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7회, 심덕출(박인환 분) 씨가 '알츠하이머'였음이 드러났다. 
기승주가 데려간 발레단에서 잠시 공연을 선보이며 자신감을 되찾은 덕출 씨, 덕분에 아내와의 약속에 늦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덕출 씨가 흘리고 간 수첩, 앞에는 채록의 매니저로, 뒤에는 초보 발레리나로 덕출 씨는 모든 걸 기록하려 애썼다. '할아버지는~'하며 채록이 집어든 수첩, 제일 앞 장에는 심덕출 씨의 사진과 연락처, 그리고 '나는 알츠하이머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74살, 친구의 죽음을 통해 더 나이들기 전에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보고 싶다'던 노옹의 소원은 7회를 통해 국면을 달리한다. 그저 더 나이들기 전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고, 그리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나선 길이었던 것이다. 그간 왜 그렇게 덕출 씨가 조급해 했는지, 비지땀을 흘리며 홀로 연습을 했는지 보다 명확해 진다.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라 시간이 없는 건 다른 것이니까. 

 

 

'엔드 게임' 
엔드게임,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의 저자 이현수 씨의 말처럼 어벤져스 시리즈의 부제가 아니다. '첫 늙음'을 감지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각자의 게임이다. 

'기억, 운동, 감각, 언어, 신체 등에서 예전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오류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엔드 게임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이 시간으로 재단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들어'선 이 게임의 시간에 그 누군들 억울하지 않으랴. 더구나 그 '엔드 게임'의 엔딩은 공평하지 않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도, 가진 재산이 많다는 것도, 엔딩은 불공평해서 공평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공원 벤치에 앉은 덕출 씨 눈 앞에 주마등 처럼 살아온 시간이 스쳐지나간다. 그의 마음은 발돋움을 하여 처음 발레 공연을 보고 혼자 거리에서 다리를 쭉쭉 뻗던 그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치매'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74살 덕출 씨가 울먹인다. '아버지, 어머니, 나 어떻게 해요.'

엔드 게임의 노년기는 불가항력일까?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는 이에 대해 '태도'를 말한다. ''못먹어도 고'의 상황에 놓인 자신을 충분히 자각하고, 아쉬워하고 나면 오히려 용감해지고 단단해진다고 한다. 선택의 폭이 좋아지면 훨씬 더 집중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치열하게 밀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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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밀도있게 
야심차게 발레를 시작하는 노년의 심덕출 씨를 보며 막연하게 그 '꿈'의 앞길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말 그대로 '엔드 게임'의 여정에서 심덕출 씨의 꿈에 무슨 그리 밝은 미래가 있겠는가. 거기다 조금씩 무언가를 잊는 모습을 보여주는 덕출 씨의 일상을 통해 <나빌레라>가 결국 '치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7회 마지막 수첩에 적힌 '나는 알츠하이머입니다'를 통해 <나빌레라>는 지금까지 '치매'를 다뤄왔던 다른 드라마와 다른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라는 걸 알게 된 덕출 씨는 공원에 앉아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에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암보다도 더 무서운 진단인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덕출 씨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발레를 시작한 것이다. 충분히 자신에게 닥친 병에 안타까워 하던 덕출 씨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남은 생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집중'의 결과물이 '발레'였다. 알츠하이머에 걸렸지만 밀도있는 삶을 향한 여정이다. 

동네 아줌마가 '춤바람'이라고 하는 발레를 74살의 노인이 선택하는게 어디 쉬웠을까. 당장 7회에서 '주책'이라는 말에 덕출 씨가 움츠러든다. 채록이는 연습만 해도 빛이 나는데, 덕출 씨는 연습복을 입은 모습부터가 스스로 '무안'하다. 나이듦은 '추레'하다.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그저 '존재'자체만으로 빛나는 젊음과 다르게 무엇하나 '뽀대'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덕출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운전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차도 손녀에게 선사한 덕출 씨다. 그래도 식전 댓바람부터 연습실로 나선다. 선생님 채록이가 없어도 온종일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한다. 

여담이지만 이 글을 쓰는 기자도 매일 요가와 필라테스를 배운다. 그런데 일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뻣뻣하다. 연식이 유연성을 향한 훈련을 앞지른다. 한 달된 젊은 처자들이 쭉쭉 몸을 뻗는다.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로 끙끙거리는 처지다. 그런 처지여서 그런가, 다리 한번 들면서 부들거리시는 덕출 씨에 공감 만배이다. 다리 하나, 팔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제 아무리 해도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와, 천근만근인 다리, 하지만 덕출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 꿈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아서이다. 

이모부님이 덕출씨와 같은 병마에 시달리신다.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최고의 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던 분이다. 뭐든 배우고자 하면 스스로 독학을 해서 뚝딱 해치우시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속절없이 변해가신다. 제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한 일이 많아도 '나이듦'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그 속수무책의 시간, 덕출 씨는 그냥 앉아서 자신의 병에 당하는 대신, 평생의 '로망'에 자신을 던진다. 엔드 게임의 시간을 맞이하는 덕출 씨의 태도이다. 엔드 게임의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지만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되는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고 드라마는 전한다. 

거기에 더해 나이듦의 미덕도 놓치지 않는다.  나이가 드는 건 모든 게 다 나빠진다는 것이다. 신체적 기능도, 정신적 기능도 약화된다. 하지만 딱  하나 좋아지는게 있다고 한다. 바로 '지혜'이다. 다리를 다쳐 다가올 콩쿨에 나갈 수 없어 좌절하는 채록, 기승주도, 은교수도 달래보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채록의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그때 덕출의 조언이 채록의 불안을 다독인다. 다음이 있다는 말, 그 평범한 말에 실린 덕출의 삶이 주는 '지혜'가 채록에게 한 발 물러설 용기를 준 것이다. 

<나빌레라>가 빛나는 건, 노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어서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퇴적층'이 되어가는 노년층을 지나온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갈 '꿈'을 꾸는 사람들로 그린다. 알츠하이머라는 최종 진단 앞에서도 말이다. 

나이듦은 본의 아니게 ktx에서 무궁화호로 갈아타는 상황과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 그 갈아탄 열차의 종착지가 아주 다르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 노년의 열차, 하지만 그 여행길을 어떻게 가는가는 탄 사람에 달렸다고 <나빌레라>는 말한다.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과감하게 보낼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기자 역시 지난 1,2년 사이 열차를 갈아탄 듯하다. 그래서일까, 덕출 씨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무모하게 용감해졌다. 나에게 찾아온 '인연'을 받아들였고, 그저 '하고 싶어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래서일까, 발레를 향한 덕출 씨의 눈빛에 공감 백배이다. 그건 '사랑'이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다. 

가파르게 늘어나는 노년층, 사회적 시스템은 나이듦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저 시스템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이 아니다. 각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여정의 삶에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빌레라>는 그저 치매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이듦의 시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by meditator 2021. 4. 13. 16:19

지난 2020년 4월 '하나의 사물(it)을 오브제로 정하여 세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잇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매주 목요일 밤 <다큐 잇it>이 문을 열었다. '반지하'로 부터 시작된 오브제는 마스크, 청약통장, 주식, 캠핑 고양이, 치킨, 배달까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를 종횡무진 섭렵하며 달려왔다.

하나의 주제를 통해 서로 다른 세대를 잇고 그를 통해 사회적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던 다큐의 새로운 모색, 하지만 오브제의 고갈인 건지, 아니면 낮은 시청률의 한계였던 건지, 결국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고자 했던 시도는 3월 25일 1년간의 여정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에 발을 굳건하게 딛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제작진의 노고와 열정에 감사를 드리며, 또 다른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3월 25일 다큐 잇it의 대문을 닫은 작품은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가족' 제도의 문제를 짚은 <우리는 가족입니다>이다. 

민법 779조는 '가족'을 정의한다.
1. 다음의 자는 가족으로 한다. 
 1) 배우자, 직계 혈족 및 형제, 자매
 2) 직계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 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 자매
1. 제 1항 제 2호의 경우에는 생계를 같이하는 자에 한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 입양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이다. 2021년, 과연 현행 이러한 가족법은 '현실'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 

 

 

남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아내 
김남숙 씨는 '아내'다. 하지만 '법'은 김남숙 씨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는다. 20년을 살다 헤어져 10년간 소식이 두절됐던 남편은 남숙 씨가 사는 동네 주변에서 이불 10장을 뒤집어 쓴 노숙자로 나타났다.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다'고 했지만 행려병자로 돌아온 남편이 반가웠다. '똥을 싸도 남편이 있어야 나는 행복인 거야'라고 했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지난 2월 남편이 죽었다. 임종까지 지켰지만 장례를 치룰 수 없었다. 남숙 씨가 법적인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연고 사망자가 된 남편, '법'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가족을 찾았다. 그렇게 안치실에서 20여 일이 지나서야 남숙 씨는 남편의 '장례주관자'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오랜 시간 '가족'이었던 사람, 하지만 현행 가족법은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이 있음에도, 혹은 '가족'처럼 지내는 지인이 있음에도 무연고 사망자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2020년 지침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법'과 충돌되는 점들이 많다.

74세의 김복남 씨와 84세의 권정수 씨는 복지관의 잉꼬 커플이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을 하고 시름에 겨워하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그로부터 14년을 함께 했다. 자식들이 양해를 했지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법적' 관계는 배제한 체 지난 시절을 함께 했다. 

둘이 함께 하는 생활 자체가 '장수'의 비결이라는 권정수 씨,  이제는 공주님이 됐다는 복남 씨, 하지만 아내 복남씨보다 나이가 많은 정수 씨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갈 일이 걱정이다. 

 

 

변화하는 가족 
1인 가구 중 노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젊은 세대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2015년 23.5%에서 2019년 24.9%로 그 비율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1인 가구의 '고독한 삶'에 '법'은 배려가 없다. 

노인 가구만이 아니다. 19세에서 39세가지 1083명 중 70.8%가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동거'에 대해 찬성한다. 가족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2020년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생계나 주거를 공유하거나 (69.7%), 정서적 친밀성을 유지하면(39.9%) '가족'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고 있다. 

장신재 씨의 경우, 4~5년간 자취 생활을 전전하다 보니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그러면 결혼? 아니 그녀가 선택한 건 결혼이 아니라, '셰어 하우스'였다.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방 3개의 큰 집을 얻고 함께 사는 '동반자'들을 구했다. 

 

 

서로 하는 일도, 사는 취향도 다른 다섯 명의 여성들이 한 집에 모여살기로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니 반겨준다. 연락이 안된다며 걱정해 준다.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의논한다. 어느덧 함께 사는 이들이 아침에 내는 소음들이 잠결에 정겨워질 정도로 서로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혈연'의 끈끈함 대신, 같은 가치관에 기반한 소속감으로 함께 한다. '가족'이 아니고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변화하는 시대, 달라져가고 있는 삶의 형태에 맞춰 법도 개정되어야 한다. 몇 십년을 얼굴도 안보고 산 피붙이들이 '가족'이라며 생애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대신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가족'의 권리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체조차 모호한 '정상 가족'의 낡은 관념을 덜어내고 법 밖의 가족들을 위한 '생활 동반자법'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by meditator 2021. 4. 10. 01:24

최근 tvn의 드라마 <나빌레라>가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에 눈을 뜨고 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주인공 심덕출(박인환 분)씨의 모습이 세대불문 삶과 행복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 만이 아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듯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삶의 기회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이듦은 '제한',이나 '한계', 혹은 '후퇴'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이다. 그러기에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를 해보겠다는 <나빌레라>의 심덕출 씨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난 2016년 개봉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인생 후루츠>는 어떨까? 발레에 도전하는 심덕출 씨와는 또 다른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두 부부가 우리에게 '노년'을 살아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실패한 젊은 건축가의 선택
젊은 건축가가 있었다. 일본 주택공단의 에이스였던 쓰바타 슈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해발 0m의 마을이 태풍으로 인해 수몰되자 정부에서는 고지대에 뉴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뉴타운 건축 책임을 맡게된 슈이치는 산이었던 그곳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숲이 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도시를 계획했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밀한 아파트들로 가득채워진 뉴타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슈이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300평의 땅을 샀다. 그로부터 50여 년,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키우며 키우며 그곳을 '자연'으로 꾸렸다. 그리고 뉴타운 단지 뒤의 민둥산을 도토리 나무로 무성하게 가꿨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고한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나레이션한 영화는 할머니의 흙 예찬론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농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흙이 좋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은 아파트 단지 속 뉴타운에서 숲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건축론에 닿는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영화에 소개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다. 할아버지에게 '보석상자'로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존재였다. 그의 꿈은 '개발'에 밀려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땅을 샀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50년 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도, 내 생각이 이러니 세상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접어둔 채 스스로 자신이 그러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90세가 되었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말한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어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살지도 않을 집, 이라는 할아버지의 질타 속에 '문명'이란 이름으로 지구를 오염시킨 숱한 '개발'의 잔해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할아버지 슈이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스스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가를, 어떤 공간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 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인생 후르츠> 속에 등장하는 수려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고, 일년 내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확물들을 공급해주는 농장을 품은, 사시사철 빛이 들어오는 슈이치 부부의 집이다. 

건축가 슈이치 씨가 평생 자신이 꿈꿔온 건축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자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 츠바타 히데코가 있어서이다. 월급이 4만엔이던 시절에 70만엔짜리 요트를 사겠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던 아내 히데코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87세, 그 세대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히데코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 여성의 숙명적 삶이라고만 여겨지지 않는다. 매 끼니 밥을 먹는 남편을 위해 <인생 후루츠>가 2018년 서울 국제 음식 영화제에 초빙을 받을 정도로 죽순 덮밥에서 부터 생딸기 케잌, 푸딩에 이르기까지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건 '의무'의 경지를 넘어선다. 남편의 뜻을 따르는 거, 남편이 하고자 하는 바를 평생 따라왔다는 그녀는 그런 자신의 '의지'가 결국은 돌고돌아 좋은 일로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에 '행복'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살아보면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시간보다 이루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삶이 주는 케잌은 달콤하지만, 그 케잌은 생각만큼 넉넉하게 여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거나 때론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래 살수록 인생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인생은 후루츠>는 두 노부부가를 통해 현명하게 나이들어가는 삶의 방식, 아니 나이를 차치하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남편인 슈이치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뜻을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관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좌절'하여 뜻을 꺾는 대신, 그 이후 50년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하였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 도시 전체가 다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히데코 역시 자신의 뜻보다는 늘 자신의 삶에 '가족'들부터 끌어들이는 남편으로 인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남편의 주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좋은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일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지만 자신은 단촐한 토스트 한 조작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융통성'도 놓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해온 부부, 하지만 장어 덮밥을 먹고 잠든 남편 슈이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았다. 아내는 담담하게 남편을 보내려고 한다. 대신 오래도록 남편의 영정 앞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90살이던 남편처럼 90살이 된 아내, 지난 65년 남편과 함께 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늘 남편의 뜻을 따라 살던 아내에게 지금의 삶은 때로는 덧없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의연하게 살아간다. 슈이치는 갔지만 그의 생각은 자연친화적인 병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왔듯 삶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건 영화 속에 등장한 대사처럼 '꾸준히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서 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by meditator 2021. 4. 8. 23:56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였다. 국사 교과서 실학자를 소개하는 부분에 정약전이 물고기 백과 사전과 같은 '자산어보'를 썼다고 하였을 때 시쳇말로 좀 '없어보였다.' 동생인 정약용이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등 정치, 경제 다방 면에 걸쳐 일가를 이루는 동안 겨우 물고기 책이라니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정약전에 대해 내 관점을 달리해주는 책을 만난 건 2006년이었다. 아이세움에서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한낱 물고기 책이나 쓴 정약전에 대한 내 '색안경'을 벗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음에도 '공도'정책이라는 무지몽매한 정책으로 오늘날 '독도' 문제의 빌미를 자초한 것처럼 '유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나라였다. 그런 세상에서 제 아무리 유배을 갔다해도 '선비'가 백성의 터전인 바다와 그 바다의 산물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건 정약전의 성취와는 또 다른 '실학'의 본류요,  어찌보면 '혁명적인 도전'이었다는 걸 <바다를 품은 책>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십 여년이 흘러 이준익 감독을 빌어 정약전과 그의 자산어보를 다시 만났다. 무지한 해양정책을 폈던 책상물림의 나라 조선에 분노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 수년이 흘러 다시 만난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묵직하고 깊게 다가온다. 

 

 

약전, 흑산으로 가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관직'에 나선 약전이 정조 임금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관직에 나서는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과 과학 기술에 천착했던 정약전이 '관직'으로 나선 결의를 유머러스하게하게 밝히는 장면에서 정조 임금은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정약전에 대한 믿음을 밝힌다. 그리고 '버티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정조 임금의 당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버린다. 서양 학문과 함께 수용한 '서학'이 정약전 형제의 목을 죈다. 약전이 스스로 배교자를 자처하며 애써 지키려 했지만 약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파워엘리트이자 학자였던 동생 약용과 약전은 조선 땅끝과 바다 건너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1790년 문과에 급제, 전적,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1798년 정조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는 등 뜻을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정조의 죽음과 함께 1801년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꺾였고, 홀로 바다 건너 흑산도로 향하게 되었다. 날개가 꺽이다 못해 뜯겨버린 처지인 셈이다.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는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했다'는 표현처럼 호방했다는 인물 약전, 설경구가 연기한 약전은 눈물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동생 약용(류승룡 분) 앞에서 의연히 흑산도로 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늘 밤은 으르렁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잠자는 구름 아래 어등(魚燈)이 빛을 뿜는다.
공활한 하늘이 훤히 펼쳐 있고
다닥다닥 별 떼가 반짝이는데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꺼졌다가 켜지며
반공중에 까닭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잠 못 들고 몇 개 섬을 돌고 났는지
왁자하게 흩어지는 새벽이 됐다.


제 아무리 동생 앞에서 의연하게 길을 떠났지만 겨우 300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흑산도의 유배 생활이 쉬웠을까. 그의 시, 어화(漁火)가 잠못들고 섬을 서성이는 선비 정약전의 맘을 드러내준다. 

 

 

실학자 약전, 자산어보를 쓰다
영화는 그런 복잡한 심경의 선비 정약전을 넘어, 실학자 정약용의 열의를 앞세운다. 나무로 지구의를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바늘구멍 사진기를 만들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자' 정약전 앞에 흑산은 그저 유배지가 아니었다. 농부가 밭을 갈듯, 어부들의 밭이었던 바다,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제대로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건 정약전 식의 '목민심서'였던 것이다. 

1816년 죽을 때까지 정약전은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 약전은 죽음의 순간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동생 약용마저 풀려난 유배길, 홀로 남아 끝까지 그가 남기려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날 것의 바다를 정화시킨 흑백의 화면은 오롯이 약전의 성실한 삶을 드러낸 보인다. 방대함과 정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산어보, 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껍질이 단단한 개류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류 등등 분류에서 부터, 붓으로 찍어 쓸 수 있는 오징어 먹물에서 부터 돗돔에 이르기까지 자산어보의 내용은 그 자체로 실학자 약전의 실천적 삶이다.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을 눈밝게 수용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자, 그 뜻을 정조 치하에서 펼쳐보려했던 실천적 정치가, 하지만 그 꿈은 멸문지화로 끝맸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풍운'의 꿈을 꾸던 이들이라면 여기서 자신의 뜻을 멈추지 않았을까? 더구나 조선 시대에 육지가 아닌 섬은 이 세상이 아닌 곳과 같은 의미이다. 그곳에 홀로 떨어진 학자, 정약전은 하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정약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 실학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면서도 쓴 '자산어보'는 그가 죽은 뒤 어느 집 벽지로 붙여져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가 동생 약용이 보낸 제자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렇게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에 필생을 바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영화 <자산어보>속 바다를 향한 멈추지 않는 정약전의 열정은 그걸 자꾸 짚어보게 만든다. 

거기에 <자산어보> 속 등장했던 섬소년 창대는 영화에서 약전이 흑산에서 애써 키운 '상놈'의 제자로 재현된다. '상놈의 제자'는 상징적이다. 서학쟁이라 약전을 경원시했던 창대에게 약전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고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영화 <일포스티노>의 네루다와 마리오와도 같다. 약용을 찾아간 창대가 약용이 아끼는 제자와 맞서 시 대결을 벌이는 장면, 정약용의 제자조차도 감히 '상놈 주제에'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창대는 통쾌하게 약용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런 창대를 절에서 일하는 '상놈'들이 경이롭게 쳐다본다. 

이 장면은 문자에 관심이 있어,  물고기에 밝아서 창대가 제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음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정약전이 가졌던 양반도, 천민도 없는 조선 사회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었기에 가능한 '실천'이었음을 영화는 뒤늦게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던 제자 창대는 결국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약전을 떠난다. 그리고 물론 '상놈' 창대의 높은 뜻은 세상과 조우할 수 없었다. 뒤늦게 돌아온 창대가 받아든 약전의 묵은 서신, 학 대신 검은 무명천, 그저 뭇 백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감의 의미를 집은 약전의 말은 자기 자신에 향하는 결의가 아니었을까.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한때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날개를 꺾이다못해 찢긴 약전, 그를 2021년 이준익 감독이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386이었다가, 이제 586이 되어가는 기자의 세대,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가 불과 20 여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어느덧 퇴색되고, 심지어 불명예의 상징이 될 지로 모를 기로에 놓여있다. 

586으로 상징되는 세대는 그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원심력'의 기세로 살아왔다. 그 겨울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늘 자신을 '발산'하던 세대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정약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늘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오던 세대, 어쩌면 이제 세상에, 젊은 세대에 그 몫을 물려주고 물러나야 하는 시간, 그 '퇴장'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기에 정치적 무대에서 강제적으로 '퇴장' 당한 약전의 삶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10여 년의 관직 생활, 뜻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바다 건너로 유폐당한 약전은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상놈' 창대를 학문적 벗삼아 <자산어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음으로써 약전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기억된다. 정조 연간의 관리 약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자산어보는 오래도록 남았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김훈은 정약전을 그린 소설<흑산>에서 이렇게 푼다. 흑산을 '자산'의 스토리로 다시 쓰는 삶,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by meditator 2021. 4. 5. 23:06

 

'트라우마'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다큐 영화 <당신의 사월>은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의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인천 항을 떠난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침몰의 순간부터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 배의 침몰을 통해 우리는 시스템, 나아가 사회, 결국 '국가'의 침몰을 확인했고 결국 그 책임을 당대의 대통령에게 물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 사회 전체의 상흔이었다.

그리고 7년, 우리는 그 해 4월로 부터 어디쯤 와있을까? 타인의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도 겪는다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었을까? <당신의 사월>은 유가족이 아닌 그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드리워진 세월호의 그림자를 살펴본다.   

 



그 해 4월, 다른 곳에서 

서촌에서 커피 공방을 10년째 하고 있는 박철우 씨는 지난 촛불 집회 때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 '심야 식당'을 했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께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씀에 그럼 함께 하자며 나섰던 것이다. 평범했던 커피 가게 사장님이던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통의 전화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동네 박사장의 전화였다. 여의도에서 농성을 하던 유가족들이 밤을 걸어 청와대로 향하니 뜨거운 물이라도 준비해달라는 전화 한 통에 그는 유가족을 맞이했다.

기사로만 접하던 세월호, 유가족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추운 봄날의 새벽, 담요을 둘러쓴 채 묵묵히 걸어오는 가족들을 보며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심정이 앞섰다. 차마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라고 말조차 걸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박철우 씨의 4월은 첫 걸음을 뗐다.    진도의 어부였던 이억년 씨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좌초 현장으로 나갔다. 거의 5~10 미터 근처까지 갔을 때 왔다갔다 하는 '물체'를 목격했다. 미역 양식줄에 꼬여 올라온 하얀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부의 4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조수진 씨는 옆 자리 선생님이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에서 세월호를 만났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기에 남의 일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구하겠지 했었다. 계속 속보가 이어지는 상황에 본의 아니게 b급 호러 무비의 관람객이 된 듯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인천항이 가까운 학교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뱃고동 소리에 자꾸만 세월호가 오버랩됐다. 교실이 마치 배같았다.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권수영, 윤인아 선생님은 자신이 살아오지 못할 꺼라는 걸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교사의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부모님 얼굴이 스쳐지나갔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촛불 집회에서 전교조 대표로 조수진 선생님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집안 곳곳에 노란 리본을 비롯하여 세월호와 관련된 기억들을 붙여놓았다.  '잊지않겠습니다'라는 취지로 아이들과 함께 추모 수업을 하고 모임을 가진다. 선생님에게 세월호는 현재형이다. 자발적으로 추모 모임을 이끌어 가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의 씨앗'을 느꼈다. 버티니 '희망'이 보였다.

인권운동가이던 정주연 씨는 진도 앞바다로 달려갔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주연 씨의 4월은 시작되었다. 그저 곁에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온전히 들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곁에서 지켜 본 유가족의 무게는 무거웠고 슬픔은 깊었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피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꺼내어 보이며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다시 예전 으로 돌아가는 엄마들, 하지만 관광객이라도 오면 고개를 숙였다. 사회가 짊어지우는 피해자다움, 유가족다움이 가족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유가족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잠수사들, 하지만 마치 delete 버튼을 누르듯 그들을 지워버린듯하는 사회와 국가, 여전히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는데 '지겹다'고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악몽을 꾸어가면서도 화가인 정수진 씨 남편은 잠수사들의 모습을 남기려고 애쓴다. 정주연 씨네 방식의 '잊지않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당시 고 3이었던 이옥영 씨는 '수능'이라는 현실에 가급적 세월호와 관련된 기사를 접하지 않으려 했었다. 수능을 마치고 세월호 기억 교실 대신 만들어진 기억저장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이옥영 씨의 미래는 달라졌다.  시간과 함께 세상에서 '유실'되어가는 세월호의 흔적들을 보며 '기록관리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던 돔마저 철거되었지만 어부 이억년 씨의 집 안에는 여전히 돔이 한 채 남아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진도 앞 바다에 온 세월호 부모님들을 이억년 씨는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다. 영화 내내 카메라로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던 문지성 학생의 아버님 문종택 씨는 딸이 있는 그 바다가 가장 편하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자신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억년  씨와 모처럼 웃음을 나눈다.  

영화는 세월호로 인해 삶의 시간이 변화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영화가 끝나고  '도움을 주신 분들'의 마지막에 '그리고 당신'이라는 자막처럼, 또 다른 우리들일 수도 있다. 세월호가 좌초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모두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를 그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은 아직도 저마다의 사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노란 리본은 현재형이다. 우리의 노란 리본은 어디쯤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트라우마>의 주디스 허먼은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by meditator 2021. 4. 5. 15:03

나에게 처음 '미드'라는 신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준 드라마는 sbs를 통해 방영된 <ER>이었다. 199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NBC를 통해 방영되었던 <ER(Emergency Room )>은 시카고 카운티 종합병원 응급실을 배경의 의학드라마이다.


'의사'라고 하면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특별한 사람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ER>속 의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고달픈 직장인들이었고, 월급을 넘어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자신의 직업적 이상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내 눈길을 끌었던 건 '부'의 국가 미국에서 의료 보험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로 인해 의사들이 '도덕적'인 고뇌에 빠지는 모습이었다. 전국민 의료 보험제도가 당연한 사회에 사는 사람에게 비춰진 '부'의 이율배반적인 민낯이었다. 

 

 

<ER>로부터 20년, 미국은 달라졌을까? 
내가 <ER>을 시청한 것이 2000년대 초반, 그로부터 어언 20여년 미국의 의료 현실은 달라졌을까?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뉴암스테르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뉴욕 한 복판에 있는 공립 병원 <뉴암스테르담>, 그런데 왜 뉴암스테르담일까? 영국의 점령 이후 새로운 요오크라는 명칭의 '뉴욕'이라고 불리기 전에 네덜란드가 점령하여 네덜란드의 수도 이름을 따서 새로운 암스테르담이라 불렸다던 뉴욕, 즉 오래된 뉴욕의 지명이 병원의 이름인 것처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병원인 벨에뷰 병원의 병원장이었던 에릭 만하이머(Eric Manheimer) 박사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하여 드라마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ER>로 부터 20여년 미국 사회는 나아지지 않았다. 공공병원은 있지만 그곳에서 '공공 의료'는 쉽지 않다. 여전히 의료 보험은 가난한 자들에게 그림의 떡이다. 항생제만 있어도, 기본적인 인슐린만 있어도 해결될 '병고'가 다리를 절단하고 응급실에 실려오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학교의 기간제 교사가 가장 기본적인 당뇨병 치료제를 구하지 못해 쓰러지고, 의료 체계에서 방치된 환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교통사고를 내서 보험 혜택을 받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한다. 여전히 <뉴암스테르담>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들의 제일 첫 마디가 '보험이 없는대요'이다. 20년 전에도 보험이 없어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던 환자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의료의 치외법권 지대에 놓여있다. <뉴암스테르담>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미국의 현실이다. 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이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발생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들이 드라마의 시즌1,2를 채운다. 

그렇게 돈이 있어야 치료도 받고 목숨도 보장받을 수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그것도 미국의 심장이라는 뉴욕 한 복판에 오래된 공립병원이 있다. 하지만 말이 공립병원이지 이른바 '합리적인 경영'을 앞세운 뉴암스테르담은 '영리' 추구를 우선으로 하는 병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데도 여전히 공립 병원으로서 어려움을 겪던 와중에 새로운 의료 팀장으로 맥스 굿윈(라이언 이골드 분)이 부임한다. 

부임하자마자 새 의료팀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돈이 되는 수술에만 골몰하던 의료진들을 '해임'하는 것이었다. 대신 병원장과 이사장이 대놓고 '그건 사회주의야'라며 난색을 표명하는 실질적인 조치들을 과감하게 실천해 나간다. 

 

 

공공의료의 본령, 뉴암스테르담
공공병원은 말 그대로 '공공의 의료'를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병원이다. 하지만 병원의 경영이라는 목적이 내세워지며 공공 의료는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회주의라며 병원 운영진의 항의를 받은 맥스 굿윈의 시도는 사실 '심플'하다. 공공의료기관으로서 뉴암스테르담의 본령을 되찾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거기를 지나던 맥스 굿윈의 눈에 상처를 치료받지 못해 곧 썩어들어 갈 것같은 다리로 인해 고통받는 노숙자 여인이 눈에 띈다. 맥스는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지 병원으로 데려오려고 한다. 치료비가 없다는, 보험이 없다는 그녀에게 말한다. 뉴암스테르담은 공립병원이라고. 치료비를, 보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공립병원이지만 사람들은 보험이 없이는 치료받을 수 없는 미국 의료 체계에 길이 들어 공립병원인 뉴암스테르담조차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맥스 굿윈은 뉴암스테르담 카드를 만들어 뉴욕 곳곳에 돌린다. 그러자 이사회장은 반대를 한다. 뉴욕 시민들이 뉴암스테르담이 공립 병원인 걸 알면 병원이 망한다며. 

맥스 굿윗이 극중 에피소드를 통해 벌이는 일들은 사실 공립 병원으로서 '상식' 차원의 일이다. 아픈 사람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는 그 '상식'이 그런데 이상주의가 되고, 사회주의가 되며, 병원을 망하게 할 지도 모를 일이 되는게 오늘날 미국의 현실이 되었다.

물론 맥스 굿윈의 '상식'이 도발적이긴 하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당뇨 치료제인 인슐린을 구할 수 없는 상황, 맥스는 그 원인을 인슐린을 비싸게 공급하는 거대 제약 회사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제약 회사와의 담판을 치루고자 하는 맥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자 맥스는 병원 내 실험실에서 인슐린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물론 반대에 봉착한다. 이번에는 인슐린을 상대적으로 싸게 파는 캐나다에서 인슐린을 공급받고자 한다. 그 시도도 인슐린 구입 트럭이 국경을 넘지 못해 실패한다. 그러자 방송을 통해 인슐린조차 구하지 못하는 환자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맥스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거대 제약 회사의 인슐린 가격을 내리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 실패일까? 인슐린을 공급받지 못해 쓰러졌던 기간제 교사에게는 무료로 평생 인슐린이 공급되었다. 겨우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맥스는 자신의 환자를 우선 살렸다. '인간의 얼굴을 한 맥스의 공공의료는 이런 식으로 한 발자국씩 앞으로 간다. 

그의 무모하고 맹목적인 시도는 늘 병원을 파산으로 이끈다고 위협받는다. 비효율적이라 비판받는다. 하지만 그럴까? 병원의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앙케이트에 냉소적인 직원들의 상황을 살피던 그는 오랜 출퇴근 시간으로 피로에 쩔어사는 직원들을 위해 '통근 버스'를 마련한다. 통근 버스를 시행함으로써 업무 효율성을 올리는 방식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오래된 관행적 업무로 인해 실제 업무를 하지 않으면서 월급을 받는 비효율적인 직원들을 재배치한다. '휴머니즘'이 비효율적이거나 무능하지 않다는 반례를 만든 것이다. 

에릭 만하이머 박사의 원작을 기반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암스테르담>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는 21세기의 미국에서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이상주의적'인 사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몽상적'이라 할만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래서 <뉴암스테르담>은 신선하다. 여전히 21세기에도 '인간의 선의와 의지'가 보다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는 '시도'가 될 수 있다는 서사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적'이다. 사이코패스와 좀비, 보다 강력하고 잔인한 범죄들이 드라마적 요소가 되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인간의 선한 얼굴에 대한 믿음과 그걸 통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해 나가는 모습이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조차 상실되어가는 낯선 휴머니즘을 오랜만에 '재회'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by meditator 2021. 3. 29. 16:56

처음이 아니다.

3월 22일 새로이 시작한 <조선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에 부딪쳤다. 좀비를 연상시키는 '생시'로 인해 왕자마저 위 협을 받는 상황, 태종 이방원(감우성 분)은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한다. 로마 교황청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 요한 신부 의주에서 그를 맞아 대접하는 장면에서 '월병' 등의 중국 음식이 상에 그득 쌓여 있었다. 왜 로마 교황청에서 온 신부를 대접하는데 '중국' 음식이어야 하는가?

하지만 <조선 구마사>의 본질적 문제는 그런 한 장면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조선 구마사>의 문제는 이미 박계옥 작가의 전작 <철인 황후>에서부터 제기되었던 바 있다. 하지만 단지 시청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성황리에 드라마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시작된 <조선 구마사>, 드라마 속 장면이 보이는 국적 불명의 상황으로 인해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구마사> 공식 페이지에는 작가 박계옥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러나 박계옥 작가가 <철인 황후>에 이어, <조선 구마사>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세계관은 드라마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연상시키는 '좀비'들의 역습으로 시작된 드라마 <조선 구마사>, 하지만 <킹덤>과 <조선 구마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역사'이다. 조선인듯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가지만 <킹덤>은 '조선'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왜란 이후 조선 어느메쯤이라고 연상은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환타지적' 공간이다.

<킹덤> 역시 왕실을 '능멸'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왕은 좀비가 되고 왕가의 혈통은 '아무개'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걸 보고 '역사 왜곡'이라고 하지 않는다. 조선인 듯하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진 가상의 봉권적 권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누군가가 되는 순간 서사의 뉘앙스는 달라진다. 

대놓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냉소하는 드라마 
<조선 구마사>는 대놓고 태종 이방원이 통치하던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한다. 10년전 생시와의 싸움을 끝으로 평화를 되찾은 조선, 하지만 다시 '생시'가 등장한다. 그 생시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사절단으로 찾아온 요한 신부, 그에게 훗날 세종이 될 충녕(장동윤 분)은 생시 출몰의 원인을 묻는다. 그러자 뜻밖에도 태종과 태상왕 태조 이성계에게 그 이유를 물으라는 대답이 나온다. 

태종에게 밉보인 세자 양녕(박성훈 분) 역시 원명왕후(서영희 분)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원명왕후는 '네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알게 될 것'이라며 답을 피한다. 두 상황을 통해 눈밝은 시청자라면 10년 만에 다시 조선에 등장한 '생시'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즉,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은 마치 영생을 위해 악마와 거래를 한 파우스트처럼 손을 빌어서는 안될 세력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생시'로 인한 작금의 사태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된다. 이러한 극의 톤은 극중 요한 신부를 대접하는 과정에서 선조 '목종'도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자조적인 대답을 하는 충녕을 통해 '용비어천가'의 정당성을 냉소한다.

 

 

조선 왕실에 대한 박계옥 작가의 비판적이다 못해 조소하는 듯한 시선은 이미 <철인 황후>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중국 드라마 리메이크 작이라는 태생적 한계라는 점을 감안해도 현재의 남자가 과거의 황후의 몸에 빙의되어 왕과 로멘스를 벌이는 기본적인 스토리가 가지는 불온함은 <철인 황후>에서도 역시 왕실을 희화화하는 여러 설정과 함께 시청자들의 역사적 우려를 자아냈다. 하지만 '재밌'으면 된다는 시청자들의 화답으로 <철인 황후>는 무사히 막을 내렸고, 결국 <조선구마사>의 사태를 불러왔다.

늘 아버지 태상왕에 대한 심적인 부담을 안고 있던 이방원은 10년 전 의주에서 그 '트라우마'로 인해 애꿏은 백성들을 '집단 살상'한다. 태종이 조선 건국 과정에서, 그리고 왕자의 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만 그것과 첫 장면에서 보여진 백성들의 집단 살상 장면을 전혀 다른 차원의 '살상'이다. 드라마는 이렇게 묘하게 역사적 사실이 가진 뉘앙스를 변조한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인한 정변과 무차별 학살은 엄밀하게 다른 문제인 것이다. 

물론 21세기에 과거 봉건 시대의 왕조에 대해 '퓨전'의 관점에서 사실을 비트는 것이 큰 문제가 있겠냐 싶을 수도 있다. 영국 국영방송인 bbc에서 방영하는 <닥터 후>를 보면 영국 왕실이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와 20여부작의 역사극과는 그 영향력이 다르다. 특히 동북 공정으로 중국이 자국의 역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왜곡'도 마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틀기를 넘어선 '퓨전으로서의 역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 <조선구마사>는 고민을 남긴다. 

19금의 자극적 설정만으로는 어설픈 서사 
그런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생시'를 불러올 만큼 불미스러운 정당성을 가진 태종조 조선에서 다시금 '생시'로 인해 벌어지는 사태의 양상이 어설프다. 19금이라는 자극적 설정 기준을 내세워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르는 등 자극적인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 끌고자 한다. 

첫 회 8.9%에서 단 한 회만에 6.9%로 떨어진 시청률에 대해 제작진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논란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드라마가 자극적이기만 하고 어수선하다. 

 

 

'생시'에 대한 원죄를 가진 이방원과 그의 두 아들 양녕과 충녕 사이에 벌어진 왕위 승계의 갈등을 '구마'라는 특이한 설정을 통해 풀어보려고 하는데 1회에 이어 2회에 드라마가 벌여놓은 구도가 산만하다. 태종과 양녕, 그리고 충녕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유기적 연결 없이 나열된다. 요한 신부, 그를 대접한 중국 풍의 식탁, 그리고 어설픈 국무당의 굿판 등 국적 불명의 설정들이 사극으로서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냉소적으로 조롱하면서도 정작 그를 '퓨전'으로 이끌어 가는 방식 또한 어설프다. '구마'라며 뜬금없이 십자가를 든 신부가 등장한다. '구마'라는 설정을 만들어 놓았지만 상상력이 빈곤하다 보니 결국 <손 the guest>신부님을 초빙한 것인가. 조선 왕조가 끌어들인 생시를 위한 구마 의식이 십자가요 성수라는 상황에 실소가 나온다. 하다못해 <손 the guest>의 전통 무속이라도 참조하기라도 했으면 나을 것을 궁궐 한 가운데서 벌어진 국무당 무화(정혜성 분)의 굿판 역시 정체불명이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엑소시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니 결국 시청자의 시선을 잡을 수 있는 방식이 '생시'들의 난립과 목을 자르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19금의 설정 밖에 없다.  ost는 웅장하지만 그 웅장함을 버텨나갈 서사가 빈약하다. <육룡이 나르샤>, <녹두꽃>의 신경수 피디가 맞는가 싶다. 드라마는 한껏 봉건적 권위를 조롱하지만 정작 그 이후에 풀어가는 서사는 자극적 장면 외에 시청자들을 흡인하기에 부족하다. 




by meditator 2021. 3. 24. 16:37

'하루가 너무 길어'. 

<나빌레라>의 주인공 덕출(박인환 분)이 편의점 배달원으로 일하는 후배에게 툭 던진 말이다.  이 보다 노년을 잘 설명한 말이 있을까? 

심덕출 씨는 한국 전쟁 때 태어났다. 쌀가게 점원이었던 아버지는 덕출이 몸쓰는 일 대신신 펜쓰는 일을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덕출은  77년 집배원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평생을 우편 배달원으로 살다 퇴직했다. 최해남(나문희 분)과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고 가장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아이들도 다 크고 은퇴도 했다. 이제 일흔, 하루가 너무 길다. 

하루가 긴 덕출은 가끔 요양원을 찾았다. 친구 교석이 있기 때문이다. 처자식도 들여다 보지 않는 교석을 덕출은 찾아간다. 그런데 이제 그 마저도 갈 수 없게 되었다. 평생 배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배 전진호를 완성하지 못했다던 친구는 어느 날 밤 자신의 방 창문 앞에 펼쳐진 바다에 종이배 '전진호'와 함께 떠났기 때문이다. 

'늙으면 이별도 익숙해지니까' 친구를 보냈다. 하지만 마지막 만났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덕출의 가슴에 남는다. '덕출아, 너는 가슴에 품은 게 있냐? 지금이다. 아직 안늦었어. 다리에 힘있고 정신 말짱할 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저는요, 한번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를 끌어당긴 음악 소리, 그곳에서 다시 덕출의 가슴이 뛰었다. 발레를 하는 채록(송강 분)을 보며 자신도 다시 한번 훨훨 날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하기로 했다. 나이 일흔, 너무 늦었을 지 몰라도,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다. 

일흔, 꿈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 22일 첫 선을 보인 tvn의 월화 드라마 <나빌레라>는 이미 다음 웹툰을 통해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Hun 글, 지민 그림으로 2016년부터 연재된 웹툰 <나빌레라>는 '발레'라는 생소한 소재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하는 70대 노인과 방황하는 20대 청년을 조우케 한다. <나쁜 녀석들>, <청일전자 미쓰리> 의 한동화 피디와 <터널>의 이은미 작가가 의기투합했고 덕출 역으로 박인환 배우와 그의 아내 해남에 나문희 배우가 합류했다. 이미 두 분의 출연만으로도 <나빌레라>의 정서적 온도가 전달된다. 

드라마는 일흔의 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덕출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너무 길다.'는 덕출의 대사는 나이든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애써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나 역시도 아침에 눈을 뜨면 시작도 하지 않은 오늘 하루가 무거운 경우가 많다. 힘들다 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던 시절에서 '방출'된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막막함이 아닐까 싶다. 

 

 

'저는요. 한번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까지는 아니라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시간은 삶의 방점이 늘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에게,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찍혀져 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면 그 '가족'에 찍혀졌던 방점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직장'에 다니며 '가장'으로 살아왔던 아버지의 자리는 '정년'과 함께 삶의 또 다른 국면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가게 된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던 그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여의치 않은 시절, 그게 바로 나이듦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물론 <나빌레라> 속 덕출의 아내 해남처럼 여전히 다 큰 자식들을 자신의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말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그저 품안의 자식이라 여기고 싶은 경우가 많다. 아직 풀어내지지 않았지만 덕출의 도전만큼 자식과 남편까지 끌어안고 사는 해남의 행보도 그래서 궁금하다. 

우리는 살아가며 온전히 '나'로 서기를 갈망하지만 막상 온전히 '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면 두렵다. 왜냐하면 '나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빌레라>의 덕출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나이 70에 후배가 하는 패스트푸드점 배달 일이라도 하고자 한다. 

그런 덕출에게 죽어가던 교석이 메시지를 던졌고, 발레를 하는 채록이 영감을 깨운다. 홀로 발레를 보러다니고 은퇴한 발레리노 승주의 팬이라 할만큼 발레를 좋아했던 덕출이 관객의 자리를 박차고 '무대'에 서고자 한다. 

왜 발레였을까? 70대의 발레는 덕출의 말대로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우리 사회는 늘 '승산있는 싸움', '성공', '쟁취'가 화두가 되는 사회다. 덕출이 하겠다고 나선 '발레'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사회의 '링'에서 내려온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덕출의 세대는 평생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언감생심'이었던 세대일 것이다. 어디 덕출뿐이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려왔던 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한 켠으로 밀어두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데 자식을 다 키우고, 정년을 하고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으로 서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다가온다. 남은 노년의 시간, 심지어 의학의 발달로 살아온 시간만큼은 아니지만 몇 십년이나 남은 시간을, 오로지 '나'만이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고. 늙은 사람들이 보내는 나머지 시간이 아닌 주체적으로 늙음을 살아가기 위한 질문을 드라마는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나빌레라>는 길고 긴 시간을 '나'로써 살아가야 하는 노년에 대한 유의미한 숙제를 안긴다. 과연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발레를 보는 덕출처럼 당신의 가슴이 설레이고 뛰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 희망의 과정을 12부작 <나빌레라>가 함께 한다. 

by meditator 2021. 3. 23. 16:38

3월 21일 10회를 맞이한 tvn 금토 드라마 <빈센조>는 11.4%로 자체 최고 시청률를 갱신했다. 지난 몇주차 동안 대놓고 주인공들이 '고구마'를 먹으며 바벨 그룹과 법무법인 우상과 지리멸렬한 공방전을 벌이던 드라마는 10회 드디어 '사이다'를 내세우며 '반격'을 개시했다. 

영화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세탁소 탁홍식(최덕문 분) 씨의 가위 액션씬에 이어,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총격씬을 등장시키며 속시원하고 화끈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드라마의 캐치프레이즈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위와 총', 이렇게 잔혹한 살상 무기를 앞세워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게된 건 바로 선한 악이 작동할 수 있도록 본연의 악이 '판'을 깔아주었기 때문이다. 

 

   

 

빈센조 상승세에 판을 깔아준 사이코패스 재벌 
판을 깔아준 '악', 거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다름아닌 바벨의 실질적 '오너'인 장준우(옥택연 분)이다. 어수룩한 바벨의 인턴 변호사로 홍차영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가 알고보니 현 바벨 회장 장한서(곽동연 분)의 이복 형이다. 동생을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는 그는 스스로가 세상에 군림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문제는 그 '신'의 방식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죽음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촉하고, 허수아비 이복 동생이 맘에 안들면 하키 채로 가차없이 구타를 하던 그의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이제 빈센조에 의해 그가 꿈꾸던 바벨의 사업들에 태클이 걸어지자 폭력적으로 발산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돈을 받아먹고도 거들먹거리던 남부지검의 검사들을 납치 동생을 패던  하키 채로 막무가내로 패서 죽여버린다. 또한 아버지를 죽인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던 병원장의 말로도 다르지 않다. 결국 바벨 제약의 신약 개발이 수포로 돌아가자 희생자 유가족들을 몰살한다. 이제 그가 이탈리아로 보낸 심부름꾼이 빈센조가 여느 변호사가 아니라 마피아의 콘실리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웃으며 '그럼 죽여야지'라고 말한다.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 출신 빈센조가 그의 고객이 숨겨둔 금괴를 '인출'하고자 방문한 한국에서 '바벨 그룹'과 얽히며 본의 아니게 '정의의 사도'가 된다는 드라마는 이제 중반부에 들어서며 마피아 출신 변호사의 '장기'를 살리기 위해 바벨 그룹 총수의 '사이코패스'적 장기를 한껏 발휘케 한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를 만날 수 있는 드라마가 <빈센조> 만이 아니다. 역시나 상승세를 타고 있는 tvn의 수목 드라마 역시 '사이코패스' 가 주인공이다. 특히 이 드라마는 대를 이은 사이코패스를 등장시켜 과연 누가 사이코패스의 아들일까를 두고 진짜 사이코패스 찾기로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던 두 임산부, 그녀들이 낳은 두 아이가 성장한 현재, 과연 누가 사이코패스로 '살인'을 폭주하고 있는가가 <마우스>의 관전 포인트이다. 그리고 이런 '관전 포인트'답게 1회부터 아버지 사이코패스 한서준(안재욱 분)에 이어 이제 아들 사이코패스의 '살인'이 매회 잔혹하게 벌어진다. 

사이코패스 찾기 드라마는 jtbc에서도 계속된다. 한 마을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고 있던 연쇄 살인 사건을 둘러싼 형사와 범인들의 공방전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 <괴물> 역시 '사이코패스'가 빠질 수 없다. 드라마 속 어리숙한 슈퍼 아저씨로 등장했지만 사실은 사이코패스였다는 이규회의 연기가 화제가 될 만큼 드라마가 이 캐릭터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어디 범죄드라마 뿐일까. 열화와 같은 시청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시즌 2로 돌아온 명실상부 시청률 1위의 sbs 주말 드라마 <펜트 하우스2>를 보면 범죄 드라마가 무색해질 지경이다. 계단으로 밀치고, 날카로운 트로피로 찍는 등의 폭력적 장면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목적과 욕망을 위해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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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가 그렇게 흔한 존재인가? 
시청자들은 결국 일주일 내내 드라마를 통해 '사이코패스'들을 만난다. 그렇게 사이코패스가 흔한 존재인가?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이다.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 기능이 일반인의 15% 밖에 되지 않아 공감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또한 공격적 성향을 억제하는 세로토닌이 부족해 폭력성을 조절하기 힘들다. 이런 사이코패스들이 인류의 2%에 해당한다.(괴물의 심연, 제임스 펠런, 더 퀘스트)

그런데 불과 2%에 해당하는 이들 사이코패스들이 요즘 대부분 드라마의 단골 악역이다. 드라마 속 악역들은 '사이코패스'답게 더 잔인하게 더 폭력적으로 악의 향연을 벌인다. 

물론, 타인과의 공감력이 떨어지는 반면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이코패스가 사회적 지도층이 되거나 특히 최고 경영자 중  그 비율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빈센조>의 장준우처럼 그들의 무자비함이나 냉철함과 같은 면이 그들의 사회적 성공에 견인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케빈 더튼, 미래의 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인구의 1~2%에 불과한 사이코패스가 드라마 속 주된 악역 캐릭터로 남발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분명 문제가 있다. 개연성 따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가 더 악한가의 향연과도 같은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가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잔인함'이 범죄의 대명사가 되다보니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는 범죄 드라마가 성립되지 않는 듯한 현상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특히 <빈센조>의 경우 시작은 바벨이라는 부도덕한 재벌과 거기에 기생하는 법무법인 우상, 그리고 그 뒷배를 봐주는 검찰의 커넥션이 드라마 속 주된 '거악'이었다. 하지만 중반부에 들어선 드라마는 구조적인 재벌 커넥션 대신, 재벌 회장의 사이코패스적 행태에 촛점을 맞춘다. 구조적인 '비리'가 개인적인 일탈로 치환되어 가는 것이다.

법무법인 우상 역시 마찬가지다. 우상으로 스카웃된 최명희 검사(김여진 분)은 장준우와 의기투합한다. 거기엔 앞서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된 홍유찬 변호사를 거침없이 제거했던 최명희의 범죄적 선택이 있다. 과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악이 그런 사이코패스적 행태때문일까. 외려 일상적이고 체계화된 '악'이 문제가 아닐까. 혹시나 그런 구조적인 악에 대해 밀도있고 집요하게 파헤치고 대적해낼 서사의 부족을 '사이코패스'로 퉁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by meditator 2021. 3. 22. 16:57

'사흘', 이 단어의 뜻을 아시는가? 그렇다면 '양성', 이나 '음성'은? 
누굴 놀리냐고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19의 상황 포탈 사이트에 많은 사람들이 '양성'과 '음성'의 뜻을 물었다고 한다. 심지어 '사흘'은 2020년 광복절 연휴 이후 사흘간 연휴라는 정부 발표 이후 실검에 오르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하루, 이틀, 사흘'의 그 사흘인데 많은 사람들이 4일이라고 알았던 것이다. 심지어 기자들 조차 '4흘'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단다.  

그 정도야 한다면 이건 어떨까? 
 

 
ktx 홈페이지에 있는 열차표 금액 계산 실례이다. 성인 남녀 880명을 대상으로 '복약 지도서, 주택 임대차 계약서, 직장 휴가일 수 계산' 등과 같은 일상 생활에성 자주 쓰는 문장으로 시험을 봤다. 결과는 평균 54점이 나왔다. 

oecd국가 중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낮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위의 시험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글을 읽어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글을 이용해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문해력'에 있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ebs는 지난 1년간의 준비를 거쳐 6부작 문해력 프로젝트 <당신의 문해력>을 3월 8일 부터 방영 중이다. 

 

 

문해가 안되서 공부를 포기하는 현실 
딱딱한 다큐만을 보여주는 형식에서 탈피하여 김구라, 이현이, 알베르토 몬디 등과 한양대 조볌영 교수, 한겨레 김진철 기자 등이 패널로 참가하여 문해력의 문제를 집중 파고든다. 

'사흘' 정도는 비웃었지만 막상 열차표 계산으로 가면 막막해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문해력'은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학교 현장에서는 심각하다. 

영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실, 그런데 막상 수업을 들여다 보면 학생들이 선생님이 해석해 주는 '한글 단어'를 몰라서 수업이 진행이 안된다. 모르는 뜻에 손을 들고 '몰라요'라고 하라는 선생님의 요구에 아이들은 한 페이지 당  무려 14번 손을 들었다.

'보모', '변호', '피의자', '출납원', '상업 광고', 등


아이들이 모른다고 했던 한국말이다. 아이들은 캐셔는 알아도 캐셔의 뜻인 출납원은 모른다. 사회 수업은 한 술 더 뜬다. 기생충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선생님, 봉준호 감독이 애초에 기생충이라는 제목 대신 가제로 '데칼코마니'라고 했던 설명에서 부터 얹힌다. '가제'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랍스터'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동물체의 양분을 빨아먹는다는 '양분'이나,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 간의 '위화감'을 알 리가 없다. 선생님은 단어를 설명하느라 진도를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진도를 나갈 수 없는 '반'이 제법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라는 것이다. 

 

 

중학생 2400 명을 대상으로 문해력 테스트를 했다. 27%가 또래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초등 수준 정도에 머무르는 학생들도  11%나 됐다. 초등 수준의 학생들에게 중학교 교과서는 당연히 '무리', 그러니 공부를 포기하게 된다. 

공부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해 늘어난 비대면 수업, '연말 특별 강화 대책'처럼 글로 전달하는 내용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이들은 읽었다고 하는데 등교하는 날조차 '인지'하지 못해 일일이 전화해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한다. 

글을 이해하는 능력도 떨어지지만 이른바 '스압주의'라는 유행어처럼 줄글,  검은 글씨, 긴글 자체를 읽지 않으려는 경향도 '문해력'에 있어 지대한 저해 요소로 작용한다고 한다. 2000년 5.7%에서 2018년 15.1%로 지난 10년 사이 읽기 능력 부진한 학생들의 비율이 3배나 증가했다. 

 

 

영상시대 문해력은 필요할까? 
물론 문해력에 대한 우려에 대응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영상의 시대 과연 굳이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카드 뉴스'나 '포스터', 나아가 '영상'처럼 보다 쉬운 방식을 통해 전달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최근의 경향성에 대해 프로그램은 공기업에 근무하는 염기철 씨의 사례를 예로 든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신의 직장에 입사한 기철 씨, 직장 내 진급 등을 위해 정보 관련 자격증 준비를 하는데 쉽지 않다.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나 읽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간 도전했지만 번번히 고배를 마신 상황이다. 제작진이 준비한 문해력 테스트, 11문제 중 겨우 5문제를 맞혔다. 그래서일까 직장에서 기철 씨가 작성한 문서가 자주 반려된다고 한다. 32살, 남들이 보기엔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들어갔으니 다 끝이라고 하겠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기철 씨에게 '문해력'은 인생의  걸림돌이 된다. 

실제 기업 10곳 중 6곳에서 젊은 세대의 국어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보고서나 기획안 등 문서 작성 능력이 부족하고, 구두 보고나 이해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이다. 가장 간단하게 '수신, 발신, 참조'라는 단어도 모르는 젊은 세대,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신입사원을 뽑아놓고 다시 대학 국어학과 교수를 초빙하여 공부를 시키는 기업도 등장한다.

oecd조사에 따르면 언어 4.5등급과 1등급 사이에 연봉 2.7배, 취업률 2.2배, 그리고 건강 마저도 2배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왜 그럴까? 뇌의 상태를 조사해보았다. 평균 1년에 20권 정도를 읽는 사람들과 한 권이나 읽을까 하는 사람들과 전전두엽 활성화 정도를 검사한 결과 활성화 기능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글의미를 파악하는 인지적 능력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활성화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글'만 읽고 있을 때, 인지적 능력이 높은 사람은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의미를 파악하는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물론 읽기 능력은 후천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등이 문해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문해력 시험을 보는 등 국가적 대응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문해력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던 기자는 <당신의 문해력>이 제기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매우 공감한다. 프로그램은 그저 '단어' 파악을 못한다고 했지만,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입말' 중심의 초등 교육 과정에서 '문어체'가 교과서의 주를 이루는 중등 교육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다수의 학생들이 '문해력'에 있어서 '장애'를 느낀다.

특히 우리나라는 '한글' 체계라고는 하지만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기에 '한글'만으로 뜻을 해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의 한글 교육은 이런 문제점을 그저 '사교육'에 맡긴 채 방기한다. 거기에 신세대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언어 문화는 또 하나의 '언어' 체계의 등장처럼 우리 사회 언어 체계에 혼란을 가져온다. 

결국 교육 과정 근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다큐는 4부 <내 아이를 바꾸는 소리의 비밀>처럼 문제 해결을 다시 '가정', '사교육'으로 환원하는 듯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회사에서 돌아온 엄마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아이와 책을 읽고 말놀이를 하는게 '해결책'이어서는 우리 사회 '문해력'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공교육이 해야 할 과제를 개인이 떠안아서는 문해력의 격차는 나날이 심해져만 갈 것이다. 저런 식의 해법이라면 조만간 '문해력' 학원이 등장할 것이다. 현재 심각한 '문해력'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당신의 문해력>은 유의미했지만 해결책 모색 과정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쉬운 점을 남긴다. 



by meditator 2021. 3. 17.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