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스포네'

영화 <관상>을 보고나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와 그를 보호하려던 김종서를 제거하는 '계유정난'(1453년)이란 역사적 사실은 변할 수가 없기에, 그들의 관상도, 그 틈바구니에 끼인 내경 일가도 그 이미 결과가 자명한 역사 속에서 짖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 역사가 스포가 되는 작년 사극 영화였던, 그리고 보잘 것 없던 인물이 역사에 휘말렸던 영화 <광해>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광해>가 광대가 왕이 되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왕도, 그리고 왕이 되어 이루려고 해보았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음에도 마치 <왕의 남자>의 공길이 한마탕 놀아보기라도 한 듯한 속 시원함이라도 남겨주었다면, <관상>은 이상하게 껄쩍지근한 민초의 자괴감을 남긴다는 뒷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사진; 뉴스엔)

그런 <관상>의 후기는 다시 <황금의 제국>의 결말에 대한 소감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태주(고수 분)가 성진 그룹을 한번이라도 차지해 보기라도 했으면, 결국 태주는 아무 것도 이룬 게 없고, 성진 그룹은 결국 성진 그룹의 것이 되었구나 라는, 그래도 단 한 회 만에 모든 걸 자신이 책임진다며 너무 획 바뀌어 버린 태주도 적응이 안되지만, 죽일 것 까지야......등등. 아마도 이것은, 영화를 보는, 혹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동일시했던, 자신들과 비슷한 주인공들이, 역사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신분 상승'의 꿈을 향해 용트림을 틀지만, 결국 '패배자'가 되어 스러지는 현장을 보는, 아니 그 아픔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공감하는, 2013년의 민초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투영된 소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이라면, 아니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때깔좋게 살아보기 위하여 거짓말, 사기, 협잡 따위에 점점 눈을 감고, 오로지 타고난 제왕의 자리가 어디 있냐며 나라고 왜 못하겠냐며 일갈하는 태주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는 동네에 뉴타운이 들어선다고 하면, 거기에 쫓겨날 사람들은 생각도 않고 옳다구나 땅값이 올라 한 몫 잡겠구나 이러고, 대통령이 될 사람이 사업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하건, 그의 아비가 누구였건 아니 오히려 그의 아비가 누구라서 그때처럼 잘 살게 해주겠지 하며 투표를 했었을 것이다.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는, 작가의 전작 <추적자>의 강동윤(김상중 분)을 빼닮았다. 철거될 지역의 초라한 음식점집 아들과, 찌그러져가는 이발소 집 아들들은, 그저 자신의 호기와 배짱, 그리고 능력만을 믿고 '입신양명'을 꿈꿨다. 그리고 똑같이, 그 과정에서 괴물로 변해갔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저 곳에 도달할 수 있으려니 했는데, 놓친 게 있었다. 거기는 바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인 것을. 자신이 바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짓밟고 괴물이 되어야 그 언저리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을, 


고수가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자살을 선택하며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번 고수의 죽음은 새로운 결말을 요구하던 시청자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결말이었다. / SBS 대기획 황금의 제국 방송 캡처
(사진; 스포츠 서울)

<황금의 제국>성진 그룹 회장실에 걸려있는 최동성의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기 그대로, 거기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이다. 마지막 홀로 남겨진 서윤처럼 자신의 가족도, 주변 사람도 모조리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야 했다. 
장태주가 포기한 것은, 바로 그것, 자신이 괴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설희를 다시 감옥에 보내야 하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더 많이 짓밟아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현실의 그는 비록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벌을 스스로에게 내렸지만, 최소한 궁극의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강동윤은 끝까지 괴물이 되어서라도 그 곳에 도달하려고 하다 실패하고, 장태주는 스스로 괴물이 되는 길에서 돌아선다. 
반면, 홀로 회장실에 남겨진 서윤은 주변의 모두를 잡아 먹은 채 괴물이 되어, 아버지란 이제는 망령이 되어버린 괴물의 주구가 되어 똑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민재는 치유되지 않는 괴물 중독증으로 인해 ,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흘러 감옥을 나와도, 여전히 괴물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자신에게 벌을 내린 장태주를 보며 느끼는 자괴감은 무엇일까? 바로 괴물이 되어서라도 한번 때깔나게 살아보지 라는, 내 안의 괴물 중독이 일까? 새삼스럽게 절감하게 된 괴물들이 사는 나라 때문일까? 아니, 괴물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황금의 제국에 대한 절망감때문일까?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어린이 그림 동화가 있다. 홀로 방 안에 남겨져 무서워 하던 아이의 방이 어느 덧 숲 속으로 변해가고, 괴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괴물들은 무서운 괴물이 아니다. 아이는 어는 덧 괴물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괴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 변해버린 방과 괴물들은 바로 아이의 마음 속에 있던 공포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기에, 아이가 마음 먹기에 따라 괴물은 친구가 되기도, 부하가 되기도 하고, 방문을 열고 나온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사실, 드라마도 그렇다. <황금의 제국>이란 드라마가 끝나면, 드라마 속 괴물 일가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드라마 속 괴물들은 사라져 없어져도, 현실의 괴물은 더 공공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실의 자괴감을 드라마 속 환타지로 치유해 주지 않은 드라마로 인해, 잠시 눈감고 싶었던 현실이 더 느껴져 괴로워 하고, 드라마에서 조차 이루어 지지 않은 '꿈'에 분노하기 조차 한다. 

(사진; 리뷰스타)

언제인가 부터 드라마 속 재벌들은 괴물이 되어 있다. <스캔들>의 장태하가 그렇고, <황금의 제국>의 성진 그룹이 그렇고, <결혼의 여신>의 시댁이 그렇다. 그들은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사람을 없애고, 사람을 피 말리게 하고, 사람을 휘돌린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 속 괴물처럼 친구가 되어주지도, 부하가 되어주지도 않는다. 눈 한 번 끔뻑하고 나면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괴물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 먹으려 든다. 

황현산 교수는 그의 수필집 [밤은 노래한다]에서 현실을 지옥도처럼 그려내는 김기덕 감독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튼튼한 상상력으로, 우리 안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마음들과의 싸움에서 우리 시대 가장 높은 투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상상력에 찬사를 보낸다. 
물론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괴물과, 최근 드라마 속 괴물들은 맥락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우리의 비겁함을, 초라함을 용기내어 말할 수 있는 이들 작품에 대해 우리는 황교수와 똑같은 찬사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현실을 직시해 주어 고맙다고. 
결국 '꿈 속의 괴물'을 없애거나, 그들과 친구가 되거나, 내 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리는 건, 현실의 내 몫이다. 


by meditator 2013. 9. 18. 10:25

서양 문화에서 팜므 파탈(프랑스어로 '치명적인 여자'.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악녀(惡女)의 캐릭터로 통한다. 화려한 외모와 선정적인 몸매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감미롭게 유혹한 후 파멸로 이끈다-네이버 지식백과)의 전형적인 인물로 받아지는 대표적 여성 중 한 사람이 유디트이다.

유디트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홀로페르네스가 이끈 앗시리아의 부대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자, 과부였던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육체적으로 유인해 하룻밤을 보내고, 그의 목을 잘라 성벽에 걸어놓아 앗시리아을 물리친 여성이다. 그녀가 적장의 목을 자른 그 모습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적장을 부등켜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와 같지만,  유디트는 그 이후 많은 미술가들을 통해 명작의 한 장면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팜므 파탈의 전형은 물론, 프로이트 의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상징적 인물로 재해석되며 서양 문화의 여성 캐릭터의 한 전형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디트라는 여성 캐릭터의 정의는 두 가지다.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성을 목적,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 하나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씌여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찾아보자면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우리의 역사 행간에 수많은 유디트들이 존재하겠지만,  이글의 원활한 설명을 위해, 상징적인 존재로 서양 문화의 유디트를 모셔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디트와 같은 인물들이 공교롭게도 최근 화제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매우 충격적이도 부도덕한 사건'이라는 부제를 가진 <스캔들>에서 직접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주범은 하은중을 유괴한 하명근이지만, 사실 그 못지않게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윤화영(신은경 분)이다. 
윤화영은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장태하와 결혼을 하게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토록 신임하던 장태하는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윤화영의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하고, 그가 감옥에서 죽어가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장태하를 애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윤화영은 그와 결혼을 할 때부터 한결같이 장태하를 무시하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심지어 그가 아버지를 죽였으니, 받아들이기는 커녕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쓴 것이 바로 윤화영 자신이 낳은 아들 은중이었다. 하지만, 은중이가 유괴되어버리고, 장태하에게 버림을 받게 된 윤화영은 생면부지의 금만복을 장은중으로 둔갑시켜 지리하지만  무시무시한 복수를 이어간다. 


이미지

지난하지만 알고보면 더 무시무시한 복수로 치자면, <황금의 제국>의 한정희(김미숙 분)도 못지않다. 그녀 역시 자신의 남편 배영완이 성진 그룹 최동성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의 칼을 간다. 최동성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며, 배동완의 아들인 배성재를 최동성의 아들로 키워냈으며, 한결같은 현모양처로 처신하며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만을 노려왔다. 최동성의 목숨이 경각에 놓인 순간,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며,  복수를 실행하고자 한다. 

윤화영과 한정희의 공통점은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위해 자신의 '성(性)'을 이용한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살아가며 복수의 시기를 노린다. 윤화영의 복수의 끝은, 기고만장한 장태하의 뒤를 자신의 핏줄, 혹은 대리 핏줄로 잇게 만드는 것이며, 한정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들이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복수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찌기 유디트가 그녀가 속한 공동체 이스라엘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헌신하듯, 윤화영과 한정희 역시 그녀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그녀가 속했던 남자들에 대한 복수로 일생을 보낸다.  지고지순하다는 말로 대신하기엔 집요하고, 퇴행적이다. 

이렇게 여성의 성을 도구로 이용한 방식은 엄밀하게 '약자'의 방식이다. 정정당당하게 권력을 놓고 한 판 붙어낼 수 없는 , 그런 수단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편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식인 것이다. 잘 나가는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지만 건설 재벌이 된 장태하에게는 역부족인 윤화영이, 최동성의 사랑 외에는 자신의 남편의 억울함을 풀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정희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권력을 쟁취하기엔 미약한 한정희, 윤화영 세대들의 복수법이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 세대인 최서윤 역시 자신의 성을 무기로 삼는다. 장태주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은 이전 세대들의 맹목적 복수와는 좀 다르다. 일종의 '제휴'이다, 

(tv리포트)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드라마 속 유디트들의 복수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윤화영이 벌인 복수극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 대신 금만복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고, 이제 그녀의 친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은 핏줄의 복수 대신에, 아버지로 인해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지게 되어 있다. 
한정희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긴 세월 한결같은 최동성의 사랑을 외면하며 복수의 칼날을 세워왔던 그녀의 복수는 허무하다. 아들을 성진 그룹의 후계자로 만들지도 못했고, 이제와 알고보니 정작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최동성도 아니요, 어쩌면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에 맞닦뜨리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디트가 성녀로 받아들여지며 구원의 팜므 파탈로 명화 속을 유람할 때, 우리의 드라마들은, 윤화영, 한정희 세대의 '도발적' 복수 방식을 용인하지 않는다. 적장의 목을 성문 밖에 건 유디트는 존경 받으며 105살까지 살지만, 우리 드라마 속 유디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자기 파멸 뿐이다. 아직도 남성들의 권력은 우월하며 견고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윤의 계약 결혼의 행보가 궁금하다. '성'을 무기로 한 최서윤 세대의 흥정은 과연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 그 앞선 세대의 실패를 뛰어넘은 성취를 보일까.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최서윤 역시 성진 그룹의 최서윤이란 사실이다. 


by meditator 2013. 8. 14. 10:17

'복수는 달콤하다'

복수에 대한 이 정의는 7월 16일자 한겨레 칼럼에서 전중환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 진화 심리학)가 내린 것이다.

복수가 달콤하다니? 그 이유는, 당할 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분노를 일으켰던 복수가 복수를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가는 순간, 뇌에는 초콜릿이나, 마약을 한 거 같은 짜릿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술래잡기의 술래가 되어 상대방이 숨어 있는 장소를 향해 나아갈 때 느끼는 그 긴박감같은 거랄까.

 

 

그런데 술래잡기의 술래가 다가가서 상대방을 잡으려다가 술래가 먼저 덜미를 잡힐 때가 있듯이, 복수란 꼭 계획을 할 때의 짜릿한 흥분을 일으키는 그 상황대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수란 진화론적으로 볼 때, '복수심은 상대방의 공격을 사전에 억제한다는 뚜렷한 기능을 수행하고자, 나를 두 번 다시 건드리지 않게 하려면 상대로 하여금 앞으로 그 어떠한 도발도 털끝만한 이득조차 가져다주지 못할 것임을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라는 것이다. (마틴 테일리 & 마고 윌슨) '상대방의 순이익이 0이 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되도록 갚아주려는 것인데, 그 과정은 대단히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이기 까지 하다'는 것이다. 즉 '엎질러진 우유를 다시 담을 수 없듯이, 내 가족을 죽인 원수에게 보복한다고 해서 가족이 살아돌아올리는 만무하'니까. 하지만, 진화론적으로, 그 어떤 나쁜 짓도 영원히 보존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류는 오늘도 자기를 내던지며 복수에 헌신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월, 화 드라마의 남 주인공들은, 이런 복수에 대한 진화론의 시뮬레이션 실행 모델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명횡사한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불나방이 되어 복수의 화신으로 살아간다.

<황금의 제국>의 주인공 장태주(고수)는 성진그룹의 건설 공사 과정에서 철거민으로서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그 스스로 '황금의 제국'이라 일컬어지는 성진그룹을 향한 복수의 일전을 꿈군다.

<상어>의 김준 역시 마찬가지다. 조상국(이정길)회장이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킬러를 이용해 없애버린 자신이 아버지와 자신의 복수를 갚고자, 15년만에 김준이 되어 나타났다.

 

 

 

 

전중환 교수는 복수가 비록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이라고 해도 결코 복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국가라는 공적 처벌 제도를 지닌 문명 사회는 바로 이 횡행하던 사적 복수를 '법'이라는 심판을 통해 제도화함으로써 안정화를 기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회란 사적 복수는 엄벌에 처하지만, 복수심에 몸부림치는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회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상어>로 돌아와서, 납치당한 이현을 어렵게 구한 이수, 즉 김준에게 이현의 양아버지 변방진(박원상)은 내 손으로 너를 잡고 싶지 않다며 더는 복수를 진행하지 말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김준의 대답은 자신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15년 전에 처럼 당하지는 않겠다고도 한다. 그런 김준에게, 변형사는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다. 미안하다고. 내가 15년 전에 조금만 더 진실을 밝히기에 노력했다면 니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상어>와 <황금의 제국>을 관통하는 복수는 공적 처벌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우리 근대사의 피해 사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상어>는한때는 친일파이다가, 전쟁 통에는 인민군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학살했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범죄도 서슴치 않았던 조상국이라는 근대사의 전범이 오늘날의 지도층으로 살아가기 위해 저지르는 만행을 복수의 배경으로 삼는다.

<황금의 제국>은 고도 성장기의 대한민국, 돈이 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거민의 목숨 따위는 가볍게 거둬들였던 자본 축적기의 대한민국 재벌의 파렴치한 범죄를 역시나 복수의 배경으로 삼는다.

즉, 복수의 진행은 사적 복수이지만, 그 배경이 되는 피해 사례는,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단죄되지 않았던, 공적 범죄들인 것이다. 그것은, 전중환 교수의 말처럼, 피해자의 눈물을 제대로 닦아주지 못한 '국가 제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여전히 눈물 흘리고 있는, 공적 부조를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사적 복수를 통해서만이 억울함을 풀 수 있는 피해자 김준과 장태주를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짚고 있는 중이다.

by meditator 2013. 7. 17. 09:47

강용석의 tv출연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그를 욕하던 사람들조차, 최근 종편과 케이블의 방송에 출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바꿔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심지어 호시탐탐 정치인으로써의 복귀를 노리는 그를 두고, 이러다 대통령 후보에 까지 나서는 거 아니냐는 우스개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무슨 대통령 후보! 라는 말에, 왜 안되냐고, 전 대통령이 <야망의 세월>과 <사랑과 야망>을 통해 대통령까지 됐는데, 강용석이라고 안될게 무어 있냐고 '이미지 세탁'의 성공적 사례까지 들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젼을 통해 등장한 인물들, 사건들의 이미지를 여과없이 받아들인다. <야망의 세월>이나, <사랑과 야망>의 남자 주인공은 그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모델이 된 누군가가, 정말 드라마 속 그 사람처럼, 의지의 입지전적 인물에, 정의롭고 양심적인 리더라 믿으며 한 표를 행사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 등장한 드라마 속 우리나라는 '수출 입국'에 '건설 입국'의 성장기의 화려한 조명만 반짝거렸었다. 한강을 따라 즐비한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신도시라는 신기루를 완성하기 위해 부서지고, 빼앗기고, 쫓겨난 삶의 흔적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을 딛고, 그 산동네를 탈피한 '개천에서 용난' 신화만이 부각되었었다.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각자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시킨 승리자가 되어야 했고, 그 성공 가도에서 일탈은 곧 그저 가난이 아니라, '패배자'라는 단호한 낙인까지 찍혀야 했다. 누구나 부지런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면 성공해서 번듯한 내 집 한 칸에서부터 대통령까지 될 수 있는 시대였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게으르고, 술독에 빠져있고 노름이나 하는 모자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사진; 스캔들의 한 장면, 뉴스엔)

 

하지만, 그 '성공시대' 대통령의 5년이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한때는 유행어였지만, 정작 히트작은 되지 못했던 어느 영화 주인공의 (사실은 실제 탈주범의)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현실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집을 가진 사람은 집을 가져서 '하우스 푸어'가 되고, 젊은이들은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88만원' 세대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성공'이란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빈익빈 부익부'의 처절한 리그만이 현실이 된 시대에, 이제 드라마는 한때 영광과 승리로만 윤색되던 시대를 솔직하게 복기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 성공 뒤에 스러진 삶들이 있다고.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과 1990년을 배경으로 한 <황금의 제국>은 공교롭게도 '건설 입국'의 뒤안길을 다룬다.

<스캔들>에서 등장한 건설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안전 기준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설계 도면을 고친다. 심지어,그로 인해 건물이 붕괴될 위기에도, 그리고 붕괴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죄과에 대한 반성이나,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우선되는 도덕적 불감증와 자본 이기주의의 끝장판을 보여준다.

<황금의 제국>에는 철거 대상인 건물과 거기에 남아 농성을 하는 사람들과, 철거 깡패들과, 그들을 부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또 다른 '건설 자본'이 등장한다.

<스캔들>에서 88년 올림픽은 범국가적 축제가 아니라,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시위도 할 수 없는 준계엄령이 상황이요, 그것을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아래 폭력적으로 밀어 붙일 수 있는, 그리고 건물 붕괴를 테러 위협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걸 보여준다.

 

(황금의 제국, 사진; 엑스포츠 뉴스)

 

<황금의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주의 아버지는 60평생 열심히 일해 가게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권리금까지 주었지만, 그 가게는 단 한 달만에 철거 대상이 되었고, 아버지에게 닥친 건, 철거 깡패의 무차별 폭력이요, 가게 주인이 응급실에서 생명의 경각에 놓인 태주의 아버지에게 돌려 준건 입에 발린 '기도'뿐이었다.

철거민들의 시위, 분신 자살, 철거 깡패, 경찰과 공무원의 비호, 건설 자본의 폭거, 이것이 이제와 무에 그리 새삼스러운 거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그 시절에는, 그저 대학생들의 유인물에서나 만날 수 있는 '진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혹은 신문 하단을 통해서만 단신으로만 전해지던, 절대로 방송을 통해서는 보여지지 않던, 역으로 성공의 팡파레만 울려퍼지던 그 시대의 사실들이, 이제야 버젓하게 그 시절 사실은 이랬다며 이야깃거리가 되어 나타난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용산을 비롯해서 많은 곳에서 철거 현장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다치고, 잡혀가고, 죽는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도 여러 첨탑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진행중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기의 이야기가 당장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 시절의 이야기들이 필요한 그 어느 때를, 이 시절의 이야기를 용감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그 어느 때를 또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대 '빈익빈 부익부'에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진실들은 묘한 위로가 된다. '성공'만이 삶의 바로미터가 아니라는 것을, '빈익빈'이 패배가 아니라, 제도적 부조리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통해 이 시절의 고단한 삶을 버틸 자존감을 심어준다.

by meditator 2013. 7. 2. 10:15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