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메르스에 걸렸던 마지막 환자가 사망하자 언론은 앞다투어 '메르스 종식'을 보도했다. 후에 메르스 유족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마치 온 사회가 남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로부터 5년,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다. 그 전쟁 과정에서 '전사'한 사망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처음 <2020 tvn shift- 1화 코로나 재난의 불평등> 예고편을 방영하던 11월 17일에 NO.는 480이었다. 그리고 불과 반 달도 되지 않아 그 숫자가 510으로 늘어났다. 우리가 줄어드는 숫자에 안도하고, 늘어나는 숫자에 불안에 떠는 이 순간, 그 숫자는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혹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숫자'가 지닌 사회적, 계급적 불평등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코로나'라는 이유만으로 한때는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았던 이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기회를 잃고 있는 건 아닌가?  배우 안내상과 연세대 상담코칭학 권수영 교수가 추모의 길에 함께 한다. 

 

 

코로나 유족, 죽음 뒤의 이야기
그는 NO. 89 사망자이다. 500여 명에 이르는 코로나 사망자, 그 중 193명이 대구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 중 한 명이다. 65세, 기저 질환이 있었지만 망자가 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열이 나 병원에 가려 했지만 그 마저도 환자가 많아 여의치 않아 집에서 보낸 이틀, 몇 번의 검사후 실려갔다. 

61세의 아내, 남편은 미안하다, 버텨달라며 우는 아내와 아들에게 울지말라 당부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전염병 환자의 경우 평범한 장례조차도 치루지 못한 채 24시간 내 화장하는 '처리' 대상이었다. 2개의 유리창 너머로 겨우 마주한 남편의 시신, 감염 우려로 남편의 유품이었던 휴대폰과 지갑은 태워졌다. 그 후로 7개월 '저 집 신랑이 코로나로 죽었다'는 수근거림이 들리는 것 같아 밖에도 나갈 수 없었단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원망한들 무엇하겠냐던 아내는 언네 끝나나만 관심있는 세상이 야속하다.

슬픔을 나누는 고별의 의식같은 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관조차 못만지게 하는 상황, 염은 커녕 평상복 그대로, 시신 팩에 넣어져 관에 넣어졌다. 위로는 커녕 아버지가, 어머니가 코로나로 돌아가셨다고 드러내어 말할 수 조차 없는 세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이러스'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더 살고 싶었던 평범한 삶은 그저 빨리 치워버려 할 '대상'이 되었다. 

 

 

감염은 공평하지만 결과는 공평치 않다. 
코로나 팬데믹, 노년층의 사망율이 전체 사망자의 94%에 이른다. 노년층 자체가 호흡기 감염병 자체에 취약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면역에 주된 역할을 하는  T- 세포 자체가 수도 줄고, 기능도 떨어져 감염에 무방비해진다. 특히 남자 노인들이 더 많은 이유는 남성 호르몬이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나이가 들면 남성 호르몬이 저하되기에 노령층 남성 사망자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사망자들은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죽음에 이른다. 폐로 부터 시작된 바이러스의 공격이 주요 장기에 이르러서이다. 신장과 심장이 나쁘면 바로 다발성 장기 부전에 이른다. 노화와 함께 떨어진 기능은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버티기 힘들다. 

하지만 노년을 괴롭히는 건 그저 '바이러스' 만이 아니다. 추석 당일 서울의 한 무료 노인 급식소 아침부터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지난 2월부터 급식대신 주먹밥을 나눠주는 형편이지만 한 끼의 호구지책에 '거리두기'가 무색하다. 코로나보다 우선인 건 허기진 배, 의지할 곳,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은 그래서 더욱 '취약층'이 된다. 

청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상대적으로 당당하다. 그들의 신체적 상황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2,30대의 과반수 이상이 코로나는 '운명이다'라는 운명론적 믿음을 보이고 있다. 즉 노력을 해도 걸릴 사람은 걸린다는 이런 생각은 '각자도생'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사회에 대한 '믿음', 즉 '신뢰 자본'의 붕괴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회적 신뢰 자본의 붕괴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장기적 동력 상실의 원인이 된다. 누군가의 일탈, 누군가의 거짓말이 코로나를 다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전염 과정은 청년층으로 부터 고령층으로 흐름을 가진다. 운명론에 휩싸인 젊은이들의 행태가 노년층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취약 계층이 된 노인층, 방역의 한 축이 되어야 하지만 사회적 배려는 없다. 

대부분의 노년층이 한국 전쟁 세대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렵게 성장한 그들은 청년기에 군사 독재를 겪었다. 그리고 장년기에 IMF를 맞이했다. 그리고 숱한 파고를 넘었던 이들은 이제 요양병원 등에서 코로나의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되었다. 

 

 

방역 수칙을 지킬 수 없는 계급
취약한 건 노인만이 아니다. 코로나는 우리 사회를 네 계급으로 나눴다. 전문 관리와 기술 인력으로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노동자가 코로나 시대 제 1계급이 되었다. 그 아래, 창고, 운수 노동자와 보건 인력들이 있다. 일자리는 있지만 감염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군가의 직장은 더 위험한 곳이 되었다. 지난 5월 물류 업체였던 직장에서 발생한 집단 감염으로 확진자가 된 전모씨가 '확진 판정 통보'를 받은 후 제일 처음 한 말은 '제가요? 그럴 리가'였다. 마스크도 쓰고, 장갑도 꼈지만 '직장'을 쉴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160여일, 자신때문에 코로나에 걸렸던 남편은 호흡부전으로 인한 심정지로 인해 뇌손상을 입고 지금까지 의식 불명 상태이다. 코로나는 한 가정을 순식간에 풍비박산내 버렸다. 

그래도 쉴 수 없어도 직장을 다니면 그나마 나은 것일까? 제조업, 서비스업 계통의 노동자들은 코로나로 인한 장기 불황에 원치 않는 무급 휴가로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 코로나 방역 수칙은 아프면 무조건 쉬라고 한다. 타인과 거리를 두라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통계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아파도 쉴 수 없다고 답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서비스가 늘어날 수록,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업무량은 늘어나고, 노동 조건은 위태로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4번 째 계급, 노숙자, 이민자 등이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스페인 카탈루니아 지방 아라곤에 과일을 수확하러 온 이민자들, 작은 기숙사에 집단으로 생활하는 이들은 마스크를 살 경제적 여력조차 없다. 그래서 코로나에 신체적으로 우위라는 2,30대 들조차 사망자가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전세계 그 어디를 막론하고 가장 아프고 소외된 곳에 코로나는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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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엑스레이, 코로나 
서울 시내에 노숙자가 갈 수 있던 공공병원이 6군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 5개가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전환되고 이제 서울 중구 동부병원만이 노숙자들을 받는다. 동부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은 '방역의 나비효과'를 말한다. 외려 노숙자들은 그들을 받아주는 의료시설의 부재로 원래 가지고 있던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고. 

사망자의 46%는 시설 병원내 감염이었다. 그 중에서 37%가 정신질환자였다. 첫 사망자가 발생한 곳도 대남병원, 그후 100 여명의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폐쇄병동 환자들, 하지만 도시락 업체도, 청소 업체도 그들이 받은 '항의 전화'를 핑계로 '협조할 수 없다'고 했다. 대형 병원 음압 병실조차 공평하지 않았다.
사회가 버리고, 가족이 버린 사람들을 국가마저 버렸다.

코로나에 걸려 이송되던 2번째 환자가 '바깥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다'고 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20년 입원, 42KG이던 첫 번 째 환자는 세상 밖으로 나와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장기 입원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어땠을까. 확진자 발생에 대한 기사가 수 천 건 쏟아지는 동안 단 169건의 기사, 그 마저도 사람들의 반응은 본질과 상관없는 '중국인 입국 금지'라는 '키워드'에 집중되었다. 

코로나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그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편견에 휩싸인 채 철처지 소외된 채 사라지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오늘 몇 명이야 숫자 세기에 바쁘다. 세상은 기억하지 않는다. 사망자는 번호로만 불려진다. 첫 확진자 후 300여 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숫자가 아닌 우리 곁에 살았던, 그리고 이제는 비워진 자리가 된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도를 가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호소한다. 그건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숫자가 아닌 존재에의 확인, 그건 바로 살아갈 우리를 위한 사회적 '기억'이다. 








by meditator 2020. 11. 25. 03:11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 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수궁가>가 토끼가 별주부 거북이의 꾐에 넘어가 용왕 전에 불려갔다가 꾀를 내어 도망친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낸 것이라는 건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터이다. 하지만, 그 <수궁가> 중에 저런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라는 내용의 판소리 곡이 있던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광고' 시간은 눈에 보이지니 보지만 보고 싶지 않은 강제 영상 시청의 시간이다. 그 15분 여의 시간 동안 눈이 번쩍 띄여지게 만드는 광고 한 편이 등장했다. 갓을 썼지만 한복은 아니고, 한복같은 색감인데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곳곳을 종횡무진 '춤'바람을 내는데, 거기서 나오는 음악이 귀에 쏙 들어온다.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힙한 판소리 
바로 한국 관광 공사의 홍보 영상이다. 35개국의 사람들, 조회수 3억을 돌파했다는 1분여의 짧은 영상에서 춤꾼들의 춤사위에 배경이 되는 음악, <범내려온다>는 얼터너티브 밴드 이날치가 <수궁가>의 한 부분을 재구성한 것이다. 11월 22일 sbs스페셜은 요즘 뜨는 판소리 밴드 이날치를 조명한다. 수궁가의 전편은 재구성하여 원곡과 이날치의 트렌디한 음악을 대비하며 판소리 밴드로서의 이날치의 음악적 성취와 의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1일 1범'이라는 유행어가 만들어 질 정도로 중독성 있는 음악으로 '무한 재생'을 부르는 밴드 이날치의 음악, 그저 판소리라 하기엔 비트가 빠른 가사는 판소리 장단에 맞춰 듣는 이의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든다. 

이런 '이날치'의 힙한 판소리 음악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국 힙합과 붙여놔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힙한' 음악이라 평가하는가 하면, 중독성 있는 '범 내려온다'의 반복 구는 소녀시대의 gee gee gee gee 만큼이나 트렌드하다 정의내린다. 

이런 대중과 전문가 모두의 '찬사'와 열띤 호응을 받고 있는 이날치, 하지만 그들의 오늘은 그저 어느날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었다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춤출수 있는 재밌는 음악을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 그리고 전통 음악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고 싶었던 이들의 조합 , 베이스 장영규, 정중엽, 드럼 이철희, 보컬 안이호, 권송희, 이나래, 신유진 이들의 음악 경력을 합치면 100년이 넘을 정도의 내공의 산물이 바로 이날치 신드롬의 이유이다. 

 

 

모두 합쳐 100년이 넘는 음악적 내공 
<전우치>, <타짜>, <좋은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그리고 최근 <보건교사 안은영> 등 100 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비롯하여, 연극, 무용, 광고까지 종횡무진, '소리의 해체와 조립에 능한 전무후무한 뮤지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영규가 바로 이날치의 프로듀서이자 베이시스트이다.

그에게 판소리 밴드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 2017년 미국의 명망있는 음악 프로 타이니 데스크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씽씽>을 통해 '판소리와 밴드의 결합을 시도한 바 있는 장영규는 김광석의 드러머였던 이철희와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베이스를 맡았던 정중업과 함께 이날치의 기초 공사와 같은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기존에 판소리의 장단을 맡던 '고수'의 역할,  기존 밴드의 기타를 제외하고 두 개의 베이스와 드럼만으로 판소리가 가진 문학적 매력을 한껏 살려내고자 했던 장영규의 시도는 '춤추고 싶게 만드는 세련되고 독특한 리듬'이란 평가를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보컬의 면면도 만만치 않다. 이나래 27년, 권송희 27년, 신유진 16년, 안이호 25년, 인생의 반 이상을 소리꾼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쉴틈 없이 공연을 하는 와중에 판소리의 본향 전주에서 4시간에 이르는 <적벽가> 완창에 도전하는 안이호, 변강쇠 전을 옹녀의 시선으로 해석하여 공연한 바 있는 이나래 등은 수궁가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 <드라곤 킹>을 통해 만나 이날치의 멤버로 거듭나게 되었다. 

소리꾼으로서의 정체성에 있어 한 치도 흔들림이 없는 네 사람의 보컬,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기 확장과 정체성, 전통 음악의 한계에 도전하고픈 열망이 그들을 얼터너티브 이날치의 멘버가 되게 하였다. 물론 이날치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전통 음악의 편견을 깨기 위해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의 조합을 시도한 롹밴드 장비나이 등이 두 문화의 콜라보를 시도한 바 있다. 장비나이가 처음 두 문화의 조합을 시도했을 때만 해도 국악계에서 시선이 곱지 않았었지만, 이제 이날치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에 보컬 들의 스승들은 기꺼이 이날치의 음악을 통한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반긴다. 

듣는 이들에게는 '힙하디 힙한' 음악이지만, 이날치 밴드는 '판소리 가사도 그대로, 사설도 그대로'의 원형을 지키고자 한다. 단지 리듬를 변화시키고 듣기 좋게 가사를 재구성했을 뿐이라고 자신들의 작업에 겸손을 표한다. 하지만 공연장을 가득찬 팬들, 그들의 음악에 절로 어깨춤을 추는 관객들에, 나아가 알아듣지 못해도 이미 '아름답지만 낯설다'며 특별한 팝으로 해외 음악 팬들에게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by meditator 2020. 11. 23. 01:35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명해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는 추천사가 장류진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 더해졌다. 그리고 그런 추천사가 틀리지 않게 <일의 기쁨과 슬픔>은 출간과 동시에 동시대의 젊은 직장인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미 앞서 2012년 알랭 드 보통는 동일한 제목의 <일의 기쁨과 슬픔>, 부제 우리는 무엇때문에 일을 하는가를 통해 '일' 그 자체의 현장을 글로 되살려내며,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노동'을 통해 '먹고사니즘'으로 낮잡아 치부되던 '일' 그 자체의 존엄성을 살려낸 바 있다. 장류진 작가는 바로 그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추구했던 '노동의 현장'을 그녀가 소설을 쓰며 몸담았던 20세기 한국 사회로 옮겨온다. 책의 소개글에서 말하든 '눈물짓되 침참하지 않고, 힘에 부치지만 자기 나름의 지혜로 잘 버텨나가고자 하는' 이 시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동시대인들의 '자화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화제작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중 표제작 <일의 기쁨과 슬픔>이 11월 21일 드라마 스페셜 4번째 작품으로 찾아왔다. 

 

 

판교에서 밥벌이란? 
우리 사회에서 '판교'란? 첨단 it기업과 스타트 업 기업들이 '군집'하는 판교는 마치 미국의 실리콘 밸리처럼 우리 사회 첨단의 기업과 기업 문화를 상징한다. 드라마는 바로 그 '판교'속 직장인의 모습을 그려내며 문을 연다. 

경쾌하게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으로 하루를 여는 안나(고원희 분)와 제니퍼(김보정 분), 이들은 '우동은 팔지 않습니다'란 문구를 붙인 문을 열고 자신들의 직장인  '우동 마켓'으로 들어선다. 그들을 맞이한 건 아침부터 탁구를 치던 우동마켓의 ceo 데비잇(오민석 분)이다. 탁구도 잠시 다함께 모여 실리콘 밸리의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미팅 방식을 본딴 스크럼을 짜자고 하는 데이빗, 그런데 어쩐지 모여드는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드라마는 주인공 안나의 독백을 통해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한 스타트업이어 보이지만 사실은 중고 직거래 사이트인 우동 마켓이라는 직장을 통해 수평적인 '첨단'의 직장 문화를 지향하지만 여전히 직장 내 갑을 관계와 얼키고 설킨 인간 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판교'의 한 직장을 조명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수평적 스타트업이지만, 스사트업 전체 중 단 3%만이 생존하는 게 현실인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고급 외제차 카다로그를 손에 쥔 채 소수의 개발자와 기획자와 함께 유저 한 사람에 일희일비하는 우동마켓의 생생한 직장 내 생태가 드라마의 한 축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본명이 안나라 본의 아니게 안나가 되어버린 기획자 안나를 중심으로 갑이 아닌 척하지만 '갑'인 ceo 대식과  매번 기획자와 개발자의 업무적 성격으로 인해 충돌을 빚게 되는 사회성 부족한 외골수 개발자 케빈과의 갈등이 그 중심에 있다. 

안나는 자신의 촌스러운 본명을 숨기고자 외국식 예명을 쓰고 실리콘 밸리 방식을 흉내내는 ceo 데이빗을 비웃지만, 실수로 올린 기획자 모집 공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케빈과의 직무적 갈등에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는 양가적 존재감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우동 마켓의 헤비 유저 '거북이 알'에 대해 알아보라는 ceo 대식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커피 머쉰 구입을 핑계로 드라마의 또 한 축이 되는 거북이 알, 이지혜(강말금 분)를 만나 그녀가 중고 거래 사이트의 '헤비 유저'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연을 전해 듣게 된다. 

 

 

카드 회사 차장이 거북이 알이 된 사연은? 

이지혜는 거대 기업인 유비 카드의 현직 15년차 차장, 그녀는 한때 공연 기획팀을 이끌던 책임자였다. 유비 카드의 회장이었던 조운범 회장이 직접 지시한 명망있는 아티스트의 기획을 실행하던 중, 회장의 '복심'을 무시한 채 절차에 따라 일을 처지하다 밉보여 카드 기획팀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제 월급조차 1년 동안 '포인트'로 받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 '포인트'를 현금으로 '전환'하기 위해 우동 마켓의 헤비 유저가 된 사연을 이지혜는 안나에게 허심탄회하게 전한다. 

'판교'라는 첨단 산업의 공간, 하지만 그곳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겪는 건 수평적인 기업 문화라는 그럴 듯한 캐치프레이즈와 달리, 여전히 '갑을' 관계가 현존하는 상황이다. 

스크럼을 짜자고 해놓고서는 ceo의 일방적인 아침 조회라던가, 해비 유저의 득세를 알아보라는 지시에 기획자라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까봐 거절하지 못하는 구차한 상황은 안나의 '자존감'을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런 안나는 해비 유저 거북이 알을 만나, 그녀가 단지 자신의 인별그램 홍보 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하고 거기에 더해 '포인트'로 월급을 받게 되는 '보복'까지 당하게 되는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그럼에도 '거북이 알'이 되어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극복하려는 이지혜의 태도에 '동지'적 위로를 얻는다. 

알랭 드 보통이 바다에서 사무실까지 섭렵하며 '일'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며 때로는 지루하기 이를데 없으며 단순 반복적이며 세상에 조명되지 않는 일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복원해냈다면, 장류진 원작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론에 방점을 찍는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직장 내 서열과 '관계'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 그럼에도 '월급'이라는 문자 하나에 기분이 전환되는 아이러니한 '밥벌이'에 구속된 존재들이 그럼에도 그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구겨지지 않고 '밸런스'를 유지하며 살아내개 위한 '노력'들을 드라마는 원작의 주제에 맞게 그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글이 드라마로 구현되는 과정은 또 다른 '창작'의 현장인지라, 2~30대 직장인들을 열광케 했던 밥벌이의 지겨움과 고달픔이 감각있게 표현되었는가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통해 덤덤하지만 내공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강말금 배우의 이지혜 에피소드는 배우 류진의 또 다른 면을 발견케 해준 조윤범 회장과의 호흡을 통해 원작 속 의도가 실감나게 전달된다. 반면  안나의 우동마켓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배우들 연기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얕다보니 이야기의 경중에서 밀리고 만다. 덕분에 판교라는 공간이 가지는 사회 생태적 환경에 대한 이야기의 '페이소스'가 아쉽다. 아마도 원작을 읽으며 동시대적인 공감에 무릎을 쳤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드라마적 감동에 인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by meditator 2020. 11. 22. 16:20

60세, 그저 60년을 살아온 시간이 아니다. 還甲(환갑), 자신이 태어났던 육십갑자의 해가 다시 돌아오는 해, 인생의 두번 째 바퀴가 시작되는 해이다. 즉 본격적으로 '노년'을 시작해야 하는 나이이다. 

그런데 60세 이후 '노년'의 삶은 녹록치 않다. 특히 60세 이후 홀로 '독거'하는 인구가 200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에서 여성이 2/3에 이른다. 11월 16, 17일 양일에 걸쳐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은 <60세 미만 출입금지>를 통해 60세 이후 '독거'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함께, 독거
다큐는 서로 다른 '독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60대 여성 세 사람이 셰어 하우스 한달 살기라는 '실험'을 통해 60세 이후 삶의 방식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서울 한가운데 고즈넉한 한옥, 그 대문 안으로 62세의 사공 경희 씨가 들어온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사람은 이제 '독거' 두 달 째를 맞이한 65세으 김영자 씨, 그리고 마지막 13년 째 '독거' 중인 65세의 이수아 씨가 오면서 함께 한 달 살기가 시작된다. 

어느덧 65세, 그리고 홀로 산 지 두 달, 하지만 영자 씨는 '독거 노인'이라는 호칭에 진저리를 친다. 아직은 '노인'이라고 하기 싫은 나이, 예전과 달리 '환갑 잔치'라는 용어 조차도 무색해지는 요즈음 영자 씨 또래의 '노인'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독거'를 하는 60대 여성들이지만 세 사람의 사정은 저마다 다르다. 사공 경희 씨는 62세이지만 아직 '미스'이다. 30대는 40대가 되면, 40대에는 50대가 되면 하고 결혼을 먼 훗날의 일로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덧 60대, 이젠 70대가 되면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이 무색해지는 시절이 되었다. 

결혼은 했지만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혼은 안했지만 남편과 따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왔던 영자 씨는 얼마 전에야 정식으로 이혼을 했다. 그리고 함께 살던 아들 내외마저 분가를 하고 홀로 산 지 2달이 되었다. 북적거리던 집안에서 아이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자 불안이 밀려오고 왜 이렇게 됐나, 인생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던 즈음 딸의 신청으로 새로운 '함께'의 삶을 시도해 보게 되었다. 

사별한 지 13년 째 자식도 없는 수아 씨는 항상 외롭다. 단란한 가정도, 친구도 없는 그녀는 이대로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부산과 광주, 그 지리적 간격만큼 홀로 살아온 시간도, 살아온 이유도, 그리고 홀로 살아갈 삶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인 세 사람이 불과 한 달이지만 '함께' 살아가는 시간은 쉽지 않다. 화통한 성격처럼 무엇이든 앞장서서 이끌어 가고, 그만큼 스스럼이 없어 보이는 영자 씨, 하지만 그런 영자 씨와 달리 스스로 해결하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온 경희 씨는 자기 자식들에게 하듯 챙겨주는 영자 씨의 방식이 어색하다. 그런가 하면 오래도록 외롭게 살아왔으면서도 막상 함께 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수아 씨 역시 만만하지가 않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두려워 늘 tv를 켜놓고 살았던 수아 씨, 함께 했던 첫 날 밤, 문을 닫지 말라던 부탁을 여름밤 모기를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들어주었던 영자씨, 그렇게 닫히지 않은 방문처럼 세 사람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갇혀있는 저마다의 방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그 방문을 열고 나온 마음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자식이 있든 없든 옛날 사진이 예뻐서 슬픈, 어느덧 60줄의 '노년'이 막막한 처지에서 다르지 않다. 

혼자 사는게 좋고, 누구와 살까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던 경희 씨가 숨겨왔던 병원공포증을 두 언니 앞에 꺼내놓고 '나 너무 무서워'라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시간, 세 사람은 불과 한 달이었지만 사람이 정든다는게 이런 거구나라며 이별을 아쉬워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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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간다는 일
다큐가 처음 던진 물음은 60세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였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문제로 삼아왔던 '독거'에 대한 질문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불과 한 달이라는 '시한부'의 '함께'라는 시간을 지켜보며 다큐가 보여준 '답'은 '누구와 살 것인가'이지만, 그 살 것인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을 함께 하는 삶이 아니었다. 

다큐는 '독거'라는 사회적 현상을 매개로 나이들어 살아가는 삶의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불과 한 달의 기간, 다른 삶을 살아왔던 세 사람은 엇물리는 관계를 풀어가며 성장한다. 즉, 함께 산다는 건, 그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관계를 '도움닫기'로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다큐는 말한다. 

혼자 살아가기에 '치킨' 한 마리도 시켜먹지 못하게 되는 삶, 그런데 불과 한 달이었지만, 그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서로에게 자신을 터놓고, 그런 가운데 서로의 '이해'와 '지지'를 얻게 된 세 사람은 훌쩍 큰다. 60이 넘어야 철이 든다는 영자씨의 말처럼, '60'은 늙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출발선이다.  움츠러들기만 했던 자신의 문을 열고 나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피아노의 건반을 용기내어 누르듯 그렇게 세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자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세 사람은 헤어져 저마다 살아왔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세 사람은 한 달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불과 한 달이지만 그간 '점'처럼 살아왔던 세 사람 사이에 그 점과 점을 이어줄 '관계'의 매듭이 생긴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의 집을 찾아가는 '관계'는 그들이 '독거'라도 '독거'가 아닌 삶을 열어준다. 높은 데서 훨훨 날아가듯 떨어져 죽고 싶다던 수아 씨가 지금 이 나이가 좋아요라고 말하기 까지 필요한 건 '한 달'이었다. 겨우 한 달이었지만 다시 혼자 살아도 이제는 혼자가 아닌 삶, 노년의 문제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삶의 질의 문제라는 것을 세 사람의 변화를 통해 말한다. 






by meditator 2020. 11. 18. 02:52

전쟁,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도구, 재앙, 새로운 진리, 이 극과 극의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시험'을 칭하는 세계 각국의 수험생들의 표현이다. 그들이 맞닥뜨린 '시험'의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의미로 시험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험생들은 이 중 어떤 의미로 '시험'을 생각할까? 그러는 당신에게 '시험'은 어떤 의미인가? 

팬데믹 상황에 빠진 코로나 임에도 '수능'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일정이 조금 늦춰질 뿐, 수능은 예정대로 12월 3일에 시행될 예정이다. 학교를 나간 날보다 나가지 않은 날이 더 많은 올해 고 3에게 수능은 어떤 의미일까? 제대로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여전히 수능은 그들이 '어른'의 세계로 건너가는 '관문'이다.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은 저마다 '통과 의례'로 시험을 친다. 그런데 각 나라의 배경과 상황에 맞춰 '시험'이 천차만별이다.

지난 2015년 ebs다큐 프라임을 통해 바영된 <시험> 5부작, 52회 백상 예술대상 tv작품상 교양 부문을 수상한 이 작품은 여전히 우리 사회 성공의 '관문'이 되고 있는 시험을 해부한다. 그 중 1부, 시험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는 세계 각국의 시험을 통해 시험의 사회적 의미를 묻는다. 

 

 

시험은 권력이다
인도의 비하르 주, 이곳은 카스트 제도 중 가장 하층의 계급인 불가촉천민(손을 대는 것조차 오염된다 하여 붙여진 호칭)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3000여년간 유지되어 온 신분보다 '시험'이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천한 취급을 받고 기회가 거의 없는 불가촉천민들, 이들은 이제 시험을 통해 사회적으로 '기회'를 얻고자 한다. 실제 시험을 통해서라면 불가촉천민이라 해도 대학 총장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과외가 성행하고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도록 가르쳐주는 학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시험을 칠 실력도 학원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지난 2015년 수험생 600여 명이 쫓겨나고 학부모들이 체포된 사건에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교실 창문에 기어올라가는 사람들, 이들은 수험생의 친지와 학부모들로 수험생에게 컨닝페이퍼를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자칫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컨닝페이퍼를 전달하기 위해 건물을 오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 60%가 이런 '불법'에 대해 불가피한 선택이자 관행이라 받아들이고 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시험, 거기엔 신분 제도를 넘어서고야 말겠다는 극단의 '의지'가 있다. 

시험은 서열이다. 
중국에서는 매년 6월 1000만 명 이상이 응시하는 우리의 수능과 같은 국가적 인재 선발 시험인  '가오카오'가 시행된다.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배경도 없고, 연줄도 없다. 하지만 머리가 있다. 돌격, 돌격'
'우산없는 토끼는 목숨을 걸고 뛰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문제를 풀 것이며 나는 할 수 있다.'

이 비장한 문구는 시험을 준비하는 교실 밖에 씌여진 낙서이다. 가오카오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지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지만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절박한 표현이다. 

허난성의 관묘 고등학교, 매번 신양시에서 선두의 성적을 거두는 학생들을 배출하는 이 학교는 논두렁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논두렁을 지나 학교에 이르는 거리에 학부모들은 집을 얻어 수험생인 학생들을 뒷바라지한다. 학생들은 유치원에서부터 12년동안 자신이 원하는 지위와 직업을 얻기 위해 가오카오를 준비한다. 등교한 이후에는 암기, 시험, 다시 암기를 반복하는 학습 과정, 같은 반 친구들은 경쟁자이다. 가오카오를 통해서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학생들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이 숨막히지만 믿을 건 자신 밖에 없다고 믿는다. 

가오카오가 시행되는 날 시험 시작 30분전부터 교통이 통제된다. 942만 명의 수험생이 저마다의 고사장으로 향한다. 듣기 평가 시간에는 차량 경적 소리 등이 금지되고, 드론을 띄워 학생들의 부정을 감시한다. 18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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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성장이다

'열정없이 살 수 있는가'
'인식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가'
'정치는 인간의 일인가'

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 논술형 대입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철학 문제들이다. 6일간의 시험 과정, 총 684,734명이 저런 문제를 푼다. 교장 선생님이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는 풍경, 시험에 늦더라도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입실을 허락한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각 교실을 돌며 시험 문제를 개봉하고, 8시에서 12시까지 4시간 동안 주어진 3문제 중 한 문제를 선택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2015년 문과의 문제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게 도덕적 의무인가'와 '나는 내 과거로부터 만들어 지는가' 등이다.  '정치가 진실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는가'가 이과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이다. 

그렇다면 채점은? 예, 아니오라고 답할 수 없는 문제, 답안의 적절성과 논리성이 채점의 기준이다. 철학 시험이지만 여타 문화적 소양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 프랑스에서 철학은 현실과 관련이 있는 학문이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영역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저런 문제를 푸는 학생들은 어떨까?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라 시험이라고 따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한다. 심지어 학기 중에 외국도 다녀오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과외 활동이 지속한다. 무의식적으로 믿고 말하고 생각하던 것, 즉 자신과 마주할 기회, 바칼로레아는 성장이다. 

시험은 이데올로기다
독일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논술과 구술로 이루어진 '아비투어'를 치뤄야 한다. 아비투어 당일 학생들은 문제를 먼저 받고 30분 정도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한 후 2명의 교사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정답? 없다. 자신의 생각, 근거를 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독일이 가진 치욕스런 역사적 경험이 전제한다. 나치 시대, 당시 시험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였다. 우생학의 논리에 따라 사회 복지는 생산성이 없는 것, 다른 곳에 쓸 돈을 왜 장애인에게 주는가라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시험을 통해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그 결과 장애인들에 대한 말살작전을 펼쳐 살인 센터를 통해 '안락사'시켰다. 

장애인들을 말살시키는데 앞장서거나 조력했던 사람들은 '평범'했던 사람들이다. 규칙적인 삶을 살았고 정직했으며 순응적인 인간들이었다. 전후 그 시대의 '평범한 악'에 대해 반성한 사람들은 더 이상 시험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재생한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질문하고 의심하는 인간 양성을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라 여긴다. 

인도와 중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 각국은 저마다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시험제도를 가진다. 불가촉천민에게 사회적 기회가 된 시험, 가진 것 없는 농촌 출신의 학생들의 등용문, 그리고 철학적 문제를 논하는 프랑스와 자신의 의견을 주체적으로 피력하는 게 관건인 독일, 우리의 시험은 이들 나라의 시험 중 어디쯤 있을까? 21세기에 대비한 창의적 인간상 구현을 목표로 하는 7차 교육 과정에 기반한 우리의 수능은 과연 '창의적 인간'을 길러내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일까.

by meditator 2020. 11. 12. 02:15

다큐멘터리는 다양한 모색의 와중에 있다. 시각적 매체 환경의 변화로 사람들은 이제 tv를 통해 제공된 프로그램을 떠난 유투브 등 스스로 찾아가는 매체 환경을 선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tv다큐멘터리는 안그래도 저조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탈피하고자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성들은 ebs의 <다큐 it>이나 sbs스페셜이 시도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처럼 다큐의 연성화 경향성이 두드러진다. 다큐와 토크 프로그램의 콜라보, 혹은 보다 대중적인 주제와 접근 방식으로의 모색이 올 한 해 다큐 프로그램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그런 가운데 또 한 편의 새로운 다큐 한 편이 시작되었다. kbs1tv가 일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영하는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이다. 


 
내가 아들 엄마라니 ! 
지난 11월 8일 <김나영의 아들 연구소> 3부작의 1부 <내가 아들 엄마라니>로 첫 선을 보인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는 단정짓지 않고, 정의내리지 않고, 과도하게 요약하지 않고 지식과 지식을 연결하는 편안한 다큐를 지향한다고 프로그램의 취지를 내세웠다.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고만고만한 아들 둘 신우와 이준을 키우는 패션 인플루언서 김나영, 멋들어진 그녀의 패션과 달리 '하지마!, 하지마! 위험해!'라는 짜증과 호통으로 연이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말을 안듣는게 아들의 정체성일까 고민하는 그녀, 요즘 핫한 오은영 정신과 의사를 만나 '아들 키우기'의 고충을 토로한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와의 아들 키우기 상담은 아들과 딸의 언어가 다르다로 시작하여 아들들은 듣는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가로 두 엄마가 공감하더니,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어리숙하다로 여자 아이들보다 늦은 성장에 방점이 찍힌다. 

그렇게 교감이 안되는 남성을 아들로 키우기의 난감함에 공감을 하던 다큐는 훌쩍 건너뛰어 어느덧 열등 종족이 되어가는 아들의 세상 이야기로 흐른다. 대학 진학율에서도 어느덧 여학생이 남학생을 앞지른 세상, 예전에는 그래도 수학은 남학생이 잘한다고 했지만 이젠 그 마저도 여학생이 평균 점수가 더 높은 세상, 이제 아이를 낳을 가임기의 부모들은 한 명만 출산한다면 딸을 원한다는 통계가 66%나 되는 세상이 되었단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여자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질까봐 남녀공학을 안보내는 시절, 회장 선거에서부터 학교 내 모든 일들을 여학생들이 리더쉽있게 처리하는 세상 , 과에서 남학생이 우등생이 되면 뉴스 거리가 되는 세상, 다큐는 그렇게 여성들이 주도하는 세상, 그리고 이제 더는 예전과 같은 습성으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남자로 살아가기에 고민되는 세상 
더 이상 여성에게 '예쁘다'라는 단어를 쓰면 안되는 세상, 남학생들끼리만 MT를 가는게 편한게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남학생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하소연한다. 젠더 이슈가 민감한 시절, 4~50대 남성들에 대해 문제 제기에 자신들이 방패가 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런 남학생들의 상실감과 불만에 대해  노명우 교수는 같은 시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라 정의내린다. 현실 인식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 간의 서로 다른 시각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 중심의 지배관이 더 많이, 더 빠르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남자라서 부당하거나 위협적이거나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부딪치지는 않는다며 세상이 더 여성에게 편해질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의 의견에 대해 남성들은 이미 자신들은 변할 만큼 변했으며 더 이상의 변화에 대해 절실하지 않다는데 딜레마가 있다고 다큐는 짚는다. 그리고 이런 남성들의 의식을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과 엘리스가 아무리 달려도 주변이 바뀌지 않았던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레드퀸' 효과'라 정의내린다.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을 쓴 오찬호 교수는 이런 상황을 우리 사회의 딜레마로 본다. 그간 아버지는 가장으로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그런 희생의 보상으로 가정에서는 군림해왔었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이지만 왜 내가 주범처럼 취급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교수는 강조한다. 문화의 힘을 말한다. 아들들이 말하듯 스스로 변화했다고 하지만 아직 아들들의 의식적 변화는 느리다는 것이다. 아들들은 여성들도 군대를 가야한다며 역차별을 주장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취업에서 남성 선호는 여전한 만큼, 이십대 남자들의 역차별 주장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십대 남자들을 중심으로 역차별이 주장되며, 젠더 갈등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그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귀결된다. 어른들이 물려준 경쟁 중심의 세상에서 버텨내야 하는 아이들의 아우성이, 그리고 이제 어른들의 세대보다 더 좁아진 경쟁의 문에서 보다 더 냉정해지고 예민해지는 아이들의 자기 보호가 '역차별'로 등장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큐는  이른바 요즘 아이들이 주장하는 바 '억울하면 시험치고 합격'하라는 '공정'은 납작한 공정이라고. 약자를 도와주는 정책이 역차별 처럼 느껴져서는 안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함께 앞으로 20년 변화는 더 가속될 것이며 남녀와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도 빠른 변화가 예상될 것이며, 지나간 세대의 관성에 기대어서는 '도태'될 것이라 경고한다. 


지성과 지성을 연결하겠다는 다큐의 취지답게 싱글맘 김나영의 아들 키우기 고민으로 시작한 다큐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현실을 비교하는가 싶더니, 결국 우리 사회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이남자'를 중심으로 한 역차별 논쟁으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다큐의 예고에서 김나영의 아들 키우기 고민 프로그램인 줄 알고 시청하려 했던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수도 있는 결과이다. 최근 다큐들이 장르와 주제의 결합을 시도하며 새로운 모색을 하는 가운데,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 역시 육아 고민을 현실에 있어서의 젠더 갈등까지 끌어가며 주제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런데 다큐가 내세운 바 단정짓지 않고, 정의내리지 않고, 요약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런 취지에 걸맞았을까, 이십대 남자들의 의견도 내세우고, 여러 학자들의 입장을 들어보았지만, 결국 다큐가 '설득'하고자 했던 것은 이 시대 이십대 남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역차별 주장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역차별 주장에 대한 설득이 설득력을 가질까?

과연 다큐가 내세우고 있는 '도태'되지 않기 위한 관성의 변화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어느덧 상실감을 느끼는 이십대 남자들에 대한 충분한 천착이 이루어졌는가, 혹은 여태까지 되풀이 되고 있는 젠더적 갈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에 불과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색되고 있는 새로운 다큐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결국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 브이로그처럼 새로운 형식을 덧붙인 것일까? 새로운 담론일까? 과연 이 시대 다큐가 당면한 과제는 새로운 형식일까, 새로운 담론일까? 첫 방송을 마친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의 과제이다. 

by meditator 2020. 11. 10. 18:37

지난 2016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모부의 엄격하고도 이상한 보호 아래 사육당하듯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와 그녀의 하인으로 들어오게 된 알고보면 사기꾼인 숙희의 미묘한 우정을 그렸다.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의 하수인으로 등장했던 숙희, 하지만 의지가지없는 히데코에 연민을 느낀 숙희와 그런 숙희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연 아가씨는 우정 이상의 '연대'를 통해 자신들을 가둔 삶을 돌파해 나간다. 

<kbs드라마 스페셜 2020> 첫 작품으로 선보인 <모단걸>은 공영방송으로 온 <아가씨>를 표방한다. 드라마는 이미 아가씨와 하인으로 살아가는 두 여성 구신득(진지희 분)와 영이(김시은 분)를 내세운다. 

 

 

영화 속 아가씨가 배경이 일제시대인 듯하지만 정체성이 모호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드라마 <모단걸>은 일제 시대, 그 중에서도 일제가 조선을 '문화'적으로 보다 교묘하면서도 철저하게 통치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919년 조선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진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더 이상 그 이전처럼 '헌병 경찰'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일제는 '문화'적으로 조선에 자율성을 주는 듯하면서도 조선 사회 곳곳에 일본의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이런 일본의 통치 방식의 변화는 성장하고 있는 조선 사회의 문화적 열망에 불을 지폈고 이른바 '모단걸'로 대표되는 사회적 변화 양상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자작의 지위를 얻은 종석 집안의 며느리인 구신득, 가세가 기운 양반 가문의 고명딸로 자란 그녀를 남편은 멀리하고 '모단걸'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런 남편을 두고 볼 수 없어 남편이 만나는 '모단걸'을 만나 '담판'을 지어보려 했지만 외려 신득은 한 눈에 보기에도 멋진 모단걸에 기가 눌리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등장한 남편으로 인해 수모를 겪게된다. 

이에 신득 자신도 '모단걸'이 되어 자신에게 등을 돌린 남편의 마음을 되찾아 오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모단걸'이 되기 위해 '학교'로 향한다. 몸종인 영이와 함께. 이렇게 드라마 <모단걸>은 바람난 남편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겠다는 '전통적 사고방식'과 그 수단이 되는 '학교'라는 근대적 문물의 충돌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학교로 간 아가씨와 몸종 
학교로 간 구신득,  신학문을 배우지만 구신득은 여전히 자작 집안의 며느리이다. 인력거를 타고 쪽진 머리로 몸종 영이를 늘 대동하는 학교 생활, 배움을 통해 모단걸이 되겠다는 그녀의 포부와 달리 어쩐지 공부에는 재능이 없어보이는 신득의 눈을 띄운 건 남편이 바람난 그녀를 보자마자 기세가 눌렸던 그 '모단'한 유행과 뜻밖에도 손에 들어온 '자유 연애'를 다룬 소설이다. 거기에 더해 어쩐지 그녀를 남다르게 대하는 듯한 선생님 윤지온(남우진 분)까지.

그런데 학교로 간 건 신득만이 아니다. 신득의 몸종으로 신득을 돕기 위해 신득의 짝꿍이 된 영이, 시험을 못본 신득 대신 나머지 공부를 하고, 시 숙제를 못한 신득 대신 자신이 쓴 시를 내는 처지이지만 영이는 신학문을 배우는 게 마냥 즐겁다. 그런데 그런 학교 생활을 넘어 그녀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다가오는데 바로 신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윤지온을 통해서이다. 신득이 남편의 모단걸을 만나 위축되었을 때 머리끄댕이를 잡고 육박전을 벌였던 영이는 신득의 신발을 찾아오던 전차에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대는 일본 학생들에게도 지지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런 영이의 모습을 눈여겨 본 윤지온은 일제의 문화 정책에 저항하는 자신의 동인지의 조력자가 되달라 영이에게 부탁한다. 

드라마는 학교로 간 아가씨와 몸종, 그리고 학교 선생님 윤지온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감정적 대척점에 서게 된 신득과 영이의 갈등 아닌 갈등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신득의 구두를 들고가다 일본 학생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그 구두를 윤지온 앞에 내던지고 온 영이, 윤지온은 그 구두가 영이의 것이라 여기며 신겨준다. 이에 감동을 받은 영이는 차마 그 구두를 신득에게 돌려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신득은 영이의 이름으로 낸 '자유시'가 발탁되어 윤지온과 '커피'를 마시며 지온의 '독려'를 듣고, 거기에 더해 지온이 영이에게 보내는 남다른 시선을 오해하여 자신에게 지온이 남다른 감정을 품었다 생각하게 된다. 

영화 <아가씨>에서처럼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미묘한 갈등 관계, 이 갈등은 윤지온이 준 잡지, <새벽>이 일본인 교장에게 들키며 더불어 드러난다. 학교 선생님 윤지온을 둘러싼 신득과 영이의 갈등, 신득은 영이가 자신을 속였다고 분노하고, 거기에 더해 윤지온조차 자신을 좋아한다 오해하게 만들었다며 전형적인 '오해'로 인한 삼각 관계로 신득과 영이의 '주종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삼각 관계는 윤지온의 '새벽'이 불온한 서적으로 수사를 받게 되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이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되면서 관계의 정체성에 변화가 생긴다. 아가씨와 백작, 그 사이에서 조력자로 고군분투하다 그만 아가씨와 연대하게 된 숙희처럼, 드라마 <모단걸>은 영이의 구금을 통해 윤지온을 사이에 둔 연적인 줄 알았던 영이가 알고보니 신득의 유일한 가족이자 벗이었다는 '자각'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이 바뀐다. 

 

 

신득, 모단걸이 되다 
드라마 속 신득은 모단걸이 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작의 며느리였던 그녀의 정체성에 맞춰 모단걸에 마음을 빼앗긴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말이 모단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지 모단걸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런 신득의 의지는 학교와 학교를 매개로 한 모단한 문물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처음에는 문물이 그녀를 현혹했다. 뽀족한 구두, 모단걸스러운 모자와 의상,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자유 연애를 그린 소설 등. 그러나 그런 '모단'한 문물이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무엇보다 그토록 자신이 애를 써서 돌려놓고 싶은 남편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드라마는 신득의 드라마틱한 모단걸 되기 해프닝을 통해 진정한 모단걸은 문물의 세례가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의 거듭남이라 '정의'내린다. 아니 어쩌면 남편의 마음을 되찾겠다고 당당하게 학교를 선택했던 신득 그 자체에 애초에 '모단'의 주체성은 내재되어 있었는 지도. 그래서 당당하게 학교를 선택했던 신득은 이제 당당하게 남편에게 '이혼장'을 내던지고 진짜 모단걸의 길을 걸어간다. 

by meditator 2020. 11. 8. 10:12

남자들 서넛만 모이면 '군대' 얘기로 날이 샌다면, 여자들 역시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풀어내기 시작하면 남자들 군대 얘기 못지않게 '우여곡절'의 롤러코스터가 끝없이 펼쳐진다.  세상에 '거저' 아이를 낳고 기른 엄마가 어디 있으랴, <산후조리원> 2회 마지막 사랑이 엄마 조은정(박하선 분)의 말처럼 엄마들은 매일 밤 저마다의 육아 애환으로 눈물흘린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다. 그 우여곡절 많은 출산과 육아담이 tvn의 미니 시리즈로 왔다. 바로 <산후 조리원>이다. 

드라마는 회사에서는 최연소 임원, 병원에서는 최고령 산모인 42세 오현진(엄지원 분)이 재난과 같은 출산과 조난과 같은 산후조리원 적응기를 거쳐 조리원 동기들과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있다. 

 

 

조난과도 같은 모유 수유
그리고 '조난'과 같은 산후조리원 적응기라는 취지에 걸맞게 2회 펼쳐진 오현진의 '수유' 에피소드는 눈물겹다. 42살의 나이임에도 비록 양수가 먼저 터졌지만 무사히 아이를 출산하고 딱풀이 엄마가 된 오현진, 그런데 아이를 낳기만 하면 다된 줄 알았는데 '조난'급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모유 수유', 갖가지 '출산'과 관련된 줄임말들이 난무하는 수유실에서 여유롭게 수유를 기다리던 현진, 하지만 현진이 타고난 유방의 모양이 수유하기에 적절하지 않은데다가 첫 수유로 +엄마 현진이 긴장한 탓에 수유가 여의치 않다. 엄마 젖을 물던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수유실의 직원은 다음 기회에 라며 엄마 현진을 밀쳐낸다. 

현진이 그리던 로망, 아이를 품에 안고 우아하게 젖을 물리는 한 폭의 그림같은 장면은 아이를 낳아 젖을 먹여 본 엄마들이라면 '환타지'라는 사실을 다 알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젖을 먹인다는 그 '만고불변'의 진리가 현실에서는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는 '허들' 경기와 같다는 것을. 현진처럼 유방의 모양이 수유에 적절한가 부터 젖이 차올라 젖몸살을 앓고, 부족해서 아이가 늘 허기져해서 애가 닳고, 처음 해본 수유에 젖이 너덜너덜해지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이 되기 십상이다. 

드라마는 이런 '고난'의 여정을 42살의 노산을 겪은 직장맘 현진과 전업주부 사랑이 엄마 조은정을 둘러싼 산후 조리원의 미묘한 갈등으로 치환한다. 

이미 쌍둥이 2명을 출산한 사랑이 엄마는 쌍둥이 2명을 21개월까지 모유 수유로 키운 육아계의 '천연기념물'같은 존재로 산후조리원의 산모들에게 칭송받는다. 엄마들은 모여 '태교'와 모유 수유의 장점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더하는데, 그런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직장맘 현진은 바쁜 직장 생활에 태교랄 것도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좀비 영화를 보고,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양수가 터지도록 일을 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때까지도 최연소 임원이 된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찼던 현진, 그러나 그녀의 자부심은 자신의 젖을 거부하는 자신의 아이 딱풀이의 자지러지는 울음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사랑이 엄마에게 '아부'까지 마다하지 않는 산후조리원 동기들을 비웃으며 결국 '직장맘'과 '전업맘'을 둘러싼 감정 충돌로 사랑이 엄마와 갈등까지 빚게 되며 졸지에 산후조리원의 '왕따'가 되고 만다. 

 

 

직장 맘 vs. 전업맘? 
드라마는 지금까지 '직장맘'에 대해 그래왔듯이 역시나 최연소 임원까지 올랐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있어서는 '젬병'인 캐릭터로 오현진을 그려낸다. 자신의 유방 모양에 대해서도 무지하며, 그런 유방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데 난항을 겪었을 때도 그저 짜증을 내고 당황하기만 하는 '생초보' 엄마로 그려낸다. 

그런 현진을 산후조리원 원장이 소환하여, 육아 9단 사랑이 엄마와의 화해를 '주문'한다. 마치 직장맘 엄마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같은 학교 또래 엄마들과 '교류'를 통한 정보를 얻지 못해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 없다는 기존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산후조리원이라는 배경으로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있어서 직장맘은 무지하며, 전업 주부는 유능하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갈등'을 만들어 낸다. 물론 이 갈등은 결국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젖으로 '모유 수유'하고 싶다는 현진의 '절대 항복'을 통해 '쭈쭈젖꼭지'라는 정보의 공유라는 '눈물어린 미담'으로 해결된다. 

모든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눈물로 밤을 지샌다는 사랑이 엄마의 '교시'와 그녀가 '은혜'처럼 나누어 준 '쭈쭈 젖꼭지'로 마무리된 에피소드를 보고 난 후 과연 육아의 '갸륵함'으로 '공감'하며 '감동'할 수 있을까?

드라마 속 산후조리원은 군대와도 같다. 처음 엄마의 젖이 낯설어 우는 아이를 냉큼 데려가 버린다. 졸지에 엄마는 수유의 도구가 된 듯 처리된다. 기계적인 수유의 시스템에 초보 엄마 현진은 무기력하게 ko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직장을 다녀야 하는 엄마는 심지어 육아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책임 엄마로 산후조리원 동기들은 묘사한다. 물론 이후에 이런 오해에 대해 풀어갈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2화에 있어서 현진은 '죄인' 취급을 당한다. 직장을 다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어야 하는 직장맘, 그런데 왜 직장 맘은 '검색'조차 하지 못하는 생초보로 그려낼까. 최연소 임원까지 오른 여성이지만 '일'에 있어서는 유능하지만 '엄마'로서는 '무지'하다는 '전형'을 드라마는 다시 한번 재생한다. 

결국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나보다 먼저 아이를 낳은 엄마들의 경험이 중요하고, 같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과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막상 드라마를 보며 들어오는 메시지는 저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할까라는 두려움이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가는 건 집에서 조리하는 것보다 과학적이며 편리하다는 '이점'이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전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이 '생초보'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을 다녀 상대적으로 정보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한번 '조난'의 경지에 몰리게 된다면, 과연 그 '조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아이를 낳고 싶을까.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겨우 2주에 불과한 산후조리원의 과정임에도 직장 맘과 전업 주부라는 이분법적인 갈등을 통해 여성과 여성의 편가르기를 통해 출산의 어려움을 풀어내려 한다는 건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 많은 출산을 앞둔 가임 여성들에게 '지옥도'를 엿보게 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드라마 속 남편의 모습은 앱 개발 스타트업 ceo라는 직책이 무색하게 무능력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막상 드라마에서 수유의 문제는 온전히 현진만의 문제가 되고, 현진과 그 주변 엄마들이 해결할 '인간 관계'가 되며, 아빠인 도윤(윤박 분)은 산후의 달라진 상황에 짜증을 내는 아내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눈치없이 구는 걸림돌처럼 취급된다. 아빠가 바빠서 함께 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고 자신의 일도 전폐하고 산후조리원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육아의 전적인 책임과 과업은 엄마의 몫이다. 

아이를 낳았지만, 그래서 편하게 조리하려고 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다시 한번 '조난'이 되고 마는 산후조리원의 에피소드, 그건 마치 산후조리원으로 온 <sky캐슬>처럼 엄마들 사이의 이분법적인 갈등을 통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를 그려낸다. '리얼'한 경험담을 배경으로 했다는 드라마, 그런데 어쩐지 드라마를 보고나면 아이를 낳고 키우기보다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 드라마, 과연 이 '무자식 상팔자'의 소견을 '감동적인 육아담'으로 역전시킬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0. 11. 4. 10:00

sbs월화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종영했다. 송아(박은빈 분)와 준영(김민재 분)는 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로맨스 멜로 드라마의 정석에 따른 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16부를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반가운 엔딩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맞잡고 웃는 그들에게 상이라도 내리고 싶다. 왜냐하면 지난 16부동안 이 두 젊은이는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신의 삶에 던져진 문제에 대해 답을 얻으려 애써왔으니까. 그저 사랑만이 아니다. 스물 아홉, 자신들에게 던져진 삶이 준 화두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한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사랑 이야기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암송되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두 갈래' 길에 대한 '화답'을 한다. 

 

 

송아가 포기한 길 
마지막 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 송아는 대학원에 합격했노라고. 준영이 축하한다고 하자, 송아는 하지만 대학원에 가지 않을 거라고 답한다. 송아에게는 오래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바이올린에 대한 '화두'가 던져졌다. 대학에 들어가 취미로 만난 바이올린이 너무나 좋아 4수를 하면서까지 선택했던 바이올린,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바이올린은 늘 송아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리고 이제 송아는 전문 연주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16부는 음악도로서 송아가 고민했던 시간이다. 좋아하지만 늘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해왔던 동기들에게 미치지 못한 자신의 실력에 고민해 왔던 송아, 여전히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해나가야 할 길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답답할 정도로 주저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이 송아에게는 계속 다른 기회가 왔다. 연주자의 처지를 헤아려 기꺼이 자신의 구두를 벗어주는 송아의 자세가 송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제 송아는 송아에게 온 다른 기회를, 다른 길을 가려고 한다. 드라마의 16부 내내 이수경 교수의 체임버 오케스트라 실무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민해 왔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송아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가볍다. 가보았기에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16를 통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포기'가 아니다. 때로는 가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준영이 포기한 길 
그런가 하면 준영은 차이콥스키 콩쿨을 포기하겠다고 전한다. 준영의 삶은 늘 방점이 자신의 바깥에 찍혀 있었다. 친구인 정경(박지현 분)이 부러워하다 못해 시샘할 만큼의 쇼팽 콩쿨에서 2등을 할 만큼의 재능이 있었지만 그 재능은 사고치는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로 허덕였다. 그리고 허덕거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경후 재단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렸다. 스스로 '달란트'가 아니라 '저주'라고도 생각할 만큼.

재능을 가졌지만 그 재능의 '주체'로서 살아오지 못했던 준영은 송아와 '사랑의 열병'을 앓고나서 '피아노'를 포기할 마음마저 가진다. 자신의 밖에 찍혔던 '삶의 방점'을 거두어 자신에게로 오는 '통과 의례'이다. 그렇게 피아노마저 포기하려 했던 준영이 송아의 졸업 연주회에 반주자로 자처한다. 송아와 눈을 맞추며 연주를 '완성'한 후 준영은 행복하라는 송아의 말에 '사랑해요'라고 고백한다. 늘 송아와의 관계에서도 '미안해요'라는 말만 되풀이 하던 준영이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말이다. 

그리고 이제 차이콥스키 콩굴을 포기했다. 그에게 콩쿨은 위기에 선 연주자 박준영이 선택했던 배수진같은 것이었다. 다시 줄을 세운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자신이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명망성의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콩쿨 심사위원을 위한 연주를 해야 하는 건 여태 그가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를 위해 피아노를 쳐왔던 방식의 답습일 뿐이었다. 행복하기 위해서 송아에게 다시 사랑해요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준영은, 그렇게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슈만을 치고, 브람스를 치고, 준영의 결을 살린 '피아노'를 완성해 간다. 자기 삶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이다. 

 

 


준영과 송아가 선택한 길
14회 준영을 찾아간 송아는 준영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더는 준영 씨를 사랑하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행복'이라는 이 피상적인 단어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가장 갈등에 빠뜨리는 단어이다. 실제 한 사람이 일생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아마 '데이터'로 따지면 '쥐꼬리'만큼도 안될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행복'을 지우라고도 말한다. 행복을 향하는 것자체가 무의미하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행복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일상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더라도 그그 시간을 의미있도록 만드는 것이 '행복'을 향한 방향성이 아닐까 싶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해 방향을 트는 것처럼. 

송아가 행복하지 않기에 준영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은 16부작 드라마 절정에 등장한 편의적인 갈등만이 아니다. 준영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음에 대해 송아는 돌아볼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런 송아에게 준영이 화답한다. 행복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16부의 엔딩은 그래서 상처받고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도, 사랑으로 인해 받은 행복이 더 크기에 사랑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드라마는 행복은 상처받지 않음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상처받음에도 기꺼이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사랑만이 아니다. 준영과 송아는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자 포기하는 상처의 시간을 가졌다. 송아는 오랫동안 좋아했던 바이올린을 포기했고, 준영은 피아니스트로서 명예를 업그레이드시켜줄 콩쿨을 포기했다. 행복은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말하고 있다.

마치 그건 극중 등장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와도 같다. 브람스 소나타의 부제는 '자유롭고 고독하게'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송아는 나레이션으로 덧붙인다. 실은 브람스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연주하라고 표기했다고. 같은 곡인데, 고독하게와 행복하게의 간극, 그건 '선택'이다, 결국. 아니면 고독이라고 보여지지만 실은 행복일 수도 있는 삶의 양면성에 대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아 사랑을 포기할 수도, 명망을 위해 콩쿨을 고집할 수도, 좋아했던 것이니 계속 부등켜 안고 갈 수도. 그 모든 주어진 선택지에서 송아와 준영은 보다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이 앞으로 상처를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처받아도 기꺼이 그 상처를 감수하는 것이 자신들이 행복할 거라 생각하며. 상처라 생각하면 상처지만 행복이라 명명하면 행복이 되는 것들이라 드라마는 상처에 주춤거리는 청춘들에게 전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는 잔잔하고 느리게 흘러갔지만 그 어떤 청춘 드라마보다 '청춘의 고민'에 진진하고 열정적으로 천착했다. 젊음의 시간, 아니 젊음의 시간 만이 아니라 살아가며 늘 다가오는 '행복'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의 행복을 추구하려 다가갈 때 다가오는 아픔들에 대해, 그리고 그런 삶의 고민들에 대해 두 주인공, 아니 두 주인공만이 아니라 극중 모든 인물들은 최선을 다해 고뇌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는 길에 선다. 

by meditator 2020. 10. 21. 17:48

또 한 편의 시네마틱 드라마가 찾아왔다. 바로 10월 17일 첫 선을 보인 10부작 OCN드라마 <써치>이다. 

<트랩>, <타인은 지옥이다>, <번외 수사>에 이은  영화와 드라마의 콜라보, 4번째 시네마틱 드라마답게 영화 <무수단>의 제작 극본을 맡은 구모 작가와 <스승의 은혜>, <시간 위의 집>의 임대웅 감독이 밀리터리 스릴러로 만났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나타난 괴생명체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구모 작가의 전작 무수단처럼 <써치> 역시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괴이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흘러들어간 공을 찾으러 들어갔다 실종된 오진택 상병과 동료 병사, 이들의 수색 작전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군견병으로 차출된 옹동진 병장(장동윤 분)과 화생방 방위 사령부 특임대 손예림 중위(정수정 분) 등이 수색작전에 투입된다. 사람의 짓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오진택 상병, 그 손에서는 '공수병'으로 의심되는 수포가 동시에 발견된다. 또한 수색 과정에서 들개떼의 습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옹동진 병장의 둘도 없는 전우인 군견병이 의문의 생명체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 

비무장 지대 사망 사건이 소환한 '23년전 총격' 
드라마는 이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을 두 개의 가지로 뻗어나간다. 그 중 하나는 바로 같은 장소에서 23년 전에 발생한 북한군 총격 사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북한'이다. 강가에서 아이를 안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성 장교, 그녀를 향해 가는 듯한 차 한대, 그런데 차 안에 탄 북한군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이상'하다. 그의 얼굴은 수포 등으로 급격하게 병증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좀비'와 같이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결국 차는 나무에 부딪치고, 괴력으로 차문을 부순 의문의 북한군 장교는 '핵물질'로 추정되는 박스를 든 채 사라진다. 그리고 수포에 뒤덮힌 채 사라진 북한군 장교가 바로 미스터리의 시작이다. 

그로 부터 얼마 후 작전에 투입된 남한의 수색조는 강가에서 바로 그 아이를 안은 여성 장교를 발견한다. '귀순'을 하겠다는 여성 장교를 보호 하에 데리고 가려는 순간, 등장한 북한군들, 그들은 그녀에게 사라진 북한 장교의 행방을 묻고, 그녀 또한 데려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남과 북의 대치 상황, 한대식의 우발적인 발포로 결국 남한군과 북한군의 교전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 당시에 발포를 했던 그 남한군 병사는 국군 사령관이 되어있다. 그런 그에게 보고된 당시 사건이 벌어진 21섹터에서 다시 한번 발생한 의문의 사건, 그는 다시 한번 당시의 사건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DMZ의 영웅이라 추앙받는 국회의원 이혁에게 보고를 한다. 

무엇이 한대식 사령관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걸까? 왜 여유를 부리면서도 이혁은 직접 21섹터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 보고 현장에 등장한 것일까? 그건 아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혁을 '영웅'으로 만든 23년전 북한국 총격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 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누군가가 범죄자에서 영웅이 되는 과정에 애꿏은 전우의 희생이 치뤄졌을 지도 모른다는 '비밀'이 이제 다시 한대식과 이혁으로 하여금 21섹터의 사건의 '1주일' 안에 조기 해결을 다그치도록 만든다. 

그래서 만들어지게 된 북극성 특임대, 자신의 군견을 잃은 옹동진 병장과 함께, 그와 불미스럽게 조우했던 의문의 인물이었던 송민규 대위(윤박 분), 이준성 중위 등이 합류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21섹터에서 발생한 사건 조사와, 그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등장한 의문의 인물 수색이지만, 그 드러난 임무 뒤에 한대식 사령관이 송민규 대위에게 은밀하게 지시한 또 다른 '비밀' 임무가 있음이 암시된다. 

 

 

좀비 미스터리 스릴러? 
<써치>는 이렇게 사망 사건으로 부터 소환된 23년전 사건의 진실 규명이 특임대 구성까지 이어지며 밀리터리 스릴러의 갈래를 펼침과 동시에 저항 한번 하지 않은 채 사망한 오상병의 손에서 나타난 수포로 부터 의심된 '공수병'으로 추정되는 의심의 증상으로  좀비 미스터리물의 방향을 더한다. 

앞서 오상병이 동료와 함께 공을 찾으러 들어간 DMZ 21 섹터 부근에서 '사람'의 형상을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의문의 생명체의 움직임을 드러내 보인다. 또한 사망한 오상병의 혈액은 급격한 변이를 보이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이제 '사망자'로 처리되어 영안실에 안치된 오상병이 되살아난다. 영안실에서 이상한 움직임과 소리를 듣고 문을 연 손예림 중위를 공격한 '살아난 시체'가 된 오상병, 번뜩이는 두 눈과 괴수와 같은 행동으로 손중위를 공격하며 2회를 마무리한다. 

 

 

2회까지의 <써치>는 이미 장르물에서 입지를 다진 임대웅 감독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한다. 여름에 방영되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가을의 선선함이 오싹함으로 이어지는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한 괴생명체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르물로써 한껏 기대를 모은다. 거기에 얽혀진 23년전 음모, 그리고 그 23년전에 '결자해지' 되지 못한 '진실'이 23년이 지난 오늘에서 다시 '해원'으로 나타난다는 설정은 장르물의 깊이를 더한다.  앞서 <트랩>, <타인은 지옥이다>를 통해 시네마틱 드라마의 묘미를 선사했던 바, 과연 그 명성을 <써치>가 다시 한번 이어갈 지 기대가 된다. 

by meditator 2020. 10. 19. 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