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증상으로 고생할 때 찾아본 책 중에 알렉스 코브가 쓴 <우울할 땐 뇌과학>이 있다. 이 책 은 뇌의 메카니즘에 근거하여 우울증을 나아지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되는데 그 중 하나가 매일 5가지씩 감사를 하는 것이다. 얼토당토치않게 감사라니! 그런데 이 책은 감사야 말로 우리의 뇌를 우울증으로 부터 구원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방어적이고 우울감에 쉽게 빠지는 뇌의 회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우울할 땐 뇌과학>의 주장이 한 편의 다큐로 이어진다. 바로 2월 12일 방영된 <다큐 온 - 감사가 뇌를 바꾼다>이다.
음력으로 1월 1일, 진짜 황소해가 시작되었다. 다큐는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름길로 '감사'를 전한다. 가장 새해 첫 날에 어울리는 덕담이다.
작년 한 해 코로나로 인해 침체되었던 시절, 웃음을 되찾기 위해 '감사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참여한 이향재 씨의 경우,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인간 관계에서 섭섭한 점이 많았다는 향재씨, 하지만 섭섭함 대신 감사할 일을 찾다보니 잘해준 게 떠오르고 그렇게 마음이 건강해져갔다고 한다. 감사 운동을 하고 보니 그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안좋은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감사 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박이철 씨이다. 박이철 씨는 말한다. 그간 우리에게 '감사'란 누군가의 자극에 의한 '반응'과 같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생각만 바꾼다면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지고 행복해 질 거라고.
과연 감사가 사람을 변화시킬까? 과연 그럴까? 실험을 해보았다. 김해 율산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감사 일기를 써봤다. 처음에는 상투적이고 피상적으로 감사를 하던 아이들이 점점 일상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번에는 5학년을 대상으로 감사 실험을 했다. 자원한 16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감사 운동'을 했고, 교사가 이를 기록했다.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는데 왜 감사하지?" "바쁘셔서 못차려주실 수도 있는데 차려주셔서 감사해요."
처음 '감사 운동'을 시작할 때 학생은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 불과 3개월의 시간이었지만 학생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혼낼 때 잘되라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감사하지 못할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는 매일 1가지 숙제가 주어졌다. '엄마, 오늘 감사한 일이 있으셨어요?"와 같이 가족들에게 '감사'와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숙제를 하면서 학생과 가족들은 자연스레 '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면서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갔다. 묻고 답하는 걸 들어야 하니 자연스레 남의 얘기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배려와 공감이 증가했다.
이런 학생들의 실험에 대해 교육학자들은 한결같이 기대 이상이었다며 놀라움을 표한다. 피상적이던 감사는 매일 되풀이 되며 현실에서 '길어져야'하는 것이 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임에도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거치고, 각성과 깨달음의 기회를 가지게 된 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일상의 소중함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는 과정이 되었다.
감사는 뇌도 변화시킨다. 그 결과 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5가지 영역의 뇌파동 검사에서 부정 심리나 뇌피로도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뇌피로도가 낮아지면 여유가 생기고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자기 조절과 심신균형 감각이 증가했다.
지난 2017년 과학 전문지에 게재된 276명을 대상으로 한 검사에서는 단 5분간의 감사 명상이 뇌의 긍정 보상 심리 회로 연결성을 증가시킨다는 결과가 나왔다. 뇌의 변연계 핵심 부위인 전대상피질이 자신과 관련된 것에 반응하는데, 이 부위는 보통 원망 등 부정적 정보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감사 등 긍정적 정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 부위에 부정적 정보 대신 긍정적인 메시지로 채워지게 된다고 한다.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의 로버트 마우어 교수는 감사를 하며 뇌에서 도파민이 발생하는데 이 도파민은 우리 뇌를 즐거움 센터로 만들며, 이는 뇌의 학습 기능을 활성화시켜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만들고 힘든 상황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감사, 삶의 변화 호주의 감사 운동가 레일리 바톨로뮤는 지난 2008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감사'를 알게 되었다. 시각적인 사람이었던 레일리는 자신의 감사를 '사진'으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레일리의 영향을 받은 로리 포트카는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그림에 담아 전달했다. 그들에 따르면 '감사'는 삶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과도 같다고 한다. 좋은 것들을 더 얻어내기 위해 뛰어다니는 대신, 오늘의 삶에서 더 좋은 걸 발견해 내는 게 바로 '감사'이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부품업체, 이 업체는 지난 2013년부터 '감사 운동'을 해오고 있다. 핸드폰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공정이 보다 복잡해지며 불량률이 늘어나자 그것이 그대로 직원들의 감정으로 연결되었다. 예민해지고 짜증이 늘어나게된 직원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강연을 들은 ceo는 이때부터 '감사 운동'을 시작했다.
하루 5가지 감사, '그만두지 않고 다니는게 감사하다', 물론 처음에 귀찬은 일이었다고 한다. 직장에서의 일은 give&take라고 생각했었는데, 5가지 감사를 찾는데 너무 힘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2년 여, 직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소소하지만 서로에게 말로 나누는 감사로 사람들의 관계가 달라졌다. '콩나물 시루'같다는 감사. 콩나물처럼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날 훌쩍 삶이 달라져 있었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실적을 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직원들이 동료가 되었고,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임원들이 직원들이 제일 하기 싫은 청소를 솔선수범해서 한다.
강원 양양의 8군단을 전력 증강의 최우선 전략으로 '감사'를 든다. 4년 전부터 감사 나눔 편지를 쓰는 2만5천 부대원들, 1000 감사 노트를 쓰며 변화해 갔다. 부모님께 100 감사 편지도 보낸다. '안써보면 모른다니까요'라는 감사 편지, 부모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사랑을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100 가지 감사의 편지를 쓰다보니 그 희생과 사랑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큐가 주장한다. 감사를 드러내어 말해야 한다고. 다큐를 연 건 걸그룹 포미닛의 지현씨,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한다. 자신이 직접 만든 전통 과자를 가지고 동네 코로나 검사소를 찾는다. 이 '의례적인듯한 행동', 다큐가 의도하는 바는 바로 '감사의 표현'이다. 마음 속 감사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감사를 드러내어 표현 할 때 삶도 변화한 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작은 것으로부터, 지금부터의 감사, 우리의 삶은 대부분 이루지 못할 미래의 '갈망'으로 채워진다. 감사는 바로 그런 불투명한 미래의 갈망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현재에 발을 딛고 그 현재에서 행복을 길어올리도록 만든다. 삶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난 2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개봉한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는 강인한 어머니 장선장을 필두로 하여, 대뜸 삼촌이 되어버린 타이거 박, 언니라는 말이 싫지 않은 업동이, 그리고 '아버지' 태호(송중기 분)까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지만 그 어떤 가족보다도 끈끈한, 모호하지만 확고한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조성희 감독에게 있어 '아버지'는 불온하고 불완전한 세계이다. 마치 우리가 발을 딛고 현실처럼. 그 세계는 자크 라캉의 '상상계'와도 같다.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처럼, 세상의 일부분이 될 수록 자기 자신을 '소외'시킬 수 밖에 없는 '지양'되어야 할 과정이다.
지양되어야 할 아버지의 세상 <승리호>에서 아버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선 태호와 설리반의 관계가 '부자' 관계의 양상을 띤다. 태호를 입양한 설리반, 하지만 그는 입양한 태호를 어린 나이에서부터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살상 무기'의 선봉에 세운다. <늑대 소년>이 순이의 세계에 맞서 늑대 소년을 만들고 버린 남성중심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듯이, 그러한 늑대 소년의 세계관은 <승리호>에서 설리반의 세계로 이어진다.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분)은 환경 오염에 물든 지구의 '메시아'를 자처한다. 깨끗한 공기와 여유로운 생활이 보장된 지구와 달 사이의 우주 궤도에 만들어진 낙원을 통해 지구인들이 자신을 구세주라 여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설리반이 만든 '아버지'의 세상은 화성 이주 계획이 '도로시'와 '지구'의 희생이 필요하듯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152세의 외모를 지탱하기 위한 또 다른 생명이 필요하듯이.
그 아버지의 세계에 '입양'된 태호는 작전 과정에서 발견한 순이를 '입양'한다. 설리반이 태호를 입양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과 달리, 태호는 순이의 '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태호는 설리반과 또 다른 면에서 '조건부적'이다. 순이로 인해 더는 '살상'을 할 수 없게 된 태호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지탱해 주었던 UTS기동대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아버지'로서의 삶도 방기한다.
어쩌면 때늦은 '순이'를 향한 그의 맹목적 애정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자, 반성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순이', 도로시를 끝까지 거부하려 한다. 심지어 살아있는 도로시를, 꽃님이를 '딜'하여 죽은 순이에게 가닿으려 한다. 그의 철지난 부성은 맹목적이지만 실체가 없다. 결국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아버지로서의 허상'을 놓는 순간 태호는 진짜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태호에게 순이가 도로시, 아니 꽃님이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 '바톤 터치' 되듯이, 꽃님이에게 '아버지'는 친아버지로부터 <승리호>로 바톤터치 된다. 친 아버지는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의 과학적 도전으로 인해 꽃님이를 위험에 빠지게 만들고, 스스로를 '지양'시킨다. '과학 문명'을 등에 업은 '아버지'의 숙명이다.
태호가 보다 직접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로 자리매김된 것과 달리, <승리호>에는 '삼촌'도 있다. '업동이'가 배우 유해진의 모션 캡춰 연기에 기반했음에도 '언니'라는 호칭과 함께 '이모'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한 반면,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분)은 도로시의 '삼촌'으로 자처한다.
'삼촌'으로 타이거 박은 <승리호>의 가족 중 가장 '순수'하다. 살상 로봇일 지도 모를 도로시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보호자를 처음 자처한 사람도 타이거 박이다. 그리고 UTS 기동대의 공격으로 위협에 빠진 승리호를, 도로시를 자신을 던져 구한다.
이렇게 <승리호> 속 아버지들은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자신을 '지양'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그 '지양'의 과정은 왜곡된 아버지 설리반의 세상에 대한 '극복'이다. 태호가 집착했던, 하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순이'를 놓아야 꽃님이를 받아들일 수 있듯이, 타이거 박이 자신을 던져 꽃님이를 구하려 하듯이, 아버지는 이전의 자신을 지우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아버지가 되어갈 수 있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에게 주어진 '숙제'처럼.
'웬만하면 보지 말자.' 명절 덕담이랄까? 그래도 명절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하던 것이 웬만하면 보지 말자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오지 말라고 하신단다. '아는 동생'은 벌써 햇수로만 2년 째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고 한다. 직계 가족이 이 정도니 그래도 명절 때나 되어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한 다리 건너 사촌, 친척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본의 아니게 '이산 가족'을 만들어 버린 '코로나 팬데믹', 안그래도 적조해져가는 가족 관계의 '소원함'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렇게 만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가는 시절에도 서로가 가족으로서 '동질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지난 2월 4일 개봉한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묶어주는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어도 '가족', 혹은 '고향'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올려지는 건 '음식'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외려 어릴 때는 참 먹기 싫었던 음식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이 글을 쓰는 기자가 어릴 적만 해도 고기를 넣은 미역국은 생일날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지 않고 평상시 미역국은 그저 국간장을 푼 물에 미역 건더기를 넣은 멀건 국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넣은 미역국과 구분해서 '소미역국'이라 불렸었다. 어렸을 때는 그 물같은 국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가끔 그립다. 그런 식이다. 멸치 다싯물에 밀가루만 뚝뚝 떼어넣은 수제비라던가. 쇠젓가락에 끼워 밥 한 공기를 비워야 했던 땅 속에서 꺼낸 겨울철 알타리 무 김치라던가 지나간 시절은 그렇게 그 시절에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식구(食口)'는 말 그대로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게 '밥상'을 함께 받던 '식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 한 집에 살지도, 밥상을 함께 받지도 않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코로나는 명절 때만이라도 '식구'가 되었던 연례 행사마저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식구'가 더는 '식구'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이제 더는 '밥상'을 함께 하지 못해도 함께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여전히 '식구'라고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말한다.
사라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더는 '밥상'을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는 '이별'로 말문을 연다. 바로 영화 제목 속 그 '사라'와의 이별이다. 영국 런던의 노팅힐 거리 그곳을 향해 사라의 자전거는 질주한다. 친구 이사벨라(셸리 콘 분)와 함께 그 거리의 한 상점에서 두 사람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열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라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다. 주인을 잃은 가게, 사라가 셰프였기에 이사벨라는 혼자서 가게를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집세만 날리던 가게를 더는 유지할 수 없었던 이사벨라는 다른 주인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때 엄마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무용학교조차 포기해버린 딸 클라리사(새넌 타벳 분)가 나선다. 하지만 다시 가게를 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자금, 클라리사는 오랫동안 엄마랑 '의절'하다시피 했던 외할머니 미미(셀리아 임리 분)를 찾는다. 한때는 공중곡예사로 전세계 공연을 다니던 미미, 자신을 플라잉 요가로 이끄는 손녀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수표책을 연다. 그리고 사라, 이사벨라와 함께 요리 학교를 다녔던 매튜(루퍼트 펜리 존스 분)가 합류한다.
그렇게 '사라'는 세상에 없지만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사라를 기억하며 한 자리에 모였다. 사라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사라를 대신하여, 사라가 하고 싶던 곳에서,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시작한다. 그래서 가게 이름이 '러브 사라'이다. 저마다 사라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미미에게 '러브 사라'는 각별한 의미다. 죽기 전 딸이 찾아와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연다며 도움을 청했었다. 하지만 그때 사라의 엄마 미미는 거절했었다. 자신을 찾아온 클라리사에게 대뜸 '돈 때문이냐?'고 선을 그은 것처럼 사라에게도 그랬었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엄마 미미에게 사라는 돈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 서운함을 토로했었다.
그리고 엄마와 딸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코로나라던가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서로에 대한 서운함으로 두 사람은 멀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엄마인 미미가 딸 사라에게 엽서를 썼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라며, 하지만 그 엽서는 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딸이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 그 날 쓴 엽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 미미는 보내지 못한 엽서 대신, 그때 들어주지 못한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녀의 수표 책은 얇아져 가지만 대신 딸이 그리던 까페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영업'은 별개였나 보다. 가까운 거리에 이미 까페가 여러 개인 거리에 새로 문을 연 까페는 첫 날부터 파리를 날렸다. 매튜의 매혹적인 디저트들만으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했다. 새로 개업했다며 인심쓰듯 나누어준 마카롱을 낯설어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를 나선 할머니 미미의 눈에 노팅힐 거리를 지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민자들이 많은 영국, 그 중에서도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거리, 그곳에 자리잡은 '러브 사라', 이 까페가 잘 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고향이 된 까페 할머니 미미가 딸 사라가 가장 좋아하던 책,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렸다. '새로운 것을 원하거든 여행을 하라',는 책 속의 명대사처럼 사라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그런 사라처럼 '러브 사라'는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상징과도 같은 열기구를 까페 앞에 단다. 그리고 80일 간의 세계 여행 대신, 세계 각국의 디저트를 만들어 낸다.
딸기 프레지에는 몰라도 , '크링글'을 기억하는 라트비아 출신의 택배 기사를 위한 '크링글'처럼 이민온 사람들이 원하는 고향의 디저트를 만들어 주기로 한다. 까페에 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향 디저트를 만들어 준다면 꼭 다시 들러 그것을 먹겠다고 하고 그렇게 한다. 호주식 케이크, '레밍턴', 리스본에서 온 모자를 위한 '카넬스네일. 터키의 바클라바, 아랍의 전통 케이크 바스부사, 이스라엘의 오렌지 세몰리나 케이크 , 그리고 일본에서 온 여성이 부탁한 말차 밀 크레이크까지 까페의 디저트에 세계가 모였다. 까페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고향'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이렇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방식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기억하는 '디저트'로 잇는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시절에 이 영화는 함께 할 수 없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전해준다. 지금 여기서 함께 나눌 수는 없지만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함께 나누었던 시간,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우리가 그 시간과 마음을 어떻게 소중하게 이어가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다가올 명절, 같은 곳에서 한데 어울려 밥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이 영화 한 편을 통해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진하게 나눌 수 있다면,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서로를 떠올리며 먹는다면 함께 할 수 없어도 함께 하는 따뜻한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여는 대사이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가장 리키는 조금 더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 트럭을 사서 '택배 기사'를 지원한다. 그리고 그 면접에서 매니저는 리키에게 저 말을 한다.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한다. 이 그럴듯한 말이야말로 오늘날 '택배 기사'들의 존재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문구이다. 그들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가 아니다. '법적으로 자영업자'인 택배 기사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생존권을 외주화하는 '긱이코노미'의 최전선에 놓인 그들은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살인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자영업자'인 그들의 생존권은 법의 사각 지대에 놓여있다.
<포스트 코로나>5부 코로나 19 이후 세상은 평등해질까는 바로 이렇게 코로나 19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코로나 시대의 필수 노동, 택배 기사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 2020년 10월 8일 택배기사로 일하던 김원종 씨는 배송을 하던 도중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다. 작년 한 해에만 16명이 택배 기사들이 초장시간 노동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 17~18시간의 살인적인 노동 현실이다. 고 김원종씨가 떠난 자리, 트럭 의자는 헤져있었고, 정리정돈할 시간도 없었던 듯 개인 소지품들이 나뒹군다. 닳아버린 신발을 덧대가며 일하던 고 김원종 씨, 이제 그 닳은 신발은 주인을 잃었다.
7년 째 택배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도균 씨의 생활도 위태롭다. 이른 새벽 출발한 김도균씨는 아침 7시부터 분류를 시작,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첫 배송에 나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삔 다리로 쉼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물건을 다른다. 병원이 바로 옆에 있어도 갈 시간이 없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주인공 리키가 다친 몸으로 트럭을 몰고 나가는 마지막 장면이 그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아프다고 쉴 만한 여력이 없다. 대신 배송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앉아서 편하게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쉬면 쉬는 만큼 퇴근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평일 적다할 때 하루 200~300 개의 물량, 추석같은 명절이면 그게 500개까지 늘어난다. 게다가 코로나로 물량이 15% 증가했다. 매변 물량은 늘지만 단가는 낮아지고 있다. 400개가 넘으면 밤 11시간 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다. 소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로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과로사를 하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 현실이다.
택배, 배달업 등은 '필수 노동자군'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으로 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사회가 그들에 의존하는 비중이 늘어나는데 비해 그들의 처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자영업자'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노동 시간 관리에 법적인 규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로사 방지를 위한 택배 관련법'이 제정중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관심이 식으면 유야무야될 지도 모를 상황이다.
배제된 장애인들과 사회적 약자들 위협받고 있는 건 택배 노동자만이 아니다. 29살의 이은혜 씨는 빛 밖에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이다. 부천 장애인 일자리 사업으로 도서관에서 다른 장애인을 도우며 살아왔던 은혜 씨에게 코로나는 장애인으로서의 어려움을 배가시켰다.
외부 일정이 있는 경우 활동 보조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은혜 씨, 팔을 잡아야 하는데 '접촉'이 불가피한 상황이 불안하다. 엘리베이터에는 항균 필름을 붙여 놓아 장갑을 끼고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 맨손으로 더듬어서 확인하는 상황 역시 불안을 가중시킨다. 코로나로 인한 방역이 외려 장애인들에게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늘어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는 보편적 장치가 되어가고 있는 QR 코드 역시 장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마스크를 나눠주던 시절, 마스크를 나눠주는 약국에서는 '마스크가 없습니다'를 종이에 써붙여 놓았다. 그래서 점자가 아니고서는 읽을 수 없었던 은혜씨는 마스크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진행성 근이영양증의 정영만 씨는 코로나로 인해 병실이 없이 이동을 할 수 없었다. 신체 보조를 받아야 하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사회적 격리를 하던 아내가 방호보조복을 입고 정영만 씨를 보살폈다. 장애의 유형 별로 도움이 필요한 분야가 다르지만 갑작스럽게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한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장애인 개개인이 온전히 코로나로 인한 불편은 책임져야만 했다. 그렇게 장애인들은 코로나 방역에서 배제된 존재가 되었다. 전체 확진자 중 장애인 확진자는 4%였지만 사망자 중 장애인은 20%에 이르렀다. 비장애인에 비해 6배나 높은 수준이었다.
취약 계층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온전히 개인적 고통으로 코로나 팬데믹에 노출되었다. 당장 식량이 부족했고, 여성들은 학대 가해자와 한 집에 머물러야 했다. 사회적 약점과 불평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백신 접종을 통한 집단 방역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즈음 또 다른 사회적 불평등이 문제되고 있다. 선진국들은 자국 인구 몇 배의 백신을 사들이고 있는 한편에서 최빈국들은 백신을 구하기조차 쉽지 않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코로나를 이겨내기 위해 백신 국가주의를 지양할 것을 호소했다. 전세계가 연결된 현재의 세계에서 세계적 협력 없이는 코로나는 종식될 수 없기에 가난한 나라에도 백신의 보편적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코로나가 끝이 아니라고. 코로나는 우리 세계에 붙어있던 반창고를 떼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 반창고를 떼고 보니 깊은 상처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고.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적 위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예비 훈련장이 되기 위해서는 사각 지대에 놓인 노동자들과 배려받지 못하는 장애인들, 그리고 배제된 가난한 이들, 가난한 나라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2월 1일 밤 9시 tvn을 통해 <루카; 더 비기닝>(이하 루카)이 방영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배우 김래원을 비롯하여 <보이스 1>,<손, 더 guesst>를 통해 장르물의 장인이 된 김홍선 감독, <추노>의 작가 천성일, 그리고 <베를린>, <도둑들>의 최영환 촬영 감독의 조합만으로도 화제가 된 작품이다.
제목의 루카는 L.U.C.A ,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의 약자이다. 모든 생명체의 기원을 거슬러 가장 원시적인 세포의 단계를 뜻하는 이 조어는 결정적인 순간 두 눈을 파랗게 빛내며 초월적인 에너지를 발생하는 주인공 지오(김래원 분)가 보이는 '괴력'의 기원이 된다.
2일 방영된 2회에서 이손(김성오 분)과의 격투 과정에서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지오는 의식불명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그의 혈액형 조차 판별할 수 없다. 국과수 오종환(이해영 분) 교수에 따르면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듯하다는 지오의 혈액형, 거기엔 과학적 금단의 선을 넘은 류중권 교수의 연구가 있다.
루카 프로젝트의 성공작, 지오를 잡아라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과학자 류중권(안내상 분)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단의 지원을 받아 여러 생물체의 가장 발달한 유전인자를 추출하여 하나의 세포에 넣어 초월적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 과학적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언제나 분화 과정에서 실패했다. 유일하게 성공했던 사례가 z시리즈의 10번째 실험 대상자 지오(z-o), 하지만 그 성공은 류중권의 손을 떠났다. <루카>의 첫 장면 의문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무리에 쫓기던 한 여성은 지오로 추정되는 갓난 아기를 건물 난간에서 떨어뜨렸고, 그 아기는 2회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지오처럼 스스로 빛을 내며 폭탄처럼 주변을 파괴하며 자신을 지켜냈고 그를 실험대상으로 하는 무리들로부터 탈출했다,
<루카>는 이렇게 실험 대상으로 인간을 넘어선 능력을 가지게 된 존재 루카, 그 이후 다시는 실험에 성공하지 못한 채 루카를 쫓는 국정원 김철수(박혁권 분)의 하수인들, 그리고 그 배후에 류중권과 김철수를 쥐락펴락하는 황정아(진경 분)가 이끄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두 축의 갈등으로 진행된다. 거기에 어린 시절 지오로 추정되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간 후 실종된 부모님을 쫓는 형사 하늘에 구름(이다희 분)가 끼어든다.
강력한 세포 분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은 루카와 그를 쫓는 무리들의 대결은 이미 앞선 장르물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김홍선 감독의 장기인 액션씬을 위주로 진행된다. 특히 2회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진 루카와 그를 잡으려는 이손, 유나, 그리고 하늘에 구름 사이에서 벌어진 액션 씬은 기존 장르물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를 통해 차별화를 꾀한다. 좁은 장소라는 딜레마를 역으로 격투를 하는 자의 시선에서 장면을 재구성하며 긴박감을 증폭시킨다. 거기에 세포 분화를 통해 괴력을 발휘하는 전기인간 같은 루카의 특성은 <루카>만의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낮과 밤, 그리고 루카; 과학적 디스토피아 시리즈? 그런데 더 비기닝이라며 시리즈의 서막을 알리는 <루카>를 보고 있노라면 동시간대 전작 <낮과 밤>이 떠오른다. 지금은 밤일까, 낮일까 라는 모호한 화두로 16부의 시리즈를 이끌었던 <낮과 밤> 역시 자신의 아이들조차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하얀 밤 마을 프로젝트'가 극중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재력과 권력을 가졌지만, 거기에 더해 영생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과학적 욕망에 도덕적 윤리를 넘어버린 과학자 집단과 결탁하여 '하얀 밤' 마을을 배경으로 많은 아이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재벌이나, 권력 혹은 조폭이라는 악의 무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 모두가 '과학'을 매개로 하나의 이권 세력으로 뭉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밤'이자, '낮'인 선과 악의 이중 인격을 가진 슈퍼맨들이 탄생한다. 그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도정우(남궁 민 분)은 일찌기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하얀 밤 마을을 몰살시켰고, 여전히 이어지는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공교롭게도 <루카>와 <낮과 밤> '과학적 윤리의 선을 넘어선 '연구'로 부터 주인공들이 '잉태'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연구의 성공이자, 목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연구를 하는 단체로부터 '튕겨져 나와' 단체의 음모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그 싸움의 '수단'은 바로 그들이 '연구의 성과'로 얻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능력'이다.
<낮과 밤>의 도정우는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영생의 공식을 만들어 내는 한편, 한 사람쯤은 저 멀리 던져버릴 정도의 괴력과 건물 전체의 전기를 껐다 켰다 하는 염력 등을 발휘한다. 그의 '아킬레스 건'이라면 늘 사탕으로 위장한 진통제를 입에 물고 다녀야 할 만큼 뇌동맥류의 위험과 지킬 앤 하이드처럼 '밤'이라는 상징으로 드러난 '그림자'와 같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측면이다.
반면 지오의 경우, 아직 그의 능력 전체가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강력한 세포 분화를 거듭하며 신체적 능력이 증폭 되어가고 있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회복할 만한 능력을 가짐은 물론 1회에서 죽어가는 하늘에 구름을 살리는 전기 충격 정도에서부터 2회에서 보여지듯이 철로를 휘고, 열차를 멈출게 할 정도의 괴력을 가진다. 그의 아킬레스 건은 강력한 세포 분화 과정에서 뇌세포가 타버려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듯한 설정을 가진 <낮과 밤>, 그리고 <루카>, <낮과 밤>은 주인공과 같은 하얀밤 프로젝트의 희생물이자 성과물인 능력자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과학적 욕망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간다. 반면, <루카>는 1주일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루카를 잡기 위한 총력전을 통해 쫓고 쫓기는 액션 장르로서의 특성을 드러낸다. 거기에 남궁님과 김래원, 믿고 보는 두 중견 배우의 걸출한 활약에 의지하는 바에 있어서도 두 작품은 공통점을 가진다.
비록 시청률면에서는 흡족하지 않았지만 신선한 이야기였다는 <낮과 밤>, 5% 후반대의 안정적 시청률로 첫 발을 내딛은 <루카>는 작품성과 시청률 두마리의 토끼를 얻을 수 있을까? 그 귀추가 주목된다.
1911년 뉴욕 의류 공장로 무려 146명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중 딴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잠궈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데 문을 잠근 공장주는 결국 풀려났다. 1920년대까지도 경제 활동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가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던 기조가 대공황을 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해 대규모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생계 보장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그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공장에서 만들어낸 물건의 소비자였다. 그들의 생존에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었다. 국가가 나섰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 3권, 8시간 노동이 보장되었다. 금융 기관을 규제하여 예금자를 보호했다. 급진적인 뉴딜 정책, 국가의 개입이 위기의 미국 경제를 되살려냈다.
이처럼 '위기'는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 생태, 보건 위생적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급격하게 변화를 겪고 있다. ebs다큐 프라임 포스트 코로나 3부 국가의 탄생은 코로나 시대 변화하는 국가의 위상에 대해 논의한다.
19세기가 노예 해방, 20세기가 보편적 선거권 도입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다.
벨기에 경제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 교수는 그의 책 <21세기 기본 소득>에서 주장한 말이다. 2018년 출간된 이 책은 '기본 소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주장을 담았지만 그것의 '실현'은 그리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그 '기본 소득'의 문턱을 코로나가 넘어서게 만들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전국민 재난 지원금이다.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시대? 국가가 직접 국민들에게 돈을 준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시적이냐 지속적이냐 라는 차이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보편적으로, 그리고 의무 조항없이 전국민 모두에게 돈을 나눠준다는 기본 소득, 하지만 코로나는 이 불가능할 것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가가 유도했던 방식은 이른바 '낙수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중앙 은행에서 대형 금융 기관으로, 그리고 기업으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여 고용을 유지하고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런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문을 닫은 거리의 가게들, 그로 인해 거리로 나앉게 생긴 자영업자들, 그리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코로나로 인한 봉쇄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금기시되던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소비자 심리 추이가 단 몇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증가했고, 재난 지원금을 받은 75.7%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경제가 호전되었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완화되었다. 특히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고소득층이 돈을 저축 등으로 흡수하지 않고 '소비'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한을 정한 것이 유효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재난 지원금을 지속적인 기본 소득으로 이어가는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재원'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이러한 기본 소득의 딜레마를 알래스카 영구 기금은 현명하게 해결한 사례로 꼽힌다. 1982년 도입된 기급은 천연 자원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그 운용 이익을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 한해서 매년 지급한다.
이 기금의 효과는 파격적이었다, 공짜로 돈을 나눠준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외려 일자리가 늘어났고, 가난한 가정의 3세 이하 아이들의 비만이 개선되는 등 양극화 문제 해소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는 풍부한 석유와 상대적으로 작은 70만 정도의 인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풍부한 석유와 함께 석유를 공유자산으로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기본 소득이 불가능한 것일까? 기본 소득의 재원으로 '토지'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다. 다량 탄소 배출 상품에 '탄소세'를 얹어 이를 재원으로 삼자고도 한다.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에 매기는 세금은 어떨까? 하지만 아직은 그 어느것도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전국민 재난 지원금으로 이미 기본 소득의 첫 발을 떼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과연 이 첫 발을 뗀 기본 소득이 21세기 보편적 화두가 될 것인가,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주목되는 시점이다.
코로나와 관련된 국가적 통제, 어디까지여야 할까? 재난 지원금과 관련된 기본 소득의 실현이 국가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지점이라면 코로나와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면 지점도 있다. 바로 '통제'적 측면이다.
지난 해 8월 호주는 코로나와 관련하여 강력한 4단계 봉쇄 정책을 펼쳤다. 일몰 이후 외출을 금지하였고, 낮에 쇼핑, 산책 등으로 외출을 하여도 5km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이를 어길 시 150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하였다. 계엄령에 준하는 봉쇄령이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0년 9월 빅토리아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을 위한 것이라며 찬성을 표명했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당연시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상 생활에 국가가 개입했다.
2020년 3월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대테러 작전용으로 씌이던 디지털 추적을 코로나와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허용하도록 하였다. 휴대전화가 위치 정보, 동선이 추적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디지털 감시 시스템이 상용화되고 있다. 횡단 보도에 설치된 안면인식 전광판, 무단 횡단을 할 경우 안면 인식을 통해 전광판에 신상 정보가 표시된다. 벌금을 내거나 사회 봉사를 해야 지워진다. 이 기술은 마스트를 착용하더라도 식별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되는 중이다. 텐왕 쉐량 프로젝트라는 기술적 통제를 통해 전국민적 삶이 기록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통치 편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국가의 기술적 통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시민 사회의 붕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원론적으로 질병의 통제가 국가의 역할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큐는 묻는다. 여기 팔찌 하나가 있다. 중앙 집중적 서버에 연결된 팔찌는 당신의 정보를 통해 미리 당신의 질병을 경고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팔찌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정부의 통제에 당신의 신상을 넘겨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로 인해 과도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우리 사회에서 국가적 역할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복지 효율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름 등 다양한 개인 정보를 담은 인구 등록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나치'에 의해 학살용 데이터베이스로 활용되고 만다. 이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문제된 바 있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 선택한 극한의 조처지만 지나친 노출로 인해 '인권의 사각 지대'가 되어 '낙인'이 되고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 것이다.
결국 코로나로 인한 정부 역할의 증대는 21세기의 또 다른 '빅브라더'의 탄생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진보적인 박노자 교수는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국가적 통제 상황을 '인권의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함정'이라 정의내린다. 쉴러가 주장한 '삶은 최고의 선이 아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선택한 편의가 '위생 독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일까?
ebs 다큐 프라임은 1월 25일부터 3부작으로 <포스트 코로나>를 방영 중이다. 백신 접종이 이미 해외에서는 시작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안에 백신 접종과 함께 집단 면역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상황, 끝이 보이지 않던 '코로나 팬데믹'라는 터널의 끝이 보일 것같은 시절에 다큐는 코로나 이후에 대해 말문을 연다.
첫 회 '언택트'한 삶 속에서도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의 의지를 다지는 다양한 창의적인 시도를 살펴본 다큐는, 그에 이어 2회에서 우리 안의 코로나를 살펴본다.
세계 그 어느 나라국가도 코로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 환자들은 늘어나고 있는 상황,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감염병이라는 상황을 처음으로 겪어본 인류, 하지만 여전히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감염된 사람들보다 많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은 이전과 우리는 더 이상 같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혹 코로나를 직접적으로 겪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건 아닐까? 코로나를 온몸으로 겪은 '전지적 코로나 시점'에서 본 세상은 어떤 것일까? 코로나 이후를 논하기 위해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를 다큐는 다룬다.
지난 2월 한 종교 단체의 집단 감염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확진자가 증가하기 시작한 대구, 특별 재난 지역이 선포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도움의 손길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하지만 당시 의료 일선에 있던 의료진은 입을 모은다. 운이 좋았다고.
그 운이 좋았다는 평가의 또 다른 이면에는 간호사들의 중노동이 숨겨져 있다. 대구 만이 아니다. 그 방역의 최일선에서 자신을 던졌던 간호사의 목소리로 다큐는 시작된다.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영웅, 간호사 환자 때문이 아니라 동료 때문에 버텼다는 유연화씨, 그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음압 병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코로나 병상이 된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단다.
코로나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유연화 씨는 눈물을 흘린다. 대단한 일을 했다지만 엄마가 나가서 자신이 코로나 병동에서 일한다고 밝힐 수 없었던 게 현실이었단다. 집에서도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 자신이 아니라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까봐, 자신이 집에 없어야 가족들이 안전한 상황,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출근을 할 때 마음이 가뿐해 졌다고 한다.
의료진이라면 필수 장비인 PAPR(전동식 호흡 보호구)는 밖의 공기를 빨아들여 깨끗한 공기를 공급해주는 장비다. 하지만 이것조차 제 때 공급받지 못했다. 방역 체계는 수시로 바뀌었다. 자신의 안전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마치 자신들이 전쟁에 방패막이처럼 세우는 병사들같았다. 게다가 처음 경험해보는 감염병으로 인해 '총도 쏠 줄 몰라요'하는 경험 부족한 의료진과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지친 티조차 낼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이 도망치며 동료들이 힘들까봐 참았다. 이른바 '전우애'로 버텼다. 과연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자식에게 '큰일 한다'며 기꺼이 응원해주는 엄마가 몇이나 있을까 라고 묻는다. 앞에서는 박수를 쳐주다 뒤에서는 꺼려하는 세상이 자신들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가 연화씨를 무엇보다 힘들게 했다.
광화문 집회 참가자의 항변 이중적 잣대에 항변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지난 8월 광화문에서 집회를 연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일원이었던 60대 여성, 그녀는 항변한다. 왜 광화문은 막으면서 해운대에 모여든 2~30만 인파에는 눈을 감냐고.
광화문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친했던 친구가 '앞으로 나 볼 생각마'라고 농담식으로 말하는데 화가 났단다. 내 손주가 살아갈 나라를 위해서 더위도, 추위도 감수하며 거기로 나선 건데,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준 채 손가락질 받는데 억울하다. 편향이 아니다. 무모함이 아니다. 확신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코로나는 재수없으면 걸리는 병이다.
슈퍼 전파자의 뒷 이야기 지난 2월 18일 대구의 31번 확진자. 본인이 증상을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종교 시설, 병원, 마트 등을 돌아다녀 슈퍼 전파자로 이목을 끌었던 장본인이다.
그녀가 확진 판정을 받은 그 날 이후 쏟아져 나온 수백명의 확진자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가 코로나에 걸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작성한 리스트의 지인들 중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녀를 만났다고 거짓 진술한 20대는 처벌을 받았다. 후에 그녀가 슈퍼 전파자가 아니라 2차 감염자일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미 슈퍼전파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두 아들의 엄마이자, 평범한 가정의 주부였다는 31번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속담으로 항변한다. 슈퍼 전파자가 된 그녀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평범했던 그녀의 가정은 서로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암보다 더한 코로나 확진의 무게는 깊다. 암보다도 더하다. 송파구 어린이집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던 정효숙 씨는 7월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바 있었던 효숙 씨, 하지만 암이 걸렸다는 사실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그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암은 나혼자 걸리면 되는 거였지만 코로나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단다.
결국 남편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다니던 교회에서 20여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왜 조심하지 않아서 걸렸느냐는 말, 부주의했다는 말들이 그녀에게 오래도록 깊은 상처로 남았다.
코로나 확진의 무게 이렇게 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넘어서기 힘든 벽을 만들었다. 이를 설치 미술 작가 박카로 씨는 'A와 B의 경계'라는 작품으로 표현했다.
해외 여행 후 마포구 15번 확진자가 된 그녀, 2주간 자가 격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동 동선이 많았던 그녀가 우선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의 확진 결과를 알리는 구청 홈페이지에 그녀의 신상을 캐고 욕을 해대는 댓글들을 보며 공개 처형당하는 듯했다.
별 증상이 없던 카로씨였는데 병실에 도착하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가짜였는데 진짜가 되어버린 듯한 상황, 하지만 열은 약과였다. 그때부터 전화가 쏟아졌다. 왜 동선을 숨기지 않았느냐는 항의, 내 얘기는 말아달라는 부탁, 걸리는 거보다 일을 못하게 되는 현실의 항의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 역시 피해자인데,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마음 떨어짐 주의' 표시가 등장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플라스틱을 안쓰고 싶어도 모든 것이 일회용품으로 제공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죄책감이 들었다. 입원 기간 동안 안쓰고 모았던 50개의 플라스틱 숟가락이 전자 저울 위에 놓였다. 작품 명, 죄의 무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 확진자 김지호씨는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이태원 N차 감염자이다.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 대각선에 앉았던 친구로 인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10580번, 50일의 입원 일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창문도 열수 없도록 못으로 고정된 병실, 에어컨은 물론, 환풍기도 비닐로 막았다. 복도에 샤워실이 있어 샤워 대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야 했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겪어야 하는 '격리'는 참을 수 있었다. 구급차도, CT도 젊은 그에게는 모두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처음 겪는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막연한 차별이나 혐오도 처음 겪어 보았다. 퇴원을 하고 출근한 회사에서 마스크를 벗고 담배를 피던 사람들이 그를 보자 다시 마스크를 썼다. 회사는 사과를 요구했다.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코로나의 최일선에서 일하던 간호사도,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도 코로나가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세상과 자신 사이의 벽을 절감했다. 바이러스보다 더 큰 마음앓이를 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경험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라 다큐는 진단한다.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위험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는 시절, 백신도 필요하고, 치료제도 필요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다쳐버린 사람들의 마음, 코로나로 인해 서로에게 벽을 느낀 사람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치료해야 할 숙제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얼마전 sns에 꽃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이벤트가 성황을 이루었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나를 상징하는 꽃을 알려주고 그와 함께 내 성격을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sns를 통해 지인들과 이 이벤트를 나누었는데 모두들 열심이었다. 새로운 화장품을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이 이벤트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mbti의 또 다른 형태와도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접촉이 한결 줄어든 2020년 인기를 끌었던 것이 mbti와 같은 '나를 찾아가는' 각종 '리트머스' 프로그램들이었다. 관계를 통해 나를 확인하던 사람들은 잦아든 관계 대신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칼 융'의 심리 유형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자아의 특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아이디어가 <소울>의 영화 감독 피트 닥터 감독의 출발점이다.
이미 지난 2015년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 속 기쁨, 슬픔 등 다섯 가지 감정을 캐릭터로 구현한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작품화한 바 있는 피트 닥터 감독은 이제 '영혼'에 캐릭터를 입힌다. 이제는 23살 된 아들이 어릴 적부터 사람든 저마다 고유한 영혼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자아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런 의문이 <소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조차도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제를 통해 우리의 모든 감정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도왔던 피트 닥터 감독은 <인사이드 아웃>에서 함께 했던 디즈니와 픽사의 협업을 통해 영혼들의 이야기를 통한 삶의 긍정성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삶의 절정에서 죽음의 세계에 빠져버린 조 이야기의 시작은 '영혼'들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이다.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하는 조 가드너, 하지만 현실은 뉴욕의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가르치는 강사 신세이다. 가르치는 밴드의 불협화음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재능이 있는 학생 조차도 음악에 대한 열정의 싹수가 요원하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학생들에게 '재즈'의 묘미를 절묘하게 설득하고자 애쓰는 조 선생님, 그런 그의 진지한 열정에 하늘이 감복해서일까. 교장 선생님이 찾아와 그가 '정규직'이 되었음을 축하한다.
하지만 정규직이라는 안정된 직장에도 그의 얼굴이 밝아지지 않는다. 그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토록 그의 제자였던 재즈 밴드 멤버가 갑작스럽게 빠진 멤버 대신 연주를 부탁한 것이다. 어쩌면 연주자로서 피아노를 연주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 나이, 하지만 우려스러운 시선을 불식하고 멋들어진 연주로 첫 연주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의 '농담 아닌 농담'이 현실이 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머나먼 저세상을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오늘 밤 연주를 위해 어떻게든 다시 지구로 돌아가려 애쓰던 조는 엉뚱하게도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어린 영혼들을 멘토링 하는 '유세미나'에 가게 된다. 그리고 멘토로 착각되어 태어나기 싫다는 시니컬한 영혼 22를 맡게된다.
조와 22의 동상이몽 본의 아니게 멘토가 되어버린 조, 그런데 어떻게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지구의 통행증을 22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조는 22의 마음을 돌이키려 애쓴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조와 달리 그간 테레사 수녀, 아인슈타인 등 유명인 멘토들이 두 손을 들고 나가떨어진 22의 마음은 쉽사리 돌려지지 않는다. 그러다 길잃은 영혼을 구해주는 모험가 문윈드 등의 도움을 얻어 함께 지구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조의 기대와 달리 22가 조의 몸에 그리고 조는 고양이 미스터 미튼스가 되어버린다 조가 되어버린 22 영혼을 구슬러 어떻게든 오늘 밤 있을 연주를 준비하려 애쓰는 조의 한바탕 해프닝, 그 해프닝을 통해 <소울>은 삶의 의미를 되살려 낸다.
안정적인 정규직의 일자리 따위 그에게 찾아온 재즈 밴드 연주에 목숨을 거는 조, 그렇게 음악적 열정으로 충만한 조의 몸에 들어간 22는 삶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느낄 수 없던 음식의 맛을 깨닫고, 그를 손들게 했던 멘토들의 교육을 통해 얻은 해박한 식견으로 조의 주변 사람들과 능숙하게 소통한다. 심지어 음악을 포기하겠다 찾아온 밴드부 학생의 마음을 돌려놓을 만큼 식견과 혜안이 밝다. 영화는 저세상의 골칫덩어리 22가 유세미나에서의 부적응 과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지상의 소통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처럼 저마다 영혼의 존재론적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저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진 어린 영혼이 지구에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불꽃을 획득해야 하는 통과 의례, 그걸 삶의 의미를 터득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와 22는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정작 22 가슴에 불꽃이 빛나도록 한 순간은 삶의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거리에 앉은 22에게 떨어지는 꽃잎 한 장이었다.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살아갈 만한 것이 아니라 삶이 주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라고 영화 속 삶의 불꽃이 반짝이며 전한다.
하지만 그렇게 삶의 의지를 회복한 22의 불꽃은 조의 몫이 된다. 다시 지구로 돌아와 그토록 원하던 도로테아 윌리엄스 밴드와의 협연을 끝낸 조는 행복했을까? <소울>은 조와 22의 엇박자 '멘토링'을 통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가도록 한다. 조가 되기 위해 애쓰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은 22처럼, <소울>은 조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저세상에 와서도 멘토링을 하고, 기꺼이 자신에게 온 유일한 기회와 '저세상에서의 마지막 멘토링'을 맞바꾸는 조가 살아온, 살아갈 '캐릭터'는 무엇일까?
당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소울>의 성격 파빌리온에서는 새로 태어날 영혼들에게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부여한다. 모두가 좋은 것만 받을 것같지만 그건 아니다. 누군가는 매우 우울한 성격을, 또 다른 누군가는 시시콜콜 따지는 까다로운 성격을, 영화는 가장 까칠했던 22를 통해 세상 그 어떤 성격도 삶의 과정에 모두 저마다의 몫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공한 연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인간 세계에서나 저 세상에 가서도 '멘토'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조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mbti로 돌아와서,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시절에 사람들이 mbti에 몰두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이러이러하게 세상에 유용하다는 자기 확인이 아닐까 싶다. 타인을 통해 증명받아왔던 나의 가치를 그 소통이 적조해지는 시절에 검사지를 통해 당신을 이런 면에서 유용하며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삶의 확인 도장같은 거 말이다. 공교롭게도 mbti가 붐을 이루는 시절에 <소울>은 우리 영혼의 캐릭터를 논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각양각색 생명의 캐릭터를 통해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세상을 살아갈 만하다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그리고 그 당신이 살아갈 세상은 당신이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세상 자체로 살만 한 것이라도 덕담도 잊지 않는다.
<경이로운 소문> 16부가 완결되었다. 다음의 인기 웹툰이었던 작품의 드라마화가 결정되었을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10% 내외의 시청률을 넘나들며 ocn 장르물의 부진을 말끔하게 씻어준 작품이 되었다.
16부, 드디어 신명휘(최광일 분) 시장 속에 들어간 완전체 악귀와 카운터들의 마지막 일전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끝을 보자며 심기일전 신명휘에게 달려든 카운터들, 그런데 신명휘는 14회차에서 결계를 치며 그들이 싸우던 그 '악귀'가 아니었다. 애꿏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보다 업그레이드된 악귀는 강력한 기운을 내뿜으며 카운터들의 공격에 끄덕도 하지 않는다.
결자해지 하지만 카운터들의 결기도 만만치 않다.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카운터들의 의지는 추여사(염혜란 분)가 벽에 부딪쳐 코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져도, 도하나(김세정 분)가 머리끄덩이를 잡혀 밀쳐져도, 가모탁(유준상 분)의 얼굴이 악귀의 카운터에 돌아가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가모탁의 말대로 이 싸움의 끝은 완전체 악귀와 경이로운 경지에 이른 소문(조병규 분)와의 대결이 된다.
보다 강해진 악의 기운으로 카운터들을 물리친 악귀의 신명휘, 그런 가운데 소문이의 다리가 꺽이고 만다. 허겁지겁 소문이의 다리를 치유하려는 추여사, 하지만 소문이는 그런 추여사를 말린다. 처음 카운터가 되고 추여사가 저는 소문이의 다리를 고쳐주기 이전처럼, 다시 다리를 절게 된 소문이는 그 다리로 절뚝이며 악귀를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몸으로 부딛치는 대신, 염력으로 주변의 것들을 들어올려 온 힘을 다해 악귀를 공격한다. 드디어 휘청거리며 쓰러진 악귀, 그 악귀에게 다가간 소문이는 있는 힘껏 악귀를 소환한다.
하지만 악귀의 마지막 단말마적 저항도 만만치 않다. 미리 소문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차에 납치하고 그 차를 향해 트럭을 달려오게 만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가, 아니면 악귀를 소환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를 구출할 것이냐로 소문이를 시험에 들게 만든다. 자신의 모습을 삼켜버린 소문이 엄마의 모습으로 변하게 하여 소문이를 흔든다. 하지만 그 모든 악귀의 저항도 16부를 줄기차게 달려온 소문이의 일관된 소망을 물리칠 순 없다.
결국 지청신의 모습을 한 악귀는 지옥으로 떨어졌고 소문이는 처음 카운터가 될 때의 소망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난다. 그리고 무려 7년 동안 소문이를 괴롭혔던 자신으로 인해 부모님을 죽음으로 내몰렸을 것이란 소문이의 오랜 죄책감이 부모님의 따스한 품에서 풀어진다.
그렇게 <경이로운 소문>을 시작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완결되었다. 소문이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죄책감에서 풀려났고, 도하나 역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가무탁은 형사로서 그가 추적했던 신명휘를 비롯한 조태신 등이 저지른 중진 시의 비리를 만천하에 고발했다. 살아남은 자로써 짊어졌던 죽음의 무게에서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시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융이라는 특별한 공간, 그곳의 명을 받아 인간 세계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악귀를 소탕하는 카운터라는 독특한 캐릭터들의 활약으로 주목받았던 신선한 장르물은 수미일관한 서사를 완성했다.
완결은 했지만 완성도는 ? 물론 완성은 했지만 뒷맛이 완전히 개운한 건 아니었다. 중반부에 들어서 지청신, 신명휘를 비롯한 악의 축들이 활개를 치면서 상대적으로 초반부 정의의 이름으로 학교를 휘어잡던 소문이의 기세는 한풀 꺽인 채 카운터들의 활약이 미미해져 갔다 .대신 1회차 1신파라는 우스개가 등자할 정도로 매회 등장 인물들과 관련되 눈물 적시는 애닮은 사연들의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웹툰을 통해 이미 화끈한 활약상에 기대가 부풀었던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기에 더욱 아쉬운 전개가 이어진 가운데 작가 교체와 관련된 잡음이 표면화되며 시청자들의 불만은 거세졌다.
더욱이 15회차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카운터들과 악귀와의 일전이 무색하게 뜬금없이 까메오로 손호준이 등장하며 극의 흐름이 끊겼다. 느닷없이 외국에서 활동하는 카운터로 등장한 오정구가 나타난다. 추여사와 같은 '치유' 능력을 가진 오정구는 앞서 결계 공격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추여사를 치료하고자 최장물(안석환 분)이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추여사 대신 출동했다가 가모탁을 구하고 대신 죽음을 당한다.
물론 오정구의 죽음을 통해 소문이 역시 보다 완전체인 카운터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설정이었지만, 오랫동안 카운터로 활약해왔다는 오정구의 죽음은 제쳐두고 오정구의 몸에 깃든 융인의 죽음만이 슬픔의 대상인 듯한 스토리 진행은 한 회에 눈물흘릴만한 신파적 설정에 대한 강박이라도 되는 양 개연성의 아쉬움을 남긴다.
16부 역시 애초에 풀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완결되었다는 점에서는 완결성을 지니지만, 이른 신명휘의 퇴장 이후 뜬금없이 개그식의 대사 주고받기로 긴장감을 떨구더니 그간 못했던 ppl의 향연으로 시간을 할애하며 마지막 회의 긴장감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경이로운 소문>은 부모님의 죽음 이후 다리를 절던 고등학생 소문이가 또 하나의 가족같은 카운터들을 만나 가족을 잃은 아픔도 치유받고, 카운터로서 활약을 통해 자신감과 자부심을 획득해 가는 긍정적인 성장 드라마로서 그 몫을 다했다. 특히 소문이 조병규를 비롯하여, 가모탁, 추여사, 도하나 등 카운터들을 비롯하여 지청신, 신명휘 까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고른 열연으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였다. 벌써부터 시즌 2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상황, 부디 시즌 2로 돌아온다면 보다 완결성 있는 구성과 서사의 준비 과정이 마련되길 바란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텅빈 거리에 혼자 있어. 태양이 하얗게 빛나고 있는데 절대 틀릴 리 없는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어. 나는 궁금해져. 지금은 낮일까 밤일까?
지난 해 11월 30일 첫 선을 보인 tvn의 드라마 <낮과 밤>은 이 모호한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문구로 서막을 열었다. 28년전 온통 불바다가 된 하얀 밤 마을, 사람들은 죽고, 서로 죽이며 마을 전체가 몰살로 이어지는 상황, 살아남은 한 소년이 독백처럼 저 문구를 되뇌인다.
연쇄 살인 사건으로 소환된 하얀 밤 마을 사건 낮과 밤이란 상징적인 문구가 결국 드러낸 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실험체로 씌인 아이들에게서 드러나는 해리성 인격 장애, 즉 괴물이 되어버린 아이들이다.그 시작은 28년전 하얀 밤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28살의 젊은 사회사업가 손민호(최진호 분)가 일군 마을 공동체 하얀 밤 마을, 성공적인 재건 사회 사업으로 언론에 조명되었던 집단 공동체였다.
하지만 그건 드러난 일면에 불과했다. 그 내부에서는 조현희와 공일도(김창완 분)등의 맹목적인 신념의 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와 군의 지원을 받은 국가적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는 일찍이 진시황의염원이었던 부와 권력으로도 닿을 수 없었던 '불사영생'의 공식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를 위해 하얀 밤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실험체가 되어 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하루밤의 화재와 마을 주민들의 몰살로 수면 아래로 사라진 듯 보였다. 28년 후 6건의 의문의 사망사고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때까지는. 수수께끼같은 암호가 적힌 살인 예고가 이지욱 기자(윤경호 분)에게 전달되고, 그 살인 예고에 맞춰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살인이라지만 살인을 당한 사람들은 미소를 띠며 스스로 옥상에서 떨어지고, 물에 뛰어들고, 차로 뛰어들어 '자살'과 같은 죽음을 자처한 상황, 과연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 무엇일까?
그 수사에 연쇄은행강도 수사를 맡았던 도정우를 팀장으로 한 서울 경찰청 특수팀이 뛰어든다. 그리고 그들의 수사를 돕기 위해 FBI출신 범죄 심리 전문가 제이미 레이튼(이청아 분)가 합류한다. 그리고 범인 색출을 청와대 비서관 오정완(김태우 분)까지 나서 독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압력을 행사한다. 오정완만이 아니다. 이제는 내로라하는 사회사업가로 사회 유력층이 된 손민호까지 정보 관리부장 이택조(백지원 분)와 내통하며 수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백야 재단이 된 하얀 밤 마을의 주도 세력 드라마는 하얀 밤 마을 사건 28년후 다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지도층이 된 28년전 하얀 밤 마을의 배후 세력을 '백야 재단'으로 등장시킨다. 그들은 28년전 마무리되지 못한 '영생 불사'의 프로젝트를 당시의 연구원이었던 조현희와 공일도를 앞세워 진행중이었다.
그리고 도정우라 범인으로 쫓기는 6건의 살인 사건을 계기로 당시 하얀밤 마을에서 사라졌던 4명의 생존 아동들이 나타난다. 도정우, 제이미, 그리고 세번 째 아이였던 문재웅(윤선우 분), 거기에 대통령 비서관 오정완의 심복으로 움직이는 네 번 째 아이 김민재(유하준 분)까지.
이들은 모두 하얀 밤 마을에서 실험 대상이 되었던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실험 과정에서 남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동시에 그 실험의 부작용으로 '해리성 인격 장애'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해리성 인격 장애는 세번 째 아이에 의해 6건의 자살과 같은 연쇄 살인을 낳았고, 그 연쇄 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도정우는 자신을 내던진다.
도정우가 사건 해결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건 바로 그 자신이, 아니 그에게 가해진 실험 부작용으로 그의 내면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28년 전 하얀 밤 마을 몰살 사건을 벌인 주범이기 때문이다.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세번 째 아이를 찾고, 오랫동안 제이미 박사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뇌수술까지 받게 한 도정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전히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막고자 한다.
그렇게 스스로 괴물이 된 아이들이 자신을, 그리고 또 다른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백야 재단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세울 때, 그들의 맞은 편에서 오정완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거침없이 실험의 성공을 위해 아이들을 '조달'하는데 전력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이들을 희생으로 삼는 실험이 인류를 위한 일이라는 몰가치적 신념을 가진 수사관 공혜원(설현 분)의 아버지 공일도와, 도정우와 제이미의 생모 조현희가 있다.
낮과 밤; 도정우와 아이들의 결자해지 16회, 실험을 막고자 하는 도정우를 비롯한 아이들과, 여전히 자신의 지적인 탐욕과 영생에의 욕심에 눈이 먼 무리들과의 마지막 일전이 치뤄진다. 특히 28년만에 자식을 눈 앞에 보고서도 반가움 대신 그들의 혈청을 탐하는 도정우의 생모 조현희와 경찰에 잡혀와서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공일도의 모습은 아우슈비츠에서 실험을 한 과학자들이 연상케 한다.
자식보다 자식의 혈청을 탐하는 생모 앞에서 결국 '낮'이었던 도정우의 선한 의지를 괴물 도정우가 먹어버린다. 28년전 그날처럼 모두를 파멸로 이끌려는 상황, 동생 제이미와 공혜원의 간절한 목소리는 도정우를 '낮'으로 되돌리고 몰살의 비극은 재연되지 않는다. 그리고 28년전 그날부터 '괴물'의 원죄로 시달린 도정우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어머니 조현희와 함께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폭발의 현장에 남는다.
생체 실험으로 염력을 비롯하여 슈퍼맨과 같은 능력을 지닌 주인공, 그리고 그가 맞서 싸우는 권력과 부를 넘어선 영생불사를 향한 맹목적인 무리들, 무엇보다 아이들의 혈청을 기반으로 하여 100세가 넘어서도 자신을 숨긴채 젊은 대통령 비서관으로 살아왔던 오정완이나, 아들의 혈청으로 늙지 않는 조현희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악행이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세번 째 아이의 살인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스토리는 그 자체로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그런 악의 무리들을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갖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속시원하게 파헤치고 단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16부작을 정주행한 시청자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 더구나 '죄'의 대가를 기꺼이 치루고자 하는 세번 째 아이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불 속에 남은 도정우의 모습은 인상깊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도정우가, 불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와제네거처럼 되살아 온 도정우, 시즌 2를 향한 히어로의 재등장인듯하지만, 그가 결자해지로 불속에 뛰어들었던 도덕적 딜레마가 뒷마을 씁쓸하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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