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면 전쟁의 경험담을 들려준 알프레드 H 멘더스에게 바치는 헌사의 자막이 올라간다. 바로 <1917>의 감독 샘 맨더스의 할아버지이다. 어린 시절 샘 맨더스가 본 할아버지는 몇 분에 한 번씩 손을 씻는 강박증을 가지고 계셨다고 한다. 왜 그러실까 의아해 하는 샘에게, 아버지는 전쟁 중 피가 스민 참호의 진흙이 닿았던 그 기억을 평생 씻어내지 못해 그러시는 거라고 전해준다. 19세의 이제 막 성년의 문턱에 들어선 청년이 늙어 할아버지가 되도록 평생 씻어내지 못한 '참호의 피묻은흙'으로 상징된 전쟁의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손자 샘 맨더스는 <1917>를 통해 인간이 일으키고 인간이 희생자가 되어버린 '전쟁의 참상'을 단 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의 경계 안에서 그 어떤 장대한 서사 못지 않게  풀어낸다. 비록 아카데미에서는 <기생충>에 밀려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음향 믹싱상만을 받았지만 77회 골든 글로부 작품상, 감독상, 전미 비평가 협회 올해의 영화 top10, 73회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 수상, 31회 미국 프로듀서 조합상(PGA) 작품상 수상, , 제 72회 미국 감독 조합상(DGA) 감독상 수상을 받은 이유이다. 


 

시신으로 가득찬 전쟁터 
샘 맨더스 감독이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전쟁담에 크리스티 윌슨 케인즈가 살을 붙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두 병사의  '미션 임파서블'이 탄생한다. 그 시작은 나른하게 기대어 졸던 블레이크를 호출한 에린 무어 장군의 명령이다. 

세계 제 1차 대전은 전차, 전투 비행기, 심지어 염소 가스 등의 현대식 무기를 통해  대량의 인명 살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세계 대전이다.  '인명을 살상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발전한, 그러나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기엔 미흡했던 과학 기술'(존 키건, 1차 대전사)은 NYT와 인터뷰한 샘 맨더스 감독의 말처럼 '기관총으로 1000야드(914M)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불과 20야드(18.288M)에 떨어진 군인과는 교신할 수 없었던 '아이러니한 기술적 진보의 상황을 배경으로 발발한다. 

그런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퇴각하는 적군이 그나마 존재하던 통신망을 끊어버렸다면? 적군은 퇴각했고 그 적군을 쫓은 아군의 부대는 이를 틈타 대규모 공습으로 적군의 섬멸을 노리지만, 그 퇴각이 '작전상' 의도된 퇴각이라면? 그런데 그걸 알릴 방법이 없다. 그 상황에 에린 무어 장군은 '지도를 잘 보고, 동시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적진을 돌파할 의지'를 가진 병사로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 분)를 선택한다. 장군의 비밀 메시지를 단 8시간 내에 2대대에 전달하지 않으면, 외려 독일군의 공습에 꼼짝없이 대대 전원이 '몰살'될 수도 있는 상황, 형이 그곳에 있는 블레이크는 당장 장군의 메시지를 들고 달린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블레이크의 동료라는 이유만으로 같이 차출된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도 함께.

단 한 장면에서도 OST를 넣지 않음으로써 2차 대전 고립된 전장의 실감을 드러낸 <덩케르크>와 달리, 장중한 토마스 뉴먼의 오케스트라 OST와 음향이 독일군이 떠났다지만 그 정보의 진위조차 의심스러운 상황, 어디서 적의 총알이 날라올 지 모르는 '무지' 혹은 '미지'의 여건 속에서도 그저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하는 두 병사의 상황을 '스릴러' 혹은 '공포물' 못지 않은 긴박감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모든 씬을 따로 찍었지만 편집하여 하나의 여정으로 보이도록 하는 '원 컨티뉴어스 컷(one continuous shot )이란 기술적 도전이 단 하루 8시간 안에 목적지인 2대대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기술'적 '음향'적 성취를 통해 불가능한 작전의 실행에 내몰려진 두 병사의 여정을 통해 <1917>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바로 '전쟁' 그 자체이다. 

북해에서 부터 스위스까지 이어졌다던 1차 세계 대전의 상징인 '참호'로 시작된 영화는 블레이크처럼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끼니 걱정은 없겠어서, 혹은 '국가의 부름'에 독려되어 '자원'한 병사들로 넘쳐났다. 1차 대전 당시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자원군 열풍이 불었다. 심지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린치를 당하기도 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젊은 청년들이라면 당연히 군대에 자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렇게 자원한 병사들로 끊임없이 조달된 전장은 우리 영화 <고지전>에서 처럼 한 치의 땅을 빼앗기 위한 연합군과 독일군의 공방으로 이어졌고,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의 말처럼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만 같은 길고 지리한 교전과 상대측의 참호를 빼앗기 위한 일전일퇴가 지속됐다.

<덩케르크>가 마치 내가 전장의 군인이 되어 싸우는 듯한 '체감'을 통해 전쟁의 무시무시함을 알렸다면, <1917>은 제한 시간 내에 장군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달리는 두 병사들이 택한 길 위에서 만난 무수한 시신들과 전쟁의 상흔을 통해 이 전쟁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마구 '희생'하고 있는가,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드러내 보인다. 한때는 싱그러웠을 그들이 철망에 걸리어, 길 곳곳에서 발에 치일 정도로 널브러져, 퉁퉁 불어 물에 둥둥 떠다니며 그곳이 '젊은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터임을 드러내 보인다.  아직도 어머니 농장의 체리를 기억하는 블레이크와 달리, 돌아갈 것조차 두려워하는 스코필드가 공을 세워 받은 훈장을 '엿바꿔' 먹은 듯한 태도에서 전장에서 세운 '공'의 허상을 엿보게 한다. 굳이 대사로 구사하지 않아도 '전쟁'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문명이 그 구성원인 인간을 '대의'라는 이름 하에  어떻게 '낭비'하고 '소모'하고 있는 가를 영화는 런닝 타임 내내 진득하게 화면 가득히 채운다. 


 

병사는 누구를 위하여 달리나
그 발에 채이는 시신들, 비록 퇴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부비 트랩, 혹은 함께 퇴각하지못한 패잔병들의 총구, 그리고 지도조차도 무력해져 버린 상황에서 막연한 도착지, 그곳을 병사들은, 그리고 병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뛴다. 

왜? 시작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의 당위는 내 피붙이와 그 피붙이같은 1600 명(공교롭게도 1차 대전 전사자를 연상케 하는) 대대원들의 목숨이다. 그들이 이 길에 나뒹구는 시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병사들은 달린다. 보급품이나 받을 줄 알고, 동료가 불러서 아무 생각없이 시작된 행보는 목숨을 던진 고행길의 '영웅담'이 되어간다. 

하지만 <1917>은 그들의 헌신을 전쟁하면 빠질 수 없는 '영웅담' 대신 '휴머니즘'이라는 갈래로 끌어들인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하는 행위의 그 '본원'을 짚는 것이다. 막연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라는 추상적 명제 대신, 내 혈육, 그리고 그 혈육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손에 잡힐 듯한 구체적인 이유로 구현된다. 그리고 이는 절박하게 내달렸으나 완수하지 못한  동료의 '의지'마저 사명감으로 부여안으며 절박함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터의 '휴머니즘'이란 결국 죽지 않는 것이다. 병사들을 죽지 않도록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 혈육'이, '우리 병사'들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장군은 퇴각을 명령했고, 중령은 공습을 감행하고자 했고, 병사는 목숨을 던져 달려 내 혈육의, 동료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그 전쟁은 1600만 명 젊은이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서야 끝났다. 



by meditator 2020. 2. 23. 1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