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성선설, 혹은 성악설, 착하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지만, 그런 '본성'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결국 '인간'을 규정짓는 건 그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선함, 혹은 악함, 그러한 것은 그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해체'되고 '사회적'으로 규정될 뿐이라고 영화 <기생충>을 통해 말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시장 썩은 생선 속에 버려진 아이 '그루누이', 체취가 없는 그를 아이들은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다 못해 죽이려고 까지 했다. '냄새'를 결핍하고 태어난 아이 그루누이, 그가 가진 평생의 소원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냄새'는 그 사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가장 '본원적인' 요소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을 표현해 주는 가장 '본원적인' 요소, '냄새'로 부터 봉준호 감독은 '우리 사회의 경계'를 도출해 낸다. 즉, 어느덧 본원적이 되어버린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 논한다. 

글쓴이가 학교 다니던 시절, 꼭 한 반에 한 명씩 정도 아이들이 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대변하는 건, '냄새', 당시만 해도 한 주에 한번 목욕탕을 가는게 꽤나 '문화적인 행사'였던 시절이었음에도, 유독 그 '아이'들에게선 옆 자리에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오래 씻지 않아 나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냄새는 그 아이의 가난을 상징했다. 그렇게 가장 원초적인 '냄새'로 상징되는 사회적 계급, 그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낙인'으로 부터 '차이'는 시작된다. 체취로 부터 구분되는 계급이라 이보다 더 '계급'으로 고착된 사회를 절묘하게 상징해 내는 '수단'이 있을까. 

 

 


상하로 재편된 설국열차 
우리 사회에 많은 '사업'들이 스쳐지나갔다. 무슨무슨 체인점에서 부터, 갖가지 전문점까지, 다들 시작은 '대박'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제일 '수지'맞는 장사가 '폐점 물품 처리업'이라는 웃픈 현실처럼, 저 '대박' 아이템들은 '한 철 장사'도 채 넘기지 못한 채 무수한 가장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기택(송강호 분)과 근세(박명훈 분)가 공교롭게도 함께 '카스테라'집 사장님이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선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imf였든, 혹은 또 다른 '정리 해고'였든 우리 사회 평범했던 다수의 가정들이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 왔다. 

그렇게 한때 사장이었지만 이제는 무기력한 가장들과 함께 '가정'도 무기력해진다. 아내는 돈을 벌어보지만 그 '푼돈'이 사업을 들어먹은 내리막길의 가정을 구하기는 역부족일 터이다. 충숙(장혜진 분)이 방안 한 가득 늘어놓은 수세미나, 박사장 집 안살림을 도맡하 했던 국문광(이정은 분)이나, 지하를 면치 못하는 충숙네 가정 형편이나, 박사장 집을 나서자 대번에 얼굴에 빛 쟁이들의 흔적을 남긴 국문광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가 그럴 진대 아이들이라고. 우리 사회 '교육'이 곧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건 이젠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군대 까지 다녀온 아들이 여전히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하고 있고, 딸내미가 그나마 다니던 학원조차 쉬어야 하는 건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을 번듯하게 밀어부칠 부모의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순박'하다. 아버지가 방구석에 등짝을 보이고 무사태평 누워있고, 엄마가 기껏 수세미나 짜고 있는데도, 여전히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사하다. 그러나 그 '순박하고도 여전한 가족'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허망한 지 드러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체되지 않는 가족을 통해 이후 그들이 뛰어든 범죄가 그들의 타고난 '범죄'적 성향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았음을 변명한다. 

 

 

가난한 지하 가족에게 찾아든 돌멩이, 아니 행운, 아들 기우(최우식 분)의 친구 민혁(박서준 분)은 자신이 교환 학생을 다녀오는 동안 가장 믿을만한(?) 친구로 대학도 가지 못한 기우를 점찍었다. 그렇게 해서 기우가 문지방을 넘은 박사장네, 어리숙한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 분)를 다혜(현승민 분)의 맥 한번 짚는 것으로 설득시킨 기우의 다음은 인터넷으로 아동 심리를 마스터한 딸 기정(박소담 분)이었고, 그 뒤를 이어 기택, 그리고 결국 충숙까지 온가족이 '완전 취업'의 행운을 얻었다. 덕분에 가족은 '필라이트'에서 '아사히'로 격이 달라진다. 모두가 실직이었던 가족이 그저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얻은 일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실직이다. 기우로 부터 시작하여 드디어 충숙까지 박사장 네로 진입에 성공한 기택네, 그리고 그런 기택네로 인해 박사장 네서 밀려난 국문광네 부부의 비밀, 지상과 지하를 오르내리는 이 두 가족의 엇갈린 희비극, 그리고 그런 두 가족의 '사기'에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안락한 삶에 천착해 있는 박사장네, 단지 그들에게 경계를 넘나드는 저들의 냄새가 불편할 뿐인 그 지상과 지하의 위계는 흡사, 상하로 재편된 '설국열차'와도 같다.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던 칸은 우리 사회 사람들을 볼모로 사로잡은  '집'이라는 '칸'을 통해 적나라하게 재편된다. 

 

 

계급이 존재를 만든다
하지만 기택네 가족의 행운은 안전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지상의 박사장네로 '안착'한듯한 가족의 흔적은 '냄새'로 남았고, 그들의 완전 범죄는 비오는 날 찾아든 국문광으로 인해 흔들린다. 

아니, 애초에 기택네도, 문광네도 시작이 '사기'였다. 행운의 돌때문이었을까, 기우의 학력 위조부터 몹시도 순탄했다. 서울대 문서 위조학과가 있으면 가야 겠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아버지, 범법 행위를 하는 자식들을 자랑스러이 말하는 이 가장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니 지하에 사는 그들의 궁상이 너무도 옹색해 이 가족의 범법 사실을 잊게 만든다. 아니, 사기를 치고도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그들의 철면피스러움이 그들의 '죄'를 눙친다. 

문광네라고 다를까. 기택처럼 '사업'을 한답시고 다 들어먹고 이전 주인이 만들고 숨긴 반공호 지하실에 숨어든 문광의 남편 근세, 빛을 등진 그 생활에 어느덧 삶의 총기마저 잃고, 지하의 생활에 만족하다 못해 모르스 부호로 박사장에게 헌사를 남기는 그는 자본주의의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가 되는 현상)이다. 

 

 

그들은 '박사장'네에 기생한다. 제 아무리 온 가족이 손가락을 빨 정도로 옹색해도, 빚쟁이에 시달려 갈 곳이 없어져도 기택네와 문광네가 저지른 짓은 사기다. 그런데 그 '사기'에 의탁하여 '박사장'네 가정의 평정은 유지된다. 가르치던 과외 선생이 어학 연수를 가도 딸 다혜의 과외는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정신없는 아들의 돌출 행동은 잘 다스려졌다. 요리는 물론 살림이라고는 젬병인 아내의 살림살이 역시 사람이 바뀌어도 빈틈없이 메워졌다. 물 한 잔을 들어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만큼 박사장을 만족시키며 사장님을 모시는 수행기사 역시 냄새의 경계를 빼놓고는 무리가 없다. 백수 가족을 하루 아침에 온 가족 취업으로 만든 '문서 위조'라는 통과 의례만 빼놓는다면 '사기'의 실체는 애초에 논할 바가 못되고 만다. 

기생충 박사로 알려진 허민 박사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게 바로 기생충의 마음이라 정의내린다. 인간을 숙주로 살아가는 기생충, 허민 박사는 길이 10m가 되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든 기생충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의 장 속에만 1000 종류가 넘는 균이 있다는 사실만 봐도, '공존'의 현실은 역력하다. 나아가, 인류 그 자체도 지구에 붙어 사는 기생충에 불과하다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영화 속 상하의 설국 열차는 적나라한 우리 사회 공존의 현실일 뿐이다. 다만 그 공존이 박사장네가 인간이고, '꼬리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람'인 대신 '기생충'이 되어야 한다는, <설국 열차>처럼 뜨거운 '혁명'의 기치가 아니라, 웃게 되지만 어쩐지 돌아서니 먹먹해지는 '블랙 코미디'이다.

멀리서 보면 웃기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슬플 수 밖에 없는 현실은 경계를 타고넘나드는 냄새처럼, 결국 그 '경계'의 선을 타넘나들다 '파국'을 맞이한다. 경계라지만 기생충과 인간의 경계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경계인 것을, 인간과 기생충일 때 '익스큐즈'되던 것들이, '사람'으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사람과 사람으로 섞여지는 순간, '아비규환'의 결과를 낳는다. 결국은 사람과 사람으로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능했지만 순박했던, 그러나 자신과 가족의 '기생충' 됨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기택은 도피인지, 유배인지, 혹은 격리인지 모를 선택을 한다. 먼 훗날 자신이 돈을 벌어 그 집을 사서 아버지를 지하에서 올라오도록 하겠다고 기우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서 마음을 먹는다. 잔혹 동화로 끝난 <기생충>, 혁명이 사라진 <설국열차>, 더 고착화된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사회의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9. 6. 7.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