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깨진다'

아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천재지변, 호환마마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이 금기의 '속설'이었다. 하지만, 이제 2014년에 이르러서는 이 속설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듯하다. 그건 바로 첫사랑을 다룬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소중한 첫사랑의 성공으로 드라마를 완결지었기 때문이다. 
2013년의 대미를 장식하며, 그리고 2014년 초입에 조용히 종영을 한 <응답하라 1994>와 <예쁜 남자>는 동일하게 여주인공이 첫사랑의 그 오빠를 자신의 것으로 쟁취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응답하라 1994>가 지겹워하면서도 또 낚여서 볼 수 밖에 없는 나정이 남편 신드롬을 만들어 낸 반면, <예쁜 남자>는 첫 방 시청률이 최고 시청률이 되는 불운을 겪으며 3%대의 낮은 시청률로 막을 내리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무엇이 동일하게 첫사랑 사수하기를 그린 두 드라마의 궤를 달리하게 만들었을까?

(사진; osen)

무엇보다, 첫사랑의 대상, 그 오빠의 캐릭터에서 두 드라마는 확연한 차이를 내보인다. <예쁜 남자>는 드라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나 그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돌릴 수 없는 천하 제일 꽃미남 오빠를 등장시킨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긴 머리를 휘날리는 꽃미남 오 마테(장근석 분)에게 한 눈에 반한 소녀 보통이(아이유 분)가 여주인공인 것이다. <예쁜 남자>의 주인공 마테는 그의 잘생김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람이다. 그의 안하무인 태도도,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너뛰며 그녀들의 도움 덕에 살아가는 백수의 삶도. 하지만, 드라마는, 그리고 여주인공은 그래도 그 오빠를 일편단심 사랑하지만, 시청자들은 외면을 했다.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처럼 만화 주인공처럼 아름답게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동안 수많은 꽃미남에 단련된 시청자들에게 그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 꽃미남으로 등장한 주인공을 연기한 장근석이, 이미 그의 전작들에서 그의 꽃미남 캐릭터를 질리게 써먹은 한에서, 더더욱 그의 꽃미남 연기는 진부한 요소로 작동할 뿐이었다. 

반면, <응답하라 1994>는 <예쁜 남자>와 반대의 전략을 쓴다.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 명도 쓰레기(정우 분)다. 그리고 쓰레기답게 그는 옷도 안갈아 입어 여주인공이 그의 옷을 벗겨 가고, 상한 음식을 먹고, 음식을 앞에 놓고 여주인공과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기 십상이다. 그의 허술한 모습에 시청자들이 허리띠 풀고 넉넉하게 웃어제낄 때 쯤, 드라마는 반전을 시작한다. 아픈 여동생에게 '이노무 가시나야~'하고 욕을 한바탕 해제끼더니, 그녀가 원하던 과자를 잔뜩 사다 던져놓고 사라진다. 병원에 입원해서 아퍼서 잠못드는 그녀를 위해 그녀가 원하는 온도로 덥힌 우유를 가져와주고, 그녀의 베게를 높여주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잠재워 준다. 심지어 알고보니 이 쓰레기가 의사란다. 게다가 정말 오빠인 줄 알았는데, 죽은 오빠를 대신해 이집의 아들 노릇을 한 거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레기를 나정이의 남편으로 기대한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이미 드라마 초반, 이 집의 아들 노릇을 천연덕스럽게 한 쓰레기의 캐릭터에 있다. <응답하라 1994>는 멋진 남자를 그려내기에 앞서, 가장 친근한 남자 캐릭터를 먼저 그려 냄으로써 인간적으로 시청자들을 공략한다. 

당연히 '위로'와 '힐링'이 대세가 되었던 2013년의 시청자들이 그저 눈에 아름다운 꽃미남과, 마음을 푸근하게 녹여주는 쓰레기 중 누구를 선택했는가는 두 드라마의 성패로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이 두 캐릭터들은 여주인공을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조차 천양지차다. 

<예쁜 남자>는 말 그대로 예쁜 독고 마테의 성장기이다. 그저 자기 자신이 이쁘고 그 이쁜 것을 이용해 세상을 농락하기 바뻤던 한 남자가,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을 통해 세상을 알아아고 성장해서 진정한 사랑에 도달한다는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나쁜 남자 개과천선기이다. 당연히, 첫 눈에 반해, 처음부터 자기 집 돼지 갈비를 통으로 들어다 줄 정도로 그에게 정신이 빠진 보통이의 수난기이기도 했다. <꽃보다 남자>가 성공한 이유는, 보통이만큼이나 평범하고 못난 소녀 금잔디가 꽃같은 남자들, 그것도 무려 네 명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환타지를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쁜 남자>는 그 반대다. 결국 마테는 첫사랑 보통이와 사랑의 결실을 맺지만, 그 과정에서 보통이는 숱한 눈물을 흘리고, 다른 여자들은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테 성장기의 도구로 작동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전히 리모컨의 향배를 쥐고 있는 여성들이, 자신들이 구박당하고, 수단으로 사용되는 이 드라마를 참고 보아 줄 인내를 지닐 만큼 마테 역을 하는 장근석이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 이유는 장근석이 매력적이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 눈에 안경이라고 <꽃보다 남자>에서도 네 명의 남자들을 놓고, 얘가 낳느니, 쟤가 낳느니 하며 이전투구했던 취향의 다양함이, 마테 한 사람으로 만족하기엔, 선택의 폭이 좁았다. 최다비드(이장우 분)가 있었지만, 마테 중심의 이야기는 한계가 분명했다. 

반면,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는 알고보니 쓰레기가 아니라 연애의 고수였다. 수많은 여성들의 탄성을 자아냈듯이 쓰레기는 늘 나정이 일편단심이었다. 운동장에서 자신의 체취가 밴 옷을 벗어서 굳이 긴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나정이를 찾아 던져주었으며, 연인이 되고 싶은 동료에게 이 사람이 그 사람좋은 쓰레기인가 싶게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나정이가 추울까바 저만치 차를 몰고가다 다시 돌아와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나정이가 원하는 책과 나정이를 위로하는 인형을 가장 잘 알아챈다. 쓰레기처럼 무심하고, 말은 거칠지만, 언제나 여주인공을 위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어렵게 얻은 직장을 위해 결혼을 취소해줄 만큼. 그런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천하의 쓰레기라도 마다치 않는게 당연하다. 게다가 쓰레기만 있는 게 아니다. 쓰레기를 위협할 만한 일편단신 칠봉이도 만만치 않다. 

(사진; 뉴스엔)

물론 두 드라마의 성패를 꼭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로만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응답하라 1994>가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뒷받침한 90년대의 향수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면, <예쁜 남자>는 결국에는 가장 평범한 사랑 이야기와 진부한 출생의 비밀이 남은 그저 그런 이야기들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를 앞세운다 한들, 허술한 전략과 스토리텔링을 가진 드라마는 존중받을 수 없다는 진실을 입증한 셈이다. 

일렉 선녀의 키치스러운 방을 등장시킬 때만 해도, 꽃미남이지만 먹을 거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 무너지는 마테를 그려낼 때만 해도, 드라마는 만화가 가지는 묘미를 살리려 애를 쓰는 듯했다. 애초에 여성들을 통해 성장한다는 상식적으로 풀어내기 힘든 제재를 용감하게 다룰 때만 해도, 그 과정을 만화적 상상력으로 대신하는가 싶었지만, 결국은, 만화가 다루었던 19금의 상상력도 공중파의 제동에 걸린 채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고, 이건 애인인지 멘토인지 헷갈리는 어정쩡한 이야기에, 통통 튀는 보통이의 연애 이야기도 눈물 콧물짜는 순애보로 둔갑시켜 버렸다. 차라리 어차피 시청률이 안나올 바에야 애초에 야심차게 시도했던 키치스러운 매력에 집중했다면 독특한 드라마로 기억될 가능성이라도 있었겠다 싶다. 

<예쁜 남자>가 차라리 케이블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공중파의 어중간한 도덕적 잣대에서 자유로이 좀 더 성인 만화로서의 상상력을 키워냈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애초에 특정한 장르에 치중한 만화를 어설프게 대중적 코드로 바꾸는 과정에서의 오류는 치명적이었다. 

종방연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해외에 나가야 할 만큼, 그런 그를 공항을 꽉 메운 채 기다려 주는 해외팬들만큼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장근석은, 국내 활동에서는 <사랑비>에 이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 좋은 수출 상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건, 한류 드라마에 의존하는 드라마 시장이나, 장근석이라는 배우에게나 지대한 부담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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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4.01.10 11:58

대부분의 동화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결국은 주인공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동화이듯, <응답하라 1994>는 전편 <응답하라 1997>에 이어 90년대를 살아냈던 아이들의 동화, 그것도 성장 동화를 그려내고자 했다. 

이 작품이 성장 동화라는 의미가 가장 명징하게 다가온 것은, 바로 마지막 삼천포(김성균 분)의 나레이션이다. 첫 회, 30분도 안 걸리는 하숙집을 찾기 위해 해가 저물도록 서울 시내를 뺑뺑 돌다 못해 바로 코 앞의 하숙집을 찾다 결국은 파출소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 삼천포가 21회, 사랑하는 아내 윤진이와, 느긋하게 택시를 타고가며,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 택시 기사조차도 미처 모르는 교통 혼잡을 피해 가는 빠른 길을 알려주는 모습은 바로 그 성장의 절정이다. 그렇게 삼천포처럼, 하숙집의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성장통을 겪어내고 그곳을 떠난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번듯한 아파트에 살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명의 아이들을 거느린 부모가 된 것만큼, 아니 오히려 더, 하숙집 딸인 나정이를 포함해 그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하숙집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마지막 회의 엔딩이 그래서 더 가슴 찡하게 그들의 성장을 다가오게 만든다. 이렇게 아이들은 저마다 커서, 자신의 집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쓰레기, 삼천포, 해태, 칠봉이, 빙그레처럼, 치기어린 별명으로 불리워지던 아이들이 이제 저 마다의 이름을 얻어 자존한다. 

그리고 늘 동화에서 처럼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어낸다. 사랑에 대한 속설이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장담하지만, 90년대 아이들의 동화인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의 첫사랑은 꼭 이루어진다. 나정이도, 쓰레기도, 삼천포도,윤진이도, 빙그레도 모두 자신의 첫사랑을 성취해 내고야 만다. 빙그레(바로 분)는 아니지 않냐고? <응답하라 1997>과 다르게 이성에 대한 사랑을 찾아간 빙그레에게, 쓰레기(정우 분)에 대한 감정은 첫사랑이기 보다는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자기 주변의 사람을 무조건 엄마라 생각하는 '각인'과도 같은 또 다른 성장통이라고 드라마는 치부한다. 

칠봉이(유연석 분)가 있지 않냐고? 하지만 <응답하라 1994>는 칠봉이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었다. 엄마랑 아빠가 있지만, 그가 아플 때 조차 부르지 않는 부모 대신에, 그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밤새 침을 튀기며 자기 일처럼 고민해 줄 수 있는 혈육과도 같은 친구를 얻었다. 애초에 칠봉이가 나정이와 하숙집을 좋아하게 되었던 그 장면처럼, 비록 칠봉이는 첫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어쩌면 첫사랑보다 더 소중한 친구와 형을 얻었다고 <응답하라 1994>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진짜 칠봉이에게 필요했던 건 그거라고.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빙그레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사랑인지 가족의 따스한 정인지 헷갈려 하던 칠봉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찾아가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응답하라 1994>가 성장동화인 이유이다. 그것은 굳이 21부로 늘여, 장황하게 한번은 헤어지게 만들고야 말았던 나정이의 남편찾기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 죽은 친오빠를 대신하여 늘 오빠여야만 했던 쓰레기와, 그를 오빠처럼 믿고 따르던 나정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친남매인지, 사랑하던 연인인지 정체성에 혼돈을 느낄 사이도 없이 사랑에 빠졌지만, 2년간의 물리적 이별과 그에 이은 진짜 이별이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인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성장통의 기간이 되었다. 그래서 21회에야 드디어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은, 해태의 하숙집 탈출과 함께 나란히 병치되어 그려짐으로써, 그것 역시 이들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성장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소꼽장난하듯 사랑을 하던 철부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드라마는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21회에 걸친 장구한 90년대 아이들의 성장 동화가 꼭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다. 결론은 해피엔딩의 동화였지만, 드라마는 내내 90년대 아이들의 성장통을 그려내기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나정이의 남편 찾기'라는 퍼즞 맞추기 게임식으로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인공들의 성장통은 뒤편에 숨긴 채 결론이 먼저 보여졌고, 한 회, 심지어 몇 회가 지나고서야 불친절하게 몰랐지, 혹은 속았지 하며 사실은 이래서 그런 거야 라며 놀리듯 사건의, 혹은 사연의 속내를 들춰 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칠봉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 옆에서 질척거리는 사내가 되었고, 심지어 나정이는 어장관리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얍삽한 나정이의 남편 찾기 게임 대신에, 진솔하게 칠봉이 사랑의 속내를, 오지랖넓은 나정이의 속내를 그려냈었다면, 시청자들이 나정이의 남편 찾기 게임 앞에 진저리를 치는 사태가 오지는 않았을 듯 싶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비록 마지막 회를 통해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90년대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그 과정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인가? <응답하라 1997>이 마지막까지도 90년대 아이들의 체취가 흠씬 느껴졌었다면, 마찬가지로 늘 어느 장면에서나 넘치듯 90년대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응답하라 1994>에서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오히려 드라마는 IMF다, 삼풍백화점 사건이다, 그리고 그 틈새 틈새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삐삐, 핸드폰의 섬세한 발자취마저 담아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응답하라 1994>에서는 오히려 그 뒤의 시대를 그린 <응답하라 1997>에서 보다도 시대의 향수가 덜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앞서 말했듯이, 드라마가 지나치게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매몰되다 보니, 사건은 있되, 알맹이는 없는 동시대성의 고증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응답하라 1997>의 전례가 있어 시들해진 추억팔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게 되어버린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회 신촌 하숙이 문을 닫고, 이제는 네 것 내 것이 무엇인지 조차 구분하기 힘들어진 삼천포와 해태의 모습, 형제들같아진 하숙집 아이들이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응답하라 1994>의 21회를 달려온 보상을 받은 듯 훈훈했다. 결국은 나정이 쓰레기 커플의 사랑 놀음에 이용당하고 만건가 라는 칠봉이에 대한 아쉬움은 미흡하나마 가족같은 친구들의 울타리로 달래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동화같은 현실은 없다. 애초에 그렇게 90년대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명문 연세 대학교에 갈 리가 없었고, 그들이 IMF라는 고비를 넘기고서도 남보란 듯 멋진 아파트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거느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어 있을 리도 없다. 동화 속에는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은 언제나 주인공들이 감내할 만한 수준의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아파하지만, 그뿐, 그들이 현실에서 얻어낼 사회적 성취에 하등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들은 아파했지만, 진정 그 시대가 고통받고 아파했던 현실적 고통엔 늘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기껏해야 그들이 맞닦뜨린 데모는 고향 주민들의 그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아니라도 막장이 판치는 세상에서, 꼭 내가 동화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해피엔딩의 동화를 보며, 탈색되었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며 잠시 묵직한 현실의 위로를 받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언제나 추억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니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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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12.29 09:34

12월 20일 방영된 <응답하라 1994>, 밀레니엄의 전날 신촌 하숙집 우연찮게 나정이만 남겨지고 모든 하숙생들과 식구들이 외출을 하게 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꽃보다 누나>는 안하려나? 벌써 10시가 되어가는데? 했는데, 중간 광고를 하는가 싶었더니, 뜬금없이 화면은 <코미디 빅리그>의 한 코너로 옮겨진다. 비가 나오는 프로그램의 예고편으로 또 옮겨진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아니다. 다른 때 같으면 8시 40분이면 일찌감치 시작했을 <응답하라 1994>가 50분이 되도록 시작되지 않은 채 시청자들은 <코미디 빅리그>와 <렛츠고 시간 탐험대>, <레인이펙트>의 예고 방송이 이미 나왔었기 때문이다. 18화 편집이 지연됨에 따른 의도적인 방송 지연이었다고 한다. 그간 <응답하라 1994>를 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20일의 이런 방송 사고가 놀짜증은 나지만 어쩌면 놀랍지는 않을 듯도 싶다. 오히려 '사필귀정이라' 공감할 듯도 싶다. 우연찮은 제작지연이 아니라는 것을. 고무줄 늘이듯 마음대로 방송 시간을 늘려 방송하던 <응답하라 1994>가 맞이할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이다. 


앞서 인기를 끌던 <응답하라 1997>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에 한 번 40분짜리 두 편을 연달아 방영하였다. 후반에 이르러서야 회차에 따라 방영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미 전작의 인기를 등에 업은데다, 시작하자 마자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 <응답하라 1994>의 방영 시간은 말 그대로 '엿장수 마음대로' 였다. 40분쯤 시작하겠거니 하고 텔레비젼을 켜보면 벌써 하고 있을 때가 있다거나, 이즈음엔 끝나겠지 하고 공중파의 다음 프로를 보려고 하면, 10시는 저리 가라 도무지 언제 끝날 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채널을 돌릴 수 조차 없다. 방송 사고가 발생한 20일 방영분에서 기어코 다시 나정이와 칠봉이를 결국은 다시 밀레니엄을 빙자해 한 자리에 앉히고 여전히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듯한 시선을 오고가는 장면을 오랜 지연 뒤에 내보내고야 마는데, 그저 낚여서 파닥파닥 거리는 처지의 시청자들이야 욕을 하면서 기다릴 밖에 무슨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사진; TV리포트)

덕분에 <응답하라 1994>의 방송 시간은 제작진만 아는 것이 되었고, 공중파의 미니 시리즈 시간 72분룰은 저리 가라, 종종 90분을 넘는 경우 조차 빈번했다. 공중파의 미니 시리즈 방영 시간이 최근에 72분에서 다시 67분으로 줄어 들었다. 이것은 실제 광고를 빼면 순수 방송 시간으로 65분에서 59분으로 줄어든 것이다. 왜 이렇게 줄였을까? 일주일에 두 편을 방영하는 미니 시리즈라면 결국 일주일에 영화 한 편 분량을 찍게 되는 셈이다. 제작진도, 연기자도, 작가도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밤샘 촬영이요, 쪽대본이라는 관행이었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시청자들의 촌각의 관심을 끌려는 꼼수로 인해 서로 조금씩 조금씩 늦게 끝나다 보니 결국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파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 공중파는 서로 협정을 맺어 72분 룰이니, 67분 룰이니를 만들어 낸 것이다. 케이블의 장점은 바로 그런 공중파를 제약하는 방송 시간의 룰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하라 1994>는 마음대로 방영 시간을 늘였다 줄였다 하는 '만용'을 부렸다. 하지만 제 아무리 드림팀의 제작진이라 하더라도, 늘어진 방송 시간은 고스란히 제작진과 출연진의 몫이다. 그러니 결국 20일의 방송 사고는 예정된 것인 셈이다. 이미 방송 사고가 나기 전 <응답하라 1994>의 방영 시간은 10시를 향하고 있었다. 다른 프로그램이 15분 정도 방영된 이후, 다시 <응답하라 1994>가 15분 정도 방영되었다. 여전히 과유불급이다. 

과연 그렇게 과욕을 부릴 만큼 <응답하라 1994>가 흥미진진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방송 사고가 나기 전 시간은 IMF의 여파와 특별했던 연인들 나정이(고아라 분)와 쓰레기(유연석 분)의 특별하지 않은 짧은 이별과, 장황한 해태의 첫사랑 다시 만나기로 채워졌다. 그리고 결국은 누구나 다 예상 했듯이, 나정이와 칠봉이의 해후가 이루어 졌다. 

그렇다. 드라마에 깔리던 나정이의 나레이션처럼,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다 헤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나정이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결혼조차 미룰 수 있는 쓰레기(정우 분)(보통 사랑 얘기에서 이쯤되면 결혼을 미루는 게 아니라, 결혼을 먼저 한다)를 그저 보통의 연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은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인다. 마치 칠봉이와 재회를 마련하기 위한 의도적인 극적 장치인 것 마냥. 죽은 오빠로 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끈끈한 인연이 단 2년 동안의 물리적 공간의 확장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리는게 이해를 하려면 이해를 하겠지만, 그간 두 사람이 보여준 정신적 유대의 깊이에 비하면 작위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랄까? 

오히려 다시 만나게 된 나정이와 칠봉이를 보면서 든 생각은 저렇게 어거지로 낚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16부작 정도로 이야기를 끝내 버리지 하는 아쉬움이다. 2년 동안 안본다고 헤어지는 나정이와 쓰레기 커플에, 더 오랫동안 나정이를 잊지 못하는 칠봉이라, 이제 누가 나정이의 남편이 되도, 공감이 가지 않을 듯 싶은거다. 과연 이 제작진이 그려내고 싶은 것이, IMF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 휘말린 청춘의 이야기인지, 도돌이펴 나정이 남편 떡밥 게임인지, 그 순수성에 자꾸 의혹의 눈길이 보내진다. 

부디 남은 몇 회 동안 시청자 낚기 게임 대신,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충실한 늘어진 방송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전개시켜 마무리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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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12.21 08:56

곰곰히 다시 되새겨 보면 12월 6일 방영된 <응답하라 1994>에는 많은 내용들이 다뤄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는 쓰레기와 나정의 알콩달콩한 이야기에, 그런 나정이를 바라보며 쓸쓸히 눈물 지으며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 칠봉이, 그리고 군 생활하는 해태에,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수술을 바로 마친 상황에서도 의대생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로 인해 복학을 결심하게 되는 빙그레에, 다음 회의 내용이 될 윤진이의 서태지바라기까지. 적어놓고 보니 서너줄이 되는 장황한 내용들이 다뤄졌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는 내내 14회는 지금까지 <응답하라 1994> 중 가장 지루하고 장황하기만 했던 회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중간에 딴 채널에서는 뭘 할까 확인하게 될 만큼. 


6일 오후 방송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나정(고아라 분)은 쓰레기(정우 분)의 키스를 받고 그간 맘 고생을 했던 것이 생각나 눈물을 보였다./tvN 응답하라 1994방송 캡처

(사진; 스포츠 서울)


아마도 <응답하라 1994>의 활기찬 동력을 빼앗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쓰레기-나정- 칠봉이 로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던 긴장감이 쓰레기의 나정에 대한 마음 고백으로 느슨해 졌기 때문 일 것이다. 여전히 칠봉이는 나정이를 두고 만약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네 옆에 아무도 없다면 나랑 사귀자 할 만큼 나정바라기이지만, 그 말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나정-쓰레기 커플이 조만간 헤어질 지도 모른다는 쓰레기 이종 사촌의 말만큼 복선을 위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즉, 가장 속된 말로, 사람 일이란게 어찌될 지 모르니, 지금 나정이랑 쓰레기가 사귀게 된 들 앞으로의 일은 장담못한다는 평범한 속설에 기대어 진행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쓰레기 나정 커플을 그들을 질시하는 운명의 여신이 호시탐탐 지켜보는 느낌? 

하지만, 14회에 오는 동안, <응답하라 1994>가 드라마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나정이의 남편은 누구인가에 의존하여 오다보니, 결혼식날 입장해 봐야 나정이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정이와 쓰레기가 막상 사귀게 되니,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여전히 나정이바라기인 칠봉이의 마음이 어쩔 수 없다 해도, 쿨하지 못해 보이기 까지 한다. <응답하라 1997>에서는 형제가 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극적 장치라도 있었지. 별다른 사건 없이 삼각관계 만으로 14회를 끌고 온 레이스도 길다 싶었는데, 이제 다시 무언가 새로운 레이스를 시작해야 하는 느낌은 버겁기까지 한다. 1회 연장까지 얹어, 21회로 종료되는 나정이의 남편 찾기 게임이 길고 지루하단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14회를 가득 채운 해태의 군생활 이야기는 양념을 넘어 이게 <푸른 거탑>이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만큼 장황했다. 더구나 맨날 후임 괴롭히는 재미로 시간을 때우던 선임이 알고보니 능력자였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이어도 너~무 상투적이었다. 물론 마지막에 병장의 가방을 채운 신문지라는 '깨는'요소가 있었음에도, 군대에서 계급은 날로 먹는게 아니라는 정설은 마치 공부를 열심힌 한 아이가 대학에 잘 간다는 논리처럼 원론적이어도 지나치게 원론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 원론은 정작 군대 다녀온 사람들에게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할 요소가 크다. 일 못하는 병장이 어디 한 둘인가 말이다. 그리고 그 일못하는 병장을 커버하느라 고생하는 상병의 고생담이 군대 이야기의 주류라는 점에서 엄밀히 그저 한 속설에 불과할 뿐이다. 

6일 오후 방송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칠봉(유연석 분)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성나정(고아라 분)과 오붓하게 술을 마셨다./tvN 응답하라 1994방송 캡처
(사진;스포츠 서울)

이런 해태의 이야기는 함께 등장하는 빙그레의 복학 결심과 함께 <응답하라 1994>를 뻔한 스토리로 만든다. 심장 수술을 앞둔 아버지가 환자복을 입고서도 은행에 가서 송금을 했다는 빙그레의 등록금, 싫어하던, 말이 통하지 않는다던 아버지였지만, 채 마취가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의대생인 아들의 공부 걱정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빙그레는 오랜 아르바이트 생활을 접는다. 하지만 이런 감동적 상황에 이은 빙그레의 결심은, 그것을 설명하는 장황한 나레이션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해가 몇 번이 바뀔 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빙그레라는 인물의 속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아르바이트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을 찾았지만, 그것이 무언인가 분명치도 않고, 거기에 가닿지도 않는 막막함이 그간 조금이라도 비춰졌었다면, 이제 와 복학을 결심하는 빙그레의 결정이 좀 더 공감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빙그레의 방황은 그저 방황이요, 이제 방황을 할 만큼 했으니 복학을 한다는 설정처럼 보이는 14회의 결론은 어쩐지 허무하다. 

<응답하라 1994>가 중반에 들어서서 어쩐지 조금씩 드라마를 보다 시계를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전작에 비해 행간의 여백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나정이를 비롯한 대학 새내기들의 대학 생활 초반만 해도 1994년이란 동시대성을 느끼게 만드는 장치에 기반한 젊음의 생기가 느껴졌다면, 이제 중반에 들어선 드라마는 몇몇 당대의 소재를 채용하는 것 외에, 대학 1년생, 2년생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현장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점점 더 궁색하게 사랑 이야기에 의존하게 되고, 이제는 진부하다 느껴지는 상투적 감동 스토리를 채용해 오게 된다. 남편 찾기의 낚시밥이 아닌, 1990년대 중반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쫀득한 이야기로 남은 회차를 채워주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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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12.07 10:53

11월 30일 <응답하라 1994> 13화, 먼저 고백을 하고 마음 조리던 나정이(고아라 분)에게 드디어 쓰레기(정우 분)가 답을 했다. 자신을 밀어낼까 쓰레기 곁에 다가가지 못했던 나정이에게 달려와 그녀의 입에 키쓰로 답을 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거의 첫 회부터 줄곧 쓰레기만을 바라보던 나정이의 일편단심이 보답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 둘의 키스씬을 보는 마음이 행복하고 설레여야 하는데, 어쩐지 찜찜하다. 심지어 불안하기 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7>에서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 한 것은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후, 다 큰 어른이 된 후, 드라마가 거의 끝날 때쯤이었다. 그런데, 1회를 연장한다는 <응답하라 1994>는 이제 겨우 중반을 넘어 13회다. 그런데 남녀 주인공의 교감이라니? 불안하다. 이러다 결국 헤어지는 거 아냐?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텔레비젼 화면에 나와 인터뷰를 하는 칠봉이가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그러자, 이제까지 쓰레기가 남편감이라고 철썩같이 믿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럼 칠봉인가?


	응답하라 1994 키스신, 쓰레기 나정 키스/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94’ 캡처
(사진; 조선.COM)

<응답하라 1994>를 보는 시청자들은 매회 자신들이 낚시 바늘 앞에서 무기력하게 입질을 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는데 동의할 것이다. 난 쓰레기가 좋다. 난 칠봉이가 좋다. 우겨봐야, 매회 제작진이 던져주는 떡밥에 따라 이리 휘돌리고, 저리 휘돌리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사랑에는 철칙이란 게 없으니까. 우리는 첫사랑을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한다. '첫사랑은 다 안이루어지는 거라야'라고, 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의 뇌리 속에 첫사랑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커플이 떠오르는 건 어쩐담. 지난 회, 뜬금없이 남편감의 다크호스로 해태가 등장했을 때도 그렇다. 그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이해해 주던 친구가 남편이 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지금까지는 쓰레기와 엮이던 빙그레가 마음을 돌이켜 나정이가 좋다는 설정으로 바뀌어 등장하면, 시청자들은 아마 욕을 하면서도 또 혹시나 빙그레야? 할 수도 있겠다. 천 쌍의 커플에, 천 개의 사연이 있듯이, 사랑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에, 그 누구라도 나정이의 인연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파닥파닥 그저 제작진의 처분에 따라 낚이게 되는 것이고. 

1994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응답하라 1994>를 추동하는 동인은 바로 나정이의 남편 찾기이다. 이것은 이미 <응답하라 1997>에서 주효했던 전략이기에, 보다 능수능란하게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떡밥을 던지며 유인해 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응답하라 1994>가 여느 멜로 드라마처럼 주인공의 심리에 천착하며 관계를 추동중이지는 않다. 회마다, 한 계절을 건너뛰는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감정선도 함께 건너뛴다. 

지난 겨울 한 해의 마지막 날 추운 터미널에서 나정이에게 입을 맞추며 사랑을 고백했던 칠봉이의 외사랑은 내내 대답이 없다. 나정이의 방문을 수시로 열어제끼며, 들락이는 칠봉이에게 나정이는 그저 덤덤하다. 기껏해야 드러난 반응이란게 너랑 둘이서 뭐 먹으러 가지 않겠단 말로 친구 사이 이상을 넘어가지 않겠단 답을 13회에 이르러서야 시청자들은 겨우 얻어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답답했던 것은, 나정이가 그렇게 애태워하던 쓰레기의 반응이었다. 칠봉이가 신촌 하숙에 등장하고, 나정이를 좋아하게 되기 까지, 쓰레기는 나정이의 감정에 묵묵부답이었다. 오죽하면 쓰레기를 연기하는 정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부러 그의 감정을 누른다는 음모론이 퍼질 만큼. 

(사진; 스포츠 월드)

하지만 계절을 건너뛰듯 감정선을 잘라먹는 <응답하라 1994>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13회에 이르러 정우가 자신의 감정을 한껏 내보이고, 그걸 다시 칠봉이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고' 맞받는 것처럼. 제작진이 던진 떡밥을 언젠가는 회수하는 <응답하라 1994>의 묘미 때문이다. 어쩌면 쓰레기와 나정이가 저렇게 한껏 키스를 하고도, 다음 회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개와 고양이처럼 아웅다웅하는 남매처럼만 그려질 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성큼 곤충이 변태를 하듯, 관계가 진전되고. 그렇게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의 진전이 이루어 질지도 모르기에 시청자들은 뻔히 알면서 <응답하라 1994>에 낚인다. 마치 그것은 청춘의 열병은 교통사고와도 같다는 문구를 되새기게 만들듯이 말이다. 사고처럼 맞닦뜨리는 주인공들의 연애 사건에 우리는 당황해 하면서도, 거기서 빚어지는 뜻밖의 '낭만성'에 또 환호하며 드라마를 열시청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회 낚이고 낚이다 보니, <응답하라 1994>가 끝나고 나면 허무해 지는 경우가 점점 빈번해 진다. 뭐 그렇다고 별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새삼 1994년의 청춘이 이랬는가 되돌아 보게 된다. 
우스개로 80년대의 대학 생활을 한 나는 아들에게 엄마의 시대는 결코 <응답하라 1994>와 같은 드라마로 만들어 질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처음 대학에서 만난 것이 강의실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형사들이요, 교정에서 만난 것은 매캐한 최류탄에, 선배를 만나 곳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던 건물 옥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응답하라 1994>를 보면 어쩌면 이 제작진이 80년대의 시대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저런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을 신청하면 들려주는 DJ가 있는 음악 다방에, 고고장에, 민속 주점에,  그리고 거기에서 흐르던 이선희 'J에게', 정수라의 '바람이었나'에, 퀸과, 스팅, 에어서플라이의 팝송이 흐르는 또 다른 청춘 연가가 될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4>의 연세대 학생들이 다니던 바로 그 연세대 캠퍼스에서 1996년 '등록금 인상 반대와 김영삼 정권 대선자금 공개' 데모를 하던 학생 노수석 학생이 죽었다. 여전히 대학에서는 매캐한 최류탄 연기가 떠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응답하라 1994>의 캠퍼스에는 그런 자욱이 없다. 
물론, 꼭 추억을 논하는 드라마가 당시의 모든 것을 그려내야 할 의무는 없다. 더더구나, 대학을 다녔다 해도 다 똑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제작진의 눈으로 본 90년대의 대학 생활은 드라마와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90년대는 운동을 했던 학생들 조차도, 자신들의 세대는 80년대처럼 운동권이 주류도 아니었으며, 끼인 세대라고 자조적으로 평가하는데, 굳이 그걸 다 그려야 한다고 강권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의 대학 시절에는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투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일 수 있으니까. 아니 꼭 그 시대 화두를 다루지 않아도 좋다. 어쩌면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어쩌면 더 중요한 그들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은, 정작 드라마에서는 쉽게 쉽게 넘어간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빙그레의 고민이 13회나 될 동안 그저 아르바이트를 하면 떠돌듯이. 사랑을 빼놓고서는 드라마의 중반을 넘긴 지금까지 <응답하라> 젊은이들의 젊은 날은 순탄하다.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세한 물품 하나가 그 시대의 것이 맞느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골몰하다 허무해지면, 문득, 우리가 보는 1994년이 정말 1994년이 맞는가 싶은가 반문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건 '젋은 날의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이 아니라, '첫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뿐인가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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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12.01 10:26

지난 한 주 배우 정우는 그 누구보다 귀가 간지러운 한 주를 보냈다. 아니 남들이 하도 자기 얘기를 해서 귀가 간지러운 정도가 아니라, 기사로 나올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만 터져도 들들 볶이는 연애 가쉽성 스캔들이 무려 두 개나, 그것도 그저 사귄다, 사귀었다를 넘어, 복잡한 삼각 관계를 연상케 하는 사건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최근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정우가 연기하는 '쓰레기'캐릭터가 여자들의 로망인 '무뚝뚝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상한 멋진 오빠'캐릭터로 워낙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저 해프닝으로 지나갈 정우의 연애사는 입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 마디 보태는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 유명세라기엔 혹독한 한 주였다. 


정우의 가쉽성 스캔들 기사들은 지금 한참 <응답하라 1994>에서 나정(고아라 분)이를 여동생을 넘어 연인으로 자각할락 말락 하는 쓰레기 역할을 해야하는 배우 정우에게도, 이제 본격적으로 삼각 연애 구도를 만들어 가려는 제작진에게도 부담이 될 거라고 예상되는 게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11월 8일 방영된, <응답하라 1994>에서, 정우는 그저 여전히 쓰레기였다. 

응사
(사진; 텐아시아)

처음<응답하라 1994>의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여러모로 우려가 되었었다. 주인공을 맡은 정우는 연기를 잘 한다고 인정은 받았다지만 인지도도 낮았을 뿐만 아니라, 스무살 대학 초년생을 연기하기에는 중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97>의 남자 주인공 서인국은 이미 슈퍼스타k 첫 시즌의 우승을 거머쥔 아이돌에 버금가는 지명도를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응답하라 1994>에서 정우가 결국 여주인공의 사랑을 쟁취하는 서인국이 될지, 아니면 '좋은 오빠'로 남게되는 송종호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후발 주자로 등장한 칠봉이(유연석 분)와 달리, 초반부터 쓰레기를 남자 주인공으로 집중 조명해 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우려'에 불과했음을 제작진과 정우는 증명해 냈다. 그저 나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보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런가 하면 정말 그 집 아들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멋진 오빠'요, 그러면서도 '쓰레기'라는 별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열렬한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스캔들 기사가 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저 쓰레기는 쓰레기로 받아들이게 할 만큼. 

이미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의 신드롬을 넘어서는 궤적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응답하라 1997>의 성공이 있었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미 전작의 묘미를 터특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제작진이 던져 준 떡밥에 설레발치며 나정이의 남편감을 예상해 보고, 칠봉이와 쓰레기의 노선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하지만, 또래 배우들의 몰입감으로 말랑말랑한 순정 만화를 보는 듯한 <응답하라 1997>과 달리, 여전한 청춘들의 연애사로 전개되어 가는 <응답하라 1994>임에도 전작보다 더 감칠 맛 나는 드라마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전작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캐릭터의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쓰레기 역의 정우는 물론이고, 그것보다 한 술 더 뜬 것이 삼천포 역의 배우 김성균이다. 그가 등장했을 때, 아버지 역의 성동일 조차 그의 외모에 감히 반말을 맘놓고 하지 못할 정도로 이제 막 대학을 입학한 '프레쉬맨' 역할의 삼천포 김성균은 어느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제 8회의 방영을 앞둔 시점에서, 삼천포는 정말 대학 1년생같아 보인다. 그 누구와 방도 같이 써본 적이 없고, 누구랑 무엇을 나눠 본 적이 없는 귀하디 귀한 지방 부잣집의 외동 아들, 그래서 서울 생활은 물론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생활에 눈치코치 없는 그럼에도 열심히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려 노력하는 삼천포가 종종 귀여워보이기 까지 한다. 저 사람이 영화 <화이>에서 그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거침없이 사람을 가해하던 아빠 동범이었는지, <이웃집 사람>의 살인마였는지 전혀 떠올리지 않게 만든다. 

삼천포 만이 아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고군분투했음에도 멀쩡한 허우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유연석도 <응답하라 1994>에서 비로소 허여멀건한 서울 놈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반질반질하다 못해 빤질빤질해 보이던 해태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빙그레 역시 조금씩 드라마 속으로 한 발 한 발 자신을 들여놓고 있는 중이다. 

<응답하라 1997>에서도 도학찬(은지원 분)이나, 방성재(이시언 분) 등의 캐릭터가 재미있었지만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라는 포지션이 분명해 보였지만, <응답하라  1994>의 캐릭터들은 마치 집단군물를 추듯, 각 캐릭터가 분명한 자신의 스토리와 성격을 가지고, 드라마 내에서 우뚝 서있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들간의 합종 연횡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응답하라 1994>가 캐릭터의 성찬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극본 상의 단단한 캐릭터 구축에 있지만, 그 캐릭터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배우들의 힘 역시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다. 

감독과 작가진이 정우가 출연한 전작 영화 <바람>을 좋아했고, 그 영화의 캐릭터를 그대로 옮겨왔다시피한 '쓰레기'캐릭터는 물론이고, 마흔살 아저씨같은 장국영을 스물살로 보이게 만드는 삼천포나, 해태 등은 그 역할을 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정우, 김성균, 유연석 모두 여러 작품을 통해 단련된 내공이, <응답하라 1994>를 통해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는 매회, 전작에서 이미 재미를 톡톡히 본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대한 기묘한 떡밥을 던지며 드라마적 흥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하지만, 쓰레기와 칠봉이, 그리고 나정이의 연인 관계의 결말만큼, 삼천포, 해태, 그리고 정대만(조윤진 분)의 삼각관계의 결말이 궁금해 지고 애닳아진다. 이미 드라마는 나정이의 남편 찾기라는 떡밥을 넘어서 캐릭터의 진기명기만으로도 풍성한 진수성찬이 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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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11.09 10:20

'당신은 언제 첫사랑이 그리운가요?'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첫사랑을 추억하는 방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을 들여다 보는 건 언제일까? 내 주변의 사람들과 행복하게 희희낙락할 때는 첫사랑을 추억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살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지금 내가 사는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이상하게도 사람은 내 마음 속에 숨겨둔 순수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꺼내들게 된다. 그건 단지 첫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직은 많은 가능성을 품었던 나를 꺼내보는 것이니까. <응답하라 1997(이하 응7)>에 이어, 호응을 얻고 있는 <응답하라 1994(이하 응4)>는 흡사, 이렇게 다시 꺼내보는 첫사랑과도 같다. 

한때 우리 문단에서 '후일담 문학'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80년대를 살아낸 386세대들이 그 시절을 마감하고 90년대에 들어서서 그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내용을 문학의 형식을 담은 것이었다. 공지영을 필두로 해서, 그 시절의 386 문인이라면 누구나 '후일담 형식'의 작품들을 배출해 냈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의 세대에게는 생뚱맞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은 '혁명'을 꿈꿨다. 가장 전선에 서서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건, 그들의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던 사람들이건, 아니 그 마저도 하지 못한 채 뒤쳐져 바라보던 사람들이건, 19세기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그 역사적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며 세상을 뒤바꿀 꿈을 꾸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걸 버리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그게 아니라도 넥타이를 매고 거리로 나서고, 박수를 보냈고, 묵묵히 그런 그들을 지켜보아 주었다. 
그러던 시절이 흘렀다. 세상이 얼마나 변혁되었는가와 상관없이, 순수한 이상으로 자신을 헌신하던 젊음은 나이가 들고, 이제 그저 생활인이 된 한 개인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 게 바로 '후일담 문학'이었다. 


그리고 이제, 90년대의 젊음을 살아낸 세대에겐 또 다른 형식의 '후일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왜 그게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냐고?
우리 문화에서 90년대는 대중 문화의 '르네상스'와도 같았던 시대다. 80년대에 청춘들은 '들국화'를 좋아했지만, 텔레비젼을 통해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015B', '서태지' 등 90년대 세대들이 즐겨 듣던 노래는 브라운관을 통해 흔쾌히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이 즐기던 운동은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되어 공감을 얻었다. <응4>와 <응7>에 나오듯이그들은 '책' 대신에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운동 경기를 관람하고, '삐삐'나 '핸드폰'을 통해 교류하였다. 드라마에서도 나온다. 강의에 들어오는 학생에게 교수님이 제발 '책'좀 가지고 오라고. 그렇듯이, 이제 그 세대는 더 이상 2차원의 종이를 차치하고, 보다 역동적인 '대중문화'의 호혜를 듬뿍 누린다. 

<응7>에서 드라마의 시작이 아이돌 그룹의 '빠순이'로 시작되고, <응4>에서 농구 '빠순이'로 시작되는 건, 그 시대의 일반이 그러했다기 보다는, 바로 그런 정체성을 가졌던 그 시대의 젊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낱 '빠순이'가 아니라, 그런 문화에 열광했던 젊음을 정당한 '문화'의 수혜자이자, 담당자로 재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를 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90년대의 그 시절에는 한없이 철없어 보이는 '빠순이'요, 서울에 와서 하숙집조차 제대로 못찾아가고, 패스트 푸드점에서는 주문 조차 못하는 '모질이'로 시작된다. 그런데, <응7>에서도 그랬듯이, 그런 그들이 현재로 오면 대단한 사람들이 되어있는 것이다. 연세대가 분명해 보이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없이 부족해 보이던 그들이, 2013년의 현재로 오면, 강남의 고층 주상 복합인 듯한 아파트에 살며 넥타이를 맨 그럴 듯해 보이는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엘리트주의'를 조장하는 환타지라는 부정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로 대변되는 그 시대의 상징성을 의미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그렇게 가수만 쫓아다니고, 농구장이나 들락거리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거 없어 뵈는 철없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통령 후보도 되고, IT강국의 주체가 되고,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는 세대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이다. 


90년대의 세대가 누구인가, 고단했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낸 선배 세대와 달리, 정치적으로는 상대적 안정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풍족하게 젊음을 누렸던 세대다. X 세대다 뭐다 라며 유별난 별칭을 가질 수 있었던 것, '빠순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문화를 누릴 여건을 지녔던 세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는데, 오히려 그들이 지금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고달프다. 
경제는 장기적 불황기에 들어서, 앞선 세대와 달리 직장도, 집도, 그 어느 것도 녹록하게 내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풍족치 않다. 풍족치 않을 정도가 아니라, 불안한 사회 안전망으로 인해 늘 위태롭고 흔들릴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어떤가, 지난 대선이 세대 대결이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첨단의 SNS등을 통해 '투표'를 독려했으나, 최근 불거진 대선 결과를 둘러싼 부정 음모들처럼, 그 수단은 오히려 역으로 이용당했으며, 나이든 세대들의 일사불란한 결사에 밀려, 처참한 패배 의식을 떠안았을 뿐이다. 획일적 문화와 조직적 사고 방식에 물든 세대들을 지양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개인을 흔들고 나락에 빠뜨리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세대적 불안함과 허무함을 위로한 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노리고 있는 것은 단지 추억팔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억을 길어 현실의 고단함을 툭툭 위로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나탈리 우드가 나왔던 영화 <초원의 빛>처럼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며 그 시절의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음을 다시금 조명해 준다. 현실에 지치고 고달픈 이 시대의 주역들에게, 너희들에게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어. 그리고 그런 시대를 지나, 너희는 이만큼 성장하고 이루어 내었어, 라며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자존감'을 가지라고, 첫사랑을 꺼내보듯, 그 찌질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답던 청춘을 되새기며 위로 받으라고.

물론 '추억'은 위험하기도 하다. 첫사랑과의 추억에 빠지다 지금의 사랑을 놓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주저앉아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때, 때로는 빛이었던 자신의 젊은 날이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이 되어 주기도 할 것이다. 부디,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90년대 세대에게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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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10.2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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