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에서 팜므 파탈(프랑스어로 '치명적인 여자'.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악녀(惡女)의 캐릭터로 통한다. 화려한 외모와 선정적인 몸매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감미롭게 유혹한 후 파멸로 이끈다-네이버 지식백과)의 전형적인 인물로 받아지는 대표적 여성 중 한 사람이 유디트이다.

유디트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홀로페르네스가 이끈 앗시리아의 부대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자, 과부였던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육체적으로 유인해 하룻밤을 보내고, 그의 목을 잘라 성벽에 걸어놓아 앗시리아을 물리친 여성이다. 그녀가 적장의 목을 자른 그 모습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적장을 부등켜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와 같지만,  유디트는 그 이후 많은 미술가들을 통해 명작의 한 장면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팜므 파탈의 전형은 물론, 프로이트 의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상징적 인물로 재해석되며 서양 문화의 여성 캐릭터의 한 전형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디트라는 여성 캐릭터의 정의는 두 가지다.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성을 목적,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 하나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씌여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찾아보자면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우리의 역사 행간에 수많은 유디트들이 존재하겠지만,  이글의 원활한 설명을 위해, 상징적인 존재로 서양 문화의 유디트를 모셔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디트와 같은 인물들이 공교롭게도 최근 화제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매우 충격적이도 부도덕한 사건'이라는 부제를 가진 <스캔들>에서 직접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주범은 하은중을 유괴한 하명근이지만, 사실 그 못지않게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윤화영(신은경 분)이다. 
윤화영은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장태하와 결혼을 하게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토록 신임하던 장태하는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윤화영의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하고, 그가 감옥에서 죽어가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장태하를 애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윤화영은 그와 결혼을 할 때부터 한결같이 장태하를 무시하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심지어 그가 아버지를 죽였으니, 받아들이기는 커녕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쓴 것이 바로 윤화영 자신이 낳은 아들 은중이었다. 하지만, 은중이가 유괴되어버리고, 장태하에게 버림을 받게 된 윤화영은 생면부지의 금만복을 장은중으로 둔갑시켜 지리하지만  무시무시한 복수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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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하지만 알고보면 더 무시무시한 복수로 치자면, <황금의 제국>의 한정희(김미숙 분)도 못지않다. 그녀 역시 자신의 남편 배영완이 성진 그룹 최동성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의 칼을 간다. 최동성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며, 배동완의 아들인 배성재를 최동성의 아들로 키워냈으며, 한결같은 현모양처로 처신하며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만을 노려왔다. 최동성의 목숨이 경각에 놓인 순간,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며,  복수를 실행하고자 한다. 

윤화영과 한정희의 공통점은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위해 자신의 '성(性)'을 이용한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살아가며 복수의 시기를 노린다. 윤화영의 복수의 끝은, 기고만장한 장태하의 뒤를 자신의 핏줄, 혹은 대리 핏줄로 잇게 만드는 것이며, 한정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들이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복수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찌기 유디트가 그녀가 속한 공동체 이스라엘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헌신하듯, 윤화영과 한정희 역시 그녀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그녀가 속했던 남자들에 대한 복수로 일생을 보낸다.  지고지순하다는 말로 대신하기엔 집요하고, 퇴행적이다. 

이렇게 여성의 성을 도구로 이용한 방식은 엄밀하게 '약자'의 방식이다. 정정당당하게 권력을 놓고 한 판 붙어낼 수 없는 , 그런 수단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편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식인 것이다. 잘 나가는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지만 건설 재벌이 된 장태하에게는 역부족인 윤화영이, 최동성의 사랑 외에는 자신의 남편의 억울함을 풀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정희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권력을 쟁취하기엔 미약한 한정희, 윤화영 세대들의 복수법이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 세대인 최서윤 역시 자신의 성을 무기로 삼는다. 장태주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은 이전 세대들의 맹목적 복수와는 좀 다르다. 일종의 '제휴'이다, 

(tv리포트)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드라마 속 유디트들의 복수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윤화영이 벌인 복수극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 대신 금만복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고, 이제 그녀의 친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은 핏줄의 복수 대신에, 아버지로 인해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지게 되어 있다. 
한정희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긴 세월 한결같은 최동성의 사랑을 외면하며 복수의 칼날을 세워왔던 그녀의 복수는 허무하다. 아들을 성진 그룹의 후계자로 만들지도 못했고, 이제와 알고보니 정작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최동성도 아니요, 어쩌면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에 맞닦뜨리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디트가 성녀로 받아들여지며 구원의 팜므 파탈로 명화 속을 유람할 때, 우리의 드라마들은, 윤화영, 한정희 세대의 '도발적' 복수 방식을 용인하지 않는다. 적장의 목을 성문 밖에 건 유디트는 존경 받으며 105살까지 살지만, 우리 드라마 속 유디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자기 파멸 뿐이다. 아직도 남성들의 권력은 우월하며 견고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윤의 계약 결혼의 행보가 궁금하다. '성'을 무기로 한 최서윤 세대의 흥정은 과연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 그 앞선 세대의 실패를 뛰어넘은 성취를 보일까.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최서윤 역시 성진 그룹의 최서윤이란 사실이다. 


by meditator 2013. 8. 14.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