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소리소문도 없이 종영한 <빠스껫볼>의 한 장면,

돈이 없어 학교에서도 쫓겨난 강산이 결국 흘러든 곳은 거리의 농구장, 그곳은 말이 농구장이지, 돈 놓고 돈을 먹는 투전판이나 진배없는, 골대에 골을 넣기 위해서는 폭력이든, 속임수든 그 어느 것이라도 가능한 싸움판이었다. 그곳에서 강산은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울분을, 자신의 덩치보다 한참 큰 상대 선수를 향해 그저 자신이 가진 장기 농구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거리에서의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에게 돈을 걸었다가 가진 돈을 다 잃고, 그것도 모자라 농구판 모리배에게 두들겨 맞고 쓰러진 사람과, 그런 광경을 보고 질타하는 어머니, 그리고 진짜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 한 여인에 대한 사랑 등이 결국 그로 하여금 편법으로 농구를 하고, 돈을 벌던 거리의 농구판을 떠나게 만든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사라지긴 했지만, <빠스껫볼>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식민지 시대의 건강한 역사 의식과 실존적 삶을 살아내려 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보다 1년 전에 방영되었던 kbs2의 <각시탈> 역시 다르지 않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역사적 주체성과, 실존적 자아의 성취를 그려내는데 진력했다. 그리고 이제 2014년에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감격시대>의 위치? 섣부른 판단일 지 모르겠지만, 2회까지로 보건대, 이 드라마의 위치는 앞선 두 드라마의 정반대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듯하다. 

<빠스껫볼>이든, <각시탈>이든 그리고, <감격시대>이든 모두 소년들의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든, 혹은 세상 사람이라도 자신의 삶의 굴레에 휘말려 돌아가 미처 가족들을 돌볼 처지에 놓이지 못한다. 반면 소년들에겐 아버지가 미처 챙겨내지 못한 가족이라는 짐이 지워져 있다. <빠스껫볼>에서는 일본인 집에서 떨어진 꽃잎 조차도 손으로 집어 치워야 하는 수모를 겪으며 일하는 어머니, <각시탈>에서는 일제의 고문으로 바보가 된 형에,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어머니, 그리고 <감격시대>에서는 병든 동생까지, 어린 나이에 소년들은 가장의 몫을 다하느라 버겁다. 

아마도 힘들기로 치자면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를 동생을 둔 <감격 시대>의 정태(곽동연 분)가 최고일 것이다. 정태는 1월16일 방영분 마지막 장면, 동생을 위해 철교 위로 올라간다. <빠스껫볼>과 <각시탈>의 주인공이 식민지 시대의 지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데 반해, <감격시대>의 주인공은, 그의 강고한 실존적 환경이 그를 정반대의 길로 빠져들게 만든다. 


감격시대 원작

이제 2회에 이르른 <감격시대>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결국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이다. <각시탈>에서 친구에게 배운 검법이 일제를 향한 단죄의 철검으로 변모한 반면, <감격시대> 정태가 가진 주먹은 그를 폭력의 세계로 인도한다. 

인력거 사납금을 채우지 못해 사무실에서 도꾸(엄태구 분)에게 맞던 짱똘(김동희 분)을 구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싸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복을 하기 위한 도꾸의 패거리에게 몰매를 맞던 정태를 풍차(조달환 분)가 구해주고, 다시  싸움은 풍차가 속한 도비패와 도꾸가 속한 불곰패거리의 싸움으로 번질 조짐이 보인다. 결코 한번 이기고 져서 끝날 일이 아니다. 마치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동심원을 이루며 물 전체의 파장으로 번져가듯, 에스컬레이션 된다. 그리고 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정태는 휘말려 갈 것이다. 그럴 듯한 캐릭터의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이들은 정태가 보다 본격적인 싸움꾼이 되어가는데 조력자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정태가 좋은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실 드라마가 노리는 것은 싸움꾼으로 멋지게 등극하는 낭만적인(?) 주먹 세계일 뿐이다. 

물론 폭력의 이유는 많다. 아픈 동생을 위해, 몰매를 맞는 친구를 위해, 괴롭힘을 당하는 여자를 위해, 고뿔조차도 고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의리를 위해, 자존심을 위해,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감격시대>의 논리는 폭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덕분에 드라마는 화려한 몸 싸움의 향연을 방영 시간에 몇 번씩 등장시켜 주지만 그렇다고, 화법이 달라지지 않는다. 싸움은 불가피했다고, 폭력의 세계는 운명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되물을 수 밖에 없다. 1985년 군사 정권 시대에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던 주먹들의 이야기가 2014년에 다시 일제 시대를 산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둔갑하여 드라마로 제작되는가 라고. 더구나, 무엇이 어떻든 동시대의 고통스런 실존적 삶에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했던 드라마, <빠스껫볼>, <각시탈>이 있었기에, 주먹으로 세상을 살아보려 했던 이야기의 논리적 불가피성은 취약할 수 밖에 없다. 150억이나 들여서 만든 폭력적 서사의 허황함이다. 


by meditator 2014. 1. 17.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