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검 형사 3부 검사 황시목(조승우 분)과 용산서 강력계 한여진 경위(배두나 분)는 검찰에게 뇌물을 주던 혐의로 수사받던 박무성의 집에서 조우하게 된 두 사람, 감정을 느끼지 못해 법전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는 검사가 천직이라 여겼지만 정작 검찰 내부에서 왕따가 되었던 황시목, 반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한여진 경위,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사건'을 대함에 있어 '원칙'을 중시하는데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동질적이다. <비밀의 숲> 시즌 1에서 그런 두 사람이 검찰 스폰서 살인 사건을 위한 특임 팀에서 만나 '공조' 수사의 팀웍을 자랑했다.
검사 스폰서 사건에서 부터 시작하여 결국 거대한 검찰 내부 비리 사건이 된 사건, 그 끝에서 상사이자 그를 이끌어 주었던 이창준 검사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사건에서 흔들리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밝혔지만 그 대가로 황시목은 통영지청으로 발령을 받고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검찰 내부 봐주기 수사를 운운하는 기사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그가 대검찰청 형사법제단에 발탁되었다. 모양새는 검찰청 발탁이지만 내용상 경찰 측에서 그를 원했다는 것이었다.
검찰과 경찰, 서로 다른 입장이 되어 만난 두 사람 대검찰청 형사법 제단 소속이 된 황시목은 검경 수사권 조정 위원회에서 경찰청 구조혁신단 주임으로 일하고 있던 경감으로 승진한 한여진을 조우하게 된다. 검찰과 경찰, 서로 자신들의 보다 많은 권익을 얻어내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의 장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 한때는 '공조 파트너'였지만 이젠 '견원지만'의 '말'노릇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법사위원장 아들과 관련된 사건, 이어 세곡 지구대 자살 사건을 통해 검경은 수사권 조정, 그 중에서도 특히 영장 청구권을 둘러싸고 '장군 멍군'의 파워 게임의 양상을 보인다.
<비밀의 숲> 시즌 1이 검찰 스폰서였던 박무성의 죽음이 검찰 내부 비리의 도화선이 되었듯이, <비밀의 숲> 시즌2는 통영 바닷가에서 젊은이들의 애꿏은 죽음으로 막을 열었다. 박무성의 죽음에서 황시목과 한여진이 현장에서 조우했듯이, 통영 사건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투철한 진실을 향한 사명감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저 우발적인 사고일 수 있었던 사건은 황시목과 한여진의 자발적 공조로 인해 그저 스쳐지나갈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장난과도 같은 고의가 발생시킨 억울한 죽음이었음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통영 사건을 통해 드라마는 황시목과 한여진의 '진정성'을 다시 한번 밝힌다. 그리고 검경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서로의 이권을 향해 장기판의 말이 될 듯했던 이 두 사람은 그 과정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뜻밖의 '진실'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검찰'이라는 울타리 안에 황시목을 가두려는 검찰 측 우태하(최무성 분)와 김사현(김영재 분)의 '패거리 문화'에 엄격하게 선을 그은 황시목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법사위원장 아들 사건에 있어 우태하가 맡은 역할에 의심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상관인 최빛(전혜진 분) 구조혁신단장이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감으로 한여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곡 지구대와 관련하여 경찰 내부의 부정한 뒷거래에 한여진은 두 눈을 질끈 감을 수 없다.
다시 손잡은 황시목과 한여진 그렇게 서로 반대편에 섰지만 자신의 편에서 '몽니'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던 두 사람, 바로 그 때 서동재(이준혁 분) 검사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얄밉도록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하지만 그만큼 시즌 1에 걸쳐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서동재의 실종에 두 사람은 통영 사건에 이어 다시 한번 현장에서 만난다.
거기에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우태하에게 접근했던 서동재, 반면 그 서동재가 조사하려고 했던 의정부 세곡 지구대 사건과 관련된 최빛, 그런 연관성으로 인해 검찰도, 경찰도 이 사건에서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 처하기를 원치 않고 그런 '이해 관계'는 이제 황시목과 한여진의 공조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윗선의 이해관계와 달리, 황시목과 한여진의 방향은 분명하다. 시즌 1에서 그렇듯이 '진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황시목을 아끼고 안타까워하는 강원철 동부지검장은 황시목을 불러 나이도 들었는데 왜 그리 피곤하게 사느냐고 핀잔섞인 훈수를 두었지만 황시목은 요동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수사를 맡긴 최빛에게 이제 더는 수사권 조정이라는 대의에 진실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두 사람의 공조가 결국 시즌 1에서 이창준의 죽음에 이르렀듯이 이제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명목을 두고 만난 경찰과 검찰, 우태하와 최빛, 그 누구에게도 황시목과 한여진의 공조가 '자비'를 베풀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황시목과 한여진이 집단의 이해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실을 향해 거침없에 내지를 때 비로소 <비밀의 숲>은 그 본류의 재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구나 서동재는 마치 부비트랩처럼 통영 사건 생존자에서부터, 세곡 지구대 관련자, 그리고 한조 그룹에 이르기까지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다. <비밀의 숲> 시즌 2는 이제 서동재의 실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숲'을 향한 걸음을 본격적으로 내딛은 듯하다. 시청자들을 숨도 못쉬게 집중시켰던 스릴러로서의 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연 황시목과 한여진이 드러낼 숲, 그 곳의 진실은 무엇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7월 mbc와 영화감독조합(DGK), OTT 플랫폼 웨이브(WAVVE), 영화 제작사 수필림이 함께 한국판 오리지널 앤솔로지 시리즈, SF8월 mbc와 영화감독조합(DGK), OTT 플랫폼 웨이브(WAVVE), 영화 제작사 수필림이 함께 한국판 오리지널 앤솔로지 시리즈, SF8을 웨이브를 통해 선공개했다.
민규동 감독의 <간호중>, 김의석 감독의 <인간 증명>, 노덕 감독의 <만신>, 안국진 감독의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수 없다>, 오기환 감독의 <증강 콩깍지>, 이윤정 감독의 <우주인 조안>, 장철수 감독의 <하얀 까마귀>, 한가람 감독의 <블링크> 등 8 작품은 이어서 8월 14일 부터 매주 금요일 MBC를 통해 방영 중이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기술 발전을 통해 완전한 사회를 꿈꾸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내세운 SF8은 미래를 배경으로 인공 지능(AI), 증강 현실(AR), 로봇, 게임, 판타지, 호러, 초능력, 재난 등의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누구를 돌볼 것인가? - 간병 로봇의 딜레마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민규동 감독의 <간호중>이다. 김혜진 작가의 SF소설집 <깃털>에 수록된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의 배경은 2046년, 여전히 아픈 사람과 그 아픈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 있는 시대이다.
'사람이 힘든 일에서 해방되고 그 일을 로봇이 대신한다면 사람과 로봇 중 누가 성장할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김혜진 작가의 원작 속 TRS는 간호중이 되어 낙원 요양 병원에서 10년 째 뇌사 상태에 빠진 연정인의 어머니(문숙 분)를 돌보고 있다.
극중 간호중은 환자의 딸인 연정인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로봇이지만 환자를 돌보야 하는 가족의 얼굴을 한 이 간병 로봇은 그래서 환자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 가족에게는 친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인쇄소를 운영하며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연정인은 간호중을 '호중'이라 부르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처음 어머니가 병상에 누웠을 때만 해도 생일을 챙기며 살갑게 어머니를 대하던 연정인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 이즈음 피폐함이 극에 달한다. 그리고 그런 정인을 돌봄 1호 정인의 어머니에 이어, 돌봄 2호라고 생각(?)한 간병 로봇 간호중에게 정인의 상태는 '딜레마'가 되어가고 있다.
간병 로봇이라고 다같은 간병 로봇이 아니다. 2046년이 되어도 여전히 가진 것에 의해 삶의 질이 나뉘는 세상, 정인의 옆방 치매 남편을 간병하기 위해 없는 돈에 보급형 간병 로봇을 들였지만 정작 남편은 차도가 없고, 간병 로봇마저 제 멋대로이자 보호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 정인은 더더욱 좌절하고, 그 역시 극단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인쇄소에서 줄을 매달고 의자에 올라가 발버둥을 치다 떨어진 순간 울린 전화벨, 달려온 병원에서 영안실에 누운 어머니를 보고 정인은 간호중을 끌어안고 '덕분에 어머니가 편히 가셨다'며 고마움을 전한다. 하지만 그도 잠시, 병원 관계자가 보여준 영상을 보고 온 정인은 돌변, 자신의 얼굴을 한 간병 로봇 간호중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분노를 폭발한다. 그리고 정인이 가하는 분노의 폭력 끝에 '간호중'은 파괴되고 만다.
로봇이 던진 질문, '인간다움'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46년, 기술은 간병 로봇을 등장시킬 정도로 발전했지만, 사람살이는 그다지 변화되지 않았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병도, 고통도 덜어지지는 않았다. 변화되지 않은 삶과 관계 속에 더해진 '로봇'은 과연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갈까?
10년 째 어머니를 간병하며, 로봇 스스로 그 어머니의 딸조차 '돌보'고 있는 상황은 이미 '메뉴얼'된 기능 이상의 '진화'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로봇은 돌봄의 질을 위해 스스로 '선택'의 질문을 던진다. 로봇을 찾아 '전도'를 했던 수녀님에게 전화를 건 로봇은 '한 사람이 죽어 다른 한 사람이 산다면?'이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드린다. 생명은 주님의 뜻이니 로봇 주제에 함부로 간여하지 말라는 수녀님의 경고에, 외려 간호중은 되묻는다.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을 생명 유지 장치를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인가? 라고. 그 죽었어야 할 사람 때문에 생기롭게 살 사람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면 그것도 하느님의 뜻이냐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끝나지 않고 있는 존엄사에 대한 질문이 간호중을 통해 던져진다. 또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젊은 정인을 구하기 위해, 정인 어머니의 생명을 끊는 간호중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인간적인' 선택에 대해 질문이 던져진다.
드라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정인을 찾은 수녀님,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수 있냐며 간호중을 파괴해 버렸던 정인은 이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결국 한 생명을 살리겠다는 간호중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던가. 그리고 수녀님은 다시 간호중을 찾아나선다. 간병 로봇을 만들었던 본사까지 걸음한 수녀님은 그곳에서 메뉴얼된 그 이상의 '작동'을 스스로 결정한 간호중을 '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만난 간호중, 아니, TRS- 70912 B는 자신에게 차오르는 무엇을 말하며 이게 고통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제 수녀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말한다. 상황이 역전되어 수녀님이 예전 간호중이 놓인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예전에 간호중은 물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으로 만들었다면 자신도 사랑으로 만들었냐고. 그때 수녀님은 '자네는 로봇이잖아!'라고 일갈했다. 그런 수녀님의 단호한 거절에 간호중은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다며 어머니의 목숨을 거두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위해 기꺼이 기도해 주겠다는 수녀님에게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목숨을 거두어 달라 호소한다. 살아서 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스럽게 살아가느니 죽음을 택하고 싶다는 간호중의 애절한 간청에 수녀님은 혼란스럽지만 규정을 넘어설 수 없다. 입장이 바뀌어 당시 간호중과 같은 입장에 처한 수녀님은 간호중이 '사랑'으로 선택한 그 결정과 달리 세상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선뜻 나설 수 없다. 그 때 간호중이 던진 한 마디는, '위선자',
같은 상황에 놓인 로봇과 인간의 다른 선택, 묘하게도 영화를 보고나면 어쩐지 로봇이 더 인간보다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위선'적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수녀님'이야말로 결국 자신들이 만든 도덕과 규정과 규칙 속에 갇혀 '딜레마'에 빠진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이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람과 로봇 중 누가 성장했을까? 라는 원작자의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인간적 고뇌의 상황에 던져진 로봇, 로봇일지라도 그 딜레마를 통해 성장하게 되었다는 건, 인간이 포기한 상황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의 진화가 주는 묵시록적인 경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SF임에도 되돌아 오는 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 그 아픔과 고뇌라는 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태풍의 한 가운데에 제주에 발이 묶였다. 남국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야자수들이 90도로 꺾지며 바람을 견디고, 에머랄드 빛이었던 파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칠고 검은 물결로 다그쳤다. 한 발자국만 헐하게 내딛어도 휘청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시간, 결국 마이삭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히고 물러났다. 3일 아침 마이삭이 휩쓸고 간 바닷가, 찢어진 해면조각들과 바닷말 찌꺼기들 사이로 작은 게들과 벌레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하시는 분이 자칭 '원주민'이셨다. 그저 얹어놓기만 했는데 태풍에도 끄덕없는 제주도 돌담을 자랑스레 이야기하시는 끝에 그 돌과 같은 제주도민들의 '의지력'을 말씀하시고는, 그 '의지'의 제주도민들이 제주 바다를 살리기 위해 들인 공으로 말씀을 돌리셨다. 태풍이 지나간 바다가 깨끗한 이유, 쓰레기나 플라스틱 조각하나 나뒹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제주도민들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50년 바닷속에는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을 거라고 학자들이 경고하는 시대, 그럼에도 '바다'를 청정해역으로 지켜낼 수 있는 건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바다'와 '사람'에 대해 kbs1 <다큐 인사이트>는 8월 20일과 27일에 걸쳐 <눈물, 바다> 2부작을 방영했다.
엘니뇨와 남획이 불러온 재앙 페루 산후안 마르코나 해역, 남극에서 흘러온 홈볼트 해류가 흐르는 이곳에는 막대한 식물성 플랑크톤이 있다. 그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기 위해 멸치 떼가 몰려들고, 그 멸치 떼를 따라 2m나 되는 오징어 떼가 지천인 곳이다. 3억 마리의 새와 180여 종의 바다 사자가 사는 곳, 페루 수산업의 중심이자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1997~99녀느 20009년에서 2010년, 2016년에서 2017년 세 차례에 걸친 엘니료로 해수 온도가 5도가 상승했다. 거기에 남획과 오염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닥쳤다. 1990년 조개류 어업이 붕괴했다. 2000년에는 다른 어업도 할 수 없게되며 산후안 마르코나 마을이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20여년간 마을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살길을 모색했다. 매일 매일 쓰레기를 치웠다. 어업 공동체를 만들어 공동으로 해안을 관리했다. 그러자 3년 전부터 붉은 성게가 돌아왔다. 성게가 돌아오자 물고기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일정 크기, 일정량 이상은 잡지 않는다. 휴식기도 엄격하기 지킨다. 이곳만이 아니다. 오래된 기구에 의지하여 잠업을 하는 페루 북쪽 안콘도, 멸치 산업의 메카 엘 카요도 후손 대대로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스스로 바다를 지켜낸다.
홍도 바다에 홍어가 없다? 우리나라의 홍도는 어떨까? 대대로 홍어 잡이를 해온 이곳은 홍어를 잡아 일년 생계를 꾸려내왔다. 홍도 사람들은 특유의 주낙( 비교적 굵은 한 가닥의 기다란 줄에 여러 가닥의 가는 줄을 달고, 그 끝에 낚시를 연결) 방식으로 낚시를 해왔는데 70년대 중국에서 온 쌍글이 어선이 서해를 까맣게 덮으며 우리 어장의 물고기를 싺쓸어 가고 거기에 수온이 상승과 바다 오염이 겹치며 홍어 잡이의 시절은 막을 내리는 듯 했다.
90년대 20여척쯤 되던 홍어잡이 배는 적자가 되자 2000 년대에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다 이제 6척이 남았다. 24시간 잠을 안자고 뿌리고 끌어올리는 주낙은 고된 노동의 현장이다. 하지만 그 현장에서 끌러올린 건 폐그물, 포대 이기 십상이다. 그래도 금어기를 만들고 , 어획량을 정해 바다를 보존하기 시작하자 2,3년 전부터 다시 홍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서도,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도 지구 녹지의 9% 인간의 보물 창고라 일컬어지는 브라질의 맹그로브 숲, 강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 정글에서 사람들은 맹그로브게를 잡아 살아왔다. 타이어로 만든 신발에 여러 겹 장갑을 끼고 날카로운 나무 뿌리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하는 '극한 어업',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암컷을 잡지 않는다. 번식을 위해서이다. 7센티 이상만 잡는다.
'더 많이 보호할 수록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맹그로브 숲의 사람들은 깨달았다. 수많은 동물들의 집,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이곳 맹그로브 숲, 그 숲이 파괴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가난한 어부지만 동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법으로 정해진 상한선을 지킨다. 자신의 아이들이 계속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구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 맹그로브 숲을 지키기 위해서.
인도네시아 와카토비의 바자우 족은 바다 집시들이다. 다이너마이트와 청산가리를 이용하여 고기를 남획해 왔다. 그 '잔인한 남획'의 결과는 처참했다. 산호초가 죽어갔다. 물고기가 사라졌다. 필리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알보알 앞바다의 정어리 떼가 사라졌다.
남획을 금지하고 무자비한 다이너마이트와 청산가리 사용을 금지하자 산호초가 살아났다. 정어리 떼가 돌아왔다. 그러자 멸종 위기의 푸른 바다 거북과 같은 다른 해양 생물들도 돌아왔다.
낚시줄, 작살총, 그물만이 허용된 인도네시아의 앞바다, 정부의 계도에 따라 어부들은 전통적인 줄낚 등을 이용하여 비록 몇 마리는 되지 않지만 비싼 물고기를 잡는다. 살벌한 전쟁터와 같던 어업이 이젠 생명의 근원인 바다에서 노니는 놀이와 같은 사냥이 되었다. 전보다 많이 잡지 못하지만 고부가가치의 고기들은 어부들의 끼니와 벌이를 보장하게 되었다.
바다가 변하고 있다. 수온은 올랐고 물고기들은 더 찬 바다를 향해 이동한다. 과도한 어획 등으로 지구촌 대다수의 어장에서 물고기의 수가 줄었다. 거기에 플라스틱 등의 쓰레기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현실은 변했지만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해 정부와 어부들은 이제 다시 노력하고 있다. 비록 조금 덜 가져가고, 조금은 느리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다시 산초호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물고기들이 돌아오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제주 바다처럼, 사람들의 노력만이 우리의 바다를 지킬 수 있다.
지난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획기적인 영화 한 편을 들고 등장했다. 올해 8월 재개봉한 <인셉션>이다. 누군가의 꿈에 잠입하여 꿈꾸는 자의 무의식에 정보를 심고, 그를 통해 현실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가는 '팽이'로 상징되는 '토템'과, 꿈의 상황을 상징하는 엿가락처럼 휜 도시의 영상으로 기억된다. 프로이트를 통해 현실 세계에 문을 두드린 '무의식'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영화적 상상력의 신선한 영역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학적 성과'를 영화적 서사의 주요한 장치로 활용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셉션>에 이어 2014년 170분이라는 긴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우주 과학'의 붐을 일으킨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비행사 쿠퍼는 환경 오염으로 인해 멸망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하여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답을 구한다.
그리고 이제 2020년 과연 이번에는 어떤 '과학적 성취'를 들고 올 것인가 하는 기대에 걸맞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과연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하며 관객들을 '아노미' 상태로 빠뜨릴 정도로 '엔트로피'를 비롯하여, 평행 우주 등등 최신 과학 이론들이 진수성찬을 이룬다.
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과한 이론적 나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당부는 명쾌하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과연 무엇을 느끼라는 것일까? 여기서 뜬금없지만 오랫동안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 영국 SF시리즈 <닥터 후>가 떠오른다. 닥터 후는 이제는 사라진 미지의 별에서 온 외계인이다.
겉보기에 전화박스로 보이는 우주선을 타고 외계와 지구,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 드라마에서는 <테넷>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과학적 이론들이 등장한다. 평행 우주 정도는 당연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SF적 장치를 관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살던 외계의 멸망을 지켜본 닥터 후가 지구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에 개입하며 지구의 불행을 막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먼저다' 마찬가지로 <테넷> 역시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건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종횡무진 활약기다. 첫 장면 무려 4300 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했다는 엄청난 규모의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은 CIA 일원으로 잠입하여 암살당할 뻔한 요인을 구출하고, 214라고 칭해지는 '무기(?)'를 빼돌리는 작전에 투입된다.
오페라 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이 최면 가스에 모두가 잠이 든 상태에서 곳곳에 시한폭탄이 놓여진 상황, 이미 자신들의 임무가 완수되었기에 굳이 그 상황에 개입할 필요가 없음에도 주인공은 홀로 남아 사람들을 구하고자 분투한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 적에게 체포된 상황에서 동료들과 작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던가.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주인공은 '의문의 단체'에 구출되어 미래에서 온 미지의 적으로부터 3차 대전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이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이 <테넷>을 이끌어 가는 근간이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액션과 그보다 더 현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버전'의 장치들 사이를 오가며 작전을 수행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전'의 결정적 순간에 '사람'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오페라의 관객들이요, 아들을 지키려는 여주인공인가가 다를 뿐이다.
그렇게 '사람'을 중심에 둔 주인공의 활약, 거기에 또 하나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이다. 영화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되풀이 하여 말한다. 내가 상황을 주도하겠다고. 어쩌면 <테넷>에서 가장 결정적 '스포'가 될 대사는 '인버전'도 '엔트로피'도, '프리패스'도, '알고리즘'도 아니라, 바로 매번 주인공이 말한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말이다. 그의 '주도성'은 결과적으로 영화 <테넷>을 가능토록 만든 '동인'이다. 그 동인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지구를 멸망에 이른 '적'들에 대항하여 지구를 지켜낸다. 바로 이런 주인공의 사명감이야말로 '교리'라는 의미를 지닌 '테넷'으로 이어진다. 작전이 아니라 사명감, 모험이 아니라 인류애가 결국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느껴달라는 '요점'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적 주체성의 맞은 편에 지구 멸망의 키를 움켜 쥔 케네스 브래너가 분한 사토르가 있다. 사토르 마방진 첫 줄의 단어, 사토르는 러시아로부터 버려진 땅에서 플루토늄을 채취하며 살아남아 불법 무기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지만, 그런 자신의 부를 지구 멸망의 군불로 삼는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세상의 운명을 그 자신의 '맥박'에 맡긴다.
자신이 없어도 인류는 세상은 존재해야 한다는, 환경 오염 등 많은 오류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주인공과 내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는 사토르, 두 가치관은 사토르를 매개로 하여 지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미래의 적'이 한 도발을 통해 '현재'에서 충돌한다. 사토르 마방진의 대각선 글자인 '테넷(TENET)'은 글자에서 보여지듯 앞과 뒤가 같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매개로 마주한 과거와 현재이다.
'인버전'된 시간 속에서 그런데 여기서 조우하게 된 과거와 현재는 이전에 우리가 알던 시간 여행의 의미와 다르다. 시간 여행이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뛰어넘거나 역행하는 과정이라면, '인버전'이라는 장치를 통한 <테넷> 속 시간의 흐름은 거꾸로 주행하는 자동차, 쥐는 것이 아니라 놓아야 손으로 튀어 오는 총알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되 그것이 현재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통해 미래의 세력은 '현재'에 개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테넷> 속 지구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의 역설'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가서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할아버지의 손자는 미래에 '존재'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할아버지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손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테넷>은 거기에 평행 우주론을 등장시키며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그 '역설'에 변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변수'가 결국 오페라 극장 이후 오슬로, 에스토니아, 그리고 최후의 결전지가 되는 러시아 사토르의 폐허가 된 고향 마을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는 '인버전'된 인물과 현재 인물들의 교차된 행보을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3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원인과 결과, 하지만 영화는 <인셉션>처럼, 하지만 다른 '과학적' 성취에 기반하여 그런 '사고'의 패턴에 이의를 제기하며 미래와 현재를 연결한다. '일어날 일'의 시작은 현재일까? 미래일까? 뒤엉킨 '시간'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그럼에도 주도적으로 '삶의 선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런 '선의'의 끝에서 <테넷>을 만나게 된다.
10회차에 이른 <악의 꽃> 이제 본격적으로 연쇄살인범이었던 도현수의 아버지, 도민석의 공범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범의 목소리를 통해 도현수(이준기 분)이 헤집은 기억 속에서 현수와 같이 간 바에서 아버지는 공범이 줏어 준 아버지의 옷을 통해 '차 키'를 전달받은 거였다. 도현수, 아니 이제 백희성은 다시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그 바를 찾아든다.
그런데 왜 도현수는 공범을 찾는데 그렇게 애를 쓰는 걸까? 온 세상이 자신이 아버지 도민석의 공범이라고 해서? 물론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누나 도해수의 뒤늦은 고백처럼 누나가 죽인 이장조차도 스스로 짊어진 도현수가 왜 이제 와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일까? 아니 지금 도현수는 자신의 결백이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공범'을 잡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공범'이 바로 그의 아내 차지원(문채원 분)의 사랑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남편의 최선이 아내가 잡으려는 '범인'을 잡아주는 것이라니! 이런 '기괴한' 사랑은 그게 도현수이기 때문이다. 아니 도현수는 지금 자신이 하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지원과 함께 있으면 아버지의 환영이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차지원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누나의 물음에 당당하게 한번도 차지원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을 던져 사랑을 구하는 사이코패스 도현수는 스스로가 태생적으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 더 이상 도현수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연습해 왔다. 더욱이 차지원을 만나, 그녀가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이후 더더욱 열심히 '감정'을 느끼는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즉, 도현수에게 '사랑'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그저 '감정'일까? 도현수는 차지원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남편이 된 이래, 남편의 역할에 그 누구보다 '충실'해왔다. 경찰이 되어 바쁜 아내 대신 가사를 맡은 도현수는 맛있는 음식은 물론, 그의 말에 따르면 딱 미니 차지원같은 딸 백은하를 키움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했다.
시청자들 역시 드라마가 규정한 사이코패스 도현수에 시선이 가려져 그가 감정이 없는 존재라는 것에만 '천착'했지만, 이제 자신의 남편이 도현수라는 걸 안 아내 차지원이 도현수에게 싫증났다며 헤어지자 하자, 그런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신을 던져 공범 잡기에 나선 도현수를 보며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만난 누가 도해수가 도현수를 보며 달라졌다고 하듯이, 도현수의 저런 모습이 '사랑'이 아닐까 라고.
도현수와 도해수가 둘이서 만나는 걸 몰래 지켜보던 차지원은 안그래도 자신이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남편이 백희성이 아니라, 오랫동안 살인범으로 추적당하던 도현수라는 사실에 혼돈스러워 하는 한편, 자신이 믿고 의지해 왔던 남편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워한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누나에게 한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니 분노를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연주시 살인 사건 수사에 매진하며 남편을 옥죄어 가는 한편, 대놓고 이제 오래 살아서 싫증이 났다며 헤어지자는 말을 한다.
물론 자신이 도현수라는 걸 애초에 속인 것에서 부터 이 부부의 딜레마는 시작된 것이지만 백희성이 도현수라는게 '들통'난 마당에 봉착한 부부의 대응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더구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서 '관계'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도현수의 맞은 편에 돈이 된다면 사람도 얼마든지 '재료'로 팔고사는 범법자들과, 자신의 명망과 이익을 위해 병든 아들 대신 도현수를 백희성으로 만들고, 그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취하는데 거침이 없는 백만우와 같은 인물들을 대비시키며 우리의 섣부른 '규정'이 파놓은 함정을 드러낸다.
사랑이 무얼까? 사랑의 '감정'에 매달린 아내 차지원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남편의 말에 '분노'하고 '이별'을 선언하는 것과 달리, 아내와의 '관계'에 충실하고자 하는 도현수는 아내의 맘을 돌리기 위해 자신을 던져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누가 사랑일까? 어쩌면 자신을 잡을 지도 모를 경찰이 되는 일을 가장 응원해 주었던 도현수, 그리고 바쁜 경찰일에도 불구하고 그런 차지원의 내조에 열과 성을 다했던 도현수,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사랑'의 감정마저 애써 노력했던 도현수, 그리고 이제 그런 아내를 위해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는 도현수, 그런 도현수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제일 힘든 게 '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드러나는 '감정'을 통해 '교감'된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악의 꽃>은 그런 관계의 표피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 어쩌면 '관계'의 실체는 그걸 채워가는 '성실함'이 아닐까 묻고 있는 듯하다.
남편을 외면했던 차지원은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의욕이 앞섰던 함정 수사에서 위기를 겪으며 비로소 남편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이 강력반이라는 험한 생업의 전선에서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이 알고보니 그 '감정'조차도 느끼지 못한다는 남편 도현수의 위로의 지지였음을. 설사 그것이 '연습'된 감정일지라도 그 '연습'의 뒤에 숨은 건 바로 자신을 향한 도현수의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었음을. 차지원은 말한다. '나는 너밖에 없었구나. 그리고 너도 나밖에 없었구나.'라고.
자신의 남편이 도현수라는 안 순간부터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을 '사이코패스'에 맞추어 오해했던 차지원은 비로소 남편의 진심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폭력적 성향으로 규정되었던 카세트 테이프 속 목소리가 다름 아닌 실종된 도현수 엄마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게 되고 상담사에게 오열한다. 왜 어린 소년 도현수조차 알지 못했던 애달픈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았냐고.
10회에 이른 <악의 꽃>은 사이코패스의 '사랑' 아닌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그걸 통해 세 치 혀의 농간에 부화뇌동하는 감정이 아닌, 관계의 실체에 대해 고민해 보자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질 수 밖에 없는 시절이다. 이 시절에 요동치는 감정의 파고를 넘어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진 삶의 버팀목에 대해 드라마를 빌어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사이코패스라지만 그 누구보다 진솔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도현수를 통해서 말이다.
메릴 스트립, 지나 데이비스, 나탈리 포트만, 케이트 블란쳇, 클로이 모레츠, 리즈 위더스푼, 산드라 오 등등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 이름을 들어왔고, 이름만이 아니라 이들이 출연한 영화를 기억할 만한 헐리우드의 유명 여배우들이다. 이들 여배우들이 한 영화에 출연했다. 바로 <우먼인 헐리우드>이다. 2018년 개봉작이었던 <우먼 인 헐리우드>가 EIDF 2020 여, 聲 섹션에 초대되었다.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들 96명이 출연했다 해서 화제가 된 영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아카데미상을 무려 3번이나 받은 메릴 스트립을 비롯하여, 저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자신의 일을 하는 현장에서 그 누구라고 막론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차별'받아왔다는 것이다. 누가 저 유명세를 떨치는 여배우들이 '차별'로 인해 고통받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하지만 대표적인 여배우들의 발언으로 <우먼 인 헐리우드>로 인해 헐리우드 영화 산업 내 차별은 현실감있게, 그리고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온다.,
아카데미 상을 받은 여배우도 받은 차별 메릴 스트립의 대표작 <크레이머 vs. 크레이머> 이혼 법정에 선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 현장에 여성은 메릴 스트립 뿐이었다. 이혼 상황에 놓인 여성 캐릭터를 남자들이 고민했다. 메릴이 자신의 생각을 영화에 투영하려 했지만, 결국 영화는 남성의 생각과 감정선을 따라 흘러갔다. 되돌아 보건대 우리나라에도 개봉하여 화제가 되었던 <크레이머 VS. 크레이머>에서 인기를 끌었던 건 여주인공이 가정을 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이 아이와 가정을 지키려 애쓰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였다.
여배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영화는 우리를 '부정'했다고. 여자들을 주로 욕망, 욕구,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다고. 여성을 통해 긍정적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소수였다고. <델마와 루이스>로 이름을 알린 지나 데이비스의 경우 영화배우가 되어 했던 첫 촬영부터 '란제리'를 입고 촬영을 했다. 지나 데이비스와 세대가 다른 클로이 모레츠라고 다를까? 십대였던 그녀에게 가슴이 작다고 '볼륨 브라'가 주어졌다. 심지어 <캐리>를 찍으며 '초경' 장면에서 남자 스텝들이 훈수를 두는 웃픈 상황이 발생했다.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이 이 산업의 핵심'이라는 농아닌 농처럼, 여성은 '객체'였고, '타자화'되었고, 주체성은 배제되어왔다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은 호소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델마와 루이스>가 개봉되고 여성들이 이 작품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며 화제가 되자 이제는 조금이라도 세상이 달라질까 했지만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 데이비스는 스스로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를 차려 미디어 속 불평등을 과학적으로 접근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피상적으로 보이던 '편견'과 '차별'에 대해 '데이터'를 통해 접근하고 반박하고자 한 것이다. 이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미국에서 흥행했던 100편의 영화 중 85%가 남성 작가들에 의해 씌여졌다고 한다. 결국 남성들에 의해 남성들의 분노와 고뇌가 주로 '작품화'되고 있는게 현실인 것이다. <우먼 인 헐리우드>에서 등장하는 데이터들은 차별을 명시화한다. 대부분 2018년의 기준인 데이터들, 그럼에도 그 데이터 속에서 여성들은 차별받고, 편견의 대상이며, 소외되어 있다.
구조적이며 내재화된 차별 1980년대는 히어로물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80년대 영화 속 히어로들은 서부영화 속 히어로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과거 영화 속 히어로들을 답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공격하는 대상인 안티 히어로들과도 동일했다. 자신의 남성성에 도전하는 것들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이들의 '미션'이었다.
이런 '미디어'의 메시지는 그 메시지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결정하고, 그 '메시지'에 의해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들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으로 확산되게 된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남자들의 리그'였다. 여자들은 버림받는 애인이거나, 구조받는 희생자였고 아름다워야 했다.
헐리우드 초창기는 지금과 달랐다. 무성 영화 시절 <귀부인과 승무원>은 여성이 감독을 하는 등 당시 여성들은 감독과 작가,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영화 산업이 커지며 음향 기술이 도입되고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하자 부유한 지배층 남성들의 시각이 '반영'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 산업 전반에서 여성을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는 시선이 팽배해 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감독상은 2009년 캐서린 비글로그 단 한 명이었다. 역대 오스카 상 심사위원에 여성이 좀 더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라고 다큐는 묻는다. 심지어 주요한 영화 평가 기관인 토론토 지수의 평가를 좌지우지하는 평론가들 중 77.8%가 남성이다. 2018년 헐리우드 상위 250 편 중 92%가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2017년 여주인공 중심의 영화는 38.1%에 불과했다. 여성에게는 흥행에 기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 감독들에게 기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킴벌리 피어스 감독은 차기작을 9년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감독은 전투적 도전적이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여성 감독들의 입지를 줄인다. 심지어 여성 촬영 감독은 더더욱 드물다. 여성감독, 여성 작가가 드문 헐리우드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기대하는 건 당연히 어렵다.
볼 수 있으면 될 수도 있다 어릴 때 보는 미디어 속 자신과 같은 성의 역할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결정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 내 미디어의 80%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유포'해왔다. 이런 '미디어'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연구소에 따르면 2018년 대표적인 작품 중 11편 만이 소수자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배우 산드라 오는 처음으로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여성의, 인종의 이야기를 다룬 <조이럭 클럽>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전한다. 분명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그걸 보는 여성이나 소수 인종이나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가치없거나 잘못되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반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개봉된 후 전형적인 모습과 달리 강렬한 이미지로 등장한 공주의 모습, 그리고 같은 해 개봉한 <헝거 게임> 속 여주인공으로 인해 양궁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이 105%나 증가했다고 한다.
CSI효과라는 것이 있다. 미드 CSI에 여성 법의학자가 등장하자 법의학을 배우는 여성의 비율이 증가했다. 그 결과 현재 현장 인력의 절반이 여성이 되었다고 한다. 섹스 어필하지 않은 여주인공에 소수 인종이 주인공인 <그레이 아나토미>의 등장 역시 쉽지 않았지만 파급력은 컸다.
리즈 위더스푼은 150명의 남자 중 유일한 여자였던 현장의 기억을 떠올린다. 여성들에게 안전망은 없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건 위험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리즈 위더스푼은 '여성 혐오적'인 캐릭터를 두고 동료 여배우들과 경쟁하는 대신 스스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작품화하기 위해 제작사를 차렸다. 그녀가 만든 작품들이 흥행을 하며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지평은 넓혀졌다. 여자들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도 흥행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80년대 유망했던 여성 감독들은 영화 현장에서 여성 권리의 확장을 위해 법적인 소송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런 여성들의 끊임없는 노력은 '자발적 준수'라는 법적인 문턱을 넘어섰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정작 여성이 판사였던 연방 법원의 기각으로 좌절되기도 했다. 감독, 조감독, 제 2조감독으로 이어지는 영화계 내에서 위계 질서에서 쉽게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세상의 반인 그녀들의 존재처럼 영화 현장에서도 '반반'의 비율이 지켜지는 그 날을 향해 <우먼 인 헐리우드>는 목소리를 높인다.
EBS 국제 다큐 영화제가 올해로 17회를 맞이했다. '그 사회의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진실을 기록'하는 '다큐, 올해는 글로벌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다시 일상으로, 다큐 내일을 꿈꾸다'라는 슬로건으로 8월 17일부터 25일까지 7일간 진행되고 있다.
영화제는 경쟁 부문인 페스티버 초이스와 함께, 여성, 예술, 교육, 무형 유산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다. '무형 유산' 부문에서는 우리나라의 씨름 등 세계 각국의 문화적 유산이 다뤄지고 있다. 그 중 <기생, 꽃의 고백>은 세상의 편견 속에 사라져 가는 '기생'의 문화적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 EBS
부산 박물관 앞에서 벌어진 '수영야류' 공연, 부산 수영구에서 전래되는 이 '탈놀이'가 전수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래 권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기생들의 조합을 뜻하는 '권번'이 우리 민속 유산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수영야류 보존회장인 이상열 씨는 자신이 동래 권번에서 엄격한 교습 과정을 통해 '수영 야류'를 배웠던 시절을 회고한다. 교방 검무, 교방 승무 등등 우리가 지금 우리의 문화 유산으로 즐기고 있는 많은 것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기 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는데 있어 기생들의 권번, 그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 '문화적 영향력'은 기생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함께 묵살되고 있다.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생 김선부, 왕수복, 신일선, 김영월 등은 1930년대를 풍미한 기생들이다. 뛰어난 미모, 모던한 옷으로 당시 신문물이었던 '와인'과 커피'를 즐겼던 사람들, 기생하면 떠올리는 전통무가 아니라 탬버린을 들고 서양식 댄스를 앞서 도입했던 사람들, <봉황의 면류관> 등 당시 영화를 만들게 되면 캐스팅 1순위였던 사람들, 오늘날 우리가 '엔터테이너'를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것들을 수행한 당대의 문화인들이다.
기생들은 시, 글, 그림, 노래, 춤의 전문가들이었다. 왕실에서 가무를 담당했던 이들을 1패 기생으로, 일단 대중들을 상대로 가무를 담당했던 이들을 '은근자', 2패 기생으로 분류했다. 이들보다 낮은 3패 기생들이 몸을 파는 일을 했는데 이들로 인해 기생 전체에 대한 '편견'이 생겨났다.
초창기 기생들은 예술 활동을 하는 예기들이 많았다. 공연 예술의 한 갈래를 담당했으며 근현대사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문화계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기생들은 국산 장려 운동, 고아들을 위한 자선 공연 등에 앞장섰다.
평양 기생학교에는 학생들이 200여 명이 넘었으며 서울에도 자체 학습 프로그램을 가질 만큼 예기로서 기생이 되는 과정에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침 10시면 나와 소리와 춤을 배웠으며, 장구, 춤, 소리는 기생으로서는 기본이었다. 한 달에 한번 시험을 봤고, 못하면 체벌을 당하거나 심하면 밥도 굶겼다. 만점을 받아야 비로소 기생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수련' 과정을 거쳤다.
이들 기생은 '권번'이라는 조합에 가입되어 있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이른바 '공연비'를 관리했으며, 의상, 코디 등을 담당하는 한편 어린 기생인 동기들을 키워냈다. 이런 과정 자체는 오늘날 '연예 기획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기생들의 권번은 서울이나 평양 뿐 아니라 부산, 군산 등에도 존재했다. 낮에는 식사를 할 수 있고, 밤에는 공연을 하는 '명월관'은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그 명성을 누렸다. 심지어 도쿄에도 '명월관'이 있었다. 평양 기생이었던 노경월이 1929년에서 32년에 걸쳐 나카타초에 열었던 명월관은 단순한 요릿집이 아니었다. 영친왕의 집과 붙어있어 모종의 지원이 추측되는 명월관은 유학파, 독립투사 등 일본에 온 다양한 우리 지식인들의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이었다.
부정당한 우리의 전통 문화, 기생 일본 명월관에 대한 기록조차도 치밀하게 자료를 모은 일본 쪽 연구로 인해 알 수 있듯이 하지만 막상 당시 기생들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드물다. 한 시대의 문화인으로 풍미했지만 이후 사회에 퍼진 기생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인해 한때 기생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후손들을 의식해서 자신이 기생이었음을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예기라 할 수 있는 군산 소화 권번 기생이었던 장금도 명인의 존재는 소중하다. 이제 90세 요양 병원에서 계셔야 할 정도로 노쇄해졌지만 자신을 기리는 공연에서 '춤출 때 보면 그렇게 예쁘다'는 그 옛날의 평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춤사위를 선보이신다.
드센 사주팔자 때문에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장 명인은 아들을 홀로 키우며 잔칫집에 다니며 춤 공연을 다니기도 했지만 모습을 감춘 다른 기생들과 달리 '민살풀이' 명인으로 후학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도 같은 장금도 명인과 후학 대진대 신명숙 교수와의 관계는 예외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여러 분야의 무형 문화재가 된 사람들치고 기생에게 배우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모두 드러내어 기생들로 부터의 전수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기생이란 이유만으로 제대로된 능력자들이 제외되고 그보다 낮은 기량의 사람들이 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것이 현실이다.
저급한 일본 기생 문화가 들어오며 소비적이며 말초적인 저급한 접대 방식이 퍼진데다 1930년대 대동아 전쟁 당시 일본이 기생에게 가무를 금하고 접대를 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기생을 '접대부'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문화적 담당자로서의 기생 이미지 대신 '접대부'라는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기생이었던 분들은 자신들은 '가무'를 담당했다며 자부한다. 기생들에게 전통 문화를 배웠던 사람들도 그 배움을 부인하기 보다 배웠으며 그 배움이 소중하다는 솔직한 시인이 필요하다. 엄연히 기생은 조선과 근대를 잇는 전통 문화의 담당자였다. '접대부'라는 후에 그들을 규정한 저급한 인식을 넘어 예술인으로 그들의 존재를 다시금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다큐는 말을 맺는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많은 전통 문화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무형 유산으로 '기생'을 복기한 <eidf 2020 -기생, 꽃의 고백>은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작년 합계 출산율은 0.92명으로 2011년(1.24명)보다 0.32명 감소하여 역대 최저를 기록하였다. 세계 203개 국 중 꼴찌이다. 이 기록이 암담한 것은 저출산과 관련하여 2011년 이후 10년간 평균 21.1%씩 증가시킨 총 209조 5000억원을 정부가 쏟아부은 결과라는 점이다. (한국 경제 연구원)
도대체 저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왜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늘지 않고 있을까? 역설적으로 그 이유를 8월 16일 방영한 <sbs스페셜 - 아빠를 고발합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14세 소년이 어른들과 함께 플랜카드를 들고 나섰다. 거기에 써있는 건 바로 '아빠를 고발합니다'라는 문구.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를 아동 학대로 고발했다. 우리나라 아동 복지법에 따르면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의 성장에 맞춰 건강하게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엄마와 이혼한 지 5년이 된 아빠는 단 한 번도 소년의 양육비를 챙겨주지 않았다. 심지어 새로 가정을 꾸려 아이까지 낳아서 키우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단다. 소년은 '유기, 방임'도 신체적 정신적 학대에 해당한다며 아빠를 고발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행위는 저희를 유기, 방임하는 행위이고, 왜 어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저와 같은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지, 왜 그 사람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친부를 아동학대로 고발한 김유성(가명)군의 기자회견 발언
우리나라에서 이혼 후 양육비를 받지 못한 비율이 78.8%에 이른다. 그 중 단 한 차례도 받지 못한 경우도 73.1%에 달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16년간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이다도시 씨 외국인으로 우리나라 방송에 출연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다도시 씨, 그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살던 이다도시 씨는 지난 2010년 이혼했다. 당시 12살, 5살이던 두 아이들을 책임진 이다도시 씨, 당시 법원은 매월 120만원의 양육비를 판결했다. 그로부터 무려 1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다도시 씨는 아이들의 아빠로 부터 단 한푼의 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들과 연락조차 끊었다.
두 아이들을 먹히고 입히며 홀로 고전하며 살아왔던 나날들, 더구나 늘 행복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방송에 보이던 그녀에게 이혼은 '생업'이었던 방송 출연에 장애가 되었다. 다행히도 숙명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두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 시간은 이다도시 씨에게는 '시련'이었고, 아이들은 '자기 인생에서 아빠를 지웠다'며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되었다.
양육비를 받지 못한 채 5년이 지났을 무렵 '양육비 이행 관리원'이 출범했다.(2015) 드디어 양육비를 받을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당연히 접수를 했다. 법원은 의무를 이행하라 명령을 했다. 하지만 민사적 제재에 불과한 명령은 '해외'에 있는 아이들 아빠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감치 명령 역시 닿을 수 없었다. 채무 불이행 명부에 등재시켰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역시나 피해갔다. 그의 sns에는 골프장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지만 매달 30만원을 받는다는 그의 핑계에 더 이상 강력한 법적 조처는 없었다.
이다도시 씨는 울분을 터트린다. 자신이 터널 통행료 2천원을 내지 않아도 당장 그날 독촉 전화가 걸려오는 대한민국, 이 나라는 얘들 생명보다 터널 지나는 비용이 더 중요한 나라냐고. 결국 이다도시 씨는 양육비를 받지 못한 지 16년 만에 지난 2018년 양육비를 부모들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NGO인 '베드 파더스'에 남편의 신상을 공개했다.
공개되기 전 남편에게 원만하게 해결하라며 사전 통보하였지만 남편 측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외려 개인간 문제에 무슨 권리로 나서느냐며 반발했다. '베드 파더스'에 신상이 공개된 90%는 이다도시 씨의 남편과 같은 '아버지'들이다. 우리의 이혼 관례상 대부분 이혼 후 양육권이 엄마에게 주어지고 있는 법적인 맹점이 현실로 드러난 사례이다.
앞서 아빠를 고발한 유성군의 경우, 5년 만에 집으로 양육비를 독촉하기 위해 찾아가자 외려 '주거 침입죄'로 경찰을 불렀다. 외제차를 몰면서도 돈을 못번다고 하는 아버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 유성군의 동생은 학교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로 재능이 많지만 엄마의 외벌이로는 그 재능을 키워주는 게 언감생심이다.
김유성 군은 왜 '고발'까지 했을까? 엄마는 그게 지난 5년간 연락조차 하지 않은 아버지와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 측은 괘씸해 할 뿐이다. 4살 때 떨어진 아버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동생 유나, 막상 아버지와 카톡이 되자, 아버지라 해야하나, 아저씨라 해야 하나 혼란스러워 한다. 미술 치료 과정에서 유성군의 그림에는 스트레스를 의미하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유나가 그린 그림에 '집'은 가장 희미하다. 엄마는 돈도 돈이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끊긴 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이 안타깝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양육비 소송 판결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핑계를 댄다. 그러나 1994년 개정된 법제로 인해 양육비는 친자 관계 본질에서 발생하는 의무이기에 재판 결과의 인지 없이 지불하는 되는 것이다.
양육비 개인의 채무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 되어야 심지어 양육비를 주기 싫어서 몸으로 때우는 경우도 있다. 오늘도 잠복 중인 선희씨, 그녀 역시 지난 6년간 양육비를 받지 못했다. 21개월에 50일된 신생아를 데리고 이혼을 했던 그녀, 남편은 그녀와 아이들을 생애 최대 오점이라 하며 외면했다.
법원에 소송을 제출할 때마다 판사는 임의대로 양육비를 깍는다. 하지만 그 깍은 양육비조차 남편은 거부했다. 법원이 미지급으로 감치 명령을 내리고, 일손이 부족한 경찰 대신 양육 부모들이 선희 씨처럼 잠복을 해서 경찰을 불러야 겨우 잡아간다. 하지만 잡혀간 남편은 양육비를 주는 대신 '몸'으로 15일을 때웠다. 자신의 재산은 현재 재혼한 아내 명의라며.
아이들의 양육을 떠맡은 엄마들은 아이들을 키우랴, 양육비를 받아내랴, 거기에 이제 이런 명목 상의 강제만 있는 불합리한 제도를 바꾸는데 나서랴 그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양육비를 내지 못하면 2년 금고에 1500 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문다. 선제적 강제 징수도 한다. 강력한 조처만 있는 게 아니다. 실제 양육비를 주지 못할 수 도 있는 상황, '양육비 대지급제'라는 제도을 통해 국가가 양육비의 1/3을 보조해 주는 제도가 있다. 이런 제도가 추구하는 건 결국 자라나는 아이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이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양육비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부모로써 아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고. 하지만, 그 책임을 개인적 채권 구도로만, '민사적 해결'에 떠맡기는 건 양육의 책임을 오로지 한 가정에 떠맡기는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제 저 심각한 양육비 분쟁에 국가가, 사회가 나서야 할 때라는데 이견이 없다. 아이들을 낳도록 돈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온 아이들을 사회가, 국가가 어떻게 책임지고 제대로 키워낼 때, 믿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출산율'도 늘게 될 것이다.
지난 2017년 6월 10일 tvn을 통해 첫 선을 보인 드라마 <비밀의 숲>은 방영과 동시에 화제가 되었다. 6월이었지만 이미 한 여름과도 같았던 시절, 그런 더위를 잊게 해줄만큼 한 겨울을 배경으로, 그 배경만큼이나 서늘하게 막을 열었던 <비밀의 숲>은 검사 황시목이 방문한 집에서 목격한 살인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흐른 2020년 8월 50여 일에 걸쳐 비가 내리는 이 시절에 통영 지청에서 원주 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처지인 황시목 검사는 안개가 자욱한 통영 바닷가를 지나다 다시 한번 '두 청년'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사건' 현장'을 통한 황시목과 한여진의 재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간', 사람들은 황시목(조승우 분)을 시쳇말로 그렇게 표현했다. 어릴 적 받은 뇌수술로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황시목에게 '법'이라는 이성적 장치는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명문화된 법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면 되는 '서부지검' 내부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 동료들이 그와 밥을 먹는 것조차 불편해 했지만, 황시목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2017년 <비밀의 숲> 1회에서 사건을 목격한 검사 황시목은 현장에 있었던 그 자신이 한여진(배두나 분) 경위에게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것 따위 무색하게 그가 목격한 현장에서 발견한 '사실'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이제 2020년 원주 지청으로 발령받은 황시목은 통영지청장님이 직접 환송을 해주겠다는 '자리'를 '쌩까고' 이번에도 사건 현장인 통영 바닷가로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현장에서 발생한 두 청년의 죽음에 '사고' 이상의 의문을 느끼던 순간, 자신의 집에서 핸드폰으로 '안스타' 순례를 하던 한여진 경감 역시 한 남자의 통영 사진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며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황시목과 한여진은 2017년 <비밀의 숲>에 이어 다시 돌아온 시즌2 <비밀의 숲>에서 한 사건을 통해 '재회'하게 된다.
황시목이 발견했던 박무성의 죽음, 그 죽음은 그저 한 개인의 죽음, 혹은 검찰 스폰서의 죽음이 아니라, 결국 검찰 내부에 얽히고 얽힌 커넥션을 밝히기 위해 훗날 검사장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될 이창준(유재명 분)이 기획하고 검찰 수사과 과장 윤세원(이규형 분)이 실행한 '설계된 죽음'이었으며, 검찰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비리의 음모를 벗겨줄 첫 번 째 '실마리'였다.
통영 사건의 의미는? 그렇다면 이제 통영에서 벌어진 두 청년의 뜻하지 않은 죽음도 시즌 2를 관통할 사건의 시작일까?
우선 통영 사건을 통해 시청자들은 다시 한번 황시목과 한여진이 누구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주인공인 '환송회' 자리 대신 두 청년의 죽은 현장으로 간 황시목, 그는 그저 술을 먹고 파도가 거센 바다에 뛰어들어 우발적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모두가 '퉁'쳐버리는 사건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 안주하는 대신 그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사실'에 집중한 황시목에게 통영 바닷가의 사건은 그저 우발적인 사고라기엔 의문점이 남았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 분명 접근 금지 푯말이 있었어야 할 이곳에 제 아무리 술이 취했기로서니 청년들은 그리 무모하게 뛰어들었을까란 의문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같은 시간 이제는 경찰청 수사구조혁신단 주임 경감이 된 한여진 역시 의아함을 느낀다. 통영 바닷가에서 접근 금지 푯말을 배경으로 커플 사진을 찍어 올렸던 사람이 황급히 사진을 삭제한 상황에 한때 동료였던 장건(최재웅 분)에게 협조 요청을 하고 두 사람은 '안스타'의 사진을 토대로 '가해자'로 추정된 사람을 찾기에 이른다. 그리고 황시목에게 전화를 걸어 2017년 <비밀의 숲> 1회에서 용의자와 형사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제 '과거'의 공조 팀 동료로 다시 한번 '통영' 사건의 '공조 수사'를 벌인다.
황시목이 그렇듯이, 한여진 역시 시즌 1에 이어 다시 한번 '정의감'이 투철한 형사로 돌아왔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법적인 사실에만 충실한 황시목과, 반면에 너무도 '인간적인' 한여진은 극과 극의 인간형이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주변 상황과 관계를 제치고 '사건'의 본질, 그리고 그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에만 충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역설적으로 '공통 분모'를 가진다. 통영 사건은 <비밀의 숲>을 지난 시간 그리워했던 애청자들에게 통영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절묘하게 두 사람의 캐릭터를 환기시키며 <비밀의 숲> 시즌 2 또한 이러한 두 사람의 전혀 다른, 하지만 공통의 '지향'이 시즌을 관통할 것임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두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중대 사안'을 통해 '적'으로 부딪치게 될 것이다. 검찰과 경찰, 서로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 가지고 싶은 '권한', '권력'을 향해 치열하게 수싸움과 기세 싸움을 벌일 판의 '말'로 던져질 예정인 것이다.
하지만 경찰청 수사구조 혁신단 단장을 맡은 최빛이 시즌 1의 이창준의 죽음과 거기에 연루된 황시목을 검찰 관련 자기 식구 감싸기 사안으로 몰고가려 하지만 그 수하가 된 한여진이 자기 역시 '관계자'였음을 환기하며 그 사건은 그리 간단하게 검찰의 자기 편 감싸기와 관련된 사안이 아니라고 제지하듯이, 한여진은 쉽사리 '말'로 '헌신'만 하지는 않을 조짐이 보인다.
박무성의 죽음을 시작으로 결국 자신을 발탁한 이창준에 이르렀던 '설계'를 한 눈 팔지 않고 끝내 밝혀냈던 황시목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 종료된 통영 지청 업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간 두 청년의 죽음에 의아심을 가지게 된 황시목과, 수사구조 혁신단으로 옮겨 가서 굳이 나서도 되지 않지만 '불의'는 넘길 수 없어 직접 탐문 수사에 나선 한여진의 기세로 보건대, 이들이 검찰과 경찰의 치열한 권력 투쟁 사이에서도 '사고'가 될 뻔한 두 청년의 죽음을 '사건'으로 길어내듯, 적어도 이들이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과정에서 뜻밖의 '진실'을 향해 다시 한번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비밀의 숲> 시즌2 1회는 보여주고 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보태면 한 사람이 먹을 밥 한 공기가 만들어 진다는, 즉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속담이다. 그런데, mbc 수목 드라마의 제목 <십시일반>에서 그 뜻은 속담을 '역설적'으로 활용된다.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을 살리고 돕는게 아니라, 여럿이 힘을 모아 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오리엔탈 특급 살인>만큼이나 신선한 '설정'으로 시작된 <십시일반>, 8부작의 반전 넘치는 전개가 도달한 결론은 뜻밖의 '진실'이다.
모두가 의심스럽다 예고편에서 마치 삼복 더위를 날려줄 '납량 특집극'처럼 분위기를 잡는다. 아니나 다를까, 1회가 끝나기도 전에 등장인물 중 가장 돈이 많은, 유인호 화백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유인호 화백이 죽은 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었다.
당대 최고의 화백이라 칭송받는 유인호(남문철 분) 화백, 그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그림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는 상태, 당연히 그의 재산은 수백 억이다. 그런 그의 생일날 사람들이 모여든다. 현재 그와 살고 있는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려인이라는 연극 연출가 설영(김정영 분), 그러나 그녀는 법적으로는 그의 아내가 아니다. 한때 잘 나갔던 모델 김지혜(오나라 분)와 바람을 펴 아내와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인호는 다시 전처 설영을 찾았고 그녀는 그의 수족이 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유인호를 돌보고 있다.
그러나 유인호와 설영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자식은 김지혜와 사이에서 낳은 유빛나(김혜준 분)가 유일하다. 유인호는 김지혜를 버렸지만 지혜 모녀에게 양육비를 대주었고, 파산을 한 김지혜는 어떻게든 유인호에게 잘 보여 유산 상속을 받을까 해서 생일날 일찌감치 찾아들어 유인호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중이다. 김지혜 모녀만이 아니다. 사기 전과 4범인 유인호의 이부 동생 독고 철(한수연 분)과 그의 딸 독고 선(김시은 분) 역시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유인호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죽은 유인호의 동생 유해준(최규진 분) 역시 유인호가 거두어 주는 처지이니 당연히 그 자리에 참석한다. 거기에 유화백의 친구이자 매니저 역할을 하는 문정욱(이윤희 분)과 가사 도우미 박여사(남미정 분) 역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모두가 모인 자리 유인호 화백은 지난 1년간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며 비아냥거리며 내일 유언장을 공개할 것이라 선포한다. 자신의 것을 자기 맘대로 줄 것이니 '토' 달지 말라며. 하지만 그 유언장이 공개 되기 전에 유인호 화백의 죽음이 앞섰다. 그리고 수면제 알레르기가 있는 그가 수면제 과용으로 죽었음이 밝혀지며 뜻밖에도 그가 먹은 다섯 알의 수면제를 먹인 인물이 그의 유일한 딸을 낳은 김지혜와, 도우미 박여사, 친구 문정욱, 이부 동생 독고 철, 그리고 조카 유해준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화가를 죽인 다섯 알을 나누어 먹인 이들이 '범인'일까? 하지만 사건은 간단치 않다. 이들이 수면제를 탄 이유에는 그들로 하여금 유언장의 내용에 접근하도록 유인한 '익명'의 누군가가 발송한 '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익명'이 의도한 것은 화가의 죽음이었을까?
등장 인물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추궁하고 서로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으르렁 거리며 싸우게 되는 과정, 당연히 시청자들은 누가 죽였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탐정' 게임에 골몰하게 된다. 드라마는 이런 '추리'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갑자기 등장 인물을 '인터뷰' 한다거나, 등장인물들이 'sns'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추리해 가는 신선한 기법을 활용하여 긴장감을 높여간다.
하지만, 누가 범인일까?을 둘러싸고 진행되던 드라마는 중반주에 들어서면서 각도를 튼다. 등장인물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유산에 혈안이 된 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게 된 유산의 주인공, 유인호의 실체가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빛나와 함께 유력한 유산 상속자로 부각되었던 유해준, 하지만 빛나보다도 더 큰 아버지의 자식같다며 빛나를 몰아세웠던 그의 '태도'가 수상하다. 그는 정말 순종적인 조카였을까? 그가 큰아버지가 먹는 초콜릿에 수면제를 타가면서까지 노렸던 것은 뜻밖에도 '진실'이었다. 어린 시절 그와 함께 큰아버지의 집을 방문해서 아들 해준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큰 아버지 집에 들어간 해준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의 '실종',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해준은 '복수'의 칼을 갈았고, 그 해준이 준비한 '복수'의 실체가 드러나며, 또 하나의 '진실'이 드러난다.
진짜 나쁜 놈은 누구일까? 15년 전 해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충직한 비서이자 친구인 줄만 알았던 문정욱이 '노예처럼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스스로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항변하는 15년의 시간 뒤에는 당대 최고의 화백이라고 칭송받지만, 그 자신말고는 아내건, 친구건 가릴 것도 없이 그 누구에게도 비열하리만큼 냉혹했던, 심지어 자신의 죽은 뒤에 명성조차도 '디자인' 하기에 여념없었던 유인호라는 '거악'이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시작은 평범한 탐욕이다. 유산을 둘러싼 한 푼이라도 더 자기 몫을 노리기 위해 달려든 '하이에나'와 같은 가족들의 이전투구, 그리고 그런 탐욕의 피해자인 듯한 유인호의 죽음, 하지만 그 드러난 탐욕의 커튼을 젖히고 보면, 거기에는 그들의 탐욕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명성과 부를 위해서 동생의 죽음을 감추고, 친구를 노예처럼 부렸으며, 사랑했던 이에 대해 파렴치했던 '이기주의자' 유인호의 '인과응보'인 죽음이 드러난다. 회를 거듭해가며 '탐욕'은 에스컬레이션되고 그 정점에 '유인호'가 있다.
과연 누가 유인호를 죽였을까? 라는 의문 부호의 스릴러로 시작된 <십시일반>은 등장인물들이 '십시일반' 유인호 죽음의 주력, 혹은 조력자인가 싶더니, 마지막 회 '속담'의 본류로 돌아와 힘을 합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원했던 죽은 뒤에도 그 '명성'만으로 그림값이 치솟는 '명성'으로 남은 유인호의 '실체'를 맟천하에 드러내는 '십시일반' 어벤져스로 활약하며 유쾌한 한 판 블랙 코미디로 막을 내린다, 비록 8부작이지만, 아니 8부작이라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신선한 장르적 시도'는 비록 시청률로 보상받지 못했지만 지지부진한 공중파 드라마는 물론, 볼 거 없다며 하소연하는 시청자들의 기호에 색다른 활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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