀴를 향한 돌팔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돌팔매에 자신의 생을 바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상처를 입는다. 부디 역사에 용기를 낸 사람들에 대한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시대가, 세대가 될 수 있기를. 오죽 답답했으면 젊은 감독이 김군 찾기에 나섰을까. 여전히 두 손으로 하늘 가리는 이 '노망'든 세대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오월이다.
<인간 수업>은 진한새 작가의 극본으로 김진민 피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만든 10부작 드라마이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지만 그 주인공이 성매매 중개업을 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10부작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회차 동안 '성'과 '폭력' 이라는 청소년 드라마에서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플롯과 파격적인 전개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품행이 단정하며 학업 성취의 동기가 남다른 계양 고등학교의 모범생 오지수(김동희 분), 하지만 보여지는 순하고 성실한 외양과 달리 그는 성매매 중개업자이다. 도박꾼 아버지, 그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어머니, 그를 돌보아주는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도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을 가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지수는 그저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그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포주'가 되었다.
가진 돈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던 그를 구해준 인연으로 인해 이왕철(최민수 분)의 도움을 받아 '조건 만남'을 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잡음도 순조롭게 해결하며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던 사업은 그의 정체를 알게된 배규리(박주현 분)와 얽히며 1년 반 동안 모은 돈을 날리며 무위로 돌아간다. 거기에 뜻하지 않게 얽혀든 변태성욕자 무리, 조폭, 그리고 자기 애인인 서민희(정다빈 분)의 뒤를 봐주는 인물을 집요하게 캐내려 하는 일진 곽기태(남윤수 분)의 개입으로 접입가경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미성숙한 아이들의 인간 배우기 그런데 이 자극적인 설정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수업'이다. 드라마에는 오지수를 비롯한 3 명의 고등학생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른들 뺨치게 야무지다 못해 도발적인 청소년들이다. 두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최첨단 앱을 이용하여 거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변조해 신분을 숨기며 포주업을 하는 오지수는 자신이 하는 일이 그저 '거간꾼' 정도라고 생각한다. 수요와 공급을 중간에서 맞추어 주는 일이라는 식으로 치부한다. 자신과 같은 학생인 서민희가 조건 만남에 나서지만 그런 일이 그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적 경계를 넘어선다.
아니 극 후반에 들어서 종종 등장하는 지수의 무의식을 반영한 '꿈'씬에서 그의 모든 판단은 '1등급'이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돈을 다 잃고도 학교에 가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서도 학교 책상에 엎드리고야 마는 그에게 학교에서 살아남기가 그가 벌인 모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다.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탈도덕'적인 상태다.
그런 지수보다 한 수 위의 존재가 나타난다. 공부는 잘하지만 도통 학교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는 지수와 달리, 남학생들과 어울려 운동을 하고, 각종 학교 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배규리가 그 주인공이다. 오지수와 배규리에 대해 '안으로만 삭히는 고구마 같은 녀석들'이라는 담임의 촌철살인처럼, 사업을 하느라 배규리를 돌봐주지는 않지만 자신들과 같은 레벨의 인간이 되도록 끊임없이 조율하고 강제하는 상류층 부모를 둔 배규리에게 사회는 규리의 부모들이 규리에게 하듯 조정하고 조련하여 요리해 가는 대상일 뿐이다.
오지수를 알게 된 배규리는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에 응하는 듯하면서도 그를 포주라 욕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벌어들인 돈을 보고 그 돈이라면 자신을 그럴 듯한 가정의 부속품처럼 다루는 부모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그의 사업에 가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배규리의 '욕망'이 적극적이면 적극적일 수록 오지수의 사업은 점점 꼬여만 간다. 아버지가 지수의 돈을 가지고 달아나고, 조폭이 얽히고, 그걸 해결다고 하자 납치와 협박이 난무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수는 물론 배규리의 목숨조차 위태롭게 된다. 그럼에도 규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수가 좌절하고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규리는 사업을 놓지 않으려 한다.
탈도덕적 의식을 점수로 매기면 지수보다 한 수 위이다. 지수가 살아남기 위해 생존템으로서 도덕적 일탈을 선택한다면, 어릴 적부터 부속품처럼 조련당하고 번듯한 아이가 되기 위해 부모의 욕구를 피가 나도록 참아내던 규리는 인간다움이란 정의 자체가 다르다. 도덕이란 경계 자체를 비웃는 규리의 탈도덕적 레벨은 어쩌면 지수보다 한 수 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규리 역시 정신적 학대와도 같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의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지수와 같다.
그리고 오지수의 '공급원'이 된 학우, 서민희가 있다. 부모가 없이 고모네 집에 얹혀서 살아가는 민희는 사랑하는 기태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기 위해 조건 만남에 나서는 아이다. 뻔히 기태가 자신을 돈때문에 옆에 두는 줄 알면서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민희, 그런 민희가 조건 만남의 폭력적인 상황에 맞닦뜨리면서 공포가 폭발하고 만다.
오지수, 배규리, 서민희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원인을 가지고 '탈도덕적 경계'에 선 위기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를 가졌지만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낸 문제의 희생양들이다. 방기된 가정, 혹은 과잉 기대로 조련되는 가정, 그게 아니면 상실된 가정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떤 게 '인간'의 모습인지 배울 기회를 잃거나, 아니면 반발심을 가지며 청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신체는 어른처럼 성숙했고, 어떤 면에서 두뇌는 어른보다 더 빨리 움직이지만, 정작 그 '하드 웨어'가 되는 인간됨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동물들처럼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게 저마다의 방향으로 분출된 이들의 행동은 뜻하지 않게 사건 사고를 발생하며 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
묘한 어른으로 인해 촉발된 '인간다움' 여기서 묘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왕철, 오지수와 함께 '실장님'으로 조건 만남의 '보디 가드' 역할을 하던 이 인물은 돈을 받고 움직이는 포주의 행동 대장이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서민희를 들여다 보고, 오지수가 빠진 위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들여다 봄으로 인해 서민희는 처음으로 그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왕철로 인해 서민희가 변해간다.
그런 서민희의 변화는 실타래처럼 얽혀만 가던 오지수가 벌인 포주업이 달려가는 지옥의 레이스를 멈출 수 있는 치트키를 경찰 이해경(김여진 분)에게 쥐어준다. 하지만 치트키는 미약하고 때론 늦는다. 오지수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내민 손은 수업 시작 종에 묻힌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벌인 '비인간적'인 사건은 '너무도 인간적인 참혹하게 인간적인 결과물'을 낳는다. 결국 사건은 최악으로 치달아 노래방을 '만인 대 만인'이 몸과 몸으로 부딪치고야 마는 전장으로 만들고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일단락된다.
행동대장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왕철의 '어른스러운 헌신'으로 마무리된 사건, 결국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벌인 일들이 그나마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야 말았다는 결과에 이르러서야 오지수는 깨닫는다.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맹목적인 욕망의 결과물인가를. 누군간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처절하게 배우게 되는 역설적 인간다움. 그것이 숨가쁘게 달려간 10부작 <인간 수업>이 도달한 결론이다.
하지만 배움은 처절하지만 그 배움의 실천에 나설 용기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껍질 게처럼 자기 보호와 연민에 빠진 오지수는 서민희를 희생시키고 결국 자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업'에 이르러서야 '수업 종료 종을 울릴 수 있었다.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같은 여지를 둔 결말은 이 수업의 종료를 다음 시즌에 대한 여지로 남긴다. 결국 자기 목숨마저 수업료로 저당잡혀야 하는 인간 수업, 그들은 채 자라지 않았지만 그들이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숙제는 과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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