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동화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결국은 주인공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동화이듯, <응답하라 1994>는 전편 <응답하라 1997>에 이어 90년대를 살아냈던 아이들의 동화, 그것도 성장 동화를 그려내고자 했다. 

이 작품이 성장 동화라는 의미가 가장 명징하게 다가온 것은, 바로 마지막 삼천포(김성균 분)의 나레이션이다. 첫 회, 30분도 안 걸리는 하숙집을 찾기 위해 해가 저물도록 서울 시내를 뺑뺑 돌다 못해 바로 코 앞의 하숙집을 찾다 결국은 파출소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 삼천포가 21회, 사랑하는 아내 윤진이와, 느긋하게 택시를 타고가며,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 택시 기사조차도 미처 모르는 교통 혼잡을 피해 가는 빠른 길을 알려주는 모습은 바로 그 성장의 절정이다. 그렇게 삼천포처럼, 하숙집의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성장통을 겪어내고 그곳을 떠난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번듯한 아파트에 살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명의 아이들을 거느린 부모가 된 것만큼, 아니 오히려 더, 하숙집 딸인 나정이를 포함해 그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하숙집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마지막 회의 엔딩이 그래서 더 가슴 찡하게 그들의 성장을 다가오게 만든다. 이렇게 아이들은 저마다 커서, 자신의 집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쓰레기, 삼천포, 해태, 칠봉이, 빙그레처럼, 치기어린 별명으로 불리워지던 아이들이 이제 저 마다의 이름을 얻어 자존한다. 

그리고 늘 동화에서 처럼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어낸다. 사랑에 대한 속설이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장담하지만, 90년대 아이들의 동화인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의 첫사랑은 꼭 이루어진다. 나정이도, 쓰레기도, 삼천포도,윤진이도, 빙그레도 모두 자신의 첫사랑을 성취해 내고야 만다. 빙그레(바로 분)는 아니지 않냐고? <응답하라 1997>과 다르게 이성에 대한 사랑을 찾아간 빙그레에게, 쓰레기(정우 분)에 대한 감정은 첫사랑이기 보다는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자기 주변의 사람을 무조건 엄마라 생각하는 '각인'과도 같은 또 다른 성장통이라고 드라마는 치부한다. 

칠봉이(유연석 분)가 있지 않냐고? 하지만 <응답하라 1994>는 칠봉이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었다. 엄마랑 아빠가 있지만, 그가 아플 때 조차 부르지 않는 부모 대신에, 그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밤새 침을 튀기며 자기 일처럼 고민해 줄 수 있는 혈육과도 같은 친구를 얻었다. 애초에 칠봉이가 나정이와 하숙집을 좋아하게 되었던 그 장면처럼, 비록 칠봉이는 첫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어쩌면 첫사랑보다 더 소중한 친구와 형을 얻었다고 <응답하라 1994>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진짜 칠봉이에게 필요했던 건 그거라고.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빙그레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사랑인지 가족의 따스한 정인지 헷갈려 하던 칠봉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찾아가게 만드는 과정이 바로 <응답하라 1994>가 성장동화인 이유이다. 그것은 굳이 21부로 늘여, 장황하게 한번은 헤어지게 만들고야 말았던 나정이의 남편찾기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 죽은 친오빠를 대신하여 늘 오빠여야만 했던 쓰레기와, 그를 오빠처럼 믿고 따르던 나정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친남매인지, 사랑하던 연인인지 정체성에 혼돈을 느낄 사이도 없이 사랑에 빠졌지만, 2년간의 물리적 이별과 그에 이은 진짜 이별이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인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성장통의 기간이 되었다. 그래서 21회에야 드디어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은, 해태의 하숙집 탈출과 함께 나란히 병치되어 그려짐으로써, 그것 역시 이들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성장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소꼽장난하듯 사랑을 하던 철부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드라마는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21회에 걸친 장구한 90년대 아이들의 성장 동화가 꼭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다. 결론은 해피엔딩의 동화였지만, 드라마는 내내 90년대 아이들의 성장통을 그려내기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나정이의 남편 찾기'라는 퍼즞 맞추기 게임식으로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인공들의 성장통은 뒤편에 숨긴 채 결론이 먼저 보여졌고, 한 회, 심지어 몇 회가 지나고서야 불친절하게 몰랐지, 혹은 속았지 하며 사실은 이래서 그런 거야 라며 놀리듯 사건의, 혹은 사연의 속내를 들춰 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칠봉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 옆에서 질척거리는 사내가 되었고, 심지어 나정이는 어장관리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얍삽한 나정이의 남편 찾기 게임 대신에, 진솔하게 칠봉이 사랑의 속내를, 오지랖넓은 나정이의 속내를 그려냈었다면, 시청자들이 나정이의 남편 찾기 게임 앞에 진저리를 치는 사태가 오지는 않았을 듯 싶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비록 마지막 회를 통해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90년대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그 과정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인가? <응답하라 1997>이 마지막까지도 90년대 아이들의 체취가 흠씬 느껴졌었다면, 마찬가지로 늘 어느 장면에서나 넘치듯 90년대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응답하라 1994>에서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오히려 드라마는 IMF다, 삼풍백화점 사건이다, 그리고 그 틈새 틈새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삐삐, 핸드폰의 섬세한 발자취마저 담아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응답하라 1994>에서는 오히려 그 뒤의 시대를 그린 <응답하라 1997>에서 보다도 시대의 향수가 덜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앞서 말했듯이, 드라마가 지나치게 '나정이의 남편 찾기'에 매몰되다 보니, 사건은 있되, 알맹이는 없는 동시대성의 고증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응답하라 1997>의 전례가 있어 시들해진 추억팔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게 되어버린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회 신촌 하숙이 문을 닫고, 이제는 네 것 내 것이 무엇인지 조차 구분하기 힘들어진 삼천포와 해태의 모습, 형제들같아진 하숙집 아이들이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응답하라 1994>의 21회를 달려온 보상을 받은 듯 훈훈했다. 결국은 나정이 쓰레기 커플의 사랑 놀음에 이용당하고 만건가 라는 칠봉이에 대한 아쉬움은 미흡하나마 가족같은 친구들의 울타리로 달래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동화같은 현실은 없다. 애초에 그렇게 90년대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명문 연세 대학교에 갈 리가 없었고, 그들이 IMF라는 고비를 넘기고서도 남보란 듯 멋진 아파트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거느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어 있을 리도 없다. 동화 속에는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은 언제나 주인공들이 감내할 만한 수준의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아파하지만, 그뿐, 그들이 현실에서 얻어낼 사회적 성취에 하등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들은 아파했지만, 진정 그 시대가 고통받고 아파했던 현실적 고통엔 늘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기껏해야 그들이 맞닦뜨린 데모는 고향 주민들의 그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아니라도 막장이 판치는 세상에서, 꼭 내가 동화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해피엔딩의 동화를 보며, 탈색되었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며 잠시 묵직한 현실의 위로를 받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언제나 추억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니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12. 29. 0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