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부터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ppl을 논하는 거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었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높아진 제작비와 군소 제작사, 그리고 열악한 제작 환경은 주어진 제작비만으로 드라마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이른바 협찬이란 이름의 ppl(product placement)은 드라마 제작비의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고, ppl을 적절히 쓰는 것이 작가의 능력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 시청자들조차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홍삼 엑기스를 빨아대거나, 가방을 주렁주렁 매다는 게 다 ppl때문이라는 건 애교처럼 넘어가는 정도에 이르른 것이다. 




ppl 잘 쓰기로 정평이 난 김은숙 작가 
김은숙 작가는 ppl을 잘 쓰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 언제나 쓰는 작품마다, 동시간대 최고의 시청률은 물론, 이른바 '대박' 작품을 늘 생산하고 있는 김 작가에게 자사 작품을 홍보하고 싶은 기업들이 줄을 잇는 것는 따논 당상이요, 스타 작가답게 김은숙 작가는 절묘하게 ppl을 드라마 안에 야무지게 버무려 넣는 것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은숙 작가의 ppl은 이런 식이다. <시그릿 가든>에서 김주원(현빈 분)은 하고많은 회사 중 모 백화점 사장이고, 김주원과 길라임(하지원 분)은 하고많은 장소 중에 제주도의 모 고급 펜션에서 영혼이 바뀐다. 심지어 보건복지부조차 금연 캠페인을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조연들을 통해 할 정도다.  <상속자들>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에스더 여사가 운영하는 회사가 원래 시놉과 다르게 의류 회사로 바뀌었고, 제국고 아이들은 방과 후 수업으로 저마다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골프 웨어'를 빼어입고 골프를 친다.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이별, 재회가 이루어지는 곳은 여주인공이 일하는 프랜차이즈 까페 등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입고, 먹고, 움직이는 동선의 배경 모두가 ppl로 범벅이 된다. 

그런데 김은숙 작가의 2016년 작 <태양의 후예>는 주인공이 군인이다. 심지어 군인인 남자 주인공 유시진(송중기 분)과 의사인 여자 주인공(강모연 분)이 사랑을 이뤄가는 곳은 지진과 분쟁의 중심인 우르크라는 가상의 국가이다. 하지만 분쟁지역이든, 작전 지역이든 ppl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이역만리 서대영에게 온 소포에서는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하도 봐서 정이 들 정도인 홍삼이 등장하는 식이다. 하지만 역시나 준전시 상황의 제한 때문이었을까? 이전 김은숙 작가 드라마에 비해서는 <태양의 후예> ppl은 애교 수준이었다. 

13회 그동안 못다한 ppl 한풀이라도 하듯
하지만 그 애교는 우르크라는 지정학적 한계 때문이었다는 것을 두 주인공이 고국으로 돌아온 13회 드라마는 증명한다. 귀국 후 모처럼 편안하게 연인의 시간을 보내는 두 주인공, 하지만 드라마는 이게 드라마인지, 광고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ppl이 만연한다. 

<태양의 후예>에서 유시진-강모연, 서대영-윤명주 못지 않게 언제 이루어질까 시청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송상현(이승준 분)-하자애(서정연 분) 커플, 이들의 옥상 데이트 아닌 데이트에서 실론에서 왔다는 차가 함께 한다. 어디 이들뿐인가, 13회의 장면, 장면 함께 하는 것들은 즐비하다. 휴가를 나갈 군인들은 피부를 관리해야 한다며 다같이 팩을 두르고, 모처럼 휴가 나온 유시진은 강모연을 만나러 가는 대신 소줏집을 향한다. 그리고 거기에 합류한 송상현은 좋은 안주 다 놔두고 아몬드를 먹는다. 술에 취한 강모연을 데리고 집으로 온 유시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강모연의 어머니와, 그녀가 앉아있는 식탁의 중탕기이다. 무박 삼일을 작정으로 술을 마신 유시진과 역시나 주사를 할 정도로 취했던 강모연이 다음 날 해장으로 먹은 것은 종종 드라마를 통해 등장하는 햄버거요, 유시진-강모연 커플이 서대영-윤명주 커플과 만나 서로 닭살돋는 애정을 과시하는 곳은 가게 상호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커피숍이다. 



그나마 이젠 커피숍이나 햄버거집은 ppl의 여사가 되었다는 듯, 이어진 서대영-윤명주의 키스씬에서 ppl은 화룡점정을 찍는다. 최근 '자동 주행'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모 자동차를 타고 윤명주를 집으로 바래다 주는 서대영, 신중하기 그지없는 그의 성격과 다르게, 윤명주에게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을 밝히기 위해 차를 자동 주행으로 모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자동 주행을 하며 자동차 운전씬의 신천지를 연다. 지금까지의 드라마라면 길 한 가운데를 달리던 차가 급격하게 핸들을 꺽어 급정거를 하고 이어졌던 키스씬을, <태양의 후예> 속 신차는 자동 주행으로 놓은 채 행한다. 

당혹스럽다. 과연 이 장면을 신개념의 키스씬으로 봐야 하는 건지, 제ooo의 놀라운 성능으로 감탄해야 하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스를 위한 자동 주행을 무개념으로 봐야 하는 건지, 다중을 상대로 한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 심지어 해외에서도 다시 한번 한류 붐을 이루었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기사를 내는 이 드라마의 이 장면을 그저 ppl의 신세계로 넘겨야 하는건지. 공중도덕의 무개념으로 봐야 하는건지, 과연 조만간 길거리에서 <태양의 후예>의 이 장면을 뽄따서 자동 주행으로 놓고 키스를 하는 커플이 있다면 이들은 교통 법규 상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머리가 복잡해 지는 순간이다. 

그까이꺼 뭐 머리가 복잡할 게 뭐 있냐고, 그저 드라마로 보면 되는거라고? 허긴 조만간 주인공이 총을 맞고 쓰러지기 5분전, 국빈을 위한 경호에 나선 특전대 상사가 여친과 헤어졌다며 초코바 두 개를 연달아 먹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거리의 자동 주행쯤이야 뭐 그리 대수겠는가 싶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 '목우촌'의 깃발이 휘날리는 ppl 세상에서 안되는 게 뭐 있겠는가. 그런데 13회는 드라마를 본게 아니라 마치 영화 상영 전 주구장창 틀어주는 광고 방송을 본 기분이 드는 건 어째야 하나.  
by meditator 2016. 4. 7. 0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