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스페셜>은 창사 특집으로 야심차게 2018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문제를 다룬다. 바로 운인가 능력인가라는 화두를 통한 '공정성 경쟁'이 그것이다. 

다큐의 시작은 어렵사리 카메라 앞에 선 지난 촛불의 마중물이 된 이대 여학생의 비리 제보이다. 김수경(27) 씨를 통해 우리 사회는 그저 엄마를 잘 둔 덕에 이대 학생이 되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국가 대표에 메달까지 딴 적폐의 상징이 된 정유라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 말, 말,  '능력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부터, '이대 딱 한번 갔다. 학점은 나도 의아해'에서, '누가 이대를 가고 싶댔나'로 '청년'들은 공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이 시대 청년들이 가장 고통받는 '아킬레스 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가고, 그런데 다시 또 죽어라 공부해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현실에,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요즘 청년들 말 대로 '뼈를 때렸다'. 

 

 

공정성의 딜레마 
그래서 창사 특집으로 <sbs스페셜>은 바로 이 청년들의 분노, 그 근원이 된 '공정성'을 헤집어 본다. 그리고 그걸 위해 최근 우리 사회 문제가 되었던 정규직 전환 문제를 다룬다. 

상시, 지속 비정규직을 정규직을 전환하겠다는 지난 대선의 문재인 후보의 공약, 이는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고,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공약에 따라 일선 학교와 각 공사들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서울 교통공사 역시 지난 3월 무기 계약직을 대거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그 '환영 받던 공약'의 결과는 달랐다. 

역차별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1250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교통 공사, 그곳에 다니는 정규직 김성희(31)씨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고시촌에서 2년 동안 세상과 담을 쌓은 채 노력했던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얻은 능력이 부정당하는 것같다는 억울함. 자신이 '노오력'을 해서 얻은 결실을 누군가는 쉽게 얻는 것같다는 울화통에 '홧병'이 날 지경이다. 

김성희 씨만이 아니다. 중소기업을 다니며 어렵사리 주경야독을 하며 공채를 통해 정직원이 된 자신의 노력이 허무하고, 심지어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이런 교통 공사 정직원들의 억울함은 결국 김민철 씨 등에 의한 헌법 소원과 행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내세우는 건 '공정성'이다. 자신들은 노력을 통해 금메달만큼 값진 사원증을 목에 걸었는데, 왜 누군가는 거기에 '무임승차'를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분노한다. '시험'이라도 치라며 과정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이런 절차 상의, 과정 상의 공정성의 문제는 뜻밖에도 12년만에 복직한 ktx 해고 승무원들에게 까지 불똥이 튄다. 이들의 복직 기사에는 청년들의 불만이 폭주한다. 떼를 쓰면 복직이 되는구나'라는 비아냥이 가득하다. '다시 시험을 치라'며 야유한다. 

그런데 그 '비아냥'과 분노의 대상이 된 사람들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교통 공사의 정규직 전환에는 2016년에 벌어진 구의역 사고라는 계기가 있다. 구의역 지하철 9-4 승차장에서 끼니로 준비한 컵라면도 먹지 못한 채 스크린 도어 수리를 하다 진 꽃과 같은 김군, 그처럼 억울한 죽음이 다시 없게 하기 위해 그처럼 스크린 도어 안전 관리를 하던 외주 용역업체 직원이던 박창수(30)씨는 정직원이 되었다.

하청업체에서 최저 임금보다 못한 임금과 대우에서의 불이익을 받던 창수씨는 정직원이 된 이후 책임감이 한층 더해졌다고 답한다. 그의 말처럼 용역업체 비정규직들의 전환 이후 사고가 줄었다. 그러나, 창수 씨의 마음은 어쩐지 불편하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12년만에 복직하는 ktx 해고 승무원 오미선(39)씨 역시 자신들의 복직을 떼를 써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항변한다. 12년전 시험을 치고 인턴 근무를 하고 1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약속이 비로소 지켜진 것이라 항변한다. 

결국 선의에서 비롯된 정규직 전환과, 해고자 복직은 우리 사회 을 vs. 을의 불편한 동거를 낳았다. 

 

 

시험은 공정한 것인가?
이 불편한 동거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큐는 최후 통첩 게임을 예를 든다.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 그들을 다시 제안자와 응답자로 나눈다. 그리고 제안자에게 주어진 10만원, 제안자는 임의대로 이를 응답자와 나눈다. 

첫 번째 과정, 대부분의 제안자들은 5만원씩 공평하게 나눈다. 제안자들은 그게 안전하고 공평하다 입을 모은다. 이어서 단 5분간의 공공기관 입사 시험 문제로 치룬 시험을 거친 후 다시 재개된 과정, 그런데 시험 결과 성적 순으로 나뉘어진 제안자와 응답자 그룹의 배분율이 달라진다. 줄어든 응답자의 몫, 제안자도 응답자로 이런 불평등한 배분이 공정한 것이라 입을 모은다. 

그러나 다큐는 반문한다. 겨우 5분의 시험만으로 달라지는 '시험'이 공정한 것이냐고. 즉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혹은 역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청년들이 내세우는 '시험'을 통한 자격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의 무용론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 사회 시험의 역사를 논한다. 한국 전쟁 이후 각자의 노력으로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장치로서 등장한 시험, 그 시험은 한국 사회에서 '출세와 보상의 공정한 장치로 자리 잡아 왔다. 더구나 고도 성장기 평균 이상의 제너럴 리스트를 배출해야 하는 산업 사회에서 '시험'은 그 중요성이 더해만 갔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이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7년째 공시에 매달리는 33살 박승현씨처럼, 너도 나도 시험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많은데 합격율은 낮아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배자'가 된다는 것이다. 수능 시험자의 3/4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공시에 매달리는 현실, 1.8 %만이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 결과는 점점 더 청년들을 무한 노력 경쟁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고 다큐는 말한다. 

더구나 그런 가운데 공기업이나 대기업에서는 그 촘촘하다는 그물 사이로 채용 비리가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래서 등장한 국가직무 능력 표준인 NCS, 업무 능력과 연관이 있는지 의심되는, 핀란드 대학생들이 '바보 같다는 시험'을 우리의 청년들은 50분에 50문항을 풀어 내야 한다.  시험의 문제를 또 다른 시험으로 풀어내는 악순환이다. 

<sbs스페셜>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규직 전환과 관련된 역차별, 공정성의 문제를 그 공정성의 잣대가 된 '시험'이 능력있는 사람을 뽑는가라는 근원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우선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자신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채'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치룬 '시험'이 무용한 것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니 당신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떨까? 저 많은 시간을 시험에 '허비'하는 청춘들이 그들이 파고드는 그 '시험'이 업무와 관련되어 유용하다 믿어서일까? 왜 우리 사회에서 사시 존폐와 관련된 반발과, 입시와 관련되어 수능 절대주의가 등장하는 것일까? 과연 이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사시나 수능이 '좋아서'일까?

아니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라는 대중적 믿음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해야 그나마 우리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절박감이다. 과연 이런 절박한 동앗줄을 선뜻 누구와 나누겠다는 사람이 쉽겠는가. 이 시대 청년들이 매달리는 시험은 그 어설픈 '최후 통첩 게임의 5분간의 시험'이 아니다. 

다큐의 초반에 등장한 정유라, 남들은 다 시험쳐서 가는 '수능'을 부모 덕에 무임 승차했다. 수능도 그런 세상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공사 정규직 전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교통 공사 정규직 전환자 중 108명이 재직자의 자녀, 배우자, 친인척이라는 현실이 말하는 건 무엇일까? 과연 이런 상황에서 다큐에서 예로 든 뉴욕 메츠에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으로 수시로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의 공정성을 우리 사회가 담보해 낼 수 있을까? 이른바 수능의 보완책으로 마련된 갖가지 수시 요강들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 활용하는 계층이 누구일까? 왜 사람들이 그래도 '시험'이 공정하다는 자기 포기적 반응의 속내가 무엇인지 다큐는 한번쯤 헤아려보기라도 한 것인지. 

문제는 '능력에 걸맞는 다른 시험의 형태'가 아니다. 공시을 통해 정규직이 된 사람들이 내세운 억울함의 촛점은  그들의 '시간'과 '노력'이다. 그런 그들에게 당신들이 친 시험이 잘못된 것이니, 양보하라 하면 yes라 할 수 있을까? 즉, 다큐가 내세운 문제 제기 공정성의 문제, 그 사례로 든 공사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된 역차별 문제와 후반부에 해법으로 내세운 시험의 시대착오적 무용론은 서로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즉, 입시 상담을 받으러 온 학생에게 흡사 선생이 과연 니가 대학을 갈 필요가 있을까 라는 원론적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산업 사회적 프레임의 시험 제도와 시스템은 문제가 많다. 하지만 그것과 최근 우리 사회에서 청춘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역차별, 공정성의 문제는 다른 이야기다. 그들은 '시험'을 말하고 있지만,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에 반해 지극히 좁은 문 사이에서 아귀 지옥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집단적 반발이다. 그런 청춘들의 고통에 대한 '원론적은 시험 무용론'은 안이하다 못해 비겁하다. 

 

by meditator 2018. 11. 12. 14:44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영화를 개봉한 줄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는, 늘 그래왔지만, 점점 더 모르게 되는 홍상수의 신작 영화 <풀잎들>이 10월 25일 개봉했다. 

 

 

잔잔한 바람에도 열심히 흔들리는 카페 앞 고무 대야 안의 풀잎들, 그렇게 시작되는 영화는 대번에 시를 기억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김수영의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골목 안 커피집이 있을 것같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커피집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 근처 식당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우는 풀, 풀잎들 딱이다. 

홍상수도 늙고, 그의 페르소나도 늙고- 단풍
한참 때 통영에서 날리던 노배우(기주봉 분)는 이제 함께 극단을 하던 대표와도 틀어지고,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 써버리고 여자 후배에게 방 한 칸을 적선하는 처지이다. 말로는 월세는 내겠다지만 어째 그 말조차 미덥지 않다. 한때는 흠모했을 지 존경했을 지 모를 선배 앞에서 원칙이라 어쩔 수 없다며 나즈막하면서도 완강하게 거절하는 후배, 
그리고 역시나 후배인 듯한 소설가에게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청을 넣는 한때는 연극인이었으나 이젠 글을 쓰겠다는 늙수구레한 남자(정진영 분)의 추파인지 청탁인지 모를 말 역시. 글은 혼자 쓰는 거라는 거절에 부딪친다. 

 

 

유지태였고, 김태우였고, 유준상이었으며, 이선균이었던 홍상수의 페르소나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이제 기주봉이고, 정진영이 되었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는 그 예의 습관성 바람은 방식과 방법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그 본성을 놓치지 않는 듯 보이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대학 교수였고, 영화 감독이던 그들은 어느덧 현업에서 밀려나고 멀어진 본의아닌 '은퇴자'들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북촌인지 서촌인지, 늘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배경이 되던 여전히 한옥이 배경이 되는 그곳은 <풀잎들>에서도 여전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인연으로 혹은 한 술집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합석을 하고, 술을 나누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방식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때는 그 밤새도록 '연애'를 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공회전을 해도 언젠가는 돌아갈 '현장'이 있던 그들과 달리, 이젠 굳이 불러주는 곳이 없는 감독의 페르소나들 때문일까, 어쩐지 동네조차도 삶의 현장에서 멀어진 '노인정'같다. 그 사이에서 미래를 기약하며 한복을 빌려입고 사진을 찍으며 낭랑하게 웃는 젊음들이 불협화음처럼.

그건 비단 홍 감독이 나이가 들어서, 그의 페르소나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어서만은 아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기세 좋게 청룡 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고, 이어 1998년 < 강원도의 힘>으로 감독상을 거머쥐며 90년대 문화의 대표 주자로 등장했을 그 시절, 홍상수라는 사람의 화법이 통하던 그 시절은 그 '바람'같은, 표리부동한 비도덕적인 인간들이나마 그래도 세상에 발 디밀어 살아갈 여지가 있던 시절이다. 그들이 밤 새워 논하고 어울리던 그 허황되고 공허하던 문화라던가, 인간이라던가, 사랑이던가 하는 것들이 그래도 감독의 비아냥을 받으며 삶의 한 자리로 '포용'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십여년, 그 바람같던 주인공이 되어버린 감독 자신이 영화 개봉 소식조차 세상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개인적 사정은 그렇다치고, 거기에 더해 어쩌면 그보다 더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해왔던 것들이 '자본'의 세계가 되어버린 영화, 혹은 문화라는 이름의 '상품'의 세계에서 '별책 부록'은 커녕, '잡담꺼리'조차 되어지지 않는 처지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 <풀잎들>의 공간은 '멈춰진 세상', 혹은 '방기된 세상'처럼 '무위'롭다. 그런데 그 '무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아직 살아가야 할 풀잎들 
그렇게 여전히 살던 근거지 통영을 떠나 서울 하늘 아래 한 몸 뉘일 곳을 찾으며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던가, 무기력한 삶에 여자와 글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던가 하는 풀잎이고 싶지만 어느덧 삶의 잎사귀가 말라가는 '단풍'들의 맞은 편에, 진짜 풀잎들이 있다. 

통영에서 온 노년의 배우와 후배의 대화를, 그리고 까페 밖에서의 글 좀 써보겠다는 한때 연극 배우 선후배를 대놓고 엿듯던 여성(김민희 분), 한때 연극배우인 신참 작가의 같이 제주도에 내려가 펜션을 빌려 글을 함께 쓰자는 노골적인 추파인지, 모호한 수작에 대번에 거절을 하고 애인인 듯한 남자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나선 것은 남동생(신석호 분), 한 식당에서 남동생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여성(한재이 분)과 상견례 아닌 상견레로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미래의 동생댁이 될 지도 모를 그녀에게 대놓고 남동생을 믿냐, 사랑을 믿냐며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가 하면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는 얼마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여성(이유영 분)이 그 사랑하는 이의 동료로 부터 애도와 추궁을 오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녀를 폄하하는 그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며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여성은 영화 속을 떠나, 실제로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었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통해 만났던 김주혁과 이유영의 사랑을 '배려'해주는 자리와도 같았다. 저 세상으로 흩어져 버린 사랑, 떠나간 사람의 존재가 커서, 떠나보낸 사람은 설 자리조차 없는 세상에, 감독은 사랑했던 이들을 위한 '추모'의 한 씬을 보탠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다시 돌아온 까페, 역시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두 남녀(안재홍, 공민정 분)가 그 절박한 감정을 지나 연민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을 조롱하고 엿듣기만 하던 여성은 커피 한 잔을 넘어 숨겨온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단풍'들과 그 후배들의 자리에 합석한다. 결국 우리 옛말처럼 간 사람은 간 거고, 삶은 여전히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엿듣던 여성이 결국은 죽을 것이라고 비아냥대도,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그 삶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게 마련이다. 여전히 까페 앞엔 풀잎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따지고 보면, 단풍이래도, 내일 떨어진다 해도, 풀잎은 풀잎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덧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90년대의 파릇파릇하던 풀잎이 이제 단풍이 되어가도록 묵묵히 그 세대를 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사실화처럼 나이가 들어도 제 버릇 개 못주는, 그런데 심지어 이제는 삶의 굴레에서조차 밀려나버린 그 세대를 그대로 그려낸다. 그리고 때로는 얽히고, 때로는 엇갈리며 아직은 눕기에 이른 젊은 풀잎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김수영이 그렸던, 아니 '역사 속 민초'라 해석됐던 그의 시 속 풀잎은 아니지만, 여기 또 바람에 연신 나부대는 풀잎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8. 11. 12.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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