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영화라고 하면 선입관이 있다.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차용하였듯이 진지하거나 코믹하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할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발리우드' 영화이다. 하지만 이런 인도 영화에 대한 선입관을 깨준 영화가 1월 15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찾아왔다. 바로 <인생은 트리방가처럼>이다. 

트리방가는 극중 여주인공 아누(카졸 분)이 추는 인도 전통 춤의 오디시 동작 중 하나이다.  주인공 아누는 그 트리방가라는 동작을 빌어 자신을 표현한다.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아누식 표현대로 하자면 '삐딱하다?' 몸을 한번 꺽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려 세 번이나 꺾는 고난이도의 동작, 그건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 '트리방가'를 영화 속 세 모녀 나얀(탄비 아즈미 분), 나얀의 딸 아누, 그리고 나얀의 딸 마샤(미틸라 팔카르 분)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로 선택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많은 딸들이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고 외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 닮고 싶지 않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거부하고 살아온 딸, 그리고 딸이 낳은 딸은 다시 그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이렇게 3대의 여성이 서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살아왔던 모습이 나얀의 뇌졸증을 계기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며 해묵은 '모녀'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엄마이자 작가였던 나얀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쓴다. 샘물이 솟아오르듯 쉴 사이 없이 떠오르는 그녀의 영감은 빠른 그녀의 손끝에서 작품화되었다. 그녀를 사랑하던 남자는 그녀의 '문재'를 아꼈고 결혼해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았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시어머니는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손을 놀리는 며느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식이 죽어나가도 글을 쓸 것이라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고 그녀를 찾아온 문학계 동료들 앞에서 수모를 안겼다. 그녀의 글을 사랑해서 결혼했다던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시키기는 커녕, 두 사람의 갈등 앞에 안락하지 않은 가정을 불평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떠나자했지만 외아들인 남편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가 떠났다.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비말, 그리고 아이들, 새로운 사랑, 그리고 두번 째 작품의 출간, 그녀는 행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녀를 엄마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엄마 대신 '나얀'이라고 불리는 여성, 여성 3대의 어머니 나얀은 자신의 자서전을 쓰며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아이들이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비난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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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정하는 아이들 
왜 아이들은 엄마를 나얀이라 부르며 외면하게 되었을까? 나얀은 그녀가 활동하던 1980년대 인도 사회에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집을 나온 이후 남편이 더 이상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자 남편 성 대신 자신의 성을 아이들에게 붙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결정이었다. 케케묵은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그녀의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정에서 10년간 싸웠다.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은 강인한 엄마이자 문필가, 하지만 그런 엄마의 결정을 감내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이혼이 흔치 않았던 1980년대의 인도 사회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이별을 맞닦뜨린데 더해, 자신들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꾼 상황에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딸 아누를 정작 고통에 빠뜨린 건 그런 주변의 놀림이 아니었다. 엄마의 두번 째 사랑인 사진가가 시시때때로 나얀을 성적으로 희롱했던 것이다. 아누에게 더 고통스러운 건 엄마가 이걸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누에게 엄마는 딸인 자신보다 작가인 엄마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누 자신이 미혼모로 고통을 받는 과정에서 갈등의 정점에 이른다. 

 

 
늦은 화해 
그렇게 엄마를 외면했던 두 남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엄마의 병실에서 모인다. 그리고 엄마의 자서전을 써왔던 밀란을 통해 뒤늦은 엄마의 진심을 확인한다. 잘못한 걸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보이고 아이들에게 비난받겠다는 엄마의 진심을 깨달으며 외면했던 마음이 돌아선다. 

아누는 엄마를 거부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맞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으로 하기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엄마가 싫었던 아누 역시 정작 한 남자와 평생을 사는 걸 바보짓이라 일축한다. 결혼을 사회적 테러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태도를 일관한 아누는 결국 엄마 나얀의 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인 나얀에 반항하며 살아왔던 아누의 딸 역시 아누의 삶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학부모 상담일마다 매번 새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는 엄마가 싫었던 딸은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자 애쓴다. 영화의 제목처럼 세 번의 굴곡이 할머니, 어머니, 손녀 삼대를 통해 드러난다.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 그런 엄마처럼 살기 싫은 딸, 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닮은 여성 3대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이혼이 수용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와 자유분방한 여배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도 사회 내 여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는 그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인도'라는 지역성을 넘어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울림을 전해준다. 









by meditator 2021. 1. 18. 17:36

인기 웹툰 <경이로운 소문>이 드라마화된 ocn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은 화제작답게 ocn 장르 드라마로는 드물게 10%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여서 그럴까 최근 작가 교체가 되었다는 낭보와 함께, 제작진의 잡음이 표면화되었다. 극중 출연자가 이에 '믿고 따라와봐요'라는 응답을 하는 듯한 sns를 했지만 들썩이는 여론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저 '작가 교체'라는 내부적 요인 때문일까? 그것보다는 이미 웹툰을 통해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경이로운 소문>과 드라마로 구현된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점이 제작상의 갈등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경이로운 소문> 
<경이로운 소문>이  ocn 장르 드라마로써는 획기적으로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건 무엇보다 이미 원작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원작의 그 '재미'란 무엇일까? 

극중 주인공들은 '카운터'들이다. 이 새로운 캐릭터들은 '융'이라는 지상과 하늘을 잇는 '영계'의 명을 받아 악귀를 사냥하는 신선한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카운터가 된 소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코마' 상태에 있던 사람들, 죽음 대신 삶의 기회와 함께 저마다의 놀라운 능력치를 얻어 그를 통해 악귀가 된 사람들을 쫓아 그들의 악령을 소환한다. 소문이(조병규 분)의 경우 그 자신이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악귀에게 희생된 케이스로 마지막 카운터의 주자로 합류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은 이들 카운터들의 활약상을 따라 드라마의 흐름을 쫓는다. 그저 악귀를 사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악귀들의 악행이 이들이 머물고 있는 중진 시의 신명휘 시장과 그의 조력자들의 사회구조적인 비리와 연결이 되며 판을 키운다. 거기에 이들의 비리를 추적하다 죽음을 당할 뻔한 카운터 가모탁(유준상 분)과 역시나 부모님을 잃은 소문이의 사연이 더해지며 우연은 운명적 만남이 된다. 거기에 단계를 높여가며 카운터들과 대척점을 이룬 악귀 지청신(이홍내 분)이 신명휘의 조력자가 되며 악과 카운터들의 대립은 중진시라는 거악의 척결로 귀결된다. 

 

 

활약 대신 사연이 
이렇게 판을 키운 <경이로운 소문>, 하지만 판이 커진 것에 비해 정작 회를 거듭하며 시청자들이 보고자 했던 카운터들의 화끈한 악귀 사냥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2.7%로 첫 출발을 끊었던 <경이로운 소문>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건 부모님을 잃은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소문이 카운터가 되며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걷게 됨은 물론, 그간 소문이와 친구들을 괴롭히던 가해 학생들을 속시원하게 '응징'하는 장면에서 부터였다.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은 물론 그 누구라도 괴롭히지 말라며 단호하게 소리치며 힘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던 학생 무리들을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장면은 말 그대로 체증이 확 풀리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러한 속시원한 활약을 기대하며 시청자들은 <경이로운 소문>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다리를 절던 소문이 두 다리로 걷고 뛰고 건물을 날아오르듯 융의 위겐들의 영적인 도움으로 카운터들이 악귀들을 제압해나가는 장면을 그 자체로 '카타시스'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반부에 들어서며 <경이로운 소문> 속 카운터들의 활약은 지지부진했다. 악귀를 사냥하는 대신, 가무탁의 과거 사연과 소문이 부모님의 사연, 그리고 도하나(김세정 분)이 풀리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반면, 카운터로서의 활약은 그런 사연 속 조미료처럼 감질맛나게 등장했다. 심지어 융의 위겐들이 과거 사연과 관련하여 카운터로써의 영역을 넘어선 카운터들의 활동을 문제삼아 소문이의 능력을 빼앗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주인공의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은 '히어로물'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통과 의례이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클리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악의 주구인 지청신을 비롯한 중진시의 악의 전횡이 드라마를 지배하며 극을 이끌어 가는 것이 누군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드는데 있다. 

장르물에서 흔히 오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시선을 사로잡는 '악'의 존재감이 커지며 극의 흐름을 '악'의 축이 끌고가게 되는 경우이다. <경이로운 소문> 역시 지청신과 백향희라는 악귀가 사람들의 목숨을 밥먹듯이 해치우며 악의 단계를 상승하며 극중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그런가 하면 신명휘와 그의 조력자 조태신의 전횡도 점입가경이었다. 

 

 
그렇게 악의 무리들이 그 힘을 키워나가는 동안 카운터들은 저마다의 사연에 천착하여 딜레마에 빠진다. 사람으로 자신이, 자신의 부모님이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은 그 무엇보다 곡진하고 애달프지만 이러한 '신파'적 정서로 스토리를 진행해가다보니 카운터로서의 면모가 상대적으로 아쉬워지게 되는 것이다. 

소문이의 경우는 매번 부모님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이미 그런 상황에서의 단독 행동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동료들마저 위험에 빠뜨려 카운터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기도 했던 소문이였는데, 이제 다시 13, 4회에서 소문이는 여전히 분노하고 폭발한다. 지청신의 자살로 신명휘에게로 옮겨간 악귀를 확인한 소문이가 동료 카운터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신명휘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 상황은 용맹한 카운터라기보다는 여전히 부모님의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등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 보인다. 즉 소문이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드라마는 카운터들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소문이라는 캐릭터를 늘 소리치고 분노하는 일차원적 캐릭터로 소모하는 경우가 많다. 

도하나 역시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자신을 통해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자신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도하나의 과거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이제 종착지를 남겨둔 14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그녀 혼자 살아남았다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악귀 사냥꾼으로서 카운터들의 저마다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지 못한다. 심지어 카운터들은 카운터로서의 활약 대신 신명휘 시장 대선 출정식에서 똥물을 뒤집어 씌우는 실소 넘치는 해프닝이나 속여넘겨 선거 자금 빼앗기와 같은 카운터답지 않은 작전으로 스토리를 이어간다.  13회에서도 결계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카운터들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뜻밖에 등장한 아이로 인해 기회를 다시 놓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지지부진한 카운터들의 시행착오가 이제 대미를 장식할 15,16회의 결전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밑밥일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잔칫날 잘 먹자고 내리 굶기는 상황처럼 16부의 여정에서 사연은 구구절절했던 반면 카운터들의 활약상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남긴다. 탄탄한 원작에도 불구하고 16부라는 여정마저 버거워보이는 흐름이었기에 작가 교체와 같은 내부 잡음이 시청자들의 불만섞인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21. 1. 18. 01:34

모리스 뤼블랑의 <괴도 뤼팽>은 '탐정'이 중심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계의 '반전'이다. 징죄를 받아야만 하는 범인이 주인공이 되어 그를 잡으려는 경찰을 희롱하며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호들을 농락하는 이야기는 <셜록 홈즈>로 대변되는 정의의 서사의 맞은 편에서 또 다른 장르를 개척하며 추리소설의 고전이 되었다. 

 

 

<셜록 홈즈>가 영국 드라마로 시즌을 거듭하며 인기를 끌며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베치에게 명성을 선사해 왔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며 <기암성>에서 셜록 홈즈와 비극적 대결 구도를 그렸던 <괴도 뤼팽>의 현대적 해석이 당연히 기대되는 상황,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이런 대중의 기대를 절묘한 서사를 통해 5부작으로 재해석해낸다. 

<괴도 뤼팽>의 첫 작품은 <왕비의 목걸이>이다. 1874년 태어난 뤼팽,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진 바람에 어머니 앙리에트와 함께 드뢰-수비즈 백작 부부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백작 부부로 인해 갖은 수모를 겪게 되는데, 뤼팽은 이런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백작 부부의 가장 아끼는 보물인 마리 앙토와네트의 목걸이를 훔치며 '괴도'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 프랑스 사회의 사회적 모순을 담은 뤼팽 
<넷플릭스 오리지널 -뤼팽>은 바로 이 <왕비의 목걸이>를 모티브로 오늘날 프랑스, 아니 유럽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을 갈등의 고리로 엮는다. 세네갈에서 유럽으로 온 아산 부자, 아산의 아버지는 재벌 펠레그레니 집에서 운전수로 일을 하게 된다. 

비오는 날 차에 시동이 꺼져 고충을 겪던 펠레그레니의 아내, 그 차에 다가가 도움을 주겠다는 아산의 아버지, 하지만 펠레그레니의 아내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협을 느끼며 차문을 잠근다. 바로 이 장면에서 이민자로서 아산 부자를 대하는 당시 프랑스의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난한 이민자였지만 아산의 아버지는 성실했고 어린 아산에게 학구열을 독려한다. 하지만 운전수라는 직업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 적응하려 했던 아산 부자의 열망은 펠레그레니 집안에서 사라진 왕비의 목걸이를 훔친 범인으로 아산의 아버지가 지목됨으로써 무너진다. 증거가 불충분했지만 가진 것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죄를 추궁당한다. 결국 감옥에 갇힌 자신의 펠레그레니에게 농락당한 것을 알고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홀로 남은 아산은 복지원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25년의 시간이 흘러, 아산의 아버지가 훔쳤다던 그 목걸이가 다시 펠레그레니 집안에서 등장하고 펠레그레니 재단 창립 기금을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경매에 붙여진다. 그리고 25년만에 나타난 아산(오마르 사이 분)은 유유히 그 목걸이를 훔친 채 사라진다. 자기 어머니가 당한 수모를 되갚기 위해 목걸이를 훔친 <괴도 뤼팽>의 첫 번 째 작품의 오마주이다. 


 

 

​​​​​​​아버지의 유지, 뤼팽 

5개의 시리즈로 이어진 <뤼팽>은 이렇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한 아산의 신출귀몰한 모험담이다. 세네갈에서 온 이민자 가정의 아산은 흑인 이민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어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뤼팽 속 스토리를 활용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뤼팽>인 이유는 그저 <괴도 뤼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서사 때문만이 아니다. 세네갈에서 온 이제는 고아가 된 소년 아산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책이 바로 <괴도 뤼팽>이었다. 그리고 <괴도 뤼팽>은 감옥에서 죽어간 아버지가 아산에게 남긴 메시지북이기도 하다. 

복지원에서 사립 학교로 이어지는 학창 생활 동안 성경 사이에 아버지가 남긴 <괴도 뤼팽>을 끼워 아산은 읽고 또 읽으며 '뤼팽'으로서 거듭났다. 그렇다면 뤼팽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뒷골목 건달들과 한탕을 위해 루브르 경매에 나온 목걸이를 훔치는 것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그 모든 계획이 경매장에 신흥 갑부로 등장한 아산이 여유롭게 목걸이를 훔쳐내기 위한 페이크 작전이었다.

<괴도 루팽>이 <셜록 홈즈>와는 또 다르게 도둑이지만 때로는 홈즈보다도 더 정의로워보였던 의적인 뤼팽의 설정처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기본 설정을 밑바탕에 깔려 있다. 거기에  뤼팽의 이야기처럼 한 편의 마술처럼 알고보니 뤼팽의 큰 그림이었다는 식의 서사가 <뤼팽>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괴도 루팽> 속 뤼팽처럼 분장을 통해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극단의 상황에서도 신출귀몰하는 기지로 위험을 돌파해내는 기지로 아산은 뤼팽이 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친 목걸이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펠레그레니에게 통쾌한 복수를 선사한 아산은 그에 이어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쫓아간다. 남의 주머니를 슬쩍 터는 건 기본, 말 몇 마디로 경찰을 따돌리고, 자산가의 보물을 한 손에 쥐는가 하면, 진실을 찾기위해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는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또한 무기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펠레그레니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전직 기자와 손을 잡고 sns를 비롯한 방송 출연이라는 첨단의 '폭로' 전술을 쓰는가 하면, 펠레그레니와 손을 잡고 그의 아버지를 잡아간 당시 형사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인공지능 홈iot는 물론 드론 활용하는 등 아산 버전의 뤼팽은 현대 문물의 귀재가 되어 법망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인크레더블 헐크> 의 루이 리터리어 감독이 연출을 맡은 시리즈는 이미 시즌을 거듭하고 있는 <셜록 홈즈>와는 또 다른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담은 갈등 구조를 풀어내며 고전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시즌 2를 기약한다. 

by meditator 2021. 1. 12. 02:30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2021년 벽두부터 던지기에는 좀 오글오글한 질문일까? 아마도 이 질문은 받아든 사람들이 머리에  떠올리는 사랑의 모습에 따라 질문도, 대답도 그 성질이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만남의 장소를 떠올릴 지도 모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사랑이라고 넘겨짚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으로 삶의 물길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 걸 경험했던 누군가라면 한번쯤 그 사랑의 시작에 대해 상념에 젖지 않을까. 

<가을의 마티네>는 1999년 약관 23살의 나이에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로맨스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가  원작이다. 2015년부터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며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이 소설을 <용의자 x의 헌신>의 니시타시 히로시 감독이 동작품을 함께 했던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영화화했다. 

소설의 제목처럼 주인공 마키노(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와 요코(이시다 유리코 분)의 사랑은 마키노의 연주회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당신의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됐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 째 대답이 될 것이다. 

연주회를 마친 마키노는 자신의 대기실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든다. 무려 20주년 독주회, 하지만 연주를 거듭할 수록 그의 이마에 배어나오는 땀방울처럼 그에게는 이젠 날이 갈수록 자신의 기타 연주가 버겁다. 그럼에도 장사진을 이룬 팬들, 그들을 말리는 충복같은 매니저 미타니(사쿠라이 유키 분), 해프닝처럼 마키노의 앨범을 의논하려고 온 소부에, 친구인 요키가 마키노와 마주하게 된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 
교감, 아마도 사랑의 시작은 이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의 궤도를 살아온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지점,  마키노와 요키는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는 역설적인 문구을 통해 교감한다. 마키노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는 미타니의 최측근 미타니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나눈다. 

영화는 내내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는 화두를 되풀이 한다. 마치 역사학자 E.H. 카의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정의를 뒤집은 듯한 문구이다.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E.H. 카와 다른 말을 한 것일까? 아니 외려, 영화를 보고나면 히라노 게이치로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E.H. 카의 인생 버전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마키노와 유키가 첫 교감을 했던 이야기는 유키의 본가 마당에 있는 너른 바윗돌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 유키가 그곳에서 소꼽장난을 즐겨했던 곳, 그래서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 그곳에서 그만 할머니가 머리를 부딪치셔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유키는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왜 마음이 아프냐는 마키노의 매니저 질문에 마키노가 '미래가 과거를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좋은 기억이었던 과거가 현재에 벌어진, 즉 '미래'의 사건으로 인해 이제는 아픈 추억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아픈 일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 '상처'에 머물러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천착'해 있는 상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각색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E.H.카가 말한 역사도 결국 현재의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미래를 지향한다는 뜻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속 마키노와 유키는 모두 '상실'을 겪는다. 기타리스트로서 더는 기타를 칠 수 없을 만큼 슬럼프에 빠진 마키노, 그런데 그가 고통 속에서 연주한 20주년 연주회에서 유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유키는 그가 유일하게 만족했던 마지막 앵콜 브라암스 곡의 진정성을 알아봐주며 마키노의 마음을 울린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로 돌아간 유키는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의 와중에서 동료를 잃고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런데 그런 유키를 위로해 준 것이 바로 마키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상실'의 과정을 겪어가며 서로의 진심을 나누고, 사랑을 약속한다. 유키는 파혼을 하고 프랑스 생활을 접고 마키노가 있는 일본으로 온다. 

하지만 운명은 얄궃게도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한다. 그로 부터 다시 몇 년의 시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궤도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동안 두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간다. 

오랫동안 기타를 연주할 수 없었던 마키노가 그를 13살에 발탁하여 가르쳐 준 스승님의 추모 앨범을 계기로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에야 두 사람의 멈췄던 인연의 시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각자 겪은 개인적인 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각자 아픔은 겪었지만, 그 아픔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빛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키노가 슬럼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연주 중 유일하게 스스로 만족한 브라암스에 감명한 유키에게 마음이 그렇게 쉽게 갔을까? 마찬가지로 동료를 잃고 슬픔에 잠긴 유키의 마음을 어떻게든지 달래보려 애쓴 마키노의 정성이 없었다면 유키가 마키노에게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시련을 맞이한다. 이별이라는 '현재'는 아마도 그들이 함께 했던 '과거' 조차도 아픔으로 기억되게 했을 것이다. 마치 유키네 집 마당의 바위가 어린 시절 추억을 할머니의 죽음으로 덮었듯이. 심지어 그 이야기를 마키노와 나누었던 그 기억 때문에 더더욱 본가로 돌아간 유키에게 그 바위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픔 가운데에서도 마키노도, 유키도 서로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상처로만 덮지도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마키노는 스승의 추모 앨범에서 '미래가 과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의 그 이야기에 유키가 화답한다. 

영화는 어딘가로 바쁘게 가던 유키가 뒤돌아 고향 마을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거리의 바윗돌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키노에게 화답한 유키가 다시 바라본 그 바윗돌은 이제 어떤 의미였을까? 

2021년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지난 아픔을 접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상처인 채 놔두면 그대로 아픔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그 아픔의 삶을 딛고 거기에 새로운 역사를 부여하는 순간, 아픔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상실과 상처, 우리를 고통받게 하는 것들이다. 영화는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각자의 삶과 사랑에 용기를 내보라 권한다. 바윗돌 하나에도 오고가는 다른 기억이 얹히듯이 우리가 살아오며 가지게 되는 아픔과 고통들에 대해, 그것들을 '승화'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라 영화는 권한다. 영화 속 마키노가 자신의 슬럼프를 딛고 나아가며 사랑을 되찾듯이, 그리고 유키가 과거에 머무는 대신 성큼 자신의 삶에, 그리고 사랑에 용기를 내보듯이. 그래서 이제 유키가 밝은 표정으로 거리의 바윗돌을 보듯이 우리 역시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해석할 수 있을 거라, 그래서 '미래가 과거를 만든다'고 영화는 거듭 말한다. <가을의 마티네>란 서정적인 제목 아래 숨겨진 영화 속 의미는 2021년 아름다움 삶과 사랑을 향한 덕담이다. 





by meditator 2021. 1. 9. 00:42

작년 10월 8일부터 롯데 뮤지엄에서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 이제는 현대 미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듣게 되는 화가이다. 그것보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에 이어 그의 작품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유명 화가라고 하면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장벽 앞에 선 1980년대의 스타 작가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등장하여 겨우 8년이라는 짦은 기간 동안 3000 여 점의 작품을 쉴틈없이 쏟아낸 스타 작가이다. 그리고 그 짧은 작품 활동 기간은 유색인종으로서 장 미쉘 바스키아가 여전히 인종 차별적 시선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 자신의 작품으로 저항한 기간이기도 하다. 

낙서와 같은 문구와 현대 문화의 아이콘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그런 그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전시회 작품 중 가장 가격이 비싸다는 작품은 해부도 속 인물과 같은 인간과 소가 그려져 있다. 바스키아가 그린 동물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유색인종 자신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그가 그린 피흘리는 예수는 그와 같은 피부빛깔이고, 당대 최고의 야구 선수 행크 아론은 역시나 그와 같은 유색 인종의 영웅으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전시회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 바스키아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이 있다. 모두가 백인인 동료들 사이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바스키아, 이십대의 감수성 예민한 흑인 청년이 그 백인들 중심의 예술계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지레 짚어볼수 있는 지점이다. 그가 가장 믿고 따랐다던 앤디 워홀조차 그에게 너무 그렇게 인종적 차별에 민감한 그림에 천착하는 것을 말리기도 했다니, 그럴 수록 젊은 바스키아가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도를 더해갔을 것이다.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그려준 그림이 단 일주일 만에 화랑에 비싼 가격에 전시되는 스타 화가였다. 전용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에서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유색인종이었다. 

 

 

1920년대의 흑인 청년의 좌절 
1980년대의 흑인 청년이 그럴진대. 1920년대를 살아가는 흑인 청년이 느끼는 사회적 좌절은 어땠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선보인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또 한 명의  흑인 청년의 좌절을 그려낸다. 

영화를 여는 건 '블루스'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민요가 우리 고유의 '한'이라는 정서에 기반한 것처럼 음악 장르로서의 블루스는 노예로 살아가던 흑인들의 '한'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킨 장르이다. 그리고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 분)'는 바로 그런 흑인들의 한을 구현하는 블루스 장르의 대표적 가수이다. 첫 장면에 선보인 그녀의 소울넘치는 음악에 흑인 관중들은 영혼의 '정화'를 느낀다. 

그런 블루스의 대표적 가수 마 레이니, 그녀가 음반 녹음을 위해 대표적인 북부의 도시 시카고에 등장한다. 트럼펫 연주자 레비(채드윅 보스먼 분)는 마 레이니의 연주를 위한 세션의 한 사람으로 동행한다. 

마 레이니를 비롯하여 세션들이 지나는 시카고 거리, 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백인들이다. 백인들은 그들을 마치 범법자 대하듯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먼저 도착한 세션들은 녹음이 예정된 공간이 아닌 창고같은 지하 공간으로 안내되어 음반에 필요한 음악을 맞춰보도록 요구된다. 그들의 동선만으로도 1920년대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가 절감된다. 

오거스트 윌슨이 쓴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답게 영화는 지하의 세션 연습장과 마 레이니의 동선을 따라 오가며 소동극처럼 진행된다. 호텔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녹음실에 이르기까지 마 레이니는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유명세를 내세워 갖가지 해프닝을 벌인다. '몽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때로는 말이 되지 않는 요구들을 내세우며 녹음 작업을 지연시키지만, 그런 마 레이니의 '몽니' 저변에 깔린 건 저들 백인들이 자신을 블루스의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불편한 자의식이다. 

그렇게 마 레이니의 해프닝과 함께 지하 녹음실을 중심으로 피아노와 트럼펫,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세션들 사이에 말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 중심에는 늙수그레한 다른 세션들과 달리 아직 젊은, 그래서 마치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어울릴 법한 태도로 일관하는 청년 '레이'가 있다. 

자신의 곡을 음반사에 선보인 레이는 한 마디로 눈에 뵈는 것이 없다. 그의 악보가 마 레이니 저리 가라하게 잘 나갈 것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그는 선배 세션들을 깔보며 마 레이니의 세션이 아닌 자신만의 악단을 꾸려 승승장구할 것이라 장담한다. 마 레이니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 스타일의 음악으로 녹음을 할 것을 제안하는 등 자신감이 넘치는 레이와 선배 세션들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드러난 건 마 레이니라는 여가수의 녹음실 해프닝이지만,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말의 성찬을 넘은 갈등을 드러내며 결국 1920년대 흑인들의 현실을 토로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아웅다웅하던 선배 세션들과  레이, 선배들은 레이를 그저 철부지로 치부하지만 알고보니 레이에게 백인들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된 슬픈 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동지애를 느낀다. 나이도, 취향도, 다루는 악기도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차별받은 유색인종이라는 지점에서 '블루스'의 정서같은 깊은 '상실'의 상흔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화 초반 그저 '나대는 것'처럼 보이던 레이의 '조증'이 영화가 진행될 수록  밟히고 싶지 않은 한 흑인 청년의 자기 방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동지애는 마 레이니의 녹음 현장에서 무력하다.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한껏 대접받고자 하는 마 레이니의 횡포에 가까운 녹음 작업에서 튀어나온 못과도 같던 레이는 결국 소외되고 주어진 기회마저 잃게 된다. 새 구두를 사고, 자신의 악보만 팔면 이제 고생 끝, 마 레이니 따위가 우습게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할 꺼라던 청년의 조급한 꿈은 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빠져버린다. 그의 조증만큼이나 순식간에 모든 걸 잃은 청년의 분노는 동료는 물론 자신을 자멸의 길로 이끈다.

녹음실의 해프닝으로 채운 영화은 그 안에서 1920년대 흑백 차별이 여전한 사회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번듯한 듯 하지만 저 마다 차별과 상실의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는 흑인들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흑인과 흑인 사이의 다시 갈라진 벽은 결국 한 청년의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후반부, 단돈 2달러 헐값에 팔라던 레이의 악보는 백인 뮤지션에 의해 녹음된다. 그 모습은 마치 8년의 생애 동안 어엿한 인류의 일원으로 흑인의 존재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던져 싸웠던 바스키아의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작품으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풍미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늘 흑인 인권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왔던 채드윅 보스먼의 유작인 <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여전히 신산했던 1920년대 추락한 흑인 이카루스의 삶을 그려낸다. 

영화 속 레이, 그리고 바스키아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흑인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에 그 누구보다도 '민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 내내 그들이 몸으로 체감했던 차별적 삶에 날카롭게 반항하다 자신을 산화시킨다. 청년, 젊은 그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그런 그들의 열망을 불태워버린다. 

by meditator 2021. 1. 5. 20:19

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 8천만 명, 세계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전문가들은 이제 세계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  kbs는 2021년 새해를 맞이하여 <kbs특별 기회 코로나믹스> 3부작을 방영했다. 제레미 러프킨, 리차드 프리먼, 서울대 사회학과 이대열 교수등 국내외 석학들의 의견을 모아 '뉴노멀'을 향한 진단과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불안한 세계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180만명,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하지만 정작 코로나가 전세계인들에게 위협을 가한 건 이 질병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생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존'의 화두를 코로나는 전 세계 사람들 앞에 던졌다. 

바이러스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닥친 결과는 달랐다. 소상공인들은 지난 1년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했다. 최저로 떨어진 근로 소득, 역대 최대의 실업률, 수익은 반토막이 났지만 월세는 그대로인 세상을 감당할 길이 없다. 

방역을 강화하자니 경제가 죽고, 경제를 살리자니 방역이 무너지는 상황, 국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부각되었다. 파격적인 재정지출을 한 독일은 1000조원을 투입했고 소득의 75%까지도 정부가 지원을 했다. 스웨덴의 경우는 이미 확립된 사회 안전망을 통해 기본 생활을 보장했다. 확장적인 재정 정책이 불가피한 상황인 된 것이다. 

 

 

위험한 질서 
코로나의 충격은 공평하지 않았다. 취약한 곳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난한 지역이 코로나에 무방비하게 무너져갔다.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 역시 저임금의 노동자들이었다. 취약 계층의 발병률은 높은 소득의 계층보다 3배나 높았다. (국민 건강보험 빅데이터) 우리나라의 경우 청소 노동자와 택배 노동자가 소외되었다. 고소득 고학력의 노동자가 빠르게 회복되는 반면, 저학력, 저소득 노동자의 침체가 심화되는 임금, 소득 수준에 따라 침체를 벗어나는 속도가 달라지는 k자형 회복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태국의 시민들은 불공정함과 차별적인 규범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왕실 개혁과 민주주의를 들고 일어섰다. 브라질 시민들 역시 일관된 정부의 무능과 방역에 대한 방기에 분노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 40년 코로나 팬데믹은 외려 승자 독식 구조를 강화했다. 확진 사실을 알고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던 아마존, 심지어 방역과 검사 지원 비용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해고한 아마존은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거래 증가로 인해 최고의 기회를 맞이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반복되는 양적 완화, 주식, 비트코인, 금 등의 자산 가치는 치솟고, 부동산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엄청난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데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지만 가난한 이들을 집에서 내쫓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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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시대
중국의 북경절, 시민들은 코로나가 끝난 듯 여유롭다. 정부 공식 발표로 77명에 이를 정도로 부쩍 줄어든 확진자, 시민들은 나라에서 잘 통제해 줄 테니 걱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중국의 효율적이지만 권위주의적 방식에 서구의 학자들은 우려를 표한다. 바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민주주의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2020년 11월 라이프찌히 시민들은 도시 봉쇄를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어떤 경우에도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서구의 민주주의적 전통 때문이다. 기본권에 대한 그 어떠한 침해에도 서구의 시민들은 반대를 표한다. 이렇듯 코로나는 각국의 대응 양식에 따라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관계 정립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k방역이 주목받았다. 극단적인 봉쇄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방역의 성공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가치와 협력의 힘에 대한 확신없이는 이루어 낼 수 없었던 성과였다. 그 결과 우리 국민들 63%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결이 잘 되는 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시민 역량에 대한 자신감도 얻었다. 

개인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부정적 자유가 아니라, 좋은 공동체적 관계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 자유의 가치를 지향하는 k 방역의 정신이 보다 사회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의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충남 보령 장고도 도민들이 해오고 있는 공동 작업, 공동 분배의 방식이나, 동자동 주민 공제 조합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아 가고 있는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다. 영국 남부의 작은 도시 루이스에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활성화시키려 하고 있는 지역 화폐 역시 공동체적 가치에 기반을 둔다. 코로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공동체적 가치를 제고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켰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 그런 가운데 독일에서는 3년간 매달 우리 돈 160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1200 유로를 제공하는 기본 소득 실험을 하고 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진행된 기본 소득 실험, 공짜 돈을 받아 근로 의욕이 떨어지기 보다는 이러한 기본 소득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일에 대한 동기 부여를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긍정적 결과를 낳고 있다. 


by meditator 2021. 1. 4. 16:46

매일 밤, 아니 새로이 하루를 시작하는 12시 20분에 지난 15년간 꾸준히 찾아온 '지식 보따리'가 있다. 바로 EBS의 지식 채널 E이다. 정보의 흡수가 보다 빨라지고 '인스턴트'화 되어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한 꼭지당 겨우 5~6분여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의 내용에 있어서는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진지하게 세상에 대한 해석을 해왔다. 코로나로 한 해를 보낼 즈음 <지식 채널 E>는 시민들과 콜라보로 '브이 로그' 11부작을 마련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온 시민들의 삶을 그들의 목소리와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코로나의 일선에서 
12월 30일 12시 20분, 아니 2020년 마지막 날인 31일 0시 20분 11부의 <지식 채널 E 연말 특집 11부작 2020을 살다>는 올 한 해 잠시도 멈출 수 없었던 사람들, 의료진들의 이야기 <#덕분에 #고맙습니다>로 마무리되었다. 

선별 진료소의 하루는 레베 D 방호복 환복에서 부터 시작된다. 6월 외부의 온도는 23도 정도지만 환복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한증막 속에 있는 듯하다고 호소하는 의료진, 하지만 한증막같은 방호복이 그들의 '업무'를 막을 수는 없다. 

감염의심자의 입장에서는 낯선 곳, 낯선 의료진에게 코와 입을 찔려야 하는 당혹스러운 상황, 그들을 의료진들은 많게는 하루 120명을 상대하며 지난 1년을 보내왔다. 일요일 35명의 방문자가 반가운 현실, 격리 병동이라고 다를까, 3명의 환자가 기쁜 소식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격리 병동이지만, 간호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몸을 감싼 방호복을 제외하면 언제나 그들이 맞이했던 똑같은 환자들이다. 십년 동안 감호사 생활을 해왔던 심수진 간호사는 올 1월만 해도 이제 그만 이 일을 그만두려 했었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심간호사가 번번히 맞이해야 하는 죽음들에 허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번성하고, 심간호사는 심기일전 다시 그 현장에 파견을 나섰다. 방호복을 겹겹이 싸맨채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상대한 제 일선이지만 심간호사는 아직은 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구나란 직업적 소명 의식을 다시 회복했노라 소회를 전한다. 

그런 의료진들의 맞은 편에 코로나 확진자의 이야기 <15일, 아주 특별했던 시간>이 있다. 해외 출장 나흘 전 확진 판정을 받은 JOEY KIM님, 감염 경로도 모른채 입원을 했다. 

빵과 우유로 한 첫 식사이후 홀로 이어간 식사 시간, 이후 정해진 시간 체온과 혈압, 산소 포화도를 스스로 재서 기록하는 일과, 미각과 후각이 사라지더니 가슴, 위의 통증과 두통, 마른 기침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5일차가 지나가며 어제와 비슷한 창밖, 비슷한 메뉴의 음식들, 멈추어버린 듯한 시간들, 멈출 수 없는 업무, 하지만 그 비슷한 것들이 다시 시간을 지내며 달라진 하늘로 다가왔다. 15일차, 드디어 음식 냄새가 맡아지고, 열도 떨어졌다. 홀로 싸워냈던 시간  JOEY KIM님은 그 시간이 일에 치어 들여다 보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과 대화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감사했던 이라고. 

 

 

코로나가 멈추게 한 일상 
코로나는 우리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지식 채널 E 연말 특집 11부작 2020을 살다>의 첫 스타트를 끊은 건 <사는 건 영화 같지 않아서>이다. 

부모님이 20년째 해오던 국밥집을 의욕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영업을 해온지 5년 째 서용대 씨는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았다. 오피스 상권에 휘몰아닥친 '재택 근무'는 수입을 50%나 급감시켰다. 폐업률이 66.8%인 시절에 매일 차악을 갱신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접어야 하나 고민하던 용대 씨는 그래도 단골 손님들이 찾아주시던 부모님 시절의 국밥집으로 돌아갔다. 자영업을 하는 47.4%, 직장을 다니는 22.1%가 투잡을 해야 하는 시절, 그래도 가족이 있어 이 시절을 버틸 수 있다는 용대씨,  아내가 하는 작업의 조수 일을 병행하기로 했다. 배달과 택배도 생각해 보려 한다.

투잡러를 넘어 쓰리잡러가 된 청년도 있다. <스리잡러 아시나요>의 진성 씨는 고2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를 댔다. 1주일에 한번 하는 분리수거물을 보니 엄청난 에너지 음료, 그 에너지 음료를 마시며 그는 2019년의 여름을 났다. 새벽부터 시작된 택배, 할부로 차를 사서 시작한 택배일은 4차 배송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자마자 바로 다시 시작된 배송 대행 아르바이트. 짬짬이 패스트푸드 점 알바도 한다. 하지만 휴가도 없이 살던 그의 일상이 멈췄다. 택배와 배송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가 접촉자가 많다는 우려만으로 택배 일을 짤렸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멈춰진 일상은 <마지막 비행>의 이수지 씨 역시 마찬가지다. 두바이에서 항공사 직원으로 일하던 이수지 씨, 지난 9개월 간 4번 비행을 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일이 그녀에게 닥쳤다. 지난 6년 동안 빼곡하게 채워졌던 비행 수첩, 그리고 세계 각국의 동료들, 그들과 함께 이제는 꿈과 같이 여겨졌던 비행의 시간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제 이수지 씨는 직원이 아닌 승객으로 마지막 비행을 한다.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것들 
<나는 이 시국에 고3입니다>는 제목 그대로 올 한 해 코로나로 인해 가장 마음을 졸였던 고3 '도나미'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루고 미루어 더는 미룰 수 없어 꽃피는 4월의 개학, 하지만 도나미는 학교를 가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입장에서 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인증'부터 코메디가 되는 상황을 겪으며 그 힘들다는 고 3의 생활을 홀로 시작한다. 고 3이라는 시절 자체가 부담인데,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코로나로 인해 줌 수업을 했다, 학교를 나갔다 뒤죽박죽인 1년 여를 보내고, 그래도 사상 최초로 연기된 수능 시험장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어려운 수능을 마치고 대학을 입학했다고 달랐을까? <당신이 보지 못했던>은 시각장애인으로 대학생 우령 씨의 이야기를 그린다. 개강 한달 전 일찌감치 기숙사에 온 우령씨, 하지만 코로나는 시각장애인 우령 씨의 일상에 또 하나의 장애물이 되었다.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붙여놓은 바이러스 방지 테이프가 손끝의 감각을 막아 기숙사 층을 찾아가는 것부터 혼란스럽다. 

온라인으로 시작된 개강, 화면 해설 프로그램을 통해 컴퓨터를 이용하는 우령 씨에게 온라인 강의실 입장부터가 '미션 임파서블', 결국 휴학을 해야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코로나는 그곳에도 
코로나는 나라를 차별하지 않았다. 번잡하던 뉴욕 맨해튼도, 화려하던 파리도 멈춰서게 만들었다. <외국에서 부친 편지>는 뉴욕 생활 7년차 최이은 씨와 , 파리 생활 13년차 김지아 씨를 통해 그곳의 코로나 이야기를 전한다. 

마트에 가려면 서류와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 파리, 입장 인원마저 제한이 된다. 그런가 하면 휴지도 1인당 한 개씩인 뉴욕의 마트에서는 식재료를 구하기 힘들어 내일 당장 먹을 게 없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빠지게 만든다. 확진자 동선을 알 수 없기에 마트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상황, 이 마트 저 마트를 전전했지만 원하던 먹거리를 얻을 수 없었던 이은 씨는 결국 눌러왔던 감정을 울컥하고 만다. 

독일 여자 줄리아와 한국 남자 최영동은 이른바 '롱디 커플'이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두 사람은 독일에서 함께 지냈지만 코로나가 심각해 지는 바람에 결국 영동 씨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애써 밝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마는 공항의 줄리아, 내가 더 사랑한다고 하지만, 8시간 시차 간극의 9개월 여를 보내고 나니 서로가 없는 일상에 서서히 익숙해져 간다.

11부작의 <지식 채널 E 연말 특집 11부작 2020을 살다>는 11개의 이야기만큼 우리 사회, 나아가 해외에 이르기까지 코로나 팬데믹으로 달라진 삶을 골고루 조명한다. 폐업율, 실직율이라는 수치로만 접하던 것들이 사람들의 사연으로 엮어지니 5,6분 여의 짧은 시간임에도 코끝이 매워진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자신이 애써 가꿔온 삶들을 '상실'했던 시절이구나 싶다. 코로나로 인해 삶이 불편해졌다지만 바이러스를 위해 붙여놓은 방역 테이프가 시각 장애인이 집을 못찾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코로나는 우리의 삶 속속들이 스며들어 지난 1년을 멈추게 했다. 그래도 그 멈춤 속에서도 학생은 공부를 했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보건교사 손은지, 체육교사 최지인>처럼 온라인 수업 등으로 고군분투한다. 

그래도 브이로그의 시민들은 꿋꿋하다. 가족이 있기에, 그래도 찾아주는 단골 손님이 있기에 행복하고 감사하다 한다. 홀로 버틴 15일의 입원 기간을 '감사'로 마친다. 미친 듯 한달 내내 일을 구해 애완견에게 다시 수박을 사줄 수 있어 스리잡러는 행복하다고 한다. 때로는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지만, 그래도 힘든 시기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한다. 아마도 올 한 해 우리 모두 그렇게 지내왔을 것이다. 이만하기가 어디냐고. 그래도 내게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그간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되어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저앉는 대신, 그래도 자신들이 아직 가진 것에 감사하며 이 한 해를 보낸다. 그래서 11부의 마지막 제목이 <#덕분에 #고맙습니다>이다. 

by meditator 2020. 12. 30. 04:12

2020년이 저문다. 2020년을 되돌아 보는 '트렌드 로드', 그 2회가 28일 밤 방영되었다. 화두는 '코로나', 코로나로 인해 '언택트'한 삶이 이어져왔던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과연 '트렌드'마저 '언택트'하게 바뀌었을까? 과연 서로와 서로가 소원해지는 시간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틈을 메꾸며 살아왔을까? 1회에 이어 트렌드 전문가 김난도 교수와 함께 MZ세대 대표 셀럽 에릭남이 참여하여 2020년의 트렌드를 살펴본다. 

 

 

코로나 - 공간에 대한 열망을 키우다 
코로나 시대, 이제 집은 그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 아니다. 수업을 듣고, 재택 근무를 하는 기능이 '다층적'으로 증가했다. 이른바 '레이러드한 룸'이라는 공간의 새로운 기능이 주목받게 된 시기이다. 

집을 떠나 직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까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공연장을 들르던 '동선'이 줄었다. 1주일 동안 누리던 공간이 1/5 정도 줄어든 셈인데, 이를 사람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1/5 줄어든 것처럼 느끼게 된다고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진단한다. 이렇게 공간이 축소는 '코로나 블루'와 같은 현상을 낳으며 사람들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가를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바깥 세상이 위험해진 만큼 내 공간에 대한 열망은 외려 커져갔다. 미국에서는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필요에 따라 모듈을 사용하여 천장에서 필요한 가구를 올리고 내리는 공간의 적극적 '창조'가 새로운 공간 디자인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비싼' 집은 언감생심, 꿩 대신 닭이라고 '차'라도? '차' 소비가 늘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단절'되었다지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속성'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남의 집 프로젝트'이다. 

온라인을 통해 취향을 공유한 사람들이 집들이처럼 남의 집을 방문하는 모임이다. 한 달에 한 두 번 코로나 시대 불가능해진 여행을 '남의 집'으로 잠시 떠난다. 이 잠시 동안의 '방문'이 뭐라고 그 전날 잠을 못자고 설레이기도 한단다. 가드닝을 한 정원에서 '소풍'과 같은 시간, 그램책을 통해 낯선 이와 속마음을 터놓고 서로 위로를 나누는 시간, 이러한 소규모의 '취향'을 매개로한 내밀한 교류가 언택트가 트렌드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관계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증명한다. 

 

 

나를 증명하는 시간 
사회적 접촉이 한층 줄어든 시간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이에 대해 김난도 교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받아왔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존재론적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를 증명해줄 타자가 없는 상화, MBTI처럼 자기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계룡 선녀전>의 웹툰 작가 장혜원씨는 색다른 공부를 시작했다. 바로 '수학'이다. 장혜원 씨가 함께 수학을 공부하는 모임, 참가자들은 이 수학 공부의 포인트는 바로 시험을 안보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다는 희열보다는 수치를 통해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이라고 한다. 

이들만이 아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 수학 관련 서적이 39.8%나 증가했다. 지난 5년 사이 처음있는 일이다. 이렇게 수학에 대한 수요는 어디로 부터 비롯되었을까?알 수 없는 세상 수학처럼 정답이 있고, 노력을 통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쾌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그에 더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수학처럼 몰두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견인해내고자 한다고 김난도 교수의 정의한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이자, 도구로서의 수학이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산'을 택한 사람도 있다. 미대에 들어간 김강은 씨는 졸업 무렵 그림으로 먹고사는 게 쉽지 않다는 '장벽'에 봉착했다. 코로나로 인해 활동마저 제한됐다.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여력도 없던 시절 무작정 동네 앞산을 올랐다. 

숨이 차올랐지만 산봉우리에 오르니 생생하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확인'받았다. 그때부터 강은 씨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른 산을 그렸다. 산을 통해 느낀 삶의 즐거움을 그림을 통해 표현했고, 그런 그녀의 그림음은 'SNS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강은씨만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 등산 인구가 늘었다. 그 중 20대는 87%나 증가했다. '등린이', '산린이'와 같은 신조어가 탄생했고, 산과 관련된 해시태그가 280만 개에 이를 정도로  MZ 세대에게 뜨거운 관심을 얻었다. 

 

 

산을 오르고 수학을 공부하며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 하지만 그들이 견뎌야 하는 시절을 혹독하다. 2008년 금융 위기에 이은 코로나 팬데믹은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앗아갔다. 해고와 직업난, 직업 훈련의 기회라는 3중고가 젊은 세대에게 얹혀졌다. 부모보다 못하는 첫 번 째 세대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한때는 잘 나갔던   LA의 UX-UI 디자이너(앱과 웹을 구성하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 크리스 준은 6개월째 실직 중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4월 실업률이 폭등하며 2차 대전 이후 최고의 실직자 사태를 낳았다. 그 중 밀레니얼 세대가 500만 명에 달한다. 유럽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은 프랑스에서는 전체 청년 중 1/4이 구직중이다.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대부분 시간제나 임시직인 경우가 많다. 어느 나라라 할 것 없이 코로나로 MZ세대는 기회마저 얻기가 쉽지 않다. 인류 전체의 시련이다. 이제 해가 바뀌면 2021년 우리의 삶은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새해의 '희망'을 옅보기 쉽지 않은 시간, 그래도 이 길고 긴 터널의 끝을 기원하며 한 해가 저문다. 

by meditator 2020. 12. 28. 03:06

1970년대 후반 서구 경제는 신자유주의 체계에 들어서며 호황을 누렸다. 그 경제적 호황은 최근 '레트로'붐을 일으키고 있는 1980년대의 문화적 융성기를 낳았다. <원더우먼 1984>는 바로 펑크와 파워숄더로 대변되는 1980대의 정점에 시선을 맞춘다. 

 

 

레트로붐을 타고 있는 최근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처럼 영화 속 여주인공 원더우먼(갤 가돗 분) 다이애나 프린스는 그녀의 직장인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출근하기 위해 어깨에 심이 잔뜩 들어간 상의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 원더우먼 만이 아니라, 빌런 맥스 로드(페트로 파스칼 분) 역시 어깨심을 넣어 각이 잡힌 스트라이프 정장으로 그 시대를 대변하지만 그런 그의 의상보다 한층 더 강조된 다이애나의 의상들은 70년대 후반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 '페미니즘'의 영향을 통해 사회적으로 한층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 여성들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욕망의 시대
그 존재만으로도 당당한 여전사 원더우먼,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을 떠나 조종사였던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 분)와 함께 참전했던 인간들의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리고 그 세계 제 1차대전의 와중에서 사랑하게 된 연인 트레버 대위를 잃은 그녀는 1984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기적처럼 죽었던 트레버 대위가 다른 남자의 몸을 빌어 그녀에게 돌아오게 된다. 다이애나가 오로지 바라던 일,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일이 바로 <원더우먼 1984>의 가장 큰 '딜레마'가 된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희망', 하지만 그 '희망'이 불가능한 욕망이라면? 영화는 원더우먼의 사랑을 통해 1980년대의 시대 정신, '욕망'을 조망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88년 올림픽 당시 정부 시책에 의해 여러 건전 가요가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 대한민국'이다.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라는 가사, 하지만 그 시절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던 그 시절의 거리에서 젊은이들은 민주적인 국가를 쟁취하고자 최류탄을 마시며 시위를 했고, 고층 아파트를 짖기위해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은 철거민이 되었다. <원더우먼 1984>는 미국의 '아, 대한민국'같은 시대를 '욕망'이란 화두를 통해 들여다본다. 

다이애나가 걸어가는 거리 상점 속 tv에서는 맥스 로드가 나와 자신이 개발 중인 유전에 투자하라는 홍보성 광고를 한다. 구구절절한 홍보성 멘트 뒤에 맥스 로드는 '아, 대한민국'의 가사같은 명쾌한 한 마디로 대 '아메리칸 드림'을 부추긴다.  

'무엇을 원하고 꿈꾸던지 그것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거액의 후원금을 내며 너스레를 떨던 맥스 로드를 반긴건 성처럼 거대한 '블랙 골드 인터네셔널' 건물 안에 텅빈 사무실과 체불과 체납의 영수증 더미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유력했던 투자자 한 명이 찾아와 그가 후원하라는 유전이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은 '사기극'이었다며 빚을 독촉한다. 그가 대중을 현혹했던 말은 '신기루'였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화배우 출신의 훤칠한 외모로 인기몰이를 하여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그 이전의 카터 대통령과 달리 '강한 미국의 전성기'를 주창했다. 하지만 그 강한 미국의 전성기를 위해 미국이 가장 열을 올렸던 던 바로 '무기 산업'이었다. 그들이 판 무기는 1980년 이란 이라크 전쟁을 위시하여 이스라엘과 아랍, 레바논 내 종교적 분쟁,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전세계 곳곳에서 지역간 분쟁과 갈등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과 신냉전주의 체제를 구축, 긴장을 격화하며 다시금 군비 경쟁에 나선다. 무기를 팔고 석유로 받는 새롭게 구축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영화 속 되돌아온 트레버 대위가 신은 '나이키'로 대변되는 문화 산업으로 거리를 휩쓴다. 

영화 속 '빌런'이 되는 맥스 로드의 욕망처럼 원하고 꿈꾸는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미국의 시대였다. 맥스는 가난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새 신발을 살 돈조차 없어 낡고 구멍난 신발을 신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지고 싶은 것은 그에게 너무도 요원했다. 그가 꿈꾸던 일은 외면받았다.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풍요로웠고, 그 풍요로운 성장의 시대에서 맥스의 욕망은 제어되지 않았다. 결국 나지도 않은 석유를 볼모로 대중들의 욕망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그 제어되지 않는 욕망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굴러다니던 신비의 금속이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런 맥스에게 결정적 조력자가 되는 건 다이애나의 동료이자, 당당한 그녀를 가장 부러워하는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 분)이다. 알고보면 능력있는 고고학자였지만 펑퍼짐한 옷차림으로 가려진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두툼한 맨투맨티와 헐렁한 치마 속에 바바라는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숨겼다. 그녀의 욕망은 그녀 앞에 등장한 바바라를 통해 구체화되었고, 신비의 돌이다. 

신비의 돌이 발견된 문명마다 결국은 '멸망'으로 이끌었던 그 돌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등장했고, 그 돌의 쓰임새를 알아본 맥스가 바바라를 유혹하여 손에 넣는다. 그리고 맥스는 그 돌에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시킨다. 망해가던 블랙 골드 인터네셔널을 다시 일으켜세우려 했던 욕망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욕망과 함께 상승하며 대통령, 나아가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렇게 그저 한탄 사기꾼에 불과했던 맥스의 욕망이 세계의 멸망으로 치달을 수 있는건 바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고 싶은 모든 이들의 '열망'이다. 

원더우먼 다이애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오랜 세월 오로지 바래왔던 '사랑', 그 하나만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욕망의 가속화된 엘리베이터를 멈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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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반면교사'
욕망이 자연스러웠던 시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산업이 되고 문화가 되었던 시대, 그 시대의 정점 1984년, 그 중심에 있는 미국에서 <원더우먼 1984>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의 열차를 추동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욕망을 묻는다. 특히 대다수의 마블과 dc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들이 '코로나'로 인해 개봉을 미루고 있는 시점에 개봉한 <원더우먼 1984>는 코로나 시대 우리의 반성과 궤를 같이 한다. 결국 빌런이 되어버린 맥스를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소박한 가장으로서의 소망이었음을 상기시킨 영화는 그칠 줄 모르고 달려오다 멈추어버린 코로나 시대,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게 한다. 

화끈한 히어로물을 기대하고 모처럼 극장을 향했다면 초반 쇼핑몰에서의 활약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영웅적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사랑'에 발목 묶여버린 원더우먼의 모습은 아쉬울 지 모르겠다. 더구나, 절정의 장면에서조차 그녀는 여전사로서의 씩씩한 모습 대신 설득과 애원을 했으니. 그렇게 영웅담으로서의 <원더우먼 1984>의 면모는 아쉬웠지만 대신 시대적 욕망을 통한 반성의 담론으로서 <원더우먼 1984>는 코로나 시대 '반면교사'로서의 메시지는 충실하게 전한다. 

by meditator 2020. 12. 26. 17:27

누적 조회수 12만 뷰로 인기를 끌었던 황영찬 그림 김칸비 글의 네이버 웹툰 <스위트 홈>이 이응복 연출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돌아왔다. 

김은숙 작가와 이응복 연출이 호흡을 맞춘 <태양의 후예>, <도깨비>와 <미스터 선샤인>을 애청했던 시청자들은 김은숙 작가의 차기작 <더 킹; 영원한 군주>에 이응복 연출이 합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로맨틱한 김은숙 작가의 필력에 아우라넘치는 세계를 구축했던 이응복 감독의 연출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응복 연출이 김은숙 작가와의 협업 대신 선택한 것이 웹툰 <스위트 홈>이었다. 그에 앞서 이응복 감독이 연출했던 장르가 <비밀>이나 <연애의 발견> 등이었기 때문에 장르물인 <스위트홈>의 선택이 더더구나 의아했다. tv를 통해 만나리라 기대되었던 <스위트 홈>은 회당 제작비 30억의 대작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되었다. 도깨비에서 보았던 그 스케일 큰 연출은 그린홈을 배경으로 한 괴물에 사로잡힌 세계를 풀어내는데 손색이 없다. 신선한 등장인물들의 연기와 호흡 역시 흡인력있게 극을 이끈다. 

 

 

괴물이 나타났다. 
이야기의 시작은 오래된 아파트로부터 시작된다. 고등학생 현수는 홀로 그린홈 아파트로 이사 들어온다. '히키코모리'였던 그는 그를 제외한 전가족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재산마저 빼앗긴 채 '죽음'을 위해 이 아파트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쉽지 않았다. 곧 죽을 거라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허기를 때우려 주문했던 '라면'박스가 송두리채 뜯겨나가버린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간 현수가 발견한 건 핏자국, 그리고 그 끝에 애지중지하던 옆집 고양이의 머리통이 나뒹군다. 그리고 그 머리통마저 끌어당기는 '괴물'의 손. 조금 후 현수의 집 앞에 찾아와 도와달라던 옆집 여자는 괴물로 변하여 그를 탐한다. 

그렇게 그린홈에 사는 이들이 괴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린홈만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쇠사슬로 잠겨진 그림홈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려던 거주민들 앞에 영화 <미스트>의 마지막 장면 속 괴물들처럼 긴 촉수를 가진 괴물이 그들을 향해 팔을, 촉수를 날름거린다. 그래도 믿을 건 '정부'밖에 없다며 tv 앞에 모여든 이들 앞에 '정부'를 믿으라던 대통령마저 코피를 줄줄 흘리더니 순식간에 괴물이 되어 끌려나간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누구라도 괴물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함께 살아가던 공동체의 일원들이 '변'하여 괴물이 되어버린 상황은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부두교에서 유래했던 좀비가 서양 영화를 넘어 우리 영화와 드라마에서 넘쳐난다. <월드 워> 속 거침없이 떼로 뭉쳐 끝없이 달려드는 좀비의 등장에 대해 눈밝은 비평가들은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상징한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대중의 모습이라 진단했다.

흥행작이었던 <부산행>에서 떼를 이뤄 부산행 열차를 탈취하려 했던 좀비들, 대부분 그 근원을  '바이러스'에서 찾는다. 전세계를 휩슨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한 인간 탐욕의 역사가 동물을 숙주로 하던 바이러스의 변종을 결국 인간 사회를 파멸로 이끌어 낸다는 '묵시론적'인 주제 의식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바이러스' 유래설의 크리처 장르물( 은 '오염'이나 '전염'을 통해 퍼져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염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양면적 속성을 가진다. 그렇게 무작위적인 바이러스의 전염은 오늘날 대중사회가 가진 맹목적인 속성을 고스란히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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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괴물을 낳다
그런데 스위트 홈 속 괴물들은 그간 좀비 콘텐츠가 가졌던 맹목성 탈목적성을 비껴선다. 드라마는 이미 초반 괴물을 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임을 '선포'한다. 

현수의 옆 집에 살던 여성, 고양이에게 자신도 먹지 못하는 비싼 먹이를 준다며 챙기지만 돈을 벌기 위해 그 무엇이라도 하겠다던 그녀의 어긋난 욕망은 그녀가 에지중지하던 고양이마저 안중에 없다. 그래서 등장한 괴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욕망을 극대화시킨 모습으로 나타난다. 손이, 혀가, 덩치가 저마다의 욕망으로 팽창한다. 

얼마전 상영된 <#살아있다>처럼 대부분 크리쳐 장르물 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괴물로 변하는 자신을 제외한 타자들을 상대로 '생존 투쟁'을 벌인다. <스위트홈> 역시 처음에는 그랬다. 자신의 집을 두드리던 옆집 여성 괴물을 상대하여, 그리고 복도를 활보하는 괴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리 위하여 피하던 주인공 현수였다. 그런데 그러던 현수가 코피를 쏟는다. 그리고 '혼절'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코피를 쏟고 쓰러지고, 그리고 눈동자 전체가 검은 색으로 변하며 현수 안의 욕망이 뛰쳐나오려 한다. 그렇게 <스위트 홈>은 주인공 자신을 '괴물'의 '골든 타임'에 던져 넣으며 '욕망'을 묻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욕망'의 시대이다. 그린홈을 피해 나가려던 사람들 눈에 거리의 모든 이들이 저마다 개성을 가진 괴물이 되어 활보하듯이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살아가는 과정이라 여긴다. 그런데 바로 그 삶의 동인이라는 '욕망'이 '괴물'을 만든다니! <스위트 홈> 속 괴물은 결국 우리의 삶을 '투사'한다. 우리의 삶이 투사한 괴물, 기존의 탈목적적인 좀비가 반성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삶에 대해 한 발 더 들어가 묻는다. 

현수는 삶을 포기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사회로 부터 자신을 격리시켰었다. 그런데 그런 현수가 가족과 '불화'했다. 그런데 그 '죽어버려'라던 가족이 정말 죽어버렸다.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친지들은 현수가 병상에 누워있던 사이 그의 집 재산을 꿀꺽했다. 그는 삶을 포기하려 했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가족을 잃은, 그리고 가족의 것을 잃은,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에 무방비했던 자신에 대한 깊은 분노가 '괴물이 된 그의 속에서 튀어 오른다. 

그런데, 아직 현수는 괴물이 되지 않았다. 그가 구하려 했던 아래층 아이들을 향한 '선의'가 그의 괴물화를 막는다. 아기 엄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단백질 덩어리 같은 덩치의 괴물이 아이들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온몸으로 막아선 건 아기 엄마였다. 그리고 괴물에 의해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그녀가 괴물이 되려 한다. 지난 봄 아기를 잃었다고 한다. 봄 볕이 좋아서 산책을 나갔다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가파른 길을 달려내려간 유모차는 아이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래서 빈 유모차를 아이처럼 끌고 다니던 그녀는 결국 그 상실의 욕망을 못이겨 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 눈 앞에서 다시 지켜야 할 아이들이 그녀에게 '괴물'이 되는 골든 타임을 유보한다. 

드라마는 저마다의 짖눌려왔던 욕망이 괴물을 탄생시키지만 모두가 괴물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욕망이 에스컬레이션하여 괴물이 되어버릴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요'라며 아이들을 구하려는 '선의'에 자신을 맡긴 현수와 아이엄마의 괴물화는 유보된다.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괴물만이 아니다. 괴물이 아직 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괴물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 심지어 괴물이 되고 싶어 안달난 사람까지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괴물과 괴물이 되지 않는 이들, 그들의 차이는 종이 한 장처럼 얇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 가장 짙은 어둠도 흐린 빛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라며 시작한다. 우애령 작가는 말한다. 제비 다리를 분지른 것도, 고쳐준 것도 인간이라고.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친 제비 다리를 보고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그 '다른이의 어려움을 염두에 두는 마음'의 측면에 드라마는 '흐린 빛'의 희망을 건다. 그 흐리지만 괴물이 되는 것조차 막아내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풀어내기 위해 드라마는 고심한다. 괴물과 인간 사이에서 시청자들은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왜 이응복 연출이 인기 멜로물을 마다하고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by meditator 2020. 12. 21.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