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시대이다. 처음에는 그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사태를 관망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도시에서 시작된 아니 정확하게는 한 종교 단체에서 벌인 '안이한 대처'로 인해 우리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신천지'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한 종교가 이토록 우리 곁에 가까이 그리고 심각할 정도로 깊게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21만이니 24만이니 하더니 이젠 31만까지 정부와 신도수를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아니 사실은 그 조차도 정확한 숫자가 아닐 수 있다는 추측이 나도는 가운데 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단적으로 교주가 죽지않고 영생을 누린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당연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두고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도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그럴 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세간의 속설과 달리, 믿는 부모가 믿지않는 자식을 보지 않겠다고 한다는 '난센스'같은 이야기도 들린다. 내 가족보다 소중한 '종교',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끈 것일까. 

 

 

그런데 최근 압도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신천지만이 아니라, 세월호 때 구원파 등 시대에 따라서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이단의 교리와 맹목적인 믿음들이 우리 사회를 전염병처럼 한바탕씩 휩쓸고 간다. 그 믿음의 시작은 무엇일까? 종교와 인간 관계에 대한 매우 신랄하고도 직설적인,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2013)>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 이 작품은 2019년 ocn을 통해 16부작의 드라마로 재탄생되었다)

영화 속 등장하는 종교는 정말 '사이비'다. 수몰 예정 지역인 마을, 그곳에 나타난 자칭 장로, 그러나 사실은 사기 전과자 최경석은 젊은 목사 성철우를 앞세워 개척 교회를 연다. 보상금을 챙겼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던 공동체가 해체될 것이라는 '사실' 앞에 흔들리는 주민 들에게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이 '마귀의 계략'이라며 우리만의 '기도원'을 만들자며 마을 주민들을 현혹시킨다. 당연히 그가 노리는 건 마을 주민들이 받은 '보상금', 기도원 설립 자금에서 부터, 폐병도 고치는 생명수, 천국가는 티켓까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마을 주민들의 주머니를 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온 김민철의 눈에도 대번에 띈 그런 뻔한 사기 수법임에도 마을 사람들은 최경석의 '수법'에 빠져든다. 영화 <사이비>는 '사기'임에도 '사이비'에 하염없이 사람들이 빠져드는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마을에서 가장 '신실한 부부 '칠성이네', 칠성의 처는 폐병 진단을 받아 자리 보전하고 누워있던 처지, 남편 칠성이 밖으로 도는 동안에도 마을의 구멍 가게를 지키며 늙고 병들어 가던 아내, 뒤늦게 철들어 그 아내에게 미안했던 칠성. 그런 아내가 교회를 나가고 부터 웃는다. 심지어 교회에서 주는 '생명수'를 마시고 나니 폐병도 다 나은 듯이 다닌다. 칠성은 그냥 그것만으로도 교회가, 하느님이 좋았다. 아내가 천당갈 티켓을 놓친다며 그를 닥달하자 미적거리던 보상금을 기꺼이 내놓겠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사이비'
이런 식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약한 부분에 마치 '바이러스'처럼 '종교'란 이름으로 '사이비'는 기생한다. 공동체가 해체될 위기의 마을 사람들의 불안함, 병으로 인한 두려움 등등. 

더구나 안타까운 건 이 '약한 부분'이 대부분 당하는 개인에게 있어 불가항력적인 지점이라는 것이다. 폭군과도 같은 민철의 행동에 영선모는 말끝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다. 폭력적인 가장 아래서 그녀가 도망칠 곳은 그곳 밖에 없다. 

특히나 영선이 종교에 빠져드는 장면을 주목할 만하다. 김민철이 최장로를 찾아 개척 교회의 예배에 들이닥친 날, 그곳에 영선과 영선모가 있었다. 공장을 다니며 어렵게 모은 돈에, 보상금까지, 이제 그 돈으로 대학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영선, 하지만 바라던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그 통장을 들고 날랐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좌절한 영선을 칠성 처는 교회로 이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회에 아버지 김민철이 나타나 최장로가 사기꾼이라며 깽판을 친다. 아버지를 말리던 영선은 아버지에게 맞고, 동네 사람들 모두 서슬퍼런 아버지 민철의 기세 주눅들어 누구 하나 말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철우 목사가 아버지를 말린다. 차라리 자신을 치라며. 

살면서 그 누구하나 자신과 어머니에게 쏟아지는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막아주기는 커녕 말려주지도 않았는데 목사님이 처음으로 자기를 때리는 아버지를 말린다. 심지어 대신 맞는다. 그런 상황만으로도 영선의 마음은 이미 교회에 기운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영선을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간 최장로는 영선에게 돈을 대줄테니 대학을 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영선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아버지에게는 폭력을, 어머니에게선 포기만을 강요당했던 영선이 처음으로 들은 그 말에 눈이 빛난다. 

그리고 그런 영선의 빛나던 눈빛은 영선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끈다. 최경석이 돈을 받고 팔아넘긴 술집에서 영선은 조금만 버티면 대학을 갈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온기'로  버틴다. 아버지가 찾아와 영선을 구해주는 데도 외려 영선은 버틴다. 놔두라고. 심지어 아버지가 데리고 가는 택시에서 뛰어내린다.

그런가 하면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성호 역시 아픈 할머니로 인해 종교적 사이비에 빠져든다. 목사님이 기도만 해주시면 나을 줄 알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반적이라면 당연히 실망을 해야 했을 상황에, 자신이 모자라서 할머니가 천당에 못가실 지도 모른다는 목사의 감언이설에 어수룩한 성호는 목사의 하수인이 되어 칼을 휘두른다. 오로지 믿고 의지해 왔던 할머니, 그를 대신하는 목사를 위해 그의 맹목적인 신념은 그를 범죄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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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앞에서도 맹목적인 믿음 
'사기극'이었던 '반석 꽃동산'은 당연히 파국으로 끝난다. 폐병이 나을 거 같았던 칠성네는 목숨을 거두고, 성호의 할머니도 돌아가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아내의 얼굴이 편하다고, 할머니가 천당에 가셔야 한다고 자신들의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영선의 경우,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는건 아버지다. 자신이 최경석의 농간으로 술집에서 일하는 처지임에도 종교적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던 그녀는 아버지가 깨뜨린 그 믿음의 현실에 세상을 놓아버린다. '아편'과도 같던 '환타지'에서 깨어난 세상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 <사이비>는  해체된 공동체에서 뿔뿔이 흩어져 나온 개인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희생자들을 그럴 듯한 감언이설을 통해 스스로 '사이비'의 늪에 빠져드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영화 속 '사이비'는 사기꾼에서 부터 비롯되었으니 '사기'임이 명확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 그 '사기'를 통해 '종교적 맹목성'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리얼'이다. 국가와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방기된 사람들에게, 공동체라는 기반에서 떨궈져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 그 누군가는 '구제주'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설사 '사기'라도. 그래서 칠성 처의 병색어린 웃음이, 삶의 마지막 동앗줄이라도 되는 듯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영선이의 절규가 처연하다. '사이비'라도 그것에서라도 '위로'를 받아야 하는 그 막다른 삶의 막막함에 먹먹해진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존재, 사람 인이라는 한자의 유래가 서로 기대어 사는 모습이라는 어원으로 비롯된 '공동체'적 습성을 종적 특성으로 가진 인류에게 종교는 인류의 역사만큼 유구한 '위로와 구원의 장치'이다. 그리고 그런 인류의 특성은 늘 '사이비'라는 종교의 갓길을 배태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마련한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사이비'는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 사회 이후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에게 '사이비'는 더더욱 달콤한 금단의 열매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한 산업화,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만큼 급격하게 붕괴되어가는 사회, 가정이라는 시스템에서 방출되어져 나온 개인들이 그들을 현혹시키는 '하느님'의, 혹은 그를 빙자한 그 누군가의 '복음'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집단주의적 문화가 잔존해 있는 우리 사회에서 대규모 사이비 단체의 등장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다. 

차라리 영화 <사이비>에서 처럼 대놓고 '사기'라면 손가락질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럴 듯한 종교적 외피를 지니고  몇 십만의 영향력을 지닌 집단이 되어버린 사이비 종교는 '영생'을 외치고, '장풍'을 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혹세무민'의 민낯은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재산이 털리고, 내 가족과의 연을 끊어도 믿음은 버리지 않는, 하느님의 가호로 병까지 무시할 수 있는 지경이 되어버려 사회적 문제가 될 때서야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마치 전염병처럼 한바탕 우리 사회를 휩쓸어버린 그 사이비는 또 다른 '사이비'에게 바톤을 넘긴 채 무대 뒤로 조금 물러선다. 교주의 영생을 믿듯 민낯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누군가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by meditator 2020. 2. 28. 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