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3일 첫 선을 보인 mbc 월화 드라마 <화정>, 50부작의 포문을 연 것은 다름아닌 단 한 회만에 생을 마감한 '선조'(박영규 분)였다. 자신의 아들 중 하나였지만 광해군(차승원 분)이 누군인지 알아보지도 못한 아비, 사랑하는 애첩의 아들 대신 죽어도 될 만만한 존재로 세자를 책봉한 얍삽한 아비,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궁을 버리고 떠나는 자신을 대신해 백성을 독려하고, 왜군에 맞서싸우던 자신보다 더 '임금님' 같던 세자를 정적으로 여기던 아비, 그는 명의 고명을 핑계로 16년이나 된 나이가 지긋한 세자 대신, 왕후의 몸에서 난 어린 대군을 세자로 다시 옹립하려 한다. 


이렇게 <화정>은 문제적 인물 광해군을 설명하기위해, 그 보다 더 문제적 인물이었던 아비 선조를 등장시킴으로써, 광해군이 가진 존재론적 고뇌를 단번에 설명해 낸다. 아직도 역사상 정당한 임금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군으로 남겨진 문제적 군주 광해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적 세력의 대력부터, 광해군의 중도적 외교 노선 등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이 첫 회의 서막만으로도, 선조의 편을 들어 어린 세자를 옹립하려 했던 중신들과, 못이기는척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하는 인목대비, 그리고 그 밖의 왕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아비와는 다른 왕'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광해의 존재론적 한계를 설득해 낸다. 



'사극의 트렌드로서의 '선조'
역사에도 유행이 있던가? 한때는 사극만 했다하면 '정조'가 등장했었다. <화정> 작가인 김이영 작가의 2007년 작품도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산>이었듯이, 여러 사극들이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의 열망을 그려내기에 앞다투었다. 하지만, 이제 개혁의 기치를 올린 정조 대신, 백성을 두고 줄행랑을 친 선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2015년 종영한 <왕의 얼굴>에서 부터, kbs1tv의 대하사극 <징비록>, 그리고 이제 새로이 시작한 <화정>까지, 실패한 지도자 선조의 모습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화정>이 자신의 아들을 정적으로 여기며 그를 몰아내고자 하자 목숨을 잃은 노회한 아비의 모습으로 선조를 그렸다면, <왕의 얼굴>은 광해를 백성을 생각하는 개혁 군주로 그려내기 위해, 아비 선조를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컴플렉스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아들을 의심하고 조련하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낸다.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관상'이란 대상에 실어 부족한 자신의 얼굴을 보완해 주는 인물을 찾는데 집착하는 인물, 그래서 자신보다 더 왕의 얼굴을 가진 광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징비록>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이지만, 실제 드라마적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결정적 인물은 '문제적 인간' 선조이다. 김태우가 분한 선조는, 임금이 될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 지도자의 능력을 갖추자 못한 사람이 리더가 됨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그려내는 듯하다. 

왜 선조일까?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으로가지 도망간 선조, 그를 원망하는 듯한 일부 중신들의 시선에 선조는 반문한다. 그럼 내가 죽었어야 했냐고. 그리고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평양을 배수의 진으로 삼아 왜적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자 한다. 군사를 모으고, 자신이 외면한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자 손수 백성들에게 장국을 나누어 주는 등 솔선수범 리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하지만, 군령이 혼란을 겪는 시기, 자신이 임명한 군 지도자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그의 통솔을 벗어난 소속 군관의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선조의 명령이 잘못된 명령이었음을 알게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선조가 명령을 내린 얼마 후, 적들을 보고 도망간 지도자를 벗어나 직접 적과 맞서 싸워 임란 최초의 전승을 거둔 그가, 적들의 수급을 자랑스레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절규하며 명령을 다시 내리지만 이미 그 시각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까지, 그리고, 전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잘못된 리더쉽을 끊임없이 보이고 있는 선조를 그려낸다. 김태우의 열연으로 형상화되는 선조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 그리고 리더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한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저 드라마일 뿐이라고 할 지 몰라도, 드라마의 트렌드는 귀신같이 사람들의 정서를 복사한다. 정조를 앞다투어 주인공으로 삼던 시기에는, 그래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를 '구제해줄' 누군가가 등장할 거란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기대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새삼, 재삼 등장하는 선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그려내는 방식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혹은 인간적으로 미흡한 등 다양한 접근이지만, 결국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 나라의 리더로서의 그릇을 갖추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귀착한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백성을 이끌고, 중신들을 다스려야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인물, 그래서, 자기 마음가는대로,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가 끌리는 핏줄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벌이는 인물, 아들 광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제대로 된 신하들을 중용하지 못하듯이, 제대로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애초에 그럴 능력조차 가지지 못한 리더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그래서 실패할 수 없는 리더의 존재를 드라마는 끊임없이 복기한다. <왕의 얼굴>은 개혁 군주가 될 광해를 그리고자 했으나, 실패한 리더 선조의 그림자가 짙었고, <징비록>은 아예 대놓고 임진왜란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을 가져야 하는 존재로 선조라는 부실한 리더를 그리는데 골몰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화정> 역시 혼돈스런 광해를 그리기 위해 그 아비 선조의 부덕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결국 엎어치던 메치던, 리더가 될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 리더가 된다면, 그리고 그의 좁은 소견과 안목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그의 대는 물론, 그의 다음 대까지 역사가 어떻게 절단나게 되는가를, 선조는 계속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선조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자기 이익와 자기 주변의 이익, 그리고 자기 이해 관계에 맞춘 리더쉽이 한 나라를 어떤 지경으로 끌고가는지는 우리가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을 통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선조의 미흡한 리더쉽이 낯설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에서, 리더를 통한 희망 대신, 실패한 리더쉽을 복기하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안쓰럽다. 

by meditator 2015. 4. 15. 11:48

23회, 광해(서인국 분)를 폐서인 시키고자 하는 선조에게 광해가 일갈한다.

"아버님은 평생, 왕의 얼굴에 매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군주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의 얼굴입니다"

광해의 이 단호한 왕의 얼굴에 대한 정의가, 바로 드라마<왕의 얼굴>이 끈질기게 추구하고자 한 주제 의식이다.

 

그리고, 그 주제 의식에 걸맞게, 선조(이성재 분)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왕이 된 광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간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던, 방납의 폐해를 없애고자 대동법을 실시한 것이다. 객주 장수태(고인범 분)의 단적인 예처럼, 산골에 부과된 전복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공물을 내기 위해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장수태와 같은 상인의 전횡과, 관료들의 이권을 견뎌내야 했는데, 이렇게 가장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방납을, 토지 소유에 근거하여, 각 얼마를 정하는 대동법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광해가 방납의 폐해를 들고 나오자, 그를 지지했던 대북파의 거두 이산해(안석환 분)는 만류한다. 조선이 세워진 이래 모든 왕들이 그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그 어떤 왕도 성공치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이산해의 저지에, 광해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바로 공과 같은 대신들이, 방납의 이권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그러면서, 각자 소유한 토지에 근거하여, 공평하게 쌀로 세를 대신 부과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겠다고 밝힌다.

 

내가 왕이다  서인국이 왕의 얼굴에서 광해를 맡아 훌륭하게 소화했다. /KBS2 왕의 얼굴 방송 캡처

the fact

 

드라마의 한 장면이지만, 보는 시청자들은 이 장면에서, 우리가 사는 현재가 고스란히 짚어진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 이른바, 증세 논란이 그것이다. 즉, 복지 국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증세를 해야 하는데, 과연 그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 각 입장별로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연초가 되자마자 급락한 대통령의 지지율의 상당 부분이, 유리 지갑이라 일컬어지는 월급쟁이들의 연말 정산의 달콤한 즐거움을 앗아갔던 탓이 큰데, 거기서 사람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바로, 정작 돈을 내야 하는 부자들에게는, 각종 혜택을 주면서, 정작 만만한 사람들에게 다시 세금을 뜯어 가고 있다는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결국, 날이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 지고 있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21세기 자본론]의 피케티의 주장처럼, 부유세만이 해결책인데, 그 해결책은 외면한 채, 엄한 담뱃세 등으로, 서민의 등골을 다시 빼먹는다 생각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다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드라마 <왕의 얼굴>은 이른바 불운의 왕세자 광해를 통해, 진정한 리더가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찾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 보란듯이, 광해는 가진 땅에 근거해 세를 부과하는, 이른바 부자 증세의 효과가 드러내는  대동법을 통해, 이 시대의 리더가 추구할 해법을 제시한다.

 

단 한번도 거역할 수 없었던 아비 선조에게, 백성의 얼굴을 일갈하고, 왕이 되자마자, 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의 밝은 얼굴을 살폈던 광해, 그가, 그렇게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리더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왔던 길은 험란했다.

그 자신이 적통이 아니기에, 늘 왕의 자격이 부족하다 생각했던 아비 선조의, 노회한 정략에 휘말려, 적통도 아니고, 심지어 장자도 아닌 처지에, 혹여나 왕의 자리를 넘볼까 시험의 대상이 되고, 밀려드는 왜군 앞에 먹잇감처럼 왕세자가 되었던 광해,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비의 시험에 들어 폐서인이 되어 궁밖에 내처지고, 홀로 한양에 남아 왕가의 대표자로서 백성을 돌보며, 진정한 리더로서 성숙해 간다. 그래서, 마지막, 평생을 나라를 좀먹은 선조가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냐며, 왕의 자격에 타고난 신분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반문하는 김도치에게 당당하게, 그것은, 권력과 재물이 아니라, 책임이라며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 <왕의 얼굴>은 최근 학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개혁 군주로서의 광해군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한 거울로서, 진정 백성을 생각하는 리더로서의 광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인조 반정을 통해 비운의 왕이 되고만 광해의 운명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듯, 폐륜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왕이 되자마자 실시했던 진정 백성을 위한 대동법 등의 개혁적 정책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드라마의 여운으로 남긴다. 그것을 위해, 인목 대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화신이 되었고, 이산해 등의 관료들은 가렴주구에 물든 권신 세력으로 묘사되었다. 이렇게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개혁적 정책과, 정통성을 승인하지 않는 무리들이 결국 광해를 왕좌에서 밀어냈을 것이라는 것을, 23회의 여정 속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드라마는 광해라는 인물을 구현해 낸다.

 

그리고 이렇게 백성을 생각하는 리더로 재탄생되는 광해의 맞은 편에, 평생, 왕의 얼굴을 가지고 싶었지만, 정작 왕의 얼굴에 집착만 했을 뿐, 전란이 나자마자 자기 한 몸 살고자 내빼기 바빴던, 심지어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피붙이조차 의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편협한 인간 선조를 대비시킨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국가에 의해 잃고, 타고난 운명을 거부하며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개인의 야욕으로 귀결되고만 김도치란 또 다른 인물을 대비시킨다. 이렇게 왕이고, 왕이 되고자 했고, 결국 왕이 된 세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올바른 리더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좋은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사극으로서 <왕의 얼굴>이 가진 아쉬운 점은 남는다.

무엇보다, 굳이 '관상'이라는 소재를 들어 왕의 얼굴에 천착함으로써,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렵사리 에둘러 돌아와야만 했다. 선조를 왕의 관상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낼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정통성을 지니지 못해 의심과, 변덕으로 자신의 보위를 유지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려냈었다면 좀 더 드라마적 개연성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관상'이란 픽션을 끌어 들임으로써, 광해라는 캐릭터가 뜬금없이 관상감의 과거를 보게 만든다거나, 결국 김개시가 되는 가희를 그려내는데 있어 역사적 사실을 비껴가는 묘사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게 된 것이다. 심지어, 광해군대에 이르러서까지 그 권세를 유지했던 김개시를 선조를 독살하고, 광해의 곁에서 물러나는 순정의 주인공으로 만듦으로써 왜곡의 수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극 <왕의 얼굴>의 옥에 티이다.

 

또한,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로 거듭나는 리더로 구현하기 위해, 광해라는 인물을 지나치게 도덕적인 히어로로 그려낸 것 역시 아쉬운 점이다. 불가피하든 어쨌든 결국, 자신의 형을 비롯하여, 인목왕후, 영창대군, 그리고 결국 자신의 동지와도 같던 허균까지 죽음으로 몬 군주가 광해일진대, 폐주로서의 그를 새롭게 모색하는 것이, 정반대로 영웅으로 미화하는 경지에 이른 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흑백 논리적인 비약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깨닫고 고뇌하는 인간 광해였다면, 조금 더 현실감있는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2. 6. 06:12

결국 '임진왜란'이 터지고야 말았다. 풍전등화 앞의 조선, 하지만, 나라의 흥망이 눈 앞에서 오고가는데도,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 자신의 입장을 놓을 수 없다. 그렇게 왜적이 침입한 상황에서도 저마다 다른 속내를 펼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왕의 얼굴>은 갈리는 운명으로 풀어낸다.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수도 한양을 위협하는 상황이 다가오자, 선조(이성재 분)는 파천을 결정한다. 대신들에게 내건 명목이야, 좀 더 명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 명에게 원병을 청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왕의 파천 행렬을 막아선 백성들의 분노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자기 한 몸 살겠다고 도망가는 거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도망가는 위정자의 모습은 너무도 익숙하다. 6.25 전쟁이 나고, 수도 서울을 버리고 한강 다리까지 폭파해버린 채 도망가던 이승만 대통령은 도망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수도 서울의 사수를 내세웠다. 심지어, 후에 서울이 수복된 후 자신들이 다리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공산치하에 내던져졌던 사람들을, '사상검증'의 잔인한 '인민 재판'앞에 던져 버린다.

 

왕의 얼굴

tv데일리

 

그렇게 도망가는 선조가 자기 대신 왜적의 총알받이로 내세운 것은 다름아닌 '광해'였다. 명목이야, 맏아들 임해가 왕재가 아니요, 신성군은 너무 어린 탓이요, 왕자 들 중 가장 왕의 재목에 어울리는 현명함을 가졌다지만, 결국 왜적들의 손에 잡혀 목숨을 잃어도 어쩌지 못할 만만한 대상이었음을 드라마 <왕의 얼굴>은 밝힌다.

하지만 그런 선조의 '응큼한' 속내에 아랑곳없이,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큰 아들 임해군과 신성군은 자신들이 세자가 되지 못함이 먼저이다. 왜적이 들이닥치건 말건, 나라가 없어지건 말건, 자신들의 '자리'가 먼저인 그들은 어떤 면에서 가장 아비를 닮은 아들들이다.

그런 형, 동생들과 달리, 드라마 속 현명한 왕재 광해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익히 알고 있으며서도 기꺼이 아비를 대신해 수도 한양에 남겠다고 말한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왕재'가 그저 헛운명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임란 속에서 위기에 빠진 왕가의 궁여지책으로 세자가 된 광해와 달리, 스스로 '왕의 길'을 가겠다고 나선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다. 바로 김도치(신성록 분)다. 대동계의 수장으로, 평등 세상을 꿈꾸는 그들의 앞에 나선 모든 일들을 진두 지휘하던 김도치, 하지만 정작 선조를 암살하려던 대동계의 일원을 스스로 죽여버리면서까지 선조의 총애를 얻으려 했던 그의 속내가, 13회에 분명해졌다. 자신의 부모 형제가 억울하게 죽어갔던 분노를 '대동 세상'을 만드는 것을 통해 '승화'하는 대신, 그 자신이, 왕이 될 '역심'을 품는다. 왕의 재목이 별거냐며, 도망간 왕이 비운 자리에 자신을 앉혀본다.

 

국난의 시기에도 나라를 지키기보다는 일신의 안녕을 우선하여, 발빠르게 도망했던 왕, 스스로 국경을 넘어 명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국경 근처에 머물렀던 왕, 비겁한 왕 선조와, 그런 아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되었던 광해, 그리고 결국 궁여지책이 그를 왕으로까지 만들었던 운명의 이야기를 <왕의 얼굴>은 '관상'이란 운명론적 서사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그래서 파천을 앞둔 전날 선조는 용상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 왕이 되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는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왕의 재목이 아니라, 결국 왜적들에게 나라를 내주게 되었다며.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관상을 통탄하고 있는 선조의 운명론의 맞은 편에 한양에 남아 광해를 돕겠다는 가희(조윤희 분)의 운명론이 있다. 왕의 후궁이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그녀, 하지만, 그녀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다 운명을 맞이하겠다며 광해를 돕기 위해, 남장을 하고 활과 목검을 챙긴다. 그런 그녀에게 당대의 최고 관상가 백경은 타고난 '관상'을 이겨내는 것이 '심상'이라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준다.

 

하지만 백경이 존중해 주지 않는 '심상'도 있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도치에게 백경은 그에게 독초를 먹여 죽이려다 차마 죽이지 못했던 과거 자신의 우유부단을 후회한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는 도치의 결단은, 그저 왕재로 타고나지 못한 운명론을 넘어선 의지론이라기 보다는, 자신과 함께 했던 대동계의 동지들마저 자신의 의도에 따라 희생시키는 선조와 다르지 않는 '일신의 안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고난 운명을 거스르는 도치의 야욕 앞에 자신의 관상에 따라 진정한 왕의 재목으로 거듭나는 광해가 있다.

 

<왕의 얼굴>은 전란에 빠진 조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운명적 선택을 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관상'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서사의 방식이, <왕의 얼굴>의 매력이자, 또한 한계가 된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인물들은, 결국 그로 인해, 다른 역사적 결과물을 낳지만, 드라마는, 그걸 원심력있는 역사로 풀어내는 대신,'관상'이라는 운명론으로 귀결시켜 버린다.

그래서 왕은,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는 전날,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나라를 이 지경에 빠진 자신을 반성하는 대신, 자신의 관상탓이나 하고 있다.

 

bnt뉴스

 

그런 왕을 대신하여, 졸지에 나라를 떠맡은 광해의 운명은 애처롭고, 그 상황에서 의연한 모습은 대단해 보이지만, 어쩐지, 그런 그의 모습은, 또 다른 운명론적 영웅을 보는 듯, 단선적이다. 비록 최근 들어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조명을 새롭게 하여,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이 아니었음이 새롭게 부각되어지고 있지만, 정말, 적군의 총발받이로 남겨진 세자가 된 그가, 한번도 자신의 애꿎은 운명을 탓하지 않은 채, 그토록 애닮게 '백성'만을 생각하는 성군이었을까? 도망가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자신을 음해하고, 죽이려고 드는 형과 동생을 대신하여 화살을 받고, 총알을 기꺼이 받는 광해는 '순교자'적이긴 하지만, 매력적인 역사적 인물은 아니다. 광야에서 악마에 시달리며 자신의 운명을 놓고 울부짖던 시간이 있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더 숭고하듯이, 인간적 고뇌조차 제껴두고, 오로지 백성만을 걱정하는 광해는,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럴 수록 생동감있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현실감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광해에 비하면, 오히려, 타고난 운명을 거슬러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김도치란 인물이 드라마적 흥미를 일으킨다. 하지만, 일찌감치 대동계의 인물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희생시킴으로써, 드라마는 하늘이 내려준 운명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신분제 사회 조선을 넘어서려는 김도치란 인물을 그저 결국 나쁜 놈으로 그려냄으로써, 그리고 '왕재'의 관상을 타고난 광해를 지고지순한 영웅으로 그려냄으로써, 운명론적 역사관에 스스로 갇혀 버리게 된 것이다.

 

by meditator 2015. 1. 2. 10:51

 입꼬리가 올라 가는 걸 보니, 자기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군, 좋은 패가 들어 온 게 틀림없어'

12월 11일 방영된 8회 <왕의 얼굴>에서 김귀인의 오빠 김공량(이병준 분)과 장수태(고인범 분)의 장부를 놓고 내기를 하게 된 광해(서인국 분)의 나레이션이다. '관상'에 능통해진 광해가 상대방의 얼굴 표정만으로 그가 가진 패를 읽어내는 순간이다. 

영화 <관상>의 설정을 허락도 없에 베꼈다 하여 방영 전부터 논란이 되었던 <왕의 얼굴>은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자, 영화에 대한 논란은 수그러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될 얼굴이란 설정의 시작은 비슷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영화 <관상>은 역적이었던 조상때문에 벼슬길에 나서지 못해 관상쟁이가 된 주인공이, 왕의 얼굴을 판가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역사의 풍파 속에 휩쓸리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굵직한 흐름은 단종과 세조 대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지만, 결국 그 안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고마는 민초의 이야기를 근저에 깔고 간다. 

그에 반해, 드라마 <왕의 얼굴>은 대놓고, 왕이 될 관상을 지니고 있지 않아 컴플렉스를 가진 왕 선조(이성재 분)를 등장시킨다. 영화<관상>에서 왕이 될 얼굴이 아님에도 왕의 자리를 노리는 수양대군과는 같은 듯 다른 캐릭터이다. 한 사람은 왕이 될 얼굴이 아니지만, 스스로 왕의 자리를 쟁탈하는 자요, 또 한 사람은, 운명적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왕이 될 깜냥이 아니라는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정신병리학적 증후군의 인물이다. 왕이 될만하지 않은 인물로 인해 일어나는 역사적 갈등을 다루었지만, 영화 <관상>이 제목이 관상임에도, 등장인물들이 '관상'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휩쓸리지 않는 것과 달리, 드라마는 시작부터 거기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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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자격이 없는 아비에게서 왕이 될 얼굴을 가진 광해가 태어나고, 그의 등장은 아버지와 갈등의 원인이 된다. 자신이 왕실의 적자가 아니기에 늘 불안감에 시달리는 왕 선조, 하지만 그에게는 정작 정실 부인인 의인 왕후에게서 난 자손이 없다. 그래서 공빈 김씨의 소생인 두 아들들이 가장 유력한 왕의 계승자이지만, 그런 것이 선조에게는 늘 마땅찮은 구석이 된다. 더구나 그 중에서도 난 놈인 것 같은 광해가 그의 눈에 걸린다. 드라마 <왕의 얼굴>은 이렇게 자신의 아들이지만,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광해가, 아버지 선조와의 갈등을 일으키며, 그리고 그런 수난을 겪는 와중에 백성들의 삶에 눈을 뜨고 진정한 군주의 상으로 거듭나는 성장드라마를 그리고자 한다. 

이렇게 태생적 아니, 왕재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왕이 되어야 했던 선조의 컴플렉스를 '관상'이란 운명론적 세계관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과연 왕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데 대한 의문을 가진 광해가 스스로 관상에 입문 능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관상'은 전가의 보도처럼 씌여진다. 11일 방송에서 처럼, 광해는, 그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마다, 게임의 필승 아이템처럼 '관상'을 꺼내 무기로 써먹는다.  마치 인간계에 등장한 마법사처럼 말이다. 당연히 상대방의 운명과 얼굴을 읽을 줄 아는 그의 능력 앞에 보통 사람은 나가 떨어질 밖에. 어디 광해 뿐인가, 궁중에 떠억하니 자리잡은 관상감하며 과거 시헙보듯이 관상 시헙을 보고 궁중에 입궐하는 김도치(신성록 분)까지. 

11일 방영된 김공량과 광해의 투전 대결은 게임 관전처럼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관상'이라는 능력을 탑재한 광해 앞에 김공량은 그저 밥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광해 앞을 가로막은 장애들은 제거된다. 이러다, 광해와 김도치가 조우하게 된다면, 마치 중국 무술 영화의 각종 비기를 장착한 무림 고수들이 장풍을 쏘며 대결하듯, '관상'대 '관상'의 환상적인 대련이 보여지는 건 아닌지. '관상'이란 요소는, 대중적으로 흥미를 느낄 소재이긴 하지만, 여전히 운명론적이며, 중국 무협 영화의 장풍만큼이나, 막연한 요소인 것이다. 

드라마는 대동계의 역모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가희와의 인연 때문에, 그녀를 보호하고자 하다, 폐서인으로 되어 궁궐 밖으로 내처지게 된 광해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여인을 보호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그녀가 살던 세상,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희, 그녀를 구하려는 광해의 시도는, 나아가 백성들의 삶을 구제하는 계기가 되어간다. 

이는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개혁군주로서의 광해에 대한 밑그림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구상이다. 하지만, 그런 광해가 가진 '관상'이란 능력은 지금은 전가의 보도처럼 쓰여지지만, 딜레마가 된다. 갖은 곡절을 이겨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지만, 그 자신이 결국 왕의 자리에서 내쫓기는, 그래서 '왕의 이름' 한 자리 지니지 못한 채, 광해군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이 존재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지. 정작 자신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한 '관상'의 능력자 광해라니.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에스컬레이터가 되었던 능력을 과연 이 드라마는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지. 

그런 능력자 광해에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비문>에서도 등장했지만,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아비와, 정통성에, 진취적 세계관까지 가진 능력자 아들이라는 단선적인 갈등 구조도 한 몫 한다. 왕의 깜냥이 아님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신들의 비리를 눈감아주며, 능구렁이 된 아비와, 그런 아비와 달리, 권신들의 비리를 척결하고자 의지를 다지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유토피아같은 세상을 꿈구는 아들이라는 대결 구도가 극을 이끌어 가다보니, 등장한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역사적으로 광해는 왕의 계승 서열에서 그의 아비 선조와 같이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결코 왕이 되기 힘든 인물이었다. 역사는 그의 형 임해가 광폭하여 왕이 될 깜냥이 되지 못한 듯 그려내지만, 그 역시 폭군 광해처럼 후대의 해석일 뿐이다. '임진왜란' 때 도망간 아비를 대신하여, 전쟁터에서 성실하게 왕자의 자리를 지킨 그의 공로가 그를 왕의 자리에 까지 올렸다. 드라마는, '왕의 얼굴'이라는 운명적 요소로 그의 왕좌를 설명하지만, 정작 그를 왕위에 올린 건, 전쟁터를 지킨 그의 책임감이자, 능력이다. 

이렇게 우연과, 우연 속에 드러난 광해라는 인물의 신실한 캐릭터를, 굳이, '관상'이라는 운명론적 요소를 개입시켜, 개연성을 부풀릴 필요가 있을까? 8회까지 진행된 드라마에서, 가희와 얽히면서 폐서인이 되기까지 광해의 파란만장해진 삶 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내적 동력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김공량과의 투전 대결에서 등장한 '관상' 아이템처럼, 절대 무한 능력까지 장착시켜, 운명론을 배가시켜야 했는지, 이건, 마치, 조선 건국을 '용비어천가'로 설명하는 식처럼, 광해란 인물을 입지전적 인물로 형상화하기 위해 둔 무리수는 아닌지. 하지만 제 아무리 이제 와 개혁 군주로서의 면모가 재조명된다 한들, 그 역시 장단점을 가진 역사적 인물에 불과할 진대, 드라마 <왕의 얼굴>은 정통성을 가진 아비에 대비하기 위해, 광해를 너무 '완벽한 캐릭터'로 키워가고 있는 건 아닌지. 진취적 성향을 가진 개혁 군주라는 또 하나의 볼모에 잡히고 있는 건 아닌지. 이제 본격적인 광해의 활약이 시작되는 즈음, <왕의 얼굴>에 덧붙이는 아쉬움이다. 


by meditator 2014. 12. 1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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