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편의 노희경표 드라마가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까지와의 노희경표 드라마와 달리, 언제나 그의 드라마라면 만나게 되던 배종옥, 김규철 등 익숙한 조연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전히, <괜찮아 사랑이야>를 노희경표 드라마라고 정의내리게 하는 걸까?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흰머리의 사내(양익준 분)가 교도소를 나가게 되었다고 동료 죄수들과 환호작약한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어, 시끌벅적한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파티, 디제잉을 하는 인기 추리 소설가 장재열(조인성 분)을 향해 그의 생일 케익이 등장한다. 그 생일 케익을 보고 장재열은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분위기에 맞추어 촛불을 끈다. 그 순간, 등장한 조금 전 교도소의 흰 머리 사내, 다짜고짜 조인성의 얼굴을 가격하고, 집어든 포크로 그를 찌른다.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 듯한 그 사내를 제압하기 위해 너도 나도 덤벼들고, 그 소란 속에서 쓰러지던 조인성, 미소를 띠며, '또라이같은 새끼'라며 나직이 읍조린다. 바로 이 장면,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역설적으로 태연한 척, 그 상황에 냉소적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주인공, 바로 그것이 이른바 '노희경 표' 드라마라는 도장 '꾹'의 상황이다. 그렇게, <괜찮아 사랑이야>는 노희경의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음을 알린다. 

거침없이 '섹스'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혼자 '자위'를 한 듯한 상황이 번연히 보이고, 자신의 문제가 성행위를 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등, 공중파에서 대놓고 '성인 드라마'임을 인증하는 각종 장치들이 등장하는 것도, 가식 따위는 던져 버리고 어른이라면 이 정도는 하고 살지 않아 라는 듯한 극적 요소들 역시 예의 노희경 식 직설이다. 낯뜨거운 동화 따위는 던져 버리고, 어른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겠다는 각오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제목의 '사랑지상주의'적인 정의와 달리 온통 미친 놈 투성이이다. 다짜고짜 교도소를 나오자 마자 동생을 포크로 찍어대는 형에서 부터, 식구들이 돌아가먀 뚜드려 패는데도 저항 한 번 하지 않는 성전환 수술 환자, 그리고  클럽에서 자신의 주치의를 날라차기하고 택시를 뺏어 광란의 질주를 하는 정신분열증 환자까지, 세상은 온통 미쳐돌아가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런 '미친 놈들'이 주인공이 되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소설을 쓰는 추리 소설가 장재열과, 그런 '미친 놈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지해수(공효진 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진; 스포츠 경향)

그런데 가만히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누가 누구를 미친 놈이라 할 만 한가 라는 생각이 든다. 형에게 포크에 찔린 지 몇 개월 후, 샤워를 하고 수건을 꺼내 닦고 욕실을 나오는 장재열, 그의 욕실은 하다못해 수건 색깔에 이르기까지 극단적 색감의 대비로 모던하지만, 정작 그가 그런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편집증'이라 정의내리기에 손색이 없다. 
지해수와 그 주변도 그리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스스로 관계 부적응이라 정의내리는 지해수는 그렇다 쳐도, 그녀의 어깨에 다정스레 팔을 두르면서도 부하 직원과 키쓰를 나누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애인도 또 다른 의미의 '미친 놈'이요, 그녀와 함께 살게 되는 조동민 역시 전처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정신과 상담 전력을 가진 정신과 의사요, 또 다른 동거자 박수광의 '뚜렛 증후군' 역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몇 분, 몇 십 분 늦은 채, 혹은 빠르게 돌아가는 시계처럼, 등장인물 모두가, 어딘가 정상의 궤도와는 비껴있는 사람들뿐, 또 하나의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이처럼, 정신병리학적 분석이 필요한 다수의 등장인물이 1회부터 번다하게 벌려진 <괜찮아 사랑이야>는 '정신병리학적'인 진단이 필요한 현대인들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런 상징적인 드라마적 장치는 동시에 <괜찮아 사랑이야>의 딜레마가 될 것임을 1회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노희경의 전작, <그들이 사는 세상>이 방송가 사람들을 통해, 방송국이라는 특수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통해, 현대인의 보편적 삶의 단편을 길어올리려고 했던 노력이, 이제 <괜찮아 사랑이야>을 통해 '정신병리학적'으로 접근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분석해 내려는 시도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러기에, <괜찮아 사랑이야>를 호의적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지점, 과중한 경쟁과 삶의 성공을 온전히 개인적 존재로서 부담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드러나는 부작용인 정신병리학적 증후군에 대한 '동의'나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웬 미친 놈들이야!'라는 반응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다분한 드라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저 그들이 사는 세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이 보여질 수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자신을 공격한 정신 분열증 환자를 대신 나서서 제압하는 장재열을 오히려 병을 들어 머리를 깨면서 말리는 지해수, 그런 환자를 자신이 탈골이 되는 아픔을 참으면서 끝내 놓치지 않고 무사히 병원으로 돌려보냈던 지해수, 극악한 범죄적 성향에 대해 끝내, 그것을 참아내는 인간의 보편적 성선설을 주장하는 지해수의 '긍정성'을 통해, 이미 1회에서, 드라마는 이 드라마가 '정신병리학적' 고통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치유'의 그 무엇을 제시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아니, 드라마는 온통 미쳐 돌아가는데, 역설적으로 제목은 '괜찮아 사랑이야'라며 다독인다. 

과연, 야심차게 시작한 노희경의 치유적 시도가 과연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런지, 아니면 또 한편의 '웰 메이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될런지, 첫 회, 동시간대 3위는 어쩐지 불안한 출발선이다. 


by meditator 2014. 7. 24. 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