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배우 신성일 씨가 폐암으로 별세했다. 1962년 첫 주연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시작으로 주연작만 506편,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은 그대로 한국 영화사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한 감독과 배우들은 그대로 한국 영화사를 쓴 주인공들이었다. 즉, 신성일의 이력이 곧 한국 영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족적을 남긴 배우, 그의 영전에는 같은 시대 활동했던 송해 선생을 비롯하여, 신영균, 최불암, 이순재, 안성기, 문희, 이창동, 조인성 등 다수의 영화계 동료, 후배들이 다녀갔고, 영화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또한 한때 정치에 몸담았던 그의 경력답게 이회창, 김병준, 유승민 등 유력한 정치인들이 조문을 했다. 

하지만 한때 은막을, 아니 한국 영화사를 대표했던 배우였지만, 말년에 대중들에게 각인된 신성일 씨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아내인 엄앵란 씨의 아침 방송 가쉽거리였고, 그 가쉽을 본인의 인터뷰를 통해 확산시켜 노배우의 말년을 일그러뜨렸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영화에 대한 애착이 무색하게 덕분에 2013년 출연한 작품은 노년의 열정이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었다. 대중들에게 한때를 풍미했던 아티스트가 아니라 어느덧 '가쉽'이 되어버린 스타, 인터뷰어 지승호 씨가 신성일씨의 진솔한 목소리를 옮긴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를 통해 소모된 이미지가 아닌 진정한 영화인 신성일을 알아보자. 

 

 

호떡 장수 청년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다. 
대구시 중구 인교동 한옥 마을에서 태어났다. 공무원이던 홀어머니 밑에서 '애비없다는 소리듣지 말고 얼굴값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당시 명문 경북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대로였다면 서울대를 갔었을 거라는 시절, 하지만 어머니가 계가 깨져 야반도주를 하고 대구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청년 신성일을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했다. 

대학에도 떨어지고 호떡 장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는 부끄러워 하셨지만 노배우는 그 시절을 '주위 눈치보지 않고 나를 키워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던 시절이라 회고한다. 가수가 된 동향 친구가 자신을 무시한 채 지나가버리자 '자존심'이 센 청년은 '너보다 잘 난 내가'하며 눈 앞에 띈 '한국 배우 전문학원'을 다짜고짜 찾았다. 그곳에서 이제는 누렇게 빛바랜 그의 50년 보물 양광남 감독이 처음으로 번역한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을 얻었고, 김기영, 김수용 등 당대 최고 감독들에게 배움을 얻었다. 꿈이 원대했던 청년은 엑스트라 배우를 전전하는 대신 당당하게 2640명이 몰린 신상옥 감독의 신필림 신인 배우 모집을 찾아갔고, 대번에 신감독에게 '나하고 함께 일해보자'는 소리를 듣고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신감독의 성까지 받아,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말을 풀어 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 한 일이라는 예명까지 지어받은 신인 배우 신성일의 시작이 첨부터 떠오르지는 않았다. 30kg이 넘는 자동차 배터리를 들어나르며 현장을 전전했고, 감독님 책상 옆 전화 받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승마와 검도로 몸을 만들며 때를 기다렸고,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은희 배우 중심의 신필름의 시스템에서 젊은 배우 신성일의 자리는 드물었다. 그러던 중 이제 중년에 접어든 김진규, 최무룡을 대신할 젊은 배우를 찾던 극동 흥업의 대본을 보고, 그는 따귀 한 대를 맞고 기꺼이 군 입대전 마지막 배수진으로 이 작품을 택했다. 그리고 드디어  1962년 당시 인기있던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라이징 청춘 스타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일본판 <에덴의 동쪽>이라 할 수 있는 대중 소설의 한국판 <가정교사>에 출연했고, 64년 드디어 당시 6대 신문이 입을 모아 '새로운 배우'의 탄생을 알렸던 <맨발의 청춘>에 출연, 최고의 청춘 스타가 되었다. 

배우 신성일의 시대 60년대
60년대는 한 해 200여 편이 넘게 영화가 만들어지던 영화의 전성기였다. 해방, 6.25. 4.19, 5.16의 격동기를 거친 대중들, 라디오 말고는 이렇다할 오락 거리가 없던 그 시대에 잘 생기고 이쁜 남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열광할 만한 것이었다. 냉난방은 커녕, 화장실에선 악취가 나고, 찢어지지 않은 의자가 드물었고, 화면에서는 비가 오듯 줄이 죽죽 갔지만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대표적 언론이었던 조선일보는 1960년 태평로 사옥이 있던 옆에 아카데미 극장을 열었다. 당시 극장과는 차별된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그런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개봉된 영화가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불과 18일만에 만들어졌던 이 영화로 인해 당시 조선일보가 제정한 청룡 영화상, 신문에 인쇄된 배우의 사진을 오려 엽서에 붙여 응모해야 했던 인기상에서 두 주연배우 신성일, 엄앵란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그  10년 뒤인 1973년까지 인기상은 배우 신성일의 몫이었다. 그렇게 그 10년은 스타 신성일의 시대였다. 

 

 

196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단편 소설 당선작이었던 <흑맥>으로 이만희 감독을 만난다. 그리고 다음 해 <만추>를 하게 되는데, 신성일은 이만희 감독을 머릿 속에 콘티가 다 들어있는 훌륭한 감독이라 평하며, <만추>는 구성, 배우들의 연기, 작품의 짜임새, 영상, 연출 기법에 있어서 완벽에 가까운 그가 출연했던 작품 중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다 회고한다. 

1967년에  47편, 67년에 51편 등 다작을 하는 가운데 <안개>, 신춘 문예 당선작 <무진 기행> 등을 컷백(cut back) 기법 등 새로운 연출 기법을 도입한 김수용 감독과 함께 한다.  개정된 영화법으로 우수 작품을 제작하면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져 너도 나도 '문예 작품'을 영화화하던 시절, 신성일은 황순원, 김동인, 심훈 등 한국 문학 전집에 나오는 소설가들의 작품 모두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0년대 '반공'이 국시가 되며 '반공 영화'의 의무 제작 등 사회적 분위기에 짖눌리고 거기에 더해 외국 영화 쿼터제와 엄격한 검열로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가져오며,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호스티스' 영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7년 <별들의 고향>, 1977년 <겨울 여자>로 46만명, 58만명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1976년 134편 제작 영화 중 7편, 77년 9편, 78년 4편 등으로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는 급격하게 줄어들며 배우 신성일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출연할 영화도 마땅치 않았고, 영화 정책에 대한 그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풀려했지만, 아내 엄앵란의 만류로 제작, 감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1971년 3편을 72년 한 편을 감독했고, 그러나 결국 '강신성일'로 세 번 출마, 그중 한번 당선되었지만, 결국 뇌물 수수 혐의로 실형을 사는 '오욕'으로 끝나고 만다. 

배우 신성일, 그의 연기
배우 신성일이 말하는 연기론, 그가 든 자신의 첫 번 째 덕목은 '자기 관리'이다. 안타깝게도 말년의 그가 가쉽성 스캔들로 소비되었지만,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이렇다할 스캔들이 없었다. 아니, 스캔들이 날 시간이 없었다는 게 정확하달까. 한 해에 수십 편이 만들어 지던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작품이 동시에 진행되어야만 했다. 24시간을 4등분해서 어떤 날을 8편을 찍기도 하면서 10년 이상을 보냈다. 차에서 다음 촬영 현장까지 쪽잠을 자던 시간이 가장 달콤했다던, 그는 그 시대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일'을 하며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일찌기 배우 학원 시절부터 단련했던 체력 관리. 몸 관리였다. 최무룡, 김진규 등 이미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형성되어 있던 60년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그의 경쟁력은 젊음, 그리고 단련된 몸이었다. 알랭 들롱이나, 제임스 딘같은 되고 싶었던 그는, 걸음걸이부터 고치는 등 그에 걸맞는 몸을 만들었고, 돋보이는 패션에 만들어 당대 최고의 '무비 스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뿐만이 아니었다. 82년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길소뜸> 촬영 당시에는 운동만으로 82kg에서 68kg으로 감량을 해냈다. 

 

 

대종상 연기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한 <이상의 날개>로 남우 주연상을 타고, 이후 <길소뜸>, <위기의 여자>, <레테의 연가> 등에서 계속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하여 '더빙 시대'의 스타라는 한계를 넘어섰다. 

또한 청춘 스타로 출발했지만, 60년대 후반 문예 영화로, 다시 <내시> 등의 사극으로 액션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로의 변신을 거듭했다. 이에 대해 신성일 씨는 '나 대로 신성일을 가지고 있'되, 작품의 패턴이 바뀔 때마다 내 몸을 그 속에 던져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고 회고한다. 이를 위해 나이가 들어서도 당당한 모습이었듯 늘 긴장하며 사는 삶을 늦추지 않았다 자부했다. 

 

 

 



무엇보다 베스트 셀러이자, 스테디 셀러인 배우가 되었던 이유를 신성일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에서 찾는다. 신상옥 감독의 68년작 <내시>, 영화 속 윤정희의 노출 장면으로 법정에 까지 서게 되었다. 이 영화의 출연자에는 남궁원, 박노식 등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과 함께 법정에 출두한 사람은 신성일 씨가 유일했다. 또한 감독이 시켜서가 아니라 작품 해석에 따라 노출을 감행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소신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맹장 수술, 한여름 땡볕에 액션씬을 찍다 쓰러지고 며칠, 신인 시절 깁스를 한 때를 빼고 그는 폭탄이 터져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던 미련스레 성실한 배우였다.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일하는 것이 행복했던, 그리고 후시 녹음이라는 당시의 영화 현장의 특성으로 인해 몇 작품을 함께 촬영하며 다작의 전성기를 보냈던 신성일, 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선배 영화인들의 전례가 '노예 문서'가 되어 후배들의 환경에 족쇄가 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다작을 하지는 않겠다 토로한다. 

호떡 장수를 하면서도 당당하던 청년, 스텝이나 다름없는 영화사 시절에도 미래의 배우를 준비하던 신인 배우는 그후로 6,7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시대를 냉철히 분석하고, 그 시절의 영화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감독과 배우들에 대해 애정을 놓치지 않던 배우, 하지만 치욕으로 남은 정치인 생활, 그는 후배 영화인들 중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워하는 노년을 보냈고 이제 유명을 달리했다. 박찬욱 감독 말처럼 프랑스의 알랭 들롱이나, 미국의 그레고리 펙, 이탈리아의 마스트로얀니 같다는 신성일, 하지만 우리는 고인을 과연 저들 외국의 배우들만큼 '스타'로, '배우'로, '아티스트'로 인정하고 대접했을까? 그의 인터뷰를 통해 진솔하고 성실했던 배우 신성일의 존재를 되살리는 것으로  '추모의 념'을 대신하는 건 어떨까. 

by meditator 2018. 11. 6. 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