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년에 제작된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오래도록 회자된 명작이다. 영국 북부 탄광촌에 사는 소년 빌리는 권투를 배우러 가던 도중 우연히 발레 수업을 보고 따라하다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광부인 아버지는 당연히 '남자답지' 못한 빌리의 선택에 반대한다. 더구나 노동자였던 아버지에게 빌리의 선택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빌리는 자신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빌리 엘리어트>의 대미는 탄광촌에서 꿈을 접을 뻔했던 빌리가 어엿한 무용수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이다. 여자 아이들 뒤편에서 토슈즈조차도 변변찮게 동작을 따라하던 꼬마가 우아한 백조가 되어 아버지와 형 앞에서 우아하면서도 절도있는 몸짓으로 '백조의 탄생'을 알렸을 때 관객들은 그들 자신이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함께 박수치고 감동했다. 

여기 또 한 명의 청년이 백조가 된 빌리처럼 한껏 자신을 드러내는 우아한 몸짓을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 온몸이 땀에 젖도록, 그리고 다친 발을 감싼 붕대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춤사위가 '공연'되는 건 관객을 마주한 무대가 아니다. 춤을 맞춰주는 차이콥스키의 웅장한 음악도 없다. 그저 장단을 맞추는 건 소박한 북소리 뿐이다. 당연히 관객도 없다. 혼연의 춤을 지켜보는 건 못마땅한 눈초리의 나이 지긋한 남자 둘 뿐이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은 청년의 한 마리 나비처럼 나긋나긋한 몸짓에 어이없어 하더니 자리를 떠버리고 만다. 하지만 청년은 춤을 멈추지 않는다.  

영국의 노동 계급 청년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났지만, 조지아의 청년은 자신이 원하는 춤을 추는 그 순간, 그가 목표로 삼고 달려왔던 '미래' 자체가 함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청년의 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자유와 미래를 맞바꾼 춤, 무엇이 청년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또 한 명의 미운 오리 새끼
조지아의 청년 메라비(레반 겔바키아니 분),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형과 함께 조지아 국립 무용단의 견습 무용단의 일원이다. 정식 무용단이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승승장구할 날을 꿈꾸며 밤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오늘도 열심히 온몸이 젖도록 춤을 춘다. 

하지만 강인하면서도 남성적인 몸짓을 지향하는 보수적인 무용단의 전통에서 메라비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동작은 늘 지적의 대상이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한때 국립무용단원이었지만 이제는 시장판에서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절박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춤보다는 매일 사람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노답'인 형, 거기에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어머니에, 할머니까지, 돈이 없이 전기까지 수시로 나가는 메라비의 가정에서 돌파구는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밖에 없다고 메라비는 믿는다. 

정식 단원이라는 돌파구,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열망하는 조지아 국립 무용단 자체가 '미래'가 없다며 그를 설득한다. 아니 조지아 국립 무용단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루지야'라는 지역명이 더 익숙한, 세계에서 '국호'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1/3에 불과한, 나라 크기가 아니라, 러시아와 터키 등 이웃 나라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가 불투명한 조지아에서 살아가는 젊은 청년 메라비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함 그 자체다. 더구나 '빌리 엘리어트' 속 탄광촌 소년 빌리처럼 메라비의 아버지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춤에 전념할 수 없는 가난한 '출신'의 한계가 역시나 메라비의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더욱 열심히 자신에게 유일한 동앗줄일 수도 있는 기회에 목을 매는 메라비, 그런 그의 앞에 이라클리(바치 발리시빌리 분)가 나타난다. 빠진 단원을 대신하여 등장한 이라클리, 그는 절도있고 완벽한 동작으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시선을 사로잡고 메라비의 자리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런 이라클리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어쩐지 자꾸 메라비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하지만 정식 단원이었던 한 청년이 동성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수도원에 유폐되는 처지가 되듯 보수적인 조지아, 그 중에서도 더욱 보수적인 국립 무용단에서 메라비가 느끼는 감정은 '터부'를 넘어 '매장'감이다. 

하지만 메라비는 이라클리을 향한 설레임을 숨길 수 없다. 그가 벗어놓은 티셔츠의 냄새로 그의 체취를 느끼듯 메라비의 마음은 자꾸만 이라클리를 향하고 그런 메라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이라클리 역시 '호의'를 넘어선 친근함을 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는 조지아 최초의 LGBTQ(성소수자)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메라비와 이라클리의 '사랑'은 그저 성적인 지향만을 뜻하지 않는다. 조지아라는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에 속한 불안정한 젊음에 닥친 '성장통'을 상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불투명한 젊음의 도화선이 된 사랑 
주인공 메라비가 처한 상황은 그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그가 추고자 하는 전통 춤의 미래도, 그럼에도 그가 되고싶은 국립 무용단원도, 그리고 그의 가정도 그 무엇도 메라비에게는 녹록치 않다. 거기에 보수적인 조지아 사회와 더 보수적인 국립 무용단에서 '금기'시되는 이라클리의 사랑이 그의 불투명함을 가속시킨다. 

메라비는 가정 형편에서도, 그리고 국립 무용단이 지향하는 춤의 지향에서도 비껴가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성공'이라고 목표한 그것에 자신을 꿰어맞추려고 한다. 선생님이 그의 섬세하고 우아한 춤사위를 지적하면 지적할 수록 그는 정식 단원이 되기 위해 남들 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노력한다. 아버지가 가능성이 없다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불가능을 돌파해 보고자 한다. 전기조차 나간 형편에 형이 '편법'으로 전기를 끌어오지만 메라비는 그런 형이 못마땅하다. 대신 아르바이트에서 팁으로 받은 돈을 고스란히 가져다 주고, 남은 음식을 싸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현실에 저당잡혔던 메라비에게 '이라클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라클리를 향해 숨길 수 없는 마음은 결국 '금기'의 선을 넘게 만든다. 그리고 이라클리의 부재로 인한 방황이 동료의 눈에 띄게 되면서 그의 정체성이 무용단 내부에 '소문'이 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 '부재'는 메라비의 부상으로 이어져 그토록 집착했다시피한 오디션의 기회마저 날려 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얻고 싶었던 이라클리, 정작 그 이라클리는 메라비의 '순정'에 아랑곳없이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메라비의 형이 그랬듯이, 이라클리 역시 돌아가실 어머니, 부양해야 할 어머니를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가 약혼자와의 삶을 선택한다. 그렇게 메라비의 사랑도, 형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에 '타협'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들은 조지아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울타기에서 한 발짝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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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백조 
영화는 메라비의 '사랑'을 통해 조지아,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펼쳐진 두 개의 길, 두 가지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형, 그리고 이라클리보다 어쩌면 더 철저하게 현실에 자신을 꿰어맞추려 노력하던 메라비는 열정적인 순간을 뒤로 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버린 이라클리의 결정 앞에서 좌절하고, 반항한다. 그리고 그 '반항'은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가 지금껏 꿰어맞추려 했던 '현실' 앞에서 그는 한껏 자신이 하고 싶었던 춤사위로 자신을 증명해 낸다. 가장 부드럽고, 가장 섬세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조지아의 전통적 춤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그런 몸짓으로 '그만하라'는 지시가 무색하게 자신이 추고 싶을 때까지  한껏 자신을 표현해 낸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백조의 호수가 '승리'의 순간이었다면,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 속 메라비의 독무는 처절한 '실패'의 순간이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공'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순간이다. 그리고 터부시되어 온 자신의 정체성을 춤에 얹어 한껏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스스로 걷어찬 성공의 순간, 아니 성공이라고 스스로를 마취시켰던 마법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순간, 그래서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 속 메라비의 독무가 <빌리 엘리어트> 속 백조가 된 빌리의 '춤사위' 못지 않게 '감동'을 준다. 열광해주는 관객이 있든 없든 그 춤사위들은 동일하게 자신을 극복해낸 '비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추고 싶었던 춤을 한껏 추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메라비, 이제 더 이상 그는 국립 무용단에도, 조지아라는 사회에도, 그리고 그를 바닥으로 내리쳤던 사랑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젊음,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영화는 그걸 말해주고 있다. 



by meditator 2020. 11. 28. 03:50

지난 2015년 메르스에 걸렸던 마지막 환자가 사망하자 언론은 앞다투어 '메르스 종식'을 보도했다. 후에 메르스 유족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마치 온 사회가 남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로부터 5년,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다. 그 전쟁 과정에서 '전사'한 사망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처음 <2020 tvn shift- 1화 코로나 재난의 불평등> 예고편을 방영하던 11월 17일에 NO.는 480이었다. 그리고 불과 반 달도 되지 않아 그 숫자가 510으로 늘어났다. 우리가 줄어드는 숫자에 안도하고, 늘어나는 숫자에 불안에 떠는 이 순간, 그 숫자는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혹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숫자'가 지닌 사회적, 계급적 불평등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코로나'라는 이유만으로 한때는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았던 이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기회를 잃고 있는 건 아닌가?  배우 안내상과 연세대 상담코칭학 권수영 교수가 추모의 길에 함께 한다. 

 

 

코로나 유족, 죽음 뒤의 이야기
그는 NO. 89 사망자이다. 500여 명에 이르는 코로나 사망자, 그 중 193명이 대구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 중 한 명이다. 65세, 기저 질환이 있었지만 망자가 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열이 나 병원에 가려 했지만 그 마저도 환자가 많아 여의치 않아 집에서 보낸 이틀, 몇 번의 검사후 실려갔다. 

61세의 아내, 남편은 미안하다, 버텨달라며 우는 아내와 아들에게 울지말라 당부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전염병 환자의 경우 평범한 장례조차도 치루지 못한 채 24시간 내 화장하는 '처리' 대상이었다. 2개의 유리창 너머로 겨우 마주한 남편의 시신, 감염 우려로 남편의 유품이었던 휴대폰과 지갑은 태워졌다. 그 후로 7개월 '저 집 신랑이 코로나로 죽었다'는 수근거림이 들리는 것 같아 밖에도 나갈 수 없었단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원망한들 무엇하겠냐던 아내는 언네 끝나나만 관심있는 세상이 야속하다.

슬픔을 나누는 고별의 의식같은 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관조차 못만지게 하는 상황, 염은 커녕 평상복 그대로, 시신 팩에 넣어져 관에 넣어졌다. 위로는 커녕 아버지가, 어머니가 코로나로 돌아가셨다고 드러내어 말할 수 조차 없는 세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이러스'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더 살고 싶었던 평범한 삶은 그저 빨리 치워버려 할 '대상'이 되었다. 

 

 

감염은 공평하지만 결과는 공평치 않다. 
코로나 팬데믹, 노년층의 사망율이 전체 사망자의 94%에 이른다. 노년층 자체가 호흡기 감염병 자체에 취약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면역에 주된 역할을 하는  T- 세포 자체가 수도 줄고, 기능도 떨어져 감염에 무방비해진다. 특히 남자 노인들이 더 많은 이유는 남성 호르몬이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나이가 들면 남성 호르몬이 저하되기에 노령층 남성 사망자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사망자들은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죽음에 이른다. 폐로 부터 시작된 바이러스의 공격이 주요 장기에 이르러서이다. 신장과 심장이 나쁘면 바로 다발성 장기 부전에 이른다. 노화와 함께 떨어진 기능은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버티기 힘들다. 

하지만 노년을 괴롭히는 건 그저 '바이러스' 만이 아니다. 추석 당일 서울의 한 무료 노인 급식소 아침부터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지난 2월부터 급식대신 주먹밥을 나눠주는 형편이지만 한 끼의 호구지책에 '거리두기'가 무색하다. 코로나보다 우선인 건 허기진 배, 의지할 곳,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은 그래서 더욱 '취약층'이 된다. 

청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상대적으로 당당하다. 그들의 신체적 상황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2,30대의 과반수 이상이 코로나는 '운명이다'라는 운명론적 믿음을 보이고 있다. 즉 노력을 해도 걸릴 사람은 걸린다는 이런 생각은 '각자도생'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사회에 대한 '믿음', 즉 '신뢰 자본'의 붕괴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회적 신뢰 자본의 붕괴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장기적 동력 상실의 원인이 된다. 누군가의 일탈, 누군가의 거짓말이 코로나를 다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전염 과정은 청년층으로 부터 고령층으로 흐름을 가진다. 운명론에 휩싸인 젊은이들의 행태가 노년층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취약 계층이 된 노인층, 방역의 한 축이 되어야 하지만 사회적 배려는 없다. 

대부분의 노년층이 한국 전쟁 세대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렵게 성장한 그들은 청년기에 군사 독재를 겪었다. 그리고 장년기에 IMF를 맞이했다. 그리고 숱한 파고를 넘었던 이들은 이제 요양병원 등에서 코로나의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되었다. 

 

 

방역 수칙을 지킬 수 없는 계급
취약한 건 노인만이 아니다. 코로나는 우리 사회를 네 계급으로 나눴다. 전문 관리와 기술 인력으로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노동자가 코로나 시대 제 1계급이 되었다. 그 아래, 창고, 운수 노동자와 보건 인력들이 있다. 일자리는 있지만 감염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군가의 직장은 더 위험한 곳이 되었다. 지난 5월 물류 업체였던 직장에서 발생한 집단 감염으로 확진자가 된 전모씨가 '확진 판정 통보'를 받은 후 제일 처음 한 말은 '제가요? 그럴 리가'였다. 마스크도 쓰고, 장갑도 꼈지만 '직장'을 쉴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160여일, 자신때문에 코로나에 걸렸던 남편은 호흡부전으로 인한 심정지로 인해 뇌손상을 입고 지금까지 의식 불명 상태이다. 코로나는 한 가정을 순식간에 풍비박산내 버렸다. 

그래도 쉴 수 없어도 직장을 다니면 그나마 나은 것일까? 제조업, 서비스업 계통의 노동자들은 코로나로 인한 장기 불황에 원치 않는 무급 휴가로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 코로나 방역 수칙은 아프면 무조건 쉬라고 한다. 타인과 거리를 두라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통계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아파도 쉴 수 없다고 답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서비스가 늘어날 수록,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업무량은 늘어나고, 노동 조건은 위태로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4번 째 계급, 노숙자, 이민자 등이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스페인 카탈루니아 지방 아라곤에 과일을 수확하러 온 이민자들, 작은 기숙사에 집단으로 생활하는 이들은 마스크를 살 경제적 여력조차 없다. 그래서 코로나에 신체적으로 우위라는 2,30대 들조차 사망자가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전세계 그 어디를 막론하고 가장 아프고 소외된 곳에 코로나는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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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엑스레이, 코로나 
서울 시내에 노숙자가 갈 수 있던 공공병원이 6군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 5개가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전환되고 이제 서울 중구 동부병원만이 노숙자들을 받는다. 동부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은 '방역의 나비효과'를 말한다. 외려 노숙자들은 그들을 받아주는 의료시설의 부재로 원래 가지고 있던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고. 

사망자의 46%는 시설 병원내 감염이었다. 그 중에서 37%가 정신질환자였다. 첫 사망자가 발생한 곳도 대남병원, 그후 100 여명의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폐쇄병동 환자들, 하지만 도시락 업체도, 청소 업체도 그들이 받은 '항의 전화'를 핑계로 '협조할 수 없다'고 했다. 대형 병원 음압 병실조차 공평하지 않았다.
사회가 버리고, 가족이 버린 사람들을 국가마저 버렸다.

코로나에 걸려 이송되던 2번째 환자가 '바깥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다'고 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20년 입원, 42KG이던 첫 번 째 환자는 세상 밖으로 나와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장기 입원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어땠을까. 확진자 발생에 대한 기사가 수 천 건 쏟아지는 동안 단 169건의 기사, 그 마저도 사람들의 반응은 본질과 상관없는 '중국인 입국 금지'라는 '키워드'에 집중되었다. 

코로나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그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편견에 휩싸인 채 철처지 소외된 채 사라지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오늘 몇 명이야 숫자 세기에 바쁘다. 세상은 기억하지 않는다. 사망자는 번호로만 불려진다. 첫 확진자 후 300여 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숫자가 아닌 우리 곁에 살았던, 그리고 이제는 비워진 자리가 된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도를 가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호소한다. 그건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숫자가 아닌 존재에의 확인, 그건 바로 살아갈 우리를 위한 사회적 '기억'이다. 








by meditator 2020. 11. 25. 03:11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 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수궁가>가 토끼가 별주부 거북이의 꾐에 넘어가 용왕 전에 불려갔다가 꾀를 내어 도망친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낸 것이라는 건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터이다. 하지만, 그 <수궁가> 중에 저런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라는 내용의 판소리 곡이 있던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광고' 시간은 눈에 보이지니 보지만 보고 싶지 않은 강제 영상 시청의 시간이다. 그 15분 여의 시간 동안 눈이 번쩍 띄여지게 만드는 광고 한 편이 등장했다. 갓을 썼지만 한복은 아니고, 한복같은 색감인데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곳곳을 종횡무진 '춤'바람을 내는데, 거기서 나오는 음악이 귀에 쏙 들어온다.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힙한 판소리 
바로 한국 관광 공사의 홍보 영상이다. 35개국의 사람들, 조회수 3억을 돌파했다는 1분여의 짧은 영상에서 춤꾼들의 춤사위에 배경이 되는 음악, <범내려온다>는 얼터너티브 밴드 이날치가 <수궁가>의 한 부분을 재구성한 것이다. 11월 22일 sbs스페셜은 요즘 뜨는 판소리 밴드 이날치를 조명한다. 수궁가의 전편은 재구성하여 원곡과 이날치의 트렌디한 음악을 대비하며 판소리 밴드로서의 이날치의 음악적 성취와 의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1일 1범'이라는 유행어가 만들어 질 정도로 중독성 있는 음악으로 '무한 재생'을 부르는 밴드 이날치의 음악, 그저 판소리라 하기엔 비트가 빠른 가사는 판소리 장단에 맞춰 듣는 이의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든다. 

이런 '이날치'의 힙한 판소리 음악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국 힙합과 붙여놔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힙한' 음악이라 평가하는가 하면, 중독성 있는 '범 내려온다'의 반복 구는 소녀시대의 gee gee gee gee 만큼이나 트렌드하다 정의내린다. 

이런 대중과 전문가 모두의 '찬사'와 열띤 호응을 받고 있는 이날치, 하지만 그들의 오늘은 그저 어느날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었다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춤출수 있는 재밌는 음악을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 그리고 전통 음악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고 싶었던 이들의 조합 , 베이스 장영규, 정중엽, 드럼 이철희, 보컬 안이호, 권송희, 이나래, 신유진 이들의 음악 경력을 합치면 100년이 넘을 정도의 내공의 산물이 바로 이날치 신드롬의 이유이다. 

 

 

모두 합쳐 100년이 넘는 음악적 내공 
<전우치>, <타짜>, <좋은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그리고 최근 <보건교사 안은영> 등 100 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비롯하여, 연극, 무용, 광고까지 종횡무진, '소리의 해체와 조립에 능한 전무후무한 뮤지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영규가 바로 이날치의 프로듀서이자 베이시스트이다.

그에게 판소리 밴드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 2017년 미국의 명망있는 음악 프로 타이니 데스크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씽씽>을 통해 '판소리와 밴드의 결합을 시도한 바 있는 장영규는 김광석의 드러머였던 이철희와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베이스를 맡았던 정중업과 함께 이날치의 기초 공사와 같은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기존에 판소리의 장단을 맡던 '고수'의 역할,  기존 밴드의 기타를 제외하고 두 개의 베이스와 드럼만으로 판소리가 가진 문학적 매력을 한껏 살려내고자 했던 장영규의 시도는 '춤추고 싶게 만드는 세련되고 독특한 리듬'이란 평가를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보컬의 면면도 만만치 않다. 이나래 27년, 권송희 27년, 신유진 16년, 안이호 25년, 인생의 반 이상을 소리꾼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쉴틈 없이 공연을 하는 와중에 판소리의 본향 전주에서 4시간에 이르는 <적벽가> 완창에 도전하는 안이호, 변강쇠 전을 옹녀의 시선으로 해석하여 공연한 바 있는 이나래 등은 수궁가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 <드라곤 킹>을 통해 만나 이날치의 멤버로 거듭나게 되었다. 

소리꾼으로서의 정체성에 있어 한 치도 흔들림이 없는 네 사람의 보컬,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기 확장과 정체성, 전통 음악의 한계에 도전하고픈 열망이 그들을 얼터너티브 이날치의 멘버가 되게 하였다. 물론 이날치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전통 음악의 편견을 깨기 위해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의 조합을 시도한 롹밴드 장비나이 등이 두 문화의 콜라보를 시도한 바 있다. 장비나이가 처음 두 문화의 조합을 시도했을 때만 해도 국악계에서 시선이 곱지 않았었지만, 이제 이날치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에 보컬 들의 스승들은 기꺼이 이날치의 음악을 통한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반긴다. 

듣는 이들에게는 '힙하디 힙한' 음악이지만, 이날치 밴드는 '판소리 가사도 그대로, 사설도 그대로'의 원형을 지키고자 한다. 단지 리듬를 변화시키고 듣기 좋게 가사를 재구성했을 뿐이라고 자신들의 작업에 겸손을 표한다. 하지만 공연장을 가득찬 팬들, 그들의 음악에 절로 어깨춤을 추는 관객들에, 나아가 알아듣지 못해도 이미 '아름답지만 낯설다'며 특별한 팝으로 해외 음악 팬들에게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by meditator 2020. 11. 23. 01:35

'오늘의 한국 사회를 설명해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는 추천사가 장류진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 더해졌다. 그리고 그런 추천사가 틀리지 않게 <일의 기쁨과 슬픔>은 출간과 동시에 동시대의 젊은 직장인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미 앞서 2012년 알랭 드 보통는 동일한 제목의 <일의 기쁨과 슬픔>, 부제 우리는 무엇때문에 일을 하는가를 통해 '일' 그 자체의 현장을 글로 되살려내며,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노동'을 통해 '먹고사니즘'으로 낮잡아 치부되던 '일' 그 자체의 존엄성을 살려낸 바 있다. 장류진 작가는 바로 그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추구했던 '노동의 현장'을 그녀가 소설을 쓰며 몸담았던 20세기 한국 사회로 옮겨온다. 책의 소개글에서 말하든 '눈물짓되 침참하지 않고, 힘에 부치지만 자기 나름의 지혜로 잘 버텨나가고자 하는' 이 시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동시대인들의 '자화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화제작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중 표제작 <일의 기쁨과 슬픔>이 11월 21일 드라마 스페셜 4번째 작품으로 찾아왔다. 

 

 

판교에서 밥벌이란? 
우리 사회에서 '판교'란? 첨단 it기업과 스타트 업 기업들이 '군집'하는 판교는 마치 미국의 실리콘 밸리처럼 우리 사회 첨단의 기업과 기업 문화를 상징한다. 드라마는 바로 그 '판교'속 직장인의 모습을 그려내며 문을 연다. 

경쾌하게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으로 하루를 여는 안나(고원희 분)와 제니퍼(김보정 분), 이들은 '우동은 팔지 않습니다'란 문구를 붙인 문을 열고 자신들의 직장인  '우동 마켓'으로 들어선다. 그들을 맞이한 건 아침부터 탁구를 치던 우동마켓의 ceo 데비잇(오민석 분)이다. 탁구도 잠시 다함께 모여 실리콘 밸리의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미팅 방식을 본딴 스크럼을 짜자고 하는 데이빗, 그런데 어쩐지 모여드는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드라마는 주인공 안나의 독백을 통해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한 스타트업이어 보이지만 사실은 중고 직거래 사이트인 우동 마켓이라는 직장을 통해 수평적인 '첨단'의 직장 문화를 지향하지만 여전히 직장 내 갑을 관계와 얼키고 설킨 인간 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판교'의 한 직장을 조명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수평적 스타트업이지만, 스사트업 전체 중 단 3%만이 생존하는 게 현실인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고급 외제차 카다로그를 손에 쥔 채 소수의 개발자와 기획자와 함께 유저 한 사람에 일희일비하는 우동마켓의 생생한 직장 내 생태가 드라마의 한 축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본명이 안나라 본의 아니게 안나가 되어버린 기획자 안나를 중심으로 갑이 아닌 척하지만 '갑'인 ceo 대식과  매번 기획자와 개발자의 업무적 성격으로 인해 충돌을 빚게 되는 사회성 부족한 외골수 개발자 케빈과의 갈등이 그 중심에 있다. 

안나는 자신의 촌스러운 본명을 숨기고자 외국식 예명을 쓰고 실리콘 밸리 방식을 흉내내는 ceo 데이빗을 비웃지만, 실수로 올린 기획자 모집 공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케빈과의 직무적 갈등에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는 양가적 존재감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우동 마켓의 헤비 유저 '거북이 알'에 대해 알아보라는 ceo 대식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커피 머쉰 구입을 핑계로 드라마의 또 한 축이 되는 거북이 알, 이지혜(강말금 분)를 만나 그녀가 중고 거래 사이트의 '헤비 유저'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연을 전해 듣게 된다. 

 

 

카드 회사 차장이 거북이 알이 된 사연은? 

이지혜는 거대 기업인 유비 카드의 현직 15년차 차장, 그녀는 한때 공연 기획팀을 이끌던 책임자였다. 유비 카드의 회장이었던 조운범 회장이 직접 지시한 명망있는 아티스트의 기획을 실행하던 중, 회장의 '복심'을 무시한 채 절차에 따라 일을 처지하다 밉보여 카드 기획팀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제 월급조차 1년 동안 '포인트'로 받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 '포인트'를 현금으로 '전환'하기 위해 우동 마켓의 헤비 유저가 된 사연을 이지혜는 안나에게 허심탄회하게 전한다. 

'판교'라는 첨단 산업의 공간, 하지만 그곳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겪는 건 수평적인 기업 문화라는 그럴 듯한 캐치프레이즈와 달리, 여전히 '갑을' 관계가 현존하는 상황이다. 

스크럼을 짜자고 해놓고서는 ceo의 일방적인 아침 조회라던가, 해비 유저의 득세를 알아보라는 지시에 기획자라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까봐 거절하지 못하는 구차한 상황은 안나의 '자존감'을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런 안나는 해비 유저 거북이 알을 만나, 그녀가 단지 자신의 인별그램 홍보 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하고 거기에 더해 '포인트'로 월급을 받게 되는 '보복'까지 당하게 되는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그럼에도 '거북이 알'이 되어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극복하려는 이지혜의 태도에 '동지'적 위로를 얻는다. 

알랭 드 보통이 바다에서 사무실까지 섭렵하며 '일'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며 때로는 지루하기 이를데 없으며 단순 반복적이며 세상에 조명되지 않는 일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복원해냈다면, 장류진 원작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론에 방점을 찍는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직장 내 서열과 '관계'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 그럼에도 '월급'이라는 문자 하나에 기분이 전환되는 아이러니한 '밥벌이'에 구속된 존재들이 그럼에도 그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구겨지지 않고 '밸런스'를 유지하며 살아내개 위한 '노력'들을 드라마는 원작의 주제에 맞게 그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글이 드라마로 구현되는 과정은 또 다른 '창작'의 현장인지라, 2~30대 직장인들을 열광케 했던 밥벌이의 지겨움과 고달픔이 감각있게 표현되었는가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통해 덤덤하지만 내공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강말금 배우의 이지혜 에피소드는 배우 류진의 또 다른 면을 발견케 해준 조윤범 회장과의 호흡을 통해 원작 속 의도가 실감나게 전달된다. 반면  안나의 우동마켓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배우들 연기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얕다보니 이야기의 경중에서 밀리고 만다. 덕분에 판교라는 공간이 가지는 사회 생태적 환경에 대한 이야기의 '페이소스'가 아쉽다. 아마도 원작을 읽으며 동시대적인 공감에 무릎을 쳤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드라마적 감동에 인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by meditator 2020. 11. 22. 16:20

아마도 다음 배우 김혜수의 인생작이 등장하기 전까지 <내가 죽던 날>은 오래도록 김혜수의 인생작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성숙한 자태에 앳된 목소리로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조선의 여인상을 연기했던 김혜수는 이후 세련된 헤어와 옷차림으로 대표적인 도시 여인의 대명사가 되었고 붉은 색 입술을 진하게 바른 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섹시한 여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늘 '배우', 그 중에서도 '여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던 사람, 그래서 유수의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는 의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이 잘 어울리는 스타, 그런데 <내가 죽던 날>에서 '배우'가 아닌 사람 김혜수의 냄새가 맡아진다. 


 

하지만 <내가 죽던 날>을 그저 배우 김혜수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만 기억하는 건 아쉽다. 지난 2008년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 아시아 단편 경쟁 부문에서 <여고생이다>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21세기의 고립된 '관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삶의 위기에 대한 '위로'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2020년이 길어낸  '힐링' 영화가 아닐까 싶다. 

'관계'로 부터, 세상으로부터 방출된 사람들 
이야기의 시작은 형사 현수(김혜수 분)로 부터 시작된다. 병가를 내고 휴직 중이었던 현수는 복직을 하고자 한다. 그녀는 괜찮다지만 상관에서부터 친구이자 동료까지 그녀의 이른 복직을 우려한다. 

그도 그럴 것이 휴직 이전까지 변호사이던 남편을 두고 직무에 있어서도 승승장구하던 현수, 하지만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승진을 앞두고 임신을 미루자던 그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그녀의 지원군이었던 남편에게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고 현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녀에게 이혼을 요청한 남편은 그 이유로 외려 그녀와 후배 형사와의 돈독한 관계를 '불륜'이라며 문제 삼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에게 닥친 일들, 그녀는 어떻게든 '의연'하게 버텨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유치원 하원 버스와 차량 충돌을 일으킨 현수, 그 이유는 감각을 잃어버린 그녀의 팔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닥친 충격이 신체적 증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무감각한 자기 팔의 감각을 견디지 못해 '자해'까지 하게 된 현수는 결국 '휴직'을 하게 되었고, 이제 다시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복직'을 하고자 한다. 

그렇게 아직은 이르다는 '복직'을 하려는 현수에게 맡겨진 사건은 몰아치던 날 절벽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세진(노정의 분), 하지만 그저 부잔줄 알았던 아버지가 탈세 사건에 연루되었고, 스스로 묻혀질 뻔한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의 '증인'이 된 소녀, 그래서 경찰은 세진을 증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외딴 섬에 '안치'한다. 그런데 세진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건을 조사해가던 현수는 복직을 위한 형식적인 요식 행위에 걸맞는 사건인 세진의 사건에 집착하게 된다. 그건 바로 세진의 '보호'를 명목으로 설치한 cctv에 잡힌,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세진의 행적에서 바로 현수 자신의 현재가 자꾸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는, 아니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살다 하루 아침에 그 삶에서 방출된 세진이 처한 처지가, 그리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섬에서 살아보고자 애쓰는 모습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어떻게든 '잡혀먹지' 않고 버텨보려는, 그래서 남들이 말리는데도 이른 복직을 하며 현실의 삶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는  현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수의 사건을 놓치못할 수록 바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세상의 모든 '관계'로 부터 방출된 듯한 세진의 절망감에 현수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게 현수가 세진의 사건을 통해 자신과 현수를 세상이 자꾸 밀어내는 듯한 절망감에 빠져드는 가운데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세진이 살았던 섬 사람이지만 섬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천댁(이정은 분)이다. 

예전에는 다른 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순천댁, 하지만 동생이 죽고, 그 동생의 하나 밖에 없는 딸마저 '세상'을 멀리하려 하는 '사건'을 겪으며 스스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한 채 살아왔다. 가족이었던 사람들을 잃어버릴 뻔한 과정에서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순천댁은 섬 사람이었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간다. 


 

방출된 현수와 세진에게 내밀어진 '손'
<내가 죽던 날>은 이렇게 각자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서, 자신이 맺었던 관계에서 방출된 세 사람 현수, 세진, 순천댁의 이야기를 '세진'의 실종 사건을 매개로 풀어낸다. 

우리는 한 사람의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 주는 건 점과 같은 존재인 우리를 엮어주고 이어주는 관계들이다. 하지만, 그 이어주는 매듭들은 견고했으면 하는 우리의 '갈망'과는 달리 헐겁다. 꽉 묶인 매듭인 줄알았는데 하염없이 풀어져버려 다시 내 존재를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관계들, 그렇게 관계에서 풀려난 존재는 '고립무원의 '점'이 되어 자신이 세상 밖으로 던져진 것처럼 상실감에 시달린다. 

영화는 그럼에도 어떻게든지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애쓰는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의 삶을 그려낸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휘몰아친 여러 사건들 속에서 그들은 견디고 버티려 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팔을 자해하면서까지 현수는 세상에 자신을 끼어넣으려 한다. 세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면 쓸 수록 더 세상이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것같다. 현수도, 세진도 그 막막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적이고 발버둥친다. 그리고 그 발버둥친 노력의 끝에서 '절벽 실종'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화는 눈밝은 관객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지 않은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내밀어진 '손'이 주는 위로가 뭉클하다. 그건 <내가 죽던 날>이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이혼 등의 '사건'이 아니라,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이라는 주요 인물에 '천착'하여 집중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세 배우의 울림있는 연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증후군과도 같은 '존재의 상실감'을 진득하게 따라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 끝에서 '연대'의 실마리를 펼쳐낸다. 

다르지만 결국 같았던 세 사람, 거기에 세진의 사건을 포기할 수 없었던 현수의 집요함이, 자신의 팔을 짖이겨서라도 세상에 자신을 끼워넣어보려던 삶의 의지가, 그저 짓밟힐 풀 한 포기같은 세진을 돌아보아준 순천댁의 마음이,  아니 애초에 조카를 자신처럼 돌보던 순천댁의 측은지심이, 순천댁의 자식같은 조카에게 마음을 보여준 세진의 연민이 끈이 되어 '삶'을 나락에서 건진다. 나풀거리는 점같은 존재들이 세상에서 떨궈지는 것도 한 순간이지만, 동시에 그 점같은 존재를 세상에 다시 묶어주는 실낱같은 '인연'도 그렇게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by meditator 2020. 11. 18. 22:05

60세, 그저 60년을 살아온 시간이 아니다. 還甲(환갑), 자신이 태어났던 육십갑자의 해가 다시 돌아오는 해, 인생의 두번 째 바퀴가 시작되는 해이다. 즉 본격적으로 '노년'을 시작해야 하는 나이이다. 

그런데 60세 이후 '노년'의 삶은 녹록치 않다. 특히 60세 이후 홀로 '독거'하는 인구가 200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에서 여성이 2/3에 이른다. 11월 16, 17일 양일에 걸쳐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은 <60세 미만 출입금지>를 통해 60세 이후 '독거'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함께, 독거
다큐는 서로 다른 '독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60대 여성 세 사람이 셰어 하우스 한달 살기라는 '실험'을 통해 60세 이후 삶의 방식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서울 한가운데 고즈넉한 한옥, 그 대문 안으로 62세의 사공 경희 씨가 들어온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사람은 이제 '독거' 두 달 째를 맞이한 65세으 김영자 씨, 그리고 마지막 13년 째 '독거' 중인 65세의 이수아 씨가 오면서 함께 한 달 살기가 시작된다. 

어느덧 65세, 그리고 홀로 산 지 두 달, 하지만 영자 씨는 '독거 노인'이라는 호칭에 진저리를 친다. 아직은 '노인'이라고 하기 싫은 나이, 예전과 달리 '환갑 잔치'라는 용어 조차도 무색해지는 요즈음 영자 씨 또래의 '노인'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독거'를 하는 60대 여성들이지만 세 사람의 사정은 저마다 다르다. 사공 경희 씨는 62세이지만 아직 '미스'이다. 30대는 40대가 되면, 40대에는 50대가 되면 하고 결혼을 먼 훗날의 일로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덧 60대, 이젠 70대가 되면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이 무색해지는 시절이 되었다. 

결혼은 했지만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혼은 안했지만 남편과 따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왔던 영자 씨는 얼마 전에야 정식으로 이혼을 했다. 그리고 함께 살던 아들 내외마저 분가를 하고 홀로 산 지 2달이 되었다. 북적거리던 집안에서 아이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자 불안이 밀려오고 왜 이렇게 됐나, 인생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던 즈음 딸의 신청으로 새로운 '함께'의 삶을 시도해 보게 되었다. 

사별한 지 13년 째 자식도 없는 수아 씨는 항상 외롭다. 단란한 가정도, 친구도 없는 그녀는 이대로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부산과 광주, 그 지리적 간격만큼 홀로 살아온 시간도, 살아온 이유도, 그리고 홀로 살아갈 삶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인 세 사람이 불과 한 달이지만 '함께' 살아가는 시간은 쉽지 않다. 화통한 성격처럼 무엇이든 앞장서서 이끌어 가고, 그만큼 스스럼이 없어 보이는 영자 씨, 하지만 그런 영자 씨와 달리 스스로 해결하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온 경희 씨는 자기 자식들에게 하듯 챙겨주는 영자 씨의 방식이 어색하다. 그런가 하면 오래도록 외롭게 살아왔으면서도 막상 함께 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수아 씨 역시 만만하지가 않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두려워 늘 tv를 켜놓고 살았던 수아 씨, 함께 했던 첫 날 밤, 문을 닫지 말라던 부탁을 여름밤 모기를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들어주었던 영자씨, 그렇게 닫히지 않은 방문처럼 세 사람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갇혀있는 저마다의 방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그 방문을 열고 나온 마음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자식이 있든 없든 옛날 사진이 예뻐서 슬픈, 어느덧 60줄의 '노년'이 막막한 처지에서 다르지 않다. 

혼자 사는게 좋고, 누구와 살까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던 경희 씨가 숨겨왔던 병원공포증을 두 언니 앞에 꺼내놓고 '나 너무 무서워'라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시간, 세 사람은 불과 한 달이었지만 사람이 정든다는게 이런 거구나라며 이별을 아쉬워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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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간다는 일
다큐가 처음 던진 물음은 60세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였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문제로 삼아왔던 '독거'에 대한 질문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불과 한 달이라는 '시한부'의 '함께'라는 시간을 지켜보며 다큐가 보여준 '답'은 '누구와 살 것인가'이지만, 그 살 것인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을 함께 하는 삶이 아니었다. 

다큐는 '독거'라는 사회적 현상을 매개로 나이들어 살아가는 삶의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불과 한 달의 기간, 다른 삶을 살아왔던 세 사람은 엇물리는 관계를 풀어가며 성장한다. 즉, 함께 산다는 건, 그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관계를 '도움닫기'로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다큐는 말한다. 

혼자 살아가기에 '치킨' 한 마리도 시켜먹지 못하게 되는 삶, 그런데 불과 한 달이었지만, 그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서로에게 자신을 터놓고, 그런 가운데 서로의 '이해'와 '지지'를 얻게 된 세 사람은 훌쩍 큰다. 60이 넘어야 철이 든다는 영자씨의 말처럼, '60'은 늙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출발선이다.  움츠러들기만 했던 자신의 문을 열고 나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피아노의 건반을 용기내어 누르듯 그렇게 세 사람은 자신이 살아갈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자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세 사람은 헤어져 저마다 살아왔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세 사람은 한 달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불과 한 달이지만 그간 '점'처럼 살아왔던 세 사람 사이에 그 점과 점을 이어줄 '관계'의 매듭이 생긴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의 집을 찾아가는 '관계'는 그들이 '독거'라도 '독거'가 아닌 삶을 열어준다. 높은 데서 훨훨 날아가듯 떨어져 죽고 싶다던 수아 씨가 지금 이 나이가 좋아요라고 말하기 까지 필요한 건 '한 달'이었다. 겨우 한 달이었지만 다시 혼자 살아도 이제는 혼자가 아닌 삶, 노년의 문제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삶의 질의 문제라는 것을 세 사람의 변화를 통해 말한다. 






by meditator 2020. 11. 18. 02:52

전쟁,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도구, 재앙, 새로운 진리, 이 극과 극의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시험'을 칭하는 세계 각국의 수험생들의 표현이다. 그들이 맞닥뜨린 '시험'의 상황이 이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의미로 시험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험생들은 이 중 어떤 의미로 '시험'을 생각할까? 그러는 당신에게 '시험'은 어떤 의미인가? 

팬데믹 상황에 빠진 코로나 임에도 '수능'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일정이 조금 늦춰질 뿐, 수능은 예정대로 12월 3일에 시행될 예정이다. 학교를 나간 날보다 나가지 않은 날이 더 많은 올해 고 3에게 수능은 어떤 의미일까? 제대로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여전히 수능은 그들이 '어른'의 세계로 건너가는 '관문'이다.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은 저마다 '통과 의례'로 시험을 친다. 그런데 각 나라의 배경과 상황에 맞춰 '시험'이 천차만별이다.

지난 2015년 ebs다큐 프라임을 통해 바영된 <시험> 5부작, 52회 백상 예술대상 tv작품상 교양 부문을 수상한 이 작품은 여전히 우리 사회 성공의 '관문'이 되고 있는 시험을 해부한다. 그 중 1부, 시험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는 세계 각국의 시험을 통해 시험의 사회적 의미를 묻는다. 

 

 

시험은 권력이다
인도의 비하르 주, 이곳은 카스트 제도 중 가장 하층의 계급인 불가촉천민(손을 대는 것조차 오염된다 하여 붙여진 호칭)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3000여년간 유지되어 온 신분보다 '시험'이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천한 취급을 받고 기회가 거의 없는 불가촉천민들, 이들은 이제 시험을 통해 사회적으로 '기회'를 얻고자 한다. 실제 시험을 통해서라면 불가촉천민이라 해도 대학 총장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과외가 성행하고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도록 가르쳐주는 학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시험을 칠 실력도 학원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지난 2015년 수험생 600여 명이 쫓겨나고 학부모들이 체포된 사건에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교실 창문에 기어올라가는 사람들, 이들은 수험생의 친지와 학부모들로 수험생에게 컨닝페이퍼를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자칫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컨닝페이퍼를 전달하기 위해 건물을 오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 60%가 이런 '불법'에 대해 불가피한 선택이자 관행이라 받아들이고 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시험, 거기엔 신분 제도를 넘어서고야 말겠다는 극단의 '의지'가 있다. 

시험은 서열이다. 
중국에서는 매년 6월 1000만 명 이상이 응시하는 우리의 수능과 같은 국가적 인재 선발 시험인  '가오카오'가 시행된다.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배경도 없고, 연줄도 없다. 하지만 머리가 있다. 돌격, 돌격'
'우산없는 토끼는 목숨을 걸고 뛰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문제를 풀 것이며 나는 할 수 있다.'

이 비장한 문구는 시험을 준비하는 교실 밖에 씌여진 낙서이다. 가오카오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지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지만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절박한 표현이다. 

허난성의 관묘 고등학교, 매번 신양시에서 선두의 성적을 거두는 학생들을 배출하는 이 학교는 논두렁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논두렁을 지나 학교에 이르는 거리에 학부모들은 집을 얻어 수험생인 학생들을 뒷바라지한다. 학생들은 유치원에서부터 12년동안 자신이 원하는 지위와 직업을 얻기 위해 가오카오를 준비한다. 등교한 이후에는 암기, 시험, 다시 암기를 반복하는 학습 과정, 같은 반 친구들은 경쟁자이다. 가오카오를 통해서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학생들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이 숨막히지만 믿을 건 자신 밖에 없다고 믿는다. 

가오카오가 시행되는 날 시험 시작 30분전부터 교통이 통제된다. 942만 명의 수험생이 저마다의 고사장으로 향한다. 듣기 평가 시간에는 차량 경적 소리 등이 금지되고, 드론을 띄워 학생들의 부정을 감시한다. 18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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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성장이다

'열정없이 살 수 있는가'
'인식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가'
'정치는 인간의 일인가'

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 논술형 대입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철학 문제들이다. 6일간의 시험 과정, 총 684,734명이 저런 문제를 푼다. 교장 선생님이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는 풍경, 시험에 늦더라도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입실을 허락한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각 교실을 돌며 시험 문제를 개봉하고, 8시에서 12시까지 4시간 동안 주어진 3문제 중 한 문제를 선택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2015년 문과의 문제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게 도덕적 의무인가'와 '나는 내 과거로부터 만들어 지는가' 등이다.  '정치가 진실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는가'가 이과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이다. 

그렇다면 채점은? 예, 아니오라고 답할 수 없는 문제, 답안의 적절성과 논리성이 채점의 기준이다. 철학 시험이지만 여타 문화적 소양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 프랑스에서 철학은 현실과 관련이 있는 학문이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영역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저런 문제를 푸는 학생들은 어떨까?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라 시험이라고 따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한다. 심지어 학기 중에 외국도 다녀오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과외 활동이 지속한다. 무의식적으로 믿고 말하고 생각하던 것, 즉 자신과 마주할 기회, 바칼로레아는 성장이다. 

시험은 이데올로기다
독일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논술과 구술로 이루어진 '아비투어'를 치뤄야 한다. 아비투어 당일 학생들은 문제를 먼저 받고 30분 정도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한 후 2명의 교사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정답? 없다. 자신의 생각, 근거를 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독일이 가진 치욕스런 역사적 경험이 전제한다. 나치 시대, 당시 시험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였다. 우생학의 논리에 따라 사회 복지는 생산성이 없는 것, 다른 곳에 쓸 돈을 왜 장애인에게 주는가라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시험을 통해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그 결과 장애인들에 대한 말살작전을 펼쳐 살인 센터를 통해 '안락사'시켰다. 

장애인들을 말살시키는데 앞장서거나 조력했던 사람들은 '평범'했던 사람들이다. 규칙적인 삶을 살았고 정직했으며 순응적인 인간들이었다. 전후 그 시대의 '평범한 악'에 대해 반성한 사람들은 더 이상 시험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재생한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질문하고 의심하는 인간 양성을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라 여긴다. 

인도와 중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 각국은 저마다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시험제도를 가진다. 불가촉천민에게 사회적 기회가 된 시험, 가진 것 없는 농촌 출신의 학생들의 등용문, 그리고 철학적 문제를 논하는 프랑스와 자신의 의견을 주체적으로 피력하는 게 관건인 독일, 우리의 시험은 이들 나라의 시험 중 어디쯤 있을까? 21세기에 대비한 창의적 인간상 구현을 목표로 하는 7차 교육 과정에 기반한 우리의 수능은 과연 '창의적 인간'을 길러내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일까.

by meditator 2020. 11. 12. 02:15

다큐멘터리는 다양한 모색의 와중에 있다. 시각적 매체 환경의 변화로 사람들은 이제 tv를 통해 제공된 프로그램을 떠난 유투브 등 스스로 찾아가는 매체 환경을 선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tv다큐멘터리는 안그래도 저조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탈피하고자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성들은 ebs의 <다큐 it>이나 sbs스페셜이 시도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처럼 다큐의 연성화 경향성이 두드러진다. 다큐와 토크 프로그램의 콜라보, 혹은 보다 대중적인 주제와 접근 방식으로의 모색이 올 한 해 다큐 프로그램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그런 가운데 또 한 편의 새로운 다큐 한 편이 시작되었다. kbs1tv가 일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영하는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이다. 


 
내가 아들 엄마라니 ! 
지난 11월 8일 <김나영의 아들 연구소> 3부작의 1부 <내가 아들 엄마라니>로 첫 선을 보인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는 단정짓지 않고, 정의내리지 않고, 과도하게 요약하지 않고 지식과 지식을 연결하는 편안한 다큐를 지향한다고 프로그램의 취지를 내세웠다.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고만고만한 아들 둘 신우와 이준을 키우는 패션 인플루언서 김나영, 멋들어진 그녀의 패션과 달리 '하지마!, 하지마! 위험해!'라는 짜증과 호통으로 연이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말을 안듣는게 아들의 정체성일까 고민하는 그녀, 요즘 핫한 오은영 정신과 의사를 만나 '아들 키우기'의 고충을 토로한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와의 아들 키우기 상담은 아들과 딸의 언어가 다르다로 시작하여 아들들은 듣는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가로 두 엄마가 공감하더니,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어리숙하다로 여자 아이들보다 늦은 성장에 방점이 찍힌다. 

그렇게 교감이 안되는 남성을 아들로 키우기의 난감함에 공감을 하던 다큐는 훌쩍 건너뛰어 어느덧 열등 종족이 되어가는 아들의 세상 이야기로 흐른다. 대학 진학율에서도 어느덧 여학생이 남학생을 앞지른 세상, 예전에는 그래도 수학은 남학생이 잘한다고 했지만 이젠 그 마저도 여학생이 평균 점수가 더 높은 세상, 이제 아이를 낳을 가임기의 부모들은 한 명만 출산한다면 딸을 원한다는 통계가 66%나 되는 세상이 되었단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여자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질까봐 남녀공학을 안보내는 시절, 회장 선거에서부터 학교 내 모든 일들을 여학생들이 리더쉽있게 처리하는 세상 , 과에서 남학생이 우등생이 되면 뉴스 거리가 되는 세상, 다큐는 그렇게 여성들이 주도하는 세상, 그리고 이제 더는 예전과 같은 습성으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남자로 살아가기에 고민되는 세상 
더 이상 여성에게 '예쁘다'라는 단어를 쓰면 안되는 세상, 남학생들끼리만 MT를 가는게 편한게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남학생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하소연한다. 젠더 이슈가 민감한 시절, 4~50대 남성들에 대해 문제 제기에 자신들이 방패가 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런 남학생들의 상실감과 불만에 대해  노명우 교수는 같은 시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라 정의내린다. 현실 인식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 간의 서로 다른 시각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 중심의 지배관이 더 많이, 더 빠르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남자라서 부당하거나 위협적이거나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부딪치지는 않는다며 세상이 더 여성에게 편해질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의 의견에 대해 남성들은 이미 자신들은 변할 만큼 변했으며 더 이상의 변화에 대해 절실하지 않다는데 딜레마가 있다고 다큐는 짚는다. 그리고 이런 남성들의 의식을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과 엘리스가 아무리 달려도 주변이 바뀌지 않았던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레드퀸' 효과'라 정의내린다.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을 쓴 오찬호 교수는 이런 상황을 우리 사회의 딜레마로 본다. 그간 아버지는 가장으로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그런 희생의 보상으로 가정에서는 군림해왔었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이지만 왜 내가 주범처럼 취급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교수는 강조한다. 문화의 힘을 말한다. 아들들이 말하듯 스스로 변화했다고 하지만 아직 아들들의 의식적 변화는 느리다는 것이다. 아들들은 여성들도 군대를 가야한다며 역차별을 주장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취업에서 남성 선호는 여전한 만큼, 이십대 남자들의 역차별 주장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십대 남자들을 중심으로 역차별이 주장되며, 젠더 갈등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그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귀결된다. 어른들이 물려준 경쟁 중심의 세상에서 버텨내야 하는 아이들의 아우성이, 그리고 이제 어른들의 세대보다 더 좁아진 경쟁의 문에서 보다 더 냉정해지고 예민해지는 아이들의 자기 보호가 '역차별'로 등장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큐는  이른바 요즘 아이들이 주장하는 바 '억울하면 시험치고 합격'하라는 '공정'은 납작한 공정이라고. 약자를 도와주는 정책이 역차별 처럼 느껴져서는 안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함께 앞으로 20년 변화는 더 가속될 것이며 남녀와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도 빠른 변화가 예상될 것이며, 지나간 세대의 관성에 기대어서는 '도태'될 것이라 경고한다. 


지성과 지성을 연결하겠다는 다큐의 취지답게 싱글맘 김나영의 아들 키우기 고민으로 시작한 다큐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현실을 비교하는가 싶더니, 결국 우리 사회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이남자'를 중심으로 한 역차별 논쟁으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다큐의 예고에서 김나영의 아들 키우기 고민 프로그램인 줄 알고 시청하려 했던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수도 있는 결과이다. 최근 다큐들이 장르와 주제의 결합을 시도하며 새로운 모색을 하는 가운데,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 역시 육아 고민을 현실에 있어서의 젠더 갈등까지 끌어가며 주제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런데 다큐가 내세운 바 단정짓지 않고, 정의내리지 않고, 요약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런 취지에 걸맞았을까, 이십대 남자들의 의견도 내세우고, 여러 학자들의 입장을 들어보았지만, 결국 다큐가 '설득'하고자 했던 것은 이 시대 이십대 남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역차별 주장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역차별 주장에 대한 설득이 설득력을 가질까?

과연 다큐가 내세우고 있는 '도태'되지 않기 위한 관성의 변화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어느덧 상실감을 느끼는 이십대 남자들에 대한 충분한 천착이 이루어졌는가, 혹은 여태까지 되풀이 되고 있는 젠더적 갈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에 불과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색되고 있는 새로운 다큐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결국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 브이로그처럼 새로운 형식을 덧붙인 것일까? 새로운 담론일까? 과연 이 시대 다큐가 당면한 과제는 새로운 형식일까, 새로운 담론일까? 첫 방송을 마친 <시리즈 지식 다큐멘터리 링크>의 과제이다. 

by meditator 2020. 11. 10. 18:37

지난 2016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모부의 엄격하고도 이상한 보호 아래 사육당하듯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와 그녀의 하인으로 들어오게 된 알고보면 사기꾼인 숙희의 미묘한 우정을 그렸다.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의 하수인으로 등장했던 숙희, 하지만 의지가지없는 히데코에 연민을 느낀 숙희와 그런 숙희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연 아가씨는 우정 이상의 '연대'를 통해 자신들을 가둔 삶을 돌파해 나간다. 

<kbs드라마 스페셜 2020> 첫 작품으로 선보인 <모단걸>은 공영방송으로 온 <아가씨>를 표방한다. 드라마는 이미 아가씨와 하인으로 살아가는 두 여성 구신득(진지희 분)와 영이(김시은 분)를 내세운다. 

 

 

영화 속 아가씨가 배경이 일제시대인 듯하지만 정체성이 모호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드라마 <모단걸>은 일제 시대, 그 중에서도 일제가 조선을 '문화'적으로 보다 교묘하면서도 철저하게 통치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919년 조선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진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더 이상 그 이전처럼 '헌병 경찰'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일제는 '문화'적으로 조선에 자율성을 주는 듯하면서도 조선 사회 곳곳에 일본의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이런 일본의 통치 방식의 변화는 성장하고 있는 조선 사회의 문화적 열망에 불을 지폈고 이른바 '모단걸'로 대표되는 사회적 변화 양상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자작의 지위를 얻은 종석 집안의 며느리인 구신득, 가세가 기운 양반 가문의 고명딸로 자란 그녀를 남편은 멀리하고 '모단걸'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런 남편을 두고 볼 수 없어 남편이 만나는 '모단걸'을 만나 '담판'을 지어보려 했지만 외려 신득은 한 눈에 보기에도 멋진 모단걸에 기가 눌리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등장한 남편으로 인해 수모를 겪게된다. 

이에 신득 자신도 '모단걸'이 되어 자신에게 등을 돌린 남편의 마음을 되찾아 오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모단걸'이 되기 위해 '학교'로 향한다. 몸종인 영이와 함께. 이렇게 드라마 <모단걸>은 바람난 남편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겠다는 '전통적 사고방식'과 그 수단이 되는 '학교'라는 근대적 문물의 충돌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학교로 간 아가씨와 몸종 
학교로 간 구신득,  신학문을 배우지만 구신득은 여전히 자작 집안의 며느리이다. 인력거를 타고 쪽진 머리로 몸종 영이를 늘 대동하는 학교 생활, 배움을 통해 모단걸이 되겠다는 그녀의 포부와 달리 어쩐지 공부에는 재능이 없어보이는 신득의 눈을 띄운 건 남편이 바람난 그녀를 보자마자 기세가 눌렸던 그 '모단'한 유행과 뜻밖에도 손에 들어온 '자유 연애'를 다룬 소설이다. 거기에 더해 어쩐지 그녀를 남다르게 대하는 듯한 선생님 윤지온(남우진 분)까지.

그런데 학교로 간 건 신득만이 아니다. 신득의 몸종으로 신득을 돕기 위해 신득의 짝꿍이 된 영이, 시험을 못본 신득 대신 나머지 공부를 하고, 시 숙제를 못한 신득 대신 자신이 쓴 시를 내는 처지이지만 영이는 신학문을 배우는 게 마냥 즐겁다. 그런데 그런 학교 생활을 넘어 그녀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다가오는데 바로 신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윤지온을 통해서이다. 신득이 남편의 모단걸을 만나 위축되었을 때 머리끄댕이를 잡고 육박전을 벌였던 영이는 신득의 신발을 찾아오던 전차에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대는 일본 학생들에게도 지지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런 영이의 모습을 눈여겨 본 윤지온은 일제의 문화 정책에 저항하는 자신의 동인지의 조력자가 되달라 영이에게 부탁한다. 

드라마는 학교로 간 아가씨와 몸종, 그리고 학교 선생님 윤지온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감정적 대척점에 서게 된 신득과 영이의 갈등 아닌 갈등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신득의 구두를 들고가다 일본 학생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그 구두를 윤지온 앞에 내던지고 온 영이, 윤지온은 그 구두가 영이의 것이라 여기며 신겨준다. 이에 감동을 받은 영이는 차마 그 구두를 신득에게 돌려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신득은 영이의 이름으로 낸 '자유시'가 발탁되어 윤지온과 '커피'를 마시며 지온의 '독려'를 듣고, 거기에 더해 지온이 영이에게 보내는 남다른 시선을 오해하여 자신에게 지온이 남다른 감정을 품었다 생각하게 된다. 

영화 <아가씨>에서처럼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미묘한 갈등 관계, 이 갈등은 윤지온이 준 잡지, <새벽>이 일본인 교장에게 들키며 더불어 드러난다. 학교 선생님 윤지온을 둘러싼 신득과 영이의 갈등, 신득은 영이가 자신을 속였다고 분노하고, 거기에 더해 윤지온조차 자신을 좋아한다 오해하게 만들었다며 전형적인 '오해'로 인한 삼각 관계로 신득과 영이의 '주종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삼각 관계는 윤지온의 '새벽'이 불온한 서적으로 수사를 받게 되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이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되면서 관계의 정체성에 변화가 생긴다. 아가씨와 백작, 그 사이에서 조력자로 고군분투하다 그만 아가씨와 연대하게 된 숙희처럼, 드라마 <모단걸>은 영이의 구금을 통해 윤지온을 사이에 둔 연적인 줄 알았던 영이가 알고보니 신득의 유일한 가족이자 벗이었다는 '자각'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이 바뀐다. 

 

 

신득, 모단걸이 되다 
드라마 속 신득은 모단걸이 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작의 며느리였던 그녀의 정체성에 맞춰 모단걸에 마음을 빼앗긴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말이 모단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지 모단걸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런 신득의 의지는 학교와 학교를 매개로 한 모단한 문물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처음에는 문물이 그녀를 현혹했다. 뽀족한 구두, 모단걸스러운 모자와 의상,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자유 연애를 그린 소설 등. 그러나 그런 '모단'한 문물이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무엇보다 그토록 자신이 애를 써서 돌려놓고 싶은 남편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드라마는 신득의 드라마틱한 모단걸 되기 해프닝을 통해 진정한 모단걸은 문물의 세례가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의 거듭남이라 '정의'내린다. 아니 어쩌면 남편의 마음을 되찾겠다고 당당하게 학교를 선택했던 신득 그 자체에 애초에 '모단'의 주체성은 내재되어 있었는 지도. 그래서 당당하게 학교를 선택했던 신득은 이제 당당하게 남편에게 '이혼장'을 내던지고 진짜 모단걸의 길을 걸어간다. 

by meditator 2020. 11. 8. 10:12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살며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구두닦이, 껌팔이, 아이스크림 장사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16살이 되던 1964년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체에 시다가 되었다. 14시간 노동에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일당 50원, 햇빛보다 백열등이 익숙하던 십대의 청년은 자기 동생 또래 여공이 먼지가 가득한 공간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열악한 현실에 분노했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외쳤다.

 

 
 
한 사람의 삶을 이끄는 건 무엇일까? 그의 사회적 존재? 그가 만나게 된 사람? 평화시장 시다가 된 노동자 청년 전태일은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여공들의 삶을 목도하고 현실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무기가 된 건 ‘근로 기준법’이었다. 하지만 영화 <마틴 에덴> 속 선박 노동자 마틴에게는 다른 삶의 ‘기회’가 온다.
 
노동자 마틴 사랑을 만나다  
배에서 일하는 노동자 마틴(루카 마리넬리 분), 그는 일을 하는 틈틈이 책을 놓지 않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부두에서 부랑배에게 구타를 당하던 엘레나(제시카 크레시 분)의 동생을 구해주며 상류층인 엘레나의 집에 초대된다. 피아노를 우아하게 연주하며, 불어를 안다는 마틴의 엉성한 발음을 수정해 주고, 그가 관심을 보인 보들레르의 시집을 주는 엘레나에게 마틴은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마틴 에덴>은 실제 노동자 출신이었던 작가 잭 런던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주먹 패거리의 두목이자 일자무식이었던 뱃사람 마틴이 상류층 여인 루스를 만나 그녀의 인도 아래 문학과 학문의 세계로 인도되어 작가가 되고자 한다는 이야기는 스웨덴 노동자 모르덴 에딘을 모델로 했지만 잭 런던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0대 시절부터 통조림 공장 노동자를 시작으로 여러 하층의 직업을 전전했던 잭 런던은 그가 살아왔던 삶의 모순적 모습을 <마틴 에덴>에 담아냈다.
 
영화 <마틴 에덴>에서 마틴에게 엘레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쓰기 시작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마틴은 그녀의 우아한 불어, 그녀가 치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 그리고 그녀가 풍기는 지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녀처럼 ‘지적’인 인물이 되면 그녀와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책들을 닥치고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특히,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스펜서의 책, 거기에 담겨있는 ‘사회 진화론’이 부두 노동자로, 주물 공장 노동자로 전전하며 살아온 마틴의 의식을 각성시키며 그로 하여금 노동자로서의 의식이 첨예한 글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을 위해 ‘지적인 인물’이 되고 싶었지만, 그 ‘지식’이 그로 하여금 계급적 각성을 일깨우게 된 처지, 그래서 마틴은 자신이 깨닫게 된 것을 그의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글’이 세상에 발탁되면 그 ‘돈’으로 엘레나와 사랑을 이루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의 글은 엘레나를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엘레나와 루스 사이
그런 그에게 엘레나가 바라는 ‘지적인’ 영역은 달랐다. 마틴에게 보들레르의 시집을 빌려주며 그의 지적 각성에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저 평범한 상류층 여성이었던 엘레나는 마틴이 아버지의 지인처럼 ‘회계사’가 되어 자신을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길 원했다. 그래서 마틴이 자신의 생각에 확고해지면 질수록 엘레나는 마틴과의 사이에서 벽을 느끼게 되어간다.
 
엘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계급적 장벽에 한계를 느끼던 마틴, 그런 와중에 엘레나의 집에서 시인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루스 브리센덴(카를로 세키 분)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피에트로 마르셀로 감독이 원작의 배경이었던 뉴욕 대신 배경으로 삼은 이십세기 중반 이탈리아 사회 운동, 노동 운동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엘레나 집에서 그에게 조롱과 냉소를 퍼붓는 이들에게 보들레르처럼 경멸과 냉소를 당당하게 퍼부을 수 있는 마틴, 하지만 오랫동안 헌책방에서 찾은 책을 통해 홀로 자신의 생각을 굳혀온 마틴은 스펜서 등을 통해 사회적 모순에 첨예한 의식은 지녔지만, 동시에 그에게 개안을 하게 해준 ‘사상’의 한계 역시 고스란히 받아들여 ‘개인주의’라는 한계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주장하며 외려 그들의 ‘조합 운동’을 논박할 정도로.

 

 
 
상류층의 여성 엘레나와 사회주의자 시인 루스, 두 사람은 책을 좋아하던 청년 마틴에게 세상을 향한 두 방향의 길을 열어 주었다. 마틴은 기꺼이 자신은 엘레나를 사랑하니 엘레나가 열어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틴이 선택한 길은 엘레나가 서있는 ‘부르조아’적인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루스가 그에게 펼쳐보인 계급적 각성을 실천으로 옮긴 노동자의 길도 아니었다. 자의식으로 그는 저들에게 복종하는 이들을 ‘개’라 일갈하는 투쟁적인 정신을 가졌지만, 그 정신은 그의 글 속에서만 분기탱천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랑이 아닌 ‘속물적 계급’의 얼굴을 드러내 보인 엘레나를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루스가 열어 보인 계급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던 마틴, 그런데 운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의 수단으로 여겼던 글이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시점에 그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사랑했던 이들이 열어 준 두 길 사이에서 이미 마음의 방향을 잃은 마틴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세상의 찬사에 더는 환호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글을 써 ‘명성’과 ‘부’를 얻으려는 이유가 ‘사랑’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다시 그에게 찾아왔지만 마틴은 안다. 처음 책을 좋아하던 청년에게 보들레르를 건네던, 그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 ‘지적’인 여인은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던 청년은 유명 시인이 되었지만 자신 앞에 펼쳐졌던 두 갈래 길 사이에 자신의 길을 만들 의지도, 열의도 잃는다. 아니 세상에는 애초에 마틴이 가고자 했던 길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by meditator 2020. 11. 6. 23:26